2017년 10월 9일 월요일

부평깡통시장" 2(먹거리)

부평깡통시장" 2(먹거리)
부평깡통시장은 부산광역시 중구 중구로 39번길 32에 위치한 시장으로 국제시장자갈치시장과 함께 부산을 대표하는 시장 중 하나이다. 과거부터 부평동 일대에 장이 열리던 것이 1876년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이후 이곳에 일본인이 거주하기 시작하고 이 곳에서 장을 보기 시작하면서 '한일시장'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후 1915년 일제에 의해 공설시장으로 지정되고 명칭도 '부평정시장'으로 바뀌었고 해방 이후엔 이름이 '부평시장'으로 바뀌고 이 곳에서 미군 군수품을 들여와 팔기 시작했고 특이 미군 통조림을 많이 팔았기에 부평깡통시장이라는 별칭이 붙게 되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이 곳에는 특히 먹거리로 유명한데, 그 중에서도 비빔당면과 유부주머니전골이 제일 유명하다,

비빔당면을 먹지 않으면 부산을 다녀왔다고 할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지역 특유의 음식이 비빔당면이다. 비빔당면은 처음에 부평깡통시장의 상인들의 허기를 메우기 위해 만들어진 음식이었다. 비빔당면은 애초에 허기를 메우기 위한 것이었기에 만드는 것도 간단하다. 당면을 불려서 삶고, 사각어묵 역시 끓는 물에 데쳐 썬 다음 그릇에 담아 양념장을 넣어 비비면 완성된다. 여기에 시금치 등의 채소를 넣기도 한다. 죽집골목 역시 부평깡통시장의 역사와 함께해 왔다. 

한국전쟁 때 피란 내려온 사람들은 먹을 것이 부족했다. 1950년대 후반 미군 부대에서 먹고 남은 잔반을 하나로 모아 죽을 끓여 파는 집이 하나둘씩 생겨나면서 죽집골목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돼지 먹이를 의미하는 꿀꿀이죽 또는 유엔탕이라고도 불렸다. 그러나 이 죽은 값이 매우 저렴했기 때문에 피란민을 비롯해 가난한 상인들에게는 허기를 채울 수 있는 훌륭한 한 끼였다. 

유부주머니전골 또한 부평깡통시장을 대표하는 음식이다. 버섯과 대파를 잘게 썰고, 무는 납작하게 썬다. 그리고 멸치의 내장을 뺀 다음에 냄비에 끓여 육수를 만든다. 데친 유부에 잡채를 넣고 미나리로 묶은 다음 냄비에 육수를 넣고 끓이면 유부주머니전골이 만들어진다. 

한국 최초 공설시장

연중무휴의 신식시장, 부산 부평동시장

요약
'각설이 타령' 일명 '장타령'은 각설이들이 장날을 따라 떠돌아다니며 구걸할 때 부르는 노래.

공설시장은 신식이라 각설이 타령에 끼지 못함. 1910년 6월, 부산 부평동시장이 생김.
일본인 거주자들의 필요에 의해 한·일 상인이 함께 설립, 초기엔 일한시장으로 불렸음.
시장은 주로 5일장이었던 한국인에게 연중무휴 공설시장은 신선, 급속도로 발전함.
'각설이 타령'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일명 '장타령'이라고도 한다. 장날을 따라 이 장 저 장 떠돌아다니며 구걸을 하던 각설이들이 흥을 돋울 때 부르는 노래라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그러니까 이 노래 가사에는 팔도 각지의 유명한 장이란 장은 그 이름이 다 나온다. 그중 경상도 쪽 장은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지 보자.
"샛바람 반지 하단장 너무 칩어서 못 보고, 나리 건너 맹호장 선개없어 못 보고, 골목골목 부산장 길 못 찾아 못 보고, 꾸벅꾸벅 구포장 허리가 아파 못 보고, 미지기 짠다 밀양장 싸개 묶어서 못 보고, 고개넘어 동래장 다리가 아파 못 보고, 아가리 크다 대구장 너무 널러서 못보고, 코 풀었다 홍해장 미끄럽어서 못 보고, 똥 쌌다 구례장 냄새가 나서 못 보고···."
하단장은 샛바람을 받아 너무 춥다 보니 못 가보고, 명지장은 내를 건널 배삯이 없어 못 가보며, 부산장은 골목이 많아 길을 못 찾을 것 같아 못 가본다는 노래다. 비록 각설이패의 노래지만 그 속에는 해학이 있고, 여유가 있고, 낭만이 있다.

그러나 시장으로 유명하면서도 이 각설이들의 노래에 끼지 못하는 시장이 바로 공설시장이다. 이른바 신식시장으로 새로 생겨난 것이었기 때문이다.

1910년 6월. 부산의 부평동에 새로 생긴 '부평동시장'은 당시의 여느 시장과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어서 상인들은 물론 시민들에게도 화제의 대상이 되었다.

무엇보다 쉬는 날이 없어 매일 문을 열고 영업을 한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그 지역의 한국인 상인들과 일본인 상인들이 공동으로 설립한 한국 최초의 공설시장이었다. 설립 당시엔 명칭이 '일한시장'이었다고 한다.

당시 한국의 시장은 주로 5일장이었다. 19세기 실학자 서유구의 명저 「임원 경제 십륙지」에는 저자가 조사한 전국의 시장이 1,052군데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중 909군데가 5일장으로 나타나 있다. 5일장 이외의 시장으로는 약령시·우시장·어시장 등이 있었다.

'장타령'에 등장하는 장은 바로 이렇게 9백 군데가 넘는 이 땅의 시골 장터 중 일부인 셈이다. 해운대장은 1일과 6일에 장이 섰고, 동래장은 2일과 7일, 구포장은 3일과 8일, 그리고 부산장이 4일과 9일, 하단장이 2일과 7일, 수영장이 5일과 10일이었다. 그러니 일한시장처럼 매일 서는 장터가 들어갈 리가 없었다.

재래시장은 물론 노천에 있었고, 상품의 매매에도 특별한 제약이 없었다. 또 장날에는 반드시 오락과 유흥이 있었고, 친교와 통신이 있었다.

시장을 그런 정서로 이해하고 있던 한국인들에게 '부평동시장'은 이색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 시장의 설립은 일본인 거주자들이 늘어나면서 그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었다. 일본인들의 생활 근거지는 중구지역이었고, 곡물이나 채소·어물 등 생활필수품을 구하려면 5일장인 동래장이나 구포장으로 나가야 했다. 이에 한일 합작으로 1천여 평의 부지에 상설시장이 들어선 것이다.

이 시장은 이후 시장 규칙을 만드는 데에도 모델 역할을 했다. 5년 후에는 부산시가 직영하게 되었는데, 그때의 규칙에 '공설시장은 20인 이상의 경영자가 일정한 건물 내에서 주로 곡물이나 식료품의 매매를 하는 장소'로 되어 있다.

'부평동시장'은 시영이 되면서부터 급속도로 발전하여 시장권역이 사방 70리에 이르렀고, 연간 거래액은 3백만 원으로 전국 최고였다. 일제 말에는 점포수가 약 5백 군데에 이르렀다. 하루 드나드는 사람의 수는 2만 명을 헤아렸다고 한다.

이 시장은 광복 후에 속칭 깡통시장으로 불렸다가, 6·25 후에는 외제상품 시장이 되기도 했다. 깡통시장이란 말은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깡통식품을 노점에서 파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들의 장사가 잘 되자 점포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도 하나 둘씩 깡통식품을 취급하기 시작해서 '부평동시장'은 외제상품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시장이 되었다.

조선조 때에도 교역의 현장이었던 부산지역에 최초의 공설시장이 들어선 것은 역사적인 면과도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서울에 공설시장이 한 군데 있었던 1938년에도 부산에는 8군데가 있었으며, 평양에 7군데, 인천에 4군데가 있었다.
오늘날에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선식이나 이유식, 건강 죽을 파는 죽집으로 변화하고 있다. 길에서 노점을 펼치고 죽을 파는 상인도 있고 점포를, 가진 죽집들도 있다. 죽 외에도 국수, 국밥, 만둣국 등도 팔고 있고, 야채와 잡곡을 이용해 미숫가루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터키 케밥, 베트남.기타 여러나라... 
여기 =  https://youtu.be/fKNbbj5Mjic,
출처 ^ 참고문헌,
[한국 최초 공설시장 - 연중무휴의 신식시장, 부산 부평동시장 (한국 최초 101장면, 1998. 9. 10., 김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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