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은 을지문덕. 나는 내가 언제 태어났고 언제 죽었는지?. 왜? 역사기록에 나와있지 않거든요. 다만 나는 후세 사람들에 의해 살수의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다. 현재의 청천강인 살수에서 수나라의 30만 대군을 수공작전(水攻作戰)으로 격퇴시켜 수나라 임금 양제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버렸다. 지금부터 내가 어떻게 수나라의 30만 대군을 물귀신으로 만들었는지 5, 6세기 중국 땅에는 여러 나라가 나타나서 중국 전체를 통일하기 위하여 서로 싸우고 있었고. 이 시기를 중국 역사에서는 남북조시대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중국의 남쪽 지역과 북쪽 지역에 하나 또는 두 개 나라가 연이어 나타나며 서로 대립했기 때문이에요. 이러한 남북조시대는 589년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함으로써 끝나요. 『역대명장전』에는 을지문덕을 평양 석다산 사람이라고 했다.
석다산은 평안남도 증산군 석다리에 있는 산이다. 지금도 이곳에는 을지문덕이 어릴 때부터 글 읽고 무술훈련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또 평안남도 평원군 화진리에 있는 불곡산의 동굴 속에서 글을 읽었으며 석다산 남쪽 마이산으로 말을 타고 다니면서 무술을 익혔다고도 한다. 『환단고기』란 책에는 이러한 현지에 내려오는 전설을 뒷받침할 내용이 있다. 그 책의 내용을 잠시 살펴보면 을지문덕은 석다산에서 태어났다고 하며, 어려서 일찍 산에 올라가 도를 닦았으며 꿈에 천신을 만나서 크게 깨달았음을 얻었다고 한다. 전설에서 불곡산이라고 했던 그 산일 것이다. 을지문덕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싶어하지만, 『삼국사기』 등에는 을지문덕의 어린 시절이나 그분의 사생활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자료가 없다. 다만 평안도 일대에서 그에 관한 많은 전설들이 전해 오고 있다.
고구려 영양왕 23년(612년) 여름과 가을에 걸쳐 터진 수(隋)나라와의 전쟁은 역사상 최고의 전쟁영웅을 낳았다. 살수대첩의 지휘관 을지문덕(乙支文德)이다. 문덕은 침착하고 굳센 성격에다 글 짓는 솜씨도 비범하였다. 큰 나라의 군대 200만 명을 맞이하면서도 전혀 겁내지 않았고, 힘만으로 무찌를 수 없음을 알아 온갖 작전을 동원하였다. 나아갈 뿐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이 의연한 기상을 신채호는 ‘을지문덕주의’라고 이름 붙였다. 오직 그 이름과 살수대첩의 전공만이 이제까지 전해오는 을지문덕. 우리는 그의 역사에서 용기와 지혜를 배운다. 을지문덕이 살았던 시대는 고구려 제25대 영양왕(嬰陽王) 때였다. 평원왕의 맏아들로평양왕(平陽王)이라고도 부른 영양왕은 565년(평원왕 7년) 태자로 세워지고, 590년에 즉위하여 29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흐름으로 보면 5세기 전성기를 지나, 이 무렵부터 고구려는 피로한 모습을 보였다. 이는 특히 중국의 새로운 왕조 수나라와의 엇갈린 관계 때문이었다.
581년에 건국한 수나라는 589년 남조의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하였다. 후한(後漢) 이후 400여 년을 지속한 혼란의 끝이었다. 영양왕은 즉위 이후 8년(597년)까지는 수나라와 평탄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끝내 두 나라가 호의적인 사이로 남아있지 못할 요인이 있었다. 요동과 요서 지방을 두고 변방의 나라들이 벌이는 각축전과 신경전은 새로운 통일 왕조 수나라를 지속적으로 괴롭혔다. 물론 그 핵심은 고구려였다. 때로 사신을 보내 조문하며 신하인 척하였지만, 실로 고구려는 독립국으로서 위상을 결코 떨어뜨리려 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사례는 신라 김유신에게서도 볼 수 있다.
김유신은 중악이란 산의 석굴에서 공부하다가 난승이란 노인을 만나 그에게서 비법을 배웠다고 한다. 옛 시대의 위인을 높이 기리는 글에는 이와 같은 기록들이 많이 전한다. 을지문덕과 관련된 사슴발부인 이야기도 있다. 평양시 대성산 광법사 사적비에도 사슴발부인의 이야기가 있는데, 여기서는 민간전설을 통해 알아보겠다. 고구려에 사슴의 발 모양과 똑같은 발을 가진 여성이 있었다. 그 여인은 한 번에 여러 명의 아이를 낳아 길렀는데, 그 아이들의 발도 사슴의 발처럼 생겼다. 어느 날 길을 가던 어떤 사람이 아이들을 보더니 아이들이 오래 살고 유명한 인물로 키우려면 어머니와 떨어져서 살아야 하고 함께 살면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사슴발부인은 너무나 슬펐지만 아이들을 위해서 할 수 없이 큰 나무함에 아이들을 넣어 강물에 띄워 보냈다. 그런데 그 나무함이 바다로 떠내려가 수나라 해안에 도착하게 되었고, 아이들은 거기서 자라나 모두 장군이 되었다. 마치 『구약성서』에 나오는 모세의 이야기와 비슷하다.
수양제가 고구려를 공격할 때 이들도 고구려에 왔다. 그러자 고구려에서는 적장 가운데 사슴발을 가진 형제장수들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사슴발부인은 그들이 분명 자기의 아들들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을지문덕을 찾아가서 사연을 말했다. 사슴발부인은 자신이 적진에 들어가 아들들을 타이르겠다고 청했다. 사슴발부인은 적진에 들어가 사슴발 장수들을 만났다. “나는 너희들의 어머니란다. 너희들이 어머니의 나라를 공격하는 것을 옳지 못한 일이다. 자, 내 발을 보아라.” 그들은 그녀의 말을 쉽게 믿지 않았다. 그러자 사슴발부인은 가슴을 헤치고 젖을 짜니 젖줄기가 여러 가닥으로 뿜어서 그 장수들의 입으로 흘러들어갔다. 그때서야 친어머니임을 알아보고 투구를 벗고 용서를 빌면서 고구려로 넘어왔다.
사슴발부인의 전설은 을지문덕만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함께 힘을 합쳐 수나라를 물리쳤음을 말해 주는 이야기다. 을지문덕에 대한 여러 가지 전설들을 살펴보았다. 전설이 곧 사실 그대로는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들은 을지문덕이 얼마나 대중적인 인기를 지닌 인물이었나를 말해 준다. 현재 서울에서 종로와 함께 중심지를 관통하는 도로의 하나가 을지문덕의 이름을 딴 을지로라는 사실은 그의 인기가 지금도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불곡산의 전설"
어느 날 을지문덕이 굴 속에서 책을 읽다가 깜박 졸고 있었다. 그때 구렁이 한 마리가 그를 해치려고 기어 들어왔다. 이상한 기운을 느낀 을지문덕은 깨어나는 순간에 그가 갖고 있던 칼로 구렁이의 머리를 쳤는데, 이때에 내려치는 힘이 얼마나 강했던지 돌로 만든 책상의 모서리가 떨어져 나갔다. 지금도 을지문덕이 공부했던 동굴 속에는 검으로 책상을 쳤던 그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한다. 다른 전설에는 불곡산 동쪽의 대원산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대원산은 평안남도 평원군 운봉리에 있는 산이다. 을지문덕이 이곳에서 무술훈련을 하였는데 활쏘기를 하다가 과녘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길게 자란 나무들을 검으로 쳐서 반반하게 만들었는데, 이때 이후로 지금까지도 이 산의 서남쪽 부분에는 바위가 두드러지게 드러날 뿐 나무는 크게 자라지 못한다고 한다. 영양왕 9년(598년)에 고구려는 요서지방 공격을 단행했다. 여기는 수나라의 코밑이었다. 고구려가 독립국의 의지를 보이며 선수를 친 것이다. 그러자 수나라의 창업주 문제(文帝)는 영양왕의 관작을 삭탈하고, 6월에 수륙 30만 명을 동원하여 고구려로 쳐들어왔다. 그러나 석 달 후인 9월에 돌아갈 때 수나라의 군사는 열의 한두 명도 남지 않았다. 고구려의 완승으로 끝난, 수와의 질기고 질긴 전쟁의 첫 판이었다. 여기에 변수로 작용하는 나라가 돌궐이었다.
돌궐은 튀르크(Türk)의 음을 따서 한자로 만든 말이다. 지금 이 나라는 투르크메니스탄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카자흐스탄과 이란 사이에 있는데, 1865년 제정 러시아에 병합되었다가 1991년 구소련의 붕괴와 함께 독립하였다. 이들이 5~6세기경 번성할 때는 동쪽으로 중국 요동과 요서에서 서쪽으로 중앙아시아까지 걸쳐 있었다. 그러다 583년 종족 간의 다툼으로 분열하여 동돌궐은 몽골고원, 서돌궐은 중앙아시아를 지배하였다. 수나라가 세워질 무렵이었다.
영양왕은 동돌궐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기로 하였다. 왕 18년(607년), 고구려는 동돌궐의 왕 계민가한에게 사신을 보냈다. 사신이 천막궁전에 도착해 있는데, 마침 수나라 양제(煬帝)가 그곳을 방문했다. 문제를 이어 604년에 즉위한 양제는 고구려를 견제하자면 동돌궐과 모종의 약속이 필요하다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고구려가 먼저 선수를 친 셈이었다. 태자 시절인 10여 년 전, 고구려에 한판 진 경험을 가진 양제는 이제 주변 나라와의 외교전에서도 밀리는가 싶었다. 이를 역사학에서는 고구려의 초원 정치라 부른다. 양제가 고구려와 국운을 건 전쟁을 시작해야겠다는 결심은 이 초원의 장막에서 이루어졌다.
영양왕은 신라와 백제에 대해서도 강한 드라이브를 걸었다. 두 나라는 수나라와 가까이 지내며 고구려를 견제하려 했다. 그러자 고구려는 영양왕 14년(603년)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했고, 18년(607년)에는 백제의 송산성을 공격했다. 신라의 진평왕이 다급한 목소리로 수나라에 군사를 청한 것이 608년이었다. 612년, 수나라가 다시 고구려 땅을 침범해 왔어요. 문제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양제가 무려 113만의 대군을 이끌고 기세등등하게 고구려를 쳐들어왔어요. 113만 명이 대군이냐고요? 그럼요. 일렬로 쭉 세워 놓으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숫자예요. 인구수로 따져서 우리나라 7위의 도시인 울산광역시 인구가 111만(2009년 8월 기준) 정도니, 113만의 군사는 대단한 숫자지요. 옛날에는 전투병 1명에 일꾼 병사 2명 정도가 함께 움직였어요. 무기와 식량을 운반해야 했거든요. 따라서 수 양제의 고구려 침공군은 적어도 350만에 이르는 천문학적인 숫자가 참가한 대규모 원정대였어요. 350만이면 얼마나 되냐고요? 2009년 8월 기준으로 우리나라 2대 도시인 부산광역시 인구가 355만 정도니, 한번 상상해 보세요. 얼마나 많은 숫자인지. 중국 측 기록에 “군사들의 출발이 40일 동안 계속되었으며, 군대 행렬이 960리에 이르렀다.”고 나와 있으니, 수 양제가 얼마나 벼르고 별러 고구려 정벌을 단행했는지 알 수 있어요. 고구려는 수의 침입을 미리 막고 전략상 유리한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먼저 랴오허 강(요하)을 건너 전략적 요충지인 요서 지방을 공격하였다. 이에 수 문제가 침공해 왔으나, 고구려는 이를 물리쳤다. 그 후, 수 양제가 황제에 올라 천하의 최고 통치자임을 내세우고 동북 아시아의 강국 고구려까지 손아귀에 넣으려고 하였다. 당시 고구려의 줄기찬 공격을 받아 고전하던 신라는 원광을 수에 보내어 군사 원조를 요청하였다.
612년 곧 영양왕 23년 여름에 수나라의 대대적인 침공이 시작되었다. 요동성을 포위, 공격하는 데 실패하고, 바다를 건너 평양성 부근까지 침략한 수군 또한 참패하자, 초조해진 수 양제는 30만 명의 별동대를 투입하여 평양성을 치게 하였다. 우중문 등이 거느린 별동대는 고구려 장군 을지문덕의 유도 작전에 말려들어 평양성 부근까지 진군하였다가 크게 지치고 굶주려 결국 후퇴하게 되었다. 고구려는 이 틈을 타서, 적군이 살수를 건널 때 그 주력 부대를 공격하여 전멸시켰다. 그리하여 별동대 30만 명 중에서 살아서 돌아간 사람은 겨우 2700명 정도였다고 한다. 이 싸움이 유명한 살수 대첩이다(612). 그 뒤에도 고구려는 수의 공격을 몇 차례 더 물리쳐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였다. 수는 무리한 전쟁으로 인한 국력 소모와 내란으로 결국 망하고 말았다. [삼국사기]는 이때의 수나라 병력이 1백13만 3천8백 명이라 적고 있다. 물경 2백만 명 대군이었다. 왜 전쟁을 해야 하는지, 양제는 시시콜콜히 그의 조서에서 밝혔다.
첫째, 고구려는 보잘것없는 나라이고 공손하지 않다.
둘째, 수나라의 말을 듣지 않고 조회에 참가하지도 않는다.
셋째, 고구려가 수나라에서 도망간 역도들을 받아들였고 변경을 괴롭혀 치안이 불안하다.
넷째, 요서를 공격하였다.
다섯째, 다른 나라들이 수나라에 조공 드는 것을 방해한다. 여섯째, 고구려의 법령이 가혹하고 지도자는 부패하다. 전쟁을 일으키는 명분이라고는 하나 사실 이는 고구려가 독립국임을 수나라에서 밝힌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400년 혼란의 역사를 종식한 제국 수나라가 2백만의 군대를 동원해 벌이는 전쟁. 그것은 수나라가 고구려를 얼마나 부담스러운 존재로 보고 있었는지 반증한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우리의 영웅 을지문덕의 활약상이 펼쳐진다. 생몰년에 집안까지 알 수 없는데다, 을지문덕은 어떤 직함을 가졌는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영양왕 23년 조에서 ‘대신(大臣)’이라고만 부르고 있다. 이는 일반적인 호칭일 뿐이다. 문득 등장하는 을지문덕. 그러나 전쟁 수행에 관한 거의 전권을 가진 그이이기에, 생략된 전후의 사정을 상상에 맡긴다면, 벌써 영양왕 9년의 전쟁부터 그의 솜씨 아님이 없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적어도 영양왕 즉위 이후 모든 전쟁의 기획은 그에게서 나왔을 것이다. [삼국유사] 열전의 을지문덕전은 200만 수나라 군대와의 전쟁을 자세히 일러준다. 을지문덕. 수나라 30만 대군을 살수에서 전부 몰살시켜 강대했던 수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한 대영웅. 그가 을지문덕이다.
을지문덕 전기를 쓰신 민족주의 역사학자 단재 신채호는 을지문덕을 4천 년 우리 역사에서 제일의 인물이라고 했다. 고구려는 수나라가 중국 전체를 차지하자 크게 긴장했어요. 중국과 고구려는 전통적으로 대립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나마 남북조시대 때는 저희들끼리 서로 눈치를 보느라고 남조, 북조 모두 고구려와 친선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느닷없이 중국에 통일 왕조가 들어섰으니, 고구려 입장에서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지요.
고구려는 무기를 수리하고 군량미를 비축하는 등 수나라의 침략에 은밀히 대비하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이를 눈치 챈 수나라의 임금 문제(文帝)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엄포를 놓았어요.“요하가 넓으면 얼마나 넓겠는가? 어찌 황하에 비하리오. 장군 한 사람을 파견하면 충분할 것을 어찌 많은 병력을 동원하겠는가?” 요하는 중국 땅인 요서 지방과 고구려 영토인 요동 지방을 가르는 강으로, 수 문제의 편지는 ‘요하만 넘으면 너희는 곧 죽음이니 알아서 복종하라.’는 강력한 경고였어요. 그러나 고구려는 수의 이러한 압력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598년에는 요하를 건너 요서 지방을 먼저 공격해 수를 자극하기까지 했어요.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수 문제는 30만의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입해 왔어요. 하지만 이 전쟁은 고구려의 일방적인 승리 로끝났다.
수나라군의 우문술(于文述)은 부여도로 나오고, 우중문(于仲文)은 낙랑도로 나와, 9군(九軍)과 더불어 압록강에 이르렀다. 문덕은 왕명을 받들고 그들의 진영에 가서 항복하였다. 이것이 첫 번째 작전이었다. 사실은 저들의 실상을 살펴보려 거짓으로 한 행동이었다. 이때 우중문과 우문술은 만약 고구려의 왕이나 문덕이 오거든 잡아두라는 밀지를 받아 놓고 있었다. 그래서 억류해 두려 하였는데, 상서우승 유사룡(劉士龍)이 굳이 말리는 것이었다. 결국 문덕을 돌려보냈다. 적진을 살피고 김을 빼려는 을지문덕의 작전은 성공했다. 수나라 군대는 고구려를 쉽게 생각하고 쳐들어 왔지만, 고구려 군사들은 한 사람이 백 명의 적과 싸운다는 일당백 정신으로 굳게 뭉쳐서 수나라 대군을 박살내 버렸어요.
고구려의 힘이 광개토대왕이나 장수왕 때만큼은 아니었어도 ‘썩어도 준치’라고, 아직 수나라 정도는 능히 대적할 힘이 있었거든요. 을지문덕을 놓아 보낸 문술과 중문이 깊이 후회하였다는 데서 기선을 제압한 문덕의 작전이 빛을 발한다. 문술과 중문이 사람을 보내 문덕을 꾀었지만, 문덕은 돌아보지 않고 압록강을 건너 본국으로 와버렸다. 중문은 후회를 넘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게다가 문술은 군량이 떨어져 가는 것을 보고 돌아가려 하였다. 사실 원정군의 가장 큰 고민은 보급이다. 일거에 대군을 쏟아 부어 전장의 주도권을 잡으려 하지만, 덩치가 크면 클수록 보급의 고민 또한 큰 법이다. 문술은 그런 면에서 현실적인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문은 정예부대를 시켜 문덕을 쫓으면 성공할 수 있다고 장담하고, 문술은 이를 말리는 자중지란이 수나라 병영에서 일어났다.
을지문덕이 노린 거짓 항복의 효과는 기대 이상으로 컸다. 마침내 중문은 화를 내며, “10만의 병력을 가지고 조그마한 적을 부수지 못한다면, 무슨 낯으로 황제를 뵌단 말이오.”라고 꾸짖었다. 문술은 마지못해 받아들이고 압록강을 건너 쫓아갔다. 여기서 문덕의 두 번째 작전이 펼쳐졌다. 수나라 군대가 주린 기색이 있음을 알고, 더욱 피곤함에 지치게 하도록, 싸우면 바로 패하며 달아났다. 그러기를 일곱 번 거듭했다고, [삼국사기]는 쓰고 있다. 권투에서도 때리다가 지친다는 말이 있다. 일방적으로 주먹을 쓰다 보면 상대를 깔보게 되고 그러는 동안 자신이 지쳐가는 것을 모른다. 중문과 문술이 그런 모양새였다. 져주는 군대를 쫓아 평양성 30리 밖에까지 달려온 것이 잘못이었다. 30만의 별동 부대를 상대하는 고구려의 작전은 의외로 간단했어요.
을지문덕 장군은 추운 겨울이 닥쳐오기 전에 전쟁을 끝내려고 무리를 해서 쳐들어오는 수의 속셈을 간파했어요. 그는 수나라 군사들이 진격해 오는 길목의 백성들을 산성 안으로 이동시키고 마을 안에 있던 우물들을 모두 메워 버렸어요.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하루에도 몇 번씩 적진을 넘나들며 적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어요. 한편 수나라 군대가 평양성 외곽 30리쯤에 도착하자,
을지문덕 장군은 거짓으로 항복을 하여 적진을 염탐했어요. 수나라 장수 우중문은 이때 을지문덕을 사로잡아 죽이려 했어요. 그러나 부하 장수가 항복하러 온 사신을 가두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해서 입맛만 쩝쩝 다시며 돌려 보냈어요. 간신히 적진을 빠져나온 을지문덕은 우중문에게 한 편의 시를 지어 보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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