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통시장"
시장은 부산의 중심에 자리한 전통시장이다. 국제시장, 자갈치시장과 함께 부산을 대표하는 시장이라 할 수 있다.
2013년부터 국내 최초로 개장한 야시장은 세계의 다양한 전통음식과 먹을거리를 다양하게 맛볼 수 있어 큰 호응을 얻고 있다.
부산 중구의 부평동이 발전한 것은 1876년 강화도조약에 의한 개항 이후로, 일본인들이 대거 이주하면서 시가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부평동에는 과거부터 열리던 장이 있었는데, 일본인들이 그곳에서 장을 보게 되면서 일한시장이라는 이름으로 사설시장이 개설되었다.일제가 정한 시장규칙에 따라 1915년 일한시장은 부산부에서 운영하는 공설시장으로 바뀌었고, 장옥도 새롭게 정비해서 부평정시장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부평정시장은 국내 최초의 공설시장으로 1920년대 시장의 규모를 넓혀가며 큰 시장으로 성장했다. 해방으로 일본인들이 물러간 이후에는 부평시장으로 이름을 바꾸고,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물건들을 취급하면서 장세를 키웠다.
부평시장은 베트남전쟁 특수로 크게 성장했는데, 당시 미군의 식량을 비롯한 다양한 군수품을 팔았다. 부평시장은 미군 물자인 통조림 등을 많이 팔았기 때문에 깡통시장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1970년대 이후에는 일본을 통해 세계 각국의 물자를 들여와 판매해 큰 인기를 끌었다. 2013년에는 국내 최초로 야시장을 개설해 세계의 전통음식들과 먹을거리를 팔면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부평동은 개항하기 전까지 강의 입구에 위치해 있어 갈대밭과 풀밭이 많았다. 부평이라는 말은 부산의 옛 지명인 부산(富山)과 하구의 갈대밭과 풀밭을 의미하는 평(平)이 합쳐진 말이다. 부평시장은 시장이 있는 지역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한편 부평시장은 부평깡통시장이라고도 불렸는데, 미군 부대에서 나온 통조림 같은 깡통 제품을 많이 거래하고 판매했기 때문이다.
개항 이후 부산은 큰 변화를 겪게 된다. 부산의 중심은 조선시대에 초량왜관이 있던 오늘날의 부산 중구로 옮겨갔다.
용두산공원 주변의 부평동, 광복동, 남포동, 신창동 등 오늘날의 부산 중구에 해당되는 지역은 개항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갈대밭과 풀밭이 많은 지역으로 ‘샛디’라고 불렸다.
부산이 개항을 하자 일본인들이 몰려왔고, 이들이 주로 거주한 곳이 부산 중구 지역이었다. 따라서 이곳은 일본 문화와 일본인들이 도입한 서양 문화가 활발하게 유입된 지역이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극장이다.
1876년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에 의해 개항하기 전까지 부산의 중심은 동래와 구포였다. 동래는 행정의 중심지였고, 구포는 낙동강 연안에 위치한 포구로서 낙동강 교역의 중심지였다.극장은 서양에서 발달한 문화로, 한국은 극장보다 마당극이 발달해 있었다.
부산 지역에 개관한 극장은 1904년 행좌와 송정좌, 1907년 7월 부평동에 부산좌가 있다. 부산좌는 2층짜리 목조건물로 700~8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크기였다. 주요 고객은 일본인들로, 활동사진의 시대가 개막되면서 다양한 영화들이 상영되었다. 그러나 부산좌는 1923년 3월에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다.
부산의 중구가 오늘날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는 영화의 도시가 된 것도 부산좌의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 근처의 밭을 구입해서 장옥과 점포를 설치하고, 경찰의 허가를 얻어 1909년 일한시장이라는 이름으로 사설시장을 개설했다.
‘일한’이란 일본과 한국을 의미한다. 일한시장은 1914년 일제의 시장규칙에 따라 시장의 부지와 건물을 부산부 당국이 임차해서 1915년 9월부터 장옥을 개축해 공설시장으로 바꾸었다. 이때 이름도 지역 이름에서 유래한 부평정시장으로 바꾸었다.
부평정시장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개설된 공설시장이었다. 부평정시장이 있던 곳은 오늘날의 부평아파트 인근이었다.주요 고객은 일본인들로, 활동사진의 시대가 개막되면서 다양한 영화들이 상영되었다. 그러나 부산좌는 1923년 3월에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다. 부산의 중구가 오늘날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는 영화의 도시가 된 것도 부산좌의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
부평동에는 원래 사거리시장이라는 이름을 가진 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그런데 개항으로 늘어난 일본인 거주자들이 이 시장에서 장을 보게 되면서, 그들을 대상으로 물건을 판매하는 상인 또한 늘어났다.부산부에서 부평정시장을 공설시장으로 개설한 것은 일본인들의 편의를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초기에는 식재료나 잡화 등을 일본인들에게 10~25% 정도 할인해서 판매했다.
일본인 거주자들이 늘어나면서 부평정시장은 1922년과 1924년에 주위의 도로를 수용해서 시장의 규모를 키웠다. 시장의 규모는 이후에도 계속 커져서 1927년에 4,233.9m2가 되었다. 1층 목조건물이었던 부평정시장은 건물 안팎에 점포들이 있었다. 1923년에는 건물 내에 125개, 바깥에 137개의 점포가 있었고, 1935년에는 건물 내에 92개, 바깥에 570개가 있었다.
부평정시장은 매월 초하루를 빼고 매일 장이 서는 상설시장이었다. 1923년 초반 주요 거래 품목은 백미, 대두, 소금, 야채와 과일, 잡곡, 조수, 어류 및 해조, 직물 등으로 가장 많이 거래된 것은 백미(56만 9,000원)와 어류 및 해조(47만 2,600원)였고, 하루 거래액은 4,346원, 연 거래액은 180만 3,000원에 이르렀다.
1935년에는 수백 명의 상인들이 곡물과 식료품, 해산물, 직물 등을 거래하며 하루 거래액이 6,500원, 연 거래액이 300만 원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커졌고, 부산을 대표하는 시장으로 성장했다. 일제강점기 때 부산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늘어나고 도시가 커지면서 부평정시장 외에도 서구 대신동에 대신정시장이 1933년 1월 문을 열었다.
대신정시장의 부지 면적은 2,692m2였다. 이 외에도 1930년대 중구 영주동, 동구 수정동에도 영주정시장, 수정정시장이 개설되어 성황을 이루었다. 1945년 해방이 되고 부평정시장은 동제의 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부평동시장, 부평시장이 되었다.
해방은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고, 그것은 부평시장도 다를 것이 없었다. 해방이 되면서 강제든 자발적이든 해외로 나갔던 동포들이 귀환하기 시작했고, 부산은 인천 등과 함께 귀환의 주요 통로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해방의 기쁨을 채 만끽하기도 전에 터진 한국전쟁 또한 한국 사회에 준 충격과 영향은 엄청났다. 전쟁 초반에 한국은 ‘낙동강전투’가 상징하는 것처럼 순식간에 낙동강 이남으로 밀려났다. 수많은 피란민들이 함락되지 않는 부산을 향해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루었다. 이런 상황은 시장과도 관련이 깊은 인구의 변동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해방 당시 40만을 헤아리던 부산의 인구는 한국전쟁 당시 2배 가까이 늘어나 88만까지 늘어났다. 인구의 급증은 부산이라는 도시를 크게 바꾸어놓았다. 피란민들은 곳곳에 임시가옥인 판잣집을 지어 거주했고, 생존을 위해 몸부림을 쳤다. 그 가운데 하나가 시장의 활성화였다.
사회가 급격한 변화를 겪을 때 또는 위기에 빠졌을 때, 반드시 등장하는 것이 흔히 말하는 암시장이다. 필요한 재화와 생필품을 얻기 위해 물물교환 형태로 시장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부산의 시장은 해방과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계기로 시장이 확대되고 성장하였다. 특히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했던 중구가 그 중심지였다. 다음2부로.!
https://youtu.be/fKNbbj5Mj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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