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
1539(중종 34)∼1615(광해군 7). 조선 중기의 의관. 자는 청원(淸源), 호는 구암(龜巖),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30여 년 동안 왕실병원인 내의원의 어의로 활약하는 한편, 『동의보감(東醫寶鑑)』을 비롯한 8종의 의학서적을 집필하여 조선을 대표하는 의학자로 우뚝 섰다.
허준(許浚, 1539-1615)은 신묘한 의술로 박애를 실천한 ‘의성(醫聖)’이 되고, 신분을 극복하고 최고의 자리에 오른 신화가 되었다. 그러나 실제 역사의 기록에서 그의 이름을 찾기란 매우 어려운 게 사실이다.그의 일생을 추적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우리가 허준에 대해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대부분은 소설과 드라마의 상상력일 뿐이다. 임진왜란으로 큰 혼란을 겪던 조정이 강화회담의 진행으로 잠시나마 한숨을 돌리고 있던 1596년 선조는 허준을 불러 명했다. “요즘 중국의 방서를 보니 모두 자잘한 것을 가려 모은 것으로 참고하기에 부족함이 있다. 너는 마땅히 온갖 처방을 덜고 모아 하나의 책으로 만들어라.”조선 중기의 의학자. 선조와 광해군의 어의를 지냈으며 1610년(광해군 2)에 조선 한방의학의 발전에 기여한 《동의보감》을 완성했다. 본관은 양천(陽川)이며 자는 청원(淸源), 호는 구암(龜巖)으로 경상도우수사(慶尙道右水使)를 지낸 허곤(許이 할아버지이며, 아버지는 무관으로 용천부사를 역임한 허론이다. 허론의 정실은 일직 손씨였으며 허준의 생모였던 영광 김씨는 소실이었다. 허론의 정실은 일직 손씨였으며 허준의 생모였던 영광 김씨는 소실이었다. 허준의 이복 형 허옥(許沃)은 임금의 신변보호와 궁궐수비를 책임지는 내금위에 있었고, 동생 허징(許澄)은 서자이면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교검, 교리 등 내직을 지냈고 선조 때 영의정이었던 노수신(盧守愼)의 사위가 되었다. 허준은 경기도 양천현 파릉리(지금의 서울시 강서구 등촌2동 능안마을)에서 태어났다. 비록 서자였지만 차별받지 않고 명문가 출신답게 좋은 교육을 받았으며 어려서부터 경전과 사서 등에 밝았다. 허준은 양반은 아니었어요. 아버지는 양반이었지만 어머니가 평민 출신이라 양반이 아닌 중인에 속할 수밖에 없었지요. 조선 시대에 중인은 과거 시험 중 관리가 될 수 있는 문과에 응시할 수 없었어요. 그래도 지금으로 치면 전문직 직업을 가질 수 있었고, 허준은 여러 전문직 중 의원, 지금으로 치면 의사를 택합니다. 과거 시험 중 잡과를 치러 의원이 된 허준은 열심히 공부하고 그 결과 능력을 인정받기에 이르렀어요. 허준이 형제들과 달리 어떤 계기로 의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유희춘(柳希春)의 《미암일기(眉巖日記)》에 의하면 1569년(선조 2) 이조판서 홍담(洪曇)에게 내의원에 천거해 주도록 부탁하였고, 1573년(선조 6)에 정3품 내의원정에 올랐다는 기록으로 보아 1569년 이후 내의원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양천 허씨 세보》에는 1574년(선조 7) 의과에 급제하였다고 알려져 있어 두 가지 설 모두 사실을 확인하기 어렵다. 잡과를 치르고 합격한 허준은 궁 안에서 의학과 약에 관한 업무를 보는 내의원에서 일하게 되었어며, 그러던 중 세자인 신성군이 당시로서는 치료하기 힘든 병인 천연두를 앓고 있을 때 허준이 신성군을 치료하여 낫게 한 계기로 선조는 허준의 의술이 매우 뛰어나다고 판단하게 되었어며. 이후 허준은 많은 왕실 사람들을 거의 도맡아 치료하다시피 하며 요줌으로하면 주치의 가됩니다. 임진왜란은 의사인 허준에게 엄청난 아픔을 주었다. 아무 죄도 없는 백성들이 적의 공격을 당해 피를 흘리며 쓰려졌고, 사방에 널린 시체들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썩으면서 전염병이 발생하게 된 거예요. 허준은 상처와 전염병 속에서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고통 속에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의사로서 도움을 주고 싶었어요. 1575년 어의 안광익(安光翼)과 함께 선조를 진료하기 시작했으며, 1578년 내의원첨정이 되었다. 1587년 10월에는 태의 양예수(楊禮壽) 등과 함께 선조를 진료하여 건강이 좋아지자 호피(虎皮)를 상으로 받았다. 파격적인 승진으로 내의원에 들어왔으나 한동안은 그다지 주목 받지 못했던 듯하다. 1575년 어의를 보조하여 왕의 맥을 진찰했고, 1581년 선조의 명으로 [찬도방론맥결집성]이라는 진맥학 책의 오류를 바로잡아 책으로 편찬하는 작업을 했으며, 1587년 다른 여러 어의와 함께 왕의 진료에 참가하여 병의 쾌유에 대한 상으로 사슴 가죽을 받았다는 등 몇 년에 한 번씩 단편적인 기록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왕명으로 진맥학 책을 전술했다는 기록을 보면 학술적으로 인정은 받았던 듯하다. 그러던 중 1590년 광해군의 두창을 고치면서 비로소 남다른 의술을 인정받는다. 당시 왕자의 신분이었던 광해군은 다시 살아날 가망이 없어 보일 정도로 병이 깊었다. 다른 의원들이 감히 나서지 못하고 있을 때 허준이 과감히 나서 병을 고치자 선조는 정3품 당상관인 통정대부의 벼슬을 내리며 그 공을 치하했다. 서얼 출신의 기술관이었던 허준에게 당시의 신분구조상 허용되었던 벼슬은 정3품의 당하관이 최대였다. 그런데 그 한계를 뛰어넘은 것이다. 그러나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임진왜란 중 다시 한번 광해군의 병을 고치면서 동반(東班)에 올라, 신분의 한계를 완전히 벗어던졌다. 동반이란 양반 중 하나인 문관을 뜻하는 것으로, 동반에 올랐다는 것은 곧 완전한 양반이 되었음을 의미했다. 또 임진왜란이 끝나자 선조는 자신을 끝까지 따른 문무관이 열일곱 명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힘겨웠던 피난길을 끝까지 함께한 공을 인정해 허준을 공신에 책봉하고 종1품 숭록대부 벼슬을 내렸다. 품계로만 따지면 좌찬성, 우찬성과 같은 지위에 오른 것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선조는 허준에게 정1품 보국숭록대부를 내리려 했다. 이듬해 당상관의 반열에 올랐다. 1592년 임진왜란의 발발로 선조가 의주로 피난갈 때 어의로서 선조 옆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모셨으며, 그 공으로 전쟁이 끝난 후 호종공신(扈從功臣)이 되었다. 1596년에는 광해군의 병을 고쳐 종2품의 가의대부(嘉義大夫)가 제수되었고, 이때부터 선조의 명을 받아 양예수 등 여러 의원들과 함께 조선의 실정에 맞는 의서(醫書)인 《동의보감(東醫寶鑑)》 편찬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정유재란의 발발로 의서 편찬이 어려워 보류되었다가 본격적인 편찬은 1600년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1601년 지중추부사로 승진하였고,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책록되었으며, 1606년 오랫동안 차도가 없던 병세가 호전되자 관직의 최고 단계인 정1품 벼슬을 내리려 한 것이다. 그러나 신분 질서를 그르치는 잘못된 조치라고 맹렬히 반대하는 사간원과 사헌부의 반대에 성사되지는 않았다. 1606년에는 양평군(陽平君)에 올라 정1품인 보국숭록대부로 승진하였으나 중인 신분으로는 과도한 벼슬이라 하여 대간(臺諫)들의 반대로 보류되기도 하였다. 1608년(선조 41) 유배 이후 허준은 연구에 전념할 시간을 얻게 되었고, 유배지에서 단시간에 책의 절반 이상을 집필해냈다. 허준은 양생(養生) 사상을 중심으로 하여 중국 의학이론과 처방의 난맥상을 바로잡고, 향약 사용의 이점을 최대화하며, 최소한의 약의 분량으로 최대한의 의학적 효과를 얻으려는 데 힘썼다. 그 무렵 명대의 신의학이 적지 않게 조선에 수입되어, 조선 전기의 의학전통과 섞이는 바람에 이를 정비할 필요가 있었고, 또한 전란을 겪으며 기근과 역병이 발생해 제대로 된 의서가 시급히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새로운 의서의 편찬을 명하면서 선조는 그 책의 성격을 분명히 제시했다. 첫째, 사람의 질병이 조섭을 잘 못해 생기므로 수양을 우선으로 하고 약물치료를 다음으로 할 것. 둘째, 처방이 너무 많고 번잡하므로 요점을 추리는 데 힘쓸 것. 셋째, 국산 약 이름을 적어 백성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할 것 등이었다.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조선 사회 회복의 일환으로 획기적인 의학의 제공이라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었으며. 『동의보감』은 중국에서 수입한 의학서의 한계를 극복한 책입니다. 백성이 쉽게 병을 진단하고,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재를 써서 병을 다스릴 수 있도록 하였다. 허준은 뼈대 있는 무관의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 허론(許碖)과 양반 가문 출신인 어머니 영광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어머니의 신분이 정실(正室)이 아니었기에, 그의 신분은 중인으로 규정되었고, 이러한 신분은 문·무백관 보다 천하다고 여겨진 의관의 길을 택하는 데 작용하였다. 그럼에도 훌륭한 가문의 배경 덕에 허준은 어려서부터 경전·역사·의학에 관한 소양을 충실히 쌓을 수 있었다. 허준이 언제, 어떻게 의학을 공부했으며, 또 의관으로 나아갔는지를 일러주는 자료는 아직 보고되지 않았다. 관직으로 볼 때, 허준의 장년 이후의 삶은 세 시기로 나뉜다. 의관 허준의 출세는 조선의 역사에서 거의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파격의 연속이었다. 이는 그의 의술 솜씨와 우직한 충성이 빚어낸 성취였다. 이와 함께 이를 질시한 양반계급의 불만도 작지 않았다. ‘양반에게 굽실거리지 않으며, 임금의 은총을 믿고 교만스럽다.’는 세평(世評)도 존재했다. 허준은 어의로 재직하면서 내의원의 의학서적 집필을 도맡았다.『동의보감』에는 백성을 사랑하는 허준의 마음이 담겨 있어요. 우리 자연에서 구할 수 있는 약재들로 병을 치료할 수 있도록 자세히 적어 놓았거든요. 허준은 『동의보감』 외에도 여러 종류의 의학 서적을 집필하였어요. 또한 어의로만 머물지 않고 백성을 위한 의원으로도 활동하였답니다. 그가 저술한 책으로는 8종이 있으며, 크게 네 부류로 대별된다. 첫째, 종합 임상의서의 집필로, 『동의보감』(1613)이 이에 해당한다. 둘째, 일상생활에 요긴한 한글 번역이 딸린 의서로,『언해태산집요(諺解胎産集要)』·『언해구급방(諺解救急方)』·『언해두창집요(諺解痘瘡集要)』(이상 1601) 등이 그것이다. 책은 각각 아이의 해산에 대한 의학적 지식, 구급 상황에 대한 발 빠른 대처, 소아전염병인 천연두에 대한 의학적 대응을 실었다. 최근에 연대 미상인『언해납약증치방(諺解臘藥症治方)』이 허준의 저작으로 추정된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다. 이 책은 가정상비약인 납약을 올바로 쓰는 지침을 담고 있다. 셋째, 전염병 전문의서로, 『신찬벽온방(新纂辟溫方)』·『벽역신방(辟疫神方)』(이상 1613)의 편찬이 그것이다. 『신찬벽온방』은 열성 질환인 온역(瘟疫: 오늘날의 급성전염병)에 대한 대책으로 내놓은 것이다. 『벽역신방』은 1613년 국내에서 첫 유행했던 성홍열에 대한 책이다. 넷째, 학습용 의학교재인데, 허준 최초의 저작인 『찬도방론맥결집성(纂圖方論脈訣集成)』(1581)이 그것이다. 이 책은 당시 전의감(典醫監)의 과거시험 교재로 쓰이고 있던 동일한 책의 오류를 바로잡은 것이다. 허준의 책 중 가장 주목할 책은『동의보감』이다. 이 책은 왕명으로 1596년(선조 29)에 시작되어 14년 후인 1610년(광해군 2)에 완성을 보아 1613년(광해 5)에 출간되었다. 애초에는 허준을 책임자로 하여 유의(儒醫) 정작(鄭碏), 다른 어의인 양예수(梁禮壽), 김응탁(金應鐸), 이명원(李命源), 정예남(鄭禮男) 등 5인의 공동 작업으로 시작했으나 정유재란으로 중단된 상태에 있다가, 이후 어느 시점에서 허준이 단독으로 책임을 맡아 책을 완성시켰다. 첫째, 내의원 관직을 얻은 1571년부터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까지이다. 이 21년 동안 허준은 내의(內醫)로서 크게 이름을 얻기는 했지만, 최고의 지위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1590년(선조 23) 허준은 왕세자의 천연두를 치료한 공으로 당상관 정3품의 품계를 받았다. 이 품계는 『경국대전(經國大典)』이 규정한 서자 출신인 허준이 받을 수 있는 최고 관직인 종3품의 한계를 깰 정도의 큰 상이었다. 둘째,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이후 선조가 승하하던 1608년(선조 41) 때까지이다. 허준이 선조의 의주 피난길에 동행하여 생사를 같이함으로써 그는 선조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었다. 1596년(선조 29) 왕세자의 난치병을 고친 공으로 중인 신분에서 벗어나 양반 중 하나인 동반(東班)에 적을 올렸다. 1604년(선조 37)에는 임진왜란 공신 책봉이 있었는데, 허준은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책정되는 한편, 그는 본관인 양천(陽川)의 읍호(邑號)를 받아 양평군(陽平君)이 되었다. 이와 함께 품계도 승진하여 종1품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올랐다. 1606년(선조 39) 선조의 중환을 호전시킨 공으로, 선조는 그에게 조선 최고의 품계인 정1품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를 주고자 했으나, 사간원·사헌부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쳐 이는 실현되지 않았다. 허준은 한국의학사, 동아시아 의학사, 세계의학사에 크게 기여했으며, 조선 의학사의 독보적인 존재로 동의(東醫), 즉 한국의학의 전통을 세웠다. 특히, 『동의보감』은 당대 최고의 고급 의학으로서 조선 의학의 통일을 가능케 했고, 언해본 의서는 의학 대중화의 촉진제가 되었다.『동의보감』은 출간이후 중국과 일본에서 동아시아 전통의학의 핵심을 잘 잡아내어 적절한 표준을 세운 것으로 평가받았다. 이 책은 중국에서 대략 30여 차례 출간되었고, 일본에서도 두 차례 출간되었다. 허준의 면밀한 성홍열 관찰 보고는 동아시아 지역에서 최초이고, 세계적으로도 최초의 그룹에 속하는 것이다. 이로써 허준은 세계질병사 연구의 선구자 중 일인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그는 광해군 대에 주로 의서를 편찬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동의보감》의 완성이다. 1610년 완성된 이 책은 총 25권 25책으로 당시 국내 의서인 《의방유취(醫方類聚)》《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의림촬요(醫林撮要)》를 비롯하여 중국측 의서 86종을 참고하여 편찬한 것이다. 그 내용은 내경(內景)·외형(外形)·잡병(雜病)·탕액(湯液)·침구(鍼灸) 등 5편으로 구성된 백과전서(百科全書)로서 오늘날까지 애용되고 있다. 이 책은 일본과 중국에까지 전해져 중국판 서문에는 ‘천하의 보(寶)를 천하와 함께한 것’이라 하였고, 일본판 발문(跋文)에서는 ‘보민(保民)의 단경(丹經)이요 의가(醫家)의 비급’이라 평하고 있어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그는 또 《구급방(救急方)》을 언해한 《언해구급방(諺解救急方)》 2권, 《창진집(瘡疹集)》을 개정하여 언해한 《언해두창집요(諺解痘瘡集要)》 2권, 노중례(盧重禮)의 《태산요록(胎産要錄)》을 개편하여 언해한 《언해태산요집(諺解胎産要集)》을 비롯하여 《벽역신방(辟疫神方)》《신찬벽온방(新纂辟瘟方)》《맥결집성(脈訣集成)》《찬도방론맥결집성(纂圖方論脈訣集成)》 등의 저술이 있다. 죽은 후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추증되었다.한국에서는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로 지정되었고, 2009년 7월 31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저서로는 동의보감, 언해태산집요, 신찬벽온방, 벽역신방, 찬도방론맥결집성, 이있다. 세계질병사의 관점에서 볼 때, 『벽역신방』도 크게 주목을 끈다. 허준은 성홍열에 대한 예리한 관찰과 합리적인 추론을 통해 이 미지(未知)의 병이 홍역을 비롯한 유사한 질환과 구별되는 병임을 밝혔다. 그의 인생 가운데 가장 커다란 시련이었던 이 기간을 허준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업적이 되는 [동의보감] 편찬에 바쳤다. “정(精), 기(氣), 신(神)을 중심으로 하는 도가의 양생학적 신체관과, 구체적인 질병의 증상과 치료법을 위주로 한 의학적 전통을 높은 수준에서 하나로 통합했다.”는 평을 받는 이 책은 이후 조선 의학사의 독보적인 존재로, 오늘날까지도 한의학도에게 널리 읽히는 명저이다. 1609년 사간원의 극심한 반대에도 광해군은 당시 일흔한 살의 허준을 내의원에 복귀시켜 자신의 병을 돌보게 했다. 한양에 돌아온 그는 마침내 완성한 [동의보감]을 광해군에게 바쳤고, 이후 역병에 관해 저술한 [신찬벽온방] [벽역신방]을 편찬했다. 1608년(선조 41)부터 그가 죽던 해인 1615년(광해 7)까지이다. 이 7년은 시련기로 선조 승하의 책임을 지고 벼슬에서 쫓겨나고 먼 곳으로 귀향을 가는 등 불운이 있었고, 귀양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권세가 없는 평범한 내의로 지내다 고요하게 삶을 마쳤다. 1608년(선조 41) 선조가 병으로 승하하자 책임 어의로서 의주로 유배되었다가 바로 풀려나 광해군의 어의로서 왕의 측근에서 총애를 받았다. 그것이 수의(首醫)인 그의 잘못이라는 탄핵을 받아 허준은 삭탈관직 되는 한편, 의주 유배형이 처해졌다. 그의 유배는 1년 8개월이 지난 1609년(광해 1)에 풀렸으며, 6년 후인 1615년(광해 7) 세상을 떴다. 사후 조정에서는 그의 공을 인정하여 정1품 보국숭록대부를 추증했다.그러다 1615년 일흔일곱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그의 죽음 뒤 정1품 보국숭록대부 작위가 추증되었다. 20세기 후반 이후 한국에서 허준은 소설과 드라마로 재조명되어 커다란 인기를 끌었다. 2009년에는 『동의보감』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세계인과 같이 나누게 되었다. 2005년 3월에는 허준박물관이 개관되어 허준과 『동의보감』을 알리는 교육과 전시행사가 있었다. 또한 서울 강서구를 중심으로 매년 ‘허준 축제’를 개최하고 있는데, 2014년 10월 제15회 행사를 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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