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
1363년 자헌대부 판강릉대도호부사(判江陵大都護府使) 황군서(黃君瑞)의 아들로 개성(開城)에서 출생했다. 소신과 관용의 리더십 을갖춘 명재상황희(黃喜,)는 누구에게나 청백리이자 명재상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며 조선조 최장수 재상이다. 그는 정치 일선에서 원칙과 소신을 견지하면서도 때로는 관용의 리더십을 발휘하여, 건국 초기 조선의 안정에 기여하였다.
조선 초 세종 대의 재상. 18년간 영의정에 재임하여 세종의 가장 신임받는 재상으로 명성이 높았다. 인품이 원만하고 청렴하여 존경 받았으며, 시문에도 뛰어났다. 1363(공민왕 12)∼1452(문종 2). 1376년(우왕 2) 음직으로 복안궁녹사(福安宮錄事)가 되었다가 1383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1389년(창왕 1) 문과에 급제, 이듬해 성균관학관(成均館學官)이 되었다.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했으나, 태조 이성계의 요청으로 1394년(태조 3) 성균관학관으로 일하게 되었고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도 겸임하였다. 그 후 직예문춘추관(直藝文春秋館)·사헌감찰(司憲監察)·우습유(右拾遺)·경기도도사(京畿道都使)를 역임했다.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장수(長水). 초명은 수로(壽老).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厖村). 황석부(黃石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황균비(黃均庇)이고, 아버지는 자헌대부 판강릉대도호부사(資憲大夫判江陵大都護府使) 황군서(黃君瑞)이며, 어머니는 김우(金祐)의 딸이다. 개성 가조리(可助里)에서 출생 하였다. 1376년(우왕 2) 음보로 복안궁녹사(福安宮錄事)가 되었다. 1383년 사마시, 1385년 진사시에 각각 합격하였다. 그리고 1389년에는 문과에 급제한 뒤, 1390년(공양왕 2) 성균관학록에 제수되었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일정 기간 은둔생활을 하며 고려 유신으로 지냈다[장수황씨 가문의 전승에 의하면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였다는 설화가 전하지만 역사적 사실이었는지는 판단할 수 없다]. 그러다가 1394년(태조 3) 태조의 적극적인 출사(出仕) 요청을 수용하여 성균관학관에 제수되면서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를 겸임하였다.
이후 직예문춘추관·감찰 등을 역임하였다.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조선조에도 명재상을 꼽는다면 황희를 거론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황희는 조선조의 최장수 재상으로 기록될 만큼 화려한 정치경력을 자랑하는 대표적인 재상이었다. 황희가 활동하던 시기는 고려에서 조선으로 교체되던 우리 역사의 격동기 가운데 한 시기였다. 고려 말 과거 급제 뒤 성균관 학관을 거치면서 청운의 푸른 꿈을 키우던 황희는 고려 대신 새왕조 조선이 건국되는 역사적 사건 앞에서 한때 정치적 시련에 빠진 적도 있었다. 1398년 문하부우습유(門下府右拾遺) 재직 중 언관으로서 사사로이 국사를 논의했다고 문책되어 경원교수(慶源敎授)로 편출되었다가, 1398년(정종 즉위년) 우습유로 소환되었다.
이듬 해 언사로 파직되었다가 그 해 2월경 문하부우보궐에 복직되었다. 곧 경기도도사(京畿道都事)를 거쳐 형조·예조·이조·병조의 정랑을 역임하였다. 1400년(정종 2) 이후 형조·예조·이조·병조 등의 정랑(正郞)을 지냈다. 1401년(태종 1)경 지신사(知申事) 박석명(朴錫命)이 태종에게 천거해 도평의사사경력(都評議使司經歷)에 발탁되었다. 1402년 부친상을 당해 잠시 사직하였다. 1404년(태종 4) 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가 되었다가 이듬해 승정원에서 왕명을 출납하는 지신사(知申事)에 올랐다. 1408년 민무휼(閔無恤) 등의 횡포를 제거하였다. 그 뒤 병조의랑에 체직되었다가 1402년 아버지의 상으로 사직하였다. 그러나 그 해 겨울 군기(軍機)를 관장하는 승추부의 인물난으로 기복되어 대호군 겸 승추부경력에 제수되었다. 1404년 우사간대부를 거쳐 승정원좌부대인에 오르고, 이듬 해박석명의 후임으로 승정원지신사에 발탁되었다.
1409년 참지의정부사가 되고, 형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대사헌 등을 지냈다. 1411년 병조판서, 1413년 예조판서를 역임하고, 이듬 해 질병으로 사직했다가 다시 예조판서가 되었다. 그다음해 이조판서(1415)를 역임하고. 송사(訟事)문제로 파직되었다가 다시 호조판서로 복귀하였고, 1416년에는 세자 양녕대군의 실행을 옹호하여 파직되었다가 다시 공조판서로 전임 복귀되었다. 그러나 그 해 행랑도감제조(行廊都監提調)에 복위된 데 이어, 참찬·호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이어 평양 판윤을 거쳐, 1418 한성부판사(漢城府判事)가 되었다. 세종의 치세가 시작되고 아울러 상왕(上王: 태종)의 노여움이 풀리면서, 1422년(세종 4) 남원에서 소환, 직첩과 과전을 환급받고 참찬으로 복직되었다.
1423년 예조판서에 이어 기근이 만연된 강원도에 관찰사로 파견되어 구휼하였다. 판우군도총제(判右軍都摠制)에 제수되면서 강원도관찰사를 계속 겸대하였다. 1424년 찬성, 이듬해에는 대사헌을 겸대하였다. 또한 1426년에는 이조판서와 찬성을 거쳐 우의정에 발탁되면서 판병조사를 겸대하였다. 1427년 좌의정 겸 판이조사가 되었고, 그 해 어머니의 상으로 사직하였다. 그 뒤 기복되어 다시 좌의정이 되었다. 이어 평안도도체찰사로 파견되어 약산성기(藥山城基)를 답사하였다. 이 때 약산이 요충지라 해서 영변대도호부를 설치한 뒤 평안도도절제사의 본영으로 삼게 하였다. 1430년 좌의정으로서, 감목(監牧)을 잘못해 국마(國馬) 1,000여 필을 죽인 일로 해서 사헌부에 구금된 태석균(太石鈞)의 일에 개입해 선처를 건의하였다. 그러나 일국의 대신이 치죄에 개입함은 부당할 뿐더러, 사헌부에 개입하는 관례를 남기게 되므로 엄히 다스려야 한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418년에는 양녕대군의 세자 폐출(충녕대군 세자 책봉)을 극력 반대하여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교하(交河)로 유배되었다가 얼마 후 고향과 가까운 남원(南原)으로 이배(移配)되었다. 1422년(세종 4) 상왕(태종)의 진노가 풀려 의정부 좌참찬에 기용되었고, 이듬해 예조판서를 거쳐 강원도 관찰사로 나가 구휼을 잘 하였다. 1426년 이조판서·우의정 거쳐 1427년 좌의정에 올랐다. 그해 인사를 하지 않는다고 무고한 사람을 때려서 죽인 사위 '서달'을 방면하여 파면되었다가 한달 뒤 복귀하였다. 1428년에는 박포의 아내와 간통한 혐의를 받았으며 1449(세종 31)년 벼슬에서 물러날 때까지 18년간 국정을 관리하였다.
그의 업적은 다양하다. 농사의 개량, 예법의 개정, 천첩(賤妾) 소생의 천역(賤役) 면제, 국방강화(야인과 왜 방어책), 4군6진 개척, 문물제도의 정비·진흥 등의 업적을 남겼다. 또한 국가의 법이 혼란스러운 것을 수정 보완하여 《경제육전(經濟六典)》을 간행하였다. 태종은 물론 세종의 가장 신임받는 재상으로 명성이 높았다. 또한, 인품이 원만하고 청렴하여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한때 파주 반구정(伴鷗亭)에 은거하였다.
1431년 다시 복직되어 영의정부사에 오른 뒤 1449년 치사(致仕: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는 것)하기까지 18년 동안 국정을 통리(統理)하였다. 그리고 치사한 뒤에도 중대사의 경우 세종의 자문에 응하는 등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활동사항 으로는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침착하고 사리가 깊고 청렴하며, 충효가 지극하고 학문에 힘써 높은 학덕을 쌓았으므로 태종으로부터 “공신은 아니지만 나는 공신으로서 대우했고, 하루라도 접견하지 못하면 반드시 불러서 접견했으며, 하루라도 좌우를 떠나지 못하게 하였한다.” 할 정도로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국방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여 북방 야인과 남방 왜에 대한 방비책을 강구하였다. 그리고 예법을 널리 바르게 잡는 데에 노력해, 원나라의 영향이 지대한 고려의 예법을 명나라의 예법과 조선의 현실을 참작해 개정, 보완하였으며, 농사개량에 유의해 곡식 종자를 배급하고, 각 도에 명령해 뽕나무를 많이 심어 의생활을 풍족하게 하였다.
『경제육전(經濟六典)』을 펴내면서, 종래 원집(元集)과 속집(續集)으로 나뉘어 내용이 중복되고 누락되거나 내용과 현실이 괴리되는 것을 수정, 보완하였으며, 인권에 유의해 천첩(賤妾) 소생의 천역(賤役)을 면제하는 등 태종대의 국가기반을 확립하는 데 공헌하였다.
세종대에는 의정부의 최고관직인 영의정부사로서 영집현전경연예문관춘추관서운관사 세자사 상정소도제조(領集賢殿經筵藝文館春秋館書雲觀事世子師詳定所都提調) 등을 겸대하였다. 그리고 중앙과 지방의 백성들의 마음을 진정(鎭定)시키면서, 4군6진의 개척, 외교와 문물제도의 정비,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문물의 진흥 등을 지휘, 감독하였다. 특히, 세종 말기에 세종의 숭불과 연관해 궁중 안에 설치된 내불당(內佛堂)을 두고 일어난 세종과 유학자 중신 간의 마찰을 중화시키는 데 힘썼다. 그는 왕을 보좌해 세종성세를 이룩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로써 조선왕조를 통해 가장 명망 있는 재상으로 칭송되었다. 1452년(문종 2) 세종묘에 배향되었다. 곧 이어 조선에 출사한 황희는 직예문 춘추관을 비롯해 사헌부 감찰 및 형조·예조·병조·이조의 정랑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뿐만 아니라 언관직인 우사간대부 이외에도 오늘날의 대통령 비서실인 승정원 소속의 좌부대언과 지신사 등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관직을 지냈다. 여기서 지신사란 오늘날의 대통령 비서실장에 해당되는 관직으로, 평소 황희를 눈 여겨 본 태종의 발탁에 의한 것이었다.
황희에 대한 태종의 예우는 상당하였다. 그가 예조판서로 옮겼을 때 마침 병이 들었다. 이에 태종은 내의(內醫) 김조와 조청 등을 보내 병을 치료하게 하고 조석으로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는 병이 나았다는 소식에, “이 사람이 성실하고 정직하니 참으로 재상이다. 그대들이 병을 치료했으니 내가 매우 기쁘게 여긴다.”고 하며, 이들 내의에게 후한 상을 내리기도 하였다. 황희는 세종 즉위 즈음에 양녕대군의 세자 폐위 문제와 관련해서 남원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세종의 부름에 응해 조정에 나왔다. 물론 역사에서 가정이란 있을 수 없으나, 후술하듯이 이때 만약 황희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면, 세종은 국왕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세종은 즉위 후 황희를 불러들였으니 이 순간 인재를 알아보는 세종의 뛰어난 혜안을 느끼게 한다. 황희는 이후 예조판서를 비롯해 20여 년 이상 재상직에 있었다. 1452년 그가 사망한 직후에 작성된 실록의 졸기에는 다음과 같이 그를 평하고 있다, 1455년(세조 1) 아들 황수신(黃守身)이 좌익공신(佐翼功臣)에 책록되면서 순충보조공신 남원부원군(純忠補祚功臣南原府院君)으로 추증되었다.
“황희는 관대하고 후덕하며 침착하고 신중하여 재상(宰相)의 식견과 도량이 있었으며, 후덕한 자질이 크고 훌륭하며 총명이 남보다 뛰어났다. 집을 다스림에는 검소하고, 기쁨과 노여움을 안색에 나타내지 않으며, 일을 의논할 적엔 정대(正大)하여 대체(大體)를 보존하기에 힘쓰고 번거롭게 변경하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 재상이 된 지 24년 동안에 중앙과 지방에서 우러러 바라보면서 모두 말하기를, ‘어진 재상(宰相)’이라 하였다.”
황희가 태종과 세종의 특별 대우를 받으며 24년 간 재상의 자리에 있을 수 있던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소신과 원칙을 견지하면서도 때로는 관용을 베풀 줄 아는 그의 정치적 자세 때문이 아닐까.? 상주의 옥동서원(玉洞書院)과 장수의 창계서원(滄溪書院)에 제향되고, 파주의 반구정에 영정이 봉안되었다. 저서로는 『방촌집』이 있으며, 시호는 익성(翼成)이다.
소신과 원칙을 견지한 정치적 자세 :
1418년 건국된 지 얼마 안 된 새 왕조 조선에 정치적 파란이 일어났다. 바로 당시까지 세자였던 양녕대군을 폐위시킨 사건이다. 세자의 교체는 자칫 엄청난 살육을 불러올 정도로 정치적 파장이 큰 사건이었다. 양녕대군을 폐위시킨 것은 계속되는 세자의 잘못된 행동 때문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를 폐위시킨 태종도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어렵게 세운 새 왕조의 명운이 걸린 문제이기에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황희가 세자의 폐위를 반대로 하고 나섰다. 당시 이조판서로 재직하던 황희는 대부분의 신료가 세자 폐위를 지지하는 상황에서, “폐장입유(廢長立幼;, 장자를 폐하고 아랫사람을 세움)는 재앙을 부르게 되는 근본이옵고, 또 세자가 비록 미쳤다고 하오나, 그 성품은 가히 성군이 될 것이오니, 치유에 주력하시기 바라옵니다.”라며 국왕의 판단에 재고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태종과 주위 대부분 신료는 듣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황희를 지탄하였다.
황희는 끝내 주장을 굽히지 않고 반대하다가 마침내 강등되어 귀양갔고, 태종은 여러 신하들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양녕대군을 세자의 자리에서 폐위시켰다. 황희의 정치적 소신과 원칙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하루는 의정부의 모임이 있었는데 마침 호조 관원 하나가 황희가 추울까 걱정하여 율무죽을 주었다. 그러자 황희가 말하기를, “탁지(度支:호조)가 어찌 재상의 아문(衙門)에 음식을 지급하는가. 장차 논계(論啓)하여 정배(定配)하겠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관청이나 관직마다 각자가 정해진 소임과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이해된다. 황희가 생존하던 시기가 조선 건국 초기라는 점을 감안해본다면 관직 기강을 세우는 것은 중요한 문제라 하겠다. 이때 황희는 관리들에게 원칙에 따른 직무 수행을 요구하였다.
황희에 대해서는 그와 얽힌 많은 일화들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이 청빈함을 강조하거나 관용과 타인에 대한 배려와 관련된 것이다. 아마도 이 점이 그가 20여 년 이상 재상직에머물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공무에 잠깐 짬을 내어 집에 있을 때의 일이었다. 집의 여종이 서로 시끄럽게 싸우다가 잠시 뒤 한 여종이 와서 “아무개가 저와 다투다가 이러이러한 못된 짓을 하였으니 아주 간악한 년입니다.”라고 일러바쳤다. 그러자 황희는 “네 말이 옳다.”고 하였다. 또 다른 여종이 와서 꼭 같은 말을 하니 황희는 또 “네 말이 옳다.”고 하였다. 마침 황희의 조카가 옆에 있다가 화가 나서는 “아저씨 판단이 너무 흐릿하십니다. 아무개는 이러하고 다른 아무개는 저러하니 이 아무개가 옳고 저 아무개가 그릅니다.”하며 나서자 황희는 다시 또 “네 말도 옳다.”고 하며 독서를 계속하였다고 한다. 언뜻 보면 주관이 없는 자세이다.
세상사 시비를 논하면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는 한쪽의 입장만을 듣게 된다. 오히려 황희가 보여준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 더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주관이 없기 보다는 ‘역지사지(易地思之)’라 했던가, 다른 사람의 입장을 충분히 배려할 줄 아는 자세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는 또한 노비에 대해서도 관용을 베풀 줄 알았고, 자신의 집에 있는 배를 따려는 젊은이를 꾸짖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집 시동(侍童)을 시켜 배를 따다 주는 관용의 미덕을 갖추기도 하였다. 조선조에서 재상까지 역임하였으면서도 청백리로 거론되는 인물로는 약 18명이 거론된다. 그리고 그 가운데 단연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이가 황희이다.
황희의 맏아들은 일찍부터 출세하여 벼슬이 참의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돈을 모아 살던 집을 새로 크게 짓고 낙성식을 하였다. 말이 낙성식이지 크게 잔치를 베푼 터이라 그 자리에는 고관들과 권세 있는 친구들이 많이 참석하였다. 집들이 잔치가 시작되려 할 때, 아버지 황희가 돌연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선비가 청렴하여 비 새는 집안에서 정사를 살펴도 나라 일이 잘 될는지 의문인데, 거처를 이다지 호화롭게 하고는 뇌물을 주고 받음이 성행치 않았다 할 수 있느냐. 나는 이런 궁궐 같은 집에는 조금도 앉아 있기가 송구스럽구나.” 그리고는 음식도 들지 않고 즉시 물러가니, 아들은 낯빛이 변하였고 자리에 참석하였던 손님들 역시 무안해졌다. 황희 본인은 비가 새는 초가에서 살면서, 있는 것이라고는 누덕 누덕 기운 이불과 서책이 전부였다고 하니, 아들의 호사가 불편했을 것이다. 과연 최장수 재상을 지냈으면서 이처럼 청빈하였으니 청백리가 됨은 당연할 것이다.
경기도 파주시에는 황희가 지었다는 반구정(伴鷗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반구정은 황희 사후 폐허가 되었다가 17세기에 후손에 의해서 중수되었다. 후손들은 반구정을 중수한 뒤 미수 허목에게 기문을 요청하였는데, 그가 지은 기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물러나 강호(江湖)에서 여생을 보낼 적에는 자연스럽게 갈매기와 같이 세상을 잊고 높은 벼슬을 뜬 구름처럼 여겼으니, 대장부의 일로 그 탁월함이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겠다. 갈매기와 여생을 보내려고 만든 정자라는 뜻이다.
조선조 5백년을 통틀어 으뜸가는 명재상이라 일컬음을 받는 황희는 재상으로 무려 20여 년 이상을 있으면서, 태종으로부터 세종∙ 문종에 이르는 3대를 내리 섬겼다. 나이 아흔줄에 들어서서도 오히려 기운이 정정하여 국사를 두루 보살폈다. 이처럼 당대에 부러울 것이 없던 황희가 굳이 왜 말년에 미물인 갈매기와 여생을 보내려고 했을까?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권력의 무상함을 느낀 것일까? 정작 반구정을 처음 세운 황희의 대답이 없어 알 수는 없다.
조선의 많은 지식인들은 이른바 ‘자분(自分)’을 생활의 중요 덕목으로 생각하였다. 자기 분수에 맞게 생활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황희 역시 이를 실천하기 위해 반구정을 지은 것은 아닐까? 오늘날 자본의 논리에 빠져 허우적되면서도 끊임없이 욕심을 채워나가는 탐욕스런 현대인들에게 잠시 반구정에 들러 그 의미를 되새겨 보기를 기대한다.
소신과 원칙을 견지하는 자세는 일상적인 공무의 집행과정에서도 많은 일화로 전해저오고있다. 황희가 정승이 되었을 때 마침 우리에게 잘 알려진 김종서가 공조판서가 되었다. 하루는 공적인 모임에서 황희와 김종서가 대면하였을 때, 김종서가 자신이 수장으로 있던 공조로 하여금 약간의 술과 음식을 갖추어 들이도록 하였다. 그러자 황희가 노하여, “국가에서 예빈시(禮賓寺)를 정부의 곁에 설치한 것은 삼공(三公)을 접대하기 위해서이다. 만일 시장하다면 의당 예빈시로 하여금 장만해 오게 할 것이지 어찌 사사로이 제공한단 말인가.”라고 말하며 김종서를 엄하게 꾸짖었다. 한때는 ‘황금대사헌(黃金大司憲)’이라고 불릴 정도로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산 적이 있었다.
1428년(세종 10년) 6월 25일 황희는 박용의 아내로부터 말을 뇌물로 받은 일로 인해 사직을 청하였다. 당시 이 기사에 대해 사관(史官)의 평가가 있었는데, 사관은 박용의 아내 관련 일 말고도 아래와 같은 내용을 추가로 적고 있다. 김익정(金益精)과 함께 잇달아 대사헌이 되어서 둘 다 중 설우(雪牛)의 금을 받았으므로, 당시의 사람들이 ‘황금(黃金) 대사헌’이라고 하였다. 또 난신 박포(朴苞)의 아내가 죽산현(竹山縣)에 살면서 자기의 종과 간통하는 것을 우두머리 종이 알게 되니, 박포의 아내가 그 우두머리 종을 죽여 연못 속에 집어 넣었는데 여러 날 만에 시체가 나오니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현관(縣官)이 시체를 검안하고 이를 추문하니, 박포의 아내는 정상이 드러날 것을 두려워하여 도망하여 서울에 들어와 황희의 집 마당 북쪽 토굴 속에 숨어 여러 해 동안 살았는데, 황희가 이때 간통하였으며, 포의 아내가 일이 무사히 된 것을 알고 돌아갔다. 이 밖에도 이 날의 기사에는 황희가 장인 양진(楊震)에게서 노비를 물려받은 것이 단지 3명뿐이었고,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것도 많지 않았는데, 집안에서 부리는 자와 농막(農幕)에 흩어져 사는 자가 많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청백리로 알려진 황희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대목이다. 시문에도 뛰어나 몇 수의 시조 작품도 전해진다. 1452년(문종 2)년에 세종묘(世宗廟)에 배향되었다. 파주의 방촌영당(厖村影堂)에 영정이 봉안되어 있고, 상주(尙州)의 옥동서원(玉洞書院) 장수의 창계서원(滄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방촌집(厖村集)》이 있다.
(참조)"경제육전, 병진정사록, 청백리상, 조선의 확립기, 반구정, 삼척 소공대비, 창계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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