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13일 금요일

낙산사, 홍련암(洛山寺 紅蓮庵)

낙산사, 홍련암(洛山寺 紅蓮庵)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신흥사의 말사인 낙산사의 부속암자이다. 676년(문무왕 16)의상()이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뒤 창건하였고, 전단향()으로 관음보살상을 만들어 모셨다.
1619년(광해군 11) 중건하였고, 1752년(영조 28)진린()이 중수하였으며, 1797년혜민()이 중건하였다.
1868년(고종 5) 장마로 말미암아 무너진 것을 이듬해에 의연()이 중건하였고, 1911년 흥운()과 청호()가 중수하였다.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소속인 낙산사의 부속암자이다. 낙산사 의상대() 북쪽 300m 지점에 있다.
672년(문무왕 12)의상()이 관음보살의 진신()을 친견하고 대나무가 솟은 곳에 지은 불전(殿)이라 한다. 또, 일설에는 의상이 이곳을 참배할 때 푸른 새를 만났는데 새가 석굴 속으로 자취를 감추자 이상히 여겨 굴 앞에서 밤낮으로 7일 동안 기도를 하였다. 7일 후 바다 위에 홍련()이 솟아 그 가운데 관음보살이 현신하였으므로 이 암자 이름을 홍련암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바닷가 암석굴 위에 자리 잡은 이 암자의 법당 마루 밑을 통하여 출렁이는 바닷물을 볼 수 있도록 지어졌다. 
의상에게 여의주()를 바친 용이 불법을 들을 수 있도록 배려하여 이와 같이 지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구조를 가졌던 감은사지()의 법당은 죽어서 용이 된 문무왕이 출입할 수 있도록 역시 법당 밑에 바닷물이 통하도록 하였다. 
신라 및 고려시대의 중창의 역사는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임진왜란 이후인 1752년(영조 28)덕린()이 중수하였고, 1797년(정조 21)혜근()이 중수하였으며, 1802년(순조 2)청호()·흥운()이 중수하였다. 1975년원철()이 중창하여 옛 모습을 복원하였다. 현재 홍련암은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6호로 지정되어 있고 당우로는 관음전과 요사채가 있다. 사리탑은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5호로 지정되어 있다. 근처의 해안에는 보기 드문 석간수가 있는데, 이 샘은 원효()가 양양의 영혈사() 샘물을 석장()에 담아 끌어왔다는 설화가 전한다. 의상대와 홍련암은 소나무숲이 우거진 해안 절벽에 자리잡고 있어 아름다운 주변 풍광과 일출 경관이 멋진 곳으로 이름나 있다. 또한 해안에는 촛대바위가 발달하여 아름다운 경관을 보여주고 있다.
"양양 낙산사 의상대와 홍련암"
송강 정철(1536~1593)의 <관동별곡>에 소개된 관동팔경 가운데 하나로 과거부터 수많은 시인묵객들에 의해 수려한 풍광으로 사랑받아온 명승지이다. 특히 동해 일출경이 유명하여 매일 아침 일출을 보러온 관광객들로 인해 북적이는 독특한 아침풍경을 가진 산사이기도 하다. 671년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을 만나기 위해 바닷가 동굴 관음굴로 들어가 기도하던 중 붉은 연꽃 속에 나타난 관음보살을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관음굴 위에 홍련암을 만들었고 천년고찰인 낙산사의 모태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홍련암은 의상대사가 좌선을 수행하던 해안절벽위에 세워진 또 다른 명승지 의상대와 함께 국가지정 명승지 제27호로 지정되어 보호 및 관리 되고 있다. 의상대와 홍련암은 소나무숲이 우거진 해안 절벽에 자리잡고 있어 아름다운 주변 풍광과 일출 경관이 멋진 곳으로 이름나 있다. 또한 해안에는 촛대바위가 발달하여 아름다운 경관을 보여주고 있다. 낙산사는 관동팔경 가운데 하나로 손꼽힐 만큼 풍광이 아름다운 곳으로, 《동문선》 등의 문헌에 많은 기록이 전하며, 예로부터 시인묵객의 발길이 잦았던 역사적 가치가 있는 명승지이다. 2007년 12월 7일 명승 제27호로 지정되었다. 낙산사에서 소유하고 양양군이 관리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소속인 낙산사의 부속암자이다. 낙산사 의상대() 북쪽 300m 지점에 있다. 홍련암은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6호로 지정되어 있고 당우로는 관음전과 요사채가 있다.
사리탑은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5호로 지정되어 있다. 근처의 해안에는 보기 드문 석간수가 있는데, 이 샘은 원효()가 양양의 영혈사() 샘물을 석장()에 담아 끌어왔다는 설화가 전한다.
낙산사는 관동팔경 가운데 하나로 손꼽힐 만큼 풍광이 아름다운 곳으로, 《동문선》 등의 문헌에 많은 기록이 전하며, 예로부터 시인묵객의 발길이 잦았던 역사적 가치가 있는 명승지이다. 2007년 12월 7일 명승 제27호로 지정되었다. 낙산사에서 소유하고 양양군이 관리한다
낙산사는 671년(신라 문무왕 11) 신라시대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유서깊은 절이다. 의상대는 낙산사를 창건할 당시 의상이 좌선하였다는 자리에 세운 정자이다. 홍련암은 의상대사가 붉은 연꽃에서 나온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세운 암자로, 관음굴이라고도 한다.
한국의 3대 관음도량 중 하나인 낙산사는 해변에 자리잡은 특이한 구조를 갖춘 절이다. 낙산사 옆쪽에 있는 이 불전은 신라 문무왕 16년(676) 의상대사가 세웠고 광해군 12년(1619)에 고쳐 세운 기록이 남아 있으나 지금 있는 건물은 고종 6년(1869)에 고쳐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의상대사가 붉은 연꽃 위에 나타난 관음을 직접 보고, 대나무가 솟은 자리에 홍련암을 지었다는 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건물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건물이 절벽 위에 자리잡고 있어 문을 옆면에 달아 앞면으로 사용하고 있다. 법당 안에는 조그만 관음보살좌상을 모시고 있고 ‘보타굴’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에 있는 불전이다. 1984년 6월 2일 강원도의 문화재자료 제36호로 지정되었다. 
낙산사 해수관음공중사리탑 비명에 1619년(광해군 12)에 중건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의 법당은 1869년(고종 6)에 중건된 것이다. 목조 기와 건물로, 전설에서 새가 들어갔다는 석굴 위에 건립되어 있다.
‘보타굴()’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법당 안에는 높이 52.5㎝의 조그만 관음보살좌상()을 모셔놓고 있다. 672년(문무왕 12)의상()이 관음보살의 진신()을 친견하고 대나무가 솟은 곳에 지은 불전(殿)이라 한다. 또, 일설에는 의상이 이곳을 참배할 때 푸른 새를 만났는데 새가 석굴 속으로 자취를 감추자 이상히 여겨 굴 앞에서 밤낮으로 7일 동안 기도를 하였다. 7일 후 바다 위에 홍련()이 솟아 그 가운데 관음보살이 현신하였으므로 이 암자 이름을 홍련암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바닷가 암석굴 위에 자리 잡은 이 암자의 법당 마루 밑을 통하여 출렁이는 바닷물을 볼 수 있도록 지어졌다. 의상에게 여의주()를 바친 용이 불법을 들을 수 있도록 배려하여 이와 같이 지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구조를 가졌던 감은사지()의 법당은 죽어서 용이 된 문무왕이 출입할 수 있도록 역시 법당 밑에 바닷물이 통하도록 하였다. 신라 및 고려시대의 중창의 역사는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임진왜란 이후인 1752년(영조 28)덕린()이 중수하였고, 1797년(정조 21)혜근()이 중수하였으며, 1802년(순조 2)청호()·흥운()이 중수하였다.
1975년원철()이 중창하여 옛 모습을 복원하였다. 그밖에 제작연대가 불기() 2984년 유() 2월 23일로 되어 있는 탱화() 등 6점이 있다. 이들은 모두 근대에 제작된 것들이다. 법당 입구에는 최근에 조성한 석등()이 좌우로 벌려서 2기가 있고, 홍련암 입구에 요사() 1동이 있다.
그 유래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신라 문무왕 12년 의상이 입산을 하는 도중에 돌다리 위에서 색깔이 파란 이상한 새를 보고 이를 쫓아갔다. 그러자 새는 석굴 속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고 보이지 않았다. 의상은 더욱 이상하게 여기고 석굴 앞 바다 가운데 있는 바위 위에 나체로 정좌하여 지성으로 기도를 드렸다. 그렇게 7일 7야를 보내자 깊은 바다 속에서 홍련(붉은 빛깔의 연꽃)이 솟아오르고 그 속에서 관음보살이 나타났다. 의상이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소원을 기원하니 만사가 뜻대로 성취되어 무상대도를 얻었으므로 이곳에 홍련암이라는 이름의 암자를 지었다고 한다.
676년(신라 문무왕 16) 한국 화엄종의 개조인 의상()이 창건하였다고 하는 법당 건물이다. 관음굴()이라고도 한다.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전진리 낙산에 있는 절로서 낙산사의 부속 암자이다.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6호. 672년(문무왕 12) 의상이 관음보살의 진신을 친견하고 대나무가 솟은 곳에 지은 불전이라 한다.근세에 편집된 사적기로는 기문()이 편집한 「낙산사관음굴중창기()」가 있는데, 창건 이후 관음굴은 해안도량()으로 널리 알려져서 많은 참배객들이 찾았으며, 해조음()을 통하여 구고구난()하는 관세음보살의 대원()이 토로되었다는 등 많은 영험담이 전한다.
"양양 낙산사 의상대와 홍련암"
송강 정철(1536~1593)의 <관동별곡>에 소개된 관동팔경 가운데 하나로 과거부터 수많은 시인묵객들에 의해 수려한 풍광으로 사랑받아온 명승지이다. 특히 동해 일출경이 유명하여 매일 아침 일출을 보러온 관광객들로 인해 북적이는 독특한 아침풍경을 가진 산사이기도 하다. 671년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을 만나기 위해 바닷가 동굴 관음굴로 들어가 기도하던 중 붉은 연꽃 속에 나타난 관음보살을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관음굴 위에 홍련암을 만들었고 천년고찰인 낙산사의 모태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홍련암은 의상대사가 좌선을 수행하던 해안절벽위에 세워진 또 다른 명승지 의상대와 함께 국가지정 명승지 제27호로 지정되어 보호 및 관리 되고 있다. 낙산사 해수관음공중사리탑 비명에 1619년(광해군 12)에 중건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의 법당은 1869년(고종 6)에 중건된 것이다. 목조 기와 건물로, 전설에서 새가 들어갔다는 석굴 위에 건립되어 있다. ‘보타굴()’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법당 안에는 높이 52.5㎝의 조그만 관음보살좌상()을 모셔놓고 있다. 그밖에 제작연대가 불기() 2984년 유() 2월 23일로 되어 있는 탱화() 등 6점이 있다. 이들은 모두 근대에 제작된 것들이다. 법당 입구에는 최근에 조성한 석등()이 좌우로 벌려서 2기가 있고, 홍련암 입구에 요사() 1동이 있다. 
신라 문무왕 12년 의상이 입산을 하는 도중에 돌다리 위에서 색깔이 파란 이상한 새를 보고 이를 쫓아갔다. 그러자 새는 석굴 속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고 보이지 않았다. 의상은 더욱 이상하게 여기고 석굴 앞 바다 가운데 있는 바위 위에 나체로 정좌하여 지성으로 기도를 드렸다. 그렇게 7일 7야를 보내자 깊은 바다 속에서 홍련(붉은 빛깔의 연꽃)이 솟아오르고 그 속에서 관음보살이 나타났다. 의상이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소원을 기원하니 만사가 뜻대로 성취되어 무상대도를 얻었으므로 이곳에 홍련암이라는 이름의 암자를 지었다고 한다. 1984년 6월 2일 강원도문화재자료 제36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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