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포는 낙동강 하류에 자리 잡은 포구로 내륙과 해안에서 생산된 물산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이렇게 모인 물산이 낙동강을 따라 멀리 안동까지 오갔다.
구포는 이런 지리적인 이점을 잘 살려 크게 번영했던 곳이었으며, 감동창이라는 조창이 있어 세금으로 낼 곡물이 집산되는 곳이기도 했다. 구포의 번영은 수로 교통에서 육로 교통으로 바뀌는 20세기에도 변하지 않았다. 그것은 1905년 개통된 경부선이 구포역을 지나면서 여전히 교통의 중심지로 기능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구포는 해방되기 전까지 영남에서 가장 번성했던 포구 중 하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부산이 본격적으로 개발되면서 구포는 주변으로 밀려났고, 구포시장도 시대적인 흐름에 따라 성쇠를 함께했다.
오늘날 구포시장은 상설시장과 정기시장이 조화를 이루며 여전히 큰 시장으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특히 구포의 정기시장은 장날이면 3~5만 명이 찾을 정도로 성황을 이루고 있고, 상설시장 역시 750여 개의 점포를 통해 고객을 맞고 있다. 2011년에는 문화관광형 시장으로 선정되었고 ‘정(情)이 있는 구포시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구포는 오랫동안 동래에 속한 곳이었으나, 부산의 중심이 동래에서 부산으로 옮겨가면서 북구에 편입되었다. 과거 구포는 낙동강 하류에 자리 잡은 나루터였으며, 조선시대 좌이면이었던 구포는 오늘날 구포동이 되었다.
구포(龜浦)는 인근에 있는 범방산 줄기가 거북과 비슷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구포의 어원에 대해 두 물이 만나는 곳 또는 갈라지는 곳에 자리한 큰 나루에서 기원했다는 주장도 있다.이런 탓에 구포에는 유난히 거북이 들어간 이름이 많다. 구포시장은 지역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낙동강 칠백리 배다리 놓아놓고, 물결 따라 흐르는 행렬진 돛단배에,봄바람 살랑살랑 휘날리는 옷자락,구포장 선창가엔 갈매기만 춤추네, 이 노래는 〈구포선창노래〉의 노랫말이다. 낙동강을 따라 내려온 배가 구포나루터에 도착하면 배에 실려 있는 나락을 주변에 있는 정미소로 나르고, 한편으로 정미소에서 나온 쌀을 일본으로 가는 배에 싣던 구한말의 노동자들이 불렀다고 한다. 이 노랫말에는 과거 구포나루터의 모습이 잘 담겨 있다.
구포는 강원도 태백시에서 발원해 부산으로 흘러드는 낙동강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낙동강은 영남 지방 전역을 두루 거치며 흐른다. 조선시대에는 많은 배들이 낙동강의 중류인 상주와 안동에서 구포를 오갔다. 흔히 말하는 낙동강 700리길은 바로 이 물길이다. 육로보다 수로를 통해 더 많은 물자가 운송되었던 조선시대에 구포는 유통의 중요 거점이었다. 게다가 구포는 강에서 바다로 흘러가는 끝에 위치해 해운의 길목이기도 했다. 따라서 구포는 영남 지방에서 생산된 물자는 물론 내륙으로 갈 해산물 같은 물자가 모이는 집산지였다. 이런 이유로 구포나루터에는 노랫말처럼 항상 돛단배들이 행렬을 지어 드나들었다.
낙동강을 통해 내륙으로 보내는 물산은 우선 육로를 통해 구포로 모였다. 그러면 그 화물은 배에 실어 삼량진이나 왜관 등지로 보내졌다. 이와 반대로 안동에서 내려오는 배들은 낙동강 유역 여러 곳에서 모인 벼를 싣고 구포로 내려왔다. 그 벼들은 곧바로 정미소로 보내졌다. 곡물 생산이 적었던 구포에 정미소가 많고 정미업이 발달했던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
이중환이 현지답사를 통해 편찬한 《택리지》(1751)에 따르면 18세기 중반까지 낙동강 유역에서 가장 유명한 포구는 김해의 칠성포였다. 그러나 18세기 후반부터 낙동강 하류의 수로가 홍수로 자주 침수되면서 오늘날처럼 구포-사상-하단으로 연결되는 흐름이 낙동강의 본류가 되었다. 이 때문에 김해의 칠성포는 뒤로 밀려나고 하단과 연결되어 해상 교통에서 우위에 있던 구포가 낙동강 하류를 대표하는 중심 나루터로 발전하게 된다. 즉 18세기 후반부터 구포나루는 위세를 떨치기 시작했다.
구포가 크게 발전하게 된 원인 중 하나는 조창이었다. 조선시대에 조창이 있던 곳 대부분이 수로 교통의 요충지였음을 감안하면 구포 인근에 조창이 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구포와 가까운 조창은 감동창이었다.
감동창은 조선시대 가장 남쪽에 있는 조창이라고 해서 남창이라고도 불렸으며, 그 후 감동창이 있던 마을은 남창리가 되었다. 감동창이 세워진 것은 조선 중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확실한 기록이 나오는 것은 1682년 숙종 연간이다. 감동창은 정부에 내야 하는 전세(田稅)와 대동미를 저장했다가 한양으로 운반하는 기능을 하던 조창이었다. 따라서 경상도 각지에서 옮겨진 물자를 보관하고, 거기서 부산좌수영 등에 필요한 군수미와 포목 등을 지급하기도 했다. 감동창이 있던 곳은 현재 부산지하철 3호선 구포역 인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조창이 있어 물자가 모여들고, 수로 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오가는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객줏집과 주막이 성행했다. 자연스럽게 교역의 중심인 시장 역시 크게 발달했다. 구포에 개설되었던 구포장은 17세기인 숙종 연간에 이미 기록되어 있었다. 또한 18세기의 기록인 《동국문헌비고》(1770)에도 동래 읍내장(2, 7일)을 비롯해 좌수영장(5, 10일), 부산장(4, 9일), 독지장(1, 6일)과 함께 동래에 개설되어 있다고 나온다. 구포장의 장날은 3, 8일로 당시 행정의 중심지인 동래의 상권에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구포장은 낙동강에서 구포 안쪽으로 들어오는 공터와 골목에서 장이 섰다.
19세기의 기록을 보면 구포장의 장날이 되면 100여 척의 배와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구포장은 20세기에 들어서도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시장과 관련된 20세기의 특징 중 하나는 교통의 변화였다. 기존의 수로 중심에서 철도와 도로의 부설로 인해 육로 중심으로 바뀐 것이다. 구포장의 경우 1905년 경부선의 개통으로 구포역이 생기면서 과거의 번영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외에도 낙동강 건너편에 있는 김해와 연결하는 구포교가 1932년에 건립되는 등 구포는 여전히 교통의 요충지에 있었다. 따라서 시장 또한 변함없이 번창했다.
구포장이 가장 번영했던 때는 〈구포선창노래〉가 불리던 구한말에서 해방까지였다. 이때 구포장 일대는 영남 최고의 시장으로 우뚝 섰다. 부산의 일본영사관이 1904년에 편찬한 《경상도 사정(事情)》이라는 책자에 “부산에서 내륙으로 수송할 화물이 이곳의 배에 실려 각지로 보내진다. 인구가 매년 증가해서 부산항 개항 때 한산한 어촌이었던 이곳에 200호, 1,500명이 거주하며 3, 8일 장날이 되면 상가로 처마를 이을 정도로 북적인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때 구포장은 육로와 수로의 요충지라는 이점을 활용해 화물의 집산과 교역지로 발달했다. 또한 기존의 농산물과 해산물에 더해 포목을 비롯해 석유, 소금, 명태 등의 상품을 취급했다. 또한 구포장에는 많은 객주들이 몰려들었고, 이런 배경 속에서 1908년에 구포주식회사라는 금융기관이 있었다.
객주와 인근 지주 등 70여 명이 자본금 2만 5,000원으로 세운 것이다. 이 회사는 우리나라 금융기관의 기원이며, 이후 1912년 6월 일본 자본이 아닌 민족 자본으로 세운 구포은행이 설립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 구포장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시장의 특성을 활용해 1919년 3월 29일 장터에서 대대적으로 만세운동을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이날 정오에 농민과 상인, 노동자로 구성된 20~30대 청년 1,200여 명이 태극기와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현수막을 들고 만세를 불렀다. 만세운동을 주동한 주도자가 붙잡혔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더욱 거세게 저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9년부터 구포시장에서는 그때의 정신을 되새기기 위해 매년 3월에 구포장터 3․1운동 재현 행사가 시행된다. 이렇게 저항이 심했던 것은 낙동강 하류의 상업 교역 중심지였기 때문에 일제가 행한 수탈의 집중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인근의 김해평야 등지와 경북 내륙에서 실려 온 많은 벼가 구포의 정미소들에서 가공되어 일본으로 실려 갔는데, 그에 대한 반감이 심했던 것이다.
정기시장이었던 구포시장이 상설시장으로 변한 것은 1932년의 일이었다. 현재 정기시장이 열리고 있는 구포시장의 장터는 1932년 당시 구포의 면장이었던 장익원 씨가 습지였던 땅을 매립해서 내놓아 마련된 곳이다. 새 장터에는 목조건물과 노점이 들어섬으로써 상설시장이 되었고, 3, 8일 정기시장과 함께 열리고 있다.새 장터는 지금의 덕천역 건너편에서 개설되었다. 그러자 옛 장터의 상권이 몰락했고, 평당 20원 하던 땅값이 1원 아래로 떨어졌다. 이와 반대로 새 장터는 수십 배나 땅값이 뛰었다.새 장터에 모여든 상인들은 시장의 활성화를 위해 야시장을 개장했다.
1934년 경부선 선로 주변에서 장터까지 70여 개의 등을 켜고, 야시장을 개설해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이렇게 구포시장은 장터를 옮기고도 번영을 구가할수 있었다고 함.
구포시장 . 이웃시장과비교표. 1930년대 말 구포시장과 주변의 시장
시장 이름 | 위치 | 장날 | 연 거래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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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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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군 구포면 구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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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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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6,65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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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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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군 사하면 하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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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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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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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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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군 덕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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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0일
|
75,845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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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산장
|
김해군 녹산면 송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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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9일
|
35,45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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