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9일 월요일

허준.

허준" 
1539(중종 34)∼1615(광해군 7). 조선 중기의 의관. 자는 청원(), 호는 구암(), 본관은 양천()이다. 30여 년 동안 왕실병원인 내의원의 어의로 활약하는 한편, 『동의보감()』을 비롯한 8종의 의학서적을 집필하여 조선을 대표하는 의학자로 우뚝 섰다. 
허준(, 1539-1615)은 신묘한 의술로 박애를 실천한 ‘의성()’이 되고, 신분을 극복하고 최고의 자리에 오른 신화가 되었다. 그러나 실제 역사의 기록에서 그의 이름을 찾기란 매우 어려운 게 사실이다.그의 일생을 추적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우리가 허준에 대해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대부분은 소설과 드라마의 상상력일 뿐이다. 임진왜란으로 큰 혼란을 겪던 조정이 강화회담의 진행으로 잠시나마 한숨을 돌리고 있던 1596년 선조는 허준을 불러 명했다. “요즘 중국의 방서를 보니 모두 자잘한 것을 가려 모은 것으로 참고하기에 부족함이 있다. 너는 마땅히 온갖 처방을 덜고 모아 하나의 책으로 만들어라.”조선 중기의 의학자. 선조와 광해군의 어의를 지냈으며 1610년(광해군 2)에 조선 한방의학의 발전에 기여한 《동의보감》을 완성했다. 본관은 양천()이며 자는 청원(), 호는 구암()으로 경상도우수사(使)를 지낸 허곤(이 할아버지이며, 아버지는 무관으로 용천부사를 역임한 허론이다. 허론의 정실은 일직 손씨였으며 허준의 생모였던 영광 김씨는 소실이었다.  허론의 정실은 일직 손씨였으며 허준의 생모였던 영광 김씨는 소실이었다. 허준의 이복 형 허옥()은 임금의 신변보호와 궁궐수비를 책임지는 내금위에 있었고, 동생 허징()은 서자이면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교검, 교리 등 내직을 지냈고 선조 때 영의정이었던 노수신()의 사위가 되었다. 허준은 경기도 양천현 파릉리(지금의 서울시 강서구 등촌2동 능안마을)에서 태어났다. 비록 서자였지만 차별받지 않고 명문가 출신답게 좋은 교육을 받았으며 어려서부터 경전과 사서 등에 밝았다. 허준은 양반은 아니었어요. 아버지는 양반이었지만 어머니가 평민 출신이라 양반이 아닌 중인에 속할 수밖에 없었지요. 조선 시대에 중인은 과거 시험 중 관리가 될 수 있는 문과에 응시할 수 없었어요. 그래도 지금으로 치면 전문직 직업을 가질 수 있었고, 허준은 여러 전문직 중 의원, 지금으로 치면 의사를 택합니다. 과거 시험 중 잡과를 치러 의원이 된 허준은 열심히 공부하고 그 결과 능력을 인정받기에 이르렀어요. 허준이 형제들과 달리 어떤 계기로 의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유희춘()의 《미암일기()》에 의하면 1569년(선조 2) 이조판서 홍담()에게 내의원에 천거해 주도록 부탁하였고, 1573년(선조 6)에 정3품 내의원정에 올랐다는 기록으로 보아 1569년 이후 내의원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양천 허씨 세보》에는 1574년(선조 7) 의과에 급제하였다고 알려져 있어 두 가지 설 모두 사실을 확인하기 어렵다. 잡과를 치르고 합격한 허준은 궁 안에서 의학과 약에 관한 업무를 보는 내의원에서 일하게 되었어며, 그러던 중 세자인 신성군이 당시로서는 치료하기 힘든 병인 천연두를 앓고 있을 때 허준이 신성군을 치료하여 낫게 한 계기로 선조는 허준의 의술이 매우 뛰어나다고 판단하게 되었어며. 이후 허준은 많은 왕실 사람들을 거의 도맡아 치료하다시피 하며 요줌으로하면 주치의 가됩니다. 임진왜란은 의사인 허준에게 엄청난 아픔을 주었다. 아무 죄도 없는 백성들이 적의 공격을 당해 피를 흘리며 쓰려졌고, 사방에 널린 시체들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썩으면서 전염병이 발생하게 된 거예요. 허준은 상처와 전염병 속에서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고통 속에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의사로서 도움을 주고 싶었어요. 1575년 어의 안광익()과 함께 선조를 진료하기 시작했으며, 1578년 내의원첨정이 되었다. 1587년 10월에는 태의 양예수() 등과 함께 선조를 진료하여 건강이 좋아지자 호피()를 상으로 받았다. 파격적인 승진으로 내의원에 들어왔으나 한동안은 그다지 주목 받지 못했던 듯하다. 1575년 어의를 보조하여 왕의 맥을 진찰했고, 1581년 선조의 명으로 [찬도방론맥결집성]이라는 진맥학 책의 오류를 바로잡아 책으로 편찬하는 작업을 했으며, 1587년 다른 여러 어의와 함께 왕의 진료에 참가하여 병의 쾌유에 대한 상으로 사슴 가죽을 받았다는 등 몇 년에 한 번씩 단편적인 기록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왕명으로 진맥학 책을 전술했다는 기록을 보면 학술적으로 인정은 받았던 듯하다. 그러던 중 1590년 광해군의 두창을 고치면서 비로소 남다른 의술을 인정받는다. 당시 왕자의 신분이었던 광해군은 다시 살아날 가망이 없어 보일 정도로 병이 깊었다. 다른 의원들이 감히 나서지 못하고 있을 때 허준이 과감히 나서 병을 고치자 선조는 정3품 당상관인 통정대부의 벼슬을 내리며 그 공을 치하했다. 서얼 출신의 기술관이었던 허준에게 당시의 신분구조상 허용되었던 벼슬은 정3품의 당하관이 최대였다. 그런데 그 한계를 뛰어넘은 것이다. 그러나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임진왜란 중 다시 한번 광해군의 병을 고치면서 동반()에 올라, 신분의 한계를 완전히 벗어던졌다. 동반이란 양반 중 하나인 문관을 뜻하는 것으로, 동반에 올랐다는 것은 곧 완전한 양반이 되었음을 의미했다. 또 임진왜란이 끝나자 선조는 자신을 끝까지 따른 문무관이 열일곱 명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힘겨웠던 피난길을 끝까지 함께한 공을 인정해 허준을 공신에 책봉하고 종1품 숭록대부 벼슬을 내렸다. 품계로만 따지면 좌찬성, 우찬성과 같은 지위에 오른 것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선조는 허준에게 정1품 보국숭록대부를 내리려 했다. 이듬해 당상관의 반열에 올랐다. 1592년 임진왜란의 발발로 선조가 의주로 피난갈 때 어의로서 선조 옆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모셨으며, 그 공으로 전쟁이 끝난 후 호종공신()이 되었다. 1596년에는 광해군의 병을 고쳐 종2품의 가의대부()가 제수되었고, 이때부터 선조의 명을 받아 양예수 등 여러 의원들과 함께 조선의 실정에 맞는 의서()인 《동의보감()》 편찬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정유재란의 발발로 의서 편찬이 어려워 보류되었다가 본격적인 편찬은 1600년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1601년 지중추부사로 승진하였고, 1604년 호성공신() 3등에 책록되었으며, 1606년 오랫동안 차도가 없던 병세가 호전되자 관직의 최고 단계인 정1품 벼슬을 내리려 한 것이다. 그러나 신분 질서를 그르치는 잘못된 조치라고 맹렬히 반대하는 사간원과 사헌부의 반대에 성사되지는 않았다. 1606년에는 양평군()에 올라 정1품인 보국숭록대부로 승진하였으나 중인 신분으로는 과도한 벼슬이라 하여 대간()들의 반대로 보류되기도 하였다. 1608년(선조 41) 유배 이후 허준은 연구에 전념할 시간을 얻게 되었고, 유배지에서 단시간에 책의 절반 이상을 집필해냈다. 허준은 양생() 사상을 중심으로 하여 중국 의학이론과 처방의 난맥상을 바로잡고, 향약 사용의 이점을 최대화하며, 최소한의 약의 분량으로 최대한의 의학적 효과를 얻으려는 데 힘썼다. 그 무렵 명대의 신의학이 적지 않게 조선에 수입되어, 조선 전기의 의학전통과 섞이는 바람에 이를 정비할 필요가 있었고, 또한 전란을 겪으며 기근과 역병이 발생해 제대로 된 의서가 시급히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새로운 의서의 편찬을 명하면서 선조는 그 책의 성격을 분명히 제시했다. 첫째, 사람의 질병이 조섭을 잘 못해 생기므로 수양을 우선으로 하고 약물치료를 다음으로 할 것. 둘째, 처방이 너무 많고 번잡하므로 요점을 추리는 데 힘쓸 것. 셋째, 국산 약 이름을 적어 백성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할 것 등이었다.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조선 사회 회복의 일환으로 획기적인 의학의 제공이라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었으며. 『동의보감』은 중국에서 수입한 의학서의 한계를 극복한 책입니다. 백성이 쉽게 병을 진단하고,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재를 써서 병을 다스릴 수 있도록 하였다.  허준은 뼈대 있는 무관의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 허론()과 양반 가문 출신인 어머니 영광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어머니의 신분이 정실()이 아니었기에, 그의 신분은 중인으로 규정되었고, 이러한 신분은 문·무백관 보다 천하다고 여겨진 의관의 길을 택하는 데 작용하였다. 그럼에도 훌륭한 가문의 배경 덕에 허준은 어려서부터 경전·역사·의학에 관한 소양을 충실히 쌓을 수 있었다. 허준이 언제, 어떻게 의학을 공부했으며, 또 의관으로 나아갔는지를 일러주는 자료는 아직 보고되지 않았다. 관직으로 볼 때, 허준의 장년 이후의 삶은 세 시기로 나뉜다. 의관 허준의 출세는 조선의 역사에서 거의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파격의 연속이었다. 이는 그의 의술 솜씨와 우직한 충성이 빚어낸 성취였다. 이와 함께 이를 질시한 양반계급의 불만도 작지 않았다. ‘양반에게 굽실거리지 않으며, 임금의 은총을 믿고 교만스럽다.’는 세평()도 존재했다. 허준은 어의로 재직하면서 내의원의 의학서적 집필을 도맡았다.『동의보감』에는 백성을 사랑하는 허준의 마음이 담겨 있어요. 우리 자연에서 구할 수 있는 약재들로 병을 치료할 수 있도록 자세히 적어 놓았거든요. 허준은 『동의보감』 외에도 여러 종류의 의학 서적을 집필하였어요. 또한 어의로만 머물지 않고 백성을 위한 의원으로도 활동하였답니다. 그가 저술한 책으로는 8종이 있으며, 크게 네 부류로 대별된다. 첫째, 종합 임상의서의 집필로, 『동의보감』(1613)이 이에 해당한다. 둘째, 일상생활에 요긴한 한글 번역이 딸린 의서로,『언해태산집요()』·『언해구급방()』·『언해두창집요()』(이상 1601) 등이 그것이다. 책은 각각 아이의 해산에 대한 의학적 지식, 구급 상황에 대한 발 빠른 대처, 소아전염병인 천연두에 대한 의학적 대응을 실었다. 최근에 연대 미상인『언해납약증치방()』이 허준의 저작으로 추정된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다. 이 책은 가정상비약인 납약을 올바로 쓰는 지침을 담고 있다. 셋째, 전염병 전문의서로, 『신찬벽온방()』·『벽역신방()』(이상 1613)의 편찬이 그것이다. 『신찬벽온방』은 열성 질환인 온역(: 오늘날의 급성전염병)에 대한 대책으로 내놓은 것이다. 『벽역신방』은 1613년 국내에서 첫 유행했던 성홍열에 대한 책이다. 넷째, 학습용 의학교재인데, 허준 최초의 저작인 『찬도방론맥결집성()』(1581)이 그것이다. 이 책은 당시 전의감()의 과거시험 교재로 쓰이고 있던 동일한 책의 오류를 바로잡은 것이다. 허준의 책 중 가장 주목할 책은『동의보감』이다. 이 책은 왕명으로 1596년(선조 29)에 시작되어 14년 후인 1610년(광해군 2)에 완성을 보아 1613년(광해 5)에 출간되었다. 애초에는 허준을 책임자로 하여 유의() 정작(), 다른 어의인 양예수(), 김응탁(), 이명원(), 정예남() 등 5인의 공동 작업으로 시작했으나 정유재란으로 중단된 상태에 있다가, 이후 어느 시점에서 허준이 단독으로 책임을 맡아 책을 완성시켰다. 첫째, 내의원 관직을 얻은 1571년부터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까지이다. 이 21년 동안 허준은 내의()로서 크게 이름을 얻기는 했지만, 최고의 지위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1590년(선조 23) 허준은 왕세자의 천연두를 치료한 공으로 당상관 정3품의 품계를 받았다. 이 품계는 『경국대전()』이 규정한 서자 출신인 허준이 받을 수 있는 최고 관직인 종3품의 한계를 깰 정도의 큰 상이었다. 둘째,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이후 선조가 승하하던 1608년(선조 41) 때까지이다. 허준이 선조의 의주 피난길에 동행하여 생사를 같이함으로써 그는 선조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었다. 1596년(선조 29) 왕세자의 난치병을 고친 공으로 중인 신분에서 벗어나 양반 중 하나인 동반()에 적을 올렸다. 1604년(선조 37)에는 임진왜란 공신 책봉이 있었는데, 허준은 호성공신() 3등에 책정되는 한편, 그는 본관인 양천()의 읍호()를 받아 양평군()이 되었다. 이와 함께 품계도 승진하여 종1품 숭록대부(祿)에 올랐다. 1606년(선조 39) 선조의 중환을 호전시킨 공으로, 선조는 그에게 조선 최고의 품계인 정1품 보국숭록대부(祿)를 주고자 했으나, 사간원·사헌부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쳐 이는 실현되지 않았다. 허준은 한국의학사, 동아시아 의학사, 세계의학사에 크게 기여했으며, 조선 의학사의 독보적인 존재로 동의(), 즉 한국의학의 전통을 세웠다. 특히, 『동의보감』은 당대 최고의 고급 의학으로서 조선 의학의 통일을 가능케 했고, 언해본 의서는 의학 대중화의 촉진제가 되었다.『동의보감』은 출간이후 중국과 일본에서 동아시아 전통의학의 핵심을 잘 잡아내어 적절한 표준을 세운 것으로 평가받았다. 이 책은 중국에서 대략 30여 차례 출간되었고, 일본에서도 두 차례 출간되었다. 허준의 면밀한 성홍열 관찰 보고는 동아시아 지역에서 최초이고, 세계적으로도 최초의 그룹에 속하는 것이다. 이로써 허준은 세계질병사 연구의 선구자 중 일인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그는 광해군 대에 주로 의서를 편찬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동의보감》의 완성이다. 1610년 완성된 이 책은 총 25권 25책으로 당시 국내 의서인 《의방유취()》《향약집성방()》《의림촬요()》를 비롯하여 중국측 의서 86종을 참고하여 편찬한 것이다. 그 내용은 내경()·외형()·잡병()·탕액()·침구() 등 5편으로 구성된 백과전서()로서 오늘날까지 애용되고 있다. 이 책은 일본과 중국에까지 전해져 중국판 서문에는 ‘천하의 보()를 천하와 함께한 것’이라 하였고, 일본판 발문()에서는 ‘보민()의 단경()이요 의가()의 비급’이라 평하고 있어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그는 또 《구급방()》을 언해한 《언해구급방()》 2권, 《창진집()》을 개정하여 언해한 《언해두창집요()》 2권, 노중례()의 《태산요록()》을 개편하여 언해한 《언해태산요집()》을 비롯하여 《벽역신방()》《신찬벽온방()》《맥결집성()》《찬도방론맥결집성()》 등의 저술이 있다. 죽은 후 보국숭록대부(祿)에 추증되었다.한국에서는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로 지정되었고, 2009년 7월 31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저서로는 동의보감, 언해태산집요, 신찬벽온방, 벽역신방, 찬도방론맥결집성, 이있다. 세계질병사의 관점에서 볼 때, 『벽역신방』도 크게 주목을 끈다. 허준은 성홍열에 대한 예리한 관찰과 합리적인 추론을 통해 이 미지()의 병이 홍역을 비롯한 유사한 질환과 구별되는 병임을 밝혔다. 그의 인생 가운데 가장 커다란 시련이었던 이 기간을 허준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업적이 되는 [동의보감] 편찬에 바쳤다. “정(), 기(), 신()을 중심으로 하는 도가의 양생학적 신체관과, 구체적인 질병의 증상과 치료법을 위주로 한 의학적 전통을 높은 수준에서 하나로 통합했다.”는 평을 받는 이 책은 이후 조선 의학사의 독보적인 존재로, 오늘날까지도 한의학도에게 널리 읽히는 명저이다. 1609년 사간원의 극심한 반대에도 광해군은 당시 일흔한 살의 허준을 내의원에 복귀시켜 자신의 병을 돌보게 했다. 한양에 돌아온 그는 마침내 완성한 [동의보감]을 광해군에게 바쳤고, 이후 역병에 관해 저술한 [신찬벽온방] [벽역신방]을 편찬했다. 1608년(선조 41)부터 그가 죽던 해인 1615년(광해 7)까지이다. 이 7년은 시련기로 선조 승하의 책임을 지고 벼슬에서 쫓겨나고 먼 곳으로 귀향을 가는 등 불운이 있었고, 귀양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권세가 없는 평범한 내의로 지내다 고요하게 삶을 마쳤다. 1608년(선조 41) 선조가 병으로 승하하자 책임 어의로서 의주로 유배되었다가 바로 풀려나 광해군의 어의로서 왕의 측근에서 총애를 받았다. 그것이 수의()인 그의 잘못이라는 탄핵을 받아 허준은 삭탈관직 되는 한편, 의주 유배형이 처해졌다. 그의 유배는 1년 8개월이 지난 1609년(광해 1)에 풀렸으며, 6년 후인 1615년(광해 7) 세상을 떴다. 사후 조정에서는 그의 공을 인정하여 정1품 보국숭록대부를 추증했다.그러다 1615년 일흔일곱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그의 죽음 뒤 정1품 보국숭록대부 작위가 추증되었다. 20세기 후반 이후 한국에서 허준은 소설과 드라마로 재조명되어 커다란 인기를 끌었다. 2009년에는 『동의보감』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세계인과 같이 나누게 되었다. 2005년 3월에는 허준박물관이 개관되어 허준과 『동의보감』을 알리는 교육과 전시행사가 있었다. 또한 서울 강서구를 중심으로 매년 ‘허준 축제’를 개최하고 있는데, 2014년 10월 제15회 행사를 진행하였다. 

도라지.

도라지,
도라지 는 초롱꽃 과의 여러해 살이풀이다. 여름에 흰색과 보라색 으로 꽃이피며 뿌리는 식용한다. 전국의 표고 1,000m 이하의 산야에 자생하는 초롱꽃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 곧은 뿌리 비대형으로써 줄기는 40 ~ 100cm까지 자라며 잎은 긴 계란형이다. 꽃대는 6~8월에 나와 꽃을 피우고, 종번식은 씨앗으로 잘되지만 보통 2년 이상 묵어야 뿌리채소로 먹을 수 있고 봄 · 가을에 뿌리를 채취하여 날것으로 먹거나 나물로 먹는다. 

도라지의 주요 성분은 사포닌이다. 열매 꼬투리채로 채종하여 잘 말려서 바수면 까맣고 작은 씨앗을 얻을 수 있고 밭에 흩어뿌린다음 자라면 속아내기를 해주고 거름을 많이 주어서 기른다. 9월 상순에 종자가 결실되며, 종자색은 검은색으로 윤이 난다. 길경, 약도라지라고도 하며, 학명은 Platycodonrandiflorum(Jacq.), 다년생 숙근 초본으로 줄기는 대부분 녹색이며 잎이 붙는 부분과 줄기의 중, 하부가 자색으로 착색되는 경우도 있다.  

흰색 또는 보라색으로 위나 옆을 향하여 피고 끝이 펴진 종 모양으로 보이고 지름 4~5cm이며 끝이 5개로 갈라진다. 꽃받침도 5개로 갈라지고 그 갈래는 바소꼴이다. 수술은 5개, 암술은 1개이고 씨방은 5실( )이며 암술머리는 5개로 갈라진다. 꽃이 피기 전에 꽃봉오리는 풍선처럼 공기가 들어 있다. 잎은 어긋나고 긴 달걀 모양으로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으며, 잎자루는 거의 없다. 잎의 끝은 날카롭고 밑 부분이 넓다. 잎 앞면은 녹색이고 뒷면은 회색빛을 띤 파란색이며 털이 없고 길이 4~7cm, 너비 1.5~4cm이다. 

잔대와 다르게 어긋나기로 자란다. 줄기는 50~120cm이며 식물체내에 연합유관을 가지고 있어 상처를 입으면 흰 유액을 분비한다우리 민족이 가장 애용하는 산나물 중 하나로 옛부터 제사에 쓰였던 삼색 나물 증의 하나인 도라지는 동아시아 원산으로 한국, 일본, 중국, 우수리지방에 분포하며 우리나라에서는 전국의 산에서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전국 어디서나 재배가 가능하므로 농가마다 소규모로 재배하고 있다. 일정한 주산지가 없으며 산간 구릉지가 많은 경북 북부, 강원도 등지에서 많이 재배되고 있다. 도라지는 다년생 초본으로 키는 40~100cm정도이다. 도라지의 뿌리는 곧고 굵으며 잎이 줄기에 붙는 부분은 자색이다. 꽃은 7~8월에 피는 하늘색 또는 백색이 있으며 꽃모양을 본따서 넓은(platys)종(codon)이라는 속명을 가지고 있다.

길경·도랏·길경채·백약·질경·산도라지라고도 한다. 산과 들에서 자란다. 뿌리는 굵고 줄기는 곧게 자라며 자르면 흰색 즙액이 나온다. 높이는 40∼100cm이다. 꽃은 7∼8월에 흰색 또는 보라색으로 위를 향하여 피고 끝이 퍼진 종 모양으로, 지름 4∼5cm이며 끝이 5개로 갈라진다. 꽃받침도 5개로 갈라지고 그 갈래는 바소꼴이다. 

수술은 5개, 암술은 1개이고 씨방은 5실()이며 암술머리는 5개로 갈라진다. 잎은 어긋나고 긴 달걀 모양 또는 넓은 바소꼴로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으며, 잎자루는 없다. 잎의 끝은 날카롭고 밑부분이 넓다. 잎 앞면은 녹색이고 뒷면은 회색빛을 띤 파란색이며 털이 없고 길이 4∼7cm, 너비 1.5∼4cm이다. 흰색 꽃이 피는 것을 백도라지(for. 
albiflorum), 꽃이 겹으로 되어 있는 것을 겹도라지(for.duplex), 흰색 꽃이 피는 겹도라지를 흰겹도라지(for leucanthum)라고 한다. 

꽃말은 영원한 사랑이다. 한국·일본·중국 등지에 분포한다. 열매는 삭과로서 달걀 모양이고 꽃받침조각이 달린 채로 익는다. 번식은 종자로 잘된다. 봄·가을에 뿌리를 채취하여 날것으로 먹거나 나물로 먹는다. 도라지의 주용 성분은 사포닌이다. 생약의 길경()은 뿌리의 껍질을 벗기거나 그대로 말린 것이며, 한방에서는 치열()·폐열·편도염·설사에 사용한다. 꽃은 파종 당해에는 7월 상순경부터, 이듬해부터는 6월 하순경부터 피기 시작하는데 줄기 끝에서부터 총상화서를 이루며 핀다. 

양성화로 수술은 5개이고 암술보다 먼저 성숙하며 1개인 암술은 끝이 5갈래로 갈라져 바깥쪽으로 말린다. 꽃부리는 백색, 청남색, 분홍색의 종모양 혹은 쟁반모양으로 끝이 5갈래로 갈라진다. 꽃 중에는 겹꽃으로 피는 것이 있는데 수술이 꽃잎으로 발달해서 겹꽃으로 피는 것과 화관()이 2중으로 되어 겹꽃으로 피는 것이 있는데 전자는 수술이 없거나 비정상인 것에 비해 후자는 정상인 수술이 있다. 잎은 어긋나거나 돌려나고 잎자루가 없으며 모양은 대개 타원형이나 난형이지만 상위부의 잎은 넓은 피침형이다. 잎의 가장자리에는 톱니모양이 있으며 표면은 녹색, 뒷면은 회록색을 띤다. 장구형의 삭과이며 성숙하면 끝이 5개로 갈라진다. 

종자는 흑갈색으로 한 꼬투리당 100~200개의 종자를 갖는데 종자는 길고 납작한 구형으로 천립중이 0.8~1g 정도 된다. 뿌리는 곧은뿌리로 비대하며 생체로 식용하고 한방에서는 말려서 약으로 쓴다. 묘를 키워서 심으면 노력이 많이 들고 잔뿌리가 많이 생기기 때문에 바로 밭에 씨를 뿌리는 것이 좋다. 묵은 종자는 발아가 잘 안되므로 지난해 받은 종자를 쓴다. 봄파종은 늦서리를 생각하여 3~5월에 씨를 뿌리는데, 싹트는 기간은 1~2주가 걸린다. 

어린 식물은 겨울동안에 얼어죽을 수 있으므로 가을 파종은 싹트지 않은 채 겨울을 넘길 수 있도록 10~11월 늦게 씨를 뿌린다. 따뜻하고 습윤한 기후를 좋아하므로 햇볕이 잘 드는 양지쪽에 적응한다. 뿌리가 잘 자랄 수 있어야 하므로 토심이 깊고 유기물함량이 많은 곳으로 물빠짐이 잘 되는 사양토 혹은 식양토가 좋다. 거친 모래나 자갈이 많은 토양이나 가무을 잘 타는 곳에서는 잔뿌리가 많아지고, 점질토에서는 뿌리뻗음이 나쁘고 수확도 불편하다. 밑거름을 고루 흩어 뿌린후 밭을 갈고 로타리하여 땅을 고르고 너비 90~120cm의 두둑을 만든다. 

비료의 피해가 없도록 7~15일 후에 6~9cm로 줄뿌림하거나 흩어 뿌림을 한다. 씨가 작기 때문에 가는 모래를 3~4배 혼합하면 고르게 뿌릴 수 있다. 아주 얇게 복토하고 씨가 흩에 달라붙게 밟아주고 볏짚을 덮고 물을 충분히 준다. 잎이 3~4매 되고 흙이 축축할 때 줄기가 끊어지지 않도록 포기사이는 4~6cm간격으로 솎음한다. 김매기는 6월 상순과 7월 상순 2회정도 하고, 웃거름은 6월 하순경 꽃대가 거의 생긴 후와 장마가 끝나는 7월 상 · 중순에 한다. 

김매기가 어려우면 파종 직후 그리고 2년차부터는 씨네마, 알라 등 김약을 규정량 뿌려준다. 장마기에 오랫동안 비가 오면 토양이 과습하고 줄기가 꺾이게 되어 병해 발생이 심하므로 물빠짐이 잘되도록 관리하고 필요하면 지주도 세워준다. 꽃필 때 꽃대를 잘라 내거나 꽃을 따버리면 뿌리발달은 좋으나 정유와 사포닌함량은 낮아지므로 그대로 두어도 무방하다. 

가을에는 길이 20~30cm의 뿌리를 수확할 수 있다. 그러나 3~4년 이상 자라야 품질 좋은 약재가 될 수 있다. 가을에 줄기가 마른 뒤부터 이듬해 봄 해동한 뒤에 수확한다. 약재로 쓸때는 상처가 생기지 않도록 캐서 물에 깨끗이 씻어 겉껍질을 대칼로 벗기거나 그대로 말려 갈무리한다. 길경(도라지 뿌리)은 사포닌이 함유되어 있으며 거담, 진해, 항균, 혈압강하 및 혈당강하 작용이 있다. 또한, 기침, 가래 둥을 없애는 효능이 있어 한방에서는 감기에 의한 기침, 목구멍이 붓고 아픈 증상에 처방하며, 가슴이 그득하고 옆구리가 아픈 증세, 이질에 의한 복통의 치료에 이용된다. 

도라지는 약용, 식용, 관상용으로 이용되고 있다. 일본, 중국, 한국에서는 말린 뿌리를 약용으로 쓰고 있으며, 중국에서는 어린순을, 한국에서는 생뿌리를 식용으로 쓰고 있다. 18세기경 유럽으로 전해져 원예용으로 개량되어 일본과 유럽 등지에는 다수의 품종이 보급되어 관상용으로 재배되고 있다. 

도라지 뿌리에는 플라티코디제닌, 폴리갈라식 산(폴리갈릭 산)등의 사포닌과 글루코스가 함유되어 있으며 폴리코제닉산 A 등의 테르펜계 물질, 이외에도 이눌린, 파이토스테롤 등을 함유하고 있으며, 꽃에는 플라티코닌이 들어있다. 식용으로 쓸 때는 반드시 물에 우려내어 독성을 제거하여 주어야 한다. 도라지의 뿌리에는 다량의 식이섬유와 미네랄을 함유하고 있으므로 아주 좋은 근채의 하나이며 구황작물로 다루어지기도 한다. 

국산앤 외산?: 가늘고 짧다.(대부분 2~3년근 수확), 국내산 은 잔뿌리가 비교적 많이 붙어 있고 원뿌리도 2~3개로 갈라진 것이 많다. 껍질에 흙이 비교적 많이 묻어있다. 수확한지 얼마되지 않아 신선하다. - 길이가 짧다. 동그랗게 말리는 성질이 약하다. 단단한 섬유질이 적어 깨물어 보면 부드러운 느낌이며 쓴맛이 거의 없다. 껍질이 잘 벗겨지지 않아 일부 남아있다. 흰색을 띤다. 독특한 향기가 강하고 변질된 것이 거의 없다. 

중국산. 굵고 길다.(대부분 3~4년근 수확), 잔뿌리가 거의 없고 원뿌리도 1~2개이며 매끈하다. 껍질에 흙이 거의 묻어 있지 않거나 물로 씻어 깨끗하다. 수확한지 오래되어 변질된 것이 있으며 신선하지 않다. 길이가 길다. - 동그랗게 말리는 성질이 강하다. - 단단한 섬유질이 많아 깨물어 보면 질긴 느낌이며 쓴맛이 강하다. 껍질이 잘 벗겨져 깨끗하다. - 약간 노란색을 띤다. 소독약 냄새가 나며 변질된 것이 있다. 볶아 먹고, 무쳐 먹는 도라지의 쓴맛이 싫으시다면, 물에 충분히 담갔다 요리해보세요. 기관지에 좋은 도라지를 맛있게 먹을 수 있답니다. 

"구입요령 : 잔뿌리가 비교적 많고 원뿌리로 갈라진 것을 고른다. 
유사재료 : 수입산 도라지 (국산 도라지에 비해 잔뿌리가 거의 없고 원뿌리도 별로 갈라져 있지 않다.) 
보관온도 : 4~5℃, 
보관일 : 10일, 
보관법 : 껍질을 벗기지 않은 채 신문지에 싸서 서늘하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보관한다. 
손질법 : 도라지의 지저분한 뿌리를 떼내고 칼로 긁어서 껍질을 벗긴 뒤 물에 깨끗이 헹구어 낸다. 껍질 벗긴 도라지는 잘게 찢어서 소금을 뿌리고 주물러 쓴맛을 뺀 뒤 물에 담가 놓는다. 
산지특성 및 기타정보 : 중국, 한국, 일본 등이 원산지로 알려져 있으며 양지바른 곳에서 잘 자라는 다년생초이다. 
섭취방법 : 나물, 전, 정과 등으로 이용하며 한약재로 사용하기도 한다. 
궁합음식정보 : 꿀 (도라지에 부족한 칼로리를 꿀이 보충해 주고 쓴맛을 줄여줄 수 있다.) 
다이어트 : 섬유소질이 많고 비타민과 무기질이 풍부해 다이어트 시 섭취하면 좋다. 
효능 : 가래 삭힘, 혈당 강하, 콜레스테롤 저하 (도라지의 사포닌 성분이 가래를 삭히고 혈당 강하 작용을 하며, 콜레스테롤을 낮춘다.) 사포닌은 식물계에 널리 분포하는 트리텔펜 및 스테로이드계의 배당체의 총칭이다. 사포닌이라는 것은 라틴어의 Sapo(비누)에서 유래되어, 물과 진탕하면 지속성의 거품을 내는 천연계면활성물질이다. 

동양에서는 생약으로서 예로부터 제염, 진핵, 소염제로서 상용되어 왔다. 트리텔페노이드계의 사포닌인 연명피는 환자목의 과육으로  각지의 산림 속에서 자생하고 생약보다 세안료로서 이용되어 왔다. 이 사포닌은 환자목 추출물로서 에 게재되어 있다. 강한 대전방지력과 항염증작용이 있고, 피부와 모발에 대한 자극완화성, 거품질과 모발의 윤활성 개량제로서 샴푸와 린스에 첨가되고 있다. 

사포닌의 유화력에 관해서는 일반적으로 약한 것으로 되어있으며, 유화제로서는 거의 이용되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사포닌의 잠재적인 계면활성능을 유도하는 유화방법이 몇 가지 발견되었다. 타시마 등은 수용성 다가알코올에 사포닌 또는 그 염을 가열용해하고 이것에 유상성분을 첨가해서 투명 또는 반투명한 점조액체나 겔을 형성시켰다. 이것을 물에 희석해서 입자가 미세한 O/W에멀젼을 얻었다. 이것은 사포닌 또는 그 염이 물-기름 계면보다도 계면장력이 적은 다가알코올-기름 계면에 빠르게 배향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와타나베는 키라야사포닌을 이용한 안정한 유화향료를 얻었다. 즉, 액당에 키라야사포닌을 용해시켜, TK호모믹서로 교반하면서 오렌지오일을 첨가해서 투명한 유화향료를 얻었다. 또 이때 친수성이 높은 폴리글리세린지방산에스테르를 병용함으로서 내염내산성이 향상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시라카와 등은 사포닌이 가용화제로서도 탁월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사포닌류, 특히 키라야사포닌을 비타민 E의 0.5-4배 량을 이용함으로서 물에 투명하게 분산하는 비타민 E 수용화 제제를 얻었다. 키라야사포닌은 칠레, 페루, 볼리비아지역에 분포는 Qullaja Saponaria Mulina(장미과), 통칭 비누나무라고 불리는 상록수의 껍질에서 얻어지는 트리텔페노이드계의 사포닌이다. 다른 사포닌에 비해 대단히 뛰어난 계면활성과 균질성이 있고, 남미와 유럽에서는 옛날부터 세정제와 발포제로서 사용되어 왔다. 

FDA와 BP에도 수록되고, JECFA에서도 그 안전성이 확인되어 있다. 키라야사포닌의 기포력은 친수성이 높은 폴리글리세린지방산에스테르와 설탕지방산에스테르에 비해 거품이 생기고, 거품안정성도 같거나 그 이상이다. 특히 거품안정성은 거품의 막점도가 대단히 높다. 

키라야사포닌은 아니온계면활성제이지만, 분자 내에 다수의 수산기가 있기 때문에 그 표면장력과 기포력은 ㏗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다. 또 저농도의 알코올 속에서도 그 기포력은 변화하지 않는다. 이 외에 사포닌에는 항산화작용이 있고 팥사포닌과 콩사포닌을 화장료에 첨가하면, 피부의 과산화지질량을 감소시켜 흑피증, 간반, 재발성피부염 등의 피부이상을 예방하고 건강한 피부를 지킬 수 있다. 또 육모제로서의 이용 등이 있다. 사포닌의 화장품에의 이용은 현재 그다지 많지 않지만, 앞으로 이용 개발함으로서 응용범위가 넓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도라지 도라지 백도라지 심심산천에 백도라지 한 두 뿌리만 캐어도 대바구니에 철철 넘친다.’ 도라지의 주용 성분은 사포닌이다. 생약의 길경()은 뿌리의 껍질을 벗기거나 그대로 말린 것이며, 한방에서는 치열() · 폐열 · 편도염 · 설사에 사용한다. 실제로 백도라지는 매우 귀한 편이다. 요즘은 외딴섬에서 수십 년 이상 오래 묵은 산도라지가 발견되어 심마니들을 즐겁게 한다. 

흰색 꽃이 피는 것을 백도라지, 꽃이 겹으로 되어 있는 것을 겹도라지, 흰색 꽃이 피는 겹도라지를 흰겹도라지라고 한다. 꽃말은 영원한 사랑이다. 한국 · 일본 · 중국 등지에 분포한다. 도라지의 주용 성분은 사포닌이다. 생약의 길경()은 뿌리의 껍질을 벗기거나 그대로 말린 것이며, 한방에서는 치열() · 폐열 · 편도염 · 설사에 사용한다. 주뿌리로사용하며. 나물 및 약용 으로도 사용한다. 다른이름은 길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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