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은 을지문덕. 나는 내가 언제 태어났고 언제 죽었는지?. 왜? 역사기록에 나와있지 않거든요. 다만 나는 후세 사람들에 의해 살수의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다. 현재의 청천강인 살수에서 수나라의 30만 대군을 수공작전(水攻作戰)으로 격퇴시켜 수나라 임금 양제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버렸다. 지금부터 내가 어떻게 수나라의 30만 대군을 물귀신으로 만들었는지 5, 6세기 중국 땅에는 여러 나라가 나타나서 중국 전체를 통일하기 위하여 서로 싸우고 있었고. 이 시기를 중국 역사에서는 남북조시대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중국의 남쪽 지역과 북쪽 지역에 하나 또는 두 개 나라가 연이어 나타나며 서로 대립했기 때문이에요. 이러한 남북조시대는 589년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함으로써 끝나요. 『역대명장전』에는 을지문덕을 평양 석다산 사람이라고 했다.
석다산은 평안남도 증산군 석다리에 있는 산이다. 지금도 이곳에는 을지문덕이 어릴 때부터 글 읽고 무술훈련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또 평안남도 평원군 화진리에 있는 불곡산의 동굴 속에서 글을 읽었으며 석다산 남쪽 마이산으로 말을 타고 다니면서 무술을 익혔다고도 한다. 『환단고기』란 책에는 이러한 현지에 내려오는 전설을 뒷받침할 내용이 있다. 그 책의 내용을 잠시 살펴보면 을지문덕은 석다산에서 태어났다고 하며, 어려서 일찍 산에 올라가 도를 닦았으며 꿈에 천신을 만나서 크게 깨달았음을 얻었다고 한다. 전설에서 불곡산이라고 했던 그 산일 것이다. 을지문덕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싶어하지만, 『삼국사기』 등에는 을지문덕의 어린 시절이나 그분의 사생활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자료가 없다. 다만 평안도 일대에서 그에 관한 많은 전설들이 전해 오고 있다.
고구려 영양왕 23년(612년) 여름과 가을에 걸쳐 터진 수(隋)나라와의 전쟁은 역사상 최고의 전쟁영웅을 낳았다. 살수대첩의 지휘관 을지문덕(乙支文德)이다. 문덕은 침착하고 굳센 성격에다 글 짓는 솜씨도 비범하였다. 큰 나라의 군대 200만 명을 맞이하면서도 전혀 겁내지 않았고, 힘만으로 무찌를 수 없음을 알아 온갖 작전을 동원하였다. 나아갈 뿐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이 의연한 기상을 신채호는 ‘을지문덕주의’라고 이름 붙였다. 오직 그 이름과 살수대첩의 전공만이 이제까지 전해오는 을지문덕. 우리는 그의 역사에서 용기와 지혜를 배운다. 을지문덕이 살았던 시대는 고구려 제25대 영양왕(嬰陽王) 때였다. 평원왕의 맏아들로평양왕(平陽王)이라고도 부른 영양왕은 565년(평원왕 7년) 태자로 세워지고, 590년에 즉위하여 29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흐름으로 보면 5세기 전성기를 지나, 이 무렵부터 고구려는 피로한 모습을 보였다. 이는 특히 중국의 새로운 왕조 수나라와의 엇갈린 관계 때문이었다.
581년에 건국한 수나라는 589년 남조의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하였다. 후한(後漢) 이후 400여 년을 지속한 혼란의 끝이었다. 영양왕은 즉위 이후 8년(597년)까지는 수나라와 평탄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끝내 두 나라가 호의적인 사이로 남아있지 못할 요인이 있었다. 요동과 요서 지방을 두고 변방의 나라들이 벌이는 각축전과 신경전은 새로운 통일 왕조 수나라를 지속적으로 괴롭혔다. 물론 그 핵심은 고구려였다. 때로 사신을 보내 조문하며 신하인 척하였지만, 실로 고구려는 독립국으로서 위상을 결코 떨어뜨리려 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사례는 신라 김유신에게서도 볼 수 있다.
김유신은 중악이란 산의 석굴에서 공부하다가 난승이란 노인을 만나 그에게서 비법을 배웠다고 한다. 옛 시대의 위인을 높이 기리는 글에는 이와 같은 기록들이 많이 전한다. 을지문덕과 관련된 사슴발부인 이야기도 있다. 평양시 대성산 광법사 사적비에도 사슴발부인의 이야기가 있는데, 여기서는 민간전설을 통해 알아보겠다. 고구려에 사슴의 발 모양과 똑같은 발을 가진 여성이 있었다. 그 여인은 한 번에 여러 명의 아이를 낳아 길렀는데, 그 아이들의 발도 사슴의 발처럼 생겼다. 어느 날 길을 가던 어떤 사람이 아이들을 보더니 아이들이 오래 살고 유명한 인물로 키우려면 어머니와 떨어져서 살아야 하고 함께 살면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사슴발부인은 너무나 슬펐지만 아이들을 위해서 할 수 없이 큰 나무함에 아이들을 넣어 강물에 띄워 보냈다. 그런데 그 나무함이 바다로 떠내려가 수나라 해안에 도착하게 되었고, 아이들은 거기서 자라나 모두 장군이 되었다. 마치 『구약성서』에 나오는 모세의 이야기와 비슷하다.
수양제가 고구려를 공격할 때 이들도 고구려에 왔다. 그러자 고구려에서는 적장 가운데 사슴발을 가진 형제장수들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사슴발부인은 그들이 분명 자기의 아들들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을지문덕을 찾아가서 사연을 말했다. 사슴발부인은 자신이 적진에 들어가 아들들을 타이르겠다고 청했다. 사슴발부인은 적진에 들어가 사슴발 장수들을 만났다. “나는 너희들의 어머니란다. 너희들이 어머니의 나라를 공격하는 것을 옳지 못한 일이다. 자, 내 발을 보아라.” 그들은 그녀의 말을 쉽게 믿지 않았다. 그러자 사슴발부인은 가슴을 헤치고 젖을 짜니 젖줄기가 여러 가닥으로 뿜어서 그 장수들의 입으로 흘러들어갔다. 그때서야 친어머니임을 알아보고 투구를 벗고 용서를 빌면서 고구려로 넘어왔다.
사슴발부인의 전설은 을지문덕만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함께 힘을 합쳐 수나라를 물리쳤음을 말해 주는 이야기다. 을지문덕에 대한 여러 가지 전설들을 살펴보았다. 전설이 곧 사실 그대로는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들은 을지문덕이 얼마나 대중적인 인기를 지닌 인물이었나를 말해 준다. 현재 서울에서 종로와 함께 중심지를 관통하는 도로의 하나가 을지문덕의 이름을 딴 을지로라는 사실은 그의 인기가 지금도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불곡산의 전설"
어느 날 을지문덕이 굴 속에서 책을 읽다가 깜박 졸고 있었다. 그때 구렁이 한 마리가 그를 해치려고 기어 들어왔다. 이상한 기운을 느낀 을지문덕은 깨어나는 순간에 그가 갖고 있던 칼로 구렁이의 머리를 쳤는데, 이때에 내려치는 힘이 얼마나 강했던지 돌로 만든 책상의 모서리가 떨어져 나갔다. 지금도 을지문덕이 공부했던 동굴 속에는 검으로 책상을 쳤던 그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한다. 다른 전설에는 불곡산 동쪽의 대원산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대원산은 평안남도 평원군 운봉리에 있는 산이다. 을지문덕이 이곳에서 무술훈련을 하였는데 활쏘기를 하다가 과녘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길게 자란 나무들을 검으로 쳐서 반반하게 만들었는데, 이때 이후로 지금까지도 이 산의 서남쪽 부분에는 바위가 두드러지게 드러날 뿐 나무는 크게 자라지 못한다고 한다. 영양왕 9년(598년)에 고구려는 요서지방 공격을 단행했다. 여기는 수나라의 코밑이었다. 고구려가 독립국의 의지를 보이며 선수를 친 것이다. 그러자 수나라의 창업주 문제(文帝)는 영양왕의 관작을 삭탈하고, 6월에 수륙 30만 명을 동원하여 고구려로 쳐들어왔다. 그러나 석 달 후인 9월에 돌아갈 때 수나라의 군사는 열의 한두 명도 남지 않았다. 고구려의 완승으로 끝난, 수와의 질기고 질긴 전쟁의 첫 판이었다. 여기에 변수로 작용하는 나라가 돌궐이었다.
돌궐은 튀르크(Türk)의 음을 따서 한자로 만든 말이다. 지금 이 나라는 투르크메니스탄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카자흐스탄과 이란 사이에 있는데, 1865년 제정 러시아에 병합되었다가 1991년 구소련의 붕괴와 함께 독립하였다. 이들이 5~6세기경 번성할 때는 동쪽으로 중국 요동과 요서에서 서쪽으로 중앙아시아까지 걸쳐 있었다. 그러다 583년 종족 간의 다툼으로 분열하여 동돌궐은 몽골고원, 서돌궐은 중앙아시아를 지배하였다. 수나라가 세워질 무렵이었다.
영양왕은 동돌궐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기로 하였다. 왕 18년(607년), 고구려는 동돌궐의 왕 계민가한에게 사신을 보냈다. 사신이 천막궁전에 도착해 있는데, 마침 수나라 양제(煬帝)가 그곳을 방문했다. 문제를 이어 604년에 즉위한 양제는 고구려를 견제하자면 동돌궐과 모종의 약속이 필요하다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고구려가 먼저 선수를 친 셈이었다. 태자 시절인 10여 년 전, 고구려에 한판 진 경험을 가진 양제는 이제 주변 나라와의 외교전에서도 밀리는가 싶었다. 이를 역사학에서는 고구려의 초원 정치라 부른다. 양제가 고구려와 국운을 건 전쟁을 시작해야겠다는 결심은 이 초원의 장막에서 이루어졌다.
영양왕은 신라와 백제에 대해서도 강한 드라이브를 걸었다. 두 나라는 수나라와 가까이 지내며 고구려를 견제하려 했다. 그러자 고구려는 영양왕 14년(603년)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했고, 18년(607년)에는 백제의 송산성을 공격했다. 신라의 진평왕이 다급한 목소리로 수나라에 군사를 청한 것이 608년이었다. 612년, 수나라가 다시 고구려 땅을 침범해 왔어요. 문제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양제가 무려 113만의 대군을 이끌고 기세등등하게 고구려를 쳐들어왔어요. 113만 명이 대군이냐고요? 그럼요. 일렬로 쭉 세워 놓으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숫자예요. 인구수로 따져서 우리나라 7위의 도시인 울산광역시 인구가 111만(2009년 8월 기준) 정도니, 113만의 군사는 대단한 숫자지요. 옛날에는 전투병 1명에 일꾼 병사 2명 정도가 함께 움직였어요. 무기와 식량을 운반해야 했거든요. 따라서 수 양제의 고구려 침공군은 적어도 350만에 이르는 천문학적인 숫자가 참가한 대규모 원정대였어요. 350만이면 얼마나 되냐고요? 2009년 8월 기준으로 우리나라 2대 도시인 부산광역시 인구가 355만 정도니, 한번 상상해 보세요. 얼마나 많은 숫자인지. 중국 측 기록에 “군사들의 출발이 40일 동안 계속되었으며, 군대 행렬이 960리에 이르렀다.”고 나와 있으니, 수 양제가 얼마나 벼르고 별러 고구려 정벌을 단행했는지 알 수 있어요. 고구려는 수의 침입을 미리 막고 전략상 유리한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먼저 랴오허 강(요하)을 건너 전략적 요충지인 요서 지방을 공격하였다. 이에 수 문제가 침공해 왔으나, 고구려는 이를 물리쳤다. 그 후, 수 양제가 황제에 올라 천하의 최고 통치자임을 내세우고 동북 아시아의 강국 고구려까지 손아귀에 넣으려고 하였다. 당시 고구려의 줄기찬 공격을 받아 고전하던 신라는 원광을 수에 보내어 군사 원조를 요청하였다.
612년 곧 영양왕 23년 여름에 수나라의 대대적인 침공이 시작되었다. 요동성을 포위, 공격하는 데 실패하고, 바다를 건너 평양성 부근까지 침략한 수군 또한 참패하자, 초조해진 수 양제는 30만 명의 별동대를 투입하여 평양성을 치게 하였다. 우중문 등이 거느린 별동대는 고구려 장군 을지문덕의 유도 작전에 말려들어 평양성 부근까지 진군하였다가 크게 지치고 굶주려 결국 후퇴하게 되었다. 고구려는 이 틈을 타서, 적군이 살수를 건널 때 그 주력 부대를 공격하여 전멸시켰다. 그리하여 별동대 30만 명 중에서 살아서 돌아간 사람은 겨우 2700명 정도였다고 한다. 이 싸움이 유명한 살수 대첩이다(612). 그 뒤에도 고구려는 수의 공격을 몇 차례 더 물리쳐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였다. 수는 무리한 전쟁으로 인한 국력 소모와 내란으로 결국 망하고 말았다. [삼국사기]는 이때의 수나라 병력이 1백13만 3천8백 명이라 적고 있다. 물경 2백만 명 대군이었다. 왜 전쟁을 해야 하는지, 양제는 시시콜콜히 그의 조서에서 밝혔다.
첫째, 고구려는 보잘것없는 나라이고 공손하지 않다.
둘째, 수나라의 말을 듣지 않고 조회에 참가하지도 않는다.
셋째, 고구려가 수나라에서 도망간 역도들을 받아들였고 변경을 괴롭혀 치안이 불안하다.
넷째, 요서를 공격하였다.
다섯째, 다른 나라들이 수나라에 조공 드는 것을 방해한다. 여섯째, 고구려의 법령이 가혹하고 지도자는 부패하다. 전쟁을 일으키는 명분이라고는 하나 사실 이는 고구려가 독립국임을 수나라에서 밝힌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400년 혼란의 역사를 종식한 제국 수나라가 2백만의 군대를 동원해 벌이는 전쟁. 그것은 수나라가 고구려를 얼마나 부담스러운 존재로 보고 있었는지 반증한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우리의 영웅 을지문덕의 활약상이 펼쳐진다. 생몰년에 집안까지 알 수 없는데다, 을지문덕은 어떤 직함을 가졌는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영양왕 23년 조에서 ‘대신(大臣)’이라고만 부르고 있다. 이는 일반적인 호칭일 뿐이다. 문득 등장하는 을지문덕. 그러나 전쟁 수행에 관한 거의 전권을 가진 그이이기에, 생략된 전후의 사정을 상상에 맡긴다면, 벌써 영양왕 9년의 전쟁부터 그의 솜씨 아님이 없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적어도 영양왕 즉위 이후 모든 전쟁의 기획은 그에게서 나왔을 것이다. [삼국유사] 열전의 을지문덕전은 200만 수나라 군대와의 전쟁을 자세히 일러준다. 을지문덕. 수나라 30만 대군을 살수에서 전부 몰살시켜 강대했던 수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한 대영웅. 그가 을지문덕이다.
을지문덕 전기를 쓰신 민족주의 역사학자 단재 신채호는 을지문덕을 4천 년 우리 역사에서 제일의 인물이라고 했다. 고구려는 수나라가 중국 전체를 차지하자 크게 긴장했어요. 중국과 고구려는 전통적으로 대립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나마 남북조시대 때는 저희들끼리 서로 눈치를 보느라고 남조, 북조 모두 고구려와 친선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느닷없이 중국에 통일 왕조가 들어섰으니, 고구려 입장에서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지요.
고구려는 무기를 수리하고 군량미를 비축하는 등 수나라의 침략에 은밀히 대비하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이를 눈치 챈 수나라의 임금 문제(文帝)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엄포를 놓았어요.“요하가 넓으면 얼마나 넓겠는가? 어찌 황하에 비하리오. 장군 한 사람을 파견하면 충분할 것을 어찌 많은 병력을 동원하겠는가?” 요하는 중국 땅인 요서 지방과 고구려 영토인 요동 지방을 가르는 강으로, 수 문제의 편지는 ‘요하만 넘으면 너희는 곧 죽음이니 알아서 복종하라.’는 강력한 경고였어요. 그러나 고구려는 수의 이러한 압력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598년에는 요하를 건너 요서 지방을 먼저 공격해 수를 자극하기까지 했어요.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수 문제는 30만의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입해 왔어요. 하지만 이 전쟁은 고구려의 일방적인 승리 로끝났다.
수나라군의 우문술(于文述)은 부여도로 나오고, 우중문(于仲文)은 낙랑도로 나와, 9군(九軍)과 더불어 압록강에 이르렀다. 문덕은 왕명을 받들고 그들의 진영에 가서 항복하였다. 이것이 첫 번째 작전이었다. 사실은 저들의 실상을 살펴보려 거짓으로 한 행동이었다. 이때 우중문과 우문술은 만약 고구려의 왕이나 문덕이 오거든 잡아두라는 밀지를 받아 놓고 있었다. 그래서 억류해 두려 하였는데, 상서우승 유사룡(劉士龍)이 굳이 말리는 것이었다. 결국 문덕을 돌려보냈다. 적진을 살피고 김을 빼려는 을지문덕의 작전은 성공했다. 수나라 군대는 고구려를 쉽게 생각하고 쳐들어 왔지만, 고구려 군사들은 한 사람이 백 명의 적과 싸운다는 일당백 정신으로 굳게 뭉쳐서 수나라 대군을 박살내 버렸어요.
고구려의 힘이 광개토대왕이나 장수왕 때만큼은 아니었어도 ‘썩어도 준치’라고, 아직 수나라 정도는 능히 대적할 힘이 있었거든요. 을지문덕을 놓아 보낸 문술과 중문이 깊이 후회하였다는 데서 기선을 제압한 문덕의 작전이 빛을 발한다. 문술과 중문이 사람을 보내 문덕을 꾀었지만, 문덕은 돌아보지 않고 압록강을 건너 본국으로 와버렸다. 중문은 후회를 넘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게다가 문술은 군량이 떨어져 가는 것을 보고 돌아가려 하였다. 사실 원정군의 가장 큰 고민은 보급이다. 일거에 대군을 쏟아 부어 전장의 주도권을 잡으려 하지만, 덩치가 크면 클수록 보급의 고민 또한 큰 법이다. 문술은 그런 면에서 현실적인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문은 정예부대를 시켜 문덕을 쫓으면 성공할 수 있다고 장담하고, 문술은 이를 말리는 자중지란이 수나라 병영에서 일어났다.
을지문덕이 노린 거짓 항복의 효과는 기대 이상으로 컸다. 마침내 중문은 화를 내며, “10만의 병력을 가지고 조그마한 적을 부수지 못한다면, 무슨 낯으로 황제를 뵌단 말이오.”라고 꾸짖었다. 문술은 마지못해 받아들이고 압록강을 건너 쫓아갔다. 여기서 문덕의 두 번째 작전이 펼쳐졌다. 수나라 군대가 주린 기색이 있음을 알고, 더욱 피곤함에 지치게 하도록, 싸우면 바로 패하며 달아났다. 그러기를 일곱 번 거듭했다고, [삼국사기]는 쓰고 있다. 권투에서도 때리다가 지친다는 말이 있다. 일방적으로 주먹을 쓰다 보면 상대를 깔보게 되고 그러는 동안 자신이 지쳐가는 것을 모른다. 중문과 문술이 그런 모양새였다. 져주는 군대를 쫓아 평양성 30리 밖에까지 달려온 것이 잘못이었다. 30만의 별동 부대를 상대하는 고구려의 작전은 의외로 간단했어요.
을지문덕 장군은 추운 겨울이 닥쳐오기 전에 전쟁을 끝내려고 무리를 해서 쳐들어오는 수의 속셈을 간파했어요. 그는 수나라 군사들이 진격해 오는 길목의 백성들을 산성 안으로 이동시키고 마을 안에 있던 우물들을 모두 메워 버렸어요.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하루에도 몇 번씩 적진을 넘나들며 적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어요. 한편 수나라 군대가 평양성 외곽 30리쯤에 도착하자,
을지문덕 장군은 거짓으로 항복을 하여 적진을 염탐했어요. 수나라 장수 우중문은 이때 을지문덕을 사로잡아 죽이려 했어요. 그러나 부하 장수가 항복하러 온 사신을 가두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해서 입맛만 쩝쩝 다시며 돌려 보냈어요. 간신히 적진을 빠져나온 을지문덕은 우중문에게 한 편의 시를 지어 보냈어요.
자연과 세상 살아 가는데 필요한 모던것을 같이하는블르그입니다, 모던전반에 관한 세상, 자연, 엔터테이먼트, 동식물, 조류, 음식, 생활도구, 병원, 한의학, 의학, 의류, 등산, 낚시, 기타, 등등 살아가는데 종합적인 모던것 입니다,
2017년 10월 9일 월요일
어묵.
어묵"
부산광역시 일대에서 생산되는 생선살을 원료로 한 향토 음식. 전국 100여 곳의 어묵 업체 가운데 45개 업체가 부산에 기반을 두고 있다. 또한 부산 지역 생산량의 70%를 서울 등 외지로 판매할 만큼 부산은 어묵 시장에서 강력한 위상을 갖고 있다. 부산 어묵 업체의 공동 브랜드인 ‘부산 어묵’은 여타 어묵보다 가격이 10~20% 비싸다.
우리나라에서는 기름에 튀긴 어묵이 발달했다. 어묵은 냉동연육을 주 원료로 하는데, 연육은 생선에서 머리와 내장, 껍질 등을 제거하고 살만 뽑아낸 것으로 갈치, 조기, 쥐치, 실꼬리돔 등 다양한 생선이 사용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어묵 제품은 주로 베트남 등지에서 수입한 연육을 사용한다.
게맛살은"
이름 때문에 주재료로 게가 사용되었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어묵과 마찬가지로 연육으로 만드는 제품이다. 부산은 지리적으로 일본과 가깝고 주재료인 수산물을 쉽게 구할 수 있어, 일제 강점기부터 일본인이 경영하는 어묵 공장이 생겨났다. 어묵은 일본에서 처음 만든 식품인데, 일본말로 가마보코라 한다. 한국의
요리책 가운데 1740년경 중인 계급인 역관 이표(李杓)가 쓴 것으로 『수문사설(搜問事設)』에 처음 어묵이 등장하는데, 일본말인 가마보코에서 그대로 가마보곶(可麻甫串)이라 표기하였다. 어육에 식염을 가해 다진 다음, 설탕·녹말 등의 조미료를 넣고 반죽을 만들어 찌거나 구워서 단백질을 가열 응고시킨 식품. 해방 이후 일본인들이 물러가자 일본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6·25 전쟁을 전후해 중구 부평동과 영도 등지에 소규모 어묵 공장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부산 어묵의 주재료는 생선으로, ‘새끼 갈치’로 통하는 풀치와 조기 새끼처럼 생긴 일명 ‘깡치’ 등을 주재료로 삼아 가공한다. 조기·도미 등 고급 어종도 섞고 갈치 역시 소량이지만 포함된다. 조기·도미 등은 탄력을 높이는 데 좋고, 갈치는 맛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 연근해 어획량이 줄면서 어획량이 많고 가격이 싼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산을 비롯해 미국 또는 캐나다산 생선을 쓰기도 한다. 겨울철 언 몸을 녹여주는 뜨끈한 국물을 선물하는 식재료입니다. 감칠맛으로 입맛을 사로잡는 어묵!! 기름기가 많지 않은 생선을 으깨어 소금, 설탕, 녹말, 맛술 등을 넣어 반죽한 것을 여러 모양으로 빚어 찌거나 굽거나 튀겨 단백질을 응고시킨 것으로 소금의 양은 생선 무게의 3% 정도가 적당하다.
1940~1950년대에는 맷돌에 생선을 뼈째 갈고 기름 솥에 튀기는 방식이었으나, 현재는 뼈를 완전히 제거하고 살코기만 사용한다. 생선뼈를 제거한 어육을 깨끗하게 씻은 다음 잘게 갈고, 소금·설탕·전분·물엿 등 다양한 원료를 첨가한다. 고기를 갈 때 소금을 첨가하면 맛은 물론이고 어묵 고유의 탄력성이 생겨난다. 고기를 갈고 나면 다양한 모양으로 ‘성형’하고 ‘가열’한 후 ‘마무리’하면 어묵이 완성된다. 어묵, 맛살 등의 유통기한은 보통 9~10일 정도로 짧은 편이기 때문에 되도록 기한이 많이 남은 제품을 구입한다.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 무렵부터 전국적으로 부산 어묵이 어묵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렇게 부산 어묵의 인기가 치솟으면서 너도나도 부산 어묵 행세를 하였고, 이에 위기감을 느낀 부산 업체들은 1998년부터 고유 상표를 특허청에 등록하였다. 부산 명품 수산물에 해당하는 부산 어묵은 더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원료 어육은 음용에 적합한 흐르는 물로 충분히 세척하여 혈액·지방·수용성 단백질 등을 제거하여야 하며, 배합 공정 중 냉각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얼음 및 냉각 처리수도 음용에 적합하여야 한다. 제품의 성분 배합 비율은 어육 함유량 70% 이상으로 어육 중 어육 살 함유량이 50% 이상이어야 한다. 그리고 합성 감미료, 합성 착색료, 합성 보존료, 산화 방지제 등은 사용해서는 안 되며 소르빈산·소르빈산칼륨 등의 보존료는 2g/㎏ 이하로 사용해야 한다. 타르 색소는 비검출, 대장균군은 음성, 식용유에 튀긴 제품은 산가 5㎎-KOH/g 이하, 과산화물가 60meq/㎏ 이하이어야 한다. 어묵은 사계절 사랑을 받지만 특히 겨울철의 대표적인 먹을거리로, 부산에서는 ‘오뎅’, 또는 ‘깐또[간또]’ 등으로 불린다. 일반적으로 어묵과 오뎅을 혼용하는 경우가 많다.
국어사전에서 ‘오뎅’은 어묵의 잘못된 표기로, 어묵으로 고쳐 쓰라고 나온다. 반면, 식품 업계에서는 어묵과 오뎅을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는데, 오뎅은 어묵을 주재료로 하고 곤약·달걀·유부·두부 등을 멸치 또는 가쓰오부시 등을 우려 낸 장국에 함께 넣어 익힌 요리[예를 들어 ‘오뎅탕’]를 말한다. 반면 어묵은 생선의 살코기만을 도려내어 소량의 식염을 넣고 갈아서 얻은 연육을 기름에 익혀 만든 연제품을 말한다. 어묵이나 맛살을 제조하는 많은 식품업체에서 HACCP 시스템을 도입해 위생과 안전성이 높아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간간이 위생상태가 불량한 업체가 적발된다. 어묵이나 맛살 제품을 구입할 때는 HACCP 인증마크를 반드시 확인한다.
어육의 비율은 제조사마다 다르지만 보통 70% 내외다. 밀가루나 전분 함량이 높은 어묵은 탕을 끓일 때 어묵이 불어나 식감이 떨어진다. 때문에 고급 제품은 연육을 80% 이상 사용하기도 하고, 최근에는 아예 밀가루나 전분을 넣지 않고 만든 제품도 나오고 있다. 어묵은 무로마치 시대[실정시대, 室町時代](1336~1573)에 만들기 시작하였다고 하며, 처음에는 메기 같은 생선살을 으깨서 굵은 대꼬챙이에 둥글게 막대 모양으로 덧발라서 구웠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어묵을 만드는 법이 다르다고 한다.
『수문사설』에 수록된 가마보곶은 물고기살을 얇게 저미고, 여기에 돼지고기·쇠고기·버섯·해삼·파·고추 등을 다져 만든 소를 얹어 3, 4켜가 되도록 하여 두루마리 종이 말듯이 둥글게 말아 삶아낸 것을 썰어서 먹는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1938년 조자호(趙慈鎬)가 쓴 『조선요리법(朝鮮料理法)』에 태극선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나오지만 일본식 어묵과는 전혀 다른 전통음식이 되었다.
어묵은 생선살과 전분의 비율에 따라 맛이 결정된다. 보통은 생선살이 50% 이상이며 고급 어묵의 경우에는 생선살이 70% 이상으로 맛이 매우 좋다. 특히 좋은 어묵은 순백색으로 광택과 탄력이 좋으며 입에서 씹히는 느낌이 좋고 씹으면 씹을수록 맛이 나는 특징이 있다.
구입요령"
제조일자와 유통기한을 확인한 후 구입하며, 냄새를 맡아 보아 시큼한 냄새가 나면 상한 것이다. 또한 육안으로 곰팡이 유무를 살핀다.
유사재료"
어묵 (어묵은 식재료 자체의 이름을 지칭하며 오뎅은 일본어로 어묵을 이용한 요리를 지칭한다. 어묵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는 표현법이다.),
보관온도 : 1~5℃, 보관일 : 4일, 보관법"
밀봉하여 냉장 보관한다. 어묵조림, 어묵맛살볶음, 어묵육개장, 어묵구이, 어묵쇠고기조림, 어묵산적, 어묵국, 어묵냉채, 어묵전골, 냄비어묵, 야채어묵전 등으로 쓰인다. 어묵은 쉽게 상하기 쉬우므로 반드시 냉장 보관 하는 것이 좋다.
손질법"
끓는 물에 살짝 데쳐내어 기름기를 제거한다. 그대로 잘라서 먹기도 하나 폭넓게 이용할 수 있다.
산지특성 및 기타정보"
바다와 가까워 어묵의 주재료인 생선을 다량으로 접할 수 있는 지역적 특성이 있다.
섭취방법"
어묵 볶음이나 어묵탕으로 요리하여 섭취한다.
궁합음식정보"
꽈리고추 (어묵에 부족한 비타민과 식이섬유소를 보충할 수 있으며, 어묵의 향을 다소 억제하여 먹기에 어려움이 없도록 돕는다.),
다이어트"
나트륨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 다이어트에 좋지 않다. 냄비)에 준비한 타네(種)를 담고 다시국물을 잠길 정도로 부은 후 전체적으로 맛이 어우러지도록 끓여준다.
다이콩(大根, 무)"
2~3cm 두께로 썬 후 껍질을 한 겹 돌려 깎은 후 모난 모서리를 둥글게 다듬어 쌀뜨물에 20~30분 삶아준다. 이렇게 하면 무 특유의 아린 맛을 제거할 수 있다. 오뎅.(일본식) 끌이는방법,
1.곤야쿠(こんにゃく, 곤약)"
적당한 크기로 썬 다음 잘게 칼집을 넣어준다.
2,다마고(卵, 달걀)"
달걀은 미리 삶아 껍질을 벗긴 후 유황 냄새를 없애기 위해 물에 담가둔다.
간모(がんも, 튀긴 두부)"
끓는 물에 살짝 데쳐 기름기를 빼둔다.
타코(タコ, 문어)"
미리 데쳐 건져두면 오뎅의 다시가 붉게 물드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규스지(牛すじ, 소힘줄)"
소힘줄은 질긴 부위가 부드럽게 될 때까지 삶아둔다. 2005년 8월 17일 부산 명품 수산물에 2개의 어묵 생산 업체가 등록되었고, 전국 단위인 한국어육제품공업협동조합 산하 부산시지부에 머물러 있던 부산 어묵 업체들은 2010년 1월 1일부터 부산어육제품공업협동조합을 출범시켜 재도약을 선언하였다. 어묵은 단백질과 필수아미노산의 함량이 높고 소화가 잘 되며 생선에 많이 들어 있는 불포화지방산은 혈관 속의 콜레스테롤을 제거해 주는 효과가 있다.
먹는방법"
가정에서는 오뎅을 나베(鍋, 전골전용냄비)에 끓여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식당 등에서는 가마보코(어묵)를 꼬치에 꽂아 판매하는 경우가 많다. 다시 국물에 넣고 끓인 오뎅의 타네(種, たね, 가마보코나 어묵의 종류를 표현할 때 쓰는 말)가 적당히 익으면 연겨자 나 된장소스 또는 7가지의 향신료를 섞은 것과 곁들여 먹는다.
부산에 어묵공장도 자리하고있다. 대표 적인기업: 환공어묵. 영진어묵. 부산어묵, 삼진어묵, 고래사어묵, 범표어묵, 기타등등...있다.
부산광역시 일대에서 생산되는 생선살을 원료로 한 향토 음식. 전국 100여 곳의 어묵 업체 가운데 45개 업체가 부산에 기반을 두고 있다. 또한 부산 지역 생산량의 70%를 서울 등 외지로 판매할 만큼 부산은 어묵 시장에서 강력한 위상을 갖고 있다. 부산 어묵 업체의 공동 브랜드인 ‘부산 어묵’은 여타 어묵보다 가격이 10~20% 비싸다.
우리나라에서는 기름에 튀긴 어묵이 발달했다. 어묵은 냉동연육을 주 원료로 하는데, 연육은 생선에서 머리와 내장, 껍질 등을 제거하고 살만 뽑아낸 것으로 갈치, 조기, 쥐치, 실꼬리돔 등 다양한 생선이 사용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어묵 제품은 주로 베트남 등지에서 수입한 연육을 사용한다.
게맛살은"
이름 때문에 주재료로 게가 사용되었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어묵과 마찬가지로 연육으로 만드는 제품이다. 부산은 지리적으로 일본과 가깝고 주재료인 수산물을 쉽게 구할 수 있어, 일제 강점기부터 일본인이 경영하는 어묵 공장이 생겨났다. 어묵은 일본에서 처음 만든 식품인데, 일본말로 가마보코라 한다. 한국의
요리책 가운데 1740년경 중인 계급인 역관 이표(李杓)가 쓴 것으로 『수문사설(搜問事設)』에 처음 어묵이 등장하는데, 일본말인 가마보코에서 그대로 가마보곶(可麻甫串)이라 표기하였다. 어육에 식염을 가해 다진 다음, 설탕·녹말 등의 조미료를 넣고 반죽을 만들어 찌거나 구워서 단백질을 가열 응고시킨 식품. 해방 이후 일본인들이 물러가자 일본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6·25 전쟁을 전후해 중구 부평동과 영도 등지에 소규모 어묵 공장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부산 어묵의 주재료는 생선으로, ‘새끼 갈치’로 통하는 풀치와 조기 새끼처럼 생긴 일명 ‘깡치’ 등을 주재료로 삼아 가공한다. 조기·도미 등 고급 어종도 섞고 갈치 역시 소량이지만 포함된다. 조기·도미 등은 탄력을 높이는 데 좋고, 갈치는 맛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 연근해 어획량이 줄면서 어획량이 많고 가격이 싼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산을 비롯해 미국 또는 캐나다산 생선을 쓰기도 한다. 겨울철 언 몸을 녹여주는 뜨끈한 국물을 선물하는 식재료입니다. 감칠맛으로 입맛을 사로잡는 어묵!! 기름기가 많지 않은 생선을 으깨어 소금, 설탕, 녹말, 맛술 등을 넣어 반죽한 것을 여러 모양으로 빚어 찌거나 굽거나 튀겨 단백질을 응고시킨 것으로 소금의 양은 생선 무게의 3% 정도가 적당하다.
1940~1950년대에는 맷돌에 생선을 뼈째 갈고 기름 솥에 튀기는 방식이었으나, 현재는 뼈를 완전히 제거하고 살코기만 사용한다. 생선뼈를 제거한 어육을 깨끗하게 씻은 다음 잘게 갈고, 소금·설탕·전분·물엿 등 다양한 원료를 첨가한다. 고기를 갈 때 소금을 첨가하면 맛은 물론이고 어묵 고유의 탄력성이 생겨난다. 고기를 갈고 나면 다양한 모양으로 ‘성형’하고 ‘가열’한 후 ‘마무리’하면 어묵이 완성된다. 어묵, 맛살 등의 유통기한은 보통 9~10일 정도로 짧은 편이기 때문에 되도록 기한이 많이 남은 제품을 구입한다.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 무렵부터 전국적으로 부산 어묵이 어묵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렇게 부산 어묵의 인기가 치솟으면서 너도나도 부산 어묵 행세를 하였고, 이에 위기감을 느낀 부산 업체들은 1998년부터 고유 상표를 특허청에 등록하였다. 부산 명품 수산물에 해당하는 부산 어묵은 더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원료 어육은 음용에 적합한 흐르는 물로 충분히 세척하여 혈액·지방·수용성 단백질 등을 제거하여야 하며, 배합 공정 중 냉각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얼음 및 냉각 처리수도 음용에 적합하여야 한다. 제품의 성분 배합 비율은 어육 함유량 70% 이상으로 어육 중 어육 살 함유량이 50% 이상이어야 한다. 그리고 합성 감미료, 합성 착색료, 합성 보존료, 산화 방지제 등은 사용해서는 안 되며 소르빈산·소르빈산칼륨 등의 보존료는 2g/㎏ 이하로 사용해야 한다. 타르 색소는 비검출, 대장균군은 음성, 식용유에 튀긴 제품은 산가 5㎎-KOH/g 이하, 과산화물가 60meq/㎏ 이하이어야 한다. 어묵은 사계절 사랑을 받지만 특히 겨울철의 대표적인 먹을거리로, 부산에서는 ‘오뎅’, 또는 ‘깐또[간또]’ 등으로 불린다. 일반적으로 어묵과 오뎅을 혼용하는 경우가 많다.
국어사전에서 ‘오뎅’은 어묵의 잘못된 표기로, 어묵으로 고쳐 쓰라고 나온다. 반면, 식품 업계에서는 어묵과 오뎅을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는데, 오뎅은 어묵을 주재료로 하고 곤약·달걀·유부·두부 등을 멸치 또는 가쓰오부시 등을 우려 낸 장국에 함께 넣어 익힌 요리[예를 들어 ‘오뎅탕’]를 말한다. 반면 어묵은 생선의 살코기만을 도려내어 소량의 식염을 넣고 갈아서 얻은 연육을 기름에 익혀 만든 연제품을 말한다. 어묵이나 맛살을 제조하는 많은 식품업체에서 HACCP 시스템을 도입해 위생과 안전성이 높아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간간이 위생상태가 불량한 업체가 적발된다. 어묵이나 맛살 제품을 구입할 때는 HACCP 인증마크를 반드시 확인한다.
어육의 비율은 제조사마다 다르지만 보통 70% 내외다. 밀가루나 전분 함량이 높은 어묵은 탕을 끓일 때 어묵이 불어나 식감이 떨어진다. 때문에 고급 제품은 연육을 80% 이상 사용하기도 하고, 최근에는 아예 밀가루나 전분을 넣지 않고 만든 제품도 나오고 있다. 어묵은 무로마치 시대[실정시대, 室町時代](1336~1573)에 만들기 시작하였다고 하며, 처음에는 메기 같은 생선살을 으깨서 굵은 대꼬챙이에 둥글게 막대 모양으로 덧발라서 구웠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어묵을 만드는 법이 다르다고 한다.
『수문사설』에 수록된 가마보곶은 물고기살을 얇게 저미고, 여기에 돼지고기·쇠고기·버섯·해삼·파·고추 등을 다져 만든 소를 얹어 3, 4켜가 되도록 하여 두루마리 종이 말듯이 둥글게 말아 삶아낸 것을 썰어서 먹는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1938년 조자호(趙慈鎬)가 쓴 『조선요리법(朝鮮料理法)』에 태극선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나오지만 일본식 어묵과는 전혀 다른 전통음식이 되었다.
어묵은 생선살과 전분의 비율에 따라 맛이 결정된다. 보통은 생선살이 50% 이상이며 고급 어묵의 경우에는 생선살이 70% 이상으로 맛이 매우 좋다. 특히 좋은 어묵은 순백색으로 광택과 탄력이 좋으며 입에서 씹히는 느낌이 좋고 씹으면 씹을수록 맛이 나는 특징이 있다.
구입요령"
제조일자와 유통기한을 확인한 후 구입하며, 냄새를 맡아 보아 시큼한 냄새가 나면 상한 것이다. 또한 육안으로 곰팡이 유무를 살핀다.
유사재료"
어묵 (어묵은 식재료 자체의 이름을 지칭하며 오뎅은 일본어로 어묵을 이용한 요리를 지칭한다. 어묵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는 표현법이다.),
보관온도 : 1~5℃, 보관일 : 4일, 보관법"
밀봉하여 냉장 보관한다. 어묵조림, 어묵맛살볶음, 어묵육개장, 어묵구이, 어묵쇠고기조림, 어묵산적, 어묵국, 어묵냉채, 어묵전골, 냄비어묵, 야채어묵전 등으로 쓰인다. 어묵은 쉽게 상하기 쉬우므로 반드시 냉장 보관 하는 것이 좋다.
손질법"
끓는 물에 살짝 데쳐내어 기름기를 제거한다. 그대로 잘라서 먹기도 하나 폭넓게 이용할 수 있다.
산지특성 및 기타정보"
바다와 가까워 어묵의 주재료인 생선을 다량으로 접할 수 있는 지역적 특성이 있다.
섭취방법"
어묵 볶음이나 어묵탕으로 요리하여 섭취한다.
궁합음식정보"
꽈리고추 (어묵에 부족한 비타민과 식이섬유소를 보충할 수 있으며, 어묵의 향을 다소 억제하여 먹기에 어려움이 없도록 돕는다.),
다이어트"
나트륨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 다이어트에 좋지 않다. 냄비)에 준비한 타네(種)를 담고 다시국물을 잠길 정도로 부은 후 전체적으로 맛이 어우러지도록 끓여준다.
다이콩(大根, 무)"
2~3cm 두께로 썬 후 껍질을 한 겹 돌려 깎은 후 모난 모서리를 둥글게 다듬어 쌀뜨물에 20~30분 삶아준다. 이렇게 하면 무 특유의 아린 맛을 제거할 수 있다. 오뎅.(일본식) 끌이는방법,
1.곤야쿠(こんにゃく, 곤약)"
적당한 크기로 썬 다음 잘게 칼집을 넣어준다.
2,다마고(卵, 달걀)"
달걀은 미리 삶아 껍질을 벗긴 후 유황 냄새를 없애기 위해 물에 담가둔다.
간모(がんも, 튀긴 두부)"
끓는 물에 살짝 데쳐 기름기를 빼둔다.
타코(タコ, 문어)"
미리 데쳐 건져두면 오뎅의 다시가 붉게 물드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규스지(牛すじ, 소힘줄)"
소힘줄은 질긴 부위가 부드럽게 될 때까지 삶아둔다. 2005년 8월 17일 부산 명품 수산물에 2개의 어묵 생산 업체가 등록되었고, 전국 단위인 한국어육제품공업협동조합 산하 부산시지부에 머물러 있던 부산 어묵 업체들은 2010년 1월 1일부터 부산어육제품공업협동조합을 출범시켜 재도약을 선언하였다. 어묵은 단백질과 필수아미노산의 함량이 높고 소화가 잘 되며 생선에 많이 들어 있는 불포화지방산은 혈관 속의 콜레스테롤을 제거해 주는 효과가 있다.
먹는방법"
가정에서는 오뎅을 나베(鍋, 전골전용냄비)에 끓여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식당 등에서는 가마보코(어묵)를 꼬치에 꽂아 판매하는 경우가 많다. 다시 국물에 넣고 끓인 오뎅의 타네(種, たね, 가마보코나 어묵의 종류를 표현할 때 쓰는 말)가 적당히 익으면 연겨자 나 된장소스 또는 7가지의 향신료를 섞은 것과 곁들여 먹는다.
부산에 어묵공장도 자리하고있다. 대표 적인기업: 환공어묵. 영진어묵. 부산어묵, 삼진어묵, 고래사어묵, 범표어묵, 기타등등...있다.
부산.
- 부산"
- 한국 최대의 항구로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과의 교역창구 역할을 했고, 6·25전쟁 때에는 임시수도로서 국가보위의 기능을 충실히 이행했다.
- 1960년대 이후 수출주도형 경제개발이 추진되면서 동양 굴지의 대표적인 무역항구로 급격히 부상했다. 항만을 기반으로 성장한 한국의 대표적인 상공업도시이며, 남동임해공업지대의 중심도시이기도 하다. 지난 30년간에 걸친 급속한 인구증가로 교통난·주택난 등의 도시문제가 심각한 편이다. 또한 수출입 물동량의 계속적인 증가로 항만시설의 확충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최근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해상 신도시 건설계획을 비롯한 종합적인 장기 개발계획이 추진되고 있으므로 명실상부한 국제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될 전망이다.
- 중구(中區)·서구(西區)·동구(東區)·영도구(影島區)·부산진구(釜山鎭區)·동래구(東萊區)·남구(南區)·북구(北區)·해운대구(海雲臺區)·사하구(沙下區)·금정구(金井區)·강서구(江西區)·수영구(水營區)·사상구(沙上區)·연제구(蓮堤區)·기장군(機張郡) 등 1개군 15개구 2개읍 3개면 234개 행정동 249개 법정동이 있으며, 시청소재지는 중구 중앙동7가이다.
- 면적 748.92㎢, 인구 3,711,268(2003), 인구밀도 4,862.1명/㎢(2003). 8·15해방 당시인 1945년 부산은 서울 다음가는 대도시였지만 인구수는 28만 1,160명이었다. 그러나 6·25전쟁을 거치며 피난민이 대거 정착하여 1955년에는 100만 명을 넘는 대도시로 성장했다. 그후 1960년 116만 3,671명, 1970년 184만 2,259명, 1980년 315만 9,766명, 1990년 379만 7,566명으로 매년 전국의 평균증가율을 훨씬 웃돌며 성장했다.
- 1960, 1970년대는 공업화와 더불어 인구가 급속히 늘어났으나,
- 1980년대에 들어 제조업 부문의 고용기회 성장률이 감소되고, 전입인구율의 감소에 따라 인구증가 속도가 크게 떨어지고 있다.
- 1990년의 인구밀도는 7,174명/㎢으로 1960년 5,297명에 비하여 1.4배가, 전국대비 인구비율은 8.9%로 1960년 4.6%에 비하여 약 2배가 증가했다. 그러나 시역의 확장으로 1996년의 인구밀도는 5,183명/㎢으로 오히려 낮아졌다.
- 1996년 현재 도시내 인구는 사하구(39만 2,206명)·동래구(31만 3,031명)·남구(32만 539명)·부산진구(46만 2,001명)의 순으로 많이 분포하며, 중구(6만 5,480명)·강서구(7만 3,322명)·기장군(7만 2,044명)은 인구가 매우 적다. 1899년 부산매축주식회사의 설립을 계기로 대교동과 남포동 일대가 매립되고 항만이 조성되면서 시가지가 형성되었다. 매립된 자리에 시행정기관이 세워짐으로써 오늘날의 남포동과 광복동·동광동 등은 중심시가지로 발전되었다. 그후 대신동과 초량동 쪽으로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점차 근대적인 도시로 발달했다. 해방 이후 공업화가 이루어지면서 시청 부근의 도심과 함께 서면과 온천장 일대에 부도심지가 형성되는 등 공업지역과 상업지역이 재편되어 도시구조가 단핵구조에서 다핵구조로 변모했다.
- 시청을 중심으로 서쪽으로 충무로·대청로·광복로 일대에 중심시가지가 형성되어 있고, 구덕로를 따라 대신동 방면으로 주거지역이 이어진다. 시청에서 서면(부전동 일대), 온천장(온천동 일대), 구서동을 잇는 부산의 간선도로인 중앙로(中央路)를 따라 남북으로 시가지가 발달해 있으며, 시의 서부에 위치한 낙동강을 따라 길게 형성된 주거 및 공업지역의 신시가지는 남동로·가야로·만덕로에 의해 기존 시가지에 연결된다. 또한 동서방향의 수영로·충렬로·동백로 등은 기존시가지와 서부 해안가에 형성된 대연동·남천동·광안동 일대의 시가지 및 해운대 일대를 연결한다.
- 남포동 일대 중심시가지는 쇼핑 센터를 비롯한 서비스 업종이 밀집된 서부지역과 중앙로를 따라 그 연변에 밀집한 언론·금융·사무실 등의 업무지구로 구분된다. 서면 일대는 중심시가지에 버금가는 부도심으로서 새로이 중심업무기능이 밀집되어 있으며, 온천장 일대는 서비스업을 중심으로 크게 번화해졌다. 중앙로를 따라 형성된 시가지는 주거·상업·공업 기능들이 혼재되어 있어 공업시설의 이전이 요구된다. 낙동강변의 북구·사하구 지역에는 대표적인 공업지역이 형성되어 있으며, 대단위 택지개발이 진행되어 새로운 주거지역으로도 각광받고 있다. 지질은 하부에 중생대 백악기의 기저퇴적암층인 송도층이 있고, 시의 북부와 중부는 송도층이 위를 덮거나 불국사산성화성암류(佛國寺酸性火成岩類)가 관입해 있고, 서부는 유문암 및 안산암질암(安山岩質岩)으로 되어 있다. 낙동강과 수영강 하구 및 연안에는 신생대 제4기의 충적층이 넓게 분포하고 있다. 지형은 대체로 노년기의 구릉성 산지와 이들 산지 사이에 발달한 소침식분지로 이루어진 낙동강 동부지역 및 대부분 저평한 충적평야로 이루어진 낙동강 서부지역으로 구분된다. 해안선의 출입이 복잡하고 수심이 깊으며, 파도로 인하여 해안침식이 왕성하다. 지형적으로 태백산맥의 말단인 포항구조분지에서 출발하여 남서방향으로 진로를 바꾸어 달리던 지맥이 대한해협에 몰입되면서 소반도·도서 그리고 만입(灣入) 등이 발달하고 있다. 그 배후에는 높이 500m 내외의 구릉성 산지가 독립적으로 분포하고 여기서 뻗어나온 산각들이 완만한 경사로 해안으로 뻗어내린다. 이와 달리낙동강 서부는 높이 5m 이하의 삼각주가 발달하여 넓은 곡창지대를 이루고 있다. 시의 북쪽 경계에 있는 주산인 금정산(金井山:802m)에서 남서방향으로 상학산(上鶴山:638m)·백양산(白陽山:642m)·고원견산(高遠見山:504m)·구덕산(九德山:502m)·시약산(蒔藥山:590m)·승학산(乘鶴山:496m) 등으로 이어지는 산맥은 다대포의 몰운대에서 대한해협에 몰입하며, 부산을 동서로 구분하는 자연적인 경계를 이루고 있다. 시의 동쪽으로 개좌산(449m)·구곡산(九曲山:435m)이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다시 장산(長山:634m)·금련산(金蓮山:427m)·황령산(荒嶺山:428m)·봉래산(蓬萊山:395m)으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산맥이 남서방향으로 솟아 있다. 이러한 산맥들은 하천의 개석작용에 의해 연속되어 있지 않고 독립된 산지로 존재한다. 평지의 발달은 산맥과 산지 사이를 따라 길게 형성되어 있으며, 시가지의 발달도 긴 띠 모양을 이룬다.
- 시의 서부에는 낙동강을 중심으로 형성된 삼각주의 거대한 충적평야가 발달해 있고 그 서쪽으로 금병산(錦屛山:241m)·옥녀봉(玉女峰:336m)·굴암산(屈岩山:662m)·보배산(479m)·봉화산(烽火山:278m)으로 이어지는 산맥이 시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특히 낙동강이 흐르는 이곳은 양산천이 합류한 후 하천의 폭이 넓어지고 그 양단에 발달한 범람坪?하구의 삼각주로 이어지는 강의 하류에 해당한다. 낙동강은 삼각주를 지나면서 낙동강 본류와 서낙동강·평강천으로 분류(分流)하며, 강의 하구에는 토사의 퇴적작용으로 형성된 크고 작은 사구가 발달했다.
- 사하구 하단동과 강서구 명지동 사이를 잇는 낙동강 하구둑의 준공으로 부산시의 식수원 공급이 안정되었고 김해평야를 염해(鹽害)로부터 보호해줄 뿐만 아니라 3.30㎢의 국토확장과 부산-진해 간의 거리를 10km 단축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경상남도 해안지방과의 교통로로도 이용되고 있어 거리와 시간을 단축시켰다. 양산시의 원효산에서 발원한 수영강(水營江)은 금정산에서 발원한 온천천(溫泉川)과 합류하면서 수영만에 유입한다. 강의 상류에는 부산시민의 식수원인 회동저수지가 있고, 하류에는 수영만의 수질을 보전하기 위한 종합하수처리장이 설치되어 있다. 백양산에서 발원하여 남류하는 동천(東川)은 수정산에서 발원한 감내천(甘乃川)과 합류하면서 부산만에 유입한다.
- 부산의 부도심인 서면 일대를 지나는 이 하천은 현재 거의 복개되었으며, 각종 폐수에 의한 오염이 심각하다. 고원견산에서 발원한 보수천(寶水川)과 구봉산에서 발원한 부산천(釜山川)이 부산만에 유입하고, 장산에서 발원한 해운대천이 수영만에 유입한다. 그밖에 낙동강으로 유입하는 지류로는 괴정천·학장천·구포천·화명천 등이 있다. 과거에 부산의 중심지였던 동래지방을 중심으로 해안과 강변에서는 신석기시대의 유적이, 내륙의 구릉지대에서는 청동기시대의 유물·유적이 많이 발견되고 있어 일찍부터 인간의 거주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삼한시대에는 독로국(瀆盧國)이 이곳에 있었던 것으로 비정된다. 〈대동지지〉에 의하면 본래 거칠산국(居漆山國) 또는 장산국(山國)이었는데 79년(탈해왕 23)에 신라가 이곳을 공격하여 거칠산군(居漆山郡)을 설치했으며, 757년(경덕왕 16)에 동래군(東萊郡)으로 고쳐 양주(良州:양산) 관하에 두었다고 되어 있다. 이때 동평(東平)과 기장(機張)을 영현으로 관할했다. 고려시대에는 1018년(현종 9)에 울주(蔚州:울산)의 속현이 되었다가 후에 현이 되었다.
- 조선초 1397년(태조 6)에 진을 설치하고 병마사가 판현사를 겸했다. 1423년(세종 5)에 부산포를 개항하여 왜관을 설치했으며 첨절제사를 두었다가 후에 현으로 바꾸었다. 1510년(중종 5)에 삼포왜란이 일어나 왜관을 폐쇄했다가 1547년(명종 2)에 다시 왜관을 설치하면서 왜인들이 왕래하는 입구라 하여 동래를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복구되기도 했으며, 1749년(영조 25)에 동래부에 독진이 설치되어 군사적으로 한층 강화되었다. 별호는 봉래(蓬萊)·봉산(蓬山)·내산(萊山)이었다.
- 조선시대에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慶尙左水軍節度使營)을 비롯하여 부산포·다대포·두모포·개운포·포이포·서평포 등 많은 수군 방어기지가 있었다. 1876년(고종 13)에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어 최초의 개항장이 부산포에 설치되었다. 1877년에 조계(租界)가 설치되고 본·중국·영국의 영사관이 자리잡았으며, 1890년에는 동래감리서가 설치되었다. 지방제도 개정으로 1895년에 동래부 동래군, 1896년에 경상남도 동래부가 되었다. 1903년 군으로 강등되었다가 1906년 다시 부로 승격되었으며, 이 해의 월경지 정리로 양산군의 두입지(斗入地)인 좌면이 동래에 편입되었으며, 일본 영사관이 폐지되고 이사청(理事廳)이 설치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 때 부산부의 부산면·사하면·사중면의 일부만이 부산부로, 나머지 지역은 동래군으로 조정되었다. 부산부의 북면·좌이면·사하면은 그대로, 용주면·동하면이 남면으로, 읍내면·서상면·동상면이 동래면으로, 서하면·동평면·남면이 서면으로, 사상면·좌이면이 사상면으로 통합되고, 기장군(機張郡)이 폐지되어 읍내면·동면·남면이 기장면으로, 동면·중북면이 일광면으로, 상북면·중북면이 장안면으로, 하북면·하서면이 정관면으로, 상서면·하서면이 철마면으로 통합되어 동래군에 병합되었다. 1925년 경상남도 도청을 진주에서 부산으로 옮겨 부산은 계속 성장했으며, 1931년에 동래면·구포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43년에 동래군의 동래읍·사하면·남면과 북면의 2개리가 부산부로 편입되어 면적이 확대되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1950년 8월 18일부터 1953년 8월 15일까지 임시수도였다. 전쟁중에 급격한 인구증가가 이루어져 1955년에 인구 100만 명을 넘어서자 1957년에 구제(區制)를 실시하여 6개구를 설치했다. 1960년에 이곳에서 불을 당긴 부정선거 규탄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어 자유당 정권이 물러나게 되었다. 1963년에 정부 직할시로 승격하면서 동래군 구포읍·사상면·북면 등을 편입했으며, 이때 동래군은 울주군 서생면을 편입했다.
- 1973년에 동래군이 폐지되어 양산군에 편입되었으며, 1983년에 경상남도 도청이 창원시로 이전했다.
- 년 남구, 1978년에 북구가 부산진구에서, 1983년에 사하구가 서구에서, 1980년 해운대구,
- 1988년에 금정구가 동래구에서 분리·신설되었다.
- 1978년에 김해군 대저읍 일원과 명지면 일부, 가락면 일부가 북구에 편입되었고,
- 1989년에 김해군 가락면·녹산면과 의창군 천가면이 편입되어 강서구가 신설되었다.
- 1994년 12월 부산직할시가 부산광역시로 개칭되었으며, 과대자치구였던 동래구, 남구, 북구가 각각 동래구·연제구, 남구·수영구, 북구·사상구로 분구되었다. 또한 1995년 전국행정구역개편으로 양산군의 장안읍·기장읍·철마면·일광면·정관면이 기장군으로 신설되어 통합되었다.
- 8·15해방 당시인 1945년 부산은 서울 다음가는 대도시였지만 인구수는 28만 1,160명이었다. 그러나 6·25전쟁을 거치며 피난민이 대거 정착하여 1955년에는 100만 명을 넘는 대도시로 성장했다. 그후 1960년 116만 3,671명, 1970년 184만 2,259명, 1980년 315만 9,766명, 1990년 379만 7,566명으로 매년 전국의 평균증가율을 훨씬 웃돌며 성장했다. 1960, 1970년대는 공업화와 더불어 인구가 급속히 늘어났으나,
- 1980년대에 들어 제조업 부문의 고용기회 성장률이 감소되고, 전입인구율의 감소에 따라 인구증가 속도가 크게 떨어지고 있다.
- 1990년의 인구밀도는 7,174명/㎢으로 1960년 5,297명에 비하여 1.4배가, 전국대비 인구비율은 8.9%로 1960년 4.6%에 비하여 약 2배가 증가했다. 그러나 시역의 확장으로 1996년의 인구밀도는 5,183명/㎢으로 오히려 낮아졌다. 1996년 현재 도시내 인구는 사하구(39만 2,206명)·동래구(31만 3,031명)·남구(32만 539명)·부산진구(46만 2,001명)의 순으로 많이 분포하며, 중구(6만 5,480명)·강서구(7만 3,322명)·기장군(7만 2,044명)은 인구가 매우 적다. 한반도 동남단에 위치하고 바다에 면해 있어 해양성기후의 특징이 나타나며, 북서쪽의 소백산맥이 겨울의 찬 북서풍을 막아주어 온화한 편이다. 연평균기온 14.1℃ 내외, 1월평균기온 2.2℃ 내외, 8월평균기온 25.9℃ 내외이다. 연교차는 23.7℃로 대구 27℃, 광주 26.4℃, 전주 27.5℃에 비해 작은 편이며, 일최저기온 0℃ 이하의 연간일수도 51일에 불과하다.
- 연평균강수량은 1,472.7㎜ 정도로 다우지역에 속하며, 그 가운데 46.5% 이상이 여름철인 6~8월 사이에 내린다.
- 평균풍속이 4.3m/s로 다른 지역에 비해 월등히 높다.
- 1994년 현재 총인구의 1.0%에도 못 미치는 3만 2,765명에 불과하나 경지율은 16.2%로 대도시로서는 높은 편이다. 총 경지면적 85.9㎢ 중 밭 16.4㎢, 논 69.4㎢로 김해평야를 중심으로 벼농사가 주로 이루어진다. 과거 1960, 1970년대를 거치면서 급속한 도시개발에 따른 농업인구의 감소와 농경지의 대규모 전용을 경험했으나, 1980년 이후 시역의 확대가 계속되면서 농가인구와 농경지가 다시 증가하게 되었다. 더욱이 농업의 최적지인 김해평야가 시역에 포함되면서 전체 경제에서 차지하는 농업의 비중이 증대되어 중장기 계획에 의한 영농이 이루어지고 근교농업의 발달로 원예농업과 낙농업도 활발하다. 특히 채소재배 면적이 급격히 증가하여 무·배추·파 등이 많이 출하된다. 과일로는 배·복숭아·감 등이 생산되나 많은 재배지가 도시개발용지로 전용되고 있다. 바다와 낙동강에 접해 있어 해면어업과 내수면어업이 발달하여 일찍부터 어업이 활발했고, 오늘날에는 한국 최대의 어항으로 성장했다.
- 어류와 갑각류를 중심으로 어획고가 증가하고 있으며, 미역 등의 양식업도 활발하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인에 의해 시작된 제조업은 해방 전 식료품공업, 방직업, 요업, 자재·목제품 공업 등 경공업이 주종을 이루었고, 금속·기계 등 중화학공업은 미미했다.
- 해방 후 6·25전쟁을 거치면서 한국 제2의 도시로서 노동력이 풍부하고 도시 자체의 많은 인구를 바탕으로 시장 잠재력이 높아 1950년대 경남모직·한국염료·부산방직 등의 신설업체가 대거 설립되었다. 그후 1960, 1970년대에 들어 수입대체산업의 육성과 수출주도형 경제개발 추진에 힘입어 섬유·금속·기계와 더불어 화학공업을 중심으로 한 제조업이 급격히 성장했다. 그러나 1980년대를 맞으면서 제조업의 성장이 다소 위축된 것은 공업배치법에 의한 대도시지역내 공장의 신설 억제와 공업용지의 부족이 큰 요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 1994년 현재 5명 이상의 종업원을 가진 사업체수는 9,304개소이며, 종업원수는 24만 5,498명에 달한다. 업종별로 종업원수는 화학공업이 30.9%, 금속·기계 공업이 27.5%, 섬유공업이 22.2%로 중화학공업 중심의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고용규모를 기준으로 지난 20여 년간의 제조업체 증가율을 전국과 비교하면 5~49명 규모의 제조업체 증가율은 높은 반면에, 50명 이상 규모의 업체수의 증가율은 낮다. 그결과 소규모 제조업의 고용규모분담비율이 크게 늘어났다. 광공업 통계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1996년 현재 5~49명 규모의 업체수는 전체 제조업의 90.3%이며, 300명 이하의 중소기업의 수는 99.3%에 달한다.
- 1970년대 이후 전국에서 차지하는 제조업체의 비중이 감소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예를 들면 1970년 부산 제조업의 부가가치액과 생산액의 전국 비중은 각각 15.4%와 16.7%이던 것이 1990년에는 모두 7.7%로 하락했다. 부산 제조업의 특화업종은 전국 출자액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고무제품 제조업이다.
- 부산의 제조업체는 항구를 중심으로 주로 도시 내부에 입지했으나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새로운 공업단지의 조성과 공장 이전 정책으로 서부의 낙동강 연안으로 입지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제조업의 40% 이상이 주거지역을 비롯한 비공업지역에 산재하고 있다.
- 부산의 대표적인 공업지역인 사상공업단지는 시가지내에 무질서하게 산재한 공장을 집단화하여 도시환경을 개선하고 새로운 공업용지를 공급하기 위하여 조성되었지만, 단지내 하수시설의 미비와 공해 유발 업종의 집중으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 공단은 과거 벼농사가 이루어지던 저습지를 매립하여 단지를 조성한 관계로 여름철 집중호우시에 엄청난 피해를 당하는 상습침수지역이기도 하다.
- 부산의 제조업체들은 도시내 공업용지 부족으로 1970년대말부터 부산의 인근 주변 시·군으로 계속 이전되고 있다. 일찍부터 일본과의 무역이 활발하여 상업이 발달했으며, 조선 후기 개설된 장시로는 동래장(2·7일)·부산장(4·9일)·독지장(禿旨場:1·6일)·좌수영장(5·10일) 등이 있었다. 장시에서는 수공업품·농산물·어염 등이 물물교환되거나 쌀·포목·화폐 등을 매개로 상품이 교환되었고, 행상을 전업으로 하는 보부상이 큰 역할을 했다. 근대적 상업의 효시로서 일제강점기 때 한·일 합작 시장인 부평동시장이 전국 최초로 설립되었다. 해방 후 침체되었던 상업은 1960년대 산업화와 함께 다시 성장했으며, 광복동·남포동·창선동 등이 중심상업지가 되었고, 특히 국제시장은 부산시 소비재 판매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 시가지가 부산진과 동래 쪽으로 확대되면서 서면·온천장 등지에 쇼핑 센터 등이 건립되어 새로운 상업 중심지가 되었다.
- 부산항은 1876년 강화도조약의 체결에 의해 대외적인 정식무역항으로 개항된 이후 1960년대부터 시작된 수출주도형 공업화 정책에 힘입어 해상물동량이 증가되고 항만시설도 꾸준히 확충되었다. 1990년 현재 연간 하역능력은 4,338만 5,000t에 이르고 전국 수출입 화물의 58% 이상을 담당하는 한국 최대의 항만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수출입 물동량의 증가에 대비한 항만의 시설확충과 하역능력제고의 문제가 대두됨에 따라 1985년 12월 신선대부두 건설을 시작으로 컨테이너 관련장비 현대화를 포함한 제3단계 개발사업이 1991년 6월에 준공되어 연간 96만 개의 컨테이너 화물을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교육" 전통적인 교육기관으로는 유일한 관학인 동래향교가 임진왜란 후 1635년(인조 13)에 중건되어 전해지며, 안락서원(安樂書院)은 1652년(효종 3)에 동래부사 윤문거에 의해 창건되었다. 1898년 동래유지 신명록은 동래부학교(東萊府學校)를 설립했고, 그후 동래 기영회에 의해 삼락학교(三樂學校)가 설립되어 동명학교(東明學校)·사립동래고등보통학교로 발전되었다. 여성교육기관인 양정숙(養貞塾)과 구명학교·옥성학교·명림학교가 차례로 설립되어 근대교육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1994년 현재 유치원 401개소, 초등학교 250개교, 중학교 150개교, 고등학교 116개교, 전문대학 12개교, 대학 13개교가 있으며, 그중 종합대학은 부산대학교·동아대학교·경성대학교·동의대학교·부산수산대학교·인제대학교·한국해양대학교·부산여자대학교·고신대학교·부산가톨릭대학·부산외국어대학교·동서대학교 등 12개교이다.
- 문화재는 국가지정문화재로서 국보 5점, 보물 14점, 사적 4점, 천연기념물 7점, 중요무형문화재 45점이 있고, 지방문화재로서 유형문화재 40점, 기념물 40점, 무형문화재 9점 등이 있다.
- 박물관으로는 부산광역시립박물관과 부산대학교·동아대학교·경성대학교·동의대학교·부산수산대학교에 각각 박물관이 있다. 선사시대 문화재로는 구석기시대의 청사포 유적과 신석기시대의 동삼동·영선동·아치섬·암남동의 패총(貝塚)과 영선동 패총에서 출토된 융기문토기(隆起紋土器:보물 제597호)가 있다.
- 청동기시대의 유적으로는 노포동·반여동·온천동 등지의 주거지와 감천동지석묘의 분묘, 유물로는 동모2점(銅二點: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8·19호), 동파두(銅把頭: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0호)·마제석검 등이 있다. 고분군으로는 복천동고분군(福泉洞古墳群:사적 제273호)·연산동고분군(蓮山洞古墳群:부산광역시 기념물 제2호)·반여동고분군·오륜대고분군·두구동임석유적·서동토광묘 등이 있고, 유물로는 마두식각배(馬頭飾角杯:보물 제598호)가 있다. 삼국시대에 창건된 범어사(梵魚寺)는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데, 3층석탑(보물 제250호)·석등(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6호)·당간지주(幢竿支柱: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5호)·원효암동3층석탑(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1호)·원효암서3층석탑(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2호) 등의 유물이 있다. 그밖의 불교유물로는 금동보살입상(金銅菩薩立像:국보 제200호)·영태2년명납석제호(永泰二年銘蠟石製壺:국보 제233호)·의령보리사지금동여래입상(宜寧菩提寺址金銅如來立像:보물 제731호) 등이 있다.
- 고려시대 불교문화재로는 만덕사지(萬德寺址:부산광역시 기념물 제3호)·3층석탑·당간지주·고려5층석탑(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3호)·범방동3층석탑(凡方洞三層石塔: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3호)·사직동석곽묘(社稷洞石槨墓) 등이 있다.
- 조선시대의 건축물로는 동래부동헌(東萊府東軒: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다대포객사(多大浦客舍: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호)·망미루(望美樓: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호)·독진대아문(獨鎭大衙門: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호)·동래향교(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6호)·범어사대웅전(보물 제434호) 등이 있으며, 임진왜란의 선열 유적으로는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 공을 모신 충렬사(忠烈祠: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7호), 송공단(宋公檀:부산광역시 기념물 제11호), 부산첨사 정발 장군을 모신 정공단(鄭公檀:부산광역시 기념물 제10호), 다대첨사 윤흥신 공을 모신 윤공단(尹公檀:부산광역시 기념물 제9호), 의용단 및 임진동래의총 등이 있다. 그밖에 중요문화재로는 개국원종공신녹권(開國原從功臣錄卷:국보 제69호)·초충도수병(草蟲圖繡屛:보물 제595호)·궁궐도(宮闕圖:보물 제596호)·조대비사순칭경진하도병(趙大妃四旬稱慶陳賀圖屛:보물 제732호)·헌종가례도병(憲宗嘉禮圖屛:보물 제733호)·조서경무과급제왕지(趙瑞卿武科及第王旨:보물 제954호)·쌍자승자총통(雙字勝字銃筒:보물 제599호)·안중근의사유묵(보물 제569-6호)이 있다. 산성으로는 금정산성(사적 제215호)을 비롯하여 동래읍성지·부산진지성(일명 子城臺,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7호)·좌수영성지(부산광역시 기념물 제8호)·동평현성지·범천증산성(凡川甑山城) 등이 있고, 응봉·구봉·황령산·계명봉·간비오산·천성연대 등의 봉수대가 있다.
- 무형문화재로는 동래들놀음(중요무형문화재 제18호)·수영들놀음(중요무형문화재 제43호)·대금산조(중요무형문화재 제45호)·좌수영어방놀이(중요무형문화재 제62호)·동해안별신굿(중요무형문화재 제82의 가호)과 함께 수영농청놀이(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2호)·동래학춤(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3호)·동래지신밟기(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4호)·충렬사제향(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5호)·부산농악(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6호)·다대포후리소리(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7호)·가야금산조(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8호) 등이 각각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 천연기념물로는 범어사등나무군생지(천연기념물 제176호)·낙동강하류철새도래지(천연기념물 제179호) 등 8점이 지정되어 있다. 전해오는 민속놀이는 윷놀이·연날리기·연등놀이 등의 성인놀이와 아동놀이가 있으며, 민요로는 〈모찌기노래〉·〈논매는노래〉 등의 노동요와 〈지신밟기〉·〈성주풀이〉 등의 의식요가 전해진다.
- 설화로는 〈범어사 창건 이야기〉, 성지곡·신선대에 대한 문헌설화와 동래정씨 시조묘, 동래온천에 대한 구비설화 등 다수가 전한다. 부산시민회관을 비롯한 16개의 공연장과 30개의 전시실을 통해 연중 활발한 문화행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1980년 충무공의 부산포 해전승전일인 10월 5일을 부산시민의 날로 제정한 후 매년 각종 문화·체육 행사가 벌어져 시민의 축제일이 되고 있다.
- 언론기관으로는 부산일보·국제신문·부산매일신문 등 3개 신문사와 한국방송공사(KBS) 부산방송본부, 부산문화방송, CBS 부산방송, 주식회사 부산방송(PSB) 등이 있다.
- 체육시설로는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구덕경기장과 최근 늘어가는 경기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사직동에 건립한 부산종합운동장이 있으며, 그밖에 수영 요트 경기장, 영도 승마장, 영도 사격장 등이 있다.
- 1996년 현재 종교기관으로는 개신교 교회 1,153개소, 천주교 교회 67개소, 불교 사찰 676개소, 천도교 교당 3개소, 원불교 교당 36개소 등이 있다. 사회복지시설은 보육시설 25개소, 모자시설 8개소, 양로원 6개소 등을 포함하여 모두 67개소에 1만 2,971명을 수용하고 있다.
- 의료시설로는 부산대학교 병원, 고신의료원, 메리놀 병원, 부산 백병원 등 종합병원 26개소, 병원 44개소, 의원 1,323개소, 치과의원 718개소, 한의원 560개소, 부설의원 34개소, 조산소 43개소, 보건소 관련 의료기관 16개소 등이 있다. 일찍부터 일본과의 무역이 활발하여 상업이 발달했으며, 조선 후기 개설된 장시로는 동래장(2·7일)·부산장(4·9일)·독지장(禿旨場:1·6일)·좌수영장(5·10일) 등이 있었다. 장시에서는 수공업품·농산물·어염 등이 물물교환되거나 쌀·포목·화폐 등을 매개로 상품이 교환되었고, 행상을 전업으로 하는 보부상이 큰 역할을 했다. 근대적 상업의 효시로서 일제강점기 때 한·일 합작 시장인 부평동시장이 전국 최초로 설립되었다. 해방 후 침체되었던 상업은
- 1960년대 산업화와 함께 다시 성장했으며, 광복동·남포동·창선동 등이 중심상업지가 되었고, 특히 국제시장은 부산시 소비재 판매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 시가지가 부산진과 동래 쪽으로 확대되면서 서면·온천장 등지에 쇼핑 센터 등이 건립되어 새로운 상업 중심지가 되었다. 부산항은 1876년 강화도조약의 체결에 의해 대외적인 정식무역항으로 개항된 이후 1960년대부터 시작된 수출주도형 공업화 정책에 힘입어 해상물동량이 증가되고 항만시설도 꾸준히 확충되었다.
- 1990년 현재 연간 하역능력은 4,338만 5,000t에 이르고 전국 수출입 화물의 58% 이상을 담당하는 한국 최대의 항만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수출입 물동량의 증가에 대비한 항만의 시설확충과 하역능력제고의 문제가 대두됨에 따라 1985년 12월 신선대부두 건설을 시작으로 컨테이너 관련장비 현대화를 포함한 제3단계 개발사업이 1991년 6월에 준공되어 연간 96만 개의 컨테이너 화물을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교통" 철도·도로·해상·항공 등의 교통수단이 고루 발달해 있으며, 이들을 연결하는 적환지(積換地)로서 교통의 요지이다.
-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되었고, 곧 도시 내 대중교통 수단인 노면전차도 개통되었으며, 그후 도로건설이 추진되면서 시가지는 도로를 따라 대상(帶狀)의 방사상 형태를 갖게 되었다. 철도는 경부선과 동해남부선이 연결되고, 고속도로는 경부고속도로와 남해고속도로가 이어진다. 해상교통은 국제여객선인 페리호가 일본의 시모노세키[下關]를 주 7회, 부산-오사카[大阪], 부산-고베[神戶], 부산-하카타[博田] 간을 취항하고 있으며, 정기연안여객은 제주·거제·통영·여수 등 총 13개 항로에 1일 최대 약 1만 1,700명을 수송하고 있다. 강서구에 위치한 김해국제공항에는 국내선과 국제선이 취항하고 있다. 지형적인 여건으로 인해 도로율이 낮고 도로 체계상 통과우회도로가 미비해 현재 극심한 교통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시내에는 도심지에서 발생하는 항만화물을 우회처리하기 위한 부두도로, 제1도시고속도로와 간선인 중앙로가 있으며, 도심순환도로의 기능을 수행하는 제2도시고속도로가 1994년 건설되었다. 도로시설의 공급부진에 따른 교통혼잡의 해소를 위해 지하철을 운영하고 있다.
- 노포동-신평동간 총길이 32.5km인 1호선을 1994년 6월에 개통했고, 호포동-서면동간 총길이 22.4km인 2호선을 1999년 6월에 개통하여 운행함으로써 극심한 도심교통난 해소에 기여하고 있다. 도로총길이 2,765.7km, 도로포장률 94%이다(1995). 동래온천 및 해운대온천과 많은 해수욕장을 비롯하여 수려한 해안, 역사유적 등 관광자원이 풍부하고, 경주권·한려수도권·지리산권·제주권 등 관광권역들을 접속하는 관광거점도시로서 그 잠재력이 매우 풍부하다.
- 조선8경의 하나인 해운대는 온천과 함께 한국 최대의 해수욕장으로 약 40만㎡의 백사장과 송림이 조화를 이룬 해안경승지이다. 인근에는 조선비치·하이야트·파라다이스비치 등의 특급 호텔과 일반 호텔이 있어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그밖에 다대포와 몰운대, 젊은이들의 명소가 된 광안리해수욕장·카페촌·송정해수욕장 등이 있다. 태종대는 기암괴석과 울창한 송림이 있어 해금강을 연상하게 하며, 맑은 날씨에는 항도부산의 상징인 오륙도와 대마도가 가까이 보인다. 동래에는 동래온천과 금강공원이 있으며, 금정산성은 산성마을의 막걸리와 염소고기로 유명하다.
- 금정산 중턱의 범어사는 한국 31본산의 하나로 심산선경을 이루어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그밖에 용두산공원·대청공원·성지곡유원지 등과 부산시립박물관, 유엔 묘지가 있으며, 철새도래지로 유명한 을숙도도 부산의 대표적인 관광지이다.
- 부산시는 현재 인근 관광지를 문화·산업 관광자원으로 개발하고자 서울 올림픽 대회 요트 경기 유치를 계기로 수영-송정 간 해변관광단지 및 낙동강 수상공원 조성을 추진하고 있다. 21세기에 이르는 도시개발의 목표는 국내외적인 여건을 고려하여 몇 가지로 설정되고 있다.
- 국제적으로는 개방화시대에 대비하여 국제교역의 중심거점으로서의 지위 확립과 함께 태평양지역의 관문 역할을 강화하고, 국내적으로는 수도권 집중을 분담할 대응 거점을 구축하고 기술혁신을 통한 지역 경제 기반을 구축하는 것이다. 개발전략은 신시가지의 개발을 통한 대규모 업무단지의 조성과 도시기능의 전문화를 유도하는 데 있다. 대도시로서의 교통난·용지난·재정난 등 각종 도시문제를 해결하고, 성장한계를 극복하여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지역특성에 따라 낙동강권·해양권·도심권·내륙권으로 구분하여 종합적·미래지향적인 권역별 개발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 최초의 해상신도시 건설을 통해 계획적인 도심의 구축과 교통 등 숙원사업에 대한 개발이익의 투자를 통해 도시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개발잠재력이 풍부한 낙동강권에는 신산업단지·신국제공항·주거단지가 조성될 전망이다. 부산광역시의 최우선 과제인 교통시설의 확충은 해상신도시, 낙동강권개발과 연계한 2개의 도시 광역 순환도로망을 구축해 기존의 방사형 연결도로를 환상방사형 연결도로로 완비할 계획이다.
- 지하철은 1999년 현재 2개 노선이 운행중이며 2007년까지 3개 노선을 추가로 건설하여 수송분담률 40%의 대중교통수단으로 자리잡을 계획이다. 또한 시역의 70%를 차지하고 있는 도심산지를 적극 활용하여 주거단지 및 시민의 휴식공간으로 조성하고, 산간도로망을 개설하여 현재의 도심 교통난을 해소시킬 계획이다.
- 도심권 및 주변 관광단지, 수영-송정간 해변 관광단지, 금정산 주변지구, 낙동강 수상공원의 권역별 관광개발을 통해 명실상부한 국제적 관광명소" 개발할 예정이며, 그밖에 상·하수도 등 생활기반 시설의 투자를 통해 쾌적한 도시환경을 조성해나갈 계획이다. 볼거리 로는 송도해수욕장의 케이블카.(해상크루즈) 해안산책로. 이기대 해안산책로. 영도 제이송도 해안산책로. 태종대. 기장 용궁사. 용두산공원. 해운대 해수욕장. 광안리해수욕장. 다대포 해수욕장. 금정산. 기타등등... 부산의 특산물 1번째=기장미역, ☆역시나 부산하면 기장미역, 2번째=기장멸치 ☆부산은 주로 해산물이 특산물이에요. 3번째=신발. ☆부산의 신발은 우리나라 에서 외국으로 수출이 잘 되요^^ 4번=조개. ☆조개 또한 자갈치 시장에 가면 볼 수 있어요 5번=구포국수, ☆국수도 부산의 특산물이에요. 보너스, 소금(천일염) & 청정해역의 맑은 바닷물을 원료로 사용하여 생산한 신안군 천일염은 세균 활동 억제작용이 월등하여 김치 & 된장을 장기간 보관하는데 탁월한 효과가 있음(물러짐 방지효과) 새우젓,
- 싱싱한 돗대기 새우의 유일한 산란지인 신안 임자도의 전장포 근해 에서 6월에 잡은 품질 좋은 새우를 곧바로 천일염으로 담구어 저온 숙성시켜 맛과 향이 뛰어나며 핵산이 함유된 순수한 자연식품 입니다, □ 다시마,
- 서남해안의 청정해역에서 채취하여 자연해풍으로 건조한 다시마는 맛과 빛깔이 뛰어나며 칼슘과 철분이 많은 자연식품임 부산에서 재배되는 식품" 1.검정쌀, 2 참외 , 3.일광배, 4.장안,5.당근, 6 토마토, 7가락쌀, 8. 깻잎, 9 명지대파, 10 미나, 11.미역, 12.멸치, 13,어묵 부산의 주요생산품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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