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28일 토요일

김구 金九

김구(金九, 1876. 7. 11(음)고종 13)~1949. 6. 26) 자 연상(蓮上), 호 백범(白凡), 초호(初號)는 연하(蓮下) 본관 안동(安東) 출신지 황해도 해주 (선생은 1876년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基洞)에서 부친 김순영과 모친 현풍 곽씨 낙원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 아명은 창암(昌巖), 본명은 김창수(金昌洙), 개명하여 김구(金龜, 金九), 법명은 원종(圓宗), 환속 후에는 김두래(金斗來)로 고쳤다. 

인조 때 삼정승을 지낸 방조(傍祖) 김자점(金自點)이 권세 다툼에서 청병(淸兵)을 끌어들였다는 역모죄로 효종의 친국을 받고 1651년 사형당하자, 화를 피하여 선조되는 사람이 그 곳으로 옮겨갔기때문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이명으로 창암(昌巖), 창수(昌洙), 두래(斗來), 구(龜), 구(九), 자는 연상(蓮上), 연하(蓮下), 호는 백범(白凡)이다. 선생의 가문은 경순왕의 자손으로서 ‘김자점의 난’으로 멸문지화를 당하게 되자 서울 부근에 이사하였다가 다시 황해도 해주로 이주, 양반의 신분을 감춘 채 11대에 걸쳐 그곳에서 정착하게 되었다. 선생의 부친은 가난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강한 자존심과 저항정신의 소유자였고 어머니는한번도 자세를 흐트린 적 없는 강한 신념과 인내심을 지닌 대표적인 한국의 어머니였다. 이러한 가정에서 태어난 선생은 선천적으로 강인한 체질과 대담 솔직한 성격이었으나 말동무나 같이 놀아줄 친구가 없다는 외로움과 가난이라는 굴레는 훗날 과묵한 성격을 형성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4세 때에 당시 열에 아홉은 사망하였다는 천연두를 앓았으나 천행으로 목숨을 건졌으며 9세가 되던 해에 비로소 가난과 양반들의 속박 밑에서 국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는 길만이 양반들로부터 모욕과 천대, 멸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여 사랑채를 서당으로 만들고 이생원(李生員)을 초빙하여 공부를 시작하였다. 16세 때에 당시(唐詩), 대학(大學), 과문(科文)을 익혀 17세(1892)가 되던 해에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당시 매관매직으로 타락한 과거에 실망을 느꼈다. 

이후 풍수, 관상에 관한 책과 손무자(孫武子), 오기자(吳起子), 육도(六韜), 삼략(三略) 등의 병서를 섭렵했다. 이듬해(1893) 동학에 입도하여 황해도 도유사(都有司)의 한사람으로 뽑혔으며 1894년 충북 보은에서 최시형 대수주(大首主)를 만나 팔봉도소접주(八峰都所接主)란 첩지를 받고 동년 9월 탐관오리의 척결과 척양척왜(斥洋斥倭)의 기치아래 동학군의 선봉장으로서 병사를 지휘하여 해주성을 공략, 탐관오리들을 추방하려 했으나 관군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1895년 동학의 기강이 점점 무너져 규율을 잃고 백성들의 원망을 사게 되자 선생은 연소의 몸으로 이를 수습하기 어려움을 깨닫고 신천군에 사는 진사 안태훈을 찾아가 몸을 의탁하였다. 당시 그의 아들 안중근은 16세의 어린 나이로 부친을 따라 동학군 토벌에 전념하고 있었으니 두 사람의 만남은 매우 미묘한 것이었으나 나라를 위하는 마음은 같았다. 

이곳에서 선생은 당시 명망이 높은 해서(海西) 거유(巨儒) 고능선(高能善)의 지도로 한학을 배웠다. 하루는 고선생이 아래와 같이 말씀하였다. 선생도 비분에 못이겨 “망하는 나라를 망하지 않도록 붙들 도리는 없습니까?”라고 물으니 고 선생은 “청국이 갑오싸움에 진 원수를 반드시 갚으려 할 것이니 우리 중에 상당한 사람이 그 나라에 가서 국정을 조사하고 그 나라 인물과도 사귀어 두었다가 뒷날 기회가 오거든 서로 응할 준비를 하여 두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말하니 선생도 이에 동감을 표시하고 청국으로 떠날 준비를 하였다. 이리하여 선생은 하직 인사차 안진사에게 들렀다가 그곳에서 만난 김형진과 같이 평양, 함흥, 갑산을 지나 압록강 기슭을 돌아 임강, 환인을 거쳐 관전에서 임경업 장군의 비각을 보고 삼도구에 다다라 그곳에서 300여 명의 의병을 지휘하고 있던 의병장 김이언 의진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선생은 김이언 의병진의 소속으로 1895년 동짓달 초에 고산리 승리의 여세를 몰아 강계(江界)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게 되자 할 수 없이 고향을 향하여 귀국길에 올랐다. 선생은 1897년 7월 사형을 언도 받고 동년 8월 26일 사형집행이 확정되었으나 광무황제의 특사로 사형직전에 집행정지령이 내려짐에 따라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선생이 사형을 면하고 살아 난 데에는 두 번의 아슬아슬한 일이 있었다. 법무대신이 선생의 이름과 함께 사형죄인 명부를 가지고 입궐하여 황제의 칙재를 받았다. 황제께서는 다 재가를 하였는데 그 때문에 입직하였던 승지 중의 하나가 선생의 죄명이 ‘국모보수(國母報讐)’인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서 이미 재가된 안건을 다시 가지고 나아가 임금께 보인 즉 황제께서는 즉시 어전회의를 열어 사형 직전에 목숨을 건질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 승지의 눈에 ‘국모보수’라는 네 글자가 아니 띄었더라면 예정대로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전화가 인천에 가설되고 감리서에 개통된 것이 사흘 전이었다고 한다. 만일 서울과 인천 사이에 전화 개통이 늦게 되었던들 황제의 명령이 인천에 도착하기 전에 벌써 사형이 집행되었을 것이다. 광무황제의 특지로 사형은 면하였으나 일제의 눈치 때문에 석방이 되지 않자 선생은 왜놈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는 탈옥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1898년 3월 9일 밤 탈옥하여 수원, 목포를 거쳐 함평에 도착, 그곳에서 15일간 묵었다. 그리고 보성, 화순, 순창, 담양을 거쳐 올라와 충남 마곡사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모든 세상의 잡념이 식은 재와 같다라는 생각이 들어 출가(법명: 원종(圓宗)하게 되었던 것이다. 낮에는 일하고 밤이면 예불법이며 천수경, 심경을 외우고 보각서장을 배웠다. 다음 해에 평양의 영천암의 주지가 되었지만 출가생활은 은신하기 위한 방법이었으므로 선생의 본색이 들어나 반년도 못되어 환속해서 고향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예로부터 흥해 보지 않은 나라도 없고 망해 보지 않은 나라도 없다. 그런데 나라가 망하는 데는 거룩하게 망하는 것이 있고 더럽게 망하는 것이 있다. 의(義)로써 싸우다가 힘이 다하여 망하는 것은 거룩하게 망하는 것이요, 또 백성이 여러 패로 갈려서 한 편은 이 나라에 붙고 한 편은 저 나라에 붙어서 망하는 것은 더러운 것이다. 이제 왜의 세력이 궐내까지 침입하여 마음대로 하고 있으니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일사보국(一死保國)하는 길밖에 없다.” 

나라 의 아픔에 앞장서다"
1895년 일제가 궁궐을 침입하여 국모를 시해한 을미사변 이후로 한민족의 분노는 전국적인 의병항쟁으로 분출되었고, 을미사변에 뒤이은 김홍집 내각의 단발령으로 의병항쟁은 더욱 거세게 불타 오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선생은 한반도를 둘러싼 정국의 변화를 관망하기로 하고 안악으로 되돌아 오던 중에 1896년 2월에 치하포 주막에서 변복한 일본인 쓰치다(土田讓亮)을 만나게 되었다.  
선생은 보통 무역이나 장사를 하는 일본인 같으면 이렇게 변복하고 다닐 까닭이 없으니 이는 필시 국모를 시해한 삼포오루(三浦梧樓) 놈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의 일당일 것이요, 설사 이도 저도 아니면 우리 국가 민족에 독균임이 분명하니 저놈 한 놈을 죽여서라도 국가의 수치를 씻어 보리라 결심하였다. 
선생은 그가 차고 있던 칼을 빼앗아 그를 찔러 죽이고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고 이 왜놈을 죽였노라’라는 내용의 글과 함께 ‘해주백운방기동 김창수(海州白雲坊基洞 金昌洙)’라는 서명까지 한 후에 이 포고문을 길가에 붙이고 유유히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사건이 일어난 지 3개월 후(1896. 5. 11) 철퇴와 철편을 든 수십 명이 선생의 집에 난입하여 ‘내부훈령등인(內部訓令等因)’이라는 체포장을 내어 보이고 선생을 쇠사슬로 포박 후 해주옥에 가두었다. 
선생은 동년 7월에 인천 감리영(監理營)으로 이감되어 경무관 김윤정의 심문을 받았다. 이때 선생은 방청을 감시하는 일인 경관 도변(渡邊)에게 “소위 만국공법 어느 조문에 통상화친하는 조약을 맺고서 그 나라 임금이나 황후를 죽이라고 하였더냐, 이 개 같은 왜놈아 너희는 어찌하여 감히 우리 국모 폐하를 살해하였느냐 내가 살아서는 이 몸을 가지고 죽으면 귀신이 되어서 맹세코 너희 임금을 죽이고 너희 왜놈들을 씨도 없이 다 없애서 우리나라의 치욕을 씻고야 말것이다”하고 소리 높여 꾸짖자 도변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김 경무관은 사건이 중대하다고 판단하고 감리사 이재정으로 하여금 직접 심문케 하여 감리사가 심문을 개시코자 함에 선생은 먼저 그를 향해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나 김창수는 산촌의 일개 천생이나 국모께옵서 왜적의 손에 돌아가신 국가의 수치를 당하고서는 청천백일하에 제 그림자가 부끄러워서 왜구 한 놈이라도 죽였거니와 아직 우리 사람으로서 왜왕을 죽여 국모의 원수를 갚았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거늘, 이제 보니 당신네가 몽백(국상으로 백립을 쓰고 소복을 입었다는 뜻)을 하였으니 춘추대의에 군부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는 몽백을 아니 한다는 귀절을 잊어버리고 한갓 부귀영화와 총록(임금님의 총애와 봉급)을 도적질 하려는 더러운 마음으로 임금을 섬긴단 말이요?” 
감리사, 경무관, 기타 청상에 있는 관원들이 말을 듣는 기색을 살피건대 모두 낯이 붉어지고 고개가 수그러졌다. 이때 감리사는 선생에게 하소연 하듯 “창수(昌洙)가 지금 하는 말을 들으니 그 충의와 용기를 흠모하는 반면에 황송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비길데 없소이다. 그러나 상부의 명령대로 심문하여 올려야 하겠으니 사실을 상세히 공술해 주시오.”하고 경어를 쓰니 옥 사정들의 대우는 물론 일반 시민들까지 선생을 존경하게 되었다. 선생은 옥중에 있으면서 중국에서 발간된 태서신사(泰西新史), 세계지지(世界地誌) 등을 탐독하여 신학문에 눈을 떠 서양이란 무엇이며 세계형편이 어떠하다는 것을 아는 동시에 선생 자신과 우리나라에 대한 비판도 하게 되었다. 

일제시대 때 교육활동"
고향으로 돌아온 선생은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고 1900년 다시 방랑길에 올라 강화에서 김두래(金斗來)란 이름으로 바꾸고 생활하였다. 그 뒤 김창수라는 본명으로 행세하기가 곤란하여 이름을 거북 구(龜)자 외자로 하고 자를 연상(蓮上), 호를 연하(蓮下)라고 고쳐 지었다. 1901년 12월 부친께서 돌아가신 후 숙부 준영을 도와 농사일을 하며 지내다 교육사업에 전념하기 위해 장연읍으로 이사하여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오순형과 함께 아동교육에 힘썼다. 선생이 장연에서 교육사업에 전념하고 있을 무렵 국내사정은 서구 열강의 끊임없는 세력다툼으로 혼란이 계속되고 있었다. 일제는 1904년 러일전쟁을 야기시킨 후 ‘한일의정서’, ‘한일협정서’ 등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재정과 외교상의 자주권을 박탈하는 등 침략의도를 드러냈으며 마침내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을사조약의 체결 소식이 <황성신문>의 사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통하여 알려지게 되자 선생은 진남포 예수교 교회 청년회의 총무자격으로 서울 상동교회에서 열리는 전국대회에 참석하여 이준, 이동녕등과 함께 을사조약 폐기를 상소하는 등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미천한 백정(白丁)의 ‘백’과 범부(凡夫)의 ‘범’을 따서 호를 삼다" 1908년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에 가입하여 맹렬한 구국운동을 전개하던 중 1910년 국권이 침탈당하자 신민회의 황해도 간부로 서울 양기탁의 집에서 이동녕, 안창호, 이시영, 안태국등과 함께 비밀회의에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 일제가 서울에 총독부를 두었으니 우리도 서울에다 도독부를 두고 각도에 총감이라는 대표를 두어서 국맥을 이어 나라를 다스리게 하고, 만주에 이민계획을 세워 무관학교를 창설하여 광복전쟁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기로 하고 각도 대표를 평안남도에 안태국, 평안북도에 이승훈, 강원도에 주진수, 경기도에 양기탁, 황해도에 선생을 선정하였다. 대표들은 각각 맡은 지방으로 돌아가서 황해, 평남, 평북은 각 15만원, 강원은 10만원, 경기는 20만원을 15일 이내로 준비하기로 결정하였다. 안약으로 돌아온 선생은 기부금 마련을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1911년 1월 5일 일제는 소위 보안법을 적용하여 신민회원들을 일망타진하게 됨에 따라 선생도 일경에 피체되어 서울 경부총감부로 압송되어 2년 형을 언도 받았으며 수감 중에 안명근 사건에도 관련되었다고 하여 15년 형이 병과되어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옥중에서 호를 백범(白凡)이라고 바꾸었다. 이름을 고친 것은 왜놈의 국적에서 이탈한다는 뜻이고 백범이라 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미천하고 무식한 백정(白丁)의 백(白)과 범부(凡夫)의 범(凡)자를 따서 호를 삼은 것으로 천한 백정과 무식한 범부까지 전부가 적어도 선생 만한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하자는 뜻으로 우리동포의 애국심과 지식의 정도를 그만큼 높이지 아니하고는 완전 독립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망명길에 올라 본격적으로 뛰어든 임시정부 활동, 1919년 3월 1일 빼앗긴 국권과 민족을 되찾기 위하여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더욱 심해지자 선생은 국내에서는 활동이 어렵다고 생각하고 재목상과 좁쌀 장사로 가장, 사리원, 신의주를 거쳐 중국 안동에 도착하여 영국 국적인 이륭양행 배에 몸을 싣고 4일만에(1919. 4. 13) 상해 포동나루에 도착하였다. 상해에 도착하자 마자 신익희, 윤현진, 서병호 등과 함께 임시정부 내무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던 중 내무총장인 안창호를 찾아가 임시정부의 문파수를 보게 해달라고 청원하자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는 나이를 고려하여 경무국장에 임명하였다. 경무국장은 농공상국, 지방국, 비서국 등과 함께 내무총장의 보좌기구로써 소관업무는 경찰업무와 도서출판, 저작권 그리고 위생에 관한 사항을 관장하는 것이었다. 또한 왜의 정탐활동을 방지하고 왜의 마수가 어느 방면으로 침투해 들어오는가를 감시하는 업무도 병행하였다. 같은 해 선생은 서병호, 안정근 등과 함께 신한청년단을 조직하고 이사에 피선되어 활약하였으며 1920년 11월 9일에는 상해 대한인거류민단 의원에 피선되기도 하였다. 1922년 7월 임시의정원과 국민대표주비회의 알력과 러시아로부터 받은 독립자금 횡령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선생은 안창호, 김덕진, 신익희, 차이석 등 여러 지사들과 동년 7월 시사책진회를 조직하고 최선의 방책을 연구하여 독립운동의 위기를 타개코자 노력하였다. 

독립활동"
1922년 10월에는 조상섭, 김인전, 손정도, 양기하 등과 회합하여 조국독립에 필요한 실력준비로 군인양성 및 전비조성을 목적으로 노병회(勞兵會)를 조직할 것을 협의하고 발기인이 되어 동월 28일 한국노병회 발기총회를 열어 이를 조직하고 이사장에 선임되었다. 한국노병회는 한국독립의 쟁취를 위하여 향후 10년 이내에 1만 명 이상의 노병(勞兵)을 양성하고 100만원 이상의 전쟁비용을 조성하여 독립군과 전쟁비용이 목적한 수준에 달하면 독립전쟁을 개시하되, 그 전이라도 국가 또는 임시정부가 독립전쟁을 개시한 때에는 이에 참가하여 출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였다. 
1923년 5월 국민대표회의 윤해, 신숙 등 소수인이 대표회의 이름을 팔아 임시의정원의 직권과 체면을 손상케 하니 동년 6월 6일 선생은 내무총장으로부터 내무부령 제1호를 발포하여 국민대표회의 해산을 명령하였다. 그 내용은 “소위 만민대표회에서 6월 2일 연호 및 국호를 정한 것은 대한민국에 대한 모반이다. 2, 3차 귀순을 권유하였으나 일향 고집하여 이와 같이 헌법을 제정함은 조국의 존엄한 권위를 침범함이다. 본 내무총장은 2천만 민족이 공동 위탁한 치안의 책임과 4천년 유업의 신기를 보유할 직권으로서 소수인의 집회 등 6월 2일 이래 일체의 불법행위를 엄금하고 대표회 자체의 즉시 해산을 명한다”라 하였다. 동년 12월 26일에는 상해교민단 의용대의 고문에 추대되었으며 
1924년 4월 9일 국무총리 노백린이 사임하자 내무총장과 국무총리 대리를 겸임하였다가 동월 24일 이동녕이 국무총리로 취임함에 따라 동년 6월 2일에는 노동국총판을 겸임하였다.
1926년 3월 20일 한국노병회 이사장직을 사임하고 동년 12월 14일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하게 되자 윤기섭, 오영선, 이규홍으로 신 내각을 조직한 후 헌법개정안을 의정원에 제출하여 국무령제를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로 개정하여 국무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그 후 임시 정부는 일본의 극심한 탄압, 젊은층의 마르크스, 레닌주의에의 심취, 자금난 등으로 시련을 겪게 된다. 광복군의 국내정진 작전 중 일왕의 항복으로 광복을 맞다, 
1940년에는 중경에서 광복군 총사령부의 성립식을 거행하여 직할 군대를 조직하였으며 임시정부는 기강으로 옮긴 뒤 5월 전당대회를 개최,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 단체를 통합하여 ‘한국독립당’에 모든 역량을 집중시키고 그 집행위원장에 취임하였다. 또한 국사특파단을 섬서성 서안에 상주케 하여 무장부대 편성에 주력하였다. 같은 해 9월에는 임시정부를 기강에서 다시 중경으로 옮긴 뒤 다시 국무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1941년 11월에 중국정부는 한국광복군의 일체 활동을 승인하고 무기와 일체 경비 등을 지원해 주기로 하는 대신 광복군의 모든 행정과 작전은 중국군사위원회의 통할지휘를 받아야 한다는 요지의 ‘한국광복군9개행동준승’을 체결하고, 이어 12월 9일에는 임시정부가 일본에 대하여 대일선전포고를 하여 본격적으로 대일항전에 진력할 수 있는 정치적 기반을 만들어 주었다. 

독립후활동"
1944년 4월에는 개정된 헌법에 따라 다시 주석에 임명되었으며 한, 미 간 군사의 합의를 이끌어 이른바 광복군의 국내정진작전을 위한 곤명 주재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 미군전략 특수공작대) 본부와 ‘한미군사합작 합의사항’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섬서성 서안과 안휘성 부양에 광복군 특별훈련단을 설치하는 한편 미국의 원조로서 본토상륙을 위한 군사기술훈련소를 강소성 정부가 있는 입황(立煌)에 설치하고 특수훈련에 들어갔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무조건 항복함에 따라 이 피나는 노력도 빛을 보지 못하였다. 이때 선생은 “아 왜적 항복! 이것은 내게는 기쁜 소식이었다기 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라고 [백범일지]에서 술회하고 있다. 자력으로 나라를 찾지 못하였다는 비통한 심정을 잘 표현한 내용이다. 동년 11월 23일 선생은 임시정부요인들과 함께 환국하여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의된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운동을 적극 추진하였으며 
1946년 2월 비상국무회의가 조직되자 부총재에 취임하였다. 1947년 1월에는 비상국무회의가 국민의회로 개편되어 부주석에 취임하였으며 5월 제2차 미, 소 공위가 열리자 반탁투쟁위원회의 활동을 이승만과 함께 추진하였으며 11월에는 유엔 감시하의 남북선거에 의한 정부 수립안을 지지하였다. 
1948년 4월 19일 남북협상차 평양에 다녀오는 등 민족통일을 염원하던 선생은 1949년 6월 26일 경교장(京橋蔣)에서 안두희의 흉탄에 의거 서거하였다. 선생의 유해는 온 국민의 애도 속에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한인애국단을 결성하여 이봉창 의사 등을 파견하다, 
1928년 3월 25일 선생은 이동녕, 안창호, 송병조, 차이석, 조완구, 조소앙, 엄항섭 등과 같이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여 민족진영의 단합을 꾀하였으며 
1929년 8월 9일 상해교민단장에 피선되었다. 당시 침체에 빠져 있는 임시정부와 한국독립운동계의 활성화를 위해, 임시정부 국무위원회에서는 날로 팽창되어가고 있는 일제에 대항해서 싸울만한 군대를 가지고 있지 못하고 인물난과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는 임시정부로써는 최소한의 인원으로 가장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특무공작이라고 결정하였다. 이에 한 몸을 나라에 바칠 애국투사를 선정하여 적의 주요 인물을 제거하거나 중요기관을 파괴하고자 한인애국단을 결성하였으며 특무공작에 필요한 모든 권한을 국무위원으로서 재무장의 직책을 겸하고 있는 선생에게 위임하였다. 
1932년 1월에 한인애국단에 가입한 이봉창의사를 동경에 파견하여 동경 앵전문 밖에서 일왕을 저격하게 하여 국내외를 놀라게 하였으며 동년 4월 29일에는 윤봉길의사가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의거를 일으켜 일군 사령관 백천의칙(白川義則) 대장 등 다수의 장성 및 고관들을 폭살케 하여 세계를 경악케 하고 민족혼을 일깨웠다. 
장개석 총통을 만나 한인 무관양성소 특설을 협의하다, 상해 홍구공원 의거 이후 미국인 피치의 집에 은신해 있던 선생은 일제의 집요한 추적 때문에 가흥의 저보성 집으로 피신하여 광동 사람으로 행세하고 있던 중 1933년에 장개석주석의 면회요청을 받고 안공근, 엄항섭을 대동하고 남경으로 가서 중앙군관학교 구내에 있는 공관에서 장개석을 면회하였다. 
이 역사적인 회담에서 
①한국독립운동을 물심양면으로 적극 지원할 것 
② 만주에 있는 독립운동자의 지원 및 교포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것 
③중국군관학교에서 한인사관을 양성할 것 등의 조약을 맺고 낙양군관학교에 한인무관양성소를 특설하여 한인교관으로 이청천, 이범석, 오광선 등 역전의 명장들을 교관으로 초빙, 한인사관 양성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이 원대한 계획도 중, 일 간의 외교적인 문제로 비화되어 제1기생 25명의 졸업생을 끝으로 폐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립운동 이념과 노선의 대립으로 대일전선통일동맹(민족주의와 공산주의 합작)이란 단체가 구성되어 국무위원 7인 중 5인이 이에 참가하게 되자 임시정부 운영은 매우 곤란하게 혼란스러운 상황이 되었다. 
1935년 11월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등 6인이 강소성 가흥에서 의정원 비상회의를 열고 국무위원을 보선하니, 선생은 다시 국무위원에 피선되어 임시정부운영에 심혈을 기울이는 동시에 이듬해(1936) 이동녕 등과 함께 한국국민당을 창당하였다. 그리고 일군의 추격을 피해 임시정부를 진강(鎭江)으로 옮겼다가 1937년에 다시 장사로 이동하였다. 
1938년 5월 장사 남목청에서 민족주의 3당 통일회를 개최하고 3당 대표자가 회의를 하던 중 간소배의 사주를 받은 흉한 이운한의 저격을 받아 현익철은 즉사하고 선생은 중상을 입어 생명이 위험하였으나 1개월 동안 입원하여 천우신조로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1939년 장사가 위험해지자 광주(廣州)로 갔다가 장개석 총통의 도움으로 중경으로 옮긴 뒤 선생은 임시정부 주석의 자리에 취임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약력" 
1908년 신민회 가입 활동, 
1919년 상해로 망명하여 
1945년까지 임시정부 국무령 역임, 
1930년 한인 애국단 조직, 의열 활동 지원,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관련사건 을사조약, 안명근사건, 안중근 하얼빈 의거, 모스크바3상회의 대표관직(경력) 상해 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 충칭 임시정부 주석, 비상 국민회의 부총재 저서(작품),백범일지, 다시정리 를 하자면 4세 때 심한 천연두를 앓아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고, 9세에 한글과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아버지의 열성으로 집안에 서당을 세우기도 하였다. 
14세에 『통감』·『사략』과 병서를 즐겨 읽었으며, 15세에는 정문재(鄭文哉)의 서당에서 본격적인 한학수업에 정진하였고, 17세에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벼슬자리를 사고 파는 부패된 세태에 울분을 참지 못하여 18세에 동학에 입도하였으며, 황해도 도유사(都有司)의 한 사람으로 뽑혀 제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과도 만났다. 

돌립운동 과 감옥생활, "
19세에 팔봉접주(八峰接主)가 되어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海州城)을 공략하였는데, 이 사건으로 1895년 신천안태훈(安泰勳)의 집에 은거하며, 당시 그의 아들 중근(重根)과도 함께 지냈다. 또한, 해서지방의 선비 고능선(高能善) 문하에서 훈도를 받았고, 솟구치는 항일의식을 참지 못하여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부대에 몸담아 일본군 토벌에 나서기도 하였다. 
을미사변으로 충격을 받고 귀향을 결심, 1896년 2월 안악 치하포(鴟河浦)에서 왜병 중위 쓰치다[土田壤亮]를 맨손으로 처단하여 21세의 의혈청년으로 국모의 원한을 푸는 첫 거사를 결행하였다. 
그 해 5월 집에서 은신중 체포되어 해주감옥에 수감되었고, 7월 인천 감리영(監理營)에 이감되었으며, 다음해인 1897년 사형이 확정되었다. 
사형집행 직전 고종황제의 특사로 집행이 중지되었으나, 석방이 되지 않아 이듬해 봄에 탈옥하였다.
삼남일대를 떠돌다가 공주 마곡사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었고, 1899년 서울 새절(봉원사)을 거쳐 평양 근교 대보산(大寶山)영천암(靈泉庵)의 주지가 되었다가 몇 달 만에 환속하였다.  

학교설립 과 재감옥" 
수사망을 피해 다니면서도 황해도 장연에서 봉양학교(鳳陽學校) 설립을 비롯하여, 교단 일선에서 계몽·교화사업을 전개하였으며, 20대 후반에 기독교에 입교하여 진남포예수교회 에버트청년회(Evert靑年會) 총무로 일했다. 
이런 가운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상경하여 상동교회 지사들의 조약반대 전국대회에 참석하였으며, 이동녕(李東寧)·이준(李儁)·전덕기(全德基) 등과 을사조약의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결의하고 대한문 앞에서 읍소하였다. 한편, 종로에서 가두연설에 나서기도 하여 구국대열에 앞장섰다. 
1906년 해서교육회(海西敎育會) 총감으로 학교설립을 추진하여, 다음해 안악에 양산학교(楊山學校)를 세웠다. 
1909년 전국 강습소 순회에 나서서 애국심 고취에 열성을 다하는 한편, 재령 보강학교(保强學校) 교장이 되었다. 그때 비밀단체 신민회(新民會)의 회원으로 구국운동에도 가담하였다. 
그 해 가을 안중근의 거사에 연좌되어 해주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그 뒤 1911년 1월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 암살모의 혐의로 안명근(安明根)사건의 관련자로 체포되어 17년형을 선고받았다. 1914년 7월 감형으로 형기 2년을 남기고 인천으로 이감되었다가 가출옥하였다. 자유의 몸이 되자 김홍량(金鴻亮)의 동산평(東山坪) 농장관리인으로 농촌부흥운동에 주력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에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고, 1923년 내무총장, 1924년 국무총리 대리, 1926년 12월 국무령(國務領)에 취임하였다. 이듬해 헌법을 제정, 임시정부를 위원제로 고치면서 국무위원이 되었다. 1929년 재중국 거류민단 단장을 역임하였고 1930년 이동녕·이시영(李始榮) 등과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였다.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 의혈청년들로 하여금 직접 왜적 수뇌의 도륙항전(屠戮抗戰)에 투신하도록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이에 중국군 김홍일(金弘壹) 및 상해병공창 송식마(宋式驫)의 무기공급과 은밀한 거사준비에 따라, 1932년 1·8이봉창의거와 4·29윤봉길의거를 주도한 바 있는데, 윤봉길(尹奉吉)의 상해의거가 성공하여 크게 이름을 떨쳤다. 

나라안밖의활동".
1933년 장개석(蔣介石)을 만나 한·중 양국의 우의를 돈독히 하고 중국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를 광복군 무관양성소로 사용하도록 합의를 본 것은 주목받을 성과였으며,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1934년 임시정부 국무령에 재임되었고, 1940년 3월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에 취임하였다. 같은해 충칭[重慶]에서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지청천(池靑天), 참모장에 이범석(李範奭)을 임명하여 항일무장부대를 편성하고, 일본의 진주만 기습에 즈음하여 1941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를 하면서 임전태세에 돌입하였다. 
1942년 7월 임시정부와 중국정부 간에 광복군 지원에 대한 정식협정이 체결되어, 광복군은 중국 각 처에서 연합군과 항일공동작전에 나설 수 있었다, 그 뒤 개정된 헌법에 따라 1944년 4월 충칭 임시정부 주석으로 재선되고, 부주석에 김규식(金奎植), 국무위원에 이시영·박찬역 등이 함께 취임하였다. 
그리고 일본군에 강제 징집된 학도병들을 광복군에 편입시키는 한편, 산시성[陜西省]시안[西安]과 안후이성[安徽省] 푸양[阜陽]에 한국광복군 특별훈련반을 설치하면서 미육군전략처와 제휴하여 비밀특수공작훈련을 실시하는 등, 중국 본토와 한반도 수복의 군사훈련을 적극 추진하고 지휘하던 중 시안에서 8·15광복을 맞이하였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 일동과 함께 제1진으로 환국하였다. 그해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에서의 신탁통치결의가 있자 신탁통1946년 2월 비상국민회의의 부총재에 취임하였고, 
1947년 비상국민회의가 국민회의로 개편되자 부주석이 되었다. 그 해 6월 30일 일본에서 운구해온 윤봉길·이봉창(李奉昌)·백정기(白貞基) 등 세 의사의 유골을 첫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손수 봉안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민주의원(民主議院)·민족통일총본부를 이승만(李承晩)·김규식과 함께 이끌었다. 
1947년 11월 국제연합 감시하에 남북총선거에 의한 정부수립결의안을 지지하면서, 그의 논설 「나의 소원」에서 밝히기를 “완전자주독립노선만이 통일정부 수립을 가능하게 한다.”고 역설하였다. 

국제연합 활동"
1948년 초 북한이 국제연합의 남북한총선거감시위원단인 국제연합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을 거절함으로써, 선거가능지역인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김구는 남한만의 선거에 의한 단독정부수립방침에 절대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 해 2월 10일「3천만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라는 성명서를 통하여 마음속의 38선을 무너뜨리고 자주독립의 통일정부를 세우자고 강력히 호소하였다. 분단된 상태의 건국보다는 통일을 우선시하여 5·10제헌국회의원선거를 거부하기로 방침을 굳히고, 그 해 4월 19일 남북협상차 평양으로 향하였다.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金枓奉) 등이 남북협상 4자회담에 임하였으나, 민족통일정부 수립 실패의 시련을 맛보고 그 해 5월 5일 서울로 돌아왔다. 
그 뒤 한국독립당의 정비와 건국실천원양성소의 일에 주력하며 구국통일의 역군 양성에 힘썼다. 
남북한의 단독정부가 그 해 8월 15일과 9월 9일에 서울과 평양에 각각 세워진 뒤에도 민족분단의 비애를 딛고 민족통일운동을 재야에서 전개하던 가운데, 이듬해 6월 26일 서울 서대문구에 있던 자택 경교장(京橋莊: 지금의 삼성강북의료원 건물)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하였다.
7월 5일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고,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추서되었으며, 4·19혁명 뒤 서울 남산공원에 동상이 세워졌다.

김구선생 저서" 
『백범일지(白凡逸志)』를 남겼다. 참고문헌" 『백범연구』 제1·2집(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편, 교문사, 1985·1986) 『백범 김구』생애와 사상(백범전기편찬위원회, 교문사, 1984) 『대한민국임시정부사』(이현희, 집문당, 1982) 『백범어록』(백범사상연구소, 사상사, 1973) 『위대한 한국인』백범 김구(선우진, 태극출판사, 1972) 『도왜실기』(엄항섭 편, 1949) 『백범주석최근언론집』(엄항섭 편, 1948) 『백범일지』(김구, 국사원, 1947) 1876(고종 13)-1949. 독립운동가, 정치가. 이봉창 의거와 윤봉길 의거를 지휘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을 했다. 광복 후에는 나라의 완전 자주독립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다가 암살당했다.치반대운동에 적극 앞장섰으며, 오직 자주독립의 통일정부 수립을 목표로 광복정계를 영도해 나갔다. 

2017년 10월 25일 수요일

Dokdo, 獨島.

대한민국 정부 소유의 국유지로서 천연기념물 제336호로 지정되어 있는섬." 경상북도 울릉군에 속한 독도는 대한민국 정부 소유(관리청: 국토교통부)의 국유지로서 천연기념물 336호(1982년 11월 문화재청)로 지정되어 있다. 주소는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1~ 96(분번 포함 101필지)이다. 동도와 서도 외에 89개의 부속도서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면적은 187,554㎡(동도 73,297㎡, 서도 88,740㎡)이다. 

독도의 좌표는 동도 삼각점 기준으로 북위 37도 14분 22초, 동경 131도 52분 08초이며, 울릉도의 동남향 87.4㎞에 위치한다. 울릉도에서는 맑은 날 독도를 볼 수 있을 정도로 비교적 가까워서 삼국시대부터 울릉도에 부속된 섬으로 인식되고 이용되어 왔다. 독도는 두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남쪽에 위치한 동도는 유인 등대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해양수산 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높이는 98.6m, 둘레 2.8km, 면적 73,297m2로 장축은 북북동 방향으로 450m에 걸쳐 경사가 60도로 뻗어 있고, 중앙부는 원형 상태로 해수면까지 꺼진 수직 홀이 특징이다. 서북쪽에 위치한 서도는 높이 168.5m, 둘레 2.6km, 면적 88,639m2, 장축은 남북 방향으로 약 450m, 동서 방향으로 약 300m 가량 뻗어 있다. 서도의 정상부는 험준한 원추형을 이루고 있고, 주요 시설물로 주민 숙소가 있다. 면적: 총면적 187,554㎡, 동도 73,297㎡, 서도 88,740㎡, 부속도서: 25,517㎡ 높이: 동도 98.6m, 서도 168.5m 둘레: 총둘레 5.4㎞, 동도 2.8㎞, 서도 2.6㎞〈독도기점 주요지점 간의 거리〉 -주요항/거리(㎞):울릉도/87.4㎞, 동해/243.8㎞, 죽변 /216.8㎞, 포항/258.3㎞, 부산/348.4㎞, 오끼섬/157.5㎞ 독도에서도 동도는 최고위점 기준으로 북위 37도 14분 26.8초, 동경 131도 52분 10.4초에 자리한다. 500톤급의 접안시설과 등대, 독도경비대의 숙소, 헬기장 등이 있다.

최고봉이 98.6m로 북쪽에 2개의 화산흔적이 있다. 해안은 30∼40m의 단애를 이루고 경사가 급해 식생 피복이 불량하다. 정상부의 평평한 곳에는 부분적으로 20∼30㎝ 두께의 토양이 형성되어 있다. 서도는 최고위점 기준으로 북위 37도 14분 30.6초, 동경 131도 51분 54.6초에 자리한다. 시설물로는 어민대피시설, 발전기, 기상측정기 등이 있다. 최고봉은 168.5m로 독도의 여러 섬들 가운데 가장 높고, 가장 넓다. 경사가 가파른 하나의 봉우리로 되어있고, 해안 단애에는 많은 동굴이 있다. 북서쪽 해안의 물골이라 불리는 바위틈에서 조금씩 떨어지는 물이 독도에서의 생활에 귀중한 수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동·서도간 최단거리는 약 151m이다. 울릉군에 따르면, 독도에는 현재 52명이 거주하고 있다. 처음으로 주민등록을 이주하여 거주하던 사람은 최종덕으로 1965년부터 1987년 사망할 때까지 거주했다. 현재는 김성도·김신열 부부가 1991년 11월 17일부터 서도에 거주하며 어로활동에 종사하고 있다. 실제 거주하지는 않지만 호적상 등재된 가구 및 인원은 149가구에 531명이 있다. 또한 독도경비대와 등대원이 독도에 상주한다. 

1956년울릉경찰서 경찰관이 입도하였고, 96년 해상경비와 독도경비대 보강차원에서 울릉경찰서 소속 독도경비대와 울릉도 경비를 전담하는 318 전경대를 통합하여 울릉경비대 예하에 독도경비대를 두고 경북지방경찰청장 책임 하에 1개 소대가 운용되고 있다. 등대원은 포항지방해양수산청 소속으로 3명이 근무하고 있다. 〈독도 관련 주요 연표〉 (출처: 울릉군, 2007) 512년: (신라 지증왕 13) 우산국이 신라에 귀속 1417년: (조선 태종 17) 왜구 출현으로 주민 쇄환정책 실시 1454년: (단종 2)『세종실록』「지리지」에 울릉도·독도 내용 수록1694년: (숙종 20) 장한상이 울릉도를 순찰하며 독도 위치 설명 1697년: (숙종 23) 2~3년 간격으로 울릉도 수토 시작 1882년: (고종 19) 개척령 반포와 함께 주민 이주정책 실 1900년: (광무 4) 강원도 울도군 설치(칙령 41호, 부속도서 울릉도, 죽도, 석도(독도)를 관할) 1952년: 평화선 설정으로 독도를 대한민국 영토로 전 세계에 선언 1953년: 독도의용수비대 조직-독도 경비 1956년: 울릉경찰서 독도경비대에 인계 1981년: 독도 주민등록 최초 전입(최종덕, 울릉도 도동리 산69) 1982년: 국가지정 문화재 천연기념물 제336호 ‘독도해조류번식지’로 지정 1999년: 국가지정문화재관리단체 지정 및 천연기념물 제336호 독도관리지침 고시 문화재명칭 변경(독도해조류번식지→독도천연보호구역) 2000년: 2000.4.7 행정구역 명칭 및 지번 변경(행정구역: 당초 도동리→독도리로 변경, 지번: 당초 도동리 산42~76번지→독도리 산1~37번지로 변경) 2005년 3월: 독도관리기준안(기존 독도관리지침 폐지) 및 독도(동도) 개방 2005년 6월 28일: 정부합동 독도현황고시 2005년 9월: 지번변경(당초 산1~37번지→1~96번지로 변경) 

"독도의 역사지리"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 섬으로서 독도의 역사는 울릉도의 역사 안에서 살펴볼 수 있다. 먼저 문헌상 울릉도에 사람이 살았다는 기록은 3세기에 나오기 시작한다.『삼국지()』권30, 위지() 동이전() 옥저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옥저의 기로()가 말하기를 ‘국인이 언젠가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하다가 바람을 만나 수십일 동안 표류하다가 동쪽의 섬에 표착하였는데 그 섬에 사람이 살고 있었으나 언어가 통하지 않았고 그들은 해마다 칠월이 되면 소녀를 가려 뽑아서 바다에 빠뜨린다’고 하였다.” 여기서 ‘동쪽의 섬’을 우산국으로 볼 것인지 대한 이견이 있었으나, 현재 4세기의 유물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3세기경에 이미 울릉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했고, 또한 ‘우산국’이라는 국가가 성립되어 있었다는 것을 위의 사료로 추정할 수 있다. 

우산국의 성립과 발전에 대한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멸망에 관한 기록만을 볼 수 있다.『삼국사기()』권4, 지증왕 13년 6월(512년)의 기록에 따르면, 우산국이 지세가 험난하고 사람들이 용맹하여 결국은 하슬라주(강릉)의 군주가 계략을 써서 복종시켰다고 한다. 이는 당시 하슬라주의 군대가 신라 최전방을 담당하던 최정예부대였음에도 우산국을 정벌하기 쉽지 않았다는 얘기로, 우산국의 군사력과 문화수준이 상당히 높은 단계에 있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준다. 이에 대한 얘기는 현재 사자바위, 투구봉, 나팔봉과 관련된 설화로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고려의 태조왕건이 후백제견훤을 물리치고 후삼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우산국은 다시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게 된다. 하지만『고려사』권1 태조 13년 8월(930년)에는 “우릉도()가 백길()과 토두()를 보내어 토산물을 바침에 백길을 정위()로 토두를 정조()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고려시대에도 변함없이 울릉도는 한반도의 지배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종 9년에는 여진의 침략으로 농업이 피해를 입자 농기구를 하사해 준 기록도 있다. 고려사에 한 동안 울릉도와 독도에 관한 기록이 나오지 않는데, 이는 여진의 침입으로 그 일대가 황폐화되었기 때문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어 1157년에는 울릉도를 적극 개발하려다 중단한 기록이 나오며, 원 간섭기에는 울릉도의 주민이 고려 조정에 입조한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의 역사를 상세히 기록한『조선왕조실록』에는 울릉도와 독도가 자주 등장한다. 여말선초에 왜구의 노략으로 피해가 심해지자 15세기 초 태종은 주민들의 피해를 우려해 육지에 나와 살도록 쇄환정책을 실시한다. 태종 17년에는 울릉도와 주변 섬을 조사하기 위해 삼척만호 김인우를 무릉등처안무사(使)로 임명하였으며, 이후 대책회의에서 ‘우산·무릉등처’라는 용어가 사용된다. 세종도 몇 차례나 주민 이주정책을 실시하면서 김인우를 우산·무릉등처안무사로 임명하고 우산도와 무릉도의 두 섬을 순견()하는 임무를 맡긴다.『세종실록』「지리지」는 당시 조선의 통치영역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자료로서 조선이 쇄환정책을 계속 유지했으나, 우산도와 무릉도가 모두 여전히 조선의 통치하에 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왜구의 침략이 줄어들자 강원 도민들이 본토의 조세부과와 역의 동원을 피해 울릉도와 독도로 피역하는 수가 증가하게 된다. 이에 강원도 감사 유계문은 무릉도의 우산이 비옥하여 산출이 많고, 또한 사람이 없어 왜노들이 점거할 우려가 있으니 무릉도에 군현을 설치하고 백성을 살게 하자고 주장한다. 하지만 세종은 육지에서 멀고 바람과 파도가 심하니 대신 매년 사람을 보내 탐색을 하고 토산물을 채취하라는 뜻을 전한다.임진왜란 이후 통치력이 많이 약화되어 있던 조정은 김연성과 군사 260명을 울릉도로 보내 정세를 살폈다. 이는 동해안 어민의 쇄환과 울릉도가 자국의 땅임을 확인코자 한 중앙정부의 순심정책을 엿볼 수 있고, 또한 강원도의 삼척영장이 이를 맡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숙종 19년에는 좌수영 소속의 능로군으로 복무했던 어부인 안용복이 고기를 잡고자 울릉도에 들어갔다가 일본의 어부들과 시비가 벌어져 일본으로 납치된 사건이 일어난다. 안용복은 당대 최고 실권자인 에도관백()에게서 “울릉도와 자산도는 일본 땅이 아니기 때문에 일본 어민들의 출어를 금지 시키겠다”는 서계를 받는다. 하지만 곧 대마도주에게 빼앗기고, ‘월경죄인’으로 감금당한다. 풀려난 안용복은 분개하며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독도와 울릉도가 우리 땅임을 명백히 하고 돌아온다. 그의 활약으로 인해 대마도주는 일본인의 울릉도 출어금지를 공식화한다. 안용복의 활동은 일본의 영토 편입 야욕으로부터 울릉도와 독도를 지켜내고, 일본의 최고 권력기관으로부터 조선의 영토임을 인정받았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조선은 1895년 도감제()를 실시하여 울릉도를 행정 관할한다. 

울릉도의 인구가 1899년에는 2,000명에 이르자, 대한제국은 울릉도를 다시 시찰하고 1900년 10월 25일 칙령 제41호를 반포해 울도군()을 신설한다. 그리고 울도군의 관할구역을 관보 1716호에 수록함으로써 법적인 효력을 지니게 된다. 당시 울릉도에는 이미 일본인들이 상당수 들어와 규목을 도벌해 가고 있었다. 1903년 울도군수 심흥택이 보고한 바에 따르면, 일본인의 호수는 63호이며 벌목의 한정이 없어 일본순검에게 처음부터도 불법이었고, 이제부터 더 이상의 벌목은 금한다고 하니 “이 섬에서 벌목한 것이 이미 10년이 지났고, 한국정부와 일본 공사가 교섭하여 명령한 바가 없으니 이를 금단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는 당시 대한제국의 힘이 일본의 침투에 대해 무능하였음을 보여준다. 

일본은 러일전쟁을 거치며 중요성을 깨닫게 된 독도에 해군 망루를 세우고 무선전신을 설치하고자, 1905년 1월 28일독도의 일본영토 편입을 결정한다. 뒤늦게 이 사실을 정부에서 알고 반박하지만,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해 항의할 데가 마땅치 않았다. 조선통감부가 설치된 뒤에 「한일어업협정」, 「한국어업법」이 제정·공포된다. 이것이 시행됨에 따라 한국어민은 까다로운 허가절차를 거쳐야 했고, 고스란히 연안어장을 일본어민에게 내어주게 된다. 또한 일본은 1942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대규모 공출과 징병, 징용을 행한다. 울릉도라고 이를 피해갈 순 없었고, 명이, 쑥, 칡 등을 먹고 생명을 이어나가야 했다. 

일제 강점기의 사료 중 독도에 관한 언급은 일본 해군성 수로부에서 만든 『일본수로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합방 이전의『조선수로지』와 그 이후의 『일본수로지』에는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표기하고 있다. 독도를 울릉도로부터 떼어내어 일본의 영토로 설명하기 시작한 것은 1952년 이후부터이다. 일본의 항복으로 해방이 되지만, 곧이어 남북이 분단됨에 따라 우리나라의 영토주권은 심하게 훼손되기에 이른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6년 1월 29일연합국 최고사령부는 지령(SCAPIN) 제677호를 발표해 울릉도와 독도, 제주도는 일본영토에서 제외된다는 언급을 한다. 

이어 6월 22일 SCAPIN 제1033호에서 일본의 영역을 더욱 분명히 규정하면서, 독도의 12해리 이내에 접근하지 못한다는 지령을 내린다. 이로써 국제적으로 울릉도와 그 부속도서가 대한민국의 영토임을 명백히 인정받게 된다. ‘에헤야 술비야/ 어기영차 뱃길이야 울고 간다 울릉도야/ 알고 간다 아랫녘아 (중략) 돛을 달고 노니다가/ 울릉도로 향해 가면 고향생각 간절하다 울릉도를 가서보면/ 에헤야 술비야 좋은 나무 탐진 미역/ 구석구석 가득찼네’ 이 노랫말처럼 여수시 삼산면 초도와 거문도 사람들이 울릉도와 독도로 배를 타고 나가 고기를 잡고 좋은 목재도 가져온 것이다. 

 동력선도 없던 때에 어떻게 그 먼 곳까지 진출하여 어장을 개척했는지 불가사의하기만 하다. 아마도 그때는 온전히 풍선배를 이용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풍향을 이용할 줄 알았다는 말인데, 얼마나 지혜로웠는지를 알 수 있다. 그것을 유추해 볼 수 있는 단서가 있다. 초도와 거문도 사람들은 옛날부터 진취적인 기질을 가졌는데, 그것은 지리적으로 손죽도와 거문도 사이가 워낙 풍랑이 드세어 이겨내려다 보니 독자적인 항해술도 익혔던 것이다. 울릉도 내왕 흔적은 초도마을에 아직도 남아 있다. 1880대에 지어진 김충석(전 여수시장)가()가 그 증거인데, 그 집의 마루벽이 여느 나무와는 달리 두터운 판목으로 짜여 있는 것이다. 목재가 없는 고장임을 생각할 때 어디서 가져왔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다른 증거로는 독도()라는 지명이다. 

 전라도에서는 노상 돌덩이를 보고 ‘독’이라고 하는데 독도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돌섬’ 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 아닐지... 뱃길 개척의 역사는 흥미롭기만 하다. 그 먼 곳까지 가는 데는 풍향을 이용하였는데, 겨울철은 샛바람이나 높새바람이 불어 배를 밀어내므로 그때는 피하고, 하늬바람이나 마파람이 부는 봄철에 떠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항해코스는 지금도 많이 이용하는 손죽도와 소리도를 거쳐, 경상남도 욕지도와 부산의 절영도를 통해서 올라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울릉도와 독도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도 어류를 포함한 해산물이 풍부했다. 특히 울릉도는 수목도 울창하여 질 좋은 목재가 많이 생산됐다. 그래서 고기를 잡는 한편으로 집을 지을 목재도 실어왔던 것이다. 전해오는 말로는 이때 향나무도 함께 베어왔는데 제수용품으로 귀한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문헌을 보면 조선은 섬을 비워두는 공도()정책을 폈다. 태종과 세종임금 때로 왜구의 침탈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 어간에 초도와 거문도 어부들이 어장을 개척한 것으로 보인다. 참으로 장하고 우리의 자존심을 살려주는 장보고와 이순신의 후예들이 아닌가 생각한다. 

지금 독도에는 김성도(74)씨 부부가 살고 있다. 독도의 최초 주민은 고 최종덕옹(87년 작고)이 작은 집을 짓고 해녀들과 함께 물일을 하며 사셨던 곳인데 지금은 현대화된 건물로 새로 지어져 있다.필자는 2012년 10월 28일 저녁에 이 건물에서 경북도청 시·군 수산관련 공무원들에게 특강을 마친 후, 다음날 새벽 서도의 대한봉에 올랐다. 숙소 입구 계단에 ‘’이라는 글자가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한국인이면서도 쉽게 올 수 없는 독도의 대한봉을 오른다는 감격에 눈물을 글썽거리며 70도의 가파른 정상을 향해 천천히 올라갔다. 예전에 독도 최초의 주민 고 최종덕옹이 직접 식수를 구하러 반대편에 있는 물골로 넘어가는 998계단을 만들었는데 지금은 길 위에 새로이 나무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지금의 계단이 없던 시절에 가파른 절벽을 올라가서 밧줄을 타고 먹을 물을 길어오기도 하고, 파도가 잔잔한 날은 식수를 배로 실어왔다고 한다. 

최종덕옹의 손길이 살아 숨쉬는 998계단은 70도에 이르는 경사다. 매우 가팔라 밑을 내려다보면 현기증이 날 정도다. 서도의 정상은 칼처럼 가파르기 때문에 더 이상 오를 수는 없었다. 물이 있다는 물골로 계단을 타고 내려가 바닷가에 있는 샘을 둘러보고 물도 마시면서 곳곳에 있는 그 분의 삶의 흔적을 찾아보았다. 우리나라 유인도 446개 섬을 세 번이나 돌아보았다. 하지만 독도에서 집을 짓고 해초 채취를 하면서 사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독도는 동해 한가운데 떠 있어 바람과 파도가 몰아닥치기 때문에 배석도 없고, 물도 많지 아니하여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다. 그런 곳에서 살다간 고 최종덕옹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존경스러웠다. ‘한국판 로빈스크루소’인 그는 개척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정신으로 이 험한 독도에서 사람냄새가 나도록 한 것이다. 

아름답고 소중한 우리 땅에서 옹골찬 개척정신이 피어나고 있어 흐뭇하다. 독도의 영토지리" 1900년 대한제국 정부는 지방 행정 제도를 개편하면서 울릉도와 죽도, 독도를 묶어 하나의 ‘군’, 즉 울도군을 만들었다. 울릉도에 ‘군수’를 상주시켜 울릉도와 독도의 수호와 행정 관리를 강화였으며, 이를『관보()의 1900년 10월 25일자 칙령 제41호(전문 6조)「울릉도를 울도()로 개칭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한 건」의 2조에 따르면, “구역은 울릉전도와 죽도, 석도를 관할할 사”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석도란 독도를 말한다. 당시 울릉도에는 다수의 남해안 어민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독도를 바위섬이란 뜻의 ‘독섬’이라고 불렀다. 남해안 사투리로 ‘독’은 ‘돌()’을 의미하며, ‘독섬’을 한자로 의역하면 ‘석도’, 음역하면 ‘독도’가 된다. 

1946년 1월 국제법 기관인 ‘연합국 최고 사령부’는 독도를 한국 영토로 판정하여 거듭 한국 영토임이 확인되었다. 연합국이 독도를 한국의 영토라고 판정한 근거의 기원은 멀리 카이로 선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카이로 선언에서 연합국은 한국의 독립을 약속하고, 패전 후 일본영토의 한계를 규정하였다. 이에 따르면 독도는 1894년 이후 “일본이 참욕과 폭력에 의하여 약취한 것”에 해당된다. 연합국은 일본으로부터 분리하여 원래 소속으로 반환해야할 영토를 규정한 연합군최고사령부지령(SCAPIN) 제677호를 발표한다. 제677호 제 3항에는 일본으로 귀속될 섬과 제외될 섬을 명기하고 있다. 

당연히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에 귀속되지 않고 한국영토로 발표되었다. 또한 만일 이를 수정할 때에는 “별도의 특정한 지령을 발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이 지령은 미래까지 유효하다”고 선언하였다. 국제민간항공기구(ICAO)에서 지정한 비행정보구역(FIR, Flight Information Region) 설정에서도 독도 상공은 당연히 인천비행정보구역(Incheon FIR)에 포함되고 있고, 일본은 후쿠오카 비행정보구역, 북한은 평양 정보구역으로 규정되어 있다. 또한 일본의 방공식별구역(JADIZ)에서도 일본 열도와 동해의 일본측 해역이 포함되고 있다. 물론 독도는 한국령으로 일본이 제외하고 있다. 

군사적 영토 인식에서도 미국과 일본 모두 독도를 한국 영토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울릉도의 영유국가가 독도를 영유하는 것은 지리적으로 독도가 울릉도의 부속도서이기 때문인데, 이는 많은 고문서에서 확인이 가능하다.『세종실록』「지리지」(1432년)에는 울릉도를 ‘본도’라 하고 독도의 당시 명칭인 우산도를 울릉도의 ‘속도’라고 하였다. 이러한 지리적 인식은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일본 관습에 ‘송죽()’은 항상 붙어 다니는 한 쌍으로 간주한다. 그렇기에 울릉도를 ‘죽도’로, 독도를 ‘송도’로 불렀던 것이다. 무엇보다 두 섬에서 목측이 가능하다는 것은 이를 뒷받침 해주는 중요한 사실이다.

『세종실록』에는 “우산 무릉 2도 재현정동해중 2도상거불원 풍일청명 즉가망견 신라시칭우산국( )”이라고 적혀 있다. 이처럼 날씨가 청명할 때 두 섬에서 서로 볼 수 있다는 기록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한국 어민과 울릉도 주민의 어로생활권역으로서 울릉도와 독도는 모섬과 자섬이라는 지리적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는 물론 심지어 일본의 역사기록과 공식적인 문서조차도 독도를 한국의 영토로 인식하고 표기한 사례를 여러 문헌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최초의 기록은『삼국사기』신라본기4, 지증마립간 512년 기사로, 지증왕 13년 6월에 우산국이 귀복하고 해마다 토산물을 바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일본 정부의 자료로는 1877년( 10년) 3월 20일 조,「태정관 지령문서」에 ‘품의한 취지의 다케시마(울릉도) 외 일도(독도) 지적 편찬의 건에 대하여 본방(일본)은 관계가 없다는 것을 심득할 것’이라는 내용이 있어 당시 일본도 독도가 한국의 땅이라는 것을 공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국가에서 제작한 고지도들은 당시의 영토인식을 보다 극명하게 보여준다. 독도가 공식적으로 지도상에 표기된 현전하는 최초의 지도는 조선 전기 지리서의 하나인『신증동국여지승람』의 「팔도총도」(1530)이다. 이 지도에는 독도가 정 위치가 아닌 울릉도의 서쪽에 그려져 있다. 이는 당시에 본토에서 울릉도에 갈 때 해류의 영향으로 독도에 먼저 도달하고 울릉도로 갔기 때문에 독도를 더 가깝게 그렸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중국 왕반의 천하여지도를 바탕으로 1603~1650년경 조선에서 수정하여 새로 제작한「조선본 동아시아 지도」(17세기 초)의 한반도 부분에도 울릉도와 독도가 명확히 표시되어 있다. 이 지도는 현재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소장중이다. 1785년의「삼국접양지도」는 일본의 하야시 시헤이(1738~1793, 일본 실학파의 최고 학자)가 그린 지도로서, 국경과 영토를 명료하게 구분하여 채색을 한 지도이다. 독도는 조선의 색채인 황색으로 표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것이란 표기까지 하였다. 

1855년 김대건 신부의 지도를 지리학자 말트 브룅(Malte-Brun)이 축소하여『파리지리학회지』(1855)에 게재한 지도에도 울릉도는 ‘Oulamgto’, 독도는 ‘Ousan’이라고 역시 정확히 표기가 되어 있다. "독도의 지명" 고문헌 속에서 확인되는 독도의 명칭은 우산도(512), 삼봉도(1471), 가지도(1794), 석도(1900), 독도(1906) 등이 있다. 우산도()는 가장 오래 동안 독도를 부르던 명칭이다.

『삼국사기』,『고려사』,『세종실록』,『동국여지승람』 등의 옛 문헌에서 독도를 우산으로 기록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간혹 ‘우()’의 표기를 잘못 읽어서 ‘천()’, ‘간()’, ‘자()’ 등으로 표기된 사례도 있지만 ‘우()’가 정확한 표기이다. 조선 성종 때에는 삼봉도()라 불렸다. 섬이 세 개의 봉우리로 보인다는 사실에서 유래한 것으로 『성종실록』(1476) 권15에 기록되어 있다.

『정조실록』(1794)에는 “가지도()에 가보니 가지어가 놀라 뛰어 나왔다”라는 기록에서 독도의 또 다른 이름인 가지도를 확인할 수 있다. 가지어는 물개의 일종인 강치를 우리말 ‘가제’로 음역한 것으로, 독도에는 강치가 많이 서식한다.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는 울릉도의 관할구역의 하나로 ‘석도()’가 등장한다. 여기서 석도란 독도를 말하는 것으로, ‘석()’의 한글 표현이 ‘돌’이고, 돌의 남해안 사투리인 ‘독’이 현재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행정지명으로서 ‘독도’는 1906년 울릉군수 심흥택에 의해서 처음 사용되었다. 

현재는 ‘돌섬’이 ‘독섬’으로 발음되면서 ‘독도()’로 표기가 되었는데, 지금도 울릉도 주민들은 ‘독섬’과 ‘돌섬’을 혼용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명치시대 이전에는 독도를 마쓰시마〔〕, 울릉도를 다케시마〔〕라 부르다가, 1905년 영토편입 이후부터는 독도를 다케시마라 부르고 있다. 서양에서는 섬을 발견한 선박의 명칭을 따라 이름을 붙였는데, 1849년 프랑스의 포경선 리앙꾸르호는 ‘리앙꾸르 암(Liancourt Rock)’으로 명명하였고, 1885년 영국함선 호네트호 또한 ‘호네트 암(Hornet Rock)’으로 명명하였다. 

독도는 해저의 순상화산체로서 해수면 위로 노출된 화산섬이다. 동도와 서도의 주요 섬을 비롯해 89개의 돌섬과 암초로 구성되어 있다. 독도의 각 지명들은 독도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특히, 독도 인근의 초들은 항해에 장애가 될 수 있는 암초 중에서 어획이 잘 이루어지는 지점의 초들만이 명칭이 있다. 이들을 부르는 명칭은 다음과 같다. 

〈독도의 육상지명과 부속도서의 지명〉 (출처: 국토지리정보원 제공) 지명 유래(2011.8.26 고시)큰가제바위 강치가 출현하는 장소로 현지 어민들이 구전으로 불리어 온 바위 작은가제바위큰가제바위 우측에 위치한 작은 바위로 현지 어민들이 구전으로 불리어 온 바위 지네바위바위이진해라는 어민이 미역을 채취하던 바위넙덕바위 현지 어민의 구전으로 전하는 바 군함바위 군함과 같은 독특한 모양의 바위 김바위 독특한 모양에 대한 명칭으로, 김은 해태를 의미하며 구전되어 온 명칭 보찰바위 보찰(거북손) 모양의 바위 삼형제굴바위 형상을 아우르는 명칭으로, 3개의 동굴이 있어 현지 어민들의 구전에 의한 명칭닭바위 닭이 알을 품은 형상의 바위 춧발바위 춧발은 갑, 곶 등이 튀어 나온 곳을 의미하는 현지 방언으로 구전되어 온 명칭 촛대바위 촛대 모양의 바위로 권총바위 라고도함 미역바위 의용수비대원들이 미역 채취를 많이 하여 붙여진 명칭, 

물오리바위 물오리가 서식하는 바위 숫돌바위 주민들이 생활할 당시 칼을 갈았다는 바위 부채바위 부채를 펼친 모양의 바위 얼굴바위 사람의 얼굴과 흡사한 모양의 바위 독립문바위 독립문 형상의 바위 천장굴 침식에 의해 함몰로 생긴 굴 탕건봉서도 북쪽에 위치하여 봉우리 형상이 탕건을 꼭 닮아 붙여진 명칭 물골탕건봉 밑에 위치하여 1일 400리터 정도의 물이 고이는 곳으로 붙여진 명칭 한반도바위 북쪽에서 바라보면 마치 한반도 형상과 꼭 닮아 붙여진 명칭 코끼리바위 코끼리가 물을 마시는 형상의 바위 해녀바위 예전 해녀들이 쉬었던 바위 전차바위 전차 모양의 바위,

〈독도의 해저지명>독도해산 해저면에서 약 2100m 높이로 솟아 있으며, 평평한 정상부 수심은 약 200~300m심흥택 해산독도에서 동방 약 15㎞ 지점에 위치한 정상부 수심 146m의 평정해산, 독도라는 명칭을 최초로 사용한 조선 말기의 울릉군수인 심흥택의 이름을 따옴 가지초 수심 8.6mdml 초로, 독도의 옛 이름인 ‘가지도’에서 따옴 삼봉초 봉우리가 세 개(수심 5m, 5.8m, 8.7m)인 형상에서 따온 이름으로 ‘삼봉’은 독도의 옛 이름이기도 함 괭이초 수심 3.1m의 초로, 충청남도 태안군 난도, 경상남도 통영시 홍도와 함께 괭이갈매기의 3대보호구역의 하나 넙덕초 수심 8.6m의 초로, 인근의 넙덕바위에서 따온 이름 군함초 수심 1.2m로 독도 인근의 초 중에서 가장 얕은 수심의 초. 인근 군함바위에서 따온이름, 독도의 경제지리" 수산업은 독도의 핵심 산업이다. 

독도의 근해는 북한한류와 동한난류가 교차하는 조경()수역으로서 플랑크톤이 풍부해 매우 훌륭한 어장이 된다. 회유성 어족인 연어, 송어, 대구를 비롯해 명태, 꽁치, 오징어, 상어가 주종을 이룬다. 예전에는 강치(물개)가 많아 어부들에게 인기가 있었으나, 지금은 포획금지 대상이다. 또한 해저암초에는 다시마, 미역, 해삼, 문어, 소라, 전복, 김 등의 해조류들이 풍성해 어민들의 주요 수입원이 되고 있다. 동해안의 특성상 독도도 양식업보다는 일반 해면어업의 비중이 높고, 현행법상 공동어로작업의 주체인 어촌계가 독도어장에 관한 공동관리와 운영을 하고 있다. 주요 어장은 독도 마을어장과 대화퇴어장이 있다. 

독도 북쪽의 원해에 있는 넓은 어장인 대화퇴어장도 역시 조경수역이 형성되는 곳으로 회유성 어족 특히, 오징어가 많이 서식한다. 독도의 연안어장과 대화퇴어장에서의 어획량이 우리나라 수산물 시장의 수급 가격을 좌우할 정도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며, 독도는 이러한 동해상의 어업 전지기지로서의 역할을 한다. 계절별로 겨울·봄(초봄)에는 명태어장이 형성되고, 여름·가을에는 오징어 어장이 형성된다. 오징어의 주어기는 9월~1월이다. 독도 주변의 어민들은 그들만의 공간을 인지하는 방향인식법이 있고, 어장을 ‘걸’ 또는 ‘짬’이라 부르는 등 독특한 문화를 공유한다. 

독도는 섬 전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을 정도로 천혜의 절경을 자랑하며 관광자원이 풍부한 곳이다. 주상절리와 같은 화산지형을 볼 수 있으며, 다양한 해양지형이 발달되어 있어 독특한 자연경관을 뽐낸다. 또한 풍부한 생물상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슴새, 바다제비, 괭이갈매기 등이 군집하여 집단적으로 번식하고 있다. 이 번식지를 보호하기 위해 1982년 11월 16일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1~96번지 독도일원 187,554㎡가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천연기념물 제336호 독도해조류번식지로 지정되었다. 과거에는 문화재보호법 제33조에 의해서 공개를 제한하여 학술, 교육, 정치적 목적 외에는 입도가 어려웠다. 그러다 2005년 동도에 한해서 공개제한을 해제(2005.3.24 정부방침 변경)하여 입도허가제를 신고제로 전환하였다. 이로써 일반인의 출입이 가능해졌다. 

최근에는 오징어축제, 우산문화제, 울릉도·독도 탐사 해양축제 등 다양한 축제들이 울릉도와 독도에서 개최되고 있다. 울릉도·독도 탐사 해양축제는 경상북도와 울릉군 및 민간단체들의 주체로 9~10월 중에 열리며, 해양생태 학술세미나, 울릉도 비경 살피기, 독도 대탐사, 청소년 해양교실과 같은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독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선박을 이용해야 한다. 종전에는 여객선의 정원 범위 내에서 1일 입도가능 인원을 선착순으로 접수하여 1일 1,880명(1회 470명)으로 한정했었으나, 2009년에 1일 입도인원제한을 해제했다. 

2007년에는 연간 10만 명의 관광객이 독도를 찾았고, 2007년 관광수입은 울릉군 전체 372억을 기록하였다. 울릉도에서 독도 서북쪽에 이르는 일대의 울릉분지에는 하이드레이트가 대량 매장되어 있다. ‘하이드레이트’란 메탄이 주성분인 천연가스가 얼음처럼 고체화된 상태이다. 기존 천연가스의 매장량보다 수십 배 많고, 석유가 있는지를 알려주는 지시자원이다. 현재 하이드레이트는 개발기술이 초보단계로 러시아를 제외하고 상업적 생산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또한 독도 북쪽의 한국대지 사면에서는 인산염암이 발견되었다. 함량이 30%나 되고, 우라늄광보다 30배나 많은 우라늄(120ppm)과 바나듐(17~300ppm)을 얻을 수 있어 경제적 가치가 충분하다. 

"독도의 지질" 독도는 우리나라 동쪽 끝에 위치한 섬으로 동도와 서도 두 개의 섬과 주변의 암초들로 구성된 화산섬이다. 일반적으로 ‘독도’는 여러 차례의 화산활동으로 형성된 거대한 화산체 중에서 해수면 위로 드러난 부분, 즉 동도와 서도를 포함한 30여 개의 작은 암초들만을 일컫는 것이다. 독도와 연결되어 해수면 아래에 잠겨있는 화산체 전체를 명명할 때에는 해저지명의 원칙에 따라 ‘독도해산’이라고 한다. 

독도해산은 크게 3개의 봉우리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중 2개는 물속에 잠겨있고, 1개는 정상부가 수면 위로 솟아 있는데 그 섬이 바로 독도이다. 독도에서 수면 위로 가장 높게 노출된 서도의 높이가 168m에 지나지 않지만 독도해산의 바닥부분이 약 25㎞, 정상부 폭만 해도 약 13㎞에 달하고 수심도 2㎞가 넘어 독도의 대부분은 물에 잠겨 있다고 할 수 있다. 

형태적으로 봤을 때 독도는 거대한 기저부와 비교적 넓은 정상부를 가지는 평정해산 위에 소규모로 드러나 있는 일종의 성층화산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아래쪽 수심 약 2㎞인 동해 해저 상에는 직경이 약 25~30㎞에 달하는 화산체의 기저부가 형성되어 있다. 이곳에서부터 수심 약 200m까지는 비교적 경사가 완만한 순상화산의 형태를 띠고 있고, 다시 여기에서 수심 약 60m까지는 경사가 2° 미만으로 더욱 완만한 평정해산을 이룬다. 이 평정해산 위에 돌출된 암체가 바로 독도이다. 

독도는 조립질의 화산쇄설물로 구성된 암석의 특징상 강도와 밀도가 크지 않아 파랑이나 바람에 의한 침식과 풍화에 약하고 또한 단층선 및 절리의 밀도가 높아 해수 유입에 의한 지속적인 침식을 받아왔을 것으로 생각된다. 독도해산을 포함한 주변의 해산들은 해산이 형성된 이후 해수에 의한 침식과정을 거쳐 정상부가 평탄한 모습의 평정해산(Guyot) 형태를 갖게 되었는데, 이러한 평탄한 정상부의 형태는 해수면 변동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독도에 분포하고 있는 암석을 토대로 조사한 결과 독도는 독도해산이 생성된 후 잔류마그마의 분출로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플라이오세~플라이스토세 시기에 일어난 알칼리 화산활동에 의해서 형성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해수면 상에 드러난 독도의 암상은 7개 내지 8개 층서로 구분되며, 대부분이 화성쇄설암과 용암 및 관입암 등의 화산암들로 구성된다. 이들 암석의 연대측정 결과 대체로 270~210만 년 전 사이에 여러 차례의 화산암류 분출로 형성된 것으로 해석된다. 현재 독도의 암상을 통해 형성과정을 유추해보면 크게 몇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초기 단계는 해수면 아래에서 분출이 일어났던 시기로 하부의 괴상응회각력암과 조면안산암이 생성되었으며 응회암층인 상부층과 부정합 관계에 있기 때문에 상당한 시간적 간격을 두고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2단계에는 독도해산이 수면 가까이에서 폭발적인 분출이 있었으며 수면 위로 완전히 상승한 후 대기 중 용암 분출 및 화성쇄설성 분출이 나타나는 단계이다. 이 때 층상라필리응회암과 층상응회암이 형성되었다. 3단계는 폭발적 분출이 조용한 분출로 전환되면서 조면안산암질 용암이 분출되는 단계이다. 4단계는 해수가 유입되거나 화산 자체에 비축된 폭발력에 의해 막혀있던 화구에서 수증기 마그마성 폭발이 발생한다. 이때 먼저 분출된 용암의 파편과 마그마 화구를 메운 암석에 의해 다양한 암편들이 형성되는데 스코리아성 층상라필리응회암이나 이후 폭발력이 줄어들면서 분출된 조면암질 용암이 바로 그것이다. 5단계에서는 화구주변에 발달한 단층이나 절리를 따라 조면암의 관입이 나타난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화산활동이 멈춘 이후 파랑의 침식에 의해 독도해산의 상부 대부분이 침식되어 평탄한 형태를 띠고 이후 해수면 상승에 의해 현재와 같은 형태로 남게 되었다. 

현재 해수면 위의 독도는 장경이 약 2.5㎞, 단경이 약 1.5㎞인 독도칼데라 외륜부의 남서쪽 잔류체로 생각된다. 독도와 울릉도의 화산암은 동일한 알칼리 계열의 조면암으로 구성되어 있고 동위원소도 일치하므로 동일한 기원물질로부터 유래된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해수면 위의 독도가 270~210만 년 전에 형성된 반면 울릉도는 140~1만 년 전에 형성되어 독도가 약 200만년 정도 먼저 형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서는 울릉도와 독도해산을 포함한 그 연장선상에 있는 해산들의 선상배열, 지형적 특성, 암석학적 특성 등을 근거로 열점 활동의 산물로 추정하기도 하나 이에 대한 보충 연구가 필요하다. 

독도에서는 수중 및 대기 중 분출로 생긴 폭발성 화성쇄설암, 용암분출암, 관입암 등 다양한 화산암류들이 수차례 반복되는 분출윤회가 관찰되는데 현재 3개의 용암층을 기준으로 최소 3회의 분출윤회를 확인할 수 있다. 이렇듯 섬 전체가 화산암과 화산쇄설성 퇴적암류로 구성되어 있다. 독도와 주변 암초들에서 관찰되는 화산암류는 생성 시기를 기준으로 하부조면암 용암, 괴상 응회각력암, 층상 라필리응회암 및 응회암, 조면안산암 용암, 스코리아성 라필리 응회암, 상부조면암 용암, 조면암 관입체, 조면암 암맥, 열극충진각력암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들은 지하 심부의 마그마가 지표로 분출되어 용암으로 냉각·고결되거나 기존 암석을 관입하여 형성된 것으로 규모나 모양에 따라 관입체 혹은 암맥으로 산출된다. 마그마가 내부의 유체 혹은 외부 물과의 반응에 의한 압력 증가로 폭발하게 되면 폭발성 화산물질이 생성되는데, 크기와 모양에 따라 화산회, 라필리 혹은 각력을 이루며 이들이 고화되어 암석화되면 각기 응회암, 라필리 응회암 혹은 각력암이 된다. 독도를 형성한 마그마는 용암, 응회암, 관입암 등 다양한 화산활동의 특성을 보여준다. 

"독도의 지형" 독도 주변의 해저는 울릉분지와 같은 큰 분지, 여러 고지대와 화산섬, 해산 등으로 이루어져 복잡한 해저지형을 보이고 있다. 독도는 이 중 울릉분지의 북동쪽 끝부분에 위치하며 독도가 속한 화산체의 서쪽 화구륜(crater rim)에 해당한다고 보고된 바 있다. 울릉분지가 수심 2㎞ 이하이므로 독도는 해면 아래에 높이 2㎞ 정도, 하부 지름 20~25㎞인 봉우리 형태로 솟아 있다. 독도 하부는 수심 약 2㎞ 이상인 해저면에서부터 원탁형의 매우 큰 화산체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독도는 화산체 정상부분 중 극히 일부가 해수면 위로 노출된 것이다. 

독도의 동남부 해저에서는 심홍택해산(제2독도 해산), 이사부해산(제3독도 해산)이 일군의 화산섬을 이루며 오키퇴(Oki Bank)로 이어진다. 이들 해산은 주변의 다른 해산과 마찬가지로 정상부가 비교적 평탄한 평정해산(guyot)이다. 이것은 화산작용으로 형성된 이후 지속적으로 파랑의 침식작용을 받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독도 동쪽의 해산들은 독도보다 생성시기가 오래되어 해면 위로 드러난 부분이 제거된 반면 독도 해산은 아직 해면 위로 섬이 잔류해있다. 

독도는 동해의 가운데 위치해있는 화산섬으로 신생대 제3기 말부터 발생한 일련의 화산활동은 독도의 전체적인 윤곽을 형성하였다. 아울러 제4기 기후변화에 의해 발생한 해수면 변동과 더불어 파랑에 의한 침식과 퇴적 작용, 바람의 작용, 염분의 비말에 의한 풍화작용 그리고 매스무브먼트에 의해 현재의 다양한 지형들이 형성되었다. 또한 기반암 특성, 즉 기반암 종류와 분포, 절리 밀도, 수평층리의 특성, 지층 경사, 단층선과 절리의 분포 특성, 사면 경사 등도 독도의 지형 발달에 큰 영향을 미친다. 

독도의 지형 발달은 화산지형적 요소와, 외적영력으로서 바다와의 상호작용, 기반암과 절리, 사면발달과 관련된 구조지형적 요소, 그 밖의 풍화지형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독도에서 확인되는 주요 지형은 주상절리, 탄낭구조 등의 화산지형, 단층선 암맥과 같은 구조지형, 파식대(shore platform), 시스택(sea stack), 해식동(sea cave), 해식아치(sea arch), 해식애(sea cliff), 자갈해안 등의 해안지형과 풍화지형으로 타포니(tafoni), 애추(talus) 등이 독도 전반에 걸쳐 분포한다. 

독도는 형성 이후 오랜 풍화와 침식으로 화구를 비롯한 화산암체 대부분이 제거되어 전체적인 화산 형태나 지형을 확인하기는 힘들지만 현재 남아있는 독도의 퇴적상을 보면 화산쇄설물과 용암이 교호하면서 누층적으로 나타나는 성층화산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한편 해수면 위에 남아있는 화산암체에서 수평절리와 수직절리가 높은 밀도로 분포하는데 수평절리는 주로 응회암과 조면암맥, 수직절리는 용암분출에 의해 형성된 조면안산암류에서 잘 나타난다. 화산지형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주상절리는 용암이 냉각되는 과정에서 열적으로 수축되어 형성된 것으로 독도에서는 서도의 상부와 탕건봉의 상부를 이루는 조면안산암에서 확인된다. 

일부 지역에서는 수평주상절리도 확인되는데 이것은 조면암이 수평방향으로 형성된 단층선을 따라 관입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형성과정은 주상절리와 동일하다. 화산이 폭발하면서 분출된 화산암괴나 화산탄이 퇴적이 진행 중인 화산쇄설층에 떨어져 박혀 형성된 주머니 모양을 탄낭(bomb sack)이라 하고 이런 지층 구조를 탄낭 구조라고 하는데, 이 역시 독도의 여러 곳에서 관찰된다. 

독도는 외해의 가운데 위치하여 해안에 도달하는 파랑에너지가 매우 크다. 특히 폭풍이 내습하거나 태풍이 통과하면 파랑에너지의 크기가 더욱 커져 해안지형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또한 신생대 제4기 플라이스토세에 걸쳐 일어난 지반 운동과 해면 변동은 해안지형에 반영되었는데, 독도해산 정상부에 넓게 형성된 평탄면은 신생대 제4기 동안 파랑의 침식을 받아 형성된 것으로 당시의 해수면을 반영하는 지형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독도해안은 화산체가 형성된 이후 지속적인 파랑의 침식작용을 받아 축소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독도의 해안에 나타나는 지형은 신생대 제4기 홀로세 중기 이후 해수면이 현 수준에서 이르러 안정됨에 따라 형성된 것들이다. 파랑의 침식작용으로 파식대, 해식애, 시스택, 해식동, 해식아치, 자갈해안과 같은 지형들이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특히 해안 부근에는 파랑의 침식에 대한 저항력이 약한 응회암으로 이루어져 있어 파식대가 넓게 형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홀로세 중기 해수면이 현재 수준에 도달한 이래 약 6,000년 동안 파랑의 침식작용으로 형성된 것이다. 

파식대가 넓어지면서 해안의 사면이 후퇴하여 형성된 해식애는 높은 밀도의 단층선, 침식에 약한 기반암 특성으로 인해 전 해안에 걸쳐 발달한다. 해식애 가운데 단층선이 통과하거나 절리밀도가 높은 지점에는 해식아치나 해식동이 형성된다. 동도와 서도 주변에서 관찰되는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암초들은 파식에 의해 약한 부분이 제거되고 풍화와 침식에 대한 저항력이 강한 부분이 남아 형성된 시스택이다. 이것은 본래 섬에 연결되어 있다가 파랑의 침식에 의해 분리되어 형성되었다. 해안을 따라 형성된 해식아치나 시스택은 각각의 독특한 모양을 본떠 이름이 붙여져 있으며 독도의 대표적 관광자원이 되고 있다. 

자갈해안은 헤드랜드 사이에서 만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해안에서 확인된다. 구성물질은 해안에 도달하는 파랑에너지가 커서 비교적 큰 자갈(cobble-boulder급)들이 혼재되어 있다. 독도에는 단층선이 높은 밀도로 분포하는데 거의 모든 지층들은 단층에 의해 변위되거나 절단되었다. 단층선을 따라서는 침식과 풍화작용에 의해 깊은 골짜기나 절리가 나타난다. 단층의 대부분은 정단층이며 주향은 서북서-동남동 내지 북서-남동 방향이 우세하다. 단층선이 해면과 만나는 곳에서는 파랑의 침식작용으로 해식동이 형성되어 있다. 

독도는 동해 가운데 위치하여 모든 방향에서 접근하는 파랑의 영향을 받는다. 파고가 높은 파랑이 해안에 부딪히거나, 비말에 포함된 염분이 암석의 절리에 침투하여 다양한 형태의 풍화지형은 형성한다. 독도에서 관찰되는 대표적 풍화지형인 타포니(tafoni)는 기반암 특성, 지질구조선 분포, 사면경사와 토양피복, 식생피복에 따라 분포에 차이를 보이는데, 특히 단층선이 통과하는 부분은 절리가 많이 형성되어 있어 단층선을 따라 타포니 발달이 용이하다. 독도에서는 주로 응회암으로 구성된 해식애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며 규모도 큰 편이다. 

서도 어민숙소 북쪽 해안에서는 거의 수직에 가까운 배후사면에서 떨어져 나온 암설들이 해안에 퇴적된 소규모의 애추(talus)를 관찰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애추는 동결ㆍ융해가 빈번하게 반복되는 빙기에 형성된 것이지만, 독도해안은 현재도 배후사면의 식생이 빈약하고 애추의 규모도 작으므로 후빙기에 형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동도 가운데에는 비교적 큰 침식와지가 관찰되는데 해발고도 60m 내외인 지표면으로부터 수직으로 해면까지 이어진다. 이 침식와지는 단층선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기반암에 절리가 높은 밀도로 형성되고 가장 하부의 괴상각력응회암이 천장굴을 통해 유입된 파랑에 의해 기반암이 차별적인 침식을 받아 제거됨과 동시에 상부 기반암들도 하부로 함몰된 이후 파랑에 의해 제거되어 수직의 와지가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독도의 많은 부분은 토양층 발달이 미약하여 기반암이 노출되어 있는데, 이는 파랑에 의해 형성된 해식애이거나 또는 사면경사가 대단히 급하여 토양층이 형성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부 식생이 분포하는 곳에서는 토양층이 분포하므로 토양분포는 식생분포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독도 산지의 정상부 부근의 모암은 알칼리성 화산암이며, 토양은 이 모암이 풍화되어 형성된 잔적토이다. 토성은 부분적으로 양토(loamy sand)도 분포하지만, 대부분 사질토 내지 사질양토이다. 

동도에는 토양층이 없거나 1㎝ 이하로 토양층 발달이 불량한 곳이 넓게 나타나지만, 사면 경사가 완만한 일부 지역에는 비교적 두꺼운 토양층이 분포한다. 이것은 사면에 식생피복이 불량하여 많은 강수량과 강한 바람으로 인해 토양층이 유실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이며, 인간 활동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토양층은 특히 동도의 정상부에서 북동쪽으로 연결되는 사면에 10㎝ 이상의 두께로 퇴적되어 있다. 일부 지역은 토양층 두께가 약 20㎝에 이르는 곳도 있는데, 이러한 지역은 사면경사가 완만하여 토양침식이 적고, 사람들의 접근이 차단되어 식생과 토양이 상대적으로 잘 보전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서도의 토양분포 특성도 동도와 유사하며 정상부 남쪽에 사면경사가 완만한 곳에 토양층이 상대적으로 두껍게 형성되어 초본들이 높은 밀도로 분포한다. 북쪽 사면이 개석된 물골 골짜기에도 토양층이 상당히 두껍게 분포하는데 이곳은 독도 식목사업의 대상지로 많은 목본들이 식재되어 있다. "독도의 기후와 해양" 독도는 대한민국 최동단의 섬이다.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같은 위도의 내륙 지역보다 겨울이 상대적으로 온화하며 여름은 더위가 심하지 않고 강수가 연중 고른 해양성 기후의 성격이 강하다. 또한 독도는 중위도에 위치하기 때문에 계절변화가 뚜렷하다. 

대륙의 동안에 위치하기 때문에 겨울철에는 대륙의 찬 고기압의 영향을 받고, 여름철에는 해양에 고기압이 형성되어 해양의 영향이 탁월하다. 기단 배치를 통해 살펴보면 여름에는 북태평양 기단의 영향이 탁월하여 덥고 습하며, 겨울에는 시베리아 기단의 영향을 받아 춥고 건조하다. 또한 동해상에 위치한 섬이므로 해양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동해는 수심이 깊고 표면적이 넓어 겨울철에도 9~10℃를 유지하여 서해보다 따뜻하다. 

독도의 기후에 영향을 미치는 해류로는 동한난류와 북한한류가 있는데 여름에는 동한난류의 영향이 탁월하고 겨울에는 북한한류와 동한난류가 울릉도 부근에서 만난다. 이렇게 수리적·지리적 위치, 기단배치, 해류, 고도 등의 인자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독도의 기후특성을 결정한다. 독도의 연평균기온은 13.8℃로 같은 위도대의 다른 지역에 비해 높은 편이다. 연교차는 20.5℃로 같은 위도대의 다른 지역들보다 작다. 이것은 동한난류와 해양의 영향으로 여름철 기온은 상대적으로 낮고 겨울철 기온은 높기 때문이다. 월평균기온은 1월과 2월 기온이 가장 낮고 8월 기온이 가장 높다. 

강수량은 여름철에 많은데 9월 강수량이 가장 많다. 연강수량에서 겨울철 강수량이 차지하는 비율도 22% 정도로 높다. 독도의 풍향을 계절별로 살펴보면 모든 계절에 서풍과 남서풍이 탁월하게 나타난다. 봄과 여름에는 남서풍이 25% 정도를 차지하고 겨울을 제외한 모든 계절에 동풍은 20~25%를 차지한다. 

독도와 울릉도는 태풍이 빈번하게 지나가는 경로에 위치하여 한 해 평균 2~3개 태풍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태풍의 영향 정도에 따라 연강수량에 큰 편차를 보이기도 한다. 독도가 위치하고 있는 동해는 태양으로부터 열이 공급되는 적도 해역으로부터 에너지를 북쪽으로 이동시키는 길목에 해당하는 중위도에 위치하고 있으며, 아시아 대륙과 태평양 사이에서 일어나는 물질 교환의 통로 역할을 한다. 동시에 동아시아 몬순의 영향으로 상층에서는 계절적으로 뚜렷하게 다른 해양학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동해의 상층에서는 동한난류, 쓰시마해류, 리만해류, 북한한류와 같은 해류가 있으며, 북부 해역의 냉수와 남쪽의 난수 사이에는 강한 극전선이 형성된다. 또한 해류들의 시공간적 변화가 심해 사행과 소용돌이를 수반하기도 한다. 

독도 주변의 해류는 위치적 특성상 단일 형태로 특정지어지지 않고 난류와 한류가 공존한다. 난류는 주로 쿠로시오로부터 공급된 해수를 운반하는 흐름으로 쿠로시오해류로부터 갈라져 나온 쓰시마난류는 대한해협을 통과하면서 몇 갈래로 분리되어 흐르다가 북위 37.5° 정도에 이르러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쓰가루해협을 향하게 된다. 

한류는 리만한류와 연결된 북한한류가 동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흐르다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흐르는 흐른다. 난류와 한류처럼 성질이 크게 다른 바닷물이 접하는 해역에서는 수온이나 염분이 수평적으로 급격하게 변하는데 이를 전선이라고 한다. 북상하는 동한난류가 동해 연안에서 이안되어 동쪽으로 흐르는 해류가 동해를 통과할 때 이 해류의 북쪽에는 상대적으로 찬 한류와 접하게 되어 수온의 변화가 크므로 전선이 나타난다. 

이 전선을 통상적으로 극전선으로 부르는데 일반적으로 극전선은 동한난류가 형성되지 않거나 약한 경우를 제외하고 울릉도 북쪽에 형성되기 때문에 독도 인접해역은 평균적으로 난류의 지배를 더 많이 받는다. 독도 주변 해역 상층 해류의 형태를 지배하는 다른 현상으로 소용돌이(eddy, )가 있다. 

독도 북쪽을 통과하는 해류는 이동 형태에 변화가 매우 다양하여 직선 형태로 나타나지 않고 곡류(meandering)하면서 독도 주변의 해류 형태를 조절하는데 곡류가 심해져 해수 흐름이 시계 혹은 반시계방향으로 회전하게 되면 소용돌이가 발달하게 된다. 독도 주변해역에서는 동한난류가 동해연안에서 분리되어 동쪽으로 흐르면서 일부가 남서쪽으로 재순환하는 과정에 울릉도 부근에서 난수성 소용돌이가 형성되어 거의 상존하고,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냉수성 소용돌이도 형성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이 난수성 소용돌이는 시계방향의 흐름을 유지하면서 수 백m 이상의 깊이까지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이러한 소용돌이와 해류의 특성은 인근 해역의 날씨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해양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독도 해역 심층에서의 해류는 전체적으로 해저 지형의 영향을 받아 등심선을 따라 흐르는 경향이 강하다. 지난 1996년부터 울릉도와 독도 사이의 한국해저간극에서 심층해류 관측을 해 온 결과 최대 유속 30㎝/s 이상의 지속적인 북향류가 관측되었는데, 이 강한 북향류는 지속적인 성격으로 인해 최근 ‘독도심층류(Dokdo Abyssal Current)’로 명명되기도 하였다. 

"독도의 생태계" 

독도는 우리나라 동쪽 끝에 자리 잡고 있는 섬으로 전반적으로 온난다습한 해양성 기후가 나타나지만 계절변화가 뚜렷하고, 난류와 한류가 교차하는 지점이라 우리나라의 다른 어느 곳보다 다양하고 독특한 생태계를 보유하고 있다. 육지에서 200㎞ 이상 떨어져 있고 그 동안 사람들의 접근이 어려워 비교적 자연환경이 잘 유지되었으나 근래 들어 입도하는 관광객 수가 증가하면서 생태계의 파괴가 우려된다. 독도의 육상 생태계를 살펴보면 육상 생태계의 모태는 식물이라고 할 수 있다. 독도는 해저화산활동에 의해 동해 해저평원 상에 형성된 대양도로서 대륙의 생물종을 그대로 가지고 분리된 대륙도와는 달리 생물의 종수가 적다. 또한 육지와의 거리가 멀고 동해의 수심도 깊어 외부로부터 종의 유입이 상대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새로운 종의 침입과 정착 과정, 그에 따른 생물의 진화나 천이과정이 명확히 드러난다. 

대양도" 

섬의 생성시기와 지리적 위치에 따른 기후특성, 면적과 고도에 따른 종의 수, 종 공급원인 대륙과의 거리, 종 유입시기와 운반매개체, 해수의 염분농도와 토양영양염류 등 여러 조건에 따라 생물상은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독도는 수리적 위치상 아한대남단 해역에 속하며 난류와 한류가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연평균 12℃ 정도로 같은 위도의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온난한 기후를 보인다. 또 눈, 비가 내리거나 흐리고 짙은 해무가 끼는 날이 많아 다습하여 독도의 식물상은 전체적으로 아열대 식물상과 유사한 양상을 나타낸다. 

독도는 섬의 면적이 좁고 면적의 대부분이 급경사를 이루고 있어 식물이 정착할 공간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토양 발달도 어렵다. 또한 연중 강한 바람과 많은 강수량은 일부 존재하는 토양의 유실을 야기한다. 노출된 기반암과 급경사 사면, 얕은 토양층, 척박한 토질, 높은 염분, 부족한 담수 등 독도는 식생의 정착에 있어 불리한 환경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독도에 자라는 식물들은 키가 작고 뿌리가 짧은 초본류가 대부분이며 큰 목본류는 자라기 매우 힘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까지 30여 차례에 걸쳐 독도 식물상에 대한 연구 및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최소 34종에서 최대 75종까지 조사자에 따라 식물종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를 종합해보면 독도에 자라고 있는 식물종은 총 48분류군이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관찰되었으며 이 중 환경부가 지정한 식물구계학적 특정식물은 총 13분류군이다. 독도에는 교목인 곰솔과 함께 보리밥나무, 넓은잎사철나무, 섬괴불나무 등의 관목, 개밀, 해국, 섬시호, 큰두루미꽃, 도깨비쇠고비, 왕김의털 등의 초본류가 자란다. 이들은 대부분 경사가 다소 완만한 곳에 분포하고 있다. 

섬시호와 큰 두루미꽃은 환경부에서 보호식물로 지정보호하고 있으며, 왕호장근은 구황식물로 이용되기도 했다. 주로 벼과(15종류), 국화과(11종류) 등이 많이 분포하는데 이것은 이들 식물이 건조에 강하고, 척박한 땅에 살 수 있으며, 바람에 잘 전파되고, 내염성이 있는 종류들이 많기 때문이다. 

독도에 자라는 섬기린초, 섬장대, 섬괴불나무 등은 울릉도 고유종인데, 독도에 분포하는 대부분의 종들이 울릉도와 공통종으로 식물지리학적 측면에서 독도는 울릉도와 가장 가까운 종 구성을 보이고 있다. 독도의 식물 가운데 많은 종이 한반도에서 울릉도를 거쳐 독도에 전파된 것으로 보이나 대나물과 같이 한반도 육지에서 직접 유입된 종들도 있다. 이들 종은 바람이나 해류, 조류를 통해 유입되거나 인간에 의해 도입된 것으로 생각된다. 아직까지 독도에만 고유하게 분포하는 식물 종류는 알려진 바 없다. 

독도에 자생하는 목본류로는? 

섬괴불나무, 사철나무, 보리밥나무, 댕댕이덩굴, 개머루, 동백나무가 있다. 이 중 섬괴불나무는 울릉도와 독도에서만 자라는 희귀종으로 높이 1.5~2m, 지름 20㎝의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독도는 한반도와는 달리 천이가 일어나지 않는 독특한 초지가 나타나는데, 이는 독도의 지형이 경사가 급하고, 토양층이 얕고, 바닷바람이 강하게 부는 등 환경조건이 열악하기 때문이다. 독도에 사는 식물은 키가 작아서 강한 바닷바람에 잘 적응하며, 잎이 두텁고 잔털이 많아 가뭄과 추위에도 잘 견딘다. 독도는 식물의 씨앗을 전해줄 공급원(source)가 멀고, 경사가 급하여 토양이 발달하지 못하고, 비는 내리지만 물 빠짐이 좋기 때문에 수분이 항상 부족하여 자생하는 식물의 종류가 적다. 그러나 최근 사람의 왕래가 많아지고 무분별하게 외지식물들을 심으면서 옮겨온 잡초성 귀화식물들이 많다. 

그 중 왕호장근은 독도의 생태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종이며, 그 밖에 마디풀, 참소리쟁이, 흰명아주, 가는명아주, 까마중, 방가지똥, 민들레, 닭의장풀 등이 독도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본래 독도의 자생식물은 국화과 식물이 주를 이루고 있었으나 외부로부터 벼과식물과 다른 귀화식물이 유입되면서 자생종과 경쟁하고 있는 실정이다. 과거에는 독도로의 진입경로가 한정되어 있었으나 최근 동도에 접안시설이 마련되고 울릉도~독도 간 정기항로가 개설되면서 독도에 입도하는 인원이 크게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인위적으로 식재하거나 우연히 유입된 종들이 많아졌고 독도에 자라는 식물종 가운데 19종이 독도에 원래 자생하던 종이 아닌 것으로 밝혀져 독도 식물생태계의 교란이 우려된다. 독도의 목본식물 중 보리밥나무, 섬괴불나무, 동백나무, 곰솔, 사철나무, 후박나무, 눈향나무, 울향나무, 무궁화는 인위적 식재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독도의 생태계 보호를 위해 외부로부터 유입된 종에 대한 관리 대책이 요구된다. 다음으로 독도의 육상생태계 중 동물상에 대해 살펴보면 독도에서 관찰되는 육상 동물은 크게 조류, 곤충류, 포유류로 구분할 수 있다. 독도에서 양서류와 파충류가 발견되었다는 기록은 아직 없기 때문이다. 

독도의 조류상에 대한 연구는? 

그동안 일부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져 왔는데, 원병오·윤무부는 8종 76개체, 우한정·구태회는 17종 153개체를 관찰하였고 괭이갈매기는 가장 많은 개체가 관찰되어 우점종이었다. 2005년 환경부의 독도생태계정밀조사에서는 25종이 관찰된 것으로 보고되었고, 권영수는 총 92종의 조류를 확인하였다. 이렇게 결과의 차이가 큰 것은 계절에 따른 조류상의 변화폭이 크고, 조사 시기나 빈도에 따라 종의 풍부도 및 다양성이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독도에 서식하는 조류로는 괭이갈매기를 포함하여 바다제비, 고니, 흰줄박이오리, 되새, 노랑턱멧새, 알락할미새, 상모솔새, 노랑말 도요새, 황조롱이, 슴새, 메추라기 등이 있다. 

이들 가운데 개체수가 가장 많은 조류는 괭이갈매기와 바다제비, 슴새 순이며, 멸종위기종은 매(Ⅰ급), 벌매, 솔개, 뿔쇠오리, 올빼미, 물수리, 고니, 흑두루미(이상Ⅱ급) 등 8종이다. 동북아시아에서만 볼 수 있는 슴새와 바다제비, 괭이갈매기 등 3종은 군집하여 서식하고 있다. 슴새와 바다제비는 감소되고 있으며, 괭이갈매기는 2,000~3,000마리 정도로 추정된다. 독도 서도의 남사면과 동도 독립문바위 서쪽, 벼과 여러해살이식물인 개밀이 자라는 곳은 괭이갈매기의 대번식지로 알려져 있다. 

독도는 남북으로 이동하는 철새들이 쉬어 가는 구원섬으로 깝작도요, 황로, 왜가리, 슴새 등의 여름철새, 민물도요, 재갈매기, 말똥가리 등의 겨울철새, 꺅도요, 노랑발도요, 청다리도요 등의 나그네새 등 다양한 철새들의 기착지 및 휴식처로서 기능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에 따라 1982년 11월 16일 ‘독도 해조류 번식지’로 지정되었다가 1999년 12월 천연기념물 제336호로 지정되면서 명칭이 ‘독도천연보호구역’으로 바뀌었다.

독도의 곤충류는 잠자리, 집게벌레, 메뚜기, 매미, 딱정벌레, 파리, 나비 등 9목 35과 53종이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조사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 해류 및 계절풍의 영향으로 비교적 온난하여 남방계 곤충(50.9%)이 북방계 곤충(39.7%)보다 많으며 이들은 쿠로시오 해류와 대마 해류의 이동으로 옮겨진 것으로 본다. 본토와의 공통종은 전체의 약 90%이상을 차지하고 울릉도와의 공통종은 전체의 70%정도이며 독도 고유종은 3종으로 약 8%를 차지한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한반도와 밀접한 관련을 가졌으며 식생과 마찬가지로 한반도-울릉도-독도 순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독도에서는 독도장님노린재, 섬땅방아벌레, 어리무당벌레, 남방남색꼬리부전나비 등 국내에서 알려지지 않은 미기록 종이 발견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독도에 자생하는 야생 포유류는 없고 독도경비대에서 기르는 삽살개가 있을 뿐이다. 예전에는 독도 주변 암초에 해양 포유류인 강치가 다수 서식하였으나 일제 강점기에 가죽과 기름을 얻기 위한 일본 어업회사의 과다한 남획으로 현재는 멸종(혹은 절멸)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1973년에 경비대가 본토에서 가져다가 토끼 10마리를 방사한 적이 있었는데 한때 그 수가 많아져 식생 파괴 등의 문제가 발생한 적이 있어 현재는 이들 모두 제거되었다. 섬이라는 특수한 환경을 고려할 때 외부 동·식물 유입에는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 다음으로 독도의 해양생태계를 살펴보면 최근 독도와 관련하여 영토문제가 부각되면서 동시에 독도의 해양생태학적 특성과 함께 주변 해역의 수산자원의 가치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독도 주변 해역의 생태, 

자원학적인 조사는 해양생물군을 대상으로 몇 차례 이루어진 적이 있으나 본격적인 수중 생태조사는 1997년부터 시작되었고, 최근 독도 전문 연구사업단이 발족되어 매년 수중조사를 포함한 기초생태학적인 자료들을 축적해오고 있다. 독도는 울릉도와 유사하게 남쪽에서 올라오는 대만난류의 영향권에 속하여 많은 난류성 생물들이 관찰된다. 

겨울철에는 수온이 10℃ 이하로 하강하기도 하여 한류성 생물종들도 서식하고 있어 난류와 한류가 교차하는 해역의 특성을 보여준다. 때문에 독도는 우리나라 동해안이나 남해, 제주도와는 또 다른 독특한 해양 생태적 특징을 지닌 해역으로 생태학적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해역이다. 1997년부터 실시된 수중생태 조사에서는 수중 지형별 대표 지점 5 곳을 선정하여 생물분류군별로 구분한 후 해조류, 무척추동물, 어류 각 종의 분포, 개체군 구조 및 생태, 현존량을 추정하였다. 독도 연안 위치와 수심, 지형적 특성, 계절에 따라 이들 분포에 차이를 보이는 것으로 관찰되었다. 현재까지 독도 연안의 해조류는 대황, 감태, 미역 등 대형 갈조류를 포함하여 총 160여종이 기재되어 왔다. 

무척추 동물은 조사 시 마다 다소 차이를 보이는데 다모류 32종, 집게류 6종, 연체동물 64종 등 한대성·온대성 종이 혼합하여 서식하는 특성을 갖고 있었다. Je et al.(1997)은 연체동물 40종, 환형동물의 갯지렁이류 56종, 절지동물의 갑각류 55종, 극피동물 6종 등을 포함하여 총 157종의 무척추동물 종을 기재하고 있다. 독도 연안의 어류는 1997년 독도 연안 어류 조사 당시 58종이 확인되었으나 그 후 19종이 추가 확인되어 지금까지 총 77종으로 기록되고 있다. 독도 주변 해역의 어종 구성을 보면 열대 어종이 37.8%, 아열대 어종이 22%, 온대 어종이 40.2%로 나타났다. 

제주도 남부 해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온대 어종이 많이 분포하는데 이는 독도 주변 해역에서 난류와 한류가 교차함을 보여준다. 앞으로 우리나라 주변 해역에 난류 세력의 확장과 함께 열대, 아열대성 어종들이 추가 발견될 것으로 보인다. 1997년부터 독도 주변의 수중 서식생태를 고려한 수산 생물종의 자원현황, 관리방안에 대한 연구도 이루어졌다. 1997년 5월독도연안의 수산생물의 생산성 조사 결과, 연어병치, 조피볼락 등 총 20종의 어류와 문어, 군소 등 연체동물 7종, 성게 등 극피동물 5종 외에 갑각류 3종 등 총 35종이 확인된 바 있다. 1999년 5월에는 총 27종(어류 15종, 연체동물 6종, 극피동물 5종, 갑각류 1종)의 수산 생물이 확인되었다. 

지금까지 독도 연안에서 기록된 해양생물자원은 어류를 포함하여 동물 145종과 해조류 44종이다. 독도는 이들 생물이 서식하기에 적합한 해저 환경을 지니고 있어 독도연안에 서식하는 많은 정착성 어종들의 유어 서식장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계절에 따라 큰 환경 변화를 초래하여 다양한 회유성 어종이 출현하므로 어족 자원이 풍부하다. 또한 빼어난 수중 경관을 가지고 있어 향후 울릉도, 독도 연안을 연계한 관광자원 개발 잠재력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독도 연안의 어족 자원에 대한 정밀한 생태·자원 조사와 이를 기반으로 한 적정 어업 생산 총량 산출을 통해 어족 자원 보존에 힘쓰는 한편, 수중 생태 보존 및 관리의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독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뜨는 곳이다. 대한민국 사람들이라면 독도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일본과 어떤 분쟁을 벌이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섬이다. 물론 우리에게 소중한 영토이며 자산이다. 독도는 울릉도 동남쪽 89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일본의 오키시마로부터는 160km의 거리에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산 1-37번지로 되어 있다. 또한 우리나라 천연기념물 336호로 지정되었다. 독도는 경제적인 측면과 지정학적인 면에서도 가치가 매우 높다. 독도 주변의 바다는 명태, 오징어, 상어, 연어 등 다양한 물고기들이 많이 잡힌다. 바닷속에도 다시마, 소라, 전복 등 해조류가 다양하게 서식하며 상당량의 지하자원이 묻혀 있는 곳이다.  

"독도 둘러보기" 

국내의 유일한 범선 코리아나를 타고 우산국(울릉도)을 복속시킨 이사부 장군의 발자취를 따라 울릉도와 독도를 답사했다. 코리아나호(선장 정채호 67세, 136톤, 정원 72명)는 정박지가 여수인데, 일본 나가사키 범선 축제를 14번째 초청받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국위를 선양하는 국내 유일한 범선이다. 지난 10월 18일부터 20일까지 삼척시 주관으로 이 배를 타고 울릉도와 독도를 답사했다. 20일 독도 방문을 마치고 저녁에 삼척으로 귀향하다가 뜻하지 않는 풍랑을 만났다. 다시 울릉도로 들어가 3일간 파도가 잔잔해지기를 기다리면서 울릉도 곳곳을 돌아봤는데 울릉도와 독도를 재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영희 한복 디자이너는 “우긴다고 독도가 일본 땅이 되지는 않겠지만 우리 국민들과 함께 힘을 보태고싶어 패션쇼를 기획했다. 독도 현지에서 우리 옷을 입고 평화로운 방식으로 우리 땅 독도를 세계에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가슴이 뿌듯하고 자긍심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독도의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바람에 휘날리는 모델들의 옷자락이 보는 이들을 압도시켰다. 독도와 한복을 연관짓는다면 둘 다 ‘우리 것’이라는 점이다. 저녁에는 독도 주민숙소에서 경북도와 동해안 5개시 군 해양수산과장 등 해양관계자 2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워크숍이 있었다. "독도와 전라도의 인연" 울릉도와 독도는 전라남도 특히 거문도 지역 사람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는 여수의 먼 바다에 있는 삼산면 어부들을 소재로 ‘남녘 어부들이 개척한 뱃길’의 역사를 연구하여 발표하였다. 

최근에 호남대학교에서 발표한 논문에 의하면, 1880년대 울릉도 개척 당시 원주민 80%는 전라도 출신이었고 독도라는 섬 이름 역시 전라도 사람들이 부여한 지명인 것으로 드러났다. 고종 때인 1882년 이규원 울릉도 검찰사가 고종에게 올리는 보고서에 울릉도 전체 인구 141명 가운데 전라도 사람이 115명, 강원도 14명, 경상도 11명, 경기도 1명으로기록했다. 전라도 출신의 개척민 가운데 각 지역별로는 흥양(현재 전남 고흥) 3도(죽도, 손죽도, 거문도) 출신이 61명으로 가장 많았고, 흥해(여수) 초도 33명, 낙안(순천) 21명이었다. 논문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에 나오는 초도 사람들은 먼 바다 한가운데 살았지만 험한 바다를 개척하는 개척자 정신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여수지방에는 노동요 술비소리가 전해온다. 이 소리는 여수의 거문도와 초도 어부들이 어구용 밧줄을 꼬는 작업을 하거나 배를 부릴 때 불러왔고 지금도 부르는 노래이다. 노랫말이 힘차고 가락 또한 여간 역동적이지 않다. 그래서 부르는 사람도 그렇지만 듣는 사람도 흥에 취한다. 그런데 이 노랫가사를 살펴보면 의미심장한 데가 있다. 멀리 울릉도와 독도의 뱃길을 개척하고 고기를 잡았던 숨은 역사가 담겨 있는 것이다. 독도는 우리땅 <노래> (바뀐 가사); 울릉도 동남쪽 뱃길 따라 87K(팔칠케이) 외로운 섬 하나 새들의 고향 그 누가 아무리 자기네 땅이라 우겨도 독도는 우리땅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동경 132 북위 37 평균기온 13도 강수량은 1800 독도는 우리땅 오징어 꼴뚜기 대구 홍합 따개비 주민등록 최종덕 이장 김성도 19만 평방미터 799에 805 독도는 우리땅 지증왕 13년 섬나라 우산국 세종실록지리지 강원도 울지현 하와이는 미국땅 대마도는 조선땅 독도는 우리땅 러일전쟁 직후에 임자없는 섬이라고 억지로 우기면 정말 곤란해 신라장군 이사부 지하에서 웃는다. 

독도는 우리땅 (한국땅). 참고문헌" 

『독도의 자연』(경북대학교 울릉도·독도연구소, 경북대학교 출판부, 2008) 『대한민국국가지도집』(국토해양부 국토지리정보원, 2008) 『한국지리지: 총론편』(국토해양부 국토지리정보원, 2008) 『한국지리지: 경상편』(국토해양부 국토지리정보원, 2008) 『독도·울릉도 사람들의 생활공간과 사회조직연구』(박성용, 경인문화사, 2008) 『독도견문록』(주강현, 웅진지식하우스, 2008) 『독도 가는 길』(최낙정 외, 해양문화재단, 2008) 『독도·울릉도의 역사』(김호동, 경인문화사, 2007) 『울릉군지』(울릉군, 2007) 『기후학』(이승호, 기후학, 2007) 

『동해상 한국령 도서와 일본령 도서의 식물지리 분석』(공우석·조도순, 한국해양수산개발원, 2007) 『가고 싶은 우리 땅 독도』(국립중앙박물관, 2006) 『돋도의 식생, 전국자연환경기초조사』(유영한·송민섭, 환경부, 2006) 『겨레의 섬 독도』(차종환·신법타·김동인, 해조음, 2006) 『독도 균열발생에 따른 지반안정성 조사연구』(한국지질자원연구원, 해양수산부, 2006) 『울릉도 및 독도의 지리적 특성』(공우석 외, 한국해양수산개발원, 2006) 『독도 균열 발생에 따른 지반안정성 조사연구』(김복철 외, 한국지질자원연구원, 2006) 『독도문제 대책을 위한 토론회 자료집』(대한지리학회·조선일보사, 2005) 

『독도, 지리상의 재발견』(이진명, 삼인, 2005) 『독도 생태계 등 기초조사 연구』(한국해양연구소, 해양수산부, 2005) 『독도 자연생태계 정밀조사』(환경부 자연보전국 자연정책과 편, 환경부, 2005) 『신용하의 독도 이야기』(신용하, 살림출판사, 2004) 『한국지리(총론)』제3판(권혁재, 법문사, 2003) 『전국자연환경조사보고서: 울릉도·독도 지역의 지형경관』(서종철·손명원·윤광성, 2002) 『한국기후표』(기상청, 2001) 『한국의 기후』(이현영, 법문사, 2000) 『독도 생태계 등 기초조사 연구』(한국해양연구소, 해양수산부, 2000)

『울릉도 독도의 종합적 연구: 울릉도 및 독도지역의 식물생태계』(김용식,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98) 『독도』(박인식, 대원사, 1996) 『독도의 민족 영토사 연구』(신용하, 지식산업사, 1996) 『울릉군 통계연보』(울릉군, 1996) 『울릉도·독도 종합학술조사보고서: 울릉도와 독도의 지형』(박동원·박승필, 한국자연보존협회, 1981) 「독도 화산의 지질: 암석, 광물, 연대 그리고 생성원인」(장윤득·박병준,『독도의 자연』, 경북대학교출판부, 2008) 

「독도해산의 사면침식으로 인한 지형」(강지현 외,『대한지리학회지』43-6, 2008) 「독도에 관한 연구 성과와 과제」(박경근·황상일,『지리학논구』27, 2008) 「조류 서식지로서 독도의 생태적 특성」(권영수,『한국조류학회지』10-1, 2007) 「독도 동도 서쪽 해안의 타포니 지형 발달」(황상일·박경근,『한국지역지리학회지』13-4, 2007) 「지구물리 자료를 이용한 울릉분지 북동부 독도 및 주변 해산들에 관한 연구」(김창환, 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6) 

「독도 지형지」(전영권,『한국지역지리학회지』11-1, 2005) 「독도 주변해역의 해저지형 특성 및 해산의 내부구조」(한현철,『독도의 지정학: 독도문제 대책을 위한 토론회』, 대한지리학회·조선일보, 2005) 「독도 영유권 시비와 지정학」(형기주,『독도의 지정학: 독도문제 대책을 위한 토론회』, 대한지리학회·조선일보, 2005) 「독도화산의 분출윤회와 화산형태」(황상구·전영권,『자원환경지질』36-6, 2003) 「동해 독도주변 해산의 지구물리학적 특성」(강무희 외,『해양학회지』7, 2002) 

「해저지형 및 자기이상 분석에 의한 독도 및 주변 해산 구조 및 성인 연구」(박찬홍 외,『대한지질학회·대한자원환경지질학회·한국석유지질학회·한국암석학회 제57차 추계공동학술발표회 초록집』, 2002) 「독도 알칼리 화산암류의 K-Ar 연대와 Nd-Sr 조성」(김규한,『지질학회지』36, 2000) 「독도 화산암의 분별결정작용」(김윤규·이대성·이경호,『지질학회지』23, 1987) 「울릉도 및 독도의 식생」(임양재·이은복·김선호,『한국자연보존협회 조사보고서』19, 1981) 「울릉도와 독도의 조류」(우한정·구태회,『자연보호중앙협의회 자연실태종합학술조사보고서』10, 1981) 「독도의 생물상 조사보고: 독도의 조류조사」(원병오·윤무부,『자연보존』23, 1978) 「독도의 식물상」(이창복,『자연보존』22, 1978) 국토지리정보원(www.ngii.go.kr) 기상청(www.kma.go.kr) 독도바다지킴이(dokdo.kcg.go.kr) 독도본부(www.dokdocenter.org) 독도종합정보시스템(www.dokdo.re.kr) 사이버독도(www.dokdo.go.kr) 울릉군청(www.ulleung.go.kr) 한국관광공사(www.visitkorea.or.kr) 

"The foundation research for conservation of environment and fishery resources in waters around Dokdo(The Association for Research and Conservation of Dokdo, 1998) Preliminary Study on Marine Benthic Organisms of Dokdo(Je, J. G. etc, Underwater Science & Technology 1-1, 1997) Geology and evolution of Tok island(Sohn, Y. K., Park, K. H., Korea. J. Geol. Soc. Korea, V.30, 1994) The observation of scuba diving in benthos biota of Dokdo(Hong, J. S., The Korean Association for Conservation of Nature 16, 1981) The fauna of marine invertebrate in Uleung Is. and Dokdo Is. (Kim, H. S., Choi, B. L, The report of the KACN 19, 1981) Seaweed in Ullungdo and Dokdo(Lee, I. K., S. M. Bu, The Korean Association for Conservation of Nature 19, 1981) A report of collection of marine invertebrate in Dokdo coast(Kim, H. S., Nature conservation 23, 1978). 

"이웃나라 (일본)의행포"

"일본은 1905년 일방적으로 독도를 일본 영토라로 말한 이후 계속 일본 소유라고 주장하고 있어요.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부르면서 ‘다케시마의 날’까지 지정해 가며 우기는 거예요. 왜 그럴까요? 독도를 소유하면 주변의 바다, 즉 바다의 천연자원까지 모두 가질 수 있기 때문이에요. 독도 주변 해역은 차가운 한류와 따뜻한 난류가 만나는, 다양한 어류들이 사는 엄청난 어장이에요. 

독도 주변에는 미래 에너지원으로 꼽히는 ‘가스 하이드레이트’가 많이 매장되어 있어요. 또한 일본의 정치인들은 국내적으로 시끄럽고 복잡한 일들이 생기면 일본인들의 관심을 나라 밖으로 돌리려고 독도 문제를 계속 이야기하고. 이제는 느끼며 깨우치고 우기기를 그만 해야죠? 지금 독일반만 본 받아도...!



훈민정음. 1

훈민정음 가장 합리적인 글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세계 문자사상 가장 진보된 글자라고 평가받고 있다. 훈민정음 창제 전에 우리 민족은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로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올바른 소리'란 뜻이며, 세종대왕이 1446년 제정 · 공포한 한국의 국자() 또는 그것을 해설한 책의 이름을 말한다. 훈민정음은 세계에 표기했다. 따라서 우리말의 특성을 충분히 반영할 수 있는 새로운 문자가 요구되었는데, 세종대왕은 남의 나라 글자인 한문을 빌려 쓰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백성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문자를 만들게 되었다. 한문은 우리말과 서로 통하지 않았으며, 배우기에 상당히 어려운 글자였다. 따라서 일반 서민들이 배우기 쉬운 새로운 문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에 세종대왕은 백성들의 불편을 덜어 주고 우리말의 자주성과 주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새로운 문자인 훈민정음을 창제하게 된 것이다. 

훈민정음을 창제하게 된 이유를 세종대왕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서 한자와 서로 통하지 못한다.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것을 딱하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노니,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익혀서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국지어음() 이호중국() 여문자불상류통() 고우민() 유소욕언() 이종불득신기정자() 다의() 여() 위차민연() 신제이십팔자() 욕사인인이습(使) 편어일용이(便))." 흔히 『언해본() 훈민정음』이라고도 한다. 

번역한 사람이나 번역된 연대를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세종 말년부터 세조 초기 사이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번역방식은 한문을 짧은 구절로 나누어 토()를 달고, 한자마다 동국정운식 한자음()을 표기하였으며, 그 아래에 두 줄로 한문의 자석( : 뜻풀이)을 한 다음, 그 구절 전체를 번역하였다. 한문본과 국역본은 그 내용이 완전히 같은 것이 아니어서, 국역본에는 원한문본에 없는 치음자()에 관한 규정, 즉 한어()의 치음을 표기하는 한글의 치음자를, 치두음자( : ㅈ ㅊ ㅉ ○ ㅆ)와 정치음자( : ㅈ ㅊ ㅉ ○ ㅆ)로 따로 제자해서 사용하도록 한 규정이 첨가되어 있으며, 이 규정은 1455년(단종 3)에 완성된 것으로 보이는 『사성통고()』의 범례에도 들어 있으므로, 번역사업은 1455년 이전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국역본 훈민정음』은 단행본으로 간행되어 전해 내려오는 것이라는 박승빈본(, 현재 고려대학교 육당문고 소장)이 알려져 있었으나, 정밀한 조사에 의하면 『월인석보』 책머리 부분을 따로 제책한 것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빠른 국역본은 1459년(세조 5)에 간행된 『월인석보』의 책머리에 실려 있는 「세종어제훈민정음()」이다. 그 원간본은 서강대학교 소장되어 있고, 1568년(선조 1)희방사()의 중간본도 전한다.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논란"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은 배익기 씨가 갖고 있다고 알려져 있으나, 현재까지 배 씨가 소유권자에 대한 인도를 거부하고 있는 상태다. 배 씨는 2008년 집을 수리하다가 발견했다고 주장하며 방송을 통해 상주본을 처음 공개했다. 그러나 골동품 판매업자 조 씨가 자신의 골동품가게에서 배 씨가 고서적을 사가면서 몰래 상주본을 훔쳐 갔다고 주장하며, 2010년 2월 배 씨를 상대로 물품 인도 청구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2011년 5월 대법원은 조 씨의 소유권을 인정하면서 배 씨는 조 씨에게 상주본을 인도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배 씨는 이에 응하지 않았고, 그해 9월 검찰이 문화재 절도죄로 배 씨를 구속, 형사소송을 제기했다. 2012년 2월 배 씨는 형사소송 1심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감옥에 수감됐지만 상주본의 행방은 여전히 밝히지 않았다. 그해 5월 소유권자 조 씨는 추후 상주본을 문화재청에 기증하겠다는 서약을 하고, 9월에는 배 씨가 2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같은 해 12월 조 씨가 사망하면서 소유권은 문화재청에 넘어갔다. 이후 2014년 5월 배 씨는 3심에서도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세종 대왕은 훈민정음 서문에서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 싶어도 그 뜻을 펴지 못한다. 내가 것을 딱하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었으니 사람들이 쉽게 익혀서 날마다 편리하게 사이용하기를 바란다.” 2015년 3월에는 배 씨 집에 불이 나면서 상주본 한 장이 소실되고 나머지도 불에 그을리는 등 상주본이 훼손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2017년 4월 배 씨는 국회의원에 당선되면 상주본 전체를 공개하겠다고 밝히며 경북 상주 국회의원 재선거에 출마했고, 상주본 한 장을 사진으로 공개했다. 그러나 배 씨가 낙선하면서 자발적 공개는 무산됐고, 문화재청과 배 씨의 법정공방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세종 대왕은 왜 한글을 만들게 되었을까? 

조선 시대 이전까지 우리 조상들은 한자로 글을 적었어. 그러나 우리말을 한자로 옮기는 것은 너무 어려웠지. 게다가 한자는 복잡해 먹고 살기 바쁜 백성들이 배우기에는 어려운 글자였어. 당연히 양반들만 글자를 사용했던 거지. 세종 대왕은 백성들이 글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누구나 쉽게 배우고 쓸 수 있는 ‘훈민정음’, 즉 한글을 만드셨어. 하지만 훈민정음 창제는 출발부터 어려움이 많았어. 최만리 등의 학자들이 “중국과 다른 문자를 만드는 것은 큰 나라를 모시는 예의에 어긋나며, 스스로 오랑캐가 되는 것입니다.”라며 격렬히 반대했거며. 그래도 세종 대왕은 뜻을 굽히지 않고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눈이 짓물러 한쪽 눈을 뜰 수 없을 때까지 연구했지. 그 결과 1443년에 드디어 훈민정음이 창제되었읍니다. 

"한글은 주로 누가 사용했을까? 

한글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 양반들은 상스러운 글자라는 뜻의 ‘언문()’, 소리를 나타내는 방법이 절반밖에 안되는 것 같다며 ‘반절’이라 부르면서 무시했어. 또 당시 여자들은 한문을 읽고 쓰는 것을 어려워했는데, 때마침 훈민정음이 생기자 궁궐과 양반집 여자들이 맨 처음으로 훈민정음을 쓰기 시작해서 ‘암글’이라고도 불렀대. 훈민정음의 편리함이 널리 알려져 상민 신분의 남자들도 쓰게 되면서 아주 빠르게 퍼져 나갔지. 그 결과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하고 독창적인 우리 고유의 글자를 가지게 된 거야. 

연산군은 왜 한글 사용을 금지했을까?

연산군 10년인 1504년에 연산군의 잘못을 지적하는 한글로 쓰인 글이 발견되었어. 연산군은 이 글을 보고 매우 화가 나서 글을 쓴 사람을 고발하면 상금과 벼슬을 주겠다고 약속했지. 한양의 백성들 중 한글을 아는 사람을 불러 글씨체를 연산군 10년인 1504년에 연산군의 잘못을 지적하는 한글로 쓰인 글이 발견되었어. 연산군은 이 글을 보고 매우 화가 나서 글을 쓴 사람을 고발하면 상금과 벼슬을 주겠다고 약속... 

한양의 백성들 중 한글을 아는 사람을 불러 글씨체를 훈민정음을 널리 보급하기 위해 훈민정음으로 쓴 《용비어천가》,《석보상절》,《월인천강지곡》이라는 여러 종류의 책을 펴내기도 했읍니다. 훈민정음 혜례본(상주본) 이 논문에서는 2008년 7월에 세상에 알려진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의 묵서에 대한 연구이다. 현재에는 이 책을 촬영한 영상화면을 통해서 책의 면면을 살필 수밖에 없지만 다행히도 영상이 비교적 깨끗하여 책의 특성을 어느 정도 밝힐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은 국보 70호인 간송미술관 소장 훈민정음 해례본과 동일한 판목에서 쇄출된 것이 확실하다. 다만 세종 임금의 서문 4장을 비롯한 본문의 여러 장이 낙장 상태이어서 문화재로서의 가치와 학술 서적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 

이 책에는 5면에 걸쳐서 묵서로 책의 내용을 요약하거나 본문의 내용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혀 놓고 있다. 특히 훈민정음 해례본에 기술된 오성과 오음의 배합이 기존의 일반적인 배합과 다르다는 점을 적시하고 있는데 이러한 견해는 이 묵서를 기록할 당시인 18세기 이후 무렵에는 보편화된 견해로 보인다. 현재 책을 볼 수 없으므로 묵서와 관련된 사진과 묵서 묵서 내용을 책에 적힌 대로 정리하여 부록에 실었다. 이 글에서는 2008년 7월 30일에 신문과 방송 보도를 통해서 알려진 훈민정음 해례본에 대해서 고찰하고자 한다. 보도에 따르면 이 책은 상주에서 공개되었는데 당시에 한국국학진흥원의 소속 연구원이 실사하여 간송미술관 소장본과 동일한 판본임을 확인하였다. 

책의 일부 또는 전부를 안동 MBC 뉴스 방송팀이 촬영하였다. 당시 안동 MBC에서 촬영된 화면을 통해서 책을 살펴본 필자(남권희)도 역시 세종 당시에 간행된 원본으로 간주한 바 있다. 불행히도 이 책은 소유주 논쟁에 휘말려 세상에 잠시 모습을 드러낸 이후에 책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원소유주로 인정받은 분이 2012년 5월 3일자로 국가에 기증하였다. 앞으로 책을 찾는다면 국가 소유의 문화재가 되고 학자들이 실물을 보면서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글은 안동 MBC에서 촬영한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책에 대해서 개괄적으로 소개함과 동시에 책에 적힌 묵서의 내용에 대해서 고찰함으로써 묵서의 기입 근거와 시기에 대해서 밝히고자 한다. 

"영문"
This article aims to present a critical bibliography of a particular copy of Hunmin jeongeum haerye (訓民正音解例, Explanations and examples of the correct sounds for the instruction of the people), the existence of which was made known to the public on July 30th, 2008. It is called Hunmin jeongeum haerye Sangjubon (hereafter “Sangjubon”) following the city name where the book came to light.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wo-fold. It first provides a general bibliographic description of the book. 

Then, it further investigates when and why the brush-written notes inside the book were made through an examination of their content. We have reached the following conclusions: 

1. Printed using the same woodblocks, Sangjubon belongs to the same edition as Gansongbon. Unlike Gansongbon which has truncated top and bottom margins, Sangjubon seems to be preserved in its original size. 

2. The brush-written notes were written in the top and bottom margins of the pages containing the poetic summary of the “Explanation of the design of the letters”. Included in the notes are (i) a list of the 23 letters for “initial sounds” (consonants), each with an example and additional pieces of classificatory information regarding the Five Sounds, the Five Notes, and the laryngeal features (cheongtak 淸濁), (ii) a list of the 11 letters for “medials” (vowels), and (iii) a discussion on the correspondence between the Five Sounds and the Five Notes. 

3. Regarding (iii) above, we show that the particular text the note writer referred to was the “Sisheng wuyin jiunong fanniutu xu” (四聲五音九弄反紐圖序), written by the Buddhist monk Shengong (神珙) and contained in the Enlarged and expanded jade chapters (Daguang yihui yupian 大廣益會玉篇, published in 1013 in the Northern Song).

4. Taking into consideration the Sino-Korean readings transcribed in the Korean alphabet next to the Chinese characters, we argue that the notes reflect Southeastern (Gyeongsang) dialect. We also date the notes to the 18th century or later. 

훈민정음. [訓民正音]

훈민정음"
업제학 정인지() 등이 세종의 명으로 새로 창제한 훈민정음을 설명한 한문해설서. 목판본. 전권 33장. 1책 국보 제70호 간송미술관() 소장. 9월 상한()에 완성되었다. 책이름을 글자이름인 훈민정음과 똑같이 ‘훈민정음’이라고도 하고, 해례()가 붙어 있어서 ‘훈민정음 해례본’ 또는 ‘훈민정음 원본’ 이라고도 한다. 내용은 세종어제() 서문과 훈민정음(새 글자)의 음가() 및 운용법()을 밝힌 예의편()이 본문처럼 되어 적은 바로 훈민정음을 만들었읍니다. 이제 훈민정음에 대해 알아볼까? 1446년(세종 28) 집현전 대있고 이를 해설한 해례편이 제자해() · 초성해() · 중성해() · 종성해() · 합자해() · 용자례()의 순으로 나누어져 기술되고 있으며, 책 끝에 정인지의 서문이 실려 있다. 집필자들은 정인지 · 신숙주() · 성삼문() · 최항() · 박팽년() · 강희안() · 이개() · 이선로() 등 집현전의 8학자이다.

이 책도 발견 당시 완전한 것은 아니고, 처음 2장이 빠져 있던 것을 나중에 붓글씨로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임금, 세종 대왕" 조선의 네 번째 임금은 세종 대왕이야. 세종 대왕은 태종 임금의 셋째 아들(충녕 대군)로 태어났지. 태종은 원래 맏아들인 양녕 대군을 세자로 삼았어, 그런데 양녕은 세자 자리에 걸맞지 않은 행실을 자꾸만 해서 결국 세자 자리에서 쫓겨나게 돼, 태종은 총명하고 학문이 뛰어난 충녕을 세자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었지. 그 결과 우리 역사에서 누구보다 백성을 사랑한 임금인 세종 대왕이 즉위하게 되었어며. 왜 우리는 세종을 다른 임금과는 달리 세종 대왕이라고 부를까?

그의 업적을 살펴보면 그 까닭을 쉽게 알 수 있어. 먼저 세종은 왕도 정치를 내세워 백성을 근본으로 하는 정치를 펼치고자 했어. 그래서 유능한 인재를 널리 구하고, 황희 정승처럼 청렴한 재상을 관리로 앉혀 깨끗한 정치를 했으며. 훈민정음이 창제된 지 거의 3년만인 세종 28년(1446) 음력 9월 상한에 발행한 훈민정음 해설서인데, 1책으로 된 목판본이다. 이 훈민정음 해례본의 한자는 해행서체, 한글은 돋움체 획형으로 나타냈다. 국보 70호인 이 책은 1940년 경북 안동에서 발견되어 현재 서울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세계 기록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 책의 한글 글꼴 특징은 자형을 정사각형에 가깝고 서선의 굵기가 일정하며 수평, 수직으로 서선 방향을 나타냈다.

다음으로 여진족을 정벌하거나 왜구를 쫓아내 영토를 확장하고 국방을 튼튼히 했어. 또 여러 가지 제도를 정비하고, 집현전2)을 설치하여 인재를 키우고 문화를 발달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지.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는 과학 기술도 놀랍도록 발전했어. 하지만 세종 대왕의 가장 큰 적었던 것인데, 적을 때 실수하여 세종 어제서문의 끝 자 ‘이()’가 ‘의()’로 되는 등 오자가 있다.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갈다."

① 본문(예의) : 어제서문(훈민정음 창제목적을 밝힘), 예의(새 글자의 음가, 운용법을 설명함),

② 해례 : 제자해(제자원리, 제자기준, 자음체계, 모음체계, 등에 관하여 설명함) · 초성해(초성이 무엇인가를 다시 설명함) · 중성해(중성이 무엇인가를 다시 설명하고 중성글자의 합용법을 보임) · 종성해(종성의 본질과 등을 설명함) · 합자해(초성 · 중성 · 종성 글자가 합해져서 음절 단위로 표기되는 보기를 보이고, 중세국어의 성조에 대하여 설명함) · 용자례(단어의 표기례를 보임),

③ 정인지 서문 : 훈민정음의 창제이유, 창제자, 훈민정음의 우수성, 이 책의 편찰자, 편찰 연월일을 분명히 밝혔다. ‘훈민정음해례본’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세종어제 서문에서는, 표기수단을 가지지 못한 비지식층 백성들에게 표기수단을 가지게 하기 위하여 세종이 친히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고 창제목적이 밝혀져 있다. 중국36자모표에 나오는 한자를 그대로 이용하지 않고, 외래어한자어의 전래자음()을 이용하여 새로 만든 훈민정음(글자)의 음가를 설명하였다. 이 중에서 초성 23자모 체계는, 비록 전래자음을 가지고 음가를 설명하기는 하였으나 중국 36자모체계의 영향을 받은 체계였으며, 인위적인 개신() 의도를 가지고 정리하였던 ≪동국정운()≫ 23자모체계와도 일치하여, 15세기중세국어의 초성체계와 부합되지 않는 면도 조금 있다


"우리역사 에 가장위대한 임금"
조선의 네 번째 임금은 세종 대왕이야. 세종 대왕은 태종 임금의 셋째 아들(충녕 대군)로 태어났지. 태종은 원래 맏아들인 양녕 대군을 세자로 삼았어. 그런데 양녕은 세자 자리에 걸맞지 않은 행실을 자꾸만 해서 결국 세자 자리에서 쫓겨나게 돼. 태종은 총명하고 학문이 뛰어난 충녕을 세자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었지. 그 결과 우리 역사에서 누구보다 백성을 사랑한 임금인 세종 대왕이 즉위하게 되었어. 왜 우리는 세종을 다른 임금과는 달리 세종 대왕이라고 부를까?
그의 업적을 살펴보면 그 까닭을 쉽게 알 수 있어. 먼저 세종은 왕도 정치를 내세워 백성을 근본으로 하는 정치를 펼치고자 했어. 그래서 유능한 인재를 널리 구하고, 황희 정승처럼 청렴한 재상을 관리로 앉혀 깨끗한 정치를 했지. 다음으로 여진족을 정벌하거나 왜구를 쫓아내 영토를 확장하고 국방을 튼튼히 했어. 또 여러 가지 제도를 정비하고, 집현전2)을 설치하여 인재를 키우고 문화를 발달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지.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는 과학 기술도 놀랍도록 발전했어. 하지만 세종 대왕의 가장 큰 업적은 바로 훈민정음을 만든 거야. 이제 훈민정음에 대해?

혜례본"
광곽()은 가로 16.8㎝, 세로 23.3㎝이고, 본문(예의) 부분은 4장 7면으로 면마다 7행에 매행 11자, 해례 부분은 26장 51면 3행으로 면마다 8행에 매행 13자, 정인지의 서문은 3장 6면에 한 자씩 낮추어서 매행 12자로 되어 있다. 그리고 끝에는 ‘정통 11년(1446) 9월 상한’이라는 반포일이 기록되어 있다. 이 책도 발견 당시 완전한 것은 아니고, 처음 2장이 빠져 있던 것을 나중에 붓글씨로 적어 넣었던 것인데, 적을 때 실수하여 세종 어제서문의 끝 자 ‘이()’가 ‘의()’로 되는 등 오자가 있다.

1) 본문(예의)
① 어제서문(훈민정음 창제목적을 밝혔다.) ② 예의 (새 글자의 음가, 운용법을 설명하였다.) 2) 해;
① 제자해(제자원리, 제자기준, 자음체계, 모음체계, 음상 등에 관하여 설명하였다.)
② 초성해(초성이 무엇인가를 다시 설명하였다.)
③ 중성해(중성이 무엇인가를 다시 설명하고, 중성글자의 합용법을 제시하였다.)
④ 종성해(종성의 본질과 사성 등을 설명하였다.)
⑤ 합자해(초성·중성·종성 글자가 합해져서 음절 단위로 표기되는 보기를 보이고, 중세국어의 성조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⑥ 용자례(단어의 표기례를 제시였다.)
3) 정인지서문; 훈민정음의 창제이유,
창제자, 훈민정음의 우수성, 이 책의 편찬자, 편찬연월일을 분명히 밝혔다. "다음으로 위의 내용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2) 본문 (서문과예의)
① 어제서문;
세종어제 서문에서는, 표기수단을 가지지 못한 비지식층 백성들에게 표기수단을 가지게 하기 위하여 세종이 친히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고 창제목적이 밝혀져 있다.
② 예의;
어제서문에 이어서 중국 36자모표에 나오는 한자를 그대로 이용하지 않고, 외래어인 한자어의 전래자음()을 이용하여 새로 만든 훈민정음(글자)의 음가를 설명하였다. 이 중에서 초성 23자모체계는, 비록 전래자음을 가지고 음가를 설명하기는 하였으나, 중국 36자모체계의 영향을 받은 체계였으며, 인위적인 개신() 의도를 가지고 정리하였던 『동국정운()』 23자모체계와도 일치하여, 15세기 중세국어의 초성체계와 부합되지 않는 면도 조금 있다.
1446년 음력 9월에 반포된 훈민정음() 판본에는 1443년에 창제된 한국의 문자 한글을 공표하는 조선왕조 제4대 임금 세종대왕(재위 1418-1450)의 반포문()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정인지() 등 집현전 학자들이 해설과 용례를 덧붙여 쓴 해설서 해례본()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판본을 『훈민정음 해례본』이라 하며, 간송 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세계적 중요성·독창성·대체 불가능성" 
훈민정음은 한국인에게 문자체계의 혁명을 불러왔다. 무엇보다 한자로는 쓸 수 없던 한국인의 말까지 완벽히 표기할 수 있게 되었다. 한자는 중국인을 위한 문자 체계이며, 음운 체계와 문법 구조가 한국어와는 완전히 달랐다. 이를 두고 정인지는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한자로 한국말을 적는다는 것은 네모난 손잡이를 둥근 구멍 안에 억지로 밀어 넣는 것만큼 어울리지 않는다.”고 표현했다. 그렇듯 한국인이 한자로 말을 적으려면 소리를 한자로 바꾸어 적어야만 했는데, 이 때문에 의사소통이 결코 쉽지 않았다.
한자로 의사소통하는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한국인들은 이두()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이두는 조정의 관리와 평범한 백성이 한자를 이용하여 한국말을 기록하는 문자 체계였다.
한자로써 한국말을 순서대로 적고, 심지어 한국말의 조사와 어미까지도 적었다. 그러나 이두는 한자를 사용하여 표기하는 것이므로 한국말의 소리를 특징적으로 나타낼 수 없을뿐더러 조사와 어미의 미묘한 차이를 반영할 수도 없었다. 이런 이유로 세종대왕이 한국말의 음운체계를 반영하는 문자를 창제하였고, 이로써 한국인은 말을 글로 온전히 적을 수 있게 되었다.
두 번째 측면은 한국인이 글자를 아주 쉽게 배우고 쓸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표의문자()인 한자는 각각의 개념을 나타내는 문자를 일일이 배워야 했기에 매우 어려웠다. 또한 글자의 획이 복잡하여 쓰기도 쉽지 않았다. 이런 한자를 배운다는 것이 한국인과 같은 외국인에게는 매우 어려워서 대부분의 한국인은 한자를 비실용적이라고 생각하였으며, 문자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세종대왕이 창제한 문자는 단 28자이며 그 획도 단순했기 때문에 배우고 사용하기가 쉬웠다. 한국인은 누구라도 한글을 배워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후, 한국인은 독특한 민족의 말을 완벽하게 적을 수 있게 됨으로써 민족문화가 새로운 차원으로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오늘날 한국의 식자율()이 높은 이유가 누구나 문자를 쉽게 배울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장기적으로 볼 때, 이것은 유네스코의 문맹 퇴치 운동에 기여하고 있다. 게일(J.S. Gale, 캐나다 출신 선교사‧한국어 학자)의 선언문에서 “세종대왕은 단지 동양에만 기여한 것이 아니라 세계에 이바지한 왕이다. 훌륭한 일을 많이 하였지만 한글(즉, 훈민정음이라는 새로운 글자) 창제가 그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일이었다.”라고 말함으로써 그 사실은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았다(『한글』, 왕립 아시아 학회의 조선 지회 회보, IV권, 제1부, 1912). 한국 정부는 양력으로

『훈민정음 해례본』
해례본의 발간일을 계산하여 10월 9일을 한글날로 지정한 뒤 1946년부터 매년 국가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그만큼 이 책은 한국인에게 중요하다. 오늘날 유네스코가 문맹 퇴치에 기여한 이에게 주는 상을 세종대왕상(King Sejong Prize)이라고 일컫는 사실이 이 책이 세계의 문화에 끼친 영향을 보여준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었다. 목판본으로 2권 2책이다.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책으로서의 훈민정음에는 "나라말씀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니…"라고 한 《훈민정음예의본》과, 글자를 지은 뜻과 사용법 등을 풀이한 《훈민정음해례본》이 있다. 전자에 대해서는 《세종실록》과 《월인석보()》 첫권에 같은 내용이 실려 있어 널리 알려졌으나, 후자에 대하여는 1940년 발견될 때까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한글의 형체에 대하여 고대글자 모방설, 고전() 기원설, 범자() 기원설, 몽골문자 기원설, 심지어는 창살 모양의 기원설까지 나올 정도로 구구한 억설이 있었으나, 이 책의 출현으로 모두 일소되고 발음기관 상형설()이 제자원리()였음이 밝혀졌다.
후자는 예의()·해례(정인지 서문 등 3부분 33장으로 되었는데, 예의는 세종이 직접 지었고, 해례는 정인지(박팽년(신숙주(성삼문(최항(강희안(이개()·이선로() 등 집현전(殿) 학사가 집필하였다. 정인지가 대표로 쓴 서문에는 1446년 9월 상순으로 발간일을 명시하고 있어, 후일 한글날 제정의 바탕이 되었다. 낙장된 이유는 연산군의 언문책을 가진 자를 처벌하는 언문정책 때문에 부득이 앞의 두 장을 찢어내고 보관하였다고 하며, 이를 입수한 전형필은 6·25전쟁 때 이 한 권만을 오동상자에 넣고 피란을 떠났으며, 잘 때에도 베개 삼아 베고 잤다는 일화가 전한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