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8일 수요일

제갈량諸葛亮

요약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정치가 겸 전략가. 명성이 높아 와룡선생(臥龍先生)이라 일컬어졌다. 유비(劉備)를 도와 오(吳)나라의 손권(孫權)과 연합하여 남하하는 조조(曹操)의 대군을 적벽(赤壁)의 싸움에서 대파하고, 형주(荊州)와 익주(益州)를 점령하였다. 221년 한나라의 멸망을 계기로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승상이 되었다.





1. 재야의 현인
제갈량은 서주() 낭야() 양도 사람으로, 동한(후한) 영제 광화() 4년인 181년 낭야군의 지방관이었던 제갈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형은 제갈근이고, 동생은 제갈균이다. 그의 자는 공명()이고, 호는 와룡(), 복룡()이다.
동한 말 세상이 혼란에 빠졌고, 그의 나이 15세가 되기 전에 양친을 여의어 숙부 제갈현()을 따라 형주(, 지금의 후베이()성 징저우)로 와서 유표에게 몸을 맡겼다. 그는 후베이성 샹양() 인근의 룽중()이란 마을에서 학문과 농사로 소일했는데, 이 시기에 지었다는 노래 <양보음>이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
당시 형주에는 전란을 피해 온 명망 높은 문인들이 많았는데, 제갈량은 이들과 활발히 교류하였다. 제갈량이 샹양 지역의 유명한 문인이며 대부호였던 황승언의 사위였기 때문이다. 이 덕분에 그는 20대 중반의 나이에 재야의 현인()으로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2) 삼고초려를 통해 제갈량을 얻은 유비"

당시 그는 스스로를 춘추시대 제나라 환공을 최초의 패자로 만들었던 대정치가 관중과 전국시대 연나라의 명장 악의에 비유했는데, 동한 헌제 건안() 12년인 207년 조조에게 쫓겨 형주에 와 있던 유비에게 초빙되어 ‘천하삼분지계()’를 제안하게 된다.
당시 유비는 허난()성 루난()에서 조조에게 패한 후 유표에게 의탁하고 있었는데, 제갈량의 명성을 듣고 룽중으로 직접 찾아와 자신의 책사로 기용한 것이다. 이때 만들어진 고사가 유명한 ‘삼고초려(초가집을 세 번 찾아가다)’이다.

이후 화북 일대를 석권한 조조가 형주를 공격해오자 제갈량은 남쪽으로 퇴각하는 유비를 수행하였다. 조조군의 추격으로 위기에 몰린 유비 측은 유표의 장남 유기의 도움을 입어 강하(, 지금의 후베이성 우한()시 지역) 지역에서 한동안 머물렀다. 이후 조조가 동진하자 제갈량은 사신의 자격으로 몸소 동오로 가서 손권을 설득하여 반조조 동맹을 성사시켰다.
3. 조조군을 격파하고 촉한의 재상이 되다

대표적인 산문()으로 《출사표()》, 《융중대()》, 《계자서()》 등이 있다. 목우유마(, 소와 말을 본떠 만든 수레), 공명등(, 종이로 만든 등으로 연을 날리듯 날려 구원을 요청했다 함) 등을 발명하고, 연노(, 쇠뇌, 여러 화살을 동시에 발사가능함)를 서주() 낭야() 양도() 사람으로 자는 공명()이고, 호는 와룡(), 복룡()이다. 삼국시대 촉한()의 정치가이자 군사가, 산문가, 발명가이다. 유비()를 보좌하여 천하 삼분지계()를 제시했고, 형주()와 익주()를 취하고 촉한()을 세우는 데 큰 공헌을 했다. 또 남만()을 평정하고 북벌()을 주도했다. 벼슬은 군사중낭장(), 군사장군(), 승상() 등을 역임했다. 생전에 무향후(개량했다.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정치가 겸 전략가. 명성이 높아 와룡선생(臥龍先生)이라 일컬어졌다. 유비(劉備)를 도와 오(吳)나라의 손권(孫權)과 연합하여 남하하는 조조(曹操)의 대군을 적벽(赤壁)의 싸움에서 대파하고, 형주(荊州)와 익주(益州)를 점령하였다. 221년 한나라의 멸망을 계기로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승상이 되었다.
자는 공명(), 시호는 충무후()이며, 낭야군 양도현(  )에서 태어났다. 호족() 출신이었으나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형주()에서 숙부 제갈현()의 손에서 자랐다. 후한() 말의 전란을 피하여 출사()하지 않았으나 명성이 높아 와룡선생이라 일컬어졌다. 
207년(건안 12) 조조()에게 쫓겨 형주에 와 있던 유비로부터 '삼고초려()'의 예로써 초빙되어 '천하삼분지계()'를 진언()하였다. 유비는 제갈량을 얻은 것을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에 비유하였다. 

이듬해 오나라의 손권()을 설득하여 유비와 연합하게 하여, 적벽의 싸움에서 조조의 대군을 물리쳤다. 소설인 《삼국지연의()》에서는 신기묘산()으로 조조의 대군을 격파하는 데 결정적 공을 세운 것으로 묘사되지만, 역사서인 《삼국지()》에는 별다른 활약상을 찾아볼 수 없으며, 형주와 익주 등 강남을 손에 넣은 유비가 제갈량을 군사중랑장()으로 삼아 영릉()·계양()·장사() 등 3군()을 감독하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세간에 구전하는 제갈량의 초인적 지략은 대부분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기인하지만, 유비의 신임을 받아 중용된 것은 소설과 역사서의 기록이 일치한다. 214년(건안 16) 유비는 성도()를 평정하고 나서 그를 군사장군()으로 삼아 자신이 출병한 뒤 군량과 병사를 대도록 하였고, 촉한의 황제에 오른 뒤에는 그를 승상()으로 삼았으며, 죽음을 앞두고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대업을 이루도록 당부하였다. 

유비는 제갈량에게 자신의 아들 유선()을 보좌하되, 아들이 무능하면 몰아내고 황제의 자리를 취하여도 좋다고 유언하였으나 제갈량은 끝까지 후주() 유선을 보필하였다. 재차 오나라와 연합하여 위나라와 항쟁하였으며, 생산을 장려하여 민치()를 꾀하고, 윈난[]으로 진출하여 개발을 도모하는 등 촉한의 경영에 힘썼다. 

상승하는 위나라에 비하여 국력의 열세가 뚜렷한 가운데 오장원()에서 위나라의 사마의()와 대치하다가 병이 들어 사망하였다. 위나라와 싸우기 위하여 출진할 때 올린 《전출사표()》와 《후출사표()》는 이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는 충신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충정으로 가득한 천고의 명문으로 꼽힌다. 후인들이 중국 곳곳에 무후사()를 지어 그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
제갈량은 서주() 낭야() 양도 사람으로, 동한(후한) 영제 광화() 4년인 181년 낭야군의 지방관이었던 제갈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형은 제갈근이고, 동생은 제갈균이다. 그의 자는 공명()이고, 호는 와룡(), 복룡()이다.

동한 말 세상이 혼란에 빠졌고, 그의 나이 15세가 되기 전에 양친을 여의어 숙부 제갈현()을 따라 형주(, 지금의 후베이()성 징저우)로 와서 유표에게 몸을 맡겼다. 그는 후베이성 샹양() 인근의 룽중()이란 마을에서 학문과 농사로 소일했는데, 이 시기에 지었다는 노래 <양보음>이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

형주에는 전란을 피해 온 명망 높은 문인들이 많았는데, 제갈량은 이들과 활발히 교류하였다. 제갈량이 샹양 지역의 유명한 문인이며 대부호였던 황승언의 사위였기 때문이다. 이 덕분에 그는 20대 중반의 나이에 재야의 현인()으로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그는 스스로를 춘추시대 제나라 환공을 최초의 패자로 만들었던 대정치가 관중과 전국시대 연나라의 명장 악의에 비유했는데, 동한 헌제 건안() 12년인 207년 조조에게 쫓겨 형주에 와 있던 유비에게 초빙되어 ‘천하삼분지계()’를 제안하게 된다.
당시 유비는 허난()성 루난()에서 조조에게 패한 후 유표에게 의탁하고 있었는데, 제갈량의 명성을 듣고 룽중으로 직접 찾아와 자신의 책사로 기용한 것이다. 이때 만들어진 고사가 유명한 ‘삼고초려(초가집을 세 번 찾아가다)’이다.
이후 화북 일대를 석권한 조조가 형주를 공격해오자 제갈량은 남쪽으로 퇴각하는 유비를 수행하였다. 조조군의 추격으로 위기에 몰린 유비 측은 유표의 장남 유기의 도움을 입어 강하(, 지금의 후베이성 우한()시 지역) 지역에서 한동안 머물렀다. 이후 조조가 동진하자 제갈량은 사신의 자격으로 몸소 동오로 가서 손권을 설득하여 반조조 동맹을 성사시켰다.
4. 남쪽 호족세력을 정벌하고 북벌을 주도하다"

건흥() 3년인 225년, 당시 익주 남쪽의 호족이었던 옹개(), 고정(), 주포() 등이 손권의 은밀한 지원을 받아 반기를 들자 제갈량은 직접 남쪽 정벌에 나섰다. 촉의 남부 지방은 유언과 유장 부자가 익주를 장악하던 기간부터 이민족과 토착 호족들이 결탁하여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한중 공방전 기간에도 반란이 일어나 이엄이 이를 진압한 전례가 있었다.
제갈량의 남쪽 정벌은 225년 봄부터 같은 해 겨울까지 계속되었으며, 성공적으로 진압되었다. 제갈량은 불모지 깊숙이 직접 들어가 토벌을 단행하여 우두머리들에게 타격을 가하고 동시에 그 지역의 세력가들을 끌어들이는 데 주력을 다했다. 그들 중 일부는 지방 장관으로 기용함으로써 안정을 이루었고, 촉에 필요한 물자와 병력을 제공하는 근거지로 삼았다.
건흥 5년인 227년 제갈량은 선주 유비의 유언을 명분으로 위나라에 대한 북벌군을 일으켰다. 출정하기에 앞서 올린 상주문이 바로 유명한 <출사표>이다. 북벌은 227년부터 234년까지 8년간 다섯 번에 걸쳐 이루어졌다. 제갈량은 북벌 기간 동안 전쟁이 없는 상황에도 한중에 상주했는데, 이 기간 촉한은 준전시 체제로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건흥 6년인 228년 봄, 1차 북벌에서 제갈량은 사곡 과 기곡(, 지금의 산시(西)성 푸()성 서북쪽)으로 동시에 진격하였다. 위연이 1만의 병사로 진령산맥을 넘어 장안(, 지금의 산시(西)성 시안(西))을 급습하는 ‘자오곡계책’을 제안하였으나 신중한 작전을 선호하는 제갈량은 이 안을 채택하지 않았다. 사곡의 본진은 제갈량이 지휘하였고, 기곡에 파견된 별동대의 지휘관은 조운이었다. 위 명제()는 조진을 도독으로 삼아 방어하게 하였고, 조진은 장안과 가까운 기곡에 전력을 집중시켰다.
제갈공명의 부인은 알고 보니 바느질에만 솜씨가 있는 것이 아니어서 모르는 것이 없었다. 제갈공명은 그런 부인의 도움으로 똑똑해질 수 있었다.
모티프 분석 「아내 덕에 똑똑해진 제갈공명」의 주요 모티프는 ‘신통한 능력을 지닌 이인()’이다. 「아내 덕에 똑똑해진 제갈공명」에서 황씨 부인은 돗바늘로 옷 바느질을 하고, 제갈공명을 집 안에서 헤매게 하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이인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여성 이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대표적인 고전 소설로는 「박씨전」과 「황부인전」 등을 들 수 있다. 재송동에서 채록된 「아내 덕에 똑똑해진 제갈공명」은 『삼국지연의』와 「황부인전」을 바탕으로 새롭게 형성된 설화라는 점이 특징이다. 특히 「황부인전」에는 황씨 부인이 절색으로 변신하는 내용이 있는데, 「아내 덕에 똑똑해진 제갈공명」에서는 생략되어 있다. 이는 소설이 구전을 통해 설화화 되는 과정에서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내용이 삭제된 것으로 보인다.

“선제()께서는 한나라를 찬탈한 역적과 같은 하늘 아래 설 수 없고, 천하의 한 모퉁이를 차지했음에 만족해 앉아만 있을 수 없다 여기시어, 신에게 역적을 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현명하신 선제께서는 신의 재주를 헤아리시어, 신이 역적을 칠 재주는 모자라고 적은 강함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역적을 치지 않으면 왕업 역시 망할 것이니, 어찌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리까. 그리하여 제게 정벌의 사명을 맡기시고 의심치 아니하셨습니다. 신은 사명을 받은 날부터 자리에 누워도 편안할 수 없었고, 밥을 먹어도 맛을 알 수 없었습니다.(…)신은 몸을 굽혀 모든 힘을 다할 것입니다. 죽은 후에야 그만둘 것입니다. 성공할지 실패할지, 이로울지 해로울지에 대해서는 지금 미리 내다보지 못합니다."
 '삼고초려'의 예우를 받고 유비의 모사가 되다" 
229년경, 촉한의 승상 제갈량은 다시 한 번 위나라를 정벌하려 떠나며 후주() 유선에게 이러한 <후출사표>를 올렸다고 한다. 이 중에서 “몸을 굽혀 모든 힘을 다하여 죽은 후에야 그만둔다( )”는 먼 훗날 청나라의 강희제가 신조로 삼았을 정도로 유명한 문구다. 그러나 이 <후출사표>는 다른 사람이 쓴 위작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제갈량은 중국사의 무수한 인물 중에서도 공자나 관우와 더불어 가장 유명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기록은 적어, 진수가 쓴 <삼국지>와 상거의 <화양국지>, 그리고 제갈량 자신의 <제갈량집>(이 역시 상당 부분이 위작이라는 의심을 받는다)이 전부다. 그리고 이 문헌들을 통해 대략 살펴볼 수 있는 제갈량의 인생 역정은 <삼국지연의>를 통해 널리 알려져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제갈량, 자는 공명(), 호는 와룡(). 181년에 낭야군 양도현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 제갈규는 태산군 승()이라는 비교적 하급직을 지냈고 제갈량이 어릴 때 죽었다. 형주의 융중에서 살게 된 것은 작은아버지 제갈현이 그를 데리고 유표의 식객으로 지내다가 죽었기 때문이다. 제갈량은 석광원, 석도, 맹공위, 서서 등과 학문을 닦았는데, 남들은 학문 자체를 깊이 탐구함에 비해 그는 대략만을 이해하고 넘어가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그리고 뽕나무를 관리하고, 밭을 갈았다.한가할 때는 양보음()이라는 노래를 읊고, 무릎을 껴안은 채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제갈량은 스스로를 춘추전국시대의 명재상 관중과 명장 악의에 비교했는데, 모두 곧이듣지 않았지만 오직 서서만이 그를 큰 인물로 알아주었다. 그리고 한 발 먼저 유비 에게 등용된 서서의 추천으로, ‘ 삼고초려 ’의 예우를 받은 다음 유비의 모사 ()가 된다.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하지 않고, 남들은 할 수 없는 일을한 ‘위대한 바보 "
하지만 군사적 재능은 과장되었어도, 제갈량은 분명 다재다능했으며 보기 드문 역량을 갖고 있었다. 촉한군의 열세를 보완하고자 그가 창안했다는 팔진도, 목우유마, 연노 등은 성능이 과장되기는 했으되 실제로 획기적인 발명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정치 방식이나 <제갈량집>에 나타난 사상을 보면 그는 유가  법가 를 적절히 조화시켰다. 원리원칙을 중시하고 신상필벌을 확실히 하는 법가의 장점과, 인간적인 대우를 통해 덕으로 사람을 움직이는 유가의 장점을 그는 모두 살렸다. “눈물을 흘리며 마속의 목을 베었다”나 “절박한 상황에 처해서도 집으로 돌려보내기로 예정된 병사들에게 돌아가라고 함으로써, 병사들이 감격하여 전력으로 싸워 이겼다”는 에피소드는 원칙을 냉정히 지키며 따뜻한 인간미를 잃지 않은 예다.

승상의 사당이 어딘지 찾으니
금관성 밖의 잣나무 숲이라네.
계단에 드리운 풀은 봄기운이 완연하고
나뭇잎 사이로는 꾀꼬리 울음 울리네.
세 번 찾아준 은혜에 천하삼분의 계책을 내고
두 대를 정성껏 섬긴 늙은 신하의 마음이여.
출사하여 이기기 전에 몸이 먼저 가니
후세의 영웅들은 옷깃을 적시네.

서주() 낭야() 양도() 사람으로 자는 공명()이고, 호는 와룡(), 복룡()이다. 삼국시대 촉한()의 정치가이자 군사가, 산문가, 발명가이다. 유비()를 보좌하여 천하 삼분지계()를 제시했고, 형주()와 익주()를 취하고 촉한()을 세우는 데 큰 공헌을 했다. 또 남만()을 평정하고 북벌()을 주도했다. 벼슬은 군사중낭장(), 군사장군(), 승상() 등을 역임했다. 생전에 무향후()로 봉해지고, 사후에 시호는 충무후()이다. 동진() 정권에서 무흥왕()으로 추봉되었다.
대표적인 산문()으로 《출사표()》, 《융중대()》, 《계자서()》 등이 있다. 목우유마(, 소와 말을 본떠 만든 수레), 공명등(, 종이로 만든 등으로 연을 날리듯 날려 구원을 요청했다 함) 등을 발명하고, 연노(, 쇠뇌, 여러 화살을 동시에 발사가능함)를 개량했다.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정치가 겸 전략가. 명성이 높아 와룡선생(臥龍先生)이라 일컬어졌다. 유비(劉備)를 도와 오(吳)나라의 손권(孫權)과 연합하여 남하하는 조조(曹操)의 대군을 적벽(赤壁)의 싸움에서 대파하고, 형주(荊州)와 익주(益州)를 점령하였다. 221년 한나라의 멸망을 계기로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승상이 되었다.
자는 공명(), 시호는 충무후()이며, 낭야군 양도현(  )에서 태어났다. 호족() 출신이었으나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형주()에서 숙부 제갈현()의 손에서 자랐다. 후한() 말의 전란을 피하여 출사()하지 않았으나 명성이 높아 와룡선생이라 일컬어졌다. 
207년(건안 12) 조조()에게 쫓겨 형주에 와 있던 유비로부터 '삼고초려()'의 예로써 초빙되어 '천하삼분지계()'를 진언()하였다. 유비는 제갈량을 얻은 것을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에 비유하였다. 

이듬해 오나라의 손권()을 설득하여 유비와 연합하게 하여, 적벽의 싸움에서 조조의 대군을 물리쳤다. 소설인 《삼국지연의()》에서는 신기묘산()으로 조조의 대군을 격파하는 데 결정적 공을 세운 것으로 묘사되지만, 역사서인 《삼국지()》에는 별다른 활약상을 찾아볼 수 없으며, 형주와 익주 등 강남을 손에 넣은 유비가 제갈량을 군사중랑장()으로 삼아 영릉()·계양()·장사() 등 3군()을 감독하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세간에 구전하는 제갈량의 초인적 지략은 대부분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기인하지만, 유비의 신임을 받아 중용된 것은 소설과 역사서의 기록이 일치한다. 214년(건안 16) 유비는 성도()를 평정하고 나서 그를 군사장군()으로 삼아 자신이 출병한 뒤 군량과 병사를 대도록 하였고, 촉한의 황제에 오른 뒤에는 그를 승상()으로 삼았으며, 죽음을 앞두고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대업을 이루도록 당부하였다. 

유비는 제갈량에게 자신의 아들 유선()을 보좌하되, 아들이 무능하면 몰아내고 황제의 자리를 취하여도 좋다고 유언하였으나 제갈량은 끝까지 후주() 유선을 보필하였다. 재차 오나라와 연합하여 위나라와 항쟁하였으며, 생산을 장려하여 민치()를 꾀하고, 윈난[]으로 진출하여 개발을 도모하는 등 촉한의 경영에 힘썼다. 

상승하는 위나라에 비하여 국력의 열세가 뚜렷한 가운데 오장원()에서 위나라의 사마의()와 대치하다가 병이 들어 사망하였다. 위나라와 싸우기 위하여 출진할 때 올린 《전출사표()》와 《후출사표()》는 이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는 충신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충정으로 가득한 천고의 명문으로 꼽힌다. 후인들이 중국 곳곳에 무후사()를 지어 그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
제갈량은 서주() 낭야() 양도 사람으로, 동한(후한) 영제 광화() 4년인 181년 낭야군의 지방관이었던 제갈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형은 제갈근이고, 동생은 제갈균이다. 그의 자는 공명()이고, 호는 와룡(), 복룡()이다.

동한 말 세상이 혼란에 빠졌고, 그의 나이 15세가 되기 전에 양친을 여의어 숙부 제갈현()을 따라 형주(, 지금의 후베이()성 징저우)로 와서 유표에게 몸을 맡겼다. 그는 후베이성 샹양() 인근의 룽중()이란 마을에서 학문과 농사로 소일했는데, 이 시기에 지었다는 노래 <양보음>이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
형주에는 전란을 피해 온 명망 높은 문인들이 많았는데, 제갈량은 이들과 활발히 교류하였다. 제갈량이 샹양 지역의 유명한 문인이며 대부호였던 황승언의 사위였기 때문이다. 이 덕분에 그는 20대 중반의 나이에 재야의 현인()으로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2. 삼고초려를 통해 제갈량을 얻은 유비

당시 그는 스스로를 춘추시대 제나라 환공을 최초의 패자로 만들었던 대정치가 관중과 전국시대 연나라의 명장 악의에 비유했는데, 동한 헌제 건안() 12년인 207년 조조에게 쫓겨 형주에 와 있던 유비에게 초빙되어 ‘천하삼분지계()’를 제안하게 된다.
당시 유비는 허난()성 루난()에서 조조에게 패한 후 유표에게 의탁하고 있었는데, 제갈량의 명성을 듣고 룽중으로 직접 찾아와 자신의 책사로 기용한 것이다. 이때 만들어진 고사가 유명한 ‘삼고초려(초가집을 세 번 찾아가다)’이다.
이후 화북 일대를 석권한 조조가 형주를 공격해오자 제갈량은 남쪽으로 퇴각하는 유비를 수행하였다. 조조군의 추격으로 위기에 몰린 유비 측은 유표의 장남 유기의 도움을 입어 강하(, 지금의 후베이성 우한()시 지역) 지역에서 한동안 머물렀다. 이후 조조가 동진하자 제갈량은 사신의 자격으로 몸소 동오로 가서 손권을 설득하여 반조조 동맹을 성사시켰다.
4. 남쪽 호족세력을 정벌하고 북벌을 주도하다"

건흥() 3년인 225년, 당시 익주 남쪽의 호족이었던 옹개(), 고정(), 주포() 등이 손권의 은밀한 지원을 받아 반기를 들자 제갈량은 직접 남쪽 정벌에 나섰다. 촉의 남부 지방은 유언과 유장 부자가 익주를 장악하던 기간부터 이민족과 토착 호족들이 결탁하여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한중 공방전 기간에도 반란이 일어나 이엄이 이를 진압한 전례가 있었다.
제갈량의 남쪽 정벌은 225년 봄부터 같은 해 겨울까지 계속되었으며, 성공적으로 진압되었다. 제갈량은 불모지 깊숙이 직접 들어가 토벌을 단행하여 우두머리들에게 타격을 가하고 동시에 그 지역의 세력가들을 끌어들이는 데 주력을 다했다. 그들 중 일부는 지방 장관으로 기용함으로써 안정을 이루었고, 촉에 필요한 물자와 병력을 제공하는 근거지로 삼았다.
건흥 5년인 227년 제갈량은 선주 유비의 유언을 명분으로 위나라에 대한 북벌군을 일으켰다. 출정하기에 앞서 올린 상주문이 바로 유명한 <출사표>이다. 북벌은 227년부터 234년까지 8년간 다섯 번에 걸쳐 이루어졌다. 제갈량은 북벌 기간 동안 전쟁이 없는 상황에도 한중에 상주했는데, 이 기간 촉한은 준전시 체제로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건흥 6년인 228년 봄, 1차 북벌에서 제갈량은 사곡 과 기곡(, 지금의 산시(西)성 푸()성 서북쪽)으로 동시에 진격하였다. 위연이 1만의 병사로 진령산맥을 넘어 장안(, 지금의 산시(西)성 시안(西))을 급습하는 ‘자오곡계책’을 제안하였으나 신중한 작전을 선호하는 제갈량은 이 안을 채택하지 않았다. 사곡의 본진은 제갈량이 지휘하였고, 기곡에 파견된 별동대의 지휘관은 조운이었다. 위 명제()는 조진을 도독으로 삼아 방어하게 하였고, 조진은 장안과 가까운 기곡에 전력을 집중시켰다.
3. 조조군을 격파하고 촉한의 재상이 되다"

건안 13년인 208년 11월, 손권과 유비의 반조조 연합군이 적벽(, 지금의 후베이성 가어()현)에서 조조군을 격파하기에 이른다. 정사에는 제갈량이 적벽대전 당시 어떤 일을 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지만, 정사 『삼국지』 「선주전()」과 「산양공재기()」에 유비가 패주하는 조조군을 형주 남부까지 추격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참모로 종군하거나 병참() 등을 담당한 것으로 본다.
이후 유비가 형남 4군, 즉 무릉, 장사(, 지금의 후난성 창사시), 계양, 영릉(, 지금의 허난성 상추()시 닝링현)을 정벌할 때 군사중랑장()으로 임명되어 행정과 병참을 담당하였다.
형주 남부를 장악한 유비는 이후 서촉(西)을 차지할 계획을 세웠고, 제갈량도 여기에 참전한다. 건안 16년인 211년 산시(西)성 한중()의 장노가 유장을 공격하자 유비는 이를 구원한다는 명목으로 서촉으로 출병하였다. 이듬해 유장과 유비의 전쟁이 발발했고, 유비는 성도(, 지금의 쓰촨()성 청두시)를 공격하여 유장 정권을 뒤엎고 익주 를 빼앗았다. 이후 제갈량은 군사장군()으로 승진했다.


유비가 정벌에 나서면 제갈량은 성도를 지키면서 후방을 튼튼히 하고 군량 공급선을 확보했다. 이 시기에 새로운 법률인 <촉과()>를 제정하고 익주의 국가적 구조조정에 참여하였다. 219년 유비와 조조간의 한중 공방전이 발발할 때도 제갈량은 성도에 머물며 병참과 보급을 담당했다.
221년 유비가 스스로 황제를 칭하며 나라 이름을 한(, 촉한)이라고 하자 제갈량은 승상(), 녹상서사(錄)에 임명되었다. 223년의 손권과의 이릉전투 때 유비가 출정하자 제갈량은 성도에 남아 내정과 병참을 관장하였다.
장무() 3년인 223년, 유비가 죽고 후주 유선이 즉위하자 승상, 녹상서사, 익주목() 및 사례교위()를 겸하며 대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14년 동안 촉한의 재상으로서 실권을 행사하였다.
4. 남쪽 호족세력을 정벌하고 북벌을 주도하다

건흥() 3년인 225년, 당시 익주 남쪽의 호족이었던 옹개(), 고정(), 주포() 등이 손권의 은밀한 지원을 받아 반기를 들자 제갈량은 직접 남쪽 정벌에 나섰다. 촉의 남부 지방은 유언과 유장 부자가 익주를 장악하던 기간부터 이민족과 토착 호족들이 결탁하여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한중 공방전 기간에도 반란이 일어나 이엄이 이를 진압한 전례가 있었다.
제갈량의 남쪽 정벌은 225년 봄부터 같은 해 겨울까지 계속되었으며, 성공적으로 진압되었다. 제갈량은 불모지 깊숙이 직접 들어가 토벌을 단행하여 우두머리들에게 타격을 가하고 동시에 그 지역의 세력가들을 끌어들이는 데 주력을 다했다. 그들 중 일부는 지방 장관으로 기용함으로써 안정을 이루었고, 촉에 필요한 물자와 병력을 제공하는 근거지로 삼았다.
건흥 5년인 227년 제갈량은 선주 유비의 유언을 명분으로 위나라에 대한 북벌군을 일으켰다. 출정하기에 앞서 올린 상주문이 바로 유명한 <출사표>이다. 북벌은 227년부터 234년까지 8년간 다섯 번에 걸쳐 이루어졌다. 제갈량은 북벌 기간 동안 전쟁이 없는 상황에도 한중에 상주했는데, 이 기간 촉한은 준전시 체제로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건흥 6년인 228년 봄, 1차 북벌에서 제갈량은 사곡 과 기곡(, 지금의 산시(西)성 푸()성 서북쪽)으로 동시에 진격하였다. 위연이 1만의 병사로 진령산맥을 넘어 장안(, 지금의 산시(西)성 시안(西))을 급습하는 ‘자오곡계책’을 제안하였으나 신중한 작전을 선호하는 제갈량은 이 안을 채택하지 않았다. 사곡의 본진은 제갈량이 지휘하였고, 기곡에 파견된 별동대의 지휘관은 조운이었다. 위 명제()는 조진을 도독으로 삼아 방어하게 하였고, 조진은 장안과 가까운 기곡에 전력을 집중시켰다.


전쟁 초반의 상황은 제갈량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제갈량이 사곡에 진출하자 옹주(, 지금의 산시(西)성 서쪽) 일대의 호족들이 일제히 호응하였고 남안(, 지금의 푸젠()성 난안), 천수(, 지금의 간쑤()성 텐수이), 안정(, 지금의 간쑤성 딩시(西)시 안딩구) 3군을 점령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제갈량의 후계자로 평가되는 강유가 귀순하였다. 반면 기곡 전선에서는 조운의 별동대가 국지전 도중에 조진에게 패해 한중으로 퇴각하기에 이른다.
활로를 찾은 조진은 장합에게 5만의 군사로 제갈량의 본진을 상대하게 하였다. 장합은 사곡과 한중을 잇는 가정으로 진격하여, 촉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자 하였고, 제갈량은 마속에게 방어하게 하였다. 하지만 마속은 협곡을 막아 방어하라는 제갈량의 지시를 무시한 채 산위에 둔병하였고, 장합의 포위전술을 맞아 고전하였다. 고상() 또한 열류성()을 빼앗겼다. 왕평이 분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대패하였다.
보급로가 끊긴 촉군은 한중으로 퇴각하였고 1차 북벌은 실패한다. 이후 제갈량은 마속에게 패전의 책임을 물어 그를 처형했는데, 이 과정에서 ‘읍참마속’이라는 고사가 생겼다. 제갈량은 후주에게 표를 올려 북벌 실패에 대한 사죄의 의미로 스스로 우장군()으로 지위를 낮추었지만, 재상의 권한은 유지하였다. 
5. 진창과의 긴 전쟁이 시작되다"
건흥 6년인 228년 가을, 제갈량은 진창으로 진격하였다. 진창은 조진의 부하 장수인 학소가 불과 1천 명의 병력으로 수비하고 있었는데, 그는 짓던 외성을 버리고 대산관에서 농성해서 20일에 걸친 촉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이후 조진이 낙양(, 지금의 허난성 뤄양)에서 구원군을 이끌고 출병하자 제갈량은 한중으로 귀환하였다. 이때 복병전을 통해 조진군의 장수인 왕쌍의 추격군을 격파하였다. 2차 북벌 이후 학소는 병으로 죽었다.
건흥 7년인 229년 제갈량은 진식에게 무도(, 지금의 간쑤성 우두시)와 음평(, 지금의 간쑤성 룽난()시 원()현)을 기습하게 하였다. 무도와 음평은 옹주(, 지금의 산시(西)성 서쪽), 양주(, 지금의 간쑤성 량저우)와 촉을 직접 잇는 요충지로 이곳을 점령하면 익주의 방어가 용이해진다는 장점이 있었다.
위나라에서는 옹양주도독 곽회가 진식의 촉군을 맞아 싸웠는데, 제갈량의 본진이 진격하자 곽회는 무도와 음평을 포기하고 퇴각했다. 하지만 겨울이 오자 양측은 소강상태에 진입하고, 제갈량은 한중으로 귀환하여 기회를 엿보게 된다. 무도와 음평을 점령한 공으로 제갈량은 승상직에 복직하였다.
해가 바뀌어 230년이 되자 조진은 군대를 세 길로 나누어 반격을 시도하였다. 조진의 본진은 사곡에서 한중을 공격하고, 사마의와 장합의 2로군은 각각 상용 과 무도를 공격하였다. 이에 제갈량은 성고 에 본진을 두고 방어하였다.
이후 계속된 여름장마로 도로가 유실되고 병력 보급이 어려워지자 위나라군은 퇴각하였고, 그해 가을 제갈량은 위연으로 하여금 강중()으로 진출하게 하여 곽회의 위군을 상대하게 했다. 위연이 양계()에서 곽회군을 대파하였는데, 이 패배로 조진은 대사마()로 좌천되고 후임으로 사마의가 등장한다.
6. 제갈량의 죽음과 함께 다가온 촉의 멸망"
건흥 9년인 231년, 제갈량은 다시 치산()으로 진격하였다. 4차 북벌부터 제갈량은 목우유마(소와 말을 본떠 만든 수레)를 사용하고 둔전(, 군사요지에 설치한 토지)을 강화하는데, 이는 매번 북벌에서 문제가 된 군량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촉군은 가을보리를 수확하는 한편, 곽회의 위군을 격파하였다.

이후 치산 인근의 노성 에서 촉군과 위군의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는데, 사마의와 장합이 서로 맞지 않아 촉군이 승리했다. 사마의는 촉군에 대한 전략을 견벽거수(, 벽을 바라보며 수비만 하다)로 수정하고 수비로 일관하였다. 하지만 이 시기에 병참을 담당한 이엄의 실수로 촉군은 다시 군량이 부족하게 되고 결국 퇴각하였다.
사마의는 참모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장합에게 촉군을 추격하게 하는데, 장합은 목문도(, 지금의 간쑤성 텐수이시의 도로)에서 촉군의 매복계에 걸려 전사하였다. 제갈량은 조정에 복귀하여 표기장군() 이엄과 거기장군() 유염()에게 북벌 실패의 책임을 물어 그들을 실각시킨다. 이 와중에 상당한 마찰이 있던 것으로 추측되며, 이후 3년 동안 북벌이 중단되었다.
건흥 12년인 234년, 제갈량은 북벌을 재개하였다. 기존의 북벌은 7~8만 정도의 병력이 투입되었으나 5차 북벌은 10여 만의 병력이 투입되었다. 촉군은 오장원 에서 위군과 대치했다. 곽회의 방어진 구축이 실패했고 사마의는 수비 전략을 고수하였다. 제갈량은 식량을 확보하면서 위군을 도발했으나 사마의는 움직이지 않았다. 4개월간의 대치 끝에 그해 8월 제갈량은 과로로 쓰러져 54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제갈량이 죽자 촉군은 장수 양의()의 지휘 아래 한중으로 퇴각하였다. 이 과정에서 양의와 사이가 나빴던 위연이 반란을 일으키지만, 왕평과 마대()의 활약으로 진압되었다. 제갈량의 지위는 장완이 물려받아서 한수(, 한중지방을 흐르는 한수이 강)를 이용한 관중 공격을 준비했으나 그도 일찍 죽었다. 이후 촉의 권력은 비위가 물려받았는데, 비위는 강유와 대립하다가 촉은 국력이 쇠하여 곧 위나라에 의해 멸망한다.
제갈량은 사후에 시호가 충무후()이며, 동진 정권에서 무흥왕()으로 추봉되었다.
대표적인 산문()으로 <출사표> 외에 <융중대()>, <계자서()> 등이 있다. 그는 목우유마 외에도, 공명등()이라고 하는 종이로 만든 등을 발명하였고,
화살이 연속 발사되는 연노()를 개량했다. 
7) 관련 유적
1) 제갈량묘(诸葛亮墓) 제갈량 무덤의 정식 명칭은 무후묘()이다. 무덤은 산시(西)성 남부 한중 분지 서쪽 몐()현의 정군산 남쪽에 위치해 있다.
2) 무후사(武侯祠) 제갈량이 죽은 후 이를 애석하게 여긴 백성들이 사당 건립을 청했고 후주 유선이 명을 내려 지금의 산시성 몐현에 첫 번째 무후사당이 건립되었다. 이후 중국 대륙 각지에 무후사가 생겼는데 지금은 9곳의 무후사가 있으며 쓰촨()성 청두()에 있는 것이 가장 유명하다. 청두 이외에도 허난성 뤄양(), 후베이성 샹양(), 간쑤성 치산(), 산시(西)성 치산산(), 충칭시 백제성(), 윈난성 바오산() 등지에 무후사가 있다.
제갈공명()은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정치가로 공명()은 자()이다. 유비()를 도와 오()와 연합하여 조조의 위군()을 적벽에서 격파한 후 촉한국()을 세운 공이 있다. 제갈공명을 우리나라 무속신앙에서 숭배하게 된 것은 임진왜란() 무렵부터가 아닌가 판단된다. 머리에는 관모()를 썼고 손에는 붓과 책을 들었으며 사실감 있는 얼굴은 인품()있는 학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어깨에는 파랑색의 스카프를 두른 녹색의 관복을 입었으며 가슴에는 흉배장식()을 하고있다. 
정의: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재송동에서 제갈공명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아내 덕에 똑똑해진 제갈공명」은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로, 제갈공명의 처에 대한 이인담()이자 신이담()이다. 제갈공명의 아내인 황씨 부인을 주인공으로 한 활자본 고전 소설 「황부인전」과 필사본 고전 소설 「황처사전」이 있는데, 후반부의 이야기는 이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제갈공명의 아내 황씨 부인은 남면 명사인 황승언의 딸로 박색이었으나 그 재주가 제갈공명과 대등하여 당시에 움직이는 인형을 만들었다고 한다. 제갈공명이 전장에서 썼던 물건들 중에는 그녀가 만든 것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채록/수집 상황
1996년 부산광역시 해운대구에서 발행한 『해운대 민속』에 「아내 덕에 똑똑해진 제갈공명」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이는 1996년 6월 22일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재송동으로 현지 조사를 나가 주민 이경룡[남, 82]으로부터 채록한 것,
그런데 그 집을 떠나려고 아무리 걸어도 계속 집 마당 안에서만 맴돌 뿐이었다. 결국 새벽녘이 되어서 마당에 나온 장인 때문에 다시 신방으로 들어갔는데, 날이 밝아 와서 다시 옷을 보았더니 듬성듬성 기운 줄 알았던 옷이 틀로 박아 놓은 것처럼 고왔다. 제갈공명의 부인은 알고 보니 바느질에만 솜씨가 있는 것이 아니어서 모르는 것이 없었다. 제갈공명은 그런 부인의 도움으로 똑똑해질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집을 떠나려고 아무리 걸어도 계속 집 마당 안에서만 맴돌 뿐이었다. 결국 새벽녘이 되어서 마당에 나온 장인 때문에 다시 신방으로 들어갔는데, 날이 밝아 와서 다시 옷을 보았더니 듬성듬성 기운 줄 알았던 옷이 틀로 박아 놓은 것처럼 고왔다. 제갈공명의 부인은 알고 보니 바느질에만 솜씨가 있는 것이 아니어서 모르는 것이 없었다. 제갈공명은 그런 부인의 도움으로 똑똑해질 수 있었다.

모티프 분석
「아내 덕에 똑똑해진 제갈공명」의 주요 모티프는 ‘신통한 능력을 지닌 이인()’이다. 「아내 덕에 똑똑해진 제갈공명」에서 황씨 부인은 돗바늘로 옷 바느질을 하고, 제갈공명을 집 안에서 헤매게 하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이인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여성 이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대표적인 고전 소설로는 「박씨전」과 「황부인전」 등을 들 수 있다. 재송동에서 채록된 「아내 덕에 똑똑해진 제갈공명」은 『삼국지연의』와 「황부인전」을 바탕으로 새롭게 형성된 설화라는 점이 특징이다. 특히 「황부인전」에는 황씨 부인이 절색으로 변신하는 내용이 있는데, 「아내 덕에 똑똑해진 제갈공명」에서는 생략되어 있다. 이는 소설이 구전을 통해 설화화 되는 과정에서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내용이 삭제된 것으로 보인다.“선제()께서는 한나라를 찬탈한 역적과 같은 하늘 아래 설 수 없고, 천하의 한 모퉁이를 차지했음에 만족해 앉아만 있을 수 없다 여기시어, 신에게 역적을 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현명하신 선제께서는 신의 재주를 헤아리시어, 신이 역적을 칠 재주는 모자라고 적은 강함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역적을 치지 않으면 왕업 역시 망할 것이니, 어찌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리까. 그리하여 제게 정벌의 사명을 맡기시고 의심치 아니하셨습니다. 신은 사명을 받은 날부터 자리에 누워도 편안할 수 없었고, 밥을 먹어도 맛을 알 수 없었습니다.(…)신은 몸을 굽혀 모든 힘을 다할 것입니다. 죽은 후에야 그만둘 것입니다. 성공할지 실패할지, 이로울지 해로울지에 대해서는 지금 미리 내다보지 못합니다."
 '삼고초려'의 예우를 받고 유비의 모사가 되다" 
229년경, 촉한의 승상 제갈량은 다시 한 번 위나라를 정벌하려 떠나며 후주() 유선에게 이러한 <후출사표>를 올렸다고 한다. 이 중에서 “몸을 굽혀 모든 힘을 다하여 죽은 후에야 그만둔다( )”는 먼 훗날 청나라의 강희제가 신조로 삼았을 정도로 유명한 문구다. 그러나 이 <후출사표>는 다른 사람이 쓴 위작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제갈량은 중국사의 무수한 인물 중에서도 공자나 관우와 더불어 가장 유명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기록은 적어, 진수가 쓴 <삼국지>와 상거의 <화양국지>, 그리고 제갈량 자신의 <제갈량집>(이 역시 상당 부분이 위작이라는 의심을 받는다)이 전부다. 그리고 이 문헌들을 통해 대략 살펴볼 수 있는 제갈량의 인생 역정은 <삼국지연의>를 통해 널리 알려져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제갈량, 자는 공명(), 호는 와룡(). 181년에 낭야군 양도현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 제갈규는 태산군 승()이라는 비교적 하급직을 지냈고 제갈량이 어릴 때 죽었다. 형주의 융중에서 살게 된 것은 작은아버지 제갈현이 그를 데리고 유표의 식객으로 지내다가 죽었기 때문이다. 제갈량은 석광원, 석도, 맹공위, 서서 등과 학문을 닦았는데, 남들은 학문 자체를 깊이 탐구함에 비해 그는 대략만을 이해하고 넘어가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그리고 뽕나무를 관리하고, 밭을 갈았다.한가할 때는 양보음()이라는 노래를 읊고, 무릎을 껴안은 채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제갈량은 스스로를 춘추전국시대의 명재상 관중과 명장 악의에 비교했는데, 모두 곧이듣지 않았지만 오직 서서만이 그를 큰 인물로 알아주었다. 그리고 한 발 먼저 유비 에게 등용된 서서의 추천으로, ‘ 삼고초려 ’의 예우를 받은 다음 유비의 모사 ()가 된다.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하지 않고, 남들은 할 수 없는 일을한 ‘위대한 바보 "
하지만 군사적 재능은 과장되었어도, 제갈량은 분명 다재다능했으며 보기 드문 역량을 갖고 있었다. 촉한군의 열세를 보완하고자 그가 창안했다는 팔진도, 목우유마, 연노 등은 성능이 과장되기는 했으되 실제로 획기적인 발명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정치 방식이나 <제갈량집>에 나타난 사상을 보면 그는 유가  법가 를 적절히 조화시켰다. 원리원칙을 중시하고 신상필벌을 확실히 하는 법가의 장점과, 인간적인 대우를 통해 덕으로 사람을 움직이는 유가의 장점을 그는 모두 살렸다. “눈물을 흘리며 마속의 목을 베었다”나 “절박한 상황에 처해서도 집으로 돌려보내기로 예정된 병사들에게 돌아가라고 함으로써, 병사들이 감격하여 전력으로 싸워 이겼다”는 에피소드는 원칙을 냉정히 지키며 따뜻한 인간미를 잃지 않은 예다.
승상의 사당이 어딘지 찾으니금관성 밖의 잣나무 숲이라네.계단에 드리운 풀은 봄기운이 완연하고나뭇잎 사이로는 꾀꼬리 울음 울리네.세 번 찾아준 은혜에 천하삼분의 계책을 내고두 대를 정성껏 섬긴 늙은 신하의 마음이여.출사하여 이기기 전에 몸이 먼저 가니후세의 영웅들은 옷깃을 적시네.
























































요약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정치가 겸 전략가. 명성이 높아 와룡선생(臥龍先生)이라 일컬어졌다. 유비(劉備)를 도와 오(吳)나라의 손권(孫權)과 연합하여 남하하는 조조(曹操)의 대군을 적벽(赤壁)의 싸움에서 대파하고, 형주(荊州)와 익주(益州)를 점령하였다. 221년 한나라의 멸망을 계기로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승상이 되었다.

2017년 11월 6일 월요일

Nile River.

Nile River.
리카 동부에 있는 하천. 전체 길이는 6,700㎞. 유역 면적은 아프리카 대륙의 약 1/10아프을 차지한다. 하천 상류의 백()나일 강은 빅토리아 호에서 발원하고, 청()나일 강은 아비시니아 고원에서 발원하여 수단의 수도인 하르툼에서 합쳐진다. 나일 강은 이집트 동부를 거쳐 지중해로 들어가는데 그 어귀에 넓은 삼각주를 형성한다. '이집트는 강의 선물'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 건계와 우계가 뚜렷한 지역을 흐르는 청나일 강의 범람으로 나일 강이 범람한다. 나일 강의 정기적인 범람은 이집트 인의 종교 사상 형성에 영향을 주었으며, 태양력도 여기에서 나오게 된 것이다. 나일 강은 고대부터 사하라 사막을 넘어 북부 아프리카와 적도 이남의 내륙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유일한 교통로였다. 페니키아 인은 '골짜기'라는 뜻의 나할(Nahal)이라고 했으며, 나일은 그리스 어의 닐루스(Nilus)에서 유래하였다.

총길이 6,671km이다. 총길이는 남반구의 부룬디 ·탄자니아 국경 부근에서 강 어귀까지이며, 유역면적은 아프리카대륙의 약 1/10을 차지한다. 나일 강에는 몇 개의 원류가 있는데, 그 중 가장 오지에 있는 것은 부룬디 산맥에서 발원하는 것이며, 여기서부터 카게라강이 되어 빅토리아호()로 흘러든다. 빅토리아호부터는 빅토리아나일이라 하는데, 키오가호를 지나 머치슨 폭포를 거쳐 앨버트호의 북단으로 들어간다. 앨버트호에서 수단 국경까지는 앨버트나일이라 하며, 여기까지의 나일 강은 산악지대를 지나면서 머치슨 폭포 같은 경관을 이룬다. 

역사학에서는 이집트의 통일 이전을 고왕국 시대, 이후를 왕조 시대 또는 파라오 시대라고 부른다.

파라오 시대는 제1왕조(B.C.3000년)부터 제30왕조 시대(B.C.341년)까지 약 2천5백 년 이상 지속되었다. 하지만 내란과 이민족의 침입으로 왕조가 거의 명맥만 유지한 때도 있었다.

유명한 피라미드 건설은 제3왕조 조세르 왕 때 시작되어 제4왕조 시대에 절정기를 맞았다. 쿠프 왕이 완성한 기자의 피라미드는 세계에서도 가장 크고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그 내부도 상당히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다.

피라미드를 건설할 때 '노예를 마치 말처럼 부렸다'는 부정적인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는 설이 유력하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나일 강이 범람한 농한기에 농민들의 생활이 궁핍해지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벌인 사업이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피라미드의 내벽에는 일을 하게 해준 왕조에 감사한다는 글이 남아 있기도 하다.

왕조 시대 후반, 이집트는 자주 페르시아의 침공을 받아 그들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페르시아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고, B.C.332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집트를 지배하게 되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에는 그의 부하 장군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가 지배권을 장악했다. 이 시대에 클레오파트라 여왕은 로마제국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일시적으로 이집트를 되찾았지만, 결국에는 로마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것이 B.C.30년경의 일로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이집트 왕조는 이로써 완전히 막을 내렸다.
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으며,1861년 카이로 북쪽에 댐이 완성됨으로써 삼각주지대의 농산물 재배가 활발해졌다. 내륙 수로로서의 개발은 19세기 말부터 1900년에 걸쳐, 부평초 때문에 항행할 수 없는 수단 남쪽의 습지대를 우회하기 위해 자연적으로 생긴 바르엘제라프강(바르알자발강의 중앙부에서 동쪽을 북진하여 백나일과 소바트강의 합류점 부근에 이르는 강)에 일부 인공을 가하여 항행을 원활하게 한 것이 시초이다.

1902년 아시우트와 아스완에 개폐식 댐을 완성, 계절적인 범람에 다소의 제어를 가하여 관개용수의 이용을 유효하게 하였는데, 이러한 공사는 그후 이스나(1909), 센나르(1925), 나그함마디(1930), 제벨아울리아(1937) 등에서도 행해졌다. 1970년 아스완하이댐이 완공되어 강의 범람을 완전히 제어하게 되었고, 이 다목적댐에 의하여 나세르호가 생겼다. 그 결과 이집트의 약 2만 4,300km2, 수단의 약 4,050km2의 농경지가 관개되었다. 나일 강은 국제하천이므로 이집트 ·수단 ·에티오피아 ·우간다 사이에 수리()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어 있다. 수자원의 적극적인 개발과 이용은 1954년 우간다에서 오웬폭포에 댐을 완성하고 수력발전을 개시함으로써 시작되었다. 1960년에는 구()아스완 댐에서도 수력발전이 시작되었다. 나일 강 중류 이북은 옛부터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으나, 원류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 이곳에 대한 탐험이 시작된 것은 17세기부터이다. 1613년 포르투갈의 파에스 신부가 청나일을 탐험하고, 1770년 영국의 J.브루스가 타나호()를 탐험하여 그것이 나일 강의 원류임을 확인하였다.

카이로에서 나일 강을 찾아 소개하는 내용이다. 이집트인에게 나일강은 자궁, 탯줄과 같은 의미로 신의 축복과도 같다. 세계의 여러 나라의 자연과 문화를 학습할 때 참고자료로 활용한다.

백나일은 이집트 탐험대가 1821∼1842년 수단 남단에 가까운 주바의 급류까지 탐험하였는데, 1830년에 그 때까지 백나일의 상류라고 생각한 나이저강이 별개의 큰 강임을 확인하였다. 1858년 영국인 스피크는 빅토리아호가 나일 강의 수원일 것이라 추정하고 탐험을 시작하여, 1860년 버튼과 함께 그 추정의 정당함을 확인하였다. 또 영국인 S.베이커는 1861년부터 2회에 걸친 탐험으로, 수단 남쪽의 습지대에서 나일 강을 거슬러 올라가 앨버트호와 머치슨 폭포를 확인하였다. 그후 1870년대에 이르러 영국의 군인 C.G.고든과 그 부하들이 나일강의 지도를 작성하는 데 성공하고, 이어서 M.스탠리가 빅토리아호를 주항()하여 백나일의 원류지대를 상세히 밝혔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런던의 왕립지리학협회가 아프리카 내륙 탐험에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1870년대에는 나일 강의 모습이 거의 알려졌다. 

세계에서 가장 긴 강이라고 알려져 왔으나, 2008년 5월 리마 지리학회의 발표에 따르면 아마존강이 나일 강보다 긴 것으로 조사됐다.
수단령으로 들어서면 서쪽에서 흘러오는 지류인 바르알가잘강과 노호()에서 합류하는데, 이것을 바르알자발강이라 한다. 바르알자발강은 광대한 습지대를 지나오면서 유량의 절반은 부평초()에 흡수당하거나 증발로 인하여 줄어든다. 이곳에서부터 수도 하르툼까지를 백나일이라 한다. 백나일은 건조지대로 들어서 하르툼에 가까워지면 완전한 사막지대를 지난다. 여기서는 남동쪽에서 흘러오는 소바트강이 합류한다.
이집트 땅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대략 기원전 3200년경 이집트 남부에서 이른바 ‘햄족’이 나일 강 유역에 정착하면서 이집트문명이 탄생했다. 나일 강 유역의 기름진 흙은 햄족에게 농사를 가능하게 해 주었고, 그물을 던지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많은 물고기를 선물해 주었다.

세계에서 가장 긴 나일 강의 범람은 이집트문명의 밑거름이었다. 에티오피아의 높은 산들과 동아프리카의 큰 호수에서 발원하는 나일 강에는 봄과 여름에 정기적으로 비가 내린다. 그래서 매년 9월이면 강의 수위가 최고에 달해 홍수가 일어난다. 그러나 나일 강의 홍수는 메소포타미아문명에 큰 피해를 준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의 홍수와 달리 비옥한 토양을 제공했다. 따라서 나일 강의 범람은 이집트의 생태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이집트인들은 메마르고 붉은빛을 띠는 사막과 달리 범람 지역을 비옥한 ‘검은 땅’이라 불렀다. 검은 땅은 다시 좁고 긴 지형을 이루고 있는 상()이집트와 광대한 삼각주를 이루고 있는 하()이집트로 구분하지만, 경작이 가능한 지역은 대부분 하이집트이다. 이집트의 농경은 나일 강의 정기적인 범람을 적절히 이용하고, 그 물과 토양을 수로와 저수지 등을 통해 넓은 농토에 공급함으로써 가능했다.

나일 강의 규칙적인 범람은 배수 문제를 자동적으로 해결해 주었다. 그래서 메소포타미아에서 발생한 염분으로 생긴 토양의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고대 이집트에서 농산물을 그리스와 로마 등지로 수출할 수 있었던 것도 나일 강의 범람이라는 천혜의 조건 때문이었다.
백나일은 에티오피아에서 흘러오는 청나일(아랍어로는 바르알아즈라크)과 하르툼에서 합류하여 나일 강이 된다. 하르툼을 떠난 나일 강은 도중에 에티오피아에서 흘러오는 또 하나의 지류인 아트바라강과 합류하여, 이집트 국경 근처에서 인공 호수인 나세르호()로 흘러든다. 아스완 하이댐과 아스완댐을 거쳐 이집트 영내로 들어가면 합류하는 지류도 없고, 카이로 북쪽에 거대한 삼각주지대를 만들면서 지중해로 흘러든다. 아스완과 하르툼 사이에는 6곳의 급류가 있어 유량이 적은 2∼7월에는 항행할 수 없으나, 그 밖의 계절에는 작은 선박이면 지중해에서 머치슨 폭포까지 항행할 수 있으며, 우간다에서 빅토리아호를 지나 카게라강을 약 160km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셈 어로 나일은 '하천'이라는 뜻이며, 아랍 어로는 '대단히 큰 물이 있는 바다'라는 뜻이다. 나일 강에 대한 탐험은 17세기부터 시작되어 1613년 포르투갈의 파에스 신부가 청나일 강을 탐험하고, 1770년 영국의 브루스가 타나 호()를 탐험하여 그것이 나일 강의 원류임을 확인하였다. 1860년 영국인 스피크와 버튼은 빅토리아 호가 백나일 강의 수원임을 밝혔다. 1870년대에는 나일 강의 지도가 작성되는 등 나일 강의 모습이 세계에 알려졌다. 나일 강이 내륙 수로로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부터이며, 1970년 아스완하이 댐이 완공되어 강의 범람을 완전히 제어하게 되었다. 나일 강은 국제 하천이므로 이집트, 수단, 에티오피아, 우간다 사이에 수리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어 있다.
구석기 시대 이전, 북아프리카는 숲으로 뒤덮여 있었다.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은 예로부터 유목 생활을 했지만, 이후 건조 지대가 되면서 나일 강 주변에 인구 밀집 지역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집트는 나일 강과 비옥한 대지, 태양의 혜택까지 받고 있는데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바다와 사막이 외적의 침입을 막아주어서 비교적 쉽게 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여명 의 나일강"
이집트에 정착 농경문화가 탄생한 것은 B.C.5000년경으로 추정된다. 이후 5백 년 정도 지나자 사람들은 동() 같은 금속을 사용하게 되었고, 또 5백 년 정도가 더 흐르자 초보적인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B.C.3500년경에는 그때까지 각지에 흩어져 있던 촌락들이 연합하여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라는 두 개의 국가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러한 국가의 성립은 언어의 발달을 가져왔다. 당시 이집트에서는 인근 지역에서 통용되는 공통의 문자가 사용되고 있었다.

이후 상이집트는 이집트 전역을 통일할 계획을 세웠다. 마침내 B.C.3000년경 상이집트의 나르메르 왕은 세 번에 걸친 교섭을 통해 이집트에 통일국가를 세울 수 있었다.
우리가 이집트 신화라고 부르지만, 그 내용은 일괄적이지 않고 지방과 시대에 따라 상당히 다르다.

예를 들면 고왕국 시대의 신화는 상이집트와 하이집트가 서로 다르다. 그리고 오시리스 신화에는 호루스와 세트 신의 대립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상·하 이집트의 대립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한다. 파라오 시대가 되자 신학자들은 헬리오폴리스파와 멤피스파로 나뉘어 서로 다른 교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집트에서 신앙의 중심은 태양 숭배였지만, 이것도 시대의 흐름과 함께 변화했다. 사람들은 태양보다 사후의 재생에 더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당초 신화 세계의 최고신은 태양신 라였지만, 후대에는 명계의 신 오시리스가 그 자리를 물려받게 된다.

이러한 변화가 일어난 것은 중왕조 시대였다. 태양신 라가 죽은 후 명계를 지배하는 오시리스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현세를 지배하는 자를 오시리스의 아들 호루스 신으로 보았다고 한다.
기원전 수천 년의 먼 옛날로부터 기원 전후에 이르기까지 나일강 유역에서 번영을 누린 고대 이집트인(人)의 신화이다.

아마존강.

아마존 강 하구의 평균 깊이는 약 45m이지만 가장 깊은 곳은 90m 정도 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또 강 하구의 폭은 240㎞ 정도 되며, 태평양으로부터 160㎞ 떨어진 안데스 산맥 정상에서 시작하여 대서양까지 약 7,000㎞를 동진하여 도달한다. 강의 대부분은 브라질을 통과하며 큰 지류만 해도 200개가 넘는다. 남아메리카의 서쪽 안데스 산맥에서 발원하여 적도를 따라 동쪽으로 흘러 대서양으로 들어가는 강으로, 유수량과 유역 면적이 세계에서 가장 크다. 그중에서 17개는 길이가 2,000㎞ 이상이며 본류와 지류를 모두 합하면 5만㎞ 이상이 된다. 
지구 상의 강 중에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만큼 넓고 긴 강이 있는가 하면 송사리를 잡던 동네 어귀의 조그마한 강도 있다. 그 중에서 가장 긴 강은 나일강(6,671㎞)이고 두 번째는 아마존 강(6,400㎞, 마라포 강의 원류부터)이다. 그러나 강의 길이는 측정 방법이나 시기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는데, 브라질의 과학자들은 아마존 강 길이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였다.
2001년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재측정을 실시하였는데, 나일 강보다 더 길다고 하였고 세계 유수의 지리학회에서 동의를 얻었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 아마존 강의 길이는 7천 ㎞를 조금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강의 유량은 아마존 강이 174,900㎥/s로 가장 많으며, 두 번째인 콩고 강(39,000㎥/s)보다 무려 5배나 많다. 아마존 강에서 1초당 흘려보내는 물의 양은 콩고 강이 4.5초, 미시시피 강이 10초, 나일 강이 56초 동안 흘려보내는 물의 양과 맞먹는데, 이 물은 지구 상의 민물 중 약 15%를 차지한다.
아마존 강은 내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600㎞ 떨어진 내륙의 중심(아마존 분지) 도시인 마나우스에서 큰 배를 타고 대서양으로 나갈 수 있으며, 하구에서 3,700㎞나 떨어진 페루의 이키토스(Iquitos)까지 대형 선박의 항행이 가능하다. 1851년에 브라질과 페루 사이에 체결된 조약으로 양국의 아마존 항행이 자유로워졌으며, 1867년에는 브라질 정부가 미국ㆍ영국ㆍ프랑스 3개국의 요청으로 아마존 본류와 지류인 토칸칭스(Tocantins) 강을 개방하였다.
아마존은 2개의 큰 강, 즉 마라뇬강과 우카얄리강이 합류하여 형성된다. 마라뇬강은 아마존의 본류로 간주되는데 그 원류는 페루의 중서부, 태평양에서 약 200㎞ 떨어진 페루의 안데스산에서 발원하여 700m의 깊이를 가진 협곡을 만들면서 약 1000㎞를 북류한다. 그 후 에콰도르 국경 부근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고 나우타(페루)에서 우카얄리강과 합류한다. 우카얄리강의 원류는 아푸리막강이라고도 하는데, 페루 남부의 안데스에서 발원하여 마라뇬강과 나란히 흐르며, 합류한 후에는 페루의 이키토스 부근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이 두 하천의 합류지점으로부터 그 하류를 아마존강이라 부른다. 본류 마라뇬강의 원류부터 아마존 하구까지는 6400㎞, 우카얄리강의 원류부터 하구까지는 7025㎞이며, 아마존 하구의 너비는 약 335㎞로 추정된다.
하구 근처에는 크고 긴 삼각주가 자리잡고 있으며, 천수백 개의 섬과 사주가 산재해 있다. 그 중에서도 마라조섬을 사이에 두고 크게 두 갈래로 갈려서 대서양으로 흘러든다. 브라질 영내의 강폭은 2∼10㎞이며 거대한 유량이 유입하기 때문에 하구에서 약 400km 떨어진 앞바다까지 해수의 염분이 희석되고, 수십km에 이르는 바다가 토사로 흐려져 있다. 1∼6월의 우기에는 중류의 마나우스처럼 수위 차가 20m나 되는 곳도 있다. 봄에는 조수의 간만 때문에 하구 부근에 해소(:밀물 때 얕은 해안이나 세모꼴로 떨어진 하구에서 일어나는 거센 파도나 그 소리)가 일어나 높이 5m 내외의 파도가 밀어닥치기도 한다.
1868년에는 페루와 에콰도르도 자국 영내의 하천을 이용하는 외국 선박의 항행을 자유화하였으며, 그 후부터 아마존은 완전한 국제 하천이 되었다. 하구와 가까운 벨렘(Belem)은 아마존 강 유역의 물자 집산지이고, 아마존과 네그로 강의 합류점 부근에 있는 마나우스는 아마존 제일의 항구이며, 이키토스는 페루의 항구 도시로 발전하였다.
아마존 강은 페루 안데스 산맥에서 발원하여 처음에는 북쪽으로 흐르다가 나중에 동쪽으로 흘러 브라질 북부를 관통한 다음 대서양으로 흘러든다. 그러나 그 원천은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정확한 원천을 찾기 위하여 국제지리학회에서 연합 팀(미국, 폴란드, 페루, 캐나다, 에스파냐)을 구성하여 탐사를 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수백 년간 베일에 싸여 있던 안데스의 고지 빙하에서 솟아나는 아마존의 원천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탐사 팀은 GPS 장비를 이용해서 이 강의 원천이 페루 남부의 네바도미스미(Nevado Mismi, 5,597m) 산꼭대기의 바위틈에서 흐르는 물이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탐사 팀을 이끈 뉴욕의 수학 교사인 앤드류 피토스키는 이 탐사를 통해 아마존의 원천뿐만 아니라 아마존의 상류에 대해 매우 정확한 지도를 얻을 수 있었다고 했다. 국내의 작은 강도 그 원류를 찾아내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약 7백만 ㎢의 유역을 가진 세계 최대의 강에 대한 원천을 찾아낸 것은 지도학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아마존강
의 유역 면적은 6,915,000㎢로 2위인 콩고 강(3,820,000㎢)보다 2배나 넓으며, 남북으로는 북위 5°~남위 20°, 동서로는 서경 50°~78°에 걸쳐 있다. 그 대부분은 브라질 영토이며 주변의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파라과이 등에 떨어지는 빗물도 아마존 강으로 흘러든다. 결국 남미 대륙 면적(1780만 ㎢)의 1/3이 아마존 강 유역인 것이다. 그러나 기아나, 수리남, 가이아나에 내린 빗물은 분수령인 기아나 고지에 막혀 아마존 강으로 들어오지 않고 바로 대서양으로 흘러들며 칠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등 세 나라는 아마존 강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브라질의 아마존 유역에는 약 200만의 인구가 있는데 그 중에서 원주민인 인디오는 5%, 백인과 혼혈인(카보클로)이 각각 40% 가량, 흑인이 10%이다. 산업수준은 매우 낮다. 주민의 대부분이 산림을 벌채하여 화전을 만들고 고무 ·만조우카(벼) ·밭벼 ·옥수수 ·주트 ·후추 ·콩류를 재배하는 한편, 천연고무 ·유지식물 ·약용식물을 채집하며 생활하고 있는데, 그러한 수확으로 흑인이나 혼혈인이 현금을 얻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아비아도(Aviado) 제도라고 하는 고리대() 자본을 앞당겨 쓰기 때문에 수확은 빚을 갚는 데 다 들어가고, 이러한 고리대금망을 형성한 백인층 밑에서 언제나 빈곤에 허덕이고 있다.브라질의 아마존 유역에는 약 200만의 인구가 있는데 그 중에서 원주민인 인디오는 5%, 백인과 혼혈인(카보클로)이 각각 40% 가량, 흑인이 10%이다. 산업수준은 매우 낮다. 주민의 대부분이 산림을 벌채하여 화전을 만들고 고무 ·만조우카(벼) ·밭벼 ·옥수수 ·주트 ·후추 ·콩류를 재배하는 한편, 천연고무 ·유지식물 ·약용식물을 채집하며 생활하고 있는데, 그러한 수확으로 흑인이나 혼혈인이 현금을 얻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아비아도(Aviado) 제도라고 하는 고리대() 자본을 앞당겨 쓰기 때문에 수확은 빚을 갚는 데 다 들어가고, 이러한 고리대금망을 형성한 백인층 밑에서 언제나 빈곤에 허덕이고 있다.유역의 기후는 1년 내내 고온다우한 열대우림 기후, 상류지역에 있는 안데스산지의 건조 기후, 건기와 우기가 교차하는 사바나 기후 등 세 기후지역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지형은 증수기()에 수면 아래로 잠기는 바르제아(varzea) 및 테조(teso)라 불리는 단구면()과 그보다 높은 단구를 포함한 테라피르메(terra firme)로 대별된다. 바르제아는 주트나 쌀의 재배에 적합하며, 테라피르메에서는 열대우림 셀바스의 밀림을 벌채하여 고무나무와 후추나무를 재배하고 있다. 셀바스에서는 아닝가 ·임바우바 ·아리아 등 특색 있는 식물을 볼 수 있으며, 고무 ·브라질너트 등 유용한 수종()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값진 침엽수가 없기 때문에 임업개발이 부진하다.
동물로는 조류와 곤충류가 많고 큰 동물은 적다. 악어 ·맥() ·나무늘보 ·아메리카표범 등이 특색 있는 것들이며 어류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담수어인 피라루쿠(의 일종으로 큰 것은 5 m나 된다), 사나운 고기인 피라니아, 식육 미꾸라지인 칸제로 등이 유명하다.
아마존강 유역의 기후는 1년 내내 고온다우한 열대우림 기후, 상류지역에 있는 안데스산지의 건조 기후, 건기와 우기가 교차하는 사바나 기후 등 세 기후지역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지형은 증수기()에 수면 아래로 잠기는 바르제아(varzea) 및 테조(teso)라 불리는 단구면()과 그보다 높은 단구를 포함한 테라피르메(terra firme)로 대별된다. 바르제아는 주트나 쌀의 재배에 적합하며, 테라피르메에서는 열대우림 셀바스의 밀림을 벌채하여 고무나무와 후추나무를 재배하고 있다. 셀바스에서는 아닝가 ·임바우바 ·아리아 등 특색 있는 식물을 볼 수 있으며, 고무 ·브라질너트 등 유용한 수종()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값진 침엽수가 없기 때문에 임업개발이 부진하다.
동물로는 조류와 곤충류가 많고 큰 동물은 적다. 악어 ·맥() ·나무늘보 ·아메리카표범 등이 특색 있는 것들이며 어류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담수어인 피라루쿠(의 일종으로 큰 것은 5 m나 된다), 사나운 고기인 피라니아, 식육 미꾸라지인 칸제로 등이 유명하다.
브라질의 아마존 유역에는 약 200만의 인구가 있는데 그 중에서 원주민인 인디오는 5%, 백인과 혼혈인(카보클로)이 각각 40% 가량, 흑인이 10%이다. 산업수준은 매우 낮다. 주민의 대부분이 산림을 벌채하여 화전을 만들고 고무 ·만조우카(벼) ·밭벼 ·옥수수 ·주트 ·후추 ·콩류를 재배하는 한편, 천연고무 ·유지식물 ·약용식물을 채집하며 생활하고 있는데, 그러한 수확으로 흑인이나 혼혈인이 현금을 얻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아비아도(Aviado) 제도라고 하는 고리대() 자본을 앞당겨 쓰기 때문에 수확은 빚을 갚는 데 다 들어가고, 이러한 고리대금망을 형성한 백인층 밑에서 언제나 빈곤에 허덕이고 있다.
한때 호경기를 누렸던 고무 경기(19세기 말~20세기 초)가 말레이시아의 재배 고무에 밀려서 쇠퇴하였다가 다시 활기를 찾았다. 브라질의 미개발 지역으로 정부는 물론 미국 등의 원조로 개발계획이 진행되고 있으며 국가예산의 3%가 이 지역 개발에 투자되고 있다. 아마존 횡단도로가 건설되어, 그 연변에 농업 개척지를 조성하고 부근에서 발견된 철광 ·알루미늄 ·망간 등의 광산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원시생활을 하고 있는 샤반테스 ·라피치 등의 인디오 종족과 아마존의 수상생활자 등 원주민의 생활상이 많이 소개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