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23일 목요일

조운趙雲

조운趙雲.

삼국 시대 촉()나라 상산() 진정() 사람. 자룡은 자고, 이름은 운()이다. 처음에는 공손찬() 수하에 있었는데, 공손찬이 원소()에게 망한 뒤 유비()에게 귀순했다. 유비의 경호원으로 여러 번 유비를 위기에서 구해 냈다. 조조()가 형주()를 취했을 때 유비가 패주하자 감부인()과 아두()를 구하기 위해 조조의 대군을 혼자 휘젓고 다니며 호위해 구출했다. “조자룡 헌 칼 쓰듯 한다.”는 속담도 이때 생겨났다. 아문장군()으로 옮겼다. 
재평가 받는 아름다운 영웅"
조자룡(趙子龍, ?~229)은 이름이 조운으로 삼국시대 촉나라의 무장입니다. 하북 지역 상산(常山) 출신으로 8척(약184cm) 장신에 늠름한 풍채를 지닌 영웅으로 관우, 장비, 마초, 황충과 더불어 ‘오호대장군(五虎大將軍)’으로 불립니다. 역사서 삼국지를 편찬한 진수는 ‘조운전’에서 용맹함이 황충 같다고 봤고, 소설가 나관중은 삼국지연의에서 유비가 조자룡을 의형제 관우나 장비와 동등하게 대우했다고 표현했습니다. 유비는 “만일 도원결의 전에 조자룡을 만났다면 우리는 4형제가 됐을 것” 이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조자룡은 유비 삼형제와 제갈량 등 당대 영웅에 묻혀 큰 주목을 받지 못한 부분도 있습니다. 최근 무장으로서 조자룡의 매력과 역할이 재조명되면서, 그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와 장편 드라마가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유비가 유장()을 공격했을 때 제갈량()을 따라 장강()을 따라 서쪽으로 올라가 군현을 평정했다. 촉 일대가 평정된 뒤 익군장군()이 되었다. 유비가 오()나라를 정벌할 때 간언을 올렸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관우()는 오만하고 장비()는 포악해서 둘 다 목 없는 귀신이 되었지만, 그는 원만한 성격으로 끝까지 용맹을 떨치고 천수를 다하고 죽었다. 유선이 즉위했을 때 중호군()과 정남장군()을 지내고, 영창정후()에 봉해졌다. 시호는 순평()이다. 중국사를 통해 창술()에 뛰어난 몇 안 되는 인물로 꼽힌다.
상산() 진정() 사람으로 자는 자룡()이다. 삼국()시대 촉한()의 무장()으로 본래 백마장군() 공손찬()의 휘하에서 유비()를 만나 그를 평생 동안 섬겼다. 유비를 따라 30여 년 동안에 박망파()전투, 장판파()전투, 강남평정()전투 등에 참여했고, 단독으로 천(), 한수(), 기곡() 등지에서 전투를 벌여서 큰 공을 세웠으며 ‘호위장군()’으로 일컬어졌다. 또 관우(), 장비(), 마초(), 황충()과 더불어 ‘오호대장군()’으로 일컬어진다.
벼슬은 편장군(), 계양태수(), 우군장군(), 진군장군() 등을 역임하고, 영창정후()에 봉해졌다. 사후에 순평후()로 추봉되었다.
조자룡은 유비와 함께하면서 무장으로서 최고의 전성기를 맞습니다. 처음에는 하북 지역 최대 세력가 원소 밑에서 일했지만, 원소가 실력보다는 출신과 배경을 보고 인재를 등용했기 때문에 쓰임을 받지 못했습니다. 공손찬도 자기중심적 성격으로 자신보다 뛰어난 인재를 인정하지 않아 그의 곁에 있을 수 없었습니다. 반면, 유비는 세력이 약했지만 의리가 강해 조자룡이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줍니다. 조자룡은 유비의 경호원으로서 여러 번의 위기에서 유비를 구해냈고, 조조가 형주성을 공격할 땐 유비가 패주하자 감부인(甘夫人)과 유선(劉禪)을 구하기 위해 조조의 10만 대군 사이를 혼자 휘젓고 다니며 구출해 옵니다. “조자룡 헌 칼 쓰듯 한다.”는 속담도 이때 생겨났습니다. 유비는 조자룡이 아들 유선을 구출해 오자 아들을 내던지면서 "하마터면 훌륭하고 용맹한 장수를 잃을 뻔했다." 고 말해 감동을 안겨줍니다. 그만큼 조자룡을 높이 평가하며 관우, 장비와 똑같이 의형제로 대접합니다. 역사서 삼국지에 ‘유비는 조운과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잤다.’고 기록한 것을 보면 절대적인 신임을 얻은 것으로 보입니다.
유비와의 만남을 통해 세상에 인정받다"
조자룡은 유비와 함께하면서 무장으로서 최고의 전성기를 맞습니다. 처음에는 하북 지역 최대 세력가 원소 밑에서 일했지만, 원소가 실력보다는 출신과 배경을 보고 인재를 등용했기 때문에 쓰임을 받지 못했습니다. 공손찬도 자기중심적 성격으로 자신보다 뛰어난 인재를 인정하지 않아 그의 곁에 있을 수 없었습니다. 반면, 유비는 세력이 약했지만 의리가 강해 조자룡이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줍니다. 조자룡은 유비의 경호원으로서 여러 번의 위기에서 유비를 구해냈고, 조조가 형주성을 공격할 땐 유비가 패주하자 감부인(甘夫人)과 유선(劉禪)을 구하기 위해 조조의 10만 대군 사이를 혼자 휘젓고 다니며 구출해 옵니다. 
“조자룡 헌 칼 쓰듯 한다.”는 속담도 이때 생겨났습니다. 유비는 조자룡이 아들 유선을 구출해 오자 아들을 내던지면서 "하마터면 훌륭하고 용맹한 장수를 잃을 뻔했다." 고 말해 감동을 안겨줍니다. 그만큼 조자룡을 높이 평가하며 관우, 장비와 똑같이 의형제로 대접합니다. 역사서 삼국지에 ‘유비는 조운과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잤다.’고 기록한 것을 보면 절대적인 신임을 얻은 것으로 보입니다. 조자룡은 삼국시대 명장으로 중국 후한 말기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이 조조에 맞서 싸웠던 적벽대전에서 유비의 호위무사로서 그 임무를 다했고 장판파 전투에서는 위기에 처한 유비의 아들을 혈혈단신으로 조조의 대군을 뚫고 구출하기까지 했다. “조자룡 헌 칼 쓰듯 한다”는 속담도 이때 생겨났다고 한다. 
만능무장이자 전략가" 
조자룡은 삼국지의 수많은 무장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무예는 관우와 장비에 뒤지지 않아 전쟁터에서 패한 경우가 거의 없었습니다. 반면 조자룡에게 목숨을 잃은 장수는 주찬, 장무, 형도영, 여광, 진응, 한기, 한덕, 한경, 포룡, 한영, 묘용렬 등 부지기수입니다. 삼국지연의에서 단기필마로 가장 많은 적장을 벤 무장 중의 무장입니다.  219년 한중전투에서는 지략과 용맹을 발휘해 소수의 병력만으로 조조의 대군을 격퇴합니다. 조조군의 군량을 빼앗기 위해 출전한 황충이 포위를 당하자, 조자룡은 조조의 진영으로 들어가 황충을 구해냅니다. 또 부하 장수 장저(張著)가 상처를 입고 뒤에 처지자 다시 돌아가 구출합니다. 장익(張翼)이 지키던 면양(沔陽)으로 들어가서는 성문을 활짝 열어놓고 조조군을 맞는 대담함도 보여줍니다. 이를 본 유비는 “자룡은 온몸이 담 덩어리로구나(子龍一身都是膽也)”라고 감탄합니다. 이때부터 ‘일신시담(一身是膽)’이라는 사자성어가 시작됩니다.  
관우의 복수전인 이릉대전 때의 일입니다. 유비의 사사로운 복수전인 이 전투에 대해 제갈량도 그 불합리함을 제대로 말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조자룡은 주적인 조조를 꺾으면 오나라 손권은 스스로 무릎을 꿇을 것이라며 만류하는 직언을 합니다. 유비는 이 말을 듣지 않고 조자룡을 강주(江州, 지금의 충칭(重慶)시)에 남겨두고 전쟁을 벌였다가 패하고 맙니다.  
관우의 복수전인 이릉대전 때의 일입니다. 유비의 사사로운 복수전인 이 전투에 대해 제갈량도 그 불합리함을 제대로 말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조자룡은 주적인 조조를 꺾으면 오나라 손권은 스스로 무릎을 꿇을 것이라며 만류하는 직언을 합니다. 유비는 이 말을 듣지 않고 조자룡을 강주(江州, 지금의 충칭(重慶)시)에 남겨두고 전쟁을 벌였다가 패하고 맙니다. 순수한 무인으로 기억되다" 조자룡은 죽는 날까지 그 올곧음을 잊지 않았습니다. 유비가 죽고 228년 제갈량이 1차 북벌을 위해 위나라로 출병할 때 조자룡은 기곡전투에서 패배하자 책임을 지고 스스로 계급을 강등합니다. 사리가 분명해 패배의 책임을 인정하는 데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또 제갈량이 패배 후 남은 군수품인 비단과 무명을 장병들에게 지급하려 하자 조운은 군수 물자는 마땅히 월동(越冬)에 대비해 써야 한다며 반대합니다. 제갈량은 유비가 생전에 조운을 군자(君子)로 여긴 것을 떠올리며 그를 더욱 존경합니다. 조자룡은 기곡전투를 마지막으로 그 이듬해 세상을 떠납니다. 용맹, 겸양, 신뢰, 공정을 두루 갖춘 조자룡은 평생 전쟁터를 누빈 순수한 무인이었습니다. 하지만 부드럽다" 제갈량은 사실 뛰어난 책사이기 보다 , 위대한 정치가 라 볼 수 있는데역사상 모든 나라가 망할 때는 "내부의 적" 바로 내분과 관료 와 환관들의 부패 에서 시작됩니다. 한나라가 환관들 과 외척세력때문에 패망하였고. 
제갈량은 이러한 역사적 교훈을 깊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과 황제에게 오직 충 과 명 을 잘 받는 내부를 관장할 청렴한 사람이 필요했으며 그게 바로 조자룡 이였습니다. 조자룡은 내부의 일을 주로 담당하였기 때문에 , 언제나 부와 재물을 좋아하는 환관들의 적이 되었고 그가 주장하는 것 역시 환관들의 방해로 묻쳐버리기 일 수 였을 것 입니다.  조자룡이 조조의 대군을 , 계책과 용맹으로 격퇴하자 다음날 유비가 친히 와서 그날의 전공을 듣고 " 자룡은 온 몸이 담력으로 이우어 졌구나" 라 칭송을 합니다.장졸들은 조자룡을 "호위장군" 이라 칭합니다.(호랑이 용맹을 가진 장군 이란뜻)정작 관직은 호위장군 이 아닙니다. 당양에서 주인을 구하고 , 오로 끌려가는 주인을 구하고 , 두번이나 단기필창 으로 주인을 구한 역사상 유래없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유선이 조운의 죽음을 듣자. 자신을 두번이나 구해준 은인이 죽었다며 식음전패하고 울었다고 합니다. 제갈량은 한팔을 잃은것 같다며 목 놓아 울었고. 유선은 촉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웅중 하나가 죽었고 , 강유에게 명하여 , 그의 업적에 맞는 시호를 내리라 명합니다 . 강유는 "순평후 " 라는 시호를 작성하여 추대했습니다.

그는 일생 무장으로서 패배를 몰랐고 신하로서도 지성어린 충절을 다해 그의 죽음을 안 후주 유선은 지난날 두 번이나 그를 구해준 것을 생각하며 목놓아 울었다고 한다. 제갈량이 재차 위를 치기에 앞서 세상을 떠난 조운은 천수를 다한 후 성도의 금병산에 묻혔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여러 장수들 중에서 무용, 충절, 최후 등에서 조자룡 만큼 골고루 다 갖춘 장수는 거의 없다. 또한 호위장군 이라는 말은 , 한중쟁탈전 에서 처음 등장하는 것인데 참고로 촉나라 장군들 중 "후"의 시호를 받은 자는 관우, 장비 ,마초 ,황충 그리고 조운 입니다. 후에 나관중이 오호대장군 이란 가상관직을 동원할때 역시 , 이같은 시호가 한 몫 단단히 했을 것 입니다. 삼국지" 연의 든 , 정사든 허구 와 과장 을 찾기전에 조자룡은 2번 주인을 구했고 관우가 자만함 과 오만함 으로 죽고 , 마초가 죽기전에도 오만하고 자신의 주군에게도 방자 하였고 끝내 병으로 요절하였으며 장비가 부하관리의 미숙함으로 죽고 , 황충이 자존심 과 오기로 인하여 죽고 위연(역시 명장입니다. 반역이 아니라) 이 , 자신의 용맹만을 믿고 의기양양 하다 , 내부의 아군에게 죽고 조자룡은 70넘은 나이에도 전장에서 활약하다 . 성도에서 지병으로 숨을 거둡니다. 삼국지 모든 영웅호걸 중 , 조운과 같이 활약을 하고 , 어진 성품으로 결말이 좋은 장수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천년의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중국의 대다수 사람들은 "관우" 를 황제로 추대하고 섬기며 하나의 무속신앙으로 자리잡았고 "장비" 를 싸움의 신으로 섬기고 , "마초"를 시대의 풍운아 로 그의 야망과 인생을 이야기 하며
"황충" 을 중국역사상 최고의 궁술 달인이자 , 노익장의 대명사 로 이야기하며
"조운" 을 중국역사상 가장 "창술" 에 뛰어나고 , 충 의 대명사로 이야기 합니다.  
조자룡은 유비가 공손찬의 밑에있을때 처음 만났습니다. 그러나 다음에 다시 만날것을 기약하고 헤어졌지요.그러다가 나중에 다시 만나게됩니다. 그때부터 유비의 밑에서 충성을 맹새하게돼었지요.그리고 그후에도 조자룡은 많은 업적을 세우고 패한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유비와 조조가 맞짱을 깟는데요 유비가 처와 자식을 전쟁도중에 잃어버리게됩니다. 그것을 알아차린 조자룡은 빨리 말타고 달려갔지요.그런데 이것을 본 장비가 조자룡이 항복을 하게되는줄 알고 쫓아가게 됩니다. 조자룡은 유비의 처를 만나서 아두공자를 받았을때 아두의 생사를 확인후 둘다 데려가려 하는데 처가 우물에 빠져 자살을 합니다. 조자룡은 거의 죽고싶은 심정으로 다시 유비에게로 돌아가려합니다. 그것을 본 조조가 창을 너무 잘쓰는 맹장이기에 자신의 밑으로 두고 싶어서 군사들에게 조자룡을 다굴까라고 시킵니다. 조자룡이 다리를 건널때 아까 쫓아오던 장비를 만나는데 장비가 그제서야 사태파악을하고 조조군을 물러가게 합니다.조자룡은 유비에게 상황을 설명하자 유비는 아두를 버리라고 합니다. 
조자룡"은 유비의 아들 유선을 적진에서 쳐들어가서 혼자서 구하고온위인입니다 '혼자서' 유비가 조조군에게 쫓기던중 급하게 가느라 잠시 쉬던곳에 유비의 본처와 후처 그리고 자식을 남겨두고 도망쳐온 사실이 한참 도망간후에 알게되었죠
그상황에서 조자룡이 자처해서 달려가 구해온 일이 유명한데요
조조와 측근들은 그런 조자룡의 싸우는 모습을 보고 뻑~갔다 하죠 감탄했데요~우물에 본처는 빠져죽고 후처와 자식만 살려돌아온 조자룡에게 유비는 눈물을 흘리며 자기자식을 땅바닥에 내쳦다는 일이 유명힙니다.
굉장히 용맹하고 지혜로우며 창을 잘썻다고 알려져있구요
유비가 죽어서까지도 유비의아들 유선을 죽을때까지 보필하다가 죽었습니다.
조자룡의 원래 이름은 조운으로 '자룡'이 바로 조운의 자입니다. 몇몇책에서는 조운대신 자룡이라 표기합니다.
조운은 상산 사람으로서 가상인물은 아닙니다. 유비를 섬기면서 유비가 죽은 후에도 촉나라를 위해서 많은 공을 세웠는데요 대표적으로 장판파싸움에서 유선을 구한게 가장 유명합니다. 무술솜씨도 어마어마했구요
아무튼 삼국지에서는 절대 빠질수 없는 캐릭터중 하나입니다. 삼국지를 읽어보시면 얼마나 대단한지 아실거에요. 촉의 장수론 대표적으로 유비 관우 장비 이 세명의 도원결의로 인해 널리 알려진거라 그 셋이 유명하긴 합니다.
허나 조자룡도 그들과 동급인 장수입니다. 삼국지 책을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조운은 나이 70살이 넘어서도 적장 5을 목베 그 위엄을 떨쳤습니다. 조자룡은조조군사100만군을뚫고아두(유선)을구해온장군입니다
오호대장군에도올랐고,오와의대전에서패하였을때패잔병을도와준인물입니다
제갈공명의북위공격때도큰부상을입고도큰공을세운인물입니다
공명이큰잔치를벌일때별이떨어지는걸보고슬픈소식을알아차립니다
그소식은조자룡의죽음이죠. 조운(趙雲) 자룡(AD ?-229) 무용, 충절을 갖춘 장수 조자룡 자가 자룡으로 상산군 진정현 사람이다. 본래 원소 관할에 있다가 그의 인품에 싫증을 느끼던 중 문추에게 쫓기던 공손찬을 위기에서 건져주고 그의 막하에 들어갔다. 
공손찬이 망한 뒤 오관참장하고 오는 관우와 유비, 장비를 함께 만나 그로부터 죽을 때까지 이들과 고락을 같이하였다. 당양파 싸움에서는 미부인이 임종에 맡긴 아두를 품에 안고 적 진중을 돌파하여 용맹을 떨쳤고, 유비가 서촉에 출병한 사이 손부인이 아두를 데리고 동오로 가는 뱃길을 따라가 이 때 역시 아두를 도로 찾아 돌아왔다. 한중전투에서 노장군 황충과 함께 선봉을 맡아 한중을 조조로부터 빼앗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는 주로 유비의 호위 대장을 맡아 중책을 어김없이 수행했다. 
유비가 죽고 유선이 즉위 후 제갈공명이 출사표를 던져 위나라 정벌길에 나섰을 때 이미 칠십이 넘은 나이였지만, 고집을 부려 출병하여 위의 선봉대장 한덕과 그의 네 아들과 모두 싸워 죽였다. 그리고 총대장 하후무까지 사로잡아 용맹이 쇠하지 않음을 보여줬다. 그는 일생 무장으로서 패배를 몰랐고 신하로서도 지성어린 충절을 다해 그의 죽음을 안 후주 유선은 지난날 두 번이나 그를 구해준 것을 생각하며 목놓아 울었다고 한다. 제갈량이 재차 위를 치기에 앞서 세상을 떠난 조운은 천수를 다한 후 성도의 금병산에 묻혔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여러 장수들 중에서 무용, 충절, 최후 등에서 조자룡 만큼 골고루 다 갖춘 장수는 거의 없다. 
조자룡의 장판교 전투 일화.
조운이 말하길 "난 당양 장판에서 조조의 83만 대군(물론 실제 병력은 10~20만추정)을 두려워 하지 않고 일기단창으로 싸웠다. 이제는 장수도 있고 군사도 있는데 무엇이 두려워 진채 문을 닫고 적에게 업수 보이겠느냐" 하며 궁노수들 참호에 배치 시키고 혼자서 진채 문앞에 창을 끼고 위군앞에 섰다. 
위군의 선봉 장수들이 이를 보고 주춤하였으나 조조는 장판교에서 장비와 같이 허장 성세를 쓰는 것이라 여겨 진군을 명하였고 조운은 궁노수에게 일제히 명을 내려 위군을 치는 매복계를 썼다.
조조가 조운의 매복계에 걸려 병력을 물리려하자 기마대로 후위를 공격하였다.
조운의 이런점으로 보아  상당한 군사적인 재능이 있었다고 봅니다.
또 관우나 위연 등이 자신의 군사적 재능을 너무 높게 봐서 때로는 제갈량이나 마량 등 군사나 모사의 명을 거슬러 실패를 맛본  반면 조운은 제갈량의 지시가 있으면 반드시 그대로 행하였기에 다른 맹장들과 같은 실수가 없었다고 봅니다.
자신의 능력보다 더 뛰어난 사람의 재능을 인정하고 수긍하는 자세도 지략있는 사람의 태도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장판파 싸움에서  100만 대군을 뚫고 나왔다는 조운의 무공에 대해 100만 대군이 아니라 실제로는 적게는 10만 많게는 20만 정도 라고 합니다. 실제로도 그 당시의 인구와 인원 동원력을 보면 10~20만 정도가 사실이라 합니다.
하지만 100만대군이건 10만 대군이건 간에 장수 혼자 그 포위를 뚫기는 힘들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만약 황건적 같이 훈련이 안된 농민 출신의 군대라도 몇만이 아니라 몇천이라도 힘들텐데 경험 많고 훈련이 가장 잘된 위의 군대의 포위를 뚫고 유선을 구한  것이라  더욱 높게 보이는 것입니다.
 조운의 무공이 다른 맹장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 하지 않다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죠.
(조운의 장판 전투는 정사에서나 연의에서나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조자룡은 창을 잘쓰는 맹장입니다.


2017년 11월 21일 화요일

조조 1,

조조(기원전 200∼154년)는 자가 맹덕()이며, 패국() 초( = 현 안휘성() 호현()) 사람이다. 잉촨[:]에서 태어났다. 주로 형명(:법가)의 학()을 익혀 관에 나아가 태상장고()에 임용되었고, 진()나라의 박사 복생()에게 사사하여 《상서()》를 배웠다. 그 무렵 한제국()은 밖으로는 흉노의 압박, 안으로는 제후의 세력증대가 큰 문제였다.
그는 흉노에 대한 정책으로서 북변방비를 위한 둔전책()에 대한 회유책으로서 그는 장안에서 참형되었다.
영천(, 지금의 하남성 우현) 출신으로 한나라 경제의 중요한 모사()였다. 그는 일찍이 지현(, 지금의 하남성 제원현 남쪽)에서 장회()를 스승으로 모시고 신불해와 상앙의 형명() 이론을 배웠다. 조조는 사람이 엄격하고 각박했다.
황건()의 난, 동탁()의 난 등의 토벌전에 참가하였고, 건안 13년에 스스로 승상이 되어 형주()를 공략하였다. 그러나 유비(), 손권()의 연합군에게 적벽() 대전에서 크게 패하였다.

나중에 위왕()이 되어 재임하다가, 66세로 낙양에서 타계하였다. 그의 문학 애호는 역대 정치가에게서도 볼 수 없었던 것으로,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시로 표현했고, 자신의 작품을 연회에서 연주하도록 하였다. 그는 청년 시기부터 실의와 격정의 세월을 살아 왔고, 전쟁을 통해 현실의 냉혹함을 누구보다 절실하게 경험했다.

그의 정치 이상은 바로 이러한 현실 체험에서 비롯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시 작품들 역시 현실과 이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의 「호리행()」은 당시 사회 현실을 적나라하게 반영하고 있으며, 「고한행()」 등은 전장의 병사들의 고통을 노래하고 있다.
중국 전한(前漢)의 정치가. 흉노에 대한 정책으로 북변방비를 위한 둔전책(屯田策), 그 재정적 뒷받침으로 곡물납입자에게 벼슬을 주는 매작령(賣爵令)을 주장하여 채용되었다. 제후에 대한 정책으로는 영지의 삭감이 경제(景帝)에 의하여 채용되었으나 그로 인해 오초7국(吳楚七國)의 난을 유발하였다.
한 문제 때 조정에 『상서()』를 연구하고 강론할 마땅한 사람이 없던 차에 제남()의 복생()이란 사람이 진 왕조 때 박사(, 고금의 역사적 사실과 서적을 관리하던 직책)를 지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복생은 서한 시대 금문 『상서』를 처음으로 전수한 사람으로 『상서』에 정통했으나 당시 나이가 벌써 90세가 넘어 조정에서 강론을 할 수 없었다. 이에 한 문제는 태상()에게 사람을 복생 쪽으로 보내 문하생이 되게 하여 『상서』를 배워오게 명령했다. 태상은 조조를 복생에게로 보냈다.

조조가 학업을 마치고 돌아오자 문제는 그를 태자에게 보내 가령()이 되어 태자를 보좌하게 했다.

조조는 태자 유계()의 총애를 얻으면서 '지혜 보따리'란 뜻의 '지낭()'으로 불렸다. 그는 말재주도 좋았다. 그가 올린 많은 치국책이 태자의 칭찬을 받았다. 그뒤 문제는 그를 조정의 논의와 자문에 응하는 중대부()에 임명했다.
신하을 이끌려면 '술수'에 능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른바 '술수()'란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말한다. 한 무제 때 박사와 재상 등을 지낸 공손홍()은 "생사를 좌우하는 힘, 막힌 것을 뚫는 방법, 가볍고 무거운 것을 다는 셈, 득실을 논하는 길 이런 것들을 통해 멀고 가깝고 진실과 거짓을 반드시 드러나게 하는 것을 술이라 한다"고 했다.

조조는 태자 유계의 선생을 맡는 동안 태자에게 크고 위대한 공업을 세울 수 있는 책략을 제시하면서 '태자가 알아야 할 술수에 관한 논의'라는 글을 썼다. 여기서 그는 군주는 '술수'에 정통하지 않으면 안 되고 어떻게 신하를 통제할 것인가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군주가 만세에 존귀한 공명을 널리 떨칠 수 있는 것은 술수를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주가 신하를 통제하고 그 무리를 다스릴 줄 알면 신하들은 두려워 굴복하며, 말을 듣고 일을 처리할 줄 알면 감히 속이거나 감추지 못한다. 또 만민에게 이익이 돌아가도록 안정시킬 줄 알면 천하가 복종하며, 충효로 위를 섬길 줄 알면 신하의 행동이 제대로 갖추어진다." 신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이 네 가지가 태자께서 하루 빨리 아셔야 할 것들입니다.
일부 조정의 신하들은 황태자가 국가를 다스리는 방법을 반드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냐고 했지만 조조는 강력하게 반박하며, 이전의 군주들이 정권을 유지 못하고 살해된 원인이 '술수'를 몰랐던 데 있고, 지금 태자가 책은 아주 많이 읽었지만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몰라 그저 책만 외운다면 헛수고라고 했다. 그러면서 문제에게 지금 가장 절실하고 활용할 수 있는 성인의 술수를 태자가 배우도록 하고 태자가 군주 앞에서 자신의 견해를 밝힐 수 있도록 해달라고 건의했다.

문제는 조조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태자의 스승으로서 조조가 미친 영향은 경제가 즉위한 다음 더욱 크게 작용했다. 즉 역사상 유명한 '문제와 경제의 전성기'라는 '문경지치'는 조조가 제기한 나라를 다스리는 방략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황제의 신임으로 9경을 압도하고, 묘책으로 날아드는 화살을 피하다
기원전 157년 한 경제 유계가 황제 자리에 올랐다. 경제는 바로 조조를 내사(, 수도 장안의 행정장관)에 임명했다. 경제는 늘 조조와 함께 국사를 의논했고, 조조의 건의는 대부분 받아들여졌다. 조조에 대한 경제의 신임과 총애는 9경(진·한 시대 중앙 9개 행정관직에 대한 총칭)에 대한 신임을 다 합쳐도 따르지 못할 정도였다. 승상 신도가()는 자신의 의견이 늘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또 조조가 밉기도 했지만 그를 박해할 마땅한 구실을 찾지 못했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당시, 내사관부 내에 있던 태상묘(, 고조 유방의 아버지 태상황의 사당)의 담 사이의 빈 터에 문이 동쪽으로 나 있어서 출입하기가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이에 조조는 자기 마음대로 남쪽으로 두 개의 문을 내서 출입했는데, 문이 공교롭게도 태상묘의 바깥 담 쪽으로 나게 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승상 신도가는 옳다 싶었다. 이것이야말로 조조를 제거할 구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황제의 조상 사당을 두르고 있는 담을 뚫어 문을 낸 죄상을 적어 황상에게 조조를 죽이라고 청할 생각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조의 문객이 조조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조조는 큰일이다 싶어 그날 밤 황제에게 단독 면담을 요청하여 이 사실을 자수하면서 황상에게 자초지종을 낱낱이 다 이야기했다.

예상대로 신도가는 이 일을 황제에게 보고하면서 조조를 정위(, 진이 설치한 9경의 하나로 중앙의 최고법관)에게 넘겨 처형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지난 밤, 조조에게 자초지종을 들어 상황을 다 파악하고 있던 경제는 승상 신도가에게 "조조는 종묘의 담을 뚫고 문을 낸 것이 아니라 종묘 빈터 바깥을 두른 낮은 담에 문을 냈을 뿐이고 그나마도 내가 허락한 것이니 법에 저촉되는 바가 없다"고 말했다. 난처해진 신도가는 사죄하며 자리를 물러났다.

그는 화가 나서 장사(, 관직명으로 서한 시대의 승상·태위·어사대부가 모두 소속관의 하나로 장사를 두었다. 직위가 아주 중요하여 지금의 행정부 비서실장에 해당한다)에게 "먼저 그 놈을 죽인 다음 보고를 했어야 하는데, 보고를 먼저 하는 바람에 그 놈이 한 발 앞서 선수를 쳐서 나까지 팔아먹고 말았다"라며 씩씩거렸다. 그러고는 피를 토하며 병석에 눕더니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조조의 위세는 더욱 높아졌다.
자기의 장점으로 적의 단점을 공격하다
일찍이 흉노가 한의 변경을 습격한 사건이 기원전 169년(문제 11년)에 있었다. 이에 조조는 「군사와 관련한 상소」를 문제에게 올려 흉노에 대항하는 전략과 책략을 제의했다. 그는 이 글에서 전쟁에서 병사의 사기를 격려하고 좋은 장수를 선발하는 일의 중요성을 제기한 다음, 전쟁에서의 지형조건, 병사의 소질, 무기를 비롯한 장비 등의 관계를 분석했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백성들의 사기는 백 배 높아지지만, 패배하면 돌이킬 수 없다. 흉노는 오랫동안 여러 차례 변경을 침략했고, 롱서(西) 일대 백성들은 많은 상처를 입고 싸워 이겨야겠다는 마음이 없어졌다.

이는 롱서 백성들이 겁이 많고 나약해서가 아니라 장수들이 군대를 통솔하는 방법이 졸렬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병법에는 "필승 장수는 있어도, 필승 백성은 없다"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변방을 안정시키고 공명을 세우는 것은 좋은 장수에 있으니 좋은 장수를 고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조조의 판단이었다.

그는 용병과 작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조건은 다음 세 가지라고 보았다. 첫째는 (유리한) 지형을 확보하는 것이고, 둘째는 병사들의 소질을 훈련시키는 것이며, 셋째는 좋은 무기를 갖추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조조는 이렇게 지적한다. 무기와 장비가 좋지 않으면 병사들을 사지로 내모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병사들을 엄격하게 훈련시키지 않으면 작전이 불가능하며 장수도 죽으러 가는 것이다. 장수가 병법의 원리와 방법을 모르면 군주를 적의 손에 넘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군주가 장수를 제대로 고르지 못하면 국가를 멸망의 길로 이끌게 된다. 이 네 가지는 국방건설에 지극히 중요한 문제다.

조조는 또 한나라 군대와 흉노 군대의 장점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여 흉노의 장점은 세 가지가 있고 한나라의 장점은 다섯 가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자신의 장점으로 적의 단점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병사는 흉기요, 전쟁은 위험스러운 일이다"라고 말했다. 병법을 모르면 크더라도 작아질 수밖에 없고, 강하더라도 약할 수밖에 없다. 전쟁이란 병사들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것이므로 만에 하나 패하면 후회해도 소용없다. 따라서 제왕의 용병술은 만전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조조는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그는 우선 소수민족과 공동전선을 구축하여 흉노를 공격하자고 했다. 좋은 무기와 장비를 소수민족에게 나누어주고, 그들의 습관에 익숙하고 그들과 잘 화합할 수 있는 좋은 장수를 보내 그들을 통솔하게 함으로써 그들에게 험준한 요지를 지키게 한다. 평원의 요충지는 한나라 군대가 지킨다. 이 두 가지를 잘 배합하여 각자의 장점을 발휘하게 한다. 이것이야말로 승리를 얻는 만반의 대책이다. 문제는 조조의 제안을 칭찬하면서 그에게 상을 내리라고 명령했다.
중앙통치를 다지다
기원전 155년(경제 2년) 조조는 어사대부가 되어 조정의 중추인 승상·태위와 함께 이른바 삼공()의 반열에 올라섰다. 자리는 높고 권력은 무거워졌다. 그는 경제에게 지방 제후들의 권력을 축소시키는 '삭번()'을 건의했다. 이것이 바로 '삭번책'이다. 서한 왕조에 대한 지방세력, 즉 번왕()들의 위협을 제거하자는 목적이었다. 그는 문제 때도 제후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법 개정을 여러 차례 건의한 바 있다.

조조는 동성, 즉 유씨 성을 가진 제후들이 전국 토지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에게 죄가 있으면 군() 하나 정도만 봉지로 남겨놓고 나머지는 모두 조정이 회수하여 봉국을 취소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경제는 조조의 건의를 받아들여 주요 제후들의 봉지를 삭탈하는 한편 30여 조항의 법령을 개정했다.

한편 이 소식을 전해들은 조조의 아버지는 영천에서 아들에게 와서 "황상께서 막 즉위하셨고 너는 어사대부가 되어 조정을 위해 일해야 하거늘 제후들의 이익을 침범하고 그들의 직권을 삭탈하여 종친들끼리 골육상잔을 벌이게 만들었으니 이제 저들은 모두 너를 원망하고 욕할 것이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했느냐?"라고 물었다. 이에 조조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천자의 지엄한 권위는 드러나지 못하고 나라도 안정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아버지는 깊게 한숨을 쉬면서 "유씨 집안(한 왕조)이 편안해지니 우리 조씨 집안이 위태로워지는구나!"라고 말한 다음 독약을 마시고 자살했다. 조조의 아버지는 죽기에 앞서 "내가 두 눈을 뜬 채 네가 화를 당하는 꼴을 차마 볼 수 없구나!"라고 말했다.

아버지의 예상대로 삭번은 제후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쳤다. 그들은 오왕과 초왕을 중심으로 세력을 모아 '오·초 7국의 난'을 일으켰다. 정적의 하나였던 원앙() 등은 경제 앞에서 이 사태의 책임이 모두 조조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조조를 죽이고 제후의 땅을 되돌려주어야만 피 흘리지 않고 제후의 난을 다스릴 수 있다고 했다. 이어 개혁에 반대하는 대신들까지 들고일어나 조조를 탄핵했다. 결국 조조는 조례복을 입고 입궁하여 동시()에서 참수되었다.
조조가 죽은 뒤 등공()이 교위()가 되어 오·초의 난을 공격했다. 등공은 돌아온 뒤 군대 상황을 문서로 보고하고 황제를 만났다. 황제는 등공에게 "오·초가 조조가 벌써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군대를 거두어들였는가?"라고 물었다. 등공은 "오가 반란을 일으킨 지 벌써 수십 년이 되었습니다. 저들이 난을 일으켰을 때 구실은 조조를 죽이라는 것이었지만 본심은 결코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신은 천하의 선비들이 조조의 죽음 때문에 입을 다물고 바른 소리를 하지 못하게 된 것이 아닌가 걱정되옵니다"라고 대답했다. "어째서인가?" 황제가 물었다. 등공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조조는 제후들의 세력이 갈수록 강해져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다는 상황을 바로 보고 황상께 삭번을 통해 중앙통치를 강화하라고 건의한 것입니다. 이는 만대에 이익이 되는 큰 모략이었습니다. 계획이 막 실행되려는데 죽음을 당함으로써 안으로는 조정 충신들의 입을 막고 밖으로는 제후들이 보복에 나섰으니, 신은 폐하께서 잘못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경제는 조조를 무고하게 죽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나 때는 벌써 늦었다. 경제는 제후들의 난을 평정한 뒤 제후들이 더 이상 국가를 다스리지 못하게 했다. 이로써 제후들은 정치적 권력을 잃고 세력이 크게 약화되고 말았다. 상대적으로 중앙정권은 크게 강화되었다. 조조의 '삭번 모략'은 역사발전의 방향에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조조"
그에 대한 황제의 총애는 9경을 능가했고, 그의 손을 거쳐 개정되지 않은 법령이 없을 정도였다.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그는 공신들과 제후들의 온갖 저항과 압력을 무릅쓰고 이들의 세력을 삭감하는 '삭번()'을 건의했다. 제후들과 공신들은 모두 그를 증오했다. 그의 아버지는 이런 아들을 걱정하며 "(아들 때문에) 유씨 황실은 편해지겠지만 우리 조씨 집안은 위태로워졌다. 화가 우리에게 생길 끔직한 일을 차마 볼 수 없다"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아버지가 죽자 오초 7국이 그를 죽인다는 명분을 앞장세워 반란을 일으켰다. 황제는 그에게 조복()을 입혀 동시()에서 목을 베었다. 난은 진압되었고 제국은 안정을 되찾았다.
서한 초기 중앙정부와 지방세력 사이에 끊이지 않는 알력과 모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이른바 삭번을 건의한 그는 조조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역사경험을 종합하여 중앙집권의 논리적 타당성을 제기하고, 이를 실천에 옮긴 논객이었다. 대세를 파악하고 자신의 희생을 감수한 정치가였다. 시대가 자신에게 맡긴 역할이 무엇인지를 누구보다 잘 알았던 지사()이기도 했다. 또 새로운 시대에 참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간파했던 모략가였다.
조조는 자신에게 닥칠 엄청난 반동의 물결과 그 결말까지 예감했던 인물이다. 그의 방법은 과격하고 비타협적이었다는 약점을 갖고 있었지만 당시 대세를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의 '삭번' 건의는 역사발전의 방향과 일치했다는 평가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