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운趙雲.
삼국 시대 촉(蜀)나라 상산(常山) 진정(眞定) 사람. 자룡은 자고, 이름은 운(雲)이다. 처음에는 공손찬(公孫瓚) 수하에 있었는데, 공손찬이 원소(袁紹)에게 망한 뒤 유비(劉備)에게 귀순했다. 유비의 경호원으로 여러 번 유비를 위기에서 구해 냈다. 조조(曹操)가 형주(荊州)를 취했을 때 유비가 패주하자 감부인(甘夫人)과 아두(阿頭, 劉禪)를 구하기 위해 조조의 대군을 혼자 휘젓고 다니며 호위해 구출했다. “조자룡 헌 칼 쓰듯 한다.”는 속담도 이때 생겨났다. 아문장군(牙門將軍)으로 옮겼다.
재평가 받는 아름다운 영웅"
조자룡(趙子龍, ?~229)은 이름이 조운으로 삼국시대 촉나라의 무장입니다. 하북 지역 상산(常山) 출신으로 8척(약184cm) 장신에 늠름한 풍채를 지닌 영웅으로 관우, 장비, 마초, 황충과 더불어 ‘오호대장군(五虎大將軍)’으로 불립니다. 역사서 삼국지를 편찬한 진수는 ‘조운전’에서 용맹함이 황충 같다고 봤고, 소설가 나관중은 삼국지연의에서 유비가 조자룡을 의형제 관우나 장비와 동등하게 대우했다고 표현했습니다. 유비는 “만일 도원결의 전에 조자룡을 만났다면 우리는 4형제가 됐을 것” 이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조자룡은 유비 삼형제와 제갈량 등 당대 영웅에 묻혀 큰 주목을 받지 못한 부분도 있습니다. 최근 무장으로서 조자룡의 매력과 역할이 재조명되면서, 그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와 장편 드라마가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유비가 유장(劉璋)을 공격했을 때 제갈량(諸葛亮)을 따라 장강(長江)을 따라 서쪽으로 올라가 군현을 평정했다. 촉 일대가 평정된 뒤 익군장군(翊軍將軍)이 되었다. 유비가 오(吳)나라를 정벌할 때 간언을 올렸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관우(關羽)는 오만하고 장비(張飛)는 포악해서 둘 다 목 없는 귀신이 되었지만, 그는 원만한 성격으로 끝까지 용맹을 떨치고 천수를 다하고 죽었다. 유선이 즉위했을 때 중호군(中護軍)과 정남장군(征南將軍)을 지내고, 영창정후(永昌亭侯)에 봉해졌다. 시호는 순평(順平)이다. 중국사를 통해 창술(槍術)에 뛰어난 몇 안 되는 인물로 꼽힌다.
유비가 유장(劉璋)을 공격했을 때 제갈량(諸葛亮)을 따라 장강(長江)을 따라 서쪽으로 올라가 군현을 평정했다. 촉 일대가 평정된 뒤 익군장군(翊軍將軍)이 되었다. 유비가 오(吳)나라를 정벌할 때 간언을 올렸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관우(關羽)는 오만하고 장비(張飛)는 포악해서 둘 다 목 없는 귀신이 되었지만, 그는 원만한 성격으로 끝까지 용맹을 떨치고 천수를 다하고 죽었다. 유선이 즉위했을 때 중호군(中護軍)과 정남장군(征南將軍)을 지내고, 영창정후(永昌亭侯)에 봉해졌다. 시호는 순평(順平)이다. 중국사를 통해 창술(槍術)에 뛰어난 몇 안 되는 인물로 꼽힌다.
상산(常山) 진정(真定) 사람으로 자는 자룡(子龍)이다. 삼국(三國)시대 촉한(蜀漢)의 무장(武將)으로 본래 백마장군(白馬將軍) 공손찬(公孫瓚)의 휘하에서 유비(劉備)를 만나 그를 평생 동안 섬겼다. 유비를 따라 30여 년 동안에 박망파(博望坡)전투, 장판파(長阪坡)전투, 강남평정(江南平定)전투 등에 참여했고, 단독으로 천(川), 한수(漢水), 기곡(箕穀) 등지에서 전투를 벌여서 큰 공을 세웠으며 ‘호위장군(虎威將軍)’으로 일컬어졌다. 또 관우(關羽), 장비(張飛), 마초(馬超), 황충(黃忠)과 더불어 ‘오호대장군(五虎大將軍)’으로 일컬어진다.
벼슬은 편장군(偏將軍), 계양태수(桂陽太守), 우군장군(翊軍將軍), 진군장군(鎮軍將軍) 등을 역임하고, 영창정후(永昌亭侯)에 봉해졌다. 사후에 순평후(順平侯)로 추봉되었다.
벼슬은 편장군(偏將軍), 계양태수(桂陽太守), 우군장군(翊軍將軍), 진군장군(鎮軍將軍) 등을 역임하고, 영창정후(永昌亭侯)에 봉해졌다. 사후에 순평후(順平侯)로 추봉되었다.
조자룡은 유비와 함께하면서 무장으로서 최고의 전성기를 맞습니다. 처음에는 하북 지역 최대 세력가 원소 밑에서 일했지만, 원소가 실력보다는 출신과 배경을 보고 인재를 등용했기 때문에 쓰임을 받지 못했습니다. 공손찬도 자기중심적 성격으로 자신보다 뛰어난 인재를 인정하지 않아 그의 곁에 있을 수 없었습니다. 반면, 유비는 세력이 약했지만 의리가 강해 조자룡이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줍니다. 조자룡은 유비의 경호원으로서 여러 번의 위기에서 유비를 구해냈고, 조조가 형주성을 공격할 땐 유비가 패주하자 감부인(甘夫人)과 유선(劉禪)을 구하기 위해 조조의 10만 대군 사이를 혼자 휘젓고 다니며 구출해 옵니다. “조자룡 헌 칼 쓰듯 한다.”는 속담도 이때 생겨났습니다. 유비는 조자룡이 아들 유선을 구출해 오자 아들을 내던지면서 "하마터면 훌륭하고 용맹한 장수를 잃을 뻔했다." 고 말해 감동을 안겨줍니다. 그만큼 조자룡을 높이 평가하며 관우, 장비와 똑같이 의형제로 대접합니다. 역사서 삼국지에 ‘유비는 조운과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잤다.’고 기록한 것을 보면 절대적인 신임을 얻은 것으로 보입니다.
유비와의 만남을 통해 세상에 인정받다"
조자룡은 유비와 함께하면서 무장으로서 최고의 전성기를 맞습니다. 처음에는 하북 지역 최대 세력가 원소 밑에서 일했지만, 원소가 실력보다는 출신과 배경을 보고 인재를 등용했기 때문에 쓰임을 받지 못했습니다. 공손찬도 자기중심적 성격으로 자신보다 뛰어난 인재를 인정하지 않아 그의 곁에 있을 수 없었습니다. 반면, 유비는 세력이 약했지만 의리가 강해 조자룡이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줍니다. 조자룡은 유비의 경호원으로서 여러 번의 위기에서 유비를 구해냈고, 조조가 형주성을 공격할 땐 유비가 패주하자 감부인(甘夫人)과 유선(劉禪)을 구하기 위해 조조의 10만 대군 사이를 혼자 휘젓고 다니며 구출해 옵니다.
“조자룡 헌 칼 쓰듯 한다.”는 속담도 이때 생겨났습니다. 유비는 조자룡이 아들 유선을 구출해 오자 아들을 내던지면서 "하마터면 훌륭하고 용맹한 장수를 잃을 뻔했다." 고 말해 감동을 안겨줍니다. 그만큼 조자룡을 높이 평가하며 관우, 장비와 똑같이 의형제로 대접합니다. 역사서 삼국지에 ‘유비는 조운과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잤다.’고 기록한 것을 보면 절대적인 신임을 얻은 것으로 보입니다. 조자룡은 삼국시대 명장으로 중국 후한 말기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이 조조에 맞서 싸웠던 적벽대전에서 유비의 호위무사로서 그 임무를 다했고 장판파 전투에서는 위기에 처한 유비의 아들을 혈혈단신으로 조조의 대군을 뚫고 구출하기까지 했다. “조자룡 헌 칼 쓰듯 한다”는 속담도 이때 생겨났다고 한다.
만능무장이자 전략가"
조자룡은 삼국지의 수많은 무장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무예는 관우와 장비에 뒤지지 않아 전쟁터에서 패한 경우가 거의 없었습니다. 반면 조자룡에게 목숨을 잃은 장수는 주찬, 장무, 형도영, 여광, 진응, 한기, 한덕, 한경, 포룡, 한영, 묘용렬 등 부지기수입니다. 삼국지연의에서 단기필마로 가장 많은 적장을 벤 무장 중의 무장입니다. 219년 한중전투에서는 지략과 용맹을 발휘해 소수의 병력만으로 조조의 대군을 격퇴합니다. 조조군의 군량을 빼앗기 위해 출전한 황충이 포위를 당하자, 조자룡은 조조의 진영으로 들어가 황충을 구해냅니다. 또 부하 장수 장저(張著)가 상처를 입고 뒤에 처지자 다시 돌아가 구출합니다. 장익(張翼)이 지키던 면양(沔陽)으로 들어가서는 성문을 활짝 열어놓고 조조군을 맞는 대담함도 보여줍니다. 이를 본 유비는 “자룡은 온몸이 담 덩어리로구나(子龍一身都是膽也)”라고 감탄합니다. 이때부터 ‘일신시담(一身是膽)’이라는 사자성어가 시작됩니다.
관우의 복수전인 이릉대전 때의 일입니다. 유비의 사사로운 복수전인 이 전투에 대해 제갈량도 그 불합리함을 제대로 말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조자룡은 주적인 조조를 꺾으면 오나라 손권은 스스로 무릎을 꿇을 것이라며 만류하는 직언을 합니다. 유비는 이 말을 듣지 않고 조자룡을 강주(江州, 지금의 충칭(重慶)시)에 남겨두고 전쟁을 벌였다가 패하고 맙니다.
관우의 복수전인 이릉대전 때의 일입니다. 유비의 사사로운 복수전인 이 전투에 대해 제갈량도 그 불합리함을 제대로 말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조자룡은 주적인 조조를 꺾으면 오나라 손권은 스스로 무릎을 꿇을 것이라며 만류하는 직언을 합니다. 유비는 이 말을 듣지 않고 조자룡을 강주(江州, 지금의 충칭(重慶)시)에 남겨두고 전쟁을 벌였다가 패하고 맙니다. 순수한 무인으로 기억되다" 조자룡은 죽는 날까지 그 올곧음을 잊지 않았습니다. 유비가 죽고 228년 제갈량이 1차 북벌을 위해 위나라로 출병할 때 조자룡은 기곡전투에서 패배하자 책임을 지고 스스로 계급을 강등합니다. 사리가 분명해 패배의 책임을 인정하는 데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또 제갈량이 패배 후 남은 군수품인 비단과 무명을 장병들에게 지급하려 하자 조운은 군수 물자는 마땅히 월동(越冬)에 대비해 써야 한다며 반대합니다. 제갈량은 유비가 생전에 조운을 군자(君子)로 여긴 것을 떠올리며 그를 더욱 존경합니다. 조자룡은 기곡전투를 마지막으로 그 이듬해 세상을 떠납니다. 용맹, 겸양, 신뢰, 공정을 두루 갖춘 조자룡은 평생 전쟁터를 누빈 순수한 무인이었습니다. 하지만 부드럽다" 제갈량은 사실 뛰어난 책사이기 보다 , 위대한 정치가 라 볼 수 있는데역사상 모든 나라가 망할 때는 "내부의 적" 바로 내분과 관료 와 환관들의 부패 에서 시작됩니다. 한나라가 환관들 과 외척세력때문에 패망하였고.
제갈량은 이러한 역사적 교훈을 깊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과 황제에게 오직 충 과 명 을 잘 받는 내부를 관장할 청렴한 사람이 필요했으며 그게 바로 조자룡 이였습니다. 조자룡은 내부의 일을 주로 담당하였기 때문에 , 언제나 부와 재물을 좋아하는 환관들의 적이 되었고 그가 주장하는 것 역시 환관들의 방해로 묻쳐버리기 일 수 였을 것 입니다. 조자룡이 조조의 대군을 , 계책과 용맹으로 격퇴하자 다음날 유비가 친히 와서 그날의 전공을 듣고 " 자룡은 온 몸이 담력으로 이우어 졌구나" 라 칭송을 합니다.장졸들은 조자룡을 "호위장군" 이라 칭합니다.(호랑이 용맹을 가진 장군 이란뜻)정작 관직은 호위장군 이 아닙니다. 당양에서 주인을 구하고 , 오로 끌려가는 주인을 구하고 , 두번이나 단기필창 으로 주인을 구한 역사상 유래없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유선이 조운의 죽음을 듣자. 자신을 두번이나 구해준 은인이 죽었다며 식음전패하고 울었다고 합니다. 제갈량은 한팔을 잃은것 같다며 목 놓아 울었고. 유선은 촉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웅중 하나가 죽었고 , 강유에게 명하여 , 그의 업적에 맞는 시호를 내리라 명합니다 . 강유는 "순평후 " 라는 시호를 작성하여 추대했습니다.
그는 일생 무장으로서 패배를 몰랐고 신하로서도 지성어린 충절을 다해 그의 죽음을 안 후주 유선은 지난날 두 번이나 그를 구해준 것을 생각하며 목놓아 울었다고 한다. 제갈량이 재차 위를 치기에 앞서 세상을 떠난 조운은 천수를 다한 후 성도의 금병산에 묻혔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여러 장수들 중에서 무용, 충절, 최후 등에서 조자룡 만큼 골고루 다 갖춘 장수는 거의 없다. 또한 호위장군 이라는 말은 , 한중쟁탈전 에서 처음 등장하는 것인데 참고로 촉나라 장군들 중 "후"의 시호를 받은 자는 관우, 장비 ,마초 ,황충 그리고 조운 입니다. 후에 나관중이 오호대장군 이란 가상관직을 동원할때 역시 , 이같은 시호가 한 몫 단단히 했을 것 입니다. 삼국지" 연의 든 , 정사든 허구 와 과장 을 찾기전에 조자룡은 2번 주인을 구했고 관우가 자만함 과 오만함 으로 죽고 , 마초가 죽기전에도 오만하고 자신의 주군에게도 방자 하였고 끝내 병으로 요절하였으며 장비가 부하관리의 미숙함으로 죽고 , 황충이 자존심 과 오기로 인하여 죽고 위연(역시 명장입니다. 반역이 아니라) 이 , 자신의 용맹만을 믿고 의기양양 하다 , 내부의 아군에게 죽고 조자룡은 70넘은 나이에도 전장에서 활약하다 . 성도에서 지병으로 숨을 거둡니다. 삼국지 모든 영웅호걸 중 , 조운과 같이 활약을 하고 , 어진 성품으로 결말이 좋은 장수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천년의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중국의 대다수 사람들은 "관우" 를 황제로 추대하고 섬기며 하나의 무속신앙으로 자리잡았고 "장비" 를 싸움의 신으로 섬기고 , "마초"를 시대의 풍운아 로 그의 야망과 인생을 이야기 하며
"황충" 을 중국역사상 최고의 궁술 달인이자 , 노익장의 대명사 로 이야기하며
"조운" 을 중국역사상 가장 "창술" 에 뛰어나고 , 충 의 대명사로 이야기 합니다.
조자룡은 유비가 공손찬의 밑에있을때 처음 만났습니다. 그러나 다음에 다시 만날것을 기약하고 헤어졌지요.그러다가 나중에 다시 만나게됩니다. 그때부터 유비의 밑에서 충성을 맹새하게돼었지요.그리고 그후에도 조자룡은 많은 업적을 세우고 패한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유비와 조조가 맞짱을 깟는데요 유비가 처와 자식을 전쟁도중에 잃어버리게됩니다. 그것을 알아차린 조자룡은 빨리 말타고 달려갔지요.그런데 이것을 본 장비가 조자룡이 항복을 하게되는줄 알고 쫓아가게 됩니다. 조자룡은 유비의 처를 만나서 아두공자를 받았을때 아두의 생사를 확인후 둘다 데려가려 하는데 처가 우물에 빠져 자살을 합니다. 조자룡은 거의 죽고싶은 심정으로 다시 유비에게로 돌아가려합니다. 그것을 본 조조가 창을 너무 잘쓰는 맹장이기에 자신의 밑으로 두고 싶어서 군사들에게 조자룡을 다굴까라고 시킵니다. 조자룡이 다리를 건널때 아까 쫓아오던 장비를 만나는데 장비가 그제서야 사태파악을하고 조조군을 물러가게 합니다.조자룡은 유비에게 상황을 설명하자 유비는 아두를 버리라고 합니다.
조자룡"은 유비의 아들 유선을 적진에서 쳐들어가서 혼자서 구하고온위인입니다 '혼자서' 유비가 조조군에게 쫓기던중 급하게 가느라 잠시 쉬던곳에 유비의 본처와 후처 그리고 자식을 남겨두고 도망쳐온 사실이 한참 도망간후에 알게되었죠
그상황에서 조자룡이 자처해서 달려가 구해온 일이 유명한데요
조조와 측근들은 그런 조자룡의 싸우는 모습을 보고 뻑~갔다 하죠 감탄했데요~우물에 본처는 빠져죽고 후처와 자식만 살려돌아온 조자룡에게 유비는 눈물을 흘리며 자기자식을 땅바닥에 내쳦다는 일이 유명힙니다.
굉장히 용맹하고 지혜로우며 창을 잘썻다고 알려져있구요
유비가 죽어서까지도 유비의아들 유선을 죽을때까지 보필하다가 죽었습니다.
조자룡의 원래 이름은 조운으로 '자룡'이 바로 조운의 자입니다. 몇몇책에서는 조운대신 자룡이라 표기합니다.
조운은 상산 사람으로서 가상인물은 아닙니다. 유비를 섬기면서 유비가 죽은 후에도 촉나라를 위해서 많은 공을 세웠는데요 대표적으로 장판파싸움에서 유선을 구한게 가장 유명합니다. 무술솜씨도 어마어마했구요
아무튼 삼국지에서는 절대 빠질수 없는 캐릭터중 하나입니다. 삼국지를 읽어보시면 얼마나 대단한지 아실거에요. 촉의 장수론 대표적으로 유비 관우 장비 이 세명의 도원결의로 인해 널리 알려진거라 그 셋이 유명하긴 합니다.
허나 조자룡도 그들과 동급인 장수입니다. 삼국지 책을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조운은 나이 70살이 넘어서도 적장 5을 목베 그 위엄을 떨쳤습니다. 조자룡은조조군사100만군을뚫고아두(유선)을구해온장군입니다
오호대장군에도올랐고,오와의대전에서패하였을때패잔병을도와준인물입니다
제갈공명의북위공격때도큰부상을입고도큰공을세운인물입니다
공명이큰잔치를벌일때별이떨어지는걸보고슬픈소식을알아차립니다
그소식은조자룡의죽음이죠. 조운(趙雲) 자룡(AD ?-229) 무용, 충절을 갖춘 장수 조자룡 자가 자룡으로 상산군 진정현 사람이다. 본래 원소 관할에 있다가 그의 인품에 싫증을 느끼던 중 문추에게 쫓기던 공손찬을 위기에서 건져주고 그의 막하에 들어갔다.
공손찬이 망한 뒤 오관참장하고 오는 관우와 유비, 장비를 함께 만나 그로부터 죽을 때까지 이들과 고락을 같이하였다. 당양파 싸움에서는 미부인이 임종에 맡긴 아두를 품에 안고 적 진중을 돌파하여 용맹을 떨쳤고, 유비가 서촉에 출병한 사이 손부인이 아두를 데리고 동오로 가는 뱃길을 따라가 이 때 역시 아두를 도로 찾아 돌아왔다. 한중전투에서 노장군 황충과 함께 선봉을 맡아 한중을 조조로부터 빼앗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는 주로 유비의 호위 대장을 맡아 중책을 어김없이 수행했다.
유비가 죽고 유선이 즉위 후 제갈공명이 출사표를 던져 위나라 정벌길에 나섰을 때 이미 칠십이 넘은 나이였지만, 고집을 부려 출병하여 위의 선봉대장 한덕과 그의 네 아들과 모두 싸워 죽였다. 그리고 총대장 하후무까지 사로잡아 용맹이 쇠하지 않음을 보여줬다. 그는 일생 무장으로서 패배를 몰랐고 신하로서도 지성어린 충절을 다해 그의 죽음을 안 후주 유선은 지난날 두 번이나 그를 구해준 것을 생각하며 목놓아 울었다고 한다. 제갈량이 재차 위를 치기에 앞서 세상을 떠난 조운은 천수를 다한 후 성도의 금병산에 묻혔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여러 장수들 중에서 무용, 충절, 최후 등에서 조자룡 만큼 골고루 다 갖춘 장수는 거의 없다.
유비가 죽고 유선이 즉위 후 제갈공명이 출사표를 던져 위나라 정벌길에 나섰을 때 이미 칠십이 넘은 나이였지만, 고집을 부려 출병하여 위의 선봉대장 한덕과 그의 네 아들과 모두 싸워 죽였다. 그리고 총대장 하후무까지 사로잡아 용맹이 쇠하지 않음을 보여줬다. 그는 일생 무장으로서 패배를 몰랐고 신하로서도 지성어린 충절을 다해 그의 죽음을 안 후주 유선은 지난날 두 번이나 그를 구해준 것을 생각하며 목놓아 울었다고 한다. 제갈량이 재차 위를 치기에 앞서 세상을 떠난 조운은 천수를 다한 후 성도의 금병산에 묻혔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여러 장수들 중에서 무용, 충절, 최후 등에서 조자룡 만큼 골고루 다 갖춘 장수는 거의 없다.
조자룡의 장판교 전투 일화.
조운이 말하길 "난 당양 장판에서 조조의 83만 대군(물론 실제 병력은 10~20만추정)을 두려워 하지 않고 일기단창으로 싸웠다. 이제는 장수도 있고 군사도 있는데 무엇이 두려워 진채 문을 닫고 적에게 업수 보이겠느냐" 하며 궁노수들 참호에 배치 시키고 혼자서 진채 문앞에 창을 끼고 위군앞에 섰다.
위군의 선봉 장수들이 이를 보고 주춤하였으나 조조는 장판교에서 장비와 같이 허장 성세를 쓰는 것이라 여겨 진군을 명하였고 조운은 궁노수에게 일제히 명을 내려 위군을 치는 매복계를 썼다.
조조가 조운의 매복계에 걸려 병력을 물리려하자 기마대로 후위를 공격하였다.
조운의 이런점으로 보아 상당한 군사적인 재능이 있었다고 봅니다.
또 관우나 위연 등이 자신의 군사적 재능을 너무 높게 봐서 때로는 제갈량이나 마량 등 군사나 모사의 명을 거슬러 실패를 맛본 반면 조운은 제갈량의 지시가 있으면 반드시 그대로 행하였기에 다른 맹장들과 같은 실수가 없었다고 봅니다.
자신의 능력보다 더 뛰어난 사람의 재능을 인정하고 수긍하는 자세도 지략있는 사람의 태도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장판파 싸움에서 100만 대군을 뚫고 나왔다는 조운의 무공에 대해 100만 대군이 아니라 실제로는 적게는 10만 많게는 20만 정도 라고 합니다. 실제로도 그 당시의 인구와 인원 동원력을 보면 10~20만 정도가 사실이라 합니다.
하지만 100만대군이건 10만 대군이건 간에 장수 혼자 그 포위를 뚫기는 힘들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만약 황건적 같이 훈련이 안된 농민 출신의 군대라도 몇만이 아니라 몇천이라도 힘들텐데 경험 많고 훈련이 가장 잘된 위의 군대의 포위를 뚫고 유선을 구한 것이라 더욱 높게 보이는 것입니다.
조운의 무공이 다른 맹장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 하지 않다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죠.
(조운의 장판 전투는 정사에서나 연의에서나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조자룡은 창을 잘쓰는 맹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