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14일 목요일

페루.

페루"
정식 국가 명칭은 페루 공화국(República del Perú)이다. 면적은 1,285,216㎢로 한반도의 약 6배이다. 인구는 2012년 기준으로 3013만 명이다. 수도는 리마(Lima)이며, 리마 인구는 약 930만 명이다. 페루의 주요 도시는 남부 고산도시 아레키파(Arequipa, 87만), 북부 해안도시 투루히요(Trujillo, 63만), 정글 지역의 이키토스(Iquitos, 49만), 잉카제국 수도였던 쿠스코(Cusco, 35만) 등이다.
인종 구성은 원주민인 인디오가 45%, 혼혈계인 메스티소가 37%, 백인이 15%, 흑인과 동양인이 3%이다. 중국계가 약 100만 명, 일본계가 약 10만 명으로 아시아계가 4%~5%라는 비공식 통계가 있다. 언어는 스페인어다. 케추아어는 1975년에 공용어로 추가되었다. 이 외에도 아이마라(Aymara)어 및 아샤닌카(Ashaninka)어와 같은 원주민 언어가 일부 사용된다. 종교는 가톨릭교가 90.5%, 기독교 6.5%, 무교 및 기타가 3.0%이다.
페루의 국가 형태는 공화국이다. 정치 체제는 대통령 중심제(임기 5년)와 의원단원제(임기 5년)이다. 2012년 현재 대통령은 2011년 7월 28일에 취임한 오얀타 우말라1)이다. 제1부통령은 마리솔 에스피노사(Marisol Espinoza)이며, 제2부통령은 오마르 체하데(Omar Chehade)이다. 외교장관은 라파엘 론카글리올로(Rafael Roncagliolo)이다. 페루 독립일은 1821년 7월 28일이다. 군사력을 살펴보면, 총병력이 12만 7000명으로 육군은 7만 6000명, 해군 3만 1000명, 공군 2만 명으로 구성된다.


2010년 기준으로 국내총생산(GDP, Gross Domestic Product)은 1565억 미국달러이며, 1인당 국내총생산은 5224미국달러이다. 경제성장률은 5.5%(2011년 기준)이다. 2010년 기준으로 수출은 337억 미국달러이며, 수입은 257억 미국달러이며, 외환보유액은 441억 미국달러, 공공외채는 332억 미국달러이다. 화폐단위는 솔(PEN, PeruvianNueve Sol)이며, 2012년 1월 기준으로 1미국달러 당 2.70솔이다. 한국과 페루의 교역현황(2011년 1월~9월)을 보면, 한국 수출이 10억 2000만 미국달러이며, 한국 수입이 16억 2000만 미국달러이다.


추픽추 Machu Picchu.

세계의명소"

태양의 도시, 공중 도시, 그리고 잃어버린 도시. 장구한 세월 동안 세속과 격리되어 유유자적함을 고이 간직한 곳. 그래서 더욱 신비하고 풀리지 않는 영원의 수수께끼가 가슴마저 벅차게 하는 그곳, 바로 남미의 얼굴 마추픽추다.

해발 2,430m에 자리한 마추픽추(Machu Picchu)는 열대 산악림 가운데에서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절경을 자랑한다. 잉카 제국의 절정기에 건설되었으며 가장 놀라운 도시 창조물로 평가될 만한 이 유적의 거대한 벽, 테라스, 경사로는 마치 자연적으로 깎여서 형성된 절벽처럼 보인다. 안데스 산맥의 동쪽 경사면에 있는 이곳의 자연 환경은 다양한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는 아마존 강 상류의 분지를 에워싸고 있다.
기차가 달릴 수 없는 종착역 마추픽추. 아담한 마추픽추 역을 빠져나와 사방을 둘러보아도 잉카 유적지 마추픽추는 보이지 않습니다. 아직까지 베일에 싸여 있는 유적지답게 마추픽추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는 웅장한 봉우리로 둘러싸인 가파른 길을 올라가야 합니다.
마추픽추 유적지는 여러 신전과 궁전을 중심으로 잉카인들이 살았던 주택, 곡식과 작물을 재배했던 계단식 경작지 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안데스 산맥에 자리한 마추픽추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유적지입니다. 정확히 누가 왜 건설했고, 어떤 사람들이 살았으며, 이토록 신비롭고 아름다운 도시가 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는지가 모두 밝혀지지 않은 곳입니다. 잉카인들이 세웠고, 그들이 살았다는 것을 빼고는 모두 추측만 하고 있지요. 베일에 싸인 ‘시간을 잃어버린 공중 도시’, 마추픽추 여행??? 

발견될 때까지 수풀에 갇힌 채 아무도 그 존재를 몰랐고 공중에서만 볼 수 있다고 하여 우주적 차원의 문명 작품으로까지 불리는 곳. 그러나 분명 잉카의 땅이며, 과거 잉카의 고도인 곳. 제국의 마지막 성전이 벌어지고 그 숨통이 끊어지는 순간을 함께한 곳. 잉카 최후의 요새 마추픽추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 보면.
안데스의 그 험난함을 말로 형용할 수 있을까? 굽이치는 길 따라 이어지는 하얀 눈이 있는 산맥들,바로 그 안데스의 정상을 거침없이 달린다. 10여 년 전엔 비포장 길이었으나 지금은 잘 포장된 신작로길이다. 6,000미터 급의 만년설도 고산지대의 호수와 함께 이방인들을 환영하고 있다. 그 높은 곳의 호수에서 플라밍고와 라마, 산 오리들이 유유히 노니는 장면은 경외감과 함께 평화로움을 선사한다.


산맥으로 이어진 길들은 다시 산허리를 돌아 강으로 이어지고 있고,강물은 여름에 내린 폭우로 황허()의 물처럼 진한 흙탕물을 머금은 채 안데스의 계곡을내달리고 있다. 리오밤바, 우루밤바, 코차밤바. 밤바라 일컫는 무수한 계곡들이 안데스와 쿠스코를 이어간다. 안데스의 험로를 지나면드디어 포근한 잉카제국의 옛 수도 쿠스코로의 입성.
한없이 이어지는 원시의 초원, 4,000m급 안데스 고산의 만년설, 이어지는 농가의 한가로움, 풀 뜯는 소들과 목동들의 평화로움은 이곳 자연이 가져다주는 경이로움의 선물이다. 눈길을 뗄 수가 없다. 맑고 고운 햇살이 전해 주는 따사로운 행복감은 가장 큰 선물이 된다. 쿠스코에서 출발한 기차는 스위치백을 거듭하며 고지를 오르더니 이어지는 강과 산길을 굽이치며 마추픽추로 향한다.
잉카의 전설.
‘잃어버린 공중도시’ 마추픽추 정상에 당도했다. 주위를 빙 둘러 높이 솟아있는 기암절벽들과 천 길 낭떠러지 우루밤바 강의 힘찬 물줄기, 그리고 열대 우림의 무성한 정글들이 공중 도시의 외로움과 신비함을 동시에 대변한 한상적이다.
잉카인이 돌을 다룬 기술은 신기()에 가까웠다. 그들은 20톤이나 나가는 돌을 바위산에서 잘라내 수십 ㎞ 떨어진 산 위로 날라서 신전과 집을 지었는데, 면도날도 드나들 틈 없이 정교하게 돌을 쌓은 모습은 경이로움 그 자체이며, 가장 큰 돌은 높이 8.53m 무게 361톤에 달한다.


[El Condor pasa(철새는 날아가고)], 천상의 음률이 공중 도시의 신비를 감싸고 돈다. 운무()에 휩싸여 더욱 신비롭다. 잉카인들의 한이 서린 페루 전통민요가 원주민 악기 삼포냐의 음률로 울려 퍼지는 순간, 오랜 역사의 추억을 가슴에 간직한채 공중도시를 뒤로하고 쿠스코로 향하게 된다. 잉카 문명의 영원한 수수께끼 마추픽추는 왕조의 슬픔과 인디오 문명의 전설을 남긴 채 우리의 뇌리 속에 영원한 수수께끼로 잠들고 있다. (노래도있다)
마추픽추에는 평야가 적었지만, 잉카인들은 산비탈을 계단처럼 깎아 옥수수를 경작하여 오랜 세월 동안 넉넉히 먹고 살았다. 구리를 쇠만큼 단단하게 제련해 썼으며 그 고대의 방법은 지금도 풀리지 않고 있다. 이렇듯 강성했던 잉카 제국은 겨우 100여 년 만에 스페인 군대에 의해 허망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그들의 역사 속 문명과 패망, 저항에 얽힌 수많은 사연을 집약해 보여 주는 잉카 최대 유적이 바로 안데스 산맥 밀림 속, 해발 2,400m 바위산 꼭대기에 남아 있는 공중 도시 마추픽추다.
1만 명이나 되는 잉카인들이 살던 요새도시 마추픽추는 1911년 미국인 하이럼 빙엄에 의해 발견되었고, 발견 당시 마추픽추는 세월의 풀에 묻혀 있던 폐허의 도시였다.잉카인들이 더욱 깊숙이 숨기 위해 처녀들과 노인들을 마추픽추의 한쪽 묘지에 묻어버리고 제2의 잉카 제국을 찾아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마추픽추는 세계인들의 뇌리 속에 영원한 수수께끼 도시로 남고있다.
1911년 발견되기 전까지 수풀에 묻힌 채 아무도 그 존재를 몰랐기에 "잃어버린 도시" 혹은 산과 절벽, 밀림에 가려 밑에선 전혀 볼 수 없고 오직 공중에서만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하여 "공중 도시"라고 불린다. 페루는 수도 리마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도시가 안데스 산맥 고원지대에 자리를 잡고 있다. 특히 마추픽추는 산꼭대기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구름이 산허리에 걸려 있을 때가 많아 산 아래에선 이 도시 존재를 확인할 길은 없다.
인티우아타나
오두막 전망대에서 남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장의석’이라고 불리는 돌을 만날 수 있어요. 2단과 3단으로 깎은 커다란 돌인 장의석은 특별한 장식이나 문양이 없어 평범한 바위처럼 보여요. 정확하게 무슨 용도로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모양과 위치로 보아 의식을 치르거나 행사를 할 때 제물을 올려놓았던 제단으로 추정하고 있다.

장의석 유적지에서 계단을 내려오면 돌로 만든 문이 나옵니다. 얼핏 보면 직사각형으로 보이지만 조금만 꼼꼼히 살펴보면 잉카의 전형적인 출입문 형태인 사다리꼴 모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이 문은 돌로 만들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답니다. 출입문을 통과하면 신전, 궁전, 광장, 주택 등이 모여 있는 커다란 유적지가 보입니다.

마추픽추 유적지 중 가장 먼저 둘러보아야 할 곳은 ‘인티우아타나’입니다. 인티우아타나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유적이에요. 넓은 바위 위에 기둥 모양으로 깎은 돌이 솟아 있지요. 케추아 어로 ‘인티’는 태양을 뜻하고, ‘우아타나’는 연결이란 뜻이라고 해요. 즉 인티우아타나는 ‘태양을 잇는 기둥’이라는 뜻이며,
인티우아타나는 해시계와 비슷한 기능을 하고 있지만 잉카인에게는 단순한 해시계가 아니라 태양을 붙잡아 바위에 묶어 놓는 성스러운 장소엿다.
동짓날이 되면 신관이라 불리는 제사장이 잉카인들이 숭배했던 태양을 붙잡아 이곳에 묶어 두는 의식을 치렀다고 해요. 잉카인들은 인티우아타나를 매우 신성하게 여겼습니다. 이를 증명하듯 잉카인이 건설한 도시의 중심지에는 항상 인티우아타나가 세워져 있다.
잉카인들의 흔적
인티우아타나 아래쪽에는 중앙 광장이 있습니다. 중앙 광장은 마추픽추의 중심에 해당하는 곳으로 주변에는 여러 신전과 궁전이 있고, 잉카의 뛰어난 건축 기술을 엿볼 수 있는 수로가 있습니다. 중앙 광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곳은 말굽 모양으로 생긴 태양의 신전입니다.

태양의 신전은 마추픽추 유적지에 있는 200여 개의 건축물 가운데 가장 독특한 모양을 자랑하지요. 커다란 바위 위에 부드러운 곡선으로 돌을 쌓은 탑 모습으로, 태양의 신전에는 2개의 창문이 있어요.
그 가운데 동남쪽 창문은 동짓날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이 창문을 통과하도록 만들어져 있어요. 태양의 신전은 태양의 후예라는 사실을 커다란 자랑으로 여겼던 잉카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태양의 신전 주변에는 왕녀의 궁전을 비롯하여 왕릉과 곡식 창고, 향기의 방, 3개의 창문이 있는 신전, 작은 광장 등이 있어요. 태양의 신전 남쪽에 붙어 있는 왕녀의 궁전은 마추픽추 유적지에서는 드물게 2층으로 지은 건물이에요.
잉카 건축 양식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두꺼운 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마추픽추에서 유일하게 1층과 2층이 안에서 연결되지 않고 바깥 계단을 이용하도록 설계된 특이한 건물입니다. 발굴 당시 이곳에서는 나무로 만든 기둥과 지붕을 받치고 있던 돌쐐기가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신비로운 유적지
오랜 세월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 있던 마추픽추는 1911년, 미국 예일대학에서 라틴 아메리카 역사를 가르치던 고고학자 히람 빙엄에 의해서 세상에 알려졌어요. 히람 빙엄은 기록과 자료도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생명의 위험까지 무릅쓰며 안데스 산맥을 탐험하여, 숨어 있는 고대 유적지 마추픽추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마추픽추를 발견한 지 100년 가까이 되었지만 아직도 정확히 어떤 용도로 사용한 곳인지, 건설한 시기가 언제인지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답니다. 다만 유적지와 유물, 자료를 토대로 학자들이 추측한 결과, 15세기 중반에 잉카인의 여름 궁전이나 왕의 은신처로 건설되었을 거라고 들합니다.

잉카인들이 사용했던 케추아 어로 마추픽추는 ‘늙은 봉우리’라는 뜻이다. 마추픽추 유적지는 젊은 봉우리를 의미하는 우아이나픽추와 늙은 봉우리인 마추픽추 봉우리 사이에 자리 잡고 있고. 그럼에도 이 유적지가 마추픽추로 불리게 된 것은 대부분의 유적지가 늙은 봉우리 아래 흩어져 있기 때문에.
잉카 문화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마추픽추에 여행하면 좋읍니다. 기차역이 있는 마을에서 순환 버스를 타면 쉽게 입구까지 갈 수 있지만 나는 걸어서 유적지까지 오르곤 한답니다. 수천 개의 계단을 오르고 비포장도로를 걸어가야 하지만 오르는 길목과 계단에서 마추픽추의 신비로운 풍경을 마음껏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마추픽추 유적지는 깊은 산속에 있는 탓에 어느 위치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모습이 전혀 다르게 다가옵니다. 어떤 곳에서는 유적지의 일부가 보이지만 몇 발자국만 더 이동하면 곧 사라져 버리지요. 한마디로 참으로 신비로운 유적지라고 말할 수 있다.
산모퉁이를 돌 때면 어김없이 다른 풍경을 보여 주는 웅장한 안데스 산맥과 골짜기 사이를 흐르는 우루밤바 강이 연출하는 풍경도 절대로 놓칠 수 없는 장관이다.

마추픽추 유적지에 오르면 작은 오두막이 세워진 전망대가 나옵니다. 마추픽추를 감상하기 좋은 곳으로 알려진 곳입니다. 오두막 전망대에서 마추픽추를 내려다보면 사방이 험준한 산과 계곡으로 둘러싸여 있어 마치 하늘에 떠 있다는 착각이 들기도한다.

마추픽추 유적지는 안데스 산맥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어, 한눈에도 천혜의 요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방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울창한 삼림과 뾰족한 봉우리들이 외부 세계와 격리시켜 거이 환상적이다.
해발 2400m의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서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넓고 평탄하답니다. 자연 지형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건설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태양의 신전 아래에는 커다란 바위에 정교하게 만들어진 동굴이 있어요. 일명 왕릉으로 불리는데, 이 동굴이 어떤 곳이었는지에 관한 유물이나 자료는 남아 있지 않아요. 자연 동굴과 달리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모습을 보고 왕이나 절대 권력자의 무덤으로 추측할 뿐입니다.

태양의 신전 북쪽에는 잉카인들의 뛰어난 토목기술을 엿볼 수 있는 수로가 남아 있어며, 잉카인들은 물과 돌을 이용하여 뛰어난 건축술을 보여 준 민족 입니다.
직접 확인하지 않고서는 믿기 어렵지만 바위뿐인 유적 사이로 물이 흐르는 모습을 볼 수 있어요. 그것도 자연적으로 흐르는 물이 아니라 높은 곳에서 아래로 흐르도록 돌을 이용하여 인공적으로 만든 것이지요. 이 관개 수로는 과학이 발달한 지금 보아도 감탄할 정도다.
태양의 신전 북서쪽에는 ‘3개의 창문이 있는 신전’이라는 조금은 특이한 이름으로 불리는 장소가 있습니다. 해가 뜨는 동쪽 벽에 3개의 창문이 있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하며.
신전은 그리스나 로마에서 볼 수 있는 보통의 신전 건물처럼 4개의 벽면이 있는 것이 아니라 3개의 벽면을 갖고 있어요. 잉카인들은 신전을 지을 때 이처럼 3개의 벽면만 짓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래서 이런 건물은 다른 잉카 유적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왕릉 앞에는 또 다른 신전인 콘도르 신전이 있습니다. 콘도르 신전은 마추픽추 유적지에 남아 있는 신전 가운데 가장 작은 신전이에요. 이곳에는 바위를 깎아 만든 콘도르 조각이 바닥에 묻혀 있어요. 잉카인들은 오랫동안 콘도르를 신성한 동물로 생각했고, 살아 있는 상태로 신에게 바쳤다고 하며,

마추픽추를 이야기할 때면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경작지입니다. 가파른 산을 깎아 만든 계단식 경작지는 마추픽추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어요. 건축물이 세워진 지역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만들어 놓은 경작지는 그 자체만으로도 뛰어난 문화유산입니다.
계단식 경작지에서는 옥수수, 감자, 마약의 일종인 코카를 재배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어요. 일부 학자들은 왕실에서 사용했던 코카만을 재배했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전체적인 의견은 아니다.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은 의문으로 가득한 시간을 잃어버린 공중 도시 마추픽추는 잉카인이 건설한 도시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명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는 유적지입니다. 인티우아타나를 비롯하여 태양의 신전, 3개의 창문이 있는 신전, 관개 수로 시설에 관한 자료는 물론이고 언제, 누가 건설했는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마추픽추에 관하여 알고 있는 수많은 지식들은 어느 날 갑자기 모두 수정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수수께끼로 가득한 마추픽추는 당분간 그 누구도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할 유적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유네스코 세계 복합 유산
유네스코에서는 다양한 분야에서 인류가 보존해야 할 문화유산과 자연 유산을 세계 유산으로 지정하여 보호·관리하고 있습니다. 세계 유산 중에는 인간이 만든 문화유산이 있고, 자연 상태가 잘 보존된 자연 유산, 문화유산과 자연 유산이 모두 잘 보존된 복합 유산이 있습니다.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유적지는 약 700여 곳이고, 자연 유산도 176곳이나 됩니다. 그러나 복합 유산 지역은 단 25곳에 불과합니다. 그만큼 문명과 자연이 함께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은 드물지요. 그중 한 곳이 마추픽추입니다.

마추픽추가 복합 유산으로 지정될 수 있었던 것은 잉카인들이 건설한 도시 유적은 물론, 아름다운 자연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추픽추 유적지는 산림이 울창할 뿐만 아니라 희귀한 안경곰과 멸종 위기에 처한 오셀롯, 커다란 콘도르, 바위에서 살고 있는 아름다운 새인 안데스 바위새 등이 서식하는 중요한 생태와 자연 보호 구역입니다. 마추픽추는 인간이 만든 신비로운 유적과 자연 생태계가 동시에 보존되어 있는 소중한 유적지입니다.


고산증 대치법" 마추픽추로 가는 출발점 쿠스코는 해발 3,400m에 위치했다. 쿠스코에 도착한 대부분의 여행자는 고소증을 겪는다. 현지인들이 즐겨 마시는 코카 차를 따라 마시는 것도 고소증 예방에 도움이 된다. 따뜻한 물을 많이 마시고, 가급적 천천히 움직이는 게 좋다.
가는 길" 쿠스코에서 마추픽추까지는 기차로 4시간 정도 소요되고 기차역에서 버스로 굽이진 산길을 40분 정도 간 다음 걸어서 다시 30분 정도 올라가야 하는 힘겨운 여정이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와 페루의 수도 리마를 거쳐 다시 국내선을 타고 쿠스코까지 가야 한다. 로스앤젤레스에서 리마까지 약 8시간, 남미 항공사들은 시간변경이 잦고 지연 운항이 많아 골탕먹기 일쑤이므로 시간 안배에 신경 써야 한다. 20시간 넘게 걸려 쿠스코에 와서도 마추픽추까지는 열차를 타고 더 가야만 볼 수 있는 곳이다.
마추픽추로 가는 가장 저렴한 방법은 쿠스코에서 오얀타이 탐보까지 버스 또는 택시를 이용하고, 오얀타이 탐보에서 아구아 칼리엔테(Agua Caliente)까지 기차로 가는 것이다. 오얀타이 탐보까지 가는 길에 많은 유적지를 돌아볼 수 있다. 성수기에는 기차표 예약을 빨리 해야 낭패를 보지 않게된다.
숙소" 쿠스코에서는 중앙광장 주변 뒷골목에 숙소를 잡는 게 좋다. 대성당 오른쪽 산타 카타리나 박물관이 있는 골목에 저렴한 숙소가 많다. 산 아구스틴 골목에는 중급 이상의 고급 호텔이 많다. 고산병을 겪는다면 좀 더 편안한 숙소를 잡는 게 이롭다.
스페인어로 ‘뜨거운 물’이란 뜻을 가진 마을 아구아 칼리엔테에도 여행자를 위한 저렴한 숙소가 있다. 마추픽추 베이스캠프인 이곳에서 버스를 타고 30분을 올라가면 공중도시 마추픽추다.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모든 여행자들은 탄성을 지른다. 잉카 전설의 도시 마추픽추의 빼어난 아름다움 때문이다. 마추픽추 정상에도 비싸지만 숙소가 있으니 염려 안해도된다.

페니텐트penitentes.
아열대나 열대의 건조한 고산지대에 발달하는 빙하의 표면에 보이는 날카로운 빙주군()을 일컫는다. 안데스, 킬리만자로 등 고산의 빙하에서 발달하고 60㎝에서 1m 정도의 높이를 가진 날카로운 빙주가 밀집하여 빙하 표면을 덮고 있는 경우가 많다. 건조기후하에서 빙하의 소모()가 심한 일사()에 기인하여 표면에서의 승화가 촉진되어 발달한다고 생각된다.
마치 고깔모자 처럼 생기기도 했는데 정확한 생성원인은 아직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건조한 기후하에서 햇빛이 내리쬐면서 표면에서 수분이 증발하면서 생긴 것으로 추측된다?높이가 1미터가 넘기도 한니다. 남아메리카의 안데스 산맥이나 킬리만자로 등 아열대나 열대의 건조한 고산지대에 발달하는등 뾰쪽하고 날카로운 모양의 얼음기둥을 페니텐트(Penitentes)라고 합니다.

한국 폭포(밀양포충사뒤 층층 폭포)

밀양 층층폭포(표충사뒤)

2017년 12월 13일 수요일

이스라엘/Israel, State of Israe.1

이스라엘/Israel, State of Israe.

정  의

아시아 서남부에 있는 공화국.

개  관

정식명칭은 이스라엘(State of Israel)로, 지중해 동남방 연안에 위치하며, 해안선의 길이는 273㎞이다.
면적은 2만 770㎢, 인구는 804만 9314명(2015년 현재), 수도 예루살렘(Jerusalem)이다.
주민은 유태인 80.1%, 아랍계 비유태인 19.9%로 구성되었다. 언어는 히브리어와 아랍어를 주로 쓰며, 종교는 유태교 80.1%, 이슬람교 14.6%, 기독교 2.1% 등이다.
국토의 많은 부분이 사막이나 키부츠조직에 의한 농업이 발달하였으며 공업수준도 높은 편이다.
2015년 현재 국민총생산은 3,206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3만 8166달러이다. 이 나라의 정체는 의원내각제의 공화제이며, 의회는 임기 4년의 단원제(120석)이다. 주요 정당은 카디마당, 노동당, 리쿠드당, 샤스당, 메레츠당, 이스라엘베이테이누당, 연금자당 등 이다.

약  사

서기전 12∼8세기에 있었던 고대 이스라엘왕국의 멸망 후 전 세계로 흩어졌던 유태민족이 민족국가 건설을 열망한 끝에 1948년 5월 14일 팔레스타인지역에서 건국되었다. 성문헌법은 없고, 기본법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대외적으로 이집트를 제외한 인접 아랍 국가들과 적대관계에 있으며, 서유럽 나라들 외에는 외교관계가 단절상태였으나, 1993년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간의 상호승인이 이루어지고 요르단과 시리아 등과도 관계가 개선되었다.
유태인과 아랍계 주민간의 마찰이 사회적 불안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으나 의회민주주의제도의 확립으로 정치적 안정도는 높은 편이다.
대외적으로는 자유를 표방하며, 친서방의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1949년 유엔에 가입하였다.

한국 과 관계

우리나라는 1962년 4월 9일 수교를 하였으며, 1964년 8월 이스라엘의 주한 상주대사관이 설치되었다. 그 뒤 1978년 4월부터 대사관이 폐쇄되고 주일 이스라엘대사가 겸임을 하였으나, 1992년 1월 재개되었다. 우리나라는 1969년 4월 주 이탈리아 대사가 이스라엘 대사를 겸임하였으나 2008년 현재 상주공관을 설치하고 있다.
양국의 관계는 6·25전쟁 당시 17만 달러 상당의 의약품을 원조한 것으로부터 비롯되며, 1990년 6월 학술교류협력의정서를 체결한 이래, 1993년 9월 항공우주기술교류 협정, 1994년 11월 과학기술협력 협정, 1994년 12월 항공운수 협정, 문화협력 협정, 
1995년 2월 비자면제 협정, 1995년 8월 군사기밀보호 협정, 1996년 9월 세관협력 협정, 1997년 3월 이중과세방지 협정, 1997년 8월 농업협력양해각서, 전기통신 및 우편협력양해각서, 1998년 11월 산업기술협력 협정, 1999년 7월 투자보장 협정, 2002년 10월 해운 협정, 2005년 1월 민간부문연구개발협력 협정, 2005년 11월 관광 협정 등을 체결하였다.
우리나라의 대 이스라엘 수출액은 2015년 현재 21억 8000만 달러로 주 종목은 자동차, 선박, 합성수지 등이고, 수입액은 9억 6000만 달러로 주 종목은 반도체, 반도체 제조용 장비, 계측기 등이다.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에는 37명의 이스라엘 선수단이 참가하였다. 2015년 현재 KOTRA를 비롯하여 현대상사, 삼성전자, 현대중공업, 대우 등의 업체가 진출해 있고, 약 750명의 교민이 있다.
북한은 이스라엘과 외교관계를 맺지 않고 있다. 이는 북한의 아랍지지일변도 정책 때문이며, 1973년 제4차 중동전쟁 때 북한의 대아랍군사 지원과 팔레스타인게릴라에 대한 북한의 무기지원으로 적대관계에 있다.



정치적으로는 한국의 대아랍관계 때문에 긴밀한 편은 아니지만, 사회·문화적으로는 쌍방의 민간친선협회를 중심으로 교류가 활발하다.
이스라엘의 정식 명칭은 이스라엘 국(The State of Israel)으로, 전 세계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이주해 와 1948년 건국한 나라이다. 이스라엘이란 나라 이름은 '하느님이 지배하신다'라는 뜻의 히브리어로 구약 성경에 나오는 유대인의 조상 야곱이 신에게 받은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이스라엘은 지중해 동남쪽의 팔레스타인 지역에 있으며, 레바논과 시리아, 요르단, 이집트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국토의 전체 면적은 20,770km2로 한반도의 약 10분의 1 정도 크기이지만, 남북으로 470km, 동서로 최대 135km에 달하는 좁고 긴 모양 때문에, 사막과 고원 등 다양한 지형을 갖고 있다.
수도는 중부의 예루살렘이지만 국제적으로는 인정받지 못하여, 각국 대사관은 모두 지중해와 인접한 텔아비브에 있다. 행정 구역은 6개 주로 나뉘며, 유대인이 이주해 오기 전부터 팔레스타인 지역에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인들의 자치 구역인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중동 지역에서는 유일하게 크네세트라는 의회가 있는 민주주의 국가이며, 의회는 4년마다 총선을 통해 선출된 120명의 의원으로 구성된다. 공식적인 국가 원수는 대통령이지만, 의회 다수파의 지도자인 총리가 실질적인 행정 권한을 행사한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은 언제나 위대한 상징적 중요성이 있었다. 220여 개의 역사 기념물 중에서도 7세기에 지어진 ‘바위의 돔’이 유명한데, 아름다운 기하학적 꽃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이 돔은 아브라함이 희생제를 올린 장소로 세 종교가 모두 인정하는 곳이다. ‘통곡의 벽’이 각기 다른 종교 집단 사이의 경계를 정하며, 성묘(Holy Sepulchre) 교회의 ‘부활의 로툰다’에는 예수의 무덤이 있다.

이스라엘이 자리한 팔레스타인 지역은 성경에 '가나안'이라고 기록된 곳으로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과 다윗 왕,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살았던 유서 깊은 땅이다.
19세기 중반부터 성경학자들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땅의 본격적인 고고학 탐사가 시작되었고, 학자들은 구약과 신약 성경에 나오는 지명의 실제 위치를 조사하여 많은 유적과 2만여 점에 이르는 유물을 발굴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 왕국 시대에 다윗 왕이 세운 도시와 솔로몬 왕 시대의 마구간, 유대 저항군과 로마군이 싸웠던 마사다 요새 등이 발굴되었으며, 사해 문서와 같은 귀중한 유물들은 이스라엘 땅과 성경의 역사적인 관계를 잘 보여 준다.
유대교를 믿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최대 성지인 제2 성전은 대부분 사라지고 현재 볼 수 있는 것은 18m 높이의 서쪽 벽뿐입니다. 서쪽 벽은 ‘통곡의 벽’으로 불리고 있어요. 전 세계에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던 유대인들이 조상들이 건설한 성스러운 장소인 이곳에 와서 나라 잃은 것을 한탄하며 슬프게 우는 것을 보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해요.
제2 성전은 처음 지어졌을 때는 무척이나 웅장하고 화려했다고 해요. 모든 건물을 하얀 돌로 지었고, 입구는 황금으로 장식했다고 전해지고 있어요. 유대인 역사학자 프라비우스 요세푸스는 헤롯 왕이 다시 지은 제2 성전을 ‘지금까지 아무도 본 적이 없고, 아무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아름다운 건물’이라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서쪽 벽을 찾아오는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가져오는 것이 있어요. 바로 자신의 소원을 적은 종이를 븥인다.
종이를 벽에 끼우고 기도를 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믿기 때문이에요. 유대인들이 소원을 적은 종이를 바위틈에 끼워 넣고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열심히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3000년 전으로 시간 여행을 떠나온 듯한 기분이 느껴진답니다.
남아 있는 서쪽 벽은 전체가 아니고 일부에 불과해요. 모두 43단의 돌로 지어졌다고 하는데, 실제 볼 수 있는 28단을 뺀 나머지 15단은 아직도 땅속에 묻혀 있기 때문이에요. 서쪽 벽은 전 세계에서 찾아온 유대인으로 항상 북적대고 있음.
서쪽 벽으로 들어갈 때는 지켜야 할 규칙도 있답니다. 통로는 남녀가 따로 구분되어 있고, 남자들은 모자나 호떡처럼 생긴 ‘키바’라는 작은 모자를 반드시 써야 됨.

크리스트교  심장,  성묘 교회
유대인만큼이나 예루살렘에 애착을 갖는 사람들은 크리스트교도들이에요. 예루살렘이 바로 예수의 발자취를 확인할 수 있는 성지이기 때문이지요. 예루살렘의 대표적인 크리스트교 유적지는 십자가의 길이 끝나는 지점에 세워진 성묘 교회입니다.
예수가 자신이 짊어지고 온 십자가에 못 박혀 생을 마친 곳이자, 사흘 만에 부활한 곳으로 크리스트교도들이 세상에서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장소랍니다.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아이러니하게도 예수가 로마군에게 처형당한 이곳에 예수를 위한 성묘 교회를 지었어요. 성묘 교회도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답니다. 336년 건설되었으나 614년 예루살렘을 점령한 페르시아 사산 왕조가 불을 질러 일부가 타 버렸지요.
옛 모습으로 복원되어 오랫동안 유지되던 성묘 교회는 파티마 왕조의 칼리프 알 하킴이 1009년 다시 파괴했어요. 오늘날 볼 수 있는 성묘 교회는 1차 십자군이 복원한 것입니다.

십자군 전쟁은 11세기 말부터 13세기 말까지 서유럽의 로마 가톨릭군이 이슬람 세력에 빼앗긴 옛 크리스트교 성지와 영토를 되찾기 위해 벌인 전쟁을 말해요. 사실은 교황과 왕, 기사들이 영토를 넓히고, 경제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 벌인 침략 전쟁이었지요. 십자군 전쟁은 모두 아홉 차례나 실시되었지만 1차를 제외하고는 모두 실패했습니다


여러 종파' 관리하는 성묘 교회"

요새가 생각날 정도로 튼튼해 보이는 성묘 교회는 로마네스크 양식을 띠고 있어요. 처음 지어질 때에는 각기 다른 6개의 건물이었지만, 십자군이 복원하면서 하나의 건물로 만들어 놓았지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묻힌 골고다 언덕도 당시에는 교회가 아니었는데 건물을 하나로 만드는 과정에서 성묘 교회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성묘 교회에는 크고 작은 예배당과 지하 묘소, 종교 유적이 정말 많아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가 십자가에서 내려진 곳에 만들어 놓은 기념 묘지와 골고다 언덕을 가장 먼저 가 본답니다. 기념 묘지는 너무 많은 순례자들이 만져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이지요.
순례자들은 너나없이 묘지에 입을 맞추고 기도를 올립니다. 그런 다음 골고다 언덕에 올라 커다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 앞에서 슬픔에 잠겨 기도를 합니다.

성묘 교회는 특이하게도 여러 종파가 나누어 관리하고 있어요.
예수의 묘와 십자가가 세워졌던 옛 골고다 언덕과 중앙 예배당은 로마 가톨릭교에서 관리하고, 예수의 부활을 상징하는 또 다른 기념 묘지는 콥트 교파에서, 다른 주요 장소들은 그리스 정교회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지배했던 어떤 나라도 이곳만은 특별 종교 구역으로 지정하여 자치권을 보장해줌.

역사가 오래된 이슬람 유적지, 의 돔"
크라이슈 족 출신인 우마르가 이끄는 이슬람교도들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것은 638년이었어요. 우마르는 유대교 성지였던 이곳을 이슬람 성역으로 선포하였지요. 우마르에 이어 예루살렘을 지배한 것은 다마스쿠스를 중심으로 정복 사업을 펼쳤던 우마이야 왕조였습니다.
바위 돔은 처음 지어졌을 때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요. 현존하는 이슬람 건축물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고, 팔각형 건물 위에 돔을 올려놓아 이슬람 건축물이 아니라 크리스트교 건축물로 착각할 정도로 특이한 모습이에요. 팔각으로 이루어진 9.5m의 벽면은 온통 파란 타일로 덮여 있고, 돔의 높이가 20.5m에 이른답니다.

눈이 부시도록 화려한 타일로 만든 벽면과 거대한 황금색 돔으로 이루어진 바위 돔은 벽과 실내 장식, 건물을 짓는 데 사용한 자재가 전혀 다른데도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요. 동(구리)을 사용한 겉모습과 다르게 내부는 나무로 지었고, 내부와 외부의 장식과 색상 역시 전혀 다르지만 자연스러운 느낌을 준답니다.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지만 바위 돔 안에는 이슬람교를 창시한 마호메트가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발자국이 남아 있다고 하여 수많은 이슬람교도들이 찾고 있다.
우마이야 왕조의 제5대 칼리프(이슬람교의 종교 지도자) 압둘 말리크는 유대인과 이슬람교도 모두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했던 성전 언덕에 성스러운 건물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지어진 것이 691년에 세워진 ‘바위 돔’으로, 지금까지 예루살렘을 상징하는 건축물이 되었다함.

십자가 의 길

바위 돔 북쪽 예수가 재판을 받았던 곳(현재 이슬람 학교)에서 골고다 언덕(현재 성묘 교회)까지 이어지는 길을 ‘비아 돌로로사(십자가의 길)’라고 합니다. 비아 돌로로사는 고난 혹은 슬픔의 길이란 뜻의 라틴 어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이 길은 시대에 따라 조금 다르게 정의 내리고 있는데, 오늘날 걸을 수 있는 코스는 13세기에 확립된 길로 전체 길이는 약 2km 정도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예수가 재판을 받았던 1지점부터 십자가가 세워진 14지점까지 총 14곳의 주요지점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4지점 가운데 1~9지점은 예수가 십자가를 메고 걸었던 곳이고 10~14지점은 성묘 교회 안에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의 진면목을 보려면 금요일이 제격입니다. 매주 금요일에는 예루살렘을 찾은 순례자들이 직접 십자가를 메고 십자가의 길을 걷는 행사를 펼칩니다. 또 예수와 관련된 모든 종교 건물과 유적지는 이날만큼은 누구나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도록 개방합니다.

십자가의 길은 예루살렘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소입니다. 이슬람 학교부터 여러 곳의 기념 교회와 유적지를 볼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다양한 생활필수품을 팔고 음식을 즐길 수 있는 전통적인 아랍식 재래시장인 슈크도 있습니다. 마치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듯한 곳입니다

성벽 밖 골목 유적지" 

예루살렘의 옛 시가지는 성벽 안으로 한정되어 있고. 성벽 밖에도 흥미로운 유적지들이 많다. 성벽 서남쪽 시온 문을 빠져나오면 시온 산을 만날 수 있으며 시온 산은 유대인들에게 익숙한 장소로 이스라엘의 왕 다윗의 무덤과 기념 묘비, 예배당인 시나고 등이 있다.
어떤 학자들은 이곳의 다윗 무덤을 다윗의 무덤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유대인들은 다윗의 무덤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또 시온 산에는 예수가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즐긴 곳으로 알려진 마가의 다락방과 성모 마리아의 죽음을 애도하고 기념하기 위하여 지은 마리아 영면 교회 등도 남아 있다.

예루살렘 동쪽으로는 키드론 골짜기가 있습니다. 키드론 골짜기의 가파른 계곡에는 바위를 깎아 만든 무덤 유적지가 있어요.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이집트와 그리스 양식이 섞인 특이한 모습의 무덤이에요.
이 무덤은 지중해의 작은 섬나라 사이프러스 파포스에 있는 왕들의 무덤과 비슷하여 바다를 사이에 두고 여러 나라가 문화를 공유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음.


예루살렘의 평화를 ~

예루살렘은 누구나 인정하는 지구촌을 대표하는 종교 중심지예요. 하지만 오늘날 예루살렘은 유일신을 믿는 세계 3대 종교의 성지라고 부르기 힘든 도시로 변해 버렸습니다. 20세기 후반 잠시 여러 민족과 종교 단체들이 서로를 인정하고 평화를 유지했던 시절도 있었지만 탐욕스러운 정치인과 민족주의자,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평화가 사라져 지만~?.
최근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테러와 보복이 계속되고 있어, 늘 긴장감이 감도는 위험한 문화유산 지역이랍니다. 예루살렘에 하루빨리 다른 종교와 문화를 인정하고 진정한 평화가 찾아올 날을 기대해 봅니다.

세계 최고의 베스트셀러, 성경

이 세상의 수많은 책 중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본 책은 무엇일까요?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은 크게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으로 구분되지요. 구약 성경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느님과 맺은 약속을 바탕으로 역사, 법률, 종교, 관습, 문화 등을 기록한 책입니다. 우주가 창조되는 과정부터 예수가 탄생하기 이전까지의 내용을 담고 있어요. 그리고 신약 성경은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을 수록해 놓은 책입니다.

구약 성경은 이스라엘 언어인 히브리 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종이가 없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동물 가죽에 성경을 적어 놓았습니다. 구약 성경은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소아시아(서쪽 아시아) 등에서 발견되었는데 대표적인 곳이 예루살렘 동남쪽 사해 근처의 쿰람이란 곳입니다. 이곳에서 발견된 성경을 ‘사해 사본’이라고 합니다.
신약 성경은 그리스 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구약 성경도 많은 부분 그리스 어로 번역되어 있어서 훗날 많은 학자들이 성경을 연구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또한 종교 개혁자로 잘 알려진 루터는 그리스 어로 된 성경을 최초로 독일어로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유대인의 성인식
성인식은 어른이 되었다는 것을 사회적으로 인정하는 행사입니다. 일반적으로 만 16~19세 사이에 성인식을 치르지만 유대인들은 만 13세가 되면 성인식을 치릅니다. 유대인의 성인식은 ‘바르 미쯔바’라고 하는데, 히브리 어로 아들을 의미하는 ‘바르’와 율법을 뜻하는 ‘미쯔바’를 합친 말입니다.
성인식은 결혼식과 더불어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행사입니다. 스스로 하느님의 아들임을 인정하는 종교적인 행사이기 때문입니다.


바르 미쯔바는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유대 예배당인 시나고그와 예루살렘 서쪽 벽 앞 광장에서 실시됩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인 ‘랍비’가 행사를 주관하지요.
가족과 친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랍비는 유대 성경인 ‘토라’를 낭독하고, 유대인으로서 지켜야 할 의무를 서약 받은 후 축복문을 낭독하는 순서로 진행합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시나고그보다 신성한 장소인 예루살렘 서쪽 벽 광장을 찾아 성인식을 합니다.

유대 성인식은 오랜 전통에 따라 만 13세가 되는 남자들만 받았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여자도 성인식을 치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자의 성인식은 ‘바트 미쯔바’라고 부릅니다. 히브리 어에서 딸을 ‘바트’라고 부르기 때문이지요.
여자들은 남자보다 1년 빠른 만 12세가 지나면 성인식을 합니다. 여자가 남자보다 신체 발달이 빨리 진행되기 때문이다.

올리브 산
진정한 예루살렘을 감상하려면 동쪽 끝에 자리한 올리브 산에 오르는 것이 좋습니다. 해발 825m인 정상에 오르면 황홀하고 신비로운 예루살렘이 훤히 내려다보입니다. 예루살렘은 시간마다 다른 모습을 연출합니다.
해가 올리브 산을 넘어오기 전과 해가 사라진 뒤의 풍경은 정말 신비롭답니다. 거대한 돔을 붉은색으로 물들이는 저녁과 해가 올리브 산을 넘어 하늘 높이 뜰 때면 예루살렘은 또 다른 모습으로 눈과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올리브 산 정상은 예수가 당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던 길목, 예수가 눈물을 흘렸다는 곳에 세워진 눈물 교회, 올리브 나무로 유명한 겟세마네 동산 등 유적지를 보기에도 좋습니다. 특히 예수가 로마군에게 잡혀갈 때도 기도를 했다고 하는 겟세마네 동산이 유명합니다.
당시에는 나무와 바위뿐이었지만 지금은 각국에서 기부한 성금으로 지은 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올리브 나무입니다. 성경에도 등장하는 올리브 나무들은 2000년도 넘게 살아왔는데, 산의 이름도 올리브 나무에서 유래되었답니다. 그리고 정상까지 이어진 많은 유대인 무덤도 올리브 산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의 하나입니다.


사해
예루살렘 동남쪽부터 요르단에 걸쳐 있는 ‘사해’는 동서 15km, 남북 80km에 달하는 제법 큰 호수입니다. 사해는 ‘죽은 바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지만 바다가 아니라 호수이지요.
수영을 잘한다고 몸을 크게 움직이면 눈이나 입으로 진한 소금물이 들어가 상당히 고통스럽답니다.사해는 바다의 5~7배에 달하는 소금을 품고 있어 호수를 가득 메우고 있는 물이 소금 자체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해에는 염분이 많아서 바다, 강, 호수에서 사는 생물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답니다. 죽음의 바다라는 이름도 이런 이유로 붙여진 것입니다.

사해에서는 몸을 움직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몸이 물 위에 뜨는 신비한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사해에서는 휴양객들이 물 위에 누워 신문이나 잡지를 읽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사해는 미네랄과 유용 광물이 풍부하기로도 유명합니다. 몸에 좋은 브롬의 함유량이 일반 바다에 비해 50~100배나 많아 피부 질환을 치료하거나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이곳을 찾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생산되는 미네랄로 각종 화장품과 의약품도 만들고 있습니다. 또한 사해에서 1km 떨어진 곳에서는 양가죽 위에 기록된 구약 성경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은 언제나 위대한 상징적 중요성이 있었다. 220여 개의 역사 기념물 중에서도 7세기에 지어진 ‘바위의 돔(Dome of Rock)’이 유명한데, 아름다운 기하학적 꽃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이 돔은 아브라함이 희생제(犧牲祭)를 올린 장소로 세 종교가 모두 인정하는 곳이다. ‘통곡의 벽(Wailing Wall)’이 각기 다른 종교 집단 사이의 경계를 정하며, 성묘 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re)의 ‘부활의 로툰다(Resurrection rotunda)’에는 예수의 무덤이 있다.
등재된 유산은 예루살렘에서 10km 남쪽에 있으며, 2세기부터 기독교 전통에서 예수의 탄생지라고 인정된 유적이다. 339년에 처음으로 교회가 건설되었고, 6세기에 화재가 난 뒤 그 위에 다시 건물을 지었으며, 이 건물에는 원래 건물의 정교한 바닥 모자이크가 남아 있다. 또한 유적에는 라틴계·그리스 정교회·프란체스코회·아르메니아 교회의 수도원과 교회 등이 있으며, 뿐만 아니라 종탑·테라스 식 정원·순례길도 포함된다.
"Birthplace of Jesus : Church of the Nativity and the Pilgrimage RouteBethleh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