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16일 토요일

스코틀랜드.1

스코틀랜드.


 남자들이 치마를 입고 백파이프를 부는 나라. ‘영국’이라고 불리기보다는 ‘스코틀랜드’ 라고 불리기를 원하는 나라. [브레이브 하트]의 윌리엄 월레스의 전설이 살아있는 땅. 하이랜드의 광활한 자연을 벗 삼아 홀로 걸어가는 길.

영국 그레이트브리튼 섬의 북쪽 지방. 켈트계 부족들의 소왕국이 몇 개 있었으며, 11세기까지 스코트 인의 지배하에 통일 왕국이 수립되어 주변 부족들을 병합하였다. 그동안 잉글랜드와의 항쟁이 계속되었으며, 13세기에 현재와 같은 경계선이 확립되었다. 1603년에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가 죽자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왕을 겸하게 되어 양국의 연합 관계가 형성되었다. 1707년에 양국의 의회가 통합되어 연합 왕국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스코틀랜드는 경제적으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잉글랜드와는 별개로 자치법으로 통치되고 있다.

중심 도시는 에든버러이고, 경제적 중심지는 글래스고이다. 화학 공업과 전통적인 모직물 공업이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지명은 '스코트 사람들의 땅'이라는 뜻인데 켈트 어로 스코트는 '도망자', '방랑자'라는 의미가 있다. 스코트 인은 아일랜드의 선주민으로 3세기경 영국 본토(그레이트브리튼 섬)로 이주하였다. '유랑하는 양치기'라는 뜻도 있다. 이 곳에서 생산되는 술을 스카치위스키라고 하며, 남자 양치기들이 입었던 치마는 스카트라고 했다.

아름다운 풍경

‘웨스트하이랜드웨이(West Highland Way)는 스코틀랜드 최초로 만들어진 장거리 도보여행길이다. 공식 오픈은 1980년. 글래스고의 외곽 마을 멀가이(Milngavie)에서 시작해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큰 로몬드 호수(Loch Lomond)를 지나 영국에서 가장 높은 산인 벤 네비스(Ben Nevis 1,243m)의 발치에 엎드린 항구 도시 포트 윌리암(PortWilliam)까지 이어지는 153km의 길이다. 황무지에 가까운 로우랜드(lowland)에서 시작해 울창한 숲, 맑은 호수, 구릉과 계곡, 거친 산을 지나 야생의 하이랜드(Highland)로 향한다. 

옛날 양치기들이 양떼들을 끌고 오가던 길, 18세기에 건설된 군사도로의 돌길, 버려진 옛 철길 등 길 자체의 다양한 변주도 즐길 수 있다. 스코틀랜드가 품은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만날 수 있어 해마다 5만 명의 사람들이 찾아오는 인기 있는 도보여행길이다.

숲과 호수, 마을이 어우러진 풍경
웨스트하이랜드웨이는 글래스고의 북서쪽 외곽 마을 멀가이에서 시작된다. 기차역을 나와 마을로 들어서면 마을 광장에 길의 시작점을 알리는 표석이 서 있다. 앞으로 이어질 일주일간 ‘육각형 아래 그려진 노란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가면 된다. 

알랜더 강(Allander Water)을 따라 이어지는 오롯한 숲길을 한 시간쯤 걷고 나면 광활한 평원이 펼쳐지고 그 너머로 호수가 누워있다. 언덕을 올라 초원을 지나 돌담을 넘기도 하고 목책을 가로지르며 걷는 길. 풀섶에 몸을 숨기고 있던 수십 마리의 꿩들이 홰를 치며 일제히 날아오른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5시간을 걷고 나면 첫날의 목적지인 드리맨(Drymen)이다. 

20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여관에서 하룻밤을 머물고 다시 길 위에 오른다. 둘째날, 1930년대 초에 조림한 깊고 어두운 전나무 숲을 지난다. 햇볕이 들지 않을 정도로 빽빽하게 그늘진 숲길을 한 시간 넘게 걷고 나면 황무지. 흐린 하늘 아래 마른 풀들만 바람에 흔들리는 무어랜드(Moorland)의 쓸쓸한 정취가 마음을 헤집는다. 저 멀리 넘어야 할 코닉힐(Conic Hill)이 보이고 왼쪽으로는 로몬드 호수의 물길이 따라온다. 

인베러난(Inverarnan)의 술집 겸 여관 드로버즈 인(Drovers Inn)은 웨스트하이랜드웨이에서 가장 오래된 술집으로 300년 넘는 세월 동안 여행자들의 쉼터가 되어왔다. 데리다로크(Derrydaroch)에서 크리안라리크(Crianlarich)로 향하는 길은 웨이드 장군의 군사로를 따라 이어진다. 18세기, 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의 점령을 목적으로 로우랜드와 포트윌리엄을 잇고자 했던 흔적이다. 크리안라리크는 웨스트하이랜드웨이의 중간 지점으로 이제 하이랜드의 심장 속으로 들어온 셈이다.

호숫가의 작은 마을 로워드넌(Rowardenan)에 들어설 무렵이면 벤 로몬드(Ben Lomond 975m)산이 모습을 드러낸다. 인버스네이드(Inversnaid)의 폭포를 지나면 바로 롭 로이(Rob Roy)의 동굴이 기다리고 있다. 소 중개상인이던 롭 로이는 어느 공작에게 빌린 돈을 갚지 못해 범법자 신세로 전락, 결국 이 동굴에 은신해 의적 노릇을 하며 생을 보냈다고 한다. 
361m의 코닉힐에 오르면 숲과 호수, 마을이 어우러진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회색빛 구름이 하늘과 물의 경계를 지우며 수평선 위에 내려앉아 있다.걸어온 산길과 호수의 물길과 새들이 날아가는 하늘길이 짙은 안개 사이로 몸을 감추고 드러내기를 반복한다.

코닉힐을 내려서면 호숫가 작은 마을 발마하(Balmaha). 구름 사이를 빠져나온 초가을 햇살이 호수 위로 은빛 비늘을 튕겨내고, 몇 척의 쪽배들이 물결에 흔들리고 있다. 마을을 벗어나면 로몬드 호수의 동쪽을 따라 늘어선 떡갈나무 숲 사이로 좁은 길이 이어진다. 호수를 끼고 따라오는 숲길이 고즈넉하고 아름답다. 

칸트는 만년의 서간[Ⅻ 205ff.]에서 자기의 선조가 스코틀랜드 출신이라고 말하지만, 오늘날의 연구에서는 부정되고 있다. 이 서간에 따르면 조부 한스 칸트는 스코틀랜드로부터 이민해와 틸지트에서 사망했다고 하고 있지만, 거기서 죽은 것은 실제로는 증조부인 리하르트 칸트이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랜 선조가 이 증조부이며, 발트 해 연안 민족의 피를 이어받은 것이 명백하다.

코스 소개 
이 길에는 광활한 야생의 아름다움이 가득하다. 사람 없는 길에서 펑펑 울고 싶은 사람, 고독의 절정을 맛보고 싶은 사람은 가을의 스코틀랜드로 찾아가기를. 걷고 있는 사람마저 쓸쓸한 풍경의 일부로 만들어버리는 길이 기다리고 있다. 총 길이 153km(95마일)에 소요기간은 일주일. 웨스트하이랜드웨이에는 다음 목적지까지 짐을 운반해주는 서비스가 있다. 무거운 짐으로부터 해방되고 싶다면 이 서비스를 이용하면 된다(4월 중순~9월 중순).
여행 Tip 
웨스트하이랜드웨이협회에서 해마다 무료로 배포하는 정보지에는 길에 대한 소개와 함께 각 구간의 숙소정보가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발마하의 국립공원센터에서 구할 수 있다. 공식 홈페이지에 들어가도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스코틀랜드의 날씨는 하루에 사계절을 다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변덕스럽다. 반드시 방수가 되는 신발과 방수 잠바, 보온 잠바 등을 준비하자. 여름철 도보여행자를 괴롭히는 스코틀랜드의 악명 높은 곤충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미찌(midge)라 불리는 작은 곤충, 둘째는 클랙(cleg)이라는 이름의 피를 빠는 말파리. 미리 벌레를 쫓는 약을 준비하고, 긴 팔 긴 바지를 입고 걷자.
언제 
스코틀랜드의 겨울 일조시간은 겨우 6-7시간에 불과하다. 날씨는 당연히 나쁘고 대중교통 운행시간도 줄어들고 많은 숙소가 문을 닫는다. 가장 좋은 계절은5-6월의 봄과 9-10월초까지의 가을. 7-8월은 관광객이 붐벼 숙소를 구하기 어렵다.
가는 길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딘버러에서 글래스고로 이동해 중앙역에서 멀가이행 기차를 탄다. 30분 정도 소요되며 30분에 한 대 정도가 다닌다.

평화로운 풍경

틴드럼(Tyndrum)을 지나 인베러런(Inveroran)쯤 들어서면 호수 뒤로 펼쳐진 숲과 나지막한 산들, 외줄기 길 위의 하얀 집 한 채가 그림처럼 서 있다. 호숫가로 물을 마시기 위해 내려온 사슴 가족을 조용히 지켜보는 여행자들의 모습이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평화로운 풍경을 이룬다. 아치형의 오키 다리를 건너면 전형적인 하이랜드의 마을 오키다리(Bridge of Orchy). 광대한 무어랜드의 끄트머리에 걸터앉은 이곳은 웨스트하이랜드웨이에서도 가장 고립된 지역으로 들어서는 길목이다. 

작은 호수들과 습지를 지나 글렌 코(Glen Coe)의 웅장한 자태를 마주보며 걷는다. 이름만 무시무시할 뿐인 '악마의 계단(Devil's staircase 564m)를 가뿐히 오르고 나면 킨로클래븐(Kinlochleven). 산자락에 자리 잡은 작은 마을에는 유럽 최대의 인공빙벽이 있다. 자작나무숲을 지나 레븐 호수(Logh Leven)를 굽어보며 걷다보면 네비스 협곡(GlenNevis)의 발치에 다다른다. 멀리 포트 윌리엄이 보이고, 마침내 “웨스트하이랜드 끝(End of West Highland Way)"을 알리는 표지판이 기다리고 있다.

스코틀랜드의 날씨는 단조롭다. 비가 내리고 있든가 곧 비가 내릴 예정이던가. 몇 시간을 걸어도 인가 하나 보이지 않는 광활한 평원과 거대한 호수, 깊은 숲길을 걸어가는 동안 귓전을 울리는 건 바람소리와 빗소리뿐이다. 그곳은 하이랜드이고, 그 땅의 주인은 비와 바람, 그리고 안개. 세상의 끝에 혼자 서 있는 기분을 즐기는 이들을 위해 준비된 땅이다.






스코틀랜드Scotland.

스코틀랜드Scotland.

영국 그레이트브리튼섬 중에서 트위드강 하류부로부터 셰비엇 구릉을 거쳐 솔웨이만(灣)에 이르는 경계선 북부 지방. 남으로는 잉글랜드 최북부의 노섬벌랜드주() 및 컴브리아주와 인접해 있고, 동으로는 북해, 서로는 대서양을 앞에 두고 있으며, 남서부에서는 노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북()아일랜드와 마주보고 있다. 


영국을 구성하는 연합왕국(잉글랜드ㆍ스코틀랜드ㆍ웨일스ㆍ북아일랜드)의 하나로, 그레이트브리튼섬의 북부 지역을 차지한다. 면적이 78,772㎢이고 인구가 522만 정도인 스코틀랜드는 전체 토지의 1/4만을 농업 지역에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열악한 토질을 가지고 있다. 거친 파도에 의해 깎여진 산맥들과 접근조차 하기 힘든 깊은 계곡들로 이루어진 하일랜드(Highland) 지역에서는 주민들이 사냥, 어로, 양치기를 하며 연명하는데, 오늘날에는 이러한 자연 환경이 도리어 관광객들의 매력을 끌고 있다. 또한 로랜드(Lowland)로 알려진 남쪽 지역에는 매우 다른 형태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이들은 검소하고 거친 열정과 시적 감흥을 소유하고 있다. 로랜드 지역은 주로 언덕과 늪지여서 양의 사육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근대 산업은 트위드 강을 따라 발전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에서 최고의 상업지는 대체로 하일랜드와 잉글랜드 국경 사이에 밀집되어 있다. 특히 포스 만(Firth of Forth)과 클라이드 만(Firth of Clyde)은 훌륭한 항구이자 운하로서, 이웃 지역들에서 나오는 광물질을 운반하는 통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 주변이 제조업으로 발전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특히 클라이드 만은 세계 조선 공업의 중심지였으며, 이 만과 접해 있는 글래스고(Glasgow)는 영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자 산업 혁명의 주요 발상지이다.


지리적으로 북부에서 남부를 향해 하일랜즈·롤랜즈·서던업랜즈로 갈라져 있으며, 인구의 대부분은 동부 해안지대로부터 롤랜드에 이르는 평야부에 모여 있다. 북부와 서부의 해안선이 길며, 헤브리디스 제도·오크니 제도·셰틀랜드 제도를 비롯하여 800개 가까운 유인도·무인도가 있다. 


남으로는 잉글랜드 최북부의 노섬벌랜드주() 및 컴브리아주와 인접해 있고, 동으로는 북해, 서로는 대서양을 앞에 두고 있으며, 남서부에서는 노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북()아일랜드와 마주보고 있다. 지리적으로 북부에서 남부를 향해 하일랜즈·롤랜즈·서던업랜즈로 갈라져 있으며, 인구의 대부분은 동부 해안지대로부터 롤랜드에 이르는 평야부에 모여 있다. 


북부와 서부의 해안선이 길며, 헤브리디스 제도·오크니 제도·셰틀랜드 제도를 비롯하여 800개 가까운 유인도·무인도가 있다. 처음에는 픽트인()과 스코트인으로 대별되는 켈트계() 부족들의 소왕국이 몇 개 있었으나 11세기까지 스코트인의 지배하에 있는 통일왕국이 수립되어 점차 주변 부족들을 병합하였으며, 15세기에는 오크니 제도와 헤브리디스 제도도 스코틀랜드의 일부가 되었다.


잉글랜드와의 항쟁이 계속되었으나 13세기의 스코틀랜드 왕 알렉산더 2세·3세시대에 현재와 거의 같은 경계선이 확립되고 정치적·경제적 안정을 이루었다. 스코틀랜드인은 흔히 이 시기를 자국의 황금시대로 간주한다. 그러나 그 후에도 잉글랜드와의 항쟁은 계속되었으며, 그 사이사이에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2세에 대한 1313∼1314년의 독립전쟁의 승리, 


1503년 제임스 4세와 잉글랜드 왕 헨리 7세의 딸 마거릿과의 결혼, 1567년의 메리 여왕의 처형 등과 같은 큰 사건들이 일어났다. 그러다가 1603년에 잉글랜드 왕 엘리자베스 1세가 죽자, 메리의 아들 제임스 6세가 혈통에 따라 잉글랜드 왕을 겸하게 되어(제임스 1세), 양국의 동군연합()관계가 성립하였다. 시민혁명 당시에는 크롬웰에 의한 스코틀랜드 정복도 있었으나, 명예혁명 후인 1707년에 양국의 의회가 통합되고, 이에 양국은 연합왕국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픽트인()과 스코트인으로 대별되는 켈트계() 부족들의 소왕국이 몇 개 있었으나 11세기까지 스코트인의 지배하에 있는 통일왕국이 수립되어 점차 주변 부족들을 병합하였으며, 15세기에는 오크니 제도와 헤브리디스 제도도 스코틀랜드의 일부가 되었다.


고대에는 픽트인(人)과 스코트인으로 대별되는 켈트계(系) 부족들의 소왕국이 몇 개 있었으나 10~11세기까지 스코트인의 지배하에 있는 통일왕국이 수립되어 점차 주변 부족들을 병합하였으며, 15세기에는 오크니제도와 헤브리디스제도도 스코틀랜드의 일부가 되었다. 그동안 잉글랜드와의 항쟁이 계속되었으나, 13세기의 스코틀랜드 왕 알렉산더 2세ㆍ3세 시대에 오늘날과 거의 같은 경계선이 확립되고 정치적ㆍ경제적 안정을 이루며 스코틀랜드의 황금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그 후에도 잉글랜드와의 항쟁은 계속되었으며,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2세에 대한 1313∼1314년의 독립전쟁의 승리, 1503년 제임스 4세와 잉글랜드 왕 헨리 7세의 딸 마거릿과의 결혼, 1567년의 메리 여왕의 처형 등과 같은 큰 사건들이 일어났다.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와는 별개의 자치법으로 통치되고 있으며, 독자적인 사법제도와 보건·교육제도를 가지며 국교회제도()도 독립해 있다. 주도()는 에든버러이고, 경제적 중심은 글래스고이다. 


주요산업으로는 보리와 사탕무·감자 등의 농업, 소·양의 목축업, 임업·어업 이외에 석탄의 산출이 풍부하며, 한때 활발했던 제철·조선 등은 쇠퇴하였다. 그 밖에 그레인지머드를 중심으로 한 화학공업과 각지에 분산해 있는 전통적인 모직물 공업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스코틀랜드의 귀족 16명이 런던의 상원 의석을 차지하는 원칙도 이때 만들어졌다. 이러한 연합의 결과로 스코틀랜드는 경제적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특히 글래스고의 상공업이 급속히 증대하였으나, 잉글랜드에 대한 뿌리 깊은 내셔널리즘은 그 후에도 존속하였다. 


1603년에 잉글랜드 왕 엘리자베스 1세의 사망으로,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메리 여왕의 아들)가 혈통에 따라 잉글랜드 왕위까지 겸하게 되어(제임스 1세), 양국의 동군연합(同君聯合)관계가 성립하였다. 


시민혁명(1642년~1649년) 당시에는 크롬웰에 의한 스코틀랜드 정복도 있었으나, 명예혁명(1688년) 후인 1707년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양국의 의회가 통합되면서 연합왕국(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을 형성하였다. 이로써 스코틀랜드의 귀족 16명이 런던의 상원 의석을 차지하는 원칙도 결정되었다. 그 결과 스코틀랜드는 경제적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특히 글래스고의 상공업이 급속히 증대하였으나, 잉글랜드에 대한 뿌리 깊은 민족적 반감은 그 후에도 존속하였다.


 2011년 5월 스코틀랜드국민당(SNP)이 자치권 확대를 주요 공약으로 내세우며 스코틀랜드의 다수당을 차지, 알렉스 새먼드 당수가 자치정부 수반에 올랐다. 이로써 스코틀랜드가 연합왕국으로부터 분리독립하는 방안이 추진돼 왔다. 이후 2012년 10월 15일 영국 정부와 스코틀랜드 자치정부의 협정을 통해, 2014년에 스코틀랜드 분리독립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를 시행하기로 최종 합의했다.


스코틀랜드는 2014년 9월 19일(현지시간) 오전 6시부터 오후 10시까지 분리독립 찬반 주민투표를 실시하였다. 투표는 16세 이상의 스코틀랜드 주민을 대상으로 실시됐으며, '스코틀랜드가 영국 연방에서 분리독립해야 하는가'라는 단일 문항에 찬성ㆍ반대 중에 결정하도록 했다.


유권자 428만 명이 참여한 이번 투표는 역대 최고인 84.6%의 투표율을 기록했으며, 투표 결과 반대 55%-찬성 45%가 나오면서 스코틀랜드의 독립은 무산됐다. 따라 307년 만에 영국 연방에서 떨어져 독립국가로서 자립하려던 스코틀랜드 자치정부의 도전은 무산됐으며, 현재 잉글랜드·스코틀랜드·웨일스·북아일랜드 등 4개 지역으로 이루어진 영국연방(UK) 체제는 계속 유지된다. 


스코틀랜드 자치정부가 영국 중앙정부로부터 조세권과 예산권을 대폭 넘겨받는 자치권 확대 약속을 얻어냄에 따라 조만간 중앙정부는 스코틀랜드 지방정부에 권한을 대폭 이양하는 ‘지방정부 권한 강화(devo-max)’ 협상을 시작할 계획이다. 














2017년 12월 15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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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방주 선사 시대 대홍수의 기억 [Noah's Ark]

노아의 방주 선사 시대 대홍수의 기억. Noah's Ark.

신의 계시에 따라 방주를 만들어 대홍수 후에도 살아남았던 노아. 그의 이야기는 성서에 익숙지 않은 일반인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전세계적으로 존재하는 홍수 전설이 이 신화를 역사적 사실로 증명한다는 일설은, 로맨틱한 사람들 사이에서 뿌리 깊게 믿어지고 있다. 이 가설에 진실은 있을까? 노아의 방주가 실재로 있었던 가능성은 어느 정도일까?

노아의 방주

성서에는 진실의 단편이 기록되어 있다.

19세기 중반 중동까지 뻗어간 고고학의 발굴은 구약성서의 무대인 메소포타미아 주변에서부터, 지금까지 전설상의 장소라고만 여겨지고 있었던 성서에 등장하는 도시의 유적에 이르기까지 차례대로 발견해나갔다. 그리하여 성서에 기술된 일부가 역사적 사실이었던 것이 증명되자 성서의 신화적 부분, 다시 말해 「창세기」에 눈을 돌리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거기에도 무엇인가 진실이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창세기" 의 홍수 전설은 구약성서의 에피소드 중 특히 스케일이 크고 또한 인상 깊으며 신비로운 이야기이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아담과 이브의 자손들은, 땅 위에서 번성하고 순조롭게 늘어갔다. '신의 아들' 들은 각각 인간 여자를 아내로 삼아 자녀를 낳았다. 여기서 말하는 신의 아들이란, 아담의 자손이 아니라 천사들을 일컫는다. 이렇게 탄생한 아이들은 네필림(Nephilim)이라 불리면서 아주 옛날 이름 높은 영웅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이 늘어남과 동시에 사람들이 행한 악행 또한 지상에 만연했다. 이런 모습에 몹시 마음이 아팠던 신은, 인간을 창조한 일은 역시 과오였노라고 후회하면서 홍수를 내려 지표면을 싹 쓸어버릴 결의를 굳혔다.

다만 신은 인간을 전멸시켜버리지 않고 단 한 명에게만 자비를 내리기로 했다. 왜냐하면 노아는 그 당시 세대에서 단 한 명, 신에게 순종하는 욕심 없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신은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 것을 명하고 자세한 순서와 치수에 대해서도 가르쳐주었다. 노아는 신의 말에 따랐다. 그는 세 명의 아들과 함께 긴 세월에 걸쳐 방주를 완성시켰다. 그러자 신은 다시 노아에게 말했다. "너는 네 식구들을 모두 데리고 배에 들어가거라. 그리고 깨끗한 짐승은 일곱 쌍씩, 부정한 짐승은 한 쌍씩, 공중의 새도 일곱 쌍씩 배에 데리고 들어가 온 땅 위에서 각종 동물의 씨가 마르지 않도록 하여라. 이제 이레가 지나면 40일 동안 밤낮으로 땅에 비를 쏟아, 내가 만든 모든 생물들을 땅 위에서 모두 없애버리리라."

노아가 방주에 실은 동물의 정확한 숫자는 불확실하다. 성서의 다른 곳에서는 모든 동물을 암컷과 수컷 한 쌍으로 두 마리씩 들여보냈다고도 기록되어 있다. 구약성서는 다섯 종류 정도의 자료를 모았는데 정리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병기()하는 형식으로 편찬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일어나는 것이다. 어쨌든 노아는 아들들과 힘을 모아 기한까지 모든 준비를 끝냈다. 방주에는 동물과 음식물이 쌓이고 노아 일족이 올라탔다. 이때 노아는 6백 살이었다고 한다.

신의 예고대로 분명히 7일 후에 파괴적인 호우가 찾아왔다. 홍수는 40일 동안(1백50일이라고도 한다) 계속되어 방주는 수면으로 떠올랐지만, 그 이외의 모든 것은 지상의 가장 높은 산조차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지표면에 남아 있던 생물은 사람이나 새나 짐승할 것 없이 모조리 숨이 끊겼다.

40일이 지나자 노아는 방주의 창문을 열고 밖으로 까마귀를 날려보냈다. 까마귀는 기세 좋게 날아올랐지만, 육지를 발견하지 못하고 방주로 들어왔다 나왔다를 반복했다. 그러던 7일 후, 이번에는 똑같이 비둘기를 날려보냈다. 그렇지만 비둘기 역시 앉을 곳을 발견하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왔다. 다시 7일 후, 노아는 다시 비둘기를 날려보내보았다. 그러자 비둘기는 멀리 날아가서 저녁 때가 되어서야 돌아왔다. 부리에는 올리브 잎이 물려 있었다. 노아는 어디선가 물이 빠져 육지가 모습을 드러냈다는 사실을 알았다. 다시 7일 후 비둘기를 날려보내자 비둘기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윽고 물이 빠지고 방주는 아라라트 산에 멈추었다. 신은 노아에게 말했다. "너는 아내와 아들들과 며느리들을 데리고 배에서 나오너라. 새나 집짐승이나 땅에서 기어다니는 길짐승까지, 너와 함께 있던 모든 동물을 데리고 나와 땅 위에서 떼지어 살며 새끼를 많이 낳아 땅 위에 두루 번성하게 하여라." 그래서 노아는 모두를 데리고 방주에서 나왔다. 그리고 신을 위해 제단을 쌓고 제물을 바쳤다. 신은 노아에게 두 번 다시 대지의 생물을 전부 벌하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그 계약의 증표가 구름 속에서 나타난 무지개라고 한다.
형상
「창세기」에는 신이 만들라고 명했던 방주의 해설이 기록되어 있다. 우선 재질은 고펠나무. 지금 이것은 전나무라 여겨진다. 그리고 이 재질을 길이 3백 큐빗, 폭 50큐빗, 높이 30큐빗〔큐빗은 일반적으로 척()이라 여겨진다. 이렇게 산출해보면 방주의 크기는 길이 약 1백35미터, 폭 약 23미터, 높이 약 14미터가 된다〕의 방주 모양으로 짰다.

몸체의 안팎으로 타르를 칠하고 내부는 세 겹 구조로 작은 방을 여러 칸 만들었다. 천장에는 빛이 들어오는 창을 냈다. 마지막으로 출입구는 방주의 옆으로 냈다고 되어 있다.

노아의 방주는 중세의 종교화에서는 고물 끝이 뾰족하고 멋진 배의 형상으로 그려진다. 아라라트 산에서 방주(의 잔해)를 보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노아의 방주를 일반적인 배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노아의 방주가 실제로 그런 형태를 갖고 있었는가 하는 점에서는 많은 의문이 남는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방주'가 아닌 것이다. 방주 전설의 원형이라 여겨지는 바빌로니아의 전설(여기에 대해서는 다음에 서술하기로 한다)에서 건조된 배는 밑바닥이 편편하고 네모난, 바야흐로 물에 뜬 상자와 같은 모습이었다. 목적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물에 떠 있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형상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노아의 방주를 우스꽝스럽고 투박한 상자 모양의 배로 정해놓은 일설도 만만치 않다.

영원한 사람 우트나피슈팀

그런데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에는 사실 명확한 모델이 있다.

1850년에 기원전 7세기 앗시리아의 앗시르바니팔 왕의 대도서관에서 열두 장의 점토판이 출토되었다. 아카드어의 설형문자가 새겨진 이 점토판에는 세계 최고()의 문학작품 『길가메시 서사시』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 중 노아의 방주 이야기와 똑같은 홍수 전설이 삽입되어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이 이야기는 반신반인의 영웅 길가메시에게 그의 선조 우트나피슈팀이라는 인물이, 영원히 죽지 않는 비밀을 말해주는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따르면 우트나피슈팀은 먼 옛날에 시르팍(대홍수 이전에 존재했다는 메소포타미아의 5대 수도 중 하나)에 살고 있었다. 그는 에아 신의 경건한 신자였다. 그래서 에아 신은 신들이 대홍수를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다는 꿈을 보여줌으로써 우트나피슈팀에게 곧 닥치게 될 파국을 경고했다.

이 꿈을 올바르게 이해한 우트나피슈팀에게 에아 신은 이렇게 명했다. "시르팍 사람, 우바라 투투의 아들이여, 그대의 집을 부수고 배를 만들어라. 부를 버리고 생명을 쫓아가라. 재산을 돌아보지 말고 그대의 생명을 구하라. 살아 있는 것의 모든 종류를 그대가 만든 배에 실어라. 그대가 만들어야 할 배는 치수와 비율을 정해진 그대로 하라. 폭과 깊이는 똑같이 비율을 맞추어라."

우트나피슈팀은 신의 계시에 따라 마을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고 방주의 건조에 착수했다. 골조는 5일 만에 완성되었다. 그는 기술자들을 시켜 신에게 명령받은 그대로 마루가 1이크(약 3천6백 제곱미터), 네 벽의 높이는 10가르(약 60미터), 덮는 판자의 폭도 각각 10가르로 된 여섯 겹의 거대한 방주를 만들었다. 배 밑바닥에는 아스팔트가 부어졌다.

배를 완성시킨 우트나피슈팀은 기술자들의 노고를 위로하는 연회를 베풀고 모든 재산과 모든 종류의 생물을 배에 실었다. 가족, 친척, 기술자, 가축, 짐승도 실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배에 올라타고 문을 닫았다.

이윽고 에아가 예고했던 시간이 다가왔다. 서광과 함께 하늘 끝에서 시커먼 구름이 몰려들었다. 천둥신 아다드가 천둥을 치게 했다. 큰 바람이 몰아치고 수로에서 물이 넘쳤다. 사람들을 징벌하리라 말을 꺼냈던 지상과 명계의 신들조차 무시무시한 대홍수에 놀라 허둥대며 천신 아누의 곁으로 도망쳤다.

여신 이슈타르는 인간 여자처럼 울면서 말했다. "보아라, 옛 나날들은 진흙으로 돌아가버렸다. 내가 신들의 모임에서 재앙을 말했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신들의 모임에서 그런 말을 했던가? 나의 인간들을 멸망시킬 싸움을 입 밖에 내었던가? 나야말로 인간들을 낳은 자인데. 물고기의 알과 같이 그들은 바다에 가득 찼었는데." 모든 지상과 명계의 신들은 이슈타르 신과 함께 슬퍼하고 후회했다.

미칠 듯이 일렁이는 바람과 홍수, 그리고 태풍이 6일 낮 6일 밤 국토를 망가뜨렸다. 7일째가 되자 폭풍의 신이 겨우 싸움에서 져서 바다가 가라앉고 폭풍은 고요해졌으며, 그리고 물은 빠져나갔다. 하지만 이미 모든 인간은 진흙으로 돌아가버린 뒤였다.

우트나피슈팀의 방주는 니시르 산(티그리스 강과 그 지류 자브 강의 합류점 가까이에 있는 산. 구르디스탄 산맥의 한 줄기)에 멈추었다. 착륙한 것이었다. 7일 동안 기다린 그는, 우선 비둘기를 날려보냈다. 그러나 비둘기는 앉을 곳을 찾지 못하고 돌아왔다. 다음에 그는 제비를 날려보냈다. 제비 역시 되돌아왔다. 마지막으로 날려보낸 것은 큰 갈가마귀였다. 갈가마귀는 물이 빠졌기 때문에 시체를 쪼아먹고 주위를 돌면서 까악까악 울면서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우트나피슈팀은 모든 새를 하늘로 날려보내고 산 정상에서 제물을 바쳤다. 그러자 향기에 이끌려 신들이 모여들었다. 여신 이슈타르가 우트나피슈팀에게 말했다. "이 나날을 마음에 새기고 결코 잊지 말아라. 신들이여, 희생 제물 앞으로 와주십시오. 엔릴(바빌로니아 3대 신 중 하나로 하늘의 대신. 신들의 왕)은 와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는 생각 없이 홍수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인간들을 파멸로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엔릴은 왔다. 그리고 배를 보고 살아남은 자가 있음을 알고서는 "이들이 도움을 받았다고 하는가. 한 명도 살아남아서는 안 되었는데" 하며 격노했다. 그런 엔릴을 말린 것은 에아였다. 에아는 엔릴이 사려 없이 홍수를 일으킨 것을 비난하면서 닥치는 대로 벌하지 말고 죄의 경중에 따라서 사자를 늘리고 이리를 풀어놓고 기근을 일으키고 역병을 돌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그 말에 마음을 고쳐먹은 엔릴은 우트나피슈팀과 그의 아내에게 축복을 내리고 불사의 몸으로 만들어주면서 그들을 멀고 먼 땅, 강의 하구에 살게 했다.

이것이 영원한 사람, 머나먼 우트나피슈팀의 전설이다. 후세의 노아의 전설이 여러 명의 신을 유일신으로 바꾼 것만 제외하면, 완전히 이 이야기의 재탕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외에도 바빌로니아 전승이 구약성서에 도입된 흔적이 많아 보이지만, 이만큼 완벽한 일치를 보이는 에피소드는 노아의 방주뿐이다.

되짚어가는 홍수 전설의 기원

이 발견(1872년에 해독, 1876년에 발표. 점토판의 발견 당시 아직 설형문자가 해독되지 않아서 읽지 못했다)이 밝혀졌을 때, 일대 충격이 일어났다. 25세기에 걸친 시간을 초월하여 성서 이야기의 뿌리가 현대에 되살아난 것이었다. 노아 이야기의 원전이 성서라는 종래의 학설은 싱겁게 덮여졌다.

게다가 그후, 수메르어로 씌어진 최고()의 파편이 닛프르에서 출토되었기 때문에 이 전승의 기원은 더욱 위로 거슬러올라가게 되었다. 왜냐하면 수메르인은 바빌로니아 이전에 메소포타미아에서 번영했던 민족으로 기원전 3500년경부터 기원전 2500년경까지 번성했다가, 그후 사막에서 습격해온 바빌로니아의 선조에게 멸망된 민족이기 때문이다. 바빌로니아인은 수메르인으로부터 문화와 신화를 차용하여 수메르어를 중세 유럽의 라틴어처럼 사용해왔다. 다시 말해 노아의 홍수 전설은 기원전 25세기가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5천 년 이상 옛날부터 면면히 전해져온 신화였던 것이다.

수메르(닛프르)판 노아(우트나피슈팀)는 그 이름을 디우스두라라고 했다. 그는 대홍수 이전 시대의 마지막 왕이었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기본적으로 바빌로니아판과 비슷하다. 홍수를 일으킨 것은 엔릴 신이고 그것을 몰래 디우스두라에게 가르쳐준 것은 영웅신 우투였다. 왕은 건조한 방주에 가족과 재산, 가축과 친구들 싣고 대홍수를 헤쳐나갔다. 그리고 엔릴에게서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고 성스러운 산에서 살 것을 허락받았다.

대홍수 전승을 전하는 점토판은 이외에도 메소포타미아 각지에서 차례대로 발견되었다. 전승이 엄청난 세월, 광대한 지역에 걸쳐서 전해 내려온 증거로, 파국에서 살아남은 홍수영웅의 이름은 판에 따라서 제각각이다. 앞에서 소개한 우트나피슈팀, 아트라 하시스(최고의 현자), 디우스두라(생명을 본 자라는 의미) 왕 이외에도 우바랏츠, 카시스트라타, 바이스바라타 등으로도 불렸다. 노아 역시 이 중 하나에 포함된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 해독된 점토판에서 확인된 이름'의 일람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커다란 의문이 생긴다. 홍수 전설은 어찌하여 이토록 오랫동안 방대하고 집요하게 이어져 내려온 것일까? 해답은 역시 고고학적 발굴이 가져왔다.

메소포타미아 각지의 발굴 조사에 따르면 우르, 키시, 시르팍, 니네베, 우르크 등 수메르 각 도시에서 대홍수의 흔적이 발견된 것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는 실제로 대규모의 홍수에 휩쓸린 적이 있었다.

다만 조사 결과, 이들 홍수의 발생 연대에는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각지의 흔적으로 미루어보아 홍수의 피해는 엄청난 것이었음이 추측되지만, 성서에 기록된 것처럼 단 한 번의 전세계적인 대재해는 아니었다.

원래 남부 메소포타미아는 엄청난 저지대로 항상 홍수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던 땅이다. 수메르인은 치수기술에 숙달되어 물을 다스리고 문명으로 단번에 비약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기술이 실용화되기 시작한 때는 기원전 3500년경. 그 이전에는 자연의 맹위에 대해 속수무책이었다. 홍수는 소위 매년 찾아오는 위기였고 때로는 괴멸적인 규모로 습격하기도 했을 것이다. 지층에 새겨진 대홍수 유적은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노아 전설의 기원이 되는 대홍수는 성서에서 말하는 세계적인 규모는 아니었지만 예전에 존재했다. 홍수가 티그리스·유프라테스 유역에 빈번했던, 숙명이라고도 할 만한 재해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어찌하여 홍수 전설이 면면히 이어져왔는가 하는 의문도 사라질 것이다. 이 사실을 노아의 방주 문제의 해답으로 삼는 사람도 많다.
방주 로망
노아의 대홍수 전설은 지역적인 것이 아니라, 좀더 세계적인 규모로 발생한 홍수의 기억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그들의 가설은 실로 천차만별인데, 가장 일반적인 것이 어떤 이유(빙하기 말이나 지축의 이동, 엇갈림)로 인해 녹은 빙하 때문에 수면이 급상승한 때 발생한 전설이라고 보는 일설도 있다.
사람들이 반드시 예로 드는 것이 세계 각지에 존재하는 홍수 전설이다. 확실히 모든 대륙에는 예전에 대홍수가 일어났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예를 들면 그리스에는 데우칼리온 전설이 있고, 인도에는 마누 신화가 있다. 미국 원주민 사이에 폭넓게 홍수 전설이 전해진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고, 이집트, 남미, 중국에도 존재한다.
신화는 일부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몇 개의 패턴으로 분류 가능한데, 대홍수가 나서 인류가 전멸하고 한 가족(아니면 한 집단)만이 재난을 면한 후 인간의 자손이 되었다는 요소가 꽤 보편적이다. 그 원인이 먼 고대의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대홍수에 있었다는 생각은 매우 로맨틱하지만, 물론 현재까지는 가설의 영역을 넘지는 않는다.
대홍수뿐만 아니라, 노아의 방주 그 자체가 예전에 실존했다고 강하게 믿는 사람들도 있다. 전승이 탄생한 경위를 생각해볼 때, 「창세기」가 말하듯이 아라라트 산에 방주가 착륙한 것은 너무나 비현실적인 생각이 든다.
아라라트 산에서 방주를 보았다, 아니면 그 잔해를 갖고 돌아왔다는 보고는 적지 않다. 아라라트 산에 방주의 흔적을 찾는 탐험은, 현대에 들어와서도 가끔씩 행해지고 있는 모양이다. 이슬람교도는 방주가 주디 산에 있다고 하며, 『길가메시 서사시』는 니시르 산에 있다고 씌어 있다. 세계의 홍수 전설을 되짚어가면 구원의 배가 멈추었다고 여겨지는 영봉()은 엄청난 숫자에 달할 것이다. 그래도 방주를 찾아다니는 자는 아라라트에 오른다. 바야흐로 그것은 학문적인 조사가 아니라 종교적 정열에 불붙은 일종의 순례적 행위라 해도 좋을 것이다.

전설에 숨겨진 사실

노아의 방주 전설은 아마도 현존하는 최고()의 부류에 속하는 신화이다. 그 뿌리는 까마득할 정도로 먼 고대로 올라갈 수 있으며, 동시에 현재까지 계속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방주 전설은 지금도 살아 있다.

전승은 시대를 초월하여 살아남는다. 아무리 꿈같이 들려도 거기에는 고대 진실의 단편이 숨겨져 있다. 끊임없는 노력과 지칠 줄 모르는 정열이 있으면 전설 속에서 고대의 사람들이 후세에 전하려고 한 사실을 해명할 수 있을 것이다.

방주라는 물질적 증거에 고집하는 것은 아마도 이 전설의 가치를 부당하게 폄하하는 것이 된다. 노아의 유산이 지금도 존재하는지 아닌지 하는 것은, 이 신화가 인류 문명의 뿌리를 해명하는 데 가져온 공헌에 비하면 사소한 일이다.
노아의 방주가 홍수를 헤쳐나와 건진 최대의 물건. 그것은 역사의 저편에 묻혔을 잃어버린 고대의 기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