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16일 토요일

잉글랜드.United Kingdom.2


잉글랜드.United Kingdom.

영국 브리튼섬의 켈트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로마의 지배였다. 로마제국의 갈리아 지방 통치자로 프랑스에 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 지방의 종족이 브리튼인의 지지를 받아 저항했기 때문에 이를 응징하고자 BC 55년과 BC 54년의 두 차례에 걸쳐 브리튼섬에 원정하였다. 

브리튼의 부족들은 연합하여 로마군에 대항하였으나 카이사르는 이를 격파하고 템스강 주변의 일부를 제압하였다. 그러나 그는 본국의 전쟁 때문에 3개월 만에 영국을 떠났으며, 로마인의 본격적인 공격은 약 1세기 후에야 이루어졌다.

랭커스터(Lancaster) ·맨체스터(Manchester) ·윈체스터(Winchester) ·체스터(Chester) ·레스터(Leicester) ·글로스터(Gloucester) ·우스터(Worcester) 등의 지명 어미 '스터(ster)'는 당시의 병영지를 나타내는 라틴어의 성곽, 이른바 Castra에서 유래한다. 당시 켈트인의 비극을 말해주는 이케니 부족의 여왕 보아디케아의 반란과 이에 따른 참패의 비화가 유명하다.

로마 제정시대에 들어와 클라우디우스는 43년 원정군을 일으켰고, 80년대에는 로마 군대가 스코틀랜드까지 침공하였다. 그후 로마인은 타인 하구에서 솔웨이만까지 브리튼섬을 동서로 횡단하는 장성을 구축하였다. 

현재의 잉글랜드 전체에 해당하는 지역을 약 4세기 동안 지배하였고, 런던이 상공업의 중심이 되었다. 당시의 유적은 여러 군데 남아있는데, 런던 등지의 성벽 일부와 바스에서 발굴된 온천이 특히 눈길을 끈다. 

카누트왕이 죽은 뒤 데인 왕조는 2대에 걸쳐 계속되었는데, 그후 에셀레드의 아들 에드워드 참회왕이 노르망디에서 돌아와 앵글로색슨 계통의 왕가가 부활하였다. 그러나 1066년 에드워드가 죽은 뒤 의동생 해럴드 2세가 왕위에 오르자 노르망디공 기욤이 왕위계승권을 주장하며 영국으로 진격해 왔으며,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해럴드군을 격파, 윌리엄 1세(정복왕)가 되었다. 

이것이 영국사에서 말하는 노르만정복(Norman conquest)이다. 그는 대륙의 봉건제를 채택하였으며, 앵글로색슨인의 토지를 노르만 제후에게 봉지로서 나누어 주었다. 또 전 잉글랜드의 토지 ·인구 ·가옥 등을 기재한 둠즈데이북(Domesday Book)을 작성하여 왕실 재정의 기초를 굳히고 중앙집권적 봉건제를 시작하였다.

둠즈데이란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최후의 심판날을 의미하는데 이 장부에 기재된 사항이 최종적 권위라는 뜻에서 그렇게 명명하였다. 후일 지주와 지배계급에 반항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봉건적 억압을 ‘노르만의 멍에’라 하여 저주하고, 옛날의 앵글로색슨 사회를 이상향으로 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와 대립한 윌리엄 1세는 교회에 대한 국왕의 관리권을 주장하고 주법정과 교회법정을 분리하여 왕권을 신장시켰다. 교회재판권을 둘러싼 헨리 2세와 대주교 토머스 베케트의 싸움, 또 후일의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1세에 의한 영국국교회 확립의 연원이 바로 여기에 있다. 헨리 1세가 죽은 뒤 즉위한 조카 스티븐과 딸 앙주 백작부인 마틸다 사이에는 왕위계승권 싸움이 계속되었는데, 스티븐이 죽은 후에는 결국 마틸다의 아들 헨리 2세가 프랑스에서 와서 왕위에 올랐다. 이에 플랜태저넷(앙주)왕조가 시작되었다. 그는 내란으로 세력을 회복한 제후를 누르고, 재판제도의 정비, 관료제와 용병제의 확립 등으로 절대적 권력을 장악하였다.

십자군으로 유명한 리처드 1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동생 존왕, 이른바 실지왕은 헨리 2세 이래의 대륙 영토의 절반을 잃고 중과세를 부과하는 등 실정을 거듭하였다. 이 때문에 귀족들은 1215년에 러니미드에서 존왕에게 49개조로 된 마그나 카르타(Magna Charta:대헌장)에 서명하게 하고, 왕권을 제한하였다. 



에드워드 3세 때 주와 도시의 대표가 왕에게 청원서를 내면 이를 귀족과 고위성직자가 심의하는 관행이 생겨 상하 양원제의 토대가 만들어졌다. 플랜태저넷 왕조에서 대륙령을 잃었기 때문에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웨일스와 스코틀랜드를 왕이 지배하려고 하였고 웨일스는 곧 잉글랜드령이 되었다. 1313년 에드워드 2세군을 대파한 스코틀랜드는 독립이 유지되어 곧바로 편입되지 못하였다.

이 헌장은 봉건제후의 권력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지만, 런던 이하 자유시의 특권을 인정하고 자유민의 생명 ·재산을 보호하는 조항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영국적 자유주의의 기원으로 여긴다. 그의 아들 헨리 3세도 남은 대륙령을 상실하고 실정이 많았기 때문에, 귀족들은 주대표 몽포르를 지도자로 내세워 반항하였다. 또한 귀족들은 시민대표도 포함시킨 회의를 열었다. 이것이 영국의회의 기원이며, 3명의 에드워드왕 시대에 더욱 발전하였다. 

제국의 기초.
스튜어트 왕실은 명예 혁명으로 시민 계층 사이에 타협점을 찾았으나, 결국 하노버 가문에게 왕실을 넘겨 주게 되었다. 한편 하노버 왕조는 시민 계층과의 타협 수준을 넘어 공존을 향한 발전을 하게 되었는데, 이런 발전은 왕으로부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를 보좌하는 내각에 의해 이루어졌고, 이를 통해 영국의 자유주의와 제국주의의 기초가 다져지게 되었다. 이 장에서는 이러한 모습들을 살펴볼 것이다.

영국의 절대왕정, 시민혁명.
장미전쟁에 참여한 귀족세력이 쇠퇴하자 헨리 7세는 가신단()을 거느리는 귀족의 권리와 재판권을 박탈하고, 향신()과 시민을 추밀원()에 기용하였으며, 해운법을 제정하여 상인을 규제하고 왕실 재정을 굳건히 하는 절대주의 정권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이어 헨리 8세는 왕비 캐서린과의 이혼 문제를 계기로 1534년 수장령()을 내리고 직접 교회의 수장이 되었으며, 이에 복종하지 않는 수도원을 해산시키고 그 영지를 몰수하였다. 그가 처형한 대법관 토머스 모어의 작품 《유토피아》에 양모가격의 등귀()에 따른 인클로저운동이 언급되고 있는 것은 유명한 일이다. 헨리의 아들 에드워드 6세 밑에서 섭정()한 서머싯 공과 그의 실각 후 등장한 워릭 백작은 가톨릭을 따른다는 교지() 내용마저 신교로 바꿈으로써  헨리의 기존 사업을 더욱 철저히 추진하였다. 그러나 에드워드의 사후에 즉위한 누이 메리는 교황과 화해하여 가톨릭으로 되돌아갔으며, 수장령()을 폐지하고 신교도를 박해하였다. 

메리의 사후에 즉위한 여동생 엘리자베스 1세는 가톨릭과 신교 두 종파의 반목에서 오는 정치적 불안, 특히 몰수된 수도원령을 차지한 신흥계급의 반감에 대처하기 위하여 에드워드 6세 시대의 정책을 부활시켰다. 새로이 수장령과 통일령(1559) 신앙개조()를 정비하여 영국국교회를 명실 공히 확립시켰다.  

가신단의 해체, 수도원령의 몰수, 인클로저운동 등으로 생긴 빈민대책으로 엘리자베스 1세는 구빈법과 도제조례()를 제정하는 등 국내정책을 충실히 하는 한편, 식민사업도 추진하였으며, 러시아회사 ·레반트회사 ·동인도회사의 독점권을 설정하는 중상주의() 정책을 추진하여 절대왕정을 완성하였다.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영국해군이 격파한 것도 이에 한몫하였다. 

절대주의는 엘리자베스시대를 정점으로 하여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여왕은 독신으로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사후에는 스코틀랜드왕 제임스가 혈연에 따라 잉글랜드왕을 겸하여 제임스 1세가 되어 스튜어트 왕조가 시작되었다. 

1605년의 가이 포크스 등 가톨릭 교도의 화약음모사건을 계기로 가톨릭을 탄압하였으며, 엘리자베스시대부터 세력을 키워온 칼뱅파 청교도도 박해하였다. 왕권신수설()을 신봉한 제임스가 청교도가 많은 의회와 대립하는 일은 그의 뒤를 이은 찰스 1세 시대에 더욱 두드러졌다. 

공채()나 조세()는 의회의 찬성을 받아야 하며 함부로 백성을 체포 ·투옥하지 못한다는 것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 권리청원이  1628년 의회에 의하여 통과되자 왕은 의회를 해산하였다. 왕은 재원 조달을 위해 1640년에 의회를 다시 소집하였으나 선출된 청교도가 이를 반대하자 해산해 버렸다. 이것이 단기의회이다. 같은 해에 소집된 장기의회에서는 왕과 의회의 반목이 더욱 격화되었으며, 1642년부터 의회파와 왕당파 사이의 국내전쟁이 일어났다. 

내전은 1647년에 이르러 의회군의 승리로 돌아갔으나, 청교도는 온건주의 장로파와 급진주의 독립파 및 평등파로 분열하였다. 왕은 스코틀랜드의 장로파와 결탁, 각지의 왕당파 지지를 얻어 다시 내전을 일으켰다. 그러나 제2차 내전은 독립파와 평등파의 승리로 끝나 1649년 찰스는 처형되고 올리버 크롬웰을 지도자로 하는 공화정부가 성립하였다. 이를 청교도 혁명이라고 한다.

청교도 혁명으로 상원은 폐지되고, 장로파와 토지배분을 요구하는 빈농·군인·직인 등 평등파도 탄압되었다. 크롬웰의 정부는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 대한 원정, 해운법에 의한 네덜란드의 제해권에 대한 도전, 에스파냐 함대의 타파 등 대외정책에서는 성공하였으나, 대내적으로는 엄격한 종교 정책과 군사독재로 국민의 불만이 커졌다. 그가 죽자 1660년 의회는 선왕의 아들 찰스를 망명처 네덜란드에서 맞아들여 그가 신교의 자유, 마그나 카르타와 권리청원을 존중하는 브레다 선언으로 맹세하게 하는 왕정을 부활시켰다. 

새 의회는 소수의 장로파와 다수의 왕당파로 이루어졌으며, 다수파는 국교도만이 국왕이 될 수 있다는 심사율()의 제정을 비롯하여 국교주의의 재건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밀약을 맺은 찰스 2세와의 대립이 표면화되었다. 이윽고 의회는 가톨릭 교도인 왕제() 제임스의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휘그와 토리의 두 파로 분열·항쟁하였는데, 찰스가 죽자 신왕 제임스 2세는 가톨릭주의와 절대주의 정치의 부활을 꾀하여 휘그 뿐만 아니라 토리와도 적대하였다. 

두 파는 협정하여 1688년 제임스의 딸 메리와 그 남편 윌리엄을 네덜란드에서 맞아들여 여왕과 왕으로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메리 여왕과 윌리엄 3세이다. 제임스는 프랑스로 망명하였으며, 이에 이른바 국왕은 의회 내에 존재한다는 명예혁명이 성립되었다. 

왕은 의회의 승인 없이 법의 정지 또는 면제, 금전의 징수, 상비군의 유지 등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 권리장전()이 이듬해 1689년에 의회를 통과하였다. 이에 권리장전은  마그나 카르타, 권리청원과 함께 영국헌법의 근간을 이루었다. 이러한 시민혁명의 결과는 이후 정치혁명의 토대를 마련하여 영국제국의 길을 열어주게 되었다. 

정치혁명, 산업혁명

정치혁명 시대 말에 이르러 윌리엄 3세는 제임스가 프랑스의 지원 아래 복위를 꾀하자 1690년부터 네덜란드·독일·에스파냐와 협력하여 1697년의 강화 때까지 프랑스와 싸웠다. 전비를 조달하기 위한 방안으로 1692년 국채 발행이 시작되었으며, 1694년 잉글랜드은행이 설립되었다. 

전비 재원· 화폐 개주()·무역차액· 법정이자율 등의 문제에 관하여 중상주의자들이 활발히 논의하였다. 윌리엄 치세 말기인 1702년부터 의매() 앤의 치세인 1714년까지 에스파냐 계승 전쟁에 관여한 결과 영국은 에스파냐와 프랑스로부터 아메리카의 뉴펀들랜드·노바스코샤·허드슨만() 지방, 지중해의 지브롤터·미노르카 등을 획득하였다. 영국은 절대왕정 이래 식민지체제를 확대하여 국내 상공업자의 이익을 증진시켰다. 

운명을 같이 한 스코틀랜드와 합쳐 영국은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되었다. 윌리엄과 앤 시대에 휘그당와 토리당은 교대로 정권을 잡았으나, 앤의 사후 독일의 하노버가에서 왕위를 계승한 조지 1세와 그의 아들 조지 2세의 치세는 휘그당의 전성기였다. 1721∼1742년의 월폴 정권과 1756∼1762년의 대()피트 정권이 이의 대표적인 경우다. 월폴은 책임내각제를 확립하였으며, 토리와도 협조하여 남해포말회사() 사건 후의 경제재건에 성공하였다. 

피트는 7년전쟁에서 프랑스 식민지를 공격하였으며, 1763년의 강화로 캐나다, 미시시피 동쪽 지방을 영유하는 영국 제국의 길을 열었다. 1760∼1820년의 조지 3세 재위 기간에는 토리 정권이 집권하였다. 이 시대는 산업혁명으로 영국 산업자본주의가 성립한 시기이기도 하다.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전반에 걸쳐 산업의 전분야가 크게 변하였다. J.하그리브스의 제니 방적기, R.아크라이트의 수력방적기, S.크롬프턴의 뮬 방적기, E.카트라이트의 역직기() 등이 잇따라 발명된 데다 J.와트의 개량 증기기관도 가세하여 면공업의 비약적 발전이 달성되었다. 또한 새 기술은 제철·채탄에도 파급하였고, 나중에는 철도부설에까지 이르렀다. 

프랑스가 18세기 말의 정치혁명으로 염원한 사회를 영국이 경제혁명에 의해 실현하였다고 할 수 있다. 1832년의 선거법 개정, 1846년의 곡물법 폐지, 1849년의 해운법 폐지 등은 모두 산업자본의 이익을 표현하는 것이다. 

산업자본의 발전은 노동자의 희생을 전제로 하였기 때문에 노동자의 단결이 불가피하였다. 1799년의 단결금지법, 1819년의 피털루사건 후에 있었던 6법 등의 입법에 의한 탄압도 시대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1837년의 공장법, 1847년의 10시간법 등 보호입법이 실현되고 노동조합의 결성도 이루어져 1834년에는 전국노동조합대연합이 만들어졌다. 

농촌에서도 제2차 인클로저 운동, 비료 개량, 탈곡기의 보급 등에 따라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그동안 농촌에서 탈곡기 파괴 운동, 도시에서 방직기 파괴 운동 등이 일어났으나 이러한 저항도 자본주의의 진전을 막지 못하였다. 

사회과학 분야에서  J.벤담의 정치학, A.스미스, D.리카도의 경제학 등 자유주의 사상이 중상주의를 대신한 새시대의 요청에 따라 등장하였다. 매년선거·비밀투표·보통선거 등의 요구를 내건 차티스트는 1830년대와 1840년대에 걸쳐 대청원운동()을 벌였는데, 

그 결과 1867년과 1884년에 선거법이 개정되어 소시민과 노동자에게도 참정권이 주어졌다. 조지 3세 시대 영국의 발전은 조지 4세, 윌리엄 4세 시대에 이어졌고 1837~1901년 빅토리아 여왕시대에 절정에 달하였다. 

국내적으로는 글래드스턴의 자유당과 디즈레일리의 보수당 등 2대 정당 간의 정권교체에 의한 전형적 의회정치가 행해지고, 선거법 개정과 1871년의 노동조합법 제정 외에 교육·군사·사법 제도의 개정 등 근대화 정책이 추진되었다. 

대외적으로는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등 백인식민지의 자치령화를 실현시키는 한편 인도를 식민지화하고, 아편전쟁과 애로호() 사건을 계기로 중국시장에도 진출하였다. 특히 수에즈운하의 매입과 이집트의 보호령화 등에 의해 영국 제국주의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영국의 왕위계승.

프랑스는 카페 왕조의 샤를 4세가 죽은 뒤 발루아 왕조로 바뀌었는데, 이를 빌미로 하여 영국은 카페가의 혈통을 가진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위를 요구하면서 1337년 프랑스와의 전쟁을 개시하였다. 1453년까지 계속된 백년전쟁의 발단이다. 백년전쟁은 왕위계승전인 동시에 과거에 잉글랜드의  영토였던 앙주령을 회복하고 최대의 양모시장인 플랑드르 지방를 쟁탈하기 위한 전쟁이기도 하였다. 

전쟁의 전반에는 영국군이 유리하여 한때는 프랑스령의 대부분을 점령하였으나, 헨리 6세 때 오를레앙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로는 승리하지 못하여 마침내 칼레 외의 모든 대륙령을 상실한 상태로 전쟁이 끝났다. 

백년전쟁이 끝나고 2년 뒤에는 국내의 왕위계승권을 두고 1455년부터 30년간 내전이 계속되었다. 에드워드 3세의 셋째 아들의 아들인 랭커스터공이 장남의 아들인 리처드 2세를 대신하여 즉위, 헨리 4세로서 랭커스터 왕조를 세운 이래로 그를 지지하는 랭커스터파와 에드워드 3세의 막내아들의 손자 요크공 리처드를 옹립하는 요크파가 대립한 것이다. 이 전쟁은 양가의 문장이 각각 붉은 장미와 흰 장미였기 때문에 장미전쟁이라 불렀다. 

리처드가 전사하였지만 요크파가 승리하자 헨리 6세는 망명하고, 에드워드 4세가 요크왕조를 열었다. 그의 아들 에드워드 5세 때, 왕이 어린 것을 틈타서 에드워드 4세의 동생 리처드가 왕과 그 동생을 런던탑에 가두고 왕위에 올라 리처드 3세가 되었는데, 

랭커스터가의 유일한 왕위계승권자인 웨일스의 튜더가의 헨리가 리처드 3세를 격파하여 헨리 7세가 되고, 튜더 왕조의 시조가 되었다. 그동안, 노르만 때문에 앵글로색슨적 자유를 박탈당하고 농노화된 농민의 지위는 14세기에 들어서부터 차츰 향상되었고, 농민의 계층문화가 진행되었다. 

1348∼49년의 흑사병으로 말미암아 인구의 1/4 이상이 사망하자 살아 남은 농민의 지위가 문제였다. 영주계급은 농업노동력의 확보를 위해 억압을 강화하였지만 농민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와트 타일러 등이 농민봉기를 일으켰다. 이 봉기는 실패했으나 농민의 감소로 나타난 부역의 폐지와 지대의 인하, 영주직영지의 대출 등이 부득이하여 장원의 붕괴를 초래하였다. 

14세기에 영국의 무역은 양모를 중심으로 발전하였으며, 머천트 스테이플러스가 일종의 상인 길드로서 무역독점권을 가지고 왕실재정의 한 기둥이 되었다. 그러나 곧 스테이플러스의 규제에서 벗어난 모험상인의 활약이 뚜렷해졌으며, 15세기에 들어서자 모험상인회사가 등장하여, 모직물 무역의 독점권을 가지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설립된 UN(United Nations:국제연합)에서 영국은 상임이사국의 지위를 차지하였으나, 국제정치에서의 주도권은 미국과 소련에 빼앗겨, 세계의 바다를 지배하던 때와는 물론 상대적 지위가 떨어진 제1차 세계대전 후와 비교하여도 국제 사회 내에서의 지위가 크게 하락하였다. 영국은 미국을 지도자로 하는 대()사회주의권을 구성하는 동시에, 구()영국경제권에 대한 미국자본의 침투를 막아야 했으며, 또 미·소 양국에 대한 독자적 세력형성을 위하여 이루어진 EEC(European Economic Community:유럽경제공동체)와도 대립하게 되었다.

외교정책의 수립과 집행에서 노동당, 보수당의 양대 정당이 기본적으로 같은 태도를 취하는 것이 영국 외교의 오랜 전통이다. 일시적으로 노동당과 보수당이 1956년 수에즈 사건을 둘러싸고 대립한 경우를 제외하고 대체로 비슷한 외교정책이 계승되고 있다. 특히 전쟁 이후 정체 상태에서 기적적으로 부흥을 이룩한 서독·프랑스·이탈리아의 경제가 중심이 된 경제적 광역주의(), 즉 유럽경제공동체(EEC)에 대하여 양당의 정부가 각각 동일한 태도를 취하였다. 

1960년 1월 영국은 오스트리아·덴마크·노르웨이·포르투갈·스위스·스웨덴 등과 함께 공업제품의 역내 자유무역을 목적으로 하는 유럽자유무역연합(European Free TradeAssociation:EFTA)을 결성하여 EEC에 대항하였다. 가맹국가 간의 무역량은 연평균 약 6%의 증가를 보였고, 7년 후에는 공업제품의 무역할당과 관세의 폐지를 달성하였다. 그러나 EEC와 달리 지역적으로 인접국이 아닌데다 경제통합의 필연성도 EEC만큼 크지 않고, 또한 모든 가맹국이 EEC 국가와의 무역 의존도가 높았기 때문에 EFTA는 처음부터 EEC에 비해 더 큰 어려운 문제를 안게 되었다. 

1961년 맥밀런 보수당 정부는 EEC 가맹을 신청했으나 1963년에 프랑스가 이를 거부하였다. 1964년 이래 윌슨 노동당 정부도 EEC 참가를 기본 외교방침의 하나로 삼았다. 프랑스가 영국의 EEC 참가를 거부한 이유는 영국과 영국연방 국가의 특례관계에 따라 연방국가에서 생산된 농산물이 싼 가격으로 역내에 유입되면 프랑스의 주요 산업인 농업이 타격을 받을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연방국가와의 관계단절을 요구하는 프랑스의 태도와 연방국가의 압력 사이에 끼여 EEC 가맹교섭은 실패로 돌아갔다. 윌슨 정부도 연방국가의 기본적 이익유지를 외교방침으로 밝혔기 때문에 가맹문제가 난항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영국의 대영국연방국가 수출은 1954년 이후 11년 동안 48%에서 35%로 감소하고, 반대로 대 서유럽 수출은 28%에서 38%로 증가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갈수록 심화되었다. 

윌슨 정부를 뒤이은 히스 보수당 정부도 유럽공동체(EC:1967년 EEC ·ECSC ·Euratom이 통합) 가맹교섭을 속행하였으며, 덴마크·노르웨이·아일랜드 3개국과 영국을 포함한 ‘확대 EC’를 1973년 1월에 발족시키겠다는 합의가 EC가맹국과의 사이에 이루어졌다. 이는 영국이 유럽과 영연방 중 경제적으로는 유럽을 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 연방 여러 나라로부터의 특례 수입에 의존해온 1차상품 가격이 상승하였으며, 연방국가는 영국 외의 국가와 관계를 확대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영국은 중국의 공산혁명 이후 재빨리 공산당 정부를 승인하여 외교관계를 맺고 현대화 지원 등 경제협력에 적극 나섰다. 또한 1984년 12월 영국은 중국과 홍콩반환협정에 정식 조인하여 1997년 7월 1일 홍콩은 중국으로 반환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가 미국·일본 등 태평양 여러 나라와의 관계 강화를 모색한 것은 그 일례이다. 연방문제뿐만 아니라 영국은 경제적·외교적·군사적으로 미국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지만, EC 가맹으로 이 점에 관한 궤도 수정도 부득이하였다. 그러나 원래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강경한 대(소련 태도 및 중공 불승인정책과는 입장을 달리한 독자적인 외교정책을 취했다. 

1954년의 월남휴전협정 때에는 소련과 공동의장국을 구성하고, 1957년에는 소련과 문화협정을 체결하였다. 또 인도 독립 때에는 영국연방에 대한 공화제 가입을 인정함으로써 연방제도가 전후의 새 국제 정세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는 길을 열어두었다. 그후에도 전쟁 전의 구제국주의 정책을 버리고 여러 속령의 독립을 촉진하면서 이들 신흥국과의 새로운 우호관계 수립 방침을 취해온 것은 전통적인 현실주의 외교 노선의 표현이었다. 

맥밀런이 소련에 직접 찾아가 미·소간 데탕트의 발단을 만든  외교 실적도 두드러진다.  1992년 11월에는 러시아 대통령 옐친이 영국을 방문하고 1766년 이후 처음으로 영·러 우호조약을 체결하였다. 1990년대 들어와 영연방국가, 미국 및 유럽 국가와의 유대강화 및 동구권과의 관계 개선을 대외정책의 기조로 삼았다. 

전임 총리 대처는 1990년 10월 로마에서 열린 EC 정상회담에서 다른 11개 회원국이 합의하여 만든 유럽중앙은행 창설(1994년 1월 1일 개설 목표)에 반대하는 등 유럽 연합에 대해 반대입장을 고수하였으나 후임 총리 메이저가1993년 유럽통합조약 비준법안을 통과시켰다.
 
1997년 발족한 토니 블레어 정권은 유럽연합(European Union:EU)의 확대, 심화에 공조하면서 세계 지역분쟁에 관해서도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2001년 9월의 미국 세계무역센터 폭발테러사건 이후 미국과 함께 군사행동, 외교활동, 인도 지원 분야 등에서 국제 테러와의 전쟁 및 아프가니스탄 부흥에 적극적으로 임하고 있다.  


2007년 1월 기준으로 영국은 최근까지 미국과 함께 이라크 군사시설에 대한 군사공격을 수시로 가하고 있다. 그러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별개로 유럽연합 산하 독자적인 방위군 창설에 관심이 많은 유럽국가들이 미국의 NATO에 대한 주도권을 거부할 경우 영국의 입장은 상당히 어려워질 것으로 전망된다.

최초의 수상 월폴.
휘그당을 이끌던 제임스 스탠호프(James Stanhope)와 타운센드(Lord Townshend) 경은 토리당의 세력이 제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휘그당을 단결시키지 못했다. 특히 스탠호프가 이끄는 휘그당은 국왕의 귀족 서임권을 제한하려고 상원 내 휘그당 출신의 귀족 수를 과반수 이상으로 늘리려고 시도했으나 월폴에 의해 저지당했다. 월폴은 당시 휘그당 소속이면서 추밀원장으로 왕을 보필하고 있었다.

1720년 정부가 일으킨 증권 붐을 타고 커진 남해 회사가 파산함으로써 많은 정계와 재계 인물들이 피해를 입었다. 이 '남해의 물거품(South Sea Bubble)' 사건에 의해 타운센드를 추종하는 세력들도 크게 피해를 입었으나 이 사건에 개입되지 않았던 월폴은 오히려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강화되어 조지 1세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다. 이제 정권은 당권 중심에서 인물 중심으로 그 판도가 바뀌게 되었다.

영국(이제부터는 스코틀랜드와 웨일스, 그리고 일부 아일랜드가 잉글랜드의 정치권 아래 놓여 있었기 때문에 잉글랜드란 호칭에서 '영국'이란 호칭으로 바꾸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라고 봄)의 역사상 초대 수상이라고 할 수 있는 월폴은 20여 년 간 조지 1세와 2세 두 왕을 모시면서 수상의 위치는 어떤 것인가를 정립시켜 놓았다.

폴은 외교 문제를 처남인 타운센드 경에게 맡기고 자신은 국내 문제에만 주력했는데, 다행히 외교적으로 평화가 지속되었기 때문에 그의 국내 통치가 한층 돋보였다. 그는, 첫째 조세를 감면하고, 둘째 성공회와 토리당의 관계를 소원하게 만들었고, 셋째 당쟁 때문에 일어났던 과거의 잔인한 모습들을 배격하면서 국내 정치를 펼쳐 나갔다. 덕분에 조지 1세 시절이 평화롭게 안착되면서 하노버 왕조의 첫 단추가 잘 끼워지게 되었다.

조지 1세를 계승한 조지 2세(1727~1760년)는 월폴을 더욱 애지중지했다. 또 거기에다 월폴을 지지했던 왕비 캐롤라인의 말을 누구보다 왕이 잘 들었기에 월폴의 신임은 더욱 두터워져 갔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확고한 위치를 약화시키는 요인이 엉뚱하게도 상업적 국수주의가 고개를 들게 됨으로써 일어났다.

위트레흐트 조약 이후 남미 대륙에서 노예 무역의 독점권을 가진 영국은 이 이권을 이용하여 노예 대신에 여러 가지 상품을 밀무역했다. 그러던 중 레베카라는 상선을 가지고 장사하던 젠킨스라는 선장이 에스파냐 군인의 검문을 받다가 반항하여 귀가 잘리는 '젠킨스의 귀' 사건이 발생했다. 

이 일이 영국 의회에 알려졌는데, 의회는 이에 대해 '영국에 대한 에스파냐의 도전'이라 하였고, 더욱이 월폴에 반대 입장에 서 있던 토리당의 윌리엄 피트(William Pitt, 1st Earl of Chatham)는 '가만히 있는 것은 굴욕적인 것'이라며 소리를 높였다.

이러한 소리들 때문에 평화를 주장하던 월폴은 자신의 노선을 깨뜨리고 1739년 에스파냐와 '젠킨스 귀' 전쟁을 시작했는데, 당시 전쟁의 필요성을 소리 높이 외치던 의회는 이 전쟁에서 총체적 지지를 선뜻 허락치 않음으로써 월폴은 의회에 농간당한 꼴이 되었다. 그 결과 전쟁에서 패하게 되고, 이로써 1742년 그가 오랫동안 지켜 오던 수상직을 사임하고 옥스퍼드 백작을 서임받아 상원에 진출했다.

월폴의 초대 수상 시기가 마감되었으나, 20여 년이라는 그의 재임 기간 때문에 영국 정계 내에서 수상은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또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월폴 이후의 차기 수상들은 평화를 부르짖으며 자국의 발전에만 신경썼던 월폴 때와는 달리 점차 대륙 문제나 식민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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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gland

선사시대의 영국은 아직도 풀어야 할 비밀이 많다.  5만 년 전 유럽 대륙과 이어져 있던 브리튼섬에는 혈거수렵인이 살았다는 흔적이 있으나 빙하의 확대와 함께 섬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지각의 함몰로 대륙과 떨어지고 난 뒤 유럽 대륙의 갈리아 ·발트해 연안 등의 지방에 살던 종족이 영국해협을 건너왔으며, 이어 신석기시대에 이베리아인 등의 비()아리안계 종족이 다시 이주해와 수렵 ·목축과 원시적인 농경에 종사하였다. 

그 후 청동기시대로부터 철기시대 초기에 걸쳐  켈트족이라고 불리우는 대륙의 여러 종족이 침입하여 선주민을 제압하고 정착하였다. 이들 중 북부에 거주한 게일인보다는 남부에 거주한 브리튼인이 진보한 문화 생활을 영위하였다. 그들은 물고기와 짐승고기를 먹는 것 외에 밀 ·보리 ·귀리 등을 재배하였고, 짐승 가죽 그리고 삼베옷과 양모의 직물을 착용하였다. 또 다신교를 믿고, 소부족으로 갈라져 서로 독립해 있었는데 딘 또는 둔이라고 하는 방벽을 만들어 생활하였다. 런던(London)이라는 지명은 소택지의 성을 뜻하는 켈트어 린딘(Lyndyn)에서 나왔으며, 나중에 로마인이 이를 라틴어로 론디니움(Londinium)이라고 말한 데서 비롯되었다.

영국의 제국주의적 발전 이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하였다. 독일과 미국 등 후진국의 세계시장 진출과 더불어 1873년에는 공황과 불황이 잇따라 일어났다. 이에 따라 수출은 감퇴하고, 실업인구는 급증하였다. 또한 숙련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직업별 노동조합이 제대로 운영되지 않자 비숙련노동자 조직과 사회주의운동이 고개를 들었다. 1884년에는 쇼와 웹 등의 페비언 협회, 모리스와 하이드맨 등의 사회민주연맹이 결성되었으며, 1893년에는 번즈와 하디 등의 독립노동당이 결성되었다. 

1900년에는 노동조합과 사회주의 단체의 대표들에 의한 노동자선거위원회가 구성되고 1906년 노동당이라고 개칭하였다. 노동당은  그 해 선거에서 29명의 의원을 당선시켰다. 자유당 내각은 이에 위협을 느껴 노동쟁의법 ·노인연금법 ·국민보험법 등 사회주의적 성격이 강한 정책을 입법하였으며, 특히 1908년의 재무장관 로이드 조지의 예산안은 대토지 소유에 대한 중세를 사회정책의 재원으로 삼았기 때문에 지배계급에 충격을 주었다. 이 법안은 하원을 통과한 후 상원에서 부결되었다. 이 때문에 자유당 정부는 1911년 상원의 권한을 크게 제한하는 국회법을 실현시켰다.

독일의 팽창정책으로 열강의 지위를 위협받은 영국은 프랑스·러시아와 손잡고 대항하였으나 1914년에는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1917년 독일의 잠수함작전으로 타격을 받고 러시아혁명에 휩싸인 러시아가 연합국에서 이탈하였기 때문에 영국은 한때 궁지에 몰렸으나, 참전한 미국과의 협력으로 1918년 독일에 승리했다. 그러나 이 전쟁으로 미국과 해외 자치령 등의 지위가 향상되고, 상대적으로 영국의 지위가 저하되었다. 특히 영국 의회의 입법이 자치령의 동의 없이는 자치령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은 1931년의 웨스트민스터 조례()의 승인은 대영제국의 붕괴를 가져왔다. 

노동당은 전후의 불황을 배경으로 착실한 약진을 계속, 1922년의 선거에서는 142명의 당선자를 내어 보수 ·노동 양대 정당의 구도에서 우위를 차지하였다. 노동당은 1923년에는 191명의 의원을 확보, 1924년에는 처음으로 소수당이면서도 노동당 단독내각을 구성하였다. 1926년에는 보수당 정부 하의 노동자 총파업이 실패하여 총파업은 불법화되었다. 1928년에는 여성참정권이 확대되어 남성과 여성의 대등한 정치적 권리가 실현되었다. 1929년에는 노동당이 제1당이 되어 제2차 노동당 내각이 탄생하였다. 

1929년의 세계공황은 세계 정세를 일변시켰다. 미국은 사회자본의 개발로 공황을 극복하였고, 영국은 연방제국과 경제블록을 결성하여 이를 타개하였다. 그러나 이 공황으로 독일 ·이탈리아·일본 등의 군국주의 경향이 두드러졌으며, 1930년대 독일에는 나치스 정권이 집권하여 독일의 팽창정책이 또 다시 노골되었다. 보수당 정부의 J.체임벌린 총리는 독일에 대한 융화정책을 계속하고 전쟁 회피에 주력하였으나, 1939년에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략하자 프랑스와 함께 영국은 대독()전쟁에 돌입하였다. 

1940년 처칠 총리가 거국일치 내각 구성으로 전쟁을 타개하고자 하였으나 전쟁 초기 프랑스가 항복하게 됨으로써 전황은 영국에게 갈수록 불리해졌다. 그러나 1941년의 독일·소련전 발발, 미국·일본 개전에 따른 미국의 참전 등으로 전황은 유리하게 바뀌었다. 미영 연합군은 1943년 이탈리아를, 1945년 독일 ·일본을 항복시킴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을 종결시켰다. 노동당은 독일 항복 후의 선거에서 처음으로 절대 다수의 의석을 얻었으며,  처칠 대신 새 총리로 임명된 애틀리가 전후 강화회담인 포츠담회담에 참석하였다. 

노동당 정부는 잉글랜드 은행· 민간항공· 탄광· 철도· 철강업 등을 잇따라 국유화하고, 국민건강보험제도의 철저화로 복지국가정책을 추진하였으나, 전쟁에 따른 경제적 곤란, 식민지의 연이은 독립, 미·소 양 블록의 긴장으로 인한 재군비 등 때문에 정권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1951년의 처칠 정부하에서 사회보장제도는 완화되고 국유화 정책도 역전되었다. 1955년 처칠이 은퇴하자 그 뒤를 이은 이든 정부는 이듬해의 수에즈 사건으로 국위를 더욱 손상시켰다. 

집권한 H.맥밀런, A.F.흄의 두 보수당 정부도 미국과 소련의 비약적인 발전에 눌려 영국의 국제지위 향상과 경제발전을 실현시킬 수 없었으며, 1964년에는 정권을 윌슨의 노동당 정부에 넘기고 말았다. 또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유럽공동시장의 발전과 이에 소극적이었던 입장으로 말미암아 영국은 유럽 내에서 그동안 누렸던 상대적 높은 지위마저 잃고 말았다. 이러한 현실에 직면하여 노동당 정부에 이은 E.히스 보수당 정부가 유럽공동체(EC) 여러 나라와 가맹교섭을 속행하여, 마침내 영국은 연방 국가와의 관계, 농업보호문제, 국민감정 등 곤란한 문제를 내부적으로 안고 있으면서도 유럽공동체를 구성하는 한 국가로서 활로를 모색하게 되었다.

영국을 구성하는 4개 지역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지역. 수도는 런던이다. 면적은 그레이트브리튼섬의 약 57%에 해당한다. 북쪽으로는 스코틀랜드, 서쪽으로는 웨일스, 남쪽으로는 영국 해협, 동쪽으로는 북해와 접한다. 

영국의 국기 이름은 연합 기(Union Flag)이고 과거 영국 선박과 해군에서 사용할 때 불리던 유니언 잭(Union Jack)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두께가 서로 다른 흰색 테두리를 두른 적십자 두 개가 파란색 바탕에 교차해 그려진 모양이다. 연합 기는 연합 왕국 이전의 잉글랜드(England), 스코틀랜드(Scotland), 아일랜드 3국의 기를 조합해 만들어졌다. 3국의 기는 모두 각국의 수호성인을 기리는 십자기로서, 기독교에서 기원했으며 중세 십자군 원정 때부터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잉글랜드(England)의 기는 흰색 바탕에 적십자가 그려진 ‘세인트조지(Saint George)의 십자기’, 스코틀랜드(Scotland)는 파란색 바탕에 ×자 모양으로 비낀 흰색 십자기가 그려진 ‘세인트앤드루(Saint Andrew)의 십자기’, 아일랜드는 흰색 바탕에 빨간색의 비낀 십자가 그려진 ‘세인트패트릭(Saint Patrick)의 십자기’였다. 연합 기는 1801년 그레이트브리튼(Great Britain) 왕국과 아일랜드 왕국이 통합되어 대영제국이 탄생하면서 만들어져 오늘날에 이른다. 영국 국기는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피지 등 영국연방국 국기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

지리적 구분 1) 런던을 중심으로 하는 사우스이스트, 2) 버밍엄을 중심으로 하는 웨스트미들랜즈, 3) 탄전과 기름진 농지를 안고 있는 이스트미들랜즈, 4) 주로 농업지역인 이스트앵글리아,5) 맨체스터와 리버풀을 포함하는 노스웨스트, 6) 웨스트요크셔 코너베이션(리즈와 브래드퍼드를 포함)이 있는 요크셔·험버사이드, 7) 유명한 호수지대()인 노스, 8) 콘월 반도를 차지하는 사우스웨스트의 8개 지역으로 크게 나뉜다.

이 지역들은 지방행정 단위가 아니다. 최남단도 거의 북위 50°의 고위도에 위치하나, 바다로 둘러싸인 데다 멕시코만류와 편서풍의 영향으로 기후는 비교적 따뜻하고, 강설()도 적어 거주와 농경에 적당하여 일찍부터 인류가 정착하였다. 스코틀랜드·웨일스 등지에 비하여 산도 적어 북부의 페나인산맥도 해발고도 400∼600m이며, 그 밖에는 콘월 반도와 기타 지역에 약간의 산지가 있을 뿐이다. 

브리튼 섬의 57%를 차지하고 있는 잉글랜드는 그 크기가 미국 뉴욕 주(5만 제곱마일) 정도인데, 면적 130,363㎢에 인구 4600만 명 정도로 전체 영국인의 85%를 차지한다. 이러한 잉글랜드는 지구의 1/4에 해당하는 지역을 가졌던 대영 제국의 요람이요 중심지였으며, 세계 역사의 산실이었다. 여기서는 이곳을 북서 잉글랜드와 동남부 잉글랜드로 나누어진다.

면적의 대부분은 평지이거나 기복이 완만한 구릉지로 가경지()가 약 40%, 영구목지()와 조방목지()가 약 40%를 차지한다. 19세기 초부터 1세기 반 이상 스코틀랜드의 인구는 약 3배로 증가한 반면,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합계인구는 약 5배로 증가하고 있으며, 이 점에서도 북부에서 남부로 인구이동을 보이고 있다.


잉글랜드 남동부 템스강() 하구에서부터 약 60km 상류에 있다. 영국의 정치·경제·문화 그리고 교통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영국연방의 사실상의 중심도시다. 뉴욕·상하이·도쿄와 더불어 세계 최대 도시의 하나다.

1888년 런던주()가 설치되었고, 1899년 시티오브런던을 제외한 지역을 28개의 행정구로 구분하여 런던 주청()이 통할하였다. 다만 런던 경시청(스코틀랜드 야드)은 주변의 여러 주에 미치는 수도경찰관구를 관할하였다. 1963년 런던 행정법에 의해서 1965년 런던 주청이 폐쇄되고, 대신 시티오브런던을 포함한 32개의 행정구로 구성된 그레이터런던 주청이 설치되었다.

런던주는 종래의 런던주 외에 미들섹스·하트퍼드셔·에식스·켄트·서리 등 각 주의 일부를 포함한다. 수도경찰관구보다는 좁으나, 런던교()를 중심으로 반경 약 24km, 구()런던주의 약 5배에 달하는 면적을 차지한다.
한여름에도 기온이 높지 않으며, 7월 평균기온 17.6℃로 서울보다 7.1℃나 낮다. 강수량도 적어 연간 약 750mm로 서울의 50% 정도지만, 강수일수는 훨씬 많아 1년의 반에 가까운 168일에 이른다. 겨울에는 강수량은 적으나, 대개 날씨가 흐려 어두침침하다. 또 런던의 안개는 유명하며, 11월에서 이듬해 2월에 걸쳐 자주 짙은 안개가 발생했다.

버크셔에서 남동해안을 향하여 뻗어나간 백악층 중앙에 있으나, 표면은 점토와 모래의 혼합토로 덮여 있다. 이것은 브리튼섬이 유럽 대륙과 육지로 이어져 있던 무렵에, 호수로 주입되는 많은 하천에 의하여 운반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지반이 비교적 약하여 근년의 건축기술이 발달하기까지 고층건축에는 부적당하다고 생각되어 왔다.

최근 대기정화정책의 철저한 시행으로 스모그 현상이 해소된 것은, 하천정화정책에 의하여 템스강이 정화되기 시작한 것과 함께 중요한 변화였다. 바람은 편서풍으로 강풍은 거의 불지 않는다.
영국은 유럽 대륙 서해안에 나타나는 서안해양성 기후의 전형으로 여름에 선선하고 겨울에 따뜻하다. 이는 난류인 북대서양해류가 영국 주변에 흐르고 편서풍이 불어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륙 동안에 비해 여름은 선선하여 위도 20° 가량 북쪽에, 겨울은 따뜻하여 10° 가량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국가의 기후와 비슷하다.
아조레스섬 부근의 고기압과 아이슬란드 부근의  저기압 및 유럽 대륙에 중심을 가진 겨울의 고기압, 여름의 저기압 등도 영국의 기상·기후를  결정하는 주요 요인이다. 영국 기후가  매우 변덕스러운 것은 이들 기압에 의한 변화 때문이며, 특히 아이슬란드 저기압에서 2차적으로 발생하는 이동성 저기압이 접근하여 통과할 때 기상변화가 심하다.

영국의 7월의 평균기온은 16.4℃, 스코틀랜드 서해안의 글래스고는 15℃, 런던은 17.6℃이며, 1월의 평균기온은 4.1℃, 글래스고 3.9℃, 런던 4.2℃로 연교차가 비교적 적어 겨울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대륙과 달리 매우 해양적이다. 연중 기온차가 적지만 7월의 등온선이 동서로 뻗고 1월의 등온선이 남북으로 뻗어 장소에 따라 기온차가 상당하다.

영국의 북서부에서는 선선한 여름과 온화한 겨울, 북동부에서는 선선한 여름과 추운 겨울, 남서부에서는 더운 여름과 온화한 겨울, 남동부에서는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이 나타난다. 강수량의 분포는 지형의 영향으로 지역차가 상당하다. 대서양에 면한 북부 및 서부 산지에서는 비가 많지만 동쪽 저지로 갈수록 비가 적어져 동서의 차이가 심하다. 
스코틀랜드 서해안은 강수량이 많아  2,000∼4,700mm에 이르고, 그 남쪽의 페나인산맥은 1,500∼2,500mm웨일스 산지가 1,000∼1,500mm이며, 가장 적은 곳은 잉글랜드 동부로 600∼700mm이다.  비는 연중 고르지만 대개 3월부터 6월까지가 가장 건조하며 9월부터 1월까지가 가장 습윤하다.

지형은 남북 교외가 약간 높고, 템스강을 사이에 끼고 있는 시가지는 낮으나, 템스강이 자주 하도()를 변경함에 따라 평탄한 시가지에도 기복이 있다. 기온은 한서의 차이가 작아, 연평균기온은 약 10.5℃이다. 북위 51°5'에 위치하나 멕시코 만류의 영향으로 겨울에도 비교적 따뜻하고 강설량도 적다. 1월 평균기온은 4.2℃로 서울의 -4.9℃에 비하여 9.1℃나 높다.
영국의 저지대는 오크(떡갈나무)·애시(서양물푸레나무)·서양너도밤나무·자작나무 등의 낙엽성 삼림으로 뒤덮여 있었으나, 경지와 목장의 확대로 삼림이 점차 축소되고, 산업화 초기의 조선용 목재, 제철·가정용 청어와 베이컨 등의 훈제용 땔감 등을 위해 대부분이 벌채되어 삼림이 국토의 10%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초지와 황무지가 넓은 면적을 차지하게 되어 영국적인 특색있는 경관이 나타난다. 
잉글랜드와 북아일랜드에서 면적의 1/3 가량을 차지하는 초지에는 완만한 목장풍경이 계속되는 한편, 스코틀랜드나 웨일스의 고지에는 기온이 낮고 습도가 지나치게 높아 무어랜드 또는 허슬랜드라고 하는 황야가 넓은 면적을 차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