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19일 화요일

온달溫達.

온달溫達.

온달()은 역사적 인물이자 문학적인 인물이다. 평강왕 시대 고구려의 대형() 벼슬을 한 장수였는가 하면, 김부식의 노련한 붓놀림으로 매우 드라마틱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는 우리 역사상 특이한 경우에 속한다. 바보에서 장수까지 가장 극적인 생애를 살다 간 온달에게 많은 사람의 애정과 관심이 끌린다.

고구려가 맞은 내우외환

고구려 제25대 평강왕(재위 559∼590)은 평원왕또는 평국왕이라고도 한다. 태어난 해는 알 수 없으나, 양원왕의 큰아들로 태어나 왕 13년(557)에 태자가 되고, 이태 뒤인 559년에 왕위를 계승하였다. 왕은 고구려의 전통적인 외교 방식대로 중국의 진()·수()·북제()·북주() 등 여러 나라와 수교하였다. 560년에는 북제로부터 ‘사지절영동이교위요동군공고구려왕(使)’의 지위를, 563년에는 진나라로부터 ‘영동장군()’의 지위를 받았다. 또 580년에는 북주에 조공하고 ‘개부의동삼사대장군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의 지위를, 581년에는 북주를 계승한 수나라와 외교관계를 가지고 ‘대장군요동군공()’의 지위를 받았다.


장수왕이 평양의 북동쪽 대성산성으로 도읍을 옮긴 뒤, 지금의 평양이라고 말하는 장안성에 대규모 축성 공사를 시작하였었다. 공사는 양원왕 때까지 계속되었으나, 그는 장수왕만한 지도력을 갖추지 못했기에, 조정의 내분과 민심의 혼란이 심각한 상태로 커져 갔다. 왕위에 오르자 평강왕은 이 같은 위기부터 극복해야 했다. 백성들의 재난을 구휼하기 위해 재위 중 왕의 음식을 줄이고 백성을 위로하고 농상()을 장려하였다. 장안성()의 축성 또한 일시 중단하였다. 내분 수습을 위한 노력이었다.

평강왕은 커져만 가는 귀족세력의 힘을 제압하기가 버거웠다. 586년, 겨우 조성을 마친 장안성으로 궁을 옮겼는데, 이번에는 표면적으로 순탄한 관계를 이어 오던 중국 북조와의 관계에 문제가 생겼다. 북주의 무제()가 요동을 공격해 온 것이었다. 평강왕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배산()에서 싸웠고, 또 590년에는 수나라가 남조의 진나라를 멸망시켰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이에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중국의 통일은 고구려에게 정치적ㆍ군사적 부담을 바로 안겨 주었다.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586년, 거란별부() 출복() 등이 이탈하여 수나라에 투항하였다. 이들은 본디 고구려의 세력권 안에 있었다. 돌궐()과의 관계도 겉으로는 커다란 충돌이 없었으나, 두 세력 사이의 긴장상태는 계속되었다. 이런 위기감은 남쪽으로도 마찬가지였다. 한강유역의 점령을 둘러싸고 나제동맹이 결렬되면서 백제와 신라 사이에 전쟁이 자주 일어났다. 고구려는 일단 관망의 자세를 취했지만, 언제 불똥이 고구려 쪽으로 튈지 몰랐다.

평강공주가 온달의 집에 가다

이런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 온달()이다. 그리고 그의 생애는 앞서 소개한 [삼국사기] 열전의 온달전()을 통해 자세하다. 실로 이후 온달을 언급하는 거의 모든 기록은 이 전기로부터 빌리지 않음이 없다. 얼굴이 험악하고 우스꽝스럽게 생겼지만 마음씨는 밝았다고, 먼저 그의 모습을 그렸다.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항상 밥을 빌어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떨어진 옷과 신발을 걸치고 길거리를 돌아다니므로 사람들은 그를 ‘바보 온달’이라 불렀다.

삼국사기()"  열전()" 온달조()에는 온달에 관한 설화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온달은 고구려 평강왕(, 평원왕을 이라고도 한다) 때의 사람으로, 얼굴은 우습게 생겼지만 마음씨는 밝았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항상 밥을 빌어다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떨어진 옷과 해진 신으로 저자거리를 왕래하니, 사람들이 그를 보고 ‘바보 온달’이라 불렀다. 평강왕의 어린 딸이 울기를 잘해 왕은 “네가 항상 울어서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커서 사대부의 아내가 될 수 없겠다.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보내야 하겠다”고 놀렸다. 

내우외환에 하루도 편할 날 없는 평강왕에게 또 하나 골칫거리가 있었다. 어린 딸이 곧잘 우는 것이었다. 어찌나 울었든지 왕은 농담 삼아, “네가 항상 울어서 내 귀를 시끄럽게 하는구나. 커서 틀림없이 사대부의 아내가 못 될게야.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내야지.”라고 하였다. 왕은 울 때마다 그렇게 말했다.

공주의 나이 16세가 되었다. 왕이 상부 고() 씨에게 시집보내려 하자 공주가, “아버님께서 항상 말씀하셨지요. 너는 반드시 온달의 아내가 되리라고요. 이제 와서 말씀을 바꾸시는 건 무슨 까닭이십니까? 보통 사람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는데, 하물며 가장 높은 자리에 계신 분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예로부터 ‘임금은 농담을 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아버님의 명령이 잘못되었으므로 소녀는 감히 받들지 못하겠습니다.”라며 정색을 했다. 울어서 골칫거리더니 이제는 엉뚱한 생각마저 하는 것 같아 왕의 마음은 더욱 불편해졌다. 한두 번 타이르면 될 줄 알았는데, 공주의 심지는 곧았다.

공주는 끝내 궁을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보물 팔찌 수십 개를 팔꿈치에 걸고 궁궐을 나와 혼자 길을 떠났다. 안정복의 [동사강목]에서는 ‘보검() 수십 자루’를 팔뚝에 걸고 나왔다고 썼다. 큰 차이는 없겠다.

길에서 한 사람을 만나 온달의 집을 물어 그의 집까지 찾아갔다. 그리고 눈먼 어머니를 보고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서 절하자, “내 아들은 가난하고 보잘 것이 없으니, 귀한 사람이 가까이 할 만 한 사람이 못 됩니다. 지금 그대의 냄새를 맡으니 향기가 보통이 아니고, 그대의 손을 만지니 부드럽기가 솜과 같구려. 반드시 천하의 귀한 사람인 듯합니다. 누구의 속임수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소? 내 자식은 굶주림을 참다못해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려고 산 속으로 간 지 오래요. 아직 돌아오지 않았어요. 라고, 어머니는 황당해 하며 말했다. 가난한 여자의 말치고 너무 점잖으나 말이야 맞다. 말투는 김부식의 윤문 탓일 뿐이다.

공주는 온달을 직접 만나기로 하였다. 느릅나무 껍질을 지고 오던 온달에게 썩 나서자, “반드시 사람이 아니라 여우나 귀신일 터, 나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고 소리친다. 온달은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렸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혼자 돌아와 사립문 밖에서 자고, 이튿날 아침에 다시 들어가서 어머니와 아들에게 자세한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온달은 우물쭈물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어머니 또한, “내 자식은 비천해서 귀한 사람의 짝이 될 수 없고, 내 집은 몹시 가난하여 정말로 살 수 없다오.”라며, 어제와 같은 말을 되풀이하였다. 그러자 공주는 ‘한 말의 곡식도 방아를 찧을 수 있고, 한 자의 베도 꿰맬 수 있다’고 하며 설득한다. 사실 이 말은 한 나라 문제()와 형제간이었던 회남의 여왕() 사이의 불화 때문에 나왔었다. [사기()]의 회남형산열전()에 보인다. 그러므로 경우가 다르다. 다만 가난한 살림나 마음먹기에 따라서 화목해질 수 있다는 비유 정도로 받아들이면 될 듯하다.

공주의 회유는 겨우 성공하였다. 그제야 금팔찌를 팔아서 전지, 주택, 노비, 우마, 기물 등을 사들이니 살림 용품이 모두 갖추어졌다. 말을 살 때는 공주가 온달에게, “시장의 말을 사지 말고, 나라에서 쓸모가 없다고 판단하여 백성에게 파는 말을 고르세요. 그 가운데 병들고 수척한 말을 골라 사오세요.”라고 했다. 온달은 이르는 대로 말을 사왔다. 공주는 부지런히 말을 길렀다. 말은 날로 살찌고 건장해졌다. 온달 또한 더불어 건장한 장수로 성장하였다.

온달의 영예로운 생애

온달의 이름이 역사서에 공식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두 번의 싸움에서이다. 첫째는 북주의 무제가 요동으로 쳐들어왔을 때이고, 둘째는 고구려군이 신라군을 치러 갔을 때이다. 온달은 평강왕이 직접 나선 전쟁의 선봉장으로 나섰으며, 신라와의 싸움에는 자진해서 나갔었다. 그렇다면 온달은 어떻게 발탁되었는가. 고구려에서는 언제나 봄 3월 3일을 맞아 하늘과 산천의 신령에게 제사를 지냈다. 낙랑 언덕에 모여, 사냥하여 잡은 돼지와 사슴을 바쳤다. 그 날이 되자 왕은 사냥을 나갔다. 여러 신하와 5부의 군사들이 모두 수행하였다. 온달도 자기가 기르던 말을 타고 따라갔다. 그는 항상 앞장서서 달리고, 또한 잡은 짐승도 많아서 남들이 따르지 못했다. 왕이 불러서 성명을 물었다. 온달이었다. 울보 공주가 궁을 나가 함께 살고 있다는 그였다. 왕은 놀랍고 기이하게 여기며 발탁하였다.

온달에게 활약한 기회는 곧 왔다. 북주의 무제가 군사를 출동시켜 요동을 공격한 바로 그 싸움에서였다. 평강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배산 들에서 맞아 싸웠다. 온달은 선봉장이 되어 용감하게 싸워 수십여 명의 목을 베니, 여러 군사들이 이 기세를 타고 공격하여 크게 이겼다. 온달이 활약한 첫 싸움이었다.

공적을 논의할 때 온달을 제일이라고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왕이 그를 가상히 여기어 감탄하기를, “이 사람은 나의 사위다.”라 하고, 예를 갖추어 영접하고 벼슬을 주어 대형으로 삼았다. 이로부터 그에 대한 왕의 은총이 더욱 두터워졌으며, 위풍과 권세가 날로 성하여졌다. 평원왕 19년(578) 11월의 일이었다.

590년 평강왕이 죽고 영양왕이 즉위하였다. 온달은 왕에게 아뢰었다. 역사서에 적힌두 번째 활약상이 여기서 펼쳐진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최후를 알리는 슬픈 사건이기도 하였다. 신라가 한강 북쪽 지역을 차지하여 그들의 군현으로 만들자, 군사를 준다면 제 땅을 도로 찾겠다고 다짐했다. 왕은 이를 허락하였다. 그의 맹세는 계립현과 죽령 서쪽을 귀속시키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아단성 곧 지금의 아차산 밑이 온달에게는 마지막 자리였다. 

고구려 평원왕(, ?~590)과 영양왕(, ?~618) 때의 장수()이다. 평민 출신으로 평원왕의 사위가 되어 577년 북주()의 무제(재위 561-577)가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 큰 공을 세웠다. 영양왕 때인 590년(영양왕 1) 신라에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남하하였으나 아단성()에서 전사하였다.

온달의 영구()가 움직이지 않았다. 그 자리에 공주가 달려와 관을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삶과 죽음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아아, 돌아가소서!” 그 때에야 영구가 움직여 하관하였다. 아름답고 비통한 장면이다.

공주()가 16세가 되자 왕은 상부()의 고씨()에게 시집보내려 했다. 공주는 ‘임금은 식언()할 수 없다’며 궁중을 나와 온달을 찾아 부부가 되었다. 공주는 궁중에서 가지고 나온 패물을 팔아 집과 밭을 마련하고 말을 사서 준마로 키웠다. 고구려에서는 해마다 3월 3일이면 낙랑()의 언덕에 왕과 신하, 5부의 병사들이 모여 사냥을 하고, 그 날 잡은 산돼지·사슴으로 하늘과 산천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온달도 말을 타고 따라 갔는데, 말을 타고 달리는 품이 남보다 앞서고 잡은 짐승도 많았다. 왕이 불러서 이름을 묻고는 놀라고 기이하게 여겼다.

북주(삼국사기에는 로 기록되어 있음)의 무제(,재위 561-577)가 요동을 침략했다. 평원왕()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나서 이산()의 들에서 맞아 싸웠다. 온달은 선봉장으로 북주의 군사를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왕이 기뻐하여 “이 사람은 나의 사위다. 예를 갖추어 맞이하고, 작위를 주어 대형()을 삼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그 뒤 온달은 왕의 은총을 받으며 위엄과 권세를 누렸다. 영양왕이 즉위하자 온달이 아뢰어 말하였다. 

“신라가 한강 이북의 땅을 빼앗아 군현을 삼았으니, 백성들이 심히 한탄하여 일찍이 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대왕께서 어리석은 저를 못나게 여기지 않으신다면 군사를 주시기 바랍니다. 가서 반드시 땅을 되찾아오겠습니다.” 왕이 허락하자, 온달은 떠나면서 “계립현()과 죽령() 서쪽의 땅을 되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하지만 온달은 신라 군사들과 아단성() 아래에서 싸우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장사를 지내려는데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면서 “죽고 사는 것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돌아갑시다”고 말하자 비로소 관이 움직였다. 대왕이 이를 듣고 몹시 슬퍼하였다.

온달()이 전사한 아단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서울 광진구 아차산()에 있는 아차산성([)이라는 주장과 충청북도 단양의 온달산성()이라는 주장으로 엇갈린다. 두 곳 모두에 온달과 관련된 설화와 유적이 전해진다. 

아차산()에는 온달이 마셨다는 온달샘 등이 전해지며, 단양에는 온달동굴과 온달이 가지고 놀았다는 공깃돌 등이 전해진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아차산성([)이 온달()의 죽음과 관련된 아단성()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당시 삼국의 형세로 볼 때 고구려의 군대는 남한강의 상류 지방인 단양까지 진출한 것이 아니라 한강 유역의 탈환에 나섰던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평강공주"
고구려 25대 평원왕은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559년부터 589년까지의 재위기간 동안 그는 흔들렸던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고 고구려 문명의 번영을 이루었던 인물이다.

그의 이름은 양성이며, 양원왕의 첫째아들이다. 평원왕은 담력이 크고, 말을 잘 타며, 활쏘기도 잘하였다. 그의 정식호칭은 평강상호왕이다. 좋아한다는 뜻의 호()라는 글자가 왕의 이름에 들어간 것은 고구려 사람들이 그를 훌륭한 임금님으로 존경했음을 알려 준다.

평원왕에게는 자식들이 여럿 있었다. 뒷날 영양왕이 되는 첫째아들 원, 영류왕이 되는 건 무, 보장왕의 아버지인 태양, 유명한 평강공주가 그들이다.
평강공주는 어려서부터 울기를 잘하여 평원왕이 딸을 자주 놀리곤 했다.

“네가 항상 울어서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커서는 좋은 데 시집 보낼 수 없겠구나. 자꾸 우니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보내야겠다.”

바보 온달. 그는 누구이길래 고구려 왕의 대화에서 거론되었을까?

온달은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성, 즉 안학궁성 주변에서 살았다. 그의 얼굴은 비루먹은 당나귀처럼 파리하여 우습게 생겼다. 그는 집이 몹시 가난하여 밥을 빌어다가 앞을 보지 못하는 어머니를 봉양했다. 온달은 항상 떨어진 옷과 헤진 신을 신고 평양 시내를 돌아다녔고, 남들이 뭐라고 하더라도 늘 명랑하게 웃으면서 받아넘겼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바보 온달이라고 했다.

그가 본래부터 바보는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의 능력을 숨기면서 세상을 달관하던 인물이었는지도 모른다. 궁궐 밖의 소문이 임금의 귀에 들어간 것을 보면 그의 행동이나 말투가 보통 특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평원왕은 평강공주가 16세가 되자, 당시 권력을 가진 상부 고씨 집안의 아들과 혼인을 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평강공주는 고씨 집안으로 시집갈 생각이 없었다.

평강공주는 평원왕에게 자기 생각을 분명히 밝혔다.

“대왕께서는 항상 저를 온달에게 시집보낸다고 하시고서 이제 와서 어찌 다른 이에게 시집을 보내신다고 하십니까. 보통 사람도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 하는데, 대왕께서 거짓말을 하신다면 누가 왕명을 따르오리까. 지금 대왕의 명령은 잘못된 것입니다. 저는 온달에게 시집을 가겠습니다.” 평원왕은 크게 역정을 냈다.

“고구려의 공주가 어찌 비천한 온달에게 시집갈 수 있느냐. 네가 어릴 적에 한 말은 농담이었다고 했는데도 내 말을 듣지 않고 고집을 부릴 수가 있느냐. 정녕 네가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너는 내 딸이라고 할 수 없다. 네 마음대로 가고 싶은 곳으로 가거라.”

평강공주는 끝내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궁궐을 나서기로 했다. 평강공주는 금팔지를 갖고 궁궐을 나와 혼자 길을 나섰다. 사람들에게 물어 물어서 온달의 집에 이르렀다.

온달 평강공주와 결혼"

평강공주는 맹인 노모가 있음을 보고 앞으로 다가가 절하고 온달이 있는 곳을 물었다.

온달의 어머니가 대답했다.

“우리 아들은 가난하고 못생겨서 귀한 사람과 짝이 되지 못합니다. 지금 그대의 냄새를 맡으니 향기가 이상하고, 손을 만지니 부드럽기가 풀솜과 같은즉 반드시 귀한 사람임이 분명한데, 누가 당신을 속여서 이곳까지 오게 했는지 모르겠군요. 내 자식은 배고픔을 참지 못하여 산으로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러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평강공주는 온달의 집에서 나와 산 아래에 이르러 느릅나무 껍질을 지고 오는 온달을 만났다. 평강공주는 온달에게 자신이 찾아온 이유를 말했다.

온달은 평강공주의 말이 너무도 이상하다고 여겨서 오히려 성을 내며 말했다.
“이는 어린 여자의 행동이 아니다. 사람이 아니라 여우나 귀신이다. 내 곁에 오지 마라.”
온달은 평강공주를 돌아보지도 않고 서둘러 집으로 갔다.

평강공주는 혼자서 온달의 집으로 돌아와 사립문 아래에서 잠을 자고, 이튿날 다시 들어가서 온달 모자에게 다시 한 번 자세히 이야기를 했다. 온달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온달의 어머니도 가난을 이유로 거듭 사양했다. 하지만 평강공주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마음만 같다면 어찌 반드시 부귀한 후에야 함께 지낼 수 있겠습니까. 제가 가져온 금팔찌가 있으니 이것을 팔면 그리 어렵지 않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평강공주는 온달과 함께 살기 시작했다. 평강공주는 가져온 금팔찌를 팔아서 집과 농토와 노비, 소와 말, 각종 세간들을 샀다.

평강공주는 궁궐에서 살아왔지만 세상물정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말을 보는 눈이 뛰어났다. 평강공주는 온달에게 쓸만한 말을 사라고 일렀다.

“시장 상인이 파는 말을 사지 말고 꼭 나라에서 파는 말을 사오되, 병들고 비리해서 내다 파는 것을 사오도록 하세요.”

평강공주는 온달이 사온 말을 열심히 먹이고 보살펴서 날마다 살찌고 건강하게 만들었다. 평강공주는 온달이 이 말을 타고 멋진 장군이 되기를 바랐다.

바보 온달 장군 온달로"

평강공주는 온달이 고구려의 훌륭한 무사가 되도록 열심히 도와 주었다. 구걸을 하지 않아도 된 온달은 공주의 기대에 보답하기 위해서 글 공부와 말 타고 활쏘기를 열심히 익혔다.

고구려에서는 항상 봄철 3월 3일이면 낙랑 언덕에 사람들이 모여 사냥을 하고, 그날 잡은 산돼지와 사슴으로 하늘과 산천 신에 제사를 지냈다. 사냥을 좋아하는 평원왕을 비롯해서 여러 신하들과 병사들이 함께 사냥을 나갔다.

온달도 기른 말을 타고 참여했다. 온달은 월등한 실력으로 남들보다 많은 짐승을 사냥했다. 온달의 놀라운 실력은 사냥대회의 화제가 되었다. 그러자 평원왕은 그를 불렀다.

“그대의 이름이 무엇인가.”
“대왕마마, 저는 온달이라고 하옵니다.”
“뭐라고, 온달이라고?”

평원왕은 깜짝 놀랐다. 어떻게 바보 온달이 이렇게 늠름한 무사가 되었는지 모두들 이상하게 여겼다. 평민 온달은 뛰어난 무예솜씨로 장군으로 등용되는 특혜를 얻었다. 사냥대회는 당시에 인재선발의 장이었던 셈이다. 신분에 상관없이 재주만 있으면 일정하게 출세할 수 있는 사회가 고구려였다. 그러나 평민이었던 온달이 단 한 번의 사냥솜씨로 왕의 사위로 인정받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578년경 북주의 무제왕이 군사를 보내어 고구려를 공격해 왔다. 북주는 북중국의 서쪽지역에 있던 나라인데, 동쪽에 있던 북제 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여세를 몰아 고구려를 공격한 것이었다.

평원왕은 즉시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배산 아래 들판에서 맞아 싸웠다. 온달은 선봉장이 되어 날쌔게 적진을 휘저으며 싸워 적 수십여 명을 칼로 베었다. 고구려군의 사기가 올라가서 후주의 군대를 크게 이길 수 있었다.

싸움이 끝나고 승리의 공을 이야기할 때 모두들 온달을 첫째 가는 공이 있다고 추켜세웠다. 평원왕은 기쁨에 넘쳐 주위사람들에게 말했다.

“여러 장군들은 보시오. 이 사람이 내 사위라오.”

평원왕은 온달과 평강공주를 궁궐로 불렀다. 평강공주를 용서하고, 온달에게는 대형이라는 높은 직위를 주었다. 평원왕은 이후에도 온달을 총애하였고, 온달은 왕의 사위로서 날로 직위가 올라갔다.

온달" 출세배경

평강공주와 온달이 만난 평원왕 시기 고구려는 빈부의 차이가 극심했다. 평강공주는 비록 궁궐에서 홀로 나왔지만, 좋은 향내가 나는 화장품을 바르고 있었고, 손은 부드럽기가 풀솜과 같았고, 얼굴 또한 예뻤다. 손목에는 금팔찌를 하고 있었다. 금팔찌는 대단히 비싼 물건이었다. 반면 온달은 집이 가난하여 농사 지을 땅도 없어서 느릅나무 껍질을 벗겨다 먹기도 하고, 구걸을 하거나 막노동으로 살아야 했다. 당시에도 돈이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사회였다. 평강공주는 집과 밭, 노비, 소와 말, 각종 세간 모두를 자신의 금팔지를 팔아 시장에서 살 수 있었다.

어떻게 왕, 귀족, 평민, 노비 사이에는 엄연한 신분적 질서가 있었다. 왕족과 평민간의 결혼이 가능했던 것일까. 『삼국사기』「온달열전」에서는 평강공주의 고집으로 결혼하였고, 온달이 뛰어난 무예솜씨로 평원왕의 사위로 인정받았다고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존재한다.

평강공주가 궁궐을 나간 후 평원왕이 공주를 찾으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을까? 만약 평원왕이 마음만 먹었다면 평양성 근처에 사는 온달과 평강공주를 찾기란 쉬웠을 것이고, 그랬다면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일찍 종결되었을 것인데?

온달이 사냥대회에서 선발된 후 즉시 사위로 공인받지 못하고 북주와의 전투에서 공을 세우자 비로소 사위로 공인받았다
평원왕이 왕위에 오르기 16년 전인 544년 겨울, 평원왕의 할아버지인 안원왕은 큰 병이 들어 언제 죽을지 몰랐다. 안원왕에게는 첫째 부인에게서 자식이 없고, 둘째 부인과 셋째 부인 사이에는 각기 아들이 있었다. 안원왕이 위독하자 둘째 부인과 셋째 부인의 외가측에서는 자신들의 외손자가 다음 왕위를 이어받게 하려고 혈안이 되었다.

두 집안간의 다툼은 급기야 수천 명이 죽는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결국 둘째 부인의 외가 쪽이 이겨 양원왕이 545년에 왕이 되었지만, 귀족사회의 내분은 쉽게 가라앉지 않아 지방까지 확산되었다. 양원왕 13년인 558년에는 환도성에서 간주리란 자가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귀족간의 내분은 특정 집단이 권력을 독점하려고 했기 때문에 일어났다. 양원왕의 외가는 양원왕 집권시기에 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마치 명림답부의 혁명 이후 연나부가 일시에 왕실을 능가하는 실력을 가졌던 것과 같다.

이런 상황에서 왕들은 막강한 권력을 가진 귀족세력을 견제하고 왕실의 지지기반을 견고히 하려는 노력을 하게 마련이다. 고국천왕이 연나부의 반란을 진압하고 을파소를 등용하여 왕실의 권위를 세웠던 것이 그러한 예다.
559년에 즉위한 평원왕도 자신의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귀족세력 견제, 백성들의 지지 획득, 친위세력 구축이라는 세 가지 과제를 수행했다.

왕권강화와 특정 세력의 권력장악을 막기 위해 여러 귀족들에게 권력을 분산하면서 귀족회의에서의 합의를 중시하고 서로간의 견제를 유도했다. 대대로, 막리지, 울절, 태대사자, 위두대형 등 1위부터 5위까지의 관등을 가진 귀족들만이 참석하여 국가의 모든 정보를 장악하고 정치와 군사에 관한 일을 논의하며 관리의 인사권을 좌우했던 귀족회의는 고구려 후기 정치의 한 특색으로 이해되고 있다.

귀족합의 정치는 왕권의 약화라기보다는 오히려 왕실이 특정한 귀족의 독점적 권력장악을 막기 위한 안배로 지속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왕권이 약했던 양원왕과 보장왕 시기에는 귀족합의 정치가 아닌 특정 집단의 독재권력이 등장했다. 
귀족회의가 정상적인 기능을 하던 평원왕과 영양왕, 영류왕 시기의 왕권은 결코 약세가 아니었다. 평원왕과 영양왕은 모두 자신이 군대를 직접 거느리고 전쟁을 지휘했으며, 3명의 왕 모두 25년 이상의 재위기간 동안 안정적인 정치를 펼쳤다. 동맹행사에서도 왕은 최고의 권력자로서 행사를 주관했다. 평원왕이 유력한 귀족인 상부 고씨와 사돈관계를 맺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왕권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평원왕 13년 8월에는 고구려의 새로운 수도인 장안성을 짓는 공사가 한참 진행중이었다. 그런데 메뚜기떼와 가뭄의 재앙이 있자 평원왕은 즉시 공사를 중지시켰다. 성을 만드는 일도 중요했지만, 그보다는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아야 하고 농사일이 더 소중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평원왕 초기부터 왕이 귀족세력을 쉽게 능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평원왕은 자신의 지지기반을 확충하기 위해 자연재해에 시달린 백성들을 위한 적극적인 배려로 백성들의 지지를 얻었다. 평원왕 5년인 563년 여름에 큰 가뭄이 있었다.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는데, 어찌 백성들의 어버이 된 자가 홀로 배부르게 먹을 수 있겠느냐. 앞으로 내게 올리는 식사를 크게 줄이도록 하라. 나 역시 백성들과 고통을 나누겠노라. 이렇게 비가 오지 않으니 내가 산천에 나아가 천신에게 기도하여 가뭄이 멈추기를 기도해야겠다.”

평원왕은 이렇게 말하며 직접 산천에 나아가 종일토록 비가 오기만을 기도했다. 왕이 솔선수범해서 식량을 절약했던 일은 삼국시대 왕들 가운데 평원왕이 유일하다.

평원왕 23년 10월에도 백성들이 굶주림을 당하자, 평원왕은 직접 백성들의 생활을 살피며 그들을 위로하기도 했다. 평원왕 25년에는 명령을 내려 긴급하지 않은 일을 줄이고, 관리들을 여러 고을에 내려보내 농사와 길쌈을 장려하는 등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먼저 넉넉해지도록 노력을 기울였다.

평원왕은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통해 자신의 지지기반을 넓혔다.
이것만으로 왕권이 안정될 수는 없었다. 평원왕에게는 자신의 친위세력이 필요했다. 평원왕 시기에는 돌궐, 백제와 신라, 북주와의 전쟁이 있었다. 이때 등장한 신진 장수들이 그의 친위세력이 될 수 있었다.

평민이었던 온달이 재주만으로 장군이 되고 왕의 사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평원왕의 정치적 이해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연개소문의 연씨 가문도 이때에 새롭게 등장한 신진세력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을파소의 등용이나 온달의 등용은 모두 왕권강화를 위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평강공주와 온달의 결합이야기는 실제 사실에서는 그 시작과 끝이 반대가 아닐까 한다. 전해 오는 이야기를 합리적으로 이해한다면, 온달이 평민으로서 장군으로 출세한 후에 평강공주와 만났으며, 왕의 사위로 인정되는 과정이 워낙 파격적이었기에 이와 같은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이며, 두 사람의 결합이 가능했던 것도 당시의 정치사회적 상황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고구려가 귀족간의 내분으로 혼란하던 551년 고구려의 오랜 동맹국이자 북방 유목세계의 패자였던 유연을 꺾고 새롭게 등장한 돌궐이 고구려의 신성과 백암성을 공격해 온 사건이 일어났다. 고구려에게는 근래에 드문 외적의 침입이었다. 비록 고흘 장군이 출전하여 돌궐을 격파했지만, 강적 돌궐의 위협은 상당 기간 계속되어 고구려는 국력을 기울여서 맞서야 했다.

이때를 틈타서 552년 신라와 백제 연합군이 고구려 남부의 한강 유역을 공격해 왔다. 고구려는 돌궐을 막는 것이 더 중요했던 상황이라 몰래 신라와 협정을 체결했다.

“신라가 한강 유역과 마운령과 황초령 이남의 동해 연안을 차지하는 것을 허락한다. 그 조건으로 신라는 백제의 침입을 막고 더 이상 고구려를 공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조건을 통해 신라의 진흥왕은 고구려의 동의를 받은 상태에서 백제를 역습하여 백제 성왕을 죽이고 한강 유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고구려는 이때에 넓은 한강 유역을 빼앗겼지만, 북쪽으로 돌궐을 막는 것이 중요했으므로 남쪽을 포기했다.

이러한 대사건이 평원왕의 부친인 양원왕 시기에 이루어졌다. 평원왕에게는 돌궐과 전쟁을 벌여 승리하는 것이 제일의 과제였고, 한강 유역을 회복하는 일은 그 다음이었다.

돌궐과의 전쟁은 비교적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그것은 돌궐이 고구려의 지배하에 있던 말갈과 거란까지 자신들의 세력 안에 넣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고구려와 돌궐과의 전쟁을 보여 주는 기록은 많지 않으나, 거란 지배를 둘러싸고 벌어진 돌궐의 이계찰대가 이끄는 대군과 고구려·말갈군의 싸움에서 고구려가 크게 이겼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때 고구려는 돌궐을 크게 격파하고 멀리 외몽골 지역까지 쳐들어갔다고 추정된다.
평원왕 시기에는 돌궐만이 아니라 앞서 보았던 북주와의 전쟁도 있었다. 5세기와 6세기 초까지 큰 전쟁이 없어 무장들의 출세가 드물었다면, 6세기 말에는 이처럼 잦은 전쟁으로 온달과 같은 전쟁영웅의 정치적 발언권이 강해질 수 있었다. 온달에게는 전쟁이 출세의 기회였다.
국토회복을 위한 온달"
590년 평원왕이 죽은 후 처남인 영양왕이 왕위에 올랐다. 온달의 직위 또한 올라갔다. 이제 온달은 평소 자신이 생각했던 것을 왕에게 아뢰었다.

“신라가 우리 한강 유역의 땅을 빼앗아 저들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곳의 우리 백성들은 하루빨리 자신들을 구해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원하옵건대 대왕께서 저를 믿어 주시어 군사를 주신다면 반드시 우리 땅을 도로 찾아오겠습니다.”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신라에게 넘겨준 것은 대륙에서 밀려오는 돌궐 등과의 싸움에 전력하기 위함이었다. 고구려 사람들은 돌궐의 침입만 아니었더라면 한강 유역을 빼앗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었기에 그 땅을 되찾으려는 욕망이 매우 컸다.

고구려의 주변정세를 보면 북방에서는 돌궐이 약화되고 중원에서는 새롭게 수나라가 통일국가를 이루어 고구려를 향해 야심을 품고 있었다. 수가 고구려를 위협하기 전에 후방을 편안히 해둘 필요가 있었다. 영양왕은 온달의 제의를 기꺼이 수락했다.

온달은 전장에 나가기 전에 평강공주에게 맹세했다.
“조령과 죽령 이북의 땅을 되찾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을 것이오.”

온달은 강한 의지를 갖고 싸움터에 나갔다. 온달은 신라가 차지하고 있던 아차성을 공격했다. 아차성은 서울과 구리시 사이에 있는 아차산성으로 추정되는데, 단양에 있는 온달산성이란 견해도 있다. 온달은 아차성 아래에서 신라군과 싸우다가 그만 화살에 맞아 죽었다. 평강공주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온달은 편히 눈을 감지 못했다.
장례를 치르고자 온달의 시신을 넣어 둔 관을 옮기려고 했으나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온달이 약속을 지키지 못한 한 때문이라고 여기고 평강공주를 모셔왔다. 평강공주는 온달의 관을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장군, 살고 죽는 것이 이미 결정되었는데, 이제는 돌아갑시다.”

그러자 관이 움직였다. 온달의 시신은 평양으로 옮겨졌고, 성대한 장례가 치러졌다. 영양왕도 이를 듣고 크게 슬퍼하였다. 백성들도 고구려 영웅의 죽음 앞에 크게 슬퍼했다.

온달은 바보라고 놀림을 받았지만, 고구려의 위대한 장군으로 백성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평강공주는 자신의 뚜렷한 의지를 갖고 삶을 스스로 개척하여 바보라 놀림받던 온달을 고구려의 영웅으로 변모시킨 현명한 아내이자 위대한 여성이었다.
온달은 진짜 바보였을까?
부와 명예를 초개처럼 내던지고 바보 온달()에게 시집간 평강공주. 바보에서 용맹한 장수로 변신한 온달. 온달의 애달픈 죽음과 이들의 생사를 초월한 교감.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익히 들어온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의 얘기다. 이 이야기에서 ‘온달 콤플렉스’라는 말이 생겼다. 뛰어난 재력이나 능력을 가진 여성과 결혼해 신분 상승을 꿈꾸는 남성의 심리적 의존 상태를 말한다. 온달 콤플렉스는 종종 여자의 ‘신데렐라 콤플렉스’와 비교된다.

온달은 설화 속 인물인가, 아니면 실존 인물인가. 설화라고 보는 입장에서는 고구려 같은 신분제 사회에서 최상층 귀족도 아니었던 온달이 공주와 결혼했다는 점, 여자인 평강공주가 결혼에 적극적이었다는 점, 바보로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뛰어난 무공을 세워 대형()이란 벼슬을 받은 점 등을 이유로 든다.

하지만 온달은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이다. 충북 단양군에는 온달이 신라군의 침입 때 성을 쌓고 싸우다가 전사했다는 온달산성이 있다. 둘레 683m를 돌로 쌓은 성으로 100m 정도가 붕괴됐지만 나머지 부분은 아직까지 남아 있다. 단양은 매년 가을에 온달문화축제를 열고 있다. 다만 온달이 언제 태어나고 죽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550년경에 태어나 590년을 전후로 사망했다고 추정할 뿐이다.

삼국사기" 온달열전" 은 온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온달은 고구려 평강왕 때 사람이다. 겉모습은 꾀죄죄하여 우스웠으나 속마음은 순박했다. 집이 무척 가난해 항상 먹을 것을 빌어 어미를 봉양했다. 찢어진 옷과 해진 신발로 거리를 왕래하니,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바보 온달이라 했다.”

사료에 기록됐듯이, 온달은 매우 가난한 집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없고 어머니는 앞을 보지 못했다. 하지지만 효성이 지극한 온달은 거리를 돌아다니며 밥을 구걸해서 어머니를 봉양했다. 바보 온달은 고구려 도성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명물이었다. 어른들은 어린아이가 떼를 쓰면 ‘바보 온달한테 데려간다’고 겁을 주곤 했다.

평강공주는 고구려 제25대 평강왕(평원왕 또는 평국왕이라고도 한다. 재위 559~590)의 외동딸이었다. 고집불통에 울보여서 뜻대로 되지 않으면 막무가내로 울었다. 내우외환에 시달리던 왕에게는 딸이 또 하나의 골칫거리였다. 공주의 울음을 막을 요량으로 왕은 공주가 울 때마다 “이 다음에 커서 바보 온달에게 시집을 보낸다”고 말했다. 그런데 말이 씨가 됐다.

공주가 열여섯 살이 되자 평강왕은 사윗감을 물색했다. 왕권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될 세력 있는 귀족 집안의 자제들이 후보 1순위였다. 그런데 공주는 바보 온달과 결혼하겠다고 생떼를 썼다. 왕이 윽박지르고 달래봐도 소용없었다. 결국 공주는 궁궐을 나와 온달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온달은 바보다? 그렇지 않다? 온달은 바보가 아니라 바보로 만들어진 것이다? 온달이 바보라고 불린 이유는 겉모습 때문이었다. 어떤 아비가, 그것도 절대 권력을 가진 왕이 단지 ‘시끄럽게 운다’는 이유만으로 딸을 바보에게 시집보내겠는가?

온달은 신분이 하급 귀족 정도는 됐을 것으로 보이며, 신흥 귀족일 것으로 추측된다. 고구려는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을 거치면서 전성기를 누렸지만 이후 귀족들의 다툼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웠다. 평강왕은 귀족 세력을 제압하기가 버거웠다. 귀족 세력이 강해질수록 왕권은 약해져만 갔다. 
평강왕이 등극할 당시 고구려는 나라 밖에서도 위협을 받는 상황이었다. 신라는 진흥왕 재위 20년, 백제는 위덕왕 재위 6년째를 맞고 있었다. 당시 평강왕은 자신을 도와줄 새로운 인물이 필요했다. 그 시절에 평강왕의 눈에 들어온 인물이 바로 온달이었다. 온달은 나중에 대형이라는 높은 관직을 얻게 된다. 공적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대형이라는 관직에 오르려면 귀족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온달은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한 무장이었다. 중국 후주 무제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등 전쟁터에서 많은 공을 세우면서 자타가 인정하는 장군이 됐다. 따라서 평강왕이 온달을 신뢰해 예를 갖춰 정식 사위로 맞아들였다고 보는 편이 더 설득력 있다.

혹자 는 삼국사기" 영양왕대(재위 590~618)에 나오는 고승 장군이 온달의 다른 이름이라고 한다. 성을 내리는 사성()의 관습은 삼국시대에 자주 있었던 일이다. 왕이 나라에 공을 세운 온달에게 고씨 성을 하사했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무공의 대가로 이름을 승()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평강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영양왕은 즉위 첫해에 신라 정벌을 계획했다.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와의 결전이 불가피한 고구려로서는 신라와 동맹을 맺어도 시원찮을 판인데, 무모한 싸움이었다. 
영양왕은 내심 온달의 출정을 바랐고, 온달은 출정을 자원했다. 죽음을 예견했는지, 온달은 떠나면서 “계립현과 죽령 이북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실제로 온달은 아단성 아래에서 신라군과 싸우다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신흥 귀족, 고승 장군 에서 "바보 온달"의 이미지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2017년 12월 18일 월요일

향일암向日庵.금오산

향일암向日庵.


암자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율림리 산7번지의 금오산에 있는 사찰이다. 화엄사의 말사로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40호로 지정되었으나, 2009년 12월 20일에 화재로 대웅전, 종무실, 종각 등 건물 3동이 전소하였다. 

금오산()이 바다와 맞닿은 가파른 언덕에 있다. 왼쪽에는 중생()이 서원()에 감응하였다는 감응도, 앞바다에는 부처가 머물렀다는 세존도, 오른쪽에는 아미타불이 화현하였다는 미타도가 있다. 

원효가 659년(의자왕 19)에 창건하였다고 한다. 관음전 앞에 원효대사가 수도를 했다는 좌선암이 있다. 조선시대인 1715년에 인묵이 지금의 자리로 암자를 옮기고, ‘해를 바라본다’는 뜻의 향일암이라고 명명하였다. 향일암은 금오산 절벽 사이의 울창한 동백나무와 남해의 일출 광경이 일품이어서 전국 각지에서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이다.
관음보살과 하늘에 소원을 기원하는 사람들은 대웅전 주변 바위 위에 작은 돌이나 동전을 올려 놓기도 한다. 대웅전 뒤편으로 숨은 듯 작은 바위 길을 따라가면 동백꽃의 보드라운 아름다움이 마음까지 편하게 만드는 곳으로 바다를 바라보고 자리한 관음전이 있다. 종교를 떠나 바라는 모든 일들을 소망하고 너른 바다처럼 넉넉한 마음을 담아보자. 향일암 입구 임포마을에서는 바다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엿볼 수 있다. 붉은 햇살 아래 홍합을 말리는 모습은 여느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다른 진풍경이다.
여수 향일암 원통보전여수 향일암 원통보전은 본래 대웅전이었다. 대웅전은 항상 사찰의 중심이 되는 전각으로 큰힘이 있어서 도덕과 법력으로 세상을 밝히는 영웅을 모신 전각이라는 뜻이다. 대웅은 고대인도의 ‘마하비라’를 한역한말로 법화경 에서 석가모니, 즉 부처님을 위대한 영웅, 대웅이라 일컫는데서 유래하고 있다. 대웅전에는 중심에 불상을 안치하는 수미단(불단)과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를 수호하는 신중을 모시는 신중단이 있다.여수 향일암 관음전(용왕전)관음전은 대웅전의 우측에 위치한 전각으로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모시고 해상용왕과 남순동자가 협시하고 있다. 다른 명칭으로는 용왕전이라고도 한다. 용왕은 농사의 풍작과 더불어 바다의 풍어, 천재 지변으로부터의 보호, 그리고 가족의 건강과 안녕을 축원하며 사바세계의 중생에서 복을 주는 선신이다.여수 향일암 관음전은 원효대사가 수도도중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곳으로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이다.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를 서원하는 보살로 모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언제 어디서나 중생과 같은 몸으로 나서 중생을 감싸고 제도한다. 그러므로 어떤 어려움이나 괴로움에 처한 중생들이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의지하며 항상 마음속에 간직하고 공경하면 고난과 불행을 면하고 해탈을 얻게 된다. 이는 관세음보살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인해 관세음보살과 중생이 일체감을 형성하고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여수 향일암 원효스님 좌선대여수 향일암 해수관세음보살 앞쪽 바닷가에 있는 바위로, 원효스님이 좌선했다는 전설이 있는 바위가있다.
여수 향일암 해수관세음보살여수 향일암 관음전 우측에 남해바다를 바라보며 남해바다를 지나다니는 수많은 배들의 안녕과 중생들의 생명을 보호해 주는 보살이다.
여수 향일암의 관음전 앞에서 본 바다의 풍경이 일품이다. 멀리 지나다니는 배와 관음신앙을 상징하는 난간의 거북형상들이 항해의 안녕을 기원하는 신앙의 특징을 드러내어 준다.
여수 향일암 삼성각여수 향일암의 대웅전 좌측에 위치한 전각으로 산신, 칠성, 독성 세분의 서인을 함께 봉안하고 있다. 산신은 금오산을 주관하며 불법과 사찰을 수호하고 중생의 자손 창성과 부귀를 축원하고, 칠성은 중생의 길흉화복 수명과 인연의 법칙 속에서 변함없이 움직이는 중생의 운명을 축원하여 준다고 한다.

남도의 바다 위로 촛불을 켠 듯 어둠을 밝히는 향일암의 일출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태양의 아름다움은 눈이 시리도록 바다를 바라보게 만든다. 기암절벽을 올라 거침없이 탁 트인 남도의 바다를 눈 아래로 바라보는 일출은 일상적인 아침과는 다른 하루를 열어준다. 여수시내에서도 바다를 향해 한참을 달려가 만나는 향일암은 삼국시대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며 관음 기도의 도량으로도 유명하다. 신라의 고승이 백제의 영토였을 남도의 끝자락에 사찰을 세우게 된 연유는 알 수 없다. 절묘하게 이어지는 통로를 따라가는 길은 가슴이 툭 터지듯 절벽 사이 넓은 자리에 대웅전이 자리잡고 있다. 
1984년 2월 29일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40호로 지정되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본사 화엄사의 말사()로 금오산()이 바다와 맞닿은 가파른 언덕에 있다. 왼쪽에는 중생()이 서원()에 감응하였다는 감응도, 앞바다에는 부처가 머물렀다는 세존도, 오른쪽에는 아미타불이 화현하였다는 미타도가 있다.

《여수군지》와 《여산지》에 따르면, 659년(백제 의자왕 19) 원효대사가 원통암()이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고 하지만 신빙성이 적다. 또 950년(고려 광종 9) 윤필() 거사가 이곳에 수도하면서 원통암을 금오암()이라 개칭하였다고도 하지만 역시 믿을 만한 자료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1713년(숙종 39)에 당시 돌산주민들이 논과 밭 52두락을 헌납한 지 3년 뒤인 1715년에 인묵대사()가 지금의 자리로 암자를 옮기고 향일암이라고 명명하였다고 한다. 향일암이라는 명칭은 금오산의 기암절벽 사이에 울창한 동백이 남해의 일출과 어우러져 절경을 빚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전한다.

관음전은 대웅전 뒤쪽으로 50m 떨어진 커다란 바위 위에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초익공계이며 바람막이판이 달린 맞배지붕이다. 1991년에 조성한 관음보살상과 관음탱이 있고, 관음전 옆에는 석조관음보살입상과 동자상이 있다. 대웅전 뒤에 있는 일명 흔들바위는 경전을 펼쳐 놓은 듯한 형상인데, 이 바위를 한 번 흔들면 경전을 사경한 공덕이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매년 12월 31일과 1월 1일에는 향일암 일출제가 열려 전국 각지에서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해맞이 명소이기도 하다.
경내는 대웅전과 관음전·용왕전·삼성각·종각·요사채·종무실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건물들은 모두 1986년에 새로 지은 것인데, 2009년 12월 20일 화재가 발생하여 대웅전과 종각·종무실이 전소하였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구조에 배흘림 기둥을 세우고 그 위로는 창방()이 얹고 헛첨차를 결구한 건물이었으며, 1983년에 조성한 소형 범종, 1987년에 조성한 청동석가모니불과 관음보살 및 지장보살, 1988년에 조성한 영산회상도와 금니()로 채색한 신중탱화 등이 봉안되어 있었다.
향일암은 전국 4대 관음 기도처 중의 한 곳으로 644년 백제 의자왕 4년 신라의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원통암이라 불렀다. 고려 광종 9년(958)에 윤필거사가 금오암으로, 조선 숙종 41년 (1715년)에 인묵대사가 향일암이라 개칭했다. 이 곳은 원통보전, 삼성각, 관음전, 용왕전, 종각, 해수관음상을 복원, 신축하여 사찰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는데 2009년 12월 20일 화재로 소실된 대웅전(원통보전), 종무소(영구암), 종각을 2012년 5월 6일 복원하여 낙성식을 가졌다.
12월 31일에서 1월 1일까지 향일암 일출제가 열리고 있어 이곳 일출 광경을 보기위해 찾는 관광객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나오는 길엔 방죽포 등 해수욕장이 많고, 돌산공원, 무술목전적지, 고니 도래지, 흥국사 등이 가까이 있다. 향일암에는 7개의 바위동굴 혹은 바위틈이 있는데 그 곳을 모두 통과하면 소원 한가지는 반드시 이뤄진다는 전설이 있다. 소원을 빌기 위해 대웅전과 용왕전 사이에 약수터 옆 바위와 관음전 뒷편 큰 바위에 동전을 붙이거나 조그만 거북 모양 조각의 등이나 머리에 동전을 올려놓기도 한다.

정의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에 있는 향일암에서 매년 새해 첫날 거행되는 해맞이 관련 행사.
개설
‘해를 향한 암자’라는 뜻의 향일암()은 한국의 4대 관음기도처 중 하나이다. 무성한 동백나무와 아열대 식물이 울창하며, 금오산 주변의 기암괴석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남해 수평선의 일출은 천하일경으로 유명하며, 매년 새해 첫날 해맞이 행사로 ‘향일암일출제’가 열린다.
개최경위
해맞이 명소로서 여수의 이미지를 새로이 부각시키고 시민 화합과 희망찬 여수 발전을 기원하기 위해 1996년부터 향일암일출제가 시작되었다.
행사내용
매년 1월 1일 해가 가장 먼저 뜨는 여수시 돌산읍 임포마을 향일암 일대에서 해맞이 행사를 개최한다. 국악한마당, 일출가요제, 관현악 합주, 촛불 의식, 카운트다운, 제야의 종, 불꽃 잔치 일출 가요제, 댄스 페스티발, 가족 영화제, 사물놀이, 시낭송, 일출 소원 풍선 띄우기, 소원함 띄우기, 여선 해상 퍼레이드, 덕담 한마당, 행운 기원 물놀이 등이 시민 참여 행사로 거행된다.
현황
항일암일출제는 매년 12월 31일에서 새해 1월 1일까지 개최된다. 2007년도에는 전국에서 20,000여 명이 해맞이를 보기 위해 여수 향일암을 방문하였다.



마을에서 향일암을 오르는 산길은 제법 가파른 편인데, 중간쯤에매표소를 지나 계단길과 평길을 돌아오르는 길이있다. 암자근처에 이르면 집채 만한 거대한 바위 두개 사이로 난 석문을 통과해야 하는데 이곳이 다른 사찰의 불이문에 속하는 곳이다. 또한 임포마을 입구에는 수령이 5백년이나 된 동백나무가 있고 향일암 뒤 금오산에는 왕관바위,경전바위,학사모바위,부처바위가 있다. 남해 수평선의 일출 광경이 장관을 이루어 향일암이라 하였으며, 또한 주위의 바위모양이 거북의 등처럼 되어 있어 영구암이라 부르기도 한다. 

등산로

1) 향일암 입구 20m전방 오른쪽에 금오산 등반로 입구 표시를 따라 금오산 정상을 오를수 있다. 정상까지 느린 걸음으로도 30여분이면 족히 오를수 있는데 정상에서 바라보는 남해바다의 풍광을 그리는데는 언어의 한계성을 느낄정도이다.
2) 죽포에서 향일암으로 내려오는 4시간 정도의 코스도 있다.

관광코스안내

유람선/ 돌산대교 - 장군도 - 진남관 - 오동도 - 무술목전적지 - 방죽포 해수욕장 - 향일암

관 람 료

대인 - 개인 2,000원 / 단체 할인 없음
군경, 청소년(중.고등학생) - 개인 1,500원 / 단체 1,200원
어린이(초등학생) - 개인 1,000원 / 단체 800원
※ 단체 30인 이상

화장실

있음

주차요금

무료

시내뻐스;  여수 터미널 - 향일암 가는 버스 111, 113번 향일암 들어가는 거진 1시간 정도.



금오산전남 여수시 돌산읍 율림리. 높이 323m이며, 산 안에 향일암이 있다.


위치전남 여수시 돌산읍
높이323m


여수반도에서 돌산대교로 이어진 전라남도 남단의 돌산도에는 여수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 일출 풍경이 가장 뛰어나다고 자랑하는 향일암이 있다. 이는 해를 향해 있다는 뜻으로 이 산에 있는 암자이지만 산보다 유명하다.
향일암은 낙산사의 홍연암, 남해 금산 보리암, 강화도 보문암과 함께 우리나라 4대 관음기도처 가운데 하나로 금바위의 전설이 얽혀 있다. 풍수지리상 경전을 등에 모시고 바닷속으로 막 잠수해 들어가는 금거북이의 형상이라 한다. 대웅전 앞에서 왼쪽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봉우리가 머리, 향일암이 선 곳이 거북의 몸체에 속한다.
한때 거북 '구'자를 써서 영구암이라 부른 적이 있고 현재 영구암이란 편액이 남아 있기도 하다. 이러한 전설을 더욱 그럴 듯하게 꾸며주는 것이 이 일대 바위의 무늬이다. 바위마다 하나같이 거북의 등 모양을 닮은 문양이 나 있는 것이다.
향일암에서 백미를 이루는 장관은 원효대사가 수도했다는 관음전 앞에서 바라보는 풍경이다. 뒤의 이 산 오름길은 정상까지 단 20분 거리로 향일암 일대의 절경을 제대로 즐기길 원한다면 이 산정의 등행을 한번 해볼 만하다.
암자 뒤에는 어른이 흔들거나 아이들이 흔들거나 똑같이 흔들리는 바위가 있는데 설악산 흔들바위보다 조금 작은 이 바위는 흡사 경전을 펼친 모습이라 이를 한 번 흔들면 불경을 한 번 읽은 것과 같은 공덕이 있다 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흔들바위 입구에서 5분 정도 비탈길을 오르면 곧 시야가 툭 트이는 바위지대 위에 서게 된다. 촛대바위·기둥바위 등 기이한 형상의 바위들이 짙푸른 바다에 서 있는 모습은 다른 곳에서는 좀체로 보기 힘든 멋진 광경으로 일출맞이를 해보는 것이 좋다. 널찍한 암반을 이룬 정상에 올랐다가 하산은 왼쪽의 잘록한 안부로 하거나 오른 길을 되짚어 내려간다.
뛰어난 향일암 일원의 경관을 보호하기 위하여 1984년 2월 29일 문화재자료 제40호로 지정하였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산의 높이와 별개로 이 산을 명산이라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여수 금오산 가파른 절벽 사이에 있는 향일암은 644년(선덕여왕 13년) 신라 원효대사가 창건한 절이다. ‘해를 향한 암자’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전국 4대 관음 기도처 중 한 곳으로 많은 관광객과 순례자들이 찾는다.

매표소를 지나 언덕길을 오르다가 사람 하나 간신히 드나들 만한 바위 사이 길을 통과하면 동백나무와 아열대 식물에 둘러싸인 향일암에 들어서게 된다. 향일암에는 바위 사이로 난 틈이 7개 있는데 이곳을 모두 통과하면 한 가지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다.

절에서 등산로를 따라 금오산 정상으로 올라가면 거북이 모양을 한 임포마을의 포구와 방죽포해수욕장 그리고 푸른 남해를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다. 인근에는 특산품을 파는 곳이 많은데, 여수 명물인 서대회와 돌산 갓김치가 입맛을 돋군다.

접근성
대중교통이 자주 있고, 버스나 기차에서 내려 찾기 쉬운 곳
대중교통이 드물게 있는 곳
대중교통이 하루 1~2번 정도로 뜸하게 다니거나 아예 없는 곳

주차
주차 걱정 없이 넉넉한 주차장이 있는 곳
주차장이 있으나 좁아서 이용하기 조금 불편한 곳
주차장이 아예 없거나 있어도 매우 협소한 곳

숙박, 음식점
주변에 해당 시설이 많이 있는 경우
 주변에 해당 시설이 드물게 있는 경우
주변에 해당 시설이 없어서 차를 타고 시내로 나가야 하는 경우
서대 대회무침,"포를 떠서 얇게 저민 서대를 막걸리에 주물러 놓고, 나박썰기 하여 소금에 절인 무를 초고추장(고추장, 식초, 고춧가루, 설탕, 다진 마늘ㆍ파ㆍ생강 등)으로 무친 다음 서대, 대파, 풋고추, 붉은 고추를 넣고 버무린 것이다. 박대회무침이라고도 한다.


여수돌산갓김치축제"

정의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서 개최되는 돌산갓김치 홍보 축제.

개설

돌산갓은 한반도 남단의 따뜻한 해양성 기후와 비옥한 알칼리성 토질의 여수 돌산 지역에서만 생산되는 특산품이다. 여수 지역에서 나는 돌산갓으로 김치를 담그면 독특한 맛뿐만 아니라 저장성이 뛰어나다. 또한, 칼슘이 발효에 의해 젖산과 결합, 젖산칼슘으로 되고 인과 결합해 뼈의 주성분이 되어 사람의 골격 형성에 중요한 작용을 한다. 또, 눈을 밝게 해 주고, 기침을 그치게 하며 기를 하강시켜 속을 따뜻하게 하여 냉·대하 치료, 머리와 얼굴의 풍()을 예방하는 데 효능이 있다고 한다.

연원 및 개최경위

여수 지역의 특산품인 돌산갓김치와 기타 농수특산품을 대내외에 알려 관광 상품화함으로써 농어업인의 소득 증대와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기 위해 ‘맛·향·인정의 어울림’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제1회 여수돌산갓김치축제가 2004년 11월 19일부터 11월 21일까지 진남체육공원에서 개최되었다.

행사내용

주요 행사로는 돌산갓김치 담그기, 돌산갓 퓨전요리, 돌산갓아줌마선발대회 등의 경연행사와 돌산갓재배방법사진전시회, 돌산갓 퓨전요리 전시회, 여수향토음식전, 우수농수특산물 전시판매, 그리고 풍물패 공연 및 노래자랑 등의 각종 공연행사가 펼쳐진다. 돌산갓김치를 직접 담그는 체험행사도 해마다 열리고있다.

현황

제2회 여수돌산갓김치축제는 2005년 11월 11일~11월 13일 ‘여수청정음식큰잔치’의 소축제로서 돌산읍 무술목 일원에서 개최되었다. 제3회 여수돌산갓김치축제는 2006년 11월 23일~11월 25일까지 종화동 하멜수변공원 일원에서 개최되었다. 2006년 11월 여수시는 경쟁력 제고와 지역 특화를 위해 여수 지역에서 개최되고 있는 9개의 축제를 5개로 통폐합하는 과정에서 여수돌산갓김치축제를 여수거북선대축제에 흡수·통합시켰다.

2007년에는 2012여수세계박람회 실사단 방문에 맞춰 여수거북선대축제의 부대행사로서 4월 11일부터 4월 14일까지 4일간 열린 한·중·일 음식큰잔치의 일부로 편입되어 돌산갓김치만들기 체험행사, 돌산갓 퓨전요리 시음행사가 펼쳐졌다.
《여수군지》와 《여산지》에 따르면, 659년(백제 의자왕 19) 원효대사가 원통암()이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고 하지만 신빙성이 적다. 또 950년(고려 광종 9) 윤필() 거사가 이곳에 수도하면서 원통암을 금오암()이라 개칭하였다고도 하지만 역시 믿을 만한 자료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1713년(숙종 39)에 당시 돌산주민들이 논과 밭 52두락을 헌납한 지 3년 뒤인 1715년에 인묵대사()가 지금의 자리로 암자를 옮기고 향일암이라고 명명하였다고 한다. 향일암이라는 명칭은 금오산의 기암절벽 사이에 울창한 동백이 남해의 일출과 어우러져 절경을 빚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