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23일 토요일

중국 . China, 中國, 2

중국 . China, 中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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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옛사건 들중?"
성복전투.城鬪.
고대 중국의 춘추시대에 진(晉)을 맹주(盟主)로 한 연합군이 초(楚)를 중심으로 한 연합군을 격파한 싸움.
BC 6세기 후반에 초나라는 중원()에 압박을 가하여 진()·채() 등을 지배하에 두고 송()을 공격하였다. 이에 진()의 문공()은 송()·진()·제()의 연합군을 인솔하여 BC632년에 위()의 성복에서 격전을 벌인 끝에 대승하고 초를 격퇴시켰다.
문공은 이 싸움이 끝난 후에 천토회()를 열어서 패자()가 되었다.

춘추오패.春覇.
중국 춘추시대 5인의 패자(覇者)를 일컫는 말.
춘추 5패, 전국 7웅
제후들이 쇠퇴한 주 왕실을 받들고 오랑캐를 막아 ‘중원의 평화 유지’를 외쳤던 시기가 춘추 시대야. 
중국에서 제국간() 혹은 제후간()에 맺어지는 회합이나 맹약을 회맹()이라 하며, 회맹의 맹주()가 된 자를 패자라고 한다. 춘추오패는 춘추시대 5인의 패자를 일컫는 말로 오백()이라고도 한다. 《순자()》에 의하면 오패라 함은 제()나라의 환공(), 진()나라의 문공(), 초()나라의 장왕(), 오()나라의 왕 합려(), 월()나라의 왕 구천()을 가리키는데, 한편 진()나라의 목공(), 송()나라의 양공()이나 오나라 왕 부차() 등을 꼽는 경우도 있다.

춘추시대에는 대체로 진() ·초()나라 혹은 제() ·진()나라 등 대제후가 중심이 되어 서로 세력을 다투며, 회맹을 되풀이하였기 때문에 특히 5인에 한하여 패자라고 하는 것은 그다지 의미 있는 일은 아니다. 오패라는 관념은 전국시대 중엽부터 발달한 오행()설의 영향으로 생겨난 것 같다.

전국7웅.戰雄.
전국시대에 중국의 패권을 놓고 다툰 7대 강국. 전국시대에 중국의 패권을 놓고 다퉜던 7개 강국을 일컫는 말로 동방의 제(), 남방의 초(), 서방의 진(), 북방의 연(), 그리고 중앙의 위()·한()·조() 나라 등이 이에 해당한다. 춘추시대에는 독립된 소도시 국가가 100여 개나 산재하고 있었으나 중기 이후 농업생산력의 향상과 상업경제의 발달에 따라 강대한 영역국가가 형성되었다. 7웅이란 이러한 강대국가를 일컫는 말로 각국은 더욱 부강한 국가로 발전하려고 내정의 충실과 군비의 확장에 진력하였다. 이 중 진나라는 상앙()의 변법() 이후 국력이 신장하여 BC 221년 천하를 통일하는 데 성공하였다.

춘추 전국 시대라는 말은 역사책 《춘추》와 《전국책》에서 따온 말이야. 《춘추》는 공자가 편찬한 역사책이고,《전국책》은 유향이 제후들의 사료를 편집하여 편찬한 책. 실제 역사 구분과 이 책의 구분이 딱 맞아떨어지는 건 아니지만, 춘추 시대는 《춘추》에 나오는 시대, 전국 시대는 《전국책》에 나오는 시대라고 봐도 무리가 없다.

“남을 알고 자신을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전쟁을 해서 이기는 것보다 전쟁을 하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이다.” 
“상황 판단이 승부를 결정한다.”  
바로 《손자병법》에 나와 있는 이야기들이다. 
춘추 전국 시대의 뛰어난 장수였던 손무가 오나라 왕에게 13편의 병법을 바쳤던 《손자병법》은 고대의 병법서 중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역사를 바꾼 미인들.

유왕 ♥ 포사 | 주나라'
주가 동쪽으로 수도를 옮기기 전 서주의 마지막 왕 유왕이 즉위할 당시에는 이미 나라가 쇠퇴하고 있었어. 그런데도 유왕은 먹고 마시며 놀기 바빴지. 유왕은 아름다운 포사를 보고 한눈에 반했어. 잘 웃지 않는 포사가 아름다운 미소를 보인 적이 있었다. 

왕후와 태자를 궁에서 쫓아내고 포사를 왕후로, 그 아들을 태자로 삼을 때였어. 그녀의 미소를 다시 보고 싶었던 유왕은 어떤 일이든 했어. 심지어 적이 침입했을 때 연기를 피우는 봉화를 올려 각 지역의 제후들의 군대가 모이게 하는 일까지 했다.

돌아가라는 유왕의 명령에 군사를 끌고 온 제후들은 분노에 차서 눈을 부라렸는데, 그때 포사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어. 진짜 적이 쳐들어왔음을 알리는 봉화를 올렸을 때는 아무도 오지 않았어. 유왕은 결국 적에게 잡혀 목숨을 잃었고, 포사는 적에게 잡혀갔으며 서주는 망하고 말았다.


헌공 ♥ 여희 | 춘추 시대.
춘추 시대 진()의 헌공은 유목 민족과의 전쟁에서 얻은 여희를 처음 본 순간,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어. 여희가 아들 해제를 낳자, 헌공은 태자인 신생을 폐하고 해제를 태자로 세우려 했어. 여희가 이를 말렸고, 헌공은 너그러운 마음의 여희를 더욱 사랑하게 됐어다. 헌공의 믿음을 얻은 여희는 신생을 없애기 위한 계획을 꾸몄다. 신생이 계모인 자신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다고 헌공에게 울면서 말하고는, 신생과 자신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헌공은 신생이 여희를 안으려는 것으로 오해했지만, 실은 여희가 자기 머리에 꿀을 발라 벌이 달라붙게 했고 신생은 그 벌을 쫓는 상황이었다. 이에 헌공은 신생을 죽이려 마음먹었고, 이를 안 신생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이윽고 병으로 세상을 떠난 헌공은 11살 해제에게 왕위를 물려주었고, 이후 진의 국력은 나날이 쇠퇴해 갔다.

서시 | 춘추 시대
미인계의 대명사가 된 대표적인 인물은 바로 월나라 서시야. 춘추 시대 월나라와 오나라는 전쟁 중이었는데, 월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서시는 오나라 왕 부차를 유혹하라는 임무를 받고 오나라로 갔다. 오나라 왕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했고 서시를 경계하라는 신하들의 충고도 듣지 않았지. 서시는 서서히 계획을 진행시켰다. 오나라 왕에게 지금이 전쟁을 할 때라고 말했고, 왕은 그대로 따랐다. 월나라에서 곡식 만 석을 꾸어달라고 했을 때에도 서시의 말에 따라 곡식을 빌려주었다. 다음 해 월나라는 싹이 나지 않게 한 종자로 곡식을 갚았다. 이로 인해 오나라는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부족했지만, 서시는 대군을 이끌고 전쟁에 나가라고 했다. 오나라는 모든 인력과 물자를 총동원해서 전쟁을 벌였기 때문에 국력이 바닥나 버렸다. 이때 월나라 왕 구천이 대군을 이끌고 공격하여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오나라 왕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미인계로 나라를 구한 서시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대.

춘추 전국 시대 고사성어'.
춘추 시대 · 오나라 왕 부차, 월나라 왕 구천
원수를 갚기 위해 쓰라림을 스스로 맛본다. B.C. 496년 오나라 왕 합려는 월나라로 쳐들어갔다가 월나라 왕 구천에게 패하여 전사했어. 그 아들 부차는 본국으로 돌아와 가시 위에 자리를 펴고 자며, 방 앞에 사람을 세워 두고 출입할 때마다 “부차야, 아비의 원수를 잊었느냐!”하고 외치게 하는 등 복수의 칼을 갈았어. 이 소식을 들은 월나라 왕 구천이 먼저 오나라를 쳐들어갔지만 패하고 말았어. 포로가 된 구천 부부와 신하 범려는 갖은 고역과 모욕을 겪은 끝에 영원히 오나라의 속국이 될 것을 맹세하고 귀국했어.

월나라 왕 구천은 자리 옆에 쓸개를 매달아 놓고 항상 핥아 쓴맛을 되씹으며 “너는 치욕을 잊었느냐!”하며 자신을 채찍질했어. ‘와신상담’은 부차의 와신(가시에 눕다)과 구천의 상담(쓸개를 맛보다)이 합쳐서 된 말로, 원수를 갚기 위해 쓰라림을 스스로 맛본다는 뜻

토사구팽 | 춘추 시대·월나라 왕 구천, 월나라 범려
토끼가 잡히고 나면 토끼를 잡던 사냥개도 쓸모가 없어져 잡아먹게 된다. 오나라에게 복수하는 데 큰 공을 세운 범려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어. 월나라 왕 구천에게 이런 편지를 남기고 말이야. “이미 소원이 이루어진 지금 저는 폐하께 더 이상 필요치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방해가 될 것입니다. 큰 공을 세운 저의 세력이 커져 폐하의 근심거리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범려가 월나라를 떠난 속마음은 따로 있었어.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지. “교활한 토끼가 죽고 나면 사냥개를 삶아먹는 것처럼 적국이 망하면 공신들은 죽임을 면치 못하는 법일세. 월왕은 원수의 굴욕을 견뎌낼 수는 있어도 공을 세운 대신들을 인정할 수 있는 위인은 못되네. 우리는 그와 고통을 함께할 수는 있지만 즐거움을 함께할 수는 없을 걸세.”


관포지교 | 춘추 시대·제나라의 관중과 포숙
관중과 포숙처럼 아주 친한 친구의 사귐, 관포는 관중과 포숙을 말하는데, 포숙에 대한 관중의 마음을 한번 들어볼래? “나는 포숙과 함께 장사를 했는데, 내가 이익금을 독차지했지만, 포숙은 나를 욕심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가난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세 번이나 벼슬을 하였지만 그때마다 쫓겨났다. 포숙은 못났다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세 번 싸워서 세 번 도망친 일이 있었다. 포숙은 나를 비겁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늙으신 어머님이 계시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포숙은 관중을 어떤 상황에서도 끝까지 믿어주었고, 관중은 ‘나를 낳아주신 것은 부모님이지만, 나를 알아 준 사람은 포숙이었다. ’라고 말한 데서 유래된 말로 아주 친한 친구의 사귐의 뜻.

어부지리 | 전국 시대·소대
사람들의 싸움을 틈타 제3자가 이득을 얻는다, 조나라가 연나라를 치려고 할 때, 소대가 조나라를 찾아가 들려준 이야기야. “큰 조개가 살을 드러내고 햇볕을 쪼이고 있을 때 물총새가 부리로 그 살을 찍자, 조개는 껍데기를 닫아 물총새의 부리를 물었습니다. 물총새는 비가 오지 않으면 조개가 죽을거라 생각했고, 조개는 껍데기를 열어주지 않으면 물총새가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서로 버티었다. 이 광경을 보던 어부가 물총새와 조개를 한꺼번에 망태 속에 넣고 말았습니다. 지금 조나라가 연나라를 치려하시는데, 두 나라가 오래 버티어 백성들이 지치게 되면 강한 진나라가 어부가 될 것 같습니다.” 소대의 이 비유를 들은 조나라 왕은 연나라 공격 계획을 중지했대. 여기에서 제3자들이 사람들의 싸움을 틈타 이득을 얻는 것을 ‘어부지리’라고 하게 되었다.

철기 보급, 제자백가
철이 세상을 바꾸다, 춘추 전국 시대에 철기가 본격적으로 사용되면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어. 철로 만든 단단한 쟁기와 괭이를 사용하고, 소를 농사에 이용하면서 땅을 더 깊게 갈 수 있게 되면서 수확량이 증가했고, 상업과 수공업도 발달했다. 철을 만드는 제철업과 소금을 만드는 제염업, 비단을 짜는 방직업도 발달했지. 큰 도시가 여러 개 생겨나고 화폐도 널리 사용되었어. 철로 된 무기가 등장하면서 전투력이 향상되고 전쟁의 규모도 더욱 커졌어.


다양한 생각의 꽃이 피다
춘추 전국 시대에 각국은 부국강병을 통해 좋은 나라를 만들려고 서로 다투었어. 그러면 백성들이 모여들었고, 모여든 백성들이 곧 나라의 힘이 되는 시대였거든.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 각국의 제후들은 국적과 신분에 관계없이 인재를 등용했어. 당시의 다양한 사상가와 학자들은 나라를 구하는 방안 등을 제시하며 제후에게 등용되기를 원했지. 다양한 학문이 발달하고, 많은 사상가와 학자가 나왔는데 이들을 ‘제자백가’라고 함.

제자백가의 주장은 무척 다양하며, 중국의 학문과 사상의 기초가 되었어. 도덕적인 정치를 강조한 공자와 맹자의 유가 사상, 엄격한 법의 제정과 시행을 강조한 한비자의 법가 사상, 도덕과 법률보다는 자연을 본받는 생활을 강조한 노자와 장자의 도가 사상, 평화 사상의 실천을 주장한 묵자의 묵가 사상 등이 있지. 유가는 훗날 유교로 발전했고, 도가는 중국의 전통 종교인 도교의 바탕이 되었다.

사회주의와 홍콩
중국이 지금 사회주의 국가라고 할 수 있느냐는 항의성 질문이 당연히 제기된다. 현 중국은 자본주의 국가라고 불러도 크게 어긋나지 않을 만큼 시장경제 체제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1979년 개혁개방 이후 약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중국‒외국 간 또는 학자 간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개혁개방의 최고 전도사라고 할 수 있는 덩샤오핑이 사회주의는 사회주의인데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라고 명명하면서 이론문제의 딜레마에 봉착한 중국공산당의 고민을 상당부분 해소시켰다.

중국은 사회주의냐 아니면 자본주의이냐 하는 이념논쟁으로부터 매우 자유스러워진 상태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첨단 자본주의를 구가하는 홍콩을 수용하고자 중국이 당장 자본주의 체제로 전환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홍콩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1국가 1체제 형식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150년간 첨단 자본주의 생리에 익숙해 온 그들에게 사회주의 체제로의 직행을 요구하는 것은 홍콩사회를 전복시킬 수 있는 크기의 충격이자 홍콩 번영의 종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중국공산당의 공식 이론에 따르면, 현재 중국은 사회주의 초급단계에 처해 있다. 이론적으로 중국의 사회주의 초급단계의 최종 시점은 2050년이다. 초급의 목표는 전체 중국의 생활수준이 먹고 살만한 상태인 소강()에 도달하는 것이다. 연해 대도시와 경제 특구들은 이미 그 수준에 다다른 것으로 볼 수 있다. 

중국정부는 그런 판단 아래 나날이 확대되고 있는 동서격차를 감소시키기 위해 서부지역 개발을 대대적으로 독려하고 있는 것이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경제발전이 황해를 위시한 연해지역 중심으로 전개되다 보니 지역 간 편차가 매우 크게 나타나고 있다. 지역 간의 발전격차는 물론 개인 간의 빈부격차는 중국의 발전을 위협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가 된 지 오래다.

연해와 내륙의 빈부격차를 줄이고, 전체 인민의 생활수준을 먹고 살 만한 상황으로 제고시키는 것이 사회주의 초급단계의 목표이다. 2050년쯤 되면 그 수준에 도달할 것이라고 중국정부는 내다보고 있다. 주권 반환 당시 홍콩의 자본주의 체제를 1997년부터 50년간 유지하기로 보장한 것이다. 그즈음이면 내지 도시와 홍콩의 경제 역량은 비슷한 수준이 될 것이라고 본다. 

중국 전체가 소강 수준에 도달하면 최첨단 자본주의 시스템을 시행하고 있는 홍콩의 충격을 흡수할 수 있다고 예상하는 것이다. 이론 시비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그 이후 즉, 중급단계나 종급단계에 대한 공식적인 의견은 발표하지 않고 있다.

춘추시대에는 주나라의 권위가 무너진 자리에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패자가 등장해 중원의 정치를 좌우했다. 다섯 사람의 유명한 패자 ‘춘추 5패’가 있었고, 각국은 독자적인 영역 국가로 성장했다. 이중 대표적인 강한 나라로는 진나라와 초나라가 있었다. 
그시기 우리나라에서는  기원전 700~500년경 : 철기문화 시작(함북 무산군 호곡 유적); 고조선 《8조 금법》 시행,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고사성어로 '와신상담()'이라는 말이 있다. 
'울퉁불퉁한 땔나무 위에 누워 잠을 자고 쓰디 쓴 곰쓸개 맛을 보며' 패전의 굴욕을 되새기는 모습은 춘추시대 각국의 치열한 생존경쟁의 단면을 보여준다. 

와신상담하지 않고서는 살아남기가 어려웠다. 
춘추 초기에 주왕으로부터 봉해진 제후국은 총 140여 개였으나 춘추 말기에는 진(), 초(), 제(), 한(), 위(), 조(), 연()의 7개국으로 정리되었다. 
기록에 남겨진 전쟁의 횟수만도 1,200회가 넘는다.

상나라 때는 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출전하였다. 왕을 호위하는 소규모 군대는 있었지만 아직 상비군 체제는 아니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제후국의 백성들이 임시로 소집되었고 군대 규모는 1만 명 정도였다. 주나라에 들어서면 상비군이 처음으로 만들어지고 수만 명의 군대가 왕의 직속 군대로 활약했으며 호경을 지키던 6사()와 낙읍을 지키던 8사, 나중에는 22사가 있었다. 물론 주의 전쟁에는 제후국의 군대도 소집되었다

전차전이 

상 · 주 시대의 전쟁은 대부분 황하 중하류의 평원지대에서 벌어졌다.
당시의 군인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고귀한 직업이었기에 하층 귀족인 사()가 상비군이 되었고, 전시에는 성 안에 사는 평민인 '국인()'도 참여하였으나 성 밖의 평민인 '야인()'이나 상인, 노예 등은 전쟁에 참여할 자격이 없었다. 
전차가 평원지대를 달리며 전투를 벌이는 전차전의 형태였기 때문에 보병은 보조적인 역할만 담당하였다.
큰 전투에는 3,000대 정도의 전차가 동원되었다. 
전차전은 말하자면 귀족형 전쟁이었다.
춘추시대까지는 대략 전차전 중심의 전투가 벌어졌다.
말기에 이르면 점차 기병이나 보병이 중요성을 띠게 되면서 커다란 사회변동이 수반되어 새로운 형태의 국가가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게 된다.
일정한 진법에 따라 전차가 죽 늘어선 상태에서 북이 울리면 공격이 시작되었고 전투 도중에도 양쪽 모두 예절을 지켰다.
무엇보다 용맹과 신의를 중하게 여겼다. 

패자의 등장, 중원 정치 좌우

춘추시대에는 주나라의 권위가 무너진 자리에 강력한 군사력을 쥔 패자()가 등장하여 중원의 정치를 좌우했다. 패자를 중심으로 각 제후국이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하였다. 다섯 사람의 유명한 패자가 있어 이를 '춘추 5패'라고 부른다. 춘추 5패는 기록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최초의 패자가 된 사람이 제나라의 환공이다. 이때는 초나라가 남방에서 흥기하여 강성해져서 중원을 위협하고 있었다. 중원의 여러 나라들이 동방의 제나라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각국의 동맹이 이루어졌다. 그는 관중을 재상으로 등용하고 혁신적인 개혁을 단행하여 부국강병에 성공함으로써 최초의 패자가 될 수 있었다.

전국시대가 

춘추시대에 주 왕실은 하나의 소국에 다름 아니었으나, 주 왕실을 존중한다는 명분이 제후들에게 호소력을 지닐 만큼 아직 그 권위는 인정되고 있었다. 이미 초나라 왕이 스스로를 왕으로 칭한 이후 세력이 약한 제후들까지도 왕을 자처하고 있었으며, 겉으로 주 왕실을 존중해 주는 척하던 봉건제도의 잔재는 전국시기에 이르면 깨끗이 사라지게 된다. 
전국시대는 진()나라가 한(), 위(), 조() 3국으로 분열했던 기원전 453년, 혹은 주 왕실이 이를 공인한 403년 이후의 시기이다. 주 왕실이 직접 제후국으로 봉한 진나라가 내부의 하극상으로 분열함으로써 봉건시대가 공식적으로 종언을 고한 것이다. 오로지 강한 국가만이 스스로 실력을 입증하여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세계에서 살아남을 것이다.

춘추시대 독자적 영역 국가' 

실제로는 춘추시대에도 각국은 독자적인 영역 국가로 성장해가고 있었다. 《춘추좌전》에 의하면, 소국 송의 재상 화원은 통행증 없이 송나라의 영토를 통과했던 대국 초의 사신을 사형에 처했다. 《사기》에 의하면, 오나라와 초나라는 국경에 서 있는 뽕나무의 소유에 관한 양국 주민의 시비가 원인이 되어 대규모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춘추시대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나라로 중원을 대표하는 진()나라와 양자강 유역에서 새로이 성장한 초()나라를 빼놓을 수 없다. 춘추 5패로 진의 문공과 초의 장왕이 잘 알려져 있다. 초는 더 남쪽의 신흥국 오()와 월()의 약진으로 잠시 위기를 맞았는데, 오의 합려와 그의 아들 부차, 월왕 구천 등이 역시 춘추 5패로 거론된다.

오 월, 철기 기술로 강성함' 

오와 월은 보병 중심의 새로운 전법을 터득하고 일찍이 철기의 기술을 습득하여 강성해졌다.
오와 월이 소유했다는 명검의 전설이 전해지던 중에, 근래에 발굴된 무덤에서 유명한 월왕 구천의 검이 실제로 발견되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오왕 합려는 즉위한 후 9년 동안 국력을 키워 초를 공격했는데, 다섯 번 싸워 다섯 번 이김으로써 초를 위기에 빠뜨리는 등 강성함을 자랑했다. 월왕 구천과의 싸움에서 손가락을 부상당한 후 이것이 원인이 되어 죽음에 이르렀다. 그가 강소성의 해용산에 묻힐 때 10만 명의 인부가 동원되었으며, 묘 안에는 3,000자루의 명검이 함께 묻혔다고 한다.

합려의 아들 부차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와신()', 즉 땔나무 위에서 잠을 자면서 고통을 상기하고 국력을 키워, 회계산의 전투에서 월왕 구천의 굴복을 받아내었다.
구천은 부차에게 뇌물과 미녀를 보내어 마음을 안심시키고, '상담()', 즉 쓸개의 쓴맛을 매일 맛보면서 스스로에게 회계산의 굴욕을 상기시켜 결국은 부차를 물리쳤다. 2,4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칼날은 지극히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날 밑의 양면에는 남색 유리와 터키석이 정교하게 상감되어 있는데 현대의 공예가도 어떻게 칼날 부분에 이러한 무늬를 넣을 수 있었는지 감탄할 뿐이다.

훌륭한 재상이 패자를 만들다,
각국이 패자로 등장하는 과정을 보면, 각 패자의 뒤에는 훌륭한 재상들이 있다.
제나라 환공에게는 '관포지교'의 아름다운 우정을 남긴 관중과 포숙이 있었고, 오나라 합려와 부차에게는 오자서가 있었으며, 월왕 구천에게는 범리가 있었다. 부차는 구천에게 패하고 자결할 때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는데, 그 이유는 오자서의 말을 듣지 않고 패하여 오자서를 볼 면목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제 환공은 포숙으로부터 관중의 인물됨을 듣고는 자신을 죽이려 했던 과거의 행적까지 과감하게 묻어버린 채 그를 재상으로 등용하는 용단을 내렸다. 바야흐로 실력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각군주들은 기존의 명문귀족들의 세력을 억압하고 세력기반이 없는 평민출신의 인재들을 과감히 등용하여 왕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화를 꾀했으며, 저마다 부국강병에 힘써 항쟁의 대열에 나섰다. 빈번한 전쟁 속에서 과학기술은 더욱 발전하여 통일 국가의 기초가 마련되었으며 훌륭한 사상가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향은 철기의 보급과 함께 전국시대에 더욱 확대되었다.


개자추.介推.
중국 춘추시대의 은사(隱士). 진나라 문공이 망명생활을 할 때 그를 모셨는데 후에 문공이 왕위에 올랐으나 개자추를 등용하지 않았다. 실망한 그는 산에 들어가 살았는데 문공이 산에 불을 질러도 나오지 않고 타 죽었다. 개지추()라고도 한다. 진()나라 문공()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아버지 헌공()에게 추방되었을 때, 19년 동안 그를 모시며 같이 망명생활하였다.  

문공이 진()나라 목공()의 주선으로 귀국하여 왕위에 오르고 많은 현신()을 등용하였으나, 개자추에게는 봉록을 주지 않았다. 실망한 그는 면산()에 들어가 숨어 살았다. 문공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그를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다. 문공은 그를 나오게 하기 위해 산에다 불을 질렀다. 끝내 나오지 않고 어머니와 함께 그대로 타 죽었다. 한식()은 개자추가 타 죽은 것을 기리기 위하여 행사로 기념한 날로서, 이때 찬밥을 먹는다고 한다. *무수한이야기들도 많다,

중원중심주의
2008년 홍콩에서 다시 애국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홍콩의 애국 정서 고양을 위해 중국정부가 올림픽을 그것과 직·간접적으로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1984년 6월 덩샤오핑은 반드시 애국자가 홍콩을 통치해야 한다고 했다. 덩샤오핑은 애국자에 대한 정의를 "자기 민족을 존중하고, 조국이 홍콩에 대한 주권을 회복하는 것을 성심성의껏 옹호해야하며, 홍콩의 번영과 안정에 해를 끼치지 않는 자"라고 한 바 있다. 1997년을 중심으로 중국의 대 홍콩 전략은 사실 국민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정부에 의해 홍콩인의 애국 교육은 꾸준히 진행되어 왔다. 2004년 2월에도 중국공산당 중앙은 애국자가 홍콩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더불어 1국가는 2체제의 전제이며, 중국의 약속인 홍콩인이 홍콩을 통치하는 조건에서 홍콩인은 애국자가 전제가 되는 홍콩인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고도의 자치는 홍콩특구가 중앙이 부여하는 권한하에서의 고도 자치를 말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이 말은 어제 오늘의 말이 아니다. 2003년부터 1국가는 2체제보다 절대적으로 우선하며, 중앙정부의 통치권은 홍콩인의 자치권에 우선한다는 점을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

홍콩인에 대한 중국인의 시각이 깔려있다. 홍콩인들은 장기적인 식민지 교육으로 국민 교육과 국가사회에 대한 정치 교육이 부족했던 바, 국가 관념이 희박하고, 민족의식이 부족하게 되었다 는 것이다. 중국학자들의 논문은 뚜렷한 이유도 없이 매번 결론은 중국 국민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입장은 바로 조국을 인식하여 자신의 민족적 책임감을 드높이는 것이라는 쪽으로 치닫고 있다. 중국정부는 애국자가 홍콩을 통치한다는 덩샤오핑의 원칙을 되풀이해서 발표하면서 홍콩의 친중국 매체를 총동원하여 애국자 교육을 계속하고 있다. 언론이 보기에 애국자는 정치 체제 문제에 있어 중국정부의 의견을 지지하는 자이다. 
홍콩을 통치할 자격과 능력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중국정부와 의견이 다른 사람은 비애국자로서 홍콩을 통치할 자격도 능력도 없는 사람이 된다. 심지어 매국노나 간첩으로 규정되기도 한다.

주권 회귀 5주년을 맞은 2002년에 총서기 장쩌민()은 홍콩 동포는 특별행정구의 주인이자 국가의 주인인데, 국가 관념과 민족의식을 부단히 증강시켜, 스스로 조국의 안전과 통일을 지키고, 조국과 민족의 전체 이익을 지켜야 한다고 했다. 이제 조국의 통일과 민족의 이익은 홍콩인들의 의식을 호시탐탐 지켜보게 되었다.

홍콩에서 애국이라는 정서가 최고조에 달한 것은 중국 최초의 우주인 양리웨이()가 방문했을 때이다. 중국은 2003년에 유인 우주선 발사에 성공했다. 200년 전부터 서구에 뒤지기 시작한 중국은 19세기 내내 그리고 20세기 까지도 서구열강으로부터 수모를 당해 왔다. 

직접적 원인은 군사무기를 비롯한 과학기술의 후진성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동안 그들은 역사의 한을 풀기 위해 모든 지도자가 총력으로 핵무기를 위시한 첨단기술의 개발에 매진하여 왔다. 1950년대에는 원자폭탄, 1960년대에는 수소폭탄, 1970년대에는 대륙 간 탄도 미사일 개발에 성공하였다. 이후 우주를 향한 계획을 차근차근 실천해 왔던 것이다. 유인 우주선의 성공은 21세기 중국 과학사의 가장 위대한 사건임이 분명하다. 중국은 유인 우주선의 성공을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까지 국민 통합 교육에 최대한 활용했다.

2003년 11월 수만 명이 홍콩 스타디움에 운집하여 양리웨이 환영 행사를 거행했다. 6일간의 방문 기간 동안 홍콩 전체가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는데, 모든 행사는 애국이라는 단 하나의 목표가 돋보이도록 준비되고 연출되었다. 
홍콩 전체가 애국 교육의 시험장으로 급조된 느낌이었다. 친중국계 신문들조차 행사의 목적이 사회적 통합과 애국심 고취를 위해서 기획되었다고 공공연히 보도 하고 있었다.

미국의 민간단체인 프리덤 하우스(Freedom House)가 발표한 「2008년 세계 각국 언론자유도 조사보고」에서 홍콩은 전 세계 195개 국가(지역) 중 67위인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66위에서 67위로 한 단계 내려갔다. 이에 대해 보고서는 홍콩의 언론매체가 최근 자가 심사를 계속하고 있으며 이것이 홍콩의 언론 자유에 영향을 미친 것 이라고 설명했다.
특색 사회주의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17년 10월 18일 개막한 중국 공산당 제19차 전국대표대회(당대회)에서 주창한 통치철학(·치국이정)을 말한다. 덩샤오핑()이 제기한 ‘중국 특색 사회주의’에 ‘신시대’라는 수식어를 달았는데 이는 시 주석이 집권 2기(2018~2022년)에는 과거 지도자들과의 차별화를 통해 1인 지배 체제를 더욱 공고화할 것임을 예고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의 핵심은 전면적 샤오캉(·모든 국민이 풍족하고 편안한 생활을 누리는) 사회 실현과 중화민족 부흥이란 ‘중국몽()’으로 요약된다. 2021년부터 2050년까지 두 단계로 나눠 국가 발전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덩샤오핑이 ‘도광양회()’를 추진한 것과 달리 시 주석은 ‘대국굴기()’도 내세웠다.
도광양회는 어둠 속에서 때를 기다린다는 것으로 조용히 실력을 키운다는 뜻이다.
시 주석이 이끄는 중국은 덩샤오핑 시절과는 상황이 다르다.

미국에 이어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성장했고, 군사력에서도 미국을 바짝 쫓고 있다.
이런 중국의 위상에 걸맞게 시 주석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강조하며 공산당의 신중국 건국 100년이 되는 2050년에 경제·군사·외교 등 모든 면에서 미국에 맞서는 초강대국이 될 것임을 분명하게 밝혔다.

덩샤오핑은 '4개 현대화'를 이룩하기 위해 경제건설이라는 중심점을 확고히 하였다. 
덩은 당시 
△1단계로 300달러의 1인당 국민소득을 20세기 말까지 4배로 끌어올려 원바오(溫飽·의식주가 해결된 기초생활) 수준을 이룩하고 
△2단계로 공산당 창건 100주년인 2021년까지 국민소득을 다시 2배로 끌어올려 중진국에 진입하며 
△3단계로 건국 100주년인 2049년까지 선진국에 진입한다는 목표를 제시했으며, 100년이 지날 때까지 이러한 체제목표가 바뀌어서는 안된다는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공산당 창당 100주년이 되는 2021년까지 샤오캉 사회를 건설하고 중산층 비율을 대폭 끌어올려 도농 소득격차를 줄이겠다고 밝혔다. 1970년대 말 덩샤오핑이 ‘선부()론’을 제시하며 전면적인 개혁·개방에 나선 뒤 중국 경제는 40년간 고속 성장을 했지만 빈부 격차가 크게 확대됐다.
중국의 지니계수(소득불평등 지수)는 유엔이 제시한 ‘사회 불안을 초래할 수 있는 수준’인 0.4를 넘어선 상태다. 이에 대한 처방전으로 시 주석이 제시한 게 샤오캉 사회다.

시 주석은 “지금부터 2020년까지가 샤오캉 사회의 전면적인 실현을 위한 결정적인 시기”라며 “2035년엔 모든 국민이 평등하게 발전하는 권리를 보장하고 도시와 농촌 간 격차를 현저하게 줄이겠다”고 약속했다. “문화 등 소프트파워를 곁들여 2035년부터 21세기 중반까지 부강하면서도 아름다운 사회주의 강국을 건설하겠다”면서 “그렇게 되면 중국은 종합적 국력과 영향력이 앞자리를 차지하는 국가로 부상할 것”이라고 말했다.


샤오캉"
중국이 2020년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는 사회상. 샤오캉(小康)은 의식주 걱정하지 않는 물질적으로 안락한 사회, 비교적 잘사는 중산층 사회를 의미한다. 장쩌민 국가주석이 2002년 16차 당 대회에서 "2020년까지 전면적인 샤오캉사회를 달성하겠다"고 말한 이후 중국발전의 상징어로 자리잡고 있다. 현 중국 정부가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있는 '大同사회(완벽한 평등,안락,평화가 있는 사회)'의 전 단계이다. 

'샤오캉'은 원래 시경 예기 등 중국 고전에 나오는 말이다. 
춘추전국시대 사상가인 맹자는 이를 "홀아비 과부 고아 등도 각자 설자리를 차지하는 상태"라고 표현했다. 불우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도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어야하는 상황이 곧 샤오캉인 것이다. 샤오캉은 "이상적인 가정경제 상황"으로 여겨져 왔다.

중국경제 발전론(분3보주)
덩샤오핑(鄧小平)이 지난 1987년 밝힌 3단계 중국경제 발전론으로, 溫飽 -> 小康 -> 大同로 나아가는 산바오조우(三步走)를 말한다. 원바오(溫飽)는 기본 의식주를 해결하는 단계를, 샤오캉(小康)은 의식주가 해결된 중등생활 이상의 복지사회를, 다퉁(大同)은 말 그대로 태평성대를 뜻한다.
1978년 12월 18일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11기3중전회)에서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파들은 회의에서 '대규모 대중적 계급투쟁'의 종결을 선언함으로써 계급투쟁이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마오쩌둥(毛澤東)시대의 노선과의 결별을 명확히 하고 4개 현대화(농업, 공업, 과학기술, 국방)와 경제발전을 당과 국가가 추구해야 할 새 시대의 총체적 과업으로 규정했다.
개혁.개방 과정의 3단계 발전전략 가운데 첫단계인 원바오(溫飽)단계는 80년대 말 완료했으며, 2002년 11월 열린 제16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장쩌민(江澤民) 총서기는 '정치보고'를 통해 지속적인 개혁 개방과 사회주의 시장경제 정책 추진으로 중국이 샤오캉(小康·의식주가 해결된 중등생활) 사회에 진입했음을 공식 선언했다.

4세대 지도부의 경제정책 형성

2002년 11월 제16차 공산당 전국대표대회()로 출범한 중국의 4세대 지도부는 2003년 10월 제16차 3중전회(), 즉 제16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를 통해 도시-농촌간, 지역간, 인간과 자연간 조화로운 발전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과학적 발전관’과 ‘조화로운 사회건설’의 경제이념의 초보적인 구상을 형성하였다.

중국은 2005년 10월 전당대회에서 과학적 발전관과 조화로운 사회건설 이념을 전면적으로 반영하여 2006년~2010년 경제사회발전계획, 즉 11.5계획을 작성하였다.

4세대 지도부는 2007년 10월 제17차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도 ‘11.5계획’의 기본 골격을 유지하면서, 구체적인 경제정책과 정부조직에 대해 부분적으로 보완하였다.
중국은 경제정책 수립과정에 있어 지도부가 정부, 민간연구기관으로부터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고, 이에 따라 형성된 기본 정책 방향을 국가발전개혁위원회(NDRCNational Development andReform Commission)가 정책으로 구체화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2011년 3월에 제12차 5개년 경제계획이 채택되었다.

중국 제11 . 12차 5개년 경제계획

중국은 제11차 5개년 경제계획(2006년~2010년)을 세워 지속가능하고 조화로운 사회, 즉 소강() 사회 건설을 목표로 산업구조 고도화, 친환경 사회 건설, 내수확대 등을 추진하였다.
소강 사회란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 생활환경 등이 비교적 여유로운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덩샤오핑()의 3단계 발전 중 2단계에 해당한다.
1단계는 온포(: 의식주 해결), 3단계는 대동(: 선진국)을 말한다.

중국은 또한 핵심기술을 육성하고, 첨단 산업 및 서비스 산업의 발전을 추진하였다.
정보통신기술(ITInformation Technology), 에너지, 신소재 등 첨단 제조업을 육성하기 위하여 연구개발(R&D, Research and Development)을 강화하고 금융, 보험, 물류 등 서비스업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시장 개방 조치를 실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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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자원절약, 친환경 순환경제를 구축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2020년 국내총생산(GDPGross Domestic Product)당 온실가스 배출량 목표를 2005년 대비 40%~45% 수준으로 결정(2009년 11월)하고, 풍력,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 및 원자력 발전의 확대를 추진하였다.
지역·계층간 격차를 해소하고, 농민소득을 증대시키며, 사회보장정책을 강화하여 내수를 진작시키고 균형발전을 이룰 수 있도록 하였다.
‘제12차 5개년 경제계획’에서는 경제 구조조정 및 내수 부문의 성장에 중점을 두었다.
중국의 자유무역협정(FTA) 추진

현황

중국은 2011년 기준으로 홍콩() 및 마카오()와 포괄적 경제동반자협정(CEPAComprehensive Economic Partnership Agreement)을 체결하였고,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Association of South East Asian Nations), 칠레, 파키스탄과 자유무역협정(FTAFree Trade Agreement)을 체결하였으며, 뉴질랜드, 페루, 코스타리카, 타이완()과는 경제협력기본협정(ECFAEconomic Cooperation Framework Agreement)을 체결하는 등 19개 국가(지역)와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 등 18개 국가(지역)와는 자유무역협정 협상을 추진 중에 있거나 타당성 연구를 진행 중에 있다.

중국령인 홍콩 및 마카오와는 포괄적 경제동반자협정을 체결하여 2004년 1월부터 중국 대륙으로 수입되는 374개(홍콩) 및 311개(마카오) 수입상품에 대해 CEPA 세율(영세율)을 적용하고 있다.
2009년 5월에는 기존 경제동반자협정에 대한 6번째 보충협의를 통해 양 지역에 대한 서비스부문 개방 폭을 더욱 확대하기로 합의하였다.


제6차 포괄적 경제동반자협정 보충협의 주요 내용

2009년 1월 1일 시행
제6차 포괄적 경제동반자협정 보충협의 주요 내용
대()홍콩()대()마카오()
개방영역 확대
철도운송과 연구개발 서비스 분야를 새로 개방(총 29개 서비스 자유화 조치를 포괄)
시장진입조건완화
의료, 보험, 은행, 증권, 여행, 개인자영업 등 40개 항목에 대해 시장진입 조건을 추가 완화
( 152개 항목→192개 항목)
좌동
(142개 항목→182개 항목)
출처: 중국 상무부
중국은 세계 최초로 동남아시아국가연합 10개국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였으며, 2005년 7월부터 상품 분야를 우선 발효하였다.
2007년 1월에는 서비스협정을 체결하여, 2007년 7월부터 발효하였으며, 2009년 8월에는 투자협정을 체결하였다.
2010년 1월 1일부터 중국과 동남아시아국가연합의 자유무역협정이 전면 발효되었다.

중국은 동남아시아국가연합의 지정학적·경제적 중요성과 주변국에 대한 경제적 영향력 확대전략의 일환으로 동남아시아국가연합과의 경제협력을 대외경제정책의 핵심과제로 추진하였고, 2003년에는 역외국가 중 최초로 동남아시아우호협력조약(TACSoutheast Asian Treatyof Amity and Cooperation)에 가입하였다.

중국은 동남아시아국가연합과의 자유무역협정에서 관세 인하는 자국 산업에 미치는 민감도 등에 따라 3개 부문으로 구분하여 차등 적용하였다.


동남아시아국가연합의 자유무역협정 관세인하 추진 계획

중국과 동남아시아국가연합의 자유무역협정 관세인하 추진 계획
구분선발 6개국후발 4개국
조기자유화
2006년까지 관세 완전철폐
일반
2012년까지 관세철폐
2018년까지 관세철폐
민감
일반 민감
2018년까지 관세율 5% 이하
2020년까지 관세율 5% 이하
고도 민감
2015년까지 관세율 50% 미만
2018년까지 관세율 50% 미만
중국은 남아메리카 국가 중 두 번째 수교국이자 그동안 무역분쟁이 발생하지 않았던 칠레와도 2006년 10월부터 상품분야 자유무역협정을 발효하였다.
1995년~2004년 상반기 중 남아메리카 국가들의 중국 상품에 대한 반덤핑(anti-dumping) 제소는 총 92건에 달하였으나 칠레와는 상호 비경쟁적 산업구조 등에 기인하여, 무역분쟁이 없었다. 

중국은 칠레 상품 중에서 2,806종에 대해 자유무역협정 시행과 동시에 관세를 철폐하였고, 칠레는 중국 상품 중에서 5,891종에 대해 자유무역협정 시행과 동시에 관세를 철폐하였다.
향후 10년 동안 양국 세목수의 97%에 해당하는 상품을 비관세화할 방침이다.

중국은 남아시아 진출의 거점기지인 파키스탄과도 자유무역협정 협상을 마무리 짓고 2007년 7월부터 발효하였다.
2009년 2월에는 서비스 협정도 체결하였고, 2009년 10월부터 발효하였다.

중국은 뉴질랜드와는 2004년 12월에 자유무역협정 협상을 개시하였고, 2008년 4월에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였으며, 2008년 10월부터 발효하였다. 
싱가포르와는 2006년 10월에 자유무역협정 협상을 개시하였고, 2008년 10월에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였으며, 2009년 1월부터 발효하였다.

페루와는 2007년 9월에 자유무역협정 협상을 개시하였고, 2009년 4월에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였으며, 2010년 3월부터 발효하였다.

코스타리카와는 2009년 1월에 자유무역협정 협상을 개시하였고, 2010년 4월에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였으며, 2011년 8월 1일에 발효하였다.
타이완과는 2010년 6월에 양안경제기본협정을 체결하였다.

2011년 말을 기준으로 오스트레일리아, 노르웨이, 스위스, 걸프협력회의(GCCGulf Cooperation Council), 아이슬란드, 남아프리카관세동맹(SACUSouthern AfricanCustoms Union)과 협상을 추진 중에 있으며, 한국 등과는 타당성 연구를 진행 중에 있다.

한국과는 2007년 3월 출범한 산관학 공동연구를 2010년 5월 종결하고, 현재 양국 정부간 한중 자유무역협정의 민감 분야에 대한 실무 협의를 진행 중에 있다.


중국 무역협정 추진 현황 .  2011년 말을 기준

중국의 자유무역협정 추진 현황
단계상대국(지역)추진 현황
기체결 11건 19개국
홍콩(),
마카오()
· 2003년 6월 포괄적 경제동반자협정(CEPAComprehensiveEconomic Partnership Agreement) 체결(2004년 1월 발효) 이후, 2009년 5월까지 총 6차례의 포괄적 경제동반자협정 보완협정(supplements) 각각 체결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 2000년 11월 공동연구 시작 후 1년간 진행
· 2002년 11월 기본협정 체결, 2004년 1월 관세조기수확(Early Harvest) 조치 시행
· 2004년 11월 상품협정 체결, 2005년 7월 발효
· 2007년 1월 서비스협정 체결, 2007년 7월 발효
· 2009년 8월 투자협정 체결
· 2010년 1월 중국·동남아시아국가연합 자유무역협정 전면 발효
칠레
· 2004년 4월 ~ 2004년 10월 민간연구, 2005년 1월 협상 개시(6차례 협상)
· 2005년 11월 상품협정 체결, 2006년 10월 발효
· 2008년 4월 서비스협정 체결, 투자협정 협상 진행 중(2010년 2월 제6차 협상 개최)
파키스탄
· 2004년 10월 ~ 2005년 4월 정부간 연구, 2005년 8월 협상 개시(6차례 협상)
· 2006년 1월 관세조기수확 시행
· 2006년 11월 상품·투자협정 체결, 2007년 7월 발효
· 2009년 2월 서비스협정 체결, 2009년 10월 발효
뉴질랜드
· 2004년 3월 ~ 2004년 9월 정부간 연구, 2004년 12월 협상 개시(15차례 협상)
· 2008년 4월 협정 체결, 2008년 10월 발효
싱가포르
· 2005년 10월 ~ 2006년 8월 정부간 공동연구
· 2006년 10월 협상 개시, 2008년 9월 협상 타결(8차례 협상)
· 2008년 10월 서명, 2009년 1월 발효
페루
· 2007년 3월 ~ 2007년 8월 정부간 연구
· 2007년 9월 협상 개시, 2008년 11월 협상 타결(6차례 협상)
· 2009년 4월 서명, 2010년 3월 발효
코스타리카
· 2008년 1월 ~ 2008년 7월 공동연구
· 2009년 1월 협상 개시, 2010년 2월 협상 타결(6차례 협상)
· 2010년 4월 서명, 2011년 8월 발효
타이완()
· 2010년 6월 양안경제협력기본협정(ECFAEconomicCooperation Framework Agreement) 체결
· 2011년 1월 1일 발효
협상 중 6건 15개국
걸프협력회의(GCC)*
· 2005년 4월 협상 개시, 2009년 6월 제6차 협상
오스트레일리아
· 2003년 10월 ~ 2005년 3월 정부간 연구
· 2005년 5월 협상 개시, 2010년 3월 제14차 협상
아이슬란드
· 2005년 5월 ~ 2006년 7월 정부간 연구
· 2007년 4월 협상 개시, 2008년 4월 제4차 협상
노르웨이
· 2007년 6월 ~ 2007년 12월 공동연구
· 2008년 9월 협상 개시, 2010년 9월 제8차 협상
스위스
· 2010년 2월 ~ 2010년 9월 공동연구
· 2011년 1월 협상 개시, 2011년 7월 제2차 협상
남아프리카관세동맹(SACU)
· 2003년 6월 ~ 2004년 6월 정부간 연구
· 2007년 협상 개시 후 현재 중단 상태
공동연구 3건 3개국
인도
· 2003년 6월 ~ 2007년 10월 지역무역협정(RTARegionalTrade Agreement) 공동연구(6차례 회의)
한국
· 2006년 11월 공동연구 개시 합의
· 2007년 3월 공동연구 개시, 2010년 5월 공동연구 종료
* 한중 자유무역협정의 민감 분야에 대한 정부간 협의 진행 중
한·중·일
· 2009년 10월 산관학 공동연구 개시 합의
· 2010년 5월 제1차 회의, 2011년 12월 공동연구 종료

*걸프협력회의(GCCGulf Cooperation Council):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카타르, 오만, 바레인 등 아라비아 반도 6개국이 1981년에 창설


추진 목표

중국은 거대한 국토와 주변 인접국이 많은 지역적 특성을 바탕으로 전방위적이고 다양한 형식의 자유무역협정(FTAFree Trade Agreement)을 추진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중국은 자국 경제의 지속가능한 성장과 안정적인 자원 확보 등 미래 전략적 이익을 우선 고려하고 있으며, 다음과 같은 4가지 측면에서 자유무역협정을 추진 중에 있다.

첫째로는 안정적인 에너지 및 자원공급원의 확보이다. 고성장에 필수적인 자원을 원활하게 확보하기 위해 주요 자원 보유국이면서 중국의 수입의존도가 높은 칠레(구리), 오스트레일리아(아연, 니켈, 철광석), 아이슬란드(알루미늄), 걸프협력회의(GCCGulf Cooperation Council) 국가(석유) 등과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하고 있다.

둘째로는 전략국가와의 관계개선을 통한 대외진출 강화이다.
전통우방국 및 남미·남아시아 지역으로 진출하는 데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과 병행하여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하고 있다.

셋째로는 신시장 개척을 통한 수출시장 다변화이다.
향후 경제적 이익에 부합하는 국가일 경우 현재 교역 수준에 관계없이 자유무역협정 협상을 추진한다는 전략이다.
중국은 주요 교역상대국과의 분쟁이 증가함에 따라 새로운 교역시장 확보의 필요성이 증대되고 있다.

넷째로는 자국 내 지역간 균형발전 도모이다.
중국의 주요 수출시장이자 넓은 의미의 중화경제권인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Association of South East Asian Nations)과의 자유무역협정 체결은 동아시아 지역 협력의 주도권을 확보한다는 목적 이외에도 서남부 지역의 발전을 촉진하는 등 자국 내 지역간 균형발전을 도모하는 전략의 일환으로도 볼 수 있다.

특히,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인접한 광시성(西)의 경우 자유무역협정 체결 이후 물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서부대개발 정책 개요

중국은 개혁·개방 이후 동부 연해지역을 우선 개발하는 정책에 펴왔으며, 이에 따라 동부지역과 서부 지역간 격차가 지속적으로 확대되었다.

중국 정부는 국토의 균형발전과 경제성장의 지속을 위해 2000년부터 서부대개발을 국가 정책목표의 하나로 추진하였다.

서부대개발을 통하여 심각한 내수부진 문제를 해결하고, 소수민족이 주로 거주하는 낙후한 서부지역의 생활수준을 향상시켜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중국 정부는 2000년 3월 개최된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서부대개발 추진을 천명하고, 국가적 장기사업으로 중점 추진하기로 하였다.

2009년 10월 원자바오(溫家寶)총리는 제10회 서부박람회에 참석하여, 지난 10년의 성과를 평가하고, 향후 10년 계획의 수립을 천명하였다.

서부지역은 서부에 있는 12개의 성·시·자치구[쓰촨(), 구이저우(), 윈난(), 산시(西), 간쑤(), 칭하이(), 충칭(), 닝샤(), 신장(), 네이멍구(), 광시(西), 시짱(西)]로, 중국 전체 면적의 71.4%(685만㎢), 전체 인구의 28.6%(3억 7,000만 명)를 점유함에도 불구하고 2009년 기준으로 국내총생산(GDPGrossDomestic Product)의 약 20%(6조 6,800억 위안)에 불과한 형편이다.

2011년 3월 원자바오 총리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제12차 5개년 경제계획을 보고하고, 서부대개발을 지역발전 총 전략의 우선에 배치하고, 교통·에너지망, 생태환경보호, 전략자원과 산업 집결구의 건설 및 특색 산업(농업, 여행 등)의 우위산업 발전 방향을 제시하였다.

중국 정부는 충칭-청두()-시안(西)의 전략적 합작을 중심으로 각 지역별 중심 도시[오르도스()-위린(), 광시북부만(西), 관중()-톈수이(), 란저우()-시닝(西), 닝샤()-옌황(沿), 톈산베이포() 등]를 새로운 성장극으로 육성시키고자 하고 있다.

서부대개발 주요 내용

중국의 서부대개발 정책은 다음과 같은 3단계 추진전략으로 이루어져 있다.

1단계는 개발 초기(2000년~2005년)로서 개발계획 및 정책을 수립하고, 발전전략을 개시하는 단계이다.

2단계는 대규모 개발(2006년~2015년) 단계로서 투자규모를 확대하고, 서부지역의 개발능력을 제고시킨다.

3단계는 전면 개발(2015년~2050년) 단계로서 서부지역의 도시화, 시장화, 국제화 수준을 제고시킨다.

서부대개발 정책의 주요 추진사업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중국 서부의 천연가스를 동부로 공급하기 위한 파이프라인(pipeline) 건설 사업인 서기동수(西, 동쪽 끝 공정 완료), 서부 지역에서 생산된 전기를 동부 지역으로 송전하는 서전동송(西, 2,800만kW 건설 완료), 칭하이()에서 시짱(西)자치구까지 연결하는 칭장철로(, 396㎞ 건설), 남부의 풍부한 담수 자원을 물이 부족한 북부로 끌어오는 남수북조(調, 2002년 동부부터 착공) 등이 있다.

이 밖에도 철도, 간선도로, 공항, 가스수송관, 수리시설, 조림사업, 교육·의료기관 건설 등을 추진 중에 있으며, 서부 12개 성·시별 ‘특색경제()’ 육성을 추진하고 있다.

중점 발전지역은 간쑤성() 관둥()-산시성(西) 톈수이() 지역, 광시북부만 지역, 그리고 쓰촨성() 청두()-충칭() 위() 지역이다.

최근 활발히 발표되고 있는 서부 삼각경제권(청두, 충칭 및 시안 중심의 도시권)은 성()간 차원에서 제기되고 있는데, 앞으로 국무원()의 승인 여부가 관심사이다.

서부대개발 향후 발전 방향

2009년 10월 원자바오() 총리는 서부국제박람회에서 서부대개발 정책의 향후 발전 방향에 대해 다음과 같은 4가지를 제시하였다.

첫째로는 에너지 및 교통 분야의 협력 강화이다.
주변 국가와 에너지 자원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에너지 관련 국제 기업들을 유치하여 서부지역의 에너지 이용효율을 제고하고, 탄광재해를 방지하며, 천연가스를 채굴하는 등 에너지 분야의 공동 개발을 추진하는 것이다.

중국 정부는 서남, 서북 지역 출입경 국제교통 대동맥 구축을 적극 추진할 계획이며, 관련 국가들과 신()아시아-유럽간 연결통로 건설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할 예정이다.

둘째로는 경제무역 및 투자협력 확대이다.
중국 정부는 서부 연해지역과 주변 국가간의 경제 무역교류와 시민간 상호교역의 확대를 지지하며, 서부의 첨단기술산업, 선진제조업, 현대 농업 및 현대 서비스업 분야에 대한 외자 유치를 유도할 계획이다.

셋째로는 에너지 절감 및 친환경 분야의 협력 확대이다.
중국 정부는 서부지역과 주변 국가 및 기타 국가간 에너지 절감 및 친환경 영역에서의 국제협력과 함께 신()에너지 및 재생에너지 분야의 공동 개발 및 이용을 적극 지지할 것이다.

넷째로는 지역 및 국제협력의 강화이다.
중국 정부는 중국-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Association of South East Asian Nations) 자유무역협정(FTAFree Trade Agreement)의 2010년 1월 개설을 환영하고, 상하이협력기구(SCOShanghai Cooperation Organization) 회원국과의 경제무역 협력과 메콩(Mekong) 강 유역개발 협력을 적극 추진할 것이며, 중국-동남아시아국가연합의 국제박람회, 중국 서부국제박람회 및 중국-남아시아 상무포럼(forum) 등의 행사 개최를 통해 지역 금융협력관계의 강화를 추진할 것이다.

서부대개발 정책 성과

중국의 서부대개발 정책은 산업 분야, 즉 중국 서부의 천연가스를 동부로 공급하기 위한 파이프라인(pipeline) 건설 사업인 ‘서기동수(西)’, 서부 지역에서 생산된 전기를 동부 지역으로 송전하는 ‘서전동송(西)’ 프로젝트(project)와 ‘칭장철로()’의 완공과 인프라(infrastructure)의 확충, 생태환경 보호, 그리고 동북 3성 지구의 인프라 개선에 어느 정도 효과를 보여주는 성과를 올리고 있다.


서전동송.西送.
중국이 경제개발계획의 일환으로 전개하는 서부 대개발 4개 공정(工程) 가운데 하나의 명칭. 싼샤[三峽] 댐 등 서부 지역에서 생산된 전기를 동부 지역으로 송전하는 사업을 가리킨다.
'서쪽(西)에서 생산된 전기()를 동쪽()으로 보낸다()'는 뜻이다. 중국이 진장철로()·서기동수(西)·남수북조(調)와 함께 경제개발계획의 중점 사업으로 추진하는 서부 대개발 4대 공정() 가운데 하나이다. 공정은 서부의 산악지대에서 수력 및 화력으로 생산한 전력을 개발 특구가 밀집되어 전력 수요가 급증하고 있는 동부의 화난[]과 화둥[], 화베이[] 지역으로 공급하기 위한 계획이다. 전력 공급은 세부적으로 북부와 중부, 남부의 3개 송전망으로 나뉜다. 북부 송전망은 황허강[] 상류에서는 수력발전으로 베이징[]과 톈진[] 지역으로 공급한다.

중부 송전망은 양쯔강[]의 싼샤댐에서 생산한 전력을 상하이[] 지역에 공급하며, 남부 송전망은 윈난성[]과 구이저우성[] 등지에서 생산한 전력을 광저우[] 지역에 공급한다. 1992년 착공되어 2009년 완공되는 싼샤댐은 원자력발전소 18기에 이르는 1820만kW의 발전용량을 보유하는 세계 최대의 수력발전소이다. 중국은 이밖에도 서전동송 사업의 일환으로 2005년 발전용량 1260만kW의 시뤄두[]댐을 착공한 데 이어 2006년에는 발전용량 600만kW의 샹자[]댐을 착공하였다.

서기동수.西輸.
중국이 '제10차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전개한 서부 대개발 사업 가운데 하나. 중국 서부 지역의 풍부한 천연가스를 동부 지역으로 운송하기 위한 가스 수송관 건설 사업으로, 10개 성(省)을 관통하며 총 길이 4,000㎞에 달한다. 2002년 7월 착공되어 2004년 8월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 '서쪽(西)의 천연가스()를 동쪽()으로 운송한다()'는 뜻이다. 중국의 제10차 5개년 계획(2001~2005년)의 일환으로 전개된 서부 대개발 사업 가운데 하나이다.
중국의 천연가스는 신장웨이우얼자치구[]를 비롯한 서부 지역에 대부분 매장되어 있는데, 신장 지역의 총 매장량은 10조㎥로 추정될 만큼 엄청난 규모이다,
서기동수는 이처럼 풍부한 서부 지역의 천연가스를 동부 지역으로 운송하기 위한 수송관을 건설하는 대규모 국책 사업으로, 2000년 발주되어 2002년 7월 4일 정식으로 착공되었다.

서쪽의 신장을 기점으로 고비사막과 황토고원, 타이항[] 산맥을 비롯하여 10개 성과 자치구 및 직할시를 통과하여 종착점인 상하이의 바이허진[]에 이르기까지 총 길이가 4,000㎞에 달한다. 가스관의 직경은 1,016㎜이고, 연간 120억㎥의 천연가스를 수송할 수 있으며, 모든 라인이 자동통제 시스템으로 운용된다. 주요 간선 파이프 공정에만 435억 위안(한화 6조 5,000억 원)이 투입되었고, 총 투자비용은 1,400억 위안에 달한다. 2003년 말 산시성[西] 징볜[]과 상하이를 연결하는 1,475㎞의 동부 구간이 개통된 데 이어 2004년 8월 3일 신장웨이얼자치구의 타림분지와 징볜을 연결하는 서부 구간이 개통되어 전 구간이 완공되었다.

중국의 페트로차이나를 주관사로 하여 영국과 네델란드의 합작법인인 로열더치셀과 러시아의 가스프롬, 미국의 엑손모빌 등 3개 사가 파트너로 참가하였다. 이 사업이 완공됨으로써 급속한 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하는 동부 산업지역에 서부 지역의 풍부한 천연가스를 저렴하게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아울러 천연가스를 사용함으로써 석유 수입 의존도와 대기오염을 줄이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중국은 신장에서 광둥성[]까지 천연가스를 수송하는 총 길이 6,000㎞의 제2차 서기동수 사업도 추진하고 있다.

칭장철로 ,青, Qīngzàng Railway, Qinghai-Xizang Railway.
칭하이성의 시닝녕(西, Xīníng)에서 시짱자치구의 라싸(, LāLhasa)에 이르는 철로로 2006.7.1에 전 구간 개통되었다. 

세계 3대 고원인 칭장고원()을 관통하며 구간의 86%에 해당하는 960㎞가 해발 4,000m 이상의 구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탕쿠라산(, 당고랍산) 지역은 최고 높은 지역으로 해발 5,072m에 달한다.

칭장철로()는 신장, 칭하이, 산시(西) 등지의 천연가스를 파이프라인을 통해 동부지역으로 수송하는 프로젝트인 서기동수(西)와 서부지역의 수력전기 등을 북ㆍ중ㆍ남 3개 송전선로 건설을 통해 동부로 송전하는 프로젝트인 서전동송(西) 사업과 더불어 장기적으로 서부 대 개발 전략 구상 하에 추진된 대표적인 실천프로젝트의 하나로서, 서부지역의 관광개발과 물류개선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본 컨텐츠는 2011년 기준으로 작성된 외교통상부 국가개황 자료들중에서.<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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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 China, 中國, 1

중국은???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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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더불어 세계 최강국이 된 중국. 세계에서 인구도 가장 많고 지하자원도 풍부해 ‘세계의 공장’으로 자리잡으면서 부자들도 많아졌다고 해요. 정말 평소 우리가 쓰는 물건 중에 중국제가 아닌 걸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어요. 세계 어느 나라에 가도 중국인 관광객이 많고요.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다.

사회주의란?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중국은 ‘공산당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국가’입니다. 중국 정부의 공식 입장은 정치적으로는 공산당 일당이 주도하는 사회주의,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를 표방하는 ‘시장 사회주의 국가’다.

사회주의란 무엇일까요? 사회주의란 사회적 부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생산수단을 사회가 소유하고 노동에 바탕을 둔 공정한 사회를 실현하려는 사상으로, 1827년 영국에서 처음 등장하였고 비슷한 시기 프랑스에서도 등장하였다.

영국의 오웬(1771~1858, 영국의 사회 운동가), 프랑스의 생시몽(1760~1825,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자)과 푸리에(1772~1837,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자)는 실업과 빈곤이 없는 사회는 토지나 자원, 원료 등의 생산수단이 공공의 소유이며,
모두가 노동에 종사하는 협동 사회의 조직과 보급으로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실제로 푸리에는 협동조합을 구성하여 구성원들은 하나의 건물 안에서 살며, 수입을 각자 제공한 노동의 양에 따라 분배하여 안정된 생활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사상을 실천해 보이기도 했으며 오웬 또한 공장에서 비슷한 공동체 생활을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의 사상은 정의와 이성을 바탕으로 노동자 계급을 구제할 대상으로 바라봄으로써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았다.

사회주의 사상을 과학적으로 발전시킨 사람이 마르크스(1818~1883, 과학적 사회주의·공산주의 창시자)와 엥겔스(1820~1895, 마르크스와 함께 마르크스주의, 과학적 공산주의, 변증법적·사적 유물론의 창시자)입니다.

마르크스는 역사를 추진하는 힘은 생산력이며 생산관계는 항상 물질적 생산력의 일정한 발전 단계에 상응한다고 보았습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러한 생산력은 끊임없이 증대하며 생산 관계와 상호작용을 통해 하나의 생산 양식을 이룹니다. 
끊임없이 상승하는 생산력과 그대로 머무르는 생산 관계는 어느 시점에서 갈등을 일으키고 결국 생산력의 발달을 위해 생산 관계가 변화함에 따라 생산 양식 또한 달라지게 됩니다. 이러한 생산 양식의 변화 과정을 순서대로 나열해보면 원시 공산제 → 고대 노예제 → 중세 봉건제 →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 볼수 있다.

마크르스는 그가 살았던 시대에 나타났던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하게 되면 생산수단의 사유화와 자본가에 의한 노동자 착취가 심화되어 빈곤과 실업, 주기적인 공황이 발생해 필연적으로 사회주의로 이행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생산수단의 사유화를 폐지하고 그것을 사회화하여 국민 경제를 계획적으로 관리함으로써 자본주의에서 발생하는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자본주의를 사회주의 사회로 이행시키는 세력이 바로 노동자 계급이므로 사회주의 사상을 노동자 계급의 대중 운동과 결부시켜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조직과 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사회 체제로서의 공산주의를 두 단계로 나누었습니다. 공산주의의 제1단계인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사적 소유가 폐지되고 생산수단이 국가로 집중되지만 노동에 따라 소득 분배가 이루어지므로 분배에 차이가 생기게 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산주의 사회로 나가는 이행기인 이 시기에는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지배를 의미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요구되다. 

제2단계는 완전한 공산주의 사회로 생산력이 고도로 발달하고 개인의 도덕성이 확립됨은 물론 인간이 완전히 해방되는 사회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국가를 대신하는 자주 관리 조직이 사회를 관리하고 각자의 필요에 따라 분배가 이루어지므로 개인 간의 완전한 평등이 실현된다고 보았습니다. 아직까지 공산주의의 2단계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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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은?

중국은 건국 이후 마오쩌둥(1893~1976, 중국의 정치가)에 의해 스탈린식 계획 경제 정책을 추진합니다. 도시화와 산업화를 내세우며 중공업 육성에 전력을 기울이는 동안 농업과 경공업을 희생시켰습니다. 그 결과 경제 성장률은 상승하였으나 국민의 생활 수준은 낙후된 빈곤한 평등이 강요되었다.

1978년 마오쩌둥 사망 후 중국 지도부의 전면에 등장한 덩샤오핑(1904~1997, 중국의 정치가)은 이러한 경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흑묘백묘론’이라고 일컫는 개혁정책을 실시함.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 일당 독재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경제 발전이라는 쥐를 잡을 수 있도록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체제를 도입하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제 발전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중국 정부는 무료로 제공하던 교육과 의료, 연금 같은 혜택을 줄였다. 

덩샤오핑의 선부론 은 부의 불평등을 심각한 수준으로 치닫게 했으며 이로 인해 상하이, 베이징과 내륙의 소득 격차가 열 배나 차이 나기에 이릅니다. 
이것은 1989년 천안문 사건이 일어나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계획 목표의 조정

계획 목표의 조정
시기목표모형
1978 ~ 1979년
계획 경제, 상품교환가치법칙 이용
1979년 ~ 1984년 10월
계획 경제 위주 시장 조절 보완
1984년 10월 ~ 1987년 10월
계획 있는 상품경제
1987년 10월 ~ 1989년 6월
국가의 시장 조절, 시장의 기업 조절
1989년 6월 ~ 1991년
계획 경제와 시장 조절의 유기적 결합
1992년
사회주의 시장 경제


당시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소련이 해체되는 등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미·소 냉전이 붕괴되는 격동의 시기였습니다. 덩샤오핑과 개혁 지지 세력은 일련의 과정을 겪으며 경제정책의 새로운 대안을 내놓기 시작합니다. 1992년 88세의 덩샤오핑은 우창, 선전, 주하이, 상하이 등을 시찰합니다. 이 시찰길에서 덩샤오핑은 이후 중국 개혁 개방 정책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는 이른바 ‘남순강화()’를 발표합니다. 

남순강화는 그동안의 개혁 개방이 중국의 발전에 이바지했음을 지적하고 이를 더욱 빠르고 강력하게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 요지다. 덩샤오핑은 “시장 경제를 한다고 자본주의의 길로 간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런 일은 없다. 계획의 요소가 더 많은가, 시장의 요소가 더 많은가 하는 것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본질적 구분이 아니다. 

계획 경제가 곧 사회주의는 아니다. 자본주의에도 계획은 있다. 시장 경제가 곧 자본주의는 아니며 사회주의에도 시장이 있다. 계획도 시장도 다 경제 수단인 것이다. 
사회주의의 본질은 생산력의 해방, 생산력의 발전, 착취의 소멸, 양극화의 해소를 통해 최종적으로 공동의 부에 도달하는 데 있다”고 하여 공동의 부를 이루는 것이 사회주의의 목표이므로 그 수단으로 시장 경제를 도입할 수 있다고 천명하며 ‘흑묘백묘론’을 확대시킵니다.

남순강화는 천안문 사건 이후 속도가 더뎌진 개혁 개방을 다시 급진적으로 추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1992년 제14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이러한 노선에 ‘사회주의 시장 경제’라는 이름을 부여하여 공식적으로 승인하게 됩니다. 

회주의 시장 경제는 대외적으로는 적극적인 문호 개방과 외자 유치 추진을, 국내에서는 사기업 활동의 자유 보장과 자주권의 확장, 경제에 대한 국가 개입의 축소, 지나친 평등주의 배제, 채권·주식 등 금융 시장의 적극적인 배양 등을 주된 내용으로 합니다. 그 결과 중국은 경제에서 일본을 제치고 G2 로 격상되는 등 엄청난 경제 발전을 이룩하게 됩니다.


개혁 개방 정책은 극심한 빈부격차, 가혹한 노동자 착취, 천안문 사건과 같은 정치적 소요, 환경 오염 같은 다양한 문제들을 양산하였으며 무엇보다 사회주의를 사실상 포기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국가 정체성에 심각한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주변의 여러 나라에서는 중국의 이러한 체제를 두고 국가 자본주의 경제 체제라 부르며 이상적인 사회주의 모델에서 중국을 분리시키고 있습니다.

사회주의 국가는 사유재산을 인정 않는다.
사유재산은 소비재와 생산재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유재산의 폐지’는 생산재, 즉 토지, 원료, 자원 같은 생산수단의 사유화를 폐지한다는 말입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소수의 자본가에게 독점되어온 생산수단을 국유화하여 생산 자원의 분배와 생산량 결정을 국가의 계획에 따라 운영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소비재의 사유는 인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뜻으로,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중국의 인민만 잘살게 하면 제일이라는 뜻.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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