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1일 월요일

여호수아.

여호수아"

여호수아서는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인솔하고 요단 강을 건너가서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복하고(1-12장) 하나님께서 주신 영토를 각 지파 백성들에게 분배함으로써(13-24장)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셨던 내용들을 성취해가는 일련의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본서는 오늘날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확장시켜 나가야 할 사명을 부여받은 우리 성도들에게 하나의 좋은 모델을 제시해 준다.

요르단강을 건넌 일,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일, 아이성을 치다가 실패한 일이 있으며, 가나안 7족속을 진멸한 후 12지파(부족)에게 기업을 나눠 주고 자신은 에브라임 산지를 받아서 성읍을 중건하고 그곳에서 생활하였다. 

그가 실수로 살인한 자를 위하여 요르단강 동편과 서편 각 3개처에 도피성()을 만들었다. 그는 임종시에 백성을 세겜에 모으고 성실과 진정으로 야훼를 경외할 것을 부탁하고 110세에 죽었다. 

본명은 호세아. 에브라임 지파() 눈의 아들이다. 모세의 종자()로서 그의 시중을 들다가 가나안 땅 정탐 때에 정탐꾼에 선발되었는데, 갈렙과 함께 긍정적인 주장을 하여 가나안땅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었다. 

모세가 죽기 전에 모세의 승계자로 지명되었고, 야훼신으로부터 그와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지도자 모세가 야훼신이 약속한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여호수아》의 중심인물로 본명은 호세아. 모세가 죽기 전에 모세의 승계자로 지명되어 이스라엘인들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들어갔다.

중심 인물
본서의 명칭 ‘여호수아’는 중심 인물인 여호수아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히브리 성경 역시 본서를 ‘예호슈아’로 명명하며, 헬라어 역본인 70인역(ⅬⅩⅩ)도 ‘여호수아’의 헬라식 명칭인 ‘이에수스’로 표기한다.

여호수아 저작설

본서에는 여호수아가 저자임을 밝히는 구절이 많이 나타난다(5:1, 6; 15:4). 특히 수 24:26의 ‘여호수아가 ··· 기록하고’란 표현은 여호수아가 본서 저자임을 부인할 수없는 구절이다. 본서의 가나안 정복 전쟁 기사들이나 필치들은 가나안 정복 전쟁을 친히 주도한 여호수아가 아니면 흉내낼 수 없을 만큼 치밀하고 생생하여 여호수아 저작설을 더욱 분명하게 한다.  
여호수아의 사망 기사(24:29-31)나 여호수아 사후에 발생한 갈렙의 헤브론 정복 기사(15:13-14), 옷니엘의 드빌 정복 사건(15:15-19), 단 지파의 레셈 정복 사건(19:47) 등은 아론의 아들인 대제사장 엘르아살이나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 등에 의해 가필되었을 것이다.

시기와 장소

가나안 정복 전쟁 기사가 생생하고 구체적이며, 영토 분배에 나타나는 팔레스타인의 여러 도시들이 옛 이름으로 소개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가나안 정복 전쟁이 끝난 직후에 본서가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출애굽을 B.C. 1446년경으로 볼 경우 대략 1405년경). 후대에 가필된 기사들은 사사 시대 초기나 적어도 여호수아 사후 1세기 이내에 기록된 것으로 여겨진다.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는 뜻. ‘여호수아’의 아람 식 표현. 스룹바벨과 함께 바벨론 포로지에서 귀환하여 신앙 회복과 부흥에 힘쓴 대제사장(느 12:1). 즉, 그는 대제사장 여호사닥의 아들로 귀국 후 지도자 스룹바벨과 협력 사역하면서 성전 예배의 정상화와 성전 재건에 진력했다(스 2:2; 3:2, 8; 5:1-2). ‘여호수아’라고도 불렸다(슥 3:8). 성경에서는 이외에도 히스기야 왕 때에 십일조를 분배하는 책임을 맡았던 한 레위인(대하 31:15)과 유다의 남쪽에 위치한 포로 시대이후의 한 성읍(느 11:26) 등으로 소개된다.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가나안 족속들을 모조리 진멸하도록 명령하셨다. ‘성전’(HolyWar)으로 불리는 가나안 정복 전쟁은 너무 잔인한 정복 전쟁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과 배치된다는 주장들도 있다.
하나님은 이 전쟁을 통해 죄를 철저하게 진멸하기를 원하시는 당신의 의지를 분명하게 확인시켜 주셨다. 이런 거룩한 전쟁은 오늘날 성도들이 죄악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자세로 죄와 싸워야 할 지 그 기준을 분명하게 제시해 준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 땅에 도착한 뒤 모세를 계승했다. 지도자가 되기에 앞서 여호수아는 모세가 가나안에 보낸 이스라엘의 첩자로 암약했다. 대다수 첩자들은 강력한 방어 시설을 자랑하는 가나안의 도시들을 보고 겁을 먹었지만, 

여호수아와 또 다른 첩자 갈렙은 이스라엘인들의 사기를 돋워 가나안 정복에 나서도록 격려했다. 이스라엘인들은 투덜거리면서 마지못해 지시에 따랐다(민수기 13~14).

여호수아서는 가나안 정복과 이스라엘 12지파에 의한 국토 분열의 과정을 이야기한다. 첫 부분에서 신은 여호수아에게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고 명하고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여호수아 1:9)고 말한다. 

2장에서는 이스라엘 첩자들이 예리코 성에 잠입하며, 6장에는 신의 힘으로 성벽이 무너진 덕분에 싸움 한 번 하지 않고 성을 점령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3장은 이스라엘 사제들이 언약궤를 가지고 요르단 강을 건널 때 강물이 갈라지는 유명한 기적을 전한다.

10장은 이스라엘인들이 적을 물리칠 때 태양이 멈추었다는 기브온의 기적을 말한다. (여호수아서에는 특히 폭력적인 내용이 많으므로 오늘날의 독자들은 자칫 혐오감을 느낄 수도 있다.) 

23장에서 여호수아는 신의 도움으로 가나안에서 적들을 몰아냈다면서 만약 백성들이 신의 율법을 따르지 않는다면 적들이 도로 이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유대인과 그리스도교도가 자주 인용하는 대목은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여호수아 24:15)는 구절이다.

여호수아는 특별한 인물이다. 그는 모세의 영도 아래 수많은 이스라엘 노예들이 이집트를 탈출해 가나안 땅까지 오는 동안 살아남았던 단 두 사람 중 하나다.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오지 못했다. (다른 생존자는 역시 첩자였던 갈렙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차지하리라는 것을 굳게 믿고 다른 이들을 격려한 사람은 단 둘뿐이었다.)

여호수아서의 몇 가지 장면은 예술의 인기 있는 주제가 되었다. 요르단 강을 건너는 장면과 예리코 성벽이 무너지는 장면이 대표적인 예다.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은 '여호수아'라는 오라토리오를 작곡했다. 

여호수아는 1956년 영화 「십계」의 중요한 등장인물이다. 미국의 작가 티머시 드와이트(Timothy Dwight)는 여호수아서를 토대로 『가나안의 정복』(1789)이라는 긴 설화시를 썼다. 그는 여호수아를 아메리카에 새 '가나안'을 건설한 미국의 건국자로 비유하고 있다.

여호수아의 이름은 원래 'Yehoshua'이며, 신약성서의 시대에는 'Yeshua'라고 표기했다. 예수와 사실상 같은 이름으로 "신이 구원한다"는 뜻이다.

중세에는 아홉 명의 전사들을 가리켜 아홉 위인이라고 불렀는데, 그 중 셋이 성서의 인물이다. 여호수아, 다윗 그리고 외경에 나오는 인물인 유다 마카베오가 바로 그들이다.

배경 과 무대

광야 생활의 마지막 체류지 모압 평원요단 강길갈, 정복 전쟁의 첫 전투지인 가나안 중부의 여리고와 아이 성. 여호수아가 정복한 가나안 남부와 북부 지방의 여러 도시들. 영토 분배시 이스라엘 백성이 지파별로 할당받은 여러 도시들.



『구약 성서』가운데 전기 문학()이라고도 할 수 있는『여호수아 기』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대표적 군인, 지도자. 눈의 아들. 모세의 후계자로서 (구약「신명기()」31장), 그의 사망 후 이스라엘 인을 통솔하여 계약의 궤를 짊어지고 요르단 강을 건넜다. 

창녀 라하브의 도움으로 두 명의 스파이를 여리고에 풀어(「여호수아 기」2장), 나팔을 불면서 계약의 궤를 짊어지고 성벽의 주위를 돌아 여리고의 도시를 함락시키고, 가나안의 땅을 정복했다(4~6장). 
아모리 인의 왕들과 기베온에서 싸울 때, 태양과 달의 운행을 멈추게 하여(10장 12~13절) 승리를 얻었다. 

고대 로마의 석관이나 기념 원주 부조와 비교되는 고전 미술의 전투 장면을 계승한 로마의 산타 마리아 마조레성당 본당 모자이크나, 『여호수아 화권()』 삽화의 연속 설화가 중세에서는 특히 중요하다. 
니콜라 푸생에 의한, 아마레크 인, 아모리 인과의 2점의 전투도(에르미타주, 푸시킨 미술관)도 같은 관심에 근거를 둔다. 

기베르티는 피렌체의 산 조반니 세례당의 청동문비()(1425~1452)에서, 『요르단 도하』와 『여리고의 성벽 포위』를 동일 구도로 나타내고 있다. 또한 창녀 라하브는 『에크레시아』 내지 『이방인 교회』의 상징으로 보여지고 있다.

여호사닥 . Jehozadak.
여호와는 의로우시다’는 뜻.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부친으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대상 6:15; 학 1:12). 일명 ‘요사닥’(스 3:2; 5:2; 느 12:26).

대제사장 . 大, high priest.
성막에서 제사의 일을 담당했던 레위 지파 제사장들 가운데 우두머리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했고 제사에 관한 제반 사항을 관장했다 (출 27:21). 
최초의 대제사장으로 아론이 임명되었고, 성막 완공 후 그 권한이 공식적으로 주어졌다 (출 27:21). 아론의 직계가 그 직무를 계승했는데, 율법상 결격 사유가 없으면 장자가 대를 이어 종신토록 사역하였다(레 21:16-23).

대제사장은 성소를 감독하고 봉사와 회계를 주관했다(왕하 22:4). 또 우림과 둠밈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였으며(민 27:21), 1년 1차 대속죄일에 지성소에 나아가 백성을 위한 속죄제를 드렸다. (레 16:34). 

대제사장 직책은 원래 레위 지파 아론 계열 중 선임 제사장에게 승계된 종신 세습직이었다(아론을 이은 엘르아살은 아론의 셋째 아들이었으나 이후 별다른 일이 없는 한 장남에게 승계됨, 민 20:23-29; 25:10-13; 27:18-23).
신약에서는 산헤드린 공회의 의장 역할을 했다. (마 26:57; 행 5:21).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이야말로 궁극적으로 우리 죄인들의 죄 문제를 영원히 해결하신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신다고 가르쳤다(히 5:5; 6:20).
신구약 중간기 이후 신약 시대로 오면서 외세의 지배를 받던 시기에 대제사장은 통치자들에 의해 임명되었다. 특히 로마 지배하에서 대제사장의 임명권은 로마 총독에게 있었다.

자연히 대제사장은 정치적 이해 관계나 이권()에 따라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심할 경우 1년을 채우지 못하는 대제사장들이 허다했으며, 성직 매매는 보통이었다. 
자연히 생존해 있는 전임 대제사장이 수두룩하게 많은 시기이기도 했다(이들 역시 ‘대제사장’이라 호칭함). 그래서 혼란을 막기 위해 현직 대제사장은 ‘그 해의 대제사장’(요 18:13)이라 하여 전직 대제사장과 구분하기도 하였다. 예수님 당시 현직 대제사장은 ‘가야바’였고(마 26:57), ‘안나스’는 전직이었다(요 18:24).

대제사장 의복

* 일반 제사장의 의복과는 다소 구별되는데, 영광과 아름다움, 거룩을 상징하는 의복이다(출 28장). 
* 흰 세마포 관 - 하얀 베실로 만들어진 터번(혹은 원추형) 모양의 둥근 모자. 
금패- 흰 세마포 관 정면 이마에 부착된 금으로 된 패. ‘여호와께 성결’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다. 
판결 흉패 - 에봇 위 가슴 부위에 달린 정사각형 주머니. 12개의 보석이 달려 있고 주머니 안에는 우림과 둠밈이 있어 제비뽑기 도구로 사용되었다. 
* 에봇 - 대제사장이 입는 조끼 모양의 의복. 
견대 - 에봇의 앞부분과 뒷부분을 붙들어 매는 어깨 띠. 
* 에봇 받침 겉옷 - 에봇 아래 입는 청색 의복. 
* 반포 속옷 - 겉옷 안에 입는 통으로 짠 의복. 
석류와 금방울 - 에봇 받침 겉옷 아랫 자락에 달린 성물.

제사장 . 祭, priest.
하나님께 제사 드리고(민 16:40), 백성에게 신앙을 지도하며(대하 15:3), 하나님의 뜻을 묻고 전달하는 사명을 맡은 자(출 28:30). 제사장은 족장 시대에는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등 가장(, 창 8:20; 26:25; 31:54)이, 율법이 주어진 이후에는 레위 지파의 아론 계열(출 19:22; 28:1)이 담당했다. 
제사장 중에서는 모든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을 주장할 뿐만 아니라 온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자로서, 1년에 한 차례(대속죄일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대제사장이 있었다(출 28:29). 
성경은, 구약의 제사장 제도는 신약에서 영원하고 유일한 참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모형에 불과하다고 가르친다(히 5:5; 7:20-26; 9:25-28; 10:12). 
예수님의 은총을 힘입어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가 예배드리는 성도는 모두가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가르친다(벧전 2:5, 9; 계 20:6).

장의 자격 과 제한

제사장은 하나님께 구별된 거룩한 존재로서(출 29:44; 레 21:4-6), 아론의 자손이어야 했다(출 29:9). 육체적으로 흠이 없어야 했으며(레 21:17-23), 가정적으로도 결격 사유가 없어야 했고(레 16:6, 24; 겔 44:25-27), 세습되었다(출 27:21; 29:9).

제사장 책임

희생제물과 예물을 드리거나(레 1:4-17; 23:10-11; 대상 16:39-40), 단 위의 불과 성소 내의 등잔불을 관리했고(레 6:12-13; 24:3-4), 성소에 들어가 섬기는 등(히 9:6) 레위인의 지도자들로서(민 3:32) 성소에 대한 전반적인 책임을 졌다(민 4:5-15; 18:1, 5). 
여호와의 모든 규례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쳤고(레 10:11), 피부 질환에 대한 판단과 부정한 것을 정하게 하는 일도 했다(레 13:2-69; 15:15-31). 
백성이 서원한 것에 대한 값을 정하거나(레 27:8, 12), 백성의 송사를 재판했고(민 5:14-31; 신 19:17), 백성을 위해 축복했다(민 6:22-27). 
외에 백성을 소집하거나(민 10:1-2, 7-8), 나팔을 불어 전쟁을 경고하거나 군인들을 격려하기도 했다(민 10:9; 신 20:2-4).

하나님 나라.
정치, 사회, 경제가 암울한 팔레스틴을 배경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를 세상에 전했다. 하나님 나라는 유대인들에게 낯선 개념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들의 오랜 기다림의 대상이다.

2017년 12월 31일 일요일

인도 . India, 印度.

인도 . India, 印度.

남부 아시아에 있는 나라로, 1857년 무굴제국이 멸망한 후 영국의 직할식민지로 편입되었다. 1947년 8월 15일 영국의 지배를 벗어나 힌두권인 인도와 이슬람권인 파키스탄이 각각 영국연방의 자치령으로 독립하였고, 1950년 자치령의 지위에서 벗어났다.
정식명칭은 인도공화국(Republic of India)이며, 힌디어()로는 바라트(Bharat)라고 한다. 서쪽으로 파키스탄, 북동쪽으로 중국·네팔·부탄, 동쪽으로 방글라데시·미얀마와 국경을 접한다. 1914년 맥마흔(McMahon) 선언에 따라 영국령인 인도와 중국의 국경이 히말라야 산맥 분수령에 설정된 이후 중국과 국경분쟁이 이어졌다. 
1962년 전쟁까지 치렀다. 파키스탄과는 독립 당시부터 카슈미르 지역을 둘러싼 영토분쟁을 벌여왔다. 아시아 문명의 원천으로 불교가 발상한 곳이며, 천축()이란 이름으로 예부터 알려진 곳이다. 국명은 산스크리트어()로 된 인더스강()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국토면적은 세계 7위이며, 인구는 세계 2위이다. 행정구역은 29개 주(state)와 7개 연방직할지(union territory)로 되어 있다.
나마스떼(안녕하세요!) 인도에는 10억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어. 사람이 많다보니 종교와 문화도 참 다양해. 인도 고유의 종교인 힌두교는 인도인들의 생활 깊숙이 자리 잡고 있어서 인도를 여행하다 보면 곳곳에서 힌두교 사원을 볼 수 있다.  
부처가 태어난 곳,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곳 등을 다니며 불교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지. 그뿐인 줄 알아? 이슬람 세력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이슬람 사원도 볼 수 있고, 영국의 지배를 받을 때 세워진 영국식 건물 사이를 누비다 보면 마치 그 거리가 인도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니까. 이제 인도의 신비한 매력 속으로 여행을...

① 랄 킬라(Red Fort) ② 자미 마스지드 ③ 타지마할 ④ 간디 슴리티 ⑤ 아그라 성 ⑥ 카주라호 사원군 ⑦ 불교의 성지 ⑧ 다르질링 ⑨ 엘로라 석굴 사원 / 아잔타 석굴 사원
랄 킬라(Red Fort)
델리가 인도의 수도였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야. 델리 성이라고도 하고, 붉은 사암으로 되어 있어서 ‘붉은성’이라고도 불러. 타지마할을 건축한 샤자한이 쌓은 것으로, 무굴 제국 전성기의 건축 기술을 볼 수 있는 곳


자미 마스지드
델리 최대의 모스크(이슬람 사원)로 한꺼번에 2,000명의 예배자가 들어갈 수 있대. 건축광 샤자한의 마지막 건축물이자 인도와 이슬람 양식이 융합된 무굴 건축의 걸작이야.
타지마할
무굴 제국의 황제 샤자한이 사랑했던 아내의 죽음을 슬퍼하며 세운 것이야. 아그라 시는 타지마할을 보러온 사람들로 넘쳐나지. 타지마할은 아침, 태양빛이 가득한 한낮, 석양 무렵의 모습이 다르다고 해.
간디 슴리티
인도 건국의 아버지 간디가 암살당하기 전까지 살았던 곳이야. 지금은 기념관이 있어서 간디가 쓰던 침대와 사진, 간디의 행적을 따라 만들어 놓은 작은 인형들이 전시되어 있어.
아그라 성
무굴 제국의 악바르 황제가 수도를 델리에서 아그라로 옮기면서 건축하기 시작해서 그의 손자인 샤자한이 완성했어. 샤자한이 말년에 아들인 아우랑제브에 의해 갇힌 곳이 바로 이곳이야. 샤자한은 강 건너 사랑하는 아내가 묻혀있는 타지마할을 바라보다 끝내 숨을 거두었


카주라호 사원군
카주라호는 도시 전체가 거대한 유적지야. 힌두교와 자이나교 사원을 보고 싶다면 이곳을 꼭 가봐. 벽면을 수놓은 수많은 조각들을 통해 중세 인도의 부조를 한눈에 볼 수 있지.
불교의 성지
불교의 4대 성지를 아니? 석가모니가 태어난 룸비니, 깨달음을 얻은 부다가야, 처음 말씀을 전한 사르나트, 열반에 들어간 쿠시나가라! 이 중에서도 가장 성스러운 곳은 바로 깨달음을 얻은 부다가야야. 지금은 국제 사원으로 꾸며져 세계의 절을 다 볼 수 있어.

다르질링
히말라야 산맥 남동쪽 기슭에 있고, 7~8월에도 16℃ 정도로 시원한 곳이야. 1883년 영국이 이곳에 차를 재배하기 시작하면서 발전했대. 다르질링 히말라야 철도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어.

엘로라 석굴 사원 / 아잔타 석굴 사원
엘로라 석굴 사원은 인도 종교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 주는 곳이야. 불교뿐 아니라 힌두교와 자이나교의 석굴도 포함되어 있는데, 굴수는 모두 34개나 된대. 한편 아잔타 석굴 사원은 인도의 대표적인 고대 불교 석굴 사원이야. 현재는 인도뿐 아니라 세계가 인정하는 불교 예술의 보물 창고라 할 수 있는 곳이야.

IT 강국 인도

영국에서 독립한 후 인도는 정치에서는 민주주의를, 경제에서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섞어서 나라의 발전을 꾀했어. 그러다가 1990년대 IMF 외환 위기를 겪은 후 경제 개방을 더 많이 하면서 높은 국민 소득 증가를 이루어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지. 특히 IT 산업은 인도 경제의 중심으로, 세계 2위의 소프트웨어 수출국이야. 그렇다면 인도가 IT 강국으로 성장하게 된 배경은???
첫째, 인도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들 수 있어. 인도 정부는 80년대 후반부터 소프트웨어를 중심으로 IT 산업을 키우기 위해 노력해서 IT 산업에서 일하는 사람이 초기에 6,800명이던 것이 2007년에는 70만 명으로 늘어났다. 
둘째, 인도는 질 높은 교육을 받은 우수한 인재들이 많아. 영어가 공용어 중 하나이고, 19×19단 암기로 계산력이 빠른 것도 장점이야. 또 인도인은 노벨상을 6번이나 수상했을 정도로 수학과 과학 실력이 뛰어나다. 
셋째, 우수한 인력에 비해 인건비가 낮은 것도 큰 장점이야. 그래서 미국과 영국의 기업들이 앞다퉈 인도의 IT기업에 일을 맡기고 있다. 
넷째, 인도는 IT 분야와 관련하여 미래의 큰 시장이 될 것으로 보여. 인도의 영화 산업 규모는 세계 최대로 극장표 판매량이 일 년에 28억 장이고, 영화도 일 년에 1,200편을 제작하고 있어. 인도 영화의 경쟁력과 우수한 IT 기술이 결합하면 애니메이션, 3D 영상 등이 발전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볼리우드는 인도 뭄바이의 옛지명인 봄베이와 미국 영화의 중심지인 할리우드를 합쳐서 만든 말이야. 할리우드에 비교할 만큼 뭄바이가 영화의 중심지라는 뜻이 담겨 있는 거지. 볼리우드의 영화는 인도뿐 아니라 중동, 아프리카, 동남아시아에서도 인기가 높아. 또한 인도 사람들이 많이 이주한 영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미국에서도 인기가 높다.

영화를 즐기는 인도인들?

극장에서 박수를 치거나 야유를 보내면 어떨까? 우리나라에서는 매너 없는 행동이라고 비난받을 일이지만, 인도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래. 멋있는 주인공이 나타나면 휘파람을 불며 박수를 치고, 악역을 맡은 사람이 나오면 야유를 보내기도 해. 영화 중간중간 춤과 노래가 나오면 박수치고 노래 부르면서 영화를 즐긴다. 
영화 관람료도 매우 저렴해서 인도인들은 영화를 즐겨 본대. 영화의 내용은 거의 대부분 착한 사람은 복 받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 거래. 또 화려한 집과 멋진 배우가 등장하고 있대. 아마 현실에서 누릴 수 없는 것을 영화를 통해 누리고 싶은 인도인의 마음이 깔려 있는 걸지도 몰른다.
인구가 너무 많아
인도의 인구는 12억으로, 세계에서 중국 다음으로 인구가 많아. 게다가 인구는 계속 증가하고 있어. 인도 정부는 우리나라의 가족 계획 사업을 도입해서 출산율을 낮춰보려고 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어. 아기를 많이 낳는 하층민의 경우 교육을 못 받아 가족 계획 사업을 홍보하기 어려웠대. 인도의 경제 발전 문제는 인구 문제와 연결된다고 할 정도로 인구 문제 해결은 매우 중요하다.

공식 언어가 17가지나 돼
인도는 땅이 넓다보니 지방마다 쓰는 언어가 약간씩 달라서 현재 약 700개의 언어가 사용되고 있어. 헌법에서 인정하는 공식 언어만 해도 17개나 돼. 인도의 주()는 언어에 따라 나뉘기 때문에 주마다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 그중 가장 많이 사용하는 언어는 전 인구의 45%가 사용하는 힌디 어야. 하지만 힌디 어를 표준어로 하는 데 반대가 심해서 현재도 영어가 공용어로 쓰이고 있다.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싸움이 자꾸 일어나
인도는 지난 수천 년 동안 외부의 침략을 자주 받았는데 그중에서도 이슬람의 영향이 가장 오랫동안 지속되었어. 이 때문에 다양한 언어와 종교가 자리 잡았고 주민들의 생활 방식도 다양해졌어. 종교 간에 서로 싸울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잘 지냈어. 그런데 영국의 식민 지배를 거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200여 년간에 걸친 영국의 지배로부터 독립하면서 힌두교 중심의 인도, 이슬람교 중심의 파키스탄으로 나뉘게 되었어. 그런데 독립할 당시 국경선이 종교 집단을 경계로 정확하게 그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국경에서는 여전히 종교 갈등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

카스트 제도가 여전히 남아 있어
3,500년이나 묵은 인도의 카스트 제도는 너무나 단단해서 그 신분의 벽을 뛰어넘기가 쉽지 않아. 게다가 ‘닿기만 해도 부정해진다.’는 인도인들의 생각이 담겨있는 ‘불가촉 천민’문제는 인도가 급히 해결해야 할 숙제야. 1955년 〈불가촉 천민법〉이 만들어져 공식적으로는 이들에 대한 종교적·사회적·직업적 차별을 금하고 있어. 그리고 입학이나 취업, 의식의 일정 비율을 배정하는 등 차별을 없애기 위한 정책을 실시하고 있어. 하지만 대다수의 불가촉 천민은 아직도 가난에 시달리며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살고 있다.

남편따라 불길 속으로 - 사티.

인도에는 남편이 죽으면 죽은 남편을 화장할 때 아내도 같이 불 속에 뛰어드는 ‘사티’라는 오랜 관습이 있어. 사티를 한 여인은 신으로 모셔지고, 이 여인을 모신 사원이 세워지게 돼. 이 이상한 관습은 아직도 있는데, 1997년도에 사티가 한 번 행해졌고, 아직까지 5년에 한 번 꼴로 나타나고 있어. 마을 사람이나 친척들이 그 여자에게 환각제를 먹여서 남편 화장하는 데 같이 밀어 넣어서 죽이기도 한다.

‘인도의 살아 있는 영웅’이라 불리는 나렌드라 자다브는 불가촉 천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인도 중앙은행 수석 경제 보좌관, 인도 푸네대학 총장 자리에 올랐어. 세계의 언론은 그를 인도의 미래를 이끌어갈 차기 대통령으로 평가하고 있지. 동물보다 못한 취급을 받아야 했던 사람들인 불가촉 천민으로 태어난 나렌드라 자다브! 그는 태어난 신분을 절대 바꿀 수 없는 인도의 절대적 신분 제도를 무너뜨리면서 지금의 자리에 올라 인도의 살아있는 영웅이 되었다.

무굴 제국/이슬람과 힌두가 만났을 때.
 16세기 전반에서 19세기 중엽까지 인도 지역을 통치한 이슬람 왕조(1526∼1857년).
인도의 분열을 틈타 들어온 이슬람 세력
6세기 말부터 굽타 왕조가 약해지고 인도를 이끌 큰 세력이 없자, 이슬람 세력이 차츰 손을 뻗기 시작했어. 8세기에는 인도 서북 지방에 자리 잡은 이슬람 세력이 인도 북부를 자주 침략하여 북인도 지역은 차츰 이슬람 세력에게 넘어갔고, 자연스럽게 이슬람의 문화와 종교가 스며들었어. 13세기 초에는 인도의 중심지인 델리가 이슬람의 손에 들어가게 되면서 이슬람의 인도 지배가 시작되었다. 

통일보다 분열이 더 자연스러운 나라

통일보다 분열이 더 자연스러운 나라
북인도남인도
분열기·이슬람의 침입
(7~13세기)
힌두교를 믿는 여러 왕조가 나누어 다스림
이슬람 왕조 - 델리 술탄왕조
(13~16세기)
무굴 제국.(16~19세기)
생산력이 낮고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기에 인도와 같은 거대한 땅을 하나로 통일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어. 실제로
인도가 영국에 의해 지배당하기 이전에는 한 번도 통일을 이루지 못했으니까 말이야. 인도의 동부, 서북부, 그리고 남부에는
늘 서로 다른 왕조가 있었고, 서북부 지역에는 이슬람을 비롯한 수많은 이민족의 이동과 국가 간의 대결로 대단히 복잡한
역사가 펼쳐졌어.
힌두교와 카스트 제도의 신분 차별에 신음하던 인도의 하층민들은 이슬람 세력을 반겼어. 알라 앞에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교리에 끌렸던 거야. 자신의 세력을 키우려는 목적으로 이슬람교를 받아들이는 인도인들도 많았고, 전쟁을 피하거나 좀더 나은 위치에 서기 위해 종족 단위로 개종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슬람이 인도에 세운 제국

무굴 제국의 성립
1526년, 몽골의 후손인 티무르의 5대손 바부르가 인도의 새 주인이 되었어. 바부르의 세력이 북인도의 중심지인 델리와 아그라를 차지하면서, 무굴 제국이 탄생한 거야. 무굴 제국의 전성기는 악바르 왕 때였다. 그는 인도 북부와 아프가니스탄을 포함하는 대제국을 건설하고, 정치·경제·사회 등 여러 분야에서 무굴 제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악바르 왕 자신은 이슬람교도였지만, 힌두교를 차별하지 않고 힌두교도에게 물리던 세금을 없애고 벼슬도 할 수 있는 기회를 줬어. 나아가 힌두교도의 공주와 결혼하여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 사이의 화합을 실천했다.
무굴 제국의 번영과 쇠퇴
무굴 제국은 17세기 아우랑제브 왕 때에 인도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크게 발전했어. 하지만 아우랑제브는 아버지 샤자한을 감옥에 가두고 두 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어. 
이슬람교를 믿지 않는 힌두교도에게 엄청난 세금을 매기고, 수많은 힌두교 신전을 파괴한 후 그 자리에 이슬람 사원을 세웠다. 무굴 제국은 아우랑제브 왕 이후 국력이 급속히 약화되었고, 이러한 가운데 영국을 비롯한 서양 세력의 침략을 받아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슬람 문화와 힌두 문화의 만남
16세기 무굴 제국의 등장으로 이슬람교는 인도 사회에 깊이 파고들어 힌두 문화와 이슬람 문화가 융합된 문화를 만들었어. 힌두 문화의 바탕 위에 이슬람교의 유일신 사상을 받아들인 시크교는 우상 숭배를 거부하고 카스트 제도를 부정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 

무굴 제국의 지배자들은 인도인들과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힌두 어, 페르시아 어, 아랍 어 등을 혼합하여 우루두 어를 만들었는데 오늘날에도 사용되고 있어. 건축에서는 타지마할 묘당과 같은 뛰어난 작품이 나타났어. 타지마할은 이슬람 사원의 양식에 연꽃 무늬를 비롯한 인도 고유의 문화를 잘 조화시켜 인도·이슬람 문화의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타지마할은 ‘인간이 만든 최고의 걸작품’,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이라는 칭찬이 끊이지 않아. 타지마할은 샤자한이 사랑하던 왕비 뭄타즈 마할이 죽자 그녀를 기리기 위해 만든 무덤이다. 

아름다웠던 왕비를 잃은 슬픔에 샤자한은 그의 온갖 예술적 정열과 국력을 쏟아 22년 동안 무덤을 짓는 데 열중했다. 평소에도 건축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세계 각지의 솜씨 있는 장인들을 불러 모으고, 백색의 대리석 외에도 보석들을 동원하여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어냈다.








중앙고속도로.죽령터널 . 竹嶺.(철길)

중앙고속도로 . 中路.

정의

부산광역시 사상구 삼락동에서 강원도 춘천시 신북읍을 연결하는 고속도로.

개설

고속도로 제55호선이다. 남북 방향으로 뻗어 있으며 총 연장 288.8㎞, 왕복 4∼8차로(삼락∼초정, 대동∼동대구분기점, 금호분기점∼춘천 구간은 4차로, 초정∼대동분기점 구간은 6차로, 동대구∼금호분기점 구간은 8차로)로 구성된 고속도로이다.
대동분기점에서 동일한 고속도로 노선번호(제55호선)를 공유한 대구부산고속도로와 직결되고 동대구분기점에서 금호분기점까지는 경부고속도로와 중첩되며, 금호분기점에서 본선으로 진입하여 경상북도 및 충청북도를 거쳐 강원도 춘천시까지 연결된다. 또한 대동분기점에서 양산분기점에 이르는 구간(8.2㎞)은 중앙고속도로 지선(고속국도 제551호선)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속도로 일부 구간(대구부산고속도로 구간)이 단절되는 까닭에 일부에서는 금호분기점∼춘천 구간만을 중앙고속도로로 보기도 한다.
노선 특성상 한반도 중앙의 험준한 산악지형을 뚫고 계곡과 계곡을 연결하는 공사구간이 많아 국내 고속도로 중 교량 및 터널이 차지하는 비중이 다른 노선보다 월등하게 높다(전체 구간의 20%). 특히 경상북도 영주시와 충청북도 단양시 사이에 놓인 죽령터널(국내 최장 도로터널, 총 연장 4,520m)과 교각 높이만 64m에 달하는 원주대교 등은 중앙고속도로가 자랑하는 명물로 꼽힌다.
중앙고속도로의 개통으로 대구와 춘천간 주행시간이 6시간에서 3시간으로 단축되어 지역간 운송 효율성이 크게 제고되었으며, 과거 낙후되었던 강원, 충청북도, 경상북도 내륙 지역의 자원개발은 물론 국토의 균형있는 발전을 촉진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또한 태백산맥, 치악산국립공원·소백산국립공원, 충주호, 단양8경 등 관광자원이 풍부한 지역을 관통하는 까닭에 도시민들의 관광도로로서 각광받고 있다.
형성 및 변천
이 노선은 1970년대 초반 국가기간고속도로건설계획의 일환으로 마산에서 원주에 이르는 노선을 구상했다가 1차로 1977년 말 대구∼마산 구간이 개통된 이후 나머지 구간에 해당한다. 1989년 10월 노선이 지정되었고 2002년 5월 새로운 고속도로 노선번호 체계에 따라 고속국도 제14호에서 제55호로 변경되었다. 낙후된 내륙지역 개발을 촉진하고 전국을 반나절 생활권으로 묶어 효율적인 개발을 유도하기 위한 기반시설 확충사업으로 건설되었다.
현황
2010년 9월 현재 중앙고속도로는 터널 30개, 교량 357개 등의 도로 시설과 분기점 8개 소(대저, 대동, 동대구, 도동, 금호, 안동, 만종, 춘천), 나들목 영업소 24개 소(삼락, 김해공항, 초정, 북대구, 칠곡, 다부, 가산, 군위, 의성, 남안동, 서안동, 예천, 영주, 풍기, 단양, 북단양, 남제천, 제천, 신림, 남원주, 북원주, 횡성, 홍천, 춘천), 본선 영업소 2개 소(대동, 춘천), 휴게소 8개 소(동명, 군위, 안동, 단양, 치악, 원주, 홍천강, 춘천) 등의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다.
대저분기점에서 남해고속도로(고속국도 10호선), 대동분기점에서 대구부산고속도로(고속국도 55호선)ㆍ중앙고속도로 지선(고속국도 551호선), 동대구분기점에서 경부고속도로(고속국도 1호선)ㆍ대구부산고속도로(고속국도 55호선), 도동분기점에서 익산포항고속도로(고속국도 20호선), 금호분기점에서 경부고속도로(고속국도 1호선)ㆍ중부내륙고속도로 지선(고속국도 451호선), 안동분기점에서 당진영덕고속도로(고속국도 30호선), 만종분기점에서 영동고속도로(고속국도 50호선), 춘천분기점에서 서울양양고속도로(고속국도 60호선)와 접속된다.
2008년 기준 1일 교통량은 승용차 15,749대, 버스 985대, 화물차 8,550대 등 총 25,284대에 달하며, 차량 주행 속도는 전 차량에 대해 춘천∼대구 구간은 최고 100㎞/h, 최저 50㎞/h(단, 치악휴게소부터 남원주나들목까지, 춘천휴게소(부산 방면)부터 춘천나들목까지는 최고 80㎞/h구간)이고, 김해∼부산 구간은 최고 110㎞/h, 최저 60㎞/h로 제한하고 있다. 

소재지"
부산광역시 사상구·강서구, 경상남도 김해시, 대구광역시 동구·북구, 경상북도 칠곡군·군위군·의성군·안동시·예천군·영주시, 충청북도 단양군·제천시, 강원도 원주시·횡성군·홍천군·춘천시.
한반도의 동부내륙을 가로지르는 총연장 280km의 4차선 고속도로. 지난 89년 시작해 12년만인 2001년 12월 14일 전구간이 개통됐다.
경북 영풍군 희방사역과 충북 단양군 죽령역 사이에 있는 중앙선의 터널로 1936년 건설되었다. 길이 4,500m.

정의
경상북도 영주시 희방사역과 충청북도 단양군 죽령역 사이에 있는 중앙선의 터널.





건립경위
이 노선은 1970년대 초반 국가기간고속도로 건설 계획의 일환으로 마산에서 원주에 이르는 노선을 구상했다가 1977년 말에 1차로 대구~마산 간을 개통하였다. 중앙고속도로는 수송 수단이 미비해 풍부한 지하자원의 개발이 지연된 태백산맥과 치악산·소백산 국립공원 및 충주호·단양을 중심으로 한 관광자원이 풍부한 지역을 통과해 동부 내륙의 지역 개발을 촉진시켜 전 국토의 균형 있는 발전을 이룰 목적으로 건립되었다
변천
1994년 12월 12일 만종분기점~남원주 구간이, 12월 15일 금호분기점~칠곡 구간이 개통되었다. 1995년 12월 29일에는 칠곡~안동, 제천~남원주, 홍천~춘천 구간이 개통되었다. 1996년 3월 28일 칠곡~안동, 제천~남원주, 홍천~춘천 구간 확장공사를 착공하였다. 6월 28일에는 대동분기점~대저분기점, 중앙지선 양산분기점~대동분기점이 개통되었다.

2000년 6월 1일 영주~풍기 구간이 개통되고 칠곡~안동, 제천~만종분기점, 홍천~춘천 구간이 왕복 4차선으로 확장 개통되었다. 2001년 8월 17일 만종분기점~홍천 구간을 개통하였다. 8월 24일 고속국도 노선번호가 제14호에서 제55호로, 제19호의2에서 제551호로 변경되었다. 2001년 12월 19일 풍기~제천 구간이 개통되었다.
현황" 
중앙고속도로는 안동시의 서쪽을 남북으로 통과하고 있다. 남쪽에는 남안동IC가 위치하며 북쪽에는 서안동IC가 위치하고 있다. 차량 이용은 일일 216대이고 2007년 7만 8,916대가 이용하였다. 중앙고속도로는 험준한 산악 지형을 뚫고 계곡과 계곡을 연결하는 어려운 공사 구간이 많아 교량 및 터널 등 구조물이 다른 노선보다 훨씬 많은 20%에 달한다.
춘천에서 시작해 홍천 원주 제천 단양 영주 안동을 거쳐 대구에서 끝난다. 영동고속도로 83km 지점인 만종분기점에서 영동고속도로와 교차하고 경부고속도로 2백88km 지점인 금호분기점에서 경부고속도로와 만난다.

중앙고속도로는 지난 70년대 초반 국가기간 고속도로 건설계획의 일환으로 마산에서 원주에 이르는 노선을 구상했다가 1차로 대구~마산 간을 77년 개통하고 난 나머지 구간이 3단계로 나눠 추진됐다. 

1단계 구간인 대구~안동(87.5㎞), 제천~원주(37.6㎞), 홍천~춘천(26.2㎞) 등 151.3㎞는 89년 10월 착공해 5년 10개월의 공사 끝에 95년 8월 왕복 2차로로 개통된 뒤 2000년 6월 또다시 4차로로 확장 개통됐다.

2단계 구간인 안동~영주(25.5㎞), 영주~제천(60㎞), 원주~홍천(43.2㎞) 등 128.7㎞는 94년 12월부터 구간별로 착공해 안동~풍기 구간이 99년, 원주~홍천구간이 2000년 각각 개통됐다.

마지막 3단계 구간은 풍기~제천 간 50.5㎞ 구간으로 2001년 12월 14일 개통됐다.


중앙고속도로에는 특히 국내 최장인 '죽령터널'과, 가장 높은 다리인 '신단양대교'가 건설됐다.

죽령고개를 관통하는 '죽령터널'은 경북 영주시 풍기읍 수철리에서 시작해 충북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리에서 끝나며 국내 최장(4520m)의 도로터널이다.

'신단양대교'는 교량 높이가 103m로, 단양군 적성면 현곡리 와단성면 하방리 사이 충주호를 가로질러 건설되었다.
부산광역시 사상구 삼락동에서 강원도 춘천시 동내면 사암리(춘천 인터체인지)에 이르는 고속도로로 길이 288.87㎞, 너비 23.4m, 왕복4∼6차선이며 낙후된 지역의 개발을 촉진하고 전국을 반나절 생활권으로 묶어 효율적인 개발을 유도하기 위한 기반시설 확충사업으로 건설되었다.
길이 288.87㎞, 너비 23.4m, 왕복4∼6차선이다. 왕복4차선은 287.27㎞, 왕복6차선은 1.6㎞이다. 부산광역시 3.8㎞, 대구광역시 8.25㎞, 강원도 96.06㎞, 충청북도 51.31㎞, 경상북도123.13㎞, 경상남도 6.32㎞이다. 동대구 인터체인지∼북대구 인터체인지∼금호분기점 17.25㎞ 구간은 경부고속도로와 중복된다.

1989년 10월 20일 노선이 지정되었고, 2002년 5월 1일 변경된 새로운 고속도로 노선번호 체계에 따라 고속국도 제14호에서 제55호로 바뀌었다. 낙후된 지역의 개발을 촉진하고 전국을 반나절 생활권으로 묶어 효율적인 개발을 유도하기 위한 기반시설 확충사업으로 건설되었다.

이 고속도로의 개통으로 대구와 춘천 간 주행시간이 6시간에서 3시간으로 줄어들어 물자의 운송시간을 단축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또한 대구·군위·의성·안동·예천·영주·풍기·단양·제천·원주·횡성·홍천·춘천을 연결하여 낙후된 중부 내륙지역의 자원개발 및 지역간 균형개발을 촉진하며 관광도로로서의 역할을 한다.
1985년 6월부터 1986년 12월에 걸쳐 타당성 조사를 실시하고, 1989년 10월 착공하였다. 제1단계 공사는 대구∼안동 간 87.5㎞, 제천∼원주 간 37.6㎞, 홍천∼춘천 간 26.2㎞로 총길이 151.3㎞를 1995년 8월 29일에 개통했다. 당시 왕복2차선이었으나 구간의 교통정체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2000년 왕복4차선으로 확장하였다.

제2단계 공사는 1993∼2000년 안동∼영주 간 25.5㎞, 1994∼2002년 영주∼제천 간 60.7㎞, 1996∼2002년 원주∼홍천 간 42.5㎞의 왕복4차선으로 총길이 129㎞를 2001년 12월에 개통하였다. 2001년에 공사를 시작한 부산~대구 간 100.4km는 2006년 1월 25일에 부산-대구간고속도로로 개통했다.

기점에서 경부선과 대구선 및 경부고속도로(고속국도 1)와 중부내륙고속도로(고속국도 45)를 이용할 수 있고, 종점에서 경춘선을 이용할 수 있다.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 인터체인지 가까이로 영동선이 지나고 강원도 원주시 만종분기점에서 영동고속도로(고속국도 50)와 연결되며, 중앙선이 지나간다. 충청북도 제천시에서는 충북선·태백선·중앙선을 이용할 수 있다

죽령터널 . 竹嶺. (기차)

내용

1936년 건설되었다. 길이는 4,500m로서 태백선의 정암터널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긴 철도터널이다.
일본인들에 의하여 군용목적으로 건설된 중앙선은 단양 쪽이 영주 쪽보다 지대가 높기 때문에 나선형으로 터널을 만들었는데, 서울 청량리역을 기점으로 하여 194.87㎞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단면형태는 말굽형[]이며, 단면제원은 너비 3.9m, 높이 5.9m로서 단선으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