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감록. 鄭鑑錄.
나라의 흥망과 개인의 안거 등을 말하는 우리 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예언서로 알려지고 있다.
조선 시대에 널리 퍼진 예언서이다. 조선 왕조가 망한 뒤 정도령이 나타나 정씨 왕조를 세우고 계룡산으로 도읍을 옮긴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당시 어려운 생활을 하며 조선 조정을 원망하던 백성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조선시대의 금서.
조선 개국 이래 전해오는 참설인 『정감록(鄭鑑錄)』에 따르면 연산현 계룡산에 있는 개태사(開泰寺) 터가 장차 정씨가 도읍할 길지라고 하였다.
당시 떠돌았던 『정감록』은 『주역』을 비롯한 여러 비기를 집대성한 것으로, 반(反)왕조적이며 현실 부정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조선시대 이래 금서에 속하였다.
조선 개국 이래 민간에 은밀하게 전승되어온 참설인 『정감록』의 작자를 정감 혹은 이심으로 보기도 하는데, 『정감록』이 정감과 이심의 대화 형식으로 서술되었기 때문이다.
조선 태조를 도와 역성혁명을 주도했던 정도전이 그것을 합리화하고 민심을 조작하기 위하여 저술하였다는 추측도 있다.
수십 가지 비결이 집대성되어 있는 『정감록』은 형식 면에서도 예언설ㆍ참요ㆍ역수뿐 아니라 풍수지리설에 의한 해설까지 포괄적으로 다루었으며, 사상적으로도 유교ㆍ도교ㆍ참위서ㆍ음양오행설까지 포함하였다.
수십 가지 비결이 집대성되어 있는 『정감록』은 형식 면에서도 예언설ㆍ참요ㆍ역수뿐 아니라 풍수지리설에 의한 해설까지 포괄적으로 다루었으며, 사상적으로도 유교ㆍ도교ㆍ참위서ㆍ음양오행설까지 포함하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급격한 사회 변동 속에서 몰락한 양반들이 풍수지리설과 음양오행설을 바탕으로 하여 왕조 교체와 사회 변혁의 법칙을 우주론에 의한 법칙과 결부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정감록』의 내용을 대변하는 「감결」의 본문 속에 나오는 구절은 다음과 같다.
『정감록』의 내용을 대변하는 「감결」의 본문 속에 나오는 구절은 다음과 같다.
한륭공이 완산백에 봉해졌다.
세 사람의 아들이 있었는데 맏아들 임은 일찍 죽었고,
둘째가 심이고,
셋째가 연이었다.
정공과 더불어 팔도 산수의 기이한 절승지를 유람하다가 금강산 비로대에 올라 서로 말하기를 “천지는 음양이 먼저 주장하는구나” 하자, 심이 “산수의 법이 기이하고 절승하다” 하였다.
정감이 “곤륜산으로부터 맥이 백두산에 이르고, 원기가 평양에 이르렀으나, 평양은 이미 1000년의 운이 지나가고, 운이 송악에 옮겨가 500년의 도읍지가 되나, 요승과 궁녀가 장난하여 땅의 기운이 쇠하고 하늘의 운수가 막히게 되면 다시 운이 한양으로 옮겨갈 것이다” 하였다.
“백두산의 맥이 금강산으로 옮겨가고 태백산과 소백산에까지 이르러서 산천의 기운이 계룡산으로 들어갔으니 정씨의 800년 도읍지요, 뒤에 가야산에 들어갔으니 조씨의 1000년 도읍지다.
정감이 “곤륜산으로부터 맥이 백두산에 이르고, 원기가 평양에 이르렀으나, 평양은 이미 1000년의 운이 지나가고, 운이 송악에 옮겨가 500년의 도읍지가 되나, 요승과 궁녀가 장난하여 땅의 기운이 쇠하고 하늘의 운수가 막히게 되면 다시 운이 한양으로 옮겨갈 것이다” 하였다.
“백두산의 맥이 금강산으로 옮겨가고 태백산과 소백산에까지 이르러서 산천의 기운이 계룡산으로 들어갔으니 정씨의 800년 도읍지요, 뒤에 가야산에 들어갔으니 조씨의 1000년 도읍지다.
전주는 범씨의 600년 도읍지이고, 다시 송악은 왕씨가 부흥할 땅이나 그 뒤는 자세하지 않아 상고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정감록』은 비록 허무맹랑한 풍수설에서 비롯된 예언이라 하지만, 당시 오랜 왕정에 시달리던 백성들이나 조정에 실망을 느끼던 민중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하였다.
광해군과 인조 이후의 모든 혁명에는 거의 빠짐없이 『정감록』의 예언이 거론되었다.
연산군 이래 국정의 문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당쟁의 틈바구니에서 극도로 암담한 삶을 살던 백성들에게 이씨가 망하면 다음엔 정씨가 있고, 그다음엔 조씨ㆍ범씨가 있어 우리 민족을 구원할 것이라는 희망을 불어넣으려 한 점에서 이 책은 높이 평가되어야 하지만, 재난이 발생할 때마다
연산군 이래 국정의 문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당쟁의 틈바구니에서 극도로 암담한 삶을 살던 백성들에게 이씨가 망하면 다음엔 정씨가 있고, 그다음엔 조씨ㆍ범씨가 있어 우리 민족을 구원할 것이라는 희망을 불어넣으려 한 점에서 이 책은 높이 평가되어야 하지만, 재난이 발생할 때마다
『정감록』에 나오는 십승지지를 찾아 떠나는 사람들이 비일비재하였던 것은 문제점으로 지적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보통 《감결(鑑訣)》을 비롯하여 《동국역대기수본궁음양결(東國歷代氣數本宮陰陽訣)》《역대왕도본궁수(歷代王都本宮數)》 등 역대의 비기를 통칭하여 《정감록》이라 부르기도 하고, 내용의 중심을 이루는 《감결》만 가리켜 《정감록》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원본도 저자도 알 수 없는데다가 오랜 세월을 거쳐 민간에 전해오는 동안에 다양한 이본(異本)이 생겨 그 종류가 40∼50종류에 이른다.
책 이름이라기보다는 정체불명의 말세예언(末世豫言)을 추종하는 민간신앙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현 이 제목이 붙은 책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현 이 제목이 붙은 책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③ 김용주(金用柱) 발행 《정감록》:활자본. 국판. 163면. 1922년 발행,
④ 《비난정감록진본(批難鄭鑑錄眞本)》:활자본. 4×6판. 100면,
⑤ 자유토론사 장판(自由討論社藏版) 호소이 하지메[細井肇] 편저 《정감록》:4×6판 등을 들 수 있다.
《정감록》의 원전 격인 《감결》은 조선의 선조인 한륭공(漢隆公)의 두 아들 이심(李沁)·이연(李淵)과 조선 멸망 후 일어설 정씨(鄭氏)의 조상이라는 정감(鄭鑑)이 금강산에서 마주앉아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엮어져 있다.
《정감록》의 원전 격인 《감결》은 조선의 선조인 한륭공(漢隆公)의 두 아들 이심(李沁)·이연(李淵)과 조선 멸망 후 일어설 정씨(鄭氏)의 조상이라는 정감(鄭鑑)이 금강산에서 마주앉아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엮어져 있다.
그 다음은 범씨(范氏)의 완산(完山) 몇백 년과 왕씨(王氏)의 재차 송악(松嶽:개성) 도읍 등을 논하고, 그 중간에 언제 무슨 재난과 화변(禍變)이 있어 세태와 민심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차례로 예언하고 있다.
현재도 전해오고 있는 것은 이들의 문답 외에 도선(道詵)·무학(無學)·토정(土亭)·격암(格庵) 등의 예언집도 있다.
현재도 전해오고 있는 것은 이들의 문답 외에 도선(道詵)·무학(無學)·토정(土亭)·격암(格庵) 등의 예언집도 있다.
이에 관한 가장 오랜 기록은 1785년(정조 9) 홍복영(洪福榮)의 옥사사건 기록에서 나온다.
비록 허무맹랑한 도참설·풍수설에서 비롯된 예언이라 하지만, 당시 오랜 왕정(王政)에 시달리며 조정에 대해 실망을 느끼고 있던 민중들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하였다.
비록 허무맹랑한 도참설·풍수설에서 비롯된 예언이라 하지만, 당시 오랜 왕정(王政)에 시달리며 조정에 대해 실망을 느끼고 있던 민중들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하였다.
정의
조선시대 이래 민간에 널리 유포되어온 예언서.
내용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예언서이다. 여러 가지의 감결류(鑑訣類)와 비결서(秘訣書)의 집성이며 이본(異本)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정감록≫에 포함되는 문헌으로는 각종 이본들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감결을 비롯하여, 삼한산림비기(三韓山林秘記)·화악노정기(華岳路程記)·구궁변수법(九宮變數法)·동국역대본궁음양결(東國歷代本宮陰陽訣)·무학비결(無學秘訣)·도선비결(道詵秘訣)·남사고비결(南師古秘訣)·징비기(徵秘記)·토정가장비결(土亭家藏秘訣)·경주이선생가장결(慶州李先生家藏訣)·삼도봉시(三道峰詩)·옥룡자기(玉龍子記) 등 수십 가지가 있다.
≪정감록≫의 저자나 성립 시기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확실한 것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정감록≫은 반왕조적이며 현실 부정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조선시대 이래 금서에 속하였으며 민간에 은밀히 전승되어 왔다.
작자를 정감(鄭鑑) 혹은 이심(李沁)이라고 보기도 하나, 이는 ≪정감록≫이 정감과 이심의 대화형식으로 서술된 까닭에 그렇게 보는 것이며, 이들은 전설적인 인물로 보아야 한다.
정도전(鄭道傳)이 조선 왕조의 역성혁명을 합리화하고 민심을 조작하기 위하여 저술하였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정감록≫이 만들어지고, 민간에 숨겨져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은 이른바 반왕조적 사회 구성원에 의하여 가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회 변동의 와중에서 몰락한 양반들이 풍수지리설이나 음양오행설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왕조 교체와 사회 변혁의 법칙을 우주론에 입각한 운세(運世)의 법칙과 결부시키려 하였다고 하겠다.
≪정감록≫이 한 사람의 인물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내용이 다양한 수십여 편의 비결류의 집성이라는 점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형식면에서도 예언설·참요(讖謠)·역수(易數)의 풀이나 풍수지리설에 의한 해석 등이 다양하게 서술되어 있으며, 사상도 유교의 외도(外道)나 도교 및 참위설·음양오행설의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정감록≫은 억눌림 때문에 공식적으로 인쇄된 것이 아니라 사본으로 수전(手傳)되어 내려왔으며, 그동안 이들에 의하여 첨삭이 가해졌을 것으로 판단된다.
성립 시기에 대해서는 대체로 외적의 침입에 의하여 사회 혼란이 극심하고 개인적인 자기보전에 급급하였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로 보는 설이 가장 설득력있게 받아 들여지고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로서는,
첫째 지명고적 관점(地名考的觀點)에서 조선시대에 바뀐 지명이 많이 나타난다는 점,
둘째 세조·성종 때의 분서목(焚書目)에 ≪정감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
셋째 ≪인조실록≫에 있는 ‘초포조입계룡건도(草浦潮入鷄龍建都)’라는 문구에 ≪정감록≫의 계룡산천도설이 반영되어 있다는 점 등이다.
내용은 난세에 풍수설에 따라 복정(卜定:점쳐서 정하는 것)된 피난처에서만 지복(至福)을 누릴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정씨(鄭氏) 성의 진인(眞人)이 출현하여 이씨 왕조가 멸망하고 새로운 세계가 도래할 것을 중심으로 하는 예언이다.
《정감록》의 인기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백성들의 기대를 높였고, 조선 후기에 일어난 민중 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사람들은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원하는 마음으로 조선 조정에 맞서 일어난 반란에 참여했다.
《정감록》은 정씨의 시조인 정감에게 들은 예언을 정리한 책이다.
《정감록》은 정씨의 시조인 정감에게 들은 예언을 정리한 책이다.
정감은 조선 왕조가 멸망한 뒤 ‘정도령’이라는 영웅이 나와 백성들을 구제하고 계룡산에서 새로운 왕조를 세울 것이라고 예언했다.
스스로 정도령이라고 내세우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정감록》은 조선의 선조인 이심이라는 사람이 정씨의 조상인 정감에게서 들었다는 이야기를 정리한 책이다.
이심이나 정감은 실제로 있었던 사람이 아니었다.
책을 신비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꾸며낸 인물이다.
《정감록》은 여러 가지 비기(비밀리에 전해지던 기록)의 내용을 모아 엮었고, 음양오행에 따라 미래를 예언하는 참위설이나 풍수지리설, 도교 사상 등이 섞여 있다.
《정감록》은 여러 가지 종류가 전해지고 있고 책에 따라 내용도 다르다.
공통된 내용 가운데 왕조와 도읍지의 변화에 관한 것이 사람들의 큰 관심을 끌었다.
정감이 이심에게 조선 이후 나라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예언했기 때문이다. 《정감록》에 따르면 이성계의 후손인 이씨의 한양, 그 이후에는 정씨의 계룡산, 조씨의 가야산, 범씨의 완산, 왕씨의 송악(개성) 순서로 왕조와 도읍이 이어질 것이라고 했다.
왕조와 도읍은 몇 백 년을 주기로 바뀔 것이라고 했다.
《정감록》은 다소 허황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조선의 백성들은 세도 정치와 탐관오리들의 수탈로 인해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정감록》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라가 바뀌고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를 기대했다.
《정감록》은 19세기에 일어난 민중 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조선 조정에 반대하며 난을 일으키려던 사람들은 《정감록》의 예언을 이용해 사람을 모으고 세력을 키웠다.
이들은 스스로 계룡산에 새로운 왕조를 세울 ‘정도령’이라고 주장했다.
조선 사회에서는 계속해서 정도령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심지어 오늘날에도 나타나고 있다.
심화
《정감록》은 흥미로운 내용이 담긴 책이지만 사회를 어지럽게 만드는 폐해를 낳기도 했다.
전쟁이 일어나거나 사회가 어지러워지면, 사람들은 《정감록》에 나오는 중요한 장소로 줄줄이 피난을 떠났다.
자연지리적 조건을 음양오행설과 결부시켜 해석한 풍수지리설이 원용되고 있다.
표현기법상의 특징으로는 직설적인 표현을 피하고 은어(隱語)·우의(寓意)·시구(詩句)·파자(破字)를 사용하여 해석이 난삽하고 애매한 표현이 많다.
이들 일부는 그곳에서 공동체를 만들어 생활하기도 했다.
한양 다음의 도읍이 된다는 계룡산이나 완산의 모악산, 지리산 주변에서는 새로운 종교가 창시되는 일도 많았다.
미래에 다가올 멸망에 대비한 피난처의 이상경(理想境)에 대한 동경이 ≪정감록≫ 전반을 꿰뚫고 흐르고 있다.
당초에는 병화를 피하는 소극적이고 은둔적인 사상이 ≪정감록≫과 관련하여 민심에 크게 우합(偶合)한 것이지만, 조선 후기의 하대로 내려올수록 반왕조적인 색깔이 짙어져서 반란이나 대소규모의 민란은 모두가 ≪정감록≫에서 우러나온 진인출현설이 압도하게 되었다.
19세기의 민중운동이 모두 ≪정감록≫과 관련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동학을 기점으로 속출한 한국의 종교운동이 거의 모두가 ≪정감록≫과 한 맥으로 통하고 있다고 할 만큼 민중의 의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정감록≫은 신비하고, 어떻게 보면 황당무계하기 그지없는 전통사회의 예언서에 불과할지도 모르나, 실제는 조선시대의 사회사상사를 엮는 데 불가결한 사료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