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1일 목요일

삼일절 . 三一節.

삼일절 . 三一節.


3ㆍ1 독립 운동 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민족의 단결과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하여 제정한 국경일.
삼일절은 일제 강점기때 우리 선조들이 일본에 맞서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운동을 펼친 것을 기념하는 날이에요.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독립 선언서 낭독으로 시작된 독립만세 운동은 1919년 5월까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어요.

3·1운동의 기미 독립 선언서가 발표되기 전, 만주에서 대한 독립 선언서가 발표되고, 일본에서는 2·8 독립선언이 발표되었어요.
1919년 3월 1일 정오, 우리나라 사람들은 당시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일제의 압박에 항거하기 위해 전세계에 민족의 자주독립을 선언하고 평화적 시위를 열었어요.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정신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하여 정부는 1949년 이 날을 국경일로 정하였어요.

'삼일절 노래' 가사 악보

삼일절 노래 악보
기미년 삼월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 독립 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이 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한강은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선열하 이 나라를 보소서
동포야 이 날을 길이 빛내자


1919년 3·1운동의 독립 정신을 계승하여 민족의 단결을 굳게 하며, 국민의 애국심을 함양하기 위해 제정한 기념일로 5대 국경일 중 하나.

내용

{3·1절()의 역사적 의의} 삼일절은 해방 이후 지금까지 가장 중요한 국가 기념일로 평가받는다.
3·1운동이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역사적인 의의 때문이다.
이 점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라고 밝히고 있는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도 잘 나타나 있다.


5대 국경일의 하나로 3월 1일이다. 
1919년 3월 1일 정오를 기하여 일제의 압박에 항거, 전세계에 민족의 자주독립을 선언하고 온 민족이 총궐기하여 평화적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러한 우리 민족의 숭고한 자주독립정신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하여 정부는 1949년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제정, 공포하여 이 날을 국경일로 정하였으며,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에 따라 공휴일이다.
이 날은 3부 요인을 비롯해서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모여 기념식을 거행하며, 조국 광복을 위하여 싸우다 순국한 선열의 유족 및 애국운동가들로 구성된 광복회 회원들은 별도로 탑골공원에 모여 그 날의 뜻을 되새기는 의식을 거행한다.
정부에서는 광복회 회원들에게 철도·시내버스·수도권전철 등에 대한 무임승차의 편의를 제공하며, 전국의 고궁 및 공원을 무료로 입장할 수 있도록 하고, 일반 가정은 전국적으로 태극기를 게양하여 그 날의 의의를 기린다.




일제의 철통같은 무단통치를 뚫고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이고 열정적으로 전개된 3·1운동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한 분명한 거부와 문화적, 역사적 민족 개념에 기반한 이상적 국가 건설이라는 지향이 한국 민족 개개인에게 뿌리 내리게 되는 결정적 계기였다.
비록 3·1운동을 통해 일제 식민 통치를 극복하지는 못했지만 3·1운동은 비로소 한국 민족을 한국 민족으로 각성시켰던 것이다.

3·1운동 이후 활동한 거의 모든 독립 운동 세력은 3·1 운동을 자신들의 모태로 간주하였으며, 독립 운동의 역사적 당위성과 그들 활동의 역사적 논거로서 3·1운동을 꼽았고, 따라서 매년 이날을 기념하면서 독립을 향한 의지를 새롭게 했다.
1920년 3월 1일 상해 올림픽대극장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주최한 제1회 삼일절 기념식에서 안창호는 “과거 일년간 일인은 이날을 무효화하려 하였고, 우리는 이날을 유효하게 하려 싸웠소.

일인의 최대 문제는 이날을 무효로 돌리는 것이고, 우리의 최대 의무는 이날을 영원히 유효하게 함이외다. …… 그리하기 위하여 우리는 작년 3월 1일에 가졌던 정신을 변치 말자 함이요.” 하고 연설했는데, 이는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모든 세력들에게 3·1운동이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적절히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민족을 한국 민족으로 각성시킨 결정적 사건이었던 3·1운동은 당연히 해방 이후에 전 민족적으로 기념해야만 하는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1946~1948년까지 해방 정국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다투었던 각 정치 세력은 자신들이 3·1운동의 진정한 계승자라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삼일절 기념식을 자신의 주도로 치르기 위해 격렬한 경쟁을 전개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듬해인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 관한 법이 제정, 공포되면서 3월 1일은 ‘삼일절’이라는 명칭으로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국경일이 되었다.
매년 3월 1일에는 3부 요인을 비롯해서 광복회와 독립 유공자 유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삼일절 기념식을 거행한다.
지역별로 1919년 3·1운동 당시 각 지역 만세 운동 광경의 재현을 비롯한 다채로운 행사를 열기도 한다.

 '삼일절 노래' 계이름 악보

삼일절 노래 계이름 악보 
삼일절 노래 (초등 교과서 음악)

삼일절이 되면 정부에서 주관하여 기념식을 열고 조국광복을 위하여 싸우다 돌아가신 애국운동가들을 추모하는 묵념을 하고, 그 뜻을 돌아보는 의식을 해요.
가정마다 태극기를 내걸고 많은 사람들이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을 되새긴답니다.

원인과 배경

3·1운동은 일제의 폭압적인 식민지 지배에 대한 민족의 저항으로 일어났다. 일본은 조선을 강점한 뒤 군사력을 배경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의 각 분야에서 폭력적인 억압과 수탈을 자행하는 무단통치()를 실시했다. 헌병경찰제도를 실시해 수많은 항일운동가들을 학살·투옥하고 모든 형태의 반일 활동을 탄압했다. 그리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 기본적인 정치적 권리와 자유도 누리지 못하게 했으며, 조선태형령()으로 가벼운 죄에도 가혹한 신체적 처벌을 가하여 인권을 유린했다. 또한 토지조사사업과 회사령 등으로 민족 산업의 발전을 억압하고 경제적 수탈을 자행하였다. 1910년대에 지속적으로 나타난 이러한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약탈로 농민을 비롯한 민중의 생활은 크게 악화되었으며,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분노와 저항의지가 높아졌다.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 속에서 민족운동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고,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는 주체적인 여건을 준비하였다. 1910년대 국내의 항일민족운동은 크게 세 가지 흐름으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첫째는 독립전쟁론의 관점에 기초해 무장조직의 결성과 지원을 목적으로 했던 비밀결사운동이다. 대한독립의군부, 민단조합, 광복회, 조선국민회 등의 비밀결사가 각지에서 결성되어 군자금 모금과 무기구입 등을 추진했다. 많은 조직들이 일제에 발각되어 파괴되었지만, 이들의 활동은 3·1운동 당시 각지에서 나타난 비밀결사의 모체가 되었다. 둘째는 실력양성의 관점에 기초해 종교단체와 학교 등을 중심으로 전개된 교육·문화운동이다. 1910년대에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각지에 설립된 사립학교, 서당, 야학 등은 3·1운동 당시 각 지역에서 항일운동을 조직하는 거점이 되어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셋째는 일제의 경제수탈에 대한 농민·노동자의 생존권 수호운동이다. 농민들은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토지조사사업 반대투쟁, 삼림정책 반대투쟁, 각종 조세 반대투쟁 등을 벌였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주재소나 면사무소 등 일제의 통치기구를 공격하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노동자들도 민족적 차별대우와 장시간 노동, 저임금 등 열악한 노동조건의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 이러한 농민·노동자의 투쟁양상은 3·1운동에서도 항일운동으로서의 성격을 강화하여 나타났다.
이처럼 일제의 폭압적인 식민지 지배에 대한 분노가 3·1운동이 폭발적으로 나타나게 된 기본 동인이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전후로 한 국제정세의 변화도 3·1운동이 일어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쟁탈전의 성격을 지닌 제1차 세계대전이 독일을 비롯한 동맹국의 패전으로 끝나면서 열강 간의 힘 관계가 재조정되어 국제 정치의 큰 변화가 나타났다. 독일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오스만제국 등에서 전제국가가 무너지고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수많은 국가들이 독립하여 새로 탄생하면서 민족주의가 고조되었다. 특히 1917년 러시아에서 사회주의혁명이 일어나 제정 러시아 치하의 피압박 민족들에게 민족 자결의 원칙을 선언하면서 식민지 민족운동들에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력이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1918년 1월에는 미국의 윌슨 대통령도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여 세계의 식민지 약소민족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에 즈음하여 나타난 이러한 새로운 시대 분위기는 국내외에서 항일민족운동의 기운을 고조시켰으며, 특히 민족주의자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의한 베르사유 체제의 성립을 ‘세계 개조의 신시대’로 인식하면서 독립에 대한 민족의 열망을 환기시켜 열강의 도움으로 독립을 이루려고 하였다.

준비 과정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 정세가 재편되는 상황에서 국외의 항일운동세력은 국제 사회에 일제의 조선 강점의 불법성과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널리 알리기 위한 활동을 준비하였다.

상하이[]에서는 1918년 6~7월 무렵부터 여운형(김규식(장덕수()·김철()·선우혁(서병호(한진교(조동호() 등이 신한청년당()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이들은 그 해 11월 28일 윌슨 대통령의 특사로 중국에 온 크레인(Charles R. Clane)에게 독립청원서를 전달하였다. 
1919년 1월에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평화조약을 협의하기 위해 개최된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했고, 여운형은 만주와 연해주로, 선우혁·김철·서병호, 김순애() 등은 국내로, 장덕수는 일본으로 건너가 각지의 인물들과 협의하여 대규모 독립운동의 추진을 준비하였다.
일본에서는 1919년 1월 조선인 유학생 학우회가 도쿄[]의 YMCA회관에서 웅변대회로 꾸며 모임을 갖고 최팔용()·김도연(백관수(서춘(椿) 등 10인을 상임위원으로 선출해 독립선언을 준비하였다. 
이들은 각지의 독립운동가들과 연계를 맺기 위해 송계백()과 이광수()를 국내와 상하이로 파견하였고, 2월 8일 유학생대회를 열어 민족대회소집청원서와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2·8독립선언서’는 일제의 국권강탈을 고발하고 독립운동으로 건립될 국가는 민주주의에 입각한 신국가임을 명시하였다.

국내에서도 1918년 말부터 국내의 천도교와 기독교 계통의 민족주의자들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윌슨의 14개조 강화원칙에 포함된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독립 요구를 위한 운동을 계획하였다. 
상하이, 미국, 도쿄 등지에서의 독립운동 소식이 전해지면서 국내 운동의 준비를 본격적으로 논의하였다. 
신한청년당의 선우혁은 이승훈(양전백()·길선주() 등 평안도 지역의 기독교 지도자들과 만나 국외 독립운동의 소식을 전했다. 
송계백도 최린()을 통해 도쿄 유학생들의 소식을 손병희(최남선(송진우() 등에게 전했다. 
천도교와 기독교, 학생들은 처음에는 각기 운동을 계획하다가 1919년 2월부터는 함께 협의하였고, 여기에 한용운() 등의 불교계 인사가 가담했다. 
학생들은 1919년 1월부터 민족대표들과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운동을 계획하였으나, 2월 하순 박희도()와 이갑성()에게 종교계의 계획에 합류할 것을 요구받고 일단 민족대표들의 계획에 합류한 뒤 3월 5일에 다시 서울에서 독자적으로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했다. 
그 결과 2월 18일까지 독립선언서와 일본 정부에 보낼 독립통고서 등이 작성되고, 2월 27일에는 독립선언서가 인쇄되어 각 종교의 교단 조직을 통해 사전에 배포되었다. 
학생들은 군중 동원과 시위, 독립선언서의 배포 등의 계획을 준비하였다.

전개 과정

3·1운동은 수개월 동안 지속되었으며 도시 등 교통이 발달한 곳을 중심으로 시작되어 농촌 등지로 전파되며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되었다. 
갈수록 참여하는 인원과 계층이 늘어나면서 운동의 양상도 비폭력 시위에서 폭력투쟁으로 발전하였다. 
국외로도 확산되어 만주, 연해주, 도쿄, 오사카, 필라델피아 등에서도 독립시위가 벌어졌다.

3·1운동의 전개 과정은 크게 3단계로 구분된다. 
1단계(점화기)에서는 서울을 비롯해 평양·진남포·안주·의주·선천·원산 등의 주요 도시에서 독립선언서가 배포되어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는 비폭력 투쟁을 특징으로 했으며, 학생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3월 10일을 전후로 한 2단계(도시확산기)에 운동은 전국의 주요 도시들로 확산되었으며, 상인과 노동자들도 철시와 파업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3월 중순 이후의 3단계(농촌확산기)에는 도시뿐 아니라 농촌에서도 시위가 일상화하였다. 
농민 등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시위의 규모도 커졌으며, 시위의 양상도 몽둥이와 죽창 등으로 무장하여 면사무소와 헌병 주재소 등을 습격하는 폭력투쟁으로 발전하였다. 
3월 하순에서 4월 상순까지의 시기에 전체 시위의 60% 이상이 일어날 정도로 운동은 최고조에 이르렀는데, 그 가운데 절반 정도가 폭력투쟁으로 나타났다.

3월 1일에 미리 계획했던 대로 서울과 평양·의주·선천·안주·원산·진남포 등 6개 도시에서 동시에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식의 거행장소를 군중들이 모여 있던 탑골공원에서 서울 인사동의 태화관()으로 일방적으로 변경하였다. 
민족대표 33명 가운데 29명은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 모여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인 서영환()을 통해 독립통고서를 조선총독부에 전달했다. 
오후 3시 한용운()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에 일본 경찰에 통고하여 스스로 체포되었다. 
탑골공원에 모여 있던 학생들은 장소 변경에 당황하여 강기덕 등을 민족대표들에게 보내 항의하기도 했으나, 2시 30분 무렵에 따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두 갈래로 나뉘어 종로·서울역·정동·이화학당·서대문 등을 행진하며 시위를 벌였다.

3월 2일에는 함흥·수안·황주·중화·강서·대동·해주·개성 등 천도교와 기독교의 조직력이 강한 평안도·함경도·황해도의 주요도시들로 시위가 확산되었다. 
3월 3일에는 고종의 장례식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서울로 모였고, 이들 가운데 많은 수가 시위운동에 참가했다. 
서울의 학생들은 원래의 계획대로 3월 5일 남대문역 광장에서 만세시위를 벌였고, 평양과 광주 등의 학생들도 결사대를 조직해 이에 참여했다. 
이 날의 시위는 고종의 장례식을 참관하고 지방으로 돌아가는 참배객들에게 운동의 지속성을 전파하여 3월 중순 이후 각 지방으로 시위운동이 확산되는 데 큰 구실을 하였다.

3월 10일 이후에는 시위가 경상도·전라도·강원도·충청도 등 중남부 지방으로 확대되어 전국적 규모로 확산되었는데, 이 과정에는 교사와 학생 등 지방 사회의 지식인들이 중요한 구실을 했다. 
이들은 선언서 등의 각종 유인물과 시위 경험을 각 지역에 전파했으며, 비밀결사와 결사대를 조직해 시위를 조직하고 주도하였다. 
청년과 학생들이 주도한 비밀결사는 전단과 격문 등을 제작·배포하여 투쟁열기를 높였는데, 일부 지역에서는 지방신문을 만들어 민족의 총궐기와 결사항쟁을 촉구하기도 했다. 
3·1운동 당시에 발간되었던 신문은 <조선독립신문>, <노동회보>, <반도의 목탁>, <충북자유보>, <혁신공보>, <각성호외보>, <광주신문>, <강화독립회보> 등 30여 종에 이르며, 이 가운데 <조선독립신문>은 27호까지 만들어지기도 했다.

3·1운동의 전국적 확산에 큰 역할을 했던 청년과 학생들은 독립청원이라는 대외의존적인 태도를 지녔던 민족대표들과는 달리 민족의 주체역량으로 독립을 쟁취할 것을 주장했다. 
이들의 노력으로 운동은 3월 중순 이후 농촌 지역으로 확산되었으며, 노동자·농민·중소상공인 등 각계각층의 민중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민중운동으로 발전되었다.

서울에서는 3월 5일에 앞장섰던 학생들이 대거 검거되면서 일시적으로 소강상태에 빠졌으나, 3월 4일에 시작된 평양과 선천의 철시투쟁에 이어 3월 9일부터 서울 시내의 주요 상점도 철시를 하면서 상인들도 항일투쟁에 나섰다. 
3월 20일 무렵부터는 노동자들의 궐기를 호소하는 <노동회보>가 배포되었고, 3월 22일에는 남대문 앞에서 노동자대회가 개최되었다. 
그 날부터 시내 곳곳에서 야간시위가 계속되었으며, 3월 26일에는 경성철도와 전차 노동자들도 파업을 벌였다. 
이러한 노동자의 항일시위는 고양·부천·시흥·김포 등 주변 농촌 지역의 시위를 촉발시켰다.

농민 시위는 주로 장날에 일어났는데, 시위 주동자들은 각 마을로 통문을 돌리거나 전단을 살포하여 미리 시위 계획을 알렸다. 
장을 돌아다니는 행상들은 각지에서 벌어지는 시위의 경험을 전하는 구실을 하기도 했다. 
과거 의병투쟁이 활발했던 지역에서는 산상봉화시위나 횃불시위 등을 벌이기도 했으며, 떼를 지어 며칠씩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시위에 참가하는 ‘만세꾼’이 등장하기도 했다.

운동이 발전될수록 투쟁 목표가 구체화되고 조직화되었으며, 비폭력적인 만세시위운동에서 계획적이고 공세적인 폭력투쟁으로 진전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폭력투쟁은 일제의 탄압에 대한 방어적인 대응으로 나타난 것도 있었지만, 일제의 권력기관에 대해 계획적이고 공세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었다.
일본 헌병의 총격 등으로 시위가 강제로 해산되면 군중들은 몽둥이와 죽창 등으로 무장하여 헌병 주재소와 면사무소, 우편소, 금융조합, 일본인과 친일인사의 집 등을 파괴하고 각종 수탈용 장부와 무기를 빼앗아 소각하는 등 무력을 행사했다. 
처음부터 일제의 권력기관을 접수하려 나서는 경우도 있었는데, 강원도 통천에서는 총검으로 무장하고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국외독립운동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평안도와 함경도 등 북부지방에서 이러한 경향이 강했는데, 간도·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세력은 3·1운동 당시 국내진공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일제는 3·1운동을 무력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했는데, 화성 제암리·천안 아우내·정주 곽산·남원 광한루·익산 이리 등 전국 각지에서 시위대에 총격을 가하는 등 학살을 저질렀다. 
시위자들을 체포하여 가혹한 고문을 서슴지 않았다. 
당시 일제의 통계에 따르면 3·1운동 이후 3개월 동안 시위진압과정에서 7,509명이 사망했으며, 15,961명이 상해를 입었다.
 46,948명이 구금되었고, 교회 47개소, 학교 2개교, 민가 715채가 소각되었다.

의의 와 한계..

3·1운동은 지식인과 학생뿐 아니라 노동자, 농민, 상공인 등 각계각층의 민중들이 폭넓게 참여한 최대 규모의 항일운동으로 독립운동사에서 커다란 분수령을 이루었다. 
그것은 나라 안팎에 민족의 독립 의지와 저력을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독립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넓혀 독립운동을 체계화·조직화·활성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민중들은 3·1운동에 참여하면서 민족의식과 정치의식을 높일 수 있었으며, 이는 1920년대에 다양한 사회운동과 조직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3·1운동은 일제의 식민통치에도 커다란 타격을 가해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바꾸게 하였으며, 중국의 5·4운동과 인도 간디의 비폭력·불복종 운동, 이집트의 반영자주운동, 터키의 민족운동 등 아시아와 중동 지역 민족운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일제는 물리적인 폭압만으로는 3·1운동으로 분출한 민족의 저항의지를 막을 수 없었으므로 형식적이나마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일부 완화하여 문화통치로 전환하였다. 
이는 가혹한 식민통치를 은폐하고 친일파를 육성하여 민족운동을 분열시키기 위한 기만책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3·1운동은 운동의 과정을 통일적으로 지도할 수 있는 조직체가 없었기에 지역과 계층에 따라 투쟁의 형태와 강도를 다르게 한 채 분산적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민족대표는 독립청원의 방식에 주력하여 타협적인 태도를 벗어나지 못했고 결국 광범위하게 일어난 민중들의 항일투쟁을 이끌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지니지 못했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전체 독립운동을 통일적으로 이끌기 위해 1919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며, 국내에서는 1920년대 전반기에 민중의 투쟁력을 조직화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3·1운동은 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법을 체계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종교계의 민족주의자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희망을 걸고 주체역량보다 외세에 의존해 독립을 얻으려 했다. 
 서구 문명국들의 동정을 얻을 수 있다는 이유로 ‘비폭력’을 절대적인 전제로 내세웠고, 일본 정부에 독립의 취지를 건의하여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적절하다며 독립청원의 방식에 의존했다.  
3·1운동의 경험을 통해 민족의 주체역량에 기초해야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실력양성과 무장투쟁이 독립운동의 방법으로 체계화하였다. 
왕조의 회복을 목표로 한 복벽주의()가 청산되고 민주공화제가 독립국가의 목표로 자리를 잡았다.  
지식인과 청년 학생들 사이에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이 확대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미국에서는 1918년 12월 안창호() 등이 조직한 대한인국민회()가 중앙총회를 열어 이승만()·민찬호()·정한경() 등 3인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기로 결의하였다. 
미국이 출국을 허가하지 않자 1919년 2월 25일 이승만은 윌슨 대통령에게 조선을 일본의 학정에서 구할 것, 장래 조선의 완전 독립을 보증할 것, 조선은 당분간 국제연맹의 통치하에 둘 것 등의 3개조로 된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였다.

만주와 연해주에서는 1918년 12월 조소앙()이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해 여준(김좌진(황상규(박찬익()·김교헌()·안창호·김규식 등 39명의 서명을 받아 이듬해 2월 1일 이를 발표하였다. 
음력으로 무오년()에 작성되어 ‘무오독립선언()’이라고도 불리는 ‘대한독립선언서’는 무장투쟁으로 완전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며 독립군의 궐기를 촉구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무오독립선언서
무오독립선언서

2018년 2월 27일 화요일

포도. Grape.

  • 포도. Grape.

    수피는 적갈색으로 세로로 길게 갈라지며 벗겨진다. 
    잎은 마주나며 덩굴손으로 다른 물체를 감고 올라간다. 
    잎의 뒷면에는 흰색의 털이 있다. 
    꽃은 6월에 피고 노란빛을 띤 녹색의 원추화서로 달린다. 
    잎과 마주나며 꽃잎과 수술은 5개이고 꿀샘이 있다. 
    열매는 장과로 8~9월에 청록색에서 흑자색으로 익는다.
    낙엽활엽만목으로 원산지는 서아시아이고 중남부 지방에 재식하고 있다.
    학명Vitis vinifera L.
    생물학적 분류 : 식물계(Plantae)
     : 현화식물문(Anthophyta)
     : 쌍떡잎식물강(Dicotyledoneae)
     : 갈매나무목(Rhamnales)
     : 포도과(Vitaceae)
     : Vitis
    개화시기6월
    수확시기8월~10월
    원산지서아시아
    분포지서아시아
    꽃말기쁨, 박애, 자선

    재배정보

    심는 방법

    삽목(꺾꽂이): 포도나무는 타과종에 비하여 뿌리가 잘 내리므로 삽목으로 주로 번식한다. 
    겨울철 포도가 휴면기에 들어갔을때 충실히 자란 1년생 가지를 채취하여 마르지 않도록 밀봉하여 5℃ 정도 되는 저장고에 보관한다. 
    봄에 이 가지를 3마디로 잘라 가운데 눈을 제거 후 땅에 삽목한다.

    심는 시기: 생육이 거의 정지상태인 낙엽기부터 봄철 뿌리의 활동이 시작되기 전까지 심는다.

    심는 거리(캠벨얼리): 열간2.7x주간2.7m

    재식구덩이 만들기: 지름 100cm, 깊이 60~80cm로 파고 짚, 건초, 낙엽등 쉽게 썩지 않는 유기물과 석회, 인산질 거름을 같이 30cm까지 넣어준다.

    묘목심기: 구덩이를 파서 재식하면 흙이 가라앉게 되므로 지표면에서 30cm 높게 심는데 재식부분은 고운 흙을 약간 긁어 모아 흙쌓기를 하고, 그 위에 묘묙을 놓고 고운 흙으로 덮어준다. 
    재식 후에는 충분히 관수해 준다.

    번식방법

    꺾꽂이(겨울철 포도가 휴면기에 들어갔을 때 충실히 자란 1년생 가지를 채취하여 마르지 않도록 밀봉하여 5℃ 정도 되는 저장고에 보관한다. 
    봄에 이 가지를 3마디로 자른 후 상부는 첫 번째 눈위 2cm에서 자르고 중간눈은 제거하며 하부눈은 비스듬히 잘라 눈을 제거함과 동시에 발근부위를 넓혀서 땅에 삽목한다. 
    발근(뿌리 내림)이 어려운 품종은 발근촉진제(IBA)를 기부에 처리하여 삽목한다.)
    가꾸기 포인트
    포도나무는 질소 비료를 많이 주면 새 가지가 윗자라고 꽃떨이 현상이 나오며 동해에도 약해지는 등 여러가지 생리 장해가 발생되므로 질소 비료를 너무 많이 주지 않도록 한다.

    기후 및 토양

    기후조건
    포도나무는 20,000~35,000lux가 광합성에 가장 좋은 광도이다. 
    뿌리는 토양온도가 10~14℃에서 활동을 시작하며, 대기온도가 10℃에 달하면 발아한다. 
    겨울철에는 휴면타파를 위하여 7.2℃ 이하의 저온이 1,000~1,200시간 이상 지속되어야 하며 포도과실의 착색, 당도증진에는 20~25℃에서 우수하다.
    토양조건
    토심이 깊고 배수가 양호한 사양토로 유기물함량을 3~5% 함유한 토양이 좋다. 
    토양산도는 pH 6.5~7.0으로 염기포화도가 높은 토양이 적합하며 칼륨, 마그네슘, 칼슘에 대한 요구량이 많다.
    질병관리
    탄저병
    증상 - 초기에는 담갈색 또는 흑갈색의 작은반점이 생기며 성숙함에 따라 병반이 점차 확대되며 특징적인 연분홍색깔의 병반이 나타난다.
    치료 - 발아전에 석회유황합제를 살포하고 생육중에는 만코지수화제, 지오판수화제등 적용약제를 살포한다.

    갈색무늬병
    증상 - 잎에 흑갈색의 점무늬가 생기고, 갈색으로 변하여 조기에 낙엽된다.
    치료 - 발아전에 석회유황합제를 살포하고 생육중에는 탄저병 방제를 겸해서 적용약제를 잎뒷면을 중심으로 충분히 살포한다.

    수피는 적갈색으로 세로로 길게 갈라지며 벗겨진다. 
    잎은 마주나며 덩굴손으로 다른 물체를 감고 올라간다. 
    잎의 뒷면에는 흰색의 털이 있다. 
    꽃은 6월에 피고 노란빛을 띤 녹색의 원추화서로 달린다. 

    잎과 마주나며 꽃잎과 수술은 5개이고 꿀샘이 있다. 
    열매는 장과로 8~9월에 청록색에서 흑자색으로 익는다.
    낙엽활엽만목으로 원산지는 서아시아이고 중남부 지방에 재식하고 있다.

    관리하기

    물주기
    관수시기 및 관수량: 관수는 토양함수량이 40%가 되었을 때 시작하며, 20cm 깊이에 60~80%가 되게 관수를 해야한다. 
    발아전에는 한달 가까이 1회 30mm 이상의 비가 오지 않으면 1주 간격으로 20~30mm를 관수하며, 착색기에 들어 갔을 때는 7일간 비가 오지 않으면 1주 간격으로 20mm씩 관수한다.
    관수방법: 스프링클러나 점적관수를 이용하여 관수한다.
    거름주기
    시비량: 10a당 연간 질소는 13~18kg, 인산은 7~10kg, 칼리는 10~15kg를 시비한다. 퇴비는 완숙된 퇴비를 2톤/10a 시비한다.
    시비시기: 밑거름은 휴면기 직전부터 휴면기간에 질소는 연간 사용량의 60~70%, 인산은 전량, 칼리는 50%를 시비한다. 
    덧거름은 만개 후 10~20일 사이에 질소는 연간사용량의 20~30%, 칼리는 40%를 시비한다. 
    가을거름은 수확 후 9월에 질소, 칼리를 연간 사용량의 10%정도를 시비한다.
    가지치기
    캠벨얼리: 결과모지(열매가지가 붙어있는 가지)를 1~2개 눈을 남기고 자르며, 1m당 13개 정도의 새 가지를 남긴다. 
    새 가지는 개화직전 8~9마디에서 순지르기하고 부초(새 가지에서 나오는 2차지)는 2~3마디를 남기고 잘라준다.
    꺾꽂이 방법
    겨울철 포도가 휴면기에 들어갔을때 충실히 자란 1년생 가지를 채취하여 마르지 않도록 밀봉하여 5℃정도 되는 저장고에 보관한다.
    봄에 이 가지를 3마디로 자른 후 상부는 첫번째 눈위 2cm에서 자르고 중간눈은 제거하며 하부눈은 비스듬히 잘라 눈을 제거함과 동시에 발근부위를 넓혀서 땅에 삽목한다. 
    발근이 어려운 품종은 발근촉진제(IBA)를 기부에 처리하여 삽목한다.

    수확하기

    수확 시기는 품종 고유의 색깔로 착색되고 향기가 나며 산 함량은 낮아지고 당도가 높아져 맛이 최상에 이르렀을 때 한다. 
    수확은 기온이 낮은 아침에 하는 것이 신선도가 좋다. 
    햇빛을 등지고 2~3m 떨어져 착색 정도를 관찰하면서 수확한다. 
    수확할 때는 포도송이의 과분이 손에 뭍어나오지 않도록 송이자루를 잡고 가위로 잘라준다. 
    수확한 과실은 직사광선을 받지 않도록 나무그늘에 두어 포도송이 자체의 온도가 올라가지 않도록 한다.

    수피는 적갈색으로 세로로 길게 갈라지며 벗겨진다. 
    잎은 마주나며 덩굴손으로 다른 물체를 감고 올라간다. 
    잎의 뒷면에는 흰색의 털이 있다. 
    꽃은 6월에 피고 노란빛을 띤 녹색의 원추화서로 달린다. 
    잎과 마주나며 꽃잎과 수술은 5개이고 꿀샘이 있다. 
    낙엽활엽만목으로 원산지는 서아시아이고 중남부 지방에 재식하고 있다.

    내용

    만목성(:덩굴로 뻗어나가는 나무성질)이다. 
    포도나무속에 속하는 종은 많은데, 우리 나라의 왕머루가 있고 수입되어 재배되고 있는 것으로 미국종과 유럽종이 있다.
    예로부터 머루 또는 멀위라는 이름을 써왔으며, 한자명은 포도 외에 영욱()·산포도() 등이다. 
    포도라는 명칭은 유럽종의 원산지인 중앙아시아지방의 원어 ‘Budow’에 근원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포도나무는 잘 발육된 1년생 가지 위에 마디마다 눈이 형성되고 다음해에 그 눈에서 새 가지가 자라나면서 그 새 가지에 열매가 달리게 된다. 
    포도류는 잎이 단엽()이고 손바닥 모양으로 갈라진다.

    꽃은 양성화() 또는 자웅이주이고 대개는 밀추화서(:송곳이 빽빽이 솟은 듯한 꽃차례)이다. 
    항상 덩굴손으로 감아 올라간다. 왕머루는 잎이 어긋나며 넓은 난형인데, 끝이 3∼5개로 얕게 갈라지고 조거치연(:거친 톱니 모양)이며, 잎 뒤에 털이 거의 없다.
    5월에 꽃이 피고 9, 10월에 장과(漿:살과 물이 많고 씨가 있는 열매)가 검게 익는다. 

    새머루는 잎 뒤의 맥 위에 미모()가 나 있고, 잎은 약간 삼각형으로 보이고 6∼7월에 꽃이 피며, 열매는 검게 익는다. 
    까마귀머루는 잎이 다섯 갈래로 깊게 갈라지는 것이 특색이고 열매는 자흑색으로 익는다. 
    유럽종 포도는 지금의 이라크·이란·이스라엘·터키·우즈베크공화국 등이 원산지의 주변 국가이고 재배의 역사가 가장 오랜 것이다.

    델러웨어(Delaware)·캠벨 얼리(Campbell Early)·머스캣 베일리 A(Muscat Bailey A)·나이아가라(Niagara)·갑주()·거봉() 등의 유명한 품종이 있다. 
    미국종은 아메리카대륙에 자생하던 야생종 포도를 신대륙발견 이후 이주민이 개량한 것으로 처음부터 여러 종류가 분포하여 있었다.

    재배용 포도가 어느 때 우리 나라에 도입되었는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산림경제≫에 포도품종과 재배기술이 서술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예로부터 재배된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중국에 서역의 포도가 도입된 것은, ≪박물지 ≫에 의하면 기원전 128년경 장건()에 의해서라고 한다. 
    우리 나라에는 중국에서 건너온 것으로 보여진다.

    ≪세종실록≫ 지리지 강원도조에 포도와 다래[]의 생산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머루에 해당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머루는 귀중한 산과()로 취급되었다. 
    현재 재배되고 있는 포도품종은 1906년에 설립된 뚝섬원예모범장에서 유럽종과 미국종을 도입하여 품종을 선발하고 재배법을 연구하여 보급하기 시작한 뒤부터 일반 과수원 형식으로 재배가 보급되었다.

    우리 나라의 포도생산량은 매년 증가하고 있으며, 경상북도와 경기도 일원에서 전체 생산량의 절반 가량이 생산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 재배되고 있는 주요 품종은 캠벨 얼리가 70% 정도로 가장 많고, 머스캣 베일리 A가 8% 정도로 그 다음이며, 그리고 거봉·델러웨어 등이 있고 가공용 품종으로는 블랙 함부르크(Black Hamburg)·네오 머스캣(Neo Muscat) 등이 소규모로 재배되고 있다.

    포도재배지는 연평균기온이 9∼17℃가 알맞고, 4∼5월의 평균기온이 13℃, 7∼9월의 평균기온이 18℃, 연강우량이 1,000∼1,200㎜이면 적당하다. 
    토질에 대한 적응성이 강하지만 적지는 품종에 따라 다르다. 
    미국종은 양토나 사양토로서 비옥하며 그다지 건조하지 않는 땅이 좋고, 유럽종은 배수가 잘되고 깊은 사양토가 알맞다.

    포도나무의 번식은 삽목하면 발근이 잘되므로 이 방법이 주로 적용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접목번식도 하는데 이때에는 설접법()이 쓰이고 있다. 
    ≪산림경제≫에도 삽목법과 공중취목법()이 설명되어 있다. 
    접목법으로 대추나무에 접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극히 의문시되는 것으로 비과학적이라고 하겠다.

    포도는 탄수화물의 함량이 많고, 그 중 당분으로서는 포도당이 주이고 그 밖의 당류는 매우 적다. 
    비타민 B·C가 소량 함유되어 있다. 
    과즙에는 주석산()·능금산·구연산·포도산·사루칠산 등이 함유되어 있다. 
    포도는 건위()·이뇨(尿)·강장()·지갈() 등에 효과가 있다. 
    포도는 생식용뿐만 아니라 포도주·주스·통조림·건포도 등으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산림경제≫에 포도주·머루주의 제조방법이 기록되어 있고, ≪지봉유설≫에도 오래가는 술로서 포도주가 있다고 하였다. 
    ≪임원경제지≫에는 포도소주()가 기록되어 있다. 
    포도는 그림의 소재로도 즐겨 사용되었는데 중종 때 황집중()은 포도그림으로 유명하였다. 
    그림의 소재가 된 종류는 잎이 다섯 갈래로 갈라지는 까마귀머루이다. 
    민간에서는 포도의 형태상 특징으로 인하여 다남()의 상징물로도 애호되었다.
    • 문헌
    • 『산림경제(山林經濟)』
    •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 『지봉유설(芝峰類說)』
    • 『본초강목(本草綱目)』
    • 『동의보감(東醫寶鑑)』
    • 『조선삼림식물도설』(정태현, 조선박물연구회, 1943)
    • 『조선상식문답속편』(최남선, 삼성문화재단, 1972)
    • 『과수원예각론』(이광연 외, 향문사, 1978)
    • 『낙엽과수재배각론』(김성복 외, 선진문화사, 1982)
    • 『백화전서』(양인석, 임원문화사, 1983)
    • 『식물의 번식』(임경빈, 대한교과서주식회사, 1985)


  • 이로써 머루와 포도는 일찍부터 술로서 이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열매는 장과로 8~9월에 청록색에서 흑자색으로 익는다.

포도나무과의 다년생 낙엽활엽수. 
포도라는 명칭은 유럽종의 원산지인 중앙아시아지방의 원어 ‘Budow’에서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개량 포도는 1901년 프랑스 신부 안토니오 콩베르에 의해 처음 도입되었고, 구포동 성당의 한 교인에 의해 안성시 서운면에서 처음 대량으로 재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