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14일 수요일

참외

참외

요약 쌍떡잎식물 합판화군 박목 박과의 한해살이 덩굴식물.
참외박과. 열매는 장과로 원주상 타원형이며 황록색 ·황색 및 기타 여러 가지 빛깔로 익는다.
학명Cucumis melo varmakuwa
식물
속씨식물
쌍떡잎식물
박목
원산지인도
분포지역원산지 인도 및 한국·중국·일본
인도산 야생종에서 개량된 것이라고 하며 재배 역사가 긴 식물이다. 
중국에서는 기원전부터 재배하였으며 5세기경에는 현대 품종의 기본형이 생겼다고 한다. 
원줄기는 길게 옆으로 벋으며 덩굴손으로 다른 물체에 기어올라간다. 
잎은 어긋나고 손바닥 모양으로 얕게 갈라지며 밑은 심장저 모양이고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다.

꽃은 6∼7월에 노란색으로 피고 양성화이다. 화관은 5개로 갈라지고 하위씨방에 돌기가 있다. 
열매는 장과(漿)로 원주상 타원형이며 황록색·황색 및 기타 여러 가지 빛깔로 익는다. 
익은 열매를 식용으로 하고, 익지 않은 열매는 최토제()로 쓰기도 한다.

원산지에서 한국을 비롯하여 중국·일본 등지에 퍼져 오랫동안 재배되어 오는 사이에 동양계 참외가 분화되어 발달하게 되었다. 
참외는 1950년대까지는 성환참외·강서참외·감참외 등 재래종들이 재배되었다. 
60년대부터 은천참외로 점차 바뀌어 오늘날에는 은천참외를 대부분 재배하고 있다. 
은천참외는 단맛이 강하고 육질도 매우 좋다.
대표적인 여름 과일로 오래전부터 재배해오던 전통의 열매 채소다. 
고온을 좋아하므로 일찍(4월 말, 5월 초순) 심는 것을 피해야 한다. 
기온이 20℃ 이상 올라가는 시기에 아주 심는 것이 좋다.

참외는 의외로 옮겨 심는 것을 아주 싫어하는 박과의 작물이다. 
옮겨 심은 후 뿌리가 자리를 잡고 새로운 줄기를 기르는 데 소요되는 기간이 길다. 
기온이 낮은 5월 초에 모종을 심으면 자리를 잡고 활기를 찾는데 3~4주가 소요되는 반면 5월 말에는 2주면 충분하다.

재배시기

참외 본문 이미지 1

모종 준비

텃밭에 조금 심는 것은 씨앗을 구해서 파종하는 것보다 시중에 나오는 모종을 구해서 심는 편이 수월하다. 
여러 종류의 참외 모종이 있지만 좋은 것을 고르기는 어렵다. 좋은 모종을 고르려면 다음과 같은 사항을 참고한다.
* 되도록 큰 포트에 심겨진 모종
* 키가 크고 덩굴이 생기는 것보다는 좀 작고 통통한 모종
* 떡잎이 잘 붙어 있으며, 잎에 윤기가 나는 모종
참외는 옮겨심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옮김 몸살이 몹시 심하게 나타나므로 포트의 크기가 큰 모종이 유리하다.

준비 및 심기

참외는 양지바르고 물 빠짐이 좋은 곳이 적당하다. 
뿌리가 얕고 넓게 퍼지므로 이를 감안해 주변의 흙이 부드러운 장소를 선택한다. 
모종을 심기 2~3주 전에 퇴비를 1㎡당 4㎏ 정도 넣고 일구어 둔다. 
두둑은 폭이 1.5m 정도, 높이를 10~20㎝로 만들어 두는 것이 좋다. 줄기가 2m 정도 퍼지는 것을 고려해 장소를 정한다. 
포트에 있는 모종에 물을 주고 나서 2~3시간 후 뽑아 심는 것이 좋다.

심는 시기는 오후의 해거름에 하는 편이 좋으며, 심는 간격은 두둑의 양쪽 끝에 포기 사이 60㎝ 정도로 심는다. 
한두 포기 관상용으로 가꾸는 것은 따로 두둑을 만들지 않고 주변을 조금 높고 평평하게 만들어 심어도 된다.

[ 주의사항 ]
참외는 물 빠짐이 좋아야 하므로 두둑을 약간 높여준다. 
퇴비를 넣고 일찌감치 일구어두면 옮겨 심고난 뒤 뿌리가 빨리 자리를 잡는 데 도움이 된다. 
소규모 주말농장에 심기에는 자리를 많이 차지한다는 단점이 있다.

자라는 모습

참외 모종을 몇 포기 심고 지켜보면 5월에는 거의 자라지 못한다는 걸 알 수 있다. 
6월이 지나서 기온이 조금씩 올라가야 참외가 제대로 자라기 시작한다. 
참외가 자리를 잡기 전에 짚이나 풀 등으로 바닥을 잘 덮어두면 열매가 땅에 닿아 상하는 것을 막아주고 풀도 덜 나게 하는 효과가 있다. 
6월 말이 되면 갑자기 줄기가 늘어나면서 사방으로 뻗어 많이 엉겨버린다. 
참외는 가뭄이 지속되다 한꺼번에 내리는 비에 열과현상(과일이 쪼개지는 현상)이 나타나는 수가 있다. 
잘 익은 참외가 터지거나 상하면 빨리 이를 제거해야 벌레가 생기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덩굴 유인 및 줄기 잘라주기

참외 덩굴 정지하는 방법
참외는 6월 중순이 되면 줄기가 급성장한다. 
초기에 어미덩굴이 4~5마디로 자라면 줄기를 잘라준다. 
아들덩굴을 기르면서 15~17마디에서 잘라준다. 
아들덩굴의 잎겨드랑이에서 손자덩굴이 자라게 된다. 
이 손자덩굴의 첫째 마디에서 열매가 달린다. 
손자덩굴의 첫째 마디에서 암꽃이 피고 나머지에서는 수꽃이 많이 피게 된다. 
참외가 자라려면 4장 정도의 잎이 필요하므로 손자덩굴의 4~5마디에서 자른다.

어미덩굴이 이미 하나의 아들덩굴(왼쪽으로 뻗은 줄기)을 기르면서 오른쪽의 마디에 아들덩굴이 조금 자라고 있는 상태다. 
이 경우는 왼쪽으로 자라는 덩굴을 기르면서 오른쪽의 덩굴 끝을 잘라준다. 
오른쪽의 아들덩굴 중에 하나만 기르고 나머지는 모두 자른다.
참외 덩굴 정지하는 방법
[ 주의사항 ]
위에서 예를 든 것은 어디까지나 교과서적인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따라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주말농장의 특성상 잘 자라는 시기에 일주일마다 찾아가면 어디가 어미덩굴이고, 아들덩굴이고, 손자덩굴인지 구별하기 힘들다. 
그때는 복잡한 곳의 줄기를 조금 정지해주는 정도로 만족한다. 
초기에 어미덩굴의 관리를 잘해주면 한결 수월해진다. 
(나의 경우에도 자료를 정리하면서 겨우 이해한 내용이다. 
이대로 따라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열매를 얻을 수 있으므로 그다지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수확

7월 이후에 하우스가 아닌 전통의 방법으로 기른 참외의 맛은 특별하다. 
보통의 참외가 봄에 주로 시중에 나온다. 
밭에서 기를 때는 제철인 7월이 지나야 수확이 가능하다. 
참외의 수확시기는 겉껍질이 노랗게 변하는 때가 되어야 한다. 
조금 덜 익으면 단맛이 덜하고 수확시기를 놓치면 아삭한 맛이 덜해진다. 
주말농장의 경우는 다음번에 밭에 가는 시기를 봐가면서 수확시기를 정해야 한다. 
2~3일 뒤에 수확하는 것이 좋은데 다음번 밭에 들리는 시기가 7일 이상 걸릴 것 같으면 차라리 오늘 수확하는 편이 좋다.

[ 주의사항 ]
다른 채소, 토마토오이와 달리 참외는 수확시기를 맞추기가 쉽지 않다. 
수확시기에 조금 못 미치는 경우라도 내일부터 며칠간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으면 지금 수확한다.

거름주기 및 관리

참외의 뿌리는 얕고 넓게 퍼지므로 퇴비를 한곳에 주기보다는 넓은 면적에 준다는 생각으로 뿌려준다. 
뿌리가 자리를 잡고 줄기를 키우는 시기에 참외 주변에 얕고 넓게 흙을 긁어내고 퇴비와 깻묵을 넣고 흙을 살짝 덮어준다.

참외가 어느 정도 자라는 시기인 6월 초에 참외가 자라는 주변에 짚이나 낙엽을 두텁게 깔아주면 관리가 수월하다. 
풀도 덜 나고 참외의 덩굴손이 감기도 편하고, 참외가 땅에 닿지 않아 좋다. 
수분유지에도 도움이 되고 많은 효과가 있으므로 짚이나 낙엽을 깔아주는 것이 좋다.

병충해와 잡풀 관리
참외는 장마철에 계속 내리는 비에 아주 취약하다. 
비가 계속 오면 잎이 연약하게 되고 말라가는 잎도 생긴다. 
이런 이유로 요사이 참외를 노지에서 기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장마철에 참외는 약해지고 상대적으로 풀은 잘 자라게 되어 풀이 번성한다. 
짚을 깔아주면 참외가 자라는 초기에는 풀이 잘 자라지 못하다 장마철이 지나면 상황이 달라진다. 
이때는 풀이 많이 자란 곳을 정리한다.

재배 ?
참외를 몇 포기 길러 잘 익은 열매를 따먹는 즐거움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다른 채소나 열매에 비해서 아주 특별한 감동을 준다. 
밭에서 일하다 참외와 오이 등을 따서 시원한 물에 담갔다. 
먹는 맛은 새롭다. 
오이가 단맛이 별로 없는 반찬용 열매라면 참외는 단맛이 배어 나오는 과일이라 간식으로 그만이다. 
재배하면서 짚을 잘 깔아주면 열매의 손상도 줄이고 풀에 대한 걱정도 덜 수 있다. 
단점이라면 수확기간이 짧아 한철 잠시 맛보는 과일로 지나가야 한다는 아쉬움이 있다.

8월 말은 참외의 수확 종료 시점이다. 
가을 채소를 파종하는 시기이므로 밭을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 
참외 수확 직후에는 무, 배추, 갓 등의 가을 채소를 파종하거나 조금 더 기다려 마늘양파 등의 월동 채소를 기르면 좋다.

나의 경우 참외 재배가 상당히 어려웠다. 
기르는 과정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열매가 잘 익어도 막상 먹어보면 싱거운 맛이 무보다 못할 때가 더러 있었다. 
어떤 때는 참외가 농익은 경우가 더러 있었다. 
이와 같은 원인이 종자 때문인지 날씨 탓인지 아직은 모른다. 
참외 재배 책자를 보면 줄기를 유인하는 방법과 줄기를 잘라내는 방법이 그림으로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줄기가 어느 정도 자라 우거지기 시작하면 줄기 유인과 잘라내는 것이 어려워진다. 
이때는 무성하게 우거진 줄기의 새로 자라는 부분을 대충 반 정도 잘라주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텃밭에서는 비 가림 시설이 없어서 가뭄에 지친 참외가 갑자기 내리는 비에 열매가 터지는 현상이 많이 생기기도 한다.


특징

줄기는 옆으로 길게 뻗으며 덩굴손으로 다른 물체를 감으며 굽은 털이 있다. 
잎은 어긋나기를 하며 손바닥모양으로 얕게 갈라지며 끝은 약간 뾰족하며 아랫부분은 심장모양이며 가장자리에는 톱니가 있다. 
잎겨드랑이에는 덩굴손이 있다. 
꽃은 6-7월에 피며 자웅동주이며 잎겨드랑이에 달린다. 꽃부리는 5개로 갈라지며 노란색이다. 
열매는 장과이며 원기둥모양의 타원형이며 길이는 5-10cm이다. 
노란색, 노란색을 띤 녹색이다.
원산지는 인도이며 야생종에서 개량된 것이다. 
전국 각지에 재배를 하는 덩굴성 한해살이 풀이다.

재배정보

심는 방법

땅 온도가 최저15℃ 이상 되어야 활착이 양호하며 바람이 없는 맑은 날을 택해 심는다. 아주심기 전, 심을 구덩이를 파고 물을 듬뿍 준다. 포기사이 30~50cm 간격으로 심는다.

번식방법

종자번식

준비물

종자, 모종, 비료, 삽


가꾸기 포인트

모종 흙 높이가 지면보다 다소 높거나 같은 깊이로 심는다. 
묘 주위에 흙을 잘 묻혀서 묘가 마르는 것을 방지하되, 묘를 눌러 심어서는 안된다.

기후 및 토양

기후조건

일조량이 풍부한 곳이 좋으며 발아적온은 25~30℃, 생육적온은 30℃ 내외이다.


토양조건

유기물이 풍부하고 물 빠짐이 좋은 모래참흙이 좋다.


관리하기

물주기

1일 1회


거름주기

1㎡당 요소 60g, 용성인비 40g, 염화칼리 30g, 퇴비 5,000g, 고토석회 7g을 준다.


가지치기

어미덩굴의 4~5마디에서 순지르기를 하여 아들덩굴을 키운다.
어미덩굴에서 나온 아들덩굴 4~5개 중 생육이 비슷한 2~3개를 골라 키운 뒤 17마디 가량에서 순을 지른다.
아들덩굴 6~10마디에서 나온 손자덩굴에서 착과시키며 4마디에서 순을 지른다. 
아들덩굴 5마디 안쪽에서 나오는 손자덩굴은 나오는 즉시 제거한다.



질병관리

ㆍ노균병
증상 - 잎의 앞면에 엷은 황색의 반점이 생기다가 점점 커진다.
치료 - 환기를 잘 시키고 지속적인 옷거름을 주어 생육이 저조하지 않도록 한다.

ㆍ흰가루병
증상 - 잎에 작은 흰색가루가 점점이 형성되어 점점 번진다.
치료 - 질소질 과용 회피, 흰가루병 등록약제 사용한다.


수확하기

아주심기 한 다음 개화 후 약 30일 전, 후면 수확이 가능하다. 

수확은 오전 중에 하는 것이 신선도를 오래 유지할 수 있다.

참외는 박과의 한해살이 덩굴식물로 노란색 과피에 흰색 과육이 대부분이며, 다른 과채류에 비해 열량과 비타민이 많아서 식품으로서 가치가 높고 특유의 향과 아삭아삭한 식감이 일품이다. 

참외에 함유되어 있는 포도당과 과당은 인체에 흡수가 빨라 피로 회복에 도움을 준다. 
천연 항산화제인 베타카로틴이 많이 함유되어 암과 심장 질환 예방에 효과가 있다.

참외 가식부 100g당 성분은 열량 26~31㎉, 수분 90.6~92.8%, 단백질 0.9~1.0g, 지질 0.1~0.4g, 탄수화물 5.0~6.0g, 칼슘 6~18㎎, 인 10~35㎎, 철 0.2~0.5㎎, 나트륨 7~14㎎, 칼륨 207~221㎎, 비타민A 80~90㎍, 비타민B1 0.02~0.05㎎, 비타민B2 0.01~0.05㎎, 니아신 0.4~1.0㎎, 비타민C 15~250㎎이 함유되어 있다.

연원 및 변천

우리나라에서 참외가 재배된 것은 삼국 시대 또는 그 이전으로 추정되며, 『해동역사()』와 『고려사()』에 의하면 통일 신라 시대에 황과()와 함께 참외[]에 대한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김천에서 참외 재배는 1970년대 시작되었으며 1990년대에 들어 단지화가 이뤄졌다.

제조(생산) 방법 및 특징

김천 지역 참외는 전국 생산량의 7.2%를 차지하며 천적을 이용한 저농약 농법으로 재배된다. 
촉성 재배 및 반촉성 재배를 하고 있으며, 연장 재배로 3월에서 10월까지 계속 수확을 하고 있다. 
다른 지역 참외에 비해 빛깔이 우수하고 육질이 단단하며 당도가 높다.

현황(관련 사업 포함)

김천 지역의 참외는 감천면·감문면·남면 일대에서 많이 생산되고 있으며, 2009년 말 기준 재배 면적 436㏊에 연간 1만 5425톤을 생산하고 있다. 
재배 품종은 오복꿀이 60% 정도를 차지하며, 그 밖에 칠성꿀, 만리장성, 팔복 등이 생산된다.





2018년 3월 13일 화요일

타박네 / 이연실

장화홍련전. 薔花紅蓮傳. 1

장화홍련전. 薔花紅蓮傳.

실화가 소설이

계모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일찍부터 소설, 설화 등에서 숱하게 다루어져 왔다. 
'신데렐라형 이야기'로 불리는 계모형 소설은 유럽에만 500편 이상의 각기 다른 이야기가 전한다고 한다. 
중국에서도 재산을 탐내 친아들과 모의하여 전설적인 성군 순()임금을 죽이려고 시도했던 흉악한 계모의 이야기를 비롯해 수많은 소설에 계모가 등장한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어서 계모의 모진 구박을 받다 세상을 떠난 처녀의 원혼이 접동새가 되었다는 설화에서부터 조선의 제12대 임금 인종이 계모 문정 왕후가 준 독이 든 떡을 먹고 죽었다는 야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 온다. 
이러한 이야기는 『장화홍련전』을 비롯해 『김인향전』()·『황월선전』()·『정을선전』()·『김취경전』()·『양풍운전』()·『어룡전』() 등 많은 고전 소설로 작품화되었다.

고전 소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계모형 가정 소설을 꼽으라면 역시 『콩쥐팥쥐전』과 『장화홍련전』을 들 수 있다. 
탄탄한 소설 구조를 갖추고 있는 『장화홍련전』은 이본이 30여 편에 이를 정도로 널리 유행했던 작품이다. 
그러한 유명세를 타고 1924년에 처음 영화로 만들어졌으며, 지난 2003년에는 이 작품을 재해석한 새로운 영화가 제작되기도 하였다. 
『장화홍련전』의 줄거리는 잘 알려져 있지만 이 이야기가 실제 일어난 사건을 바탕으로 한 것임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싶다.
실제 사건 '장화홍련전'은 효종대 전동흘이 평안도 철산 부사로 재직하던 중에 겪은 일로, 그의 문집인 『가재사실록』()에 실려 있다. 
전동흘은 전라도 출신의 무장으로,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김상헌(, 1570~1652)의 종사관으로 명나라에 군사를 요청하러 갔다가 화의가 성립되어 도중에 돌아온 일이 있으며, 병자호란 때에는 의병을 일으켜 남한산성까지 인조를 모시고 내려가는 등 국가에 대한 의리를 철저히 지켰던 인물이다.

1651년(효종 2)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북벌 정책을 추진하던 송시열()에 의해 발탁돼 선전관을 지냈다. 
세상에서는 그를 이상진(), 소두산()과 함께 '호남삼걸'()이라 불렀다. 
1656년(효종 7)에는 흥덕 현감에 제수되었는데, 수군을 조련하던 중 폭풍우로 배가 침몰하자 직접 물에 뛰어들어 군사들을 구해 낸 공으로 특별히 당상관에 제수되었다. 
철산 부사에 임명된 것은 그 후의 일이다.

철산현은 원귀() 때문에 매년 가뭄이 들고 수령들이 죽거나 갈려 거의 폐읍이 될 정도였다고 한다. 
실제로 효종 연간(1649~1659)에는 거의 매년 가뭄이 들다시피 하였다. 
이렇게 가뭄이 계속 들자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것이 억울하게 죽은 귀신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았던 것으로 보인다. 
귀신 이야기는 21세기인 지금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지만, 조선시대의 경우 대궐 안에 돌덩이가 날아들거나 의복에 불이 붙고 궁인의 머리카락이 잘리는 등 귀신이 부리는 요상한 변괴가 일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를 현종이 직접 할 정도였던 것을 보면 민간에서 그러한 소문이 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로 인해 조정에서는 적당한 수령을 물색하고 있었는데 전동흘의 지모()가 수령직을 감당할 만하다고 판단하여 그를 파견하였던 것이다. 
소설 속에서는 정동우로 나오는데 이는 전동흘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철산 부사로 파견된 전동흘은 장화와 홍련의 죽음에 얽힌 사건을 해결하였으며, 그런 연유로 부민들은 그를 '신명철인'()이라 부르고 공덕비를 세웠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 보면 『가재사실록』에 기록된 '장화홍련전'은 전동흘이 밝혀낸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엮은 것이 분명하다.

문집에서는 전동흘이 관아에서 실제로 장화와 홍련의 원귀를 만난 것처럼 설명하고 있지만, 물론 이는 사실로 보기 힘들다. 
'장화홍련전' 자체가 전동흘이 쓴 것이 아니며 전동흘 생존시의 기록도 아니기 때문이다. 
『가재사실록』은 전동흘의 8대손 전기락()이 1865년(고종 2)에 편찬한 책이다. 
여기에 실려 있는 '장화홍련전'은 1818년(순조 18)에 박인수()라는 사람이 전동흘의 6대손 전만택()으로부터 한글본을 한문으로 고쳐 달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사양하고 그 대략의 내용을 적어 놓은 것이다.

『가재사실록』에 기록되기 이전에 한글본 『장화홍련전』이 있었던 것을 보면 이미 일반인들 사이에 장화와 홍련의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었고, 그런 과정에서 소설적인 요소들이 덧붙여졌을 가능성이 크다. 『가재사실록』의 '장화홍련전'도 일정 부분은 소설이다. 
민간에 유포되어 있던 『장화홍련전』이 『가재사실록』에 실린 것보다 좀 더 소설적인 성격이 강하다.

장화가 정혼을 하게 되자, 혼수를 많이 장만하라는 좌수의 말에 재물이 축날것이 아까워 장화를 죽이기로 흉계를 꾸며, 큰 쥐를 튀하여 장화의 이불 속에 넣었다가 꺼내어 좌수에게 보이고 장화가 부정을 저질러 낙태하였다고 속여, 아들 장쇠를 시켜 못에 빠뜨려 죽였다. 
그 순간 범이 나와 장쇠의 두 귀와 한 팔, 한 다리를 잘라가 장쇠는 병신이 되었다. 
이에 계모는 홍련을 더욱 학대하고 죽이려 하였다. 
홍련은 장쇠에게서 장화가 죽은 것을 알았고, 또 꿈에 장화가 현몽하여 원사한 사실을 알고, 장화가 죽은 못을 찾아가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그로부터 그 못에는 주야로 곡성이 났으며, 원사한 두 자매가 원정()을 호소하려고 부사에게 가면 부사는 놀라서 죽었다.
이런 변고로 부사로 올 사람이 없었는데, 마침 정동우()라는 사람이 자원하여 부사로 부임하였다. 
도임 초야에 장화 · 홍련이 나타나 원사한 시말과 설원()해 주기를 간청하였다. 
이튿날 부사는 좌수 부부를 문초한 바, 장화는 낙태하여 투신자살하였고, 홍련은 행실이 부정하더니 야음을 틈타 가출하고 종무소식이며, 장화의 낙태물이라고 증거물을 제시하는 것을 본 바 낙태물인 것 같아서, 좌수 부부를 훈방하였다.

그날 밤 꿈에 두 소저가 나타나 계모가 제시한 낙태물의 배를 갈라 보면 알 것이라 하고 사라졌다. 
이튿날 부사는 다시 그 낙태물을 살피고 배를 갈라 본즉 쥐똥이 나왔다. 
이에 부사는 계모를 능지처참하고, 장쇠는 교수형에 처하였으며, 좌수는 훈방하였다. 
그리고 못에 가서 자매의 시신을 건져 안장하고 비()를 세워 혼형을 위로하였더니, 그날 밤 꿈에 두 자매가 다시 나타나 설원해 준 일을 사례하며, 앞으로 승직할 것이라 하였다.
그 말대로 부사는 승직하여 통제사에 이르렸다〔Ⅰ〕.
한문본은 전동흘의 철산부사 재임시에 겪은 실력담을, 그의 6대손 만택()의 간청에 의하여 박인수()가 1818년(순조 18) 섣달 초하룻날에 쓴 것이다. 
이 한문본은 전동홉의 8대손 기락()등이 1865년(고종 2)에 편찬한 《가재사실록()》과 《가재공실록()》(, 1968)에 실려 있고, 국한문본은 《광국장군전동흘실기()》에 실려 전한다. 




『가재사실록』에 실려 있는 '장화홍련전', 즉 가장 역사적 사실과 가깝다고 할 수 있는 내용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실제 사건의 내막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순치(, 청나라 세조의 연호) 연간(1644~1661) 평안도 철산에 배시경()이라는 양반이 살고 있었다. 
그는 재주와 기품이 있어 백성들의 천거로 좌수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 
첫 부인과의 사이에서 장화와 홍련이라는 두 딸을 두었는데, 장화가 여섯 살 되던 해에 부인이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손수 두 딸을 길렀다. 
어머니 없이 크는 두 딸이 안쓰러워 재혼을 하게 되었고, 후처와의 사이에서 필동()과 응동()이라는 두 아들을 낳았다.

『장화홍련전』의 줄거리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이 작품이 실제 사건을 소재로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진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중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평안도 철산 일대의 모습.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일찍 생모를 잃었지만 장화와 홍련은 예쁘고 교양 있는 처녀로 성장하여 사족()들이 서로 며느리로 맞이하기를 청할 정도였다. 
배 좌수는 고심 끝에 장화가 스무 살이 되던 1651년에 훌륭한 가문의 아들과 정혼하였다. 
배 좌수는 직무로 관부에 있던 중에 혼인을 결정하였기 때문에 후처에게 혼수를 잘 준비하도록 기별을 넣었다. 
후처는 성격이 본래 탐욕스러워 항상 두 딸을 살해하고자 벼르고 있었는데, 혼수를 마련해 주어야 하자 한 가지 흉계를 궁리해 실행에 옮겼다.

계모는 새끼 쥐의 껍질을 벗겨 낙태한 태아처럼 만든 다음 장화의 이불 속에 몰래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잠시 후에 방에 들어와 태연하게 "장화야 무슨 병이 있어 이렇게 곤히 자느냐?"며 장화를 깨웠다. 장화의 옷과 이불에는 당연히 피가 묻어 있었다. 
계모는 웬 피가 이렇게 많이 묻었냐며 이불을 젖혀 보고는 쥐를 꺼내면서 "네가 양반집 여자로서 이처럼 음탕한 짓을 하였으니 정말 놀랍구나"라고 말하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장화는 그저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며칠 뒤 배 좌수가 돌아오자 후처는 집안에 큰일이 났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배 좌수가 놀라 무슨 일이냐고 묻자, 후처는 "장화가 몇 일 밤에 낙태를 하였는데 믿지 못하실 것 같아 보관해 놓았습니다. 
만일 이 일이 밖으로 새어 나가면 저 두 아이들은 필시 세상 사람들에게 용서받지 못할 것이니 강에다 던져 자취를 감춥시다"라고 하였다. 
크게 노한 배 좌수는 필동을 불러 "네 누이의 행실이 이와 같으니 살아서 무엇 하겠느냐. 주암() 용수()에 밀어 죽여라"라고 지시하였다. 
그리고는 장화를 불러 외삼촌이 보고 싶어 하니 다녀오라고 하였다.

이상한 예감이 든 장화는 "여자의 행실은 문밖에도 가볍게 나갈 수 없는 것인데 어찌하여 이런 밤에 다녀오라고 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아버지가 재촉하자 장화는 홍련에게 "내가 가고 나면 너는 아버지를 모시고 아무 일 없이 살았으면 좋겠구나" 하는 말을 남기고는 필동과 함께 길을 나섰다.

용추에 이르자 필동은 갑자기 장화에게 "누나의 행실이 말할 수 없이 음탕하여 아버지가 나보고 죽이라고 하였으니 죽어야겠어"라고 하는 것이었다. 
장화는 크게 놀라 말에서 내려 통곡하면서 외삼촌을 보고 온 후에 죽을 수 있도록 며칠만 시간을 달라고 애원하였다. 
필동은 아무리 목숨을 구걸해도 아버지의 명이 엄하여 자식된 도리로 사사롭게 놓아줄 수 없다고 하고는 장화를 용추 연못에 밀어 넣었다.

그날 밤 홍련의 꿈에 언니가 나타났다. 
꿈에서 장화는 아버지가 계모의 말을 듣고는 자기를 연못에 빠뜨려 죽게 만들어 뼈에 사무치도록 원통하다며, 후에 황천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홍련은 부모에게 이상한 꿈 이야기를 하면서 아무래도 언니가 죽은 징조 같다고 하였다. 
계모는 장화의 행실이 나쁜 까닭에 아버지가 노하여 죽인 것이니 언니를 생각해도 할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홍련은 땅을 치고 통곡하면서 "내 꿈이 과연 맞았구나. 언니가 죄 없이 죽었으니 천지신명은 반드시 그 원통함을 알 것이다. 
혼자 사는 것이 죽는 것만도 못하다"며 용추 연못에 가서는 "만일 내가 죽은 후 3월에 가뭄이 있으면 원혼 때문임을 알라"는 유언을 남기고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

그런데 과연 홍련의 유언대로 3월에 큰 가뭄이 들었으며, 하늘이 음침하고 비가 축축히 온 날 밤에는 곡성이 들렸다. 
원혼이 된 두 자매는 원통함을 호소하기 위해 관을 찾았다. 
자매의 원혼을 보고 수령이 놀라 죽거나 줄행랑을 치기 일쑤여서 몇 해 동안 인심만 흉흉하였다.

일이 이렇게 되자 평안 감사는 국왕에게 철산 지방에 원귀가 있어 하늘이 가물고 관리가 교체되니 인재를 가려 보내 읍이 황폐해지지 않도록 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조정에서는 전라도 진안에 사는 전동흘이 재주와 도량이 뛰어나며 용맹하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철산 부사로 임명하였다.

철산에 부임한 전동흘은 원귀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는 밤에 호롱불을 환히 밝히고 기다렸다. 
밤이 깊어지자 장화와 홍련의 원귀가 뜰에 들어와 슬피 울며 "저희들은 본래 양반집 여자로 오명을 뒤집어쓰고 자매가 함께 죽어 뼈에 사무치도록 원한이 쌓였는데 몇 년 동안 풀지 못하였으니 명쾌하게 결단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호소하였다. 
부사가 그들의 집안과 이름, 전후의 자세한 사정을 고할 것을 명하니 그동안 있었던 일의 자초지종을 모두 이야기하였다.

부사가 즉시 형리를 불러 본읍에 배 좌수라는 자가 있으며 혹 처를 다시 얻은 일이 있고 자녀는 몇인지를 물으니 과연 장화 자매의 말과 일치하였다. 
이에 부사가 즉시 배 좌수 부부를 불러 심문하니 후처는 장녀 장화가 음탕한 짓으로 낙태를 하여 스스로 부끄러워 물에 빠져 죽었고, 홍련 역시 그 사실이 부끄러워 따라 죽었다면서 숨겨 놓은 새끼 쥐를 낙태의 증거물로 제시하였다. 
의심이 들었지만 증거물까지 제시하자 부사는 어쩔 수 없이 배 좌수 부부를 그대로 돌려보냈다.

그날 밤 장화와 홍련이 다시 나타나 그것은 쥐이니 배를 갈라 보면 사실을 알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부사가 장화와 홍련이 시킨 대로 하니 뱃속에서 쥐똥이 나왔다. 
크게 노한 부사가 좌수와 후처, 그 아들들을 잡아들여 죄를 다그치자 계모는 모든 사실을 실토하였다.

부사가 사건의 진상을 보고하자 임금은 배 좌수는 유배를 보내고 처자는 죽이도록 하교하였다. 
다음 날 부사는 장화 자매의 시신을 건져 올려 후하게 장례를 치러 주었다. 
밤이 다 되어 관아로 돌아오자 장화와 홍련이 기쁜 표정으로 나타나 백배를 하며 사례하고는 자기들이 다시 꿈에 나타나면 그때는 필시 자품()을 올리라는 임금의 하교가 있을 것이라고 말한 뒤 사라졌다. 
이후 전동흘은 좌·우 수사, 남·북 병사, 포도대장, 통제사 등 중요한 관직을 두루 역임하다가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