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23일 금요일

월왕구천세가(한자 원문) , 卷四十一. 越王句踐世家. King Gōu Jiàn of Yuè

월왕구천세가(한자 원문) , 卷四十一. 越王句踐世家King Gōu Jiàn of Yuè.


월왕 윤상(, B.C.510~497 재위)의 아들. 
B.C.496년에 취리()에서 오나라 군사와 격돌했을 당시 사형수 300여 명으로 된 결사대를 투입하여 오나라 군사들이 보는 앞에서 차례로 목을 찔러 자결하게 하는 전대미문의 계책을 써서 오나라 군사들의 혼을 뺀 뒤 기습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고 오왕 합려를 사망하게 만들었음. 

이 대승리에 만족하여 잠깐 방심한 결과 3년 뒤인 B.C.494년에 합려의 아들 부차()가 이끈 대규모의 오나라 군대에게 패배함으로써 망국 직전까지 가는 참담한 패배와 치욕을 당하게 되었음. 

이후 날마다 쓸개를 핥으면서 지난날의 치욕을 거듭 상기하고 오나라에 대한 적개심을 계속 북돋아 보복전을 철저히 준비했음. 

그처럼 고군분투한 결과 마침내 20년 뒤인 B.C.473년에 오나라를 멸국()시켜 원수를 갚고 춘추 후기 국제 질서의 주요 축이었던 오, 월 양국의 항쟁을 완전히 종식시켰음. 

문종()과 범려() 양 책사의 보필하에 대내적으로도 내정 개혁과 안정에 힘써 월나라의 최고 전성기를 이끌었으며 중원 국가들에게도 월나라의 위명과 영향력을 널리 알렸음.


구천과 오월쟁패>
월왕() 구천()은 그 선조가 우()나라의 후예로서 하후() 제소강()의 서자였다. 
회계()에 봉해져 우나라의 제사를 받들었다. 
문신을 하고 머리카락을 잘랐으며, 풀을 뽑고 나무를 베는 등 황무지를 개척하여 읍을 만들었다. 
그 후 20여 세()가 지나 윤상()에 이르렀다. 
윤상 때 오왕() 합려()와 싸워 서로 원한을 품고 정벌하게 되었다. 
윤상이 죽고 아들 구천()이 자리에 오르니 이가 월왕이다.

월왕 구천 원년(기원전 496년)에 오왕 합려는 윤상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군대를 일으켜 월나라를 정벌했다. 
월왕 구천은 결사대로 맞서 싸웠는데, 세 줄을 지어 오나라의 진영에 이르러 고함을 지르며 목을 그어 죽었다. 

오나라의 군대가 이를 구경하는 사이 월나라가 오나라의 군대를 습격하여 오나라의 군대를 취리()에서 패배시키는 한편 오왕 합려에게 활을 쏘아 부상을 입혔다. 
합려가 죽음을 앞두고 그 아들 부차()에게 “월나라를 절대 잊지 말아라!”라고 했다.
구천 3년에 구천은 오왕 부차가 밤낮으로 병사를 훈련시켜 월나라에 보복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오나라가 나서기 전에 월나라이 먼저 오나라를 정벌하려 했다. 
범려()가 “안 됩니다. 

신이 듣기에 군대는 흉기이며, 전쟁은 덕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싸움은 모든 일의 맨 마지막입니다.
음모로 덕을 거스르고, 흉기를 즐겨 사용하여 자신의 몸을 보잘 것 없는 곳에다 시험하려는 것은 상제께서 금할 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옮겨도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라고 충고했다. 
월왕은 “내가 이미 결심했다.”고 하면서 드디어 군대를 일으켰다. 
오왕이 이를 듣고는 정예병을 모두 징발하여 월나라를 공격하여 부추()에서 패배시켰다. 

월왕은 남은 병사 5천을 수습하여 회계산()을 거점으로 수비에 들어갔고, 오왕은 추격하여 이곳을 에워쌌다.
월왕은 범려에게 “그대 말을 듣지 않은 까닭에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하면 되겠소?”라고 했다. 

범려는 “가득 찬 것이 지속되려면 하늘이 도와야 하고, 기운 것을 바로 세우려면 사람이 도와야 하며, 절제할 수 있으려면 땅이 도와야 합니다. 
자신을 낮추는 말과 넉넉한 예물을 그 쪽에 보내십시오. 
허락하지 않으면 몸이라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구천이 “좋소.”라 하고는 바로 대부 문종()에게 오나라로 가서 일을 성사시키게 했다. 
(
문종이) 무릎으로 기어 머리를 조아리며 “군왕의 망한 신하 구천이 심부름꾼 신 문종을 보내 여러분들께 ‘구천은 신하가 되고, 처는 첩이 되길 청합니다’라고 감히 아뢰라고 했습니다.”라 했다. 
오왕이 이를 허락하려 하자, 오자서()가 오왕에게 “하늘이 월나라를 오나라에게 주시려는데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했다.
문종이 돌아와 구천에게 보고하자 구천은 처자식을 죽이고 보물을 불태워, 죽음으로 맞서 싸우려 했다. 

문종이 구천을 말리며 “보아 하니 오나라의 태재() 백비()가 탐욕스러워 이익으로 그를 유혹할 수 있으니, 몰래 가서 이를 알리도록 하십시오.”라고 했다. 
이에 문종을 시켜 미녀와 보물을 몰래 오나라 태재 백비에게 바쳤다. 
백비가 이를 받고는 바로 대부 문종을 오왕에게 보였다. 
문종이 머리를 조아리며 “대왕께 원하옵건대 구천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의 보물을 다 거두어주시기 바랍니다. 
불행하게도 용서하지 않으신다면, 구천은 그의 처자식을 다 죽이고 보물을 불태운 다음 5천 명을 모두 거두어 죽기로 싸울 것이니 (대왕께서도) 분명 상당한 대가를 치를 것입니다.”라고 했다.

백비가 오왕에게 “월나라가 항복하여 신하가 되었으니 용서하시면 나라에 이익이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오왕이 이를 받아들였다. 

오자서가 나서며 “지금 월나라를 멸망시키지 않으면 훗날 틀림없이 후회할 것입니다. 
구천은 현명한 국군이고 문종과 범려는 좋은 신하들입니다. 
저들 나라로 돌려보내면 장차 난이 일어날 것입니다.”라고 직언했다. 
오왕은 듣지 않고 끝내 월나라를 용서하고 군대를 철수시켜 돌아갔다.

구천이 회계산에서 포위당했을 때 “내가 여기서 끝나는 것인가?”라며 탄식했다. 
문종이 “탕()나라는 하대()에, 문왕()은 유리()에 갇혔었습니다. 
중이()는 적()나라으로, 소백()은 거()나라로 달아났었습니다. 
끝내는 왕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지금 상황이) 복이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오나라가 월나라를 용서하자, 

월왕 구천은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는 몸과 마음을 고통스럽게 했는데, 자리에 곰쓸개를 두고서 앉으나 누우나 쓸개를 올려다보았고, 음식을 먹을 때도 쓸개를 맛보았다. 
“네가 회계의 치욕을 잊었는가?”라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몸소 농사를 짓고 부인은 옷감을 짰다. 음식에 고기를 더하지 않았고, 옷은 색깔 있는 옷을 입지 않았다. 
체면을 내려놓고 유능한 인재를 우대하고, 빈객을 후하게 접대하고, 가난한 사람을 돕고, 죽은 자를 조문하면서 백성들과 수고를 함께 했다. 

범려에게 국정을 맡기려 하자 범려는 “군대 일이라면 문종이 범려만 못합니다만 나라를 단단히 어루만지고 백성을 따르게 하는 일이라면 범려가 문종만 못합니다.”라고 했다. 
이에 국정을 대부 문종에게 맡기고 범려와 대부 자계()를 보내 담판을 짓고 오나라에 인질로 남게 했다.
2년 뒤 오나라는 범려를 돌려보냈다.

구천이 회계에서 돌아온 지 7년(기원전 487년)만에 군대와 백성을 잘 다독거려서 오나라에 보복하는 데 쓰려고 했다. 
대부 봉동()이 “나라가 얼마 전에 망했다가 이제 조금 넉넉해지려고 합니다. 
군비를 정비하고 무기를 가다듬으면 오나라가 두려워 할 것이 뻔하고, 두려워하면 어려움이 닥치기 마련입니다. 
무릇 매나 수리가 공격을 하려 할 때는 그 모습을 숨기는 법입니다. 
지금 오나라는 제나라, 진()나라에 병력을 더 보내고 있고, 초나라와 월나라는 한이 깊습니다. 
명성이 천하에 높지만 실제로는 주나라 왕실에 해가 되고 있습니다. 
덕은 적고 공은 많으니 분명 자기 멋대로 교만하게 굴 것입니다. 

월나라를 위한 계책으로 말하자면 제나라와 결탁하고, 초나라와 친하게 지내고, 진()나라에 의지하고, 오나라를 강하게 만드는 것이 최선입니다. 
오나라의 야심이 커지면 싸움을 우습게 볼 것이 분명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주도권을 쥐고, 세 나라와 함께 오나라를 정벌하고, 우리 월나라는 오나라의 지친 틈을 이용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라고 직간했다. 
구천이 “좋소!”라고 했다.
2년이 지나자, 오왕이 제나라를 정벌하려 했다. 오자서가 “안 됩니다. 
신이 듣기에 구천은 두 가지 이상 맛있는 음식을 먹지 않고, 백성과 더불어 고락을 같이 한답니다. 
이 자가 죽지 않으면 틀림없이 우리나라의 근심이 됩니다. 

오나라에게 월나라는 뱃속의 질병이지만 제나라는 오나라에게 부스럼 정도입니다. 
바라옵건대 왕께서는 제나라는 놔두시고 월나라를 우선시하십시오.”라고 간언했다. 
오왕이 듣지 않고 기어코 제나라를 정벌하여 애릉()에서 (제나라를) 패배시키고 고장()과 국하()를 포로로 잡아 돌아와서는 오자서를 나무랐다. 
오자서가 “왕께서는 기뻐할 것 없습니다.”라고 하자 왕이 노했다. 
오자서가 자살하려고 하자 왕이 이를 알고는 말렸다.

월나라의 대부 문종은 “신이 보아하니 오왕의 정치가 교만합니다. 
시험삼아 양식을 빌려 달라고 하고, 그 일이 어찌 되는 지 예측해보시기 바랍니다.”라고 했다. 
식량을 빌려달라고 청하자 오왕은 주려고 하는데, 오자서가 주지 말라고 했다. 
오왕이 끝내 빌려주었고, 월나라는 은근히 기뻐했다. 
오자서는 “왕이 내 말을 듣지 않는구나. 3년 뒤면 오나라의 땅이 폐허가 되겠구나!”라고 했다.

태재 백비가 이를 듣고는 오자서와 월나라에 대해 여러 차례 논쟁을 벌이면서 오자서를 두고 “오원(오자서)이 보기는 충성스럽지만 실은 잔인한 사람입니다. 
그 아버지와 형님도 돌보지 않았는데 어찌 왕을 돌보겠습니까? 왕께서 전에 제나라를 치려고 하셨을 때 오원이 강력하게 말렸지요. 
공을 세웠는데도 이 때문에 오히려 왕을 원망했습니다. 
왕께서 오원에 대해 대비하지 않으면, 오원은 반드시 난을 일으킬 것입니다.”라고 모함했다. 

봉동과 함께 모의하여 왕에게 오자서를 모함했다. 
처음에 오왕은 이 말에 동조하지 않고, 오자서를 제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오자서가 제나라에 가서 그 아들을 포목()에게 맡겼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왕이 “오원이 정말 과인을 속였구나!”라며 크게 노했다.
(제나라 정벌에서) 돌아와서는 사람을 시켜 오자서에게 촉루검()을 주면서 자살하게 했다. 

오자서가 크게 웃으며 “내가 네 아비를 패주로 만들었고, 내가 또 너를 세웠다. 
네가 처음에 오나라를 반으로 나누어 내게 주겠다고 했지만, 나는 받지 않았다.  
지금 네가 오히려 모함의 말을 듣고 나를 죽이는구나. 
오호라, 오호라! 혼자서는 오래 갈 수 없을 것이다!”라 하고는 사신에게 “반드시 내 눈알을 파내 오나라 동문에 걸어 월나라 군대가 쳐들어오는 것을 보게 하라!”는 말을 전하게 했다. 

오왕은 백비에게 정권을 맡겼다.
3년이 지나자, 구천은 범려를 불러 “오나라가 이미 오자서를 죽였고, 지금 그 주위에는 모두 아부만 일삼는 자들만 있이니 (공격하면) 되겠소?”라고 물었다. 
(범려가) “안 됩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듬해 봄이 되자, 오왕은 북쪽 황지()에서 제후와 회맹했다. 
오나라의 정예병은 왕을 따라 나섰고, 오로지 노약자와 태자만 남아 지키고 있었다. 
구천이 범려에게 다시 묻자 범려는 “가능하겠습니다.”라고 했다. 

물에 익숙한 2천명, 훈련을 제대로 받은 4만명, 뜻이 굳센 군자() 6천명, 근위 시종 1천명을 선발하여 오나라를 정벌하여 오나라의 군대를 물리치고 마침내 오나라의 태자를 죽였다.
오나라는 왕에게 급히 알렸다. 

오왕은 황지에서 제후들과 회맹 중이었는데 천하가 이 일을 알까 두려워 비밀에 부쳤다. 
오왕이 황지 회맹을 마치고는 바로 사람을 보내 후한 예물로 월나라에 강화를 요청했다. 
월나라는 아직 오나라를 멸망시킬 능력이 없음을 스스로 헤아려서 오나라와 화평을 맺었다.

그 뒤4년 만에 월나라가 다시 오나라를 정벌하러 나섰다. 
오나라의 군사와 백성들은 이미 지친 상태였다. 
정예병이 모두 제나라와 진()나라에서 죽었기 때문이었다. 
월나라는 오나라를 대파하고 3년 동안 포위했다. 
오나라의 군대는 패했고, 월나라는 마침내 고소산()으로 오왕을 몰아넣었다.
오왕의 사신 대부 공손웅()은 웃통을 벗고 무릎으로 기어서 월왕에게로 다가가 강화를 요청하며 “오갈 데 없는 신 부차가 감히 속마음을 털어 놓습니다. 

지난 날 회계에서 죄를 지었을 때 이 부차는 감히 명을 어기지 못하고 왕의 강화 요청을 받아들여 귀국하도록 했습니다. 
지금 왕께서 몸소 옥체를 움직여 신을 토벌하시니 신은 명을 받들 뿐입니다. 
회계에서 그랬던 것처럼 신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지요?”라고 했다.
구천은 차마 모질지 못해 받아들이려 했다. 

범려가 “회계의 사건은 하늘이 월나라를 오나라에 준 것인데 오나라가 취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오나라를 월나라에 주려는 것인데 월나라가 어찌 하늘을 거스를 수 있겠습니까? 
왕께서 아침 일찍 조회를 하고 저녁 늦게 파한 것은 오나라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22년을 계획했는데 하루아침에 버린다니 될 말입니까? 
하늘이 주시는 데도 받지 않으면 오히려 그 화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나무를 베어 도끼자루를 만들려면 그 본이 멀지 않거늘’라는 (시경의) 구절이 있듯이 왕께서 회계의 재앙을 잊으신 것은 아니겠지요?”라고 했다.
구천은 “내가 그대의 말을 따르고 싶지만, 사신에게는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소이다.”라 했다. 

범려는 북을 울려 군대를 진격시키면서 “왕께서 이미 이 일을 내게 맡겼으니 사신을 돌아가시오. 그렇지 않으면 죄를 받게 될 것이오!”라고 했다.
오나라의 사신은 눈물을 흘리며 돌아갔다.
구천이 가엾게 여겨 곧 사람을 보내 오왕에게 “내가 왕을 용동()으로 보내 100가의 우두머리가 되도록 하겠소.”라고 했다. 

오왕이 “내가 이미 늙어서 군왕을 섬길 수 없겠습니다.”라며 사양하고는 드디어 자살했다. 그때 그 얼굴을 가리게 하면서 “내가 오자서를 볼 면목이 없다!”라고 했다. 
월왕은 바로 오왕을 장사지내고 태재 백비를 죽였다
구천이 오나라를 평정하고 바로 병사를 거느리고 북으로 회하를 건너 제후 제나라, 진()나라와 서주()에서 회맹하고 주나라에 조공을 바쳤다. 
주나라 원왕()은 사람을 시켜 구천에게 제사지낸 고기를 내리고 백()에 임명했다. 

구천은 철수하여 회하 남쪽을 건너 회하 위쪽 땅을 초나라에 주고, 침탈한 송나라의 땅을 돌려주고, 노나라에게는 사수() 동쪽 사방 100리 땅을 주었다. 
당시 월나라의 군대가 장강과 회하 동쪽을 주름잡으니 제후들이 모두 축하를 드리며 패왕()이라고 칭했다.
범려는 (월나라를) 떠나 제나라에서 문종에게 편지를 보내 “날던 새가 다 잡히면 좋은 활은 감추고, 약은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는 삶기는 법이오. 

월왕은 목은 길고 입은 뾰족하여 근심과 어려움은 함께 할 수 있어도 즐거움은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이오. 
그대는 어째서 떠나지 않소?”라고 했다.
문종이 편지를 보고는 병을 핑계로 조정에 들어가지 않았다. 
누군가 문종이 난을 일으키려 한다고 중상하자 구천은 문종에게 바로 검을 내리며 “그대가 과인에게 오나라를 정벌할 일곱 개의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과인은 그중 세 가지만 사용하여 오나라를 물리쳤다. 

나머지 넷은 그대에게 있으니 그대는 나를 위해 선왕을 따라가서 그것을 시험하도록 하라.”라고 했다. 
문종이 마침내 자살했다.
구천이 죽자 아들 석여()가 왕으로 섰다. 
석여가 죽자 아들 불수()가 왕이 되었다. 
불수가 죽자 아들 옹()이, 옹이 죽자 그의 아들 예()가, 예가 죽자 아들 지후()가, 지후가 죽자 아들 무강()이 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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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천 .勾踐. , gōu jiàn.


춘추시대 말기의 월(越)나라의 왕(재위 BC 496∼BC 465). 오왕 합려와 싸워 그를 죽였고 부차에게 패했다. 
그 후 부차를 꺾어 자살하게 하고 서주(徐州)에서 제후와 회맹하여 패자가 되었다.
요약춘추시대 말기의 월(越)나라의 왕(재위 BC 496∼BC 465). 오왕 합려와 싸워 그를 죽였고 부차에게 패했다. 그 후 부차를 꺾어 자살하게 하고 서주(徐州)에서 제후와 회맹하여 패자가 되었다.
출생-사망? ~ BC 465
국적/왕조중국 춘추시대 월()
재위기간BC 496년∼BC 465년
활동분야정치, 군사
아버지 윤상()이 죽은 뒤 왕위를 이어받자마자 오왕() 합려()와 싸워 그를 죽였다. 
합려의 아들 부차()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섶나무 위에서 자며 복수심을 불태웠다고 한다. 
2년 후인 BC 494년에 구천은 부차에게 패배하여 회계산()에 숨었다가 버티지 못하고 용서를 빌어 오왕의 신하가 되었다. 
그 후 구천은 회계산의 치욕을 씻기 위하여 쓸개를 핥으면서 부국강병()에 힘썼다. 
그리하여 끝내 부차를 꺾어 자살하게 하고, 서주()에서 제후와 회맹()하여 패자()가 되었다. 
이것이 부차와 구천 두사람의 싸움으로 생긴 ‘와신상담()’의 고사()이다.

그 후 명신() 범여()를 추방하고 대부() 문종()을 자살하게 하는 등 만년에는 지각없는 행동을 많이 하였다. 
최근에 후베이성[] 장링[]의 망산일호초묘()에서 ‘월왕구천자작용검()’이라는 명()이 있는 아름다운 동검()이 출토되었다.

생애

성은 사()이고, 다른 이름은 구천(), 담집()이다. 춘추시대 월나라 군주이다.
하우의 후예이며, 아버지는 월왕 윤상(, ?~BC.497)이다.

무리한 공격이 부른 굴욕

아버지 윤상이 오나라 임금 합려와 싸워 패하고 말았다. 
구천은 즉위(BC.496년) 하자마자 바로 휴리()라는 지역에서 오나라와 싸워 승리했다. 
이 전투에서 오왕 합려는 부상으로 죽고 그 아들 부차가 즉위했다.
이후 구천은 범려와 문종의 충고를 듣지 않고 오나라를 무리하게 공격했다가 부차에게 크게 패하고 마는데, 문종을 통해 오나라 태재()로 있던 백비()에게 사람을 보내 뇌물과 미인 등을 바치며 화의를 청했다. 
구천은 문종을 국내에 남겨 사태를 수습하게 하고, 자신은 범려와 함께 오왕 부차의 시중을 드는 치욕을 감수해야 했다.

춘추전국 최후의 패주

3년 만에 오나라에서 귀국한 구천은 밥상머리에 곰의 쓸개를 달아놓고 이를 핥으면서 복수를 다짐했는데, 여기서 ‘와신상담()’이라는 고사성어가 나왔다.
그는 범려와 문종의 계책을 채용해 10년 동안 물자를 모으고 10년 동안 인재를 양성해 국력을 키웠고 오나라에 대해서는 이간책과 미인계 등으로 국력을 낭비하게 하는 전략을 취했다.
구천 재위 15년인 BC.482년에 오왕 부차가 황지()란 곳에서 제후들과 회맹하는 틈을 타 구천이 정예병을 이끌고 오나라 수도를 공격했다. 
부차는 서둘러 귀국하여 싸웠으나 패하고 말았다. 
구천은 일단 물러났다가 다시 오나라를 공격했고, 기력을 잃은 부차가 사람을 보내 화의를 청했으나 받아들이지 않고 끝내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구천은 북방 지역을 공략하여 서주의 제후들을 규합하고, 주 왕실에 조공하여 패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구천은 춘추전국 시기의 최후의 패주가 되었다.
오나라를 멸망시킨 후 구천은 문종을 자살하게 하는 등 공신들의 숙청에 나섰는데, 범려는 이러한 구천의 본색을 미리 예상하고 월나라를 떠나 동해 바닷가로 은퇴했다고 한다.

고사성어의 유래

춘추시대 강남의 오나라와 월나라는 대대로 원수지간으로 끊임없이 싸워왔다. 
나라 왕 부차는 즉위하면서 월나라를 공격했는데, 당시 오나라의 수도는 오(, 현 장쑤성 쑤저우)였고, 월나라의 수도는 회계(, 현 저장성 사오싱())였다. 
두 나라 군대는 태호와 고성(, 현 장쑤성 가오춘()현 남쪽) 일대에서 전투를 벌였고, 월나라는 대패했다.
월나라 왕 구천은 대부 문종을 오나라의 태재 백비에게 보내 화해를 청했다. 
백비는 문종이 가져온 황금 · 옥 등 귀중품과 미녀를 보고는 득의만만해져 문종을 왕 부차에게로 데려갔고, 문종은 부차를 만나 월나라 왕이 오나라 왕의 신하가 되길 간청하며 월나라의 토지도 오나라에게 바치겠다고 했다. 
부차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한편 보내온 예물을 거두고 월나라 왕 구천으로 하여금 오나라로 와서 자기를 모시라고 했다.
『사기』 「월왕구천세가」와 『오월춘추』에는 구천이 나랏일을 문종과 다른 대신에게 맡기고 자신은 처자식과 대부 범려를 데리고 회계를 떠나 오나라로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나라 왕 부차는 구천을 자신의 아버지 합려(과거 오 · 월 전쟁에서 전사)의 무덤 옆 돌방에서 말을 먹이도록 했고, 범려도 함께 허드렛일을 하면서 지냈다. 
부차가 수레를 타고 나갈 때면 구천은 그를 위해 말고삐를 잡고 수레를 몰기도 하는 등 부차를 모시는 구천의 자세는 참으로 주도면밀했고 정성스럽기 그지없었다. 
문종도 수시로 월나라 국내에서 각종 귀중품을 가져와 백비에게 갖다 바쳤고, 백비는 그의 왕 부차 앞에서 구천에 관해 좋은 말을 해주었다. 
이렇게 구천은 3년 동안 조심조심 근신하며 참고 살았다.
어느 날 부차가 병이 났는데, 구천이 백비를 통해 부차의 침실로 들어가 손수 부차를 간호했다. 
부차는 크게 감동했고 병이 나은 후 구천 부부와 범려를 석방하여 월나라로의 귀국을 허락했다.
그는 10년간의 준비를 통해 인구를 늘리고 재물을 축적하는 한편, 국민과 군대의 교육과 훈련에도 박차를 가했다. 
이것이 이른바 ‘십년생취(), 십년교훈()’이다.
이렇게 10년 만에 국세를 회복하고 날로 발전 · 강대해진 월나라는 단 한번으로 오나라를 격파했다. 
구천은 문종, 범려와 함께 직접 대군을 이끌고 오나라로 쳐들어갔는데, 오나라는 이 기세를 당해내지 못했다. 
백비는 투항하고 부차는 자살함으로써 오나라는 마침내 망하고 말았다.
‘와신상담’, ‘십년생취, 십년교훈’은 훗날 각고의 노력, 비분강개, 설욕의 맹세 등을 비유하는 말이 되었고, 실패나 좌절을 당한 후 자신을 격려하거나 서로 격려하는 중요한 방법이 되기도 했다.

유적

1965년 후베이성 장링() 망산()의 초나라 무덤 1호묘에서 상태가 완전한 55.7센티미터 길이의 검이 발굴되었다. 
이 검은 출토 당시 빛이 살아 있고 날이 여간 예리한 것이 아니었다. 
이 검이 바로 ‘천하제일검’으로 불리는 구천검(월왕구천검())이다. 
검 손잡이 부분에서 구천이란 명문이 나왔기 때문이다. 
2,400년이 넘는 세월 속에서도 날카로움과 빛을 잃지 않고 있어 당시 과학기술의 수준을 잘 보여주는 최고의 검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후베이성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문헌
『사기(史記)』 「월왕구천세가(越王勾踐世家)」, 「오태백세가(吳太伯世家)」『오월춘추(吳越春秋)』

월왕구천검 . 越劍.




월왕() 구천() 시기에 제작된 동검()으로 '' 여덟 자가 새겨져 있음. 
호북성 강릉현 출토로 월왕구천검이 춘추 말기에 모종의 원인(전쟁이나 교류)에 의해 초나라로 전파된 사실을 알 수 있다.



"부친 윤상()이 죽은 뒤 왕위를 이어받자마자 오왕() 합려()와 싸워 그를 죽였으나, 2년 후인 B.C. 494년에 합려의 아들 부차()에게 패하여 회계산()에 숨었다가 버티지 못하고 용서를 빌어 오왕의 신하가 되었으며, 그 후 구천은 치욕을 씻기 위하여 쓸개를 핥으면서 부국강병에 힘써서 마침내 부차를 꺾고 자살하게 하여 와신상담()의 고사()가 전하였다. 

이후 서주()에서 제후와 회맹하여 패자()가 되었으나 만년에 명신() 범려(Fan Li)를 추방하고 대부() 문종()을 자살하게 하는 등 지각없는 행동을 많이 한 것으로 전해진다.




2018년 3월 18일 일요일

연,
연을 날리기 위해서는 우선 연을 만들어야 한다. 따라서 연을 만드는 방법부터 날리기, 겨루기 등을 차례로 소개한다.

재료
종이는 보통 창호지를 사용하고 살(달)은 대나무가 가장 좋다. 대나무는 물기가 완전히 빠진 잘 마른 것을 이용하는데, 왕대 또는 참대 중에 구부러졌다가 탄력 있게 펴지는 것을 이용한다.
대나무가 없으면 싸리·수숫대·갈대 같은 것을 이용하기도 하는데, 모두 껍질을 좁게 째서 길게 다듬어 쓴다.
연줄은 가볍고 질긴 명주실이 가장 좋으나, 값이 너무 비싸 일반적으로 무명실·베실 등을 이용한다.
실을 감는 얼레는 나무로 만드는데, 연줄을 풀었다 조였다 하는 도구로 매우 중요하다. 얼레는 나무가 없으면 수숫대 같은 것으로도 만든다.



만들기(방패연)
종이 ― 연의 크기는 종이의 크기인데 지방의 자연적인 조건에 따라 다르다.
바람이 센 바닷가와 평야지대에서는 연을 크게 만들고, 바람이 잔잔한 산간과 내륙지방에는 창호지 반장 정도의 크기로 만든다.
보통 방패연의 표준형은 가로:세로의 비가 2:3 정도의 장방형으로 한다.
살 ― 종이가 준비되면 살을 붙이는데 살의 부분 명칭과 역할, 붙이는 순서는 아래와 같다.
연살을 붙일 때는 연 가운데 부분이 평면에서 약 10도 가량 불룩하게 나와야 하고, 연의 굽은 각도에 따라 잘 뜨고 못 뜨게 되므로 손으로 만져서 알맞은 각이 만들어지게 조정해야 한다.
① 머릿살 ― 머릿살은 연이 바람을 타고 공중으로 올라갈 때 정면으로 맞는 바람을 사방으로 흩어지게 하는 역할을 하며, 또한 세찬 바람을 맞을 때 연 윗부분이 견뎌내는 구실을 하므로 5개의 연살 중에서 가장 튼튼하게 만들어야 하고 가장 먼저 붙여야 한다.
②③ 귓살(장살) ― 귓살은 연의 형태를 유지하는 기본 뼈대로 바람을 상하 좌우로 흩어지게 하여 연이 공중으로 뜨게 하는 역할을 하는데, 머릿살 다음에 붙인다.
④ 가운뎃살 ― 가운뎃살은 연의 중앙을 상하로 가로질러 중심을 잡게 하는 역할을 하는데, 귓살을 붙인 다음에 붙인다.
⑤ 허릿살 ― 허릿살은 연의 좌우를 가로지르는 연살로 5개의 연살 중 가장 가늘고 약한 살인데 마지막에 붙인다.

줄 ― 종이에 살을 붙인 다음 줄을 매야 하는데, 만드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한 과정이다. 보통 매는 순서는 아래와 같다.
① 머릿줄(활벌잇줄) ― 머릿줄은 ㉠과 ㉡사이에 매는 줄로, 약 15도 각도로 연 윗부분이 뒤로 휘어지게 잡아 가장 먼저 맨다.
② 윗줄 ― 윗줄은 머릿살 양 끝 ㉠, ㉡에서 ㉤까지의 줄로, ㉠에서 ㉤, ㉡에서 ㉤까지의 길이가 같게 맨다.
③ 가운뎃줄 ― 가운뎃줄은 ㉢에서 ㉤까지의 길이로 정하는데, 좀 여유 있게 늘어뜨려 맨다.
④ 아랫줄 ― 아랫줄(꽁숫줄)은 방구멍 중앙에서 맨 아래까지를 3등분했을 때, 아래에서 1/3 정도에 구멍을 뚫고 실로 가운뎃살에 실을 매서 ㉣에서 ㉤에 잡아맨다. 이때 길이는 윗줄과 같게 한다.
연에 실을 맨 다음 그 실과 얼레에서 나온 실을 연결하면 연 만들기가 끝난다.
보통 연을 만들 때는 연을 날리는 곳의 바람의 세기를 참작하여 연의 크기를 정해야 한다. 방구멍 역시 바람이 강한 해안지방에서는 크게, 바람이 약한 내륙지방에서는 작게 뚫어야 한다.
얼레는 연줄을 감았다 풀었다 하면서 연을 조정하는 역할을 하는데, 기둥의 수에 따라 2모, 4모, 6모, 8모 얼레가 있다.

연날리기
연을 날릴 때 꼭 알아두어야 할 것으로 기본적인 지식과 기술이 있는데 아래와 같다.
① 연은 바람을 헤치고 올라가지 않고 바람을 타고 올라간다.
② 바람이 흐르는 방향으로 연을 띄워 바람을 최대한 이용하도록 해야 한다.
③ 연 날릴 때의 몸가짐은 연과 날리는 사람의 앞가슴이 45도 각도로 마주보고 있어야 하며, 연줄 역시 직선에 가깝도록 팽팽하게 당겨야 연을 자유롭게 조종할 수 있다.
④ 얼레질을 잘 해야 바람의 흐름과 풍압에 맞춰 연줄을 풀거나 감을 수 있다.
⑤ 튀김을 잘 주어야 하는데, 튀김이란 얼레를 잦혀 연을 조종하는 기술을 말한다.
⑥ 연이 곧바로 섰을 때 통줄(연줄을 막 풀어 갑자기 많이 풀려나가는 줄)을 주면 연은 왼쪽 또는 오른쪽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어진다.
이때 연줄을 재빨리 감으면 기울어진 방향으로 날게 된다.
⑦ 통줄을 주어 연이 비스듬하게 될 때 튀김을 주면 연은 거꾸로 방향을 바꾸는데, 이때 얼레를 감으면 연은 수직으로 곤두박질친다. 
곤두박질치는 연을 다시 바로 잡고 위로 올릴 때는 튀김을 주어 연줄을 풀어주고 감으면 된다.

연놀이의 종류
① 높이 띄우기 ― 연을 약 500m 이상 띄우면 연의 무늬가 보이지 않고, 약 1,000m 가량 높이 띄우면 눈에 가물가물하게 보이고, 그 이상이 넘게 되면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연은 높이 멀리 올라갈수록 바람을 세차게 받기 때문에 연이 망가지거나 연줄이 끊어질 우려가 있다.
② 재주부리기 ― 연을 날리는 사람의 손놀림에 따라 연은 왼쪽 또는 오른쪽으로 급회전, 급강하, 급상승 등 다양한 공중곡예를 부린다.
이는 연을 날리는 솜씨에 달려 있지만 우리 나라 연만이 지닌 구조적 특징으로 이와 같은 기동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③ 끊어먹기 ― 대표적인 연놀이로 연이 서로 엇갈리며 연줄을 비벼서 상대방 연줄을 끊는 놀이이다.
승부는 연실의 질김과 약함에도 달려 있지만 그보다도 연의 조종기술에 의해 좌우되기도 한다.

연의 종류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연은 방패연이다.
이밖에 주로 어린이들이 많이 날리는 가오리연과 변형연이 있다.
방패연은 연 바탕에 그려진 무늬와 색깔에 따라 이름이 붙여진다.
① 꼭지연 ― 꼭지는 연의 이마 가운데에 붙이는 둥근 원형의 색지를 말한다.
꼭지는 방구멍을 오려낸 종이로 만드는데, 크기는 보통 방구멍을 오려낸 종이를 한번 더 도려내 방구멍보다 작게 한다.
경상도에서는 꼭지연을 달연이라고 한다.
꼭지의 색깔이 청색이면 청꼭지연, 홍색이면 홍꼭지연, 검은 색이면 먹꼭지연이라고 한다.
② 반달연 ― 이마 가운데 반달형의 색지를 오려 붙인 연을 말하는데, 반달의 빛깔에 따라 명칭이 다르다.
먹반달연은 검은 색지를 반달형으로 오려 붙인 연이고, 홍반달연은 붉은 색지를 오려붙인 것이고, 임반달연은 연의 이마에 장방형 색지 양쪽 귀를 둥글리거나 모만 접어서 반달모양으로 붙인 연을 말한다.
③ 치마연 ― 상반부는 백색 그대로 놓아두고 하반부만 여러 가지 빛깔을 칠한 연을 말하는데, 마치 여인들의 치마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하반부의 빛깔이 검은 연은 먹치마연, 푸른 연은 청치마연, 붉은 연은 홍치마연(분홍치마연), 삼등분한 연은 삼동치마연, 사등분한 연은 사동치마연, 여러 가지 세로로 칠한 연은 색동치마연이라고 한다.
④ 동이연 ― 동이란 말은 연의 머리나 허리를 '동이다'라는 말이다.
어떤 물건이 흩어지지 않도록 묶는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연의 머리나 허리에 색칠을 하는 것을 말한다.
머리에 동이면 머리동이연이고 허리에 동이면 허리동이연이라고 한다.
⑤ 초연 ― 연의 꼭지만을 제외하고 전체를 동일한 색으로 칠한 것을 말하는데, 빛깔에 따라 전체가 검은색이면 먹초연, 푸른색이면 청초연, 붉은색이면 홍초연, 노란색이면 황초연, 보라색이면 보라초연이라고 한다.
⑥ 박이연 ― 연의 전체나 일부분에 동전 크기의 점이나 눈, 긴 코 같은 모양을 박은 연을 말한다.
돈점만한 흰점을 드문드문 박은 연은 돈점박이연, 귀머리장군연에 직사각형 모양의 붉은 꼭지를 박은 연은 귀머리장군긴코박이연, 양쪽 삼각형에 각각 크고 작은 둥근 흰 점을 둘 혹은 셋씩 박은 연은 눈깔귀머리장군긴코박이연이라고 한다.
⑦ 발연 ― 연의 맨 아래나 좌우 가장자리에 발 모양의 종이를 붙인 연을 말한다.
맨 아래에 네가닥의 길다란 색지나 흰 종이를 오려 붙인 연은 사족발연, 국수같이 가늘고 길다랗게 십여 가닥을 붙인 연을 국수발연, 좌우 가장자리에 색지를 붙이거나 빛깔을 칠한 종이로 지네발 모양으로 오려서 촘촘히 붙인 연은 지네발연이라고 한다.
⑧ 기타 연 ― 연의 모양이나 그림에 따라 다양한 이름이 붙는데 바둑판처럼 생긴 연은 바둑판연, 가오리처럼 생긴 연은 가오리연, 호랑이처럼 생긴 연은 호랑이연 등으로 불린다. 
사람 머리에 쓰는 관처럼 생겼다고 관연, 연의 전면에 아무 장식도 하지 않은 흰색 그대로의 연을 상주연, 연을 날리다가 음력 정월 보름에 송액()이라고 써서 멀리 날려버리는 액막이연, 요즘에 어린이들이 흔히 날리는 가오리처럼 생긴 가오리연 등 종류가 수백 가지이다.

놀이

연날리기는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고 이용하는 방법을 깨닫게 하는 놀이이다. 
어디에서 바람이 부는가· 어느 정도 세게 부는가· 지금 연을 날리는 것이 좋을까· 바람이 약해지기를 기다릴까· 
등을 생각하며 촉각을 세우고 있는 그 순간, 자연과 인간이 하나된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늘 높이 오른 연을 멀리 또는 가깝게 올렸다 내렸다 마음대로 조종하면서, 그 동안 만드는 과정에서의 어려움은 하나의 즐거움으로 승화된다. 
연날리기는 만드는 과정에서 손의 조작능력이 향상되며 어떤 형태로, 어떤 그림을 넣을까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창의력이 길러진다. 
무엇보다도 바람에 대해 몸으로 깨닫게 된다는 점에서 교육적 효과가 뛰어난 놀이이다. 
추운 겨울, 방안에서 웅크리고 있기보다 밖으로 나가 추위를 이기는 동안 체력, 지구력 등이 길러지게 된다.

기타

연은 일본을 비롯하여 중국·말레이시아·태국·인도·싱가포르·네팔 등에서도 날리는데, 그 모양새나 과학적 원리가 우리 연을 따라 갈 수 없다. 
우리 연을 대표하는 방패연은 날리는 사람의 손놀림에 따라 올라갔다 내려왔다, 
좌우로 돌아갔다 다시 올라가고 또 뒤로 물러갔다 할 수도 있고 얼마든지 오래, 높이 날릴 수 있다. 
이렇게 재주부리기가 가능한 것은 연의 구조가 과학적으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방패연은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전부가 짧은 사각형으로 가로:세로의 비율이 약 2 : 3 정도의 장방형으로 되어 있다. 
장방형은 줄을 3~4곳에 매기 때문에 아래에서 높이 뜬 연을 조종하기가 쉽다. 
가운데 둥글게 방구멍을 뚫어 바람이 잘 빠지므로 강한 바람에도 연이 망가질 염려가 없다. 
머리 부분은 구부린 유선형으로, 항상 바람을 많이 받는 연 이마쪽의 바람이 강하게 부딪히지 않도록 만들어져 있다. 
맨 아래에는 연살을 대지 않아 하체가 가볍게 되어 있으며, 머릿살 양쪽 귀와 가운데 구멍에 십자로 교차되는 곳과 가운뎃살 좌우에 연줄이 비스듬히 또는 아래에서 올라와 가운뎃줄과 한데 모여 느슨하게 매어져 날리게 되므로 연 전체나 또는 그 일부분이 연줄 조종에 따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기동성을 지닐 수 있다.

이런 과학적인 원리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여러 번 날리면서 어떻게 하면 더 잘 날 수 있을까,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면서 바람의 움직임과 연과의 관계, 연줄과의 관계를 과학적으로 찾아낸 결과라 여겨진다.

게다가 바람이 많이 부는 해안가나 강가에서는 연의 크기와 방구멍의 크기를 크게 뚫는 반면, 산이 많은 곳이나 평지에서는 연과 방구멍의 크기를 작게 뚫었다. 
이것은 각 지방의 특성을 연에 반영한 것으로 과학적인 사고를 엿볼 수 있는 예가 될 것이다.

또한 연줄을 감는 얼레를 만들어 감고 푸는 것을 쉽게 했다. 
이것은 실패와는 다르게 물레의 원리를 이용해서 중앙에 고정 막대가 있고 겉의 틀이 돌아가게 함으로써 빨리 풀고 감을 수 있도록 했다.

연날리기는 보통 정월 대보름이 지나면 더 이상 하지 않았다고 한다. 
대보름이 되면 연에 액()또는 송액()이라고 써서 날렸다고 한다. 
이는 그해의 나쁜 액을 멀리 날려보냄으로써 좋은 일만 있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지연() 또는 풍연()이라고도 한다.
연날리기는 세계 각국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고, 특히 동양 3국에서 성행하고 있어 나라마다 명칭도 다양하다.
연은 BC 400년대에 그리스의 알투스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중국 송나라 때 고승()이 찬한 《사물기원()》에 보면 BC 200년경 한신()이 군사적인 목적에서 연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국의 기록은 중국보다 약 800년이 뒤진다.

삼국사기》 <열전()>에 보면 신라 선덕여왕 말년에 김유신이 밤에 풍연에 불을 달아 하늘로 올려 민심을 수습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그 후 고려의 명장 최영()이 제주도를 정벌할 때, 연을 이용하여 적성()을 함락시켰다는 전설이 있다.

일본은 한국보다 약 300년이 뒤진 헤이안시대[:794~1192]에 연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전주왜명유취초()》에 실려 있다. 
고려와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연날리기는 아이들의 놀이로 세시풍속화하였으며 그 기록이 《동국세시기()》, 《경도잡지()》, 《지봉유설()》을 비롯한 여러 문헌에 나타나 있다.
그 종류도 100여 종을 헤아릴 수 있으며 이들은 대개 두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 하나는 한국 연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직사각형 중앙에 방구멍이 뚫려 있는 것으로, 연면()에 붙이는 색지()의 색과 모양에 따라, 또는 그림에 따라 명칭을 달리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연의 생긴 모양, 즉 외형에 따라 그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그 가운데 전자의 연은 꼭지연·반달연·치마연·동이연·초연·박이연·발연 등을 비롯하여 기타 연으로 귀머리장군연·바둑판연·오색연·문자()연·나비연·고기비늘연·구리팔괘()연·돌쩌기연·소딱지연·쌍나비연·삼봉산()연 ·삼봉산눈생이연·중머리연·접시연·편자연·방상시()연·상주()연·액막이연·제비연·쟁반연·관()연·용()연·봉황연·거북선연·박쥐연 등이 있으며, 후자의 연으로는 까치날개연·방패연·가오리연·족제비연·십자()연·홍어연·매연·박대연·사람연 등이 있다.
연을 만드는 재료는 대[]와 종이로, 대는 통상 고황죽()·백간죽()을 사용하며 종이는 백지·창호지 등을 사용한다. 
먼저 연의 바탕이 될 종이를 접을 때는 이것을 날릴 사람의 연령에 따라, 또는 바람이 강한 해안지방과 바람이 비교적 약한 내륙지방의 구분에 따라, 크기를 달리한다.

중간쯤의 예를 들면 종이를 길이 56cm, 나비 46cm 정도로 재단하고 길이 한 끝을 2.5 cm쯤 접어 머리를 삼는다. 
다음은 연길이의 1/3쯤 되는 지름으로 한가운데를 오려내어 구멍을 뚫고 대살을 산적꼬챙이같이 가늘고 얄팍하게 깎아 다듬어서 종이에 붙이는데, 먼저 머리 접은 곳에 가로로 붙이고, 다음 세로로 한가운데를 내리붙이고, 다시 중간허리에 가로로 붙이고, 끝으로 좌우 머리를 교차하여 귀걸어 붙인 다음 종이를 알맞게 오려 꼭지와 양쪽 발을 붙이고 나서 벌이줄을 매어 평형을 잡는다. 
그 다음 색지를 붙여 여러 모양을 내거나 직접 색칠을 하기도 한다.
연줄은 상백사(:한국산 명주실)·당백사(:중국산 명주실)·떡줄(무명실) 등을 사용한다. 요즈음은 질긴 화학사를 사용하기도 한다. 
연줄은 부레뜸이나 풀뜸을 하는데, 이것은 부레(생선의 공기주머니) 또는 풀을 끓인 물에 사기가루나 유리가루를 타서 실에 올리는 것으로 ‘가미먹인다’또는 '개미먹인다'라고 한다.

얼레는 지방에 따라 ‘자새’ 또는 ‘감개’라고도 한다. 나무오리로 네 기둥을 맞추고 가운데 자루를 박아 실을 감아 연을 날리는 기구로 4모얼레·6모얼레·8모얼레 그리고 볼기짝얼레(이모얼레·납작얼레)가 있다. 
일반적으로 4모얼레가 많이 사용되는데, 경기용으로는 6모·8모얼레가 사용되며 볼기짝얼레는 아이들이 골목에서 장난삼아 연을 날릴 때 쓴다.
연날리기는 지금도 행하여지는 민속놀이로, 오락성과 민속신앙적인 양면성을 지닌다. 먼저 민속신앙적인 놀이로는 ‘액막이 연날리기’를 들 수 있는데, 옛날부터 정월 대보름날이면 연에 ‘’자 또는 ‘’이라 써서 높이 날려 보냄으로써 액을 쫓아보낸다는 풍습이 전해지고 있다.

오락적인 것으로는 연싸움이 있는데, 두 사람 이상이 연을 높이 띄우고 서로 연줄을 걸어 풀었다감았다 하면서 상대편의 연줄을 끊어 연을 날려보내는 놀이로, 지금도 매년 열리는 연날리기대회에서는 연싸움이 벌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