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3일 화요일

박문수 . 朴文秀.

박문수 . 朴秀.


691(숙종 17)∼1756(영조 32). 조선 후기의 문신.
영원한 암행어사
본관은 고령(). 자는 성보(), 호는 기은(). 이조판서 박장원()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세마() 박선()이고, 아버지는 영은군()박항한()이며, 어머니는 공조참판 이세필()의 딸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 
이인좌의 난 때 전공을 세웠다. 
함경도 진휼사로 경상도 기민을 구제, 송덕비가 세워졌다. 
병조판서, 호조판서, 우참찬 등을 지냈다. 
군정과 세정에 밝았다.《탁지정례》등이 있다.

1박문수는 영조 대 소론계 당인이면서도 항상 공적인 입장을 우선시했던 인물이었다. 
본관은 고령()이며 는 성보(), 는 기은()이다. 
1723년(경종 3)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사관()이 되었다. 
1724년 병조정랑()에 올랐다가 노론()이 집권하삭직당했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득세하 사서()에 등용되어 영남 암행어사로 나가 부정관리들을 적발했다. 
이듬해 이인좌()의 난 때는 종사관()으로 출전, 전공을 세워 경상도 관찰사에 발탁되고, 분무공신() 2등에 책록되어 영성군()에 봉해졌다. 

1730년 서어사(西)로 기민() 구제에 힘썼으며, 1734년 진주부사(使)로 나라에 다녀온 뒤 병조판서 등을 지냈다. 
1738년 다시 동지사(使)로 나라에 다녀온 뒤, 앞서 안동서원()을 철폐시킨 일로 탄핵을 받아 풍덕부사(使)로 좌천되었다. 
1741년 어영대장()에 이어 함경도 진휼사(使)로 나가 경상도의 곡식 1만 섬을 실어다가 기민을 구제하여 송덕비가 세워졌다.

그 후 병조판서를 지내고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 황해도 수군절도사로 좌천되었다. 
1749년 조판서가 되어 양역()의 폐해를 논하다가 다시 충주목사(使)로 좌천되었다. 
그 뒤 영남균세사(使) 등을 거쳐 세손사부()를 지내고, 1752년 왕세손(:  ) 이 죽 약방제조(調)로서 책임을 추궁당해 제주()에 안치, 이듬해 풀려나 우참찬()이 되었다. 

군정()과 세정()에 밝았으며, 암행어사 때의 많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저서로는 《탁지정례()》, 《국혼정례()》가 있고, 글씨로는 《오명항토적송공비()》가 있다. 는 충헌()이다.

무에도 밝아 국가의 재정이나 군사 부분 개혁을 주도하였다. 
박문수의 암행어사 활동은 사실과 다소 간극이 있으나, 이변이 없는 한 아마도 그는 우리들 가슴속에 영원히 암행어사로 자리할 것이다.

전설 속의 박문수
조선시대 암행어사는 국왕의 명으로 몰래 지방관을 감찰하고, 그들의 비리를 척결하던 관원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암행어사는 백성들에게는 희망의 전도사였다. 
오늘날에도 구전되는 각종 전설에 암행어사를 대상으로 한 것이 많은 이유는 그만큼 암행어사가 백성들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춘향전]에서 춘향이 사또의 수청 문제로 생사를 오고 가는 순간에 극적으로 나타나 옛사랑을 구원하는 이몽룡도 암행어사로 등장하고 있지 않은가!
암행어사는 어렵고 힘든 상황이 되면 어디에선가 나타나서 이를 해결해줄 것 같은 백성들의 로망이었다. 조선시대에 많은 암행어사가 있었다. 
유독 박문수는 암행어사의 대명사인양 말해지고 있다. 
암행어사 하면 박문수요, 박문수 하면 암행어사로 대표되고 있는 것이다.

전라도 한 지역에 나이 많은 부자가 있었다. 
이 부자는 일찍 부인을 여의고 세 아들과 함께 살았다. 
세 아들 가운데 막내만이 혼례를 해서 며느리를 들였다, 하루는 부자가 일찍 여읜 부인의 제사를 마치고 집을 한 바퀴 돌고 있는데 며느리 방에 불이 켜져 있어 들어가 보니 며느리가 누군가에 의해 칼을 맞고 죽어 있었다. 
이를 본 부자가 냉큼 방으로 들어가 먼저 칼을 뽑아들고 있었는데 마침 이 광경을 며느리를 모시던 몸종이 보고는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살해했다고 한 것이었다. 
물론 시아버지는 부인했으나 칼을 들고 있던 모습 때문에 영락없이 범인으로 몰려 감옥생활을 하였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 마침 박문수가 어사로 이곳을 지나다가 소문을 듣고는 살인사건이 발생한 집에서 하루 머물면서 부자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었다. 
그리고는 살인사건 당시 부자가 빼들었다는 칼을 보았다. 
칼을 보게 된 박문수는 이것이 중들이 쓰는 장도칼이었음을 알아차렸다. 
다음날 박문수는 칼을 들고 인근의 무량사라는 절에 가서는 기지를 발휘해 그 절 소속 중 가운데 범인을 잡아 부자의 억울함을 풀어주었다.
박문수와 관련해서는 많은 구전설화가 있으나, 그 가운데 충청남도 보령군 웅천면 일대에서 조사된 암행어사 박문수의 활약상을 전하는 설화는 다음과 같다.
이런 이야기가 한둘이 아니니, 박문수는 그야말로 암행어사 계의 레전드가 아닐까.

박문수, 사실()과 설화 사이
이처럼 박문수와 관련된 많은 암행어사 설화에서는 잘못된 평판이나 소문의 진실을 밝히는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로 그려지거나 때로는 억울하게 누명을 쓴 백성을 구명하여 억울함을 풀어주는 정의의 심판자로 그려지고 있다. 
실제 역사 속에서 박문수가 정작 암행어사로 파견된 적이 없다는 점을 알면 이런 이야기에 대해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다.
물론 박문수가 어사로 파견된 적은 있었다. 
1727년(영조 3) 9월의 일로, 이때 박문수는 영남별견어사()로 임명되어 영남에 파견되었다. 
이때도 암행어사는 아니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암행어사는 그야말로 암행을 하는 어사였으나, 박문수는 이때 어사의 직함을 띠고 다음 해 3월까지 안동을 비롯해 예천, 상주 등지를 순행하며 도내 명망 있는 인사들과 공개적인 만남을 가졌다. 
사실 이때의 어사 활동으로 박문수는 다음 해에 곤경을 처하기도 하였다. 
1728년 이른바 무신란(혹은 이라고도 함)이 발생하였는데, 난을 주도한 영남 지역 인사 가운데 한 명이 정희량이었다. 
마침 박문수가 어사로 활동하면서 정중원()의 상가를 방문한 적이 있었으며, 정중원의 아들이 정희량이었다. 
반대세력으로부터 박문수가 영남을 순행하면서 거사를 모의한 것을 알고 있었다는 혐의였다. 
이처럼 역사 기록을 보면 박문수가 어사로 파견된 적은 있으나 암행어사는 아니었다. 그리고 지역도 영남에 국한되었다. 
지금 구전되는 박문수 관련 설화는 비단 영남에 국한되지 않으며 심지어는 제주나 강화도까지도 관련 설화가 전하고 있으니, 그의 인기를 가히 실감할 만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전설과 사실 사이에 간극이 발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이는 박문수에 대한 백성들의 믿음에서 연유한 것이라 생각된다. 
1727년 박문수가 영남에 어사로 파견되어 활동할 때 환곡을 백성들의 삶을 위한 밑천으로 돌렸고, 탐관오리들을 다스렸으며, 바닷가 고을에 명망 있는 인물을 지방관으로 임명할 것 등을 정부에 요구하거나 조치를 취하였다. 
이런 조치가 백성들에게 크게 환영받았다. 
아마도 이때의 경험이 백성들에게 많은 어사나 암행어사가 있었음에도 박문수라는 이름이 각인되게 되었고, 그것이 결국 후대에 내려오면서 암행어사 하면 박문수라는 등식을 성립시킨 것이라 하겠다.

당론에 충실 ‘공()’을 우선한 소론계 당인
박문수가 관직 활동을 하던 시기는 정치적으로는 노론과 소론이 격심하게 대립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 박문수는 소론의 당색을 가지고 당론을 가장 추종하던 인물로 활동하였다. 
이 점은 1741년(영조 17) 반포된 신유대훈()에 대한 입장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신유대훈은 영조의 왕위 계승과 관련해서 노론과 소론, 그리고 남인의 논의 절충을 통해 발표된, 정치 현안에 대한 결정 문안이었다.
신유대훈이 반포되자 박문수는 노론 측의 김용택과 이천기를 역적의 죄로 단정한 것이 분명하지 않다고 불만을 드러냈다. 
김용택과 이천기는 노론 측 인물로, 경종연간에 왕세제 연잉군(후일의 영조)을 지지하다가 1722년(경종 2) 목호룡의 고변에서 국왕을 시해하려고 했다고 하여 죽임을 당했다. 
신유대훈의 반포로, 역적으로 죽임을 당했던 김용택과 이천기가 이제는 충신이 되었다. 
박문수는 김용택 등이 이미 경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모종의 모의를 하였으며, 경종의 신하를 자처하지 않았다고 하며 이들을 역적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소론 당론을 추종하던 강경 소론들의 기본적인 입장이었다. 
점차 노론으로 정치의 주도권이 옮겨져 가던 시기 박문수의 이 같은 정치적 자세는 그가 정치적으로 성장하는데 한계가 되었다. 
그가 사망하던 시기에 작성된 실록의 졸기에는 “이광좌를 사표로 삼아 지론이 시종일관 변하지 아니하였으니, 그 때문에 끝내 정승에 제배되지 못하였다.
([영조실록])”고 하였다. 
이광좌는 영조 대 전반 소론의 영수에 해당하는 인물로, 그에 상대하던 노론 측의 영수는 민진원(인현왕후의 오빠)이었다.
이렇게 강경한 소론의 정치적 입장을 견지하던 박문수였으나, 당론보다 앞섰던 것이 ‘공’을 우선시하는 입장이었다. 
이와 관련해서 반대당이었던 양주 조씨 조태채와의 관련 일화가 전하고 있다. 
조태채는 경종 대 신임옥사 때 죽임을 당한 노론 측 4대신 가운데 한 명인 만큼 박문수와는 정치적으로 타협이 불가능한 인물이었다. 
주지하듯이 영조 대는 이른바 탕평책이 정치운용술로 통용되던 시기였다. 
탕평채는 이때 만들어진 음식이라 한다. 
영조를 중심으로 추진되던 탕평책 하에 관료 생활을 하던 박문수는 어느 날 대궐에서 숙직하며 사람들과 같이 밥을 먹게 되었다, 
마침 반찬으로 콩나물이 나왔다. 
박문수는 콩나물 대가리를 꼭 떼어버리며 “콩나물 대가리는 어차피 잘라버려야 돼”하고 말했다는 것이다. 
콩나물을 한자로 표현하면 ‘(태채)’가 되는데, 그 음이 조태채()의 이름과 같았기 때문에 그리한 것이었다.
이렇게 조태채에 대해서 강경한 입장을 보이던 박문수였으나, 조태채의 아들 조관빈에게 보여준 다음과 같은 자세는 여러 가지 시사하는 바가 있다. 
조관빈은 박문수와 거의 같은 시기에 정치 활동을 하였다. 
한번은 조관빈이 극형에 처해질 위기가 있었다. 
박문수는 국왕을 알현하고는, “조관빈이 지극히 흉악한 죄를 지었으니 죄상으로 보아서는 마땅히 목을 베어야 하나 지금 말해지고 있는 일 정도로는 죽일 사안이 아닙니다."라며 관대한 처벌을 요청하였다. 
영조는 “조관빈은 경의 원수가 아니오!”라며 의아해 하였다. 
박문수가 이어서 “사적으로는 원수이오나 공적인 판단으로는 죄가 아니옵니다. 
전하께서 관빈을 죽이고 싶으시다면 신 문수의 원한을 갚기 위해 죽였노라고 중외에 포고한 다음 죽이소서”라 하였다. 
조관빈은 박문수의 요청에 의해 사면되게 되었다. 
비록 반대당 인물이지만 중요한 순간에 개인적인 감정만을 강조하기보다는 공적인 입장을 우선시한 것이라 하겠다.

균역법 제정의 일등공신, 박문수
박문수는 또한 뛰어난 실무관료이기도 하였다. 
이 점은 그가 사망하였을 때 작성된 졸기에서, “나랏일에 대해서는 마음을 다하여 해이하지 아니하여 병조와 호조에서 바로잡고 개혁한 것이 많았으며, 누차 병권()을 장악하여 사졸의 환심을 얻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병조판서로 재직하면서는 국왕 호위군의 약화를 보완하기 위해 용호영창설을 주도하였다. 
호조판서로 재직 시에는 국가 재정에 대한 정비를 주도하였고 그 결과물인 [탁지정례]를 편찬하였으며, 균역법의 제정에 공을 세웠다.
박문수는 호조판서로 일련의 정책 결정 과정을 주도하였다. 
1750년(영조 26) 5월 19일, 이날도 국왕은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에 나아가 유생과 평민들을 모아 놓고 양역에 대해서 물었다. 
이때 논의에 부쳐졌던 안은 호포론과 결포론이었다. 
본래 양역은 사람을 단위로 하여 부과되던 것인 데 비해 호포론은 가호()를 단위로 포를 징수하자는 것이고, 결포론은 토지를 단위로 포를 징수하는 논의였다. 
이때 논의에서는 호포론이 유력한 안으로 결정되었는데 그 막후에 바로 호조판서 박문수의 막후 노력이 있었다. 
박문수는 이 밖에도 화폐문제를 해결하고자 청나라 화폐를 수입하자고 하거나 은으로 화폐를 주조하자는 등 각종 경제나 사회 문제에 대해 여러 가지 정책 입안과 추진에 참여하였다. 
이 같은 박문수의 죽음에 대해 영조는 애도의 뜻을 표하면서 그에게 관직을 추증하였는데, 이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맺음말에 갈음한다.균역법은 양역() 문제 해결을 위한 대책이었다. 
18세기 중반 경 양역은 백성들이 느끼는 가장 커다란 민폐 가운데 하나였다.
잘 알려진 폐단인 족징(), 인징(), 황구첨정(), 백골징포() 등이 여기서 유래한 것이었다. 
양역 문제에 대해 어떠한 형태로라든지 그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그 대책으로 여러 가지 안들이 논의되었고, 국왕도 몇 차례 조정 신료들과의 논란뿐 아니라 궁궐 문 앞에 서울의 유생이나 시전 상인들을 모아놓고 정책에 대한 가부를 묻기도 하였다.
“아! 영성(;박문수의 봉호)이 춘방()에 있을 때부터 나를 섬긴 것이 이제 이미 33년이다.

예로부터 군신() 중에 비록 뜻이 잘 맞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어찌 나의 영성과 같음이 있으랴? 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영성이며, 영성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나였다.

그가 언제나 나라를 위하는 충성이 깊었음을 나는 알고 있다. …(중략)…이 소식을 듣고 보니, 슬픔을 무엇에 비유할 수 있으랴? 더욱 애석한 것은 벼슬이 경재()에 그친 것이다.

이것이 어찌된 연유이겠는가? 뜻은 대개 당()을 비호하였기 때문이었다.

아! 영성이 이미 갔으니, 그 누가 나의 마음을 알 것인가? 아! 무신년에 충성을 다한 것이 어찌 삼재( : 의정부 좌우참찬)에 그치고 말 것인가? 이미 옛 전장()이 있으니, 어찌 아뢰어 결정받기를 기다릴 것인가? 해조()로 하여금 특별히 의정()에 추증하여 나의 옛날의 공을 생각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영조실록]에서

생애 활동

1급제
1723년(조선왕조 3) 증광시() 병과16(16)

1723년(경종 3)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예문관검열()로 뽑혔다. 
이듬해 세자시강원설서()·병조정랑에 올랐다가 1724년(영조 즉위년) 노론이 집권할 때 삭직되었다.
이듬해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사로도순문사(使) 오명항()의 종사관으로 출전, 전공을 세워 경상도관찰사에 발탁되었다. 
이어 분무공신() 2등에 책록되고 영성군()에 봉해졌다. 
같은 해 도당록()에 들었다.
1730년 대사성·대사간·도승지를 역임했으며, 1731년 영남감진어사()로 나가 기민()의 구제에 힘썼다. 
1732년 선혜청당상()이 되었고, 1734년 예조참판으로 재직 중에 진주사(使)의 부사(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호조참판을 거쳐, 1737년 도승지를 역임한 뒤 병조판서가 되었다. 
이때 병조 자체 내에 인신()이 없어 군무의 신속한 입송()에 불편을 주고, 간리()가 중간에 농간을 부리는 폐단이 있었다.
이는 군기의 중요성에 비추어 많은 문제점을 야기할 수도 있어, 왕에게 주청해 병조판서와 이군색()의 인신을 만들었다.
1738년 다시 동지사(使)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나 앞서 안동서원을 철폐시킨 일로 탄핵을 받아 풍덕부사로 좌천되었다. 
이어 함경도에 북도진휼사(使)로 나가 경상도의 곡식 1만 섬을 실어다 기민을 구제해 송덕비가 세워졌다. 
다음 해 병조판서로 재직시 지리적 여건으로 봉군()의 충원이 어려운 북도()에 각 지방에 정배()된 봉무사()로서 변통할 것을 주청해 이를 시행하게 하였다.

암행어사 연보
1723년(조선왕조 3) 예문관검열()로 뽑혔고, 이듬해 세자시강원설서(),병조정랑에 올랐다가 1724년(영조 즉위년) 노론이 집권할 때 삭직

36세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기용되자 사서()에 등용, 영남암행어사 파견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사로도순문사(使) 오명항()의 종사관으로 출전, 전공을 세워 1728년 경상도관찰사에 발탁되었으며, 분무공신()2등에 책록되고 영성군()에 봉하여졌다. 같은해 도당록(錄)에 들었다.
1730년 대사성,대사간,도승지를 역임
39세 1730년 대사성,대사간,도승지를 역임하였으며, 충청도에 암행어사로 기민()의 구제에 힘썼다.
48세 1739년 함경도관찰사가 되었고, 1741년 어영대장()을 역임하였으며, 함경도에 진휼사(使)로 나아가 경상도의 곡식 1만섬을 실어다 기민을 구제하여 송덕비가 세워졌다.
1740년 병조판서로 재직시 지리적 여건으로 봉군()의 충원이 어려운 북도()에 각 지방에 정배()된 봉무사()로서 변통할 것을 주청하여 이를 시행
1743년 경기도관찰사가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 이듬해 황해도수군절도사로 좌천되었다.

1745년 어영대장에 재임되었고, 1749년 호조판서로 재직시 궐 안의 당우()를 3년에 한 번씩 수리할 때 책임관으로서 역대 어느 관료보다도 일을 잘 처리했다는 역사적인 교훈을 남기기도 하였다.
1750년 수어사(使)를 역임한 뒤 관동영남균세사(使)를 거쳐, 지성균관사()·판의금부사()·세손사부() 등을 지냈고, 1751년 예조판서가 되었다. 
1752년 왕세손이 죽자 내의원제조(調)로 책임을 추궁당하여 제주로 귀양갔다. 
이듬해 풀려나와 우참찬에 올랐다.
정치적으로 소론에 속하였다. 
영조가 탕평책()을 실시할 때 명문 벌열() 중심의 인사 정책에서 벗어날 것을 주장했으며, 4색()의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탕평의 실()을 강조하였다. 
군정()과 세정()에 밝아 당시 국정의 개혁 논의에 중요한 몫을 다하였다.
1749년영조에게 주청해 다른 신하들과 함께 『각전각궁공상정례(殿)』 6권, 『국혼정례()』 2권, 『각사정례()』 12권, 『상방정례()』 3권을 합해 『탁지정례()』를 출판하였다. 
글씨로는 안성의 『오명항토적송공비()』가 전한다.
4차례에 걸쳐 어사로 파견되었던 행적이 허구로 각색되며 암행어사 박문수 설화가 많이 전해지고 있다. 

암행어사란 임금이 지방 관리들의 행동과 백성들의 생활을 알아보기 위해 몰래 보낸 관리로 대개 정직한 선비가 암행어사가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정직, 청렴함이 우선시되는 암행어사라는 관직을 거론할 때 우리들이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인물이 바로 박문수이일 것이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만화책이나 동화책 등을 통해서 ‘암행어사 출두야 !’를 외치며 나타나 부패한 관리들을 엄벌하는 장면들이 머릿속에 깊게 각인된 사람들 중에 박문수가 역사속의실존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작가는 바로 이러한 상황, 즉 짓밟히고 억눌린 민중들 편에 서서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 주며 늘 강자보다는 약자의 편에 서서 고통을 덜어주려 했던 그의 행적이 토막이야기로 흩어져 야담수준으로 구전된 탓에 그를 설화나 전설 속의 허구적 인물로만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사()를 바탕으로 한 제대로 된 이야기가 없다는 현실에 대한 아쉬움과 더불어 학자와 관료 또 암행어사로서의 그를 제대로 알리고 싶다는 바람으로 이 글을 쓰게 되었다고 집필 의도를 밝히고 있다.

박문수()는 조선시대의 문신으로 호는 기은으로 본관은 고령이며 자는 성보, 시호는 충헌이며 구당공 장원의 증손이다.

박문수는 숙종 17년(1691) 9월 8일 진위현 현평대군에서 학자 항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723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관이 되었고, 병조정랑에 올랐다가 노론의 집권으로 삭직되었다. 1727년에 사서로 다시 등용되었고 영남 지방의 암행어사로 나가 부정한 관리들을 적발하여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 주었다. 군정과 세정에 밝아 당시 국정의 개혁 논의에 중요한 몫을 다한 인물이다.

박문수는 지혜가 명석하고 기지가 뛰어나 영조의 신임을 받게 되어 영조 3년 안집어사(使)에 차출되어 곳곳을 두루 돌아 다니며 억울한 백성들의 고통을 살피고 지방관리들의 수탈과 횡포를 뿌리뽑아 명성을 떨쳤다. 박문수는 이처럼 암행어사 직책을 맡았을 때 곳곳을 떠돌며 억울하게 짓밟히는 민권을 옹호하고 구제하기에 힘썼으며 숱한 업적을 남겼다.

양역()의 폐단을 개혁했을 뿐만 아니라 탁지정례()제도를 만들어 국가의 재정을 튼튼히 했고 오로지 고통 받는 백성을 위해 살신성인의 자세로 초지일관 하였다.

옳다고 생각하면 임금 앞에서도 굽히지 않는 강직한 성품으로 인하여 모함을 받고 파직되기도 하였으며 온갖 고초를 겪기도 했다.

박문수가 당시를 비롯하여 지금까지 널리 회자되고 있는 원인 중에 하나는 항상 정의의 편에서 약자를 돕고 진실을 규명했다는데 있을 것이다. 실제로 박문수가 암행어사 임무를 수행했던 기간은 일 년 남짓하다고 한다.

이 책은 전 3권으로 1권은 그동안 우리가 박문수에 대해 많이 들어오던 암행어사로서의 행적을 구전되는 일화나 야사를 중심으로 내용이 이루어져 있고, 2~3권은 지금까지 우리가 거의 접해보지 못했던, 한 시대를 학자 그리고 관료로서 왕에게 직언을 마다않던 곧은 절개를 가진 선비로서의 그의 행적이 사료를 바탕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특히 1권에서는 선인이 등장, 박문수의 재목됨을 알아보고 조부와 아버지의 묘자리 이장 권고와 더불어 과거의 글제를 미리 암시해주고, 그에게 선인도를 익히게 하는 등 그를 도와주는 역할을 하면서 재미와 더불어 박문수의 재기를 두드러지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다.

소년시절의 박문수는 매우 불행했다. 여섯 살 때 조부와 백부가 돌아가시더니 여덟살 때 부친마저 세상을 떠나 어머니 경주 이씨의 손에서 자랐다. 그러다가 외가에 가서 외숙 이태좌의 밑에서 수학() 하였다.

성장할수록 매사에 얽매이지 않고 큰 뜻이 있었으며 친우들의 모임에서도 의기가 뛰어났고 담론이 펄펄 날아서 항상 한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굴복시켰다.

이와 같은 박문수의 재기는 식우지기()라는 단어로 표현되고 있는데, 이는 호랑이 새끼가 아직 자라지 않았어도 충분히 소를 잡아먹을 수 있다는 의미로 기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박문수는 금강산에 올라 허균의 형 허봉이 지은 ‘풍악기사제’를 읊으며, 벼슬길에 나가더라도 당쟁에 휩쓸리지 말고 차라리 그럴 바에는 벼슬길에서 물러나겠다는 뜻과 더불어 진심으로 백성을 위해 일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풍류객이 되겠다는 다짐을 스스로에게 한다.

이와 같은 그의 다짐대로 박문수는 암행어사로 활약하며 위험을 마다않고 억울한 이들의 누명을 벗겨주고 탐관오리의 횡포로부터 백성들의 고단함을 덜어준다.

도깨비 불의 정체를 밝혀 과년한 딸의 혼수비 장만을 위해 마을 사람들의 가벼운 주머니를 털려던 박수무당의 소행에 벌을 준 이야기와, 평소 권진사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던 이가 권진사가 과부가 된 며느리와 못된 행동을 한다는 소문을 내 권진사에게 복수하려던 것을 박문수가 몰래 며느리의 방에 숨어들어 손목을 잡아 보며 며느리의 반응을 살펴보는 방법으로 모든 것이 헛소문임을 밝혀 권진사와 며느리의 억울함을 밝혀주는 이야기 및 어린 신랑의 사인을 규명해 가엽게 죽은 혼을 달래주었다는 이야기, 원한 맺힌 남매의 한을 풀어준 이야기등 책 1권에는 암행어사 시절의 이야기가 신비적 요소와 결합되어 박문수의 인물됨을 중심으로 흥미진진하게 전개되고 있다.

책 2~3권에는 역사적 사건을 중심으로 관료로서의 박문수의 행적을 서술하고 있다. 
영조 4년 청주에서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오명항을 사로도순무사(使)로 박문수를 종사관()으로서 군중어사(使)를 겸하도록 하여 출정시켰다.

이 때 박문수는 기지 넘치는 전략으로 관군의 어려움을 구하고 역적들을 소탕하고 적의 우두머리 이인좌 등을 잡아서 치죄하였다.

안의에서 정희량등이 난을 일으켜 함양,거창을 침범한다는 소문을 듣고 박문수는 계속 진군하기를 권하여 추풍령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가 수십일 동안 끝까지 잔적을 소탕하고 모두 평정하였다.

조정에서는 이 반란을 평정한 사람들에게 공훈을 내렸는데 박문수에게는 분무공신 이등 영성군으로 봉하고 경상도 진무사로 남아서 흩어진 백성들을 불러 모아서 다시 농업에 종사하도록 하였다.

다음해 마침 경상도관찰사 자리가 비어 조정의 논의가 박문수가 아니면 마땅한 사람이 없다고 하여 그 자리에서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그 때 경상도는 소란이 안정되지 않아 마음으로 백성들을 사랑하며 어루만지고 또한 믿게 하니 도내가 크게 다스려졌다.

영조 10년 (1734)국가에서 연경에 사신을 보내야 하는데 사신으로 갈 사람이 없게 되자 박문수로 하여금 가도록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문수는 병이 있어 갈 수 없다고 하자 박문수는 병을 무릅쓰고 일어나 스스로 임금을 뵙고 가기를 청하여 말하기를 ‘신()의 어머니께서 손수 조의()를 입혀주시면서 임금님을 뵙고 가기를 청하라’하셨으니 어머니의 뜻을 편안하게 하여 드림이 효()가 되겠습니다.」하고 진주부사로서 연경에 갔다가 다음해에 돌아왔다. 
이 해 7월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

영조 13년(1737)에 복()을 마치고 품계가 자헌으로 진급되고 병조판서에 임명되었다.

박문수는 군수품을 내는 것으로 병역의 의무를 대신하게 했던 양역제도가 폐단이 심하자 바대파들의 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개혁을 주장하였고, 처음으로 양인()제도를 만들고 정간어린책()을 만들어 부당한 소모를 막으니 군수품이 쌓이어 별도로 창고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관서포 700여필을 청하여 육진()빈민들의 미납 세금을 갚아주고 성천강에 총길이 3,600여장의 뚝을 쌓아서 수해을 물리쳤다. 영조 16년에는(1740) 내직으로 옮기려 하였으나 그 해에 흉년이 들어 농사가 황폐해지자 영남의 곡식을 꾸어오고 관서포도 바꿔서 백성구제에 힘썼다.

영조 21년(1745) 조정의 논의가 무너져 당쟁이 심해지자 임금께서 근심하고 오로지 탕평()에 힘쓰시나 신하들이 잘 받들지 않으니 영성군께서 말씀하시길 「소위 탕평이란 동서남북을 논하지 말고 어질면 구하고 재주가 있으면 등용하여 공정한 마음으로 당()도 없고 치우침도 없어야 되는데 지금의 탕평은 의욕만 채우려고 다투어 얻음과 잃음을 근심하고 두려움을 돌아보는 바가 없으니 나라는 위태하고 구제치 못한다.」하시며 전후 연석에서 여러번 이것을 쓰도록 말하였으나 그때마다 거슬림만 쌓이게 되어, 평소 그의 강직한 성품과 사사로운 이득보다는 백성구제를 위해 실행한 많은 정책들에 대해 불만이 많았던 반대파들의 탄핵을 받고 영조 22년 (1746)에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영조의 간곡한 설득으로 다시 관직에 복귀하여 ‘탁지정례’를 만들어 물정이 편리해지 도록하여 국가의 경비지출에 낭비가 없도록 하는 등, 영조 32년(1756)4월 24일 취현방 집에서 66세로 파란많은 생애를 마칠 때가지 나라와 백성의 안위를 위해 혼신을 다하였다.

박문수의 부음()을 듣고 조정이나 시장은 문을 닫았으며 사대부와 모든 사람들이 서로 상심하며 말하기를 「나라에 급한 일이 있으면 장차 누구를 믿겠는가?」라고 위로하였고, 영남의 선비들과 부녀자들은 방아와 베짜기를 멈추고 통곡하였으며 함경도민들은 함흥 만세교에 모여 통곡하였다고 한다.

영조는 「자고로 군신간에 마음을 알아줌이 어찌 나와 영성같은 사이가 있겠는가? 영성이 이미 죽었으니 누가 내 마음을 알아주겠는가? 정승을 시키려고 한지가 오래이나 시속()이 반드시 기뻐하지 않기 때문에 이루지 못했다.」하시고 특별증적으로 대광보국승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영성부원군에 추증하고 부조를 명하였으며 부대시장으로 시호를 충헌이라 내려주며, 친히 제문을 지으시고 제관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셨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헌()이다.

어사 박문수. 御秀.
작가 노성산인()에 대해 알려진 정보가 없으며, 단행본 정보를 찾을 수 없다. 
134회 연재분 끝에 ‘상권 종’이라고 표기되어 있으나 이후 더 이상 연재되지 않았다. 
1927년 12월 16일(131회) 이후 며칠 연재가 중단되었다가 1927년 12월 28일(132회)부터 다시 연재가 시작되었다. 
암행어사 박문수가 전국을 다니며 각 지방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해결하고 착한 이에게는 상을 주고, 악한 이에게는 벌을 내린다는 내용이다.

내용

박문수는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가난하게 자랐으나 누구보다 의협심과 동정심이 많은 소년이다. 
어엿한 선비가 된 문수는 경종 3년 증광문과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오른다. 
그는 경종이 승하한 뒤 왕위에 오른 영조로부터 큰 신임을 얻는다. 
영조는 민생을 꼼꼼히 살피기를 원하는 마음에 그를 암행어사에 봉하고 전국을 시찰할 것을 명한다. 이후 박 어사는 전국 방방곡곡을 순회하며 다양한 경험을 한다.

욕정에 눈이 먼 중이 어느 대감 집 며느리를 겁탈하려다 살해한 사건, 다른 남자와 간통을 한 여인이 남편을 죽인 사건, 외간남자와 바람이 난 아낙이 돈을 훔치고 이를 엉뚱한 사람에게 덮어씌운 사건 등 박 어사는 각 지방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고 진범을 찾는 데 온 힘을 기울인다. 
전국을 다니며 사건을 해결하고 돌아온 박 어사는 임금으로부터 포상을 받고 큰 신임을 얻는다. 
이후 박 어사는 세자 책봉 문제로 고민하는 임금에게 묘안을 내어 중국의 간섭을 물리치고 문제를 해결하는 등 혁혁한 공을 세운다.

박학다식한 어사 박문수는 영남 어사로 파견되어 수완을 발휘한다. 훗날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을 때에도 영남지방에서 대활약을 펼치며 영조의 총애를 받는다. 
무엇보다 백성 편에 서기를 좋아했던 그는 조선시대에서 가장 유명한 암행어사로 입에 오른다.

1727년, 영조 3년이 되는 해에 임금님이 신하들에게 말했습니다.
"지금 영남 지방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크게 고통받고 있으니 사리에 밝고 기지가 뛰어난 자를 어사로 뽑아 내려보내도록 하라. 
경들 생각에는 누가 좋겠는가?"
그러자 신하들은 모두 입을 모아 박문수를 추천했습니다.
"박문수? 그는 지방의 일에 대한 경험이 없지 않느냐?"
임금은 말했습니다.
"박문수가 비록 경험이 없긴 하오나 맡은 일을 처리하는 솜씨가 몹시 뛰어나고 사리에 두루 통달하옵니다."
신하들이 다시 아뢰자 영조 임금은 반신반의하면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경들의 생각이 그러하다면 박문수를 어사로 삼도록 하라."
이렇게 해서 영남 어사가 된 박문수는 영남 지방으로 떠나기 전, 임금 앞에 찾아와 이렇게 아뢰었습니다.
"백성들을 못살게 굴고 제 잇속만 챙기는 탐관오리들을 찾아낸다 해도 처벌이 엄하지 않다면 계속해서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러니 보다 엄하게 벌을 내릴 수 있도록 하소서. 또한 경주와 몇몇 고을은 토지의 측량이 잘못된 것 같사오니 그런 고을도 둘러볼 수 있도록 허락하소서."
박문수의 말은 조사해야 할 고을의 범위를 더 넓게 해달라는 것과 수령들의 잘못을 가볍게 넘기지 않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이것은 어사의 임무를 보다 적극적으로 하겠다는 표시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의지가 남다르다는 것을 안 영조 임금은 박문수의 청을 모두 들어주었습니다.
임금께 절을 하고 궁궐을 떠난 박문수는 곧장 영남 지방을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조선을 대표하게 될 가장 유명한 어사 박문수의 파란만장한 일대기가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박문수.
여덟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란 그는 유난히 활달하고 총명한 아이였습니다. 
글공부를 할 때면 어른 못지 않게 진지했고, 동무들과 함께 놀 때면 여느 아이들보다 더 활기차게 뛰어다녔습니다. 
몸과 마음을 두루두루 단련시키며 박문수는 차츰 강하고 똑똑한 소년으로 성장했습니다.
경종 임금 3년 해인 1723년, 과거에 장원 급제한 박문수는 드디어 벼슬길에 올라 자기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조 임금이 즉위하던 해에 박문수는 당파 싸움에 밀려 벼슬에서 밀려나고 말았습니다.
이후 3년 뒤인 1727년에 다시 벼슬을 얻기까지 박문수는 못다 한 글공부와 더불어 백성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자세히 관찰하며 차근차근 앞날을 준비해왔던 것입니다.

찢어지고 누렇게 색이 바랜 옷을 입고 다 떨어진 갓을 쓴 채 거지 선비처럼 변장을 한 박문수는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목적지로 향했습니다.
고을 구석구석을 다니며 백성들의 살림살이를 관찰하고, 때로 이 사람 저 사람 만나 직접 조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암행어사들이 고을을 제대로 조사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백성들은 고을 수령이나 향리들이 무서워 사실을 제대로 말하지 않기도 했고, 관아에서 훼방을 놓기 위해 사람을 풀기도 했던 것입니다. 
한 두 사람의 말이나 뜬소문만 믿어서는 절대로 임무를 완수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박문수는 그 누구보다 아는 것이 많고 보는 눈이 예리한 어사였습니다. 
무엇이 핵심인지 정확하게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대체로 수령의 능력을 한 눈에 알아보려면 아전들의 세력이 어느 정도인지 먼저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경상북도 자인현()의 수령인 남국한()과 대구 판관 윤숙(), 그리고 울산 부사 이만유() 등은 한 고을을 다스리기에는 자격이 너무도 불충분했습니다. 
수령으로서의 지식이 모자라거나 성격이 너무 나약했으며 술과 놀이를 지나치게 즐겼습니다. 
수령이 나약하고 어리석으면 아전들의 기세가 등등해지기 마련이어서 고을의 정사가 제멋대로 굴러가곤 했습니다.

박문수는 자격 없는 수령들의 이름과 그 이유를 일일이 기록해 두었습니다. 
백성들을 괴롭히는 묵은 제도와 그 잘못 또한 자세히 기록했습니다.
영남 지방에서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박문수는 듣고 보고 조사했던 모든 일들을 영조 임금에게 낱낱이 보고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은 비단 영남 지방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닐 듯 하옵니다. 
호남 지방에도 분명 이러한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하고 덧붙였습니다.
그 말은 폐단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그리고 언제든지 출동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한참동안 보고를 받은 영조 임금은 박문수의 적극적인 성격과 예리한 판단력, 그리고 풍부한 지식을 높이 사게 되었습니다.

이듬해인 1728년, 조선에는 이인좌의 난(이인좌는 권력에서 소외되자 난을 일으켰는데, 청주를 점령하기도 하였지요. 
나라 안이 떠들썩했답니다)이 일어나 나라 안에서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이때 박문수는 병조판서 오명항을 보좌하는 종사관에 임명되어 싸움터로 나갔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들고일어난 이인좌의 군대는 맹렬한 기세로 치고 올라왔지만 결국 관군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 무렵 오명항과 함께 청주에 머물고 있던 박문수는 영남 지방에 남아있던 반란 세력이 도적으로 변해 활개를 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곧장 추풍령을 넘어 영남으로 진격하라!"
오명항이 군사들에게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추풍령 고개 앞에서 오명항은 잠시 행군을 멈춰야 했습니다. 
길이 몹시 험하고 숲이 우거져 언제 어디서 적이 나타날 지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때 박문수가 나섰습니다.
"제가 먼저 달려가 적의 소굴을 치겠습니다. 
100명의 병사를 끌고 가겠습니다."
"고작 100명으로 적진을 치겠다고?"
오명항이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저는 일전에 암행어사로서 이 지방을 샅샅이 뒤진 바가 있습니다. 
적들이 어디쯤 매복해 있는지, 지름길이 어디로 나 있는지 잘 알고 있으니 저를 믿어보십시오."
박문수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오명항은 박문수에게 정예 병사 100명을 지휘하게 했습니다. 
박문수는 출발하기 전에 다시 한번 다짐을 했습니다.
"적진은 안음 고을입니다. 
그 앞에는 선산진이 막혀 있고 상주가 또 선산의 뒤에 있습니다. 
적들은 이 두 진을 깨뜨리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이 길로 곧장 조령을 넘어 안동에서 병력을 보충한 뒤 적진으로 향하겠습니다."
오명항은 깜짝 놀랐습니다. 
언제나 자기 옆에서 조용히 따라다니기만 하던 박문수의 입에서 순식간에 작전 계획이며 적진에 관한 정보가 술술 쏟아져 나왔던 것입니다.
이후 박문수의 활약으로 도적들은 모두 흩어지고 난리도 잠잠해졌습니다. 
난리를 치른 각 고을은 몹시 혼란스러웠습니다.

"자네는 이 지방을 잘 알고 있으니 남아서 백성들을 안심시키게."
오명항은 믿음직한 박문수에게 뒷일을 맡기기로 했습니다.

비록 난리는 다 끝났지만 영남의 네 고을은 마치 유령의 마을처럼 조용했습니다. 
백성들이 모두 산골짜기로 도망쳤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지못해 반란군 편에 섰던 그들은 벌받을 것이 두려워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혼자 남은 박문수는 말을 타고 이 고을 저 고을 쉴새없이 찾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박문수에게는 크고 작은 위험이 끝없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숲에 숨어 있는 적들에게 언제 공격을 받을 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박문수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혼자 숲 속으로 들어가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내 말을 잘 들으시오! 이제 난리는 다 끝났으니 안심하고 내려오시오. 
당신들은 협박을 받아 잠시 도적이 되었을 뿐이니 모두 용서받을 것이오."
처음에는 이 말을 믿는 자가 없었지만 차츰 한 두 사람씩 산을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박문수는 그들에게 농사지을 양식을 나누어주며 일일이 안심시켰습니다. 
그 뒤로 산 속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떼지어 몰려나왔습니다.
이때 누군가 박문수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으리, 아직 위험이 다 가시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혼자 다니시면 위험합니다. 
그러니 호위 병사들을 거느리시는 게 좋을 듯 합니다."

박문수는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병사들을 거느리고 다녔다면 저들이 내 말을 과연 믿었을까? 지금 내가 하는 일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백성들을 안심시키는 일이다. 
내가 먼저 아무 두려움이 없다는 것을 보여야 저들이 믿게 될 것이다. 
비록 언제 어떤 일을 당할지는 모르지만 나라를 위해 한 번 죽는 것이 뭐가 두렵겠는가?"

그 말은 입에서 입으로 퍼져 마침내 산 속에 있던 주민들이 모두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아주 짧은 시간에 영남의 네 고을은 다시 활기차게 복구되었습니다.
박문수의 활약은 영조 임금의 귀에도 전해졌습니다.

"참으로 든든한 신하로다."

영조 임금은 박문수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경상도 감사라는 벼슬을 내려주었습니다. 
박문수는 분무공신() 2등으로 영성군()에 봉해졌습니다. 
3년 뒤인 1731년, 박문수는 다시 암행어사가 되어 이번에는 호서 지방을 순찰하게 되었습니다.

앉아서 소문이나 문서 따위만으로 조사하기보다는 직접 몸으로 부딪혀 가며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듣는 성격인 박문수는 이번에도 맹활약을 펼쳤습니다.

그 무렵, 흉년을 맞아 열 집에 아홉 집 가량은 양식이 다 떨어져 모두들 굶주리는 형편이었습니다. 
공주 고을은 굶어죽는 사람이 다른 고을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관아에서 나누어줄 곡식도 바닥이 났으니 정말 큰일이다."

박문수는 보다 못해 호서에 있는 자기 창고에서 곡식을 꺼내어 공주로 옮겨왔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모두 나누어주었습니다. 
사실 그 정도 분량으로 굶주린 백성들을 다 먹일 수는 없었습니다. 박문수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노린 것은 고을의 사대부들이나 부자들의 행동이었습니다. 
어사가 스스로 자기 창고를 열어 백성들을 먹이는 판국이니 그 고을의 부자들이며 양반들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 고을의 사대부들이 개인 창고를 열기 시작했습니다.

박문수는 어사로서 두 차례 순찰을 나간 뒤에도 수많은 벼슬을 거쳤습니다.  
그의 주된 관심은 언제나 '백성들의 안정된 생활'이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세금에 관한 상소를 많이 하기로 유명했습니다. 
백성들로부터 거둬들인 세금이 양반들의 주머니나 채울 뿐 나라와 백성들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제도를 바꿀 것을 건의하였던 것입니다.
이후에도 박문수는 함경도 진휼사로 나가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제하기도 하고, 당파 싸움의 근원지인 안동서원을 없애고, 양역의 폐단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양반보다는 백성 편에 서서 건의를 하니 여러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박문수가 두 차례의 유배 생활을 하게된 것도 이러한 반대와 미움 때문이었지만 정작 본인은 자기 뜻을 끝까지 굽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두 차례의 유배 생활을 통해서 박문수는 백성들의 현실에 더욱 가깝게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백성들 사이에서는 언제부터인가 어사 박문수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 둘씩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어사로서 활동한 것은 두 차례의 짧은 기간밖에 안 되었지만 이야기 속의 박문수는 조선 팔도를 종횡무진하며 활약하는 정의의 사도로 등장했습니다.

백성들은 박문수를 내세워 모든 암행어사들의 본보기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후 33년 동안 영조 임금 곁에서 수많은 활약을 펼친 박문수는 그의 나이 65세 되던 해에 병이 들어 자리에 눕고 말았습니다.
영조 임금은 친히 어의()를 보내 치료하도록 했지만 박문수는 끝내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누구보다 슬퍼했던 것은 영조 임금이었습니다.

"아! 그가 나를 섬긴 것이 이제 이미 33년이다. 
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영성( ; 박문수를 말함)뿐이었고, 영성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나였다. 
그가 언제나 나라를 위하는 충성이 깊었음을 나는 알고 있다.

이제 그가 떠났으니 이 슬픔을 무엇에 비유할 수 있으랴?"
영조 임금은 그에게 충헌()이라는 시호와 더불어 영의정 벼슬을 내려주었습니다.

영조 임금이 그토록 총애했던 신하 박문수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이름이 수백 년이 넘도록 백성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모든 어사를 대표하는 조선의 암행어사 박문수로 다시 태어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2018년 4월 2일 월요일

낙산사 . 洛山寺.

해수관음의 성지, 양양 낙산사.洛寺.

 관세음보살이 머무른다는 낙산(오봉산)에 있는 사찰로, 671년(신라 문무왕 11) 의상()이 창건하였다. 

858년(헌안왕 2) 범일()이 중건()한 이후 몇 차례 다시 세웠으나 6·25전쟁으로 소실되었다. 
전쟁으로 소실된 건물들은 1953년에 다시 지었다. 
3대 관음기도도량 가운데 하나이며, 관동팔경()의 하나로 유명하다. 
경내에는 조선 세조() 때 다시 세운 7층석탑을 비롯하여 원통보전(殿)과 그것을 에워싸고 있는 담장 및 홍예문() 등이 남아 있다. 
2005년 4월 6일에 일어난 큰 산불로 대부분의 전각은 소실되었다.

원통보전 내부에는 관세음보살상이 안치되어 있다.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량을 복구한 후 이곳으로부터 약 8km 떨어진 설악산 관모봉 영혈사()에서 옮겨 왔다고 한다. 
제작 시기는 12세기 초로 추측되는데, 고려시대 문화의 극성기 양식을 나타낸 매우 아름다운 관음상이다. 

이 절의 창건과 관련하여 전하는 이야기가 있다. 
의상이 관음보살을 만나기 위하여 낙산사 동쪽 벼랑에서 27일 동안 기도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여 바다에 투신하려 하였다. 
이때 바닷가 굴 속에서 희미하게 관음보살이 나타나 여의주와 수정염주()를 건네주면서, "나의 전신()은 볼 수 없으나 산 위로 수백 걸음 올라가면 두 그루의 대나무가 있을 터이니 그곳으로 가보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는데 그곳이 바로 원통보전의 자리라고 한다. 
부속건물로 의상대(), 홍련암() 등이 있고 이 일대가 사적 제495호로 지정되어 있다. 
2005년 4월 5일 강원도 삼척, 강릉, 고성을 휩쓴 큰 산불이 일어나 낙산사 원통보전과 여러채의 전각이 소실되고 보물 제479호로 지정된 낙산사 동종이 화마에 녹아버렸다.

동해를 바라보며 기원의 빛을 보내는 해수 사찰이자 관음사찰로 명성 높은 낙산사는 2005년 고성과 양양 지역을 휩쓴 대화재로 천 년의 기록들이 재로 변하였다. 
사찰 경내의 모든 목조건물을 한순간에 잿더미로 만들어 버린 화마의 위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어서 500년 역사의 낙산사 동종을 녹여낼 정도였다. 
원통보전과 무설전 등 수많은 사람들의 기원을 담고 마음을 다독이던 장소들이 타오르는 불길 속에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모든 사람들의 마음 또한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1,300년 전 의상대사가 관세음보살의 진신사리를 모셔 만들었다는 사찰은 관동지방의 절경으로 이름난 오봉산 자락에 자리 잡고 푸른 동해 바다를 바라보는 모습으로 유명하다. 
진실한 사람들의 소망과 기원을 받아준다는 관세음보살의 신통함으로 우리나라 최고의 기원 사찰로도 이름 높다. 
소나무의 숲으로 싸여 있던 사찰은 화재로 벌거벗고 나무들도 사라졌지만 검게 탄 그루터기만이 남은 자리에는 새록새록 푸른 생명들이 새로운 희망을 간직하며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거친 화마에도 자리를 지킨 해수관음상은 높이 16m의 화강암 재질로 낙산사의 가장 높은 곳에서 동해 바다를 내려다 보며 사람들의 마음을 달랜다.

동해 일출과 멋지게 어울리는 의상대는 여전히 아름답다. 
바닷길 따라 절벽 위로 자리하는 건축물은 홍련암이다. 
의상대사가 동굴에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바다에서 솟아오르는 붉은 연꽃을 담았다는 암자는 바닥으로 뚫린 구멍으로 낭떠러지 아래 동해 바다를 볼 수 있는 신비함이 있다. 
화마의 피해를 입지 않은 보타전을 중심으로 낙산사의 복원은 신중하게 진행되고 있다. 
성급한 옛 모습 찾기가 아닌 조선 시대의 번창하였던 모습으로 새로운 사찰을 세우듯 진행된다고 하니 더욱 기대가 크다. 
다급한 화재 속에서 원통보전 내부의 건칠관세음보살을 옮겨 보전하였던 깊은 불심으로 부처님과 사람들의 마음을 채우는 터전이 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이다.

신선이 노닐고 구름이 쉬어가는 곳, 강원도. 지난겨울 막바지에 너무 많은 눈구름이 쉬어갔다. 끝없이 내리는 눈은 자연재해가 되어 강원도에 큰 피해를 입혔다. 지난 2005년, 강풍을 타고 넘어온 산불이 낙산사를 덮쳤다. 아이러니하게도 4월 5일 식목일이었다. 
산불로 인해 낙산사는 전소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원통보전이 불타고, 보물로 지정된 조선시대 동종이 녹아내리는 모습을 보며 차마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지난해 11월 8년여에 걸친 낙산사 복원이 마무리되었다. 불심으로 다시 일어난 낙산사는 해수관음의 성지로서 면모가 여전하다. 
새롭게 복원된 낙산사의 모습을 찾아가 본다.

통일신라 위기 때 나타난 관음보살
낙산사 창건 전, 당나라 유학을 중단하고 신라로 돌아온 의상대사는 걱정이 많았다. 그는 당나라의 침입을 예감하고 있었고, 삼국통일에 반감을 품은 귀족의 반란 징후가 곳곳에 나타났으며, 문무왕은 불안해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내부적 단합이 중요하던 그때, 의상대사는 강원도 양양에 관음보살이 머물고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된다. 
관음보살은 중생의 괴로움을 구제하는 보살이기에 의상대사는 바로 양양으로 향했다. 
홍련암 아래 관음굴에서 21일 동안 기도한 그는 마침내 관음보살을 만날 수 있었다. 
관음보살은 대나무가 쌍으로 돋아날 것이니, 그곳에 불전을 짓는 것이 마땅하리라고 전했다. 
대나무가 돋아난 곳에 의상대사는 원통보전을 세웠다. 
낙산사 전각 중 원통보전과 홍련암을 대표적 전각으로 꼽는 이유다.

낙산사의 원통보전

낙산사 복원에는 문화재청과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전문가가 참여했다. 
원통보전의 복원에는 양양에서 자란 소나무를 사용했다. 
조선 초기 다포식 양식인 원통보전은 팔작지붕에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중앙 법당다운 안정감과 장엄한 기운을 지녔다. 
원통보전에 다가설수록 색감은 생생해지고 단청의 화려함은 섬세해지는데,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모를 정도다. 
서까래만 봐도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가늠할 수 있다.


원통보전 가까이 건칠관음보살좌상(보물 제1362호), 칠층석탑(보물 제499호), 담장(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4호) 등 문화재가 모여 있다. 
건칠관음보살좌상은 원통보전 내부에 있다. 고려 후반 전통 양식을 띤 이 불상은 조선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지금까지도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중요한 문화재이다. 
온화한 표정, 가냘픈 손가락, 섬세한 옷 주름 등 섬세한 묘사가 돋보인다.

원통보전 정면으로 칠층석탑이 있다. 
이 탑은 창건 당시 3층이던 것을 세조 13년(1467)에 이르러 7층으로 높였다. 
부분적으로 손상됐으나 탑 꼭대기에 있는 쇠붙이까지 원형 그대로 남아 있으며, 기단부에서 투박한 겹연꽃 무늬를 볼 수 있다.

원통보전 담장은 조선시대 세조가 낙산사를 중창할 때 쌓은 것으로 전해진다. 
기와와 흙을 차례로 쌓고 곳곳에 원형 단면의 화강암을 넣었다. 
조선시대 사찰의 대표적인 담장으로 평가받는다. 
담장 주위엔 창건 설화에 등장하는 대나무가 자란다. 
홍예문에서 원통보전으로 이어지는 동선은 오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여느 고찰의 분위기와 사뭇 다르다. 
마치 세조가 다녀간 뒤 중수 직후의 모습이 지금 같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선명함과 생생함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낙산사.해수관음상·의상대·홍련암

원통보전에서 해수관음상으로 향하면 낙산사의 또 다른 매력이 기다린다. 
해수관음상에서 의상대를 지나 홍련암에 이르는 구간이다. 
도보로 약 20분 거리지만 고개만 돌리면 낙산사와 자연이 빚어내는 조화가 걸음을 멈추게 한다.

해수관음상은 높이 15m, 둘레 3m 정도의 거대 불상으로, 불상 조각의 일인자인 권정학 씨가 조각했다. 
크기만큼 공사 기간도 상당한데, 1971년부터 다듬기 시작해 6년 6개월 만에 완성했다. 
바다를 등지고 불상을 바라보면 관음보살이 백두대간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는 듯하다. 
그 시선을 따라 다음 목적지인 의상대와 홍련암으로 향한다.


의상대와 홍련암 일대는 따로 명승 제27호로 지정됐다. 
주변 해안이 독특하고 경관이 아름답기도 하지만, 의상대사의 전설이 깃든 곳이기 때문이다. 
홍련암은 의상대사가 붉은 연꽃 속 관음보살을 봤다고 해서 유래한 이름이다. 
암자는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지붕의 앞뒤가 각각 형식이 다른 것이 특징이다. 
불전에 앉으면 관음굴에서 치는 파도소리가 바닥을 울리며 몸으로 전해진다.


의상대 또한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을 만난 해안 절벽 위에 지었다고 전해진다. 
지금의 의상대는 1925년 만해 한용운이 낙산사에서 머물면서 해돋이를 보기 위해 복원한 것이라 전해진다.

이곳에서 조선시대 문신 정철은 해돋이를 보며 "새벽같이 일어나 보니 상운이 짙어 육룡이라도 일듯, 마침내 해가 뜨니 만국이 움직이고 천중에 치뜨니 호발을 헬 듯하다"고 묘사했다.

낙산사의 역사..


의상대에서 약 200m거리에 의상전시관이 있다. 
의상대사와 낙산사에 얽힌 이야기를 다양한 전시품으로 접할 수 있으며, 2005년 낙산사 화재 관련 자료도 볼 수 있다. 
홍예문에서 출구 방향으로 약 40m 떨어진 낙산사화재자료전시장에도 화재 관련 자료를 전시해놓았다. 
복원 과정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물과 불에 탄 기와로 쌓은 탑, 화재 후의 흔적을 그대로 재현한 전시를 통해 경각심을 느끼게 된다.
홍예문 안쪽, 낙산배 시조목도 눈여겨볼 만하다. 
배나무 한 그루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 모양새가 특이하다. 
기록에 따르면, 조선시대 진상품으로 재래종 황실배가 낙산사 주변에서 재배됐다고 한다. 
이에 배 품종의 하나인 장십랑을 1915년 주지스님이 도내에 재배하기 시작하면서 낙산배의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 그 시조가 되는 배나무 가지에 벌써 물이 올라 옅은 녹색이 감돈다.

의상전시관에서 가까운 계단에 "길에서 길을 묻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선택을 두고 갈림길이라 말하지 않던가. 충전이 필요할 때, 심신이 지쳤을 때, 낙산사 템플스테이는 좋은 쉼표가 된다. 프로그램은 휴식형과 체험형으로 나뉘며, 외국인도 신청할 수 있다. 
낙산사는 입장객에게 무료로 공양국수를 대접한다. 
공양시간은 오전 11시 30분부터 오후 1시 30분까지. 낙산사 탐방 중 출출함을 해결할 수 있으니 참고하시라. 가는 길, 곧 봄기운을 내뿜을 강원도를 만나고 싶다면 홍천에서 오색령을 지나 양양에 이르는 44번 국도가 제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