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2일 월요일

낙산사 . 洛山寺.

해수관음의 성지, 양양 낙산사.洛寺.

 관세음보살이 머무른다는 낙산(오봉산)에 있는 사찰로, 671년(신라 문무왕 11) 의상()이 창건하였다. 

858년(헌안왕 2) 범일()이 중건()한 이후 몇 차례 다시 세웠으나 6·25전쟁으로 소실되었다. 
전쟁으로 소실된 건물들은 1953년에 다시 지었다. 
3대 관음기도도량 가운데 하나이며, 관동팔경()의 하나로 유명하다. 
경내에는 조선 세조() 때 다시 세운 7층석탑을 비롯하여 원통보전(殿)과 그것을 에워싸고 있는 담장 및 홍예문() 등이 남아 있다. 
2005년 4월 6일에 일어난 큰 산불로 대부분의 전각은 소실되었다.

원통보전 내부에는 관세음보살상이 안치되어 있다.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량을 복구한 후 이곳으로부터 약 8km 떨어진 설악산 관모봉 영혈사()에서 옮겨 왔다고 한다. 
제작 시기는 12세기 초로 추측되는데, 고려시대 문화의 극성기 양식을 나타낸 매우 아름다운 관음상이다. 

이 절의 창건과 관련하여 전하는 이야기가 있다. 
의상이 관음보살을 만나기 위하여 낙산사 동쪽 벼랑에서 27일 동안 기도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여 바다에 투신하려 하였다. 
이때 바닷가 굴 속에서 희미하게 관음보살이 나타나 여의주와 수정염주()를 건네주면서, "나의 전신()은 볼 수 없으나 산 위로 수백 걸음 올라가면 두 그루의 대나무가 있을 터이니 그곳으로 가보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는데 그곳이 바로 원통보전의 자리라고 한다. 
부속건물로 의상대(), 홍련암() 등이 있고 이 일대가 사적 제495호로 지정되어 있다. 
2005년 4월 5일 강원도 삼척, 강릉, 고성을 휩쓴 큰 산불이 일어나 낙산사 원통보전과 여러채의 전각이 소실되고 보물 제479호로 지정된 낙산사 동종이 화마에 녹아버렸다.

동해를 바라보며 기원의 빛을 보내는 해수 사찰이자 관음사찰로 명성 높은 낙산사는 2005년 고성과 양양 지역을 휩쓴 대화재로 천 년의 기록들이 재로 변하였다. 
사찰 경내의 모든 목조건물을 한순간에 잿더미로 만들어 버린 화마의 위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어서 500년 역사의 낙산사 동종을 녹여낼 정도였다. 
원통보전과 무설전 등 수많은 사람들의 기원을 담고 마음을 다독이던 장소들이 타오르는 불길 속에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모든 사람들의 마음 또한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1,300년 전 의상대사가 관세음보살의 진신사리를 모셔 만들었다는 사찰은 관동지방의 절경으로 이름난 오봉산 자락에 자리 잡고 푸른 동해 바다를 바라보는 모습으로 유명하다. 
진실한 사람들의 소망과 기원을 받아준다는 관세음보살의 신통함으로 우리나라 최고의 기원 사찰로도 이름 높다. 
소나무의 숲으로 싸여 있던 사찰은 화재로 벌거벗고 나무들도 사라졌지만 검게 탄 그루터기만이 남은 자리에는 새록새록 푸른 생명들이 새로운 희망을 간직하며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거친 화마에도 자리를 지킨 해수관음상은 높이 16m의 화강암 재질로 낙산사의 가장 높은 곳에서 동해 바다를 내려다 보며 사람들의 마음을 달랜다.

동해 일출과 멋지게 어울리는 의상대는 여전히 아름답다. 
바닷길 따라 절벽 위로 자리하는 건축물은 홍련암이다. 
의상대사가 동굴에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바다에서 솟아오르는 붉은 연꽃을 담았다는 암자는 바닥으로 뚫린 구멍으로 낭떠러지 아래 동해 바다를 볼 수 있는 신비함이 있다. 
화마의 피해를 입지 않은 보타전을 중심으로 낙산사의 복원은 신중하게 진행되고 있다. 
성급한 옛 모습 찾기가 아닌 조선 시대의 번창하였던 모습으로 새로운 사찰을 세우듯 진행된다고 하니 더욱 기대가 크다. 
다급한 화재 속에서 원통보전 내부의 건칠관세음보살을 옮겨 보전하였던 깊은 불심으로 부처님과 사람들의 마음을 채우는 터전이 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이다.

신선이 노닐고 구름이 쉬어가는 곳, 강원도. 지난겨울 막바지에 너무 많은 눈구름이 쉬어갔다. 끝없이 내리는 눈은 자연재해가 되어 강원도에 큰 피해를 입혔다. 지난 2005년, 강풍을 타고 넘어온 산불이 낙산사를 덮쳤다. 아이러니하게도 4월 5일 식목일이었다. 
산불로 인해 낙산사는 전소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원통보전이 불타고, 보물로 지정된 조선시대 동종이 녹아내리는 모습을 보며 차마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지난해 11월 8년여에 걸친 낙산사 복원이 마무리되었다. 불심으로 다시 일어난 낙산사는 해수관음의 성지로서 면모가 여전하다. 
새롭게 복원된 낙산사의 모습을 찾아가 본다.

통일신라 위기 때 나타난 관음보살
낙산사 창건 전, 당나라 유학을 중단하고 신라로 돌아온 의상대사는 걱정이 많았다. 그는 당나라의 침입을 예감하고 있었고, 삼국통일에 반감을 품은 귀족의 반란 징후가 곳곳에 나타났으며, 문무왕은 불안해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내부적 단합이 중요하던 그때, 의상대사는 강원도 양양에 관음보살이 머물고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된다. 
관음보살은 중생의 괴로움을 구제하는 보살이기에 의상대사는 바로 양양으로 향했다. 
홍련암 아래 관음굴에서 21일 동안 기도한 그는 마침내 관음보살을 만날 수 있었다. 
관음보살은 대나무가 쌍으로 돋아날 것이니, 그곳에 불전을 짓는 것이 마땅하리라고 전했다. 
대나무가 돋아난 곳에 의상대사는 원통보전을 세웠다. 
낙산사 전각 중 원통보전과 홍련암을 대표적 전각으로 꼽는 이유다.

낙산사의 원통보전

낙산사 복원에는 문화재청과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전문가가 참여했다. 
원통보전의 복원에는 양양에서 자란 소나무를 사용했다. 
조선 초기 다포식 양식인 원통보전은 팔작지붕에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중앙 법당다운 안정감과 장엄한 기운을 지녔다. 
원통보전에 다가설수록 색감은 생생해지고 단청의 화려함은 섬세해지는데,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모를 정도다. 
서까래만 봐도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가늠할 수 있다.


원통보전 가까이 건칠관음보살좌상(보물 제1362호), 칠층석탑(보물 제499호), 담장(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4호) 등 문화재가 모여 있다. 
건칠관음보살좌상은 원통보전 내부에 있다. 고려 후반 전통 양식을 띤 이 불상은 조선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지금까지도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중요한 문화재이다. 
온화한 표정, 가냘픈 손가락, 섬세한 옷 주름 등 섬세한 묘사가 돋보인다.

원통보전 정면으로 칠층석탑이 있다. 
이 탑은 창건 당시 3층이던 것을 세조 13년(1467)에 이르러 7층으로 높였다. 
부분적으로 손상됐으나 탑 꼭대기에 있는 쇠붙이까지 원형 그대로 남아 있으며, 기단부에서 투박한 겹연꽃 무늬를 볼 수 있다.

원통보전 담장은 조선시대 세조가 낙산사를 중창할 때 쌓은 것으로 전해진다. 
기와와 흙을 차례로 쌓고 곳곳에 원형 단면의 화강암을 넣었다. 
조선시대 사찰의 대표적인 담장으로 평가받는다. 
담장 주위엔 창건 설화에 등장하는 대나무가 자란다. 
홍예문에서 원통보전으로 이어지는 동선은 오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여느 고찰의 분위기와 사뭇 다르다. 
마치 세조가 다녀간 뒤 중수 직후의 모습이 지금 같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선명함과 생생함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낙산사.해수관음상·의상대·홍련암

원통보전에서 해수관음상으로 향하면 낙산사의 또 다른 매력이 기다린다. 
해수관음상에서 의상대를 지나 홍련암에 이르는 구간이다. 
도보로 약 20분 거리지만 고개만 돌리면 낙산사와 자연이 빚어내는 조화가 걸음을 멈추게 한다.

해수관음상은 높이 15m, 둘레 3m 정도의 거대 불상으로, 불상 조각의 일인자인 권정학 씨가 조각했다. 
크기만큼 공사 기간도 상당한데, 1971년부터 다듬기 시작해 6년 6개월 만에 완성했다. 
바다를 등지고 불상을 바라보면 관음보살이 백두대간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는 듯하다. 
그 시선을 따라 다음 목적지인 의상대와 홍련암으로 향한다.


의상대와 홍련암 일대는 따로 명승 제27호로 지정됐다. 
주변 해안이 독특하고 경관이 아름답기도 하지만, 의상대사의 전설이 깃든 곳이기 때문이다. 
홍련암은 의상대사가 붉은 연꽃 속 관음보살을 봤다고 해서 유래한 이름이다. 
암자는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지붕의 앞뒤가 각각 형식이 다른 것이 특징이다. 
불전에 앉으면 관음굴에서 치는 파도소리가 바닥을 울리며 몸으로 전해진다.


의상대 또한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을 만난 해안 절벽 위에 지었다고 전해진다. 
지금의 의상대는 1925년 만해 한용운이 낙산사에서 머물면서 해돋이를 보기 위해 복원한 것이라 전해진다.

이곳에서 조선시대 문신 정철은 해돋이를 보며 "새벽같이 일어나 보니 상운이 짙어 육룡이라도 일듯, 마침내 해가 뜨니 만국이 움직이고 천중에 치뜨니 호발을 헬 듯하다"고 묘사했다.

낙산사의 역사..


의상대에서 약 200m거리에 의상전시관이 있다. 
의상대사와 낙산사에 얽힌 이야기를 다양한 전시품으로 접할 수 있으며, 2005년 낙산사 화재 관련 자료도 볼 수 있다. 
홍예문에서 출구 방향으로 약 40m 떨어진 낙산사화재자료전시장에도 화재 관련 자료를 전시해놓았다. 
복원 과정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물과 불에 탄 기와로 쌓은 탑, 화재 후의 흔적을 그대로 재현한 전시를 통해 경각심을 느끼게 된다.
홍예문 안쪽, 낙산배 시조목도 눈여겨볼 만하다. 
배나무 한 그루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 모양새가 특이하다. 
기록에 따르면, 조선시대 진상품으로 재래종 황실배가 낙산사 주변에서 재배됐다고 한다. 
이에 배 품종의 하나인 장십랑을 1915년 주지스님이 도내에 재배하기 시작하면서 낙산배의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 그 시조가 되는 배나무 가지에 벌써 물이 올라 옅은 녹색이 감돈다.

의상전시관에서 가까운 계단에 "길에서 길을 묻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선택을 두고 갈림길이라 말하지 않던가. 충전이 필요할 때, 심신이 지쳤을 때, 낙산사 템플스테이는 좋은 쉼표가 된다. 프로그램은 휴식형과 체험형으로 나뉘며, 외국인도 신청할 수 있다. 
낙산사는 입장객에게 무료로 공양국수를 대접한다. 
공양시간은 오전 11시 30분부터 오후 1시 30분까지. 낙산사 탐방 중 출출함을 해결할 수 있으니 참고하시라. 가는 길, 곧 봄기운을 내뿜을 강원도를 만나고 싶다면 홍천에서 오색령을 지나 양양에 이르는 44번 국도가 제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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