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2일 월요일

경포대 .鏡浦臺.

경포대 .鏡臺.


강원도 강릉시 저동(苧洞)의 경포호북안에 있는 누각.
지정종목시도유형문화재
지정번호강원유형문화재 제6호
지정일1971년 12월 16일
시대고려
종류/분류누각
크기정면 6칸, 측면 5칸, 기둥 32주
1971년 12월 16일 강원도지방유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6칸, 측면 5칸, 기둥 32주()의 팔작지붕 겹처마기와집의 누대()로, 강릉 오죽헌()에 있던 율곡()이 10세 때에 지었다고 하는 《경포대부()》를 판각()하여 걸었다.

숙종의 어제시()를 비롯하여 여러 명사들의 기문() ·시판()이 걸려 있다. 
누대의 전자액()은 유한지(), 정자액()은 이익회(), 제일강산()은 주지번()의 글씨라고 하는데, ‘’ 두 자를 잃어버려 후세인이 써 넣었다고 한다. 

1326년(충숙왕 13)에 관동존무사(使) 박숙정()이 현 방해정() 북쪽에 세웠으며, 1508년(중종 3)에 부사(使) 한급()이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그 후 여러 차례 중수하여 현재에 이른다. 
경포대를 중심으로 8경이 있는데, 녹두일출() ·죽도명월() ·강문어화() ·초당취연() ·홍장야우() ·증봉낙조() ·환선취적() ·한사모종() 등을 말한다.


정철이 『관동별곡』에서 “강릉대도호 풍속이 좋을시고, 절효정문()이 골골이 버티고 있으니, 비옥가봉()이 이제도 있다”라고 노래한 강릉의 경포대 부근이 『택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경포대는 작은 산기슭 하나가 동쪽을 향해 우뚝한데, 대()는 그 산 위에 있다. 
앞에는 호수가 있는데 주위가 20리나 되고, 물 깊이는 사람의 배꼽에 닿을 정도여서 작은 배만 다닐 수 있다. 
동편에 강문교()가 있고, 다리 너머에는 흰 모랫둑이 겹겹으로 막혀 있다. 
한편 호수는 바다와 통하고, 모랫둑 너머에는 푸른 바다가 하늘에 잇닿는다.
조선 중기의 문신 최전이 열아홉 살 때 대 위에 올라가서 시를 지었다.
봉래산에 신선 든 지 삼천 년인데
바다같이 넓은 호수 맑고 얕구나
오늘도 난새는 생황 불며 오는데
벽도화(복숭아나무 중 하나인 벽도화나무의 꽃) 피는 신선 땅엔 인적 드무네
이 시는 예전에도 그리고 이후에도 다시 나오지 않을 절창이 되었고, 그 뒤를 이어 시를 짓는 사람이 없었다. 
어떤 사람은 “이 시에 한 점의 속됨도 없으니, 이는 신선의 말이다”라고 하였고, 어떤 사람은 “이 시가 너무 으슥하니 이것은 귀신의 말이다”라고 하였는데, 정작 최전은 돌아가서 곧 죽었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경포호수는 옛날에 어느 부자가 살던 곳이었다. 
하루는 중이 그 부자에게 쌀 시주를 청하였는데 그가 똥을 퍼주었다. 
갑자기 그 부자가 살던 곳이 내려앉아서 호수가 되었고, 쌓였던 곡식은 모두 작은 조개로 변하였다. 
해마다 흉년이 들면 조개가 많이 나고 풍년이 들면 적게 나는데, 조개의 하나인 맛의 맛이 달고 향긋하여 요기할 만하며, 세상 사람은 이를 적곡조개라 한다. 
봄여름이면 먼 곳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주운 조개를 이고 지고 갔다. 
호수 밑바닥에는 아직 기와 부스러기와 그릇들이 남아 있어 헤엄을 치는 사람들이 가끔 줍는다고 한다.

경포호 남쪽 언덕은 조선 전기의 문신 심언광이 살던 곳이다. 
심언광이 조정에 벼슬을 할 때 좌우에 이 호수 경치의 그림을 두고 말하기를 “내게 이와 같은 호수와 산이 있으니 내 자손은 능히 떨치지 못하고 반드시 쇠망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호수 남쪽으로 몇 리 떨어진 곳에 자리한 한송정()에는 돌솥과 돌절구 등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네 명의 신선이 놀던 곳이다.

경포대 는 강릉시 저동, 운정동, 초당동의 경포호수 북쪽에 위치한 누각으로, 경포대해수욕장과 가까운 곳에 있다. 
아름드리 소나무 숲과 어우러진 경포호수를 내려다보는 위치인데, 경포대해수욕장을 찾는 사람은 많아도 경포대를 찾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경포대는 1326년(충숙왕 13) 강원도안렴사였던 박숙이 신라의 사선()이 놀았다던 방해정 뒷산 인월사 터에 세웠다가 그 뒤 1508년(중종 3)에 강릉부사 한급이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고 전해진다.

정면 5칸, 측면 5칸의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경포대는 우물천장을 하게 마련인 팔작지붕인데도 연등천장이며, 주춧돌도 자연석을 그대로 놓은 뒤 기둥에 딸린 부위만 둥글게 다듬어놓았다. 
1626년(인조 4) 강릉부사 이명준이 크게 중수하였다. 
인조 때 우의정을 지냈던 장유가 지은 『중수기』에는 “태조와 세조도 친히 경포대에 올라 사면의 경치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임진왜란 때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었다”라고 적혀 있다. 
현재의 건물은 1745년(영조 21) 부사 조하망이 세운 것이며, 낡은 건물은 헐어낸 다음 홍수로 사천면 근처 앞바다까지 떠내려온 아름드리나무로 다시 지었다고 한다.

관동팔경 중 첫손에 꼽히는 경치를 자랑하는 경포대의 현판은 전서체와 해서체로 쓴 것 두 개가 있다. 
해서체는 순조 때 한성부판윤을 지낸 이익회가 썼고, 전서체는 조선 후기의 서예가 유한지가 썼다. 
제일강산()은 전주 객사의 풍패지관()을 썼다고 알려진 명나라 사신 주지번의 글씨라고도 하고 또는 조선 전기 4대 서예가 중의 한 사람인 양사언의 글씨라고도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고, 뒷부분의 파손된 두 글자는 후세 사람이 써서 덧붙인 것이라고 한다.

그 밖에 숙종의 어제시와 명문으로 널리 알려진 조하망의 상량문 등 여러 사람의 글이 걸려 있는 가운데 율곡 이이가 열 살 무렵 지었다는 「경포대부()」도 편액되어 있다. 
“하늘은 유유하여 더욱 멀고 달은 교교하여 빛을 더하더라”라는 글도 있지만, 
“해 뜨는 이른 아침이나 달 밝은 가을밤에 경포대에 올라 경포호를 굽어보거나 호수 너머 동해의 푸른 바다를 대하면 속세는 간데없이 온통 선경이요”라고 표현했던 옛 사람의 시가 주위의 소나무와 상수리나무 등이 알맞게 어우러진 운치 있는 경관을 보면 생각난다.

일찍부터 강릉 사람들은 경포대에서 볼 수 있는 여덟 개의 경치를 경포팔경이라 불렀는데, 경포대에서 바라보는 해돋이와 낙조 그리고 달맞이, 고기잡이배의 야경, 노송에 들어앉은 강문동, 초당마을에서 피어오르는 저녁연기 등이 경포팔경이다.

경포대강릉시 저동, 운정동, 초당동의 경포호수 북쪽에 위치한 누각으로, 아름드리 소나무 숲과 어우러진 경포호수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다.
거울처럼 맑다고 해서 이름이 붙은 경포호에는 달이 네 개가 뜬다는 말이 있다. 
하늘에 뜨는 달이 하나요, 바다에 하나, 호수에 하나 그리고 술잔에도 똑같은 달이 뜬다는 말이다. 요즘은 여기에 하나가 덧붙여진다고 말한다. 
하늘, 바다, 호수, 술잔 그리고 상대방의 눈동자에 또 하나의 달이 뜬다는 경포호는 사람에게 유익함을 준다는 뜻으로 군자호()라고도 불린다.

고려 때의 문신 김극기는 경포대를 두고 “서늘한 경포대에 물과 돌이 다투어 둘렸네. 버들언덕에는 푸른 연기 합쳐졌고, 새는 교반을 떨어뜨리네. 모래언덕에 흰 눈이 무더기졌구나. 
선인은 아득하게 어디로 갔나. 땅에는 푸른 이끼만 가득하다”라고 노래하였고, 조선 초기의 청백리 황희는 “맑고 맑은 경포 물엔 새 달[신월()]이 잠겼고, 늘어진 차가운 소나무는 푸른 연기에 잠겼구나. 
구름 비단의 연꽃은 못에 가득하고 대()엔 대나무가 가득한데, 티끌세상에도 또한 해중() 신선이 있다”라고 읊었다. 
어느 가을 달밤에 경포대에서 호수를 바라보던 세조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속세는 간데없이 온갖 선경이라
나오느니 서경시요, 들리느니 노래라
바다에는 갈매기, 호수에는 철새들이 쌍쌍이 날고
천병만마 늘어선 송림 사이로
거니는 선남선녀의 모습이 그림 같구나
경포대에 놀러 와서 경포 잉어회와 초당 두부를 못 먹고 돌아가는 사람은 멋은 알지 몰라도 맛은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며, 경포호 주변에선 찌갯거리로 애용되는 때복이라는 민물조개가 유명한데, 이 민물조개에는 앞서 말한 부잣집 이야기가 전해져온다.
경포대 : 경포대는 강릉시 저동의 경포호 북안에 있는 누각이다. 
1326년(충숙왕 13) 강원도안렴사였던 박숙이 신라의 사선이 놀았다던 방해정 뒷산 인월사 터에 세웠다가 그 뒤 1508년(중종 3)에 강릉부사 한급이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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