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임당. 申師任堂.
1504(연산군 10)∼1551(명종 6). 조선 중기의 여류예술가.
강릉 오죽헌 소장, 1986년 표준영정 지정. 〈신사임당〉 1504(연산군 10)∼1551(명종 6), 본관 평산, 조선 중기의 시·그림·글씨에 능했던 여류 예술가이다.
우리 나라 어머니의 표상이자 최고의 여성상으로 불린다.
시와 그림에 능한 예술가이자 율곡 이이를 낳은 훌륭한 어머니.
48세를 일기로 작고할 때까지 그리 길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 훌륭한 작품을 남긴 천재 화가로서, 조선시대의위대한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서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 사임당은 현모양처(賢母良妻)를 상징하는 인물로 5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추앙받고 있다.
개설
본관은 평산(平山). 아버지는 신명화(申命和)이며, 어머니는 용인 이씨로 이사온(李思溫)의 딸이다.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호는 사임당(師任堂)이다. 사임당은 중국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을 본받겠다는 뜻에서 사용된 당호로 임사재(任師齋)라고 칭하기도 했다.
본명은 확인되지 않는다.
이름이 인선(仁善)이라는 설도 있으나 이를 뒷받침하는 역사적 자료는 없다.
아버지는 영월군수(寧越郡守) 신숙권(申叔權)의 아들 신명화(申命和)이고, 어머니는 세조 때의 원종공신(原從功臣) 이유약(李有若)의 손자인 이사온(李思溫)의 외동딸 용인 이씨(龍仁李氏)이다.
아버지는 영월군수(寧越郡守) 신숙권(申叔權)의 아들 신명화(申命和)이고, 어머니는 세조 때의 원종공신(原從功臣) 이유약(李有若)의 손자인 이사온(李思溫)의 외동딸 용인 이씨(龍仁李氏)이다.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등을 지낸 이원수(李元秀)와 결혼하여 이선(李璿)ㆍ이번(李璠)ㆍ이이(李珥)ㆍ이우(李瑀)의 네 아들을 두었고, 조대남(趙大男)ㆍ윤섭(尹涉)ㆍ홍천우(洪天祐)에게 출가한 세 딸을 두었다.
딸들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으며 맏딸이 매창(梅窓)이란 호를 사용한 기록만 남아있다.
남편이 증좌한성 이원수(李元秀)이고, 조선시대의 대표적 학자이며 경세가인 이이(李珥)의 어머니이다.
시·그림·글씨에 능했던 여류 예술가이다.
생애 활동
우리 역사에서 신사임당만큼 존경받은 여성도 드물다.
그녀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여성 최초로 고액권인 5만원 화폐 도안 인물로까지 이어졌다.
선덕여왕, 유관순 열사 등 몇몇 후보 인물들이 있었지만,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존경해 마지않는 신사임당이 최종 인물로 선정되었다.
그녀의 삶은 50년이 채 안 되지만 그녀에 대한 한국인들의 사랑은 5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회자되고 계속되고 있다.
신사임당은 1504년(연산군 10년) 외가인 강원도 강릉 북평촌(현재 강릉시 죽헌동)에서 서울 사람인 아버지 신명화와 강릉 사람인 어머니 용인 이씨 사이에서 다섯 딸 중의 둘째로 태어났다.
신사임당이 태어난 강릉은 서쪽으로 대관령이 병풍처럼 처져있고, 동쪽으로는 푸른 동해 바다가 펼쳐져 있는 곳으로 역사적으로는 예국(濊國)의 수도로 오랜 전통을 간직한 곳이다.
신사임당의 조부이자 신명화의 부친인 신숙권은 영월군수로 재임한 적이 있고, 이때 매죽루(梅竹樓)라는 누각을 창건하기도 했다.
신명화는 서울 출신으로 벼슬에 뜻이 없어 과거시험에 응시하지 않다가 마흔이 넘어서야 비로소 진사(進士)가 되었을 뿐 관직을 사양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했다고 전한다.
신사임당의 생애에서 눈 여겨봐야 할 것이 강릉지역에 터를 둔 외가이다.
어머니 이씨 부인은 본관이 용인이며 강릉 사람으로 참판을 지낸 최응현의 손녀이다.
이씨 부인은 강릉에서 외조부인 최응현 밑에서 자랐으며, 아버지 최치운은 이조참판을 지낸 인물이다.
신사임당과 모친인 이씨 부인이 외가 쪽과 밀접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조선전기의 가족문화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는 부계중심의 가족문화가 발달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러한 가족문화가 완전히 뿌리내린 것은 17세기 이후였다.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중기까지 결혼을 바탕으로 한 가족문화는 여성의 거주지 중심으로 움직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신사임당과 그의 어머니인 이씨 부인이 친정 쪽에서 거주하는 것이 특별한 일이 아닌 시대였다고 볼 수 있다.
강조해도모자람 ?
사임당은 당호이며, 그 밖에 시임당(媤任堂)·임사재(妊思齋)라고도 하였다.
당호의 뜻은 중국 고대 주나라의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을 본받는다는 것으로서, 태임을 최고의 여성상으로 꼽았음을 알 수 있다.
외가인 강릉 북평촌(北坪村)에서 태어나 자랐다.
아버지 신명화는 사임당이 13세 때인 1516년(중종 11)에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는 나가지 않았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이었으나 1519년의 기묘사화의 참화는 면하였다.
외할아버지 이사온이 어머니를 아들잡이로 여겨 출가 후에도 계속 친정에 머물러 살도록 하였다.
이에 사임당도 외가에서 생활하면서 어머니에게 여범(女範)과 더불어 학문을 배워 부덕(婦德)과 교양을 갖춘 현부로 자라났다.
서울에서 주로 생활하는 아버지와는 16년간 떨어져 살았고, 그가 가끔 강릉에 들를 때만 만날 수 있었다.
19세에 덕수 이씨(德水李氏) 이원수(李元秀)와 결혼하였다.
사임당은 그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아들 없는 친정의 아들잡이였으므로 남편의 동의를 얻어 시집에 가지 않고 친정에 머물렀다.
결혼 몇 달 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친정에서 3년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갔다.
시집의 터전인 파주 율곡리에 기거하기도 하였고,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에서도 여러 해 살았다.
이따금 친정에 가서 홀로 사는 어머니와 같이 지내기도 했으며, 셋째 아들 이이도 강릉에서 낳았다.
1541년(중종 36) 38세에 시집 살림을 주관하기 위해 아주 서울로 떠나왔으며, 수진방(壽進坊: 지금의 종로구 壽松洞과 淸進洞)에서 살다가 1551년(명종 6) 봄에 48세에 삼청동으로 이사하였다.
이 해 여름 남편이 수운판관(水運判官)이 되어 아들들과 함께 평안도에 갔을 때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최고의 여성상인 태임을 본받는다는 뜻으로 당호를 지었는데, 사임당을 평한 사람들 중에는 그의 온아한 천품과 예술적 자질조차도 모두 태임의 덕을 배우고 본뜬 데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이이와 같은 대정치가요 대학자를 길러낸 훌륭한 어머니로서의 위치를 평가한 때문이다.
사임당은 완전한 예술인으로서의 생활 속에서 어머니와 아내의 역할을 성숙시켰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그는 조선왕조가 요구하는 유교적 여성상에 만족하지 않고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생활을 스스로 개척한 여성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교양과 학문을 갖춘 예술인으로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의 천부적인 재능과 더불어 그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북돋아준 좋은 환경이 있었다.
이미 그의 재능은 7세에 안견(安堅)의 그림을 스스로 사숙(私淑)했던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신 사임당은 통찰력과 판단력이 뛰어나고 예민한 감수성을 지녀 예술가로서 대성할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거문고 타는 소리를 듣고 감회가 일어나 눈물을 지었다든지 또는 강릉의 친정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운 것 등은 그녀의 섬세한 감정이 남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녀의 성격만큼이나 그림·글씨·시도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운데, 그림은 풀벌레·포도·화조·어죽(魚竹)·매화·난초·산수 등이 주된 화제(畫題)이다.
마치 생동하는 듯한 섬세한 사실화여서 풀벌레 그림을 마당에 내놓아 여름 볕에 말리려 하자, 닭이 와서 산 풀벌레인 줄 알고 쪼아 종이가 뚫어질 뻔하기도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녀의 그림에 후세의 시인·학자들이 발문을 붙였는데 한결같이 절찬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림으로 채색화·묵화 등 약 40폭 정도가 전해지고 있는데,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그림도 수십 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글씨로는 초서 여섯 폭과 해서 한 폭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 몇 조각의 글씨에서 그녀의 고상한 정신과 기백을 볼 수 있다.
1868년 강릉부사로 간 윤종의(尹宗儀)는 사임당의 글씨를 영원히 후세에 남기고자 그 글씨를 판각하여 오죽헌에 보관하면서 발문을 적었다.
그는 거기서 사임당의 글씨를 “정성들여 그은 획이 그윽하고 고상하여 정결하고 고요하여 부인께서 더욱더 저 태임의 덕을 본뜬 것임을 알 수 있다”고 격찬하였다.
그녀의 글씨는 그야말로 말발굽과 누에 머리[馬蹄蠶頭]라는 체법에 의한 본격적인 글씨였다.
그의 절묘한 예술적 재능에 대여 명종 때 어숙권(魚叔權)은 『패관잡기』에서 “사임당의 포도와 산수는 절묘하여 평하는 이들이 ‘안견 다음에 간다. ’라고 한다.
어찌 부녀자의 그림이라 하여 경홀히 여길 것이며, 또 어찌 부녀자에게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나무랄 수 있을 것이랴”라고 격찬하였다.
그녀의 여섯 폭짜리 초서가 오늘까지 전해진 경과를 보면, 사임당의 넷째 여동생의 아들 권처균(權處均)이 이 여섯 폭 초서를 얻어간 것을 그 딸이 최대해(崔大海)에게 출가할 때 가지고 가 최씨 가문에서 대대로 가보로 전하였다.
영조 때에 이웃 고을 사람의 꾐에 빠져 이를 빼앗겼다가 어렵게 되찾아 그 뒤 최씨 집안에서 계속 보관하게 된 것이다.
이후 두산동 최씨가에서 보관하던 여섯 폭짜리 초서는 1971년 강릉시에 인계되어 율곡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
여섯 폭짜리 초서는 신사임당초서병풍(申師任堂草書屛風)인데, 1973년 7월 31일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1호로 지정되었다.
윤종의에 의하여 판각된 것은 오죽헌에 보관되어 있다.
사임당이 절묘한 경지의 예술 세계에 머문 중요한 동기는 환경이었다.
첫째 현철한 어머니의 훈조를 마음껏 받을 수 있는 환경을 가졌다는 점을 들 수 있고, 둘째는 완폭하고 자기주장적인 유교 사회의 전형적인 남성 우위의 허세를 부리는 그러한 남편을 만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녀의 남편은 자질을 인정해 주고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도량 넓은 사나이였다.
먼저 혼인 전 환경을 보면 그의 예술과 학문에 깊은 영향을 준 외조부의 학문은 현철한 어머니를 통해 사임당에게 전수되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무남독녀로 부모의 깊은 사랑을 받으면서 학문을 배웠고, 출가 뒤에도 부모와 함께 친정에서 살았기 때문에 일반 여성들이 겪는 시가에서의 정신적 고통이나 육체적 분주함이 없었다.
비교적 자유롭게 일상 생활과 자녀 교육을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어머니에게 훈도를 받은 그녀는 천부적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그녀가 서울 시가로 가면서 지은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이나 서울에서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지은 「사친(思親)」 등의 시에서 어머니를 향한 그녀의 애정이 얼마나 깊고 절절한가를 알 수 있다.
이것은 어머니의 세계가 사임당에게 그만큼 영향이 컸다는 것을 보여 주기도 한다.
여자가 출가한 뒤에는 오직 시집만을 위하도록 요구한 유교적 규범 속에서도 친정을 그리워하고 친정에서 자주 생활한 것은 규격화된 의리의 규범보다 순수한 인간 본연의 정과 사랑을 더 중요시한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예술 속에서 나타나듯이 거짓없는 본연성을 정직하면서 순수하게 추구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예술성을 보다 북돋아준 것은 남편이었다.
사임당이 친정에서 많은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과 시어머니의 도량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남편은 사임당의 그림을 친구들에게 자랑을 할 정도로 아내를 이해하고 또 재능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는 아내와의 대화에도 인색하지 않아 대화에서 늘 배울 것은 배우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였던 것이다.
사임당의 시당숙 이기(李芑)가 우의정으로 있을 때 남편이 그 문하에 가서 노닐었다. 이기는 1545년(인종 원년)에 윤원형(尹元衡)과 결탁하여 을사사화를 일으켜 선비들에게 크게 화를 입혔던 사람이다.
사임당은 남편에게 어진 선비를 모해하고 권세만을 탐하는 당숙의 영광이 오래 갈 수 없음을 상기시키면서 그 집에 발을 들여놓지 말라고 권하였다.
이원수는 이러한 아내의 말을 받아들여 뒷날 화를 당하지 않았다.
사임당의 자녀들 중 그의 훈도와 감화를 제일 많이 받은 것은 셋째 아들 이이(李珥)이다.
이이는 그의 어머니 사임당의 행장기를 저술했는데, 그는 여기에서 사임당의 예술적 재능, 우아한 천품, 정결한 지조, 순효(純孝)한 성품 등을 소상히 밝혔다.
윤종섭(尹鍾燮)은 이이와 같은 대성인이 태어난 것은 태임을 본받은 사임당의 태교에 있음을 시로 읊어 예찬하였다.
현모양처 와 화가로의 삶'
신사임당의 본명은 신인선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사임당은 당호이며, 사임당 외에도 시임당·임사제라고도 하였다.
사임당이라고 지은 것은 중국 고대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로 뛰어난 부덕을 갖추었다는 태임(太任)을 본받는 뜻이 담겨 있다.
태임은 신사임당의 롤모델(role model)이었다.
사임당은 7세 때부터 스승 없이 그림 그리기를 시작했다고 전한다.
세종 때 안견의 [몽유도원도], [적벽도], [청산백운도] 등의 산수화를 보면서 모방해 그렸고 특히 풀벌레와 포도를 그리는 데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사임당은 어머니 이씨와 할머니 최씨와 더불어 오죽헌에 살면서 아버지 신명화 보다는 시와 그림, 글씨 등을 외가를 통해 전수받았다.
사임당이 결혼한 것은 1522년인 19세 때로 남편은 덕수 이씨 가문의 이원수이다.
이후 2년 뒤인 21세 때 맏아들 선, 26세 때 맏딸 매창, 33세에 셋째 아들 율곡 이이를 낳는 등 모두 4남 3녀를 낳아 길렀다.
기록에 따르면, 사임당은 38세 때 서울 시집에 정착하기까지 근 20년을 강릉에서 친정 어머니인 용인이씨와 살았다.
용인이씨가 아들이 없어 딸인 신사임당이 아들처럼 어머니를 모신 것인데, 조선초기까지도 전통적인 친정살이 혼인 풍습이 이어졌기 때문에 특별한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남자 형제가 없었던 용인 이씨도 결혼한 뒤에 신사임당의 외할머니가 되는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사임당 또한 어머니 용인 이씨를 이어 친정살이를 한 것이다.
결혼 몇 달 후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친정에서 3년 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기도 했다.
이후 시가인 파주 율곡리에 기거하기도 하고,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에서 살기도 했다.
때로는 친정인 강릉에 가서 홀로 계시는 어머니의 말동무를 해드리는 사이에 셋째 아들인 이이를 강릉에서 낳았다.
38세 되던 해에 시집살림을 주관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와 수진방(현재 청진동)에서 살다가 48세에 삼청동으로 이사하였다.
같은 해 남편이 수운판관에 임명되어 아들들과 함께 평안도로 갔을 때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간혹 아팠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건강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부군인 이원수의 나이가 51세였고 사임당이 사망한 이후 10년을 더 살았다.
부인을 잃은 후 이원수는 어린 자식들 때문이었는지 재혼하지 말라는 그녀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재혼을 했다.
사임당은 뒤에 아들 이이 덕분에 정경부인에 증직되었고 그의 유적으로는 탄생지인 오죽헌과 묘소가 있는 조운산이 있다.사임당이 사망할 무렵 이이의 나이는 16세였다.
십대 중반에 어머니를 여의자 금강산에 입산할 정도로 방황했다.
이후 어머니를 대신한 외조모의 따뜻한 정은 관직에 나가서도 잊지 못할 정도였다고 전한다.
“조정으로 본다면 신은 있으나 마나 한 보잘것없는 존재이오나 외조모에게 신은 마치 천금의 보물 같은 몸이오며, 신 역시 한번 외조모가 생각나면 눈앞이 아득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율곡전서])
사임당은 아들 없는 집안의 다섯 딸 중 둘째 딸로 태어나 시와 글씨, 그림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고 현모양처로 인품과 재능을 겸비한 여성으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 사임당은 율곡 이이를 낳은 어머니로 더 유명하지만, 그녀가 살았던 시기에는 산수도를 잘 그린 화가로서 명성이 자자했다.
율곡의 스승인 어숙권은 신사임당이 안견(安堅) 다음가는 화가라 했다.
화가로 유명했던 사임당이 부덕의 상징으로서 존경받게 된 것은 사후 1백 년이 지난 17세기 중엽이다.
율곡이 유학자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자 사임당은 천재화가 보다는 그를 낳은 어머니로 칭송받기 시작했다. 사임당에 대한 유학자들의 존경은 18세기 유학적 가치가 정점에 이른 시기에 더욱 올라 마침내 그녀는 부덕과 모성의 상징으로 변화해 갔다.
말하자면 사임당의 이미지가 갖고 있는 모성의 신화화는 17세기를 거치면서 생산되고 18세기에 와서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임당은 신령스런 천지의 기운을 받아 율곡을 잉태한 여성이었고, 훌륭한 태교와 교육을 통해 율곡을 기른 어머니 사임당으로 더 유명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사임당의 일생을 돌아보면, 현모양처 이전에 화가로서 그리고 효녀로서도 훌륭한 여성이었다.
그녀에 대한 이미지는 전통시대에 남성 지식인들의 눈으로 바라 본 것이었다.
화가라는 자신의 일생보다 아내로서, 어머니로서의 삶이 더 부각되었다.
이는 사임당을 부덕의 상징으로 존경의 대상이 되게 한 면이 있으나 한편으로는 사임당의 정체성을 고정화시켰고, 다양한 렌즈로 그녀를 바라볼 수 없게 만든 요인이 되기도 했다.
앞으로 신사임당이 어떤 여성으로 재탄생할 수 있을런지, 그녀의 부덕 보다는 화가로서 추구했던 한 여성으로서의 삶
사임당은 실로 현모로서 아들 이는 백대의 스승으로, 아들 이우(李瑀)와 큰딸 매창(梅窓)은 자신의 재주를 계승한 예술가로 키웠다.
작품으로는 「자리도(紫鯉圖)」·「산수도(山水圖)」·「초충도(草蟲圖)」·「노안도(蘆雁圖)」·「연로도(蓮鷺圖)」·「요안조압도(蓼岸鳥鴨圖)」와 6폭초서병풍 등이 있다.
초충도 / 신사임당전 신사임당, 〈초충도〉, 종이에 채색, 34×28.5㎝, 국립중앙박물관. 이 그림은 신사임당의 작품으로 전하는 초충도 8점으로 구성된 병풍. 한창 보랏빛으로 익어가는 가지 주변으로 나비, 벌, 여치, 개미 등이 그려져 있다. 섬세한 필선, 선명한 채색, 안정된 구도가 잘 어우러진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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