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1일 화요일

고려 , 高麗 .

고려 , 高麗 .


고구려의 후기 국호. 장수왕대 이후 멸망 때까지 국호로 사용되었다. 
고구려에서 국호를 고려로 개칭했다는 기록은 없다.

고려 제1대 왕(재위 918∼943). 궁예의 휘하에서 견훤의 군사를 격파하였고 정벌한 지방의 구휼에도 힘써 백성의 신망을 얻었다. 
고려를 세운 후, 수도를 송악으로 옮기고 불교를 호국신앙으로 삼았으며 신라와 후백제를 합병하여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고구려의 국호가 고려로 개칭되었음이 당시의 금석문이나 당시의 역사기록을 통해 확인된다.

왕건(王建)이 신라말에 분열된 한반도를 다시 통일하여 세운 왕조(918∼1392).
918년 왕건에 의해 건국되었고 34대 공양왕()까지 475년간 존속했다. 
신라 말에 송악(:)의 토호()였던 왕건은 태봉()의 왕인 궁예()의 부하로 있다가 918년 궁예를 추방하고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 연호를 천수()라고 하여 고려를 건국하였다. 
개경(현 황해도 개성시)을 수도로 삼았으며 936년 후삼국시대를 형성하고 있던 한반도를 하나의 국가로 통일하였다.

왕권에 비해 지방 토호 세력이 강력했지만 4대 광종에 이르러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왕권이 강화되고 중앙집권체제가 확립되었다. 
대외적으로는 중국, 일본과 교류하였고 멀리 아라비아와 페르시아까지 무역을 했다.

11세기에는 거란족의 침입을 받았으나 명장 강감찬의 귀주대첩(1019년)으로 이를 물리쳤고 대각국사 의천을 통해 불교가 본격적으로 유입되어 불교를 숭상하는 국가가 되었으며 불교의 가장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12세기에 들어 권력투쟁과 내분이 격화되어 무신정변이 일어나게 되었고 왕권이 약화되면서 병권을 가진 무신들에 의해 지배되었다. 
13세기에는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의 침입을 받아 전 국토가 피폐화되었고 국력이 쇠퇴하기 시작했다.

31대 공민왕이 즉위하여 왕권을 다시 세우고 국력을 강화시키고자 했지만 그의 정책이 실패로 끝나게 되자, 권력의 중심인 왕권이 무너지고 민심이 급격하게 악화되어 갔다. 
이에 무신이었던 이성계와 그의 책사였던 정도전 등이 주도하는 정치세력에 의해 1392년에 멸망하게 되었다.  
1979년에 충청북도 충주에서 발견된 중원고구려비()의 첫줄에 “(5월중 고려대왕조왕)”이라 하여 국명이 ‘고려()'로 기록되어 있다. 
539년으로 추정되는 연가7년명불상 광배의 기록에 “(고려국낙량동사)”라고 하여 고려라는 국호가 쓰여 있다.
중국 역사서에는 태연() 원년(435, 장수왕 23)에 고려에서 사신을 파견했다고 ≪위서≫ 본기에 기록된 이후 계속 고려로 기록이 되고 있다.
≪남제서≫·≪주서≫·≪수서≫·≪당서≫ 등에서 고구려 열전의 명칭이 ‘고려전()’으로 바뀌어 기술하고 있다. 또한 ≪일본서기≫에는 모두 고려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도 고려로 기록한 많은 흔적을 남기고 있다. 
≪삼국유사≫의 왕력에서는 신라, 고려, 백제로 전체의 국명을 고려로 칭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기록을 고려로 칭하고 있다. 
당시에 기록된 ≪양고승전 ≫ 등의 불교전적에서도 고려로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 고대에 관한 기록이 있는 중국의 역사서《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는 고구려 항목을 고려조()라 하는 등 고구려를 고려로 지칭하고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보면 고대 중국에서는 고구려를 고려라고 불렀던 듯하다.
중국 문헌에서 고구려의 국호가 고려로 기록된 연대 중 가장 시기가 앞선 것은 398년(광개토대왕 8), 423년(장수왕 11), 435년(장수왕 23)년의 기록이 찾아지고 있으나 확실한 자료는 435년으로 판단된다. 
국호의 개칭은 427년(장수왕 15)에 있었던 평양 천도와 관련이 깊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1449년에 판찬하기 시작하여 1451년에 완성된 고려시대에 대한 역사서이다. 
'삼국사기'에서 본기라고 한 부분을 세가라고 한 것은 대명의식과 주자학적 명분론이 작용한 결과이다. 
총 139권이며 기전체로 되어있다. 연세대학교 도서관 소장.


918년부터 1392년까지 474년간 왕씨()가 34대에 걸쳐 집권했던 왕조.

개설

처음 왕건()이 신라 말에 나라를 세워 분립된 후삼국을 통일하고, 성종 때 중앙집권적인 국가기반을 확립시킨 후 문종 때 이르러 귀족정치의 최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1170년(의종 24) 무신란()이 일어나 1백년간의 무신정권이 성립되었다. 그 뒤 다시 1백여 년 동안의 원나라의 간섭기를 거쳐, 14세기 말 이성계()가 고려를 넘어뜨리고 조선을 건국하였다.
9세기 말 신라의 국력이 쇠약해지자, 각지에서 군웅이 할거하였다. 그 가운데 전라도지방의 견훤()과 중부지방의 궁예()가 세력이 가장 왕성해 후삼국의 정립을 보게 되었다.
왕건은 송악(: 지금의 개성)지방의 호족으로서 궁예의 부하로 활동하다가, 918년 민심을 잃은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웠다. 왕건은 935년신라의 귀부()를 받고, 이듬해후백제를 멸망시켜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태조는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자처해 국호를 ‘고려’라 하고 북진정책을 추진해 서경(西: 지금의 평양)을 중시, 북방을 개척해 국경선을 청천강까지 확대하였다. 또한, 거란의 침략으로 발해가 멸망하자, 고구려계통의 발해유민을 받아들여 포섭하였다.
태조는 대내적으로 반독립적인 상태에 있는 호족세력을 통합하기 위해 호족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는 혼인정책을 쓰고, 기인제도()와 사심관제도()를 실시하였다.
호족세력을 억압해 왕권을 안정시키려는 태조의 집권화정책은 그 뒤 광종의 훈신숙청과 노비안검법() 및 과거제의 실시로 나타났다. 경종 때는 전시과의 제정으로 집권체제의 경제적 기반이 마련되었다. 성종 때는 내외의 정치제도가 정비되어 중앙집권적인 지배체제가 성립되었다.
성종은 당나라 제도를 채용해 삼성육부의 중앙관제를 제정하고, 처음으로 지방관을 파견하는 한편, 지방호족들의 지위를 격하하는 향직을 개혁해 중앙집권체제의 확립을 보게 하였다.
귀족사회 형성의 기반이 마련된 성종 이후 현종을 거쳐 문종에 이르는 사이에 고려의 정치기구와 토지제도 및 신분체제가 완비되어 절정기를 맞았다. 문종 때는 고려의 귀족정치가 절정기에 이르러 귀족문화가 난숙해지고, 경제적·정치적으로 국력의 신장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이 때부터 귀족사회 내부의 모순이 축적되어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인종 때의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은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의종 때는 무신란이 일어나 귀족사회를 붕괴시키고 말았다.
1170년 정중부() 등 무인이 일으킨 무신란으로 문신의 귀족정치는 끝나고 새로이 무인들의 정권이 성립되었다. 이 때 무인집정을 정점으로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해 문신을 억압하고 왕권이 약화되었으며, 사회질서의 문란으로 각지에서는 민란이 발생하였다. 무신정권은 교정도감()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지배기구를 설치하고, 막대한 사병을 양성해 무력기반으로 삼았으며, 광대한 토지를 집적해 경제적 기반을 이루었다.
그러나 1270년 몽골의 세력을 업은 원종과 그 일파의 거사로 무신정권이 몰락하고 왕정이 복구되었다. 그러나 고려는 원나라의 압박 아래 놓이게 되었다. 고려 무인의 마지막 대몽항전인 삼별초의 저항(1270∼1273)이 끝나자, 원나라의 요구에 따라 두 차례나 일본정벌에 동원되었다.
또한 왕실은 원나라에 예속되어 원나라의 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이고 왕실의 호칭도 낮추어 부르게 되었다. 관제도 격하되고 직접 원나라의 관청인 정동행성()이 설치되고, 또 함경도와 평안도지방에 쌍성총관부와 동녕부가 설치되어 영토의 일부를 빼앗기게 되었다.
고려 후기의 지배세력은 권문세족으로 일컬어지는 보수세력이었다. 친원파를 중심으로 형성된 권문세족은 도평의사사에 앉아 정권을 장악하고 광대한 농장을 소유해 지배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가문을 중요시한 점에서 종래의 문벌귀족의 일면을 계승하면서도 또한 현실적인 관직을 중시하는 새로운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이 때 점차 학자적 관료인 사대부가 공민왕의 개혁정치로 인해 신흥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기성세력인 권문세가과 대항하면서 정치의 표면에 나서게 되었다. 그 뒤 고려는 이들 신흥사대부세력과 결탁한 이성계에 의해 멸망되고 새 왕조로 교체되었다.
불교적 성향이 강한 권문세족은 친원정책을 주장하고, 기성질서의 유지에 급급하였다. 반면, 유교적 신흥사대부는 친명정책을 주장하고, 개혁정치를 요구하였다. 무인 이성계는 시대의 새 흐름을 간파하고, 신흥사대부세력과 결탁하였다.
이성계는 1388년(우왕 14) 요동정벌 중 위화도()에서 회군해 정치와 군사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1391년(공양왕 3) 과전법을 공포해 새 왕조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한 뒤, 1392년 역성혁명()을 일으켜 ‘조선’을 개창하였다. 이로써 고려왕조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고려의 성립과 발전

귀족사회의 성립과 발전

건국과 후삼국의 통일

신라 후기에는 몰락한 중앙귀족과 토착적인 촌주출신, 그리고 지방의 군사적인 무력을 가진 군진세력() 등이 지방호족으로 등장하였다. 이들은 농민반란을 배경으로 각지에서 봉기하였다.
9세기 말 이들은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상주지방의 원종()과 애노(), 죽주(: 지금의 경기도 안성시 )의 기훤(), 북원(: 지금의 강원도 원주)의 양길(), 지금의 전라도지방의 견훤 등이 대표적인 세력이었다. 특히 그 중에서 강력한 세력을 이룬 것이 견훤과 궁예였다.
견훤은 원래 상주의 호족출신이었다. 신라의 작은 부대장[]이 되어 세력을 키우다가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군대를 이끌고 무진주(: 지금의 광주)를 점령하고 다시 완산주(: 지금의 전라북도 전주)에 진격해 그곳을 근거로 900년에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궁예는 신라의 왕족으로 몰락한 가문출신이었다. 처음에 양길의 부하가 되어 강원도일대를 경략하고 세력이 강성해지자, 양길을 넘어뜨리고 송악에서 자립해 901년에 후고구려를 건국하였다.
이에 신라와 함께 백제·고구려의 부흥을 부르짖는 후백제·후고구려가 정립해 후삼국시대가 나타나게 되었다. 신라는 진골왕족의 권력다툼에 휩싸여 경상도일대만을 지배하는 상태였으나, 견훤과 궁예는 전제군주로서 전라도일대와 중부지방에서 커다란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왕건은 본래 혈구진()을 비롯한 해상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궁예의 휘하에서 수군을 이끌고 서남해방면으로부터 후백제지역을 공략해 진도·금성(: 지금의 나주)을 점령한 것은 그러한 해상활동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국호를 ‘고려’라고 한 것은 궁예와 같이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것은 종래의 구 신라에 대한 혁명적인 새 왕조건설의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였다.
그는 이듬해 국도를 철원에서 그의 출신지인 송악으로 옮겼다. 그가 건국 초의 불안정한 시기에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송악지방의 정치적·경제적·군사적 기반 위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신라는 내부의 정치적 혼란과 외부의 후백제 침략으로 국운이 쇠퇴해 935년(경순왕 9) 고려에 귀부하였다. 그것은 927년 견훤이 신라의 국도를 침략해 경애왕을 죽이고 노략질할 때, 왕건이 신라를 도와 견훤과 싸워준 친신라정책이 주효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고려는 전 왕조인 신라의 전통과 권위를 계승함으로써 정통왕조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후백제는 이미 934년운주(: 지금의 충청남도 홍성)에서 고려 태조군에게 패배해 웅진 이북의 30여 성을 빼앗기는 타격을 받았다. 또한 이듬해 부자간의 불화로 견훤이 아들 신검()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되는 일이 일어났다. 그러한 내부적 분열을 틈타 태조는 936년 대군을 이끌고 신검의 군대를 선산에서 대파해 그의 항복을 받아 후삼국의 통일을 보게 되었다.

호족통제정책

태조가 통일왕조를 이룩했으나 중앙의 통치력이 전국적으로 미치지 못하였다. 지방에는 반독립적인 호족들이 분립해 상당한 세력을 갖고 있었으므로, 태조의 가장 긴급한 과제는 중앙집권체제의 구축이었다.
처음에는 호족세력을 회유해 자기 기반 안에 흡수하려 하였다. 미처 확고한 세력을 마련하지 못한 고려왕조로서는 독자적 세력을 가진 호족들의 지원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각 지방의 유력한 호족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는 혼인정책을 썼다.
즉 태조는 정주 유씨()·평산 박씨()·충주 유씨() 등 전국의 20여 호족들과의 정략적인 혼인을 하였다. 또한, 호족들에게 왕씨성()을 주어 한집안과 같은 관계를 맺은 것도 그러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호족세력의 통제에도 노력하였다. 우선 태봉의 관제를 답습해 여러 정치기구를 설치하고, 많은 호족을 중앙관리로 등용해 관료의 지위로 전환시켰다.
또한,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아 중앙통제력이 미치지 못했으므로 대신 지방호족들에게 호장·부호장 등의 향직을 주고 그 자제들을 뽑아 인질로 서울에 머무르게 하는 기인제도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개국공신이나 고관들에게 자기 출신지역의 부호장 이하의 향직을 임명하고, 지방의 치안통제를 책임지는 사심관을 삼아 지방을 통제하였다. 태조가 호족들에게 관계()를 수여하고, 토성()을 분정()한 것도 지배질서 안에 편제하려는 의도였다.
한편 태조는 만년에 신하로서 지켜야 할 규범으로 『정계()』 1권과 『계백료서()』 8편을 지어 중외에 반포하였다. 이 두 책은 중앙관료와 지방호족들에게 군주에 대한 신하의 도리를 일깨워 중앙집권화의 정신적 기반으로 삼으려 한 것이었다. 또한, 자손들에게 ‘훈요십조()’를 만들어 군주로서 지켜야 할 교훈을 남긴 것은 이에 대응한 것이라 하겠다.

집권화정책

호족들의 존재로 인해 불안정했던 왕권은 태조의 죽음과 함께 표면화되었다. 945년(혜종 2)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광주()의 호족 ‘왕규()의 난’이 일어났다.
두 딸을 태조의 15비와 16비로 들여놓은 왕규는 혜종의 두 아우 요(: 뒤의 정종)와 소(: 뒤의 광종)를 꺼려 혜종에게 거듭 상소했으나 듣지 않자. 그는 외손 광주원군을 왕위에 올리고자 하였다.
이에 혜종은 불의의 변을 두려워해 사람을 의심하고, 갑사()로써 신변을 호위하게 하였다. 그런데 그가 즉위 2년 만에 병으로 죽자, 서경의 왕식렴() 세력과 결탁한 요가 왕규를 제거하고 정종이 되었다.
그러나 왕권의 불안정은 계속되어 이들 도전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힘쓰는 한편, 그들의 세력기반인 개경을 벗어나기 위해 서경천도를 추진했으나 갑자기 병으로 죽음으로써 실현되지 못하였다.
고려의 왕권이 어느 정도 안정된 시기는 광종 때부터였다. 광종은 즉위 후 온건한 방법으로 호족세력을 무마하면서 왕권의 안정을 꾀해 기반을 세우고 서서히 호족세력의 억제수단을 마련하였다.
우선 956년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였다. 이로써 호족들의 많은 노비가 해방되어 그들의 경제적·군사적 기반이 약화되었고, 반면 양인을 확보하게 되어 국가의 수입이 증가하였다. 958년후주()의 귀화인 쌍기()의 건의에 따라 과거제도를 실시해 신진관리를 채용하였다. 이로써 개국공신계열의 훈신이 타격을 받고 대신 새 관료를 밑받침으로 한 왕권의 강화를 보게 되었다.
이어 960년 백관공복()이 제정되어 모든 관리의 복색을 계급에 따라 자삼()·단삼()·비삼()·녹삼()의 네 등급으로 구분하였다. 이러한 계층의 편제는 왕권확립의 표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호족들의 불만이 커지자 광종은 숙청작업에 나서게 되었다. 960년 대상() 준홍(), 좌승() 왕동() 등 개국공신계열을 무자비하게 죽여 왕권의 확립을 꾀하였다.
이러한 의지는 광덕()·준풍() 등의 독자적인 연호 사용과 개경을 황도(), 서경을 서도(西)라 했으며, 스스로 황제의 칭호를 사용한 데도 나타난다. 이러한 시책에 의해 건국 초의 불안정한 왕권이 안정되고 중앙집권화가 진전되었다.

국가기반의 확립

고려가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를 마련하고 국가기반이 확립된 것은 성종 때였다. 광종이 중앙집권체제 확립의 기반을 마련했지만 그것은 완전한 것이 못되었다. 광종이 죽고 경종이 975년 즉위하자 개혁정치의 주역들이 제거되고 반동정치가 행해졌다.
그러나 중앙집권화정책은 경종 때도 계속되었다. 일부 보수세력이 정치의 대권을 행사했지만 그들 개국공신계열의 세력은 약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중앙집권정치의 표현은 976년 전시과의 제정으로 나타났다. 전시과의 실시는 중앙관료들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주고 동시에 그들을 중앙집권체제 안에 편입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고려 초기의 중앙집권화정책은 성종에 이르러 일단락을 짓게 되었다. 성종은 최승로()의 보필을 받아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삼고 당나라 제도를 받아들여 내외의 정치제도를 정비하였다. 982년 중앙관제를 제정해 집권정치를 실행할 수 있는 정치적 기구를 마련하였다.
이어 983년 전국에 12목()을 설치해 처음으로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특히, 12목의 설치로 지방의 자치적인 향호()가 중앙정부의 통제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 때 향직이 개정되어 당대등()이 호장()으로 바뀌고, 병부()가 사병(), 창부()가 사창()으로 개칭되었다. 이는 이들 호족들이 지방관의 보좌역인 향리의 지위로 격하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지방의 자치적인 호족들을 중앙에서 파견한 지방관 밑의 향리로 떨어지게 했을 뿐 아니라, 그들을 중앙관료로 등용해 집권체제 안에 흡수하였다. 즉, 호족의 자제들을 뽑아 개경의 학교에서 유학하게 하고 그들을 과거를 통해 관리로 임명하였다. 지방호족들이 교육정책을 통해 유교적 교양을 지닌 중앙관료로 전신함으로써 중앙집권체제는 확립되어갔다.

귀족사회의 발전

성종 때 확립된 중앙집권체제는 현종을 거쳐 문종 때 이르러 완성을 보게 하였다. 물론 성종부터 현종에 이르는 시기에 세 차례의 거란 침입과 그 뒤 여진족의 압력에 시달렸지만, 내부적으로 국가체제가 더욱 정비되어 귀족사회의 발전을 보게 되었다.
성종 때 삼성육부와 중추원·삼사가 설치되었는데, 목종 때 여러 잡서()가 증설되고, 현종 때 도병마사가 성립되어 중앙관제의 정비를 보게 되었다.
또한, 성종 때 성립된 지방제도도 1018년에 정비되어 경기()가 설치되고, 군현제가 완성되었으며, 주부군현의 향리의 수가 정해졌고, 육위()가 형성되었다. 목종 때 다시 이군()이 설치됨으로써 중앙군제의 완성을 보게 되었다.
이 시기에 경제제도도 정비되었다. 경종 때 처음 제정된 전시과는 998년 18과로 구분된 전시과로 개정되고(개정전시과), 1024년 자식 없는 군인의 처에게 구분전이 지급되고, 1049년 양반공음전시법()이 제정되었다.
1054년 세 등급으로 나누어진 전품제()가 실시되고, 1069년 양전()의 보수()가 정해졌으며, 1076년 최종적인 경정전시과로 고쳐지면서 경제제도의 정비를 보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사회구조가 정착되어 귀족사회가 발달하게 되었다. 즉, 국가체제가 확립됨에 따라 사회적인 지배세력이 정착되어갔는데, 이들은 문벌을 중요시하는 귀족의 신분이었다. 이러한 귀족사회는 문종 때에 이르러 절정기를 맞았다. 이 때 고려는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면에 걸쳐 황금기를 이루었다.

무신정권의 전개

귀족사회의 동요

고려의 귀족사회는 문종 때 전성기를 이루어 이후 한 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문벌귀족들은 과거와 음서를 통해 관직을 독점하고 정치권력을 장악했으며, 관직에 따른 전시과나 공음전 외에 사전을 받고, 특히 권력에 의한 불법적인 겸병을 통해 막대한 사전을 확대하였다. 이러한 정치권력과 경제력의 특권적 확대는 이를 둘러싼 귀족 사이에 내부적 분열을 일으키고 치열한 자기항쟁을 불러일으켰다.
귀족사회의 모순으로 시작된 지배세력 사이의 상호분쟁은 전통적인 문벌귀족에 대한 지방출신의 신진관료세력과의 대립으로 나타났다. 인주 이씨()[경원 이씨()] 등 보수적인 집권세력에 도전하는 지방향리출신의 신진관료가 대두해 서로 대립하였다. 그 구체적 사건이 인종 때 일어난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이었다.
이자겸의 난은 이자겸 일파가 지방출신 신진관료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벌인 정치적 책동이었다. 이자겸은 인종에게 두 딸을 왕비로 들여 권세를 잡고, 마침내 인종을 폐해 스스로 왕이 되려는 야심을 품었다.
이에 1126년김찬()·안보린() 등 국왕의 측근세력이 이자겸을 제거하려 거사하였다. 이들은 문벌귀족에 반대해 왕권을 옹호하려는 세력으로 신진관료들과 맥락을 같이하는 무리들이었다.
그러나 이 거사는 이자겸의 일당인 척준경()의 군사행동으로 실패하였다. 그 뒤 이자겸은 인종을 가두고 살해하려고 하는 등 횡포를 다했으나, 내부의 분열로 이자겸이 축출되어 제거됨으로써 인주 이씨는 몰락하였다. 따라서, 이 사건은 귀족사회가 붕괴되는 발단이 되었다.
묘청의 난은 개경의 문벌귀족에 대립하는 지방신진세력의 반항운동이었다. 이자겸의 난 때 궁궐이 불타 개경은 황폐되고 분위기는 어수선했으며, 밖으로 금나라에 사대의 예를 취하게 되어 백성들이 실망하게 되었다.
이러한 내외의 정세를 정치적으로 이용해 개경의 문벌귀족을 넘어뜨리고 새로운 혁신정치를 꾀하려 한 것이 묘청()·백수한()·정지상() 등 서경세력이었다.
묘청 등은 개경의 지덕은 쇠하고 서경의 지덕은 왕성하므로 서경에 천도하면 천하를 아우를 수 있고, 금나라도 항복하며, 해외의 모든 나라가 조공을 바칠 것이라 하였다. 이들은 서경의 명당자리라는 곳에 대화궁()을 짓고, 칭제()·건원()을 내세우며 금나라 정벌까지 주장하였다. 이것은 당시 풍미하던 풍수지리설을 이용해 사대적인 개경의 문벌귀족정치를 벗어나 서경에서 자주적인 혁신정치를 실행해보려는 것이었다.
묘청의 서경천도론은 문벌정치로 약화된 왕권의 부흥을 꾀한 인종에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김부식()을 대표로 한 개경파 문벌귀족들의 반대로 실행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묘청 등은 1135년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켜 국호를 대위(), 연호를 천개()라 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천견충의군()이라 칭했는데, 여기에서도 그들의 자주적인 의식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묘청군은 김부식이 이끈 관군에게 토벌되어 1년 만에 진압되었다.
이와 같이, 두 난은 일단 수습되기는 했지만, 귀족사회의 모순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귀족사회는 그 근저로부터 동요되고 점차 붕괴의 길을 걷게 되었다.

무신의 반란

고려의 귀족사회는 1170년에 일어난 무신란에 의해 붕괴되었다. 무신란의 발생 요인은 기성문벌귀족과 신진관료 사이의 대립으로 인한 귀족사회 내부의 모순에 있었다. 그러나 무신란의 직접적인 동기는 귀족정권의 대무신정책의 모순이라 할 수 있다.
고려는 양반제도를 만들어 문반과 무반을 하나의 관계체계 안에 일원적으로 편성하고, 법제적으로 동등하게 대우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숭문천무정책()으로 무반에 대한 차별이 심하였다.
귀족은 문반직에 있는 자들로만 구성되어 정치권력을 차지했고, 심지어 군대를 지휘하는 병마권까지 장악해 무반은 다만 문신귀족정권을 보호하는 호위병의 지위로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양반이라 하는 법제적 지위를 근거로 삼고 거란·여진과의 전쟁을 기회로 현실적인 세력을 축적해나갔다. 1076년에 개정된 전시과에서 무반에 대한 대우가 좋아지고, 1109년무학재()가 설치된 것은 그것을 반영한 것이었다. 귀족정권의 천무정책에도 불구하고 무반의 실질적인 지위의 상승이 무신란을 일으켜 무신정권을 세울 수 있는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또한, 문신귀족정권에 대한 군인들의 불만은 무신봉기의 한 요인이 되었다. 고려의 군인들은 일반 농민층으로 충당되었다. 그런데 문반귀족의 대토지겸병으로 농민들은 토지를 잃었으며, 군인전마저 문신들에게 빼앗겨 불만이 컸다. 이러한 군인들의 불만이 무신들의 불평과 결합되어 귀족정권타도에 동원되도록 하는 요인이 되었다.
이와 같은 요인들에 의해 1170년 무신란이 폭발되었다. 태평호문의 군주라 일컬어진 의종이 문신들과 함께 보현원()에 놀러갔을 때, 호위한 무신 정중부·이의방()·이고() 등이 정변을 일으켜, 문신들을 죽이고 의종을 폐한 뒤 왕의 동생인 명종을 옹립하였다. 이들 무신들은 스스로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고 정권을 잡아 무인정치를 실시하였다.
이렇게 보면, 무신란의 발생과 무신정권의 출현은 결코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고, 문신귀족정치의 누적된 모순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였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귀족사회는 붕괴되고 무신정권이 성립되어 정치적·경제적·사회적으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무신란은 고려시대사의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무신정권의 교체

무신정권은 1270년임연() 부자가 몰락할 때까지 꼭 1백년간 계속되었다. 그 동안 무신들은 초월적인 권력을 가진 무인집정을 정점으로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고 정권을 독점하였다. 무신정권기는 크게 형성기, 확립기, 붕괴기의 셋으로 나눌 수 있다.
형성기는 정중부의 집권 이후 1196년 최충헌()이 이의민()을 제거할 때까지의 명종시대를 말한다. 이 기간은 아직 무신정권의 기반이 확립되지 못해 무인집정의 지위(무신정권의 제1인자)가 불안정하고, 무신정치는 무반세력의 집합체인 중방()을 중심으로 실행되던 시기이다.
따라서, 종래의 문반세력의 반항이 일어나고, 무신상호간에도 치열한 정권다툼이 전개되었다. 1173년 동북면병마사(使) 김보당()이 의종복위운동을 일으켜 거병했으나 실패했는데, 이것은 무신정권에 대한 문신세력의 반항이었다. 이듬해 서경유수 조위총()이 동북면 지방민의 불만을 이용해 정중부정권의 타도를 부르짖고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지만 역시 진압되었다.
또한, 무인집정 사이에도 내분이 일어나 정권이 자주 교체되었다. 1171년 이의방이 이고를 주살하고, 1174년 정중부가 이의방을 제거해 정중부가 단독으로 정권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정중부도 1179년 장군 경대승()에게 살육되었고, 1183년 경대승이 병사하자 이의민이 집권했지만, 그도 1190년 최충헌에게 숙청되고 말았다.
최충헌은 과단성 있는 전제정치로 무신정권의 안정을 꾀해 최우()·최항()·최의()에 이르는 4대 62년간의 최씨정권을 지속시켰다. 이 기간이 바로 무신정권의 확립기였다.
이 때 교정도감을 설치하고 막대한 사병을 조직해 무력기반으로 삼고, 광대한 토지를 점유해 경제력을 형성하는 등 자체적인 권력기반을 확립해 전형적인 무신정권의 형태를 갖추었다. 이것은 형성기의 무인집정에 비해 커다란 변화였다.
최충헌이 명종과 희종을 폐하고, 신종·희종·강종·고종을 세우는 등 마음대로 국왕을 폐립하는 초월적인 권력을 행사한 것도 독자적인 권력기반을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 때는 형성기와는 반대로 일반무인들의 옹호가 필요 없게 되어 오히려 무반과 중방을 억압하고 문신을 보호하는 역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1258년(고종 45)최의가 김준()·임연() 등에 의해 제거됨으로써 4대에 걸친 최씨정권도 무너지고 무신정권은 붕괴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처음 김준이 무인집정이 되어 정권을 잡았으나, 1268년 임연에게 빼앗기고 다시 아들 임유무()에게 전해지는 사이에 점차 약화의 길을 걸었다.
김준·임연 부자 등도 무인집정의 지위를 표시하는 교정별감이 되어 무인정치를 계속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미 독자적인 집정기구와 무력장치로서의 사병집단, 그리고 이를 유지하기 위한 경제기반이 약화되고 무인집정의 지위도 불안해졌다.
이와 같이, 김준·임연 정권은 자체기반이 약화되어 스스로 무너지는 내부적 요인이 있었지만, 이를 붕괴하게 한 결정적 요인은 밖으로부터의 압력이었다.
당시 몽골의 간섭이 무신정권의 존속을 불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몽골은 항몽의 주동자인 무신정권의 붕괴를 꾀했고, 고려 국왕도 무인정치로 거세된 왕권의 회복을 바랐으므로 양자는 결합되어 임씨정권을 타도하려 했던 것이다.
1270년 몽골세력의 옹호를 받으며 귀국하고 있던 국왕이 강화도에서 개경으로의 환도를 명했으나, 임유무가 이를 듣지 않자 홍문계()와 송송례() 등이 삼별초를 움직여 그 일당을 제거하였다. 이에 왕정은 복구되고, 무신정권은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농민·천민의 봉기

무신란 뒤에는 무신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문신계의 반항과 정권을 탈취하기 위한 무인상호간의 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으며, 농민과 천민의 봉기가 계속 일어났음이 특징적인 현상이었다.
농민과 천민의 봉기는 양반관리들의 정치적 반란과는 달리 사회적·경제적 모순에 대한 하층계급의 반항이었으므로 ‘민란’이라 할 수 있다. 무신란으로 정권을 잡은 무인들이 토지를 겸병해 민전을 빼앗고, 지방관리의 가렴주구로 농민의 생활이 곤궁해지자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무신정권기의 민란은 명종·신종 때의 30년간에 집중적으로 발생하였다. 무신정권 형성기인 명종 때와 최충헌의 독재정치가 자리잡지 못한 신종 때는 통제력이 약했으므로 민란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민란은 처음 서북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은 그 지역이 개경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또 특수한 군사지대였으므로 제일 먼저 무신정권에 대한 반항을 일으킬 수 있었다. 1172년 서북계의 창주()·성주()·철주()의 세 고을 주민이 수령의 탐오와 주구에 반항해 민란을 일으켰다. 1174년 서경유수 조위총의 난 때도 많은 농민이 참가했고, 조위총의 난이 평정된 뒤에도 나머지 무리들이 계속해 1179년까지 민란을 일으켰다.
서북계의 서적(西)과 더불어 남부지방에서도 남적()이라 불리는 민란이 발생하였다. 같은 민란이지만 서적이 국방지대의 군사적 조건 위에서 봉기했다면, 남적은 농민생활의 불안에서 일어난 순수한 농민반란이었다.
남도의 민란은 1176년 공주 명학소()에서 망이()·망소이()가 일으킨 이후 크게 번져나갔다. 이들은 한때 공주를 함락시키고 관군을 무찔렀으나 정부의 회유책으로 항복했으며, 이듬해 다시 봉기해 충청도의 거의 모든 군현을 점령했지만, 정부의 토벌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 ‘망이·망소이의 난’은 농민을 주체로 하면서도 소()에서 일어난 점에서 농민반란과 함께 부곡() 천민의 신분해방운동이 복합된 것이라 하겠다.
그 뒤 1182년 충청도의 관성(: 지금의 옥천)과 부성(: 지금의 서산)에서 수령의 탐학에 반항해 농민의 반란이 일어났다. 또 전주에서 군인과 관노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가장 대규모의 민란은 1193년에 시작된 경상도일대의 남적이었다.
이 때 김사미()는 운문(: 지금의 청도)에서, 효심()은 초전(: 지금의 울산)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서로 공동전선을 펴서 그 세력이 경상도 전역에 확장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밀성(: 지금의 밀양)싸움에서 정부군에 패해 7천여 명이 죽음으로써 마침내 진압되고 말았다.
또 1199년(신종 2) 명주(: 지금의 강능)에서 일어난 민란이 확대되어 삼척·울진까지 함락시키고, 동경(: 지금의 경주)에서도 반란이 일어나서 서로 합세하였다. 이듬해 진주에서 공사노비의 반란이 일어나고, 합주(: 지금의 합천)에서 부곡민의 반란이 일어나 서로 연합전선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경상도일대의 민란은 마침내 1202년 경주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의 반란으로 확대되었다. 이 때 경주 주민들은 신라의 부흥을 내세우고 운문산과 울진·초전의 반란군과 연합해 기세가 자못 강성하였다. 그러나 최충헌의 과감한 토벌로 이듬해 평정되었다.
무신정권기에는 농민의 봉기와 함께 천민·노비들의 반란도 있었다. 망이·망소이의 난은 농민과 천민의 반란의 연합된 형태였다. 천민과 노비 등 천민계층은 중앙통제력의 약화를 기화로 신분 해방을 꾀해 봉기하였다. 천민반란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1198년 개경에서 일어난 사노 만적()의 난이었다.
만적은 공사노비들을 모아놓고 “무신란 이후 공경대부가 천례()에서 많이 나왔으므로 우리들도 최충헌과 중신들을 죽이고 천민에서 해방되면 공경장상이 될 수 있다.”고 외치고 대규모의 반란을 획책했는데, 중도에 발각되어 진압되고 말았다. 노비·천민은 농민과 같은 피지배층으로 시달림을 받았으므로 함께 결합해 민란을 일으켰는데, 특히 이들은 천민신분에서의 해방을 목표로 했다는 점에서 농민봉기와 차이가 있다.
명종·신종 때 집중적으로 일어났던 민란은 모두 진압되고, 최충헌의 강력한 독재정치로 무신정권이 안정되자 그 기세가 꺾이게 되었다. 그러나 무신정권기의 민란은 그 역사적 의의가 결코 적지 않았다.
무신정권은 민란의 평정에 전력을 기울이는 한편, 농민을 위한 시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부는 난민을 위로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권농()을 하고 빼앗긴 토지를 돌려주며 조부()를 감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농민과 천민의 반란이 신분사회의 변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다. 즉, 무신란 이후의 민란은 귀족중심의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탈피해 새로운 사회체제로 넘어가게 한 원동력이 되었으며, 그것은 고려 사회의 발전에 큰 구실을 하였다.

권문세족의 집권과 사대부의 대두

원의 간섭

1270년 무신정권이 붕괴되고 왕정이 복구됨으로써 고려 사회는 커다란 전환을 보게 되었다. 몽골세력의 옹호로 왕권은 회복되었지만 대신 그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그것은 삼별초의 난을 몽골군의 도움으로 진압한 뒤 본격화되었다.
고려가 몽골에 굴복한 뒤 최초로 받은 압력은 일본정벌에 동원된 일이었다. 고려는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원정에 징발되었다. 이 때 원나라의 명령에 따라 군량을 공급하고 함선을 건조했으며, 직접 군사를 동원해 피해가 매우 컸다.
또한 원나라의 관청이 설치되어 내정을 간섭하였다. 원나라는 처음 일본정벌을 위해 고려에 정동행성을 설치하더니, 1280년 일본정벌을 단념한 뒤에도 이를 존속시켜 고려통치의 관부로 삼았다.
그러나 실제로 정동행성의 장관인 승상은 자동적으로 고려왕이 겸하고, 그 밑의 관원도 고려왕이 임명한 고려인으로 채워져 명의상·형식상의 존재에 불과했고, 다만 원나라와 고려 사이의 의례적인 행사를 맡았다. 오히려 정동행성의 부속기구인 이문소()가 원나라의 세력을 등에 업고 불법적으로 사법권을 행사해 폐단이 많았다.
또한, 지방에도 원나라의 관부가 설치되어 영토의 지배권을 빼앗기게 되었다. 이미 1258년 화주(: 지금의 )에 원나라의 쌍성총관부가 설치되어 철령 이북의 땅을 차지하더니, 1270년 서경에 동녕부를 설치해 자비령 이북의 땅을 다스렸다.
삼별초의 난을 평정한 1273년에는 제주도에 탐라총관부()를 두어 목마장을 관장하였다. 동녕부와 탐라총관부는 고려의 요청으로 충렬왕 때 반환되었으나 쌍성총관부는 공민왕이 무력으로 탈환할 때까지 남아 있었다.
그리고 원나라의 간섭으로 고려의 관제 자체도 격하되었다. 삼성육부의 체제는 상국()의 제도로 분수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을 합쳐서 첨의부()라 하고, 육부는 사사()로 축소되었으며, 중추원은 밀직사()로 개칭되었다.
양부()의 합좌기관인 도병마사는 원나라의 관제가 아니었지만, 그 기능이 확대되었기 때문에 도평의사사로 개칭되었고, 왕실의 용어도 격을 낮추어 부르게 되었다.
역대왕은 원나라의 공주를 왕비로 받아들여 이른바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었기 때문에 황제의 칭호에 비기는 것을 피해야 하였다. 조() 또는 종()을 붙였던 왕의 묘호를 왕()으로 고쳐야 했고, 짐()은 고(), 폐하는 전하, 태자는 세자로 개칭하게 되었다.
원나라의 간섭은 경제적 수탈로도 나타났다. 원나라는 여러 가지 명목으로 공물을 강요해 금·은·포 등을 빼앗아갔다. 특히 인삼·잣·약재·매(해동청) 등 특산물을 요구해 많은 부담을 안겨주었다. 심지어 동녀()·환관()까지도 요구해 고통은 더하였다.
또한, 원나라는 그들의 법속까지도 따르도록 강요하였다. 왕실과 상류층에서는 몽골식 이름을 가지고 몽골어를 사용했으며, 몽골식 의복과 변발이 유행하게 되었다. 또, 왕족의 혈족혼을 비난하고 노비제도의 개혁도 요구했지만, 고려의 반대로 실시되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원나라는 정치·경제·사회 모든 면에 간섭을 가했으나 국권은 엄연히 존속되었다. 비록, 형식적으로 원나라의 정동행성이 설치되었지만, 고려의 국내정치는 고려정부에 의해 자주적으로 수행되었다. 더욱이, 외면적으로는 친원정책을 썼지만 내면적으로는 원나라에 대한 반감이 온존해 때로 반원운동으로 폭발하기도 하였다.

권문세족의 집권

고려 후기에 정치권력을 장악한 것은 권문세족이었다. 이들은 1백년간의 무신정권과 그 뒤의 대원관계가 진전되는 가운데 재편성된 사회세력이었다.
먼저 무신정권기에 새로 부상한 무반세력이 권문세족에 편입되었다. 비록, 무신정권은 몰락했지만 무반세력은 왕정이 복구된 뒤에도 유력한 가문으로 등장하였다.
대표적인 가문으로는 김취려()의 언양 김씨()와 채송년()의 평강 채씨() 등이 있다. 고려 후기에 무반가문의 권문세족으로의 등장은 고려 전기에 문벌귀족이 문반가문으로만 구성된 것과는 크게 다른 점이었다.
또 하나의 새로운 세력은 원나라와의 관계를 통해 대두한 가문이었다. 몽골어의 역인으로 성장한 조인규()의 평양 조씨()는 그 대표적인 가문이었다. 응방()을 통해 진출한 윤수()의 칠원 윤씨()와 삼별초의 난과 일본정벌에서 무공을 세워 출세한 김방경()의 안동 김씨() 등도 원나라와의 관계를 통해 대두하였다.
또한 고려 전기의 문벌귀족도 그대로 지배세력으로 존속되었다. 인주 이씨나 정안 임씨()·경주 김씨()·파평 윤씨() 등 전통있는 문벌귀족이 고려 후기에도 여전히 권문세족으로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었다. 이는 고려 사회의 뿌리깊은 문벌관념의 영향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들 문벌귀족의 전통적인 권위에 대해 실질적인 정치권력은 크지 못했다는 것이 권문세족의 새로운 성격이라 하겠다.
충선왕 즉위년의 하교에는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재상지종()이 열거되고 있다. 여기에 경주 김씨·언양 김씨·정안 임씨·인주 이씨·안산 김씨()·철원 최씨 등 열다섯 가문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전통적인 문벌귀족과 무신란 뒤에 새로 진출한 무반가문, 그리고 대원관계를 통해 대두한 세력들이다.
이들 가운데 당시 세력은 강력하지 못했으나 전기 이래로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은 가문이기 때문에 열거된 경우가 있고, 반대로 상당한 실력은 가졌지만 전통적인 문벌관념에 의해 빠진 가문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 재상지종은 대체로 고려 후기의 지배세력인 권문세족을 가리킨 것이라 할 수 있다.
권문세족은 양부인 첨의부와 밀직사의 재추()가 되어 도평의사사에서 합좌해 국정을 보았다. 처음 도병마사에는 재신 5명 추신 7명이 합좌했으나, 후기에는 도평의사사의 기구가 확대되어 70∼80명에 이르는 재추가 회의에 참가하고, 그 기능은 최고의 정치기관으로 대두해 도당()이라 불렸다. 이들 재추는 권문세족들이 독차지하였다.
그들은 경제적으로도 대토지의 소유자가 되었다. 이들은 공식적으로 관리에게 주는 녹과전이나 녹봉보다는 불법적인 토지집적을 통해 이룬 농장()을 경영해 부를 축적하였다. 농장은 면세와 면역의 특권 등 사적지배력이 강한 토지였는데, 권문세족은 산천을 경계로 하는 광대한 농장을 소유하였다.
이와 같이, 후기의 권문세족은 높은 관직을 차지하고 광대한 농장을 경영하는 지배층으로 보수적인 사회세력이었다. 이들은 문화적 소양과는 거리가 먼 성향을 가졌고, 대체로 친원적인 존재들이었다. 따라서, 권문세족은 기성의 정치권력을 유지하고, 경제기반을 존속시키기 위해 원나라의 세력을 이용하고, 새로운 개혁에 반대하였다.
후기의 권문세족이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재상지종으로 문벌을 중요시한 점은 전기의 문벌귀족과 비슷하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그 성분부터 다른 데가 있었는데, 무반가문이나 부원세력 등 종래의 문벌관념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새로운 세력이 편입되었다.
뿐만 아니라 종래의 문벌귀족이 가문 자체의 권위로 귀족적 특권을 누린 데 반해, 권문세족은 현실적인 관직을 통해 정치권력을 행사했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이제 고려의 지배세력은 가문위주의 문벌귀족에서 보다 관료적 성향이 짙은 권문세족으로 발전했던 것이다.

사대부세력의 대두

고려 후기에는 지배세력인 권문세족에 도전하는 새로운 사회세력으로 신흥사대부들이 대두하였다. 신흥사대부는 권문세족의 정치권력의 독점과 농장의 확대에 따른 정치·경제·사회적 혼란을 시정하기 위해 개혁정치를 주장했다. 이리하여 보수적인 권문세족과 진보적인 신흥사대부는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신흥사대부는 최씨정권시대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최씨정권은 정국이 안정되자, 그들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학문적 교양이 높고 행정실무에 밝은 문인들을 등용하였다. 이들은 유교적 지식이 부족한 무신정권에 대해 학문과 행정능력을 보충해주는 관료적 학자가 되었으며, 이들이 바로 신흥사대부였다. 이들은 무신정권의 붕괴 이후 더욱 활발하게 중앙정계에 진출해 커다란 사회세력으로 대두하게 되었다.
신흥사대부는 권문세족에 비해 가문이 낮고 지방의 향리층 출신이 많았다. 고려의 향리는 후기의 사회적·경제적 변동을 겪으면서 중소지주로 성장하였다. 향리자제들은 문학적 교양을 쌓고 과거를 통해 중앙의 관리로 진출하였다. 따라서, 신흥사대부는 이미 중앙정계에서 보수적 세력기반을 구축했던 권문세족과는 대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권문세족에 대해 미약한 신흥사대부의 개혁운동은 성공하기 어려웠다. 더욱이, 권문세족들이 원나라의 세력과 결탁하고 있는 이상 그것은 기대할 수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충선왕의 개혁정치의 실패에서 엿볼 수 있다.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하자 전반적인 관제개혁을 단행해 정방을 폐지하고 사림원을 설치하면서 이를 중심으로 개혁정치를 수행하였다. 이 때 개혁을 주도한 사람들은 과거를 통해 중앙정계로 진출한 지방출신의 신흥사대부들이었다. 그러나 충선왕과 사대부의 개혁정치는 원나라와 결탁된 권문세족들의 공격을 받아 실패하고, 충선왕도 퇴위하고 말았다.
신흥사대부의 개혁운동은 공민왕 때 이르러 본격화되었다. 이 때 신흥사대부의 세력이 자못 성장했고, 또한 명나라가 일어나 원나라의 세력이 쇠퇴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공민왕은 사대부를 기반으로 개혁정치를 실행할 수 있었다.
공민왕의 개혁운동은 안으로 권문세족을 억압하고, 밖으로 그들의 배후인 원나라의 세력을 축출하는 것이었다. 우선 공민왕은 기철() 등 부원파를 제거하고, 정동행성의 이문소를 혁파하며 쌍성총관부를 무력으로 회복하는 반원정책을 강행하였다. 그리고 새로이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하고, 사신을 파견해 친명정책을 뚜렷이 하였다.
또한, 대내적으로 원나라의 간섭으로 변형된 관제를 삼성육부의 구관제로 복구하고, 권문세족의 관직독점의 중심기관이었던 정방을 폐지하였다. 특히, 승려 신돈()을 등용해 과감한 개혁정치를 단행해 오랫동안의 폐단을 시정하려 하였다.
먼저 권신의 중심인물인 이공수()·경천흥()·이수산() 등을 축출하고, 대신 문벌이 낮은 사대부를 등용하였다. 또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해 권문세족이 빼앗은 전민을 원소유주에게 돌려주고, 노비로서 양민이 되고자 호소하는 자는 모두 해방시켜주었다.
이러한 공민왕과 사대부들의 대외·대내적인 개혁정치는 아직도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권문세족의 반발에 부딪쳤다. 권문세족은 공민왕의 반원정책과 혁신정치로 인해 자신들의 세력기반이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해 보수적인 반동정치를 폈다. 그에 따라 신돈은 제거되고, 공민왕도 피살되어 사대부들의 개혁운동도 좌절되고 말았다.

국제정세의 변화와 위화도회군

내부적으로 권문세족과 신흥사대부 사이의 대립이 격화되고 있을 때, 밖으로는 왜구·홍건적의 침입과 원·명 교체에 따른 대외관계의 변동이 일어났다.
고려 후기에는 왜구의 창궐로 심한 고통을 겪었다. 왜구는 대마도() 등 일본 근해의 해적들로 이미 고종 때부터 연해에 출몰하였다. 특히 공민왕 때는 거의 매년 전국각지에 침구하고, 심지어 강화도까지 약탈을 당해 개경에 계엄령이 내리기까지 하였다. 왜구의 창궐로 해상의 조운이 끊겨 중앙정부의 재정이 곤란하게 되었으며, 연해의 농민들이 약탈을 당해 큰 화를 입게 되었다.
고려는 왜구를 막기 위해 일본정부와 외교적 교섭을 벌였으나, 일본정부 자체가 이를 억제할 힘이 없었기 때문에 별 효과를 거둘 수 없었다. 이에 국방력을 강화하고 적극적인 토벌에 나섰는데, 그 토벌전에서 큰 공훈을 세운 장군이 최영()과 이성계였다.
이 때 최무선()은 중국 상인으로부터 화약제조방법을 배워 화포()를 만들어 왜구를 무찔렀고, 박위()는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해 그 기세를 꺾었다.
공민왕 때는 또한 대륙으로부터 홍건적의 침입을 받았다. 공민왕이 즉위할 무렵 원나라가 쇠퇴하고, 각지에서 한족()의 봉기가 일어났다. 홍건적은 그러한 한인반란군의 하나로, 허베이() 영평()에서 한산동()·유복동() 등이 일으켜 북중국에서 원나라 세력을 축출하고 그 세력이 강성했는데, 1359년 원군의 반격을 받은 한 무리가 요동으로 쫓겨와 고려를 침범하였다.
이 때 홍건적은 서경까지 이르렀으나 고려군의 반격으로 큰 피해를 입고 되돌아갔다. 그러나 1361년 홍건적은 다시 침입해 개경이 함락되고, 왕은 안동으로 피난했지만, 정세운()·안우()·김득배()·이방실() 등이 무찔러 몰아내었다.
한편 한인반란군의 한 사람인 주원장()이 1368년 중국 난징()에서 명나라를 세우고, 원나라의 대도(: )를 함락시켜, 원나라가 멀리 북으로 달아나는 원·명 교체가 일어났다. 이에 반원정책을 추구하던 공민왕은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고 연호를 사용해 친명정책을 쓰게 되었다.
그러나 국내에는 아직도 부원세력의 기반이 잔존하고 있었으므로, 고려는 외교정책을 놓고 대립하게 되었다. 공민왕을 정점으로 신진사대부는 친명파를 구성했고, 친원파는 전통적으로 원나라와 연결되고 있었던 권문세족으로 형성되고 있었다.
이러한 친원·친명의 대립 속에서 공민왕은 1374년 반대파에 의해 살해되고, 중립파인 이인임()의 추대로 우왕이 즉위하자, 고려는 원나라와 명나라에 걸치는 양면정책을 추구하였다.
즉, 이인임 일파는 우왕이 즉위하자 곧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그 승습()의 승인을 요청하는 한편, 북원()에 사신을 파견해 국교를 회복했던 것이다. 그러나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는 친원·친명 양세력의 대립관계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명나라는 고려가 북원과 통하는 것을 힐책하고 무리한 공물을 요구해 고려사신을 유배하는 등 고압적인 태도를 취해 고려조정을 분개하게 했는데, 1388년 원나라의 쌍성총관부 관할하에 있던 철령 이북의 땅을 명나라의 직속령으로 삼겠다고 통고해왔던 것이다. 이 때 정권을 쥐고 있던 최영은 크게 분개해 도리어 이 기회에 명나라가 차지한 요동지방까지 회복하려 요동정벌을 꾀하게 되었다.
1388년(우왕 14) 최영이 팔도도통사가 되고, 조민수()를 좌군도통사,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요동정벌에 나섰다. 그러나 국내외의 정세로 보아 요동정벌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출병을 반대했던 이성계 일파는 위화도에서 회군해 개경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반대파인 최영 등을 제거하고, 우왕을 축출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것이 이성계가 고려를 넘어뜨리고 조선을 건국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성계의 집권

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 일파가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권문세족의 세력은 도태되었다. 특히, 같은 회군공신이지만 권문세족에 속했던 조민수가 우왕의 아들 창왕을 옹립해 권세가 컸는데, 그가 이성계 일파에 의해 실각되고, 창왕마저 신돈의 아들이라 해 축출되자, 정치적 실권은 완전히 권문세족에서 사대부세력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정권을 잡은 사대부들이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은 사전개혁이었다. 권문세족들의 물질적 기반인 사전을 혁파해 새로운 토지제도를 제정하려 한 것이다. 전제개혁은 이성계 일파인 조준()·정도전() 등의 힘으로 추진되었는데, 공양왕이 즉위하고 이성계의 실권이 강화되면서 실천에 옮겨졌다.
먼저 전국의 토지개량이 시작되어 1390년에 완료되고 종래의 공사전적을 모두 불태워버림으로써 전제개혁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그리하여 이듬해 과전법이 제정되어 공포되었다. 과전법의 시행으로 종래 권문세족이 차지한 사전이 혁파되고, 국가지배의 공전이 증가했으며, 관료들에게 과전을 급여해 신진관료층의 경제적 토대를 마련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성계 일파가 집권하는데 있어 사대부 내부의 또 다른 반대에 부딪쳤다. 사대부는 두 파로 갈라져 있었는데, 고려왕조의 적폐를 점진적으로 개혁하려는 온건파와 고려왕조 자체를 바꾸려는 역성혁명파였다. 이색()·정몽주() 등이 전자에 속했고, 조준·정도전·남은() 등은 후자에 속하였다.
그러나 군사대권을 장악한 이성계가 공양왕을 옹립하고, 전제개혁을 단행해 경제적 실권까지 잡음으로써 혁명파의 우세는 결정적인 추세가 되었다. 혁명파는 강력한 반대자인 정몽주를 죽인 뒤 공양왕을 내쫓고 이성계를 추대해 새 왕조를 개창하였다. 이로써 1392년 고려왕조는 끝나게 되었다.

고려의 제도

지배체제

중앙정치제도

고려의 중앙정치제도는 성종 때 마련된 삼성육부의 정부조직을 기간으로 하였다. 이전까지는 궁예의 관제를 답습해 광평성()·내봉성()·순군부()·병부()를 기간으로 한 정치제도를 실시했으나, 집권체제가 확립된 성종 때 비로소 당나라 제도에 따른 삼성체제()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고려의 정치제도는 당나라 제도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송나라 제도와 고려의 독자적인 제도가 섞여 있었다.
삼성육부는 당나라 제도를, 중추원·삼사()는 송나라 제도를 채용한 것이다. 반면 도병마사·식목도감()은 고려 자체의 필요성에서 생긴 것이었다. 이와 같이, 고려의 정치제도는 세 계통으로 구성되어 독특한 정치체제와 권력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정치기구의 중심이 된 것은 삼성육부의 조직이었다. 삼성은 원래 중서성()·문하성()·상서성()을 말하지만, 고려에서는 중서성과 문하성이 합해 중서문하성()이라는 단일기구를 이루고 최고정무기관으로 재부()라 일컫게 되었으며, 그 장관인 문하시중이 수상이 되었다.
중서문하성의 관원은 2품 이상의 재신( : ·)과 3품 이하의 성랑( : ·)으로 구성되었다. 재신은 백관을 통솔하고 국가정책을 의논, 결정하는 일을 보았고, 성랑은 간쟁()과 봉박()·서경()의 임무를 맡았다.
상서성은 같은 삼성의 하나이지만 실제는 중서문하성에서 결정된 정책을 실행하는 실무기관에 불과했고, 그 장관인 복야()의 지위도 낮았다. 상서성에는 육부가 예속되어 각각 국무를 분담했는데, 이·병·호·형·예·공의 순서로 고려의 독자적인 구성이었다.
육부에는 각각 정3품의 상서()가 장관이 되었지만, 수상은 이부, 아상(: )은 병부 등 재신이 육부의 판사가 되었다. 이것도 상서성이 중서문하성에 예속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당나라의 육부는 각기 사사()의 속사()가 달려 모두 24사의 조직을 이루고 있었으나, 고려의 육부는 각각 단사()의 간단한 조직이었다. 다만 이부에 고공사(), 형부에 도관() 등 두 속사가 있을 따름이었다.
중서문하성과 함께 고려의 중요한 정치기구는 중추원이었다. 중추원은 중서문하성의 재부에 대해 추부()라고 불려, 함께 재추 또는 양부의 이름을 가지는 권력기구를 이루었다. 중추원의 관원도 이원적으로 구성되어, 2품 이상의 추밀(, 즉 )이 군기()를 관장했고, 3품의 승선()은 왕명을 출납하는 비서 기능을 가졌다.
고려의 양대 정치기구인 중서문하성과 중추원의 양부 재추들이 모여 국가의 중대사를 회의, 결정하는 합좌기구()가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이었다. 도병마사는 대외적인 국방·군사 관계를 관장했고, 식목도감은 대내적인 법제·격식 문제를 다루는 회의기관이었다.
이 밖에 중요한 관부로 시정()을 논집()하고 백관을 규찰, 탄핵하는 어사대()가 있었다. 어사대는 중서문하성의 성랑과 함께 대간() 또는 성대()라고 불려 국왕에 시종해 언관의 구실을 담당하였다. 특히, 대간은 서경의 권한이 있어 왕권의 전제성을 규제하는 기능을 가졌다.
정치제도는 중앙집권적인 조직으로 되어 왕권에 유리하였다. 특히, 육부가 국왕에게 직접 상주하는 제도는 국왕으로 하여금 정부기구를 통할하는 권한을 가지게 하였다. 그러나 정치권력이 양부 재추에게 집중되고, 이들 재추는 문벌귀족들이 독차지하고 있었으며 대간의 간언·서경도 이들 귀족관리들의 커다란 권한이었다. 이것은 고려의 정치제도가 국왕과 귀족 사이의 권력의 조화 위에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지방제도

지방제도는 군현제도를 기간으로 해서 중앙에서 외관을 파견하는 중앙집권적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 건국 초기에는 지방에 수령이 파견되지 못하고, 호족들의 자치에 일임되고 있었는데, 성종 때 지방관의 설치를 보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지방에 외관을 파견한 것은 983년 12목의 설치를 시초로 하였다. 그 뒤 몇 차례의 개폐를 거듭하다가 1018년 지방제도가 일단락되게 되었다.
전국에 약 5백개의 군현이 존재했지만, 모두 외관이 파견되지 않았다. 『고려사』 지리지에 의하면, 전기에 수령이 파견된 주현()이 130개인 반면, 그렇지 않은 속현은 374개나 되었다. 이들 속현들은 수령이 설치된 주현에 예속되어 중앙의 간접지배를 받는 행정조직을 이루었다. 즉, 중앙정부에서 여러 군현 중 외관이 파견된 주현에 직첩()하는 행정체계를 이루고, 이들 주현이 속현을 관할하게 하였다.
그러나 주현의 수가 많아 이를 일률적으로 통제하기가 곤란했으므로, 몇 개의 큰 군현을 계수관()으로 삼아 중간기구의 기능을 띠게 하였다. 즉, 대개 14개가 되는 경()·도호부()·목()이 계수관으로서 관내의 일반군현을 통할해 향공()의 진상이나 외옥수()의 추검 등을 맡게 하였다. 그러므로 같은 군현이라 하지만 고려의 군현제는 계수관과 일반주현, 그리고 속현의 누층적 구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속현에 대한 외관의 증파로 주현의 수가 많아지자, 지금까지의 계수관에 의한 허술한 군현통제는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에 중기부터는 계수관에 대신해 중앙정부와 군현 사이의 중간기구로 5도()·양계()의 설치를 보게 되었다. 즉, 북부지방에는 양계, 남부지방에는 5도를 설치하고, 양계에는 병마사(使)를, 5도에는 안찰사(使)를 파견해 도내의 군현을 통할하는 상부행정구획으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중간기구가 지역에 따라 양계·5도로 구분되고, 다시 경기는 개성부()에 의해 통치되는 등, 전국을 삼원적인 지배양식으로 차이를 두었다는 점은 속현의 광범한 존재와 함께 고려지방제도의 미숙성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군현에는 그곳 지방출신이 호장·부호장 등 향리에 임명되어 수령 밑에서 직접 백성을 다스렸다. 향리는 주현뿐 아니라 외관이 없는 속현이나 부곡에도 설치되었다. 원래 호족출신인 향리는 조세·부역·소송 등 행정사무를 맡았으므로, 비록 수령의 보좌역이지만 실권은 커서 백성을 침탈해 폐단이 많았다.
이에 향리의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그 지방출신의 중앙고관을 사심관으로 임명해 향리를 통제하게 하고, 또 그들 향리자제를 기인으로 삼아 상경, 숙위하게 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따라서, 고려시대의 향리는 지방호족의 지위에서 점차 하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군사제도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는 군사제도의 정비에도 나타났다. 초기의 자치적인 지방호족의 사병은 집권체제를 확립함으로써 점차 국군의 일환으로 편입되었다. 이리하여 중앙에는 이군육위()가 성립되고, 지방에는 주현군()이 편성되었다.
중앙군은 이군육위의 8개 부대로 편성되었다. 이군은 응양군()·용호군()으로 구성된 국왕의 친위대로 근장()이라고도 했으며, 육위보다 우위에 있었다. 육위는 좌우위()·신호위()·흥위위()·금오위()·천우위()·감문위() 등으로, 핵심 부대는 좌우·신호·흥위의 3위로서, 개경의 경비와 국경의 방어까지 담당한 경군의 주력부대였다. 금오위는 경찰, 천우위는 의장, 감문위는 궁성문의 수위를 맡았다.
이군육위에는 모두 45개의 영()이 있었다. 영은 1천명으로 조직되어, 고려의 군대는 모두 4만5천명이 되었다. 그러나 평상시에는 결원이 많아 그보다 적었으며, 전쟁 때는 그 수가 증가해 오히려 이보다 많은 편이었다. 영은 병종()에 따라 보승()·정용()·역령()·상령()·해령() 등으로 구분되었는데, 그 중 보승·정용이 핵심전투병종으로 주력부대인 3위에 소속되었다.
이군육위의 부대장은 정3품의 상장군()이었고, 종3품의 대장군()이 부지휘관이 되었다. 이들 이군육위의 상장군과 대장군이 무반의 합좌기관인 중방()을 구성해 군사문제에 관한 회의를 했는데, 가장 서열이 높은 응양군 상장군이 의장이 되어 반주()라 칭하였다. 영의 부대장은 정4품의 장군으로 그들도 역시 합좌기관인 장군방()을 구성하였다.
이군육위의 경군은 처음에는 특정한 군반씨족()들에서 충당한 전문적인 직업군인이었다. 그들은 군역을 세습하는 대가로 군인전을 받아 생활기반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러한 군반제는 얼마 안되어 무너지고 대신 일반농민으로 군인을 충당하게 되었다. 이것은 고려 군인의 질을 저하시켜 뒤에 특수부대인 별무반()과 삼별초를 설치한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지방에는 남부 5도의 주현군과 변경지대인 주진군()으로 편성되었다. 5도의 주현군은 수령의 지휘 아래 치안과 방수 및 공역의 임무를 담당했는데, 이들은 일반농민들로 구성되어 농사에 종사하면서 군역을 치렀다. 양계는 국경지대였으므로 주진()에 초군()·좌군()·우군()을 중심으로 한 정규군이 주둔해, 예비군적인 주현군과는 다른 상비군적인 주진군을 이루었다.

교육·과거 제도

지배체제를 운영하는 인적 자원을 양성, 공급하는 방법이 곧 교육·과거 제도였다. 중앙집권적인 정치의 실행자로서 관료의 양성이 필요해 중앙과 지방에 학교를 설치했고, 이곳의 출신자들을 과거를 통해 관리로 선발하였다.
고려는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삼았으므로 유교교육을 받은 관리양성이 필요하였다. 이미 태조 때 개경과 서경에 학교를 세웠지만, 992년 중앙에 정식으로 국자감()이 설치됨으로써 교육제도의 기반이 확립되었다.
국자감은 당나라 제도를 채용해 설치한 일종의 종합대학으로, 국자학()·태학()·사문학() 및 율학()·서학()·산학()으로 구성되었다. 국자학은 문무관 3품 이상, 태학은 5품 이상, 사문학은 7품 이상의 자제가 입학하는 자격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 유학을 교육하였다. 잡학인 율학·서학·산학은 8품 이하의 자제나 서인이 입학하였다.
이와 같이, 같은 국자감 안에서도 신분과 관품에 따라 각 분과의 입학자격에 차이를 두었고, 또 유학이 우대된 반면 잡학이 천시된 것은 고려의 유교적인 귀족사회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성종은 지방자제들에 대한 교육에도 관심을 가져 그들을 상경시켜 습업()하게 하였다. 여기에는 성종의 중앙집권화정책에 따라 지방호족을 중앙관료화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987년 경학박사·의학박사 각 한명씩을 12목에 파견해 지방자제를 교육시켰다.
또 1127년 각 주에 향학()을 세워 지방교육기관으로 삼게 하였다. 이러한 고려의 지방교육에 대한 열성으로 지방문화는 향상되었으며, 지방호족의 자제들이 과거를 통해 중앙관리로 진출하는 기반이 되었다.
이들 교육기관에서 유교적 교양을 쌓은 사람들은 과거를 보고 관리가 되었다. 광종은 훈신을 억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과거제를 실시했는데, 과거에 합격한 사람들이 관리로 등용됨으로써 고려 관료제의 밑받침이 되었다.
과거제도는 제술과()·명경과()·잡과()의 셋으로 나누어졌다. 제술과는 시·부·송·책·논 등의 문학으로 시험하고, 명경과는 시·서·역·춘추 등 유교경전으로 시험해 함께 문신을 선발하는 과거인데, 제술과가 보다 중시되어 우대하였다. 잡과는 의학·천문·음양 지리 및 율학·서학·산학 등 기술관시험으로 그리 중시되지 못하였다.
무반을 선발하는 무과는 예종 때 실시했으나, 문반들의 반대로 폐지되었다가 고려 멸망 직전인 공양왕 때 비로소 실시되었다. 그러한 과거제도는 문예를 존중하는 문신 위주의 선발방법으로 무반이 멸시되고, 기술학인 잡학을 경시하는 풍조를 나타내었다.
그러나 과거 급제자 모두가 관리로 임명되는 것은 아니었다. 합격자에 비해 관직의 수가 적었기 때문에 과거합격의 성적과 그의 출신문벌이 관직임명에 작용되었다. 귀족가문의 급제자는 좋은 관직을 보임받았고 승진하는 데에도 유리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또한, 과거 외에 음서()가 있어 고관의 자제는 자동적으로 관리가 될 수 있었다. 5품 이상의 벼슬을 하면 그의 아들 하나는 관리로 들여보낼 수 있는 특권이 부여되었던 것이다. 이는 고려 귀족제도의 밑받침이 되었고, 고려를 문벌을 중시하는 귀족사회로 규정짓는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사회제도

사회신분의 구조

고려는 신분사회로서 가문에 따른 신분이 사회계층을 구분하는 기본조건이 되었다. 귀족이나 양인·천민 등 사회계층의 구분도 신분차이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이는 정치적·경제적·사회적인 지위를 결정하는 요인이 되었다. 특히, 지배층인 문벌귀족들의 특권을 독점하기 위한 폐쇄적인 사회정책은 신분제도의 엄격한 유지를 요구하였다.
고려의 사회계층은 지배층인 귀족·하급관리와 피지배층인 양인·천민으로 구성되었다. 이들 네 개의 계층은 세습되는 신분제로 인해 그 사이의 구별이 엄격하였다. 이와 같이, 신분제도는 네 계층이지만, 그 가운데 귀족이 제일신분으로 국가의 정치적 권력을 독점했기 때문에, 고려를 귀족사회로 일컫게 된 것이다.
귀족은 최고귀족이라 할 수 있는 왕실을 정점으로 문벌이 좋은 일부 특권신분으로 이루어졌다. 양반관료가 문반·무반의 관직을 차지했으나, 귀족이란 그들 품관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그들 관료 중 문벌이 좋고 고위관직에 오른 일부 특권층만을 가리켰다. 음서와 공음전시()의 특권이 5품관 이상에게 부여되었으므로, 그들 고관은 귀족층에 포함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다만, 문반이 우대되고 무반은 천시되어 귀족은 문반중심으로 이루어지고, 무반은 그 일부만이 귀족층에 포함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귀족이란 단순한 관직의 고하에 달린 것이 아니라, 출신문벌에 따라 결정되었으므로, 비록 관직이 낮거나 임명되지 않았더라도 벌족가문의 자손은 대대로 귀족신분의 대우를 받았다.
같은 지배층이지만 귀족에 포함되지 못한 중간계층으로 하급관리가 있었다. 문·무반 6품관 이하의 실무적인 사무를 보는 관료와, 중앙 각 관서의 서리, 무반의 하급장교, 그리고 궁중의 잡일을 맡는 대표적인 남반()이 포함되었다.
지방의 토착세력인 향리도 역시 지방관을 보좌하는 지배기구의 말단조직의 일원으로 여기에 포함되었다. 이들 하급관리는 국가의 정치권력을 잡은 귀족에 대해 실무적인 행정을 담당한 사람들이었다.
양인은 일반 주·부·군·현에 거주하며, 농업에 종사하는 농민층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들을 보통 백정()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국가에 대해 조세·공부·역역()의 부담을 지니고 있었다. 그 밖에 상인과 수공업자가 농민보다 천시되었지만, 역시 양인에 속해 공역()의 의무를 갖고 있었다. 그들 양인층은 국민의 주류가 되었고, 그 가운데 대부분이 농민이었다.
가장 천시된 신분은 천민계층으로 천민과 노비로 구성되었다. 천민은 특수행정구역인 향()·부곡()·소()에 사는 사람들로 일반주현에 사는 양인보다 천시되었다. 그밖에 육지의 교통요지에 설치된 역()과 숙박시설인 관(), 그리고 수상의 교통요지에 설치된 진()의 주민들도 모두 천민으로 여겨졌다.
천민 중에서도 사회의 최하층에 놓여 가장 천대를 받는 계층이 노비였다. 국가에 속하는 공노비는 궁중이나 관청에서 잡역에 종사하였다. 사노비는 귀족 등 사인()이나 사원의 소유로, 직접 주인집의 종으로 살면서 잡일을 돌보는 솔거노비()와, 주인과 따로 살며 농업에 종사하면서 주인에게 신공을 바치는 외거노비()가 있었다.
특히, 외거노비는 주인의 토지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토지도 경작하고, 나아가 자신의 토지까지도 소유하면서 부를 축적할 수 있는 독립경제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 노비 이외에 유기장이나 수렵 등의 천업에 종사하는 화척(: )과 광대인 재인() 등도 천민에 속하였다.
한편 사회신분이 세습되는 엄격한 신분제도와 함께, 사회계층의 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천민집단인 향·부곡·소가 일반주현으로 승격해 그 주민들이 양인화 되어갔고, 외거노비 가운데 재산을 늘려 신분적으로 양인으로 상승하는 자가 증가하였다.
그러나 특히 주목되는 것은 향리출신들이 과거를 통해 문반관리로 진출한 점이었다. 이들 향리의 자제들이 과거에 합격해 관리에 등용되고, 능력에 따라 고위관직에 승진하면서 신진관료가 되었다.
그들은 폐쇄적인 귀족사회를 개방시키고 보수적인 정치풍토를 쇄신하는 구실을 담당하였다. 이들 신진관료도 몇 대가 계속되면 다시 귀족가문으로 승격하게 되었지만, 이 향리세력은 언제나 중앙의 혁신적인 신흥관리의 공급원이 되었다.
그밖에 군인에서 장교로 진급하는 예가 많았으므로, 일반농민이 군인을 통해 무반으로 진출함으로써 신분변동의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사회정책

국민의 대부분은 농민들이었는데, 이들의 생활은 대체로 가난하였다. 그것은 농민들에 대한 국가의 수취가 가중했기 때문이었다. 농민은 자기 농토에서는 국가에 10분의 1의 조를 내면 되었지만 공전에서는 수확량의 4분의 1을 내었고, 사전에서는 2분의 1이라는 높은 조세를 바쳐야 하였다. 또한, 공부·역역의 부담을 지녀 국가에 의한 수취가 많은 편이었다.
그러나 더 무서운 것은 관리들의 불법적인 가렴주구로, 농민들은 양반관리나 향리들에 의해 수탈의 대상이 되었고, 귀족권력자에게 토지를 빼앗기는 일이 많았다. 자기의 민전을 빼앗긴 농민들은 타인의 토지를 경작하는 전호()로 전락하거나, 고향을 떠나 유민이 되었다.
이러한 농민의 몰락은 국가경제의 파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농민의 토지이탈로 국가수취의 세원이 감소되고, 농업생산 위에 성립된 경제기반이 동요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중앙정부는 권농정책을 써서 농업을 장려하고 농민생활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성종 때부터 국왕이 원구()에서 기곡()의 예를 행하고 적전()을 친히 갈아 농사의 모범을 보이며, 사직()을 세워 지신과 오곡의 신을 제사지낸 것은 이러한 권농정책에 따른 것이었다.
또한, 성종은 지방관에게 영을 내려 농기에는 농민을 잡역에 동원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면재법()을 만들어 수해·한재·충해·상해로 전답의 피해가 4할 이상인 때는 조를 면하고, 6할 이상인 때는 조·포, 7할 이상인 때는 조·포·역을 모두 면제하도록 하였다. 또 고리대를 억제하고자 경종 때 미·포의 이자율을 정했었는데, 성종은 본전인 모()와 이자인 자()가 서로 같은 액수에 달하면 그 이상 더 이자를 취하지 못하게 하였다.
한편, 성종은 농민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태조 때부터 설치된 빈민구제기관인 흑창제도()를 보다 확장해 각 주부()에 의창()을 베풀어 미곡을 저장했다가 흉년에 빈민을 구제하게 하였다. 또한 개경·서경과 12목에 물가조정기관인 상평창()을 설치해 곡식과 베의 값이 내렸을 때 사들였다가 값이 오르면 싸게 내어파는 제도를 마련하였다.
이밖에 빈민과 여행자의 구호를 위한 제위보()가 설치되었고, 서울 동서에 구료기관으로 대비원()이 마련해 무의탁자를 치료 부양하게 하였다. 또한 혜민국()을 두어 빈민에게 약을 지어주도록 하였다.

경제제도

토지제도

토지제도는 전시과체제를 기본으로 해 지배층을 중심으로 토지가 분배되었다. 전시과는 문무백관으로부터 부병·한인에 이르기까지 무릇 국가의 관직이나 직역을 담당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지위에 따라 전토와 시지()를 차등있게 나누어주는 토지제도를 말한다. 즉, 고려는 관인이나 군인의 국가에 대한 봉사의 반대급부로서 전시과를 마련한 것이다.
919년 역분전()을 분급하였다. 이것은 후삼국통일 후의 논공행상적인 토지급여로 조신·군사에게 관계()의 고하를 논하지 않고 그 사람의 성행()의 선악과 공로의 대소에 따라 토지를 차등 있게 나누어준 것이었다.
이 역분전을 기반으로 976년(경종 1) 처음으로 전시과가 설정되었다. 이는 단일적인 기준에 의한 일원적인 구성이 못되고, 자삼·단삼·비삼·녹삼 등의 4색공복을 기준으로 8개의 표에 따른 다원적인 구성이었다. 또한 여기에는 관품 이외에 인품까지도 고려하는 미숙한 것이었다.
이 전시과가 998년 하나의 체계로 정비되고, 관직의 고하에 따라 1과에서 18과로 나누어 토지를 분급하게 되었다. 종래 막연한 인품이라는 기준이 지양되고 관직의 고하를 기준으로 삼은 것은 관료체제의 확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때 산관()은 현직보다 몇 과를 낮추어 급여하게 규정한 것은 역시 현직주의의 표현이며, 또 무관이 같은 품계의 문관에 비해 적은 전시를 받게 된 것도 문신귀족사회의 면모를 나타낸 것이었다.
전시과는 1076년에 이르러 재편성되었다. 이 때 18과로 나누어 전시를 지급한 것은 전과 다름이 없으나, 각 과의 토지액수가 감소되고, 산관은 아예 지급대상에서 제외되어 현직만 해당되었으며, 문관에 대한 무관의 차별대우가 시정되었다. 문종 때의 전시과는 몇 차례의 개정 끝에 이룩된 최종적인 형태로 토지제도의 완성을 뜻하는 것이었다.
전시과는 직역에 대한 반대급부로 관리들에게 지급한 토지였으므로, 토지 자체를 주는 것이 아니라 그 토지의 조를 걷는 수조권을 준 것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수조권은 문종 때 이르러 직역에 종사하는 현직기간에 일시적으로 수여했을 뿐, 관직을 그만두면 국가에 반납하게 하였다.
그리고 관리가 거두어들이는 수조도 직접 수취하지 못하고 국가에서 대행했으므로, 전시과의 과전에 대한 관리의 사적 지배는 약하고 국가의 공적 지배가 강했다고 할 수 있다.
공음전시과는 전시과에 비해 사적 지배가 농후했는데, 본래 국가에 대한 공훈이 큰 공신에게 지급했던 것으로, 문종 때 5품 이상의 관리에게 지급하게끔 제도화되었다. 공음전시과는 전시과와는 달리 자손에게 세습이 허락되었다. 이는 5품 이상의 고관자제에게 음서의 혜택을 준 것과 함께 관인신분의 보호를 위한 시책이고, 귀족사회의 성립기반이 되었다.
5품 이상 관리의 자손에게 공음전시를 수여한 것과 대응해, 6품 이하 관리의 자제에게는 한인전()을 지급하였다. 그리고 자손이 없는 하급관리와 군인유가족에게는 구분전()을 지급해 생활대책을 마련해주었다. 또한 직역을 부담하는 향리·군인·악공·공장 등에게도 토지를 지급하였다. 향리에게 분급한 외역전()과 군인에게 지급한 군인전 등이 이러한 직역에 대한 대가였다.
이밖에도 왕실의 경비에 충당하기 위한 내장전()이 있었다. 내장전은 장() 또는 처()라 불려 특정한 행정구획을 이루고 관리되었음이 특색이다. 중앙과 지방의 각 관아에는 공해전()이 지급되어 경비를 충당하게 했고, 사원에는 사원전이 소속되어 있었다.

민전

토지제도는 왕실이나 관청 등 공공기관이나 직역을 담당한 관리·향리·군인들에게 토지를 지급한 전시과체제를 근간으로 했으나, 실제로는 일반농민의 소유토지인 민전이 전국 토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농민들은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토지를 경작하며 생계를 유지했는데, 이 토지는 농민사유의 민전으로 매매가 가능하였다. 고려왕조는 이러한 민전을 공전()이라 하고 농민으로부터 수확의 10분의 1을 조로 거두었다.
농민은 조를 납부함으로써 현실적으로 그들의 사유에 속하는 개별적인 보유지를 국가로부터 법제적으로 공인을 받았다. 이들 민전에서 나오는 조와 농민이 부담하는 역을 통해 나라의 경제적 기반을 유지하였다.
그런데 민전이 세력 있는 귀족들에 의해 겸병되어 농장화했는데, 이것은 농민층의 분해를 가져오고 국가수입의 원천을 두절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귀족정치기에 진행되어 농민은 토지에서 이탈해 유민화되고 국가의 재정도 감소되어갔다.

토지소유관계

토지제도는 소유관계에 따라 공전과 사전으로 구분된다. 왕실 소속의 내장전이나 관청의 땅인 공해전과 같은 국·공유지는 공전에 속했고, 일반국민이 소유한 민전은 사전이라 하였다.
그러나 국민의 사유지도 국가에 수확의 10분의 1을 조세로 납부했으므로 공전이라고도 불렀다. 이것은 모든 토지가 국유라는 관념에서 나온 것으로, 민전은 소유권상으로는 사전이지만 수조권상으로는 공전인 셈이었다.
그리고 직역을 담당한 관리·향리·군인 등에게 반대급부로서 토지를 분급했는데, 그것은 민전의 수조권을 준 것이었다. 이들 과전이나 공음전, 그리고 향리전·군인전 등은 사전이라 일컬어지나, 실은 토지의 소유권을 준 것이 아니고, 다만 민전에서 국가에 납부하는 조세의 수조권만을 이양받은 데 불과하였다. 민전의 소유자로서는 국가에 바치는 10분의 1의 조세를 대신 관리·향리·군인에게 납부했을 따름이었다.
원래 토지국유제란 고대로부터의 왕토사상에서 나온 산물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사적 지배가 강하였다. 가령, 과전은 세습이 허용된 것이 아니었으나, 현실적으로 그 아들이 다시 관리가 됨으로써 세습적으로 보유하게 되었다. 특히 공음전은 법제적으로 자손에게 상속이 허용된 영업전()으로 사유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향리의 외역전과 군인의 군인전도 역의 세습에 따라 자손에게 상속할 수 있는 영업전이었다. 더욱이, 공전이라 일컬어지는 민전의 실체가 일반농민이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사유지였음은 고려시대 토지소유관계의 실상을 말하는 것이다.

수취제도

경제적 기반이 된 수취제도는 토지제도와 연결되어 성립되었다. 고려는 농업을 주축으로 한 자연경제였기 때문에, 국민으로부터 거두어들이는 수입은 대체로 토지를 매개로 농민들로부터 수취한 것이었다. 국가에 대한 농민들의 부담은 보통 조세·공부·역역의 세 가지로서, 그것이 고려왕조의 주요 재원이 되었다.
조세는 토지를 통해 수취하는 제도였다. 국가는 토지를 소유한 국민으로부터 일정한 수취율의 조세를 받아들였다. 사유지인 민전의 소유자는 10분의 1의 조세를 국가에 납부하였다. 여기서 공전인 경우는 직접 국고에 들어가 국가의 재원이 되었고, 만약 거기에 과전이나 공음전이 설정되었을 경우 수조권자인 관리에게 귀속되었다.
민전을 소유하지 못한 영세농민은 전호로서 귀족·양반 관리의 광대한 사전이나 왕실 소속의 토지 및 국가공유지를 소작하였다. 귀족·양반 관리도 자기의 사전을 노비들을 시켜 직영도 했지만, 전호제 경영을 할 때는 병작으로 수확량의 2분의 1을 받아들였다. 반면 왕실의 토지나 공해전·둔전의 공전에서는 4분의 1을 내게 했으나, 그러한 토지는 척박한 곳이 많았기 때문에 전호의 실질적 부담은 사전의 2분의 1과 별 차이가 없었다.
공부는 지방에서 포나 토산물 등 현물을 납부하는 수취제도였다. 공부에는 매년 일정한 공물을 바치는 상공()과, 그때 그때의 필요에 따라 임시로 공납하게 하는 별공()이 있었다.
상공은 미리 정해진 공물의 종류와 액수를 각 주현에 할당해 매년 헌납하게 하였다. 그에 따라 주현은 이 공물을 각각 집집마다에 배분해 수취하였다. 그때 가호는 인정의 다소로써 편성된 호제의 등급인 9등호에 따라 차등 있게 징수하였다. 그러나 상공보다도 임시적인 별공에 따른 관리들의 가렴주구가 심해 공부는 농민들의 부담 가운데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천민집단인 향·부곡에 사는 주민들도 토지의 조세를 납부했는데, 소는 수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거주지였으므로 그들이 헌납하는 제품도 일종의 공부라 할 수 있었다.
역역은 국가가 국민들의 노동력을 수취하는 제도였다. 16세부터 60세까지의 남자는 정()이라 하여 입역의 의무를 가졌다. 대체로 역역이란 성곽의 축조, 관아의 영조, 제방의 축조, 도로의 개수 등 토목공사에 노동력을 동원하는 것이었다. 역역도 공부와 같이 인정의 다소에 따른 호제의 등급에 따라 징수했으므로, 공부와 역역은 때에 따라 공역()으로 결합되기도 하였다.

고려의 문화

국가불교의 성격

고려는 불교국가라 할만큼 불교가 성행하였다. 유교가 고려의 정치이념이 되었다면, 불교는 정신계의 지도이념이 되었고, 현실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므로 불교는 고려시대의 문화·사상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불교의 발달은 왕실·귀족들의 두터운 보호를 받았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왕실·귀족들은 불교가 국가나 개인의 현세생활에 행복과 이익을 준다고 믿고 열심히 숭상하였다. 고려의 불교가 현세구복적이고 호국적인 성격을 띤 것은 이 때문이었다. 왕실·귀족이 국가를 비보하고 국리민복을 가져다주는 불교를 국교로 삼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고려의 숭불정책은 이미 태조 때부터 실시되었다. 태조는 ‘훈요십조’ 제1조에서 “우리나라의 대업은 반드시 제불의 호위에 의지한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의 사원을 세워 주지를 보내어 수호하게 하고 각기 그 업을 닦게 하라.”고 하여 자손들에게 불교국가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태조는 개경에 법왕사()·왕륜사()·흥국사() 등 10개의 사찰을 지었다. 문종 때는 2,800칸이 넘는 흥왕사()를 건립해 번성할 때는 개경에만도 70개의 불사가 즐비할 정도로 불교왕국의 면모를 이루었다.
불법이 국가를 비보한다는 관념은 사원의 건립뿐 아니라 각종 불교행사의 실시로도 나타났다. 정월보름날(뒤에는 2월 15일)의 연등회()와 11월 15일의 팔관회()는 가장 커다란 불교행사였는데, 그것은 군신이 가무와 음주로 함께 즐기며, 제불과 천지신명에 제사해 국가와 왕실의 태평을 기원하는 것이었다.
또한, 호국경전인 「인왕반야바라밀경()」을 독송하는 인왕도량()이 설치되어 국가의 안태()를 빌었다. 이 때 승공양의 불사인 반승()이 행해졌다. 현종 때 외적의 침입을 불력()으로 물리치기 위해 대장경을 간행했던 것도 불교행사가 국가호위에 큰 목적이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대장경 간행은 현종 때 시작해 문종 때 이르러 6천여 권의 대장경 조판이 완성되었다.
그 뒤 선종 때 의천()이 송·요·일본으로부터 불서를 사들여 4,700여 권의 『교장()』을 간행했고, 다시 고종 때 강화도에서 몽골병의 침입을 격퇴하려는 의도에서 이른바 『팔만대장경』을 간행하였다.
국가불교의 성격은 국가가 관할하는 승과제도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승과는 종파에 따라 교종선()과 선종선()으로 나누어지고, 급제자에게 다같이 대선()이라는 첫 법계를 주었다. 그들이 승진하면 교종은 승통(), 선종은 대선사()라는 최고의 호를 받았다. 또한, 고승을 국사·왕사로 삼아 신앙면에서 국가·왕실의 고문역할을 담당하게 했는데, 그것은 승려로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직이었다.
불교에 대한 국가적 뒷받침은 사원에 대한 경제적 후원에도 나타났다. 국가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 사찰을 건립했고, 토지를 지급하였다. 사원전에는 면세의 특권을 주어졌으며, 왕실·귀족의 토지 희사와 농민들의 투탁에 의해 더욱 확대되어갔다. 또한, 승려에게는 면역의 특권을 주었다.
그러자 백성들이 다투어 출가해 승려의 수가 증가하는 요인이 되었다. 특히, 왕실·귀족 출신으로 승려가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것은 고려불교의 귀족성에서 나온 현상이었다.

천태종의 성립

초기에는 5교·9산의 신라불교가 그대로 계속되어 교종과 선종의 대립이 있었는데, 집권적인 지배체제의 확립과 함께 교종불교가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교종은 신라 때도 통일과 화합의 사상으로 왕권을 옹호해준 불교였지만, 신라 말기 호족세력의 기반 위에 선종이 유행하면서 한때 쇠약해졌으나, 왕권의 강화와 더불어 다시 세력의 신장을 보게 된 것이다. 고려는 교종과 선종을 동등하게 병립시키면서도 교종 우위의 정책을 썼던 것이다.
국가적 안정을 위해 교종과 선종의 대립을 지양하기 위한 교선합일()의 운동을 일으켰는데, 그것은 천태종()의 성립으로 나타났다. 국초부터 중국의 천태종을 받아들여 연구하고, 광종 때는 체관()이 『천태사교의()』를 지었지만, 당시에는 하나의 종파로서 성립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의천이 송나라에 건너가 그것을 연구하고 돌아와 천태종을 창설함으로써 독립된 종파를 이루게 되었는데, 이는 고려불교계의 일대혁신이었다. 의천은 교종과 선종의 대립에서 오는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범불교운동을 일으켜 교관겸수(), 즉 교선의 일치를 주장하고 천태종을 폈던 것이지만, 실제로는 교종인 화엄종()에 서서 선종을 흡수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천태종은 잡념을 정지하고 지혜로써 사물을 관조하는 지관()을 중히 여겨 그 실천수행법이 선종의 그것과 비슷했지만, 기본적으로는 법화경을 정종으로 삼는 통일적이고 지적인 종파로, 왕권우위의 중앙집권적 귀족사회에 알맞은 사상이었다. 의천이 천태종을 일으킴으로써 고려의 불교는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게 되었다.

조계종의 발전

무신란 이후 불교계에 새로운 기운이 나타나게 되었다. 곧 선종인 조계종()의 발전이었다. 의천이 교종과 선종을 융합해 천태종을 개창했지만, 그것은 교종 위주로 한 것이었고, 무신집권기에는 그에 대신해 선종이 크게 일어나게 되었다. 처음 무신정권이 성립하자 불교계에는 격렬한 반란이 일어났다. 그것은 왕실·귀족의 비호를 받고 문신과 결탁된 사원세력이 무신란으로 큰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들 무신정권에 항쟁한 사원세력은 당시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교종측이었다. 왕실의 권위를 부정하고 문신귀족정치를 붕괴시킨 무신정권에 대해 당시 교종중심의 불교계는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그러한 교종사원의 반란은 무신정권의 가혹한 탄압을 받아 쇠퇴하게 되었으며, 그에 대신해 선종세력이 흥륭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말여초에 호족의 옹호를 받았던 선종은 왕실·귀족과 밀착된 권위주의적인 교종에 대한 무신들의 생리와도 상통되는 것이었다. 선종은 경전에 의한 복잡한 이론적 접근을 배격하고 참선을 통한 불교신앙을 그 중심내용으로 삼았기 때문에 소박한 무인들에게 친근감을 주었다. 특히 선종의 혁신성은 종래의 문신귀족에 의한 기성질서를 무너뜨리고 성립된 무신정권의 성향에 알맞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무신정권은 교종사원의 반란을 탄압하는 반면 선종세력에 두터운 후원을 보냈다. 그 때 선종 자체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지눌()이 새로운 불교이론을 구명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선종위주의 불교혁신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지눌은 돈오점수()·정혜쌍수()를 주창하였다. 그것은 자기의 자성을 깨닫는 한편 화엄교리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으로, 선종을 위주로 교종을 융합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불교혁신운동은 무신란 이후 정치적·사회적 변혁의 분위기 속에서 나타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지눌의 선종신풍운동은 조계종으로 성립되고, 혜심()에게 계승되어 교단으로서의 위치를 굳히고, 다시 몽여() 등의 후계자에 의해 발전을 보게 되었다.
이러한 조계종의 성립과 발전은 불교계에 있어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종래의 교종중심의 불교를 선종중심으로 옮기게 했고, 선종 자체도 새로운 혁신의 기풍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우리나라 불교사의 일대전환이 되었다. 따라서, 조계종은 종래의 교종과는 달리 정치적이며 세속적인 성격에서 벗어나 왕실·귀족에 대신해 민중을 저변으로 한 종교로 기반을 확대할 수 있었다.
특히, 조계종의 심성에 대한 철학적 사상체계는 고려 후기에 성리학을 수용하는 바탕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조계종의 혁신적 기운에도 불구하고 고려 후기의 불교계는 점차 타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당시 집권세력인 권문세족의 후원을 받은 사원은 막대한 농장을 겸병하고 고리대나 양주()로 경제적 부를 확대했으며, 승려는 세속화되어 그 비행이 사회의 지탄을 받게 되었다. 그것은 불교가 혼란한 고려 사회를 이끌 수 있는 정신적 이념이 되지 못했으며, 결국 성리학의 수용에 따른 유불교체의 요인을 만들었던 것이다.

유학의 발달

고려시대에는 유교가 정치이념으로 채용되어 크게 흥륭하게 되었다. 광종이 과거제도를 실시하고, 성종이 유신() 최승로의 보필을 받아 숭유정책을 펴서, 유교는 정치의 사상체계로 성립되고 학문적으로도 크게 발달하게 되었다. 특히, 지배층인 문벌귀족이 문반으로 구성되고 문치주의를 표방함에 따라 숭문의 풍조는 더하였다.
유학은 귀족정치의 전성기인 문종 때 크게 융성했으며, 해동공자()의 칭을 받는 최충()이 구재학당()을 세워 사학의 효시가 되었다. 최충의 구재학당은 그의 시호에 따라 문헌공도()로도 불렸으며, 이를 본보기로 11개의 사숙이 성립되어, 십이도()가 성립되었다. 사학의 설립자는 대개 과거의 지공거()를 역임한 유신들로, 과거응시를 위한 준비교육에 치중했기 때문에 과거준비를 하는 귀족 자제들이 많이 입학하였다.
사학의 융성은 관학인 국자감의 쇠퇴를 가져왔다. 이는 귀족의 자제들이 명성 높은 사학에만 몰려 국자감교육이 유명무실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숙종은 국자감에 서적포()를 두어 도서를 출판하게 했고, 예종은 국학에 칠재라는 전문강좌를 두어 관학의 부흥을 꾀하였다.
또, 일종의 장학재단인 양현고()를 설치해 관학의 재정기반을 강화했으며, 궁내에 청연각()과 보문각()이라는 학문연구소를 두어 유학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인종은 학제를 상정해, 안으로 경사육학()의 제도를 정하고, 밖으로 주현에 향학을 세워 관학기관을 정비하였다.
고려가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채용함으로써 신라의 종교적 관념에서 보다 새로운 지적이고 합리적인 사상체계가 성립되었다. 그것은 확실히 하나의 전진을 의미하는 것이며, 유학은 귀족사회의 발달과 함께 귀족문화의 중심을 이루고 융성하였다. 그러나 과거준비에 급급해 이론이나 사상면에 대한 폭넓은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사장학()·훈고학()에 몰두하게 된 유학자들은 유교가 현실생활에, 불교는 정신생활을 주안으로 하는 것이라 해 불교를 배척하지 않았다. 그것은 고려시대 유학에 한계가 있었음을 나타낸다. 더욱이, 중기 이후 귀족사회가 발달함에 따라 유학은 시문을 주로 한 귀족취향의 보수적인 경향으로 흐르는 폐단을 가져왔다.

성리학의 수용

후기에는 신진사대부들에 의해 새로운 유학인 성리학의 수용을 보게 되었다. 권문세족의 횡포와 불교의 폐해는 신진사대부로 하여금 새로운 지도이념을 추구하게 했는데, 때마침 원나라로부터 들어온 성리학은 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성리학은 우주의 근본원리와 인간의 심성문제를 철학적으로 해명하는 신유학이었다. 성리학은 송나라의 멸망 후 원나라에 이어져 성행했는데, 다시 고려에 전하게 된 것이다. 고려는 이미 무신란 이후 심성화된 선종의 흥륭으로 성리학수용의 터전이 마련되어 있어 쉽게 전파될 수 있었다.
충렬왕 때 안향()이 처음으로 소개했고, 그 뒤 백이정()이 직접 원나라에 가서 배워와 이제현()·박충좌() 등에게 전수하였다. 말기에 이색·이숭인()·정몽주·길재()·권근()·정도전 등이 발전시켰다.
고려에 수용된 초기의 성리학은 송나라의 주자학이 원나라에 들어와 한 차례 걸러진 내용으로, 형이상학적인 측면보다도 실천적인 측면이 강조되었다. 따라서, 우주론적인 이기론()에 대한 사변적()인 면은 별로 발전이 없었다.
반면, 일상생활에 관계되는 실천적 기능이 수용되어 주자()의 실천덕목의 책인 『소학』이 존중되었고, 또 습속을 바로잡기 위해 주자의 『가례()』가 채용되었다.
그러나 점차 철학적인 이기론에 대한 깊이가 더해갔다. 이색은 불교의 적()을 가지고 성리학의 태극으로부터의 생성론과 『대학』·『중용』에서의 경()까지를 포괄하려 하였다. 그것은 불교철학으로써 성리학체계를 이해하려는 한계를 보이는 것이었다.
또 동방 이학()의 조()라고 불리는 정몽주의 저술 중에도 이론적인 배불론()이나 이학에 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정도전에 이르러 그의 『불씨잡변()』에서 본격적인 이기철학()을 전개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발전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성리학의 수용은 사상계의 일대전환점이 되었다. 종래의 훈고학적 유학에서 철학적인 유학으로 변화해 새로운 사상체계가 이루어졌고, 유불교체의 계기가 되었다. 그 때까지 고려의 유교는 정치이념으로 채용되어 종교적인 불교와 공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유학이 형이상학적인 철학으로 변화함에 따라 양자는 충돌하게 되었다.
이에 정도전 등 성리학자는 불교를 인륜에 어긋나는 도라고 하여 불교 자체를 공박했고, 이로써 불교에서 유교로의 교체를 초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후기에는 성리학이 넓혀져 그때까지의 정신적 지주였던 불교사상이 쇠퇴하고 새로운 사상체계인 유교가 흥륭하게 되었다.

역사학의 발달

이미 전기부터 유학의 발달에 따라 유교적인 역사서술체가 정립되었다. 그것은 편년체인 실록편찬에서 비롯되어 기전체인 정사체로 완결되었다.
현종 때 거란의 침입으로 많은 역사기록이 불타버렸으므로 태조부터 목종에 이르는 7대 실록이 황주량() 등에 의해 편찬되었다. 문종 때 박인량()이 『고금록()』을 저술했으며, 예종 때 홍관()이 전부터 전하던 『편년통재()』에 이어 『속편년통재』를 지어 편년체의 역사서술이 발달하였다. 인종 때 기전체인 『삼국사기』가 편찬됨으로써 역사서술의 발전을 보게 되었다.
『삼국사기』는 1145년(인종 23) 김부식이 왕명을 받고 편찬한 기전체의 정사로서, 현존하는 가장 오랜 사서이며, 문신귀족으로서 유교적 역사의식에 입각해 서술한 것으로 고려 전기 사풍을 대표하는 것이다.
따라서, 『삼국사기』는 종교적이며 전통적인 신라의 고대사관을 탈피해 유교사관의 합리성을 내세웠으며, 당시의 귀족 사이의 분쟁과 송·금의 대립에서 오는 국내외의 불안정 속에서 자체문화의 고양을 위한 자국역사의 재구성을 의도했다는 점에 역사의식의 성장을 나타낸다. 그러나 역시 유교적인 문신귀족의 입장에서 서술했다는 점에 한계를 지니고 있다.
또한, 고종 때 승려 각훈()이 왕명에 따라 편찬한 『해동고승전()』 역시 교종의 입장에서 편찬한 불교사라는 점에서 『삼국사기』와 그 성격을 같이한 것이다.
후기에는 이러한 유교사관에 대항해 우리의 고대사를 자주적인 입장에서 이해하려는 새로운 경향이 일어났다. 그것은 무신란 이후의 사회적 혼란과 대몽항쟁의 위기를 경험한 지식인들의 민족적 자주의식의 표현이었다.
고종 때 이규보()가 지은 「동명왕편」과 충렬왕 때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 이승휴()가 지은 『제왕운기』 등이 대표적인 저술이었다.
『삼국유사』는 같은 우리나라 고대사를 엮은 사서이지만 『삼국사기』와 성격이 판이하다. 사대적인 유교사관에 입각해 편찬된 기전체의 정사인 『삼국사기』에 대해, 『삼국유사』는 불교사를 중심으로 고대의 설화와 야사를 많이 수록하고, 특히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받드는 자주의식이 간직되어 있다.
『제왕운기』에서도 역시 우리나라 역사를 단군으로부터 서술했고, 또 「동명왕편」에서도 동명왕을 고구려 건국의 영웅으로 커다란 긍지를 가지고 서사시를 쓴 것과 같은 민족의식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한편, 후기에는 유교적인 신흥사대부의 대두로 『삼국사기』의 전통을 이은 유교사관이 보다 발달하게 되었다. 충렬왕 때 원부()를 대표로 관찬한 『고금록()』과 정가신()이 지은 『천추금경록()』, 충선왕 때 민지()가 지은 『본조편년강목()』, 공민왕 때 이제현이 엮은 『사략()』 등이 그것이다. 이들 사서는 유교의 합리주의사관이 반영되고, 점차 정통과 대의명분을 존중하는 성리학적 사관이 나타나는 새로운 경향이 일어나게 되었다.

문학의 발달

전기에는 신라 향가의 여맥이 남아 있었다. 대표적 작가인 균여()는 흔히 「보현십원가()」로 널리 알려진 사뇌가 11수를 남겼으나, 예술적인 향기보다는 기교에 치우친 작품이며 찬송가적 느낌이 드는 것들이다. 그것이 향가로서는 마지막 작품이며, 그러한 향가에 대해 새로이 등장하게 된 것이 한문학이다.
과거제의 성립과 관련을 갖는 한문학은, 특히 전기의 과거제가 경전 이해보다는 시문 창작능력을 중시했기 때문에 귀족사회의 필수교양으로 크게 발전해갔다. 성종 때 문신월과법()이라 하여 문신들에게 매달 시를 지어바치게 했고, 시간을 정하고 시를 지어 문재를 겨루는 각촉부시()가 유행한 것도 모두 한문학의 발전에 이바지한 것이었다.
이 무렵은 설화에 대한 관심도 높아져 금관(김해)지방의 수령이라고만 전하는 어떤 문인에 의해 『가락국기()』가 편찬되기도 하였다. 또 신라 때부터 전해온 책을 박인량이 보완, 개작했으리라고 믿어지는 『수이전()』도 이 무렵 설화의 관심에 대한 한 본보기가 될 것이다.
무신란으로 인해 고려 사회는 전반적인 변혁을 가져왔다. 문학의 경우, 많은 문인들이 세속을 등지고 은거하는 현상이 나타나지만, 문학 자체는 발전해 갔다. 오히려 오세재()나 이인로() 등은 죽림고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삶의 보람을 찾는 한편 무신정권에 등용되는 길을 열고자 하였다.
한편, 후기에 신흥사대부의 대두와 함께 새로운 문학경향이 나타났다. 우선, 시가에 있어 경기체가를 들 수 있다. 「한림별곡」·「관동별곡」 등으로 대표되는 경기체가는 송악() 내지 송사()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향가의 형식을 계승한 것으로, 내용의 대부분은 신흥사대부의 생활상을 반영하였다. 또한, 새로운 시가문학으로 「어부가」가 있었다. 경기체가가 관료적 문학이었다면, 이것은 정취를 추구하고 한적한 인생을 스스로 즐기는 처사적 문학이었다.
사대부계층의 시가와 아울러 장가() 또는 속요()라 불리는 민중의 노래가 유행하였다. 「동동」·「정읍사」·「정과정」·「쌍화점」 등은 토속적이며 민중적인 감정을 대담하고 자유분망한 형식으로 읊은 노래로서, 시가문학의 새로운 경지를 창조한 것이었다.
한문학에서도 이인로의 『파한집()』, 최자()의 『보한집()』, 이제현의 『역옹패설()』 등으로 대표되는 일종의 수필형식인 패관문학()이 발달하게 되었다. 또한, 임춘(椿)의 「국순전()」, 이규보의 「국선생전()」, 이곡()의 「죽부인전()」 등 사물을 의인화한 가전체문학이 등장하였다.
또, 한시도 완숙한 경지에 이르러, 이인로는 자못 세련된 시를 읊어 명성을 떨쳤고, 이규보는 「동명왕편」에서 자유로운 문장체를 구사함으로써 새로운 문학세계를 추구하기도 하였다. 특히, 그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집』은 하나의 문집체재를 갖춘 것이었다. 이제현과 이색을 비롯해 이숭인·정몽주 등은 모두 이 시대를 대표하는 한문학자들이었다.

예술의 발달

귀족사회의 발달은 호화로운 예술문화를 낳았다. 귀족들은 그들의 사치생활을 충족하기 위해 여러 가지 예술작품을 만들어 즐겼고, 이로 인해 예술이 발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때의 예술이란 귀족취향의 귀족예술이었고, 일반서민생활과는 거리가 있었다.
귀족예술을 대표로 한 것이 고려청자였다. 고려청자는 그릇 표면에 독특한 무늬를 넣어 병·항아리·연적 등의 우아한 형태를 만든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릇 표면에 양각 또는 음각을 하여 무늬를 새기는 단순한 청자에 불과했으나, 뒤에는 무늬를 음각해 초벌을 구운 다음 그 안에 백토 또는 흑토를 메우고 청자유약을 발라 구워내는 상감청자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 상감청자는 고려인이 창안한 특수한 수법으로 고려자기의 정수를 이루었다.
귀족문화의 발달은 서화와 음악에도 나타났다. 서예는 왕희지체()와 구양순체()가 문신귀족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문종 때의 유신()과 인종 때의 승려 탄연(), 고종 때의 최우()가 명필로서 신라의 김생()과 함께 신품사현()이라 일컬어졌다.
회화도 왕실과 귀족들의 취미생활로 자못 발달했는데, 「예성강도()」를 그린 인종 때의 이령()과 그 아들 이광필()이 유명하였다. 음악 역시 왕실·귀족들의 향락생활의 소산으로 발달하였다.
아악은 송나라로부터 수입한 대성악()이 궁중음악으로 발달한 것이고, 향악은 신라시대 이래의 고유음악이 당악의 영향을 받아 발달한 것으로 「동동」·「한림별곡」·「대동강」 등의 곡이 유명하였다.
이와 같이, 고려청자와 금속공예 등의 귀족예술이 호화롭고 정교함에 반해, 건축·조각 등의 불교예술은 신라시대에 비해 뒤떨어졌다. 고려시대의 석탑은 신라의 모형을 그대로 계승했으나, 예술성은 퇴보되었다.
경기도 개풍의 현화사() 칠층석탑은 고려의 독특한 형태를 나타낸 것이고, 오대산의 월정사() 구층석탑은 송나라 석탑의 영향을 받아 8각으로 이루어졌다. 불상은 영주 부석사()의 아미타여래상이 신라양식을 계승한 걸작품으로 꼽히지만, 그밖의 것은 거의 뒤떨어진 것이었다. 논산의 관촉사() 미륵불은 거대하기는 하나 균형이 잡히지 않아 미술적 가치가 적었다.
후기의 예술은 문벌귀족의 몰락과 선종의 융성으로 퇴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불교종풍의 변화와 원나라 예술의 영향으로 조형미술의 형태와 양식에 변화는 있었다.
후기에 세워진 목조건축으로는 안동 봉정사()의 극락전과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조사당, 그리고 예산 수덕사()의 대웅전, 안변 석왕사()의 응진전(殿) 등 몇 개가 남아 있는데, 그것들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부석사의 무량수전으로 고려시대 목조건축의 일반적 양식인 주심포양식으로 간결하고 조화된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석왕사 응진전은 원나라의 영향을 받은 다포양식의 중후장엄한 건축으로 조선시대 다포건축의 시초가 되었다.
후기의 석조건축으로는 탑파와 부도가 있는데, 대체로 미적 감각이 결여되고 형식에 흐르고 있다. 대표적인 석탑은 개풍의 경천사() 십층석탑(현재 경복궁에 이전)이고, 부도는 여주의 신륵사() 보제존자석종()이 있다.
경천사십층석탑은 원나라 양식의 영향을 받은 이색적인 석탑형태로, 조선시대 세조 때 세워진 원각사탑(, 현재 서울 파고다공원 소재)의 원형이 되었다. 또한, 보제존자석종은 전기의 화려한 모양에서 벗어나 인도 불탑의 영향을 받은 소박한 석종형의 부도로 조선시대 부도형식의 선구가 되었다.
서예는 신라부터 내려온 구양순체가 주류를 이루었다가, 후기에 이르러 원나라 조맹부()의 송설체()가 들어와 유행하였다. 충선왕 때의 이암()은 그 대표적인 서예가였다.
회화는 자못 발달해 많은 작품이 만들어졌다. 전하는 것은 드물지만 공민왕이 그렸다는 「천산대렵도()」가 남아 있어 당시의 화풍을 보여준다. 그것은 원대 북화()의 영향을 받아 필치가 뚜렷하고 표현이 세밀한 점에 특색이 있다.
또한, 후기에 그려진 불화가 일본에 흘러들어가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혜허()의 「양류관음도()」가 있는데, 장엄하고 화려한 화풍을 보여주고 있다.
그밖에 사원과 고분의 벽화가 있는데, 부석사 조사당 벽화의 사천왕상()과 수덕사 대웅전 벽화의 수화도() 등이 유명하다. 특히, 후기에는 신흥사대부들의 시화일치론()이 유행해 회화의 문학화가 이루어졌다......
















































사인검. 四寅劍

사인검. 四


동양에서는 천()에 대한 사상이 강했던 관계로 왕이 하늘의 아들인 천자로 표현되었다. 
하늘의 아들에게 거역하는 자를 징벌한다는 의미 때문에 형벌을 의미하는 부월()을 정벌군 장수에게 줌으로써 장수의 권위를 확인시켜 주었다. 

수면문()이나 성좌() 등이 부월에 표현되었다. 
왕으로부터 병권을 상징하는 부월을 받은 장수는 자신의 권위를 나타내는 장검을 소지하게 된다.

통상 이 장검은 상징물이었기 때문에 시종이 별도로 들고 지휘자의 뒤를 따랐다. 
그리하여 인명을 좌우하는 지휘자의 통솔의 의미와 승리를 상징하는 용맹의 의미로 인해 칠성검이나 인검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권위용의 검 외에도 소유자의 무운을 비는 의미로 싯귀를 새기고 실존하지 않은 동물을 그려 새겨 넣거나 화문()을 그려 넣어 상()스러운 무기로 만들려고 하였다.


인검은 간지의 인( : 호랑이, 
예로부터 호랑이는 무를 상징)자 들어가는 때에 제작된 칼로 무()의 기운이 강하여 부월이 상징하는 바를 구현한다고 생각하였다. 

인년(), 인월(), 인일(), 인시() 이 네가지가 모든 적용되는 시기에 제작된 칼을 사인검(), 세가지가 겹칠 때 제작된 칼을 삼인검(), 두가지가 겹칠 때 제작된 칼을 이인검()이라고 한다. 

호랑이의 위력을 빌려 사귀()를 물리침으로써 왕실과 궁중의 안전을 도모하고자 했던 것이다.

사인검은 시기적으로 매 12년마다 제작할 수 있었으나 제작에 많은물력()과 인력()이 수개월 간 소용되므로 흉년 등에는 제작하지 않았다.

사인검은 검신()의 한면에 <사인검>을 포함한 27자의 한자가 금()상감 되어 있고, 다른 한 면에는 191개의 별로 된 성좌()가 역시 금상감 되어있는 보검 중의 보검이다.


사인검은 조선조 중기에 왕들이 장식용 또는 호신용으로 지녔던 검이다. 
여기에서 사인이란 12지간 중에 호랑이를 뜻한다. 

인해와 인달, 인날, 인시에 열처리한 것으로 60년 만에 한 자루를 제작하는 진귀한 검으로 호랑이의 용맹스러움이 간직되어 있다.


사인검()은 조선시대에 임금의 지시에 의해 국가사업으로 제작하였던 칼인데, 12간지의 인()이 4번 겹치는 때 즉 인년(), 인월(), 인일(), 인시()를 택해 타조()하였다.

사인검은 표면에 사인검을 설명하는 한자 27자가 순금으로 새겨져 있다. 

칼집은 어피(철갑상어 껍질)로 되어 있고 손잡이는 동으로 되어 있으며, 순금으로 사인검이라 상감되어 있다. 


사인검의 제원은 전장 82.5cm, 칼날길이 63.7cm, 손잡이길이 18.8cm, 칼날폭 3.3cm, 칼집길이 67.5cm, 칼집폭 4cm 이다.


도신 : 
칠성문 금상감. 면 - 사인검을 위시한 범어 금상감. 병부 : 부적문, 범어와 병부중앙 전후에 8판화가 칠부되었고 병부첨단에는 연봉형이 있으며 중앙에는 8판화와 주위에 성좌가 금상감.


『성종실록』 권90, 성종 9년 3월 계유조에는 “창원군()이 말하기를 신은 본래 고읍지()라고 일컫는 여인을 알지도 못하며, 전후에도 여인을 살해한 일이 없습니다. 

집안에 다만 삼인검()과 삼진검()이 각각 한 자루씩 있을 뿐이고, 또 환도()는 없습니다.”라고 나와있다. 
여기서 삼인검과 삼진검은 동일하게 하나의 의장용 군기()였음이 분명하다. 

유성룡의 『징비록()』에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가 출정하는 신립을 불러 보검()을 하사하고 이일이하 제 군사들이 명을 거역할 때에는 이 검으로 다스리라고 하였다. 
이 검 역시 인검과 유사한 의미를 지닌 검일 것이다.


연()•월(月)•일()•시()가 모두 인()인 때에 만드는 칼.

정원에 전교하기를, “…공장은 다른 일은 별로 없고, 다만 별조궁과 사인검을 만드는 일이어서 장인의 숫자가 많을 것이다. 
지금 같은 흉년에 정지하라고 명하는 것은 곤란하지는 않으나, 별조궁은 여느 때에 변방의 장수와 수령에게 상사하는 것이므로 군무의 일이기에 부득이해서 하는 것이다.<

사인검은 해마다 주조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인년에 만들어야 하는데, 이것은 조종 때의 옛일이며, 올해가 마침 인년이므로 주조하라고 명하였다.…” 하였다. ; 
傳于政院曰…工匠則別無他役 只於別造弓四寅劍造成之事 匠人數多矣 如此凶年 命停不難 而別造弓 則常時賞賜戍邊將士及守令 故軍務之事 不得已爲之<…> 四寅劒則非年年所鑄 必於寅年爲之 此祖宗朝故事也 今年適寅年 故命鑄之… [중종실록 권제98, 12장 뒤쪽, 중종 37년 4월 18일(무진)]

모든 것이 뜻대로 이루어짐
여의()는 승려가 경을 읽거나 설법할 때 지니는 도구로, 강론하는 스님이 글을 기록하여 두고 참고하는데 쓰는 것이라고도 하며 등의 가려운 데를 긁는 기구로 쓰였다고도 한다. 
불교 전래와 함께 유입된 것으로, 여의()란 ‘모든 것이 뜻과 같이 된다’는 의미의 단어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여의는 여의가 가진 단어적 의미 그대로를 상징하는 문양이 되었다.
보통 미술품에 나타나는 여의는 의장적 요소가 강한 여의의 머리부분[여의두]이 주로 장식되며 여의 전체를 그린 그림에서는 영지나 불로초와 유사하게 그려진다.
여의가 그림이나 문양, 장식으로 쓰일 때는 다른 길상 상징형과 결합하여 좀 더 구체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는데 평안여의(), 사사여의(), 만사여의() 등이 그것이다. 
예를 들어 화평, 평안을 의미하는 화병()에 꽂힌 여의는 모든 것이 뜻대로 이루어져 평안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검은 육군박물관과 고려대박물관 소장의 사인검을 복제한 것으로 “사인검()”이라는 명문과 북두칠성() 문양이 상감()되어 있다.

조선시대 일반무기류 중에서 창검류가 차지하는 전술상의 지위는 전체적으로 저하되었지만 근접전에 있어서는 그 기능과 역할은 무시될 수 없었다. 
창검류 중에서 창류는 무과시험에 있어서 궁시류 다음으로 중요한 과목이었기에 전술상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할 수가 있었다. 

도검류는 병사들의 중요한 휴대무기였음에도 무과시험의 과목대상이 아니라는 현실의 반영이 도검의 제조술과 검술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도검류의 전술적 기능과 위치가 약화 내지 전환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의 주요한 무기 중의 하나이자 도검류 중의 가장 대표적인 무기가 바로 환도였다. 
환도는 전통적으로 전술상에서 차지하고 있었던 그 기능과 위치를 회복하기 위하여 시대적 요구에 부응한 변화를 모색하였다.

조선시대 일반무기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공격무기]

도검류로는 이인검, 삼인검, 사인검, 이진검, 삼진검, 사진검 등의 검과 패검, 운검, 별운검 등의 환도류, 장도 등이 있었다.
창류로는 창, 모, 극, 기창 등이 있었고 궁시류로는 정양궁, 예궁, 목궁, 철궁, 철태궁, 고, 각궁 등의 활과 목전, 철전, 예전, 편전, 동개살, 장군전, 세전, 유엽전, 노 등의 화살이 있었다. 공성무기류로는 차전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