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1일 화요일

사인검. 四寅劍

사인검. 四


동양에서는 천()에 대한 사상이 강했던 관계로 왕이 하늘의 아들인 천자로 표현되었다. 
하늘의 아들에게 거역하는 자를 징벌한다는 의미 때문에 형벌을 의미하는 부월()을 정벌군 장수에게 줌으로써 장수의 권위를 확인시켜 주었다. 

수면문()이나 성좌() 등이 부월에 표현되었다. 
왕으로부터 병권을 상징하는 부월을 받은 장수는 자신의 권위를 나타내는 장검을 소지하게 된다.

통상 이 장검은 상징물이었기 때문에 시종이 별도로 들고 지휘자의 뒤를 따랐다. 
그리하여 인명을 좌우하는 지휘자의 통솔의 의미와 승리를 상징하는 용맹의 의미로 인해 칠성검이나 인검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권위용의 검 외에도 소유자의 무운을 비는 의미로 싯귀를 새기고 실존하지 않은 동물을 그려 새겨 넣거나 화문()을 그려 넣어 상()스러운 무기로 만들려고 하였다.


인검은 간지의 인( : 호랑이, 
예로부터 호랑이는 무를 상징)자 들어가는 때에 제작된 칼로 무()의 기운이 강하여 부월이 상징하는 바를 구현한다고 생각하였다. 

인년(), 인월(), 인일(), 인시() 이 네가지가 모든 적용되는 시기에 제작된 칼을 사인검(), 세가지가 겹칠 때 제작된 칼을 삼인검(), 두가지가 겹칠 때 제작된 칼을 이인검()이라고 한다. 

호랑이의 위력을 빌려 사귀()를 물리침으로써 왕실과 궁중의 안전을 도모하고자 했던 것이다.

사인검은 시기적으로 매 12년마다 제작할 수 있었으나 제작에 많은물력()과 인력()이 수개월 간 소용되므로 흉년 등에는 제작하지 않았다.

사인검은 검신()의 한면에 <사인검>을 포함한 27자의 한자가 금()상감 되어 있고, 다른 한 면에는 191개의 별로 된 성좌()가 역시 금상감 되어있는 보검 중의 보검이다.


사인검은 조선조 중기에 왕들이 장식용 또는 호신용으로 지녔던 검이다. 
여기에서 사인이란 12지간 중에 호랑이를 뜻한다. 

인해와 인달, 인날, 인시에 열처리한 것으로 60년 만에 한 자루를 제작하는 진귀한 검으로 호랑이의 용맹스러움이 간직되어 있다.


사인검()은 조선시대에 임금의 지시에 의해 국가사업으로 제작하였던 칼인데, 12간지의 인()이 4번 겹치는 때 즉 인년(), 인월(), 인일(), 인시()를 택해 타조()하였다.

사인검은 표면에 사인검을 설명하는 한자 27자가 순금으로 새겨져 있다. 

칼집은 어피(철갑상어 껍질)로 되어 있고 손잡이는 동으로 되어 있으며, 순금으로 사인검이라 상감되어 있다. 


사인검의 제원은 전장 82.5cm, 칼날길이 63.7cm, 손잡이길이 18.8cm, 칼날폭 3.3cm, 칼집길이 67.5cm, 칼집폭 4cm 이다.


도신 : 
칠성문 금상감. 면 - 사인검을 위시한 범어 금상감. 병부 : 부적문, 범어와 병부중앙 전후에 8판화가 칠부되었고 병부첨단에는 연봉형이 있으며 중앙에는 8판화와 주위에 성좌가 금상감.


『성종실록』 권90, 성종 9년 3월 계유조에는 “창원군()이 말하기를 신은 본래 고읍지()라고 일컫는 여인을 알지도 못하며, 전후에도 여인을 살해한 일이 없습니다. 

집안에 다만 삼인검()과 삼진검()이 각각 한 자루씩 있을 뿐이고, 또 환도()는 없습니다.”라고 나와있다. 
여기서 삼인검과 삼진검은 동일하게 하나의 의장용 군기()였음이 분명하다. 

유성룡의 『징비록()』에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가 출정하는 신립을 불러 보검()을 하사하고 이일이하 제 군사들이 명을 거역할 때에는 이 검으로 다스리라고 하였다. 
이 검 역시 인검과 유사한 의미를 지닌 검일 것이다.


연()•월(月)•일()•시()가 모두 인()인 때에 만드는 칼.

정원에 전교하기를, “…공장은 다른 일은 별로 없고, 다만 별조궁과 사인검을 만드는 일이어서 장인의 숫자가 많을 것이다. 
지금 같은 흉년에 정지하라고 명하는 것은 곤란하지는 않으나, 별조궁은 여느 때에 변방의 장수와 수령에게 상사하는 것이므로 군무의 일이기에 부득이해서 하는 것이다.<

사인검은 해마다 주조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인년에 만들어야 하는데, 이것은 조종 때의 옛일이며, 올해가 마침 인년이므로 주조하라고 명하였다.…” 하였다. ; 
傳于政院曰…工匠則別無他役 只於別造弓四寅劍造成之事 匠人數多矣 如此凶年 命停不難 而別造弓 則常時賞賜戍邊將士及守令 故軍務之事 不得已爲之<…> 四寅劒則非年年所鑄 必於寅年爲之 此祖宗朝故事也 今年適寅年 故命鑄之… [중종실록 권제98, 12장 뒤쪽, 중종 37년 4월 18일(무진)]

모든 것이 뜻대로 이루어짐
여의()는 승려가 경을 읽거나 설법할 때 지니는 도구로, 강론하는 스님이 글을 기록하여 두고 참고하는데 쓰는 것이라고도 하며 등의 가려운 데를 긁는 기구로 쓰였다고도 한다. 
불교 전래와 함께 유입된 것으로, 여의()란 ‘모든 것이 뜻과 같이 된다’는 의미의 단어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여의는 여의가 가진 단어적 의미 그대로를 상징하는 문양이 되었다.
보통 미술품에 나타나는 여의는 의장적 요소가 강한 여의의 머리부분[여의두]이 주로 장식되며 여의 전체를 그린 그림에서는 영지나 불로초와 유사하게 그려진다.
여의가 그림이나 문양, 장식으로 쓰일 때는 다른 길상 상징형과 결합하여 좀 더 구체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는데 평안여의(), 사사여의(), 만사여의() 등이 그것이다. 
예를 들어 화평, 평안을 의미하는 화병()에 꽂힌 여의는 모든 것이 뜻대로 이루어져 평안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검은 육군박물관과 고려대박물관 소장의 사인검을 복제한 것으로 “사인검()”이라는 명문과 북두칠성() 문양이 상감()되어 있다.

조선시대 일반무기류 중에서 창검류가 차지하는 전술상의 지위는 전체적으로 저하되었지만 근접전에 있어서는 그 기능과 역할은 무시될 수 없었다. 
창검류 중에서 창류는 무과시험에 있어서 궁시류 다음으로 중요한 과목이었기에 전술상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할 수가 있었다. 

도검류는 병사들의 중요한 휴대무기였음에도 무과시험의 과목대상이 아니라는 현실의 반영이 도검의 제조술과 검술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도검류의 전술적 기능과 위치가 약화 내지 전환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의 주요한 무기 중의 하나이자 도검류 중의 가장 대표적인 무기가 바로 환도였다. 
환도는 전통적으로 전술상에서 차지하고 있었던 그 기능과 위치를 회복하기 위하여 시대적 요구에 부응한 변화를 모색하였다.

조선시대 일반무기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공격무기]

도검류로는 이인검, 삼인검, 사인검, 이진검, 삼진검, 사진검 등의 검과 패검, 운검, 별운검 등의 환도류, 장도 등이 있었다.
창류로는 창, 모, 극, 기창 등이 있었고 궁시류로는 정양궁, 예궁, 목궁, 철궁, 철태궁, 고, 각궁 등의 활과 목전, 철전, 예전, 편전, 동개살, 장군전, 세전, 유엽전, 노 등의 화살이 있었다. 공성무기류로는 차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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