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 高麗 .
기술학과 인쇄술
유교를 숭상하는 고려시대의 기술학은 잡학이라 하여 천시되었다. 그러나 현실생활의 필요에서 여러 가지 기술학을 일으켜 발달을 보게 되었다. 즉, 국자감에서 유학 이외에 율학·서학·산학 등 잡학을 교육했고, 과거에서도 제술과·명경과 이외에 의(醫)·복(卜)·지리(地理)·율·서·산 등 잡과를 설치하였다. 또 그러한 부문을 담당하는 기구로 천문·역수를 관장한 서운관(書雲觀), 의약치료를 담당한 태의감 등이 있었으므로 기술학은 자못 발달하게 되었다.
먼저 천문·역법에 있어, 서운관에서는 천문[占星]·역수(曆數)·측후(測候)·각루(刻漏) 등의 일을 관장해 천문관측학과 역(曆)의 계산법이 발달하였다.
천문관리는 천체운행을 관측해 그 결과가 『고려사』 천문지에 상세히 수록되어 있다. 거기에는 과학적 가치를 가진 천문관측도 있었지만, 점성(占星)을 목적으로 한 것이 많았다. 특히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에 따라 천변(天變)을 인간행동의 훈계로 삼으려는 뜻에서 열심히 관측하였다.
그러한 천문관측은 정확한 역계산을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졌으므로, 천문계산표의 개선에 따라 역법이 발달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통일신라 때 사용되기 시작한 당나라의 선명력(宣明曆)을 그대로 계승했는데, 중국은 이미 새 역법으로 바꾼 뒤였으므로, 고려는 그 정확한 역계산법을 알지 못해 오차가 생겼다. 그러한 오차를 없애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독자적 역법을 만들지는 못하였다.
충선왕 때 원나라의 수시력(授時曆)을 받아들여 사용했는데, 천문관리들은 수시력의 개방술을 완전히 알지 못해 일월교식(日月交食)의 추산법을 몰랐다. 그래서 선명력의 구법에 의해 그대로 추산했으므로 일월식의 추산에 오차가 심하였다.
의학은 학교에서의 교수와 과거에서의 의과 설치로 발달을 보게 되었다. 특히, 궁정의술에서 평민을 위한 의술로 개방된 점에 그 의의가 크다. 고려 초까지는 의술의 혜택이 왕실이나 귀족층에 한정되었다.
그러나 963년 제위보(濟危寶)라는 서민층의 치료사업을 담당하는 기관이 설치되고, 989년 내외의 문관 5품, 무관 4품 이상의 질병자에게 의관을 보내어 시약, 치료하게 함으로써 의학발달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처음에는 송나라 의학의 영향을 받았지만, 점차 전통적인 의약을 개발해 자주적인 의학체계를 이루었다. 김영석(金永錫)의 『제중입효방(濟衆立效方)』, 최종준(崔宗峻)의 『신집어의촬요방(新集御醫撮要方)』·『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 등 고려인에 의한 의서가 나왔다.
특히, 『향약구급방』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의서로 1236년(고종 23)에 초간되었다. 이 책은 그때까지 쓰이던 중국 약재들을 한국산 약재, 즉 향약으로 충당하려 했기에, 우리나라 의약의 독자적 연구의 계기를 마련한 점에 가치가 있다.
그리하여 고려 말에 이르러 향약의 지식은 본초학(本草學)으로 학문적 결실을 맺게 되어 『삼화자향약방(三和子鄕藥方)』 등 고려의 독자적인 의약서의 출현을 낳게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우경(牛耕)에 의한 심경법(深耕法)이 행해지고 2년3작식의 윤작법이 시행되었다. 후기에는 농업기술이 더욱 발달해 농업생산력이 증가하고 벼재배도 보급되었다. 특히 이암은 원나라의 농서인 『농상집요(農桑輯要)』를 소개해 넓힌 것은 이를 뒷받침한다.
한편 말기에는 목화가 재배되기 시작해 우리나라 의복원료에 커다란 변혁을 가져왔다. 목화는 공민왕 때 문익점(文益漸)이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가져와 장인 정천익(鄭天益)이 재배에 성공해 보급되었다. 이로써 일반평민의 의료(衣料)가 종래의 베에서 무명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또한 화약의 제조법이 전래되어 화약과 화포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원나라·명나라가 화약제조법을 비밀에 붙여 고려는 이를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공민왕 때 최무선이 중국으로부터 제조법을 배워 들여와 1377년 정식으로 화통도감(火桶都監)을 설치하고 화약과 화포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전함에 화포를 설치해 왜구격퇴에 위력을 발휘하였다. 1380년 진포(鎭浦)에 침입한 왜선 5백여 척을 화통과 화포로써 격파한 것은 그 첫 실험이었다.
한편 인쇄술의 발달이 특히 괄목할 만하다. 처음에는 대장경과 같이 고정식인 목판인쇄였으나, 뒤에는 이동식인 활판인쇄로 발전하게 되었다. 1234년 주자(鑄字)로써 최윤의(崔允儀) 등이 지은 『상정고금예문(詳定古今禮文)』 50권을 인출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주자는 금속활자임이 분명하므로 그 이전부터 금속활자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금속활자의 발명은 서양의 그것보다 2백여 년이나 앞선 것으로 세계최초의 일이다.
『상정고금예문』은 오늘에 전하지 않지만 다행히 1377년에 간행된 『직지심경(直指心經)』이 남아 있어 세계최고의 것으로 공인받고 있다. 금속활자의 사용은 고려 말에 더욱 활발해 1392년 서적원(書籍院)을 두고 주자인쇄를 맡게 하였다.
고려의 대외관계
대외정책의 특성
고려시대는 유달리 외민족의 침입이 잦았던 시기이다. 대륙정세가 불안정해 계속해 그 파도가 고려에 파급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고려의 대외정책은 시대적인 특성을 갖게 되었다.
고려가 건국된 10세기 초부터 멸망한 14세기 후반까지 대륙에서는 북방민족이 군사적·정치적으로 커다란 활약을 전개하였다. 북방의 유목·수렵 민족인 거란·여진, 그리고 몽골 등이 차례로 일어나 중원의 한민족을 압박하고 대륙의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그러한 북방민족의 등장은 종래 중국을 주축으로 움직이던 동아시아의 국제적인 역학관계에 변동을 일으켜 고려도 그 영향을 받게 되었다.
고려는 건국 이후 오대(五代)로부터 송나라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역대왕조에 대해 친선관계를 유지하였다. 특히 송나라와 문화적·경제적으로 밀접한 유대를 맺었다. 반면 북방민족인 거란이나 여진, 그리고 몽골은 야만시하고 대립정책을 견지하였다. 그러한 고려의 대외정책은 동아시아의 국제정국이 균형을 이루고 있을 동안에는 아무런 변동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거란·여진·몽골 등 북방민족이 일어나 문약한 송왕조를 압박하고 중원에 진출함으로써 고려의 전통적인 외교정책은 변동을 가져오게 되었다. 고려가 계속해 그들 북방민족의 침입을 받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북방민족의 압력에 대한 고려의 대응은 그때 그때의 지배층의 체질에 따라 양상을 달리하였다. 처음 거란에 대해서는 건국 초기의 강건한 자주적 의식을 밑받침으로 굳건한 항쟁을 계속해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12세기에 들어 문신귀족정치가 난숙하자, 그들은 금나라에 대해 유약한 사대주의를 결정해 강화를 맺기에 이르렀다.
13세기에 이르러 몽골이 침입했을 때는 최씨무신정권이 집권하고 있었으므로 항쟁의 결의를 고수하고 강화도로 천도해 항전을 계속하였다. 그러한 고려의 대외정책의 추진은 당시의 국제정세의 변화보다도 대내적인 위정자들 사이의 이해관계와 보다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전개되었던 것이다.
거란과의 관계
고려가 건국된 10세기 초에는 대륙에서도 커다란 변동이 일어났다. 오대의 혼란이 송나라의 건국으로 수습되고, 북방에서는 거란이 강성해져 발해가 멸망하였다. 그 때 고려는 송나라에 대해 친선정책을 썼으나 북방민족인 거란에 대해서는 배척정책을 취하였다.
거란에 대해 배척정책을 쓴 것은 거란이 중국 오대의 혼란기에 장성을 넘어 연운(燕雲) 16주를 침략했고, 또 동족의식을 가진 발해를 멸망시키고, 고려에도 압력을 가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942년 거란이 사신을 보내어 낙타 50필을 바치자 태조는 “거란은 발해와의 구맹을 저버리고 일조에 공멸한 무도의 나라이므로 교빙할 수 없다.”하고 사신은 섬으로 유배하고 낙타는 만부교(萬夫橋) 밑에 매두어 굶어죽게 하였다.
또한, 태조는 발해의 유민을 받아들이고 북진정책을 강행해 청천강까지 국경을 확장시켰다. 그러한 태조의 북진정책과 반거란정책은 역대왕에게도 계승되었다. 정종은 북방개척을 위해 서경천도를 계획하는 동시에, 광군사(光軍司)를 설치하고 광군 30만을 조직해 거란침입에 대비하였다.
또한 정종과 광종은 청천강 너머 압록강 사이에 여러 성진을 쌓아 북방에 대한 경계를 엄히 하였다. 그런데 광종 때 발해유민들이 일찍이 고구려가 흥기했던 압록강 중류지역에 정안국(定安國)을 세워 송나라 및 고려와 통교하면서 거란에 적대하므로, 고려에 대한 거란의 침입은 필지의 사실이 되었다.
거란의 제1차 침입은 993년에 있었다. 거란은 986년 먼저 압록강 중류지역의 정안국을 멸망시키고, 또 압록강 하류의 여진족을 경략해 991년 내원성(來遠城)을 쌓은 뒤 고려에 대한 침략을 시작하였다.
그 때 거란은 동경유수 소손녕(蕭遜寧)이 군사를 이끌고 고려의 서북변에 쳐들어왔는데, 고려군의 중군사(中軍使)로 출정한 서희(徐熙)가 그와 담판을 벌여 송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거란에 적대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거란군을 철수하게 하고 오히려 압록강 동쪽의 여진의 옛땅을 소유하는 권리를 얻게 되었다.
거란군이 철수하자 고려는 압록강 이동의 여진을 토벌하고 거기에 여러 성을 쌓아, 이른바 강동육주(江東六州)를 소유하게 되었다. 이로써 고려의 국경은 압록강에 이르게 되었다. 거란은 고려가 강동육주를 점령하고 군사적 거점으로 삼은 데 불만을 갖고 그의 할양을 요구하다 거절당하자, 드디어 1010년강조(康兆)의 정변을 구실로 제2차 침입을 해왔다.
그 때 서북면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 강조는 목종의 모후 천추태후(千秋太后)와 김치양(金致陽)이 불륜의 관계를 맺고 왕위까지 엿보자 군사를 일으켜 김치양 일파와 함께 목종까지 시해하고 현종을 영립했는데, 거란의 성종(聖宗)은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핑계로 4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양규(楊規)가 흥화진(興化鎭)에서 거란군을 맞아 잘 싸웠으나, 강조가 통주(通州)에서 패해 포로가 되고 개경까지 함락되어 현종은 나주로 피난하였다. 그러나 거란은 다만 고려왕의 친조(親朝)를 조건으로 별다른 소득 없이 철군했는데, 그것은 그 때까지도 항복하지 않은 북계의 서경·흥화진 등 여러 성의 군사력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려는 약속한 대로 국왕의 입조를 지키지 않았고, 거란은 이를 독촉했으나 현종은 병을 칭해 회피하였다. 그러자 거란은 본래의 목적인 강동육주의 반환을 강요했으나 역시 거절당하였다.
이에 1018년소배압(蕭排押)으로 해금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제3차 침입을 강행하였다. 그러나 상원수 강감찬(姜邯贊)이 흥화진에서 내침하는 거란군을 맞아 크게 무찌르고, 퇴각하는 적군을 구주에서 섬멸해, 거란의 침입은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거란은 이렇듯 참패만을 당하고 그들의 목적인 강동육주의 쟁탈에 실패하자, 1019년 고려와 화약을 체결해 평화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고려는 북방에 대한 경계를 강화할 필요를 느끼고 전란이 끝나자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1029년부터 개경에 나성을 축조하였다. 그 뒤 1033년부터 국경선에 장성을 쌓기 시작해 1044년에 완공했는데 그것이 ‘천리장성’이다.
여진과의 관계
고려가 많은 인력과 경비를 들여 북방에 대규모의 천리장성을 축조한 것은 거란뿐 아니라 여진에 대한 대비책이기도 하였다. 11세기 후반부터 북만주의 여진족인 완안부(完顔部)가 강성해져 여러 부족을 토벌하고 고려에 압력을 가해왔기 때문이다.
원래 여진은 발해의 일부를 이루던 말갈(靺鞨)의 유족으로 문화수준이 낮아 통일된 국가를 이루지 못하였다. 이들은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기며 공물을 바치기도 하고, 때로는 변경을 침구하기도 하였다.
고려는 공물을 바치는 여진족에 대해서는 식량·철제농구 등을 주어 회유하고, 반면 침구하는 자는 무력으로 응징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또한, 고려에 귀순한 여진인에게는 가옥과 토지를 주어 일반민호에 편입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여진족에 통일세력이 나타나 오히려 고려에 압박을 가하니 그 관계에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완안부에 의해 통일된 여진은 1104년 고려에 복속했던 여진족을 토벌해 함흥지방을 아우르고 도망가는 자를 쫓아 정주관(定州關: 지금의 定平)에 이르렀다. 고려도 임간(林幹)과 윤관(尹瓘)으로 그들을 치게 했으나 모두 패배하였다. 여진군은 기병인 데 비해 고려군은 보병으로 대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윤관의 건의에 따라 기병을 주축으로 한 별무반(別武班)을 조직해 신기군(神騎軍: 騎兵)·신보군(神步軍: 步兵)·항마군(降魔軍: 僧兵)을 편성하고 대비를 서둘렀다.
1107년(예종 2) 윤관에 의한 여진정벌이 단행되었다. 그 때 윤관은 17만의 대군을 이끌고 정주관을 출발해 함흥평야를 점령하고 그 부근에 9성을 쌓아 군사를 주둔시켜 지키니, 고려의 국경은 크게 북쪽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9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종래의 함흥평야설에 대해 근래 두만강 너머 만주설이 제기되고 있는 것은 주목할 점이다.
그러나 여진은 실지를 회복하기 위해 자주 침구하는 한편 사신을 보내어 환부를 애원하였다. 또 고려 내부에서는 윤관의 무공에 대한 시기 등이 겹쳐 1109년 구성을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그뿐 아니라 여진의 아쿠타[阿骨打]가 1115년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금나라를 건국, 1125년 요나라를 멸망시켰고, 고려에 대해서도 사대의 예를 요구하였다.
그러자 고려는 1126년 권신 이자겸이 중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금나라에 대해 상표칭신(上表稱臣)할 것을 결정하였다. 고려 초기에는 강건한 고려인의 기개로 거란침입에 항전을 다했으나, 문신귀족들은 자신들의 정치권력의 유지를 위해 여진족에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송과의 관계
고려는 건국 이후 오대의 여러 중국왕조와 교빙했는데, 송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그와 친선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친선관계는 북방민족인 거란과 여진의 흥기로 방해를 받게 되었다.
거란의 침입으로 강화를 맺게 되자 고려와 송나라와의 교빙은 끊어졌다. 다만 비공식적인 송나라 상인의 내왕은 있었다. 그러나 문종 때 거란의 세력이 쇠약해지자 다시 송나라와의 국교가 재개되었다. 고려는 송나라의 선진문물을 수입하려는 욕구가 많았고, 송나라도 고려를 통해 거란을 견제하려는 의도에서 양국의 통교가 다시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12세기 무렵에 여진족이 흥기해 금나라를 건국하면서 친선관계는 변모하게 되었다. 송나라는 금나라와 손을 잡고 숙적인 요나라를 공격해 멸망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나중에는 도리어 금나라의 침공을 받게 되었다. 송나라의 변경(抃京)이 함락되고 남은 일족이 강남으로 피신해 남송으로 명맥을 유지하게 되어, 고려와 송나라와의 통교는 약화되었다.
송나라는 고려와의 친선관계를 유지해 거란·여진족의 침입시에 고려의 군사력을 얻으려고 했으나 고려는 중립의 태도를 취하였다. 송나라가 거란정벌에 고려의 원군을 청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고, 또 송나라가 금나라의 침공을 받자, 고려에 군사를 일으켜줄 것을 간청했고, 강남으로 옮긴 뒤에도 포로가 된 휘종·흠종을 구출하도록 부탁했지만 역시 고려는 거절하였다. 고려는 친송정책을 취하면서도 당시의 국제정세로 보아 군사적 개입을 회피하는 중립의 태도를 유지하였다.
송나라의 대 고려 외교가 정치적·군사적 목적에 있었다면, 고려의 대송외교는 문화적·경제적 면에 주안점이 있었다. 고려는 송나라와의 통교를 통해 그들의 발달된 선진문물을 수입하였다. 고려는 사신과 학생·승려를 송나라에 파견해 그들의 난숙한 유학·불교·예술 등을 받아들여, 유학·불교가 송나라의 영향으로 심화되었다. 그리고 송판본의 전래로 고려의 인쇄술이 발달되었으며, 송자(宋磁)의 영향으로 고려자기가 발달하게 되었다.
또한, 공적인 사신과 사적인 상인의 왕래로 송나라와의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고려는 송나라의 선진문화에 대한 흠모와 또 귀족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송나라의 서적·비단·자기·약재·차·향료 등을 수입했으며, 반대로 금·은·동·인삼·나전칠기·화문석 등을 수출하였다. 그 때 예성강구의 벽란도(碧瀾渡)는 송나라 상인뿐 아니라 멀리 대식국(大食國: 아라비아)의 상인까지도 출입하는 국제항구로 성황을 이루었다.
몽골과의 관계
오랫동안 평화를 누려온 고려의 대외관계는 13세기에 들어와 커다란 변동을 겪게 되었다. 즉, 몽골세력의 흥기와 그 침입이었다.
몽골족은 금나라의 세력 밑에 있었는데, 13세기 초 테무친[鐵木眞]이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1206년 칸[汗]의 지위에 올랐으니, 그가 곧 칭기즈칸[成吉思汗]이다. 그 때부터 몽골은 사방으로 정복사업을 전개해 영토를 확장하고 북중국에 자리잡은 금나라를 침략해 그 세력이 강성해졌고, 마침내 고려와도 충돌을 하게 된 것이다.
고려가 몽골과 접촉을 가진 것은 1219년 강동성에 웅거한 거란족을 몽골과 함께 공략해 함락시킨 것에서 비롯되었다. 처음 금나라에 복속되었던 거란족은 금나라의 국세가 약화되자 독립했다가 몽골군에 쫓겨 고려 영토로 밀려와 강동성에 들어왔고, 이 때 고려·몽골군의 협공으로 패멸되었다.
몽골은 거란을 토벌한 뒤 고려에 대해 막대한 공물을 요구하였다. 특히 1221년 사신으로 온 저고여(著古與)는 황태자의 지시라고 하여 과중한 공물을 요구했고, 오만불손한 태도로 고려 군신들의 분노를 샀다. 1225년 압록강가에서 귀국하던 저고여가 어떤 도둑에게 피살된 사건이 일어나자 몽골은 그것을 트집잡아 침입하기에 이른 것이다.
몽골의 제1차 침입은 1231년에 이루어졌다. 몽골의 장군 사르타이[撒禮塔]가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북계의 여러 성을 함락시키고 개경근처에 다다랐다. 고려는 몽골군의 침입을 맞아 구주에서 박서(朴犀)가 용감히 항전했으나, 수도가 포위되어 화의를 요청해 몽골군은 서북면에 다루가치[達魯花赤]를 설치한 뒤 철수하였다.
그러나 몽골이 무리한 조공을 요구하고, 고려에 파견된 몽골관리의 횡포가 심하자 고려 군신의 분노가 고조되어 최우 정권은 단호히 항전할 것을 결의하고, 1232년 강화도로 도읍을 옮겨 반몽태도를 분명히 하였다.
그러자 사르타이는 제2차 침입을 단행해 개경을 지나 한강 남쪽까지 공략했으나, 처인성(處仁城: 지금의 용인)에서 김윤후(金允侯)에게 사살되어 철군하였다.
그 뒤에도 몽골군은 1259년 강화가 맺어질 때까지 여러 차례 침입하였다. 오랜 기간에 걸쳐 몽골군의 침략이 되풀이되었지만 고려인은 끈질긴 항쟁을 계속해 국토를 수호하였다. 강력한 반몽정책을 견지한 최씨정권이 바다 건너 강화도에서 꿋꿋이 항전을 지휘했고, 육지에서는 일반 민중들이 침략군에 대항해 용감히 싸움으로써 몽골군을 격퇴할 수 있었다.
특히, 무신정권은 농민들로 하여금 산성과 해도(海島)로 들어가 살게 하는 정책을 썼으므로, 농민은 그 기지를 중심으로 집단적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싸워 항전의 주체가 되었다.
그러나 항전을 고수해왔던 최씨정권의 붕괴는 항몽전에 변화를 가져왔다. 1258년 최의가 문신 유경(柳璥), 무신 김준 등에 의해 제거되자, 강화파인 문신들의 주청에 따라 이듬해 몽골에 대한 화의가 성립된 것이다. 그러나 최씨정권을 무너뜨린 무신 김준은 문신 유경을 거세한 뒤 교정별감이 되어 무신정권을 유지하고 몽골에 대한 강화를 반대하였다.
이는 1268년 김준을 살해하고 대신 교정별감이 된 임연에 이르러 더욱 노골화되었다. 임연은 1269년 친몽정책을 쓴 원종을 폐하고 왕제 안경공 창(安慶公淐)을 세웠으나 몽골의 압력으로 복위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임연이 죽은 뒤 그 아들 임유무도 반몽정책을 고수해, 1270년 국왕이 몽골의 세력을 업고 몽골에서 귀국하면서 내린 출륙명령(出陸命令)을 거부하고 재항쟁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반대파에 의해 죽임을 당하면서 무신정권은 종식되고, 그에 따라 오랜 항몽은 끝나게 되었다.
이에 왕정이 복구되고 개경으로 환도하게 되었으나, 몽골에 대한 반항이 그친 것은 아니었다. 무신정권의 무력적 기반으로 항몽전의 선두에 섰던 삼별초가 개경환도를 반대하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즉, 1270년 출륙명령이 내리자 개경환도는 곧 몽골에 대한 항복을 의미한다 하여 배중손(裵仲孫)이 이끈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승화후 온(承化侯溫)을 왕으로 옹립하고, 몽골세력을 등에 업은 원종의 개경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그들은 장기전을 펴기 위해 멀리 진도로 내려가 남부지방일대를 손에 넣었지만 여·몽연합군의 토벌로 진도가 함락되자, 그 일부는 다시 제주도로 옮겨 김통정(金通精)의 지휘 아래 항쟁을 계속했으나 1273년에 평정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계속된 대몽항쟁은 종식되어 이후 고려는 몽골의 간섭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고려의 역사적 성격
지방호족세력 시대
고려는 지방호족세력이 대두해 건국한 왕조인 동시에 그 뒤에도 지방세력이 언제나 중앙관리의 공급원이 되고 있었음이 특징이었다. 그런 점에서 고려는 바로 지방세력의 시대라 해도 좋을 것이다.
호족세력은 처음 고려 건국의 주역으로 중앙정권에 크게 관여하였다. 그러나 왕조의 기반이 확립되자 중앙집권화정책에 의해 그들은 차차 중앙관리로 편입되어 독립성을 상실해갔다. 이들이 곧 고려 귀족가문이 되어 귀족정치에 참여한 것이다. 지방에 남은 지방세력도 그들의 자제들은 과거를 통해 중앙정계에 진출시켜 문벌귀족의 보수정치에 도전하는 신진대사의 구실을 담당하였다.
그들 지방세력은 후기에도 지배세력인 권문세족에 대립한 신흥사대부가 되어 새로운 시대의 개혁을 주도하였다. 지방의 중소지주인 유향품관(留鄕品官)과 향리의 자제들이 과거를 통해 중앙관리로 진출하고, 당시 높은 관직을 독점하고 막대한 농장을 겸병한 보수적인 권문세족에 대립한 신진사대부가 되어 개혁정치를 주장하였다. 이성계의 혁명은 바로 그들 지방세력을 중심으로 한 신흥사대부계층의 승리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지방호족은 고려 건국의 주역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 뒤에도 언제나 중앙의 보수적인 지배세력에 대한 신진관료의 개혁세력이 되었고, 마침내 조선 건국의 주역의 구실도 담당했다고 하겠다.
귀족사회의 성격
고려 사회의 성격을 귀족사회로 보느냐 또는 관료사회로 보느냐에 대해서 양론이 있으나, 대체로 문벌을 중시하는 귀족사회로 규정하는 것이 일반적 견해인 듯하다. 고려는 지방호족세력에 의해 건국되었지만, 성종 이후 중앙관리가 귀족화함에 따라 문벌귀족사회가 형성되어갔다.
그들 귀족은 중요관직을 독점해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토지를 집적해 대토지소유자가 되었으며, 사회적으로도 문벌귀족의 특권을 향유해 지배계층이 되었다. 그들은 자기들 상호간에 중첩되는 혼인관계를 맺고 왕실과도 혼인해 외척가문이 됨으로써 귀족가문의 권위를 유지하였다.
이 때 관리가 되는 정상적인 길은 과거였으나, 음서제가 광범하게 실행되어 5품 이상 관리의 자제에게 과거를 보지 않고도 음직을 주는 제도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귀족사회의 제도적인 기반이 되었다. 또, 음서제와 결합되어 5품 이상 관리에게 공음전(功蔭田)이 주어졌다. 이것은 자손에게 세습이 허용되어 귀족제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그리하여 정치적인 안정으로 국력이 강성해지고, 경제적으로 국가재정과 농민생활의 안정을 가져왔으며, 사회적으로 귀족을 정점으로 한 신분제도의 확립을 보았다. 문화면에서는 귀족층의 주도로 유학·불교 및 미술공예의 발달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귀족사회는 그 자체의 모순성의 격화로 붕괴되었다. 관직과 토지를 둘러싼 귀족상호간의 분쟁과, 특히 보수적인 문벌귀족에 대한 지방출신인 신진관료의 대립은 귀족정치의 계속을 허용하지 않았다. 인종 때의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은 귀족사회의 기반을 흔들리게 했고, 의종 때의 무신란과 무신정권의 성립은 그를 붕괴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발전적인 고려사회
약 5백년간의 고려왕조는 어디까지나 동적인 역사였고 발전하는 사회였다. 따라서, 고려시대사를 이해하려면 평면적으로 정적인 역사로 보아서는 안되고, 항상 시간에 따라 발전한 사회였다는 시각에서 조명해야 할 것이다.
고려왕조를 건국하고 정권에 참여한 세력은 호족들이었다. 그러나 고려의 기반이 확립되고 중앙집권화가 진전됨에 따라 문벌귀족사회가 형성되었다. 호족세력은 중앙관리가 되어 집권체제에 편입되거나, 자기 지방의 향리로 격하되어 초기의 자립성을 상실한 것이다. 그와 같이, 사회의 주도세력이 지방호족에서 중앙귀족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고려사의 발전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1170년에 일어난 무신란과 그 뒤 1백년간 계속된 무신정권은 귀족사회성립의 기반인 신분체제를 전복시켜 새로운 사회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무신란은 바로 고려사회의 성격인 귀족사회를 붕괴시키고 새로운 신분사회로 넘어가는 분수령을 이루었던 것이다.
후기의 지배세력은 무신정권기와 그뒤의 대몽관계를 통해 형성된 권문세족이었다. 권문세족은 가문의 권위를 중요시하는 종래의 문벌귀족의 일면을 계승했으나, 가문의 후광보다도 현실적인 관직을 보다 중시하였다.
그것은 귀족사회에서 관료사회로 넘어가는 중간존재였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후기의 지배세력인 권문세족은 전기의 지배세력인 문벌귀족의 발전된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권문세족도 새로운 사회계층인 신흥사대부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후기에는 지방의 중소지주인 유향품관과 향리출신의 자제들이 과거를 통해 중앙관리로 진출했는데, 그들은 권문세족의 보수정치에 대립해 개혁정치를 내세웠다.
충선왕과 공민왕의 개혁정치도 신진사대부가 국왕과 결합해 추진한 것이었다. 그들은 마침내 이성계와 연합해 고려를 넘어뜨리고 조선 신왕조를 개창한 주인공이 되었다. 그것은 사회의 주도세력이 권문세족에서 신진사대부로 넘어갔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고려는 몇 차례에 걸쳐 지배세력이 교체되며 사회발전이 이루어졌다. 초기의 호족시대에서 왕조의 기반이 확립되자 귀족사회로 넘어갔고, 다시 무신란 뒤 신분체제가 변화하자 권문세족이 지배세력이 되었고, 신흥사대부의 대두로 새 왕조가 교체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고려의 문벌귀족사회는 조선의 양반관료사회로 전환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고려사는 5백년 동안 언제나 새 사회를 지향하며 발전한 동적인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
사상체계의 특징
나말여초에는 정치사회의 변화와 함께 사상계에도 커다란 변동이 일어났다. 신라 말기의 육두품출신들은 골품제도의 운영원리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유교정치이념을 내세웠고, 그것은 고려에 들어와 정착하게 되었다.
고려 건국기에 최치원(崔致遠) 계통의 문인들이 왕건에게 귀의하면서 유교정치이념을 표방했고, 최승로의 보필을 받아 숭유정책을 추진한 성종 때 보다 본격화되어, 드디어 고려는 유교를 정치실천의 원리로 삼게 되었다.
불교계에도 국가와 진골귀족의 옹호를 받아 발달한 교종에 대해, 지방호족들에 의해 선종이 크게 일어났다. 그것은 문자에 의하지 않고 선(禪)을 통해 심성을 깨닫는 서민적인 선종이 호족들의 체질에 맞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진골귀족의 교종은 민중적이며 혁신적인 성격을 지닌 선종으로 교체되는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다. 고려의 불교계는 교종에서 선종으로 바뀌었으며, 나아가 천태종이 건립되는 커다란 진전이 있었다.
또한, 유교가 정치이념으로 채용되었고, 불교는 사상·신앙계의 지도이념으로 이용되었다. 양자는 각기 그 세계가 달랐기 때문에 공존할 수 있었고, 유학자가 불교를 믿고 승려가 유교경전에 능통한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후기에 철학적이며 사변적인 주자학이 수용되면서 불교와 충돌하게 되었다. 주자학자들이 불교를 배척해 종래의 유불공존에서 억불앙유로 바뀌어 유불교체의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중세사회의 성격
한국사의 시대구분의 문제는 아직도 시론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사에 있어서 중세가 언제부터 시작되고, 또 어떤 성격을 가졌는가 하는 문제는 아직 정립된 결론이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는 고려를 중세사회로 규정하는 데 큰 이의가 없는 것 같다.
고려시대가 중세라는 점은 고대사회의 편성원리인 골품제의 극복에서 엿볼 수 있다. 신라에서는 출생한 혈족에 따라 지위와 신분이 규정된 골품제가 기본적인 사회체제를 이루고 있었는데, 나말여초에 지방호족세력과 지식층인 육두품출신이 골품제에 반대하고 새로운 사회질서를 형성하였다. 그러므로 고려는 고대적이며 폐쇄적인 골품체제에서 보다 개방되고 전진된 사회라는 점에서 중세라 할 수 있다.
고려가 중세사회라는 것은 지방호족의 대두에서도 찾을 수 있다. 신라는 왕경(王京)의 중앙귀족 중심의 정치체제를 이루고 지방세력의 성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신라 말기에 토착적인 촌주출신과 왕경에서 내려간 중앙귀족들이 지방의 호족으로 대두해 새로운 지배세력이 되었다. 그들 지방호족은 마침내 고려를 건국하고, 지배층이 되었으므로, 그것을 중세사회로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채용한 것도 중세사상의 성립으로 볼 수 있다. 신라의 진골체제를 극복하기 위해 유교정치이념을 채용하고, 당·송의 제도를 본받아 중앙집권적인 정치제도를 실시한 점에서도 고대적인 사회에서 중세사회로 전진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불교에 있어서도 귀족적인 교종에서 벗어나 민중적이며 혁신적인 선종의 유행을 보게 된 것도 새로운 중세사상의 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사회적·경제적인 면에서도 중세적 요소가 나타났다. 신라의 고대적인 토지소유관계와 농민에 대한 수취관계의 모순을 시정하려 했는데, 태조의 조세개혁과 그 뒤의 전시과 제정이 그것이다. 전시과의 시행은 확실히 일보전진한 형태로, 중세적인 토지지배관계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특히, 일반농민이 조상대대로 이어받아 경작하는 민전이 광범하게 존재한 것은 농민의 토지소유의 일반화를 말해주는 것으로, 농민지위의 성장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토지소유관계의 진전과 농민의 성장은 신라의 고대적인 것과 다른 중세적인 성격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중세사회의 성격은 다음 조선의 근세사회로 발전하는 토대를 이루었다.
오늘날 고려시대사에 대한 연구는 자못 활발하고 연구성과도 많은 편이다.
비교적 많은 인원이 고려시대연구에 참여하고 있고, 각 부문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고려시대사연구의 활기는 1960년대 이후 비롯된 것으로 그전까지는 한산하였다.
일제시기의 고려시대사연구는 전반적인 한국사연구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전혀 방치된 상태였다.
몇몇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고려시대의 역사지리나 정치사·대외관계 등에 대한 연구가 있었으나, 그것은 단편적인 사건의 고증적 연구에 불과했고, 그 성과도 미미하였다. 반면 한국인 학자들의 고려시대연구는 더욱 보잘 것 없었다.
신채호(申采浩)는 「조선역사상 1천년래 제1대사건」에서 묘청의 난을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조명했고, 이병도(李丙燾)의 「인종조의 서경천도운동과 그 반란」(日文), 김상기(金庠基)의 「삼별초와 그의 난에 대하여」, 윤용균(尹瑢均)의 「고려 의종조에 있어서의 정중부난의 소인과 그 영향」(日文) 등 몇몇 학자들이 몇 편의 논문을 발표했으나 성과는 크지 못하였다.
백남운(白南雲)이 사회경제사적인 입장에서 고려시대사를 서술한 『조선봉건사회경제사상』(日文)이 나온 것은 특이한 일로 그 의의가 컸다.
고려시대사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광복 후에 시작되었다.
이병도는 일제시대에 발표한 논문을 광복 후의 연구업적과 함께 『고려시대의 연구』를 펴내어 고려시대의 풍수도참설의 발전을 고찰하였다.
김상기도 삼별초연구를 합친 연구서인 『동방문화교류사논고』 안에 「여송무역소고」·「고려무인정치기구고」를 발표하였다.
이들 광복 직후의 고려시대사연구서의 출간은 민족항일기부터의 연구업적을 토대로 나올 수 있는 성과였다.
새로이 고려시대사연구에 참여한 젊은 세대의 연구논문은 6·25전쟁이 휴전된 뒤부터 배출되기 시작했으며, 특히 그것은 『역사학보(歷史學報)』의 간행에 크게 힘입게 되었다. 그리하여 1950년대 『역사학보』를 비롯한 몇 개의 연구지에 새 역사학도들에 의한 고려시대사연구논문이 상당량 발표되었다.
윤무병(尹武炳)이 1953년 처음으로 「고려북계지리고」를 발표한 이후, 1954년 이광린(李光麟)이 「기인제도의 변천에 대하여」를 내놓았고, 1955년 박성봉(朴性鳳)이 「해동공자 최충소고」, 이용범(李龍範)이 「여란무역고(麗丹貿易考)」, 김용덕(金龍德)이 「향·소·부곡고」를 발표했으며, 1956년 이기백(李基白)의 「고려경군고」, 윤무병의 「소위 적현(赤縣)에 대하여」, 양원석(梁元錫)의 「여말의 유민문제」, 천관우(千寬宇)의 「여말선초의 한량」, 김용덕의 「고려시대의 서경에 대하여」 등 여러 논문이 나오기에 이른 것이다.
1950년대에는 광복 후의 새로운 사학도들에 의한 고려시대 연구논문이 상당수 발표되었으나, 그것은 아직도 개별적인 문제연구에 불과했고, 그 분야의 계통적이며 집중적인 연구업적은 1960년대에 결실되기 시작하였다.
1960년대 초에는 고려시대에 대한 두 개의 시대사가 출간되었다.
이병도의 『한국사』 중세편과 김상기의 『고려시대사』가 그것이다. 그것들은 고려시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길잡이가 되었다.
특히, 이기백이 고려 경군에 대한 논문에 이어 일련의 고려시대 병제를 연구해 『고려병제사연구』로 집대성했고, 변태섭(邊太燮)이 「만적란발생의 사회적 소지」 이후 일련의 고려정치제도를 연구한 논문을 모아 『고려정치제도사연구』를 출간함으로써 고려사연구는 본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1970년대에는 보다 젊은 학자들이 고려시대연구에 참여해 새로운 시각으로 각 분야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담당하였다.
고려시대의 시대적 변화와 사회적 성격 등에 대해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끈질긴 연찬을 가함으로써 그 성과는 매우 컸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에 들어서는 수많은 연구논문과 그것들을 집대성한 연구서가 배출되었다.
고려 초기의 호족세력과 왕권과의 관계에 대해 하현강(河炫綱)·김광수(金光洙)·강희웅(姜喜雄) 등의 연구가 있다.
연구서로는 이기백 편 『고려광종연구』가 출간되어 고려 초기의 호족연합정권과 그 뒤의 중앙집권화정책에 대해 고찰하였다.
고려사회의 성격에 대한 귀족제사회설과 관료제사회설의 논쟁을 중심으로 박창희(朴菖熙)·김의규(金毅圭)·박용운(朴龍雲)·이기백·변태섭 등의 연구가 있었다.
연구서로는 황운룡(黃雲龍)의 『고려벌족에 관한 연구』, 허흥식(許興植)의 『고려사회사연구』, 홍승기(洪承基)의 『고려귀족사회와 노비』, 이수건(李樹健)의 『한국중세사회사연구』가 나와 가장 풍요한 업적을 이루었다.
토지제도에 대한 연구로는 강진철(姜晉哲)이 『고려토지제도사연구』를 내놓았고, 연구논문으로는 이우성(李佑成)의 영업전(永業田), 송병기(宋炳基)의 농장, 민현구(閔賢九)의 녹과전, 김용섭(金容燮)의 양전제에 관한 것이 눈에 띈다.
사상사방면에도 적지 않은 연구성과가 있었다. 이병도의 『고려시대의 연구』는 고려의 풍수도참사상의 발전을 고찰했으며, 조명기(趙明基)의 『고려 대각국사와 천태사상』, 김두진(金杜珍)의 『균여화엄사상연구』, 이희덕(李熙德)의 『고려유교정치사상의 연구』 등이 나왔다.
연구논문으로는, 유교사상에 이병도·박성봉·이희덕의 업적이 있고, 불교사상에 안계현(安啓賢)·최병헌(崔柄憲)·고익진(高翊晉)·채상식(蔡尙植) 등의 연구성과가 돋보인다.
문화면에는 문화의식과 역사의식에 대해 김철준(金哲埈)·고병익(高柄翊)·이우성·박창희 등의 연구가 있고, 문학에 이명구(李明九)·장덕순(張德順), 미술에 고유섭(高裕燮)·진홍섭(秦弘燮) 등의 논문이 있다.
무신란과 무신정권에 대해서는 김상기·변태섭·민병하(閔丙河)·김의규·정두희(鄭杜熙)·박창희의 연구가 있고, 민란과 삼별초의 난에 대해서는 역시 김상기·변태섭의 논문이 보인다.
고려 후기 사회에 대해서는 민현구·김윤곤(金潤坤)·이기남(李起男) 등이 권문세가와 신흥사대부의 대립을 해명하는 연구를 하였다.
대외관계에 관한 연구로는, 거란 및 여진족과의 관계는 박현서(朴賢緖)·이용범·김상기·김광수, 그리고 송나라와의 관계는 김상기·전해종(全海宗) 등의 연구가 있다.
원나라와의 관계는 고병익·강진철·유홍렬(柳洪烈) 등의 연구가 보인다.
1990년대에 들어 고려사연구는 과연 활기를 띠게 되었으며 그것은 특히 소장학자들의 학위논문의 형식으로 구체화되었다.
이것은 젊은 학자들의 고려사연구에 대거 참여로 저변이 확대되어 그 장래가 희망적인 점이다.
이들은 각분야에서 골고루 많은 업적을 내놓았는데 특히 정치사·정치제도사에서 볼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홍승기는 몇사람의 논문을 합쳐 『고려태조의 국가경영』을 내놓았고, 박용운은 『고려개경연구』·『고려시대 관계·관직연구』를 저술했으며, 이밖에 학위논문으로 신수정(申守楨)의 재상제도, 김창현(金昌鉉)의 정방연구가 돋보였다.
정치세력분야에서는 이익주(李益柱)·박재우(朴宰佑)의 고려후기 정치세력연구와 김광철(金光哲)의 세족층(世族層) 연구가 집중되었고 김용선(金龍善)·박용운의 음서제연구에 성과를 거두었다.
지방제도연구로는 김일우(金日宇)·김아네스의 고려초기 지방지배연구가 있었고, 박종기(朴宗基)의 부곡제연구, 구산우(具山祐)·박은경(朴恩卿)의 향촌사회 분석이 눈에 뛴다.
군사제도로는 홍승기·홍원기·정경현의 경군인 2군·6위 연구가 잇따라 발표되었고, 권영국(權寧國)의 고려 후기 군사제도가 이를 이어 나왔다.
교육제도로는 박찬수(朴贊洙) 및 민병하·신천식의 논문이 돋보인다.
경제사분야에서는 윤한택(尹漢宅)의 고려 전기 사전(私田) 연구와 박경안(朴京安)의 고려 후기 토지제도연구가 있었고, 사원경제(寺院經濟) 연구로 이상선(李相瑄)·이병희(李炳熙)의 업적이 눈에 뛴다.
재정사연구로 김옥근(金玉根)·안병우(安秉佑)의 논문이 있고, 최정환(崔貞煥)의 녹봉제연구와 김재명(金載名)·박종진(朴鍾進)의 부역제도 연구가 새로웠다.
사상사방면에는 허흥식의 불교사연구, 김광식(金光植)의 무인정권과 불교계연구가 있었고 성리학수용연구로 이원명(李源明)·변동명(邊東明)의 성과가 컸다.
무신정권에 대해서는 김당택(金塘澤)·민병하의 연구에 이어 이정신의 무신정권기 농민·천민항쟁 연구가 있었으며 윤용혁은 대몽항쟁사를 상술하였다.
이상에서 찾아본 바와 같이, 고려시대사에 대한 연구는 근년에 이르러 인원이나 연구성과에 있어 자못 활기를 띠게 되었다.
지금까지 개척되지 않았던 많은 문제점이 해명되고 심도 있는 연구업적이 나오게 되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와 1990년대에 이르러 수많은 연구서가 출간되기 시작한 것은 그와 같은 활발한 고려시대사 연구의 결실로 이해된다.
이같은 연구추세는 앞으로도 계속되리라 믿어진다.
연천 숭의전지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에 있는 고려 태조와 7왕을 제사지냈던 사당.
1397년에 태조의 명으로 묘를 세워 1399년에 고려 태조와 7왕을 제사지냈다.
문종은 이곳을 '숭의전'이라 이름짓고, 고려조의 충신 정몽주 외 열다섯 사람을 제사지내도록 하였으며, 고려 왕족의 후손들로 하여금 이곳을 관리하게 하였다.
고려
[高麗]
고려 1
고려 2
고려 3
고려 4
고려 5
고려 6
고려 7
고려 8
본관 개성(開城), 자 약천(若天), 성 왕(王), 휘 건(建), 시호 신성(神聖)이다.
금성태수(金城太守) 융(隆)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위숙왕후(威肅王后:追尊) 한씨(韓氏)이다.
29명에 이르는 많은 후비(后妃)를 두었는데 이는 혼인관계를 통해 호족세력을 통합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895년(진성여왕 9) 아버지를 따라 궁예(弓裔)의 휘하에 들어가 898년(효공왕 2) 정기대감(精騎大監)이 되고, 900년 광주(廣州)·충주(忠州) 등을 공취, 그 공으로 아찬(阿粲)의 위계를 받았다.
903년에는 수군을 이끌고 전라도 지방을 공략, 궁예의 영토를 확장하여 알찬(閼粲)에 승진되고 계속하여 전라도·경상도 지방에서 견훤(甄萱)의 군사를 격파하는 한편 정벌한 지방의 구휼(救恤)에도 힘써 백성의 신망을 얻었으며, 913년 시중(侍中)이 되었다.
918년 세력이 강대해짐에 따라 난폭한 행동을 자행하는 궁예가 민심을 잃자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 등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어 즉위, 국호를 '고려'라 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 정하였다.
이듬해 수도를 송악(松嶽)으로 옮기고 융화정책·북진정책·숭불정책을 건국이념으로 삼아 정책을 펴나갔다.
지방 호족들을 회유·무마하는 한편, 서경(西京)을 개척하고 여진을 공략했으며 불교를 호국신앙으로 삼아 각처에 절을 세웠다.
935년 투항해 온 신라 경순왕을 맞아 평화적으로 합병하고 이듬해에는 앞서 항복해 온 견훤과 함께 신검(神儉)의 후백제를 공격, 이를 멸망시켜 마침내 후삼국(後三國)을 통일하였다.
이 해 《정계(政誡)》 《계백료서(誡百寮書)》를 저술하여 정치의 귀감으로 삼게 하고 943년 후세의 왕들이 치국의 귀감으로 삼도록 〈훈요십조(訓要十條)〉를 유훈으로 남겼다.
서예에 뛰어났으며, 능은 현릉(顯陵:개성)이다.
고려를 세우고 후삼국을 통일한 임금이다.
후고구려의 임금인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운 뒤 신라와 후백제를 정복해 한반도의 주인이 되었다.
혼인 정책과 불교 장려 정책 등으로 나라를 안정시켰다.
태조는 고려를 세우고 결혼정책을 통해 호족을 통합했다.
세금을 감면하고 불교 행사를 성대하게 열어 민심의 안정과 통합을 이루려고 했다.
통일신라와 차별되는 고려만의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 북진정책을 펼쳐 실제로 영토를 확장했다.
민심을 얻지 못하는 국가는 오랫동안 유지될 수가 없습니다.
이건 동서고금의 진리예요.
마지막으로 새로운 국가를 만들었으니 고려만의 브랜드가 있어야 합니다.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기 위한 고려만의 색을 만들어나갑니다.
고려 태조, 한반도 역대 왕 중 가장 많은 부인,
1위. 고려 태조 29명
2위. 고려 현종 13명
3위. 조선 성종 12명,
조선 중종 12명
엄청나? 요즘이야 일부일처제니까 열 명 이상 비빈을 거느린 왕들이 방탕하다고 여겨집니다.
세계사적인 수준에서는 결코 지나치지 않아 오히려 약소합니다.
중국이나 이슬람제국의 경우 후궁은 최소한 수천 명.
심지어 종교적으로 일부일처제가 강요된 서구에서도 왕은 수많은 정부를 뒀거든요.
조선의 국력과 인구를 생각해도 수십 정도는 되어야 했을 겁니다.
후궁의 수는 권력의 크기를 보여주거든요.
후손들에게 당부하는 글, 훈요 10조
태조도 이걸 걱정해서 죽기 전에 후손들에게 당부하는 글인 훈요 10조를 남깁니다.
어떤 글인지???
1조. 불교의 힘으로 나라를 세웠으므로, 사찰을 세우고 주지를 파견하여 불도를 닦도록 하라.
고려 시대까지는 불교를 존중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불교를 완전히 억압하거든요(억불숭유정책이라고 하죠!).
2조. 도선의 풍수사상에 따라 사찰을 세우고, 함부로 짓지 말라.
풍수지리사상을 중요하게 여기는 걸 알 수 있어요. 실제로 고려를 건국한 이들의 사상적 배경이 풍수지리사상이었죠.
4조. 우리나라와 중국은 지역과 사람의 인성이 다르므로 중국의 문화를 반드시 따를 필요가 없으며, 거란은 짐승과 같은 나라이므로 그들의 의관제도는 따르지 말라.
여기에선 두 가지를 알 수 있네요.
무조건 중국 것이 좋은 게 아니라 우리나라에 맞는 것을 수용하자고 말하고 있어요.
사대적이지 않고 자주적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북진정책을 추진하면서 거란을 여전히 견제하는 걸 알 수 있죠.
5조. 서경은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이 되니, 백 일 이상 머물러라.
서경은 서쪽 수도인 평양을 뜻합니다.
마찬가지로 북진정책이 돋보인다.
북진정책을 추진하다
마지막으로 ‘new brand’ 만들기를.
가장 중요한 건 이 나라를 왜 만들었는지에 대한 ‘방향’을 세우는 겁니다.
그 방향은 고려라는 국호에 가장 잘 드러나 있죠.
고려는 고구려의 준말입니다.
지금도 우리나라 이름이 대한민국인데 한국이라고도 하죠? 마찬가지입니다.
고려라는 이름을 지은 이유는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라는 걸 의미합니다.
예전의 통일신라와는 다른 고려만의 브랜드를 만들려고 한 거죠.
추진한 정책이 바로 북진정책입니다.
고구려의 그 넓었던 북쪽 영토를 되찾기 위해 북쪽으로 진출하는 정책을 펼친 거죠.
실제로 청천강에서 영흥의 국경선까지 영토를 확장하는 성과를 거둬요.
고구려의 원수, 거란에게 적대적,,
고려의 옛 수도였던 평양을 제2의 서울로 삼고 중요하게 여겼어요.
당시 개경의 위치를 기준으로 볼 때 평양이 서쪽에 있어서 서쪽 수도라는 의미로 평양을 서경이라고 불렀습니다.
고구려의 원수는 고려의 원수가 되겠죠?
고구려의 유이민들이 만든 국가인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에게는 적대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만약 북한을 멸망시키고 중국이 우리의 북쪽 땅을 빼앗았다면 우리들의 원수가 되겠죠? 그런데 거란은 고려와 잘 지내고 싶어 했어요.
짝사랑이었던 거죠.
거란에서는 고려에 아주 귀한 선물인 낙타를 무려 50마리나 선물로 보냅니다.
북방 민족들에게 목숨만큼 중요한 게 바로 가축이거든요.
거란이 미웠던 태조는 그 낙타를 만부교라는 다리 밑에 묶어놓고 굶겨 죽였습니다.
사랑이 깊어지면 증오가 되죠.
나중에 다루겠지만 이런 크고 작은 분쟁으로 거란은 고려를 침공하게 됩니다.
태조 왕죽음, 왕위 다툼이 시작
태조 왕건이 죽자 이미 예고되어 있던 문제가 빵빵 터집니다.
큰 아들 혜종이 왕위를 이어받았지만, 왕위를 노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던 거.
왕자들만 25명이라고 했죠? 부인이 29명인 데다가, 그 부인들의 아버지들은 호족 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강한 호족들이었다.
2대 왕인 혜종은 재위 2년 만에 34세의 젊은 나이에 의문사를 당하고요, 3대 왕인 정종도 내내 불안정한 왕 자리에서 덜덜 떨다가 3년 만에 병에 걸려 27세에 승하하게 됩니다.
왕건은 877년에 송악(지금의 개성 지방)에서 태어났다.
송악의 호족이었던 왕건의 아버지 왕륭은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지방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아버지를 따라 궁예의 신하가 된 왕건은 전쟁터에 나가 공을 세우고 궁예로부터 신임을 얻으며 자신의 세력을 키워 갔다.
이후 궁예가 난폭한 행동을 일삼자 918년에 홍유, 신숭겸, 복지겸, 배현경 등의 장수들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웠다.
임금이 된 왕건은 신라와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는데, 927년에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를 공격해 경애왕을 죽이자 대구의 팔공산에서 후백제와 전투를 벌였다.
그는 후백제군에게 포위되는 위급한 상황에 빠졌고, 그의 부하인 신숭겸의 희생 덕분에 간신히 위기를 벗어났다.
이후 왕건은 후백제에게 계속 밀리다 930년에 일어난 고창(지금의 안동 지방)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면서 후삼국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935년에는 신라를 합병했고, 936년에는 후백제를 멸망시켜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했다.
후삼국 통일 후 왕건은 고려가 고구려를 이어 받은 나라임을 밝히고, 청천강 하류에서 영흥 지방까지 영토를 넓혔다.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에 의해 핍박받던 발해 유민들을 따뜻하게 맞아들이고 거란과는 외교를 끊었다.
왕건은 정치를 안정시키기 위해 지방의 토착 세력(호족)들과 혼인 관계를 맺고, 각 지방의 힘 있는 자들에게 왕씨 성을 내렸다.
불교를 적극 장려해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켰으며, 후대의 임금들이 나라를 잘 다스리도록 훈요 10조를 남기기도 했다.
왕건은
통일 후의 고려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호족들의 딸과 결혼을 하고, 자신의 성씨를 상으로 주는 등 지방의 토착 세력을 끌어안는 포용 정책을 펼쳤다.
이에 따라 전국 곳곳에 있는 호족들이 그의 신하가 되어 충성을 약속했다.
왕건은 943년에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무려 29명의 부인과 34명의 자식을 두었다.
왕건이 많은 부인을 둔 것은 지방 세력과 우호 관계를 맺기 위해서였다.
그들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만든 것이다.
이러한 혼인 정책은 왕건이 죽은 뒤 치열한 권력 다툼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태조와 신혜왕후를 합장한 왕릉인 현릉(顯陵)
태조와 신혜왕후를 합장한 왕릉인 현릉(顯陵)
사성(賜姓)은 ‘성을 내린다’는 뜻이다.
지방의 유력한 호족에게 자신의 성인 ‘왕’ 씨 성을 하사하여, 왕족으로 신분을 높여주고 관직이나 토지를 주어 그들을 우대해주는 정책이다.
이 정책 역시 호족들이 태조를 적극 지지하여 나라를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기술학과 인쇄술
유교를 숭상하는 고려시대의 기술학은 잡학이라 하여 천시되었다. 그러나 현실생활의 필요에서 여러 가지 기술학을 일으켜 발달을 보게 되었다. 즉, 국자감에서 유학 이외에 율학·서학·산학 등 잡학을 교육했고, 과거에서도 제술과·명경과 이외에 의(醫)·복(卜)·지리(地理)·율·서·산 등 잡과를 설치하였다. 또 그러한 부문을 담당하는 기구로 천문·역수를 관장한 서운관(書雲觀), 의약치료를 담당한 태의감 등이 있었으므로 기술학은 자못 발달하게 되었다.
먼저 천문·역법에 있어, 서운관에서는 천문[占星]·역수(曆數)·측후(測候)·각루(刻漏) 등의 일을 관장해 천문관측학과 역(曆)의 계산법이 발달하였다.
천문관리는 천체운행을 관측해 그 결과가 『고려사』 천문지에 상세히 수록되어 있다. 거기에는 과학적 가치를 가진 천문관측도 있었지만, 점성(占星)을 목적으로 한 것이 많았다. 특히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에 따라 천변(天變)을 인간행동의 훈계로 삼으려는 뜻에서 열심히 관측하였다.
그러한 천문관측은 정확한 역계산을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졌으므로, 천문계산표의 개선에 따라 역법이 발달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통일신라 때 사용되기 시작한 당나라의 선명력(宣明曆)을 그대로 계승했는데, 중국은 이미 새 역법으로 바꾼 뒤였으므로, 고려는 그 정확한 역계산법을 알지 못해 오차가 생겼다. 그러한 오차를 없애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독자적 역법을 만들지는 못하였다.
충선왕 때 원나라의 수시력(授時曆)을 받아들여 사용했는데, 천문관리들은 수시력의 개방술을 완전히 알지 못해 일월교식(日月交食)의 추산법을 몰랐다. 그래서 선명력의 구법에 의해 그대로 추산했으므로 일월식의 추산에 오차가 심하였다.
의학은 학교에서의 교수와 과거에서의 의과 설치로 발달을 보게 되었다. 특히, 궁정의술에서 평민을 위한 의술로 개방된 점에 그 의의가 크다. 고려 초까지는 의술의 혜택이 왕실이나 귀족층에 한정되었다.
그러나 963년 제위보(濟危寶)라는 서민층의 치료사업을 담당하는 기관이 설치되고, 989년 내외의 문관 5품, 무관 4품 이상의 질병자에게 의관을 보내어 시약, 치료하게 함으로써 의학발달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처음에는 송나라 의학의 영향을 받았지만, 점차 전통적인 의약을 개발해 자주적인 의학체계를 이루었다. 김영석(金永錫)의 『제중입효방(濟衆立效方)』, 최종준(崔宗峻)의 『신집어의촬요방(新集御醫撮要方)』·『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 등 고려인에 의한 의서가 나왔다.
특히, 『향약구급방』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의서로 1236년(고종 23)에 초간되었다. 이 책은 그때까지 쓰이던 중국 약재들을 한국산 약재, 즉 향약으로 충당하려 했기에, 우리나라 의약의 독자적 연구의 계기를 마련한 점에 가치가 있다.
그리하여 고려 말에 이르러 향약의 지식은 본초학(本草學)으로 학문적 결실을 맺게 되어 『삼화자향약방(三和子鄕藥方)』 등 고려의 독자적인 의약서의 출현을 낳게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우경(牛耕)에 의한 심경법(深耕法)이 행해지고 2년3작식의 윤작법이 시행되었다. 후기에는 농업기술이 더욱 발달해 농업생산력이 증가하고 벼재배도 보급되었다. 특히 이암은 원나라의 농서인 『농상집요(農桑輯要)』를 소개해 넓힌 것은 이를 뒷받침한다.
한편 말기에는 목화가 재배되기 시작해 우리나라 의복원료에 커다란 변혁을 가져왔다. 목화는 공민왕 때 문익점(文益漸)이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가져와 장인 정천익(鄭天益)이 재배에 성공해 보급되었다. 이로써 일반평민의 의료(衣料)가 종래의 베에서 무명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또한 화약의 제조법이 전래되어 화약과 화포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원나라·명나라가 화약제조법을 비밀에 붙여 고려는 이를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공민왕 때 최무선이 중국으로부터 제조법을 배워 들여와 1377년 정식으로 화통도감(火桶都監)을 설치하고 화약과 화포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전함에 화포를 설치해 왜구격퇴에 위력을 발휘하였다. 1380년 진포(鎭浦)에 침입한 왜선 5백여 척을 화통과 화포로써 격파한 것은 그 첫 실험이었다.
한편 인쇄술의 발달이 특히 괄목할 만하다. 처음에는 대장경과 같이 고정식인 목판인쇄였으나, 뒤에는 이동식인 활판인쇄로 발전하게 되었다. 1234년 주자(鑄字)로써 최윤의(崔允儀) 등이 지은 『상정고금예문(詳定古今禮文)』 50권을 인출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주자는 금속활자임이 분명하므로 그 이전부터 금속활자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금속활자의 발명은 서양의 그것보다 2백여 년이나 앞선 것으로 세계최초의 일이다.
『상정고금예문』은 오늘에 전하지 않지만 다행히 1377년에 간행된 『직지심경(直指心經)』이 남아 있어 세계최고의 것으로 공인받고 있다. 금속활자의 사용은 고려 말에 더욱 활발해 1392년 서적원(書籍院)을 두고 주자인쇄를 맡게 하였다.
고려의 대외관계
대외정책의 특성
고려시대는 유달리 외민족의 침입이 잦았던 시기이다. 대륙정세가 불안정해 계속해 그 파도가 고려에 파급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고려의 대외정책은 시대적인 특성을 갖게 되었다.
고려가 건국된 10세기 초부터 멸망한 14세기 후반까지 대륙에서는 북방민족이 군사적·정치적으로 커다란 활약을 전개하였다. 북방의 유목·수렵 민족인 거란·여진, 그리고 몽골 등이 차례로 일어나 중원의 한민족을 압박하고 대륙의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그러한 북방민족의 등장은 종래 중국을 주축으로 움직이던 동아시아의 국제적인 역학관계에 변동을 일으켜 고려도 그 영향을 받게 되었다.
고려는 건국 이후 오대(五代)로부터 송나라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역대왕조에 대해 친선관계를 유지하였다. 특히 송나라와 문화적·경제적으로 밀접한 유대를 맺었다. 반면 북방민족인 거란이나 여진, 그리고 몽골은 야만시하고 대립정책을 견지하였다. 그러한 고려의 대외정책은 동아시아의 국제정국이 균형을 이루고 있을 동안에는 아무런 변동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거란·여진·몽골 등 북방민족이 일어나 문약한 송왕조를 압박하고 중원에 진출함으로써 고려의 전통적인 외교정책은 변동을 가져오게 되었다. 고려가 계속해 그들 북방민족의 침입을 받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북방민족의 압력에 대한 고려의 대응은 그때 그때의 지배층의 체질에 따라 양상을 달리하였다. 처음 거란에 대해서는 건국 초기의 강건한 자주적 의식을 밑받침으로 굳건한 항쟁을 계속해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12세기에 들어 문신귀족정치가 난숙하자, 그들은 금나라에 대해 유약한 사대주의를 결정해 강화를 맺기에 이르렀다.
13세기에 이르러 몽골이 침입했을 때는 최씨무신정권이 집권하고 있었으므로 항쟁의 결의를 고수하고 강화도로 천도해 항전을 계속하였다. 그러한 고려의 대외정책의 추진은 당시의 국제정세의 변화보다도 대내적인 위정자들 사이의 이해관계와 보다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전개되었던 것이다.
거란과의 관계
고려가 건국된 10세기 초에는 대륙에서도 커다란 변동이 일어났다. 오대의 혼란이 송나라의 건국으로 수습되고, 북방에서는 거란이 강성해져 발해가 멸망하였다. 그 때 고려는 송나라에 대해 친선정책을 썼으나 북방민족인 거란에 대해서는 배척정책을 취하였다.
거란에 대해 배척정책을 쓴 것은 거란이 중국 오대의 혼란기에 장성을 넘어 연운(燕雲) 16주를 침략했고, 또 동족의식을 가진 발해를 멸망시키고, 고려에도 압력을 가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942년 거란이 사신을 보내어 낙타 50필을 바치자 태조는 “거란은 발해와의 구맹을 저버리고 일조에 공멸한 무도의 나라이므로 교빙할 수 없다.”하고 사신은 섬으로 유배하고 낙타는 만부교(萬夫橋) 밑에 매두어 굶어죽게 하였다.
또한, 태조는 발해의 유민을 받아들이고 북진정책을 강행해 청천강까지 국경을 확장시켰다. 그러한 태조의 북진정책과 반거란정책은 역대왕에게도 계승되었다. 정종은 북방개척을 위해 서경천도를 계획하는 동시에, 광군사(光軍司)를 설치하고 광군 30만을 조직해 거란침입에 대비하였다.
또한 정종과 광종은 청천강 너머 압록강 사이에 여러 성진을 쌓아 북방에 대한 경계를 엄히 하였다. 그런데 광종 때 발해유민들이 일찍이 고구려가 흥기했던 압록강 중류지역에 정안국(定安國)을 세워 송나라 및 고려와 통교하면서 거란에 적대하므로, 고려에 대한 거란의 침입은 필지의 사실이 되었다.
거란의 제1차 침입은 993년에 있었다. 거란은 986년 먼저 압록강 중류지역의 정안국을 멸망시키고, 또 압록강 하류의 여진족을 경략해 991년 내원성(來遠城)을 쌓은 뒤 고려에 대한 침략을 시작하였다.
그 때 거란은 동경유수 소손녕(蕭遜寧)이 군사를 이끌고 고려의 서북변에 쳐들어왔는데, 고려군의 중군사(中軍使)로 출정한 서희(徐熙)가 그와 담판을 벌여 송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거란에 적대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거란군을 철수하게 하고 오히려 압록강 동쪽의 여진의 옛땅을 소유하는 권리를 얻게 되었다.
거란군이 철수하자 고려는 압록강 이동의 여진을 토벌하고 거기에 여러 성을 쌓아, 이른바 강동육주(江東六州)를 소유하게 되었다. 이로써 고려의 국경은 압록강에 이르게 되었다. 거란은 고려가 강동육주를 점령하고 군사적 거점으로 삼은 데 불만을 갖고 그의 할양을 요구하다 거절당하자, 드디어 1010년강조(康兆)의 정변을 구실로 제2차 침입을 해왔다.
그 때 서북면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 강조는 목종의 모후 천추태후(千秋太后)와 김치양(金致陽)이 불륜의 관계를 맺고 왕위까지 엿보자 군사를 일으켜 김치양 일파와 함께 목종까지 시해하고 현종을 영립했는데, 거란의 성종(聖宗)은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핑계로 4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양규(楊規)가 흥화진(興化鎭)에서 거란군을 맞아 잘 싸웠으나, 강조가 통주(通州)에서 패해 포로가 되고 개경까지 함락되어 현종은 나주로 피난하였다. 그러나 거란은 다만 고려왕의 친조(親朝)를 조건으로 별다른 소득 없이 철군했는데, 그것은 그 때까지도 항복하지 않은 북계의 서경·흥화진 등 여러 성의 군사력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려는 약속한 대로 국왕의 입조를 지키지 않았고, 거란은 이를 독촉했으나 현종은 병을 칭해 회피하였다. 그러자 거란은 본래의 목적인 강동육주의 반환을 강요했으나 역시 거절당하였다.
이에 1018년소배압(蕭排押)으로 해금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제3차 침입을 강행하였다. 그러나 상원수 강감찬(姜邯贊)이 흥화진에서 내침하는 거란군을 맞아 크게 무찌르고, 퇴각하는 적군을 구주에서 섬멸해, 거란의 침입은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거란은 이렇듯 참패만을 당하고 그들의 목적인 강동육주의 쟁탈에 실패하자, 1019년 고려와 화약을 체결해 평화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고려는 북방에 대한 경계를 강화할 필요를 느끼고 전란이 끝나자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1029년부터 개경에 나성을 축조하였다. 그 뒤 1033년부터 국경선에 장성을 쌓기 시작해 1044년에 완공했는데 그것이 ‘천리장성’이다.
여진과의 관계
고려가 많은 인력과 경비를 들여 북방에 대규모의 천리장성을 축조한 것은 거란뿐 아니라 여진에 대한 대비책이기도 하였다. 11세기 후반부터 북만주의 여진족인 완안부(完顔部)가 강성해져 여러 부족을 토벌하고 고려에 압력을 가해왔기 때문이다.
원래 여진은 발해의 일부를 이루던 말갈(靺鞨)의 유족으로 문화수준이 낮아 통일된 국가를 이루지 못하였다. 이들은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기며 공물을 바치기도 하고, 때로는 변경을 침구하기도 하였다.
고려는 공물을 바치는 여진족에 대해서는 식량·철제농구 등을 주어 회유하고, 반면 침구하는 자는 무력으로 응징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또한, 고려에 귀순한 여진인에게는 가옥과 토지를 주어 일반민호에 편입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여진족에 통일세력이 나타나 오히려 고려에 압박을 가하니 그 관계에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완안부에 의해 통일된 여진은 1104년 고려에 복속했던 여진족을 토벌해 함흥지방을 아우르고 도망가는 자를 쫓아 정주관(定州關: 지금의 定平)에 이르렀다. 고려도 임간(林幹)과 윤관(尹瓘)으로 그들을 치게 했으나 모두 패배하였다. 여진군은 기병인 데 비해 고려군은 보병으로 대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윤관의 건의에 따라 기병을 주축으로 한 별무반(別武班)을 조직해 신기군(神騎軍: 騎兵)·신보군(神步軍: 步兵)·항마군(降魔軍: 僧兵)을 편성하고 대비를 서둘렀다.
1107년(예종 2) 윤관에 의한 여진정벌이 단행되었다. 그 때 윤관은 17만의 대군을 이끌고 정주관을 출발해 함흥평야를 점령하고 그 부근에 9성을 쌓아 군사를 주둔시켜 지키니, 고려의 국경은 크게 북쪽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9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종래의 함흥평야설에 대해 근래 두만강 너머 만주설이 제기되고 있는 것은 주목할 점이다.
그러나 여진은 실지를 회복하기 위해 자주 침구하는 한편 사신을 보내어 환부를 애원하였다. 또 고려 내부에서는 윤관의 무공에 대한 시기 등이 겹쳐 1109년 구성을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그뿐 아니라 여진의 아쿠타[阿骨打]가 1115년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금나라를 건국, 1125년 요나라를 멸망시켰고, 고려에 대해서도 사대의 예를 요구하였다.
그러자 고려는 1126년 권신 이자겸이 중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금나라에 대해 상표칭신(上表稱臣)할 것을 결정하였다. 고려 초기에는 강건한 고려인의 기개로 거란침입에 항전을 다했으나, 문신귀족들은 자신들의 정치권력의 유지를 위해 여진족에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송과의 관계
고려는 건국 이후 오대의 여러 중국왕조와 교빙했는데, 송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그와 친선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친선관계는 북방민족인 거란과 여진의 흥기로 방해를 받게 되었다.
거란의 침입으로 강화를 맺게 되자 고려와 송나라와의 교빙은 끊어졌다. 다만 비공식적인 송나라 상인의 내왕은 있었다. 그러나 문종 때 거란의 세력이 쇠약해지자 다시 송나라와의 국교가 재개되었다. 고려는 송나라의 선진문물을 수입하려는 욕구가 많았고, 송나라도 고려를 통해 거란을 견제하려는 의도에서 양국의 통교가 다시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12세기 무렵에 여진족이 흥기해 금나라를 건국하면서 친선관계는 변모하게 되었다. 송나라는 금나라와 손을 잡고 숙적인 요나라를 공격해 멸망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나중에는 도리어 금나라의 침공을 받게 되었다. 송나라의 변경(抃京)이 함락되고 남은 일족이 강남으로 피신해 남송으로 명맥을 유지하게 되어, 고려와 송나라와의 통교는 약화되었다.
송나라는 고려와의 친선관계를 유지해 거란·여진족의 침입시에 고려의 군사력을 얻으려고 했으나 고려는 중립의 태도를 취하였다. 송나라가 거란정벌에 고려의 원군을 청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고, 또 송나라가 금나라의 침공을 받자, 고려에 군사를 일으켜줄 것을 간청했고, 강남으로 옮긴 뒤에도 포로가 된 휘종·흠종을 구출하도록 부탁했지만 역시 고려는 거절하였다. 고려는 친송정책을 취하면서도 당시의 국제정세로 보아 군사적 개입을 회피하는 중립의 태도를 유지하였다.
송나라의 대 고려 외교가 정치적·군사적 목적에 있었다면, 고려의 대송외교는 문화적·경제적 면에 주안점이 있었다. 고려는 송나라와의 통교를 통해 그들의 발달된 선진문물을 수입하였다. 고려는 사신과 학생·승려를 송나라에 파견해 그들의 난숙한 유학·불교·예술 등을 받아들여, 유학·불교가 송나라의 영향으로 심화되었다. 그리고 송판본의 전래로 고려의 인쇄술이 발달되었으며, 송자(宋磁)의 영향으로 고려자기가 발달하게 되었다.
또한, 공적인 사신과 사적인 상인의 왕래로 송나라와의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고려는 송나라의 선진문화에 대한 흠모와 또 귀족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송나라의 서적·비단·자기·약재·차·향료 등을 수입했으며, 반대로 금·은·동·인삼·나전칠기·화문석 등을 수출하였다. 그 때 예성강구의 벽란도(碧瀾渡)는 송나라 상인뿐 아니라 멀리 대식국(大食國: 아라비아)의 상인까지도 출입하는 국제항구로 성황을 이루었다.
몽골과의 관계
오랫동안 평화를 누려온 고려의 대외관계는 13세기에 들어와 커다란 변동을 겪게 되었다. 즉, 몽골세력의 흥기와 그 침입이었다.
몽골족은 금나라의 세력 밑에 있었는데, 13세기 초 테무친[鐵木眞]이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1206년 칸[汗]의 지위에 올랐으니, 그가 곧 칭기즈칸[成吉思汗]이다. 그 때부터 몽골은 사방으로 정복사업을 전개해 영토를 확장하고 북중국에 자리잡은 금나라를 침략해 그 세력이 강성해졌고, 마침내 고려와도 충돌을 하게 된 것이다.
고려가 몽골과 접촉을 가진 것은 1219년 강동성에 웅거한 거란족을 몽골과 함께 공략해 함락시킨 것에서 비롯되었다. 처음 금나라에 복속되었던 거란족은 금나라의 국세가 약화되자 독립했다가 몽골군에 쫓겨 고려 영토로 밀려와 강동성에 들어왔고, 이 때 고려·몽골군의 협공으로 패멸되었다.
몽골은 거란을 토벌한 뒤 고려에 대해 막대한 공물을 요구하였다. 특히 1221년 사신으로 온 저고여(著古與)는 황태자의 지시라고 하여 과중한 공물을 요구했고, 오만불손한 태도로 고려 군신들의 분노를 샀다. 1225년 압록강가에서 귀국하던 저고여가 어떤 도둑에게 피살된 사건이 일어나자 몽골은 그것을 트집잡아 침입하기에 이른 것이다.
몽골의 제1차 침입은 1231년에 이루어졌다. 몽골의 장군 사르타이[撒禮塔]가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북계의 여러 성을 함락시키고 개경근처에 다다랐다. 고려는 몽골군의 침입을 맞아 구주에서 박서(朴犀)가 용감히 항전했으나, 수도가 포위되어 화의를 요청해 몽골군은 서북면에 다루가치[達魯花赤]를 설치한 뒤 철수하였다.
그러나 몽골이 무리한 조공을 요구하고, 고려에 파견된 몽골관리의 횡포가 심하자 고려 군신의 분노가 고조되어 최우 정권은 단호히 항전할 것을 결의하고, 1232년 강화도로 도읍을 옮겨 반몽태도를 분명히 하였다.
그러자 사르타이는 제2차 침입을 단행해 개경을 지나 한강 남쪽까지 공략했으나, 처인성(處仁城: 지금의 용인)에서 김윤후(金允侯)에게 사살되어 철군하였다.
그 뒤에도 몽골군은 1259년 강화가 맺어질 때까지 여러 차례 침입하였다. 오랜 기간에 걸쳐 몽골군의 침략이 되풀이되었지만 고려인은 끈질긴 항쟁을 계속해 국토를 수호하였다. 강력한 반몽정책을 견지한 최씨정권이 바다 건너 강화도에서 꿋꿋이 항전을 지휘했고, 육지에서는 일반 민중들이 침략군에 대항해 용감히 싸움으로써 몽골군을 격퇴할 수 있었다.
특히, 무신정권은 농민들로 하여금 산성과 해도(海島)로 들어가 살게 하는 정책을 썼으므로, 농민은 그 기지를 중심으로 집단적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싸워 항전의 주체가 되었다.
그러나 항전을 고수해왔던 최씨정권의 붕괴는 항몽전에 변화를 가져왔다. 1258년 최의가 문신 유경(柳璥), 무신 김준 등에 의해 제거되자, 강화파인 문신들의 주청에 따라 이듬해 몽골에 대한 화의가 성립된 것이다. 그러나 최씨정권을 무너뜨린 무신 김준은 문신 유경을 거세한 뒤 교정별감이 되어 무신정권을 유지하고 몽골에 대한 강화를 반대하였다.
이는 1268년 김준을 살해하고 대신 교정별감이 된 임연에 이르러 더욱 노골화되었다. 임연은 1269년 친몽정책을 쓴 원종을 폐하고 왕제 안경공 창(安慶公淐)을 세웠으나 몽골의 압력으로 복위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임연이 죽은 뒤 그 아들 임유무도 반몽정책을 고수해, 1270년 국왕이 몽골의 세력을 업고 몽골에서 귀국하면서 내린 출륙명령(出陸命令)을 거부하고 재항쟁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반대파에 의해 죽임을 당하면서 무신정권은 종식되고, 그에 따라 오랜 항몽은 끝나게 되었다.
이에 왕정이 복구되고 개경으로 환도하게 되었으나, 몽골에 대한 반항이 그친 것은 아니었다. 무신정권의 무력적 기반으로 항몽전의 선두에 섰던 삼별초가 개경환도를 반대하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즉, 1270년 출륙명령이 내리자 개경환도는 곧 몽골에 대한 항복을 의미한다 하여 배중손(裵仲孫)이 이끈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승화후 온(承化侯溫)을 왕으로 옹립하고, 몽골세력을 등에 업은 원종의 개경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그들은 장기전을 펴기 위해 멀리 진도로 내려가 남부지방일대를 손에 넣었지만 여·몽연합군의 토벌로 진도가 함락되자, 그 일부는 다시 제주도로 옮겨 김통정(金通精)의 지휘 아래 항쟁을 계속했으나 1273년에 평정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계속된 대몽항쟁은 종식되어 이후 고려는 몽골의 간섭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고려의 역사적 성격
지방호족세력 시대
고려는 지방호족세력이 대두해 건국한 왕조인 동시에 그 뒤에도 지방세력이 언제나 중앙관리의 공급원이 되고 있었음이 특징이었다. 그런 점에서 고려는 바로 지방세력의 시대라 해도 좋을 것이다.
호족세력은 처음 고려 건국의 주역으로 중앙정권에 크게 관여하였다. 그러나 왕조의 기반이 확립되자 중앙집권화정책에 의해 그들은 차차 중앙관리로 편입되어 독립성을 상실해갔다. 이들이 곧 고려 귀족가문이 되어 귀족정치에 참여한 것이다. 지방에 남은 지방세력도 그들의 자제들은 과거를 통해 중앙정계에 진출시켜 문벌귀족의 보수정치에 도전하는 신진대사의 구실을 담당하였다.
그들 지방세력은 후기에도 지배세력인 권문세족에 대립한 신흥사대부가 되어 새로운 시대의 개혁을 주도하였다. 지방의 중소지주인 유향품관(留鄕品官)과 향리의 자제들이 과거를 통해 중앙관리로 진출하고, 당시 높은 관직을 독점하고 막대한 농장을 겸병한 보수적인 권문세족에 대립한 신진사대부가 되어 개혁정치를 주장하였다. 이성계의 혁명은 바로 그들 지방세력을 중심으로 한 신흥사대부계층의 승리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지방호족은 고려 건국의 주역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 뒤에도 언제나 중앙의 보수적인 지배세력에 대한 신진관료의 개혁세력이 되었고, 마침내 조선 건국의 주역의 구실도 담당했다고 하겠다.
귀족사회의 성격
고려 사회의 성격을 귀족사회로 보느냐 또는 관료사회로 보느냐에 대해서 양론이 있으나, 대체로 문벌을 중시하는 귀족사회로 규정하는 것이 일반적 견해인 듯하다. 고려는 지방호족세력에 의해 건국되었지만, 성종 이후 중앙관리가 귀족화함에 따라 문벌귀족사회가 형성되어갔다.
그들 귀족은 중요관직을 독점해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토지를 집적해 대토지소유자가 되었으며, 사회적으로도 문벌귀족의 특권을 향유해 지배계층이 되었다. 그들은 자기들 상호간에 중첩되는 혼인관계를 맺고 왕실과도 혼인해 외척가문이 됨으로써 귀족가문의 권위를 유지하였다.
이 때 관리가 되는 정상적인 길은 과거였으나, 음서제가 광범하게 실행되어 5품 이상 관리의 자제에게 과거를 보지 않고도 음직을 주는 제도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귀족사회의 제도적인 기반이 되었다. 또, 음서제와 결합되어 5품 이상 관리에게 공음전(功蔭田)이 주어졌다. 이것은 자손에게 세습이 허용되어 귀족제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그리하여 정치적인 안정으로 국력이 강성해지고, 경제적으로 국가재정과 농민생활의 안정을 가져왔으며, 사회적으로 귀족을 정점으로 한 신분제도의 확립을 보았다. 문화면에서는 귀족층의 주도로 유학·불교 및 미술공예의 발달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귀족사회는 그 자체의 모순성의 격화로 붕괴되었다. 관직과 토지를 둘러싼 귀족상호간의 분쟁과, 특히 보수적인 문벌귀족에 대한 지방출신인 신진관료의 대립은 귀족정치의 계속을 허용하지 않았다. 인종 때의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은 귀족사회의 기반을 흔들리게 했고, 의종 때의 무신란과 무신정권의 성립은 그를 붕괴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발전적인 고려사회
약 5백년간의 고려왕조는 어디까지나 동적인 역사였고 발전하는 사회였다. 따라서, 고려시대사를 이해하려면 평면적으로 정적인 역사로 보아서는 안되고, 항상 시간에 따라 발전한 사회였다는 시각에서 조명해야 할 것이다.
고려왕조를 건국하고 정권에 참여한 세력은 호족들이었다. 그러나 고려의 기반이 확립되고 중앙집권화가 진전됨에 따라 문벌귀족사회가 형성되었다. 호족세력은 중앙관리가 되어 집권체제에 편입되거나, 자기 지방의 향리로 격하되어 초기의 자립성을 상실한 것이다. 그와 같이, 사회의 주도세력이 지방호족에서 중앙귀족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고려사의 발전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1170년에 일어난 무신란과 그 뒤 1백년간 계속된 무신정권은 귀족사회성립의 기반인 신분체제를 전복시켜 새로운 사회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무신란은 바로 고려사회의 성격인 귀족사회를 붕괴시키고 새로운 신분사회로 넘어가는 분수령을 이루었던 것이다.
후기의 지배세력은 무신정권기와 그뒤의 대몽관계를 통해 형성된 권문세족이었다. 권문세족은 가문의 권위를 중요시하는 종래의 문벌귀족의 일면을 계승했으나, 가문의 후광보다도 현실적인 관직을 보다 중시하였다.
그것은 귀족사회에서 관료사회로 넘어가는 중간존재였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후기의 지배세력인 권문세족은 전기의 지배세력인 문벌귀족의 발전된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권문세족도 새로운 사회계층인 신흥사대부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후기에는 지방의 중소지주인 유향품관과 향리출신의 자제들이 과거를 통해 중앙관리로 진출했는데, 그들은 권문세족의 보수정치에 대립해 개혁정치를 내세웠다.
충선왕과 공민왕의 개혁정치도 신진사대부가 국왕과 결합해 추진한 것이었다. 그들은 마침내 이성계와 연합해 고려를 넘어뜨리고 조선 신왕조를 개창한 주인공이 되었다. 그것은 사회의 주도세력이 권문세족에서 신진사대부로 넘어갔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고려는 몇 차례에 걸쳐 지배세력이 교체되며 사회발전이 이루어졌다. 초기의 호족시대에서 왕조의 기반이 확립되자 귀족사회로 넘어갔고, 다시 무신란 뒤 신분체제가 변화하자 권문세족이 지배세력이 되었고, 신흥사대부의 대두로 새 왕조가 교체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고려의 문벌귀족사회는 조선의 양반관료사회로 전환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고려사는 5백년 동안 언제나 새 사회를 지향하며 발전한 동적인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
사상체계의 특징
나말여초에는 정치사회의 변화와 함께 사상계에도 커다란 변동이 일어났다. 신라 말기의 육두품출신들은 골품제도의 운영원리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유교정치이념을 내세웠고, 그것은 고려에 들어와 정착하게 되었다.
고려 건국기에 최치원(崔致遠) 계통의 문인들이 왕건에게 귀의하면서 유교정치이념을 표방했고, 최승로의 보필을 받아 숭유정책을 추진한 성종 때 보다 본격화되어, 드디어 고려는 유교를 정치실천의 원리로 삼게 되었다.
불교계에도 국가와 진골귀족의 옹호를 받아 발달한 교종에 대해, 지방호족들에 의해 선종이 크게 일어났다. 그것은 문자에 의하지 않고 선(禪)을 통해 심성을 깨닫는 서민적인 선종이 호족들의 체질에 맞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진골귀족의 교종은 민중적이며 혁신적인 성격을 지닌 선종으로 교체되는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다. 고려의 불교계는 교종에서 선종으로 바뀌었으며, 나아가 천태종이 건립되는 커다란 진전이 있었다.
또한, 유교가 정치이념으로 채용되었고, 불교는 사상·신앙계의 지도이념으로 이용되었다. 양자는 각기 그 세계가 달랐기 때문에 공존할 수 있었고, 유학자가 불교를 믿고 승려가 유교경전에 능통한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후기에 철학적이며 사변적인 주자학이 수용되면서 불교와 충돌하게 되었다. 주자학자들이 불교를 배척해 종래의 유불공존에서 억불앙유로 바뀌어 유불교체의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중세사회의 성격
한국사의 시대구분의 문제는 아직도 시론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사에 있어서 중세가 언제부터 시작되고, 또 어떤 성격을 가졌는가 하는 문제는 아직 정립된 결론이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는 고려를 중세사회로 규정하는 데 큰 이의가 없는 것 같다.
고려시대가 중세라는 점은 고대사회의 편성원리인 골품제의 극복에서 엿볼 수 있다. 신라에서는 출생한 혈족에 따라 지위와 신분이 규정된 골품제가 기본적인 사회체제를 이루고 있었는데, 나말여초에 지방호족세력과 지식층인 육두품출신이 골품제에 반대하고 새로운 사회질서를 형성하였다. 그러므로 고려는 고대적이며 폐쇄적인 골품체제에서 보다 개방되고 전진된 사회라는 점에서 중세라 할 수 있다.
고려가 중세사회라는 것은 지방호족의 대두에서도 찾을 수 있다. 신라는 왕경(王京)의 중앙귀족 중심의 정치체제를 이루고 지방세력의 성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신라 말기에 토착적인 촌주출신과 왕경에서 내려간 중앙귀족들이 지방의 호족으로 대두해 새로운 지배세력이 되었다. 그들 지방호족은 마침내 고려를 건국하고, 지배층이 되었으므로, 그것을 중세사회로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채용한 것도 중세사상의 성립으로 볼 수 있다. 신라의 진골체제를 극복하기 위해 유교정치이념을 채용하고, 당·송의 제도를 본받아 중앙집권적인 정치제도를 실시한 점에서도 고대적인 사회에서 중세사회로 전진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불교에 있어서도 귀족적인 교종에서 벗어나 민중적이며 혁신적인 선종의 유행을 보게 된 것도 새로운 중세사상의 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사회적·경제적인 면에서도 중세적 요소가 나타났다. 신라의 고대적인 토지소유관계와 농민에 대한 수취관계의 모순을 시정하려 했는데, 태조의 조세개혁과 그 뒤의 전시과 제정이 그것이다. 전시과의 시행은 확실히 일보전진한 형태로, 중세적인 토지지배관계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특히, 일반농민이 조상대대로 이어받아 경작하는 민전이 광범하게 존재한 것은 농민의 토지소유의 일반화를 말해주는 것으로, 농민지위의 성장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토지소유관계의 진전과 농민의 성장은 신라의 고대적인 것과 다른 중세적인 성격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중세사회의 성격은 다음 조선의 근세사회로 발전하는 토대를 이루었다.
오늘날 고려시대사에 대한 연구는 자못 활발하고 연구성과도 많은 편이다.
비교적 많은 인원이 고려시대연구에 참여하고 있고, 각 부문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고려시대사연구의 활기는 1960년대 이후 비롯된 것으로 그전까지는 한산하였다.
일제시기의 고려시대사연구는 전반적인 한국사연구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전혀 방치된 상태였다.
몇몇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고려시대의 역사지리나 정치사·대외관계 등에 대한 연구가 있었으나, 그것은 단편적인 사건의 고증적 연구에 불과했고, 그 성과도 미미하였다. 반면 한국인 학자들의 고려시대연구는 더욱 보잘 것 없었다.
신채호(申采浩)는 「조선역사상 1천년래 제1대사건」에서 묘청의 난을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조명했고, 이병도(李丙燾)의 「인종조의 서경천도운동과 그 반란」(日文), 김상기(金庠基)의 「삼별초와 그의 난에 대하여」, 윤용균(尹瑢均)의 「고려 의종조에 있어서의 정중부난의 소인과 그 영향」(日文) 등 몇몇 학자들이 몇 편의 논문을 발표했으나 성과는 크지 못하였다.
백남운(白南雲)이 사회경제사적인 입장에서 고려시대사를 서술한 『조선봉건사회경제사상』(日文)이 나온 것은 특이한 일로 그 의의가 컸다.
고려시대사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광복 후에 시작되었다.
이병도는 일제시대에 발표한 논문을 광복 후의 연구업적과 함께 『고려시대의 연구』를 펴내어 고려시대의 풍수도참설의 발전을 고찰하였다.
김상기도 삼별초연구를 합친 연구서인 『동방문화교류사논고』 안에 「여송무역소고」·「고려무인정치기구고」를 발표하였다.
이들 광복 직후의 고려시대사연구서의 출간은 민족항일기부터의 연구업적을 토대로 나올 수 있는 성과였다.
새로이 고려시대사연구에 참여한 젊은 세대의 연구논문은 6·25전쟁이 휴전된 뒤부터 배출되기 시작했으며, 특히 그것은 『역사학보(歷史學報)』의 간행에 크게 힘입게 되었다. 그리하여 1950년대 『역사학보』를 비롯한 몇 개의 연구지에 새 역사학도들에 의한 고려시대사연구논문이 상당량 발표되었다.
윤무병(尹武炳)이 1953년 처음으로 「고려북계지리고」를 발표한 이후, 1954년 이광린(李光麟)이 「기인제도의 변천에 대하여」를 내놓았고, 1955년 박성봉(朴性鳳)이 「해동공자 최충소고」, 이용범(李龍範)이 「여란무역고(麗丹貿易考)」, 김용덕(金龍德)이 「향·소·부곡고」를 발표했으며, 1956년 이기백(李基白)의 「고려경군고」, 윤무병의 「소위 적현(赤縣)에 대하여」, 양원석(梁元錫)의 「여말의 유민문제」, 천관우(千寬宇)의 「여말선초의 한량」, 김용덕의 「고려시대의 서경에 대하여」 등 여러 논문이 나오기에 이른 것이다.
1950년대에는 광복 후의 새로운 사학도들에 의한 고려시대 연구논문이 상당수 발표되었으나, 그것은 아직도 개별적인 문제연구에 불과했고, 그 분야의 계통적이며 집중적인 연구업적은 1960년대에 결실되기 시작하였다.
1960년대 초에는 고려시대에 대한 두 개의 시대사가 출간되었다.
이병도의 『한국사』 중세편과 김상기의 『고려시대사』가 그것이다. 그것들은 고려시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길잡이가 되었다.
특히, 이기백이 고려 경군에 대한 논문에 이어 일련의 고려시대 병제를 연구해 『고려병제사연구』로 집대성했고, 변태섭(邊太燮)이 「만적란발생의 사회적 소지」 이후 일련의 고려정치제도를 연구한 논문을 모아 『고려정치제도사연구』를 출간함으로써 고려사연구는 본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1970년대에는 보다 젊은 학자들이 고려시대연구에 참여해 새로운 시각으로 각 분야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담당하였다.
고려시대의 시대적 변화와 사회적 성격 등에 대해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끈질긴 연찬을 가함으로써 그 성과는 매우 컸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에 들어서는 수많은 연구논문과 그것들을 집대성한 연구서가 배출되었다.
고려 초기의 호족세력과 왕권과의 관계에 대해 하현강(河炫綱)·김광수(金光洙)·강희웅(姜喜雄) 등의 연구가 있다.
연구서로는 이기백 편 『고려광종연구』가 출간되어 고려 초기의 호족연합정권과 그 뒤의 중앙집권화정책에 대해 고찰하였다.
고려사회의 성격에 대한 귀족제사회설과 관료제사회설의 논쟁을 중심으로 박창희(朴菖熙)·김의규(金毅圭)·박용운(朴龍雲)·이기백·변태섭 등의 연구가 있었다.
연구서로는 황운룡(黃雲龍)의 『고려벌족에 관한 연구』, 허흥식(許興植)의 『고려사회사연구』, 홍승기(洪承基)의 『고려귀족사회와 노비』, 이수건(李樹健)의 『한국중세사회사연구』가 나와 가장 풍요한 업적을 이루었다.
토지제도에 대한 연구로는 강진철(姜晉哲)이 『고려토지제도사연구』를 내놓았고, 연구논문으로는 이우성(李佑成)의 영업전(永業田), 송병기(宋炳基)의 농장, 민현구(閔賢九)의 녹과전, 김용섭(金容燮)의 양전제에 관한 것이 눈에 띈다.
사상사방면에도 적지 않은 연구성과가 있었다. 이병도의 『고려시대의 연구』는 고려의 풍수도참사상의 발전을 고찰했으며, 조명기(趙明基)의 『고려 대각국사와 천태사상』, 김두진(金杜珍)의 『균여화엄사상연구』, 이희덕(李熙德)의 『고려유교정치사상의 연구』 등이 나왔다.
연구논문으로는, 유교사상에 이병도·박성봉·이희덕의 업적이 있고, 불교사상에 안계현(安啓賢)·최병헌(崔柄憲)·고익진(高翊晉)·채상식(蔡尙植) 등의 연구성과가 돋보인다.
문화면에는 문화의식과 역사의식에 대해 김철준(金哲埈)·고병익(高柄翊)·이우성·박창희 등의 연구가 있고, 문학에 이명구(李明九)·장덕순(張德順), 미술에 고유섭(高裕燮)·진홍섭(秦弘燮) 등의 논문이 있다.
무신란과 무신정권에 대해서는 김상기·변태섭·민병하(閔丙河)·김의규·정두희(鄭杜熙)·박창희의 연구가 있고, 민란과 삼별초의 난에 대해서는 역시 김상기·변태섭의 논문이 보인다.
고려 후기 사회에 대해서는 민현구·김윤곤(金潤坤)·이기남(李起男) 등이 권문세가와 신흥사대부의 대립을 해명하는 연구를 하였다.
대외관계에 관한 연구로는, 거란 및 여진족과의 관계는 박현서(朴賢緖)·이용범·김상기·김광수, 그리고 송나라와의 관계는 김상기·전해종(全海宗) 등의 연구가 있다.
원나라와의 관계는 고병익·강진철·유홍렬(柳洪烈) 등의 연구가 보인다.
1990년대에 들어 고려사연구는 과연 활기를 띠게 되었으며 그것은 특히 소장학자들의 학위논문의 형식으로 구체화되었다.
이것은 젊은 학자들의 고려사연구에 대거 참여로 저변이 확대되어 그 장래가 희망적인 점이다.
이들은 각분야에서 골고루 많은 업적을 내놓았는데 특히 정치사·정치제도사에서 볼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홍승기는 몇사람의 논문을 합쳐 『고려태조의 국가경영』을 내놓았고, 박용운은 『고려개경연구』·『고려시대 관계·관직연구』를 저술했으며, 이밖에 학위논문으로 신수정(申守楨)의 재상제도, 김창현(金昌鉉)의 정방연구가 돋보였다.
정치세력분야에서는 이익주(李益柱)·박재우(朴宰佑)의 고려후기 정치세력연구와 김광철(金光哲)의 세족층(世族層) 연구가 집중되었고 김용선(金龍善)·박용운의 음서제연구에 성과를 거두었다.
지방제도연구로는 김일우(金日宇)·김아네스의 고려초기 지방지배연구가 있었고, 박종기(朴宗基)의 부곡제연구, 구산우(具山祐)·박은경(朴恩卿)의 향촌사회 분석이 눈에 뛴다.
군사제도로는 홍승기·홍원기·정경현의 경군인 2군·6위 연구가 잇따라 발표되었고, 권영국(權寧國)의 고려 후기 군사제도가 이를 이어 나왔다.
교육제도로는 박찬수(朴贊洙) 및 민병하·신천식의 논문이 돋보인다.
경제사분야에서는 윤한택(尹漢宅)의 고려 전기 사전(私田) 연구와 박경안(朴京安)의 고려 후기 토지제도연구가 있었고, 사원경제(寺院經濟) 연구로 이상선(李相瑄)·이병희(李炳熙)의 업적이 눈에 뛴다.
재정사연구로 김옥근(金玉根)·안병우(安秉佑)의 논문이 있고, 최정환(崔貞煥)의 녹봉제연구와 김재명(金載名)·박종진(朴鍾進)의 부역제도 연구가 새로웠다.
사상사방면에는 허흥식의 불교사연구, 김광식(金光植)의 무인정권과 불교계연구가 있었고 성리학수용연구로 이원명(李源明)·변동명(邊東明)의 성과가 컸다.
무신정권에 대해서는 김당택(金塘澤)·민병하의 연구에 이어 이정신의 무신정권기 농민·천민항쟁 연구가 있었으며 윤용혁은 대몽항쟁사를 상술하였다.
이상에서 찾아본 바와 같이, 고려시대사에 대한 연구는 근년에 이르러 인원이나 연구성과에 있어 자못 활기를 띠게 되었다.
지금까지 개척되지 않았던 많은 문제점이 해명되고 심도 있는 연구업적이 나오게 되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와 1990년대에 이르러 수많은 연구서가 출간되기 시작한 것은 그와 같은 활발한 고려시대사 연구의 결실로 이해된다.
이같은 연구추세는 앞으로도 계속되리라 믿어진다.
연천 숭의전지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에 있는 고려 태조와 7왕을 제사지냈던 사당.
1397년에 태조의 명으로 묘를 세워 1399년에 고려 태조와 7왕을 제사지냈다.
문종은 이곳을 '숭의전'이라 이름짓고, 고려조의 충신 정몽주 외 열다섯 사람을 제사지내도록 하였으며, 고려 왕족의 후손들로 하여금 이곳을 관리하게 하였다.
고려
[高麗]
고려 1
고려 2
고려 3
고려 4
고려 5
고려 6
고려 7
고려 8
본관 개성(開城), 자 약천(若天), 성 왕(王), 휘 건(建), 시호 신성(神聖)이다.
금성태수(金城太守) 융(隆)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위숙왕후(威肅王后:追尊) 한씨(韓氏)이다.
29명에 이르는 많은 후비(后妃)를 두었는데 이는 혼인관계를 통해 호족세력을 통합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895년(진성여왕 9) 아버지를 따라 궁예(弓裔)의 휘하에 들어가 898년(효공왕 2) 정기대감(精騎大監)이 되고, 900년 광주(廣州)·충주(忠州) 등을 공취, 그 공으로 아찬(阿粲)의 위계를 받았다.
903년에는 수군을 이끌고 전라도 지방을 공략, 궁예의 영토를 확장하여 알찬(閼粲)에 승진되고 계속하여 전라도·경상도 지방에서 견훤(甄萱)의 군사를 격파하는 한편 정벌한 지방의 구휼(救恤)에도 힘써 백성의 신망을 얻었으며, 913년 시중(侍中)이 되었다.
918년 세력이 강대해짐에 따라 난폭한 행동을 자행하는 궁예가 민심을 잃자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 등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어 즉위, 국호를 '고려'라 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 정하였다.
이듬해 수도를 송악(松嶽)으로 옮기고 융화정책·북진정책·숭불정책을 건국이념으로 삼아 정책을 펴나갔다.
지방 호족들을 회유·무마하는 한편, 서경(西京)을 개척하고 여진을 공략했으며 불교를 호국신앙으로 삼아 각처에 절을 세웠다.
935년 투항해 온 신라 경순왕을 맞아 평화적으로 합병하고 이듬해에는 앞서 항복해 온 견훤과 함께 신검(神儉)의 후백제를 공격, 이를 멸망시켜 마침내 후삼국(後三國)을 통일하였다.
이 해 《정계(政誡)》 《계백료서(誡百寮書)》를 저술하여 정치의 귀감으로 삼게 하고 943년 후세의 왕들이 치국의 귀감으로 삼도록 〈훈요십조(訓要十條)〉를 유훈으로 남겼다.
서예에 뛰어났으며, 능은 현릉(顯陵:개성)이다.
고려를 세우고 후삼국을 통일한 임금이다.
후고구려의 임금인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운 뒤 신라와 후백제를 정복해 한반도의 주인이 되었다.
혼인 정책과 불교 장려 정책 등으로 나라를 안정시켰다.
태조는 고려를 세우고 결혼정책을 통해 호족을 통합했다.
세금을 감면하고 불교 행사를 성대하게 열어 민심의 안정과 통합을 이루려고 했다.
통일신라와 차별되는 고려만의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 북진정책을 펼쳐 실제로 영토를 확장했다.
민심을 얻지 못하는 국가는 오랫동안 유지될 수가 없습니다.
이건 동서고금의 진리예요.
마지막으로 새로운 국가를 만들었으니 고려만의 브랜드가 있어야 합니다.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기 위한 고려만의 색을 만들어나갑니다.
고려 태조, 한반도 역대 왕 중 가장 많은 부인,
1위. 고려 태조 29명
2위. 고려 현종 13명
3위. 조선 성종 12명,
조선 중종 12명
엄청나? 요즘이야 일부일처제니까 열 명 이상 비빈을 거느린 왕들이 방탕하다고 여겨집니다.
세계사적인 수준에서는 결코 지나치지 않아 오히려 약소합니다.
중국이나 이슬람제국의 경우 후궁은 최소한 수천 명.
심지어 종교적으로 일부일처제가 강요된 서구에서도 왕은 수많은 정부를 뒀거든요.
조선의 국력과 인구를 생각해도 수십 정도는 되어야 했을 겁니다.
후궁의 수는 권력의 크기를 보여주거든요.
후손들에게 당부하는 글, 훈요 10조
태조도 이걸 걱정해서 죽기 전에 후손들에게 당부하는 글인 훈요 10조를 남깁니다.
어떤 글인지???
1조. 불교의 힘으로 나라를 세웠으므로, 사찰을 세우고 주지를 파견하여 불도를 닦도록 하라.
고려 시대까지는 불교를 존중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불교를 완전히 억압하거든요(억불숭유정책이라고 하죠!).
2조. 도선의 풍수사상에 따라 사찰을 세우고, 함부로 짓지 말라.
풍수지리사상을 중요하게 여기는 걸 알 수 있어요. 실제로 고려를 건국한 이들의 사상적 배경이 풍수지리사상이었죠.
4조. 우리나라와 중국은 지역과 사람의 인성이 다르므로 중국의 문화를 반드시 따를 필요가 없으며, 거란은 짐승과 같은 나라이므로 그들의 의관제도는 따르지 말라.
여기에선 두 가지를 알 수 있네요.
무조건 중국 것이 좋은 게 아니라 우리나라에 맞는 것을 수용하자고 말하고 있어요.
사대적이지 않고 자주적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북진정책을 추진하면서 거란을 여전히 견제하는 걸 알 수 있죠.
5조. 서경은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이 되니, 백 일 이상 머물러라.
서경은 서쪽 수도인 평양을 뜻합니다.
마찬가지로 북진정책이 돋보인다.
북진정책을 추진하다
마지막으로 ‘new brand’ 만들기를.
가장 중요한 건 이 나라를 왜 만들었는지에 대한 ‘방향’을 세우는 겁니다.
그 방향은 고려라는 국호에 가장 잘 드러나 있죠.
고려는 고구려의 준말입니다.
지금도 우리나라 이름이 대한민국인데 한국이라고도 하죠? 마찬가지입니다.
고려라는 이름을 지은 이유는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라는 걸 의미합니다.
예전의 통일신라와는 다른 고려만의 브랜드를 만들려고 한 거죠.
추진한 정책이 바로 북진정책입니다.
고구려의 그 넓었던 북쪽 영토를 되찾기 위해 북쪽으로 진출하는 정책을 펼친 거죠.
실제로 청천강에서 영흥의 국경선까지 영토를 확장하는 성과를 거둬요.
고구려의 원수, 거란에게 적대적,,
고려의 옛 수도였던 평양을 제2의 서울로 삼고 중요하게 여겼어요.
당시 개경의 위치를 기준으로 볼 때 평양이 서쪽에 있어서 서쪽 수도라는 의미로 평양을 서경이라고 불렀습니다.
고구려의 원수는 고려의 원수가 되겠죠?
고구려의 유이민들이 만든 국가인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에게는 적대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만약 북한을 멸망시키고 중국이 우리의 북쪽 땅을 빼앗았다면 우리들의 원수가 되겠죠? 그런데 거란은 고려와 잘 지내고 싶어 했어요.
짝사랑이었던 거죠.
거란에서는 고려에 아주 귀한 선물인 낙타를 무려 50마리나 선물로 보냅니다.
북방 민족들에게 목숨만큼 중요한 게 바로 가축이거든요.
거란이 미웠던 태조는 그 낙타를 만부교라는 다리 밑에 묶어놓고 굶겨 죽였습니다.
사랑이 깊어지면 증오가 되죠.
나중에 다루겠지만 이런 크고 작은 분쟁으로 거란은 고려를 침공하게 됩니다.
태조 왕죽음, 왕위 다툼이 시작
태조 왕건이 죽자 이미 예고되어 있던 문제가 빵빵 터집니다.
큰 아들 혜종이 왕위를 이어받았지만, 왕위를 노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던 거.
왕자들만 25명이라고 했죠? 부인이 29명인 데다가, 그 부인들의 아버지들은 호족 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강한 호족들이었다.
2대 왕인 혜종은 재위 2년 만에 34세의 젊은 나이에 의문사를 당하고요, 3대 왕인 정종도 내내 불안정한 왕 자리에서 덜덜 떨다가 3년 만에 병에 걸려 27세에 승하하게 됩니다.
왕건은 877년에 송악(지금의 개성 지방)에서 태어났다.
송악의 호족이었던 왕건의 아버지 왕륭은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지방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아버지를 따라 궁예의 신하가 된 왕건은 전쟁터에 나가 공을 세우고 궁예로부터 신임을 얻으며 자신의 세력을 키워 갔다.
이후 궁예가 난폭한 행동을 일삼자 918년에 홍유, 신숭겸, 복지겸, 배현경 등의 장수들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웠다.
임금이 된 왕건은 신라와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는데, 927년에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를 공격해 경애왕을 죽이자 대구의 팔공산에서 후백제와 전투를 벌였다.
그는 후백제군에게 포위되는 위급한 상황에 빠졌고, 그의 부하인 신숭겸의 희생 덕분에 간신히 위기를 벗어났다.
이후 왕건은 후백제에게 계속 밀리다 930년에 일어난 고창(지금의 안동 지방)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면서 후삼국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935년에는 신라를 합병했고, 936년에는 후백제를 멸망시켜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했다.
후삼국 통일 후 왕건은 고려가 고구려를 이어 받은 나라임을 밝히고, 청천강 하류에서 영흥 지방까지 영토를 넓혔다.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에 의해 핍박받던 발해 유민들을 따뜻하게 맞아들이고 거란과는 외교를 끊었다.
왕건은 정치를 안정시키기 위해 지방의 토착 세력(호족)들과 혼인 관계를 맺고, 각 지방의 힘 있는 자들에게 왕씨 성을 내렸다.
불교를 적극 장려해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켰으며, 후대의 임금들이 나라를 잘 다스리도록 훈요 10조를 남기기도 했다.
왕건은
고려 , 高麗 .
기술학과 인쇄술
유교를 숭상하는 고려시대의 기술학은 잡학이라 하여 천시되었다. 그러나 현실생활의 필요에서 여러 가지 기술학을 일으켜 발달을 보게 되었다. 즉, 국자감에서 유학 이외에 율학·서학·산학 등 잡학을 교육했고, 과거에서도 제술과·명경과 이외에 의(醫)·복(卜)·지리(地理)·율·서·산 등 잡과를 설치하였다. 또 그러한 부문을 담당하는 기구로 천문·역수를 관장한 서운관(書雲觀), 의약치료를 담당한 태의감 등이 있었으므로 기술학은 자못 발달하게 되었다.
먼저 천문·역법에 있어, 서운관에서는 천문[占星]·역수(曆數)·측후(測候)·각루(刻漏) 등의 일을 관장해 천문관측학과 역(曆)의 계산법이 발달하였다.
천문관리는 천체운행을 관측해 그 결과가 『고려사』 천문지에 상세히 수록되어 있다. 거기에는 과학적 가치를 가진 천문관측도 있었지만, 점성(占星)을 목적으로 한 것이 많았다. 특히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에 따라 천변(天變)을 인간행동의 훈계로 삼으려는 뜻에서 열심히 관측하였다.
그러한 천문관측은 정확한 역계산을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졌으므로, 천문계산표의 개선에 따라 역법이 발달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통일신라 때 사용되기 시작한 당나라의 선명력(宣明曆)을 그대로 계승했는데, 중국은 이미 새 역법으로 바꾼 뒤였으므로, 고려는 그 정확한 역계산법을 알지 못해 오차가 생겼다. 그러한 오차를 없애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독자적 역법을 만들지는 못하였다.
충선왕 때 원나라의 수시력(授時曆)을 받아들여 사용했는데, 천문관리들은 수시력의 개방술을 완전히 알지 못해 일월교식(日月交食)의 추산법을 몰랐다. 그래서 선명력의 구법에 의해 그대로 추산했으므로 일월식의 추산에 오차가 심하였다.
의학은 학교에서의 교수와 과거에서의 의과 설치로 발달을 보게 되었다. 특히, 궁정의술에서 평민을 위한 의술로 개방된 점에 그 의의가 크다. 고려 초까지는 의술의 혜택이 왕실이나 귀족층에 한정되었다.
그러나 963년 제위보(濟危寶)라는 서민층의 치료사업을 담당하는 기관이 설치되고, 989년 내외의 문관 5품, 무관 4품 이상의 질병자에게 의관을 보내어 시약, 치료하게 함으로써 의학발달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처음에는 송나라 의학의 영향을 받았지만, 점차 전통적인 의약을 개발해 자주적인 의학체계를 이루었다. 김영석(金永錫)의 『제중입효방(濟衆立效方)』, 최종준(崔宗峻)의 『신집어의촬요방(新集御醫撮要方)』·『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 등 고려인에 의한 의서가 나왔다.
특히, 『향약구급방』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의서로 1236년(고종 23)에 초간되었다. 이 책은 그때까지 쓰이던 중국 약재들을 한국산 약재, 즉 향약으로 충당하려 했기에, 우리나라 의약의 독자적 연구의 계기를 마련한 점에 가치가 있다.
그리하여 고려 말에 이르러 향약의 지식은 본초학(本草學)으로 학문적 결실을 맺게 되어 『삼화자향약방(三和子鄕藥方)』 등 고려의 독자적인 의약서의 출현을 낳게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우경(牛耕)에 의한 심경법(深耕法)이 행해지고 2년3작식의 윤작법이 시행되었다. 후기에는 농업기술이 더욱 발달해 농업생산력이 증가하고 벼재배도 보급되었다. 특히 이암은 원나라의 농서인 『농상집요(農桑輯要)』를 소개해 넓힌 것은 이를 뒷받침한다.
한편 말기에는 목화가 재배되기 시작해 우리나라 의복원료에 커다란 변혁을 가져왔다. 목화는 공민왕 때 문익점(文益漸)이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가져와 장인 정천익(鄭天益)이 재배에 성공해 보급되었다. 이로써 일반평민의 의료(衣料)가 종래의 베에서 무명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또한 화약의 제조법이 전래되어 화약과 화포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원나라·명나라가 화약제조법을 비밀에 붙여 고려는 이를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공민왕 때 최무선이 중국으로부터 제조법을 배워 들여와 1377년 정식으로 화통도감(火桶都監)을 설치하고 화약과 화포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전함에 화포를 설치해 왜구격퇴에 위력을 발휘하였다. 1380년 진포(鎭浦)에 침입한 왜선 5백여 척을 화통과 화포로써 격파한 것은 그 첫 실험이었다.
한편 인쇄술의 발달이 특히 괄목할 만하다. 처음에는 대장경과 같이 고정식인 목판인쇄였으나, 뒤에는 이동식인 활판인쇄로 발전하게 되었다. 1234년 주자(鑄字)로써 최윤의(崔允儀) 등이 지은 『상정고금예문(詳定古今禮文)』 50권을 인출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주자는 금속활자임이 분명하므로 그 이전부터 금속활자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금속활자의 발명은 서양의 그것보다 2백여 년이나 앞선 것으로 세계최초의 일이다.
『상정고금예문』은 오늘에 전하지 않지만 다행히 1377년에 간행된 『직지심경(直指心經)』이 남아 있어 세계최고의 것으로 공인받고 있다. 금속활자의 사용은 고려 말에 더욱 활발해 1392년 서적원(書籍院)을 두고 주자인쇄를 맡게 하였다.
유교를 숭상하는 고려시대의 기술학은 잡학이라 하여 천시되었다. 그러나 현실생활의 필요에서 여러 가지 기술학을 일으켜 발달을 보게 되었다. 즉, 국자감에서 유학 이외에 율학·서학·산학 등 잡학을 교육했고, 과거에서도 제술과·명경과 이외에 의(醫)·복(卜)·지리(地理)·율·서·산 등 잡과를 설치하였다. 또 그러한 부문을 담당하는 기구로 천문·역수를 관장한 서운관(書雲觀), 의약치료를 담당한 태의감 등이 있었으므로 기술학은 자못 발달하게 되었다.
먼저 천문·역법에 있어, 서운관에서는 천문[占星]·역수(曆數)·측후(測候)·각루(刻漏) 등의 일을 관장해 천문관측학과 역(曆)의 계산법이 발달하였다.
천문관리는 천체운행을 관측해 그 결과가 『고려사』 천문지에 상세히 수록되어 있다. 거기에는 과학적 가치를 가진 천문관측도 있었지만, 점성(占星)을 목적으로 한 것이 많았다. 특히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에 따라 천변(天變)을 인간행동의 훈계로 삼으려는 뜻에서 열심히 관측하였다.
그러한 천문관측은 정확한 역계산을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졌으므로, 천문계산표의 개선에 따라 역법이 발달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통일신라 때 사용되기 시작한 당나라의 선명력(宣明曆)을 그대로 계승했는데, 중국은 이미 새 역법으로 바꾼 뒤였으므로, 고려는 그 정확한 역계산법을 알지 못해 오차가 생겼다. 그러한 오차를 없애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독자적 역법을 만들지는 못하였다.
충선왕 때 원나라의 수시력(授時曆)을 받아들여 사용했는데, 천문관리들은 수시력의 개방술을 완전히 알지 못해 일월교식(日月交食)의 추산법을 몰랐다. 그래서 선명력의 구법에 의해 그대로 추산했으므로 일월식의 추산에 오차가 심하였다.
의학은 학교에서의 교수와 과거에서의 의과 설치로 발달을 보게 되었다. 특히, 궁정의술에서 평민을 위한 의술로 개방된 점에 그 의의가 크다. 고려 초까지는 의술의 혜택이 왕실이나 귀족층에 한정되었다.
그러나 963년 제위보(濟危寶)라는 서민층의 치료사업을 담당하는 기관이 설치되고, 989년 내외의 문관 5품, 무관 4품 이상의 질병자에게 의관을 보내어 시약, 치료하게 함으로써 의학발달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처음에는 송나라 의학의 영향을 받았지만, 점차 전통적인 의약을 개발해 자주적인 의학체계를 이루었다. 김영석(金永錫)의 『제중입효방(濟衆立效方)』, 최종준(崔宗峻)의 『신집어의촬요방(新集御醫撮要方)』·『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 등 고려인에 의한 의서가 나왔다.
특히, 『향약구급방』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의서로 1236년(고종 23)에 초간되었다. 이 책은 그때까지 쓰이던 중국 약재들을 한국산 약재, 즉 향약으로 충당하려 했기에, 우리나라 의약의 독자적 연구의 계기를 마련한 점에 가치가 있다.
그리하여 고려 말에 이르러 향약의 지식은 본초학(本草學)으로 학문적 결실을 맺게 되어 『삼화자향약방(三和子鄕藥方)』 등 고려의 독자적인 의약서의 출현을 낳게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우경(牛耕)에 의한 심경법(深耕法)이 행해지고 2년3작식의 윤작법이 시행되었다. 후기에는 농업기술이 더욱 발달해 농업생산력이 증가하고 벼재배도 보급되었다. 특히 이암은 원나라의 농서인 『농상집요(農桑輯要)』를 소개해 넓힌 것은 이를 뒷받침한다.
한편 말기에는 목화가 재배되기 시작해 우리나라 의복원료에 커다란 변혁을 가져왔다. 목화는 공민왕 때 문익점(文益漸)이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가져와 장인 정천익(鄭天益)이 재배에 성공해 보급되었다. 이로써 일반평민의 의료(衣料)가 종래의 베에서 무명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또한 화약의 제조법이 전래되어 화약과 화포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원나라·명나라가 화약제조법을 비밀에 붙여 고려는 이를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공민왕 때 최무선이 중국으로부터 제조법을 배워 들여와 1377년 정식으로 화통도감(火桶都監)을 설치하고 화약과 화포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전함에 화포를 설치해 왜구격퇴에 위력을 발휘하였다. 1380년 진포(鎭浦)에 침입한 왜선 5백여 척을 화통과 화포로써 격파한 것은 그 첫 실험이었다.
한편 인쇄술의 발달이 특히 괄목할 만하다. 처음에는 대장경과 같이 고정식인 목판인쇄였으나, 뒤에는 이동식인 활판인쇄로 발전하게 되었다. 1234년 주자(鑄字)로써 최윤의(崔允儀) 등이 지은 『상정고금예문(詳定古今禮文)』 50권을 인출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주자는 금속활자임이 분명하므로 그 이전부터 금속활자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금속활자의 발명은 서양의 그것보다 2백여 년이나 앞선 것으로 세계최초의 일이다.
『상정고금예문』은 오늘에 전하지 않지만 다행히 1377년에 간행된 『직지심경(直指心經)』이 남아 있어 세계최고의 것으로 공인받고 있다. 금속활자의 사용은 고려 말에 더욱 활발해 1392년 서적원(書籍院)을 두고 주자인쇄를 맡게 하였다.
고려의 대외관계
대외정책의 특성
고려시대는 유달리 외민족의 침입이 잦았던 시기이다. 대륙정세가 불안정해 계속해 그 파도가 고려에 파급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고려의 대외정책은 시대적인 특성을 갖게 되었다.
고려가 건국된 10세기 초부터 멸망한 14세기 후반까지 대륙에서는 북방민족이 군사적·정치적으로 커다란 활약을 전개하였다. 북방의 유목·수렵 민족인 거란·여진, 그리고 몽골 등이 차례로 일어나 중원의 한민족을 압박하고 대륙의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그러한 북방민족의 등장은 종래 중국을 주축으로 움직이던 동아시아의 국제적인 역학관계에 변동을 일으켜 고려도 그 영향을 받게 되었다.
고려는 건국 이후 오대(五代)로부터 송나라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역대왕조에 대해 친선관계를 유지하였다. 특히 송나라와 문화적·경제적으로 밀접한 유대를 맺었다. 반면 북방민족인 거란이나 여진, 그리고 몽골은 야만시하고 대립정책을 견지하였다. 그러한 고려의 대외정책은 동아시아의 국제정국이 균형을 이루고 있을 동안에는 아무런 변동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거란·여진·몽골 등 북방민족이 일어나 문약한 송왕조를 압박하고 중원에 진출함으로써 고려의 전통적인 외교정책은 변동을 가져오게 되었다. 고려가 계속해 그들 북방민족의 침입을 받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북방민족의 압력에 대한 고려의 대응은 그때 그때의 지배층의 체질에 따라 양상을 달리하였다. 처음 거란에 대해서는 건국 초기의 강건한 자주적 의식을 밑받침으로 굳건한 항쟁을 계속해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12세기에 들어 문신귀족정치가 난숙하자, 그들은 금나라에 대해 유약한 사대주의를 결정해 강화를 맺기에 이르렀다.
13세기에 이르러 몽골이 침입했을 때는 최씨무신정권이 집권하고 있었으므로 항쟁의 결의를 고수하고 강화도로 천도해 항전을 계속하였다. 그러한 고려의 대외정책의 추진은 당시의 국제정세의 변화보다도 대내적인 위정자들 사이의 이해관계와 보다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전개되었던 것이다.
고려시대는 유달리 외민족의 침입이 잦았던 시기이다. 대륙정세가 불안정해 계속해 그 파도가 고려에 파급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고려의 대외정책은 시대적인 특성을 갖게 되었다.
고려가 건국된 10세기 초부터 멸망한 14세기 후반까지 대륙에서는 북방민족이 군사적·정치적으로 커다란 활약을 전개하였다. 북방의 유목·수렵 민족인 거란·여진, 그리고 몽골 등이 차례로 일어나 중원의 한민족을 압박하고 대륙의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그러한 북방민족의 등장은 종래 중국을 주축으로 움직이던 동아시아의 국제적인 역학관계에 변동을 일으켜 고려도 그 영향을 받게 되었다.
고려는 건국 이후 오대(五代)로부터 송나라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역대왕조에 대해 친선관계를 유지하였다. 특히 송나라와 문화적·경제적으로 밀접한 유대를 맺었다. 반면 북방민족인 거란이나 여진, 그리고 몽골은 야만시하고 대립정책을 견지하였다. 그러한 고려의 대외정책은 동아시아의 국제정국이 균형을 이루고 있을 동안에는 아무런 변동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거란·여진·몽골 등 북방민족이 일어나 문약한 송왕조를 압박하고 중원에 진출함으로써 고려의 전통적인 외교정책은 변동을 가져오게 되었다. 고려가 계속해 그들 북방민족의 침입을 받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북방민족의 압력에 대한 고려의 대응은 그때 그때의 지배층의 체질에 따라 양상을 달리하였다. 처음 거란에 대해서는 건국 초기의 강건한 자주적 의식을 밑받침으로 굳건한 항쟁을 계속해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12세기에 들어 문신귀족정치가 난숙하자, 그들은 금나라에 대해 유약한 사대주의를 결정해 강화를 맺기에 이르렀다.
13세기에 이르러 몽골이 침입했을 때는 최씨무신정권이 집권하고 있었으므로 항쟁의 결의를 고수하고 강화도로 천도해 항전을 계속하였다. 그러한 고려의 대외정책의 추진은 당시의 국제정세의 변화보다도 대내적인 위정자들 사이의 이해관계와 보다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전개되었던 것이다.
거란과의 관계
고려가 건국된 10세기 초에는 대륙에서도 커다란 변동이 일어났다. 오대의 혼란이 송나라의 건국으로 수습되고, 북방에서는 거란이 강성해져 발해가 멸망하였다. 그 때 고려는 송나라에 대해 친선정책을 썼으나 북방민족인 거란에 대해서는 배척정책을 취하였다.
거란에 대해 배척정책을 쓴 것은 거란이 중국 오대의 혼란기에 장성을 넘어 연운(燕雲) 16주를 침략했고, 또 동족의식을 가진 발해를 멸망시키고, 고려에도 압력을 가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942년 거란이 사신을 보내어 낙타 50필을 바치자 태조는 “거란은 발해와의 구맹을 저버리고 일조에 공멸한 무도의 나라이므로 교빙할 수 없다.”하고 사신은 섬으로 유배하고 낙타는 만부교(萬夫橋) 밑에 매두어 굶어죽게 하였다.
또한, 태조는 발해의 유민을 받아들이고 북진정책을 강행해 청천강까지 국경을 확장시켰다. 그러한 태조의 북진정책과 반거란정책은 역대왕에게도 계승되었다. 정종은 북방개척을 위해 서경천도를 계획하는 동시에, 광군사(光軍司)를 설치하고 광군 30만을 조직해 거란침입에 대비하였다.
또한 정종과 광종은 청천강 너머 압록강 사이에 여러 성진을 쌓아 북방에 대한 경계를 엄히 하였다. 그런데 광종 때 발해유민들이 일찍이 고구려가 흥기했던 압록강 중류지역에 정안국(定安國)을 세워 송나라 및 고려와 통교하면서 거란에 적대하므로, 고려에 대한 거란의 침입은 필지의 사실이 되었다.
거란의 제1차 침입은 993년에 있었다. 거란은 986년 먼저 압록강 중류지역의 정안국을 멸망시키고, 또 압록강 하류의 여진족을 경략해 991년 내원성(來遠城)을 쌓은 뒤 고려에 대한 침략을 시작하였다.
그 때 거란은 동경유수 소손녕(蕭遜寧)이 군사를 이끌고 고려의 서북변에 쳐들어왔는데, 고려군의 중군사(中軍使)로 출정한 서희(徐熙)가 그와 담판을 벌여 송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거란에 적대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거란군을 철수하게 하고 오히려 압록강 동쪽의 여진의 옛땅을 소유하는 권리를 얻게 되었다.
거란군이 철수하자 고려는 압록강 이동의 여진을 토벌하고 거기에 여러 성을 쌓아, 이른바 강동육주(江東六州)를 소유하게 되었다. 이로써 고려의 국경은 압록강에 이르게 되었다. 거란은 고려가 강동육주를 점령하고 군사적 거점으로 삼은 데 불만을 갖고 그의 할양을 요구하다 거절당하자, 드디어 1010년강조(康兆)의 정변을 구실로 제2차 침입을 해왔다.
그 때 서북면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 강조는 목종의 모후 천추태후(千秋太后)와 김치양(金致陽)이 불륜의 관계를 맺고 왕위까지 엿보자 군사를 일으켜 김치양 일파와 함께 목종까지 시해하고 현종을 영립했는데, 거란의 성종(聖宗)은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핑계로 4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양규(楊規)가 흥화진(興化鎭)에서 거란군을 맞아 잘 싸웠으나, 강조가 통주(通州)에서 패해 포로가 되고 개경까지 함락되어 현종은 나주로 피난하였다. 그러나 거란은 다만 고려왕의 친조(親朝)를 조건으로 별다른 소득 없이 철군했는데, 그것은 그 때까지도 항복하지 않은 북계의 서경·흥화진 등 여러 성의 군사력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려는 약속한 대로 국왕의 입조를 지키지 않았고, 거란은 이를 독촉했으나 현종은 병을 칭해 회피하였다. 그러자 거란은 본래의 목적인 강동육주의 반환을 강요했으나 역시 거절당하였다.
이에 1018년소배압(蕭排押)으로 해금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제3차 침입을 강행하였다. 그러나 상원수 강감찬(姜邯贊)이 흥화진에서 내침하는 거란군을 맞아 크게 무찌르고, 퇴각하는 적군을 구주에서 섬멸해, 거란의 침입은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거란은 이렇듯 참패만을 당하고 그들의 목적인 강동육주의 쟁탈에 실패하자, 1019년 고려와 화약을 체결해 평화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고려는 북방에 대한 경계를 강화할 필요를 느끼고 전란이 끝나자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1029년부터 개경에 나성을 축조하였다. 그 뒤 1033년부터 국경선에 장성을 쌓기 시작해 1044년에 완공했는데 그것이 ‘천리장성’이다.
고려가 건국된 10세기 초에는 대륙에서도 커다란 변동이 일어났다. 오대의 혼란이 송나라의 건국으로 수습되고, 북방에서는 거란이 강성해져 발해가 멸망하였다. 그 때 고려는 송나라에 대해 친선정책을 썼으나 북방민족인 거란에 대해서는 배척정책을 취하였다.
거란에 대해 배척정책을 쓴 것은 거란이 중국 오대의 혼란기에 장성을 넘어 연운(燕雲) 16주를 침략했고, 또 동족의식을 가진 발해를 멸망시키고, 고려에도 압력을 가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942년 거란이 사신을 보내어 낙타 50필을 바치자 태조는 “거란은 발해와의 구맹을 저버리고 일조에 공멸한 무도의 나라이므로 교빙할 수 없다.”하고 사신은 섬으로 유배하고 낙타는 만부교(萬夫橋) 밑에 매두어 굶어죽게 하였다.
또한, 태조는 발해의 유민을 받아들이고 북진정책을 강행해 청천강까지 국경을 확장시켰다. 그러한 태조의 북진정책과 반거란정책은 역대왕에게도 계승되었다. 정종은 북방개척을 위해 서경천도를 계획하는 동시에, 광군사(光軍司)를 설치하고 광군 30만을 조직해 거란침입에 대비하였다.
또한 정종과 광종은 청천강 너머 압록강 사이에 여러 성진을 쌓아 북방에 대한 경계를 엄히 하였다. 그런데 광종 때 발해유민들이 일찍이 고구려가 흥기했던 압록강 중류지역에 정안국(定安國)을 세워 송나라 및 고려와 통교하면서 거란에 적대하므로, 고려에 대한 거란의 침입은 필지의 사실이 되었다.
거란의 제1차 침입은 993년에 있었다. 거란은 986년 먼저 압록강 중류지역의 정안국을 멸망시키고, 또 압록강 하류의 여진족을 경략해 991년 내원성(來遠城)을 쌓은 뒤 고려에 대한 침략을 시작하였다.
그 때 거란은 동경유수 소손녕(蕭遜寧)이 군사를 이끌고 고려의 서북변에 쳐들어왔는데, 고려군의 중군사(中軍使)로 출정한 서희(徐熙)가 그와 담판을 벌여 송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거란에 적대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거란군을 철수하게 하고 오히려 압록강 동쪽의 여진의 옛땅을 소유하는 권리를 얻게 되었다.
거란군이 철수하자 고려는 압록강 이동의 여진을 토벌하고 거기에 여러 성을 쌓아, 이른바 강동육주(江東六州)를 소유하게 되었다. 이로써 고려의 국경은 압록강에 이르게 되었다. 거란은 고려가 강동육주를 점령하고 군사적 거점으로 삼은 데 불만을 갖고 그의 할양을 요구하다 거절당하자, 드디어 1010년강조(康兆)의 정변을 구실로 제2차 침입을 해왔다.
그 때 서북면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 강조는 목종의 모후 천추태후(千秋太后)와 김치양(金致陽)이 불륜의 관계를 맺고 왕위까지 엿보자 군사를 일으켜 김치양 일파와 함께 목종까지 시해하고 현종을 영립했는데, 거란의 성종(聖宗)은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핑계로 4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양규(楊規)가 흥화진(興化鎭)에서 거란군을 맞아 잘 싸웠으나, 강조가 통주(通州)에서 패해 포로가 되고 개경까지 함락되어 현종은 나주로 피난하였다. 그러나 거란은 다만 고려왕의 친조(親朝)를 조건으로 별다른 소득 없이 철군했는데, 그것은 그 때까지도 항복하지 않은 북계의 서경·흥화진 등 여러 성의 군사력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려는 약속한 대로 국왕의 입조를 지키지 않았고, 거란은 이를 독촉했으나 현종은 병을 칭해 회피하였다. 그러자 거란은 본래의 목적인 강동육주의 반환을 강요했으나 역시 거절당하였다.
이에 1018년소배압(蕭排押)으로 해금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제3차 침입을 강행하였다. 그러나 상원수 강감찬(姜邯贊)이 흥화진에서 내침하는 거란군을 맞아 크게 무찌르고, 퇴각하는 적군을 구주에서 섬멸해, 거란의 침입은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거란은 이렇듯 참패만을 당하고 그들의 목적인 강동육주의 쟁탈에 실패하자, 1019년 고려와 화약을 체결해 평화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고려는 북방에 대한 경계를 강화할 필요를 느끼고 전란이 끝나자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1029년부터 개경에 나성을 축조하였다. 그 뒤 1033년부터 국경선에 장성을 쌓기 시작해 1044년에 완공했는데 그것이 ‘천리장성’이다.
여진과의 관계
고려가 많은 인력과 경비를 들여 북방에 대규모의 천리장성을 축조한 것은 거란뿐 아니라 여진에 대한 대비책이기도 하였다. 11세기 후반부터 북만주의 여진족인 완안부(完顔部)가 강성해져 여러 부족을 토벌하고 고려에 압력을 가해왔기 때문이다.
원래 여진은 발해의 일부를 이루던 말갈(靺鞨)의 유족으로 문화수준이 낮아 통일된 국가를 이루지 못하였다. 이들은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기며 공물을 바치기도 하고, 때로는 변경을 침구하기도 하였다.
고려는 공물을 바치는 여진족에 대해서는 식량·철제농구 등을 주어 회유하고, 반면 침구하는 자는 무력으로 응징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또한, 고려에 귀순한 여진인에게는 가옥과 토지를 주어 일반민호에 편입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여진족에 통일세력이 나타나 오히려 고려에 압박을 가하니 그 관계에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완안부에 의해 통일된 여진은 1104년 고려에 복속했던 여진족을 토벌해 함흥지방을 아우르고 도망가는 자를 쫓아 정주관(定州關: 지금의 定平)에 이르렀다. 고려도 임간(林幹)과 윤관(尹瓘)으로 그들을 치게 했으나 모두 패배하였다. 여진군은 기병인 데 비해 고려군은 보병으로 대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윤관의 건의에 따라 기병을 주축으로 한 별무반(別武班)을 조직해 신기군(神騎軍: 騎兵)·신보군(神步軍: 步兵)·항마군(降魔軍: 僧兵)을 편성하고 대비를 서둘렀다.
1107년(예종 2) 윤관에 의한 여진정벌이 단행되었다. 그 때 윤관은 17만의 대군을 이끌고 정주관을 출발해 함흥평야를 점령하고 그 부근에 9성을 쌓아 군사를 주둔시켜 지키니, 고려의 국경은 크게 북쪽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9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종래의 함흥평야설에 대해 근래 두만강 너머 만주설이 제기되고 있는 것은 주목할 점이다.
그러나 여진은 실지를 회복하기 위해 자주 침구하는 한편 사신을 보내어 환부를 애원하였다. 또 고려 내부에서는 윤관의 무공에 대한 시기 등이 겹쳐 1109년 구성을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그뿐 아니라 여진의 아쿠타[阿骨打]가 1115년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금나라를 건국, 1125년 요나라를 멸망시켰고, 고려에 대해서도 사대의 예를 요구하였다.
그러자 고려는 1126년 권신 이자겸이 중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금나라에 대해 상표칭신(上表稱臣)할 것을 결정하였다. 고려 초기에는 강건한 고려인의 기개로 거란침입에 항전을 다했으나, 문신귀족들은 자신들의 정치권력의 유지를 위해 여진족에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고려가 많은 인력과 경비를 들여 북방에 대규모의 천리장성을 축조한 것은 거란뿐 아니라 여진에 대한 대비책이기도 하였다. 11세기 후반부터 북만주의 여진족인 완안부(完顔部)가 강성해져 여러 부족을 토벌하고 고려에 압력을 가해왔기 때문이다.
원래 여진은 발해의 일부를 이루던 말갈(靺鞨)의 유족으로 문화수준이 낮아 통일된 국가를 이루지 못하였다. 이들은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기며 공물을 바치기도 하고, 때로는 변경을 침구하기도 하였다.
고려는 공물을 바치는 여진족에 대해서는 식량·철제농구 등을 주어 회유하고, 반면 침구하는 자는 무력으로 응징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또한, 고려에 귀순한 여진인에게는 가옥과 토지를 주어 일반민호에 편입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여진족에 통일세력이 나타나 오히려 고려에 압박을 가하니 그 관계에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완안부에 의해 통일된 여진은 1104년 고려에 복속했던 여진족을 토벌해 함흥지방을 아우르고 도망가는 자를 쫓아 정주관(定州關: 지금의 定平)에 이르렀다. 고려도 임간(林幹)과 윤관(尹瓘)으로 그들을 치게 했으나 모두 패배하였다. 여진군은 기병인 데 비해 고려군은 보병으로 대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윤관의 건의에 따라 기병을 주축으로 한 별무반(別武班)을 조직해 신기군(神騎軍: 騎兵)·신보군(神步軍: 步兵)·항마군(降魔軍: 僧兵)을 편성하고 대비를 서둘렀다.
1107년(예종 2) 윤관에 의한 여진정벌이 단행되었다. 그 때 윤관은 17만의 대군을 이끌고 정주관을 출발해 함흥평야를 점령하고 그 부근에 9성을 쌓아 군사를 주둔시켜 지키니, 고려의 국경은 크게 북쪽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9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종래의 함흥평야설에 대해 근래 두만강 너머 만주설이 제기되고 있는 것은 주목할 점이다.
그러나 여진은 실지를 회복하기 위해 자주 침구하는 한편 사신을 보내어 환부를 애원하였다. 또 고려 내부에서는 윤관의 무공에 대한 시기 등이 겹쳐 1109년 구성을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그뿐 아니라 여진의 아쿠타[阿骨打]가 1115년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금나라를 건국, 1125년 요나라를 멸망시켰고, 고려에 대해서도 사대의 예를 요구하였다.
그러자 고려는 1126년 권신 이자겸이 중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금나라에 대해 상표칭신(上表稱臣)할 것을 결정하였다. 고려 초기에는 강건한 고려인의 기개로 거란침입에 항전을 다했으나, 문신귀족들은 자신들의 정치권력의 유지를 위해 여진족에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송과의 관계
고려는 건국 이후 오대의 여러 중국왕조와 교빙했는데, 송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그와 친선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친선관계는 북방민족인 거란과 여진의 흥기로 방해를 받게 되었다.
거란의 침입으로 강화를 맺게 되자 고려와 송나라와의 교빙은 끊어졌다. 다만 비공식적인 송나라 상인의 내왕은 있었다. 그러나 문종 때 거란의 세력이 쇠약해지자 다시 송나라와의 국교가 재개되었다. 고려는 송나라의 선진문물을 수입하려는 욕구가 많았고, 송나라도 고려를 통해 거란을 견제하려는 의도에서 양국의 통교가 다시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12세기 무렵에 여진족이 흥기해 금나라를 건국하면서 친선관계는 변모하게 되었다. 송나라는 금나라와 손을 잡고 숙적인 요나라를 공격해 멸망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나중에는 도리어 금나라의 침공을 받게 되었다. 송나라의 변경(抃京)이 함락되고 남은 일족이 강남으로 피신해 남송으로 명맥을 유지하게 되어, 고려와 송나라와의 통교는 약화되었다.
송나라는 고려와의 친선관계를 유지해 거란·여진족의 침입시에 고려의 군사력을 얻으려고 했으나 고려는 중립의 태도를 취하였다. 송나라가 거란정벌에 고려의 원군을 청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고, 또 송나라가 금나라의 침공을 받자, 고려에 군사를 일으켜줄 것을 간청했고, 강남으로 옮긴 뒤에도 포로가 된 휘종·흠종을 구출하도록 부탁했지만 역시 고려는 거절하였다. 고려는 친송정책을 취하면서도 당시의 국제정세로 보아 군사적 개입을 회피하는 중립의 태도를 유지하였다.
송나라의 대 고려 외교가 정치적·군사적 목적에 있었다면, 고려의 대송외교는 문화적·경제적 면에 주안점이 있었다. 고려는 송나라와의 통교를 통해 그들의 발달된 선진문물을 수입하였다. 고려는 사신과 학생·승려를 송나라에 파견해 그들의 난숙한 유학·불교·예술 등을 받아들여, 유학·불교가 송나라의 영향으로 심화되었다. 그리고 송판본의 전래로 고려의 인쇄술이 발달되었으며, 송자(宋磁)의 영향으로 고려자기가 발달하게 되었다.
또한, 공적인 사신과 사적인 상인의 왕래로 송나라와의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고려는 송나라의 선진문화에 대한 흠모와 또 귀족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송나라의 서적·비단·자기·약재·차·향료 등을 수입했으며, 반대로 금·은·동·인삼·나전칠기·화문석 등을 수출하였다. 그 때 예성강구의 벽란도(碧瀾渡)는 송나라 상인뿐 아니라 멀리 대식국(大食國: 아라비아)의 상인까지도 출입하는 국제항구로 성황을 이루었다.
고려는 건국 이후 오대의 여러 중국왕조와 교빙했는데, 송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그와 친선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친선관계는 북방민족인 거란과 여진의 흥기로 방해를 받게 되었다.
거란의 침입으로 강화를 맺게 되자 고려와 송나라와의 교빙은 끊어졌다. 다만 비공식적인 송나라 상인의 내왕은 있었다. 그러나 문종 때 거란의 세력이 쇠약해지자 다시 송나라와의 국교가 재개되었다. 고려는 송나라의 선진문물을 수입하려는 욕구가 많았고, 송나라도 고려를 통해 거란을 견제하려는 의도에서 양국의 통교가 다시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12세기 무렵에 여진족이 흥기해 금나라를 건국하면서 친선관계는 변모하게 되었다. 송나라는 금나라와 손을 잡고 숙적인 요나라를 공격해 멸망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나중에는 도리어 금나라의 침공을 받게 되었다. 송나라의 변경(抃京)이 함락되고 남은 일족이 강남으로 피신해 남송으로 명맥을 유지하게 되어, 고려와 송나라와의 통교는 약화되었다.
송나라는 고려와의 친선관계를 유지해 거란·여진족의 침입시에 고려의 군사력을 얻으려고 했으나 고려는 중립의 태도를 취하였다. 송나라가 거란정벌에 고려의 원군을 청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고, 또 송나라가 금나라의 침공을 받자, 고려에 군사를 일으켜줄 것을 간청했고, 강남으로 옮긴 뒤에도 포로가 된 휘종·흠종을 구출하도록 부탁했지만 역시 고려는 거절하였다. 고려는 친송정책을 취하면서도 당시의 국제정세로 보아 군사적 개입을 회피하는 중립의 태도를 유지하였다.
송나라의 대 고려 외교가 정치적·군사적 목적에 있었다면, 고려의 대송외교는 문화적·경제적 면에 주안점이 있었다. 고려는 송나라와의 통교를 통해 그들의 발달된 선진문물을 수입하였다. 고려는 사신과 학생·승려를 송나라에 파견해 그들의 난숙한 유학·불교·예술 등을 받아들여, 유학·불교가 송나라의 영향으로 심화되었다. 그리고 송판본의 전래로 고려의 인쇄술이 발달되었으며, 송자(宋磁)의 영향으로 고려자기가 발달하게 되었다.
또한, 공적인 사신과 사적인 상인의 왕래로 송나라와의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고려는 송나라의 선진문화에 대한 흠모와 또 귀족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송나라의 서적·비단·자기·약재·차·향료 등을 수입했으며, 반대로 금·은·동·인삼·나전칠기·화문석 등을 수출하였다. 그 때 예성강구의 벽란도(碧瀾渡)는 송나라 상인뿐 아니라 멀리 대식국(大食國: 아라비아)의 상인까지도 출입하는 국제항구로 성황을 이루었다.
몽골과의 관계
오랫동안 평화를 누려온 고려의 대외관계는 13세기에 들어와 커다란 변동을 겪게 되었다. 즉, 몽골세력의 흥기와 그 침입이었다.
몽골족은 금나라의 세력 밑에 있었는데, 13세기 초 테무친[鐵木眞]이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1206년 칸[汗]의 지위에 올랐으니, 그가 곧 칭기즈칸[成吉思汗]이다. 그 때부터 몽골은 사방으로 정복사업을 전개해 영토를 확장하고 북중국에 자리잡은 금나라를 침략해 그 세력이 강성해졌고, 마침내 고려와도 충돌을 하게 된 것이다.
고려가 몽골과 접촉을 가진 것은 1219년 강동성에 웅거한 거란족을 몽골과 함께 공략해 함락시킨 것에서 비롯되었다. 처음 금나라에 복속되었던 거란족은 금나라의 국세가 약화되자 독립했다가 몽골군에 쫓겨 고려 영토로 밀려와 강동성에 들어왔고, 이 때 고려·몽골군의 협공으로 패멸되었다.
몽골은 거란을 토벌한 뒤 고려에 대해 막대한 공물을 요구하였다. 특히 1221년 사신으로 온 저고여(著古與)는 황태자의 지시라고 하여 과중한 공물을 요구했고, 오만불손한 태도로 고려 군신들의 분노를 샀다. 1225년 압록강가에서 귀국하던 저고여가 어떤 도둑에게 피살된 사건이 일어나자 몽골은 그것을 트집잡아 침입하기에 이른 것이다.
몽골의 제1차 침입은 1231년에 이루어졌다. 몽골의 장군 사르타이[撒禮塔]가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북계의 여러 성을 함락시키고 개경근처에 다다랐다. 고려는 몽골군의 침입을 맞아 구주에서 박서(朴犀)가 용감히 항전했으나, 수도가 포위되어 화의를 요청해 몽골군은 서북면에 다루가치[達魯花赤]를 설치한 뒤 철수하였다.
그러나 몽골이 무리한 조공을 요구하고, 고려에 파견된 몽골관리의 횡포가 심하자 고려 군신의 분노가 고조되어 최우 정권은 단호히 항전할 것을 결의하고, 1232년 강화도로 도읍을 옮겨 반몽태도를 분명히 하였다.
그러자 사르타이는 제2차 침입을 단행해 개경을 지나 한강 남쪽까지 공략했으나, 처인성(處仁城: 지금의 용인)에서 김윤후(金允侯)에게 사살되어 철군하였다.
그 뒤에도 몽골군은 1259년 강화가 맺어질 때까지 여러 차례 침입하였다. 오랜 기간에 걸쳐 몽골군의 침략이 되풀이되었지만 고려인은 끈질긴 항쟁을 계속해 국토를 수호하였다. 강력한 반몽정책을 견지한 최씨정권이 바다 건너 강화도에서 꿋꿋이 항전을 지휘했고, 육지에서는 일반 민중들이 침략군에 대항해 용감히 싸움으로써 몽골군을 격퇴할 수 있었다.
특히, 무신정권은 농민들로 하여금 산성과 해도(海島)로 들어가 살게 하는 정책을 썼으므로, 농민은 그 기지를 중심으로 집단적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싸워 항전의 주체가 되었다.
그러나 항전을 고수해왔던 최씨정권의 붕괴는 항몽전에 변화를 가져왔다. 1258년 최의가 문신 유경(柳璥), 무신 김준 등에 의해 제거되자, 강화파인 문신들의 주청에 따라 이듬해 몽골에 대한 화의가 성립된 것이다. 그러나 최씨정권을 무너뜨린 무신 김준은 문신 유경을 거세한 뒤 교정별감이 되어 무신정권을 유지하고 몽골에 대한 강화를 반대하였다.
이는 1268년 김준을 살해하고 대신 교정별감이 된 임연에 이르러 더욱 노골화되었다. 임연은 1269년 친몽정책을 쓴 원종을 폐하고 왕제 안경공 창(安慶公淐)을 세웠으나 몽골의 압력으로 복위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임연이 죽은 뒤 그 아들 임유무도 반몽정책을 고수해, 1270년 국왕이 몽골의 세력을 업고 몽골에서 귀국하면서 내린 출륙명령(出陸命令)을 거부하고 재항쟁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반대파에 의해 죽임을 당하면서 무신정권은 종식되고, 그에 따라 오랜 항몽은 끝나게 되었다.
이에 왕정이 복구되고 개경으로 환도하게 되었으나, 몽골에 대한 반항이 그친 것은 아니었다. 무신정권의 무력적 기반으로 항몽전의 선두에 섰던 삼별초가 개경환도를 반대하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즉, 1270년 출륙명령이 내리자 개경환도는 곧 몽골에 대한 항복을 의미한다 하여 배중손(裵仲孫)이 이끈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승화후 온(承化侯溫)을 왕으로 옹립하고, 몽골세력을 등에 업은 원종의 개경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그들은 장기전을 펴기 위해 멀리 진도로 내려가 남부지방일대를 손에 넣었지만 여·몽연합군의 토벌로 진도가 함락되자, 그 일부는 다시 제주도로 옮겨 김통정(金通精)의 지휘 아래 항쟁을 계속했으나 1273년에 평정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계속된 대몽항쟁은 종식되어 이후 고려는 몽골의 간섭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오랫동안 평화를 누려온 고려의 대외관계는 13세기에 들어와 커다란 변동을 겪게 되었다. 즉, 몽골세력의 흥기와 그 침입이었다.
몽골족은 금나라의 세력 밑에 있었는데, 13세기 초 테무친[鐵木眞]이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1206년 칸[汗]의 지위에 올랐으니, 그가 곧 칭기즈칸[成吉思汗]이다. 그 때부터 몽골은 사방으로 정복사업을 전개해 영토를 확장하고 북중국에 자리잡은 금나라를 침략해 그 세력이 강성해졌고, 마침내 고려와도 충돌을 하게 된 것이다.
고려가 몽골과 접촉을 가진 것은 1219년 강동성에 웅거한 거란족을 몽골과 함께 공략해 함락시킨 것에서 비롯되었다. 처음 금나라에 복속되었던 거란족은 금나라의 국세가 약화되자 독립했다가 몽골군에 쫓겨 고려 영토로 밀려와 강동성에 들어왔고, 이 때 고려·몽골군의 협공으로 패멸되었다.
몽골은 거란을 토벌한 뒤 고려에 대해 막대한 공물을 요구하였다. 특히 1221년 사신으로 온 저고여(著古與)는 황태자의 지시라고 하여 과중한 공물을 요구했고, 오만불손한 태도로 고려 군신들의 분노를 샀다. 1225년 압록강가에서 귀국하던 저고여가 어떤 도둑에게 피살된 사건이 일어나자 몽골은 그것을 트집잡아 침입하기에 이른 것이다.
몽골의 제1차 침입은 1231년에 이루어졌다. 몽골의 장군 사르타이[撒禮塔]가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북계의 여러 성을 함락시키고 개경근처에 다다랐다. 고려는 몽골군의 침입을 맞아 구주에서 박서(朴犀)가 용감히 항전했으나, 수도가 포위되어 화의를 요청해 몽골군은 서북면에 다루가치[達魯花赤]를 설치한 뒤 철수하였다.
그러나 몽골이 무리한 조공을 요구하고, 고려에 파견된 몽골관리의 횡포가 심하자 고려 군신의 분노가 고조되어 최우 정권은 단호히 항전할 것을 결의하고, 1232년 강화도로 도읍을 옮겨 반몽태도를 분명히 하였다.
그러자 사르타이는 제2차 침입을 단행해 개경을 지나 한강 남쪽까지 공략했으나, 처인성(處仁城: 지금의 용인)에서 김윤후(金允侯)에게 사살되어 철군하였다.
그 뒤에도 몽골군은 1259년 강화가 맺어질 때까지 여러 차례 침입하였다. 오랜 기간에 걸쳐 몽골군의 침략이 되풀이되었지만 고려인은 끈질긴 항쟁을 계속해 국토를 수호하였다. 강력한 반몽정책을 견지한 최씨정권이 바다 건너 강화도에서 꿋꿋이 항전을 지휘했고, 육지에서는 일반 민중들이 침략군에 대항해 용감히 싸움으로써 몽골군을 격퇴할 수 있었다.
특히, 무신정권은 농민들로 하여금 산성과 해도(海島)로 들어가 살게 하는 정책을 썼으므로, 농민은 그 기지를 중심으로 집단적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싸워 항전의 주체가 되었다.
그러나 항전을 고수해왔던 최씨정권의 붕괴는 항몽전에 변화를 가져왔다. 1258년 최의가 문신 유경(柳璥), 무신 김준 등에 의해 제거되자, 강화파인 문신들의 주청에 따라 이듬해 몽골에 대한 화의가 성립된 것이다. 그러나 최씨정권을 무너뜨린 무신 김준은 문신 유경을 거세한 뒤 교정별감이 되어 무신정권을 유지하고 몽골에 대한 강화를 반대하였다.
이는 1268년 김준을 살해하고 대신 교정별감이 된 임연에 이르러 더욱 노골화되었다. 임연은 1269년 친몽정책을 쓴 원종을 폐하고 왕제 안경공 창(安慶公淐)을 세웠으나 몽골의 압력으로 복위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임연이 죽은 뒤 그 아들 임유무도 반몽정책을 고수해, 1270년 국왕이 몽골의 세력을 업고 몽골에서 귀국하면서 내린 출륙명령(出陸命令)을 거부하고 재항쟁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반대파에 의해 죽임을 당하면서 무신정권은 종식되고, 그에 따라 오랜 항몽은 끝나게 되었다.
이에 왕정이 복구되고 개경으로 환도하게 되었으나, 몽골에 대한 반항이 그친 것은 아니었다. 무신정권의 무력적 기반으로 항몽전의 선두에 섰던 삼별초가 개경환도를 반대하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즉, 1270년 출륙명령이 내리자 개경환도는 곧 몽골에 대한 항복을 의미한다 하여 배중손(裵仲孫)이 이끈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승화후 온(承化侯溫)을 왕으로 옹립하고, 몽골세력을 등에 업은 원종의 개경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그들은 장기전을 펴기 위해 멀리 진도로 내려가 남부지방일대를 손에 넣었지만 여·몽연합군의 토벌로 진도가 함락되자, 그 일부는 다시 제주도로 옮겨 김통정(金通精)의 지휘 아래 항쟁을 계속했으나 1273년에 평정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계속된 대몽항쟁은 종식되어 이후 고려는 몽골의 간섭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고려의 역사적 성격
지방호족세력 시대
고려는 지방호족세력이 대두해 건국한 왕조인 동시에 그 뒤에도 지방세력이 언제나 중앙관리의 공급원이 되고 있었음이 특징이었다. 그런 점에서 고려는 바로 지방세력의 시대라 해도 좋을 것이다.
호족세력은 처음 고려 건국의 주역으로 중앙정권에 크게 관여하였다. 그러나 왕조의 기반이 확립되자 중앙집권화정책에 의해 그들은 차차 중앙관리로 편입되어 독립성을 상실해갔다. 이들이 곧 고려 귀족가문이 되어 귀족정치에 참여한 것이다. 지방에 남은 지방세력도 그들의 자제들은 과거를 통해 중앙정계에 진출시켜 문벌귀족의 보수정치에 도전하는 신진대사의 구실을 담당하였다.
그들 지방세력은 후기에도 지배세력인 권문세족에 대립한 신흥사대부가 되어 새로운 시대의 개혁을 주도하였다. 지방의 중소지주인 유향품관(留鄕品官)과 향리의 자제들이 과거를 통해 중앙관리로 진출하고, 당시 높은 관직을 독점하고 막대한 농장을 겸병한 보수적인 권문세족에 대립한 신진사대부가 되어 개혁정치를 주장하였다. 이성계의 혁명은 바로 그들 지방세력을 중심으로 한 신흥사대부계층의 승리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지방호족은 고려 건국의 주역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 뒤에도 언제나 중앙의 보수적인 지배세력에 대한 신진관료의 개혁세력이 되었고, 마침내 조선 건국의 주역의 구실도 담당했다고 하겠다.
고려는 지방호족세력이 대두해 건국한 왕조인 동시에 그 뒤에도 지방세력이 언제나 중앙관리의 공급원이 되고 있었음이 특징이었다. 그런 점에서 고려는 바로 지방세력의 시대라 해도 좋을 것이다.
호족세력은 처음 고려 건국의 주역으로 중앙정권에 크게 관여하였다. 그러나 왕조의 기반이 확립되자 중앙집권화정책에 의해 그들은 차차 중앙관리로 편입되어 독립성을 상실해갔다. 이들이 곧 고려 귀족가문이 되어 귀족정치에 참여한 것이다. 지방에 남은 지방세력도 그들의 자제들은 과거를 통해 중앙정계에 진출시켜 문벌귀족의 보수정치에 도전하는 신진대사의 구실을 담당하였다.
그들 지방세력은 후기에도 지배세력인 권문세족에 대립한 신흥사대부가 되어 새로운 시대의 개혁을 주도하였다. 지방의 중소지주인 유향품관(留鄕品官)과 향리의 자제들이 과거를 통해 중앙관리로 진출하고, 당시 높은 관직을 독점하고 막대한 농장을 겸병한 보수적인 권문세족에 대립한 신진사대부가 되어 개혁정치를 주장하였다. 이성계의 혁명은 바로 그들 지방세력을 중심으로 한 신흥사대부계층의 승리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지방호족은 고려 건국의 주역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 뒤에도 언제나 중앙의 보수적인 지배세력에 대한 신진관료의 개혁세력이 되었고, 마침내 조선 건국의 주역의 구실도 담당했다고 하겠다.
귀족사회의 성격
고려 사회의 성격을 귀족사회로 보느냐 또는 관료사회로 보느냐에 대해서 양론이 있으나, 대체로 문벌을 중시하는 귀족사회로 규정하는 것이 일반적 견해인 듯하다. 고려는 지방호족세력에 의해 건국되었지만, 성종 이후 중앙관리가 귀족화함에 따라 문벌귀족사회가 형성되어갔다.
그들 귀족은 중요관직을 독점해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토지를 집적해 대토지소유자가 되었으며, 사회적으로도 문벌귀족의 특권을 향유해 지배계층이 되었다. 그들은 자기들 상호간에 중첩되는 혼인관계를 맺고 왕실과도 혼인해 외척가문이 됨으로써 귀족가문의 권위를 유지하였다.
이 때 관리가 되는 정상적인 길은 과거였으나, 음서제가 광범하게 실행되어 5품 이상 관리의 자제에게 과거를 보지 않고도 음직을 주는 제도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귀족사회의 제도적인 기반이 되었다. 또, 음서제와 결합되어 5품 이상 관리에게 공음전(功蔭田)이 주어졌다. 이것은 자손에게 세습이 허용되어 귀족제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그리하여 정치적인 안정으로 국력이 강성해지고, 경제적으로 국가재정과 농민생활의 안정을 가져왔으며, 사회적으로 귀족을 정점으로 한 신분제도의 확립을 보았다. 문화면에서는 귀족층의 주도로 유학·불교 및 미술공예의 발달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귀족사회는 그 자체의 모순성의 격화로 붕괴되었다. 관직과 토지를 둘러싼 귀족상호간의 분쟁과, 특히 보수적인 문벌귀족에 대한 지방출신인 신진관료의 대립은 귀족정치의 계속을 허용하지 않았다. 인종 때의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은 귀족사회의 기반을 흔들리게 했고, 의종 때의 무신란과 무신정권의 성립은 그를 붕괴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고려 사회의 성격을 귀족사회로 보느냐 또는 관료사회로 보느냐에 대해서 양론이 있으나, 대체로 문벌을 중시하는 귀족사회로 규정하는 것이 일반적 견해인 듯하다. 고려는 지방호족세력에 의해 건국되었지만, 성종 이후 중앙관리가 귀족화함에 따라 문벌귀족사회가 형성되어갔다.
그들 귀족은 중요관직을 독점해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토지를 집적해 대토지소유자가 되었으며, 사회적으로도 문벌귀족의 특권을 향유해 지배계층이 되었다. 그들은 자기들 상호간에 중첩되는 혼인관계를 맺고 왕실과도 혼인해 외척가문이 됨으로써 귀족가문의 권위를 유지하였다.
이 때 관리가 되는 정상적인 길은 과거였으나, 음서제가 광범하게 실행되어 5품 이상 관리의 자제에게 과거를 보지 않고도 음직을 주는 제도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귀족사회의 제도적인 기반이 되었다. 또, 음서제와 결합되어 5품 이상 관리에게 공음전(功蔭田)이 주어졌다. 이것은 자손에게 세습이 허용되어 귀족제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그리하여 정치적인 안정으로 국력이 강성해지고, 경제적으로 국가재정과 농민생활의 안정을 가져왔으며, 사회적으로 귀족을 정점으로 한 신분제도의 확립을 보았다. 문화면에서는 귀족층의 주도로 유학·불교 및 미술공예의 발달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귀족사회는 그 자체의 모순성의 격화로 붕괴되었다. 관직과 토지를 둘러싼 귀족상호간의 분쟁과, 특히 보수적인 문벌귀족에 대한 지방출신인 신진관료의 대립은 귀족정치의 계속을 허용하지 않았다. 인종 때의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은 귀족사회의 기반을 흔들리게 했고, 의종 때의 무신란과 무신정권의 성립은 그를 붕괴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발전적인 고려사회
약 5백년간의 고려왕조는 어디까지나 동적인 역사였고 발전하는 사회였다. 따라서, 고려시대사를 이해하려면 평면적으로 정적인 역사로 보아서는 안되고, 항상 시간에 따라 발전한 사회였다는 시각에서 조명해야 할 것이다.
고려왕조를 건국하고 정권에 참여한 세력은 호족들이었다. 그러나 고려의 기반이 확립되고 중앙집권화가 진전됨에 따라 문벌귀족사회가 형성되었다. 호족세력은 중앙관리가 되어 집권체제에 편입되거나, 자기 지방의 향리로 격하되어 초기의 자립성을 상실한 것이다. 그와 같이, 사회의 주도세력이 지방호족에서 중앙귀족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고려사의 발전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1170년에 일어난 무신란과 그 뒤 1백년간 계속된 무신정권은 귀족사회성립의 기반인 신분체제를 전복시켜 새로운 사회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무신란은 바로 고려사회의 성격인 귀족사회를 붕괴시키고 새로운 신분사회로 넘어가는 분수령을 이루었던 것이다.
후기의 지배세력은 무신정권기와 그뒤의 대몽관계를 통해 형성된 권문세족이었다. 권문세족은 가문의 권위를 중요시하는 종래의 문벌귀족의 일면을 계승했으나, 가문의 후광보다도 현실적인 관직을 보다 중시하였다.
그것은 귀족사회에서 관료사회로 넘어가는 중간존재였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후기의 지배세력인 권문세족은 전기의 지배세력인 문벌귀족의 발전된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권문세족도 새로운 사회계층인 신흥사대부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후기에는 지방의 중소지주인 유향품관과 향리출신의 자제들이 과거를 통해 중앙관리로 진출했는데, 그들은 권문세족의 보수정치에 대립해 개혁정치를 내세웠다.
충선왕과 공민왕의 개혁정치도 신진사대부가 국왕과 결합해 추진한 것이었다. 그들은 마침내 이성계와 연합해 고려를 넘어뜨리고 조선 신왕조를 개창한 주인공이 되었다. 그것은 사회의 주도세력이 권문세족에서 신진사대부로 넘어갔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고려는 몇 차례에 걸쳐 지배세력이 교체되며 사회발전이 이루어졌다. 초기의 호족시대에서 왕조의 기반이 확립되자 귀족사회로 넘어갔고, 다시 무신란 뒤 신분체제가 변화하자 권문세족이 지배세력이 되었고, 신흥사대부의 대두로 새 왕조가 교체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고려의 문벌귀족사회는 조선의 양반관료사회로 전환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고려사는 5백년 동안 언제나 새 사회를 지향하며 발전한 동적인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
약 5백년간의 고려왕조는 어디까지나 동적인 역사였고 발전하는 사회였다. 따라서, 고려시대사를 이해하려면 평면적으로 정적인 역사로 보아서는 안되고, 항상 시간에 따라 발전한 사회였다는 시각에서 조명해야 할 것이다.
고려왕조를 건국하고 정권에 참여한 세력은 호족들이었다. 그러나 고려의 기반이 확립되고 중앙집권화가 진전됨에 따라 문벌귀족사회가 형성되었다. 호족세력은 중앙관리가 되어 집권체제에 편입되거나, 자기 지방의 향리로 격하되어 초기의 자립성을 상실한 것이다. 그와 같이, 사회의 주도세력이 지방호족에서 중앙귀족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고려사의 발전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1170년에 일어난 무신란과 그 뒤 1백년간 계속된 무신정권은 귀족사회성립의 기반인 신분체제를 전복시켜 새로운 사회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무신란은 바로 고려사회의 성격인 귀족사회를 붕괴시키고 새로운 신분사회로 넘어가는 분수령을 이루었던 것이다.
후기의 지배세력은 무신정권기와 그뒤의 대몽관계를 통해 형성된 권문세족이었다. 권문세족은 가문의 권위를 중요시하는 종래의 문벌귀족의 일면을 계승했으나, 가문의 후광보다도 현실적인 관직을 보다 중시하였다.
그것은 귀족사회에서 관료사회로 넘어가는 중간존재였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후기의 지배세력인 권문세족은 전기의 지배세력인 문벌귀족의 발전된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권문세족도 새로운 사회계층인 신흥사대부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후기에는 지방의 중소지주인 유향품관과 향리출신의 자제들이 과거를 통해 중앙관리로 진출했는데, 그들은 권문세족의 보수정치에 대립해 개혁정치를 내세웠다.
충선왕과 공민왕의 개혁정치도 신진사대부가 국왕과 결합해 추진한 것이었다. 그들은 마침내 이성계와 연합해 고려를 넘어뜨리고 조선 신왕조를 개창한 주인공이 되었다. 그것은 사회의 주도세력이 권문세족에서 신진사대부로 넘어갔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고려는 몇 차례에 걸쳐 지배세력이 교체되며 사회발전이 이루어졌다. 초기의 호족시대에서 왕조의 기반이 확립되자 귀족사회로 넘어갔고, 다시 무신란 뒤 신분체제가 변화하자 권문세족이 지배세력이 되었고, 신흥사대부의 대두로 새 왕조가 교체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고려의 문벌귀족사회는 조선의 양반관료사회로 전환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고려사는 5백년 동안 언제나 새 사회를 지향하며 발전한 동적인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
사상체계의 특징
나말여초에는 정치사회의 변화와 함께 사상계에도 커다란 변동이 일어났다. 신라 말기의 육두품출신들은 골품제도의 운영원리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유교정치이념을 내세웠고, 그것은 고려에 들어와 정착하게 되었다.
고려 건국기에 최치원(崔致遠) 계통의 문인들이 왕건에게 귀의하면서 유교정치이념을 표방했고, 최승로의 보필을 받아 숭유정책을 추진한 성종 때 보다 본격화되어, 드디어 고려는 유교를 정치실천의 원리로 삼게 되었다.
불교계에도 국가와 진골귀족의 옹호를 받아 발달한 교종에 대해, 지방호족들에 의해 선종이 크게 일어났다. 그것은 문자에 의하지 않고 선(禪)을 통해 심성을 깨닫는 서민적인 선종이 호족들의 체질에 맞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진골귀족의 교종은 민중적이며 혁신적인 성격을 지닌 선종으로 교체되는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다. 고려의 불교계는 교종에서 선종으로 바뀌었으며, 나아가 천태종이 건립되는 커다란 진전이 있었다.
또한, 유교가 정치이념으로 채용되었고, 불교는 사상·신앙계의 지도이념으로 이용되었다. 양자는 각기 그 세계가 달랐기 때문에 공존할 수 있었고, 유학자가 불교를 믿고 승려가 유교경전에 능통한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후기에 철학적이며 사변적인 주자학이 수용되면서 불교와 충돌하게 되었다. 주자학자들이 불교를 배척해 종래의 유불공존에서 억불앙유로 바뀌어 유불교체의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나말여초에는 정치사회의 변화와 함께 사상계에도 커다란 변동이 일어났다. 신라 말기의 육두품출신들은 골품제도의 운영원리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유교정치이념을 내세웠고, 그것은 고려에 들어와 정착하게 되었다.
고려 건국기에 최치원(崔致遠) 계통의 문인들이 왕건에게 귀의하면서 유교정치이념을 표방했고, 최승로의 보필을 받아 숭유정책을 추진한 성종 때 보다 본격화되어, 드디어 고려는 유교를 정치실천의 원리로 삼게 되었다.
불교계에도 국가와 진골귀족의 옹호를 받아 발달한 교종에 대해, 지방호족들에 의해 선종이 크게 일어났다. 그것은 문자에 의하지 않고 선(禪)을 통해 심성을 깨닫는 서민적인 선종이 호족들의 체질에 맞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진골귀족의 교종은 민중적이며 혁신적인 성격을 지닌 선종으로 교체되는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다. 고려의 불교계는 교종에서 선종으로 바뀌었으며, 나아가 천태종이 건립되는 커다란 진전이 있었다.
또한, 유교가 정치이념으로 채용되었고, 불교는 사상·신앙계의 지도이념으로 이용되었다. 양자는 각기 그 세계가 달랐기 때문에 공존할 수 있었고, 유학자가 불교를 믿고 승려가 유교경전에 능통한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후기에 철학적이며 사변적인 주자학이 수용되면서 불교와 충돌하게 되었다. 주자학자들이 불교를 배척해 종래의 유불공존에서 억불앙유로 바뀌어 유불교체의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중세사회의 성격
한국사의 시대구분의 문제는 아직도 시론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사에 있어서 중세가 언제부터 시작되고, 또 어떤 성격을 가졌는가 하는 문제는 아직 정립된 결론이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는 고려를 중세사회로 규정하는 데 큰 이의가 없는 것 같다.
고려시대가 중세라는 점은 고대사회의 편성원리인 골품제의 극복에서 엿볼 수 있다. 신라에서는 출생한 혈족에 따라 지위와 신분이 규정된 골품제가 기본적인 사회체제를 이루고 있었는데, 나말여초에 지방호족세력과 지식층인 육두품출신이 골품제에 반대하고 새로운 사회질서를 형성하였다. 그러므로 고려는 고대적이며 폐쇄적인 골품체제에서 보다 개방되고 전진된 사회라는 점에서 중세라 할 수 있다.
고려가 중세사회라는 것은 지방호족의 대두에서도 찾을 수 있다. 신라는 왕경(王京)의 중앙귀족 중심의 정치체제를 이루고 지방세력의 성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신라 말기에 토착적인 촌주출신과 왕경에서 내려간 중앙귀족들이 지방의 호족으로 대두해 새로운 지배세력이 되었다. 그들 지방호족은 마침내 고려를 건국하고, 지배층이 되었으므로, 그것을 중세사회로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채용한 것도 중세사상의 성립으로 볼 수 있다. 신라의 진골체제를 극복하기 위해 유교정치이념을 채용하고, 당·송의 제도를 본받아 중앙집권적인 정치제도를 실시한 점에서도 고대적인 사회에서 중세사회로 전진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불교에 있어서도 귀족적인 교종에서 벗어나 민중적이며 혁신적인 선종의 유행을 보게 된 것도 새로운 중세사상의 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사회적·경제적인 면에서도 중세적 요소가 나타났다. 신라의 고대적인 토지소유관계와 농민에 대한 수취관계의 모순을 시정하려 했는데, 태조의 조세개혁과 그 뒤의 전시과 제정이 그것이다. 전시과의 시행은 확실히 일보전진한 형태로, 중세적인 토지지배관계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특히, 일반농민이 조상대대로 이어받아 경작하는 민전이 광범하게 존재한 것은 농민의 토지소유의 일반화를 말해주는 것으로, 농민지위의 성장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토지소유관계의 진전과 농민의 성장은 신라의 고대적인 것과 다른 중세적인 성격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중세사회의 성격은 다음 조선의 근세사회로 발전하는 토대를 이루었다.
오늘날 고려시대사에 대한 연구는 자못 활발하고 연구성과도 많은 편이다.
비교적 많은 인원이 고려시대연구에 참여하고 있고, 각 부문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고려시대사연구의 활기는 1960년대 이후 비롯된 것으로 그전까지는 한산하였다.
일제시기의 고려시대사연구는 전반적인 한국사연구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전혀 방치된 상태였다.
몇몇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고려시대의 역사지리나 정치사·대외관계 등에 대한 연구가 있었으나, 그것은 단편적인 사건의 고증적 연구에 불과했고, 그 성과도 미미하였다. 반면 한국인 학자들의 고려시대연구는 더욱 보잘 것 없었다.
신채호(申采浩)는 「조선역사상 1천년래 제1대사건」에서 묘청의 난을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조명했고, 이병도(李丙燾)의 「인종조의 서경천도운동과 그 반란」(日文), 김상기(金庠基)의 「삼별초와 그의 난에 대하여」, 윤용균(尹瑢均)의 「고려 의종조에 있어서의 정중부난의 소인과 그 영향」(日文) 등 몇몇 학자들이 몇 편의 논문을 발표했으나 성과는 크지 못하였다.
백남운(白南雲)이 사회경제사적인 입장에서 고려시대사를 서술한 『조선봉건사회경제사상』(日文)이 나온 것은 특이한 일로 그 의의가 컸다.
고려시대사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광복 후에 시작되었다.
이병도는 일제시대에 발표한 논문을 광복 후의 연구업적과 함께 『고려시대의 연구』를 펴내어 고려시대의 풍수도참설의 발전을 고찰하였다.
김상기도 삼별초연구를 합친 연구서인 『동방문화교류사논고』 안에 「여송무역소고」·「고려무인정치기구고」를 발표하였다.
이들 광복 직후의 고려시대사연구서의 출간은 민족항일기부터의 연구업적을 토대로 나올 수 있는 성과였다.
새로이 고려시대사연구에 참여한 젊은 세대의 연구논문은 6·25전쟁이 휴전된 뒤부터 배출되기 시작했으며, 특히 그것은 『역사학보(歷史學報)』의 간행에 크게 힘입게 되었다. 그리하여 1950년대 『역사학보』를 비롯한 몇 개의 연구지에 새 역사학도들에 의한 고려시대사연구논문이 상당량 발표되었다.
윤무병(尹武炳)이 1953년 처음으로 「고려북계지리고」를 발표한 이후, 1954년 이광린(李光麟)이 「기인제도의 변천에 대하여」를 내놓았고, 1955년 박성봉(朴性鳳)이 「해동공자 최충소고」, 이용범(李龍範)이 「여란무역고(麗丹貿易考)」, 김용덕(金龍德)이 「향·소·부곡고」를 발표했으며, 1956년 이기백(李基白)의 「고려경군고」, 윤무병의 「소위 적현(赤縣)에 대하여」, 양원석(梁元錫)의 「여말의 유민문제」, 천관우(千寬宇)의 「여말선초의 한량」, 김용덕의 「고려시대의 서경에 대하여」 등 여러 논문이 나오기에 이른 것이다.
1950년대에는 광복 후의 새로운 사학도들에 의한 고려시대 연구논문이 상당수 발표되었으나, 그것은 아직도 개별적인 문제연구에 불과했고, 그 분야의 계통적이며 집중적인 연구업적은 1960년대에 결실되기 시작하였다.
1960년대 초에는 고려시대에 대한 두 개의 시대사가 출간되었다.
이병도의 『한국사』 중세편과 김상기의 『고려시대사』가 그것이다. 그것들은 고려시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길잡이가 되었다.
특히, 이기백이 고려 경군에 대한 논문에 이어 일련의 고려시대 병제를 연구해 『고려병제사연구』로 집대성했고, 변태섭(邊太燮)이 「만적란발생의 사회적 소지」 이후 일련의 고려정치제도를 연구한 논문을 모아 『고려정치제도사연구』를 출간함으로써 고려사연구는 본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1970년대에는 보다 젊은 학자들이 고려시대연구에 참여해 새로운 시각으로 각 분야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담당하였다.
고려시대의 시대적 변화와 사회적 성격 등에 대해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끈질긴 연찬을 가함으로써 그 성과는 매우 컸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에 들어서는 수많은 연구논문과 그것들을 집대성한 연구서가 배출되었다.
고려 초기의 호족세력과 왕권과의 관계에 대해 하현강(河炫綱)·김광수(金光洙)·강희웅(姜喜雄) 등의 연구가 있다.
연구서로는 이기백 편 『고려광종연구』가 출간되어 고려 초기의 호족연합정권과 그 뒤의 중앙집권화정책에 대해 고찰하였다.
고려사회의 성격에 대한 귀족제사회설과 관료제사회설의 논쟁을 중심으로 박창희(朴菖熙)·김의규(金毅圭)·박용운(朴龍雲)·이기백·변태섭 등의 연구가 있었다.
연구서로는 황운룡(黃雲龍)의 『고려벌족에 관한 연구』, 허흥식(許興植)의 『고려사회사연구』, 홍승기(洪承基)의 『고려귀족사회와 노비』, 이수건(李樹健)의 『한국중세사회사연구』가 나와 가장 풍요한 업적을 이루었다.
토지제도에 대한 연구로는 강진철(姜晉哲)이 『고려토지제도사연구』를 내놓았고, 연구논문으로는 이우성(李佑成)의 영업전(永業田), 송병기(宋炳基)의 농장, 민현구(閔賢九)의 녹과전, 김용섭(金容燮)의 양전제에 관한 것이 눈에 띈다.
사상사방면에도 적지 않은 연구성과가 있었다. 이병도의 『고려시대의 연구』는 고려의 풍수도참사상의 발전을 고찰했으며, 조명기(趙明基)의 『고려 대각국사와 천태사상』, 김두진(金杜珍)의 『균여화엄사상연구』, 이희덕(李熙德)의 『고려유교정치사상의 연구』 등이 나왔다.
연구논문으로는, 유교사상에 이병도·박성봉·이희덕의 업적이 있고, 불교사상에 안계현(安啓賢)·최병헌(崔柄憲)·고익진(高翊晉)·채상식(蔡尙植) 등의 연구성과가 돋보인다.
문화면에는 문화의식과 역사의식에 대해 김철준(金哲埈)·고병익(高柄翊)·이우성·박창희 등의 연구가 있고, 문학에 이명구(李明九)·장덕순(張德順), 미술에 고유섭(高裕燮)·진홍섭(秦弘燮) 등의 논문이 있다.
무신란과 무신정권에 대해서는 김상기·변태섭·민병하(閔丙河)·김의규·정두희(鄭杜熙)·박창희의 연구가 있고, 민란과 삼별초의 난에 대해서는 역시 김상기·변태섭의 논문이 보인다.
고려 후기 사회에 대해서는 민현구·김윤곤(金潤坤)·이기남(李起男) 등이 권문세가와 신흥사대부의 대립을 해명하는 연구를 하였다.
대외관계에 관한 연구로는, 거란 및 여진족과의 관계는 박현서(朴賢緖)·이용범·김상기·김광수, 그리고 송나라와의 관계는 김상기·전해종(全海宗) 등의 연구가 있다.
원나라와의 관계는 고병익·강진철·유홍렬(柳洪烈) 등의 연구가 보인다.
1990년대에 들어 고려사연구는 과연 활기를 띠게 되었으며 그것은 특히 소장학자들의 학위논문의 형식으로 구체화되었다.
이것은 젊은 학자들의 고려사연구에 대거 참여로 저변이 확대되어 그 장래가 희망적인 점이다.
이들은 각분야에서 골고루 많은 업적을 내놓았는데 특히 정치사·정치제도사에서 볼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홍승기는 몇사람의 논문을 합쳐 『고려태조의 국가경영』을 내놓았고, 박용운은 『고려개경연구』·『고려시대 관계·관직연구』를 저술했으며, 이밖에 학위논문으로 신수정(申守楨)의 재상제도, 김창현(金昌鉉)의 정방연구가 돋보였다.
정치세력분야에서는 이익주(李益柱)·박재우(朴宰佑)의 고려후기 정치세력연구와 김광철(金光哲)의 세족층(世族層) 연구가 집중되었고 김용선(金龍善)·박용운의 음서제연구에 성과를 거두었다.
지방제도연구로는 김일우(金日宇)·김아네스의 고려초기 지방지배연구가 있었고, 박종기(朴宗基)의 부곡제연구, 구산우(具山祐)·박은경(朴恩卿)의 향촌사회 분석이 눈에 뛴다.
군사제도로는 홍승기·홍원기·정경현의 경군인 2군·6위 연구가 잇따라 발표되었고, 권영국(權寧國)의 고려 후기 군사제도가 이를 이어 나왔다.
교육제도로는 박찬수(朴贊洙) 및 민병하·신천식의 논문이 돋보인다.
경제사분야에서는 윤한택(尹漢宅)의 고려 전기 사전(私田) 연구와 박경안(朴京安)의 고려 후기 토지제도연구가 있었고, 사원경제(寺院經濟) 연구로 이상선(李相瑄)·이병희(李炳熙)의 업적이 눈에 뛴다.
재정사연구로 김옥근(金玉根)·안병우(安秉佑)의 논문이 있고, 최정환(崔貞煥)의 녹봉제연구와 김재명(金載名)·박종진(朴鍾進)의 부역제도 연구가 새로웠다.
사상사방면에는 허흥식의 불교사연구, 김광식(金光植)의 무인정권과 불교계연구가 있었고 성리학수용연구로 이원명(李源明)·변동명(邊東明)의 성과가 컸다.
무신정권에 대해서는 김당택(金塘澤)·민병하의 연구에 이어 이정신의 무신정권기 농민·천민항쟁 연구가 있었으며 윤용혁은 대몽항쟁사를 상술하였다.
이상에서 찾아본 바와 같이, 고려시대사에 대한 연구는 근년에 이르러 인원이나 연구성과에 있어 자못 활기를 띠게 되었다.
지금까지 개척되지 않았던 많은 문제점이 해명되고 심도 있는 연구업적이 나오게 되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와 1990년대에 이르러 수많은 연구서가 출간되기 시작한 것은 그와 같은 활발한 고려시대사 연구의 결실로 이해된다.
이같은 연구추세는 앞으로도 계속되리라 믿어진다.
연천 숭의전지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에 있는 고려 태조와 7왕을 제사지냈던 사당.
1397년에 태조의 명으로 묘를 세워 1399년에 고려 태조와 7왕을 제사지냈다.
문종은 이곳을 '숭의전'이라 이름짓고, 고려조의 충신 정몽주 외 열다섯 사람을 제사지내도록 하였으며, 고려 왕족의 후손들로 하여금 이곳을 관리하게 하였다.
한국사의 시대구분의 문제는 아직도 시론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사에 있어서 중세가 언제부터 시작되고, 또 어떤 성격을 가졌는가 하는 문제는 아직 정립된 결론이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는 고려를 중세사회로 규정하는 데 큰 이의가 없는 것 같다.
고려시대가 중세라는 점은 고대사회의 편성원리인 골품제의 극복에서 엿볼 수 있다. 신라에서는 출생한 혈족에 따라 지위와 신분이 규정된 골품제가 기본적인 사회체제를 이루고 있었는데, 나말여초에 지방호족세력과 지식층인 육두품출신이 골품제에 반대하고 새로운 사회질서를 형성하였다. 그러므로 고려는 고대적이며 폐쇄적인 골품체제에서 보다 개방되고 전진된 사회라는 점에서 중세라 할 수 있다.
고려가 중세사회라는 것은 지방호족의 대두에서도 찾을 수 있다. 신라는 왕경(王京)의 중앙귀족 중심의 정치체제를 이루고 지방세력의 성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신라 말기에 토착적인 촌주출신과 왕경에서 내려간 중앙귀족들이 지방의 호족으로 대두해 새로운 지배세력이 되었다. 그들 지방호족은 마침내 고려를 건국하고, 지배층이 되었으므로, 그것을 중세사회로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채용한 것도 중세사상의 성립으로 볼 수 있다. 신라의 진골체제를 극복하기 위해 유교정치이념을 채용하고, 당·송의 제도를 본받아 중앙집권적인 정치제도를 실시한 점에서도 고대적인 사회에서 중세사회로 전진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불교에 있어서도 귀족적인 교종에서 벗어나 민중적이며 혁신적인 선종의 유행을 보게 된 것도 새로운 중세사상의 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사회적·경제적인 면에서도 중세적 요소가 나타났다. 신라의 고대적인 토지소유관계와 농민에 대한 수취관계의 모순을 시정하려 했는데, 태조의 조세개혁과 그 뒤의 전시과 제정이 그것이다. 전시과의 시행은 확실히 일보전진한 형태로, 중세적인 토지지배관계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특히, 일반농민이 조상대대로 이어받아 경작하는 민전이 광범하게 존재한 것은 농민의 토지소유의 일반화를 말해주는 것으로, 농민지위의 성장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토지소유관계의 진전과 농민의 성장은 신라의 고대적인 것과 다른 중세적인 성격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중세사회의 성격은 다음 조선의 근세사회로 발전하는 토대를 이루었다.
오늘날 고려시대사에 대한 연구는 자못 활발하고 연구성과도 많은 편이다.
비교적 많은 인원이 고려시대연구에 참여하고 있고, 각 부문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고려시대사연구의 활기는 1960년대 이후 비롯된 것으로 그전까지는 한산하였다.
일제시기의 고려시대사연구는 전반적인 한국사연구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전혀 방치된 상태였다.
몇몇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고려시대의 역사지리나 정치사·대외관계 등에 대한 연구가 있었으나, 그것은 단편적인 사건의 고증적 연구에 불과했고, 그 성과도 미미하였다. 반면 한국인 학자들의 고려시대연구는 더욱 보잘 것 없었다.
신채호(申采浩)는 「조선역사상 1천년래 제1대사건」에서 묘청의 난을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조명했고, 이병도(李丙燾)의 「인종조의 서경천도운동과 그 반란」(日文), 김상기(金庠基)의 「삼별초와 그의 난에 대하여」, 윤용균(尹瑢均)의 「고려 의종조에 있어서의 정중부난의 소인과 그 영향」(日文) 등 몇몇 학자들이 몇 편의 논문을 발표했으나 성과는 크지 못하였다.
백남운(白南雲)이 사회경제사적인 입장에서 고려시대사를 서술한 『조선봉건사회경제사상』(日文)이 나온 것은 특이한 일로 그 의의가 컸다.
고려시대사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광복 후에 시작되었다.
이병도는 일제시대에 발표한 논문을 광복 후의 연구업적과 함께 『고려시대의 연구』를 펴내어 고려시대의 풍수도참설의 발전을 고찰하였다.
김상기도 삼별초연구를 합친 연구서인 『동방문화교류사논고』 안에 「여송무역소고」·「고려무인정치기구고」를 발표하였다.
이들 광복 직후의 고려시대사연구서의 출간은 민족항일기부터의 연구업적을 토대로 나올 수 있는 성과였다.
새로이 고려시대사연구에 참여한 젊은 세대의 연구논문은 6·25전쟁이 휴전된 뒤부터 배출되기 시작했으며, 특히 그것은 『역사학보(歷史學報)』의 간행에 크게 힘입게 되었다. 그리하여 1950년대 『역사학보』를 비롯한 몇 개의 연구지에 새 역사학도들에 의한 고려시대사연구논문이 상당량 발표되었다.
윤무병(尹武炳)이 1953년 처음으로 「고려북계지리고」를 발표한 이후, 1954년 이광린(李光麟)이 「기인제도의 변천에 대하여」를 내놓았고, 1955년 박성봉(朴性鳳)이 「해동공자 최충소고」, 이용범(李龍範)이 「여란무역고(麗丹貿易考)」, 김용덕(金龍德)이 「향·소·부곡고」를 발표했으며, 1956년 이기백(李基白)의 「고려경군고」, 윤무병의 「소위 적현(赤縣)에 대하여」, 양원석(梁元錫)의 「여말의 유민문제」, 천관우(千寬宇)의 「여말선초의 한량」, 김용덕의 「고려시대의 서경에 대하여」 등 여러 논문이 나오기에 이른 것이다.
1950년대에는 광복 후의 새로운 사학도들에 의한 고려시대 연구논문이 상당수 발표되었으나, 그것은 아직도 개별적인 문제연구에 불과했고, 그 분야의 계통적이며 집중적인 연구업적은 1960년대에 결실되기 시작하였다.
1960년대 초에는 고려시대에 대한 두 개의 시대사가 출간되었다.
이병도의 『한국사』 중세편과 김상기의 『고려시대사』가 그것이다. 그것들은 고려시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길잡이가 되었다.
특히, 이기백이 고려 경군에 대한 논문에 이어 일련의 고려시대 병제를 연구해 『고려병제사연구』로 집대성했고, 변태섭(邊太燮)이 「만적란발생의 사회적 소지」 이후 일련의 고려정치제도를 연구한 논문을 모아 『고려정치제도사연구』를 출간함으로써 고려사연구는 본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1970년대에는 보다 젊은 학자들이 고려시대연구에 참여해 새로운 시각으로 각 분야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담당하였다.
고려시대의 시대적 변화와 사회적 성격 등에 대해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끈질긴 연찬을 가함으로써 그 성과는 매우 컸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에 들어서는 수많은 연구논문과 그것들을 집대성한 연구서가 배출되었다.
고려 초기의 호족세력과 왕권과의 관계에 대해 하현강(河炫綱)·김광수(金光洙)·강희웅(姜喜雄) 등의 연구가 있다.
연구서로는 이기백 편 『고려광종연구』가 출간되어 고려 초기의 호족연합정권과 그 뒤의 중앙집권화정책에 대해 고찰하였다.
고려사회의 성격에 대한 귀족제사회설과 관료제사회설의 논쟁을 중심으로 박창희(朴菖熙)·김의규(金毅圭)·박용운(朴龍雲)·이기백·변태섭 등의 연구가 있었다.
연구서로는 황운룡(黃雲龍)의 『고려벌족에 관한 연구』, 허흥식(許興植)의 『고려사회사연구』, 홍승기(洪承基)의 『고려귀족사회와 노비』, 이수건(李樹健)의 『한국중세사회사연구』가 나와 가장 풍요한 업적을 이루었다.
토지제도에 대한 연구로는 강진철(姜晉哲)이 『고려토지제도사연구』를 내놓았고, 연구논문으로는 이우성(李佑成)의 영업전(永業田), 송병기(宋炳基)의 농장, 민현구(閔賢九)의 녹과전, 김용섭(金容燮)의 양전제에 관한 것이 눈에 띈다.
사상사방면에도 적지 않은 연구성과가 있었다. 이병도의 『고려시대의 연구』는 고려의 풍수도참사상의 발전을 고찰했으며, 조명기(趙明基)의 『고려 대각국사와 천태사상』, 김두진(金杜珍)의 『균여화엄사상연구』, 이희덕(李熙德)의 『고려유교정치사상의 연구』 등이 나왔다.
연구논문으로는, 유교사상에 이병도·박성봉·이희덕의 업적이 있고, 불교사상에 안계현(安啓賢)·최병헌(崔柄憲)·고익진(高翊晉)·채상식(蔡尙植) 등의 연구성과가 돋보인다.
문화면에는 문화의식과 역사의식에 대해 김철준(金哲埈)·고병익(高柄翊)·이우성·박창희 등의 연구가 있고, 문학에 이명구(李明九)·장덕순(張德順), 미술에 고유섭(高裕燮)·진홍섭(秦弘燮) 등의 논문이 있다.
무신란과 무신정권에 대해서는 김상기·변태섭·민병하(閔丙河)·김의규·정두희(鄭杜熙)·박창희의 연구가 있고, 민란과 삼별초의 난에 대해서는 역시 김상기·변태섭의 논문이 보인다.
고려 후기 사회에 대해서는 민현구·김윤곤(金潤坤)·이기남(李起男) 등이 권문세가와 신흥사대부의 대립을 해명하는 연구를 하였다.
대외관계에 관한 연구로는, 거란 및 여진족과의 관계는 박현서(朴賢緖)·이용범·김상기·김광수, 그리고 송나라와의 관계는 김상기·전해종(全海宗) 등의 연구가 있다.
원나라와의 관계는 고병익·강진철·유홍렬(柳洪烈) 등의 연구가 보인다.
1990년대에 들어 고려사연구는 과연 활기를 띠게 되었으며 그것은 특히 소장학자들의 학위논문의 형식으로 구체화되었다.
이것은 젊은 학자들의 고려사연구에 대거 참여로 저변이 확대되어 그 장래가 희망적인 점이다.
이들은 각분야에서 골고루 많은 업적을 내놓았는데 특히 정치사·정치제도사에서 볼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홍승기는 몇사람의 논문을 합쳐 『고려태조의 국가경영』을 내놓았고, 박용운은 『고려개경연구』·『고려시대 관계·관직연구』를 저술했으며, 이밖에 학위논문으로 신수정(申守楨)의 재상제도, 김창현(金昌鉉)의 정방연구가 돋보였다.
정치세력분야에서는 이익주(李益柱)·박재우(朴宰佑)의 고려후기 정치세력연구와 김광철(金光哲)의 세족층(世族層) 연구가 집중되었고 김용선(金龍善)·박용운의 음서제연구에 성과를 거두었다.
지방제도연구로는 김일우(金日宇)·김아네스의 고려초기 지방지배연구가 있었고, 박종기(朴宗基)의 부곡제연구, 구산우(具山祐)·박은경(朴恩卿)의 향촌사회 분석이 눈에 뛴다.
군사제도로는 홍승기·홍원기·정경현의 경군인 2군·6위 연구가 잇따라 발표되었고, 권영국(權寧國)의 고려 후기 군사제도가 이를 이어 나왔다.
교육제도로는 박찬수(朴贊洙) 및 민병하·신천식의 논문이 돋보인다.
경제사분야에서는 윤한택(尹漢宅)의 고려 전기 사전(私田) 연구와 박경안(朴京安)의 고려 후기 토지제도연구가 있었고, 사원경제(寺院經濟) 연구로 이상선(李相瑄)·이병희(李炳熙)의 업적이 눈에 뛴다.
재정사연구로 김옥근(金玉根)·안병우(安秉佑)의 논문이 있고, 최정환(崔貞煥)의 녹봉제연구와 김재명(金載名)·박종진(朴鍾進)의 부역제도 연구가 새로웠다.
사상사방면에는 허흥식의 불교사연구, 김광식(金光植)의 무인정권과 불교계연구가 있었고 성리학수용연구로 이원명(李源明)·변동명(邊東明)의 성과가 컸다.
무신정권에 대해서는 김당택(金塘澤)·민병하의 연구에 이어 이정신의 무신정권기 농민·천민항쟁 연구가 있었으며 윤용혁은 대몽항쟁사를 상술하였다.
이상에서 찾아본 바와 같이, 고려시대사에 대한 연구는 근년에 이르러 인원이나 연구성과에 있어 자못 활기를 띠게 되었다.
지금까지 개척되지 않았던 많은 문제점이 해명되고 심도 있는 연구업적이 나오게 되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와 1990년대에 이르러 수많은 연구서가 출간되기 시작한 것은 그와 같은 활발한 고려시대사 연구의 결실로 이해된다.
이같은 연구추세는 앞으로도 계속되리라 믿어진다.
연천 숭의전지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에 있는 고려 태조와 7왕을 제사지냈던 사당.
1397년에 태조의 명으로 묘를 세워 1399년에 고려 태조와 7왕을 제사지냈다.
문종은 이곳을 '숭의전'이라 이름짓고, 고려조의 충신 정몽주 외 열다섯 사람을 제사지내도록 하였으며, 고려 왕족의 후손들로 하여금 이곳을 관리하게 하였다.
고려
[高麗]
본관 개성(開城), 자 약천(若天), 성 왕(王), 휘 건(建), 시호 신성(神聖)이다.
금성태수(金城太守) 융(隆)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위숙왕후(威肅王后:追尊) 한씨(韓氏)이다.
29명에 이르는 많은 후비(后妃)를 두었는데 이는 혼인관계를 통해 호족세력을 통합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895년(진성여왕 9) 아버지를 따라 궁예(弓裔)의 휘하에 들어가 898년(효공왕 2) 정기대감(精騎大監)이 되고, 900년 광주(廣州)·충주(忠州) 등을 공취, 그 공으로 아찬(阿粲)의 위계를 받았다.
903년에는 수군을 이끌고 전라도 지방을 공략, 궁예의 영토를 확장하여 알찬(閼粲)에 승진되고 계속하여 전라도·경상도 지방에서 견훤(甄萱)의 군사를 격파하는 한편 정벌한 지방의 구휼(救恤)에도 힘써 백성의 신망을 얻었으며, 913년 시중(侍中)이 되었다.
918년 세력이 강대해짐에 따라 난폭한 행동을 자행하는 궁예가 민심을 잃자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 등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어 즉위, 국호를 '고려'라 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 정하였다.
지방 호족들을 회유·무마하는 한편, 서경(西京)을 개척하고 여진을 공략했으며 불교를 호국신앙으로 삼아 각처에 절을 세웠다.
935년 투항해 온 신라 경순왕을 맞아 평화적으로 합병하고 이듬해에는 앞서 항복해 온 견훤과 함께 신검(神儉)의 후백제를 공격, 이를 멸망시켜 마침내 후삼국(後三國)을 통일하였다.
이 해 《정계(政誡)》 《계백료서(誡百寮書)》를 저술하여 정치의 귀감으로 삼게 하고 943년 후세의 왕들이 치국의 귀감으로 삼도록 〈훈요십조(訓要十條)〉를 유훈으로 남겼다.
고려를 세우고 후삼국을 통일한 임금이다.
후고구려의 임금인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운 뒤 신라와 후백제를 정복해 한반도의 주인이 되었다.
혼인 정책과 불교 장려 정책 등으로 나라를 안정시켰다.
태조는 고려를 세우고 결혼정책을 통해 호족을 통합했다.
세금을 감면하고 불교 행사를 성대하게 열어 민심의 안정과 통합을 이루려고 했다.
통일신라와 차별되는 고려만의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 북진정책을 펼쳐 실제로 영토를 확장했다.
민심을 얻지 못하는 국가는 오랫동안 유지될 수가 없습니다.
이건 동서고금의 진리예요.
마지막으로 새로운 국가를 만들었으니 고려만의 브랜드가 있어야 합니다.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기 위한 고려만의 색을 만들어나갑니다.
고려 태조, 한반도 역대 왕 중 가장 많은 부인,
1위. 고려 태조 29명
2위. 고려 현종 13명
3위. 조선 성종 12명,
조선 중종 12명
엄청나? 요즘이야 일부일처제니까 열 명 이상 비빈을 거느린 왕들이 방탕하다고 여겨집니다.
세계사적인 수준에서는 결코 지나치지 않아 오히려 약소합니다.
중국이나 이슬람제국의 경우 후궁은 최소한 수천 명.
심지어 종교적으로 일부일처제가 강요된 서구에서도 왕은 수많은 정부를 뒀거든요.
조선의 국력과 인구를 생각해도 수십 정도는 되어야 했을 겁니다.
후궁의 수는 권력의 크기를 보여주거든요.
후손들에게 당부하는 글, 훈요 10조
태조도 이걸 걱정해서 죽기 전에 후손들에게 당부하는 글인 훈요 10조를 남깁니다.
어떤 글인지???
고려 시대까지는 불교를 존중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불교를 완전히 억압하거든요(억불숭유정책이라고 하죠!).
풍수지리사상을 중요하게 여기는 걸 알 수 있어요. 실제로 고려를 건국한 이들의 사상적 배경이 풍수지리사상이었죠.
여기에선 두 가지를 알 수 있네요.
무조건 중국 것이 좋은 게 아니라 우리나라에 맞는 것을 수용하자고 말하고 있어요.
사대적이지 않고 자주적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북진정책을 추진하면서 거란을 여전히 견제하는 걸 알 수 있죠.
서경은 서쪽 수도인 평양을 뜻합니다.
마찬가지로 북진정책이 돋보인다.
북진정책을 추진하다
마지막으로 ‘new brand’ 만들기를.
가장 중요한 건 이 나라를 왜 만들었는지에 대한 ‘방향’을 세우는 겁니다.
그 방향은 고려라는 국호에 가장 잘 드러나 있죠.
고려는 고구려의 준말입니다.
지금도 우리나라 이름이 대한민국인데 한국이라고도 하죠? 마찬가지입니다.
고려라는 이름을 지은 이유는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라는 걸 의미합니다.
예전의 통일신라와는 다른 고려만의 브랜드를 만들려고 한 거죠.
추진한 정책이 바로 북진정책입니다.
고구려의 그 넓었던 북쪽 영토를 되찾기 위해 북쪽으로 진출하는 정책을 펼친 거죠.
실제로 청천강에서 영흥의 국경선까지 영토를 확장하는 성과를 거둬요.
[高麗]
본관 개성(開城), 자 약천(若天), 성 왕(王), 휘 건(建), 시호 신성(神聖)이다.
금성태수(金城太守) 융(隆)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위숙왕후(威肅王后:追尊) 한씨(韓氏)이다.
29명에 이르는 많은 후비(后妃)를 두었는데 이는 혼인관계를 통해 호족세력을 통합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895년(진성여왕 9) 아버지를 따라 궁예(弓裔)의 휘하에 들어가 898년(효공왕 2) 정기대감(精騎大監)이 되고, 900년 광주(廣州)·충주(忠州) 등을 공취, 그 공으로 아찬(阿粲)의 위계를 받았다.
903년에는 수군을 이끌고 전라도 지방을 공략, 궁예의 영토를 확장하여 알찬(閼粲)에 승진되고 계속하여 전라도·경상도 지방에서 견훤(甄萱)의 군사를 격파하는 한편 정벌한 지방의 구휼(救恤)에도 힘써 백성의 신망을 얻었으며, 913년 시중(侍中)이 되었다.
918년 세력이 강대해짐에 따라 난폭한 행동을 자행하는 궁예가 민심을 잃자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 등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어 즉위, 국호를 '고려'라 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 정하였다.
지방 호족들을 회유·무마하는 한편, 서경(西京)을 개척하고 여진을 공략했으며 불교를 호국신앙으로 삼아 각처에 절을 세웠다.
935년 투항해 온 신라 경순왕을 맞아 평화적으로 합병하고 이듬해에는 앞서 항복해 온 견훤과 함께 신검(神儉)의 후백제를 공격, 이를 멸망시켜 마침내 후삼국(後三國)을 통일하였다.
이 해 《정계(政誡)》 《계백료서(誡百寮書)》를 저술하여 정치의 귀감으로 삼게 하고 943년 후세의 왕들이 치국의 귀감으로 삼도록 〈훈요십조(訓要十條)〉를 유훈으로 남겼다.
고려를 세우고 후삼국을 통일한 임금이다.
후고구려의 임금인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운 뒤 신라와 후백제를 정복해 한반도의 주인이 되었다.
혼인 정책과 불교 장려 정책 등으로 나라를 안정시켰다.
태조는 고려를 세우고 결혼정책을 통해 호족을 통합했다.
세금을 감면하고 불교 행사를 성대하게 열어 민심의 안정과 통합을 이루려고 했다.
통일신라와 차별되는 고려만의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 북진정책을 펼쳐 실제로 영토를 확장했다.
민심을 얻지 못하는 국가는 오랫동안 유지될 수가 없습니다.
이건 동서고금의 진리예요.
마지막으로 새로운 국가를 만들었으니 고려만의 브랜드가 있어야 합니다.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기 위한 고려만의 색을 만들어나갑니다.
고려 태조, 한반도 역대 왕 중 가장 많은 부인,
1위. 고려 태조 29명
2위. 고려 현종 13명
3위. 조선 성종 12명,
조선 중종 12명
엄청나? 요즘이야 일부일처제니까 열 명 이상 비빈을 거느린 왕들이 방탕하다고 여겨집니다.
세계사적인 수준에서는 결코 지나치지 않아 오히려 약소합니다.
중국이나 이슬람제국의 경우 후궁은 최소한 수천 명.
심지어 종교적으로 일부일처제가 강요된 서구에서도 왕은 수많은 정부를 뒀거든요.
조선의 국력과 인구를 생각해도 수십 정도는 되어야 했을 겁니다.
후궁의 수는 권력의 크기를 보여주거든요.
후손들에게 당부하는 글, 훈요 10조
태조도 이걸 걱정해서 죽기 전에 후손들에게 당부하는 글인 훈요 10조를 남깁니다.
어떤 글인지???
고려 시대까지는 불교를 존중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불교를 완전히 억압하거든요(억불숭유정책이라고 하죠!).
풍수지리사상을 중요하게 여기는 걸 알 수 있어요. 실제로 고려를 건국한 이들의 사상적 배경이 풍수지리사상이었죠.
여기에선 두 가지를 알 수 있네요.
무조건 중국 것이 좋은 게 아니라 우리나라에 맞는 것을 수용하자고 말하고 있어요.
사대적이지 않고 자주적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북진정책을 추진하면서 거란을 여전히 견제하는 걸 알 수 있죠.
서경은 서쪽 수도인 평양을 뜻합니다.
마찬가지로 북진정책이 돋보인다.
북진정책을 추진하다
마지막으로 ‘new brand’ 만들기를.
가장 중요한 건 이 나라를 왜 만들었는지에 대한 ‘방향’을 세우는 겁니다.
그 방향은 고려라는 국호에 가장 잘 드러나 있죠.
고려는 고구려의 준말입니다.
지금도 우리나라 이름이 대한민국인데 한국이라고도 하죠? 마찬가지입니다.
고려라는 이름을 지은 이유는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라는 걸 의미합니다.
예전의 통일신라와는 다른 고려만의 브랜드를 만들려고 한 거죠.
추진한 정책이 바로 북진정책입니다.
고구려의 그 넓었던 북쪽 영토를 되찾기 위해 북쪽으로 진출하는 정책을 펼친 거죠.
실제로 청천강에서 영흥의 국경선까지 영토를 확장하는 성과를 거둬요.
고구려의 원수, 거란에게 적대적,,
고려의 옛 수도였던 평양을 제2의 서울로 삼고 중요하게 여겼어요.
당시 개경의 위치를 기준으로 볼 때 평양이 서쪽에 있어서 서쪽 수도라는 의미로 평양을 서경이라고 불렀습니다.
고구려의 원수는 고려의 원수가 되겠죠?
고구려의 유이민들이 만든 국가인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에게는 적대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만약 북한을 멸망시키고 중국이 우리의 북쪽 땅을 빼앗았다면 우리들의 원수가 되겠죠? 그런데 거란은 고려와 잘 지내고 싶어 했어요.
짝사랑이었던 거죠.
거란에서는 고려에 아주 귀한 선물인 낙타를 무려 50마리나 선물로 보냅니다.
북방 민족들에게 목숨만큼 중요한 게 바로 가축이거든요.
거란이 미웠던 태조는 그 낙타를 만부교라는 다리 밑에 묶어놓고 굶겨 죽였습니다.
사랑이 깊어지면 증오가 되죠.
나중에 다루겠지만 이런 크고 작은 분쟁으로 거란은 고려를 침공하게 됩니다.
고려의 옛 수도였던 평양을 제2의 서울로 삼고 중요하게 여겼어요.
당시 개경의 위치를 기준으로 볼 때 평양이 서쪽에 있어서 서쪽 수도라는 의미로 평양을 서경이라고 불렀습니다.
고구려의 원수는 고려의 원수가 되겠죠?
고구려의 유이민들이 만든 국가인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에게는 적대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만약 북한을 멸망시키고 중국이 우리의 북쪽 땅을 빼앗았다면 우리들의 원수가 되겠죠? 그런데 거란은 고려와 잘 지내고 싶어 했어요.
짝사랑이었던 거죠.
거란에서는 고려에 아주 귀한 선물인 낙타를 무려 50마리나 선물로 보냅니다.
북방 민족들에게 목숨만큼 중요한 게 바로 가축이거든요.
거란이 미웠던 태조는 그 낙타를 만부교라는 다리 밑에 묶어놓고 굶겨 죽였습니다.
사랑이 깊어지면 증오가 되죠.
나중에 다루겠지만 이런 크고 작은 분쟁으로 거란은 고려를 침공하게 됩니다.
태조 왕죽음, 왕위 다툼이 시작
태조 왕건이 죽자 이미 예고되어 있던 문제가 빵빵 터집니다.
큰 아들 혜종이 왕위를 이어받았지만, 왕위를 노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던 거.
왕자들만 25명이라고 했죠? 부인이 29명인 데다가, 그 부인들의 아버지들은 호족 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강한 호족들이었다.
2대 왕인 혜종은 재위 2년 만에 34세의 젊은 나이에 의문사를 당하고요, 3대 왕인 정종도 내내 불안정한 왕 자리에서 덜덜 떨다가 3년 만에 병에 걸려 27세에 승하하게 됩니다.
왕건은 877년에 송악(지금의 개성 지방)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따라 궁예의 신하가 된 왕건은 전쟁터에 나가 공을 세우고 궁예로부터 신임을 얻으며 자신의 세력을 키워 갔다.
이후 궁예가 난폭한 행동을 일삼자 918년에 홍유, 신숭겸, 복지겸, 배현경 등의 장수들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웠다.
그는 후백제군에게 포위되는 위급한 상황에 빠졌고, 그의 부하인 신숭겸의 희생 덕분에 간신히 위기를 벗어났다.
이후 왕건은 후백제에게 계속 밀리다 930년에 일어난 고창(지금의 안동 지방)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면서 후삼국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935년에는 신라를 합병했고, 936년에는 후백제를 멸망시켜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했다.
후삼국 통일 후 왕건은 고려가 고구려를 이어 받은 나라임을 밝히고, 청천강 하류에서 영흥 지방까지 영토를 넓혔다.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에 의해 핍박받던 발해 유민들을 따뜻하게 맞아들이고 거란과는 외교를 끊었다.
왕건은 정치를 안정시키기 위해 지방의 토착 세력(호족)들과 혼인 관계를 맺고, 각 지방의 힘 있는 자들에게 왕씨 성을 내렸다.
불교를 적극 장려해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켰으며, 후대의 임금들이 나라를 잘 다스리도록 훈요 10조를 남기기도 했다.
왕건은 통일 후의 고려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호족들의 딸과 결혼을 하고, 자신의 성씨를 상으로 주는 등 지방의 토착 세력을 끌어안는 포용 정책을 펼쳤다. 이에 따라 전국 곳곳에 있는 호족들이 그의 신하가 되어 충성을 약속했다.
왕건은 943년에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무려 29명의 부인과 34명의 자식을 두었다. 왕건이 많은 부인을 둔 것은 지방 세력과 우호 관계를 맺기 위해서였다. 그들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만든 것이다. 이러한 혼인 정책은 왕건이 죽은 뒤 치열한 권력 다툼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태조 왕건이 죽자 이미 예고되어 있던 문제가 빵빵 터집니다.
큰 아들 혜종이 왕위를 이어받았지만, 왕위를 노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던 거.
왕자들만 25명이라고 했죠? 부인이 29명인 데다가, 그 부인들의 아버지들은 호족 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강한 호족들이었다.
2대 왕인 혜종은 재위 2년 만에 34세의 젊은 나이에 의문사를 당하고요, 3대 왕인 정종도 내내 불안정한 왕 자리에서 덜덜 떨다가 3년 만에 병에 걸려 27세에 승하하게 됩니다.
왕건은 877년에 송악(지금의 개성 지방)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따라 궁예의 신하가 된 왕건은 전쟁터에 나가 공을 세우고 궁예로부터 신임을 얻으며 자신의 세력을 키워 갔다.
이후 궁예가 난폭한 행동을 일삼자 918년에 홍유, 신숭겸, 복지겸, 배현경 등의 장수들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웠다.
그는 후백제군에게 포위되는 위급한 상황에 빠졌고, 그의 부하인 신숭겸의 희생 덕분에 간신히 위기를 벗어났다.
이후 왕건은 후백제에게 계속 밀리다 930년에 일어난 고창(지금의 안동 지방)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면서 후삼국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935년에는 신라를 합병했고, 936년에는 후백제를 멸망시켜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했다.
후삼국 통일 후 왕건은 고려가 고구려를 이어 받은 나라임을 밝히고, 청천강 하류에서 영흥 지방까지 영토를 넓혔다.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에 의해 핍박받던 발해 유민들을 따뜻하게 맞아들이고 거란과는 외교를 끊었다.
왕건은 정치를 안정시키기 위해 지방의 토착 세력(호족)들과 혼인 관계를 맺고, 각 지방의 힘 있는 자들에게 왕씨 성을 내렸다.
불교를 적극 장려해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켰으며, 후대의 임금들이 나라를 잘 다스리도록 훈요 10조를 남기기도 했다.
왕건은 통일 후의 고려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호족들의 딸과 결혼을 하고, 자신의 성씨를 상으로 주는 등 지방의 토착 세력을 끌어안는 포용 정책을 펼쳤다. 이에 따라 전국 곳곳에 있는 호족들이 그의 신하가 되어 충성을 약속했다.
왕건은 943년에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무려 29명의 부인과 34명의 자식을 두었다. 왕건이 많은 부인을 둔 것은 지방 세력과 우호 관계를 맺기 위해서였다. 그들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만든 것이다. 이러한 혼인 정책은 왕건이 죽은 뒤 치열한 권력 다툼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호족들의 딸과 결혼을 하고, 자신의 성씨를 상으로 주는 등 지방의 토착 세력을 끌어안는 포용 정책을 펼쳤다.
이에 따라 전국 곳곳에 있는 호족들이 그의 신하가 되어 충성을 약속했다.
왕건은 943년에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무려 29명의 부인과 34명의 자식을 두었다.
왕건이 많은 부인을 둔 것은 지방 세력과 우호 관계를 맺기 위해서였다.
그들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만든 것이다.
이러한 혼인 정책은 왕건이 죽은 뒤 치열한 권력 다툼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태조와 신혜왕후를 합장한 왕릉인 현릉(顯陵)
태조와 신혜왕후를 합장한 왕릉인 현릉(顯陵)
사성(賜姓)은 ‘성을 내린다’는 뜻이다.
지방의 유력한 호족에게 자신의 성인 ‘왕’ 씨 성을 하사하여, 왕족으로 신분을 높여주고 관직이나 토지를 주어 그들을 우대해주는 정책이다.
이 정책 역시 호족들이 태조를 적극 지지하여 나라를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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