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한민족이 35년간의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에서 광복을 되찾은 것을 기념하는 국경일.
광복절은 민족의 해방과 조국의 광복 또는 독립을 기념하는 법정공휴일이다.
국경일은 근대 국민국가의 보편적인 제도의 하나이다.
미군정은 1945년 10월 일제강점기의 경축일을 폐지하고 새롭게 축제일과 공휴일을 제정했다.
한국은 1948년 8월 15일 해방 3주년에 정부 수립을 선포하였다.
1949년 5월 국무회의에서 국경일을 제정했는데, 이때 8·15가 독립기념일로 제정되었으며, 1949년 10월 1일 법률 53호로 공포된 ‘국경일에관한법률’에 의해 광복절로 명칭이 수정되었다.
이후 지금까지 매년 8월 15일은 광복절로서 기념되고 있다.
한국 정부는 국경일과 함께 ‘각종기념일등에관한규정’을 1973년에 제정하여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1941년에는 미국을 공격하여 태평양전쟁을 일으켰지만,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한국은 이를 통해 광복을 되찾았고 일제에 의해 강제 동원된 한국인은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8·15의 의미는 해방, 독립, 광복의 세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1946년 8월 15일은 해방 1주년으로 비록 좌익과 우익으로 갈려 기념식이 치러졌으나, 전민족적 기념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하였다.
1948년 8월 15일에 한국은 정부수립을 선포함으로써 이날의 역사적 의의를 드높였다.
1949년 이후 8·15는 광복과 정부 수립의 중첩적 의미를 지닌 날이 되었다.
광복의 개념은 국권 상실 직후에 결성된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나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와 협의를 거쳐 성립한 서간도의 광복군사령부(光復軍司令部), 철혈광복단(鐵血光復團),
1936년의 조국광복회,
1940년 임시정부가 재조직한 광복군 등을 통해 지속되었다.
해방 이전 광복이라는 개념과 가장 친숙한 존재는 임시정부 산하에 설치된 한국광복군과 이들이 발간한 『광복』이라는 기관지였다.
광복군은 1940년에 창설되었고, 『광복』은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정훈처가 1941년에 창간한 광복군의 기관지였다.
1974년 기념식장에서 영부인 암살 사건이 발생하여 우여곡절을 겪었다.
기념식 장소는 중앙국립극장, 세종문화회관, 독립기념관 등으로 바뀌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일제의 강점으로부터 벗어난 날과 독립국으로서 정부가 수립된 날을 기념하기 위해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매년 8월 15일을 광복절이라 하고 국경일로 지정하였다.
'광복'이란 '빛을 되찾다'는 뜻으로서 잃었던 국권의 회복을 의미한다.
전국의 모든 가정에서 태극기를 게양하도록 권장하고, 정부는 저녁에 외교사절 등을 초청하여 경축연회를 베푼다.
광복회원 및 그 가족에 대한 우대조치로 8월 14~16일까지 전국의 철도·시내버스 및 수도권 지하철을 무임승차하게 하고, 고궁 및 공원도 무료입장하도록 한다.
광복절이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기념하는 시간적 의례 장치라면, 이에 상응하는 공간적 기억 장치는 독립기념관으로 1987년 8월 15일 개관하였다.
이와는 달리 일제 지배를 상징하는 구 조선총독부 건물은 1995년 8월 15일 철거되었다.
광복절은 민족의 분단된 상태를 의식하여 끊임없이 남북간에 민족 통일을 향한 회담이나 선언이 이루어지는 날이기도 하다.
북한은 8·15를 조국해방기념일로 지정하여 기념해왔는데, 최근에 광복이라는 용어를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1945년 8·15는 동아시아 현대사의 기점이다.
일본인에게 이날은 패전일 또는 종전일이다.
식민지 지배나 침략에 시달린 여러 민족들에게는 해방과 독립을 가져다준 경축일이다.
동아시아는 제국, 식민지 체제에서 새로운 독립국가의 형성과 함께 냉전 체제로 이행하기 시작하였다.
광복절은 조국의 광복을 위해 투쟁한 순국선열들을 추념하고 민족의 해방을 경축하는 국경일이다.
동아시아에서 일본제국주의 지배와 침략전쟁의 유산이 완전히 청산되지 않았고, 광복 60주년이 지나도록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는 상황은 광복절을 단지 과거의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는 날로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점차 한반도의 통일과 동아시아의 평화를 기원하는 기념일로서 의미가 커지고 있다.
한민족은 카이로 선언과 그것이 다시 확인된 포츠담 선언으로, 그리고 한민족의 오랜 투쟁을 통한 민족의 극복으로 일제의 학정으로부터 해방을 맞이하였으나, 경술국치를 재확인하여 결국 일본과 단절되었다.
광복회원 및 동반 가족에게는 광복절을 전후하여 전국의 철도·시내버스와 수도권 전철 무임승차, 고궁 및 공원 무료입장 혜택을 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민족해방 기념일'로 부르고 있는데, 그 내용은 "김일성 동지께서 항일의 혈전만리를 헤치시며 찾아주신 조국해방의 날"로 선전한다.
그날 중대 발표가 있으니 조선인들은 경청하라는 벽보가 나붙었으나 당시 라디오를 가진 조선인들은 많지 않았고,
히로히토 천황의 항복 발표 방송은 잡음이 심했고 어려운 한자가 섞여 있던 데다가,
결정적으로 이게 그 당시 쓰던 일본어도 아니고 일본 황족어로 나왔기 때문에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였다.
라디오로 방송된 문장과 개요가 당일의 신문에 기재되고 있었으므로, 일본 국민의 대부분이 패전을 이해했다.
8월 16일
다음날이 되자 비로소 조항 내용대로 형무소에 있었던 정치범과 경제범이 석방되기 시작했다.
경성(서울) 시민들은 어제 방송이 히로히토 천황의 항복 방송인 줄 알게 되었고, 해방을 환호하기 시작했다.
그대로 시민들은 계동에 있는 여운형의 집에 몰려가 연설을 해달라고 요청하였고, 여운형은 집 바로 뒤에 있는 휘문중학교 운동장으로 가서 해방을 맞이하는 연설을 한다
조선 민족의 해방의 날은 왔다. 어제 15일에 원등(엔도 류사쿠)이가 나를 불러가지고 '과거 두 민족이 합하였던 것이 조선에게 잘못됐던가는 다시 말하고 싶지 않다. 오늘날 나누는 때에 서로 좋게 나누는 것이 좋겠다. 오해로 피를 흘리고 불상사를 일으키지 않도록 민중을 지도하여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나는 다섯 가지 조건을 요구하였다.
우리 민족해방의 제일보를 내딛게 되었으니 우리가 지난날의 아프고 쓰리던 것을 이 자리에서 다 잊어버리고 이 땅에다 합리적· 이상적 낙원을 건설하여야 한다.
이때는 개인적 영웅주의는 단연 없애고 끝까지 집단적으로 일사불란의 단결로 나아가자! 머지않아 연합군 군대가 입성할 터이며, 그들이 오면 민족의 모양을 그대로 보게 될 터이니 우리들의 태도는 조금도 부끄럼이 없이 하자.
세계 각국은 우리들을 주시할 것이다.
백기를 든 일본의 심흉을 잘 살피자. 물론 우리는 통쾌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그들에 대하여 우리들의 아량을 보이자.
세계문화 건설에 백두산 밑에서 자라난 우리 민족의 힘을 바치자. 이미 전문·대학·중학생의 경비대원이 배치되었다.
이제 곧 여러 곳으로부터 훌륭한 지도자가 들어오게 될 터이니 그들이 올 때까지 우리들의 힘은 적으나마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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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중의 일각이 웅성거리는 가운데 여운형은 연설을 이어나갔으나 소련군의 경성 입성 소문은 순식간에 운동장을 한 바퀴 돌았다.
이에 흥분한 군중의 일부가 아우성치면서 교문 밖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여 여운형의 이날 연설은 중단되고 말았다.
기록으로 전하는 연설문도 반 토막뿐이다.
연설이 중단된 원인은 흔히 소련군의 경성 입성 소문 때문이었던 것으로만 알려졌으나 실상은 조선사람들의 습격을 두려워한 조선총독부 관료들이 전향자들을 동원해서 벌였던 공작이었다.
- 우리는 완전한 독립국의 건설을 기함.
- 우리는 전 민족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기본 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민주주의적 정권의 수립을 기함,
- 우리는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국내 질서를 자주적으로 유지하며 대중생활의 확보를 기함.
당시 상황
해방소식을 듣자 반일인사들을 옥에 가두고 고문했던 친일경찰들은 도망가기 바빴으며,일본군들은 미군에 의해 무장해제되는 9월 9일까지 시내를 돌아다니며 해방을 환호하는 군중들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지시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을 염려해 비행기로 경거망동을 삼가라는 건준 명의의 전단을 뿌렸다.
건준은 8월 말까지 전국에 145개 지부를 두고 일본인 자본가와 지주로부터 재산과 토지를 접수하여 조선인들에게 배분하는 것을 도와주었으며, 경찰들이 도망간 빈자리를 대신하여 전국의 뜻있는 청년들을 모집해 치안대를 결성해 치안을 유지하였다.
지방의 경우는 사회주의, 민족주의 등 이념을 떠나서 지방의 유력한 유지들과 지주들 역시 적극적으로 나서서 건준에 활동하기도 했다.
경성 같은 경우 조선군사령부의 방해로 2중 정부와 같은 혼란이 야기되기도 함
광복 이후
가혹한 압제로부터의 돌연한 광복은 과격한 흥분상태를 가져왔고 수많은 정당과 사회단체가 통일적 핵심체 없이 난립하게 되었다.
여운형 계통에서는 안재홍을 비롯한 일부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로서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했으며, 이때 잔류한 좌익세력은 소위 인민공화국이라는 정권조직을 급조하여 한민당과 민족주의자들의 지지를 받던 충칭의 임시정부와 대립할 기세를 취했다.
해외에서 독립운동 활동한 한국광복군은 미군첩보부대 OSS와 함께 국내 진입작전을 추진하던 이범석, 장준하, 김준엽, 노능서 등 4명의 광복군 요원이 1945년 8월 18일 낮 여의도비행장에 착륙하면서 해방된 조국 땅을 밟았다.
무장한 채 여의도에 착륙한 이들은 미군이 "휴전조약이 체결된 다음에 다시 오라."는 일본군의 협박에 굴복하는 바람에 다음날 오후 다시 중국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한국광복군을 비롯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5년 11월이 되어서야 귀국할 수 있었다.
국내에서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의 대립이 첨예해갈 때에 미·소 양군이 각기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삼아 남북으로 갈라서 1945년 9월 한반도에 진출했다.
남북한을 분할한 미·소 양군은 점령 지역에 군정을 실시하였다.
소련은 처음 조만식을 내세워 인민위원회를 조직게 하고 군정 하의 행정을 담당케 하였으나, 이어 김일성(金日成)을 위원장으로 하는 소위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조직, 공산주의 정치 체제를 갖추어 나갔다.
남한에 진주한 미군도 군정청을 설치하고 남한의 모든 행정을 담당하였다.
미 군정은 정치활동의 자유를 허용하여 모든 한국인 정당에 대한 절대 중립 태도를 언명했다.
미국 본토와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초대 임시정부 대통령인 이승만(李承晩)이 귀국하고, 중국과 만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김구를 비롯한 임정 요인들도 귀국하였으나 혼란은 여전하였다.
광복이란 대한제국이 붕괴되면서부터 1910년 국권을 빼앗긴 이후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 패하여 우리나라가 해방되던 날까지의 시기에 대해서만 적용되는 반일민족독립운동의 사상과 운동을 포괄하는 관념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일본의 패전이 8·15광복의 직접적인 계기이지만 1910년 8월 22 일 일본의 강제합병 이후 35년간 민족해방을 위한 독립운동은 계속 전개되었다.
1910년 이전에는 애국계몽운동·독립협회운동·반침략호국운동이, 이후에는 대한제국의 부활을 위한 복벽운동이 전개되었으며,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민 족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운동이 일어났다.
1919년 3·1운동에는 산발적인 독립운동이 집결되어 200만 명의 인원이 참가하였으며, 독립이 현대적 국민국가수립을 의미하게 되었다.
국내에서는 4월 23일 임시정부선포문을 발표하는 등 곳곳에 정부가 세워졌으며, 1920년대는 민족유일당운동이 전개되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1910년경 만주지방에서는 독립군의 무장항쟁이 활기를 띠었다.
간도 삼원보(三源堡)의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는 독립군 3,500명을 수료시키고, 김좌진(金佐鎭)은 간도에서 1,600여명의 독립군을 양성하였으며, 연길현(延吉縣)에서는 홍범도(洪範圖)의 대한독립군이 활동하였다.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 이후에는 독립군부대가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설립하였다.
1927년 2월 재통합을 위해 신간회가 조직되었으나 1931년 붕괴되었다.
해외에서는 정치단체가 1935년 7월 민족혁명당으로 통합되었으나, 1938년 좌익계 독립운동단체가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함으로써 민족진영과 좌익사회주의진영으로 양립되었다.
1940년 9월 충칭[重慶]에서는 광복군이 창설되어 대일무력항전을 전개하였다.
1941년 12월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이 1943년 들어 연합국의 우세가 확실해짐에 따라 연합국측은 전후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1943년 카이로회담을 열었으며, 한국에 대해서는 적당한 시기에 독립시킬 것을 결의하였다.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는 신탁통치가 거론되었으며, 1945년 7월 포츠담선언에서는 카이로선언이 재확인되었다.
1945년 8월 6일 일본의 나가사키[長崎]·히로시마[廣島]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8월 9일 얄타협정에 따라 러시아가 대일선전포고를 한데 이어 38선 전역을 점령하였다.
러시아의 남하를 우려한 미국이 38선분할안을 제기하였으며, 8월 15일 일본은 무조건 항복하였다.
9월 8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 하였으며, 한반도는 자유주의 미국과 사회주의 러시아가 점령하였다.
광복이 되었으나 국제적인 인정을 받지 못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부요인은 개인자격으로 귀국하였으며, 정계는 박헌영의 조선인민공화국, 여운형의 조선인민 당, 김성수(金性洙)의 한국민주당, 김구의 한국독립당으로 분열되었다.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삼상회의는 한국에 대해 미·영·러·중 4개국의 5년간 신탁 통치를 결정하였으며, 이에 대해 모든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반탁(反託)을 주장 하였으나, 1946년 1월 2일 공산당은 친탁으로 돌아섰다.
1946년 1월 16일 과 1947년 5월 21일 2차례의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으나 합의를 보지 못하고 10월 18일 무기휴회에 들어갔다.
미국은 한국문제를 UN(UnitedNations:국제연합)으로 이관하였으며, UN은 1948년 1월 23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을 파견하였다.
북한이 입국을 거부함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총 선거를 실시하고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를 수립하였다.
북한에서는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구성하고 급진적인 사회개혁을 추진하였으며, 1947년 2월 사실상의 정부인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수립하였다.
1948년 2월 임시헌법을 공포하고 9월 9일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 였다.
남북한에서 각기 단독 정부가 수립되려는 움직임이 계속되자, 1947년말부터 중도파 정당들을 중심으로 미·러양군의 철수와 남북정당들의 직 접적인 협상을 통한 자주적 남북통일정부수립운동이 추진되어 1948년 4월말 남 북조선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와 남북요인회담이 평양에서 개최되었으나 남북한 단독정부수립을 저지시키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8·15광복을 맞은 한국 민족의 역사적 과제는 일제식민통치의 잔재를 청산하고 자주독립국가의 토대를 세우는 것이었으나 미국과 러시아는 한국의 자주독립국 가수립을 원조하기 보다는 각기 자국의 영향력을 반영하는 국가를 건설하는 데 1차적인 목표를 두었으며, 국토분단으로 38선을 기준으로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진행되었다.
이 민족분열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6·25전쟁이 일어났으나 이것은 해결책이 되지 못하였으며, 평화적 민족통일이 8·15광복 이후 우리민족의 과제로 남아 있다.
1945년 8월 15일, 라디오에서는 일본 천황의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한다는 내용이었다.
일본의 식민 통치를 받던 한반도에도 광복의 기쁨이 찾아왔다. 여기서 ‘광복’이란 빼앗긴 주권을 다시 찾는다는 뜻이다.
비록 일본의 항복과 동시에 완전한 독립 국가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우리 민족은 일제의 식민 지배에서 비로소 벗어날 수 있었다.
8 · 15 광복은 직접적으로는 연합군이 일본에 승리하면서 얻어진 결과이지만, 우리 민족의 끈질긴 독립운동도 큰 역할을 했다.
1919년의 3 · 1 운동은 우리 민족의 강한 독립 의지를 드러냈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외교와 한국광복군의 결성, 만주에서의 무장 독립 전쟁, 연해주와 미국에서 있었던 독립운동 등은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국제 사회에 널리 알렸다.
민족 독립 활동은 연합군 진영의 나라들에게도 큰 감동을 주었다.
그 결과,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열린 카이로 회담에서 한반도의 독립 문제가 의논되었다.
미국의 루스벨트, 중국의 장제스, 영국의 처칠 등의 대표들은 “한국 민중의 노예 상태에 유의해 적당한 절차를 밟아 한국을 자유 독립시키기로 한다.”는 결의 내용을 발표했다.
독일이 연합군에 항복한 뒤 열린 포츠담 회담에서 우리나라의 독립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우리나라는 마침내 독립을 이룰 수 있었다.
일본의 항복으로 식민 지배에서 벗어났지만 우리나라는 곧바로 독립 국가가 되지는 못했다.
한반도에서 일본이 물러남과 동시에 외국 군대의 군정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쪽에는 미군, 북쪽에는 소련군이 각각 들어왔다.
공식적인 독립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임시로 우리나라를 다스렸는데, 우리 민족은 끝내 통일 정부를 세우지 못하고 남쪽과 북쪽에 각각의 정부를 세운 뒤 분단 국가가 되었다.
8 · 15 광복은 우리 민족이 오랫동안 바라온 독립 국가를 세울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 주었다.
이 때문에 우리 민족은 매우 기뻐했는데, 안타깝게도 통일 정부를 이루지는 못했다.
미군이 다스리는 남쪽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소련군이 다스리는 북쪽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들어서면서 분단 국가가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은 끝이 나고, 우리나라는 독립하게 되었다.
‘광복’이란 ‘빛을 되찾다.’라는 뜻으로,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 잃었던 국권을 회복한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