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3일 금요일

광복절 , 光復節 .

광복절 , 光復節 .


광복절8월 15일달력보기

1945년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광복된 것을 기념하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경축하는 국경일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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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기록원독립기념관문화재청

1945년 8월 15일, 한민족이 35년간의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에서 광복을 되찾은 것을 기념하는 국경일. 
광복절은 민족의 해방과 조국의 광복 또는 독립을 기념하는 법정공휴일이다.


국경일은 근대 국민국가의 보편적인 제도의 하나이다. 
미군정은 1945년 10월 일제강점기의 경축일을 폐지하고 새롭게 축제일과 공휴일을 제정했다. 
한국은 1948년 8월 15일 해방 3주년에 정부 수립을 선포하였다. 

1949년 5월 국무회의에서 국경일을 제정했는데, 이때 8·15가 독립기념일로 제정되었으며, 1949년 10월 1일 법률 53호로 공포된 ‘국경일에관한법률’에 의해 광복절로 명칭이 수정되었다. 


이후 지금까지 매년 8월 15일은 광복절로서 기념되고 있다. 
한국 정부는 국경일과 함께 ‘각종기념일등에관한규정’을 1973년에 제정하여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1941년에는 미국을 공격하여 태평양전쟁을 일으켰지만,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한국은 이를 통해 광복을 되찾았고 일제에 의해 강제 동원된 한국인은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8·15의 의미는 해방, 독립, 광복의 세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1946년 8월 15일은 해방 1주년으로 비록 좌익과 우익으로 갈려 기념식이 치러졌으나, 전민족적 기념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하였다. 
1948년 8월 15일에 한국은 정부수립을 선포함으로써 이날의 역사적 의의를 드높였다. 
1949년 이후 8·15는 광복과 정부 수립의 중첩적 의미를 지닌 날이 되었다.

광복의 개념은 국권 상실 직후에 결성된 대한광복회()나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협의를 거쳐 성립한 서간도의 광복군사령부(), 철혈광복단(), 
1936년의 조국광복회, 
1940년 임시정부가 재조직한 광복군 등을 통해 지속되었다. 

해방 이전 광복이라는 개념과 가장 친숙한 존재는 임시정부 산하에 설치된 한국광복군과 이들이 발간한 『광복』이라는 기관지였다. 
광복군은 1940년에 창설되었고, 『광복』은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정훈처가 1941년에 창간한 광복군의 기관지였다.
 1974년 기념식장에서 영부인 암살 사건이 발생하여 우여곡절을 겪었다. 
기념식 장소는 중앙국립극장, 세종문화회관, 독립기념관 등으로 바뀌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어 한국이 독립하였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일제의 강점으로부터 벗어난 날과 독립국으로서 정부가 수립된 날을 기념하기 위해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매년 8월 15일을 광복절이라 하고 국경일로 지정하였다. 

'광복'이란 '빛을 되찾다'는 뜻으로서 잃었던 국권의 회복을 의미한다.
이 날은 대통령이 참석하는 독립기념관의 경축식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기념 행사를 거행한다. 

전국의 모든 가정에서 태극기를 게양하도록 권장하고, 정부는 저녁에 외교사절 등을 초청하여 경축연회를 베푼다. 

기념식에서는 정인보가 작사하고, 윤용하가 작곡한 〈광복절의 노래〉가 연주된다. 

광복회원 및 그 가족에 대한 우대조치로 8월 14~16일까지 전국의 철도·시내버스 및 수도권 지하철을 무임승차하게 하고, 고궁 및 공원도 무료입장하도록 한다.




광복절이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기념하는 시간적 의례 장치라면, 이에 상응하는 공간적 기억 장치는 독립기념관으로 1987년 8월 15일 개관하였다. 

이와는 달리 일제 지배를 상징하는 구 조선총독부 건물은 1995년 8월 15일 철거되었다.

광복절은 민족의 분단된 상태를 의식하여 끊임없이 남북간에 민족 통일을 향한 회담이나 선언이 이루어지는 날이기도 하다. 

북한은 8·15를 조국해방기념일로 지정하여 기념해왔는데, 최근에 광복이라는 용어를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1945년 8·15는 동아시아 현대사의 기점이다. 
일본인에게 이날은 패전일 또는 종전일이다. 

식민지 지배나 침략에 시달린 여러 민족들에게는 해방과 독립을 가져다준 경축일이다. 

동아시아는 제국, 식민지 체제에서 새로운 독립국가의 형성과 함께 냉전 체제로 이행하기 시작하였다.


광복절은 조국의 광복을 위해 투쟁한 순국선열들을 추념하고 민족의 해방을 경축하는 국경일이다. 


동아시아에서 일본제국주의 지배와 침략전쟁의 유산이 완전히 청산되지 않았고, 광복 60주년이 지나도록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는 상황은 광복절을 단지 과거의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는 날로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점차 한반도의 통일과 동아시아의 평화를 기원하는 기념일로서 의미가 커지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은 1943년에 접어들면서부터 점차 연합군 측에 유리하게 되어, 그해 11월 말에 미국·영국·중화민국 3국은 소위 카이로 선언을 발표했다. 


이어 1945년 5월에 나치 독일이 항복하였고, 8월 8일에는 미국과 영국소비에트 연방이 모여 포츠담 선언을 발표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드디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하였는데 북한의 청진시에서는 아직까지도 소련과 일본이 서로 치열한 전투를 계속 하고 있었다. 


한민족은 카이로 선언과 그것이 다시 확인된 포츠담 선언으로, 그리고 한민족의 오랜 투쟁을 통한 민족의 극복으로 일제의 학정으로부터 해방을 맞이하였으나, 경술국치를 재확인하여 결국 일본과 단절되었다.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 대한 법률〉에 따라 국경일로 지정되어 대한민국에서는 전국적으로 각종 경축 행사가 거행되며, 공공기관, 가정에서는 태극기를 달아야 한다.


광복회원 및 동반 가족에게는 광복절을 전후하여 전국의 철도·시내버스와 수도권 전철 무임승차, 고궁 및 공원 무료입장 혜택을 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민족해방 기념일'로 부르고 있는데, 그 내용은 "김일성 동지께서 항일의 혈전만리를 헤치시며 찾아주신 조국해방의 날"로 선전한다.



그날 정오에 히로히토 천황의 항복 방송이 라디오로 중계되었다.
8월 16일 오전 9시 마포형무소 앞[3]

그날 중대 발표가 있으니 조선인들은 경청하라는 벽보가 나붙었으나 당시 라디오를 가진 조선인들은 많지 않았고, 

히로히토 천황의 항복 발표 방송은 잡음이 심했고 어려운 한자가 섞여 있던 데다가, 

결정적으로 이게 그 당시 쓰던 일본어도 아니고 일본 황족어로 나왔기 때문에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였다. 

라디오로 방송된 문장과 개요가 당일의 신문에 기재되고 있었으므로, 일본 국민의 대부분이 패전을 이해했다.
그 사이에 소련은 일본과 청진시에서 전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8월 16일

다음날이 되자 비로소 조항 내용대로 형무소에 있었던 정치범과 경제범이 석방되기 시작했다. 

경성(서울) 시민들은 어제 방송이 히로히토 천황의 항복 방송인 줄 알게 되었고, 해방을 환호하기 시작했다. 

그대로 시민들은 계동에 있는 여운형의 집에 몰려가 연설을 해달라고 요청하였고, 여운형은 집 바로 뒤에 있는 휘문중학교 운동장으로 가서 해방을 맞이하는 연설을 한다


조선 민족의 해방의 날은 왔다.

어제 15일에 원등(엔도 류사쿠)이가 나를 불러가지고 '과거 두 민족이 합하였던 것이 조선에게 잘못됐던가는 다시 말하고 싶지 않다.
오늘날 나누는 때에 서로 좋게 나누는 것이 좋겠다.


오해로 피를 흘리고 불상사를 일으키지 않도록 민중을 지도하여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나는 다섯 가지 조건을 요구하였다.

우리 민족해방의 제일보를 내딛게 되었으니 우리가 지난날의 아프고 쓰리던 것을 이 자리에서 다 잊어버리고 이 땅에다 합리적· 이상적 낙원을 건설하여야 한다. 

이때는 개인적 영웅주의는 단연 없애고 끝까지 집단적으로 일사불란의 단결로 나아가자! 머지않아 연합군 군대가 입성할 터이며, 그들이 오면 민족의 모양을 그대로 보게 될 터이니 우리들의 태도는 조금도 부끄럼이 없이 하자. 

세계 각국은 우리들을 주시할 것이다. 
백기를 든 일본의 심흉을 잘 살피자. 물론 우리는 통쾌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그들에 대하여 우리들의 아량을 보이자.

세계문화 건설에 백두산 밑에서 자라난 우리 민족의 힘을 바치자. 이미 전문·대학·중학생의 경비대원이 배치되었다. 

이제 곧 여러 곳으로부터 훌륭한 지도자가 들어오게 될 터이니 그들이 올 때까지 우리들의 힘은 적으나마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1945년 8월 16일, 경성 계동 휘문고보의 군중 속 여운형. 여운형은 이곳에서 연설하였다.

연설 도중에 '소련군이 서울역에 온다'는 소문이 나돌자 수많은 시민이 연설 도중 청중들 사이에서 고함을 외쳤다. 

청중의 일각이 웅성거리는 가운데 여운형은 연설을 이어나갔으나 소련군의 경성 입성 소문은 순식간에 운동장을 한 바퀴 돌았다. 

이에 흥분한 군중의 일부가 아우성치면서 교문 밖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여 여운형의 이날 연설은 중단되고 말았다. 
기록으로 전하는 연설문도 반 토막뿐이다. 

연설이 중단된 원인은 흔히 소련군의 경성 입성 소문 때문이었던 것으로만 알려졌으나 실상은 조선사람들의 습격을 두려워한 조선총독부 관료들이 전향자들을 동원해서 벌였던 공작이었다. 

여운형은 기존에 자신이 1944년 8월에 결성하여 운영했던 비밀결사 조직인 조선건국동맹을 기본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조직하였고 YMCA 건물에서 건준 강령을 발표하였다.
  1. 우리는 완전한 독립국의 건설을 기함.
  2. 우리는 전 민족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기본 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민주주의적 정권의 수립을 기함,
  3. 우리는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국내 질서를 자주적으로 유지하며 대중생활의 확보를 기함.


당시 상황

해방소식을 듣자 반일인사들을 옥에 가두고 고문했던 친일경찰들은 도망가기 바빴으며,일본군들은 미군에 의해 무장해제되는 9월 9일까지 시내를 돌아다니며 해방을 환호하는 군중들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지시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을 염려해 비행기로 경거망동을 삼가라는 건준 명의의 전단을 뿌렸다.


건준은 8월 말까지 전국에 145개 지부를 두고 일본인 자본가와 지주로부터 재산과 토지를 접수하여 조선인들에게 배분하는 것을 도와주었으며, 경찰들이 도망간 빈자리를 대신하여 전국의 뜻있는 청년들을 모집해 치안대를 결성해 치안을 유지하였다. 


지방의 경우는 사회주의, 민족주의 등 이념을 떠나서 지방의 유력한 유지들과 지주들 역시 적극적으로 나서서 건준에 활동하기도 했다.

경성 같은 경우 조선군사령부의 방해로 2중 정부와 같은 혼란이 야기되기도 함



광복 이후

가혹한 압제로부터의 돌연한 광복은 과격한 흥분상태를 가져왔고 수많은 정당과 사회단체가 통일적 핵심체 없이 난립하게 되었다. 

임시 정부가 곧 귀국하여 정권을 담당할 것을 기대하는 송진우 계통과 연합군이 진주할 때까지 민족대표기관을 설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여운형 계통과의 행동이 분열된 것이다. 

여운형 계통에서는 안재홍을 비롯한 일부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로서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했으며, 이때 잔류한 좌익세력은 소위 인민공화국이라는 정권조직을 급조하여 한민당과 민족주의자들의 지지를 받던 충칭의 임시정부와 대립할 기세를 취했다.

해외에서 독립운동 활동한 한국광복군은 미군첩보부대 OSS와 함께 국내 진입작전을 추진하던 이범석장준하김준엽노능서 등 4명의 광복군 요원이 1945년 8월 18일 낮 여의도비행장에 착륙하면서 해방된 조국 땅을 밟았다. 

무장한 채 여의도에 착륙한 이들은 미군이 "휴전조약이 체결된 다음에 다시 오라."는 일본군의 협박에 굴복하는 바람에 다음날 오후 다시 중국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한국광복군을 비롯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5년 11월이 되어서야 귀국할 수 있었다.

국내에서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의 대립이 첨예해갈 때에 미·소 양군이 각기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삼아 남북으로 갈라서 1945년 9월 한반도에 진출했다. 
남북한을 분할한 미·소 양군은 점령 지역에 군정을 실시하였다. 

소련은 처음 조만식을 내세워 인민위원회를 조직게 하고 군정 하의 행정을 담당케 하였으나, 이어 김일성(金日成)을 위원장으로 하는 소위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조직, 공산주의 정치 체제를 갖추어 나갔다. 

남한에 진주한 미군도 군정청을 설치하고 남한의 모든 행정을 담당하였다. 

미 군정은 정치활동의 자유를 허용하여 모든 한국인 정당에 대한 절대 중립 태도를 언명했다. 

하여 송진우 등우 '한국민주당', 안재홍 등의 '국민당', 여운형 등의 '조선인민당', 박헌영(朴憲永) 등의 '조선공산당'을 위시한 50여 개의 정당이 난립하였다. 

미국 본토와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초대 임시정부 대통령인 이승만(李承晩)이 귀국하고, 중국과 만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김구를 비롯한 임정 요인들도 귀국하였으나 혼란은 여전하였다.


광복이란 대한제국이 붕괴되면서부터 1910년 국권을 빼앗긴 이후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 패하여 우리나라가 해방되던 날까지의 시기에 대해서만 적용되는 반일민족독립운동의 사상과 운동을 포괄하는 관념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일본의 패전이 8·15광복의 직접적인 계기이지만 1910년 8월 22 일 일본의 강제합병 이후 35년간 민족해방을 위한 독립운동은 계속 전개되었다. 

1910년 이전에는 애국계몽운동·독립협회운동·반침략호국운동이, 이후에는 대한제국의 부활을 위한 복벽운동이 전개되었으며,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민 족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운동이 일어났다.


1919년 3·1운동에는 산발적인 독립운동이 집결되어 200만 명의 인원이 참가하였으며, 독립이 현대적 국민국가수립을 의미하게 되었다. 

3·1운동 직전 2월에는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국민의회가, 3·1운동 직후 4월 13일에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국내에서는 4월 23일 임시정부선포문을 발표하는 등 곳곳에 정부가 세워졌으며, 1920년대는 민족유일당운동이 전개되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1910년경 만주지방에서는 독립군의 무장항쟁이 활기를 띠었다. 

간도 삼원보()의 신흥무관학교()는 독립군 3,500명을 수료시키고, 김좌진()은 간도에서 1,600여명의 독립군을 양성하였으며, 연길현()에서는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 활동하였다.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 이후에는 독립군부대가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설립하였다. 

국내의 광복운동은 사회운동의 형태를 취하였으며, 1917년 민족주의노선과 사회주의혁명노선으로 양분되었다. 

1927년 2월 재통합을 위해 신간회가 조직되었으나 1931년 붕괴되었다.


해외에서는 정치단체가 1935년 7월 민족혁명당으로 통합되었으나, 1938년 좌익계 독립운동단체가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함으로써 민족진영과 좌익사회주의진영으로 양립되었다. 

1939년 김구()와 김원봉()이 민족적 통일기구로 전국연합전선협회를 성립시켰으며, 1940년 한국독립당()으로 발전하였다. 

1940년 9월 충칭[]에서는 광복군이 창설되어 대일무력항전을 전개하였다.


1941년 12월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이 1943년 들어 연합국의 우세가 확실해짐에 따라 연합국측은 전후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1943년 카이로회담을 열었으며, 한국에 대해서는 적당한 시기에 독립시킬 것을 결의하였다.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는 신탁통치가 거론되었으며, 1945년 7월 포츠담선언에서는 카이로선언이 재확인되었다. 

1945년 8월 6일 일본의 나가사키[]·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8월 9일 얄타협정에 따라 러시아가 대일선전포고를 한데 이어 38선 전역을 점령하였다. 

러시아의 남하를 우려한 미국이 38선분할안을 제기하였으며, 8월 15일 일본은 무조건 항복하였다. 

9월 8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 하였으며, 한반도는 자유주의 미국과 사회주의 러시아가 점령하였다.


광복이 되었으나 국제적인 인정을 받지 못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부요인은 개인자격으로 귀국하였으며, 정계는 박헌영의 조선인민공화국, 여운형의 조선인민 당, 김성수()의 한국민주당, 김구의 한국독립당으로 분열되었다.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삼상회의는 한국에 대해 미·영·러·중 4개국의 5년간 신탁 통치를 결정하였으며, 이에 대해 모든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반탁()을 주장 하였으나, 1946년 1월 2일 공산당은 친탁으로 돌아섰다.


1946년 1월 16일 과 1947년 5월 21일 2차례의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으나 합의를 보지 못하고 10월 18일 무기휴회에 들어갔다. 

미국은 한국문제를 UN(UnitedNations:국제연합)으로 이관하였으며, UN은 1948년 1월 23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을 파견하였다.  

북한이 입국을 거부함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총 선거를 실시하고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를 수립하였다.


북한에서는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구성하고 급진적인 사회개혁을 추진하였으며, 1947년 2월 사실상의 정부인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수립하였다. 

1948년 2월 임시헌법을 공포하고 9월 9일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 였다. 

남북한에서 각기 단독 정부가 수립되려는 움직임이 계속되자, 1947년말부터 중도파 정당들을 중심으로 미·러양군의 철수와 남북정당들의 직 접적인 협상을 통한 자주적 남북통일정부수립운동이 추진되어 1948년 4월말 남 북조선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와 남북요인회담이 평양에서 개최되었으나 남북한 단독정부수립을 저지시키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8·15광복을 맞은 한국 민족의 역사적 과제는 일제식민통치의 잔재를 청산하고 자주독립국가의 토대를 세우는 것이었으나 미국과 러시아는 한국의 자주독립국 가수립을 원조하기 보다는 각기 자국의 영향력을 반영하는 국가를 건설하는 데 1차적인 목표를 두었으며, 국토분단으로 38선을 기준으로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진행되었다. 

이 민족분열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6·25전쟁이 일어났으나 이것은 해결책이 되지 못하였으며, 평화적 민족통일이 8·15광복 이후 우리민족의 과제로 남아 있다.



8·15광복 본문 이미지 1




1945년 8월 15일, 라디오에서는 일본 천황의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한다는 내용이었다. 

일본의 식민 통치를 받던 한반도에도 광복의 기쁨이 찾아왔다. 여기서 ‘광복’이란 빼앗긴 주권을 다시 찾는다는 뜻이다. 

비록 일본의 항복과 동시에 완전한 독립 국가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우리 민족은 일제의 식민 지배에서 비로소 벗어날 수 있었다.
8 · 15 광복은 직접적으로는 연합군이 일본에 승리하면서 얻어진 결과이지만, 우리 민족의 끈질긴 독립운동도 큰 역할을 했다. 

1919년의 3 · 1 운동은 우리 민족의 강한 독립 의지를 드러냈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외교와 한국광복군의 결성, 만주에서의 무장 독립 전쟁, 연해주와 미국에서 있었던 독립운동 등은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국제 사회에 널리 알렸다.

민족 독립 활동은 연합군 진영의 나라들에게도 큰 감동을 주었다. 
그 결과,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열린 카이로 회담에서 한반도의 독립 문제가 의논되었다. 

미국의 루스벨트, 중국의 장제스, 영국의 처칠 등의 대표들은 “한국 민중의 노예 상태에 유의해 적당한 절차를 밟아 한국을 자유 독립시키기로 한다.”는 결의 내용을 발표했다. 

독일이 연합군에 항복한 뒤 열린 포츠담 회담에서 우리나라의 독립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우리나라는 마침내 독립을 이룰 수 있었다.





일본의 항복으로 식민 지배에서 벗어났지만 우리나라는 곧바로 독립 국가가 되지는 못했다. 

한반도에서 일본이 물러남과 동시에 외국 군대의 군정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쪽에는 미군, 북쪽에는 소련군이 각각 들어왔다. 

공식적인 독립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임시로 우리나라를 다스렸는데, 우리 민족은 끝내 통일 정부를 세우지 못하고 남쪽과 북쪽에 각각의 정부를 세운 뒤 분단 국가가 되었다.


8 · 15 광복은 우리 민족이 오랫동안 바라온 독립 국가를 세울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 주었다. 
이 때문에 우리 민족은 매우 기뻐했는데, 안타깝게도 통일 정부를 이루지는 못했다. 
미군이 다스리는 남쪽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소련군이 다스리는 북쪽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들어서면서 분단 국가가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은 끝이 나고, 우리나라는 독립하게 되었다. 

‘광복’이란 ‘빛을 되찾다.’라는 뜻으로,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 잃었던 국권을 회복한 것을 의미한다.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8월 15일을 광복절이라 하고 국경일로 지정하였다.




태극기 이야기

2018년 8월 2일 목요일

부여 , 夫餘. 1

부여 , 夫餘. 1

부여인은 농업을 영위해 오곡을 생산하였다. 
목축도 성행해 말·소·돼지·개 등이 주요한 가축이었다. 
부여의 대평원에서 생산되는 말은 유명하였다.
농경민이면서도 기마 풍습이 일반화되어 있었고 훌륭한 말을 산출했으므로 부여족은 상대적으로 우월한 전투력을 지닐 수 있었다. 

부여족의 일파가 남으로 이주해 고구려나 백제 건국의 중심세력이 되었던 것도 이러한 면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부여인들은 흰색을 숭상해 흰옷을 즐겨 입었다. 
상복도 남녀 모두 흰옷이었다. 
장례는 5월장이었다. 
여름에는 얼음을 써서 시체의 부패를 방지하고자 하였다. 

혼인을 할 때에는 남자집에서 여자집에 혼납금()으로 소와 말을 보내었다.
남녀가 간음을 하거나 부인이 질투를 하면 모두 죽였다. 
부인의 질투를 미워해 죽인 뒤 시체를 산 위에 가져다가 썩게 내버려두었다가 여인의 친정에서 딸의 시체를 거두어 가려면 남자집에 소와 말을 보내야 하는데, 이는 혼인 때의 혼납금을 되돌려주는 형식이었다.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취하였다. 

취수혼(levirate)이 선호혼()으로 널리 행해지고 있었음은 당시 부여사회에서 친족집단의 공동체적 성격이 강하게 유지되고 있었음을 반영해주는 것이다. 
고구려에서도 취수혼이 성행하였는데 부여의 상황과 비슷한 면을 지녔다.
12월에 영고()라는 축제를 거행하였다. 

12월은 본격적인 사냥철이 시작되는 시기이다. 이 때에 축제를 거행함은 공동수렵을 행하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축제 때에는 노예나 외래민을 제외한 전 부여의 읍락민들이 참여했다.
축제기간 중 밤낮으로 술 마시고 노래하며 춤을 추고 즐기면서 서로간의 결속을 도모하였다. 
이 때 죄수들에 대한 재판과 처벌을 단행했고, 일부 가벼운 죄를 범한 자들은 석방하였다.

수도에 전국의 가()들이 모여 왕을 중심으로 하늘에 제사지내고 지난 한해를 결산하며 주요 문제를 토의하여, 국가의 통합력을 강화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전국에 걸친 지배조직이 미비하고, 지방 각지에서 읍락들을 지배하고 있던 가()들의 자치력이 강하던 상황에서, 영고는 비단 민속적인 행사로서 뿐 아니라 정치적인 통합기능도 매우 컸던 것으로 여겨진다.

부여국의 국가구조에서 기본 단위를 이루었던 것이 읍락이다. 
각 읍락에는 우두머리()인 호민이 있으며 그 밑에 일반민이 있었다. 

『삼국지』 동이전에서는 읍락민이 하호()로서 모두 노복과 같은 처지에 있다고 기술하였다. 
하호는 당시 중국에서 빈한한 소작농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 기록에 의거해 부여의 읍락민을 노예나 농노로 규정하는 설들이 있어왔다.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이 시기 부여의 읍락에는 철제 농기구가 부족하고 특히 보습과 같은 대형의 농기구는 주로 호민이 소유하고 있었다.

농업생산력이 상대적으로 낮아 수확이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읍락민은 농경 등의 일상생활을 호민의 주재 하에서 영위하고 통제를 받았다.

부여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던 위나라 사람이 보았을 때, 
가난하고 열세한 읍락민의 외형상의 모습이 호민의 소작농이나 노복처럼 여겨져 그런 기술을 했던 것이다. 
부여의 하호는 노예나 농노가 아니라 읍락의 일반민이었고, 호민은 읍락의 거수()였다.

당시의 읍락에는 촌락공동체적 요소가 상당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호민은 기존의 촌락공동체적 요소를 활용함을 통해 우월적 지위를 강화해나갔고, 다른 한편에는 읍락민들도 전래의 관습과 공동체적인 상호부조에 의지해 그들의 삶을 유지해나갔던 상황으로 여겨진다.

부여의 읍락민은 모두 동일한 처지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읍락민이 호민의 통제 하에 있었지만, 그들 내에서도 자영농민층과 빈농층의 분화가 진전되고 있었다. 

전쟁 때에는 스스로 무장해 참전했던 이들과 그렇지 못해 양식을 운반하는 노무부대로 참가하는 이들로 나뉘어졌음은 그런 면을 말해준다.
이러한 읍락을 수개 내지 수십개를 지배했던 것이 가()들이다. 

가들과 그 일족은 지배계급으로서, 왕의 일정한 통제를 받았다. 
각기 지배 하에 있는 읍락들을 자치적으로 통할했으며, 이들 읍락으로부터 징수한 공납으로 생활하였다.
이들은 외국에 나갈 때 수를 놓은 비단옷에 모피·갓을 쓰고 금은으로 장식을 하며 호사로움을 과시하였다. 

전체적으로 가 계층의 부력은 상당했고, 그들에 의한 부의 집중이 진전되고 있었다.
일반민 아래 노예가 존재하였다. 

가들과 호민들은 상당수의 노예를 소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장례에 때로는 백수십인을 죽여 순장()을 하기도 하였다. 
순장된 노예는 전쟁포로 노예가 많았을 것이나 가내노예도 상당했을 것이다.

노예에는 전쟁포로 출신뿐 아니라, 형벌노예와 부채노예도 있었다. 
부여의 법에 살인자는 죽이고 그 가족을 노예로 삼았다. 
절도를 할 경우 12배로 배상하게 하였으며, 변상이 여의치 않으면 노예로 삼았을 것이다. 

빈한한 읍락민 중 일부는 점차 가나 호민의 예속민으로 전락해갔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보면 2세기 후반에서 3세기 전반의 부여의 사회는 제가층(), 호민층, 스스로 무장할 수 있는 읍락민, 빈한한 읍락민, 노비 등 대략 다섯층으로 구성되어있다고 볼 수 있다.

부여사회는 공동체적 유제가 잔존해 있는 가운데 사회분화가 진전되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정치체제에서도 연맹체적 성격이 강인하게 존재하는 가운데서 왕권이 점차 강화되어가는 추세를 보였음과 서로 연관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나라 소멸 과정

3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부여국은 격심한 변화를 맞게 되었다. 
이는 근본적으로 주변정세가 급속히 변화함에 따른 것이다.
부여는 지형상으로 대평원지대에 자리잡고 있어 외침을 방어하는데 취약점이 있었다. 
삼림민·유목민·농경민이 서로 교차하는 중간지대에 있어 주변세력의 변화에 따른 영향을 민감하게 받았다.

3세기 종반 이후 중국의 통일세력이 무너지고 유목민세력이 흥기해 동아시아 전체가 격동의 시기에 접어들게 됨에 따라 더욱 그러해졌다. 
남으로부터 가해지는 고구려의 압력과 서쪽의 선비족의 세력 팽창에 의해 여러 차례 공략을 당하였다.

285년에는 선비족 모용씨()에 의해 수도가 함락되고 1만여 인이 포로로 잡혀갔다. 
이 때 국왕 의려는 자살했고, 부여왕실은 두만강 유역의 북옥저 방면으로 피난하였다.
이어 의라()가 왕위를 계승한 뒤 진()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 선비족을 격퇴하고 나라를 회복하였다. 

북옥저로 피난했던 부여인들 중 일부는 본국으로 돌아갔으나, 일부는 그대로 머물어 토착하였다.
길림 방면의 부여는 그 뒤 계속 모용씨의 침공을 받게 되었다. 
많은 수의 부여인들이 포로가 되어 북중국에 노예로 전매되어 갔다.
당시 부여는 진나라가 쇠망함에 따라 외부로부터의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고구려의 공략을 받자 더 이상 길림 일대의 원 중심지를 유지할 수 없게 되어 서쪽으로 근거지를 옮기게 되었다.
346년 서로부터 선비족 모용씨가 세운 전연()의 공격을 받아 대타격을 입었다. 
이 때 국왕 현() 이하 5만여 명이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다. 
그 뒤 쇠약해진 부여는 마침내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고구려는 부여에 군대를 주둔시켜 이를 통할하였다. 
부여왕실은 고구려의 지배하에서 고구려의 부여지역 지배를 위한 방편으로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북옥저 방면에 정착했던 부여인들은 본국과 분리되어 점차 자립하게 되었다. 
이를 고구려인들이 동부여라고 했고, 길림 및 장춘·농안 방면의 부여를 북부여라고 불렀다. 
동부여는 410년광개토왕에 의해 병합되었다.

북부여는 457년 북위에 조공을 하여 한 차례 국제무대에 얼굴을 내밀었다. 
이는 일시적인 시도에 불과했고, 고구려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을 회복할 수 없었다.

5세기 말 동만주 삼림지대에 거주하던 물길()이 흥기해 고구려와 상쟁을 벌이고, 동류 송화강()을 거슬러 세력을 뻗쳐나갔다.
이에 부여는 그 침략을 받게 되고, 부여왕실은 안전한 고구려 내지로 옮겨지게 되었다. 
부여지역의 통제를 위해 존속시켰던 부여왕실의 명맥은 그 지역을 상실하면서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되어, 마침내 494년(문자왕 3)에 소멸되었다.


백제부여"
‘부여’ 하면 우리는 백제를 떠올리게 된다. 

부드럽고 풍요하고 원만하고 아름다운 문화를 일구었던 나라, 
강성해지는 고구려에 밀려서 점점 남하하다가 마침내는 나당연합군의 말발굽 아래 스러져 간 나라, 
황산벌에서 5천 결사대와 함께 목숨을 바친 계백, 
낙화암에서 떨어진 삼천 궁녀, 
이런 것이 우리가 백제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다.

백제 사람들이 600년 넘는 역사 속에, 적어도 가장 찬란했던 123년을 일구어냈던 부여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알 수 있을 만한 흔적들은 너무도 적다. 



백제 멸망 이후에 이땅 사람들은 계속 홀대를 받으며 살아왔다. 
부여를 비롯한 옛 백제 지역에는 이렇다 할 통일신라 유물이나 유적조차 없으니, 
지방적인 문화마저 발현될 수 없을 만큼 억눌렸던 것. 
고려 시대에 와서야 이땅 사람들은 소박한 형태로나마 조금씩 자신들의 문화를 드러내게 되었다.

역사책에도 백제의 모습은 파편적으로 남아 있을 따름이니 백제 역사 연구는 줄기를 제대로 잡을 수 없을 만큼 그 진폭이 크다. 

시조에 대해서도 비류냐 온조냐 또는 그 어머니인 소서노냐 하는 설까지 있다. 
강역에 관해서는 한강 유역을 차지했다가 고구려에 밀려 공주로 남하하고, 
더 남녘인 부여로 내려가 마침내 멸망했다는 식으로 보는가 하면, 
한때는 중국의 북경을 아우르는 지역에서부터 양자강 남쪽까지 식민지를 건설하고, 

백제의 왕족들은 일본으로 건너가 지배층을 이루었으니 중국, 한국, 일본에 걸친 거대한 제국을 형성했다고까지 하는 사람도 있다.

부여 땅 답사는 이토록 헤아리기 어려운 백제의 모습을, 
직접 디딤으로써 하나씩 알아가는 과정이 될 터이다. 

육당 최남선이 『삼국고적순례』에서 부여를 두고 “보드랍고 훗훗하고 정답고 알뜰한 맛은 부여 아닌 다른 옛 도읍에서 도무지 얻어 맛볼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 의미를.

부여는 공주에서 천도한 해인 538년부터 나당연합군의 말발굽 아래 마침내 그 생명을 다하던 660년까지 6대 123년 동안 백제의 왕도로서 삶을 누렸던 곳이다. 

번성기에 사비의 인구는 가구 수가 13만 호에 이르렀다니 3만여 명밖에 안 되는 요즈음과 비할 바가 못된다. 

백제가 멸망한 뒤로 8세기 중엽인 경덕왕 때는 웅천주의 속군이 될 만큼 철저히 압살되기도 했는데, 
신라 말에 견훤이 후백제를 세웠을 때에는 한동안 후백제 영역으로서의 삶도 누렸다.

부여에서 가장 발길을 잡아끄는 곳은 정림사터이다. 
거기에는 백제탑의 완성이라 할 조형미를 갖추고 있는 늘씬한 오층석탑이 있다. 

정림사터 탑은 뒷날 옛 백제 지역 탑의 범본이 되었으니 백마강 건너 장하리에는 자그마한 삼층석탑이 있어 생김새 자체로 정림사터 탑의 후손임을 드러내 보인다.

정림사터 탑이 부여에서는 유일한 지상의 백제건축이라면 능산리 고분군의 무덤들은 그에 상응하는 지하건축물이다. 

사신도가 그려진 무덤도 있어 6,7세기 백제인이 불교만이 아니라 도교 사상도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부소산성은 백제왕실의 이야기를 곳곳에 보듬고 있는 곳이다. 
부여의 진산인 부소산의 남쪽 기슭에는 지금은 조각 땅으로만 보여지는 왕궁터가 있고, 
산성 안에는 해맞이하는 영일루와 달을 보내는 송월루 등의 누각 자리가 있어 백제 사람들의 풍류를 알 만하다. 

부소산성을 정점으로 해서 부여를 빙 둘러가며 수도 방위의 외곽시설인 나성이 흔적으로 남아 있고, 
더 바깥쪽으로는 성흥산성을 비롯한 외곽 산성들이 있어 사비의 규모와 당시 수도의 방위체계를 엿볼 수 있다.

시가의 남쪽이었을 군수리에는 이름을 알지 못하는 절터가 지금은 논 가운데 아담하게 자리한다. 
그 옆쪽의 동남리에는 무왕의 태생에 얽힌 전설이 서려 있으며, 
이궁()을 짓고 즐겼다는 궁남지에 지금도 버드나무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백제 역사 이전부터 지금까지 쉬임 없이 흐르고 있는 백마강이 있다. 
부여를 휘감아 싼 백마강가에는 유난히 전설이 서린 곳이 많다. 

제대로 기록되지 못한 백제의 역사를 사람들은 그처럼 전설로라도 간직해 내려온 것이다. 

유람선을 타고 백마강 물살에 흔들리면서 낙화암, 조룡대, 구드래나루, 수북정 들의 전설에 젖어보는 맛도 그런대로 괜찮다.

금성산 기슭에 자리한 국립부여박물관에 가서야 우리는 비로소 사비 시대 백제 유물의 실제와 마주한다.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을 비롯한 백제 부처들이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우리를 맞이한다. 

꽃잎이 도톰한 연꽃무늬 기와들, 품이 넉넉한 백제 그릇들도 있다. 
부여 송국리의 청동기 시대 집터에서 발굴한 유물들을 비롯하여 뜻밖에도 많은 선사 시대 유물들이 충청남도에서 살았던 옛사람들의 모습도 전해 준다.

고려 때의 몇몇 유물들은 이땅 사람들이 백제의 후손으로서의 미감을 잘 간직하고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 
앞에서 말한 장하리 삼층석탑이 그러하고, 
정림사터에 있는, 비록 비바람에 씻겨 많이 닳긴 했지만 엷은 미소를 머

금은 석불상이 그러하다.
성흥산의 대조사에도 거대한 몸체로 지방적인 양식을 보이지만 미소만큼은 넉넉한 석불상이 있다.

아직도 읍으로 머물고 있는 부여지만 옛 역사에만 파묻혀 있지는 않다. 
부여의 현대를, 
현실을 역사로서 숨쉬게 하는 데에는 60년대를 대표하는 민족시인 신동엽이 큰 구실을 한다. 

시내에는 그의 생가가, 백마강가에는 시비가 있어 큰 시인의 짧지만 무거웠던 삶을 증거해 준다.



「금강」에서 “백제,/천오백년, 별로/오랜 세월이 아니다
.우리 할아버지가" 그 할아버지를 생각하듯" 몇 번 안 가서" 

백제는우리 엊그제, 그끄제에있다”고 했건만, 
오늘 우리가 백제의 수도로만 알고 있는 부여에서 정작 백제의 숨결을, 
온기를, 살결에 닿는 바람처럼 느끼기는 쉽지 않다. 

그만큼 백제는 천오백년 세월에 철저히 묻혀졌다. 

백제가 “우리 엊그제, 그끄제에 있다”는 것은 다만 눈으로 보이는 유물이나 유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삶의 의미로서 백제, 바람버섯처럼 찢어져서 씨를 뿌리는 역사로서의 백제이므로, 
피어나야 하는 역사의 고장으로서의 백제는 이 부여에서 가장 확실하게, 
역사의 땅을 밟는 사람들의 발걸음 발걸음으로 살아날 것이다.


천년 사직을 지켜온 도성터며 절터가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경주와는 달리, 
전화에 휩쓸리고 사람들은 볼모로 잡혀가고, 
남은 이들은 부흥운동을 하다가 스러지고 불탄 폐허는 더욱 황폐해져 버렸던 부여는 왕도였던 모습을 간직하기는커녕 시내 한가운데에 정림사터 오층석탑만이 홀로 덩그러니 섰을 따름이다. 

왕성의 방위시설이었던 부소산성을 걸어보아도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


백제의 옛도읍지 부여는 충남의 공주·논산·청양·보령·서천, 전북의 익산과 접하고 있다. 공주에서 부여로 가는 길은 40번 국도로 가는 것이 대표적이고 서울, 대전, 공주, 논산, 보령, 청양, 서천 등지에서 수시로 고속버스나 시외버스가 다녀 교통이 매우 편리하다. 부여 읍내에는 숙식시설과 주차장 등이 잘 갖추어져 있으나, 그외 지역에서는 숙식할 만한 곳이 드물다.
**본 정보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으므로, 여행 시에는 최신 정보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