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18일 토요일

백제 , 百濟.

백제 , 百濟.

온조가 한강 유역의 위례성에 세운 나라로 근초고왕 때 전성기를 누렸다. 

백제는 한강 유역의 좋은 자연환경을 바탕으로 일찍이 고대 국가의 기틀을 닦아 발전했으며, 세련되고 우아한 문화를 발달시켜 일본 고대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삼국()의 하나로서 한반도 중서부에 위치했으며 660년에 멸망한 고대국가.


백제()는 서기전 18년에 부여족() 계통인 온조()집단에 의해 현재의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건국되었다. 
4세기 중반에는 북으로 황해도에서부터 경기도·충청도·전라도 일대를 영역으로 하여 전성기를 누렸다. 
660년에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였다. 이후 3년 간 치열한 부흥운동()을 전개하였지만 이마저 실패하고 말았다. 
678년 동안 존속한 백제 역사의 전개과정을 수도 변천을 중심으로 보면 한성도읍기(: 기원전 18∼기원후 475), 웅진도읍기(: 475∼538), 사비도읍기(: 538∼660)로 시기를 구분할 수 있다.
백제를 구성한 주민들의 계통을 보면 선주토착민은 한인()이었고, 여기에 예인()들이 섞였다. 
한성도읍기에 지배층은 부여족 계통이 주류를 이루었다. 
4세기 이후 삼국간의 접촉과 중국 및 왜()와의 접촉이 본격화되면서 신라인·고구려인·왜인·중국계통의 사람들도 지배세력으로 흡수되기도 하였다.
백제는 세 차례 천도를 하면서 개성있는 문화를 형성하였다. 
한성시대에는 서울시 석촌동에 있는 대규모의 적석총()에서 보듯이 고구려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었다. 
웅진 및 사비로 천도하면서 중국의 남조문화()를 받아들여 세련되고 우아한 문화를 만들어냈다. 
지정학적인 이점을 최대한 이용해 중국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이를 백제화하고, 다시 왜나 가야()에 전수해 고대 동아시아 공유()문화권을 형성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건국과 성장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는 기원전 18년에 온조집단이 고구려에서 남하해 내려와 한강 유역의 위례성()에 자리를 잡고 나라를 세운 것으로 나온다. 
백제의 건국 과정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기본사료인『삼국사기』백제본기()의 초기기록과『삼국지()』동이전 한전( )의 내용이 상충하는 점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가져야 한다. 
영역과 관련하여『삼국지』동이전에는 3세기 중엽 무렵까지 경기·충청·전라도 지역에 마한() 54국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백제는 그 중의 하나인 백제국()으로 나온다. 
『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서기전 1세기 초에 백제온조왕()이 전라북도 고부()까지 영역으로 확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지배체제와 관련하여 동이전에는 국의 지배자인 국읍() 주수()가 읍락()의 거수()들을 잘 제어하지 못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 반면에 백제본기에서는 3세기 중엽 경에 이미 6좌평()·16관등제()라고 하는 잘 짜여진 국가조직을 갖춘 것으로 되어 있다.
이처럼 두 사서가 보여주는 백제의 모습이 매우 다르기 때문에 어느 자료를 택하느냐에 따라 백제의 건국·성장 과정을 이해하는데 커다란 차이가 생긴다. 
초기기록을 신뢰하는 입장과 동이전의 내용을 강조하는 입장 등이 나왔다. 
3세기까지 백제국은 마한 연맹체의 일원이었다는 동이전의 내용을 토대로 하고 백제본기의 초기기록에 보이는 영역 확대 기사는 후대의 것이 부회()된 것으로 보는 절충론()의 입장에서 정리하였다.
『삼국사기』백제본기에 두 가지의 건국설화()가 실려 있다. 
온조 중심의 설화에 의하면 온조는 고구려 건국자인 주몽()과 졸본왕녀()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그 뒤 주몽의 원자인 유리()가 아버지를 찾아와 태자가 되자, 형 비류()와 함께 남하해 위례()에 정착하여 나라를 세웠고, 비류가 죽자 그를 따르던 무리들을 통합했다고 한다. 

비류 중심의 건국설화에 의하면 비류는 해부루()의 서손()인 우태()와 소서노(西)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우태가 죽은 뒤 주몽이 졸본으로 망명해오자 소서노는 주몽에게 개가()해 고구려 건국을 도왔으며, 그 뒤 주몽의 원자인 유리가 아버지를 찾아와 태자로 책봉되자 비류는 어머니를 모시고 무리를 이끌고 남으로 내려와 미추홀()에 정착했다고 한다.


건국설화에 의할 때 백제를 건국한 주체집단은 부여족 계통의 유민인 것은 분명하다. 
온조집단은 처음에는 하북위례성()에 정착해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십제()’라고 하였다. 
이후 십제는 미추홀(현 인천광역시 일대)의 비류계 세력과 연맹을 형성했다. 
비류와 온조가 형제라고 하는 시조 형제설화()는 두 집단이 연맹을 형성한 것을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 형제설화에서 비류가 형으로 나오는 것은 연맹 초기에 비류계가 주도권을 장악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비류가 죽자 그를 따르든 무리들이 온조에게 귀부했다는 것은 그 후 어느 시기에 온조계가 연맹장의 지위를 차지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시기는 초고왕()이다. 초고왕은 정치의 중심지를 하남위례성()으로 옮기고 국호를 ‘백제’로 개칭하였다. 
이후 백제의 왕계는 온조계의 부여씨()로 고정되었다.
백제의 성장에는 청동기시대 이래 발달한 한강유역의 청동기 및 초기철기문화() 기반과 이 토대 위에서 이루어진 농업생산력의 증대 및 내륙 지방은 물론 서해안과 잘 통할 수 있는 이점을 지닌 한강의 지정학적인 조건 등이 작용하였다. 
이후 백제의 성장은 크게 두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하나는 연맹 내의 세력들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지배력 강화는 우보()·좌보()와 같은 직에 지역 세력들을 임명함으로써 이루어졌다. 
다른 하나는 외부의 압력에 대항하면서 영역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이때의 외부 세력은 백제의 성장을 저지하려는 중국 군현()과 약탈적인 침략을 해오는 말갈()로 표현되는 예()세력이었다. 백제는 이들과 공방을 치루면서 성장해 나갔다.
3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한반도에서는 큰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다. 
246년에 진한()의 8국을 분할하는 문제로 마한과 낙랑·대방군(·)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이 전쟁에서 마한은 대방태수()를 전사시키는 전과를 올렸지만 결국 패배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목지국()의 위상이 약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백제는 목지국을 제압하고 새로이 마한의 맹주국이 되었다. 
그 시기가 고이왕()대이다. 
고이왕은 주변 세력들을 아울러 북으로는 예성강(), 동으로는 춘천(), 남으로는 안성()·성환(), 서로는 서해에 이르는 지역을 영역으로 확보하였다. 

좌장()을 설치해 병마권()을 장악하고, 좌평을 설치하여 귀족회의를 주관하게 함으로써 왕의 위치를 한 단계 격상시켰으며, 금령()을 선포하고 솔계() 관등과 덕계() 관등을 토대로 하는 관제를 만들어 지배체제의 확립을 도모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고대국가로서의 토대를 갖추게 되었다.


한성시대

3세기말 4세기 초에 중국의 서진(西)은 ‘8왕의 난(291∼306)’이라고 하는 왕족들 사이의 반란과 만리장성 이북의 유목민[오호()]의 침입 등으로 혼란에 빠졌다. 
이로 말미암아 한반도에 위치한 낙랑군과 대방군은 고립무원의 상태가 되었다. 
이에 백제는 낙랑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기도 하였지만 책계왕()과 분서왕(西)이 낙랑 세력에 의해 피살되는 등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책계왕과 분서왕의 피살을 계기로 초고왕계인 비류왕()이 왕위에 올랐다.

비류왕은 김제에 대규모의 벽골제()를 축조하는 등 수리시설을 확충시켜 농업경제력의 기반을 확대하였고, 활쏘기 연습을 장려하는 등 군사력을 강화하였으며, 서제 우복()의 반란을 평정한 후에는 진씨() 세력과 결합해 정치적 기반도 안정시켰다. 
이 토대 위에서 근초고왕()이 즉위하여 초고왕계()의 왕위계승권을 확립하였다. 
즉위 후 근초고왕은 진씨 출신의 여자를 왕비로 맞이하여 아신왕()대까지 진씨 왕비족시대를 열었으며, 귀족세력들의 상하 서열을 분명히 하기 위해 관등제를 일원화하였다.

지방의 생산물을 파악하고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영역을 행정구역으로 나누고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이를 담로제()라 한다. 
담로제의 실시로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는 직접지배로 바뀌었다. 
박사() 고흥()으로 하여금『서기()』를 편찬하게 하여 왕실의 권위를 신성화시키고 정통성을 확립하였다.
이렇게 다져진 기반 위에서 근초고왕은 대외정복활동을 전개하였다.

『일본서기』신공기() 49년(수정연대 369)조에 의하면 왜가 비자벌(: 경남 창녕)·남가라(: 경남 김해)·안라(: 경남 함안)·가라(: 경북 고령))등 가야 7국을 평정한 뒤 군대를 돌려 고해진(: 전남 강진)에 이르고 남만() 침미다례()를 정벌하고 비리()·벽중()·포미지()·반고() 등 4읍의 항복을 받아 백제에 준 것으로 나온다. 

왜가 백제에 땅을 주었다는 것은『일본서기』편찬자의 왜곡과 윤색이 분명하다. 
이 기사의 역사적 실상은 근초고왕이 가야지역으로 진출해 왜와의 교역로를 확보했다는 것과 전라도 지역에 잔존하고 있던 마한의 잔여세력을 정복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근초고왕대에 백제는 남으로 영산강() 유역까지를 영역으로 편입했던 것이다. 
영산강 유역을 장악한 근초고왕은 남진해 내려오는 고구려세력과 대결하였다. 

특히 371년(근초고왕 26)의 평양성전투()에서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승리를 거두어 수곡성(: 황해도 신계)까지 영역으로 하였다.
백제 초기의 대중관계()는 낙랑·대방군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나, 근초고왕이 동진()에 사신을 파견하고 동진으로부터 ‘진동장군영낙랑태수()’의 작호()를 받음으로써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이 시기의 조공()은 한반도 내에서의 역학관계를 중국과 연결함으로써 세력균형을 유지하려던 외교행위였다. 

백제의 중국에 대한 외교는 지리관계상 주로 남조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 때로는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북조()와의 교섭도 추구하였다.
백제와 왜와의 관계는『삼국사기』에는 우호적이고 상호 원조하는 형태로 나온다. 
이는 일본열도로 이주한 백제계 사람들이 왜정권()의 핵심에 자리한 것과도 일정한 연관이 있다. 
백제와 왜와의 관계는 근초고왕대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당시의 양국관계는 칠지도()에 새져진 금상감명문에서 엿볼 수 있다. 
이에 의하면 백제는 왜왕을 후왕()으로 대우하였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백제는 왜에 학술·기술 등 선진문물을 제공하였고, 그 대신 왜는 백제에 군사적 지원을 하였다. 
백제가 왜에 박사 왕인()을 파견하여『천자문()』과『논어()』를 보내준 것은 전자의 사례가 되며,「광개토왕비문()」에 왜군이 백제를 도와 고구려. 신라군과 싸운 것은 후자의 예가 된다.

침류왕()대에 와서 백제는 동진으로부터 온 인도 승려 마라난타()를 예로써 맞이하면서 불교를 공인하였다. 
불교 공인을 통해 백제는 확대된 영토와 강화된 왕권을 지지하는 고대국가의 이데올로기로서 확립해 보편적인 세계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침류왕이 죽은 뒤, 동생 진사()는 조카 아신()의 왕위를 찬탈했다. 
7년 뒤 아신은 숙부 진사왕()을 쫓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왕족 사이에서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일어난 갈등의 배후에는 왕비족으로서의 진씨 세력의 힘이 강하게 작용하였다. 진씨 세력은 군권()을 장악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것이다.
이 시기 백제는 고구려와의 공방을 계속하였다. 
4세기 말에 와서 고구려광개토왕은 적극적인 정복 정책을 추진하였다. 
신라를 자국 편으로 끌어들인 뒤 백제에 대한 공격을 단행하였다. 
그 결과 백제는 58성() 700촌()을 점령당하고, 왕제()와 대신() 10명을 인질로 보내야 하는 궁지에 몰렸다. 


한반도에서의 세력 불균형을 극복하기 위해 아신왕은 태자 전지()를 왜에 파견해 원군을 요청하였다. 
고구려에게 빼앗긴 북방의 요충지인 관미성()을 탈환하려고 군사를 일으켰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아신왕이 죽은 뒤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지배세력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태자 전지를 지지한 해씨() 세력이 왕제 혈례()를 지지한 진씨 세력을 누르고 전지왕()을 옹립하였다. 

해씨세력은 진씨를 대신하여 왕비를 배출하였다. 
이로써 실권()세력은 진씨에서 해씨로 교체되었다. 
실권을 장악한 해씨 세력은 상좌평()을 설치하여 군국정사()를 맡게 하는 등 실권귀족 중심으로 정치운영을 해나갔다. 
실권귀족 중심의 정치운영은 구이신왕()대와 비유왕()대에도 지속되었다. 
이로써 왕권은 매우 미약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고구려장수왕()은 광개토왕이 정복한 영토를 효율적으로 지배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평양천도를 추진하였다. 
이 기간 동안 장수왕은 대외 정복활동을 자제하였지만 427년에 천도를 단행한 후 남진을 재개하였다. 
고구려의 남진은 백제와 신라에 큰 압박으로 작용하였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백제는 신라에 우호관계를 요청하여 비유왕 8년(434)에 동맹이 맺어졌다. 


이 동맹은 백제가 주도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에 제라동맹()으로 부를 수 있다. 
이 동맹은 고구려의 침략에 대해 공동으로 방어하는 공수동맹()의 성격의 것이었다. 
나아가 비유왕은 송()에 사신을 보내 역림, 식점과 더불어 요노()를 요청하여 받았다. 
요노라고 하는 신무기의 도입으로 백제 무기체계를 새롭게 정비할 수 있게 되었다.

비유왕은 흑룡()이 사라진 후 죽었다는 기사와 무덤도 제대로 조영되지 못하였다는 사실이 상징해 주듯이 비명에 사망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즉위한 개로왕()은 후반에 와서 실권귀족중심체제를 극복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왕실의 권위를 높이려고 하였다. 
이를 위해 개로왕은 궁실을 장려하게 하고, 부왕의 능을 개수했으며, 북위()에 사신을 보내 군사원조를 요청하는 등 일련의 조처를 취하였다. 

이러한 왕권전제화정책()은 안으로는 귀족들의 반발에 부닥쳤을 뿐만 아니라 대규모의 토목공사는 국가 재정을 탕진하게 하였고 밖으로는 북위가 군사원조를 거부함으로써 제대로 실행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고구려는 475년에 3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백제 공격을 단행하였다. 
장수왕이 친히 거느린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은 백제는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한 채 왕도()는 함락되고, 개로왕은 사로잡혀 죽음을 당했다. 
이로써 백제는 웅진천도()라고 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웅진시대

고구려군에 의해 한성이 함락되기 직전 신라에 원병을 요청하러 간 문주()는 원병 1만명을 얻어 돌아왔다. 
이미 개로왕은 전사하고 한성도 함락된 뒤였다. 
이에 문주는 목협만치(滿)·조미걸취()의 보필을 받아 즉위한 후 웅진으로 천도하였다. 
웅진으로 천도를 하게 된 데는 웅진 지역에 기반을 둔 백씨()세력의 도움이 컸다. 
금동관, 금동신발, 장식대도, 중국제 청자가 다수 출토된 공주수촌리고분군은 백씨 세력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천도 후 문주왕()은 왜에서 귀국한 동생 곤지()를 내신좌평()으로 삼고, 장자 삼근()을 태자로 책봉해 왕실의 안정을 꾀하면서 국가재건에 노력하였다. 
한성에서 남하해온 귀족들은 자체분열을 일으키고 있었고, 밖으로는 서해의 해상제해권이 고구려에 넘어감으로써 대중국 접촉도 방해를 받게 되었다. 
이런 혼란을 틈타 병권을 장악한 병관좌평() 해구()는 문주왕을 살해하고, 어린 삼근왕()을 세워 전권을 휘두르다가 반란을 일으켰다. 


해구의 반란은 덕솔() 진로()에 의해 평정되었고 삼근왕도 재위 3년 만에 죽었다. 
이에 진로는 왜에 있던 동성()을 옹립하였다.
동성왕()은 비록 옹립되었지만 즉위 후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 어려운 정치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신라 왕족인 이찬() 비지()의 딸을 아내로 맞이해 신라와의 동맹체제를 보다 돈독히 하면서 사씨()·연씨()·백씨() 등 신진 지방세력들을 중앙에 등용해 한성에서 내려온 기존 세력과의 상호견제와 균형을 도모하였다.
남제()와의 교통을 재개함으로써 국제적인 고립을 벗어나게 되었다. 

북위에 대해서는 위로(), 흉리()로 폄하하는 등 대립각을 세웠다.
동성왕은 19년(497)에 병관좌평 진로가 죽자 신진세력의 하나인 연돌()을 병관좌평으로 삼았다. 
이는 동성왕이 신진세력 중심으로 정치운영을 추구하였음을 보여준다. 
신진세력의 위세가 커지자 이를 억제하기 위해 동성왕은 측근 중심의 정치운영을 도모하였다. 
이에 반발하는 위사좌평() 백가()를 가림성()의 성주()로 파견했다. 
불만을 품은 백가는 도리어 자객을 보내 왕을 살해하였다.
동성왕을 이어 무령왕()이 즉위하였다. 
무령왕은『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동성왕의 둘째 아들로 나온다. 


「무령왕릉지석()」과『일본서기』에 인용된『백제신찬()』을 종합하면, 무령왕은 동성왕의 이모형이 된다. 
즉위 후 무령왕은 먼저 백가의 난을 평정해 왕권을 안정시켰다. 
고구려에 대해서는 선제공격을 단행하는 등 공세적 입장을 취하여 세력균형을 이루었다. 

제방을 수리하게 하고 유식자()들을 귀농()시켜 금강 유역권과 영산강 유역권을 적극 개발해서 농업생산력을 높이고 농민생활의 안정을 꾀하였다. 
지방통치조직인 담로에 자제종족을 파견하여 지방에 대한 통제력도 강화하였다. 
나아가 섬진강 유역으로 진출하여 남원·하동 지역을 장악함으로써 한성을 상실한 이후 축소된 경제 기반을 확대하였다. 
이 토대 위에서 무령왕은 다시 강국이 되었음을 선언하였고 양()나라로부터 ‘영동대장군()’의 작호를 받아 국제관계상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었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호화롭고 풍부한 부장품들은 무령왕대의 왕권의 신장과 국력의 성세를 보여주는 물적 증거가 되는 것이다.





사비시대

웅진 지역의 지리적 조건은 방어하기에 좋은 요충지이나 한 나라의 수도로서는 협소하였다. 
이에 성왕()은 무령왕대에 이루어진 안정 기반을 바탕으로 백제의 중흥과 왕권강화를 이루기 위해 사비로의 천도를 단행하였다. 
사비 지역은 금강이 감돌아 방어에 유리하고 또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어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유리한 곳이었다. 

사비로의 천도는 성왕의 영민하고 과단성 있는 결단과 성왕을 지지하는 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사비천도를 적극 지지한 세력으로는 사비 지역을 기반으로 한 신진세력인 사씨 세력과 한성에서 남하해온 목씨() 세력 등이었다. 

성왕은 사비에 왕궁을 비롯해 여러 관청을 건축하고, 부소산을 중심으로 좌우로 연결되는 나성()을 축조하고 시가지는 방리제()에 입각해 정비한 후 538년(성왕 16)에 천도하였다.
천도 후 성왕은 왕권강화를 위한 제반 조처를 추진해나갔다. 
우선 국호를 ‘남부여()’로 개칭하여 부여족의 전통을 강조함으로써 왕실의 전통성과 권위를 강화하였다. 

중국 남조와의 교류를 통해 모시박사()·강례박사() 등을 초빙하여 문화의 질을 높이고, 선진문물을 왜에 전수하였다. 
중인도()로부터 오부율()을 갖고 온 겸익()을 우대, 백제적 계율종()을 설립시키고 계율을 강조함으로써 불교교단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중앙통치조직으로 좌평을 1품으로 하고 극우()를 16품으로 하는 16관등제를 정비하고, 22부사제() 등 중앙의 중요 관청들을 설치하였다. 
수도의 행정 조직은 5부()로 나누고 각 부 아래에 5항()을 두는 5부-5항제로 완비하였고, 지방은 전국으로 5방()으로 나누고 그 아래에 군()과 성[: 현()]을 두는 ‘5방-군-성(현)제’를 편제하여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였다. 



이렇게 집권체제가 갖추어지면서 왕명을 받들어 행하는 22부가 정치운영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고, 그 결과 귀족들의 회의체인 5좌평제는 그 위상이 약화되었다.
천도를 중흥을 이룩한 성왕은 한강 유역 회복작전을 기도하였다.  
자력으로 고구려를 공격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신라·가야군과 연합군을 형성하였다. 
이 시기 고구려는 대외적으로는 서북으로부터 돌궐()의 남하에 따른 압력을 받고 있었고, 내적으로는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외척들이 싸움을 벌이는 등 내분에 처해 있었다. 
이 틈을 이용하여 신라·가야군과 연합한 백제군은 551년에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단행하여 마침내 백제는 한강 하류를 차지했고, 신라는 한강 상류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


신라는 한강 상류의 점령에 만족하지 못하고 중국과 직접 교류할 수 있는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비밀히 고구려와 결탁한 후 백제가 점령하고 있던 한강 하류 유역을 백제로부터 빼앗았다. 
신라의 이러한 돌발 행동으로 양국 사이의 화호()관계는 깨지고 말았다. 
이에 격분한 성왕은 원로 대신인 기로()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왕자 여창()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공격하였다. 
이 정벌에서 백제군은 초기에는 우세를 보였으나 마침내 관산성전투()에서 성왕은 신라 복병에 의해 사로잡혀 전사함으로써 대패하였다. 
이 패배로 백제는 왕을 비롯해 좌평 4명이 전사하고, 사졸() 3만여 명이 전사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선에 나가 있던 왕자 여창도 간신히 목숨을 구하였다.
관산성전투 패전은 백제의 정국에 커다란 파문을 던졌다. 
신라정벌을 반대하였던 기로들은 위덕왕()에게 패전의 책임을 추궁하면서 정치적 발언권을 증대해나갔다. 
이로써 사씨·연씨·해씨·진씨 등 ‘대성팔족()’으로 표현되는 가문들이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 실권귀족들은 좌평의 정원을 5명에서 6명으로 확대하여 6좌평회의체()를 최고 귀족회의체로 만든 후 정치운영을 주도해나갔다.
그러나 위덕왕은 10년(567)에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능사()를 창건하고 여기에 사용할 도구의 하나로 금동대향로()를 만들었다. 
금동대향로는 성왕이 추구한 유교·불교·도교 삼교()의 공존과 상보를 표현한 것이었다. 그리고 20년(577)에는 죽은 왕자를 위해 왕흥사()를 창건하였다. 
이는 위덕왕이 초기의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점차 왕권강화를 추구한 것을 보여준다. 


법왕()은 위덕왕대에 지어진 왕흥사를 국가적 차원의 사찰로 그 격을 높여 위축된 왕권을 회복하고자 하였지만 실권귀족들의 반대로 재위 2년의 단명으로 죽었다. 
이에 실권귀족들은 익산()에서 마[]를 캐며 살던 몰락한 왕족 출신인 무왕()을 옹립해 왕으로 삼았다. 
무왕의 출자에 대해『삼국사기』에는 법왕의 아들로 나오지만『삼국유사()』에는 지룡()의 아들로 나온다. 
무왕이 왕이 되기 전에 서동()으로서 가난한 삶을 살았다는 사실에서 미루어 보면 그는 몰락왕족 출신이라 할 수 있다.


무왕은 귀족들의 정략적 옹립에 의해 왕이 되었지만, 즉위 후 실추된 왕권의 회복을 위해 일련의 조처를 추진하였다. 
먼저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신라진평왕()의 딸 선화공주()와 결혼하였다. 
무왕과 선화공주와의 결혼에 대해 당시에 백제와 신라는 빈번히 전쟁을 하였다는 점에 주목하여 이 결혼이 매우 설화적이라고 꼬집는 견해가 있다. 
근래에 미륵사지서탑(西)에서 발견된 사리봉안기()에 무왕의 왕비가 사택적덕()의 딸로 나온다는 사실 등을 근거로 하여 선화공주의 존재를 부인하는 견해도 있다. 


왕실과 왕실 사이의 결혼은 두 나라 사이에 긴장감이 고조될 때 이루어진다는 점, 고대사회에서는 왕비가 동시에 2명 이상 있을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이 시기에 신라가 고구려의 압박을 받고 있었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무왕과 선화공주의 결혼을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결혼 시기는 신라진평왕이 원광법사()에게 고구려의 공격을 막아달라고 요청한 청군표()를 쓴 608년 전후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다음으로 무왕은 익산을 경영하여 이 지역을 자신의 세력기반으로 삼은 후 익산으로의 천도를 계획하였다. 
이를 위해 무왕은 제석사()를 만들고, 거대한 미륵사()를 창건하였다. 
미륵사를 창건하면서 무왕은 스스로를 전륜성왕()에 비겨 왕실의 권위를 높였다. 
그의 익산천도 계획은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혀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로써 신도() 경영을 통한 귀족세력의 재편성이라는 그의 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멸망과 부흥운동

무왕은 재위 33년(632)에 왕자 의자()를 태자로 삼았지만 익산으로의 천도가 좌절된 이후 점차 환락에 빠졌다. 
이를 기회로 측근들이 권세를 농단하기 시작하여 정치정세는 매우 어지러워졌다. 
무왕이 죽은 후 왕위에 오른 의자왕()은 ‘해동증자()’로 불릴 정도로 유교이념에 투철하였지만 친위정변을 일으켜 자신의 즉위에 반대하였던 내좌평() 기미() 등 유력 귀족 40여 명을 추방하였다. 
미후성을 친히 공격하면서 군사권을 장악하였다. 
이렇게 귀족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중심의 정치운영체제를 확립한 의자왕은 대외적으로 고구려·왜와 화친관계를 수립하고 신라에 대해서는 윤충()으로 하여금 대야성()을 공격하게 하는 등 압박을 강화하였다.

의자왕은 15년 이후에 궁정의 측근세력들에게 둘러싸이기 시작하였다. 
여기에는 왕의 총애를 받았던 왕비 은고() 세력의 작동과 의자왕의 병환이 원인이 되었다. 
의자왕은 왕의 행동을 비판한 성충()을 투옥하여 죽이고 말았으며 이로 말미암아 지배계층 사이의 분열이 심화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의자왕의 탐락과 황음() 및 그에 따른 궁중 내부에서의 부패와 정권의 천단은 백제의 지배질서를 더욱 문란하게 하였다. 
의자왕은 신라에 대한 공격을 가중하였다. 이 전쟁에서 백제는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지만 패배한 경우도 적지 않았으며 이런 빈번한 전쟁은 국력을 피폐시키고 농민경제를 더욱 어렵게 하였다. 

백제의 군사적 압박은 신라로 하여금 당나라와의 결합을 가속화시켰고, 그 결과 신라김춘추()는 당나라에 들어가 당태종()과 나당군사동맹()을 맺었다. 
나당연합군의 결성은 백제를 더욱 더 어려운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신라와 군사동맹을 맺은 당은 고구려 공격을 우선적으로 추진하였던 종래의 전략과는 달리 먼저 백제를 공격하기로 결심하였다. 
660년 6월당나라 소정방()이 이끄는 13만 명의 군대와 김유신()이 이끄는 5만의 신라군은 백제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백제 군신들이 효과적인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한 신라군은 요충지인 탄현()을 무사히 통과하였고, 당군은 큰 저항을 받지 않고 기벌포()에 상륙하였다. 
화급해진 의자왕은 계백()으로 하여금 출전하게 하였다. 
비장한 각오로 결사대 5천명을 거느린 계백은 황산벌전투()에서 신라군의 공격을 끝내 막아내지 못한 채 전사하였고, 백강() 하구에 상륙한 당군은 신라군과 합세하여 사비성()으로 진군하였다.
다급해진 의자왕은 태자와 더불어 웅진성()으로 피난을 갔다. 


이에 왕자 태()가 사비성을 지키면서 스스로 왕위에 올랐지만 민심이 동요하고 이탈자가 많이 생겨나자 당군에 항복하였다. 
사비성이 함락되자 웅진을 지키던 방령() 녜식()이 의자왕을 겁박하여 당군에 항복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멸망하고 말았다.
사비성을 점령한 나당연합군은 횡포와 약탈을 자행하였다. 
점령군의 이러한 횡포는 백제 유민들을 크게 자극하여 곧바로 각 지역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들은 끊어진 왕조를 다시 일으켜야겠다는 ‘흥사계절()’의 정신을 표방하였다. 
백제부흥군의 중심 인물로는 정무()·지수신()·흑치상지()·복신()·도침() 등을 들 수 있다. 
무왕의 조카인 복신은 승려 도침과 더불어 임존성()을 공격해 온 소정방의 군대를 물리쳤다. 
이는 부흥군의 사기를 크게 고무시켰다. 
그에 따라 각 지역의 200여 성들이 부흥군에 호응함으로써 부흥군의 형세는 커졌다.

661년 3월도침이 거느린 군대는 웅진강() 전투에서 당군에 패배하였지만 복신의 군대는 1달 여 동안 지속된 두량윤성() 전투에서 신라 대군을 격파하여 신라군의 기세를 꺾었다.
이후 복신과 도침은 중심지를 임존성에서 주류성(: 전북 부안의 위금안산성)으로 옮긴 후 661년 9월에 의자왕의 아들 풍()이 왜에서 귀국하자 왕으로 옹립하였다. 
이로써 부흥백제국이 성립되었다. 
독립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춘 후 도침은 ‘영군장군()’을, 복신은 ‘상잠장군()’을 칭하면서 신라가 사비성으로 군량을 수송하는 길을 차단하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나당연합군의 지배지역은 극히 제한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복신과 도침 사이에 불화가 생겨 복신은 도침을 죽이고, 권력을 차지하였다. 
부흥군 지휘부 내의 내분과 암투는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도록 하여 내사지성(: 현 대전광역시 유성 등 금강 동쪽의 거점 성들과 거열성(: 경남 거창) 등 남방 지역의 거점 성들이 신라에 함락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복신은 풍왕()을 암살하려다가 도리어 풍왕에게 살해당하였다. 이 틈을 타서 나당연합군은 대대적인 공격을 준비하였다. 
이에 풍왕은 고구려와 왜에 군사원조를 요청했다. 
이 요청에 응해 왜는 2만 7천명의 구원군을 파견하였다. 
풍왕은 왜의 수군과 연계하여 백강과 주류성에서 나당연합군을 저지하려 하였다. 

백강구전투()에서 왜군은 당나라 수군과 4번 싸워 크게 패배했고 황급해진 풍왕은 고구려로 도망을 쳤다. 
곧이어 주류성도 신라군에게 함락되었다.
이때 지수신은 임존성을 근거로 나당연합군에 끝까지 저항하였지만 마침내 견디지 못하고 고구려로 망명하여 임존성마저 함락되고 말았다. 
이로써 3년간에 걸친 백제부흥군의 부흥전쟁·부흥운동은 끝을 맺고 말았다.

백제는 3세기 고이왕 때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하며 고대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일찍이 한강을 차지한 백제는 빠르게 발전하며 중국의 동진, 왜, 가야와 교류를 했다. 5세기에는 고구려에 밀려 백제의 힘이 약해졌다. 

이후 무령왕과 성왕이 백제의 부흥을 위해 노력했다.




정치제도

중앙통치조직
백제의 정치제도는 국가발전 단계에 따라 변하였다. 
국()단계에는 국읍의 주수와 읍락의 거수가 정치의 중심을 이루었다. 
연맹단계에 와서 우보와 좌보가 설치되어 군국정사를 관장하였다. 
고이왕대에 5부체제가 이루어지면서 각국의 수장들은 중앙귀족으로 전화되었다. 
국왕이 부의 세력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지배조직은 국왕 직속의 관직과 각 부의 장에게 직속된 관직이 양립하는 이원적인 체제로 운영되었다. 

근초고왕대에 와서 백제는 이원적인 지배조직을 일원화하고 지방통치조직을 만들어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였다. 
이 시기 통치조직의 핵심은 관등제, 관직제, 작호제(), 귀족회의체, 군사조직, 지방통치조직, 신분제 등이다. 
이러한 제도는 한성도읍기에 기본틀이 만들어졌고 웅진도읍기를 거쳐 사비시대에 와서 정비되었다.





관등은 중앙귀족과 지방세력들을 서열화하여 상호간의 상하를 구별짓는 제도이다. 국단계에서는 관등과 관직의 구별이 없었다. 
고이왕대에 와서 중앙귀족화한 세력들을 지배체제 내로 편제하기 위해 좌평과 솔계() 관등, 덕계() 관등이 만들어졌다. 
중앙집권체제를 갖춘 근초고왕 대에는 좌평을 최고위로 하고 그 아래에 솔계 관등과 덕계 관등을 각각 다섯으로 분화시키고 맨 아래에 좌군()-진무()-극우를 두어 관등제를 일원화하였다. 
전지왕대에 상좌평이 설치되면서 좌평의 분화가 시작되었다. 
이 관등제는 웅진도읍기를 거쳐 사비도읍기에 16관등제로 정비되었다. 
16관등의 명칭은 다음과 같다.




백제 16관등의 명칭
품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관등명 좌평 달솔 은솔 덕솔 한솔 나솔 장덕 시덕 고덕 계덕 대덕 문독 무독 좌군 진무 극우
               
16관등제에서 좌평은 1품이었고, 좌평은 처음에는 5명이었으나 뒤에 6명이 되었다. 
달솔은 2품이었고 정원은 30명이었다. 
3품 은솔 이하는 정원이 없었다. 
정원이 정해진 좌평과 달솔은 가장 핵심적인 관료집단이 가질 수 있는 관등이었다. 
문독과 무독은 문·무의 구별이 관등제에 반영된 것을 보여준다.


16관등은 복색과 관식() 및 띠의 색〔〕에 의해 구분되었다. 
1품 좌평에서 6품 나솔까지는 자복()을, 7품 장덕 이하 11품 대덕에 이르는 관등은 비복()을, 12품 문독 이하 16품 극우까지는 청복()을 입었다. 
대색()의 경우 장덕까지는 자대(), 시덕은 조대(), 고덕은 적대(), 계덕은 청대(), 대덕·문독은 황대(), 무독 이하 극우까지는 백대()를 띠었다. 
관제()의 경우 왕은 금화()로, 나솔 이상은 은화()로 관을 장식하였다.




연맹단계에서 정치는 좌보와 우보 중심으로 운영되었지만 아직까지 관직과 관등은 미분화한 상태였다. 
부체제 단계에 와서 좌장이 설치되면서 관직과 관등은 분화되고 관부도 설치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관부과 관직제는 웅진도읍기를 거쳐 사비도읍기에 와서 22부-사()로 재정비되었다. 
22부의 명칭과 담당 업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백제 22부의 명칭과 담당 업무

백제

백제
구분
관부명
담당업무
구분
관부명
담당업무
내관
전내부()
왕명출납·국왕근시
외관
사군부()
내외병마
곡부()
곡물공선·어료지 관리
사도부()
교육·의례
육부()
육류공선·왕실목장 관리
사공부()
토목·역역 관리
내경부()
왕실창고 관리
사구부()
형벌·사법
외경부()
국용창고 관리
점구부()
호구파악
마부()
어마·승물 관리
객부()
외교·사신접대
도부()
무기·무구 제작
외사부()
관료의 인사
공덕부()
불교사원
주부()
직물제조·공물출납
약부()
어의·제약
일관부()
천문·점술
목부()
토목·건축
도시부()
시장·교역·왕도의 관리
법부()
의례 및 왕족 관리
후궁부()
후궁 관리




22부-사제는 상위 관부인 부와 하위 관부인 사()로 구성되었다. 
부는 궁중사무를 관장하는 내관() 12부와 일반 국무를 관장하는 외관() 10부 등 22부로 이루어졌다. 
22부를 보면, 일반 서정(
)을 담당하는 부에 궁중의 업무를 담당한 관청의 수가 많다. 
이는 왕권 중심의 관부 운용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군부()∼사구부()까지의 명칭은 중국 고대의 『주례()』의 6관()의 명칭과 동일하다. 
이는 북주()의 주례주의적() 관제정비에서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것을 의미한다. 
각 부의 장은 장사()·재관장() 등으로 불렸으며 3년에 한 번씩 교체되었다. 
이외의 관직으로 박사, 부마도위(), 막부() 관료 등을 들 수 있다. 
박사는 오경박사(), 역박사(), 모시박사 등 유교경전을 전문으로 하는 박사와 와박사(), 노반박사() 등 전문기술직을 담당한 박사로 구분된다. 
부마도위는 왕의 사위를 예우하기 위한 관직이다. 
장사, 사마(), 참군()은 막부에 설치된 관직으로서 주로 외교 및 군사업무를 담당하였다.
작호제는 공을 세운 고위귀족들에게 수여하는 칭호로서 왕·후·장군호(··)가 사용되었다. 
이 작호제는 칠지도에 왜왕을 후왕으로 부른 것에서 보듯이 근초고왕대에 실시되었다. 
왕·후로는 아착왕(), 불사후() 등에서 보듯이 지명이 붙은 형태로 사용되었고 장군호로는 정로장군(), 관군장군(), 보국장군() 등이 사용되었다. 
근래에 전북 고창에서 ‘△’이 새겨진 청동도장이 출토되어, ‘△’이라는 또 하나의 장군호를 사용하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귀족회의체
초기백제 시기에는 귀족회의가 국가의 군국사무를 총괄하였다. 
부체제 단계에 들어온 이후 국왕 중심의 집권체제가 확립됨에 따라 귀족회의가 수행하던 기능은 점차 행정관부가 담당하게 되었다. 
국왕의 권력이 초월적인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중요한 사항은 귀족회의체에서 논의되었다.
귀족회의체의 모태는 국의 거수들로 구성된 족장회의체였다. 
이후 부체제가 확립되고 중앙귀족이 생겨나면서 중앙귀족 중심의 회의체가 만들어졌다. 
이를 제솔회의()라고 한다. 
제솔회의의 의장은 좌평이었고 구성원은 솔계 관등을 가진 귀족들이었다. 
근초고왕대에 와서 제솔회의는 제신회의()로 개칭되었다. 
전지왕대에 와서 상좌평의 설치로 좌평은 상좌평, 중좌평(), 하좌평() 등 5좌평으로 분화되었다. 
이리하여 좌평으로 구성된 회의체가 이제 최고귀족회의체가 되었다.




사비도읍기에 와서 좌평의 정원이 6명으로 늘어나면서 6좌평회의체가 최고귀족회의체가 되었다. 
이 가운데 내신좌평은 수석좌평으로서 의장의 기능을 하였다.
 6좌평 회의체는 재상을 뽑는 것과 같은 중요한 국사는 신성한 지역에서 처리하였다. 
백마강 건너 편에 있는 호암사()의 정사암()은 이러한 신성지역의 하나였다. 
6좌평의 명칭과 관장 업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백제 6좌평의 명칭과 직무
명칭 직무
내신좌평() 왕명출납
내두좌평() 재정업무
내법좌평() 외교와 의례업무
위사좌평() 왕궁 숙위 업무
조정좌평() 형옥관계 업무
병관좌평() 내외병마권 관장






도성제
도성은 왕권의 표상이다. 
백제의 최초의 도성은 위례성이다. 
위례는 울타리라는 의미인데 백제에서는 도성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이 위례성은 뒤에 한성으로 불렸다. 
한성은 큰 성이라는 의미이다. 한성도읍기의 도성은 북성()과 남성()으로 이루어진 2성체제였다. 
위치에서 볼 때 북성은 풍납토성()으로서 평지성()이며 평소의 거성이고 남성은 몽촌토성()으로서 유사시에 대피하는 산성적() 성격을 지녔다.


풍납토성은 둘레가 3.5㎞에 달하는 평지성으로서 성벽의 저변은 43m가 넘고 높이도 9m 이상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토성이다. 
성 내부를 발굴한 결과, 신전(殿)으로 생각되는 건물지와 이 신전에 사용한 토기들을 보관해둔 우물형 수장고와 중국제 도자기를 보관한 창고도 확인되었다. 
이외에 부뚜막이 있는 주거지와 도로 유적 및 무수한 기와 등도 출토되었으며 성밖에서는 목조 우물도 확인되었다. 
몽촌토성은 구릉을 이용하여 만든 것으로서 성벽에는 목책을 둘렀다. 
성내를 발굴한 결과, 저장 시설과 연지가 확인되었다. 
문헌에 의하면 이곳에 별궁()이 조영되었다.
웅진도읍기의 도성은 웅진성이었다. 
이 웅진성은 오늘날의 공주 공산성()이다. 
왕궁의 위치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공산성 내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고 연회장소인 임류각()도 확인되었다.



사비도읍기의 도성은 사비성이었다. 
사비도성은 나성으로 둘러싸였다. 
발굴 결과 북나성()과 동나성()은 확인되었고 서측과 남측은 백마강을 자연방어 시설로 활용하였다. 
왕궁은 부소산성() 남쪽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고, 부소산성은 평화 시에 후원의 역할을 하였다. 

시가지 구조는 관북리에서 정리사지로 뻗은 남북 대로를 중심으로 사방이 바둑판처럼 짜여졌다. 이를 방리제라고 한다. 
도성 내부는 상부()·전부()·중부()·하부()·후부()로 나뉘고, 각 부는 다시 오항으로 나누어졌다. 
궁남지()에서 출토된「서부후항 목간」은 왕도 조직이 부-항으로 이루어진 것을 입증해준다.
각 부는 달솔 관등을 소지한 자가 맡았으며, 500명의 군사가 배속되어 있었고, 나성 외곽에는 청마산성(), 주장산성, 울성산성(), 부산성(), 석성산성() 등 많은 성들이 배치되어 도성 방어망을 형성하였다.






지방통치조직
백제의 지방제도는 지방에 대한 통제력 강화와 지방의 생산물 수취를 목적으로 마련되었다. 
부체제 단계까지 지방에 대한 통치는 부의 장을 통한 간접지배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고 지방통치조직이 마련되어 지방관이 파견됨으로써 지방에 대한 직접지배가 이루어졌다. 

백제의 지방제도는 근초고왕이 영역을 분정하고 지방관을 파견해 각 지방의 생산물을 파악하게 함으로써 비로소 만들어졌다. 
이때 만들어진 지방통치조직이 담로이다. 
이 담로는 종래 마한을 구성하였던 국을 토대로 하여 만들어졌다. 
여기에는 왕족이나 유력한 귀족이 파견되었으며 종래 국의 수장이나 읍락의 거수들은 재지세력으로 전환되어 담로에 파견된 관료들을 보좌하였다. 
한성도읍기의 담로의 수는 50여 개로 추정되는데 웅진도읍기에 와서 22개로 축소되었다.



사비천도를 계기로 백제는 담로제를 방·군·성(현)제[··()]로 재정비하였다. 
방·군·성(현)제는 중앙에서 지방을 보다 강력하게 통제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방은 중방()·동방()·남방()·서방(西)·북방()의 5방으로 구성되었고, 각 방에는 방성()을 두어 방의 중심지로 삼았다. 
중방은 고사성(), 동방은 득안성(), 남방은 구지하성(), 서방은 도선성(), 북방은 웅진성이다. 
방의 장관은 방령이고, 달솔의 관등을 가진 자가 맡았으며 보좌관으로 방좌()가 있었다. 
이러한 방은 군·성과 중앙을 매개하는 기능을 하면서 동시에 군관구적() 성격을 지녔다. 방성의 내부구조는 수도와 마찬가지로 5부-5항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중방의 치소였던 고부읍성() 발굴에서 발굴된 백제 기와에 새겨진 ‘-(상부-상항)’이란 명문에서 확인된다. 
5방성의 명칭과 위치는 다음과 같다.




오방성의 명칭과 위치
방성 명칭 현재의 지명
중방성() 고사성()전북 고부
동방성() 득안성()충남 은진
남방성() 구지하성()광주 또는 남원
서방성(西) 도선성()충남 대흥
북방성() 웅진성()충남 공주
군은 37개 군으로 구성되었다. 
군의 장으로는 군장() 3명이 있었고, 덕솔의 위계자가 임명되었다. 
군 규모의 성보다 작은 단위의 것을 소성() 또는 현()이라 했는데, 그 장은 도사(使)라 하였다. 
소성(현)은 방성이나 군성()에 통속되어 있었다. 
성(현)의 수는 200∼250개였다. 

성(현)의 수가 이렇게 많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종래 사회편제 단위였던 읍락이 행정조직을 이룰 정도로 경제적으로 성장하고 인구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5방제는 백제 말기에 와서 5부제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나 성격의 변화는 없었다. 
멸망할 당시 백제는 5부·37군·200성(혹은 250현)이었고 호수()는 76만호()였다. 
방·군·성(현)제의 실시로 중앙의 통치력이 보다 강력하게 지방에 미칠 수 있게 되었고 지방의 재지세력들은 군사()나 현사()에 속하여 지방관의 지방통치를 보좌하였다.




군사제도

군사조직과 운용
백제의 군사조직은 국단계에서는 읍락의 지배자인 거수층과 호민층이 중심을 이루었다. 
이들은 일종의 명망군()으로서 참전의 대가로 전쟁에서 획득한 노획물이나 포로 등을 분배받았다. 
반면에 하호()층은 군량을 조달하였다. 
오부체제가 확립되어 군사권이 국왕에게로 집중되면서 국왕의 명을 받아 군령권을 행사하는 좌장이 설치되었다.

중앙집권체제가 갖추어지고 또 전쟁의 규모가 확대되면서 군사조직도 정비되었다. 
근초고왕이 3만명의 정병()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공격한 것이 이를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근초고왕은 왕도의 주민을 주축으로 하는 중앙 군사조직과 지방 주민들을 징발하여 편성한 지방군사조직을 만들었다. 
대규모의 군사조직이 편성되면서 종래의 명망군적인 군대만으로는 병력을 충원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근초고왕은 일정한 연령층의 백성[정남()]들에게 군역 의무를 부과하고 이들을 병사로 징집하였다. 
이로써 국민개병제()에 의한 군사충원제도가 마련되었다. 
이들의 복무기간은 3년이었다.




백제의 군사조직은 웅진도읍기를 거쳐 사비도읍기에 와서 재정비되었다. 
사비도읍기에 정비된 군사조직은 시위군(), 중앙군(), 지방군()으로 나누어진다. 
시위군은 국왕의 친위 군사로서 왕궁을 시키고 국왕의 행차에 호종하는 기능을 하였다. 이 시위군은 왕도에 주둔한 2,500명의 군사였다. 
이 군사들은 5부에 각각 500명씩 배치되어 있었다. 
이 시위군은 총체적으로 위사좌평이 관장하였고 그 아래에 달솔의 관등을 지닌 자가 각 부에 배치된 군사들을 통솔하였다. 
중앙군은 외침을 방어하거나 다른 나라를 공격할 때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군사력이었다. 
병졸들은 왕도인을 징발하여 편성하였는데 지방민의 일부도 차출되기도 하였다. 
중앙군은 청마산성, 청산성 등 사비도성의 주변에 위치한 산성에 주둔하였다.




군사조직의 운용기구로는 사군부, 병관좌평, 좌장, 장군 등이 있었다. 
사군부는 내외병마를 총괄하는 관청이었고, 병관좌평은 내외의 군정 업무를 담당하였으며, 좌장은 왕명을 받아 출동하는 군부대를 지휘하는 군령권을 행사하였다.  
좌평이나 달솔의 관등을 가진 자들이 왕명을 받아 군사권을 행사할 때는 장군을 칭하였다. 
최고 지방통치조직인 5방에는 각각 1,000∼1,200명의 군사 또는 7∼8백명 정도의 군사들이 주둔하였다. 
이 군사들은 방의 장관인 방령이 통솔하였다. 
군에도 군사가 배치되었는데 장관인 군령()이 통솔하였고, 현에 배치된 군사는 장관인 도사(성주)가 관할하였다.




군사의 지휘와 훈련
군대를 출동할 때 통솔하는 방법은 친솔형과 교견형으로 나누어진다. 
친솔형은 최고 군령권자인 국왕이 직접 군대를 지휘하는 것을 말하며, 교견형은 국왕은 왕도에 머무르고 신하들에게 군령권을 임시로 위임하여 행사하는 것을 말한다. 
군령권을 위임할 때 국왕의 재가를 받지 않고도 군사와 관련항 사항을 처리할 수 있는 편의종사권이 부여되기도 하였다. 
군령권의 위임은 좌장에게 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때로는 좌평이나 달솔의 관등을 가진 자도 위임받기도 하였다.
병종으로는 보병(), 궁수대(), 기병(), 수군() 등과 특수병종으로서 노군(), 충군(), 석투군(), 운제군() 등이 있었다. 

노군은 요노()로 무장한 부대를, 충군은 충차()를 이용하여 성문을 공격하는 부대를, 석투군은 투석을 전문으로 하는 부대를, 운제군은 구름사다리를 이용하여 성벽에 오르는 부대를 말한다. 

군사훈련은 평상시에는 병법에 따라 행해졌다. 
때문에 군령권자가 누가 되더라도 그 지휘에 따를 수 있었다. 
전렵()은 본래 사냥 놀이지만 이에 부수하여 군사훈련도 행하였다. 
습사()는 매월 보름과 초하루에 정기적으로 활쏘기 연습을 하는 것이다. 
왕도에서 도성 서쪽에 사대()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오행에 의할 때 서쪽은 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무구()에는 개인 방호를 위한 갑주()를 비롯하여 충차(), 포차() 등과 같은 공·수성용 무기와 마구()가 있었다. 
병기로는 단병기, 장병기, 속사병기, 공·수성용 병기가 있었다. 
궁수대가 사용하는 화살대는 대나무, 싸리나무, 박달나무 등으로 만들었다.




신분제도

신분제는 가문에 따라 정치적 사회적 특권과 제약이 주어진 사회적 제도이다. 
백제의 신분제는 백제국이 성장하면서 마한의 여러 나라들을 통합하여 중앙귀족으로 전환시키고 중앙과 지방의 귀족들을 편제하는 과정에서 성립되었다. 
백제의 신분은 크게 지배신분층, 평민층, 천인층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지배신분층은 공복의 복색과 관등제를 연결시켜 볼 때, 내부적으로 몇 개의 층으로 구별할 수 있다. 
제1신분 층은 자복()을 입는 솔계 관등 이상을 소지할 수 있는 층이다. 
제2층은 비복()을 입는 덕계 관등을 소지할 수 있는 층이다. 
제3층은 청복()을 입을 수 있는 관등층이다. 
이 가운데 지배신분층의 중심은 왕족과 왕비족이었다. 
왕족은 부여족의 일파로 남하해 와서 건국한 온조계 집단으로 이루어졌으며, 왕비족은 한성도읍기 전기에는 진씨, 후기에는 해씨가 되었다. 
사비도읍기에 와서는 왕족 이외에 대성팔족이 최고신분층을 형성하였다. 
대성팔족은 사씨·연씨·해씨·진씨·목씨·백씨()·협씨()·국씨()를 말한다. 
이 가운데 5∼6명으로 정원이 정해진 좌평과 30명으로 정원이 정해진 달솔은 최고 귀족신분층 출신자들이 오를 수 있는 관등이었다.
신분제는 관등·관직제를 규정하기 때문에 신분에 따라 관등·관직·복색·대색에도 구별이 있었다. 

왕은 금화로 장식한 오라관()을 쓰고, 흰 가죽띠를 두르고, 검은색의 비단신을 신었다. 
지배신분층 가운데 제1층은 자복을 입고, 은화로 장식한 관을 썼다. 
제2층은 비복을 입었고, 자대에서 황대까지의 띠를 띠었다. 
제3층은 청복을 입되, 황대에서 백대까지의 띠를 둘렀다.

이러한 귀족의 지배를 받은 피지배층의 주류는 신분적으로는 자유민인 일반 농민이었다. 
농민은 소규모 토지보유자로서 농업·공업·상업에 종사했으며, 국가 수취의 주된 대상이었다. 
이들은 비색이나 자색의 옷을 입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 밑에는 최하층의 신분으로서 천인과 노비가 있었다. 


천민신분층은 정복전쟁과 통일전쟁의 전개과정에서 피정복민들이 천민집단으로 또는 노예로 전락되면서 성립되었다. 
노비는 관노()·사노()가 있었다. 관노는 국가 또는 관청에, 사노는 개인에게 예속되었다. 
노비는 물건과 같이 취급받는 비자유인이었다. 
노비의 공급 및 재생산의 방법에 따라 전쟁포로·부채노비·형벌노비와 노비소생자를 노비로 삼는 세습노비 등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경제

토지제도
백제는 철제의 농기구·토목용구()를 사용함에 따라 농업생산력이 발전하면서 사적 소유가 진전되었다. 
이에 따라 경작지에 대한 공동체적 소유가 소멸되어 점차 개별적인 토지사유가 가능하게 되었다.

토지지배의 유형에서 상부 특권층의 토지지배에는 국가·왕실의 직속지, 귀족들에 대한 사전(), 사원전() 등이 있었다. 
대귀족에 대한 식읍()의 사여()도 있었다. 
전렵지인 서해대도(西)·횡악() 등은 국왕의 직속지였을 것이다.
사원은 왕실과 귀족의 후원에 힘입어 대토지소유자로 등장하였다. 
귀족들은 자신의 소유지 외에 특별한 공로로 전조권()이나 식읍을 부여받기도 했고, 새로운 토지를 개간함으로써 대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농민의 토지지배로는 농민이 개별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소규모의 경작지가 있었다. 
소를 사용한 경작[우경()]으로 토질이 개선되고 노동력이 절감되었다. 
이에 농업경영 방식도 노동력이 많이 소요되는 집체적 방식에서 소농() 중심의 농업경영 추세를 보이게 되었다. 
개별 농가가 농업경영 단위로 성장함으로써 개별 농가에 의한 토지소유가 촉진되고, 농민층의 다양한 계층분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러한 농민 경작지는 국가의 각종 수탈과 귀족층의 강점() 대상이 되었다. 
빈번한 전쟁에의 동원 등으로 농토를 상실한 농민은 노비로 전락하거나 남의 농토를 용작()하기도 하였다. 
토지경작은 소규모의 경작지를 보유한 자유농민에 의해 주로 이뤄졌으며 노예노동도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토지지배는 생산력의 향상과 연관된다. 
백제는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철제 농기구의 사용을 장려하고 또 우경을 행하도록 하였다. 
나아가 수리관개시설()을 정비하였다. 
수리시설은 안동 저전리에서 청동기시대 저수지가 발굴된 것에서 보듯이 청동기시대부터 만들어졌다.



『삼국사기』초기기록에 보이는 수리시설은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은 저수지 제방이라 할 수 잇다. 
백제에서 본격적으로 저수지가 축조되기 시작한 것은 4세기 전반 경에 만들어진 김제의 벽골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 벽골제는 나뭇가지 등을 이용한 부수공법에 의해 축조되었다. 
웅진도읍기에 와서 무령왕은 경제기반을 확대하기 위해 전국의 제방을 수리하고 새롭게 축조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저수지의 축조는 많은 논에 물을 공급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갈수기()에도 물을 공급할 수 있어서 획기적인 생산력의 향상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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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17일 금요일

스코틀랜드 , Scotland .

스코틀랜드 , Scotland.

영국 그레이트브리튼섬 중에서 트위드강 하류부로부터 셰비엇 구릉을 거쳐 솔웨이만(灣)에 이르는 경계선 북부 지방.

에든버러성영국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중세기 의 성으로 7세기경부터 축성이 계속되어 왔다. 성내에서는 11세기의 교회 세인트 마 거렛트차펠, 그래트홀, 박물관 등이 있다.
남으로는 잉글랜드 최북부의 노섬벌랜드주() 및 컴브리아주와 인접해 있고, 동으로는 북해, 서로는 대서양을 앞에 두고 있으며, 남서부에서는 노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북()아일랜드와 마주보고 있다. 
지리적으로 북부에서 남부를 향해 하일랜즈·롤랜즈·서던업랜즈로 갈라져 있으며, 인구의 대부분은 동부 해안지대로부터 롤랜드에 이르는 평야부에 모여 있다. 
북부와 서부의 해안선이 길며, 헤브리디스 제도·오크니 제도·셰틀랜드 제도를 비롯하여 800개 가까운 유인도·무인도가 있다. 
처음에는 픽트인()과 스코트인으로 대별되는 켈트계() 부족들의 소왕국이 몇 개 있었으나 11세기까지 스코트인의 지배하에 있는 통일왕국이 수립되어 점차 주변 부족들을 병합하였으며, 15세기에는 오크니 제도와 헤브리디스 제도도 스코틀랜드의 일부가 되었다.

그동안 잉글랜드와의 항쟁이 계속되었으나 13세기의 스코틀랜드 왕 알렉산더 2세·3세시대에 현재와 거의 같은 경계선이 확립되고 정치적·경제적 안정을 이루었다. 
스코틀랜드인은 흔히 이 시기를 자국의 황금시대로 간주한다. 
그 후에도 잉글랜드와의 항쟁은 계속되었으며, 그 사이사이에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2세에 대한 1313∼1314년의 독립전쟁의 승리, 1503년 제임스 4세와 잉글랜드 왕 헨리 7세의 딸 마거릿과의 결혼, 
1567년의 메리 여왕의 처형 등과 같은 큰 사건들이 일어났다. 
1603년에 잉글랜드 왕 엘리자베스 1세가 죽자, 메리의 아들 제임스 6세가 혈통에 따라 잉글랜드 왕을 겸하게 되어(제임스 1세), 양국의 동군연합()관계가 성립하였다. 
시민혁명 당시에는 크롬웰에 의한 스코틀랜드 정복도 있었으나, 명예혁명 후인 1707년에 양국의 의회가 통합되고, 이에 양국은 연합왕국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스코틀랜드의 귀족 16명이 런던의 상원 의석을 차지하는 원칙도 이때 만들어졌다. 
이러한 연합의 결과로 스코틀랜드는 경제적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특히 글래스고의 상공업이 급속히 증대하였으나, 잉글랜드에 대한 뿌리 깊은 내셔널리즘은 그 후에도 존속하였다.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와는 별개의 자치법으로 통치되고 있으며, 독자적인 사법제도와 보건·교육제도를 가지며 국교회제도()도 독립해 있다. 
주도()는 에든버러이고, 경제적 중심은 글래스고이다. 
주요산업으로는 보리와 사탕무·감자 등의 농업, 소·양의 목축업, 임업·어업 이외에 석탄의 산출이 풍부하며, 한때 활발했던 제철·조선 등은 쇠퇴하였다. 
그 밖에 그레인지머드를 중심으로 한 화학공업과 각지에 분산해 있는 전통적인 모직물 공업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영국을 구성하는 연합왕국(잉글랜드ㆍ스코틀랜드ㆍ웨일스ㆍ북아일랜드)의 하나로, 그레이트브리튼섬의 북부 지역을 차지한다. 

면적 78,783㎢, 인구 5,062,011명으로, 수도는 에든버러이며, 경제적 중심지는 글래스고이다.
고대에는 픽트인(人)과 스코트인으로 대별되는 켈트계(系) 부족들의 소왕국이 몇 개 있었으나 10~11세기까지 스코트인의 지배하에 있는 통일왕국이 수립되어 점차 주변 부족들을 병합하였으며, 15세기에는 오크니제도와 헤브리디스제도도 스코틀랜드의 일부가 되었다. 
그동안 잉글랜드와의 항쟁이 계속되었으나, 13세기의 스코틀랜드 왕 알렉산더 2세ㆍ3세 시대에 오늘날과 거의 같은 경계선이 확립되고 정치적ㆍ경제적 안정을 이루며 스코틀랜드의 황금시대가 열렸다. 
그 후에도 잉글랜드와의 항쟁은 계속되었으며,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2세에 대한 1313∼1314년의 독립전쟁의 승리, 1503년 제임스 4세와 잉글랜드 왕 헨리 7세의 딸 마거릿과의 결혼, 1567년의 메리 여왕의 처형 등과 같은 큰 사건들이 일어났다.

이후 1603년에 잉글랜드 왕 엘리자베스 1세의 사망으로,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메리 여왕의 아들)가 혈통에 따라 잉글랜드 왕위까지 겸하게 되어(제임스 1세), 양국의 동군연합(同君聯合)관계가 성립하였다. 
시민혁명(1642년~1649년) 당시에는 크롬웰에 의한 스코틀랜드 정복도 있었으나, 명예혁명(1688년) 후인 1707년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양국의 의회가 통합되면서 연합왕국(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을 형성하였다. 
이로써 스코틀랜드의 귀족 16명이 런던의 상원 의석을 차지하는 원칙도 결정되었다. 
그 결과 스코틀랜드는 경제적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특히 글래스고의 상공업이 급속히 증대하였으나, 잉글랜드에 대한 뿌리 깊은 민족적 반감은 그 후에도 존속하였다.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와는 별개의 자치법으로 통치되며, 독자적인 사법제도와 보건ㆍ교육제도를 비롯해 국교회제도(國敎會制度) 또한 독립해 있다.(스코틀랜드의 국교는 장로회(그리스도교 신교)).


이로써 스코틀랜드의 귀족 16명이 런던의 상원 의석을 차지하는 원칙도 결정되었다.



이로써 스코틀랜드의 귀족 16명이 런던의 상원 의석을 차지하는 원칙도 결정되었다.
이로써 스코틀랜드가 연합왕국으로부터 분리독립하는 방안이 추진돼 왔다. 
이후 2012년 10월 15일 영국 정부와 스코틀랜드 자치정부의 협정을 통해, 2014년에 스코틀랜드 분리독립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를 시행하기로 최종 합의했다.

이에 따라 스코틀랜드는 2014년 9월 19일(현지시간) 오전 6시부터 오후 10시까지 분리독립 찬반 주민투표를 실시하였다. 
투표는 16세 이상의 스코틀랜드 주민을 대상으로 실시됐으며, '스코틀랜드가 영국 연방에서 분리독립해야 하는가'라는 단일 문항에 찬성ㆍ반대 중에 결정하도록 했다.

유권자 428만 명이 참여한 이번 투표는 역대 최고인 84.6%의 투표율을 기록했으며, 투표 결과 반대 55%-찬성 45%가 나오면서 스코틀랜드의 독립은 무산됐다.
307년 만에 영국 연방에서 떨어져 독립국가로서 자립하려던 스코틀랜드 자치정부의 도전은 무산됐으며, 현재 잉글랜드·스코틀랜드·웨일스·북아일랜드 등 4개 지역으로 이루어진 영국연방(UK) 체제는 계속 유지된다.


투표는 16세 이상의 스코틀랜드 주민을 대상으로 실시됐으며, '스코틀랜드가 영국 연방에서 분리독립해야 하는가'라는 단일 문항에 찬성ㆍ반대 중에 결정하도록 했다.

유권자 428만 명이 참여한 이번 투표는 역대 최고인 84.6%의 투표율을 기록했으며, 투표 결과 반대 55%-찬성 45%가 나오면서 스코틀랜드의 독립은 무산됐다.



스코틀랜드 자치정부가 영국 중앙정부로부터 조세권과 예산권을 대폭 넘겨받는 자치권 확대 약속을 얻어냄에 따라 조만간 중앙정부는 스코틀랜드 지방정부에 권한을 대폭 이양하는 ‘지방정부 권한 강화(devo-max)’ 협상을 시작할 계획이다.


영국 본토인 그레이트브리튼 섬 북부의 지방. 
수도는 에든버러.
북부는 산지가 많은 고원 지방, 중부는 저지대, 남부는 구릉 지대로 나누어짐. 
중부 저지에는 도시가 많고 지하 자원이 풍부해 기계 · 화학 · 제지 · 섬유 · 의류 등 공업이 발달했다. 
고원 지방은 스카치위스키가 특산품임. 
역사적으로 여러 왕국이 교체됐고 잉글랜드와 대립을 계속하다 1707년 합병됐으나 대립 의식은 계속돼 왔음.

켈트계 부족들의 소왕국이 몇 개 있었으며, 11세기까지 스코트 인의 지배하에 통일 왕국이 수립되어 주변 부족들을 병합하였다. 
그동안 잉글랜드와의 항쟁이 계속되었으며, 13세기에 현재와 같은 경계선이 확립되었다. 
1603년에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가 죽자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왕을 겸하게 되어 양국의 연합 관계가 형성되었다. 
1707년에 양국의 의회가 통합되어 연합 왕국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스코틀랜드는 경제적으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잉글랜드와는 별개로 자치법으로 통치되고 있다.

경제적 중심지는 글래스고이다. 
화학 공업과 전통적인 모직물 공업이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지명은 '스코트 사람들의 땅'이라는 뜻인데 켈트 어로 스코트는 '도망자', '방랑자'라는 의미가 있다. 
스코트 인은 아일랜드의 선주민으로 3세기경 영국 본토(그레이트브리튼 섬)로 이주하였다. 
'유랑하는 양치기'라는 뜻도 있다. 
이 곳에서 생산되는 술을 스카치위스키라고 하며, 남자 양치기들이 입었던 치마는 스카트라고 했다.

최근 세계 곳곳에서 분리독립 갈등을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거세지고 있어요. 
2014년 9월에는 스코틀랜드에서 분리 독립 주민투표가 있었고, 스페인 카탈루냐 주에서도 11월에 주민투표가 있어요. 
벨기에, 이탈리아, 캐나다, 중국 등도 여전히 분리독립 문제로 골치를 썩이고 있답니다.
2014년 9월 19일 열린 스코틀랜드 분리독립 주민투표 결과, 반대표가 200만 2천 표(55.3%)로 찬성 161만 8천 표(44.7%)보다 높게 나왔습니다. 
이로써 1707년 영국에 합병된 후 307년 만에 시도됐던 스코틀랜드의 분리독립은 무산됐고, 스코틀랜드는 영국을 구성하는 4개의 자치정부 중 하나로 남게 됐습니다.

투표 전 스코틀랜드의 자치권을 늘리기로 약속했던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스코틀랜드가 영국에 남아 기쁘다. 
더 나은 미래를 향해 함께 가자.”고 선언했습니다. 
스코틀랜드 독립을 주장했던 알렉스 새먼드 스코틀랜드 자치정부 수반은 “모든 스코틀랜드인은 민주적 결정을 받아들이자.”며 투표 결과를 인정했습니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도 영국 국민의 이해와 단결을 강조했습니다.

이번 투표 결과를 보면 찬성과 반대 비율의 차가 크지 않습니다. 
스코틀랜드의 분리독립 찬반 세력 사이의 갈등을 풀어 가는 게 쉽지 않을 전망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중심도시 에든버러에서는 독립 반대표(61.1%)가 더 많았던 반면, 가장 큰 도시인 글래스고에서는 독립 찬성표(53.5%)가 더 많았습니다. 
이번 주민투표는 84.6%라는 스코틀랜드 사상 최고 투표율을 기록했습니다.

영국 정부는 지난 2년 동안 벌인 분리독립의 갈등을 해소하고, 스코틀랜드와의 화합과 관계 개선에 노력해야 할 숙제를 안게 됐습니다.

가장 호감이 가는 사람 중의 하나이자 위대한 철학가인 David Hume(1711~76)은 인식론자, 도덕주의자, 정치이론가, 역사가로 알려져 있다. 

흄은 인과적 추론이 이성보다는 관습에 따른다고 하여 그 타당성에 회의적이었지만, 정신생활의 다른 분야에서 관습과 관례의 역할에 조심스러웠다. 
사실 관습은 인간생활의 가장 큰 안내자이다. 
관습은 인간의 경험을 유용하게 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미래가 과거와 같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끔 한다.
자연과 사상의 과정 사이에 예정된 조화가 있으면, 그것은 곧 관습에 기인한다.

"관습은 이러한 일치에 영향을 주어 온 원칙이다. 따라서 그것은 인간생활의 발생과 모든 환경에서 인간의 생존유지와 행동규제에 필요한 것이다."

사실 여기에서 지식사회학이 막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흄은 또한 자연법의 원리를 공격하고, 옳고 선한 것에 대해 우리가 의미하는 것은 사회의 관습으로부터 유래된다고 주장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규범이라고 부르는 규칙은 개인적 이익의 만족이나 사회의 안정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사회는 정부 없이도 가능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것을 원시상태하에서만 본다. 인간의 약점은 가까운 곳의 선을 먼 곳의 선보다 선호하는 데 있으며, 정부의 제도가 이러한 경향을 치료하지는 못하더라도 완화하는 것은 가능하다. 사회학의 이해를 위한 흄의 밀접한 접근은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드러난다.

"모든 국가와 시대에 있어서 인간의 행동에는 큰 일치점이 있으며, 그 원칙과 작용에서 인간의 본성은 여전히 같다고 보편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리고 그 뒤에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여러분은 그리스와 로마의 생활과정과 정서, 성향들을 알고 있는가? 프랑스 사람들과 영국 사람들의 기질과 행동을 잘 연구해 보라. 
여러분은 후자에 대하여 행하였던 대부분의 관찰을 전자로 옮기더라도 큰 실수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류는 모든 시간과 공간에서 많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역사는 우리에게 새롭거나 낯선 어떠한 것도 보여 주지 않는다. 
역사의 장점의 이용은 모든 다양한 상황과 환경 속에서 나타나는 인간성의 보편적이고 지속적인 원칙을 찾게 하고, 우리가 관찰을 하여 인간행동의 규칙적인 원천에 친숙해지는 자료를 제공하는 데 있다."

물론 편견, 여론, 성격의 다양성과 성별, 연령의 차이는 고려해야 한다. 
대체적으로 인간들 사이에는 일치된 성향이 있다. 
정의와 재산의 기원을 논의하는 데 있어서 흄은 사회의 기원을 탐색할 기회를 가졌다. 
자연은 인간에게 자신의 만족을 충족시킬 수단보다는 욕구를 더 많이 줌으로써 잔혹한 대상이 된다.
인간의 '불완전성이 보상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회에서만 가능하다. 
이러한 필요성이 사회의 제일의 근원적인 원칙이다.

"이러한 필요성은 성적인 자연적 욕구 바로 그것이며, 양성이 결합하여 자기들의 후손에 대한 관심 속에서 새로운 유대의 결합을 보존한다. 
이러한 새로운 관심사는 부모와 자녀간의 결합의 원칙이 되며 많은 사회를 형성하게 된다."

덧붙여서, 흄은 자연의 상태가 공허한 허구라고 믿었다. 
"Of the Original Contract"라는 논문에서 자연의 상태는 단지 정의가 인간의 관습의 결과로서 발생하는 것을 보여 주는 데만 유용하다고 하였다. 
흄은, 정부가 숲과 사막에서 출발한 초기에 몇몇 사회계약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역사에 나타난 모든 정부들은 동의보다는 강제에 기초하고 있다. 
이 논문에 대해 Peter Gay는 "흄이 도덕철학뿐만 아니라 정치 철학도 사회학으로 전환시키고자 하였다"고 말하였다.4)

"Of National Characters"라는 논문에서, 흄은 사회에서의 지리적 요인의 영향을 상당히 자세하게 논의하고 몽테스키외와는 대조적으로 "인간은 자신의 기질이나 재능을 공기, 음식, 기후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에 회의하고 있다. 
그는 한 논문에서, 흄은 왜 지리적 해석이 받아들여질 수 없는가에 관한 적어도 9가지 이상의 이유를 보여 주고 있다. 
북부지역의 인간은 술을 소비하는 성향이 있지만, 남부지역에서는 사랑과 여성을 더 선호한다.

그러나 이러한 측면에서도 도덕적 명분은 육체적인 것만큼 중요한 것이다. 
흄은 취미와 열정, 미신과 열광, 인간본성의 위엄과 비천함, 시민의 자유, 예술과 과학의 발생과 진보, 일부다처제와 이혼, 돈, 고대국가의 인구, 관습, 이혼, 그리고 오만과 겸손, 사랑과 결혼, 자살 등 사회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 문제에 관한 많은 글들을 썼다. 
마지막으로, 비교자료들을 이용하고 있는 Natural History of Religion은 종교사회학에 분명한 공헌을 하고 있다.

Adam Ferguson(1723~1816)이 사회학의 실질적인 아버지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것은 뉴턴에 대한 찬양처럼 예사로운 것이 되었다. 
퍼거슨은 흄과 애덤 스미스가 소속되어 있는 유명인사들의 모임의 중요한 회원이었으며, 이 집단은 예술과 과학의 분야에서 스코틀랜드의 계몽주의를 형성하였다. 
'북쪽의 아테네'로 알려진 Edinburgh는 파리와 경쟁하였고 문화와 학문의 중심지로서 런던과 필라델피아를 능가하였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여러 측면에서 18세기의 스코틀랜드는 영국보다는 프랑스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어쨌든 퍼거슨 자신이 Edinburgh Review에서 언급한 것처럼, 가장 전형적인 스코틀랜드인인 그는 Black Watch Highland Regiment에 목사로서 봉사하였고 아직도 알 수 없는 이유에서 스코틀랜드의 교회를 떠나 법무부 도서관 관리자로서 흄을 계승하였으며, Edinburgh의 대학에서 도덕철학과 기역학(Pneumatics)의 교수가 되어 1759년부터 1785년 은퇴할 때까지 일을 하였다. 퍼거슨은 1767년 Essay on the History of Civil Society를 출간하였고, 1792년에는 강연집인 Principles of Moral and Political Science를 출간하였다. 또한 그는 1782년에 History of the Progress and Termination of the Roman Republic을 간행하였다.

퍼거슨은, 사회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상태이며, 인류에 관한 적절한 연구는 개인들보다는 집단에 대한 연구라고 믿었다. "인류는 집단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 주제와 관계 있는 모든 실험은 개인이 아닌 전체사회에 대해 행해져야 한다." 그리고 "인류는 항상 무리나 집단으로 이동하거나 정착하고, 합의를 하거나 다투기도 한다."5) 흄의 명제 중의 하나인 인간정신은 그 발전을 위해 사회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사회의 분위기는 인간정신이 지성의 첫 숨을 쉬게 되는 요소라고 볼 수 있다. 도덕적 정서의 훌륭한 생명력 있는 공기가 아니라면, 불꽃을 밝히는 강력한 효과는 없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인간의 정신은, 예를 든다면, 바로는 불이 붙을 수 없는 땔감에 비교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만약 다량으로 모아지면 쉽게 불꽃으로 점화될 것이다."6)

"사회로부터 사람의 행복한 정서만이 아니라 힘을 얻으며 합리적 성격의 그 모든 것을 얻는다. 사람을 사막으로 혼자 보내면 뿌리 없는 식물과 같아진다. 형체는 있을지언정 모든 능력은 시들고 인간됨이나 인간성은 없어진다."7)

사회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는 창안, 상상, 추측을 피하고 관찰에 의존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는(루소를 생각하고 있다), 도덕철학은 과학적 기초에 의존해야 하며 지리학, 심리학, 언어의 역사, 그리고 인구학으로부터 경험적인 증거를 이용해야만 한다. 그러나 퍼거슨은 심리학적 원리로부터 사회의 구조를 연역하려고는 시도하지 않았다.

그의 모든 동시대인들처럼 몽테스키외로부터 영향을 받은 퍼거슨은, 지리학의 중요성은 인정했지만 사회변동에 관한 일원론은 거부하였다. 그는 사회를 미개, 야만, 세련의 시대로 나누었다. 이러한 구분은 MacRae로 하여금 퍼거슨을 다윈 이전의 진화론자로 인정하도록 하였다. 그는 또한 자연의 상태에서 살고 있는 인간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거부하였다. 만약 우리가 자연의 상태를 찾고자 한다면,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는 영국의 섬과 희망봉에 있는 우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19세기의 그의 계승자들보다 더욱 세련된 퍼거슨은 유기체와의 유추를 거부하였다.

"인간의 구조는 일반적인 과정을 가지고 있다. 
모든 개인들에게서 그 구조는 연약한 조직과 제한된 지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경험에 의해 닳고 그 기능의 반복에 의해 피폐된다. 
사회에서는 그 구성원들은 세대마다 새로와지고 인류가 영구한 젊음과 누적된 이익들을 향유하기 때문에 우리는 햇수나 세월의 길이와 관련된 저능함을 발견하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

퍼거슨은 사회의 단일성, 다양성 모두를 강조하였다. 
사회의 진화는 목적적인 것이 아니다. 
그럭저럭 꾸려 가는 사회는 인간행동의 결과이지만, 어떤 인간의 설계의 실행은 아니다. 
각 사회는 교환의 준비가 되어 있을 때에만 다른 사회로부터 관습을 차용한다. 
사회진화는 선형적인 것이 아니라 순환적인 것이다.
퍼거슨은 왜 국가들이 종종 번성하게 되는 것을 멈추는가 하는 점을 묻고 있지만, 미덕의 쇠퇴가 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만족스런 설명도 제시하지 않았다. 
미덕은 투쟁의 시기에 활성화되며, 목표들이 달성되면 악에 굴복한다.

퍼거슨은, 약 1세기 반이 지나 짐멜이 말한 것처럼, 사회갈등이 장점을 가지고 있으며 필수적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창조물과 결코 투쟁하지 않은 자는 인류의 정서를 잘 모르는 것이다." 
인간은 적극적으로 갈등을 즐기며, 대립의 기회를 기쁘게 포용한다. 
공격은 활기를 돋구어 준다. 
전쟁은 시민사회의 응집에 이바지한다. 
이러한 응집이 없으면 사회는 형성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적대하는 사람들에 대한 적의를 인정하지 않고 그들 사이에 일체감만 있다고 기대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그리고 "강철에 불을 붙일 때 부싯돌이 필요한 것처럼, 아테네는 그 미덕의 행사에 있어서 스파르타에 필수적인 것이었다." 
우리는 내집단/외집단 원칙의 보다 명료한 표현을 찾을 수 있다. 
다른 문제에 대해서 콩도르세가 했던 것처럼 퍼거슨은, 생계유지수단은 인구성장을 제한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인간은 상황이 마음에 드는 곳에 모일 것이며, 몇 세대가 지나가면 생계유지수단의 정도에 따라 국민이 모이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퍼거슨은 분업에 관한 글을 썼고 그 후의 사회학자들처럼 그것의 장점과 단점을 이해하였다. 
그것은 진보에 필요한 것이고 예술적인 삶의 육성을 위해서도 필수적인 것이다.
미개와 야만사회에서 인간은 너무 많은 일들을 해야만 했기 때문에 그것들을 모두 잘할 수는 없었다. 
분업과 함께 인간은 일들을 분리시킬 수 있게 되었고 점차 세련되어 갔다. 
보다 생산적이게 되었다. 
마르크스(그는 퍼거슨을 좋아했다)가 인식했듯이, 분업은 또한 소외를 동반한다.

따라서 분업은 축복과 저주의 양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분업은 공동체를 분리시키고 사회의 통합을 위협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 세기 후에 뒤르켐이 해결하려고 노력했던 사회문제를 만들어 낸다. 
우리는 "분업에 관한 퍼거슨의 글들은 18세기 사회학의 작은 승리이다"라고 말한 Peter Gay에 쉽게 동의할 수 있다.
우리가 퍼거슨이 사회학적인 주제에 관해 쓴 것에 관해 무엇인가를 말한다면, 우리는 작은 승리를 한 것이 아니라 주요한 부분의 하나를 얻은 것이라고 할 것이다. 
오늘날 퍼거슨에 관한 호의적인 평가가 있으며, 우리는 우리 시대의 적절한 표현으로 그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Donald MacRae가 주장했듯이, 퍼거슨이 경제학을 알고 있었다면 그것은 그의 사회학에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애덤 스미스에 있어서는 그 반대로 되어 있다. 
그의 사회학은 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1759)에서 윤리이론에, The Wealth of Nations(1776)에서 경제이론에 도움을 주었다. 
『국부론』은 경제학사에 있어서 위대한 저서 가운데 하나이다. 
그의 경제학은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자유방임 자본주의를 위한 기초를 설정해 주었고, 비록 즉각적이지는 않았지만 사회과학으로 쓰여진 가장 영향력 있는 책의 하나가 되었다.

심지어 독일인들이 '애덤 스미스의 문제'라고 부르는 것을 형성하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그의 윤리이론이 이타주의를 지지하고 경제학이 이기주의를 지지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저녁상은 푸줏간, 양조장, 빵집의 자선이 아니라 그것의 이익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사회학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분업에 관한 초기의 글을 제외하고는 전적으로 경제학에 속하는 것이다.

18세기의 스코틀랜드를 말할 때 John Millar를 언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충분한 것이 될 것이다. 
그는 1735년 6월 22일 Edinburgh의 Glasgow 동부에서 몇 마일 떨어진 Kirk o'Shotts에서 태어났다. 
11세에 Glasgow의 대학에 입학하여 6년 동안 공부한 후, 후에 친밀한 친구가 된 애덤 스미스의 강의에 참여하였다. 
1760년에 법관이 되었고 1761년에 Glasgow 대학의 민법교수가 되었다. 
1801년 5월 30일 사망할 때까지 40년 동안 유명한 교수로서 지냈다.

그의 생애 동안에는 광범위하게 칭송되다가 잊혀진 두권의 책이 최근에 사회학에 중요한 공헌을 한 것으로서 재발견되었다. 
첫번째 책은 "An Inquiry into the Circumstances Which Give Rise to Influence and Authority in the Different Members of Society"라는 교육적인 부제를 가진 The Origin of the Distinction of Ranks이다. 이 책은 1771년에 쓰여져서 4판을 찍었다. 
두번째 책은 An Historical View of the English Goverment from the Settlement of the Saxons in Britain to the Accession of the House of Stewart라는 것으로 1787년에 간행되어 7판을 찍었다.

퍼거슨의 사상처럼, Millar의 사상은 사회학적인 틀에 분명하게 들어 맞는다. 
그는 인간의 사회제도를 지배하게 된 관습, 제도 등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비록 밀라가 Lycurgus, Solon, Alfred 왕과 같은 입법자들의 공헌을 인정하고는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의 형성에 있어서 개인보다는 관습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 
몽테스키외에 대해서 그는 사회변동의 원인적인 요인으로서 기후를 강조한 것을 거부하고, 스파르타와 아테네, 스페인과 프랑스, 그리스와 터키와 같이 비슷한 위치에 있는 나라에서 나타나는 차이들은 기후가 거의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다른 시기에 같은 나라에서 나오는 국민들의 다양한 관습들은 설명하지 못하며, 국민성은 기후의 직접적인 작용에 거의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었다. 
밀라는, 인간들 사이의 불평등의 원인은 능력과 성취에서의 차이, 우수한 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결코 이 불평등을 제거하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사실 계급 없는 사회는 헛된 희망에 불과하다. 
상위계급은 기생적이긴 하지만 지도력의 자질을 가지고 있고, 하위계급은 우둔하나 부지런한 지능을 부여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밀라는 분업에 관하여 통찰력 있게 글을 썼고 그것의 과도함이 인간정신에 미치게 되는 효과를 인식하였다. 
그는 19세기에 앞서서 사냥, 목축, 농업, 상업의 사회진화의 4단계 과정을 예견하였다. 
사회에는 무지로부터 유식으로, 거친 것으로부터 세련으로 발전하는 자연적인 진보가 있고, 그것은 저항될 수도 없고 너무 빠르게 될 수도 없는 단일한 과정이다.

밀라는 이름은 없어도 모든 면에서 사회학자인 것이다. 
Robert M. MacIver는 그를 독창적인 사상가이자 사회학의 개척자로 불렀다.11) 
그는 계몽화된 그의 동시대인들의 反교회적인 정서를 완전하게 공유하고 있었고, 스코틀랜드의 Augustan 시대의 지도력 있는 인물 중의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