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22일 수요일

성충 , 成忠.

성충 , 成忠.

일명 ‘정충()’이라고도 한다. 
656년 좌평()으로 있을 때 왕이 신라와의 싸움에서 연승하여 자만과 주색에 빠지자 국운이 위태로워짐을 극간하다가 투옥되었다.

옥중에서 단식을 하다가 죽음에 임박하여 왕에게 글을 올리기를 “충신은 죽더라도 임금을 잊지 못하는 법입니다.


656(의자왕 16)년 왕이 주색()에 빠져 정사가 어지럽자 이를 극간()하다 죽음을 당했다. 








죽으면서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신이 항상 시세의 흐름을 볼 적에 멀지않아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그때 군대를 사용함에 있어서는 그 지리적 조건을 잘 이용하여야 하는데, 강 상류에서 적병을 맞이하면 나라를 보전할 수 있습니다.
만일, 적군이 쳐들어오면 육로로는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에 못 들어오게 한 뒤, 험한 지형에 의지하여 싸우면 틀림없이 이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660년 신라군은 탄현을 넘어 수도 사비()로 쳐들어오고, 당나라 군대도 기벌포를 지나 사비성으로 쳐들어와 백제는 멸망하였다. 
왕은 그때서야 성충의 충언을 따르지 아니한 것을 후회하였다. 
청구영언()》에 그의 이름으로 전하는 다음 시조 2수는 후세인의 위작()인듯 하다. 


「뭇노라 멱라수()야 굴원()이 어이 죽더터니, 참소()에 더러인 몸 죽어 뭇칠imagefont히 업셔, 창파()에 골육()을 imagefont셔 어복리()에 장(imagefont니라」 「뭇노라 져 선사()야 관동풍경() 엇더터니, 명사십리() 해당화()만 붉어 잇고, 원포()에 양양() 백구()는 비소우를 imagefont더라.」



청구영언 , 靑言.
구분시조집
저자김천택(金天澤) 편찬
출간 시기1728(영조 4)
이칭청구영언(), 청구영언(), 청구영언()
1728년(영조 4)에 가인 김천택()이 편찬한 시조집. 필사본. 1권 1책. 우리의 노래가 구전으로만 읊어지다가 없어짐을 한탄하여, 기록으로써 후세에 전하고자 이 책을 편찬하였다고 한다. 
해동가요≫ · ≪가곡원류≫와 함께 중요 가집()의 하나이다.

작가

김천택( : ?~?)
자 백함()ㆍ이숙(), 호 남파()이다. 평민 출신으로 숙종 때 포교를 지냈다. 
창에 뛰어났으며 시조도 잘 지어 『해동가요』에 57수를 남겼고, 1728년(영조 4)에는 시가집 『청구영언()』을 편찬, 국문학사상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같은 평민 출신 노가재() 김수장()과 함께 ‘경정산가단()’에 동인()을 결집, 시조에 신풍을 불어넣었다. 

그때까지 시조계의 주류를 이루었던 학자ㆍ문인의 시조가 한정()을 즉흥적으로 노래한 도학적ㆍ관념적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시조는 제재를 일상생활 속에서 찾았고, 그 묘사가 사실적이었으며 해학이 풍부하였다. 
후진양성과 시조의 정리ㆍ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특징

1) 1728년(영조4) 김천택()이 편찬한 가집().
2) 1권 1책 필사본.
3) 『해동가요』, 『가곡원류』와 함께 3대 시조집의 하나.
4) 영조3년까지 내려오는 전래 시조를 집대성.


책명의 유래

‘청구’는 본래 우리나라를 뜻하는 말이고, ‘영언’은 노래를 뜻한다()는 말이다. 
책명은 한글로 모두가 ‘청구영언’이지만, 한자로 쓰면, ‘청구영언()’, ‘청구영언()’, ‘청구영언()’ 등으로 표기된다. 
우리의 노래가 구전으로만 읊어지다가 없어짐을 한탄하여, 기록으로써 후세에 전하고자 이 책을 편찬하였다고 한다.


이본 (이책)

지금까지 밝혀진 이본은 7종으로 원본으로 추정되는 것이 진본()이다. 
이 책은 오장환()이 소장하였다가, 그 뒤에 통문관()에서 소장하였다. 
홍씨본()은 홍재휴() 소장본으로, 그 제목은 ‘청구영언()’으로 되어 있다. 
가람본ⅠㆍⅡ는 이병기()가 소장하다가 가람문고에 소장된 이본들로, 가람본Ⅱ의 제목은 ‘청구영언()’이다.

연민본()은 이가원()이 소장한 이본으로, 이한진()이 1815년(순조 15)에 자필로 쓴 책이다. 
육당본()은 최남선()이 소장하였다가, 6.25 때 소실되었다. 
『송곡편가집()』은 김득신()의 서문에 ‘가집편기()’가 나오므로, 그 책을 가칭()한 이본의 명칭이다. 
『청구영언』은 책이름이 동일하지만, 제각기 특색을 지니며 내용도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원전으로 추정되는 진본에 수록된 작품 수는 580수이다.


진본의 특징

편성 내용은 본내용을 중심으로 앞에는 정윤경()의 서문과, 뒤에는 김천택 자신의 자서와 마악노초()의 발문으로 되어 있고, 본편은 13항으로 나누어져 있다.

첫 번째 항은 초중대엽(), 이중대엽(), 삼중대엽(), 북전(殿), 이북전(殿), 초삭대엽(), 이삭대엽(, 원문에는 없으나, 빠진 것으로 생각하여 보충함) 등의 곡목 다음에 각각 한 작품씩을 수록한 부분이다. 
두 번째 항은 「여말()」이라는 제목 아래 고려 말 작품 6수를 싣고 있다. 
세 번째 항은 「본조()」로 조선조에 41명이 쓴 작품 203수를 수록하고 있다. 
네 번째 항은 「열성어제()」로 세 왕의 작품 5수를 싣고 있다. 
다섯 번째 항은 「여항육인()」으로 6명의 작품 65수를 수록하고 있다. 
여섯 번째 항은 「규수삼인()」으로 3명의 작품 5수를 싣고 있다.

일곱 번째 항은 「연대결고()」로 3명의 작품 3수를 싣고 있다. 
여덟 번째 항은 무명씨()라는 제목으로 104수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아홉 번째 항의 제목은 「삼삭대엽()」으로 55수를 싣고 있다. 
열 번째 항은 「낙시조(調)」로 작품 10수를 수록하고 있다. 
열한 번째 항은 「장진주()」 1수이며, 열두 번째 항은 「맹상군가()」 1수이다. 
마지막 항은 ‘만횡청류()’라는 제목 아래 작품 116수를 싣고 있다. 
이들 각 항목에서 작품을 배열한 기준은 작가의 연대와 신분, 작품의 내용, 곡목 등이다. 
작가는 먼저 호, 다음에 성명을 쓰고, 끝으로 경력을 작은 글씨의 주()로 달고 있다.

본의 특징

진본에 비하여 홍씨본은 몇 가지 특성을 보인다. 앞에 떨어져 나간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74면인데, 없어진 부분 일부에 가지곡목형용()의 일부를 가지고 있다. 
작품분류는 유명씨와 무명씨로 나누고, 그 다음에 한산인()이라는 난을 두었다. 
잡휘란()에는 무명씨의 작품을 열거하면서, 기류()의 작품은 모두 무명씨로 처리하고 있다. 
삼국시대의 작품까지 등장시키는데, 이는 『가곡원류』와 비슷하다.

수록작품은 시조가 999수이며 「상사곡()」 등의 가사 16편을 수록하고 있다. 
진본의 곡목이 9곡목인 데 비하여 25곡목으로 상세하게 나누었고, 곡목 위주로 편찬하였다. 
삼국시대의 작가는 한데 묶고, 왕실과 기류를 묶어 놓으나 유명씨와 무명씨를 구분하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밝혀진 가집 중에서 가장 오래된 현존 시조집으로, 후대 가집의 편찬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친 만큼 문학사적인 가치가 크다.
 구분육당본
()
오씨본
()
일석본
()
가람본연민본
()
오꾸라본후지다본
소장자
최남선
(대학본ㆍ 통문관본)
오장환
(진본청구영언)
이희승
(가곡원류의 이본)
이병기
이가원
소창진평
()
등전양책
()
수록편수
시조999수
가사16수
580수
727수
714수
257수
소재불명
소재불명
분류별
곡조별
곡조별
곡조별
작가별
작가별



청구는 본래 우리나라를 뜻하는 말이고, 영언은 노래를 뜻한다()는 말로, 책명은 한글로 모두가 ‘청구영언’이지만, 한자로 쓰면, ‘’ · ‘’ · ‘’ 등으로 표기된다. 
지금까지 밝혀진 이본은 7종으로 원본으로 추정되는 것이 진본()이다. 
이책은 오장환()이 소장하였다가, 그뒤에 통문관()에서 소장한 책이다. 
홍씨본()은 홍재휴()가 소장한 이본으로, 그 제목은 ≪청구영언()≫이다.

기람본 I · II는 이병기()가 소장하다가 가람문고에 소장된 이본들로 가람본 II의 제목은 ≪청구영언()≫이다. 
연민본()은 이가원()이 소장한 이본으로, 이한진()이 1815년(순조 15)에 자필로 쓴 책이다. 
육당본()은 최남선()이 소장하였다가, 6 · 25 때 소실된 이본이다. 


≪송곡편가집()≫은 김득신()의 서문에 ‘가집편기()’가 나오므로, 그 책을 가칭()한 이본의 명칭이다.

≪청구영언≫은 책이름이 동일하지만, 제각기 특색을 지니며 내용도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원전으로 추정되는 진본에 수록된 작품수는 580수로, 편성내용은 본내용을 중심으로 앞에는 정윤경()의 서문과, 뒤에는 김천택 자신의 자서와 마악노초()의 발문으로 되어 있고, 본편은 13항으로 나누어져 있다.



첫 번째 항은 초중대엽() · 이중대엽() · 삼중대엽() · 북전(殿) · 이북전(殿) · 초삭대엽() 이삭대엽(: 원문에는 없으나, 빠진 것으로 생각하여 보충함)등의 곡목 다음에 각각 한 작품씩을 수록한 부분이다. 
두 번째 항은 <여말()>이라는 제목 아래 6수의 고려말 작품을 싣고 있다. 
세 번째 항은 <본조()>로 조선조에 41명이 쓴 작품 203수를 수록하고 있다.

네 번째 항은 <열성어제()>로 3왕의 작품 5수를 싣고 있다. 
다섯 번째 항은 <여항육인()>으로 6명의 작품 65수를 수록하고 있다. 
여섯 번째 항은 <규삼수인()>으로 3명의 작품 5수를 싣고 있다. 
일곱 번째 항은 <연대결고()>로 3명의 작품 3수를 싣고 있다. 
여덟 번째 항은 무명씨()라는 제목으로 104수의 작품을 수록하고 있다. 
아홉 번째 항의 제목은 <삼삭대엽()>으로 55수를 싣고 있다.

열 번째 항은 <낙시조(調)>로 작품 10수를 수록하고 있다. 
열한 번째 항은 <장진주()> 1수이며, 열두 번째 항은 <맹상군가()> 1수이다. 
마지막 항은 <만횡청류()>라는 제목으로 아래 작품 116수를 싣고 있다. 

필사본. 1권 1책. 현재까지 전해지는 가집() 중에서 편찬 연대가 가장 오래되었으며 방대한 것으로 《해동가요()》 《가곡원류()》와 아울러 3대 가집으로 꼽히는 책이다. 

이 책의 제1차 초고가 완성된 때는 1727년(영조 3), 제1차 수보() 완료는 1728년, 제2차 수보를 마친 때가 1732년으로서, 이 때에는 상당한 시조가 증보된 듯하므로 실제 완성된 시기를 28년으로 보는 것이다. 



《청구영언》에는 ① 최남선()본, 
② 오장환()본, 
③ 이희승()본, 
④ 홍재휴()본, 
⑤ 이병기()본, 
⑥ 이가원()본, 
⑦ 일본인(오구라 신페이[], 후지타[])본 등의 이본()이 있다. 




이본별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육당본():수록 작품은 시조 999수와 가사 16편이다. 
25종 곡목() 해설이 있고, 곡목에 따라 작품을 배열하였다. 
1930년 경성제국대학에서 간행한 바 있어 대학본()이라는 별칭이 있고, 39년에 조선문고본()으로 간행되었으며 1946년에 신문고본으로 간행된 통문관본() 등이 있다. 


오씨본():수록된 시조는 580수이다. 
정윤경()이 쓴 서문에서 김천택이 이 가집을 편찬하였다는 말을 하였고, 1728년에 쓴 남파()의 자서(), 1727년에 쓴 마악노초() 제()가 있어 이 책을 원본()으로 추정한다. 
10항목의 곡목으로 나누어 지명씨() 작품을 연대순으로 배열하고, 이어 실명씨()의 작품을 수록하였다.
1948년 조선진서간행회()에서 간행한 것을 《진본청구영언()》이라 일컫는다. 
1767년 정주동() ·유창균()의 주석본이 나왔다. 


이희승본:《일석본()》이라고도 한다. 
이 책은 제목만 《청구영언》으로 되어 있을 뿐이고, 수록 내용으로 보아 《가곡원류》의 이본이다. 



홍씨본():수록된 시조는 310수로서, 6종의 곡목과 해당 작품을 열거하고, 지명씨 작품을 연대순으로 배열한 다음, 실명씨 작품을 실었다. 



이병기본 청구영언:《가람본 청구영언》이라고도 한다. 
수록된 작품은 시조 596수와 가사 11편이다.
5종 곡목과 시조 17수, 2삭대엽()부터 태종() 등의 어제() 시조 7수를 비롯한 지명씨의 시조를 연대순으로 싣고 이어 실명씨작을 실었다. 




이가원본:《연민본()》이라고도 한다. 
1815년(순조 15) 이한진()의 자필 편저본으로 다른 《청구영언》과는 전혀 별개의 책이라 할 수 있다. 
1961년 한국어문학회 자료총간 2집으로 영인된 일이 있다. 




오쿠라본[]은 현재 일본 도쿄대학[]에 소장되어 있고, 후지타본[]은 소재 불명이다.






이들 각 항목에서 작품을 배열한 기준은 작가와 연대와 신분, 작품의 내용, 곡목 등이다. 
작가는 먼저 호(), 다음에 성명을 쓰고, 끝으로 경력을 작은 글씨의 주()로 달고 있다.
진본에 비하여 홍씨본은 몇 가지 특성을 보인다. 
앞에 떨어져나간 부분을 제외한 잔존분은 74면인데, 멸실분 일부에 가지곡목형용()의 일부를 가지고 있다. 
작품분류는 유명씨와 무명씨로 나누고, 그 다음에 한산인()이라는 난을 두며, 잡휘란()에 무명씨의 작품을 열거하면서, 기류()의 작품은 모두 무명씨로 처리하고 있다. 
삼국시대의 작품까지 등장시키는데, 이는 ≪가곡원류≫와 비슷하다.




가람본 Ⅰ은 진본에 비하여 서문과 발문이 없으며, 가집 끝에 파양()이라는 제목 아래 9수의 작품을 추가로 수록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가람본 Ⅱ는 진본에 비하여 가지풍도형용십사조목()과 오음통유() · 태사공예악서() · 소자() · 역() · 사조별형용의태상괘() · 장단점수() · 장단격법() 등이 첨가되어 있다. 또한, 시조작품 끝에는 <어부사()> 등의 11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연민본은 진본에 비하여, 호 위주로 작품 257수를 싣고, 끝에 <속어부사()>를 수록하고 있다. 
육당본은 진본에 비하여 서문 외에도 <해동가요록()> 등을 옮기며, 곡목과 작품을 더하여 진본을 증보하고 발전시킨다. 
수록작품은 시조가 999수이며 <상사곡()> 등의 가사 16편을 수록하고 있다. 
진본의 곡목이 9인데 비하여 25곡목으로 상세하게 나누고, 곡목 위주로 편찬하였다. 




삼국시대의 작가는 한데 묶고, 왕실과 기류를 묶어놓았으나, 유명씨와 무명씨를 구분하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밝혀진 가집 중에서 가장 오래된 현존 시조집으로, 후대에 가집의 편찬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치는 가치를 지닌다. 
영인본으로는 연민본이 1961년에 한국어문학회() 자료총간으로 나았다. 
육당본은 경성제국대학(, 1930)에서 인쇄되고, 다시 조선문고본(, 1939) · 통문관신문고본(, 1946)으로 출판되었다. 
진본은 오한근()이 조선진서간행회()에서 1948년에 간행하였는데, 이 책에는 많은 오식()이 포함되었음을 필자가 밝혔다.



현존하는 다섯 이본과 육당본에 대한 정리는 어느 정도되어 있으나, ≪송곡편가집≫의 부전으로 문제가 남아 있다. 
연민본과 ≪청구영언()≫( 소장)과 ≪화원악보()≫에 실린 김득신의 서문에는 송곡에 관한 기록이 있다. 
이 서문과 ≪송곡편가집≫은 깊은 관계에 있으며, 여러 가집을 보완, 윤색한 것이 진본이며 육당본이라는 학설이 나오면서, ≪청구영언≫에 대한 연구는 원류()의 재고와 새로운 사료의 출현이 기대된다.
"현재 부여에서는 그를 흥수()·계백()과 함께 삼충사()에 모시고 제사를 올리고 있다.




"일본 제국 의 만행"....

일본이깨우치고 꼭반성 해야되는점들 - 
아시아나라들에침탈해많은사람들이(전쟁)희생된점.... 
 
우리나라 가 기억 해야 되는 일제강정기 민족적 치욕....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하였으니 일제강점기의 치욕스러운 역사가 다시 반복되지 않으려면 영원히 잊지않고 기억해야할것 입니다

(일본이깨우치고반성해야되는나라- 아시아나라들에침탈해많은사람들이(전쟁)희생된점....일류역사에잊지못하고기록에영원히남는나라.)

일제(일본)는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킨 뒤 그 여세를 몰아 1907년 7월 24일 제3차 한일협약(한일신협약 혹은 정미조약) 체결을 강요했다. 
서울의 치안 유지를 명목으로 일본 혼성 1여단 병력이 급히 파견되고, 외무대신 하야시가 서울에 도착하는 등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일본 측 요구는 별다른 수정 없이 가결되었다. 
조약 체결 사실은 바로 다음 날 관보 호외를 통해 공표되었고, 각국 주재 일본 대표들을 통해 열강에도 통보되었다. 협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907년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기 위한 예비조처로 체결한 7개 항목의 조약. 정미7조약()이라고도 부른다. 

1905년 을사조약에 의하여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여러 가지 내정을 간섭해오던 일본은 헤이그특사파견사건(Hague使)을 계기로 하여 한층 강력한 침략행위를 강행할 방법을 강구하였다. 

일본은 외무대신 하야시()와 통감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로 하여금 우선 사건의 책임을 고종에게 묻고 고종을 퇴위시키는 한편, 고종이 양위하고 신황제인 순종이 즉위한 4일 후인 1907년 7월 24일 전격적으로 흉계를 꾸며 그들이 대한제국의 국권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는 내용의 원안()을 제시하였다. 

이에 이완용() 내각은 즉시 각의를 열고 일본측 원안을 그대로 채택하여, 순종의 재가를 얻은 뒤 이완용이 전권위원()이 되어 7월 24일 밤 통감 이토의 사택에서 7개 조항의 신협약을 체결, 조인하였다. 

이밖에 부연하여 각 조항의 시행규칙에 관하여 협정된 비밀조치서가 작성되었는데, 이는 한국군대의 해산, 사법권의 위임, 일본인 차관()의 채용, 경찰권의 위임 등을 골자로 하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한국군대의 해산이 가장 중요한 항목이었다. 

제1조 대한제국 정부는 시정개선에 관해 통감의 지도를 받는다.
제2조 대한제국 정부는 법령의 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은 미리 통감의 승인을 거친다.
제3조 대한제국의 사법 사무는 보통 행정 사무와 구별한다.
제4조 대한제국 고등관리의 임면은 통감의 동의를 얻어 행한다.
제5조 대한제국 정부는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대한제국 관리에 임명한다.
제6조 대한제국 정부는 통감의 동의 없이 외국인을 용빙할 수 없다.
제7조 1904년 8월 22일 조인한 일한협약 제1항은 폐지한다.

이 조약의 7개조를 보면, 을사조약보다 강력한 통감의 권한과 일본인 관리의 채용 등을 강요하는 한국의 내정에 관한 모든 국권을 일본에게 넘겨준 것이며, 
제7조에서 외국인 재정고문의 용빙을 폐지한다고 한 것은 사법권과 관리임용권까지 빼앗았기 때문에, 이 조항이 무의미하게 되어 폐지한 것이다. 

차관정치()가 실현됨으로써 한국은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화되었으며, 군대해산에 따라 각지에서 무장 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이에 일제는 사법권ㆍ행정권 및 관리임면권의 탈취와 외국인 고문폐지 등을 강압적으로 실시하여, 이후 1910년 일제에 의해서 강제로 병탄될 때까지 이른바 차관정치가 실시됨으로써 실권이 없는 한국정부는 한 걸음 더 기울어 져 일본인 차관의 수중에 넘어갔다. 
이 결과 1909년 현재 한국정부에 채용 배치된 일본인 관리의 수는 2,000여명으로 모든 행정관청은 그들 관리들이 차지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침략정책을 단계적으로 강행하는 일이었다.

신협약을 통해 일제는 ‘시정개선’에 관한 통감의 지도권이라는 명목으로 대한제국 내정에 대한 간여를 공식화했다. 
그동안에도 ‘시정개선’이라는 명목으로 사실상의 내정간섭을 하고 있었지만, 원래 ‘보호조약’에 의거한 통감의 임무는 대한제국의 외교권만을 대행하는 것이었다.  
통감부 설치 이후 통감은 실제로 각부 고문에 대한 지휘감독권을 통해 내정에 간섭하더라도 형식상 대한제국 정부에 협조를 요청하거나 권고하는 절차를 밟아야만 했다.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방법을 폐기하고 법령 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 처분에 대한 승인권, 고등관리 임면에 대한 동의권 등을 확보함으로써, 통감은 명실공히 대한제국의 최고 감독권자가 되었다. 

1904년 고문협약의 조항을 폐지하는 대신 일본인을 직접 대한제국 관리로 임명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함으로써, 조언이나 권고 수준에서 더 나아가 직접 행정 실무까지 장악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애초에 이토가 생각한 요구 사항에는 대한제국 황제가 조칙을 발표하기 전에 미리 통감의 자문을 받게 한다는 항목까지 있었지만, 이는 협의 과정에서 제외되었다.
정미7조약()이라고도 한다. 
헤이그특사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킨 일제는 형해화()한 대한제국의 국가체제에 마지막 숨통을 죄기 위해 법령제정권 ·관리임명권 ·행정권 및 일본관리의 임명 등을 내용으로 한 7개항의 조약안을 제시, 아무런 장애도 없이 1907년 7월 24일 이완용()과 이토 히로부미[]의 명의로 체결 ·조인하였다.
조약의 내용은 
① 한국정부는 시정개선에 관하여 통감의 지도를 받을 것, 
② 한국정부의 법령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은 미리 통감의 승인을 거칠 것, 
③ 한국의 사법사무는 보통 행정사무와 이를 구분할 것, 
④ 한국고등관리의 임명은 통감의 동의로써 이를 행할 것, 
⑤ 한국정부는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한국관리에 용빙할 것, 
⑥ 한국정부는 통감의 동의 없이 외국인을 한국관리에 임명하지 말 것, 
⑦ 1904년 8월 22일 조인한 한일외국인 고문 용빙에 관한 협정서 제1항은 폐지할 것 등이다. 일제는 조약의 후속조치로 행정실권을 장악하기 위해 한국인 대신 밑에 일본인 차관을 임명하고, 경찰권을 위임하도록 하였으며, 경비를 절약한다는 이유로 한국군대를 해산하였다. 

이 밖에 언론탄압을 위한 ‘신문지법’,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박탈하기 위한 ‘보안법’이 공포되는 등 10년에 명칭만의 대한제국의 국체를 말소하기까지 4년 간은 통감부에 의한 차관정치가 실시되었다. 

이 조약은 일본이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킨 직후에 체결된 것으로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비정상적으로 체결되었기 때문에 국제조약으로서의 법적 유효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신협약에서 보다 중요한 사실은, 조약 체결 당시 이토와 이완용 사이에 교환된 이면 각서의 존재였다. 

각서에서는 한일 양국인으로 구성된 재판소(대심원, 공소원, 지방재판소, 구재판소)를 신설하고(제1조), 간수장 이하 반수를 일본인으로 하는 감옥을 설치하며(제2조), 황궁 수비를 위한 육군 1대대 외의 모든 군대를 해산할 것 등이 약속되었다(제3조). 

가장 기본적인 국가기구들인 감옥, 군대, 재판소 등을 일제가 장악함으로써 철저하게 대한제국을 해체하는 과정에 들어간 것이다.

우선 신협약에 따라 일본인들이 각 부서의 차관에 임명되어 실권을 장악하고(이른바 차관정치), 내부 경무국장이나 경무사 등의 자리에도 진출하여 치안경찰권을 장악했다.

대한제국의 정부 조직은 대폭 정리하고, 특히 왕실 관련 궁내부는 모두 정리하면서 황실 재산도 모두 빼앗아갔다. 

통감은 통감 관저에 앉아서 대한제국 정부 대신들을 불러오거나 각부의 일본인 차관들을 소집하여 모든 국정 운영을 직접 지휘했다. 

황제에게 결재를 청하는 문안이 있더라도 통감이 먼저 승인해야 하므로 대한제국의 최고권자는 이미 통감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일본인 관리의 대한제국 정부 진출은 그간 고문 또는 참여관 명의로 대한제국 정부에 용빙된 사람들을 모두 해고하고, 중앙 및 지방 관리에 직접 일본인을 임명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구체적으로 각부 차관, 내부 경무국장, 경무사 또는 부경무사, 내각 서기관 및 서기랑 중 약간 명, 각부 서기관 및 서기랑 중 약간 명, 각도 사무관 1명, 각도 경무관, 각도 주사 중 약간 명과 재무 · 경무 및 기술 관련 관리 등이 그 대상이었다. 

중앙 각부의 차관, 내각 서기관 등을 일본인으로 임명함으로써 중요 정책의 결정과 집행 과정을 장악하게 하고, 내부 경무국장 임명을 통해 치안권을 확보하며, 각 지방 일선 대민행정 분야에까지 공식적으로 일본인을 진출시키려는 것이었다.

이런 방침에 따라 1907년 8월 2일 경무고문이던 마루야마 시게토시가 경시총감에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8월 8일 궁내부 차관 쓰루하라 사다키치(전 통감부 총무장관), 내부 차관 기우치 주시로(전 통감부 농상공부총장), 학부 차관 다와라 마고이치(전 통감부 서기관)가 임명되었고, 8월 13일 내부 경무국장에 마쓰이 시게루()가 임명되었다.

8월 15일에는 각도 사무관 및 경시, 9월 7일에는 탁지부 차관 아라이 겐타로(, 전 재정고문부 소속), 9월 19일에는 농상공부 차관 오카요시, 법부 차관 구라토미 유자부로() 등이 임명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통감부에서 자리를 옮기거나, 그간 고문직으로 간접적으로 대한제국 정부에 참여하다가 직접 대한제국 내각에 들어서게 된 경우였다.

일본인들이 직접 대한제국 정부에 진출함으로써, 통감부 입장에서는 그간 효율성에 문제가 있었던 ‘대한제국 정부 집행-통감부 · 고문부 감독’이라는 이중구조가 필요 없어졌다. 

시정개선 사업에서 막강한 권한을 휘둘러오던 재정고문부는 폐지되어 탁지부 재무감독국에 귀속되었고, 고문경찰의 폐지로 각도 경무고문지부 보좌관은 각도 경시에, 나머지 경무고문부 직원들은 경부, 순사에 임용되는 등 다수의 일본 경찰이 대한제국 정부에 임용되어 내부 경무국장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이제 일본 경찰이 직접 한국민들을 체포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일제시대 악명 높던 그 무서운 ‘일본 순사’가 이때부터 등장했다. 

이미 일제가 치안경찰권을 모두 장악한 마당에 여러 종의 경찰이 존재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대한제국 경찰과 고문경찰, 통감부 · 이사청 경찰 3종이 모두 통일되었다.

대한제국 정부 조직에 대해서는 대대적인 통폐합 정리가 시작되었다. 

먼저 1907년 11월 27일 궁내부 신관제를 발포하여 경리원 등 궁내부 소속 다수 부서를 폐지하고 관리도 대폭 감축하는 한편, 일본인을 궁내부 수뇌부에 배치했다. 

황제를 보좌하던 궁내관 중에서 폐관 또는 퇴관된 사람은 1908년 상반기까지 칙임관 이하 166명, 하급관원 2,400여 명, 궁중 제사관 300여 명 등이었다.

메가타 재정고문이 부임 당시부터 추진했으나 황제 측의 심한 반발로 완전한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던 황실 재산 정리도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일제에 대한 저항의 물적 · 인적 기반이었던 궁내부와 황실 재산을 철저하게 해체하는 작업이었다.

1908년 1월 각부 신관제 실시 이후 일본인 관리의 임명은 더욱 현저히 증가했다. 

종래 고문, 보좌관, 참여관 혹은 그 부속원으로서 대한제국 정부에 용빙되었던 이들은 대부분 대한제국 정부 관리로 임명되었다. 

1908년 6월에 이르면 대한제국 정부 관료 5,096명 중 일본인이 1,797명, 통감부 소속 일본인 관료는 4,403명에 이르렀다.

12월에는 다시 2,080명으로 일본인 관리 수가 늘어났는데, 나라의 살림살이를 관장하는 탁지부 관리가 962명(46.3%)으로 가장 많았다. 

일본이 무엇보다도 대한제국의 재정 장악을 우선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밖에 법부 393명(18.9%), 내부 373명(17.9%)의 순서로 일본인 관리가 진출했고, 1909년 말에는 일본인 관리 수가 한국 관리 수에 육박할 정도로 대한제국 정부는 급속도로 일제에 의해 장악되었다

일본인들이 대한제국 내각에 직접 진입함에 따라 통감부 조직은 대폭 축소되었다. 

일본인들이 직접 대한제국의 내정을 완전히 장악했으므로 대한제국 정부와 통감부 사이에 중복되는 부분은 과감히 정리, 조직을 간소화한 것이다. 

1907년 9월 9일 칙령 제295호 「통감부 및 이사청 관제」 개정의 내용을 보면, 일단 통감의 직권은 확장되었다.

통감은 대한제국에서 일본 정부를 대표하여 조약 및 법령에 기초하여 제반 정무를 통할한다고 규정되어(제3조), 외교 업무 대행 외에 대한제국의 일반 내정까지 관장하는 대한제국 국정 운영의 실질적인 최고 통치권자가 되었다. 
이전에도 실제로는 그런 위치였지만 황제권의 반발로 명문화되지 못했던 것이 이제 법적 · 공식적으로도 명실상부한 권한을 확보하게 된 셈이었다. 
통감부 관리의 수는 부통감의 신설(제10조 2항) 외에는 상당히 축소되었다.

총무장관 1명, 참여관 2명(감사부장, 외무부장), 비서관 2명, 서기관 6명, 기사 4명, 통역관 9명, 속() · 기수 · 통역생 43명 등이 전부였다. 
경시 및 경부는 폐지되었다. 

대한제국 각부의 일본인 차관 9명을 참여관 자격으로 통감부에 소속시키고, 또 대한제국 내각에 진출한 일본인 관리들이 실제로 통감의 지휘를 받게 되었으므로, 통감부는 변함없이 최고의 권력 기관이었다.

1907년 10월 9일에는 통감부 훈령 제21호 「통감부사무분장규정」의 개정으로 총무부 · 경무부 · 농상공부를 폐지한 대신, 통감관방 · 감사부 · 지방부를 신설하고 관방장관에 총무장관, 각 부장에는 총무장관 혹은 전임 참여관을 임명했다. 

통감관방에는 문서 · 인사 · 회계과를 두고, 외무부 각 분과는 폐합하여 영사관 및 외국인에 관한 사항, 이민에 관한 사항, 조약 및 약정서에 관한 사항, 의식 및 서훈에 관한 사항 등을 관장했다.

감사부는 통감부 법령과 함께 대한제국 정부가 제정한 제 법령 및 처분을 심사하는 업무를 관장하고, 지방부는 지방 행정에 관한 사항, 식산 및 금융에 관한 사항, 종교 및 교육에 관한 사항, 사법 및 경찰에 관한 사항 등을 관장했다.

통감부 개정 관제의 특징은 통감부가 집행 기능을 축소하고 대한제국 내각의 통치 행정을 감독하는 상위기구의 성격을 분명히 한 점이었다. 

종래 통감부와 대한제국의 정부 조직이 이중적으로 존재하고 또 고문부가 중간에 개재해 있던 병렬적 구조에서, 고문부가 해체되고 통감부와 고문부의 일본인 관리들이 직접 대한제국 내각에 진입함으로써, 통감부의 집행기구적 측면은 최소화되고 대한제국 정부를 감독하는 상위기구적 성격이 강화된 것이다.

통감은 여전히 통감 관저에서 대한제국 정부 대신들을 소집하여 시정개선협의회를 계속하되, 실행의 세부 사항에 대해서는 통감부 총무장관 및 각 참여관과 대한제국 정부 각부의 일본인 차관들을 참여관회의에 소집하여 직접 집행을 지휘했다.

통감이 대한제국 정부의 법령 제정에 대한 동의 · 승인권을 행사하게 됨으로써, 대한제국 정부가 칙령 · 법률을 제정하려면 먼저 내각 또는 각부의 초안을 내각회의에서 논의한 뒤, 황제에게 결재를 품청하는 문안을 만들어 통감부에 넘기고, 통감의 승인이 나면 황제에게 상주하여 칙재를 받아 반포할 수 있었다. 
각령 · 부령은 법률 · 칙령의 범위 안에서 내각 총리대신 및 각부 대신이 통감의 승인을 받아 관보에 공포했다. 
이로써 대한제국 황제권은 완전히 해체되었고, 통감이 실질적인 최고 통치권자가 되었다.

또한 위한부 를 비롯하여  일일이열거하기가 이루다 쓰기도 벅차고 힘드는일입니다.

이러하니 한나라(대한민국) 을비롯하여 아시아 여러나라 들의 잊지못할  사건이 된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