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22일 수요일

성충 , 成忠.

성충 , 成忠.

일명 ‘정충()’이라고도 한다. 
656년 좌평()으로 있을 때 왕이 신라와의 싸움에서 연승하여 자만과 주색에 빠지자 국운이 위태로워짐을 극간하다가 투옥되었다.

옥중에서 단식을 하다가 죽음에 임박하여 왕에게 글을 올리기를 “충신은 죽더라도 임금을 잊지 못하는 법입니다.


656(의자왕 16)년 왕이 주색()에 빠져 정사가 어지럽자 이를 극간()하다 죽음을 당했다. 








죽으면서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신이 항상 시세의 흐름을 볼 적에 멀지않아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그때 군대를 사용함에 있어서는 그 지리적 조건을 잘 이용하여야 하는데, 강 상류에서 적병을 맞이하면 나라를 보전할 수 있습니다.
만일, 적군이 쳐들어오면 육로로는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에 못 들어오게 한 뒤, 험한 지형에 의지하여 싸우면 틀림없이 이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660년 신라군은 탄현을 넘어 수도 사비()로 쳐들어오고, 당나라 군대도 기벌포를 지나 사비성으로 쳐들어와 백제는 멸망하였다. 
왕은 그때서야 성충의 충언을 따르지 아니한 것을 후회하였다. 
청구영언()》에 그의 이름으로 전하는 다음 시조 2수는 후세인의 위작()인듯 하다. 


「뭇노라 멱라수()야 굴원()이 어이 죽더터니, 참소()에 더러인 몸 죽어 뭇칠imagefont히 업셔, 창파()에 골육()을 imagefont셔 어복리()에 장(imagefont니라」 「뭇노라 져 선사()야 관동풍경() 엇더터니, 명사십리() 해당화()만 붉어 잇고, 원포()에 양양() 백구()는 비소우를 imagefont더라.」



청구영언 , 靑言.
구분시조집
저자김천택(金天澤) 편찬
출간 시기1728(영조 4)
이칭청구영언(), 청구영언(), 청구영언()
1728년(영조 4)에 가인 김천택()이 편찬한 시조집. 필사본. 1권 1책. 우리의 노래가 구전으로만 읊어지다가 없어짐을 한탄하여, 기록으로써 후세에 전하고자 이 책을 편찬하였다고 한다. 
해동가요≫ · ≪가곡원류≫와 함께 중요 가집()의 하나이다.

작가

김천택( : ?~?)
자 백함()ㆍ이숙(), 호 남파()이다. 평민 출신으로 숙종 때 포교를 지냈다. 
창에 뛰어났으며 시조도 잘 지어 『해동가요』에 57수를 남겼고, 1728년(영조 4)에는 시가집 『청구영언()』을 편찬, 국문학사상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같은 평민 출신 노가재() 김수장()과 함께 ‘경정산가단()’에 동인()을 결집, 시조에 신풍을 불어넣었다. 

그때까지 시조계의 주류를 이루었던 학자ㆍ문인의 시조가 한정()을 즉흥적으로 노래한 도학적ㆍ관념적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시조는 제재를 일상생활 속에서 찾았고, 그 묘사가 사실적이었으며 해학이 풍부하였다. 
후진양성과 시조의 정리ㆍ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특징

1) 1728년(영조4) 김천택()이 편찬한 가집().
2) 1권 1책 필사본.
3) 『해동가요』, 『가곡원류』와 함께 3대 시조집의 하나.
4) 영조3년까지 내려오는 전래 시조를 집대성.


책명의 유래

‘청구’는 본래 우리나라를 뜻하는 말이고, ‘영언’은 노래를 뜻한다()는 말이다. 
책명은 한글로 모두가 ‘청구영언’이지만, 한자로 쓰면, ‘청구영언()’, ‘청구영언()’, ‘청구영언()’ 등으로 표기된다. 
우리의 노래가 구전으로만 읊어지다가 없어짐을 한탄하여, 기록으로써 후세에 전하고자 이 책을 편찬하였다고 한다.


이본 (이책)

지금까지 밝혀진 이본은 7종으로 원본으로 추정되는 것이 진본()이다. 
이 책은 오장환()이 소장하였다가, 그 뒤에 통문관()에서 소장하였다. 
홍씨본()은 홍재휴() 소장본으로, 그 제목은 ‘청구영언()’으로 되어 있다. 
가람본ⅠㆍⅡ는 이병기()가 소장하다가 가람문고에 소장된 이본들로, 가람본Ⅱ의 제목은 ‘청구영언()’이다.

연민본()은 이가원()이 소장한 이본으로, 이한진()이 1815년(순조 15)에 자필로 쓴 책이다. 
육당본()은 최남선()이 소장하였다가, 6.25 때 소실되었다. 
『송곡편가집()』은 김득신()의 서문에 ‘가집편기()’가 나오므로, 그 책을 가칭()한 이본의 명칭이다. 
『청구영언』은 책이름이 동일하지만, 제각기 특색을 지니며 내용도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원전으로 추정되는 진본에 수록된 작품 수는 580수이다.


진본의 특징

편성 내용은 본내용을 중심으로 앞에는 정윤경()의 서문과, 뒤에는 김천택 자신의 자서와 마악노초()의 발문으로 되어 있고, 본편은 13항으로 나누어져 있다.

첫 번째 항은 초중대엽(), 이중대엽(), 삼중대엽(), 북전(殿), 이북전(殿), 초삭대엽(), 이삭대엽(, 원문에는 없으나, 빠진 것으로 생각하여 보충함) 등의 곡목 다음에 각각 한 작품씩을 수록한 부분이다. 
두 번째 항은 「여말()」이라는 제목 아래 고려 말 작품 6수를 싣고 있다. 
세 번째 항은 「본조()」로 조선조에 41명이 쓴 작품 203수를 수록하고 있다. 
네 번째 항은 「열성어제()」로 세 왕의 작품 5수를 싣고 있다. 
다섯 번째 항은 「여항육인()」으로 6명의 작품 65수를 수록하고 있다. 
여섯 번째 항은 「규수삼인()」으로 3명의 작품 5수를 싣고 있다.

일곱 번째 항은 「연대결고()」로 3명의 작품 3수를 싣고 있다. 
여덟 번째 항은 무명씨()라는 제목으로 104수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아홉 번째 항의 제목은 「삼삭대엽()」으로 55수를 싣고 있다. 
열 번째 항은 「낙시조(調)」로 작품 10수를 수록하고 있다. 
열한 번째 항은 「장진주()」 1수이며, 열두 번째 항은 「맹상군가()」 1수이다. 
마지막 항은 ‘만횡청류()’라는 제목 아래 작품 116수를 싣고 있다. 
이들 각 항목에서 작품을 배열한 기준은 작가의 연대와 신분, 작품의 내용, 곡목 등이다. 
작가는 먼저 호, 다음에 성명을 쓰고, 끝으로 경력을 작은 글씨의 주()로 달고 있다.

본의 특징

진본에 비하여 홍씨본은 몇 가지 특성을 보인다. 앞에 떨어져 나간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74면인데, 없어진 부분 일부에 가지곡목형용()의 일부를 가지고 있다. 
작품분류는 유명씨와 무명씨로 나누고, 그 다음에 한산인()이라는 난을 두었다. 
잡휘란()에는 무명씨의 작품을 열거하면서, 기류()의 작품은 모두 무명씨로 처리하고 있다. 
삼국시대의 작품까지 등장시키는데, 이는 『가곡원류』와 비슷하다.

수록작품은 시조가 999수이며 「상사곡()」 등의 가사 16편을 수록하고 있다. 
진본의 곡목이 9곡목인 데 비하여 25곡목으로 상세하게 나누었고, 곡목 위주로 편찬하였다. 
삼국시대의 작가는 한데 묶고, 왕실과 기류를 묶어 놓으나 유명씨와 무명씨를 구분하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밝혀진 가집 중에서 가장 오래된 현존 시조집으로, 후대 가집의 편찬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친 만큼 문학사적인 가치가 크다.
 구분육당본
()
오씨본
()
일석본
()
가람본연민본
()
오꾸라본후지다본
소장자
최남선
(대학본ㆍ 통문관본)
오장환
(진본청구영언)
이희승
(가곡원류의 이본)
이병기
이가원
소창진평
()
등전양책
()
수록편수
시조999수
가사16수
580수
727수
714수
257수
소재불명
소재불명
분류별
곡조별
곡조별
곡조별
작가별
작가별



청구는 본래 우리나라를 뜻하는 말이고, 영언은 노래를 뜻한다()는 말로, 책명은 한글로 모두가 ‘청구영언’이지만, 한자로 쓰면, ‘’ · ‘’ · ‘’ 등으로 표기된다. 
지금까지 밝혀진 이본은 7종으로 원본으로 추정되는 것이 진본()이다. 
이책은 오장환()이 소장하였다가, 그뒤에 통문관()에서 소장한 책이다. 
홍씨본()은 홍재휴()가 소장한 이본으로, 그 제목은 ≪청구영언()≫이다.

기람본 I · II는 이병기()가 소장하다가 가람문고에 소장된 이본들로 가람본 II의 제목은 ≪청구영언()≫이다. 
연민본()은 이가원()이 소장한 이본으로, 이한진()이 1815년(순조 15)에 자필로 쓴 책이다. 
육당본()은 최남선()이 소장하였다가, 6 · 25 때 소실된 이본이다. 


≪송곡편가집()≫은 김득신()의 서문에 ‘가집편기()’가 나오므로, 그 책을 가칭()한 이본의 명칭이다.

≪청구영언≫은 책이름이 동일하지만, 제각기 특색을 지니며 내용도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원전으로 추정되는 진본에 수록된 작품수는 580수로, 편성내용은 본내용을 중심으로 앞에는 정윤경()의 서문과, 뒤에는 김천택 자신의 자서와 마악노초()의 발문으로 되어 있고, 본편은 13항으로 나누어져 있다.



첫 번째 항은 초중대엽() · 이중대엽() · 삼중대엽() · 북전(殿) · 이북전(殿) · 초삭대엽() 이삭대엽(: 원문에는 없으나, 빠진 것으로 생각하여 보충함)등의 곡목 다음에 각각 한 작품씩을 수록한 부분이다. 
두 번째 항은 <여말()>이라는 제목 아래 6수의 고려말 작품을 싣고 있다. 
세 번째 항은 <본조()>로 조선조에 41명이 쓴 작품 203수를 수록하고 있다.

네 번째 항은 <열성어제()>로 3왕의 작품 5수를 싣고 있다. 
다섯 번째 항은 <여항육인()>으로 6명의 작품 65수를 수록하고 있다. 
여섯 번째 항은 <규삼수인()>으로 3명의 작품 5수를 싣고 있다. 
일곱 번째 항은 <연대결고()>로 3명의 작품 3수를 싣고 있다. 
여덟 번째 항은 무명씨()라는 제목으로 104수의 작품을 수록하고 있다. 
아홉 번째 항의 제목은 <삼삭대엽()>으로 55수를 싣고 있다.

열 번째 항은 <낙시조(調)>로 작품 10수를 수록하고 있다. 
열한 번째 항은 <장진주()> 1수이며, 열두 번째 항은 <맹상군가()> 1수이다. 
마지막 항은 <만횡청류()>라는 제목으로 아래 작품 116수를 싣고 있다. 

필사본. 1권 1책. 현재까지 전해지는 가집() 중에서 편찬 연대가 가장 오래되었으며 방대한 것으로 《해동가요()》 《가곡원류()》와 아울러 3대 가집으로 꼽히는 책이다. 

이 책의 제1차 초고가 완성된 때는 1727년(영조 3), 제1차 수보() 완료는 1728년, 제2차 수보를 마친 때가 1732년으로서, 이 때에는 상당한 시조가 증보된 듯하므로 실제 완성된 시기를 28년으로 보는 것이다. 



《청구영언》에는 ① 최남선()본, 
② 오장환()본, 
③ 이희승()본, 
④ 홍재휴()본, 
⑤ 이병기()본, 
⑥ 이가원()본, 
⑦ 일본인(오구라 신페이[], 후지타[])본 등의 이본()이 있다. 




이본별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육당본():수록 작품은 시조 999수와 가사 16편이다. 
25종 곡목() 해설이 있고, 곡목에 따라 작품을 배열하였다. 
1930년 경성제국대학에서 간행한 바 있어 대학본()이라는 별칭이 있고, 39년에 조선문고본()으로 간행되었으며 1946년에 신문고본으로 간행된 통문관본() 등이 있다. 


오씨본():수록된 시조는 580수이다. 
정윤경()이 쓴 서문에서 김천택이 이 가집을 편찬하였다는 말을 하였고, 1728년에 쓴 남파()의 자서(), 1727년에 쓴 마악노초() 제()가 있어 이 책을 원본()으로 추정한다. 
10항목의 곡목으로 나누어 지명씨() 작품을 연대순으로 배열하고, 이어 실명씨()의 작품을 수록하였다.
1948년 조선진서간행회()에서 간행한 것을 《진본청구영언()》이라 일컫는다. 
1767년 정주동() ·유창균()의 주석본이 나왔다. 


이희승본:《일석본()》이라고도 한다. 
이 책은 제목만 《청구영언》으로 되어 있을 뿐이고, 수록 내용으로 보아 《가곡원류》의 이본이다. 



홍씨본():수록된 시조는 310수로서, 6종의 곡목과 해당 작품을 열거하고, 지명씨 작품을 연대순으로 배열한 다음, 실명씨 작품을 실었다. 



이병기본 청구영언:《가람본 청구영언》이라고도 한다. 
수록된 작품은 시조 596수와 가사 11편이다.
5종 곡목과 시조 17수, 2삭대엽()부터 태종() 등의 어제() 시조 7수를 비롯한 지명씨의 시조를 연대순으로 싣고 이어 실명씨작을 실었다. 




이가원본:《연민본()》이라고도 한다. 
1815년(순조 15) 이한진()의 자필 편저본으로 다른 《청구영언》과는 전혀 별개의 책이라 할 수 있다. 
1961년 한국어문학회 자료총간 2집으로 영인된 일이 있다. 




오쿠라본[]은 현재 일본 도쿄대학[]에 소장되어 있고, 후지타본[]은 소재 불명이다.






이들 각 항목에서 작품을 배열한 기준은 작가와 연대와 신분, 작품의 내용, 곡목 등이다. 
작가는 먼저 호(), 다음에 성명을 쓰고, 끝으로 경력을 작은 글씨의 주()로 달고 있다.
진본에 비하여 홍씨본은 몇 가지 특성을 보인다. 
앞에 떨어져나간 부분을 제외한 잔존분은 74면인데, 멸실분 일부에 가지곡목형용()의 일부를 가지고 있다. 
작품분류는 유명씨와 무명씨로 나누고, 그 다음에 한산인()이라는 난을 두며, 잡휘란()에 무명씨의 작품을 열거하면서, 기류()의 작품은 모두 무명씨로 처리하고 있다. 
삼국시대의 작품까지 등장시키는데, 이는 ≪가곡원류≫와 비슷하다.




가람본 Ⅰ은 진본에 비하여 서문과 발문이 없으며, 가집 끝에 파양()이라는 제목 아래 9수의 작품을 추가로 수록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가람본 Ⅱ는 진본에 비하여 가지풍도형용십사조목()과 오음통유() · 태사공예악서() · 소자() · 역() · 사조별형용의태상괘() · 장단점수() · 장단격법() 등이 첨가되어 있다. 또한, 시조작품 끝에는 <어부사()> 등의 11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연민본은 진본에 비하여, 호 위주로 작품 257수를 싣고, 끝에 <속어부사()>를 수록하고 있다. 
육당본은 진본에 비하여 서문 외에도 <해동가요록()> 등을 옮기며, 곡목과 작품을 더하여 진본을 증보하고 발전시킨다. 
수록작품은 시조가 999수이며 <상사곡()> 등의 가사 16편을 수록하고 있다. 
진본의 곡목이 9인데 비하여 25곡목으로 상세하게 나누고, 곡목 위주로 편찬하였다. 




삼국시대의 작가는 한데 묶고, 왕실과 기류를 묶어놓았으나, 유명씨와 무명씨를 구분하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밝혀진 가집 중에서 가장 오래된 현존 시조집으로, 후대에 가집의 편찬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치는 가치를 지닌다. 
영인본으로는 연민본이 1961년에 한국어문학회() 자료총간으로 나았다. 
육당본은 경성제국대학(, 1930)에서 인쇄되고, 다시 조선문고본(, 1939) · 통문관신문고본(, 1946)으로 출판되었다. 
진본은 오한근()이 조선진서간행회()에서 1948년에 간행하였는데, 이 책에는 많은 오식()이 포함되었음을 필자가 밝혔다.



현존하는 다섯 이본과 육당본에 대한 정리는 어느 정도되어 있으나, ≪송곡편가집≫의 부전으로 문제가 남아 있다. 
연민본과 ≪청구영언()≫( 소장)과 ≪화원악보()≫에 실린 김득신의 서문에는 송곡에 관한 기록이 있다. 
이 서문과 ≪송곡편가집≫은 깊은 관계에 있으며, 여러 가집을 보완, 윤색한 것이 진본이며 육당본이라는 학설이 나오면서, ≪청구영언≫에 대한 연구는 원류()의 재고와 새로운 사료의 출현이 기대된다.
"현재 부여에서는 그를 흥수()·계백()과 함께 삼충사()에 모시고 제사를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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