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22일 수요일

다솔사 , 多率寺.

다솔사 , 多寺.


대한불교조계종 제14교구 본사인 범어사의 말사이다. 

봉명산은 이명산이라고도 한다. 
사찰이 자리한 일대는 봉명산군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511년(지증왕 12)에 조사() 연기()가 영악사()라 하여 처음 세웠고, 636년(선덕여왕 5) 새로 건물 2동을 지은 뒤 다솔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676년(문무왕 16) 대사 의상()에 의해 영봉사()로 바뀐 뒤 신라 말기에 국사 도선()이 다시 손질하여 고쳐 짓고 다솔사라 하였다. 

1326년(충숙왕 13) 나옹()이 중수한 뒤에도 여러 차례 수리하였으며, 임진왜란 당시 전화로 불탔으나 숙종 때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현재의 건물은 1914년의 화재로 타버린 것을 이듬해 다시 세운 것이다. 

절 안에는 경상남도유형문화재 83호로 지정된 대양루(), 대웅전, 나한전, 천왕전(殿), 요사채를 비롯한 10여 동의 건물이 남아 있다. 







대양루는 1749년(영조 25)에 세워져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는 2층 맞배집으로 건평이 106평에 이르는 규모가 큰 건축물이다. 

대웅전 후불탱화 속에서 108개의 사리가 발견되어 세상의 이목을 끌기도 하였다. 

이밖에도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마애불과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39호인 보안암() 석굴, 부도군() 등이 있다. 

보안암 석굴은 고려 말기에 세웠다고 전해지며 석굴암과 비슷한 모양이다. 

부도군은 도명(), 낙화(), 성진(), 세진(), 풍운() 등 5인의 부도가 보존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 한용운()이 수도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고, 소설가 김동리()가 한동안 머물러 《등신불》을 쓴 곳으로도 유명하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4교구 본사인 범어사의 말사이다. 

511년(지증왕 12)에 조사()) 연기()가 영악사()라 하여 처음 세웠고, 636년(선덕여왕 5) 새로 건물 2동을 지은 뒤 다솔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676년(문무왕 16) 대사 의상()에 의해 영봉사()로 바뀐 뒤 신라 말기에 국사 도선()이 다시 손질하여 고쳐 짓고 다솔사라 하였다. 

1326년(충숙왕 13) 나옹()이 중수한 뒤에도 여러 차례 수리하였으며, 임진왜란 당시 전화로 불탔으나 숙종 때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현재의 건물은 1914년의 화재로 타버린 것을 이듬해 다시 세운 것이다. 







절 안에는 경상남도유형문화재 83호로 지정된 대양루(), 대웅전, 나한전, 천왕전(殿), 요사채를 비롯한 10여 동의 건물이 남아 있다. 

대양루는 1749년(영조 25)에 세워져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는 2층 맞배집으로 건평이 106평에 이르는 규모가 큰 건축물이다. 

대웅전 후불탱화 속에서 108개의 사리가 발견되어 세상의 이목을 끌기도 하였다. 

이밖에도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마애불과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39호인 보안암() 석굴, 부도군() 등이 있다. 

보안암 석굴은 고려 말기에 세웠다고 전해지며 석굴암과 비슷한 모양이다. 

부도군은 도명(), 낙화(), 성진(), 세진(), 풍운() 등 5인의 부도가 보존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 한용운()이 수도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고, 소설가 김동리()가 한동안 머물러 《등신불》을 쓴 곳으로도 유명하다.





절을 지키는 소나무 들

‘많은 군사를 거느린다’는 그 이름처럼 다솔사로 오르는 길 양옆으로는 군사들이 사열하는 것과 같이 하늘 높이 뻗은 소나무들로 빽빽하다. 

사철 푸른 그 모습이 보기 좋으며,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는 좋은 휴식처다. 

다솔사는 신라 지증왕 때 만들어진 사찰로 경남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절 중 하나로 꼽힌다. 

신라 때 의상대사가 이곳의 이름을 영봉사라 했다가 신라 말 도선국사가 지금의 다솔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오랜 시간을 지나는 동안 큰 불이 아홉 차례나 났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절을 숙종 때 다시 지었으나 또 화재가 나 지금의 건물들은 1910년대에 새로 지은 것이다. 

절로 오르는 계단 끝에서 만나게 되는 건물인 대양루만이 조선 후기 영조 때인 1748년에 지어진 건물로 절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담고 있다. 

대양루는 36개의 큰 기둥이 받치고 있는 건물로 커다랗게 올려진 맞배지붕이 인상적이다. 


대양루 맞은편으로 절의 본전인 적멸보궁이 있는데 원래는 대웅전이었으나 1979년 오른편에 있는 응진전을 수리하다가 탱화 뒤 벽에서 사리가 발견되어 대웅전을 적멸보궁으로 개축하고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게 된 사연을 가지고 있다. 






다른 적멸보궁들에 보통 불상들이 없는 데 반하여 이곳에는 잠든 듯 기대어 있는 와불이 모셔져 있다. 

건물 뒤로는 사리탑이 있어 소원을 빌며 참배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다솔사는 일제 때 항일기지의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잘 알려진 인물로 만해 한용운이 응진전에서 머물렀으며, 김동리도 이곳에 머물며 야학을 세워 농촌계몽운동을 펼쳤다고 한다. 


다솔암에서 뒤로 난 길로 2㎞ 정도 오르면 부속 암자인 보안암이 있는데, 이곳에는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석굴이 있어 유명하다. 

한 사람 정도 겨우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석굴 내부로 들어가 불상과 나한을 볼 수 있는데 경주 토함산의 석굴암과 비교하며 둘러보자. 

다솔사는 차가 유명한데, 독립 운동가로 나중에 출가를 해 스님이 된 최범술이 절 뒤에 차밭을 가꾼 것이 시초이다. 

대나무통에 넣어 숙성시킨 차로 절 앞의 전통다원에서 그 맛을 볼 수 있다.




다솔사()는 경남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절집이라는 내력보다 듣기 좋고 소리 내기 ‘다솔’이라는 예쁜 이름 때문에 쉽게 기억된다. 
한글 이름만 듣는다면 소나무가 많은 곳이리라 짐작되지만 정작 한자 풀이는 많은 군사를 거느린다는 뜻이다. 
소나무가 많을 것이라는 추측도 빗나가지는 않는다.

다솔사 경남지역에서는 가장 오래된 절집으로, 신라 지증왕 4년 연기조사가 처음 영악사란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전한다.
사천시 곤명면 용산리 봉명산(400m)에 둥지를 틀고 있는 다솔사는 찾아가는 길에 적요로운 시골길을 지나 원시림을 떠올릴 만큼 빽빽한 측백나무·삼나무 사이사이에 소나무가 10여 그루씩 어울려 꿋꿋한 자태를 드러내는 멋진 숲을 만날 수 있어 좋다.

다솔사는 신라 지증왕 4년(503) 연기조사가 창건해 영악사()라 불리다가 선덕여왕 5년(636)에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후 문무왕 16년(676) 의상대사 때 영봉사()로 고쳐졌다가, 경문왕(861~875) 때 도선국사가 다시 다솔사로 바꿔 불렀다. 
이후 다솔사는 고려 충숙왕 13년(1326)에 중수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완전 소실되었으며, 숙종 6년(1680)에 복원된 이래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녹색 짙고 향기로운 나무 내음 속에서 첫인사를 나누게 되는 다솔사의 건물은 대양루()이다. 
대양루는 정면 5칸 측면 4칸에, 전체 건물 길이가 13m에 이르는 2층 누각 맞배지붕집으로 육중하면서도 고졸한 멋이 눈길을 끈다. 
영조 24년(1748)에 세워졌으며,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3호이다. 
그 옆에는 아름드리 단풍나무가 장하게 어울려 있다.

다솔사 대양루전체 길이 13m에 이르는 2층 누각 맞배지붕집으로 육중하면서도 고졸한 멋이 눈길을 끈다. 누 앞에 서 있는 비는 다솔사 중건비로 조선 숙종 30년에 세워졌다.
대양루로 올라가는 계단 앞 한켠에는 숙종 30년(1704)에 세운 다솔사 중건비가 얌전히 서 있다. 
거북이 몸통같이 생긴 자연석 위에 비신과 이수가 차례로 놓여 있는 이 비석에는 ‘조선국 경상우도 곤양군 북지리산 영악산 중건비’라는 비명이 새겨져 있다.

대양루를 옆으로 돌아가면 대양루보다 한 단 높은 적멸보궁 영역으로 들어선다. 





적멸보궁은 본래 대웅전이었는데, 1979년 응진전에 모신 아미타여래불상 속에서 불사리 108과가 나오자 대웅전을 적멸보궁으로 증개축한 뒤 불사리를 적멸보궁에 모셔놓았다고 한다. 
적멸보궁 안에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물게 열반에 들기 직전의 부처님 모습인 와불상이 모셔져 있다. 

적멸보궁 앞에서 대양루를 바라보면 대양루의 맞배지붕이 묵직하다.

적멸보궁 오른쪽 뒤에 있는 응진전은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이며 승려였던 만해 한용운(1879~1944)이 머물며 수도한 곳이다. 






일제강점기에 다솔사는 만해뿐 아니라 승려이면서 독립운동과 정치·교육 활동에 활발했던 김법린(1899~1964)과 최범술(1904~1979), 불교철학을 연구·교육하는 데 힘쓴 김범부(1897~1966), 소설가 김동리(1913~1995) 등이 은거하면서 독립운동을 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최범술은 다솔사 앞마을에서 태어나 60년 가까이 이곳에 머물면서, 인근에 자생하던 차나무 씨를 받아 절 뒤쪽 비탈에 차밭을 넓게 일구어 반야로차를 만들어냈다. 
차를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다솔사가 ‘다사’()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것은 이 반야로차 때문이다.



적멸보궁 뒤쪽에는 그가 일군 차밭이 꽤 넓게 펼쳐져 있다. 
이곳 차나무는 성장 속도가 빨라 다른 지역의 차나무가 움이 틀 무렵이면 여기서는 찻잎을 딴다. 
이곳의 차나무 씨를 받아 다른 곳에서 기르기도 하는데, 차맛은 여기서 자란 것보다 떨어진다고 한다. 값이 만만치는 않지만 다솔사의 명품으로 손색없는 이 반야로차는 경내 매점에서 살 수 있다. 



다솔사 길목인 다솔사휴게소 앞 언덕배기에 최범술의 부도가 있다.

다솔사와 인연을 맺은 소설가로는 김동리가 있다. 
그는 1936년부터 1940년까지 다솔사에 머물며 광명학원이란 야학을 세워 농촌계몽운동을 펼쳤다. 
이때 대양루가 수업 장소였는데, 경남지방에서 모인 청년학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후 김동리는 다솔사로 낙향하여 1963년 단편소설 「등신불」을 썼다. 
「등신불」의 배경이 다솔사이다.







보안암 석굴

다솔사 왼쪽으로 난 등산로는 비교적 평탄한 능선을 타고 이어지는 오솔길이라서 산책하는 기분으로 걸을 수 있다. 
이 길을 따라 약 2㎞ 정도 올라가면 다솔사에 딸린 보안암()이 나온다. 
보안암에는 통일신라 때 건축된 경주 토함산의 석불사(석굴암)와 닮은꼴인 고려시대 석굴이 있다. 
이른바 보안암 석굴이다.

보안암 석굴석굴사원이 많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고려시대의 석굴이다. 비록 규모도 작고 솜씨도 거칠지만 돌을 쌓아 만든 축조방식에서는 경주 석불사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비좁은 보안암에 그나마 절반 이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석굴은 뒷산을 의지하여 경사면을 ㄴ자로 파내고 다진 터 위에 널빤지 모양의 돌을 반구형으로 차곡차곡 쌓아올려 만든 석실 형식이다. 
널빤지 모양의 자연석은 충격이나 비바람에 의해 결 따라 깨진 점판암 조각으로, 깨고 다듬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없이 석굴 주변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재료이다. 
석굴의 크기는 정면 9.4m 측면 6.6m 높이 약 3.5m이다.

석굴의 내부는 기본적으로 돌방무덤과 같다. 





정면은 양쪽에 기둥을 세워 현관을 만든 후 통로를 통하여 주실에 이르도록 만든 전실이며, 주실은 화강암 장대석으로 벽과 천장의 뼈대를 만들고 그 사이사이를 널빤지 모양의 점판암으로 메웠다. 
예전에는 전실 앞 나무기둥에 작은 기와집이 있었다고 한다. 
통로인 전실은 폭 1m 길이 1.8m 높이 1.8m이며, 주실은 폭 3.6m 길이 2.5m 높이 2.8m이다. 
주실에는 향받침대 뒤로 석조여래좌상이 있고 좌우에 16나한상이 있다. 
향받침대에 조각된 도깨비 얼굴이 생동감 있게 생겨 눈길을 끈다.

석조여래좌상은 얼굴이 파손되어 시멘트로 보수하였으나 전체의 윤곽은 그런대로 옛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지는 않지만 항마촉지인을 한 석가여래임이 분명하며, 신체 각 부위는 부위별로 굴곡이 유연하게 드러나 있다. 
높이는 1.9m, 무릎폭이 1.02m 정도이다.

16나한상은 모두 50㎝ 내외로 왼쪽에 8구, 오른쪽에 7구가 있는데, 자연석이라 해도 믿어질 만큼 추상적이고 대담하다. 
얼굴엔 세부 표현이 전혀 없고, 몸 전체가 마치 자루 속에 들어앉아 있는 것처럼 대부분 웅크리고 있다. 




나한상들은 목을 움츠리거나 빼거나 팔짱을 끼거나 무릎을 세우거나 고개를 숙이고 있는 등 변화의 폭이 크진 않지만 제각기 다른 크기와 자세를 하고 있다. 
16나한상인데 어찌된 까닭인지 1구가 보이지 않는다.

석굴 앞쪽으로 낮은 산이 연이어 가로막고 있어서 바다가 보이지 않지만, 석굴은 동향하여 진주만의 바다를 향하도록 자리잡고 있다. 

보안암 앞쪽으로 약 300m 떨어진 곳에 전망바위가 있는데 이곳에서 남해에 면한 사천땅의 생김새 요모조모를 발치 아래로 내려다보는 맛이 썩 감칠나다.


지형적인 이유로 인도나 중국과 같은 대규모의 석굴이 조성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석굴사원으로 명명할 만한 것은 경주 석불사뿐이다.

보안암 석굴은 비록 규모가 작고 솜씨도 거칠지만 돌을 쌓아올려 만든 석굴에 동향한 석불을 봉안하고 있는 등 경주 석불사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다솔사 보안암 석굴의 석조여래좌상경남 사천시 곤양면 무고리 산43.
지정종목시도유형문화재
지정번호경남유형문화재 제39호
지정일1972년 02월 12일
시대고려
종류/분류석조문화재(기타)
1972년 2월 12일 경남유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되었다.

인공으로 마련된 대지 위에 판형()의 사암질() 자연석을 계단식으로 쌓아올린 분묘형() 석굴로, 앞에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목조가구를 짜올렸다. 
석굴 입구에 ‘미륵전(殿)’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으며 2m 정도 되는 직사각형의 통로를 따라 들어가면 정사각형에 가까운 주실()이 있다. 
천장은 장대석() 2개를 동서로 걸치고 다시 그 위에 또 하나의 장대석을 걸쳐놓았다. 
이러한 내부수법은 횡혈식() 석실묘()의 수법과 비슷하다. 


석굴 안에는 결가부좌한 석조여래좌상이 안치되어 있고, 좌상 뒤에는 아주 작은 돌을 쪼아 만든 16구()의 나한상()이 각 8구씩 좌우로 배치되어 있다. 
전실()의 목조가구수법은 한국의 석굴이나 마애석불()의 전면에 설치하던 전통적인 방식을 보여주고 있어 경주 토함산의 석굴암 구조를 따른 고려시대의 석굴이다.

보안암은 원래 서봉사()에 딸린 암자였으나 서봉사가 폐지됨에 따라 다솔사로 귀속되었다. 

일명 미륵암()이라고도 했으며 창건연대는 명확하게 전하지 않는다.  
1336년경 이곡()이 쓴 기록에 ‘서봉사 남쪽 천령() 위에 석굴을 만들어 미륵석상을 봉안한 것은 신라 신문왕 때의 두 왕자에 의해서이다.’라고 되어 있고,  17세기 중엽의 최응천()도 미륵봉의 석실 안에 장륙석불()이 봉안되어 있다고 서술했다. 
이들 기록 등으로 미루어 보안암석굴의 창건연대를 신라시대로 추정한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된 대양루()를 비롯하여,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48호인 극락전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49호인 응진전, 대웅전·나한전(殿)·천왕전(殿)·요사채 등 10여 동의 건물이 있다.
대양루는 1749년(영조 25) 건립된 2층 맞배집으로서, 건평 106평의 큰 건물이다. 
1658년에 중건하고, 1986년에 수리하였으며, 2000년 1월에 다시 보수를 마쳤다.



1978년 2월 8일에 있었던 대웅전 삼존불상 개금불사() 때 후불탱화 속에서 108개의 사리가 발견됨에 따라, 이 절에서는 익산 미륵사지의 석탑을 본뜬 높이 23m, 30평 정도의 성보법당()을 탑 안에 설치하여 적멸보궁사리탑()을 건립하였다.
이밖에도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마멸이 심한 마애불()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9호인 보안암석굴(), 부도군() 등이 있다.
보안암석굴은 고려 말에 창건되었다고 전하여지며, 경주 석굴암의 형태와 비슷하다. 
석굴 안의 본존불인 석가모니불은 코 부분이 깨어져 있으며, 본존불을 중심으로 하여 1.3m 내외의 석불좌상 16구가 안치되어 있는데, 조각수법으로 보아 조선시대 작품으로 추정된다. 
부도군에는 도명()·낙화()·성진()·풍운()·세진() 등 5인의 부도가 있다.
이 절은 일제 때 한용운()이 머물러 수도하던 곳이며, 소설가 김동리()가 『등신불()』을 쓴 곳이기도 하다. 
이밖에도 절 주위에서 재배되는 죽로차()는 반야로()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명차이다.


현재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돼 있다.

교통, 숙식 등 여행에 필요한 기초 정보

사천시 곤명면 용산리에 있다. 
남해·하동 방면에서 사천·진주 방면으로 난 남해고속도로를 따라가다 곤양 교차로에서 다시 58번 지방도로로 나와 곤명 방면으로 4.1㎞ 가면 길 왼쪽에 다솔사 표지판이 있는 추동삼거리가 나온다. 
추동삼거리에서 왼쪽으로 난 마을길을 따라 2.1㎞ 가면 다솔사 주차장에 닿는다.

다솔사 대양루 앞에서 왼쪽으로 난 산길을 따라 2㎞, 약 40분쯤 가면 보안암이 나온다. 
진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곤양을 거쳐 다솔사 입구인 추동삼거리를 지나는 버스는 하루 14회 있다. 
사천읍 버스터미널에서 곤양까지는 시내버스가 하루 7회 다니며 오전에 한차례 시외버스가 다닌다. 
진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사천읍으로는 5분 간격으로 완행버스가 다닌다.


ⓘ 본 정보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으므로, 여행 시에는 최신 정보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참고문헌

  • 『한국의 명산대찰』(국제불교도협의회, 1982)
  • 『문화유적총람』(문화재관리국, 1977)
     다솔사 [多率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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