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멸보궁 , 寂滅寶宮.
석가모니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신 법당을 가리킨다.
궁(宮)은 전(殿)이나 각(閣)보다 우위에 있다.
《화엄경(華嚴經)》에 따르면, 깨달음을 얻은 부처는 처음 7일 동안 시방세계(十方世界) 불보살들에게 화엄경을 설법하기 위한 해인삼매(海印三昧)의 선정에 들었다 한다.
《화엄경(華嚴經)》에 따르면, 깨달음을 얻은 부처는 처음 7일 동안 시방세계(十方世界) 불보살들에게 화엄경을 설법하기 위한 해인삼매(海印三昧)의 선정에 들었다 한다.
부처 주위에 많은 보살들이 모여 부처의 덕을 칭송하였고, 부처는 법신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과 한몸이 되었다.
적멸보궁은 본래 언덕 모양의 계단(戒壇)을 쌓고 불사리를 봉안함으로써 부처가 항상 그곳에서 적멸의 법을 법계에 설하고 있음을 상징하던 곳이었다.
적멸보궁은 본래 언덕 모양의 계단(戒壇)을 쌓고 불사리를 봉안함으로써 부처가 항상 그곳에서 적멸의 법을 법계에 설하고 있음을 상징하던 곳이었다.
진신사리는 곧 부처와 동일체로, 부처 열반 후 불상이 조성될 때까지 가장 진지하고 경건한 숭배 대상이 되었으며 불상이 만들어진 후에도 소홀하게 취급되지 않았다.
오늘날 한국에서 적멸보궁의 편액을 붙인 전각은 본래 진신사리의 예배 장소로 마련된 절집이었다.
오늘날 한국에서 적멸보궁의 편액을 붙인 전각은 본래 진신사리의 예배 장소로 마련된 절집이었다.
석가모니불이 『화엄경』을 설한 중인도 마가다국 가야성의 남쪽 보리수 아래의 적멸도량(寂滅道場)을 뜻하는 전각으로, 불사리를 모심으로써 부처님이 항상 이곳에서 적멸의 낙을 누리고 있는 곳임을 상징한다.
진신인 사리를 모시고 있는 이 불전에는 따로 불상을 봉안하지 않고 불단(佛壇)만 있는 것이 특징이다.
불사리는 곧 법신불(法身佛)로서의 석가모니 진신이 상주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신 적멸보궁의 바깥쪽에 사리탑을 세우거나 계단(戒壇)을 만들기도 한다.
우리나라에는 불사리를 모신 곳이 많지만 그 중 대표적으로 5대 적멸보궁이 있다.
①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축산 통도사의 적멸보궁,
②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오대산 중대(中臺)에 있는 적멸보궁,
③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설악산 봉정암(鳳頂庵)에 있는 적멸보궁,
④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 사자산 법흥사(法興寺)에 있는 적멸보궁,
⑤ 강원도 정선군 동면 고한리 태백산 정암사(淨巖寺)의 적멸보궁 등이다.
이 중 태백산 정암사의 적멸보궁을 제외하고는 모두 신라시대에 자장(慈藏)이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져온 불사리 및 정골(頂骨)을 직접 봉안한 것이며, 정암사의 보궁에 봉안된 사리는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泗溟大師)가 왜적의 노략질을 피해서 통도사의 것을 나누어 봉안한 것이다.
5대 적멸보궁 중 오대산의 것 외에는 사리를 안치한 위치가 분명하지만, 오대산의 보궁은 어느 곳에 불사리가 안치되어 있는지 알려져 있지 않아 그 신비성을 더하고 있다.
이들 5대 적멸보궁은 불교도의 순례지로서, 또 기도처로서 가장 신봉되고 있는 성지이다.
이 밖에 비슬산 용연사(龍淵寺)에도 사명대사가 통도사의 사리를 분장(分藏)한 적멸보궁이 있다.
우리 나라 절 가운데는 불상(佛像)을 전혀 모셔놓지 않은 데가 있다.
법당 안에는 단(壇.戒壇)만 있고 속이 텅 비었으며 법당 밖 뒤편에는 사리탑을 봉안하여 놓은 곳이다.
이러한 곳을 적멸보궁, 또는 보궁이라 하는데 이는 사리탑에 부처님의 진신(眞身) 사리를 모신 보배로운 곳이란 뜻이다.
신라 진덕왕 때 자장(慈藏) 스님이 중국 오대산에 가서 문수 보살을 친견하고 부처님 가사와 사리를 받아와 우리 나라의 가장 수승한 땅에 부처님 사리를 봉안하여 모셨는데 경남 양산 통도사(通度寺)에 부처님 가사와 사리를 모시고 금강 계단을 세웠다.
강원도 설악산 봉정암(鳳程庵), 오대산 상원사(上院寺)에 각기 사리를 모시고 적멸보궁을 지었다 한다.
강원도 영월 사자산 법흥사(法興寺)와 태백산 정암사(淨岩寺)에도 부처님사리를 봉안하고 적멸보궁을 세웠다.
이로써 이곳을 3대 적멸보궁, 5대 적멸보궁이라 통칭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한 불전을 지칭하여 적멸보궁이라 한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심으로써 부처님이 항상 그곳에서 적멸의 낙을 누리고 있음을 상징하게 된다.
부처님 생존시는 인도 마가다국 가야성의 남쪽 보리수 아래로, 을 설파한 적멸도량임을 뜻한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는 곧 법신불(法身佛)로 부처님의 진신이 상주하고 있음을 의미하며여기에는 예불의 대상으로 따로 불상을 봉안하지 않고 불단(佛壇)만 있는 것이 다른 불전과의 차이점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5개의 적멸보궁은 경상남도 양산군 영축산 통도사의 대웅전, 강원도 평창군 오대산의 적멸보궁, 강원도 인제군 설악산 봉정암(鳳頂庵) 의 적멸보궁, 강원도 영월군 사자산 법흥사(法興寺)의 적멸보궁, 강원도 정선군 태백산 정암사(淨巖寺)의 적멸보궁 등이다.
이 중에서 태백산 정암사(淨巖絲)의 적멸보궁을 제외하고는 모두 신라의 자장(慈藏)이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져온 불사리 및 정골(頂骨)을 직접 봉안한 것이다.
정암사에 봉안된 사리는 임진왜란 때 왜적의 노략질을 피해 통도사의 것을 나누어 봉안한 것이다.
통도사의 적멸보궁인 대웅전은 특이한 건축 형식과 금강계단의 존재로 가장 주목할 만한 적멸보궁이다.
통도사 대웅전은 1645년에 중건한 정면 3칸 측면 5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다른 전각과는 달리 정면의 너비가 측면보다 좁은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
특이한 평면형식은 이 전각 내에 부처님을 모시지 않고 건물 후면에 있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을 향하여 정면이 위치하면서, 한편으로는 불이문(不二門)을 들어섰을 때 마주 보이는 측면에도 합각(合閣)을 만들어 출입상의 정면과 예배상의 정면 양쪽 모두를 강조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웅전의 기단은 건물의 격에 맞추어 격식을 갖춘 가구식기단으로 장식하였으며, 건물 내부의 불단과 천정을 화려하게 조각하고 단청을 하여 장엄하고 있다.
진신사리가 봉안된 쪽으로 예배 행위를 위한 불단을 마련하였다.
한국에서는 643년 신라의 승려 자장(慈藏)대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져온 부처의 사리와 정골(頂骨)을 나누어 봉안한 5대 적멸보궁이 있다.
한국에서는 643년 신라의 승려 자장(慈藏)대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져온 부처의 사리와 정골(頂骨)을 나누어 봉안한 5대 적멸보궁이 있다.
경남 양산 통도사(通度寺),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上院寺), 설악산 봉정암(鳳頂庵), 태백산 정암사(淨巖寺), 사자산 법흥사(法興寺) 적멸보궁이 이에 해당된다.
이들 5대 적멸보궁은 불교도들의 순례지이자 기도처로서 가장 신성한 장소로 신봉되고 있다.
이들 5대 적멸보궁은 불교도들의 순례지이자 기도처로서 가장 신성한 장소로 신봉되고 있다.
오대산사고 , 五臺山史庫.
|
---|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 월정사(月精寺) 북쪽 10리 남호암(南虎巖) 기슭에 있었던 사고.
외사고(外史庫)로서 오대산사고가 설치된 것은 1606년(선조 39)이었다.
이보다 앞서 1605년 10월에 재 인쇄된 실록의 초고본을 봉안할 장소로 오대산 상원사(上院寺)가 선정되었다.
그러다가 월정사 부근에 사각(史閣)을 건립, 실록을 보관하기로 하고 사고를 마련해 초고본 실록을 보관한 것이다.
오대산사고의 수호 사찰(守護寺刹)인 월정사는 사고에서 너무 떨어져 있어 암자 격인 영감사(靈鑑寺)에서 실제로 수호를 하였다.
영감사를 일명 사고사(史庫寺)라 하기도 하였다.
오대산 사고의 실록 봉안은 1606년에 태조부터 명종 때까지의 초고본을 봉안한 이후, 1616년(광해군 8)에는 ≪선조실록≫을 봉안하였다.
1653년(효종 4)에는 ≪인조실록≫을, 1657년에는 ≪선조수정실록≫을, 1661년(현종 2)에는 ≪효종실록≫을, 1678년(숙종 4)에는 ≪광해군일기≫를, 1728년(영조 4)에는 ≪숙종실록≫을, 1732년에는 ≪경종실록≫을, 1805년(순조 5)에는 ≪정조실록≫을 봉안하였다.
오대산사고지 선원보각강원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사적 37호. 우리나라 4대 사고의 하나.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37호로 지정되었다.
여기에는 1606년(선조 39)에 재간행한 역대 실록 중 전주사고에 보관한 실록을 재인쇄, 교정을 본 교정인쇄본을 보관하여 이를 오대산본이라 하였으며 다른 사고에는 정본을 보관하였다.
오대산본은 그 후 일제가 일본의 도쿄대학[東京大學]에 옮겼다가, 1923년 간토[關東]대지진으로 대부분 소실되었으나 그 중 59권 27책은 찾아오고 98권 30책은 도쿄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실록 포쇄(實錄曝曬 :
실록책을 바람에 쐬고 햇볕에 쬐는 것)는 수시로 행해져 정확한 실시횟수는 파악하기 어렵다.
현재 남아 있는 형지안(形止案)으로 근거해 볼 때, 약 59회 행해졌다.
사고를 관리하는 책임은 참봉(參奉)에게 있지만, 사고 수호 책임은 실록수호총섭(實錄守護總攝)에게 있었다.
오대산사고 실록수호총섭은 월정사의 주지였다.
설치할 때에 수호군(守護軍) 60명, 승군(僧軍) 20명이 맡아 지켰다.
1910년 국권 상실 후, 오대산사고의 서책도 이왕직도서관(李王職圖書館)에서 관리하였다.
이듬해인 1911년 3월, 조선총독부 취조국(取調局)에서 강제로 접수했다가 1913년 10월 동경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부속 도서관에 기증되었다.
1923년 9월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으로 소실되고 대출되었던 45책만이 화를 면하였다.
소잔본(燒殘本) 27책은 1932년 5월에 경성제국대학에 이관되어 현재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사고(史庫)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