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5일 수요일

현도군,玄菟郡.

현도군,玄郡.

유형지명/지명
시대고대/초기국가/고조선
성격한사군()의 하나
소재지한반도 북부와 요동()

중국 한()나라가 설치한 군()으로서 한사군()의 하나.

전한()의 무제()가 서기전 108년에 위만조선(滿)을 멸망시킨 후, 그 옛 땅을 중심으로 낙랑군()·진번군()·임둔군()을 설치하고, 이듬해에 현도군()을 설치하였다. 
그로부터 25년 뒤인 서기전 82년에 임둔군·진번군이 폐지될 때 진번군의 일부를 흡수하였다.

서기전 75년에는 압록강 중류 지방에 있던 군치()가 요동() 혼하() 상류인 흥경()·노성() 부근으로 옮겨갔다.
『삼국지()』위지()에는 군치를 옮긴 이유를 이맥()이 침범하기 때문이라고 했을 뿐 더 자세한 설명은 없다. 

이는 서기전 1세기 전반 한의 고구려에 대한 대외정책이 강경책에서 유화책으로 전환했으며, 한인()의 압박정치에 대한 토착인의 반발이 심해졌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당시 한은 오환()의 흥기에 대해 토벌 정책을 구사하면서 동시에 이맥()에 대한 군사력을 강화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맥에 대해서는 군현지배()를 완화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에 압록강 중·상류의 주민집단은 이러한 정세변화를 적극 활용해 제1현도군을 무력으로 공격했던 것이다.

한은 현도군을 흥경·노성방면, 즉 지금의 신빈현() 영릉진()으로 군치를 옮겨 제2현도군을 설치하고 압록강 중·상류 주민집단의 공격에 대비해 현도성을 축조하는 등 방어를 강화시켰다.
1세기 말경 후한()은 잇따른 자연재해와 외척()의 발호 등으로 인해 급격한 내부불안 상태에 빠졌으며 이에 따라 군사방어력이 약화되었다. 

이를 틈타 고구려가 제2현도군에게 잦은 침공을 가하자 제2현도군은 다시 무순()지방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이 때 본래의 속현()에 요동군()의 속현인 고현()·후성()·요양() 등 3현을 분할, 귀속시키면서 제3현도군을 형성하였다.
후한 말에는 낙랑군과 함께 공손씨()의 통치를 받다가 다시 위()에 속하였으며, 그 뒤에는 서진(西)에 속하게 되었다. 

서진 말에 고구려로부터 수차례에 걸친 공략을 받아 315년에는 거의 전멸상태에 빠졌다.
제3현도군은 선비족() 모용씨()의 전연()이 319년에 요동을 차지한 뒤 요동군과 더불어 지배되다가, 그 뒤 모용씨의 후연()에 의해 지배되었으며, 404년(광개토왕 14) 이전에 이미 요동군과 함께 완전히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됨으로써 소멸되었다.

현도군의 강역()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첫째, 함경도 방면에 비정하는 옥저설()이다.
『삼국지』위지 동옥저전에 서기전 109년에 조선을 정벌하고 옥저성()으로 현도군을 삼았다는데 근거하고 있다.
둘째, 고구려설()이다. 후위()의 역도원()의『수경주()』에 보이는 현도군치()의 고구려현()을 원고구려로 보고 요산()을 현도군 소재지로 본 것이다.
셋째, 옥저 및 고구려설이다. 청나라 말기 양수경()이 『회명헌고(稿)』중에 수록한 「왕사탁한지석지박의()」에서 주장한 이래 자주 인용되었다.
넷째, 이병도()의 설로서, 현도군은 앞서 서기전 128년부터 서기전 126년까지 존속한 창해군()이 설치되었던 예맥의 땅에 두었다는 것이다. 

예맥이라는 명칭은 전한시대에는 주로 압록강의 상류·중류 지방 및 동가강()의 전 유역에 걸쳐 있었던 고구려족()을 지칭한 것으로, 현도군을 현도성이 있던 통구평야()에 비정하였다.
다섯째, 혼하()유역에서 집안()·강계()를 거쳐 함흥()까지 연장되었다고 하는 설이다. 

일본학자 와다()는 현도군을 옮기기 전부터 흥경()·노성·무순() 등지에도 역시 현치() 정도는 있었을 것이라 하였다. 
처음 현도군은 뒤의 고구려 환도성()을 중심으로 남만주와 반도의 동해안에 걸쳐 분포된 교통로적인 성격을 가졌으리라 하였다.

어떤 견해든 압록강 중·상류 일대가 제1현도군의 관할 범위에 속한다는 것에는 동의하고 있다. 
최근에는 압록강 중류지역인 집안() 국내성지() 아래층의 토축() 성벽을 비롯해 환인() 하고성지(), 통화() 적백송고성() 등 한대 토성지()가 여러 곳에서 발견되어 현도군이나 속현의 치소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 지역은 대체로 교통로상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변에 넓은 충적지대가 펼쳐져 있다. 
이것은 한이 일찍부터 성장한 유력한 정치세력들이 존재하는 교통로 상의 요지에 군현의 치소를 설치하여 압록강 중·상류 일대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를 도모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최근에는 현도군은 물론 한사군 모두가 한반도와는 관계없이 요하() 서쪽지역에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서기전 75년 군치를 흥경·노성방면으로 옮긴 후의 현도군의 규모는『한서()』지리지()에 보이는 고구려·상은태()·서개마(西) 등 3현에 불과하나, 최초의 속현은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같은 책에 기재된 호구()수는 4만 5,006호(), 22만 1,845명이다.


현도군은 앞서 한무제가 창해군()을 설치한 예맥()의 땅에 둔 것으로, 압록강 중류지역과 혼강(:) 유역에 자리잡고 있었다. 
현도군 설치 당시의 속현은 자세하지 않으나, 그 군치는 국내 환도() 지방의 고구려현에 두었고, BC 82년에 임둔군을 폐합하여 이를 영유하였다. 

BC 75년경 그 관하의 본주민(예맥)이 한족()의 지배에 항쟁을 일으켜 국내 환도지방에 있던 군치 고구려현을 요동의 새내()인 혼하(:) 상류의 흥경() ·노성()에 옮기고, 앞서 병합한 임둔군의 고지()는 낙랑군에 귀속시켰다.

현도군의 속현은 고구려 ·상은대() ·서개마(西)의 3현에 4만 5006호(), 22만 명으로 《한서》에 나타났고, 나머지 현도군의 고지는 본주민에 돌아가 이 지역은 여러 부락으로 나뉘어 얼마 동안 자치를 계속하다가 여기에서 고구려가 일어나 여러 부족을 통일하게 되었다. 

고구려 태조왕 때에 이르러 현도군은 증강한 고구려의 세력에 밀려 제2의 군치(신고구려현)를 다시 무순()지방으로 옮기고, 107년에는 요동군의 고현() ·후성() ·요양()의 3현을 편입시켰고, 그 후 다시 망평현()을 병합하여 모두 7현을 관할하였다.

현도군은 낙랑군과 더불어 184년 요동태수가 된 공손 탁의 지배하에 들어가고, 238년 공손씨가 3대만에 망하자 위()의 지배하에 들어갔다가 후에 다시 서진(西)에 속하게 되었다. 

《진서()》 지리지에는 이 당시의 현도군은 ‘통현() 3, 호() 3,200’이라 하여 그 세력이 크게 축소되었음을 나타내는데, 이전의 7현 중 서변(西)의 고구려 ·망평 ·고현 등 3현만 남고, 동변()의 상은대 ·서개마 ·요양 ·후성 등 4현은 이미 고구려의 판도에 들어간 듯 제외되어 있다. 
319년 이후 현도군은 요동군과 더불어 모용씨()의 연()나라 치하에 들어갔다가 광개토왕 때 고구려가 쟁취함으로써 한사군의 마지막 국가가 되었다.





군현제, .

기원전 221년 진의 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하자,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제를 실시하여 전국을 36군으로 나누었다. 군 아래 다수의 현을 설치하고, 중앙으로부터 관리를 파견하여 다스렸다. 
군에는 군수, 군위, 감어사, 현에는 현령, 현위, 현승이 있었는데, 중앙 정부와 비슷하게 민정, 군사, 감찰의 3권을 나누었다. 
이로써 중앙 집권 체제의 기초가 다져졌다. 


전국을 군과 현으로 나누고 지방에 관리를 파견하여 다스리는 제도. 왕의 권력이 지방까지 미치는 중앙 집권적 제도이다. 
진시황제는 군현 제도를 실시해 강력한 왕권을 유지하려 하였고 한나라의 무제는 군현 제도와 봉건 제도를 혼합한 군국 제도를 실시하였다. 
우리나라도 삼국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군현 제도가 실시되었다.

군현제는 한나라 이후 당나라 초까지 실시하였고, 그 뒤 국가는 주현제()를 실시하였다.

한사군 , 漢四郡 .

한사군 , 漢四郡 .

BC 108∼BC 107년 전한(前漢)의 무제(武帝)가 위만조선(衛滿朝鮮)을 멸망시키고 그 고지(故地)에 설치한 4개의 행정구역.

중국을 통일한 한나라는 무제() 때 동방점령을 목적으로 요동지방 진출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한나라의 무력침공은 당시 동북아시아에서 패권을 장악하고 있던 위만조선(滿)과 불가피하게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서기전 108년에 한나라는 위만조선을 굴복시키고 점령지역의 통치를 위해 4개의 지방행정구역으로 분할하였다. 
이것이 한사군이다.
이 4군은 명칭은 물론, 지역·치폐경위·소멸 등에 이르기까지 각각 다른 변천과정을 겪었다. 

4군은 전후 두 차례에 걸쳐 크게 변화되고 있다. 

서기전 82년에는 진번군을 낙랑군에 합하고 임둔군은 현도군에 폐합되었다.

서기전 75년에는 토착세력의 저항으로 현도군의 치소()가 고구려현()에서 혼하() 상류의 흥경()·노성()지방으로 옮겨지면서, 전에 현도군에 합쳤던 임둔군의 옛땅은 낙랑군에 편입되었다. 

현도군의 처음 영토는 토착민에게 돌아갔으며 통치방식도 자치에 의하게 되었다.

처음에 설치된 4군 중 진번과 임둔 2군은 설치된 지 25년 만에 소멸되었고, 현도군도 20여 년만에 본래의 지역이 토착세력에게 점령되어 한사군은 불과 30여 년만에 낙랑군만을 남기고 소멸되는 변화과정을 겪게 되었다.

낙랑군은 313년에 고구려 미천왕의 공격으로 멸망하면서 고구려에 귀속되었다. 
한나라의 4군이 동시에 존속한 기간은 25년여에 불과하며 그 이후로는 낙랑군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역사적인 변천상황이 각각 다른 4군이 한사군이라고 하는 역사술어로 사용된 것은 일제의 관학사학자들에 의해서였다. 

이들은 조선을 식민지로 영구화하기 위해 조선의 역사에서 타율성을 강조하였다. 

그 근거가 되는 역사사실의 하나가 바로 한사군이었다.

이들의 논리에 의하면, 조선의 역사는 자율적인 역사가 아니라, 외부의 침입과 이에 따른 영향으로 진행되는 타율적인 역사이며, 따라서 선진문물을 보유한 국가의 식민지가 되는 것은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나라의 식민지로 설치된 한사군의 존재는 타율성을 입증하는 좋은 근거가 되었다.

≪조선사의 길잡이 ≫라고 하는 개설서에서는 조선사의 시작을 한사군부터라고 하여, 마치 우리 역사가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는 것처럼 서술하기도 하였다. 

한사군은 일제가 우리 역사에서 타율성을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강조한 역사술어임을 알게 된다.

광복 후, 일제에 의해 왜곡, 날조된 한국사의 실체를 찾기 위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한사군문제도 재조명되었다. 

그 결과, 한사군은 낙랑군을 제외하면 존속기간이 불과 25년 정도에 이르는 짧은 기간이었으며, 가장 늦게 멸망한 낙랑군도 후기에는 대동강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좁은 지역에서 이름만을 유지하고 있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한나라가 멸망(220)한 뒤의 시기는 한나라와 전혀 무관한 지역이다. 

낙랑군의 성격은 통치기구라기보다는 중국대륙의 무역·통신업무 등을 수행하는 상업적인 기능이 강한 조계지()와 비슷한 기관임도 밝혀졌다. 

낙랑계 고분이 평양 근처에서만 집중적으로 발견되고 있는 고고학적 보고도 그와 같은 증거의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사군은 일제에 의해 그 실체보다도 확대 해석되어 지금까지도 한국고대사의 인식을 그르치게 하는데 영향을 끼쳐왔고, 광복 후에야 비로소 그 바른 모습이 밝혀졌다. 

한사군은 우리 역사에서 시대구분상의 어떤 중요한 기점이 되는 것도 아니며, 또한 역사술어로서도 타당성이 결여된 비과학적인 용어이다.



BC 108년 중국 한()나라의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하고 그 자리에 세운 4개의 군. 한의 무제는 대외팽창에 적극적이었는데, 위만조선에 대한 정벌도 그러한 대외팽창 정책의 하나였다. 
무제는 BC 109년 누선장군 양복과 좌장군 순체에게 각각 군사를 주어 육지와 바다에서 고조선을 공격케 했다. 
위만조선의 우거왕은 1년여 동안 끈질기게 저항하다가 결국 왕검성이 함락됨으로써 멸망했다. 
한은 위만조선 지역에 낙랑군()을, 옛 임둔() 지역에 임둔을, 옛 진번()의 땅에 진번을 설치하고, 이듬해 고구려 예맥에 현도군()을 설치했다고 한다. 
그 후 BC 82년에 진번, 임둔 양군을 각기 반씩을 폐기하고 나머지 반은 낙랑과 현도에 합했다. 
얼마 후 현도군마저도 토착인들의 저항으로 서북쪽으로 옮겨 소자하() 상류지역에 위치하게 되었다. 
결국 낙랑군은 옛 진번군의 7현과 옛 임둔군의 7현을 합친 대낙랑군을 형성하게 되었다.

한()은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BC 108년에 위만조선의 영역과 복속되었던 지역에 낙랑군()·임둔군()·진번군()을 설치하고 그 이듬해에 현도군()을 설치하였다.  


진번군과 임둔군은 BC 82년에 낙랑군과 현도군에 합쳐지고 현도군은 BC 75년에 서북지역으로 축출되었다. 
낙랑군은 313년에 소멸되었다.

한사군을 한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는 곳으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최근에는 위만조선의 지배세력 재편을 통한 주화파세력들의 정권으로 보고 있다. 

실제 한사군에서 위만조선의 주화파세력이 후()로 임명되었으며 중앙에서 파견되어 군을 관할하는 태수()는 임명된 후에도 현지에 부임하지 않아 실질적인 통제가 불가능했다.

오랫동안 있었던 낙랑군은 전한시대에는 한의 통치를 받기도 했지만 그 이후에는 한의 문화 유입의 통로 역할을 하며 유이민집단의 자치도시적인 성격을 가졌다.

고조선시대에 한나라가 우리 나라의 서북부지역에 설치한 낙랑()·임둔()·진번()·현도()의 4개의 군현.



기원전 108년에 중국의 한나라가 고조선을 무너뜨린 뒤 설치한 행정 구역이다. 
낙랑, 임둔, 진번, 현도 등 네 개의 군을 설치해 ‘한사군’이라고도 부른다. 
고조선 유민들의 강한 저항과 고구려의 공격으로 사라졌다.

진에 이어 중국을 통일한 한은 동쪽에서 세력을 키우는 고조선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한은 고조선에게 자신을 큰 나라로 섬기라고 압력을 가했지만, 고조선은 이를 거절했다. 
이 과정에서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한의 사신이 책임을 면하기 위해 고조선의 고위 관리를 죽이자, 고조선도 그 복수로 한의 사신을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무제는 이를 빌미로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고조선을 침공했다. 
고조선은 한의 군대에 맞서 1년을 넘게 싸웠지만 도성인 왕검성이 함락되면서 기원전 108년에 멸망했다.
한은 고조선의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 낙랑, 임둔, 진번, 현도 등 네 개의 군을 설치하고 관리를 보냈다. 

한군현은 고조선 백성들의 거센 저항에 부딪혔다. 
이로 인해 진번군과 임둔군은 기원전 82년에 사라졌고, 현도군은 기원전 75년에 서북쪽으로 쫓겨났다. 
낙랑군은 313년에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물러날 때까지 한과의 교역을 관리하는 무역 기지 역할을 했다.

삼국사기》에는 낙랑과 얽힌 설화가 실려 있다. 
고구려 대무신왕의 왕자 호동은 사냥을 나갔다가 낙랑 태수의 딸을 만나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고구려는 낙랑을 정벌하고자 했지만 위험이 생기면 소리를 내는 신비한 북인 자명고 때문에 번번이 실패했다. 

이에 호동은 낙랑 공주를 설득해 자명고를 찢게 했고, 고구려군은 기습 작전을 펼쳐 낙랑을 정복했다. 
낙랑왕은 딸을 죽이고 항복했다. 
이 설화에 나오는 낙랑이 ‘낙랑군’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