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사군 , 漢四郡 .
BC 108∼BC 107년 전한(前漢)의 무제(武帝)가 위만조선(衛滿朝鮮)을 멸망시키고 그 고지(故地)에 설치한 4개의 행정구역.
중국을 통일한 한나라는 무제(武帝) 때 동방점령을 목적으로 요동지방 진출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한나라의 무력침공은 당시 동북아시아에서 패권을 장악하고 있던 위만조선(衛滿朝鮮)과 불가피하게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서기전 108년에 한나라는 위만조선을 굴복시키고 점령지역의 통치를 위해 4개의 지방행정구역으로 분할하였다.
이것이 한사군이다.
이 4군은 명칭은 물론, 지역·치폐경위·소멸 등에 이르기까지 각각 다른 변천과정을 겪었다.
4군은 전후 두 차례에 걸쳐 크게 변화되고 있다.
서기전 82년에는 진번군을 낙랑군에 합하고 임둔군은 현도군에 폐합되었다.
서기전 75년에는 토착세력의 저항으로 현도군의 치소(治所)가 고구려현(高句麗縣)에서 혼하(渾河) 상류의 흥경(興京)·노성(老城)지방으로 옮겨지면서, 전에 현도군에 합쳤던 임둔군의 옛땅은 낙랑군에 편입되었다.
현도군의 처음 영토는 토착민에게 돌아갔으며 통치방식도 자치에 의하게 되었다.
처음에 설치된 4군 중 진번과 임둔 2군은 설치된 지 25년 만에 소멸되었고, 현도군도 20여 년만에 본래의 지역이 토착세력에게 점령되어 한사군은 불과 30여 년만에 낙랑군만을 남기고 소멸되는 변화과정을 겪게 되었다.
낙랑군은 313년에 고구려 미천왕의 공격으로 멸망하면서 고구려에 귀속되었다.
한나라의 4군이 동시에 존속한 기간은 25년여에 불과하며 그 이후로는 낙랑군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역사적인 변천상황이 각각 다른 4군이 한사군이라고 하는 역사술어로 사용된 것은 일제의 관학사학자들에 의해서였다.
이들은 조선을 식민지로 영구화하기 위해 조선의 역사에서 타율성을 강조하였다.
그 근거가 되는 역사사실의 하나가 바로 한사군이었다.
이들의 논리에 의하면, 조선의 역사는 자율적인 역사가 아니라, 외부의 침입과 이에 따른 영향으로 진행되는 타율적인 역사이며, 따라서 선진문물을 보유한 국가의 식민지가 되는 것은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나라의 식민지로 설치된 한사군의 존재는 타율성을 입증하는 좋은 근거가 되었다.
≪조선사의 길잡이 朝鮮史の栞≫라고 하는 개설서에서는 조선사의 시작을 한사군부터라고 하여, 마치 우리 역사가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는 것처럼 서술하기도 하였다.
한사군은 일제가 우리 역사에서 타율성을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강조한 역사술어임을 알게 된다.
광복 후, 일제에 의해 왜곡, 날조된 한국사의 실체를 찾기 위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한사군문제도 재조명되었다.
그 결과, 한사군은 낙랑군을 제외하면 존속기간이 불과 25년 정도에 이르는 짧은 기간이었으며, 가장 늦게 멸망한 낙랑군도 후기에는 대동강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좁은 지역에서 이름만을 유지하고 있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한나라가 멸망(220)한 뒤의 시기는 한나라와 전혀 무관한 지역이다.
낙랑군의 성격은 통치기구라기보다는 중국대륙의 무역·통신업무 등을 수행하는 상업적인 기능이 강한 조계지(租界地)와 비슷한 기관임도 밝혀졌다.
낙랑계 고분이 평양 근처에서만 집중적으로 발견되고 있는 고고학적 보고도 그와 같은 증거의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사군은 일제에 의해 그 실체보다도 확대 해석되어 지금까지도 한국고대사의 인식을 그르치게 하는데 영향을 끼쳐왔고, 광복 후에야 비로소 그 바른 모습이 밝혀졌다.
한사군은 우리 역사에서 시대구분상의 어떤 중요한 기점이 되는 것도 아니며, 또한 역사술어로서도 타당성이 결여된 비과학적인 용어이다.
BC 108년 중국 한(漢)나라의 무제(武帝)가 위만조선을 멸하고 그 자리에 세운 4개의 군. 한의 무제는 대외팽창에 적극적이었는데, 위만조선에 대한 정벌도 그러한 대외팽창 정책의 하나였다.
무제는 BC 109년 누선장군 양복과 좌장군 순체에게 각각 군사를 주어 육지와 바다에서 고조선을 공격케 했다.
그 후 BC 82년에 진번, 임둔 양군을 각기 반씩을 폐기하고 나머지 반은 낙랑과 현도에 합했다.
얼마 후 현도군마저도 토착인들의 저항으로 서북쪽으로 옮겨 소자하(蘇子河) 상류지역에 위치하게 되었다.
결국 낙랑군은 옛 진번군의 7현과 옛 임둔군의 7현을 합친 대낙랑군을 형성하게 되었다.
진번군과 임둔군은 BC 82년에 낙랑군과 현도군에 합쳐지고 현도군은 BC 75년에 서북지역으로 축출되었다.
실제 한사군에서 위만조선의 주화파세력이 후(侯)로 임명되었으며 중앙에서 파견되어 군을 관할하는 태수(太守)는 임명된 후에도 현지에 부임하지 않아 실질적인 통제가 불가능했다.
오랫동안 있었던 낙랑군은 전한시대에는 한의 통치를 받기도 했지만 그 이후에는 한의 문화 유입의 통로 역할을 하며 유이민집단의 자치도시적인 성격을 가졌다.
오랫동안 있었던 낙랑군은 전한시대에는 한의 통치를 받기도 했지만 그 이후에는 한의 문화 유입의 통로 역할을 하며 유이민집단의 자치도시적인 성격을 가졌다.
고조선시대에 한나라가 우리 나라의 서북부지역에 설치한 낙랑(樂浪)·임둔(臨屯)·진번(眞蕃)·현도(玄菟)의 4개의 군현.
- 기원전 108년에 중국의 한나라가 고조선을 무너뜨린 뒤 설치한 행정 구역이다.
- 낙랑, 임둔, 진번, 현도 등 네 개의 군을 설치해 ‘한사군’이라고도 부른다.
- 고조선 유민들의 강한 저항과 고구려의 공격으로 사라졌다.
진에 이어 중국을 통일한 한은 동쪽에서 세력을 키우는 고조선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한은 고조선에게 자신을 큰 나라로 섬기라고 압력을 가했지만, 고조선은 이를 거절했다.
이 과정에서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한의 사신이 책임을 면하기 위해 고조선의 고위 관리를 죽이자, 고조선도 그 복수로 한의 사신을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무제는 이를 빌미로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고조선을 침공했다.
고조선은 한의 군대에 맞서 1년을 넘게 싸웠지만 도성인 왕검성이 함락되면서 기원전 108년에 멸망했다.
한은 고조선의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 낙랑, 임둔, 진번, 현도 등 네 개의 군을 설치하고 관리를 보냈다.
한군현은 고조선 백성들의 거센 저항에 부딪혔다.
이로 인해 진번군과 임둔군은 기원전 82년에 사라졌고, 현도군은 기원전 75년에 서북쪽으로 쫓겨났다.
낙랑군은 313년에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물러날 때까지 한과의 교역을 관리하는 무역 기지 역할을 했다.
《삼국사기》에는 낙랑과 얽힌 설화가 실려 있다.
고구려 대무신왕의 왕자 호동은 사냥을 나갔다가 낙랑 태수의 딸을 만나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고구려는 낙랑을 정벌하고자 했지만 위험이 생기면 소리를 내는 신비한 북인 자명고 때문에 번번이 실패했다.
이에 호동은 낙랑 공주를 설득해 자명고를 찢게 했고, 고구려군은 기습 작전을 펼쳐 낙랑을 정복했다.
낙랑왕은 딸을 죽이고 항복했다.
이 설화에 나오는 낙랑이 ‘낙랑군’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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