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10일 수요일

최치원 [崔致遠] 1

열두 살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 6두품의 천재


신라 6두품 출신으로 당으로 건너가 18세에 빈공과에 장원으로 합격한, 신라 최고의 천재 최치원.


868년 어느 날, 당나라로 떠나는 열두 살의 최치원에게 아버지는 말했다.
“10년 공부하여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라고 하지 말아라. 
나 역시 아들이 있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가서 열심히 하거라.”










먼 곳으로 어린 아들을 보내는 아버지의 당부로는 지나치리만큼 매서운 이 말 속에는 대대로 문장과 학문으로 이름을 얻었던 최씨 집안 자손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6두품으로서 느끼는 한과 비애가 숨어 있었다. 

“네 살 때 글을 배우기 시작해 열 살 때 사서삼경을 읽었다.”라는 기록이 전할 만큼 총명한 아들이었지만 신라에서는 그 재능을 다 펼치기 어렵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아버지였다.
최치원은 신라 6두품 집안 출신이었다. 

엄격한 골품제 사회였던 신라에서 6두품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신라 17관등 가운데 6등위에 해당하는 아찬 이상의 벼슬에는 오를 수 없었다. 
골품제라는 한계 속에서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하지 못했던 6두품들은 당나라 유학의 길을 많이 선택했다. 

837년 한 해 동안 당나라에 건너간 신라 유학생이 216명에 이를 정도로 당시 신라에서는 유학 열풍이 불고 있었다.
유학을 떠나는 최치원의 각오도 아버지 못지않았다. 

당나라에 간 최치원은 “졸음을 쫓기 위해 상투를 매달고 가시로 살을 찌르며, 남이 백을 하는 동안 나는 천의 노력을 했다.”라는 기록을 남길 만큼 열심히 공부했다. 
그 결과 6년 만인 874년, 18세의 나이로 빈공과에 합격했다. 그냥 합격도 아니고 장원이었다. 
빈공과는 당나라에서 외국인을 위해 실시한 과거로 이 시험에 합격하면 당나라에서 벼슬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귀국 후 출세길이 보장된 엘리트코스였다.

[토황소격문]으로 당나라 전역에 이름을 떨치다

과거에 합격한 2년 뒤인 876년 율수현의 현위로 첫 관직에 올랐으나 이듬해 사직했고, 이후 회남 절도사 고변의 추천으로 관역순관이라는 비교적 높은 지위에 올랐다. 이 무렵 ‘황소의 난’이 일어났다. 
소금장수였던 황소가 장안을 점령하고 스스로 황제를 칭하자, 고변은 이를 토벌하러 나가면서 최치원을 종사관으로 발탁했다. 

“황소가 읽다가 너무 놀라서 침상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라는 일화가 전하는 유명한 글 [토황소격문]이쓰인 것은 이때의 일이다.
“무릇 바른 것을 지키고 떳떳함을 행하는 것을 도라 하고, 위험한 때를 당해서 변통하는 것을 권이라 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때에 순응해 성공하지만 어리석은 자는 이치를 거슬러 패하는 법이다.”
이렇게 시작한 글은 “온 천하 사람들이 너를 드러내놓고 죽이려 할 뿐 아니라, 지하의 귀신들까지 너를 죽이려 이미 의논했을 것이다.”라며 겁을 주기도 하고 “나는 한 장의 글을 남겨서 너의 거꾸로 매달린 위급함을 풀어주려는 것이니, 너는 미련한 짓을 하지 말고 일찍 기회를 보아 좋은 방책을 세워 잘못을 고치도록 해라.”라고 회유하기도 한다.
중국땅에 문을 연 최치원 기념관. 최치원은 고국인 신라보다는 당에서 더욱 실력을 인정받았다.
고변은 황소가 장악한 모든 지역에 이 글을 뿌렸다. 
당시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황소를 격퇴한 것은 칼이 아니라 최치원의 글이다.”라는 이야기가 떠돌았을 정도로 최치원의 글솜씨는 당나라 전체를 뒤흔들었다. 
황소의 난이 진압된 뒤중국 황제는 최치원에게 자금어대를 하사했다. 
자금어대는 황제가 정5품 이상에게 하사하는 붉은 주머니로, 이것을 받았다 함은 그 능력을 황제에게 인정받았다는 의미이다.

[토황소격문]으로 문명(文名)을 떨쳤고 황제에게 인정도 받았으나, 고국과 부모에 대한 그리움을 떨쳐버리지 못했기 때문인지 최치원은 17년간의 당나라 생활을 접고 귀국을 결정한다. 
884년 당 희종이 신라 왕에게 내리는 조서를 가지고 귀국할 당시 그의 나이는 28세였다. 
신라의 헌강왕은 최치원을 ‘시독 겸 한림학사’로 임명했다. 
신라 조정에서 당에 올리는 표문을 비롯한 문서를 작성하는 직책이었다. 
헌강왕은 왕권을 강화하려는 노력의 하나로 당나라 유학생 출신들을 귀국시켜 학문적인 전문가로 측근에 두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세계적인 지식인으로 성장한 젊은 최치원에 대한 기대가 컸을 것이다. 
최치원 또한 당나라에서 배운 학문과 기량을 고국에서 제대로 펼쳐보이고 싶은 열망에 가득 차 있었다.
삼국사기 옥산서원본 전 50권 가운데 권 46의 제 3장 최치원 부분.
<출처 : 국사출판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NIKH.DB-fl_001_002_001_0035)

이듬해 7월 헌강왕이 승하하자 최치원은 곧 외직으로 나가 태산군 태수가 되었다. 
외직으로 나간 이유에 대해 [삼국사기]는 ‘최치원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당나라에 유학해 얻은 바가 많아서 앞으로 자신의 뜻을 행하려 하였으나, 신라가 쇠퇴하는 때여서 의심과 시기가 많아 용납될 수 없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헌강왕이 세상을 떠난 직후임을 살펴볼 때 왕권을 강화하려는 노력을 펼치던 헌강왕의 측근으로서, 헌강왕의 정책에 반발하던 진골 귀족들의 눈 밖에 난 것일 수도 있다.
그 무렵 신라는 급속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지방에서 호족들이 등장하여 중앙 정부를 위협하고, 세금을 제대로 거두어들이지 못한 국가의 재정은 어려웠다. 
889년에는 농민들이 사방에서 봉기하여 전국적인 내란 상태에 빠졌다. 
의욕적으로 시작한 고국생활이었지만 골품제의 한계와 국정의 혼란을 넘어서지 못한 채 최치원은 외직으로 떠돌며 대산군∙천령군∙부성군 등의 태수를 역임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신라를 개혁하려는 의지가 완전히 꺾인 것은 아니었다. 
894년에는 시무책 10여 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려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진성여왕은 그의 시무책을 받아들여, 최치원을 6두품 신분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 관직인 아찬에 제수하고 그의 제안대로 개혁을 펼치려 했다. 
당시 중앙 귀족들은 그의 개혁안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당나라에서는 이방인이라는 한계가, 고국에 돌아와서는 6두품이라는 한계가 그의 발목을 붙잡은 셈이다.


이후 최치원은 은둔을 결심하고 경주의 남산∙강주∙합천의 청량사∙지리산 쌍계사∙동래의 해운대 등에 발자취를 남기다 말년에는 해인사에 머물며 열정적으로 저술활동에 몰두했다. 
해인사에서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알 수 없으나, 그가 남긴 마지막 글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에 따르면 908년까지 생존했던 듯하다. 
그 뒤 방랑하다가 죽었다고도 하고 신선이 되었다고도 한다.
경북 문경의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 국보 315호로 최치원이 지은 비문을 새긴 비석이다.
부산 해운대(海雲臺)의 지명의 유래가 된 최치원이 남긴 글씨
최치원 자신은 신라인으로 남아 은둔 생활로 일생을 마쳤지만, 유교에서 그의 선구적 업적은 최승로로 이어져 신흥 고려의 정치 이념을 확립하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후 최치원은 한국유학사상 최초의 도통으로 모셔지고 있으나, 사실 그의 사상은 유교와 불교, 도교를 통합한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지증∙낭혜∙진감 등 선승들의 탑 비문을 썼고, 노장사상에도 관심이 있었으며, 유∙불∙선의 통합을 주장했다.


최치원이 왕건에게 “계림(신라)은 누런 잎이고, 곡령(고려)은 푸른 소나무”라는 글을 올려 고려에 대한 지지를 완곡하게 표현했으며, 심지어 이 때문에 신라왕의 미움을 받아 가족을 이끌고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가 은거했다는 말들이 전한다. 
그러나 최치원이 은퇴할 당시 왕건은 이십 대 초반의 청년으로 궁예 휘하의 장수에 불과했다.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것은 그로부터 20년이나 더 지난 뒤의 일이다. 
은퇴한 이후에도 꾸준히 신라에 대한 강한 애착과 호국에 대한 굳은 의지를 글로 표현했던 최치원이 은밀히 왕건을 지지했을 것 같지는 않다.
최치원 [崔致遠] - 유·불·선 통합을 주장했던, 신라 최고의 천재 (인물한국사)

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최문창후 전집』(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1972)
최영성, 『최치원의 철학 사상』(아세아문화사, 2000)
당인핑, 『최치원 신연구』(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2004)
이구의, 『최고운 문학 연구』(아세아문화사, 2005)
장일규, 『최치원의 사회사상 연구』(신서원, 2008)

최치원 [崔致遠]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유()ㆍ불()ㆍ선() 통합 사상

최치원은 개혁이 좌절된 뒤에 신라 말기의 혼란 속에서 은둔 생활로 삶을 마쳤다. 하지만 유교() 정치이념을 기반으로 골품제도라는 신분제의 사회적 문제를 극복하려고 했던 그의 사상은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최언위(), 최승로() 등은 고려에서 유교 정치이념이 확립되는 데 기여했으며, 새로운 국가체제와 사회질서를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때문에 최치원은 조선시대에 와서도 태인() 무성서원(), 경주()의 서악서원(西), 함양의 백연서원(), 영평()의 고운영당() 등에 제향()되는 등 유학자들에게 계속해서 숭앙되었다. 

그는 유교사관()에 입각해 역사를 정리하여 삼국의 역사를 연표의 형식으로 정리한 <제왕연대력()>을 저술하기도 했다.

최치원은 유학에 기반을 두고 있으면서도, 신라의 고유 사상을 새롭게 인식하고 나아가 유교ㆍ불교ㆍ도교의 가르침을 하나로 통합해서 이해하려고 했다. 
그는 ‘난랑()’이라는 화랑을 기리는 ‘난랑비서()’라는 글에서 유교와 도교, 불교를 포용하고 조화시키는 ‘풍류도’를 한국 사상의 고유한 전통으로 제시하고 있다.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라 한다

(). 그 가르침을 베푼 근원은 ‘선사()’에 상세히 실려 있는데, 실로 삼교()를 포함하여 중생을 교화한다

(  ). 들어와 집에서 효도하고 나가서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가르침이다

(  ). 무위로 일을 처리하고 말없이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노자의 뜻이다

(  ). 악한 일은 하지 않고 선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부처의 가르침이다(  ).”

<삼국사기()>의 ‘진흥왕 조()’에 인용되어 전해지는 이 글에서 최치원이 말하는 풍류도는 신라의 화랑도를 가리킨다. 
달리 풍월도()라고도 하는 화랑도는 신라 진흥왕 때에 비로소 제도로 정착되었지만, 그 기원은 고대의 전통 신앙과 사상으로 이어진다. 

<삼국사기>에는 화랑도에 대해 “무리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혹은 서로 도의를 연마하고 혹은 서로 가락을 즐기면서 산수를 찾아다니며 즐겼는데 멀어서 못간 곳이 없다. 

이로 인하여 그 사람의 옳고 그름을 알게 되고 그 중에서 좋은 사람을 가려 뽑아 이를 조정에 추천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화랑의 수양 방법은 노래와 춤을 즐기고, 산악을 숭배하던 고대의 제천 행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고구려에도 ‘조의선인()’이라는 관직과 ‘경당()’이라는 교육기관이 있었던 것에 비추어보면 이러한 전통은 꼭 신라에만 국한되었던 것으로 보기 어렵다. 

최치원은 이처럼 고유 신앙과 사상에 바탕을 두면서 유교ㆍ불교ㆍ도교 등 외래 사상의 가르침을 융합하고 있는 풍류도를 ‘현묘한 도()’라고 칭하며, 포용과 조화의 특성을 지닌 한국 사상의 고유한 전통으로 강조하고 있다.

나아가 최치원은 유교ㆍ불교ㆍ도교의 가르침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지극한 도()에서는 하나로 통하므로 그것들을 구별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생각은 ‘진감선사 비문()’에 실린 다음과 같은 내용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학자들이 간혹 이르기를 석가와 공자의 가르침이 흐름이 갈리고 체제가 달라 둥근 구멍에 모난 자루를 박는 것처럼 서로 모순되어 한 귀퉁이에만 집착한다고 한다.  

시()를 해설하는 사람이 문()으로 사()를 해치지 않고, 사()로 뜻()을 해치지 않는 것처럼, <예기()>에 이르기를 ‘말이 어찌 한 갈래뿐이겠는가. 무릇 제각기 마땅한 바가 있다’고 하였다. 

여산()의 혜원()이 논()을 지어서 ‘여래()가 주공, 공자와 드러낸 이치는 비록 다르지만 돌아가는 바는 한 길이며 지극한 이치에 통달하였다. 
겸하지 못하는 자는 물()이 겸하기를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심약()도 말하기를 ‘공자는 그 실마리를 일으켰고 석가는 그 이치를 밝혔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그 큰 뜻을 아는 사람이어야 비로소 더불어 지극한 도()를 말할 수 있다 하겠다.”

이처럼 궁극적으로는 유()ㆍ불()ㆍ선()의 가르침이 하나로 통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최치원은 유학자이면서도 불교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고, 노장사상()과 풍수지리설() 등에도 상당한 이해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승려들과 폭넓게 교류하고, 불교에 관한 글을 많이 남겼다. 
여기에는 ‘법장화상전()’ㆍ‘부석존자전()’ㆍ‘석순응전()’ㆍ‘석이정전()’ 등 화엄종()과 관련된 것들도 있지만, 지증()ㆍ낭혜()ㆍ진감() 등 새로 등장한 선종() 승려들에 관한 글들도 포함되어 있다. 

특히 ‘지증대사 비문()’에서는 신라 선종()의 역사를 간명하게 기술하고 있다. 
원측()과 태현() 등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어 유식학()에 대해서도 깊게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유교ㆍ불교ㆍ도교의 가르침을 모두 깊게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글에서는 승려의 비문()에서도 불교만이 아니라 유교와 도교의 경전이 폭넓게 인용되고 있다. 
이는 그가 유()ㆍ불()ㆍ선()의 3교()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출발점은 달라도 궁극적으로 하나로 통합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최치원의 유ㆍ불ㆍ선 통합 사상은 고려 시대의 유학과 불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유교 정치이념을 강조한 최승로()와 같은 유학자조차도 ‘불교는 수신()의 근본이고 유교는 치국()의 근원’이라고 말할 정도로 고려 시대에는 유교ㆍ불교ㆍ도교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특히 민간 신앙과 풍습에서는 그것들이 서로 긴밀히 융합하는 모습을 띠었다. 

고려 말기의 선승()인 진각국사() 혜심()은 “이름을 들어보면 유교와 불교가 서로 멀어 다른 것 같지만 그 실상을 알면 유교와 불교가 다르지 않다.
( )”며 ‘유불일치설()’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조선 말기에 민족의 고유의 경천() 사상을 바탕으로 유ㆍ불ㆍ선의 사상을 융합하여 형성된 동학()에서도 최치원 사상과의 연관성이 나타난다.

최치원은 문학에서도 뛰어난 성취를 보여 후대에 숭앙되었다. 

<사시금체부()>, <오언칠언금체시()>, <잡시부()>, <사륙집()> 등의 시문집은 오늘날에는 전해지지 않고 이름만 남아 있지만, <계원필경()>과 <동문선()>에는 그가 쓴 시문()들이 다수 전해지고 있다.  

‘대숭복사비()’, ‘진감국사비()’, ‘지증대사적조탑비()’, ‘무염국사백월보광탑비()’ 등 이른바 ‘사산비문()’과 <법장화상전()> 등도 전해지고 있다. 
그는 대구()로 이루어진 4ㆍ6 변려문()을 즐겨 썼으며, 문장이 평이하면서도 고아()한 품격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밖에 <제왕연대력 >, <중산복궤집()>, <석순응전()>, <부석존자전()>, <석이정전()> 등의 저술이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글씨도 잘 썼으며, ‘사산비문()’ 가운데 하동의 쌍계사에 있는 ‘진감국사비()’는 최치원이 직접 짓고 쓴 것으로 오늘날까지 그의 필적을 전해준다. 
이 탑비()는 대한민국 국보 47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최치원이 해서체()로 쓴 비문은 모두 38행 2,414자로 되어 있다.


9세기 통일신라 말기의 학자이다. 
중국 당 나라에서 ‘토황소격문()’으로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으며, 신라로 돌아온 뒤에는 진성여왕에게 시무책을 올려 정치 개혁을 추진하였다. 
유교()ㆍ불교()ㆍ도교()에 모두 이해가 깊었고, 유ㆍ불ㆍ선 통합 사상을 제시하였다. 
수많은 시문()을 남겨 한문학의 발달에도 기여하였다.

12세 때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18세 때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879년 황소의 난 당시 이를 비난하는 <토황소격문>을 지으면서 문장가로 유명해졌다. 
신라로 귀국한 후에는 문란한 정치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담은 시무 10여 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리면서 아찬()이 되었다. 
그 후 벼슬에서 물러나 어지러운 현실을 비관하며 유랑하다가 가야산의 해인사에서 생을 마쳤다.

유학자였지만 불교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불교의 선종과 교종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승려들과도 친분이 두터웠으며 말년에는 해인사에서 지내기도 하였다. 
문장과 문학에도 능하여 후대 학자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변려문() 형식의 그의 문장은 아름답게 다듬어지고 형식미가 갖추어져 있었으며, 대표적인 저서로는 <계원필경>, <사륙집()> 등이 있다. 
그가 지은 <난랑비서문()>은 화랑도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최치원 연보
출생 857~ 사망 ?
857
견일의 아들로 출생.
868
당나라에서 유학.
874
당나라 빈공과에 합격.
876
선주 율수현 현위로 관직에 오름.
877
관직에서 물러나 양양에서 이위의 문객으로 지냄.
885
 희종의 조서를 가지고 신라에 귀국.
886
당나라에서 썼던 글들을 문집으로 정리하여 신라 왕에게 바침.
893
견당사로 임명되었으나 각지에서 일어난 민란 때문에 관직에 나가지 못함.
894
진성여왕에게 10여 조의 시무책을 제시하여 아찬으로 임명 됨.
897
효공왕이 즉위한 뒤 관직에서 물러나 각지를 유랑.
908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 집필.

최치원 [崔致遠] (Basic 고교생을 위한 윤리 용어사전, 2001. 12. 20., (주)신원문화사)

















최치원 [崔致遠]

최치원

[]

신라의 학자로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고운()·해운()이다. 

최치원초상 / 채용신
채용신, 〈최치원초상〉, 1924년, 비단에 채색, 123×73㎝, 무성서원. 통일신라시대의 대문장가인 최치원의 초상화이다. 
복식은 중국 당나라 형식으로 머리에는 복두를 쓰고 붉은색 단령을 입고 있으며 가부좌를 하고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손에 불자를 들고 있는 모습이나 의자 아래 신발이 놓여 있는 모습은 불교의 승려 초상화 형식을 따른 것이다.
이칭별칭 고운, , 해운, 
유형인물
시대고대/남북국/통일신라
출생 - 사망857년 ~ 미상
성격학자
성별
본관경주()
저서(작품)계원필경, 법장화상전, 사산비명
대표관직(경력)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사, 부성군 태수, 아찬

 최치원 [崔致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는 고운(), 해운() 또는 해부()이다. 
고려 현종() 때인 1023년(현종 14년)에 내사령()으로 추증되었으며, 문묘()에 배향되며 ‘문창후()’라는 시호()를 받았다. 

신라 6부의 하나인 ‘사량부(, 지금의 경주)’에서 6두품의 신분으로 태어났으며, 오늘날 경주() 최씨의 시조로 여겨지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본피부()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라 47대 헌안왕(, 재위 857~861) 원년인 857년에 태어났으며, 부친은 38대 원성왕(, 재위 785~798) 때에 숭복사() 창건에 참여했다고 전해지는 견일()이다. 

48대 경문왕(, 재위 861~875) 때인 868년에 12세의 어린 나이로 중국 당() 나라로 유학을 떠나, 874년 예부시랑() 배찬()이 주관한 빈공과()에 합격하였다. 

2년 동안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뤄양[] 등지를 떠돌면서 시작()에 몰두하여 5수() 1권()으로 된 <사시금체부()>, 100수 1권으로 된 <오언칠언금체시()>, 30수 1권으로 된 <잡시부()> 등의 시문집을 지었으나, 오늘날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 뒤 876년 선주() 율수현(, 지금의  ) 현위()로 관직에 올랐으며, 이 무렵 1부() 5권으로 된 <중산복궤집()>을 저술하였다.

당시 당()은 심각한 기근으로 인해 각지에서 농민 반란이 일어나, 875년부터는 왕선지(), 황소() 등이 유민을 모아 산둥성[], 허난성[], 안후이성[] 등지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877년 겨울 관직에서 물러난 최치원은 양양()에서 이위()의 문객()이 되었다가, 회남절도사(使) 고변()의 추천으로 관역순관()이 되었다. 

고변이 황소()의 반군을 토벌하기 위한 제도행영병마도통()이 되자, 
그의 종사관으로 참전하여 4년 동안 표()ㆍ서계()ㆍ격문() 등의 문서를 작성하는 일을 맡았다. 

이 무렵 최치원이 쓴 글은 1만여 편에 이르렀는데, 그 가운데 특히 ‘토황소격문()’은 명문()으로 이름이 높았다. 
최치원은 879년 승무랑() 전중시어사 내공봉(殿)으로 도통순관()의 직위에 올랐으며, 포상으로 비은어대()를 받았다. 

882년에는 자금어대()를 받았다. 
최치원()은 당 나라에서 17년 동안 머무르며 나은(, 833~909) 등의 문인들과 친교를 맺으며 문명()을 떨쳤다. 

<당서()> ‘예문지()’에도 <사륙집()>과 <계원필경()> 등 그가 저술한 책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885년(헌강왕 11년), 최치원은 당 희종(, 재위 873~888)의 조서를 가지고 신라로 귀국했으며, 신라의 49대 헌강왕(, 재위 875~886)은 그를 당에 보내는 외교 문서 등을 작성하는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으로 등용하였다. 

귀국한 이듬해에 왕의 명령으로 ‘대숭복사비문()’ 등을 썼고, 당 나라에서 썼던 글들을 28권의 문집으로 정리하여 왕에게 바쳤다. 
이 가운데 <중산복궤집()> 등 8권은 전해지지 않으며, <계원필경()> 20권만 전해지고 있다. 

886년 헌강왕이 죽은 뒤에는 외직()으로 물러나 태산군(, 지금의 전라북도 태인), 천령군(,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 부성군(, 지금의 충청남도 서산)의 태수()를 지냈다. 
893년에는 견당사(使)로 임명되었으나,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나 떠나지 못했다.

당시 신라는 지방에서 호족의 세력이 커지면서 왕실과 조정의 권위가 약화되었으며, 중앙 정부는 주()와 군()에서 공부()도 제대로 거두지 못해 심각한 재정 위기를 겪고 있었다. 

게다가 889년에는 진성여왕(, 재위 887~897)이 공부()의 납부를 독촉하면서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나 조정의 힘은 수도인 서라벌 부근에만 한정될 정도로 정치적 위기가 심화되었다. 

최치원은 894년 진성여왕에게 10여 조의 시무책()을 제시하였고, 진성여왕은 그를 6두품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 관직인 아찬()으로 임명하였다. 
최치원의 개혁은 중앙 귀족의 반발로 실현되지 못했다.



진성여왕이 물러나고 효공왕(, 재위 897~912)이 즉위한 뒤, 최치원은 관직에서 물러나 각지를 유랑하였다. 
만년에는 가야산()의 해인사()에 머물렀다. 


908년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를 쓸 때까지는 생존해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지만, 그 뒤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때문에 정확한 사망 날짜는 확인되지 않으며, 방랑하다가 죽었다거나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그는 경주의 남산(), 합천 매화산의 청량사(), 하동의 쌍계사() 등을 즐겨 찾았던 것으로 전해지며, 부산의 해운대()라는 지명도 최치원의 자()인 ‘해운()’에서 비롯되었다.



남북국 시대 부산 지역의 해운대()를 명명한 신라의 학자 겸 문장가.


본관은 경주(). 자는 고운() 또는 해운(). 
아버지는 숭복사의 전신인 곡사()의 중창 사업에 참여한 최견일()이고, 형은 해인사 승려 현준()이다. 
당제()는 헌강왕() 대 견당 사절단의 녹사()였던 최서원()이다.


최치원()[856~?]은 경주 사량부()에서 태어나 12살 때인 경문왕 8년(868) 당나라에 유학하여 국자감()에서 공부하였다. 

18세 때인 874년 외국인 대상의 과거 시험인 빈공과()에 급제하여 선주() 율수현()[지금의 강소성 율수현]의 현위()가 되었다. 

황소()의 난[875~884]이 일어나자 회남 절도사 고병()의 종사관으로 나가 「격황소서()」[토황소 격문()]을 지어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다.

29세 때인 헌강왕 11년(885) 귀국하여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 감사() 벼슬을 받았다. 

왕실 귀족들의 경계와 질시로 중앙 관직에서 물러나 대산군()[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 천령군()[지금의 경상남도 함양군], 부성군()[지금의 충청남도 서산시] 태수 등 외직을 전전하다가 하정사(使)로서 당나라에 한 차례 다녀왔다. 

진성 여왕 8년(894) 어지러운 정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임금에게 「시무 10조()」를 올려 채택되고, 아찬 관직을 받았으나 나라 안팎의 사정으로 개혁이 무산되었다.

최치원은 당에서 익힌 학술과 식견을 바탕으로 큰 뜻을 펼치려 했으나 번번이 좌절되자, 만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전국의 산천을 노닐며 책 읽고 시 짓는 일로 소일하였다. 

최치원이 전국을 방랑할 때 부산의 바닷가에 잠시 머물렀는데, 이때 동백섬 인근 바위에 자신의 자()를 따서 ‘’라는 글씨를 새겼다. 
최치원 석각
해운대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최치원 한시비 「가야산 홍류동」, 「양산 임경대」

최치원 한시비 「비오는 가을 밤에」, 「생각을 붙여」

최치원 한시비 「봄새벽」


당나라 국자감에서 공부하여 유학과 사장학()에 뛰어났고, 불교와 도교, 풍수지리설에도 이해가 깊었다. 

최치원이 지은 책은 『계원필경()』, 『중산 복궤집()』, 『금체시()』, 『오언 칠언 금체시()』, 『잡시부()』, 『사륙집()』, 『제왕 연대력()』, 『부석존자전()』, 『법장 화상전()』, 『석이정전()』, 『석순응전()』 등이 있었다고 한다. 


청룡대 각석 최치원 친필
청룡대 각석 최치원 친필경상남도 창원시 가주동에 있는 청룡대 각석에 새겨진 최치원 친필이다. 
자연 암석을 다듬은 다음, '청룡대치원서'라는 글씨를 새겼다.


일명 사산비명()으로 불리는 「성주사 낭혜 화상 백월보광탑비()」, 「쌍계사 진감 선사 대공영탑비()」, 「초월산 대숭복사비()」, 「봉암사 지증 대사 적조탑비()」 등의 글씨도 최치원이 썼다. 
이 가운데 『계원필경』과 『법장 화상전』, 사산비명의 내용만이 온전하게 전해지고 있다.

고려 현종 14년(1022)에 문창후()라는 시호를 받았고, 국자감과 향교의 문묘에 배향되었다. 부산에서는 동래 향교에서 배향하고 있다.


유·불·선 통합을 주장했던, 신라 최고의 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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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崔致遠, 857~?)은 유교∙불교∙도교에 이르기까지 깊은 이해를 지녔던 학자이자 뛰어난 문장가였다. 

높은 신분제의 벽에 가로막혀, 자신의 뜻을 현실정치에 펼쳐보이지 못하고 깊은 좌절을 안은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그가 이룩한 학문과 문장의 경지는 높았으나, 난세를 산 그의 삶은 그가 이룩한 높은 경지만큼 불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