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10일 수요일

최치원 [崔致遠]

최치원

[]

신라의 학자로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고운()·해운()이다. 

최치원초상 / 채용신
채용신, 〈최치원초상〉, 1924년, 비단에 채색, 123×73㎝, 무성서원. 통일신라시대의 대문장가인 최치원의 초상화이다. 
복식은 중국 당나라 형식으로 머리에는 복두를 쓰고 붉은색 단령을 입고 있으며 가부좌를 하고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손에 불자를 들고 있는 모습이나 의자 아래 신발이 놓여 있는 모습은 불교의 승려 초상화 형식을 따른 것이다.
이칭별칭 고운, , 해운, 
유형인물
시대고대/남북국/통일신라
출생 - 사망857년 ~ 미상
성격학자
성별
본관경주()
저서(작품)계원필경, 법장화상전, 사산비명
대표관직(경력)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사, 부성군 태수, 아찬

 최치원 [崔致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는 고운(), 해운() 또는 해부()이다. 
고려 현종() 때인 1023년(현종 14년)에 내사령()으로 추증되었으며, 문묘()에 배향되며 ‘문창후()’라는 시호()를 받았다. 

신라 6부의 하나인 ‘사량부(, 지금의 경주)’에서 6두품의 신분으로 태어났으며, 오늘날 경주() 최씨의 시조로 여겨지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본피부()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라 47대 헌안왕(, 재위 857~861) 원년인 857년에 태어났으며, 부친은 38대 원성왕(, 재위 785~798) 때에 숭복사() 창건에 참여했다고 전해지는 견일()이다. 

48대 경문왕(, 재위 861~875) 때인 868년에 12세의 어린 나이로 중국 당() 나라로 유학을 떠나, 874년 예부시랑() 배찬()이 주관한 빈공과()에 합격하였다. 

2년 동안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뤄양[] 등지를 떠돌면서 시작()에 몰두하여 5수() 1권()으로 된 <사시금체부()>, 100수 1권으로 된 <오언칠언금체시()>, 30수 1권으로 된 <잡시부()> 등의 시문집을 지었으나, 오늘날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 뒤 876년 선주() 율수현(, 지금의  ) 현위()로 관직에 올랐으며, 이 무렵 1부() 5권으로 된 <중산복궤집()>을 저술하였다.

당시 당()은 심각한 기근으로 인해 각지에서 농민 반란이 일어나, 875년부터는 왕선지(), 황소() 등이 유민을 모아 산둥성[], 허난성[], 안후이성[] 등지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877년 겨울 관직에서 물러난 최치원은 양양()에서 이위()의 문객()이 되었다가, 회남절도사(使) 고변()의 추천으로 관역순관()이 되었다. 

고변이 황소()의 반군을 토벌하기 위한 제도행영병마도통()이 되자, 
그의 종사관으로 참전하여 4년 동안 표()ㆍ서계()ㆍ격문() 등의 문서를 작성하는 일을 맡았다. 

이 무렵 최치원이 쓴 글은 1만여 편에 이르렀는데, 그 가운데 특히 ‘토황소격문()’은 명문()으로 이름이 높았다. 
최치원은 879년 승무랑() 전중시어사 내공봉(殿)으로 도통순관()의 직위에 올랐으며, 포상으로 비은어대()를 받았다. 

882년에는 자금어대()를 받았다. 
최치원()은 당 나라에서 17년 동안 머무르며 나은(, 833~909) 등의 문인들과 친교를 맺으며 문명()을 떨쳤다. 

<당서()> ‘예문지()’에도 <사륙집()>과 <계원필경()> 등 그가 저술한 책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885년(헌강왕 11년), 최치원은 당 희종(, 재위 873~888)의 조서를 가지고 신라로 귀국했으며, 신라의 49대 헌강왕(, 재위 875~886)은 그를 당에 보내는 외교 문서 등을 작성하는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으로 등용하였다. 

귀국한 이듬해에 왕의 명령으로 ‘대숭복사비문()’ 등을 썼고, 당 나라에서 썼던 글들을 28권의 문집으로 정리하여 왕에게 바쳤다. 
이 가운데 <중산복궤집()> 등 8권은 전해지지 않으며, <계원필경()> 20권만 전해지고 있다. 

886년 헌강왕이 죽은 뒤에는 외직()으로 물러나 태산군(, 지금의 전라북도 태인), 천령군(,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 부성군(, 지금의 충청남도 서산)의 태수()를 지냈다. 
893년에는 견당사(使)로 임명되었으나,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나 떠나지 못했다.

당시 신라는 지방에서 호족의 세력이 커지면서 왕실과 조정의 권위가 약화되었으며, 중앙 정부는 주()와 군()에서 공부()도 제대로 거두지 못해 심각한 재정 위기를 겪고 있었다. 

게다가 889년에는 진성여왕(, 재위 887~897)이 공부()의 납부를 독촉하면서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나 조정의 힘은 수도인 서라벌 부근에만 한정될 정도로 정치적 위기가 심화되었다. 

최치원은 894년 진성여왕에게 10여 조의 시무책()을 제시하였고, 진성여왕은 그를 6두품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 관직인 아찬()으로 임명하였다. 
최치원의 개혁은 중앙 귀족의 반발로 실현되지 못했다.



진성여왕이 물러나고 효공왕(, 재위 897~912)이 즉위한 뒤, 최치원은 관직에서 물러나 각지를 유랑하였다. 
만년에는 가야산()의 해인사()에 머물렀다. 


908년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를 쓸 때까지는 생존해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지만, 그 뒤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때문에 정확한 사망 날짜는 확인되지 않으며, 방랑하다가 죽었다거나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그는 경주의 남산(), 합천 매화산의 청량사(), 하동의 쌍계사() 등을 즐겨 찾았던 것으로 전해지며, 부산의 해운대()라는 지명도 최치원의 자()인 ‘해운()’에서 비롯되었다.



남북국 시대 부산 지역의 해운대()를 명명한 신라의 학자 겸 문장가.


본관은 경주(). 자는 고운() 또는 해운(). 
아버지는 숭복사의 전신인 곡사()의 중창 사업에 참여한 최견일()이고, 형은 해인사 승려 현준()이다. 
당제()는 헌강왕() 대 견당 사절단의 녹사()였던 최서원()이다.


최치원()[856~?]은 경주 사량부()에서 태어나 12살 때인 경문왕 8년(868) 당나라에 유학하여 국자감()에서 공부하였다. 

18세 때인 874년 외국인 대상의 과거 시험인 빈공과()에 급제하여 선주() 율수현()[지금의 강소성 율수현]의 현위()가 되었다. 

황소()의 난[875~884]이 일어나자 회남 절도사 고병()의 종사관으로 나가 「격황소서()」[토황소 격문()]을 지어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다.

29세 때인 헌강왕 11년(885) 귀국하여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 감사() 벼슬을 받았다. 

왕실 귀족들의 경계와 질시로 중앙 관직에서 물러나 대산군()[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 천령군()[지금의 경상남도 함양군], 부성군()[지금의 충청남도 서산시] 태수 등 외직을 전전하다가 하정사(使)로서 당나라에 한 차례 다녀왔다. 

진성 여왕 8년(894) 어지러운 정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임금에게 「시무 10조()」를 올려 채택되고, 아찬 관직을 받았으나 나라 안팎의 사정으로 개혁이 무산되었다.

최치원은 당에서 익힌 학술과 식견을 바탕으로 큰 뜻을 펼치려 했으나 번번이 좌절되자, 만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전국의 산천을 노닐며 책 읽고 시 짓는 일로 소일하였다. 

최치원이 전국을 방랑할 때 부산의 바닷가에 잠시 머물렀는데, 이때 동백섬 인근 바위에 자신의 자()를 따서 ‘’라는 글씨를 새겼다. 
최치원 석각
해운대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최치원 한시비 「가야산 홍류동」, 「양산 임경대」

최치원 한시비 「비오는 가을 밤에」, 「생각을 붙여」

최치원 한시비 「봄새벽」


당나라 국자감에서 공부하여 유학과 사장학()에 뛰어났고, 불교와 도교, 풍수지리설에도 이해가 깊었다. 

최치원이 지은 책은 『계원필경()』, 『중산 복궤집()』, 『금체시()』, 『오언 칠언 금체시()』, 『잡시부()』, 『사륙집()』, 『제왕 연대력()』, 『부석존자전()』, 『법장 화상전()』, 『석이정전()』, 『석순응전()』 등이 있었다고 한다. 


청룡대 각석 최치원 친필
청룡대 각석 최치원 친필경상남도 창원시 가주동에 있는 청룡대 각석에 새겨진 최치원 친필이다. 
자연 암석을 다듬은 다음, '청룡대치원서'라는 글씨를 새겼다.


일명 사산비명()으로 불리는 「성주사 낭혜 화상 백월보광탑비()」, 「쌍계사 진감 선사 대공영탑비()」, 「초월산 대숭복사비()」, 「봉암사 지증 대사 적조탑비()」 등의 글씨도 최치원이 썼다. 
이 가운데 『계원필경』과 『법장 화상전』, 사산비명의 내용만이 온전하게 전해지고 있다.

고려 현종 14년(1022)에 문창후()라는 시호를 받았고, 국자감과 향교의 문묘에 배향되었다. 부산에서는 동래 향교에서 배향하고 있다.


유·불·선 통합을 주장했던, 신라 최고의 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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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1
최치원(崔致遠, 857~?)은 유교∙불교∙도교에 이르기까지 깊은 이해를 지녔던 학자이자 뛰어난 문장가였다. 

높은 신분제의 벽에 가로막혀, 자신의 뜻을 현실정치에 펼쳐보이지 못하고 깊은 좌절을 안은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그가 이룩한 학문과 문장의 경지는 높았으나, 난세를 산 그의 삶은 그가 이룩한 높은 경지만큼 불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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