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21일 월요일

강천산,(순창) 단풍, 폭포, 구름다리,산성,

강천산 (순창) [剛泉山] 단풍, 폭포, 구름다리,산성,
강청산계곡,은 전북 순창군중에 팔덕면 청계리는 곳에 있는 '강청산계곡'이다.

분야지리/자연 지리
유형지명/자연 지명
지역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 청계리
시대현대/현대
출처디지털순창문화대전-강천산
순창군 강천산군립공원은 여느 산과같이 높은 산이나 웅장한 산세를 자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강청산 봉우리들이 품고 있는 강천산 첩첩히 쌓여있는 '강천산계곡'은 나름 명성이 난 산들은 사람들이 많읍니다,

강청산 오르는 입구

강천산은 본래 광덕산이었는데, 887년(진성 여왕 1)에 도선 국사()가 창건한 전통 사찰인 강천사()가 있어서 강천산으로 불리게 되었다. 강천산 군립 공원()은 수려한 산세와 울창한 숲, 기암괴석 등의 볼거리를 갖춘 풍부한 관광 자원이 있어 1981년 1월 7일 전국 제1호 군립 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구성,
강천산 군립 공원은 크게 자연 보존 지구, 자연환경 지구, 자연 취락 지구, 집단 시설 지구로 나뉘어져 있다. 그중 자연 보존 지구가 6.847㎢로 전체의 43.2%를 차지하고 있으며, 자연환경 지구가 8.774㎢로 55.4%, 자연 취락 지구가 0.046㎢로 0.3%, 집단 시설 지구가 0.177㎢로 1.1%를 차지하고 있다.



강천산 군립 공원 안에는 병풍 폭포, 용머리 폭포, 약수 폭포, 비룡 폭포, 천우 폭포, 구장군 폭포, 수좌굴, 북바위, 거라시 바위, 송음암, 부처 바위 등의 자연물과 금성산성, 산림욕장 등이 자리하고 있으며, 석교 11개[강천교, 광덕교, 신선교, 도선교, 금강교, 송음교, 극락교, 삼인대 앞 석교, 무명교, 비룡교, 현수교 계단 옆 석교]와 목교 4개[놀이터 입구, 윗용소 옆, 현수교 밑, 구장군 폭포 취수보 밑 목교]가 설치되어 있다. 시설로는 순창군 관광 안내소, 상가, 매표소, 화장실 10개소, 주차장 3개소, 공작 사육장, 토끼 사육장 등이 있다.

절의탑:고려말 순절한 현중 중 5명이 순창인이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국란이 있을 때 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이들이 많아서 순창을 절의의 고향이라 부른다. 절의탑은 이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탑이다, 
현황
면적은 15.844㎢이다. 강천산은 ‘호남의 소금강()’으로 불릴 정도로 자연 경관이 뛰어나며,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 청계리와 담양군 금성면 금성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광덕산 선녀봉[578m], 산성산 연대암[603m], 강천산 왕자봉[583.7m] 등이 있다. 봄이면 진달래, 개나리, 벚꽃이 만발하고, 여름에는 강천산 계곡으로 인파가 몰려든다. 특히 11월 초순에 온 산을 붉게 물들이는 애기단풍 등 활엽수가 만들어 내는 단풍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강천산 입구와 해발 고도 300m 능선에 호수가 있는데, 앞의 호수를 강천 1호, 뒤의 호수를 강천 2호라고 부른다.


강천산 군립 공원 내에는 강천사와 순창 삼인대()[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27호], 강천사 오층 석탑[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92호]과 강천산 군립 공원 입구의 강천사 모과나무[전라북도 기념물 제97호] 등의 문화재가 자리하고 있다. 산책로와 등산 코스도 개설되어 있다. 
산책로는 계곡을 따라 구장군 폭포까지 왕복 5㎞ 정도를 걷는 코스로, 중간에 다양한 볼거리와 체험거리가 있다. 등산 코스로는 총 6개의 코스가 개발되어 있다. 강천산 군립 공원은 2012년에 외지인 관광객 수가 100만 명을 넘어섰고, 2013년에는 110만 명을 넘겼다. 
인근 관광지로 전통 고추장 정보화 마을, 회문산 자연 휴양림, 순창 예향 천리 마실길, 향가 유원지, 추령 장승촌 등이 있다.

병풍폭포와 단풍이 아름답다. & 사진제공·순창군청,

강천산 현수교,
강천산과 산성산 사이의 깊은 계곡에 축조된 강천호. 

다람쥐 먹이홯동,

강천산 계곡의 원앙 사육장. [출처] 名山순례 (16) 전북 순창군 강청산 

여느 협곡이나 명성에 비해서 이곳 계곡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정말 아름다운 한 폭의 진경산수화를 보는듯한 것과 같다.


이곳 강천사 계곡을 따라서 펼쳐저 있는 깎아지른 기암절벽 아래로 맑고 깨끗한 계곡물이 쉬임 없이 흐르고 있는 청정계류는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일상에서의 번잡함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곳이다.


이곳 '강천산 계곡'은 봉우리 와 봉우리 골이 깊어 사시사철 가뭄에도 맑은 물이 흐르는 곳으로 유명하다.


높이 120m에서 떨어지는 구장군폭포<사진제공·순창군청&

병풍폭포

강천산계곡'은 약 십 오리(6km)가 넘는 계곡 사이사이에 자연이 만들어낸 자갈과 자갈 사이로 깨끗하고 맑고 물이 끝임없이 흘러내린다.
이곳 '강천산계곡'물은 너무도 맑아서인지 차가워서인지 여느 계곡과 달리 이끼가 끼지 않는 곳으로도알려져 있다.



강천산, 단풍, 현수교,



붉은 강천산 현수교,
강천산 최고봉인 왕자봉(583.7m)으로 가려면 현수교에서 북쪽으로 올라간다.


구장군폭포까지 걷고 현수교를 건넜으니, 정상에 오르지 않아도 단풍 산행으로 충분하다. 구장군폭포 고개를 젖혀 현수교를 올려다보면 그 높이가 아찔하다. 색색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이 현수교에서 기념사진을 찍는다.


아치형 다리를 건너면 구장군폭포다. 병풍폭포와 마찬가지로 인공 폭포인데, 120m 높이에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자연스러워 원래 있던 폭포 같다.


팔각정과 벤치 등 쉴 자리가 많고, 폭포가 잘 보이는 곳에 데크를 만들어 사진 찍기도 좋다. 여기서 더 가면 비룡폭포, 연대암터를 지나 담양과 경계에 자리한 금성산성에 올라설 수 있다.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 청계리와 전라남도 담양군 용면 용산리 경계에 있는 산.

명칭 유래,

강천산()은 원래 광덕산()이었으나, 신라 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강천사()라는 유명한 사찰이 있어 강천산이라고도 불리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지리지나 문집 등에는 강천산 보다는 광덕산이라는 명칭이 더 일반적이다. 또한 풍수지리상 용이 꼬리를 치며 승천하는 형상이라서 용천산()으로 불리기도 했다.
강천산의 주봉()인 왕자봉[583.7m]은 호남 정맥에서 동쪽으로 약간 벗어나 있으며, 강천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는 산성산[603m]이다. 강천산의 옛 이름을 간직한 광덕산은 호남 정맥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여 지리산처럼 산 전체를 아우를 때는 강천산, 주봉[정상]은 왕자봉, 가장 높은 봉우리는 산성봉, 그리고 남쪽 끝자락의 광덕산은 광대봉으로 불러야 옳다.

자연환경,
산줄기는 백두 대간인 장수군의 영취산에서 서북쪽으로 뻗어가다 금남 호남 정맥인 진안군과 완주군의 경계에 있는 주화산에서 두 갈래를 친다. 주화산에서 북으로 금남 정맥을 보낸 호남 정맥이 남진하며 경각산, 오봉산, 내장산, 백암산, 용추봉, 추월산을 거쳐 강천산을 형성하였다. 강천산의 물줄기는 남쪽은 담양호를 통하여 영산강으로 흐르고, 동쪽은 구림천을 통하여 섬진강으로 흐른다.


강천산의 주봉인 왕자봉을 기점으로 서쪽은 추월산과 내장산, 북쪽은 용추봉과 여분산, 동쪽은 문덕봉과 고리봉, 그 너머로 백두 대간의 지리산 연봉들이 아스라이 펼쳐진다. 남쪽은 설산과 괘일산, 그 너머에는 무등산이 첩첩히 다가온다. 강천산은 광덕산, 산성산, 왕자봉 등의 선녀 계곡, 금강 계곡, 용골 등에서 흘러나온 명경지수()로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고 있다. 

강천산 계곡 안에는 천연 폭포인 비룡 폭포와 선녀 폭포, 인공 폭포인 구장군() 폭포와 병풍 폭포, 그리고 병풍 바위, 용바위, 투구봉, 호두암, 금강굴, 수좌굴, 형제굴 등 천혜의 비경이 숨겨져 있다.
강천산은 예로부터 호남의 소금강()으로 알려진 명산이며, 1981년에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군립 공원으로 지정되었다. 해발 583.7m의 강천산은 계절별로 봄에는 진달래, 개나리, 벚꽃, 여름에는 더위를 식혀 주는 시원한 폭포와 계곡, 가을에는 애기단풍, 겨울에는 잔설로 덮인 현수교가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또한 강천사, 광덕정, 흥화정이라는 정자와 순창 삼인대()[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27호], 깎아지른 계곡에 만들어진 길이 76m의 호남 제일의 구름다리인 현수교 등이 볼거리다. 2003년에 인공으로 조성된 병풍 폭포는 높이 40m의 자연 형상을 최대한 활용하여 자연미와 웅장함이 살아 있다. 
2005년에 2.5㎞의 웰빙 산책로[맨발 산책로]가 조성되었으며, 2009년에는 삼림욕장이 조성되었다. 순창읍에서 지방도 792호선을 타고 북쪽 정읍 방면으로 8㎞ 정도 가다 보면 강천산 입구에 도착한다.
강천산 단풍,

출처 & 참고문헌,

[네이버 지식백과] 강천산 [剛泉山]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신증 동국여지승람』
신경준, 『산경표(山經表)』(1769)
『순창 군정사지(淳昌郡政史誌)』(순창군, 1988)
『한국 지명 총람』(한글 학회, 1988)이형석, 『한국의 강』(홍익재, 1997)전북 전통 문화 연구소, 『순창 문화유산 탐구』Ⅰ(순창 문화원, 1999)조석필, 『산경표를 위하여』(산악 문화, 1999)현진상, 『한글 산경표』(풀빛, 2000)김정길, 『전북의 백대 명산을 가다』(신아 출판사, 2001)전북 전통 문화 연구소, 『순창의 역사와 문화』(신아 출판사, 2002)김정길, 『전북 명산과 문화유산』(영광 인쇄사, 2012)「지형도 1:50,000」(국토지리정보원, 2009)

[名山순례 (16) 전북 순창군 강청산 
[네이버 지식백과] 강천산 군립 공원 [剛泉山郡立公園]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순창 #강천산 #병풍폭포 #구장군폭포 #구름다리 #현수교 #단풍

광화문.

광화문.
  • 소 재 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세종로 1-57)<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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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시대 정궁인 경복궁(景福宮) 정문의 이름. 정종 원년(1399) 경복궁의 둘레에 궁성을 쌓은 뒤 동•서•남쪽에 성문을 세웠는데, 세종 8년(1426) 동문을 건춘문(), 서문을 영추문(迎秋門), 남문을 광화문()이라 하였음.
    집현전 수찬에게 명하여 경복궁 각 문과 다리의 이름을 정하게 하니, 근정전 앞 둘째 문을 홍례, 셋째 문을 광화라 하고, 근정전 동곽 협문을 일화, 서쪽 문을 월화라 하고, 궁성은 동쪽을 건춘, 서쪽을 영추라 하고, 근정전 앞 석교를 영제라 하였다. ; 命集賢殿修撰 定景福宮各門及橋名 勤政殿前第二門曰弘禮 第三門曰光化 勤政殿東廊夾門曰日華 西曰月華 宮城東曰建春 西曰迎秋 勤政殿前石橋曰永濟 [세종실록 권제34, 4장 앞쪽, 세종 8년 10월 26일(병술)]
    1395년(태조 4년) 9월에 창건되어 정도전에 의해 사정문으로 명명되었고 오문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425년(세종 7년) 집현전 학사들이 광화문이라고 바꾸었다. 광화문은 석축기단에 3개의 홍예문를 만들고 그 위에 정면 3칸의 중층우진각 지붕으로 된 목조문루를 세웠다. 목조건축의 양식은 다포식으로 상하층이 모두 외이출목 · 내삼출목, 외부는 제공 뿌리를 쇠서로 하고, 내부는 운공을 만들었으며, 첨차 양측면에는 모두 파련초각을 하였다. 이 건물은 섬세한 수법과 웅대한 구조를 보여주고, 전체적으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장려한 외관을 지닌 가장 뛰어난 궐문으로 평가되었다.

    광화문 3개의 궐문 중 가운데 칸이 높고 크다. 이곳은 임금이 행차하는 문이며 천정에는 주작을 그려넣었다. 정면 좌우에는 상상의 동물이자 영물인 해태상을 설치했다. 광화문 앞으로는 궐외각사인 이조 ·호조 ·예조 · 병조 ·형조 · 공조 육조의 관아들이 늘어서 있었고 이를 육조거리라고 불렀다.

  •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270여년 간 중건되지 못하다가 1864년(고종 1)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재건으로 다시 옛 모습을 되찾았다. 한일병합 후 1927년 조선총독부가 해체하여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 북쪽에 이전시켰고, 설상가상 6·25전쟁 때 폭격으로 소실되고 말았다. 1968년에 전통적인 광화문의 모습을 상실한 채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복원시켰다. 그나마 도로확장을 위해 위치도 뒤쪽으로 밀려나 있었다. 2006년 12월부터 광화문 복원 및 이전 공사가 시작되어 전통적인 옛 모습을 찾기 시작했으며 2010년 8월에 완공되었다.







  • 서울 종로구 사직로 161


매일 09:00 - 18:00(입장마감 17:00)
화요일 휴무

  • 3,000원
  • 무료
  • 무료
  • 무료
  • 무료


경복궁의 정문. 1395년(태조 4년) 9월에 창건되어 정도전(鄭道傳)에 의해 사정문(四正門)으로 명명되었고 오문(午門)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425년(세종 7년) 집현전 학사들이 광화문이라고 바꾸었다. 광화문은 석축기단(石築基壇)에 3개의 홍예문(虹霓門...더보기

새 모습 드러낸 ´광화문의 변천사´

경복궁의 동서남북을 둘러싸고 있는 4개의 대문 중 남쪽에 위치한 정문()이다. 1865년 고종 중건 당시의 모습과 원래 축에서 틀어졌던 각도를 원래 위치로 돌려 2010년 8월 15일 광화문 복원공사를 마친 바 있다. 뒤큰건물은 예중앙청사' 일본잔제의산물이라 철거되었다.
외국어 표기
(한자)
건립
1385년(태조 4년)
광화문과 경복궁의 전경경복궁의 남쪽에 있는 정문이다. 섬세한 건축 기법으로 지어 아름다우면서도 웅장하여 가장 뛰어난 궐문으로 평가된다. 경복궁이 처음 지어진 태조(이성계) 때 정도전이 ‘사정문’과 ‘오문’이라고 이름 붙였으나, 세종 때 집현전 학사들이 ‘왕의 큰 덕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뜻의 광화문()이란 이름을 지어 올려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광화문 본문 이미지 1
광화문 앞의 큰 길은 ‘6조 거리’라고 불렀으며, 이곳에는 주요 관청이 자리하고 있었다.
① 커다란 석축 위에 올린 문루. 아름답고 웅장한 모습이며, 궁궐을 드나드는 사람은 물론 적을 감시하고 지키는 병사와 관원들이 이곳에서 일을 했다.
② 사람이 드나드는 홍예문. 궁궐을 드나들 때에도 예법을 엄격히 지켜, 가운데 문으로는 왕이, 좌우의 문으로는 왕세자와 신하들이 드나들었다.
③ ‘해태’라고도 부르는 해치상. 선과 악을 구별하고 정의를 지키는 전설 속의 동물이다.
광화문
광화문은 돌로 만든 커다란 축대 위에 문루를 얹은 모습으로, 조선의 궐문 가운데 이렇게 만든 것은 광화문이 유일하다. 사람이 드나드는 문은 윗부분이 무지개처럼 둥글게 처리된 홍예문이다. 3개의 홍예문 중 가운데 문으로는 왕이, 좌우의 문으로는 왕세자를 비롯한 신하들이 드나들었다.
광화문은 경복궁과 더불어 여러 번 시련을 겪었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 버렸던 것을 고종 때 흥선 대원군이 다시 중건했고, 일제가 조선 총독부 건물을 경복궁 안에 지으면서 철거하려다 국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동쪽에 있는 건춘문 북쪽으로 옮겼다.
광화문 광장
광화문 광장
"서울특별시 종로구 광화문에서 세종로사거리로 이어지는 세종로에 조성된 광장'


6 · 25 전쟁 때에는 폭격을 당해 모두 불타고 석축만 남았으나 1968년에 원래 자리에 옮겨 지었다. 하지만 이때에도 문루를 콘크리트로 복원한 데다 옛 조선 총독부 건물에 맞춰 놓아 중심축이 맞지 않았다. 그러다 2006년부터 문화재청 주도로 고종 중건기의 모습으로 복원하기 시작했고, 2010년 8월 15일에 공개해 지금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광화문 양 옆에는 흔히 ‘해태’라고 불리는 해치상이 있다. 
1910년대의 서울 광화문 전경
1910년대의 서울 광화문 전경1910년대 촬영된 광화문의 모습이다.
서울 경복궁 중 광화문 전경
서울 경복궁 중 광화문 전경1926년 이전 촬영된 서울 경복궁 중 광화문의 모습이다.
원래 위치는 광화문에서 40~50미터 떨어진 곳으로 현재 놓인 곳보다 더 멀리 떨어진 사헌부 앞이었다. 
서울 경복궁 중 광화문 후측면
서울 경복궁 중 광화문 후측면서울에 위치한 경복궁 중 광화문 후측면이다. 일제강점기 촬영.
광화문 앞의 큰 길을 조선 시대에는 ‘6조 거리’라고 불렀으며 그곳에는 이조, 호조, 예조 등 정부의 6개 주요 관청을 비롯해 지금의 서울 시청에 해당하는 한성부, 사헌부 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중 사헌부 앞, 지금의 정부 청사 앞길 양쪽에 해태가 앉아 있었다. 해태는 법과 정의를 지키는 동물로 여겨져 정치의 잘못을 가리고 관리의 비리를 감찰하는 사헌부와 잘 어울렸다.

소설광화문'
<광화문>은 급변하는 역사와 당대 정치의 격랑을 불화살처럼 뚫고 나간 지도자 흥선대원군의 일생과, 구한말 개혁과 보수의 첨예한 대립을, 당대의 정사를 철저히 고증하여 새롭게 복원한 대하역사소설이다.

한말의 위기 상황 속에서 흥선대원군이란 강력한 개성의 정치가를 중심으로 사태 전개를 다면적으로 펼쳐 보이는 우람한 역사소설이다.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면서 이를 해석, 비판하고 있는 이 작품은 오늘의 우리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아주 풍부한 경국과 제민에 관한 책이다.

옛스러운 문체와 풍부한 옛말 속에서도 깨우치는 바가 많지만 뜨거운 정치의 계절에 정치인에게도 유권자에게도 정치 교육이 될 것이 틀림없는 진지한 소설이다. <광화문>이라는 제목으로 대원군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써낼 가장 합당한 작가로 서기원말고 또 누가 있을까. 작가는 특히 당시의 왕권과 사대부 계층과의 권력투쟁에 초점을 맟줘 일종의 대중정치를 지향했던 대원군의 자취를 사실에 어긋나지 않게 그려내고 있다. 또 19세기 중엽의 대원군을 중심으로 한 우리 정치의 상황을 오늘과 오버랩시키면서 지금의 메시지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중진 작가 서기원 선생이 조선일보에 장기 연재한 <광화문>은 역사소설이면서 미래소설이다. 조선왕조 말기와 일제 식민지 시대의 초기를 다룬 <광화문>은 오늘의 한국인들에게 과거 역사 속에서 미래로 가는 길을 밝혀주고 있다.

이 소설은 지난 세기말에 주체적 근대화와 산업화에 실패했던 선조들의 역사를 냉철하게 탐구함으로써 21세기를 눈앞에 둔 한국인들의 의식에 미래지향적 교훈을 새겨둔다.

그런 의미에서 <광화문>이란 제목은 역사의 상징이면서 미래를 향해 열려 있는 의식의 문이기도 하다. 왕권 회복을 내건 대원군의 정치 개혁과 그 좌절의 드라마를 객관적 시점에서 조명한 이 소설에는 1백 년 전 엘리트들의 사상과 삶이 눅눅하게 배어 있다.
<광화문>은 흥선대원군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지배층과 민중과의 관계를 선명하게 분석하여, 당시의 시대상을 오늘날의 상황과 연관시키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주인공 흥선대원군의 생애는 다음과 같다.

흥선대원군은(순조20년(1820) ∼ 광무2년(1898)) 조선왕족이고 정치가였다. 자는 시백, 호는 석파, 이름은 하응이다. 영조의 현손. 남연군 구의 아들이고 고종의 아버지이다.

1848년(헌종9) 흥선군에 봉해지고, 1846년 수릉천장도감의 대존관이 된 후 종친부 유사당상·도총관 등 한직을 역임하며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밑에서 불우하게 지냈다. 이 동안 보신책으로 불량배와 어울려 파락호로서 궁도령이라는 비칭으로까지 불리며 안동김씨의 감시를 피하면서도 철종의 후사가 없음을 기회로 조성하를 포섭하여 대왕대비 신정왕후 조씨에 접근, 둘째 아들 명복을 후계자로 삼을 것을 내락()받았다.

1863년에 철종이 죽고 신정왕후 조씨에 의해 고종이 즉위하자 대원군에 진봉, 이어 대왕대비의 수렴청정이 선포되자 안동 김씨의 반발을 억누르고 그는 정책적 정권을 받아 섭정을 맡았다.

당시 외척 세도의 아성인 안동 김씨의 주류를 숙청하는 한편 당색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 부패 관리를 적발하여 파직시키고, 47개 서원()을 제외한 나머지 서원을 철폐하여 국가 재정의 낭비와 당쟁의 요인을 없앴으며, 육전조례() 대전회통 등을 간행하여 법률제도의 확립을 기함으로써 중앙집권적인 정치 기강을 수립했다.

또한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와 삼군부를 두어 행정권과 군사권을 분리시켰고, 관복의 제정과 서민들의 주속광복의 착용을 금하여 의복제도를 개량하고 사치와 낭비를 억제하는 한편, 세제()를 개혁하여 귀족·상인에 차별없이 세금을 징수했으며, 조세()의 운반과정에서 조작되는 지방관들의 부정을 근절하기 위해 사창을 세움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을 삭감하여 다소 국민의 생활이 안정되고 국고도 충실해졌다.

그러나 왕실의 위엄을 상징하기 위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부족한 재정을 충당키 위해 원납전을 강징하여 백성의 생활고가 가중되고, 1866년(고종 3)대동강에서 제너럴·셔어먼호 소각사건, 이해 강화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과의 마찰로 병인양요가 일어나고, 1871년 강화에서의 미군과의 전투로 신미양요가 일어났으며 천주교도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을 가하는 등 세계정세에 어두운 쇄국정치를 고집함으로써 국제관계가 악화되고 외래 문명의 흡수가 뒤늦게 된 원인이 되었다.

한편 그의 섭정 10년 동안 반대세력이 형성되어 며느리인 고종비 민비가 그의 독재에 불만을 품은 반대파를 포섭하고 어린 왕 고종도 성장하여 친정을 계획하게 되자 이 기회를 틈탄 민비의 조종으로 1873년 그의 실정의 조목을 든 동부승지 최익현의 탄핵을 받았다.

이에 11월 3일 고종이 친정을 선포하고 그의 정치 간여를 금하자 운현궁을 떠나 양주 직곡에 은퇴했다. 이때부터 민비와의 정치적 숙원이 깊어져 재집권을 노리던 중 1882년(고종19) 임오군란으로 정권을 잡고 난의 뒷수습에 힘쓰며 재빨리 행방불명이 된 민비의 죽음을 선포했다.

그러나 충주에 피난해 있던 민비의 책동으로 청나라의 군사가 출동하고 마건창에 의해 납치되어 청나라에 건너가 천진의 보정부()에 4년간 유폐되었다가, 1885년(고종 32) 귀국, 운현궁에 칩거하며 재기의 기회를 노리던 중 1885년 원세개와 협력하여 고종의 폐위와 함께 장남 재황을 웅립하려다 실패했다.

1895년(고종 32) 재집권을 위해 일본 공사 미우라와 결탁, 을미사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으나 일본의 괴뢰 역활에 불과했다. 민비 시해사건으로 미우라 공사가 본국에 소환되자 정권을 내놓고 은퇴, 아들 고종이 그의 장례식에도 나타나지 않을 정도로 부자관계가 악화된 채 죽었다.

<광화문>이, 당시의 시대상을 오늘날의 상황과 연관시키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은 <작가의 말>을 통해서 좀더 확실히 나타난다. <작가의 말>에는 흥선대원군에 대한 작가 서기원의 평가도 담겨있다.

수백년을 통틀어 대원군은 리더십을 발휘한 몇 안되는 통치자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는 시대를 잘못 만났다. 시대의 변화는 이해하고 있었지만 권력을 유지하고 경륜을 펴자니,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는 개혁을 통해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면서 주변 정세에 대응하려 했지만 왕비 민씨를 비롯한 척신 세력과의 권력 투쟁에서 심신을 소모하여 결국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개혁 정치에는 일종의 미학이 있었다. 이것은 방법론의 문제라기보다 결코 빙공영사하지 않은 그의 인간성에서 우러난 것이다.

흔히들 당시의 내외 정세와 오늘의 그것이 닮았다고 한다. 닮았다면 북한이 남한보다 더 닮았다.

남한은 어떤가? 주변 강대국간의 역학 속에서 시달림과 압력을 받고 있는 구도는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다. 국력이 조금 나아졌다고 우리가 무슨 선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게 된 것처럼 호언 장담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힘이 있을수록 겸손해야 하고 이웃 나라들과 잘 사귀어야 한다. 조선왕조가 망한 것은 명분과 실질의 괴리, 형식과 내용의 상반 등의 현상에서 빚어진 것이다. 이 두 대목이 지나치게 엇갈리면 허위와 위선이 만연하고 사회적 통합이 무너진다.

대원군은 이것을 잘 알고 있었고, 과함한 개혁으로 이같은 모순을 고치려고 했다. 그러나 시대가 그의 편이 아니었다. 그가 실각한 뒤 국정을 개혁 이전보다 더 악화되었고 권력의 비리와 부패는 더욱 심화되었다. 거개가 자신의 생존과 가족의 보전만을 생각하였다. 이 점만은 지금도 여전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는 외적을 물리칠 수 없다.

조선왕조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역사관이 많다. 하지만 긍정적인 면도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의 가치체계가 조선 왕조를 통해 형성되었음도 인정해야 한다. 역사는 단절되는 것이 아니고, 부채도 유산에 속한다. 대원군은 소설가의 흥미와 호기심을 끄는 인물이다.

출처 & 참고문헌,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문예위원회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로고 http://munjang.or.kr/광화문 - 아름답고 웅장한 경복궁의 정문 (한국사 사전 1 - 유물과 유적·법과 제도, 2015...)광화문 (한국문예위원회, 한국문예위원회)경복궁 광화문 [Gyeongbokgung Gwanghwamun Gate, 景福宮光化門] (두산백과)광화문 [光化門]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