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7일 토요일

분열의 역사, 이슬람 국가,

분열의 역사, 갈등의 원인, 이슬람 국가,
이슬람 국가의 대표적인 두 종파 수니파와 시아파, 차이,
아랍 내부에서도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으로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시아파와 수니파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 무려 1400년간을 싸우고 있다지만, 지금처럼 수니파와 시아파가 극렬하게 분열된 것은 그리 오랜 역사는 아닙니다. 시아파와 수니파의 역사적 분열 원인은 최근에 더욱 불거진 일입니다. 심지어 이제는 두 종교의 접경에서 이웃 간에도 총질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수니파와 시아파의 분열은 왜 있나???
옛날부터 시아파와 수니파의 분열이 있었지만, 이렇게 극한 대립이 생긴 건 근대의 일입니다. 직접적인 원인은 이란, 이라크 전쟁과 걸프전이라고 봅니다. 1980년대 초에 이란은 호메이니가 이슬람 혁명을 일으켜 강경 시아파가 정권을 잡았습니다. 이때 미국은 이란과 사이가 나빴으므로 수니파인 이라크에 무기를 대주며 이란, 이라크 전쟁에 끼어들었습니다. 아랍엔 무기가 넘쳐났고 이라크는 최강 군대를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이라크의 후세인은 수니파 정권이었는데 시아파를 탄압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1400년을 싸우는 수니파에 시아파의 차이?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은 1400년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서기 600년 초에 무하마드는 이슬람교를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무하마드(마호메트)가 죽으며 후계자를 지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한쪽은 선출에 의해 지도자를 뽑아야 한다고 하고, 한쪽은 혈통에 의해 지도자가 이어져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수니파와 시아파가 갈라졌습니다. 

처음에는 다수인 수니파의 주장대로 선출직으로 칼리프가 뽑혔습니다. 그러다가 3대 칼리프가 암살되고 시아파의 주장대로 무하마드의 사위인 알리가 칼리프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알리와 가족들은 수니파에 의해 살해되고 맙니다. 소수인 시아파들은 이 사건으로 인해 다수인 수니파에게 원한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700년대의 아바스 왕조, 1500년대 초의 사파위 왕조에서나 시아파가 권력을 잡는 기간이 있었습니다. 물론 중앙아시아에서 돌궐족이라 부르던 투르크족이 아랍으로 들어와, 1300년대에 오스만 제국의 황금기를 열며 수니파와 시아파를 고루 등용하는 시대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1900년대까지 수니파와 시아파의 분열은 다소 수그러들었습니다. 그러나 서양열강의 아랍 간섭에 의해 수니파와 시아파는 이용당했고, 그 상처가 곪아서 결국 수니파와 시아파의 분쟁이 터진 것입니다

1400년을 싸우는 종교적 시각에서~수니파에 시아파의 차이,
수니파와 시아파의 차이는 600년대 무하마드의 후계자 결정에서 부터 시작되었지만, 종교적으로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4억이 넘는 아랍권 이슬람인들 중 90%는 수니파입니다. 나머지 10%인 시아파는 주로 이란과 남부 이라크에 몰려 있습니다. 시아파와 수니파의 근본적인 차이는 종교적 정통성에 대한 시각입니다. 시아파는 무하마드의 정통성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혈통에 의한 후계자가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수니파는 자격이 있다면, 능력 있는 자가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수니파는 외국인 칼리프까지도 수용하였었습니다.

이슬람에서 정신적 지도자인 "이맘"도 수니파와 시아파의 차이가 있습니다. 수니파의 이맘은 기독교에서의 목사처럼 자격을 갖추면 예배를 주도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시아파의 이맘은 수십 년의 수행기간을 거쳐 종교적 완성을 이룬 존재를 뜻하기 때문에 훨씬 엄격합니다. 그래서 수니파 이슬람은 다양한 지역적 관습과 사상도 받아들고, 시아파 이슬람은 전통적인 종교원리를 고수하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수니파가 온건파이고 시아파가 강경파인데 반해, 이슬람 과격 테러단체인 IS는 수니파이면서 강경파입니다. 이들은 미국에 의해 강제로 축출된 과거 이라크 정권 지지자가 많습니다. 더불어, 시리아 등의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은 이란이 지배력을 강화하면서 불거진 분열이기도 합니다.
옛날부터 시아파와 수니파의 분열이 있었지만, 이렇게 극한 대립이 생긴 건 근대의 일입니다. 직접적인 원인은 이란, 이라크 전쟁과 걸프전이라고 봅니다. 1980년대 초에 이란은 호메이니가 이슬람 혁명을 일으켜 강경 시아파가 정권을 잡았습니다.

중동 이슬람의 수니파, 시아파 분포도,

미국은 이란과 사이가 나빴으므로 수니파인 이라크에 무기를 대주며 이란, 이라크 전쟁에 끼어들었습니다. 아랍엔 무기가 넘쳐났고 이라크는 최강 군대를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이라크의 후세인은 수니파 정권이었는데 시아파를 탄압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나중에는 국제정세가 변하여 이라크의 후세인은 미국에 맞서게 되었습니다. 미국은 두 번의 걸프전을 일으켜 수니파인 후세인을 축출했습니다. 이런 여파로 이라크의 다음 정권은 시아파에게 돌아갔습니다. 경쟁상대인 이라크가 사라지자, 이란은 아랍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습니다. 


이슬람 수니파, 시아파의 갈등은 외세, 강대국의 잘못도 크다,

이란은 이라크와 시리아 등의 시아파에게 원조를 했습니다. 이라크는 이란과 가까운 쪽에는 시아파 정권이, 먼 쪽에는 수니파인 IS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시아파는 소수입니다. 다수인 수니파 입장에서는 소수 시아파 정권이 외세를 끌어들여 권력을 쥐고 수니파를 탄압한다고 느끼기에 수니파와 시아파 갈등이 생긴 것입니다.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은 1400년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서기 600년 초에 무하마드는 이슬람교를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무하마드(마호메트)가 죽으며 후계자를 지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한쪽은 선출에 의해 지도자를 뽑아야 한다고 하고, 한쪽은 혈통에 의해 지도자가 이어져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수니파와 시아파가 갈라졌습니다. 

수니파, 시아파 분열의 기원으로 보는 4대 칼리프 알리,

처음에는 다수인 수니파의 주장대로 선출직으로 칼리프가 뽑혔습니다. 그러다가 3대 칼리프가 암살되고 시아파의 주장대로 무하마드의 사위인 알리가 칼리프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알리와 가족들은 수니파에 의해 살해되고 맙니다. 

소수인 시아파들은 이 사건으로 인해 다수인 수니파에게 원한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700년대의 아바스 왕조, 1500년대 초의 사파위 왕조에서나 시아파가 권력을 잡는 기간이 있었습니다. 

IS는 시아파에 밀려난 수니파 중 과격 테러단체이다

중앙아시아에서 돌궐족이라 부르던 투르크족이 아랍으로 들어와, 1300년대에 오스만 제국의 황금기를 열며 수니파와 시아파를 고루 등용하는 시대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1900년대까지 수니파와 시아파의 분열은 다소 수그러들었습니다. 그러나 서양열강의 아랍 간섭에 의해 수니파와 시아파는 이용당했고, 그 상처가 곪아서 결국 수니파와 시아파의 분쟁이 터진 것입니다.  

수니파와 시아파의 차이는 600년대 무하마드의 후계자 결정에서 부터 시작되었지만, 종교적으로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4억이 넘는 아랍권 이슬람인들 중 90%는 수니파입니다. 나머지 10%인 시아파는 주로 이란과 남부 이라크에 몰려 있습니다. 

시아파와 수니파의 근본적인 차이는 종교적 정통성에 대한 시각입니다. 시아파는 무하마드의 정통성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혈통에 의한 후계자가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수니파는 자격이 있다면, 능력 있는 자가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수니파는 외국인 칼리프까지도 수용하였었습니다. 

이슬람에서 정신적 지도자인 "이맘"도 수니파와 시아파의 차이가 있습니다. 수니파의 이맘은 기독교에서의 목사처럼 자격을 갖추면 예배를 주도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시아파의 이맘은 수십 년의 수행기간을 거쳐 종교적 완성을 이룬 존재를 뜻하기 때문에 훨씬 엄격합니다. 그래서 수니파 이슬람은 다양한 지역적 관습과 사상도 받아들고, 시아파 이슬람은 전통적인 종교원리를 고수하는 차이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수니파가 온건파이고 시아파가 강경파인데 반해, 이슬람 과격 테러단체인 IS는 수니파이면서 강경파입니다. 이들은 미국에 의해 강제로 축출된 과거 이라크 정권 지지자가 많습니다. 더불어, 시리아 등의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은 이란이 지배력을 강화하면서 불거진 분열이기도 합니다. 이라크 북부의 강경한 IS는 수니파이지만, 일반적으로는 시아파가 강경하고 호전적인 이슬람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1.이슬람교의 두종파 수니파와 시아파는1 400년째 극 갈등과 분쟁 대립
1).이슬람교의 칼리프(통치자)의 후계의 계승 갈등과 분쟁
(1).AD.610년. 이슬람교 창시
①AD.570년 무함마트 마호메트는 사우디 아라비아 메카에서 태어났다
②AD.610년-AD.632년 창시자 예언자 무함마드 마호메트는 사우디 아라비아 메카에서 이슬람 종교를 창시
③AD.632년 이슬람 창시자 이자 예언자였던 무함마드 마호메트가 사망하면서 후계자의 자리를 두고 표면화 되었던 갈등이 오늘날까지 1400년가 지속 되었다

④수니파(비혈통 선출제)와 시아파(혈통 세습제)는 이슬람 국가을 대표하는 이슬람교의 두종파이다,
이러한 이슬람 종교 두종파의 분열과 갈등은,
⑤창시자가 사망한후 가장 현안으로 대두되었던 칼리프(통치자)의 후계의 계승과 관련된 문제였다
⑥창시자 무함마드 마호메트의 혈통의 세습으로 후계자 주장하는 소수는 숫자적으로 열세인 친척 이루어진 소수의 측근들이였으며 (훗날 시아파),
⑦다수인 이슬람교을 이끌고 가는 비 혈통의 능력의 후계자 합의로 선출된 다수와의 분쟁으로 (훗날 수니파) 그 결과 두 파벌이 분리 되었고,
⑧오늘날까지 1400년간 중동 이슬람 국가간에 이 두종파 분쟁의 갈등으로 대립하였다   

(2).종교와 통치를 겸한 이슬람교 칼리프 (통치자)의 후계구도의 두 파벌 (선출제 비혈통과 세습제 혈통)
①AD.632년 당시 무함마드 마호메트의 자녀는 딸들만 있었고 후계자에 대한 유언이 없이 사망하자
②당시 마호메트 친척들의 소수는 혈육의 세습제로 혈족인 조카이자 사위를 후계자로 추대를 주장하였지만 (훗날 시아파로 분류된 종파)
③마호메트 측근의 다수의 여론(비혈통)에 밀려
④당시 이슬람 공동체의 다수의 의견에 따라 슈라(최초의 이슬람교 의회 제도)는 이즈마 (합의)를 통해 후계자를 선출하였습니다
⑤코란과 하디스에 의하면 이렇게 선출된 지도자 후계자가 되었다
⑥결국 1대에는만장일치로 선출된 후계자는 비혈통계 무함마드 마호메트의 측근이자 친구이자 연장자였던 아부바르크가 선출 되었습니다
⑦ 1대.2대. 3대.(AD.632년 -AD.656년)  후계자까지는 비혈통계의 능력자 위주의 칼리프가 선출 되었다
⑧4대 (AD.656년-AD.661년)이르러 마호메트 혈통인 조카이자 사위인 알 리가 선출하게 되었다
⑨이로써 무함마드 사후 슈라 의회에서 합의 된 1대부터 4대까지 공식 선출되여 이른바 정통 칼리프 후계자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⑩그러나 마호메트 사후 서서히 두파가   존재하기 시작 하였다, 즉 1대 .2대 .3대까지는 비혈통계에서 칼리프가 선출 되었고 4대에 이르러 마지막    혈통인     알 리가 선출 되었다  

(4).이슬람교 칼리프 정통성 시대
①창시자 무함마드 마호메트 AD.610년-AD.632년 창시자
②1대 아부 바르크 AD.632년-AD.634년 수니파 (선출  비혈통)
③2대 오마르   AD.634년-AD.644년 수니파 (선출  비혈통)
④3대 오스만   AD.644년-AD.656년 수니파 (선출 비혈통)
⑤4대 알리     AD.656년-AD.661년 시아파 (선출 혈통)  

2). 이슬람 교의 칼리프의 직위를 두고 세습제 (혈통계)와 선출제 (비혈통)
(1).4대 선출된 (혈통계) 알리의 칼리프 선출
①이슬람교의 불행은 4대 알 리가 칼리프로 선출된 이때부터 시작됩니다
②권력이나 정권 쟁탈의 살해와 음모가 그렇듯이
③마호메트 마지막 혈통인 조카이자 사위인 알리는 마호메트 측근의 다수세력에 밀려 그 동안  1대-3대까지 칼리프에 오르지 못했다
④그동안 1대에서 2대에서 3대까지 계속적으로 다수의 세력에 밀려 선출되지 못하였고
⑤끝내 4대째에 이르러 긴신히 칼리프에  합의로  선출 되었다  

(2).4대 선출된 알리 칼리프의 혈통 중심이 되자   다수의 비혈통계 반란
이때 알리의 칼리프 선출에 불복한 세력들이 봉기하여 이슬람 제국은 결국 내전에 돌입하게 된다, 내전 도중 칼리프인 알 리가 반란군에 질질 끌려다니다 분노한 신하가 알리를 암살하였고
②이슬람교 4대 칼리프에 오른 알리는 세력을 규합하여 칼리프(혈통계) 세습제을 하려는 움직임 보였고
⑤그 동안 비혈통계의 칼리프에 올랐던 세력들은 막강하였고
⑥4대 현직의 알리 칼리프 세력에 밀려 세습제에 의한 입지가 좁아질수 있는 위험을 느낀 다수의 세력들은(비혈통계 1대 2대 3대 전직 칼리프 추종세력들은) 반란을 일으킨다
⑦그리고 세습제를 추진하고 있는 혈통계 4대 칼리프 알리를 암살합니다

(3).이슬람 종교 두 파벌의 탄생
①4대 칼리프 마지막 마호메트의 혈통인 알 리가 (시아파)
②1대 2대 3대 칼리프 비혈통계 다수의 세력에 (수니파) 의해암살을 당합니다
③마호메트 마지막 혈통인 4대 칼리프 알리의 두아들중 한명도 (시아파)
④ 1대 2대 3대 전직 칼리프 측근의 비혈통계 다수의 세력에 (수니파) 의해 암살을 당합니다
⑤혈통계 4대 칼리프 알리의 차남은 (시아파)
⑥1대 2대 3대 전직 칼리프 측근의 비혈통계 다수의 세력 (수니파)과의 전투에서 죽음을 맞이 하게 되지요
⑦이로서 마호메트 혈통의 칼리프계를 추종하는 시아파와
비혈통의 칼리프계의 다수의 세력(수니파)으로 분리 됩니다
⑨그러나 이슬람교 두종파는 수니파와 시아파로 분열되여 철천지 원수지간이 되는 계기 됩니다
⑩AD.661년 4대 칼리프 알리 죽음은 그야 말로 창시자 무함마드 직손의 혈통이 끊어지게 되는 겁니다
⑪그러므로 시아파의 혈통 중심의 통치 적임자는 이땅에서 사라지며 오늘날 이란과 몇몇 부족 만이 간신히 그명맥을 유지하며 이란이 시아파의 종주국으로 남아 있습니다
⑫ AD.661년 서서히 이슬람제국이 탄생과 팽창을 하며 수니파의 세력으로 이루어 집니다

(4).이슬람 종교 두 파벌의 탄생
①4대째  칼리프 마지막 마호메트의 혈통인 알 리가 (시아파) 신하에 의해
⑩AD.661년 4대 칼리프 알리와 두자녀의  죽음은 그야 말로 창시자 무함마드 직손의 혈통이 끊어지게 되는 겁니다
⑪그러므로 시아파의 혈통 중심의 통치 적임자는 이땅에서 사라지며 오늘날 이란과 몇몇 부족 만이 간신히 그명맥을 유지하며 이란이 시아파의 종주국으로 남아 있습니다
⑫ AD.661년 이후 급격히 이슬람제국이 탄생과 팽창을 하며 수니파의 세력으로 이루어 집니다   

(5).시아파(혈통계 세습제)와 수니파 (비혈통계의 선출제)
①한에 맺힌 시아파 는 창시자 모함마드 마호메트사후 혈통의 4대 알리 칼리프만이혈통으로  시아파의 원조로 인정할뿐입니다
②그러나 수니파는 합의 의한 선출된 1대-4대 칼리프 모두 (비혈통과 혈통)정통성을 인정합니다
③시아파와 수니파 에서는 창시자 무함마드 마호메트와의 시작으로 12대의 12명의 이맘(종교 지도자)을 추종하는 이란를 비롯하여 대부분과 이라크 이스람교에는 이맘으로 불리우는 이슬람 종교자로 (이란의 호메니옹은 이맘 종교지도자로 모든 권력을 함께 쥐고 있었습니다    

3).이슬람교 종파적 특징
(1).수니파 특징 (비혈통 .능력제 합의 선출 )
①수니파의 대표적인 나라는 사우디 아라비아 (메카)
②수니파 문자적으로 무함마드의 언행. 관행(수나)를 따르는 사람들이란 뜻으로 무슬림 정통파이지만 중동 인구 90%을 차지하는 다수파
③수니파에서의 이맘은 단순히 종교 예배를 관장하는 종교지도에 불과 하며 이맘이 될수 있는 자격 또한 별다른 특별함이 없습니다

(2).시아파 특징(혈통 세습. 종교적 이맘(지도자)의 강력한 권위 )
①시아파의 대표적인 나라는 이란
②시아파의 명칭의 기원은 마호메트의 혈통인 칼리프 4대 알리만를 추종하는 사람들 (쉬아트 알리)에서 유래 했으며
③시아파에서의 이맘은 가장 위대하고 훌륭한 스승이며 신성한 존재입니다
④또한 실수를 할수 없는 초인적인 존재로서 이슬람 율법에 대한 해석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종교는 물론 정치와 사법권의 모든 소유함을 뜻합니다
⑤(시아파의 이맘이였던 이란의 호메이니는 이란을 종교을 강화 하였다 )   

(3).IS 수니파 원리주의 (이슬람 정통파)
①IS (Islamic state 이슬람 국가)급진 수니파 무장단체을 어느 관점으로 보십니까 코란과 이슬람의 원리주의 관점으로 볼 때 모든 행위가 알라 앞에서 정당한것입니다
②IS (Islamic state 이슬람 국가)급진 수니파 무장단체인 이들은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 2014년6월29일 이슬람국가로 개명한 단체로 그해 6월부터 이라크와 시리아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③서방세계에서는 이들의 약탈 경제와 전쟁 파괴등은 이슬람을 위한 종교 전쟁으로 이를 이슬람전체의 모습으로 보고 있습니다 (유럽은 오랜 역사관으로 동행한 이슬람교을 너무 잘알고 있습니다)
③그러나 이슬람을 모르는 또 다른 세계 시각에서는 IS 이슬람은 변질된 이슬람이므로 별개이다라며 평화의  이슬람 모습이 아니다라 하지만 이는 이슬람을 전혀 모르는 시각에서입니다
④IS 이슬람 국가의 모습은 이슬람교의 진정한 참 모습이며 정통의 이슬람의 원리주의입니다
⑤그들의 무자비한 처형과 테러 이유의 근거 코란에 기록에 따른 율법을 따른 원칙과 알라의 뜻으로 고수하는 수니파의 원리주의자이며 실제적 이슬람국가을 이룩하려는 정통의 이슬람 국가을 건설하는 것입니다  

2).오늘날 시아파 종주국 이란과 수니파 종주국 사우디 아라비아  
(1).이슬람 종교의 두 파벌 .1400년간 싸우는 시아파(혈통 세습)와 수니파 (비혈통 .능력의 선출 )
①오늘날에 들어서면서 수니파의 대표적인 이슬람국가 사우디 아라비아가 자국의 반대 종파 시아파 성직자를 처형하면서 시작된 중동위기가 연일 격화가 되었습니다
②철저한 시아파 대표적인 이란에서 크게 반발하면서
이슬람국가간에 시아파와 수니파의 갈등의 분쟁은 역사적으로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③이러한 두종파의 갈등은 AD.632년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 예언자가 사망하면서 훗날에 후계자를 정하지 않고서 죽어 버립니다
④(비혈통 선출)수니파와 시아파(혈통의 세습제)의 권력구조의 갈등의 본격적 분쟁의 시작은
창시자 마호메트 사후부터 시작 됩니다
⑤마호메트가 사망하자 다수 비혈통 세력들이 소수 혈통의 알리 세력들을 누르며 칼리프 1대 2대 3대를 비혈통들이 선출 하여 통치 했습니다
⑥문제는 4대째 오른 마지막 혈통 알 리가 칼리프에 오릅니다
⑦반란의 불행이 시작됩니다
⑧1대 2대 3대 전임 칼리프 측근의 다수 세력 비혈통의 다수의 무리들이 반란을 일으킵니다
⑨AD.631년 마호메트의 마지막 혈통 조카이자 사위 였던 4대 칼리프 였던 알리와 큰아들 장남을 암살하고 둘째 아들은 전사시키며 (시아파) 마호메트 혈통을 모두 제거 해버립니다
반란에 성공한 비혈통의 다수의 세력들이 (수니파) 등장하면서부터 종파로 분열 됩니다
역사적으로 수니파와 시아파와 분쟁은 1400년이나 지속하여 이런 갈등을 겪어 왔고 다 그 속에 숨어 있는 종교 갈등과 복잡이해 관계 얽히고 설킨 문제였습니다
중동을 이해하는데 이슬람교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해야 되고 이 두종파는 꼭필요합니다  

(2).시아파 종주국.  이란,
오늘날 시아파 국가 이란에서는 무함메트 마지막 혈통 알리와 그의 아들의 순교한 순교일
①오늘날 이란은 마지막 혈통의 알리와 장남 후세인  순교일에 가두시위를 하며 슬퍼하며 울고 불고 자신들을 자악하며 순교를 슬퍼합니다
②이란의 시아파 국가에서는 순교일에 마호메트 유일한 혈통 알 리와 장남 후세인이  사실은 죽은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이다 시아파는 아직도 마호메트 마지막 혈통  4대 칼리프인 알 리와 장남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③아직도 마지막 혈통  알리가 언제가 돌아온다며 암살자인  수니파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④시아파는 이 때부터 지역적으로 따로 떨어져나가며 완전히 갈라지게 되는 것이지요
⑤1400전에 일로 이후 1400년간 계속 갈등하고 있다가 유럽의 열강에 의해 나라별로 갈라졌다고 그 시아파의 대표국가 이란입니다
⑥이란에 가까운 이라크는 시아파가 75% 나머지는 수니파 였으며 후세인은 수니파로 수니파가 정권을 잡았으나 미국에 의해 현제는 시아파가 정권을 잡고 있습니다
⑦이슬람 종교의 같은 뿌리는 통치자 권력 칼리프의 세력의 분쟁이 서로 다른 종교 신념으로 수니파와 시아파는 영원히 두 종파로 분리 되었습니다   

(3).중동 이슬람 국가 수니파와 시아파의 종파 분포
①수니파-사우디 아라비아 . 오만.예멘 . 소말리아 .리비아 . 시리아.터키.요르단.이집트.수단 .차드.아프카니스탄 .파키스탄.
②시아파-이란. 이라크 .바레인 .레바논. 예멘(남)
③수니파의 대표적인 나라가 사우디 아라비아 는 두 성지-메카.메디아. 메카에 카바 신전은 수니파와 시아파의 성지이기도 하다
④동남아 필리핀 등 먼거리 국가들은 모두다 수니파 종파이다  

(4). 시아파와 수니파의 대표적인 종교 갈등 사건 전쟁은 어떤 것이 존재 한가 (전쟁에 이용되는 수니파와 시아파의 종파 갈등)
①이슬람교 두 종파의 양대 주요 세력들이 집권세력들이 강경 노선을 취하고 싶을 때 항상 종교 분쟁이라는 카드를 쓰는데 그것에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 이란과 이라크 전쟁이 있습니다
②이라크는 표면상 시아파 다수지역으로 되어 있지만 당시 정부는 사담 후세인 소수의 수니파가 이라크정권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③전쟁후에는 미국이 이라크를 지배 하면서 시아파 정부가 되었지만 (그전에 후세인 수니파 정부였다 )
④1차 이라크 전쟁은 쿠웨이트 침공도 역시 소수 정권 후세인 수니파가 시아파 국가를 침공하였다
⑤전쟁과 분쟁이 일어날때마다 먼저 수니아파와 시아파가 등장하게 된다 항시 반대 종파가 먼저 일순위가 된다
⑥시리아 내전에도 시아파 정권과 수니파 반군으로 종파가 대두된다
⑦예멘 내전에도 수니파 정권과 시아파 반군 으로 두 종파가 대두 되여 지역 절반으로 나누어져 남.북 예멘 두정부가 됩니다,

3).국제적 경쟁을 종파 갈등으로 변질시켜 종파적 자존심을 추락시키는 수니파 종주국 사우디 아라비아
(1).중동의 패권과 두종파와 미국과의 관계,
①사우디 아라비아(수니파)는 이란(시아파)을 견제 하기 위해 이라크 전쟁이전에 이라크(수니파)를 지원하는 측면도 있었고 경제 대국 미국과의 우방국가의 관계을 지속하면서 중동에서 패권을 쥐고 있었다
②사우디아라비아는 (세계적 이슬람교 수니파 85%이상) 수니파 종주국이였다
③모든 중동의 국가들은 경제 대국 미국과 유럽을 싫어하고 배척하였지만  
④미국과 사우디와 경제적 관계와 우호관계에서는 이의를 달지 않았다
⑤그 이유는 사우디 대국으로 원조를 받을수 있었기 때문이였고 사우디 아라비아 세력이 경제적으로 크기 때문이였고 미국이 이란의 핵 보유를 제지 하고 이란을 견제하는 역활을 사우디와 공동으로 함으로 사우디가 중동의 패권 국가로 남기 위해서는 미국과의 우호 적인 관계가 되여야 하기 때문이였다  
⑥사우디는 세계 수니파의 종주국으로 중동에서 패권을 쥐고 이슬람국가들을 견제를 하였다
⑦특히 사우디 아라비아가 견제 하는 중동국은 특히 시아파 종주국 이란이 눈에 가시였다 
시아파 이란은  핵을 보유하여 수니파 사우디를 제치고  중동의 패권을 시아파의 세력으로 장악하려 하기에
사우디는 이란을 아주 아주 많이 미워했다 거기다가 화확무기 .핵을 만든다고 설치고 다니니 한마디 소화가 안되었다

(2).사우디는 이란과 미국과의 국제적 우호 관계가 성립되려 하자 슬며시 부하가 치밀자 이란의 시아파 종주국의 종교 자존심을 밟아버렸다
사우디는중동국가중에   미국과는 오래동안 제일  좋은 관계로 우방으로 유지하면서 중동의 패권을 잡았다  
그동안 사우디(수니파)는 이란(시아파)을 견제하기 위해서 이라크 전쟁 이전에 후세인 정권(수니파)에게 힘을 실어주곤 했다
사우디는 미국과 함께  중동국가중에 이란을 경계하였고 이란은 더욱 중동 패권 세력을 키우려 핵에 집중했다
사우디는 수니파에 종주국이고 이란은 시아파의 종주국으로 종파 관계에서도 대립하였다
그동안 이란은 미국과는 적대 관계였다  미국에서는 이란 핵보유를 막기 위해 경제력을 동원하여  사우디 공동으로 제재와 압력을 가했다
이러한 이란이 그동안 미국과 적대관계을 깨고 (사우디의 우방인 )미국에게 달라붙어서 러브콜를 보냈다
이란은 사우디의 우방인 미국에게 갑자기 미국과 친구가 되고 싶다고 미국과 손을 잡고 난리 치는 이란을  사우디 왕실은 이란을 정말 봐줄수 없었다  부하가 있는대로 치밀었다
한편 이란은 그동안 미국의 경제 제재로 어려운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해 미국과 이란과 핵협상 타결하며 원조금도 받았고 모든 지원을 받았다
사우디는 이러한 이란을 보기가 역겨웠는지 이란을 골탕을 먹이려는 타켓을 골라 잡은 것이 사우디는 굉장히 전형적인 수법을 사용했다 카드는 종파였다
⑩사우디 왕실은 다시 한번 사우디와 이란간에 종파 갈등 카드를 꺼내면서 적을 외부가 아닌 내부 다 희생양을 찾은 것이다
⑪사우디 아라비아 내에 시아파 성직자들을 이유를 걸어서 처형시켰다
⑫결국 사우디는 시아파 종주국인 이란의 명예적 이슬람 종교적 체면을 간접적으로 밟아 버렸지만   

(3).사우디 자국내 시아파 성직자 처형사건은 작은 일이 아니였다 이란 국민들이 발칵했다  
모든 이란 국민들은  흥분하고 분노했다 1400년전 이란의 시아파 종교적 정서를 들춰낸것이다, 1400년전 시아파의 상처을 후며낸것이였다  
①이는 시아파 종주국인 이란 국가의 종교적 명예 정면으로 실추시키 기위한 방법으로 사우디 자국내 시아파 종교집단을 처형이란 방법으로 구태연한 방법으로 이란의 종파적 명예를 그대로 짓뭉기며 밟아 버렸던것 사건이였다
②사우디 왕실(수니파)은 마치 1400년전 마지막 마호메트 마지막 혈통 알리와 장남 후세인 를 암살한것과 같은 수니파 세력이 한 짓을 흉내낸것이였다 (종파적으로 볼때 있을수 없는 일이였다 )
③마치 1400년전 마호메트 마지막 혈통 칼리프 알리와 그의아들을 암살하듯이 사우디 자국내 시아파 성직자들을 처형 한 것은 종파 전쟁을 예고 한것이였다
④시아파 종주국 이란의 전 국민들은  해마다 수니파들이 암살한 마지막 마호메트 혈통 알리와 그 아들 후세인을 위하여 순교일에 이란 전 국민들은 거리에 나와 대성통곡을 하며 뒹글르며 몸에 상처를 내며 피를 흘리며 순교 정신을 그리는 이란 국민의 시아파  정서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지른격이였다
⑤사우디 황실은 (수니파) 1400년이 지난 이때에도 암살하는 짓거리를 또다시 오늘날에도 반복하며 시아파 성직자들을 처형했던것이다 (그들이 사형을 받으려면 적어도 간첩죄가 아니였을까 ) 
⑥종교적 정서상 이란 국민과 정부의 분노는 아마도 핵이 있으면 터트리고 싶은 심정이였을 것이다 (이란은 중동의 시아파의 약세을 극복하려고 중동의   패권을 위하여 오랫동안 핵을 보유하려고 하였지만 미국이 사우디 함께 제재하였다  그래서 사우디는 자신들을 위하여 미국 편이였다
⑦이란이 핵을 갖는 날에는 중동의 패권은 이란으로 넘어가지만 그러면 사우디도 터어키도 너도 나도 핵을 가지려 할것이고 핵 중동시대가 올 것이다
⑧근래에는 터키가 러시아와 수위하여 핵시설을 준공 하고 있다 터키는 중동 패권을 노리고 있으나 미국과의 분쟁으로 경제 제재에 휘말리고 있다  

(4).이란과 사우디의 두 종파의 종주국간에 분쟁을 일으킨 사우디 왕실은 사우디 아라비아내 시아파 성직자를 처형했다 그런데 사우디 황실은 이란의 반격으로 휘청하게 된다
①중동에서는 정권을 잡으려면 이슬람 종교가 필요하며 또한 종파가 결정되야 한다
②사우디아라비아는 수니파 대표적인 국가이며 이란은 시아파에 대표적인국가이다
③사우디 아라비아는 수니파 종파이기에 자국내 반대 종파 시아파 성직자를 처형 하는 강경책을 사용했다 (이란은 시아파 종주국이기 때문이였다)
④이란은 시아파에 대표적인 국가로 모든 국민 시아파를 선택하고 있다 수니파에서는  냉혹하다
⑤수니파의 대표적인 사우디가 정부가 반대 종파인 자국내 시아파 성직자를 처형하여 이란 정부에 대한 반감을 간접적으로 이란 의 종파적 자존심에 상처를 주었다
⑥시아파 종주국 이란의 종교적 심기를 건들이며 이란 국민들이 분노가 폭팔했다 사우디와 단교을 보면 아주 전형적인 종파 갈등을 내세우는 정치적인 미국 개입된 계산이 배후에 깔린 그런 사태라고 볼수 있는데 종파 분쟁의 대표적인 사건이였다
⑦하필 종파 분쟁은 당시 사우디 국왕인 살만 즉위한지 1년이 되었을 때였다  이 국왕은 종파문제로 정치 능력 시험대 오르는 곤욕을 치러야 했다
⑧이 종파 분쟁은 사우디와 이란과 교역 단절 . 항공편.여행 중단. 항공편 끊은 사우디 이란 종파 갈등 심각 하였다
⑨사우디 왕실이 풀어야 할숙제가 많았던 시기로 유가 때문에 정부 보조금도 삭감해야 되고 ,시리아 내전 Is격퇴 문제에도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고,
⑩사우디 왕실은 예멘 내전에 출구 전략 없이 너무 깊숙이 개입함으로 안그래도 재정 압박이 있는대 이런 대외 활동에 자금을 사용하게 되었다
 ⑪당시 사우디 국민들의 불만도 높아가고 있던때 였고   살만 국왕 즉위때 약속했던 다음 왕실 멤버들의 다같이 합의를 했던 왕의 승계구도를 다 바꾸게 되는 문제가 이란과 종파문제로 국제 문제 파급으로 급격히 당면하게 되었다 
⑪부랴 부랴 사우디 왕실은 자기 자신의 차남 자신의 왕자를 제2왕세자로 순서를 바꾸어 버립니다
⑫그러나  그또한 미봉책으로  왕실 내부에서도 반발이 있었고 계속적으로 코너에 몰리기 시작했다
⑬그런던차에 업친대 겹친격으로 사우디 성지 메카 순례에 많은 순례자들이 압사 사고가 있으면서 사우디 왕실에 권위가 수니파 종교 국가로 급격히 추락을 하였다 (사우디 황실은 마지막으로  망치로 뒷통수를 맞은것이다 ) 
⑭초기에 정권을 잡은 사우디 왕실은 정말로 업치데 겹치게 되었다 국제상 심기가 불편하다고 종파 문제로 이란을 건들인 것이 큰 문제였다  

(5).사우디 아라비아의 메카에서 순례자들의 압사 사건이 일어나자 이란은 ( 사우디의 시아파 성직자 처형 문제의 보복) 신이 났다 .노골적 사우디 왕실의 비난하며 자신들의 종교 권위를 잃은 만큼 메카의 순례 문제로 사우디 왕실의 권위를 계속적으로 끈질기에 추락 시켰다
①수많은 카바 신전 순례자들이 사우디 메카 몰려들어 깔려 죽는 사고가 연일 일어 났다
②시아파 처형사건으로 비르고 있던 이란이 가만히 있을리 만무하다 순례 수니파 피해자 국가를 부추기며 사우디 왕실을 종교적으로 끈질기게 날마다 공개 비판하였다 사우디 황실은 종교적을 내부나 외부나 곤욕스러웠다
②지난번에도 이란(시아파)은 사우디 아라비아 을 향하여 그것 봐라 니들이(수니파)제대로 관리 못하고 있는 것 아니냐 수니파들이 하는 일이란 고작 하며 그게 화평이냐
(암살과 처형과 압사 하는 수니파)은근히 비유하며 중동 온 이스람국가을 향하여 사우디 황실을 연속적인 비난과 피의자 국가에 충돌질하였다
③당시 사방의  이슬람 국가에서 조차 비난이 쇄도하자 1년 밖에 안된 사우디 왕실이 권위가 추락을 했다며 이는 불난집에 부채질한 그 배후에는 이란 정부가 계속적으로 비난히고 충동질 한 것이 뻔하기 때문이였다
④이렇게 중동에서는 1400전부터 시아파와 수니파의 종파 분쟁이 1400년이 지난 오늘날 까지 이어지고 있고 앞으로도 끊이질 않을 것이다  

4).미국과 친하면 왜 이슬람국들에게 설득력을 얻어 미국을 공적으로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1).다른 급진 이슬람 세력들이(강경파 ) 미국을 향한 적개심,
①지금은 지하 내부에있는 급진세력들 테러 리스트들이 미국을 공적으로 삼는 이유는 여러 가지 원인 이 있겠지마는
②근간의 역사적으로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1980년 아프칸 전쟁에서 쏘련 연방이 이슬람주의를 지원하고자 침공했을 때,
③쏘련을 저항하는 이슬람 세력들을 미국이 지원 했을 때 그때 바로 미국 정부와 오사마 빈라덴과 밀월관계가 형성이 되었다
④문제는 아프칸 전쟁이 끝나고 쏘런과 탈냉전이 시작되니까 소연방의 세력이 크지 않자 미국이 그렇게 열심히 지원해주었던 이슬람 세력을 그냥 내팽겨쳐 놓고 배반을 하고 등을 돌리고 가버립니다 (거기다가 이슬라엘에 지원하고  이스라엘 편에서니 )
⑤그때부터 믿었던 미국이 등을 돌리자 빈라덴은 우리 가장 큰 적은 미국이다며 선포를 합니다
⑥빈라덴은 알카이다 조직을 파키스탄과 아프칸스탄 사이에 세웁니다
⑦미국의 911사태는 빈라덴과 알카이다 조직의 테러였으므로 미국이 테러단체로 전쟁에 들어갑니다
⑧이후 알카이 급진세력들은 다시 IS로 편입하여 연합니다  

(2). 이팔(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과 이슬람 급진주의자가 주도하는 배경
①이스라엘의 건국에 가장 큰 지지 세력은 영국 프랑스 19세기에 영국 프랑스 제국 주의라면  
미국은 20세기와 21세기의 미국은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지원하고
이슬람 급진 주의자들을  또한 미국의 지원을 하였으나 어느시점에 등을 돌렸고
결국 이슬람 극단주의와 미국은 갈등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모든 무슬림의 생각은 아니지만 그런 전반적인 사상이 깔려 있는것은 맞는 것이다
게다가 미국이 중동에 민주주의를 수출한다 하면서 중동국가들에게 비 일관적인 잣대를 댄다
중동국가 라도 사우디 정부 같은 경우에는 우방이라고 솜방망이처럼 배려하며
시리아나 이라크 같은 경우는 없는줄 잘 모르지만 대량 살상무기가 있다고 하며 여리 이유로 탄폭격을 일삼고 경제 제재를 하며,,,  

5).이슬람 수니파와 시아파
(1).시아파 이란의 개혁파와 급진파
①이란의 여성들 여성시위대 이란의 여성들은 히잡을 쓰고 정치 활동을 안하던 분들인데 갑자기 하는 배경은 어디 있는것인가
②사실 이란내에서 이런 활동은 사실 사우디 여성보다는 더 활발했던것은 사실입니다
③하지만 여성들을 동원된 것은 이란내에서 입지가 점차 약해지는 급진 강경파들이
④이란내에서는 미국과의 협상을 타결시킨 대통령 중심으로한 온건 개혁파가 많은 지지를 얻으니
⑤이것에 위협을 느낀 급진파들이 너무 불보듯 뻔하게 종교적으로 시위대를 동원했고 여성들까지 동원한 것으로 보여진다
⑥미국을 향한 사회 갈등으로 확산 시키는 것 같습니다,
⑦정치와 종교가 합쳐지면 그 끝이 좋을수가 없습니다,  

(2).이슬람  두종파의 급진 파,
①레바논 시아파 무장 단체 헤즈 볼라 2016년 1월5일 (시아파 테러리스트 -헤즈볼라 하마스 )
②오사마 빈라덴 수니파 알카이다 무장세력
③이라크 사담 후세인 정부 수니파 30% 정권
④이라크 미국 주도하에 정부 시아파 70% 정권 

(3).ls(이슬람주의)의 원리주의  수니파 (정통)
①이라크내 시아파 정권수립에 대한 수니파의 불만으로,
②수니파 이슬람주의 무장 세력과 결탁

석유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하는가?
1. 오늘의 세계를 이해하고 싶다면 시대를 꿰뚫는 키워드를 찾아야 합니다.
세상의 욕망이 지속적으로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 국제 질서를 결정하는 강대국의 욕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세상을 읽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현대를 관통하는 키워드를 단 하나 꼽으라면 석유입니다.
석유가 현대 세계에서 '이해관계의 근원적인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석유는 국제 사회에서 부와 힘의 원천이었습니다. 석유의 지배는 곧 세계의 지배였습니다.
현대사에서 석유는 정치, 경제, 외교를 움직이는 심층 동인이었습니다. '에너지, 그 이상의 가치'로 작용했습니다. 너무 크고 추상적인 이야기라 아직은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그림을 꼼꼼하게 채워 넣어서 뚜렷하게 이해하지 않으면 오늘을 알 수 없고 그런 이유로 내일을 준비할 수 없습니다.
어느 분야에서나 역사에 대한 지식은 필수입니다. 특정 분야의 역사를 알면 그 분야에서 하는 일의 위치와 맥락을 알게 됩니다. 반대로 역사를 모르면 맥락 없는 방법이나 좌표에 맞지 않는 방식을 취하기도 합니다. 과거의 데이터를 모르는 채 미래를 프로그래밍할 수 없습니다. 과거의 그림을 모르는 채 미래의 그림을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상상력은 자기가 가진 레퍼런스에 비례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책이 독자 여러분 마음에 새로운 레퍼런스가 되길 바랍니다.

석유, 오늘을 열다,
(1차 세계대전 ~ 1969년)
근대 석유 산업은 '석유왕'이라 불리는 존 데이비슨 록펠러에 의해 미국에서 태동합니다. 그가 1870년 세운 Standard Oil은 미국의 석유 사업을 지배했고, 오늘날에도 ExxonMobil과 Chevron으로 이름을 바꿔 세계 최대 기업으로서 건재하고 있습니다.

록펠러의 시대의 대부분 국가에서는 여전히 석탄이 주요 에너지원이었습니다. 산업혁명의 동력있었던 증기기관은 석탄을 에너지원으로 활용했고, 중동의 석유는 아직 개발되기 전이었습니다. 그러한 시절에 석유를 두고 록펠러보다 큰 꿈을 꾸는 영국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영국의 전 총리 윈스턴 처칠입니다.

처질의 결정으로 인해 석유가 세계의 연료이자 이해관계의 핵심으로 등극하는 석유의 시대가 열립니다. 1911년, 당시 영국 해군 장관이었던 처칠은 독일과의 해군력 경쟁에서 우위에 서기 위해 해군 함대의 연료를 석탄에서 석유로 모두 바꾸는 결정을 내립니다. 문제는 당시 영국에 석유 매장량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영국은 중동 정세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합니다. 로렌스로 상징되는 영국의 지원으로 아랍인들은 오스만 제국을 물리칩니다.  당시 영국은 1차 세계대전의 적국이었던 오스만 제국을 약화시키기 위해 아랍을 이용합니다.

아랍인들 역시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영국의 도움을 받아들입니다. 무엇보다 영국은 이 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중동의 근현대사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국가가 됩니다.
아라비아 반도는 16세기경부터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20세기 초반 영국의 지원으로 오스만 제국을 몰아낸 이후 다양한 부족과 토후국이 난립합니다. 그 혼란의 와중에서 영국의 지원을 받은 사우드Saud 왕가가 주변 부족과 토후족을 정벌하면서 1932년 사우드 왕가의 나라, 즉 사우디아라비아Saudi Arabia라는 독립된 통일 국가를 건국합니다.
영국은 아라비아반도와 이웃한 페르시아 (오늘날 이란)에서도 활약합니다. 1908년 페르시아 남부의 마스제드솔레이만에서 거대한 유전을 발견합니다. 이 발견으로 1909년 페르시아에 BP의 전신인 Anglo-Persian Oil Company라는 석유 회사가 설립됩니다. 이후 이 회사는 이란의 석유 개발을 주도하며 이란의 정치와 경제에 큰 영향을 줍니다.
영국은 20세기 중반까지 중동 지역에서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했고 그 열매로 이 지역의 석유 질서를 주도합니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위험을 무릅쓰고 영국 함대의 연료를 석유로 전환한 처칠의 결단이었습니다.

1차,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영국은 중동의 맹주 노릇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20세기의 영국은 쇠퇴해 가는 나라였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중동의 중요성을 위늦게 알아채고 석유 기업을 진출시키며 영국을 견제하는 국가가 등장합니다. 바로 미국입니다.
1940년대 초반 중동의 석유 생산량은 전 세계 생산량의 5~10퍼센트에 불과했습니다. 아직은 중동이 석유의 중심이 아니었고 미국도 이 지역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미국도 중동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합니다. 1941년 미국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석유와 중동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석유는 전쟁 승패에 결정적인 요소였고, 미국은 모든 전선에 석유를 공급하고 있었습니다.

미국 정부는 당시 미국 최고의 지질학자이자 석유 지질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에버렛 드골리에를 중동으로 보내 석유 매장량을 조사하게 됩니다. 드골리에 일행은 그 임무를 수행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중동 석유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포상'이 될 것이다. 이 때문에 영국이 딜레마에 빠집니다.

영국은 미국이 필요했습니다. 중동을 노리는 소련의 위협을 홀로 방어하기도 힘들었고, 중동 유전 개발에 필요한 자본도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이 중동에 들어와서 영국의 기득권을 상당 부분 빼앗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복잡 미묘한 상황에서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뛰어난 '스케치 실력'으로 리더쉽을 발휘합니다.

페르시아(이란) 석유는 영국이 갖고, 이라크와 쿠웨이트의 석유는 공유하며, 사우디 석유는 미국이 갖는다.

루스벨트 제안은 1944년 영미석유협약 Anglo-American Petroleum Agreement이라는 결실로 이어집니다.
미국은 사우디에 Aramco라는 석유 회사를 세웁니다. 현재 아람코는 사우디의 국영 석유 회사지만, 당시에는 미국 석유 기업 Socal과 Texaco가 합작해서 세운 100퍼센트 미국 회사였습니다. 아라비아의 미국 회사라는 의미로 이름도 Arabian-American Oil Company, 줄여서 Ar-Am-Co입니다. 이란에서는 BP의 전신인 Anglo-Persian 석유 회사가 독점적으로 사업을 지속합니다.
역사적으로 이란은 영국에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때 이란은 중립을 지키려고 하다가 독일 쪽에 서게 됩니다. 그래서 연합국은 이란을 공격해 당시 국왕이었던 레자 샤 팔레비를 폐위시키고 그의 아들 무함마드 팔레비를 왕위에 앉힙니다. 그러한 방식이 국민을 통제하는 데 유리하다고 본 것입니다.

반영 감정의 더 중요한 이유는 석유였습니다. 1932년 앵글로-페르시안에서 이름을 바꾼 Anglo-Iranian Oil Company는 1945년부터 1950년까지 2억 5000만 파운드의 수익을 올린 데 반해, 이란은 로열티로 9000만 파운드의 수익만을 가져갑니다.
국민적 반영 감정을 등에 업고 민족주의 성향의 무함마드 모사데크가 등장합니다. 그는 앵글로-이란 석유 회사의 국유화를 공약으로 내세워 1951년 4월 국회에서 총리로 선출됩니다. 연합국이 내세웠던 팔레비는 2선으로 물러나고 힘을 잃습니다.
모사데크는 집권 후 곧바로 영국 소유였던 앵글로-이란 석유 회사를 일방적으로 국유화합니다. 영국으로서는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결정이었기에 즉시 페르시아만에 해군 함대를 파견하고 영국 은행에 예치된 이란 자산을 동결합니다. 제재가 계속되는 가운데 몇 차례의 제안과 협상이 있었지만, 모사데크 역시 강경한 태도를 바꾸지 않았습니다.

영국의 정보기관은 모사데크 정권이 소련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하면서 그를 놔둘 경우 이란이 공산화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란이 넘어가면 사우디도 위험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 CIA는 영국 정보기관 M16과 함께 쿠데타를 추진합니다.
석유 수출이 막혀 경제난과 생활고에 시달리는 이란 군중에게 돈을 풀어 시위를 유도하고 군부를 매수하여 쿠데타를 실행하게 합니다. 결국 미국을 등에 업은 군부 세력과 이란 국왕 팔레비는 모사데크를 축출하고 다시 정권을 잡는 데 성공합니다.
이란의 팔레비 왕가는 영국과 미국이 지원한 쿠데타 덕분에 정권을 잡았고, 사우디의 사우드 왕가도 미국의 보호 하에 왕조를 안정적으로 유지했습니다. 이렇게 두 강대국이 형성한 정치적 경제적 한계를 아랍 민족주의자들은 서구 제국주의의 산물로 여깁니다.
오늘날 가장 중요한 석유 운송로는 페르시아만의 호르무즈 해협입니다. 전 세계에서 해상으로 운송되는 원유의 3분의 1이 지나가는 원유 운송의 요충지입니다.
1950년대 후반, 오늘날보다 더 심각한 석유 운송로의 위기가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당시 가장 중요한 운송로는 수에즈 운하Suez Canal 였습니다. 이집트에 있는 이 운하는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해서 중동의 석유를 유럽으로 공급하는 통로였습니다.


1875년 이집트의 통치자 이스마일 파샤가 파산 위기에 처하게 되자, 이집트 소유의 운하 지분이 시장에 나옵니다. 이때 영국은 수에즈 운하의 지분 44퍼센트를 취득합니다. 이후 영국과 프랑스는 수에즈 운하를 공동으로 소유하면서 운하 운영 수익의 대부분을 가져갑니다.
이집트에서 1952년 가말 압델 나세르가 쿠데타를 통해 왕정을 폐지하고 정권을 잡습니다. 이후 나세르는 제3세계 국가와 함께 비동맹주의를 주창합니다. 미국과 소련 어느 편에도 서지 않고 중립을 유지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집트가 소련으로부터 무기를 구매하고 당시 적성국이었던 중공(중국)을 외교적으로 승인하는 등 미국의 의도와 다르게 움지이자 미국은 아스완댐 건설 지원을 취소합니다.

미국의 지원을 받지 못한 나세르는 아스완댐 건설 자금 확보를 위해 영국과 프랑스 소유였던 수에즈 운하를 일방적으로 국유화합니다. 쇠락해 가는 대영제국의 조바심 때문이었는지, 처칠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된 앤서니 이든은 즉시 프랑스와 함께 군사 대응을 결정합니다. 이것이 2차 중동전쟁, 혹은 '수에즈 위기'라고 불리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군사 대응은 미국이 반대하는 가운데 진행되었습니다. 당시는 미국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재선을 노리고 선거를 준비하던 시기로, 그는 한국전쟁의 휴전을 끌어낸 '평화의 사도' 이미지를 구축하길 바라고 있었습니다.
이집트 나세르 정권은 수에즈 운하를 점령당하기 직전에 바위와 시멘트를 가득 선적한 선박을 침몰시켜서 수에즈 운하를 폐쇄합니다. 인양하는데 수개월이 걸리는 거대한 장애물이었기 중동산 석유가 유럽으로 가는 길이 막히게 됩니다.

미국이 영국과 프랑스 군대를 철수시키기 위해 꺼낸 최후의 카드는 원유 공급 계획의 취소였습니다. 당시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원유 공급 중단을 선언하고 즉각 실행합니다. 결국 영국과 프랑스는 1956년 11월 군사 대응 한 달여 만에 얌전히 군대를 철수합니다.
이렇게 수습된 수에즈 위기는 현대 국제 질서의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적인 힘의 이동을 보여 주면서 새로운 질서를 명확히 하는 계기가 됩니다.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를 이집트에서 철수시킴으로써 국제 질서에서 주도적 지위를 확립합니다.
강력한 리더십을 얻게 된 이집트의 나세르는 1,2차 중동전쟁에서 풀지 못한 아랍의 과제를 완수하려 합니다. 바로 아랍의 통합입니다. 나세리즘이라 불리는 그의 사상의 핵심은 아랍 민족의 통일을 추구하는 범아랍주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존재하는 한 아랍의 지리적 통일은 불가능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단일한 아랍 국가를 꿈꾸는 아랍 지도자 나세르의 사명은 명확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점령입니다. 그러나 선제공격은 이스라엘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3차 중동전쟁) 이스라엘의 기습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아랍국가들은 전쟁 패배로 군사력의 심각한 불균형이 드러나면서 외교적 지위가 약해졌을 뿐 아니라, 석유 무기화에도 실패하여 큰 좌절과 분노를 겪게 됩니다.
영국과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승전국이 된 이후에는 서로 타협하여 중동의 사업권을 나눠 가집니다. 이 독점적 사업권을 통한 경제적 이익과 안정적 석유 수급은 영국과 미국의 핵심 이익이 되었고, 그것의 유지가 중동 정세를 좌우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성장한 것이 Seven sisters입니다. 7개 회사 중 5개는 미국계이고 2개 (쉘과 BP)는 영국계입니다.


두 나라가 중동에서 석유 사업을 독점하는 것에 반발하며 도전장을 내민 돈키호테 같은 사나이가 이탈리아에서 등장합니다. 마테이는 세븐 시스터즈에 도전하기 위해 1953년 이탈리아에서 Eni라는 회사를 설립합니다. 그런데 1962년, 마테이는 소련의 파이프라인과 지중해의 파이프라인을 연결하는 공사를 시작하려는 시점에 전용기가 추락하는 의문의 사고로 사망하게 됩니다. * 헐. 의문의 사고라니.
당시에 세븐 시스터즈와 산유국 간의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했던 부분은 무엇보다 유가, 즉 석유 판매 가격이었습니다. 사우디 초대 석유 장관이었던 압둘라 타리키는 당시 세븐 시스터즈가 독점하고 있던 원유 공시 가격의 결정권을 가져오려 했습니다. 이 시대에는 공개 시장에서 유가가 결정되지 않고 세븐 시스터즈가 일방적으로 원유 공시 가격을 결정했습니다.
주요 산유국은 석유 수입이 미국 사기업의 사무실에서 결정되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이에 분노한 사우디의 타리키는 베네주엘라의 석유 장관 알폰조에게 연락하여 약속했던 계획을 실행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중동 3개국이 동참하면서 1960년 9월 바그다드에서 석유수출국기구Organization of the Petroleum Exporting Countries, 즉 OPEC이 결성됩니다.
창설 직후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는 그 영향력이 미미했습니다. 그 이유는 세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1) OPEC이 창설된 이듬해 케네디 행정부는 '진보를 위한 연대Alliance for Progress'라고 불리는 중남미 경제 원조를 시행합니다. 베네수엘라가 이 정책의 주요 수혜국이 되면서 그 지역의 반미 정서가 옅어집니다. 미국의 이러한 접근은 2차 세계대전 직후 추진했던 마셜 플랜Marshall Plan과 닮아 있습니다. '서유럽의 경제를 부흥시킴으로써 소련의 세력을 봉쇄하기 위한 경제 지원 정책' 다만, 케네디 정부의 중남미 경제 원조는 소련이 아닌 쿠바 혁명의 확산을 막기 위함이었다는 것.
(2) 중동 산유국의 양대 산맥인 사우디와 이란의 관계가 좋지 못했습니다.
(3) 당시 산유국들은 석유 개발에 필요한 자본과 기술 그리고 판매에 이르기까지 사업의 모든 부분을 메이저 석유 회사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메이저 석유 회사에 강하게 도전할 수 없는 구조적인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석유, 무기가 되다1970~1979년

미국은 1960년대 말까지 자국 석유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석유 수입 물량을 제한했습니다. 그 정도로 자국의 석유 생산량이 자급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 수요의 증가가 공급의 증가를 앞지르면서 상황이 바뀝니다. 미국은 1968년 파리에서 열린 OECD 회의에서 "미국은 원유 생산 능력의 100퍼센트를 가동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석유 수입 물량 제한도 폐지합니다.
잉여 공급 물량이 소멸하면서 공급 중단은 바로 공급 공백을 초래하는 상황이 됩니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아랍은 석유 질서의 캐스팅보트를 쥐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아랍의 지위가 상승하고 협상력 또한 강해졌습니다.
1969년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리비아 카다피는 미국 석유 회사 옥시덴탈을 위협해 석유 수익 반분 원칙을 깬다. 카다피의 성공은 1970년대 석유 질서의 주도권이 메이저 석유 회사에서 중동 산유국으로 옮겨 가는 신호탄이다.
1970년대 두 차례 일어난 오일쇼크는 세계 현대사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사건들입니다. 그런데 둘의 배경과 원인이 다릅니다. 1차는 야마니 (사우디 석유장관)의 주도하에 정교하게 계획되었던 반면, 2차는 이란 혁명으로 인한 중동 정세의 불안과 그로 인한 시장의 공포 그리고 산유국들의 탐욕이 뒤섞이면서 우발적으로 발생했습니다.
1970년 이집트에 새로운 지도자가 등장합니다. 나세르가 물러나고 안와르 사다트가 대통령이 됩니다. 사다트는 석유 시장의 변화를 등에 업고 다시 한 번 전쟁을 준비합니다.

사다트는 승리가 불확실하더라도 전쟁을 꼭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를 당시 미국의 국무 장관 키신저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다트의 목적은 전쟁의 승리를 위해 영토를 얻는 게 아니었다. 3차 중동전쟁의 참패로 인해 고착화된 이스라엘의 태도를 바꿀 필요가 있었다.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의 태도를 변화시켜야만 협상의 길이라도 열 수 있었다."
사우디의 확답을 받지 못한 채 1973년 10월 6일, 이집트와 시리아 등은 이스라엘이 했던 것처럼 선제 기습으로 전쟁을 개시합니다. (4차 중동전쟁 또는 욤키푸르 전쟁)
이집트 군이 이스라엘에 빼앗겼던 시나이반도를 탈환하고 이스라엘로 진입하기 시작하자, 이스라엘 총리 골다 메이어는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에게 지원을 요청합니다.
미국은 석유 사업의 최대 파트너인 아랍 국가들의 눈치를 봐야 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미국에게 이스라엘을 지원할 작은 명분이 생깁니다. 소련이 이집트에 막대한 군수 물자를 지원한 것인데, 이를 구실로 미국 또한 이스라엘에 대규모 군수 지원을 실시합니다. 미국의 지원은 서서히 전쟁의 양상을 바꿔 놓습니다. 초반에 일방적으로 밀렸던 이스라엘은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에 나섭니다.
전세가 역전되자 미국은 소련이 이 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우려하게 됩니다.
한국전쟁처럼 중국의 개입으로 전쟁이 장기화되는 것을 우려한 키신저는 급히 모스크바를 방문해 소련과 전쟁을 종료하기로 합의합니다.
아랍은 이스라엘보다 더 많은 사상자를 내고 영토도 회복하지 못했지만 소기의 성과는 달성했습니다. 1~3차 중동전쟁까지 형편없이 밀렸던 모습이 아닌, 대등하게 싸우는 모습을 보여 주며 긍지를 회복한 것입니다. 아랍의 소득은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아랍의 강력한 무기인 석유의 힘을 드러낸 것이 더 큰 소득이었습니다.
미국은 석유 무기화의 충격을 그대로 받았습니다. 이후 미국은 오일쇼크의 근본 원인이었던 아랍과 이스라엘의 갈등에 적극적으로 개입합니다.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의 중재로 이스라엘과 이집트가 시나이반도 반환에 합의하는 캠프 데이비드 협정이 체결됩니다. 이 협정으로 이집트는 잃었던 영토를 회복합니다.
캠프 데이비드에서는 팔레스타인 자치 문제도 논의됐는데, 이 문제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완전한 자치를 주장하는 팔레스타인과 제한적 자치를 주장하는 이스라엘 간의 입장 차이가 현재까지도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후 이집트는 아랍권의 반발을 무릅쓰고 1979년 이스라엘과 평화 조약을 체겨합니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평화조약 체결 이후, 이스라엘과 범아랍권 사이의 갈등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문제로 국지화되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스라엘의 시나이반도 반환을 중재한 1978년 카터와 예루살렘과 골란고원이 이스라엘 소유라고 주장하는 2019년 트럼프의 차이는 석유 생산의 중심이 바뀌면서 국제 역학 관계가 달라진 현실을 반영합니다.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는 줄곧 평화 정책을 지향합니다. 그의 온건한 정책은 아랍권에서 강한 반발을 일으킵니다.

평화조약 파기를 촉구하는 테러가 이어지는 가운데, 이집트는 1979년 아랍연맹애서 반강제적으로 탈퇴합니다. 사다트 또한 1981년 그를 반대하던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암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1차 오일쇼크 이후 중동에 석유 지배권을 넘겨준 서구 국가들은 다양한 자구책을 모색합니다.

영국은 북해 유전 개발에 박차를 가합니다. Forties 유전에서 스코틀랜드를 잇는 거대한 포티스 송유관도 건설합니다.


미국은 알래스카가 새로운 원유 공급지로 떠오르기를 기대하면서 알래스카 유전 개발과 장거리 송유관 건설에 집중했는데, 이후 알래스카는 미국 원유 생산량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됩니다.
국제 사회가 석유 수급 위기에 공동으로 대응하고자 국제에너지기구 International Energy Agency (IEA)를 창립합니다. 입회 자격으로 90일분 이상의 비축유 확보 의무를 지웁니다.
미국이 주도한 IEA는 중동에 대항한 서구 국가들의 공동 기구 성격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서구 선진국 중 IEA 창립을 강하게 비난하며 가입을 거부한 국가가 있었습니다. 바로 자존심 강한 프랑스입니다.
프랑스가 IEA 가입을 거부한 주된 이유는 세븐 시스터즈가 주도하는 석유 질서에서 배제되었다는 불만이었습니다. 영미에 끌려가지 않을 독립적인 에너지 정책을 구상합니다.
우선 프랑스는 오일쇼크 이후, 석유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기 위해 원자력 발전에 집중합니다.
일반적으로 한 국가의 주권에 영향을 주는 요소로 국방, 식량, 에너지를 들 수 있습니다. 한 국가가 이 세 가지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면 외국에 일방적으로 의존하게 되어 자주권 확보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국방, 식량, 에너지 영역에서의 역량 확보는 경제적 가치 외에 비경제적 가치도 함께 고려하며 접근해야 합니다.
석유 사업의 주도권은 산유국 정부 또는 산유국의 국영 석유 회사로 옮겨가게 됩니다. 과거에는 석유 회사들이 자기가 발견한 석유의 '소유자Concessionaire)로서 권리를 가졌다면, 이제는 발견된 석유에 대해 수익을 분배하는 '계약자Contractor'의 지위로 격하됩니다.
산유국 정부가 이익의 주체로 부상하면서 산유국 정부들은 앞다투어 국영 석유 회사를 설립하고, 자국에서 발생하는 석유 이익을 환수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2007년 3월 <파이낸셜 타임스>는 과거 앵글로-색슨 계열의 세븐 시스터즈를 대체하는 새로운 7개 석유 가스 회사를 New Seven Sisters라고 명명합니다.



중동 국가들은 오일머니의 상당 부분을 무기 구매에 소비합니다. 특히 사우디는 미국 전체 무기 수출액의 20퍼센트에 이르는 막대한 규모의 오일머니를 무기 수입에 지출하고 있습니다.
사우디와 이란은 원유 가격 정책에서 큰 의견 차이를 보입니다. 사우디는 시장에 충분한 물량을 공급하며 유가를 낮게 유지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란과 리비아 등 다른 산유국들은 공급량을 조절하여 높은 유가로 이익을 극대화하려 했습니다. 사우디는 물량 중심, 이란은 가격 중심의 정책으로 생각이 정반대였던 것입니다.
사우디 석유장관 야마니는 훗날 석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대변하는 유명한 말을 남기는 데, 지금까지도 논쟁이 되는 말입니다. 석기 시대는 돌이 부족해져서 끝난 것이 아니다. 석유 시대는 석유가 고갈되기 전에 끝날 것이다. 야마니는 1973년 1차 오일쇼크 이후 에너지 시장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기술 진보가 에너지 공급원을 다양화할 것이며 이것이 궁극적으로 석유 수요를 줄일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사우디의 저유가 정책에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습니다. 이는 2차 오일쇼크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이기도 합니다. 사우디는 고유가로 인한 석유 수익의 급증이 사회 분열과 혼란을 야기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실제로 고유가를 주장하던 이란에서 이러한 현상이 심하게 나타났습니다.

오일머니의 홍수는 혼돈과 부패, 인플레이션 속에서 이란 경제와 사회를 파괴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팔레비 왕가에 대한 반체제 여론을 확산시킵니다. 이란 혁명은 이런 상황에서 터져나왔고, 그것이 2차 오일쇼크의 출발점이 됩니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 8월, 이란 국왕 팔레비는 미 CIA의 지원을 받아 모사데크를 축출하고 정권을 잡습니다. 이후 팔레비는 친미 노선을 유지하며 26년간 장기 집권합니다. 1963년 이후에는 서구식 근대화와 산업화를 추진합니다.
이란은 이슬람 전통이 강한 국가였기 때문에 서구화 정책을 추진하는 것에 반발심을 갖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팔레비는 장기 집권을 유지하기 위해 비밀경찰 사바크를 통해 자신의 반대파를 철저히 감시, 고문, 처형해서 국민의 불만이 더욱 증폭됩니다.
팔레비 왕정하에서 석유로 인한 부가 오히려 사회를 병들게 하고 독재를 강화하자 이란 국민들은 다른 곳에서 희망을 찾습니다. 바로 이슬람 원리주의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팔레비 왕가에 반기를 든 혁명가이자 이란 시아파 지도자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영향력을 확대합니다.
그 와중인 1977년 말, 호메이니의 아들이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암살에 팔레비가 관여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혁명의 뇌관이 터집니다. 국왕의 하야를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을 휩쓰는데, 석유업계 종사자들도 이 시위에 동참합니다. 이로써 이후 약 2년여간 지속된 2차 오일쇼크의 서막이 오릅니다.
결국 1979년 1월 팔레비가 이란을 탈출하면서 이란의 마지막 왕조가 막을 내립니다. 그리고 호메이니를 중심으로 정부가 수립됩니다. 이를 '이란 혁명' 또는 '이슬람 혁명'이라 부릅니다.
이후 이란은 중국과의 관계를 확대해 나갑니다. 중국이 성장할수록 이란은 원유 시장을 서구에 의존하지 않아도됩니다. 중국의 '일대일로' 계획에는 중국이 이란을 거쳐 유럽과 통하게 됩니다. 미국과 중국의 대립은 격해지고 이란과 중국의 협력 관계는 강화되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이란에 다시 팔레비 같은 미국에 우호적인 정권이 들어서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미국은 이슬람의 역동성도 과소평가했습니다. 이란에서 이슬람 원리주의가 부흥하리라는 것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개방과 세속화를 경험한 국민이 엄격한 중세적인 전통으로 회귀하는 것은 현대사에서도 특이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는 이슬람 문화의 전통과 정체성이 그만큼 강력하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1차 오일쇼크는 중동 산유국의 생산 축소가 그대로 공급 공백으로 이어지면서 세계 시장에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2차 오일쇼크는 조금 달랐습니다. 북해, 남미, 동남아, 아프리카 등 비중동 지역에서 새로운 유전이 개발되어 생산 중이었기에 이란 혁명으로 석유 공급이 감소해도 다른 지역의 증산으로 보충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공급 상황에도 불구하고 2차 오일쇼크라는 거대한 충격이 발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1) 불안과 공포를 첫 번째 이유로 들 수 있습니다. 소설가 알랭 드 보통은 <불안>이라는 책에서 불안의 원인으로 사랑, 결핍, 기대(욕망) 등과 더불어 '불확실성'을 꼽습니다. 영화 <올드보이>에는 사람이 공포를 느끼는 이유는 인간에게 상상력이 있기 때문이라는 명대사가 나옵니다. 결국 불안과 공포는 알 수 없는 미래의 '불확실성'과 '상상력'이 더해진 결과일 것입니다.
(2) 팔레비가 미국의 보호하에 건재할 경우, 1953년 미국이 쿠데타를 지원하여 팔레비가 왕정복고에 성공했듯이 다시 한 번 왕정 지지 세력을 규합하여 정권을 회복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호메이니는 미국에 팔레비의 신병 인도를 요구하지만 미국은 이를 거부합니다. 그러자 이란 대학생들이 이란 주재 미국 대사관을 점거하고 대사관 직원 52명을 인질로 잡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무려 15개월이나 지속되며, 2차 오일쇼크 장기화의 중요한 원인이 됩니다.
(3) 이란 혁명 직후 미국에서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발생합니다. 대체 에너지로서 원자력에 대한 기대치를 대폭 낮춥니다. 그 결과 석유 수요에 대한 불확실성은 더욱 증가합니다.
1979년 12월에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합니다. 당시 아프간에는 무함마드 타라키가 이끄는 친소련 성향의 인민민주당 정권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입지는 위태로웠습니다. 아프간의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은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주의 정권을 적으로 간주하고 '무자헤딘Mujahidin'이라는 무장 집단을 만들어 아프간 정부를 위협했습니다.

친소련 성향의 정권이 위태로워지자 소련은 아프간 정권과의 우호적 협력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파견합니다. 석유, 시장을 열다, 1980~1989년,

미국 입장에서는 소련의 군사 행동에 단호하고 강력하게 대응해야 했습니다. 미국은 스팅어 미사일 등 무기와 자금을 무자헤딘에 지원합니다. 소련은 무자헤딘의 저항에 고전을 면치 못합니다. 소련은 엄청난 인명 피해와 물적 손실을 입습니다. 결국 오랜 소모전은 소련 붕괴의 단초가 됩니다.
미국도 무자헤딘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훗날 미국을 향한 테러의 씨앗을 뿌립니다. 아프간 전쟁은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이 정신적으로 그들의 신념을 내면화하고 군사적으로 무기 체계를 발전시키는 계기였습니다. 미국은 소련군과 맞서는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을 지원하는 가운데 탈레반과 오사마 빈 라덴의 알카에다 세력을 키워 주게 됩니다.
아프간 전쟁은 1989년 소련의 철군으로 끝납니다. 이후 아프간의 공산주의 정부는 4년을 버티지만 결국 무너지고 1996년 반미 성향의 탈레반이 권력을 장악합니다. 결과적으로 소련의 아프간 침공은 치욕적인 철군과 막대한 피해를 남기며 소련 붕괴에 영향을 미칩니다. 미국 입장에서도 탈레반과 알카에다라는 반미 세력이 이 전쟁을 통해 성장하며 훗날 911 테러와 아프간 전쟁 그리고 이라크 전쟁의 발단이 됩니다.
아프간의 역사는 19세기와 20세기를 지나 2018년 시리아에서도 반복됩니다.러시아는 반미-사회주의 성향의 바샤르 알 아사드 정부를 지원하고, 미국은 이에 대항하는 반정부 세력을 지원합니다. 냉전 시대가 끝났음에도 시리아에서 미국과 러시아의 대리전 양상이 나타난 것입니다.
석유 시장에 큰 충격을 주는 또 다른 전쟁이 발발합니다. 1980년 9월 이라크의 선제공격으로 이란-이라크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전쟁의 원인은 다양하게 제시되지만, 핵심적인 이유로 두 가지가 꼽힙니다.
(1) 이란 혁명의 확산에 대한 우려입니다. 시아파인 호메이니가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것과 그 정권이 강성해지는 것은 이웃나라 이라크의 수니파 지도자 후세인에게 위협적이었습니다.
(2) 영토 분쟁입니다.
이란과 이라크 국경 지역에 샤트 알아랍 강이 있습니다. 이 강의 하류는 석유 수출 통로로 이용되는 매우 중요한 지역인데 1937년 이래로 이라크가 점유했습니다. 그런데 이라크가 강 영유권의 상당 부분을 이란에 양보합니다. 인구의 약 20퍼센트를 차지하는 쿠르드족 Kurd 때문이었습니다.

이란은 이라크를 견제하고자 이라크 내 쿠르드족의 무장 독립 투쟁을 지원합니다. 이라크는 이 지원의 중단을 대가로 샤트 알아랍강의 영유권을 양보했습니다. 양보라고 표현했지만 이라크 입장에서는 협박에 의한 강탈에 가까웠습니다.
(3) 미국이 이라크를 부추겨서 전쟁을 유도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미국은 호메이니를 축출하고 싶었고 그래서 이라크에 무기 지원을 하며 전쟁을 유도했다는 것입니다.
OPEC의 인위적인 고유가 정책은 비OPEC 국가의 생산량 증대를 야기하며 OPEC의 시장 지배력을 약화시켰습니다. 지속적인 가격 인상으로 OPEC 공식 가격의 신뢰성과 수용성이 추락하자, 시장은 새로운 기준 유가의 등장을 요구합니다. 바로 이때 시장의 새로운 질서를 알리는 바람이 뉴욕에서 불어옵니다. 1983년 3월, 오늘날까지 유가 뉴스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뉴욕상품거래소의 WTI 선물 유가가 등장한 것입니다.
이제 석유는 특수한 지위를 갖는 재화에서 시장의 원리에 지배받는 평범한 '상품Commodity'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중동 산유국 모두가 석유의 상품화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석유가 특별하기를 바랐고, 시장이 아닌 OPEC의 영향하에서 거래되기를 바랐습니다. 석유가 시장 질서로 편입된다는 것은 자유 시장을 지배하는 세력, 즉 시장과 금융을 주도하는 미국에게 석유의 자산 가치를 결정할 권리를 넘겨준다는 의미였기 때문입니다.
석유가 금융 상품이 되면서 풍부한 유동성이 창출됩니다. 석유 실물을 수반하지 않는 페이퍼 거래의 규모가 실물 거래의 비중을 압도합니다. 페어퍼 거래가 실물 거래의 10~20배 수준으로 이루어지면서 석유의 금융 상품화가 정착됩니다. 그 결과 석유 파생 상품 등 금융 거래가 실물 시장의 유가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변수가 됩니다.
지난 60여 년간의 장기 유가 그래프를 보면 유가가 폭락하는 모습을 몇 차례 볼 수 있는데, 그중에도 현저한 수직 낙하가 두 번 정도 있습니다. 1986년에는 사우디가, 2014년에는 OPEC이 물량 조정을 포기하고 '점유율 전쟁'을 하면서 유가 급락이 촉발되었습니다. 그럼 왜 산유국들은 점유율에 집착하는 것일까요?

(1) 국가와 국민의 부와 직결된다는 것입니다. 중동과 아프리카 산유국은 대부분 국가 수입원을 석유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2) 미래의 불확실성입니다. 산유국 입장에서는 석유 감산과 그로 인한 점유율 감소가 있더라도 미래에 언젠가 그 물량만큼 더 생산하고 판매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감산 결정은 좀 더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3) 점유율은 한 번 잃으면 쉽게 회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우디는 넷백net back이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고객을 유인합니다. 넷백은 휘발유, 등유, 경유 등의 가격을 기초로 하여 유가를 정하는 방식입니다. 이는 공식 판매 가격에 기초한 기존 거래 전통을 깨는 파격적인 방식이었습니다. 최종 제품유 가격에서 역산하여 정유업체의 마진을 확보하는 방식이었기에 정유업계는 사우디 워유를 위험 없이 대량으로 구매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파격적인 거래 조건에도 불구하고 사우디는 잃어버린 점유율을 회복하는 데 10년 이상 걸립니다.
이후 사우디는 점유율을 지키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고 안정적인 수요처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사우디 국영 회사인 아람코는 1988년 미국 텍사코의 정유 회사 지분 50퍼센트를 취득합니다. 그리고 1991년 쌍용 정유 (현재 S-OIL)의 지분 35퍼센트를 취득합니다. 이후 지분을 63.4퍼센트까지 늘려 최대 주주가 되면서 한국 정유 회사에 원유를 안정적으로 판매할 수 있게 됩니다. 2019년 4월에도 아람코는 또 다른 한국 정유 회사인 현대오일뱅크의 지분 17퍼센트를 매입하는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셰일 혁명으로 미국의 석유 생산량이 증가하면서 미국에 한국 시장 점유율을 내줄지도 모른다는 아람코의 우려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람코가 에스오일과 현대오일뱅크의 지분을 사들인 건 결국 안정적인 판매망 확보를 위한 것. 석유, 오늘을 결정하다, 1990년 ~ 현재 1988년 이라크 전쟁이 끝났습니다. 1990년 8월 후세인은 다시 전쟁을 결심합니다. 이라크는 생산 쿼터 등을 문제 삼으며 쿠웨이트를 전격적으로 침공하고, 쿠웨이트는 제대로 된 저항도 못하고 점령됩니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점령은 중동의 헤게모니가 미국에 우호적인 사우디 중심에서 반미 국가인 이라크 중심으로 흘러갈 가능성을 낳았습니다. 이라크와 쿠웨이트의 석유 생산량을 합치면 사우디에 필적하기 때문입니다. 미국 사령관 노먼 슈워츠코프의 지휘하에 '사막의 폭풍Desert Storm'이란 작전명으로 전쟁이 시작됩니다.
걸프전 직전 후세인의 계산으로는 미국은 역내 세력 균형 차원에서 이라크를 건드릴 수 없었습니다. 만약 미국이 쿠웨이트 침공을 구실로 이라크를 붕괴시킨다면 이란과 이라크 사이의 역내 세력 균형이 깨지면서 이란이 중동의 최강자로 군림할 가능성이 생깁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미국은 걸프전에서 이라크군을 궤멸시키고도 후세인 정권을 유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후세인 정권은 수니파지만, 이라크 국민의 과반수는 이란과 같은 시아파였기 때무입니다. 이라크에서 시아파 정권이 들어선다면 이란-이라크-시리아로 이어지는 시아파 벨트가 수니파의 사우디를 압도하면서 역내 균형이 깨질 수도 있었습니다.
미국은 2003년 이라크전 이후 이 지역에 군대를 주둔시키며 친미 민주주의 정부가 들어서길 기대했지만 그 또한 실패로 돌아갑니다. 결국 오바마 행정부는 막대한 비용과 피해를 뒤로하고 이라크에서 미군을 철수시킵니다.
걸프전이 발발한 1991년, 소련의 마지막 공산당 서기장이자 당시 대통령이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비에트 연방 해체를 선언합니다. 이로써 미국-소련 양극 체제가 무너지고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이 주도하는 단일 질서의 시대가 열립니다.
미국 우선America First인지, 아니면 세계 우선World First인지의 기로에서 미국은 후자, 즉 미국 주도의 세계화를 선택합니다. 세계화는 기본적으로 영국과 미국이 1970~1980년대 추구한 신자유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세계화를 통해 정부 역할 최소화, 규제 완화, 민영화, 자유 무역 등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적 경제 질서가 구축됩니다.
이런 조건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주체는 거대 다국적 기업입니다. 거대 다국적 기업은 정부의 힘이 축소되고 자본의 흐름이 자유로워진 상황에서 수익과 비용을 세계 곳곳으로 이동시킬 수 있습니다.
이 흐름을 석유 기업이 주도합니다. 1990년대 후반부터 메이저 석유 회사들의 초대형 인수합병이 잇따라 이루어지면서 엑손모빌, 셰브런, BP, 토탈Total과 같은 초대형 다국적 석유 기업이 등장합니다.
이 시기에 서구 자본이 특히 집중했던 곳은 중앙아시아였습니다. 아제르바이잔, 투크르메니스탄, 카자흐스탄 등은 막대한 석유 매장량에도 불구하고 미국 기업의 진출이 막혀 있던 곳이었으나 소련이 해체되면서 새로운 황금의 샘으로 떠오릅니다. 1990년대에 미국, 유럽, 중국, 러시아 등이 중앙아시아의 석유 사업권을 놓고 벌인 경쟁은 '뉴 그레이트 게임New Great Game'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아르제바이잔의 바쿠와 인근 지역은 1920년 러시아 볼셰비키군이 점령한 이후로 소련 석유 산업의 출발점이자 주무대였습니다.
중앙아시아는 해안과 접하지 않은 내륙에 있기 때문에 이곳의 석유 사업이 서구에 의미가 있으려면 거대한 송유관이 필요했습니다. 1993년 송유관에 대한 기초 문서가 서명된 이후, 12년의 준비와 건설 기간 끝에 2005년 아제르바이잔의 바쿠Baku에서 시작하여 조지아의 트빌리시Tbilisi를 거쳐 터키의 지중해 연안 도시 제이한Ceyhan을 연결하는 BTC 송유관이 완공됩니다.


​영국의 BP가 이 송유관의 최대 지분(30.1%)을 확보하여 운영권을 손에 넣는 모습은 19세기 영국이 세계 경영을 하던 때에 수에즈 운하의 최대 주주로서 운영권을 행사하던 모습을 떠오르게 합니다.
미국은 전 세계 해상권을 장악한 상태에서 중앙아시아 내륙의 해상권이라 할 BTC 송유관의 건설과 운영에도 관여하여 미국이 주도하는 단일 질서를 공고히 했습니다.
세계화가 진행될수록 원리주의 성향을 지닌 이슬람교도의 분노도 커집니다. 그들은 아랍이 경제적 문화적으로 미국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현실에 분노합니다.  그러한 분노가 응집되어 나타난 결과는 개인 또는 집단이 폭력을 도구로 미국의 영향력에 대항하는 것이었습니다.

1980년대 무자헤딘과 헤즈볼라에 이어 1990년대에 알카에다 그리고 2000년대 이후에는 IS로 알려진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 국가Islamic State'가 등장합니다. 이들은 정면으로 미국과 겨룰 수 없었고 국가도 아니기 때문에 전쟁을 벌일 수도 없었습니다. 취할 수 있는 군사적 옵션은 테러였습니다. 2000년대 가장 충격적인 테러의 장본인은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에 가장 우호적인 국가 사우디에서 등장합니다. 바로 오사마 빈 라덴입니다.

빈 라덴은 1988년 테러 조직 알카에다를 결성하였습니다. 빈 라덴이 미국을 상대로 지하드(성전)을 결심한 계기는 미군의 사우디 주둔이었습니다. 미군 주둔은 항상 민감한 문제였습니다.
사우드 왕가를 미국의 종복agent이라 규정한 빈 라덴은 이후 사우디에서 쫓겨나다시피 하며 1991년 수단으로 건너갑니다. 그는 수단을 거점으로 알카에다를 운영하면서 건설업 등의 수익 사업으로 자금을 확보하고 미국에 대한 테러를 실행합니다.

미국은 테러의 배후에 알카에다가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수단 정부로 하여금 빈 라덴에게 거처를 제공하지 말라고 압력을 행사합니다. 결국 빈 라덴은 수단에서도 추방됩니다. 빈 라덴의 다음 행선지는 아프간이었습니다. 그곳에서 탈레반을 이끄는 지도자 물라 오마르를 만납니다. 친미 성향의 사우디 정부와 파키스탄 정부의 지원을 받는 탈레반과 철저한 반미를 지향하는 빈 라덴의 공존은 상상하기 어려웠습니다. 아프간에서 온 빈 라덴은 CNN, ABC 등 서구 언론과 빈번하게 인터뷰하며 이슬람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시작합니다.
탈레반의 비호 아래 빈 라덴은 오랫동안 구상한 테러를 치밀하게 진행합니다. 바로 2001년 911 테러입니다.
911테러에서 나타난 분노의 기원,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지는 이슬람과 서구의 반목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제국주의 시절부터 이어진 침탈의 역사입니다. 중동과 아랍은 20세기 석유 개발의 역사에서 부의 상당 부분을 서구가 빼앗아 갔다고 여깁니다. 그들이 아랍의 '토지'라고 여기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교도의 국가를 건설한 것도 테러의 주요 이유입니다.
2001년 대통령에 취임한 아들 조지 부시는 취임 직후 석유에 대한 장기적인 전망을 시도합니다. 2001년 5월 완성된 이 보고서에 따르면 2020년 미국 원유 생산량은 하루 510만~580만 배럴 수준으로 감소합니다. 반면 원유 소비량은 2580만 배럴까지 증가합니다. 미국의 에너지 안보 뿐 아니라 패권, 나아가 존립마저 흔들 수 있는 심각한 예측 결과였습니다. 따라서 걸프 지역에 미국의 '사활적 이익vital interest'이 걸려 있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미래는 보고서가 예측한 대로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2008년 미국발 금융 위기의 본질은 손실의 규모가 아니었습니다. 더 중요한 원인은 금융의 개방성과 확산성이었습니다. 미국 내 위기가 유럽과 아시아 등으로 확산된 것은 미국이 자본의 경계를 없애고 전 세계 금융 시장을 개방하여 달러라는 국제 통화에 연계시킨 것에서 출발합니다. 그렇기에 당시 미 연준의 해결책도 간단했습니다. 금융 시스템에 달러라는 '국제 통화'를 충분히 공급하는 것입니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중세 이후 인류의 생산성이 급격히 향상되고 과학이 발전할 수 있었던 주된 요인으로 '신용에 기반한 금융'을 꼽습니다. 금융은 '재능과 자원의 뷸균형을 해소'함으로써 무덤으로 가야만 했던 인류의 수많은 잠재 재능을 실현합니다. 금융을 통한 기회와 성취는 자본주의의 큰 장점입니다.
<21>의 저자 토마 피케티는 18세기 이후 "자본 수익률이 실물 경제 성장률보다 지속적으로 높았다"고 주장합니다. 피케티의 주장처럼 실물 경제가 성장하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자본이 커지면, 전체 생산물 중 자본 소득자가 가져가는 비중이 커집니다.
금융 자본에는 투자와 대부에 대한 보상으로 제빵사의 '부를 이전'할 수 있는 기능이 있습니다. 이것은 금융 자본의 본질적 속성입니다. 이를 활용할 수 있는 미국의 금융 자본과 다국적 기업은 자본 시장 개방에 긴밀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기에 자본 시장 개방과 세계화를 정책으로 요구합니다. 국제 통화의 확립과 금융의 세계화는 거대 자본이 부를 효과적으로 이전하는 환경을 마련해 주기 때문입니다.
1차 오일쇼크 이후 중동으로 흘러가는 달러가 급격히 늘어납니다. 미국은 이를 되돌릴 메커니즘, 즉 금융의 리사이클링financial recycling이 필요했습니다. 뉴욕대학 중동연구센터 교수 티머시 미첼은 유출된 달러의 흐름을 되돌리는 금융 리사이클링에 가장 적합한 재화는 무기였다고 말합니다. 중동에서 전쟁과 갈등은 무기 수요를 꾸준히 창출했습니다.
산유국은 여러 이유로 미국보다 자본 수익률이 높을 수 없습니다. 토마 피케티는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의 경우, 오일머니를 통해 엄청난 자본을 형성할 수 있지만 국가의 안전과 체제 보장을 미국에 위탁한 이상, 불가피하게 수익률이 낮은 미국 국채에 투자할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미국을 제외한 대다수의 나라들은 대규모의 달러를 낮은 수익률로 투자하거나 보유해야 하는 구조적인 상황입니다. 이러한 현실에 피케티의 이론을 적용하면 외국의 자본 수익률은 발권국의 자본 수익률을 능가할 수 없고 그것이 지속되면 부의 편중은 심화됩니다.
1944년 브레튼우즈 회의에 미국 대표 화이트와 영국 대표 케인스가 참석한 가운데 달러를 국제 통화로 화되 금의 가치에 고정시킨다고 결정합니다. 이 원칙에 기초하여 브레튼우즈 체제가 출범합니다. 환율 유지와 전후 복구 지원을 위해 국제통화기금IMF와 국제부흥개발은행IBRD도 함께 설립됩니다.
이 브레튼우즈 체제는 1960년대 후반부터 위기를 맞습니다. 미국은 서유럽 경제 지원 계획인 마셜 플랜과 베트남전 수행 등으로 막대한 달러를 해외에 풀어야 했습니다. 또한 서유럽과 일본 등이 미국과의 교역에서 달성한 무역 수지 흑자는 달러의 과잉 유출을 불러옵니다. 이에 따라 1971년 닉슨은 달러의 금 태환 포기를 선언하며 전후 통화 질서를 이끌어 온 브레튼우즈 체제의 종말을 고합니다.
닉슨은 석유의 결제 통화로 달러만 사용해 줄 것을 사우디 왕실에 요청합니다. 미국 재무 장관 윌리엄 사이먼이 1974년 사우디 국왕 파이살을 방문하여 석유 판매로 벌어들인 달러로 미국 국채를 대거 매입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사우디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미국은 브레튼우즈 체제에서 발생한 달러의 과잉 유출 상황을 해결합니다. 금 대신 석유라는 교환 수단을 확보한 달러는 국제 통화 지위를 유지합니다.


1929년 대공황의 교훈은 생산력과 구매력을 함께 확대하지 않으면 미국 내 제조업이 성장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해외 시장이 확대되려면 유럽 경제를 빠른 속도로 복구해야 했습니다. 1944년 브레튼우즈 회의 이후, 미국은 1947년부터 마셜 플랜으로 불리는 서유럽 경제 원조를 실행합니다. 1949년에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통해 미국과 서유럽의 집단 안보 체제도 만들어집니다. 마셜 플랜은 공산주의 체제의 확산을 막는 목적도 있었지만 유럽 경제를 빠르게 부흥시켜서 미국이 주도하는 '확대 재생산 체제'에 시동을 거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미국은 이웃 제빵사가 빵을 만드는 것을 도와주어 전체적인 부를 증가시키고, 동시에 그 빵을 중간 재료로 하여 더 부가가치가 높은 케이크와 햄버거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런데 21세기 이후 상황이 변합니다. 확대 재생산이 한계에 부딪혔는데, 금융은 비대해져서 오히려 제조업의 성장을 저해합니다. 미국의 금융은 실패하고 다른 국가들은 기술 격차를 좁혀 옵니다.

중국은 기술을 모방하기도 하고 새롭게 발전시키기도 하며 제조업을 급속히 발전시킵니다. 특히 인공지능과 5G 통신기술 등 이른바 4차 산업혁명을 끌어갈 분야에서 미국의 우위를 위협할 만한 발전 속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더욱이 중국은 금융 시장을 완전히 개방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의 금융 통제에서 한발 비껴서 있습니다. 이러한 불안감을 안고 미국은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세계화가 올바른 전략인지 고민합니다. 이 때 뜻밖의 상황이 연출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금융 위기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마침내 '셰일 오일'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미 연준은 금융 위기 수습을 위해 양적 완화를 추진합니다. 특히 2009년부터 2015년까지 0~0.25퍼센트의 초저금리 기조를 유지합니다. 이 시기에 프래킹fracking의 가능성을 본 셰일업체들이 저금리로 자금을 조달하면서 우후죽순처럼 생겨납니다. 때마침 유가도 100달러를 돌파합니다. 금리와 유가가 셰일 산업의 성장을 돕습니다.
셰일 오일의 새로운 전기는 텍사스의 석유 중소기업 회장인 조지 미첼에 의해 마련됩니다. 그는 '수압 파쇄법'을 통해 셰일층에서 가스와 원유를 생산하는 데 성공합니다.
새로운 석유의 등장에 중동 산유국은 긴장합니다. 셰일 붐이 일어난 2014년 중반 이후 OPEC 산유국은 원유를 증산합니다. OPEC의 증산으로 유가는 폭락하고, 결국 많은 수의 셰일업체들이 도산합니다. 미국이 의도적으로 방기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셰일 혁명의 속도를 조절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소비 문제는 수출을 통해 일부 해결한다고 해도 운송 문제는 해결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석유는 대부분 송유관으로 수송되므로 송유관이 증설되지 않으면 운송할 방법이 없습니다. 셰일 오일의 급증이 미국의 정치적 경제적 태도에 영향을 주고 있음을 세계가 목도하고 있습니다.
(1) 2017년 말 미국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선언했습니다.
(2) 2018년 이후에는 이란과 기존 핵 합의를 파기하고 더욱 엄격한 핵 합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3) 셰일 오일로 강해진 경제 체력을 바탕으로, 출혈을 감수하며 중국과 무역 전쟁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4) 미군을 주둔시키지 않고 멀리 떨어져서 균형을 잡을 수 있습니다. (2018년 12월 트럼프는 내전 중인 시리아에서 미군을 철수)
* 2월 29일, 아프간은 극단주의 무장조직이 미국과 동맹국을 공격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미국은 그 대가로 아프간에 파병된 미국과 NATO 국제동맹군을 14개월 안에 모두 철군하기로 했다.

국제정치학의 석학 존 미어샤이머는 역외 균형 전략이 "미국의 전통적 힘에 기반한 자신감"의 발로라고 합니다. 그런데 과거에 없던 그 자신감이 오늘날 발현되는 이유는 부와 힘의 원천인 석유가 미국에서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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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 6일 금요일

이슬람 국가,

이슬람 국가,

이슬람 공동체와 국가,
메디나에 공동체(움마)를 건설한 무함마드는 아라비아반도 각지의 부족집단과 맹약을 맺어서 이들을 개별적으로 움마에 연결시키고, 그 결과 성립한 완만한 정치구성체(쟈마아 ; jamā 'a)를 움마의 지배하에 통합했다. 여기에서 이슬람 국가의 원초형태를 인정할 수 있다. 쟈마아는 무함마드의 권위를 승인하는 부족민의 집합체이었는데, 결국 칼리프의 지휘하에 대정복이 행하여지자, 움마와 쟈마아를 구성하는 아랍전체가 정복자 집단으로서 제국 내의 이민족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비아랍 이교도 중에서도 개종해서 움마의 구성원이 되고, 아랍 무슬림과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의 수가 점차로 증대했다. 이들 신개종자를 마와리라고 하는데, 아랍 우위체제하에서 그들에 대한 세금의 지불의무에서도, 또한 사회적 신분상에서도 확실히 불리한 입장에 처해 있었다. 이슬람의 가르침에 의하면 모든 무슬림은 인종이나 신분에 관계없이 움마의 성원으로서 평등한 권리와 의무를 가져야 한다. 그러나 아랍제국인 옴미아드 왕조(661~750)는 결국 이와 같은 이슬람의 이념에 합치하는 정치체제를 창출하지 못했다.
아바스 왕조(750~1258)의 성립에 의해서 아랍의 특권은 상실되고, 제국 내에서의 무슬림의 평등 원리가 확립되었다. 이 왕조가 일반적으로 이슬람제국이라고 불리는 이유이다. 9세기경까지는 이슬람법(샤리아)의 체계화도 행하여져, 움마의 지도자로서 샤리아의 집행에 임하는 칼리프의 권한은 현저하게 강화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움마의 통일은 이미 상실되고, 동서로 분열한 이스라엘 세계는 칼리프 또는 왕(마리크, 아밀)을 주권자로 받드는 왕조에 의해서 지배되는 것이 실정이었다. 다우라는 원래 <시간의 추이>나 <계절의 전환>을 의미하는 아라비아어인데, 이것이 <왕조>의 의미로 이용된 것은 아바스 왕조 시대 이후이다. 물론 다우라는 지배권을 담당하는 칼리프족이나 왕가를 중심으로 하는 개념으로, <국가> 그 자체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왕권의 지배영역에 착안하면 맘라카(mamlaka, 왕국)라는 말도 잘 이용되며, 또한 정부나 통치기관을 의미하는 윌라야(wilāya, 오스만 왕조에서는 후쿠마 ; hūkuma)도 사용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이슬람 국가의 하나의 측면을 나타내는 용어에 지나지 않았다. 이와 같이 국가 그 자체를 나타내는 고유한 용어가 이슬람 세계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무슬림에 있어서 이슬람 국가의 본질이 칼리프의 권위를 서약에 의해서 인정하는 각 무슬림의 집합체, 즉 움마나 쟈마아로서 의식되었기 때문이다. 그 공간적 확산이 <이슬람 세계(다르 알이슬람)>이었다. 따라서 독자적인 권력국가론을 전개한 이븐 할든(Ibn Khaldūn)을 제외하면 무슬림 지식인(울라마)에 의한 이슬람 국가론은 오로지 움마의 대표로서의 칼리프(이맘)를 중심논제로서 전개되며, 실질적으로 국가로서의 기능을 담당하는 왕조(다우라)는 그 시야 밖에 놓여져 있었다.
칼리프권과 왕권,
<신의 사도의 대리>로서 초대 칼리프에 취임한 아부 바크르는 무함마드의 종교ㆍ정치의 두 권한 중 정치적 권한만을 계승했다. 그나마 그 권한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겨우 무슬림의 정리역, 즉 움마의 지도자로서의 성격을 가지는데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대정복에 의해서 국가영역이 확대되고, 막대한 부가 칼리프에 집중하게 되자 칼리프의 권력은 현저히 강대하게 되었다. 제2대 칼리프, 우마르 1세는 <신도의 수장>을 의미하는 아미르 알무미닌의 칭호를 이용하였는데, 이는 성전(지하드)의 지휘관인 칼리프에 어울리는 칭호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 수니파의 울라마가 이용하는 이맘은 무슬림의 종교적인 지도자로서 칼리프에 무게를 두는 칭호였다. 또한 아바스 왕조 시대에 칼리프는 <신의 사도의 대리>에서 <신의 대리>로 보게 되고, 법학자도 칼리프권은 신으로부터 직접 위임받았다는 칼리프권 신수설(神授設)을 제창하기에 이르렀다. 단, 이와 같은 칼리프의 신권화에도 불구하고 그 권위가 공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초기 시대와 마찬가지로 칼리프에 대한 무슬림의 바이아와 타아(복종)가 필요하였다. 따라서 마을이나 거리의 주민이 이 계약을 파기해서 모스크에서의 설교에서 주권자의 이름을 깎는 것은 그 지역의 무슬림이 공적으로 반란의 의사를 표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아바스 왕조는 군대와 관료에 의한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를 수립하였는데, 칼리프권이 강대하였던 시대는 그다지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9세기 중반을 지날 무렵부터 맘무크(노예군인)의 대두와 함께 칼리프권은 점차로 약체화되고, 936년에는 군인총독을 대아미르(아미르 알울라마)에 임명해서, 군사ㆍ재정의 양 권한을 포함한 제국의 행정권을 위양했다. 이때 전국의 모스크에서는 칼리프와 대아미르의 이름하에 프토바를 행할 것이 명령되었는데, 이는 칼리프가 프토바의 권한을 독점하였던 시대의 종지부를 의미했다. 시아파를 받드는 브와이프 왕조(932~1062)의 대아미르도 칼리프가 가진 특권을 차례차례로 빼앗고, 칼리프에는 이맘(신앙상의 지도자)으로서의 명목적인 권한만이 남았다.
그러나 브와이프 왕조나 셀주크 왕조(1038~1194)의 군주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칼리프에 의한 정당화가 필요하였는데, 여기에 칼리프는 대아미르나 술탄의 보호를 받는 대신에 군사정권의 정당성을 보증한다는, 칼리프권과 왕권(물크)과의 상호의존시대가 끝났다. 이와 같은 현실 변화에 대응해서 울라마도 국가의 사실상의 지배자인 군주의 존재를 용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를 들어 알 마와르디는 지배자가 샤리아에 따라서 정치를 행한다면 칼리프는 왕권에 합법성을 주어야 한다고 하고, 또한 가자리는 공동체의 질서유지에 임하는 술탄을 칼리프는 무조건 승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후에는 타협과 추인의 칼리프론을 비판하는 이븐 타이미야와 같은 사상가도 나타났는데, 대방의 울라마는 현실적으로 차례차례로 양보를 거듭해서 결국에는 이븐 쟈마아(Ibn Jamā 'a)와 같은 폭군의 용인에까지 이르렀다.
국가의 구조,
칼리프나 술탄에 의한 통합(윌라야)의 실태에 대해서 살펴보면, 아랍제국의 시대에는 아미르가 정복지의 농민으로부터 조세를 징수하고, 그중에서 아랍 전사에게 봉급을 지급하는 시스템이 취해졌다. 이를 아타체제라고 한다. 군영도시를 통괄하는 아미르는 칼리프에 의해서 임명되며, 그 체제하에서 조세징수의 실무를 담당한 것은 사산 왕조나 비잔틴제국시대 이래의 촌장이었다.
아바스 왕조 시대가 되어서 관료기구가 정비되자, 중앙에서 파견된 징세관(아미르)이 촌장 대신에 징세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는데, 군대나 관료에게 봉급을 지불하는 아타체제는 거의 그대로의 형태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10세기 초 무렵까지는 군벌간의 항쟁이나 궁정의 난비, 또는 징세기구의 파탄 등에 의해서 국가재정은 점차로 궁핍의 도를 더해갔다. 국고수입의 저하는 아타체제의 유지를 어렵게 하였다. 10세기 중반에 군인에 대해서 직접 토지의 지배와 관리를 위임하는 이크타제도가 성립한 것은 이와 같은 구 체제의 완전한 붕괴를 의미하였다. 도시에 사는 이크타 보유자(무크타)는 대관을 파견해서 농민으로부터 조세를 징수하고, 그 수입을 이용해서 지배하는 병사를 양성하는 것이 의무시되었다. 이와 같이 이크타 제도는 군인을 매개로서 국가와 사회를 연결시키는 체제였기 때문에 그후의 이슬람 여러 왕조에서도 국가의 기본제도로서 널리 채용되었다. 사파비 왕조의 투유르나 소유르갈, 오스만 제국의 티말 등도 본질적으로 이 이크타를 계승하는 제도였다고 할 수 있다.
칼리프나 술탄의 권력은 군대나 관료에 의해서 지지되었다. 관청은 옴미아드 왕조 시대부터 현실의 필요에 따라서 차례차례로 증설되고, 아바스 왕조 시대에 되자 이란인을 중심으로 한 재상(와질)이나 서기(카티브)가 정치 세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군대의 주력은 아바스 왕조 혁명을 계기로 아랍군에서 홀라산군으로 바뀌고, 9세기 이후에는 맘루크군인이 관료를 억압해서 국가의 실권을 장악했다. 이크타보유에 의해서 농촌을 지배한 맘루크는 그 부를 기초로 도시의 경제를 좌우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으나, 군인의 지배권에는 무슬림에 대한 재판권은 포함되어 있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샤리아에 의한 재판은 각 도시에 파견된 카디(재판관)에 의해서 행하여졌다. 또한 이들 카디는 재판의 업무를 넘어서 지방행정에 참여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카디를 포함한 울라마는 불법적인 지배자에 대한 이슬람 정의의 수호신인 동시에 이민족의 군사정권을 지지해서 국가와 민중을 연결하는 고리로서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이와 같은 경향은 이라크나 이집트에 수니파 정권이 부활하는 셀주크 왕조나 아이유브 왕조(1169~1250) 또는 맘루크 왕조(1250~1517) 시대에 특히 현저하다.
맘루크 왕조를 쓰러뜨리고 메카메디나의 종주권을 장악해서 이슬람 국가로서의 본질을 밝힌 오스만 제국은 아랍 이외에 발칸의 그리스도 교도 등을 옹호하는 다민족 국가의 양상을 띠는데, 국가의 성격이나 구조에 대해서 보면 그 이전의 이슬람의 여러 왕조와 거의 변함없었다. 최성기인 술탄은 동시에 칼리프를 칭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강대하였는데, 그 정치는 샤리아에 따라서 행하여지며,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서 전대의 샤사(행정법)에 상당하는 카눈이 발포되었다. 또한 술탄권력을 지지해온 것은 군대나 관료이며, 군대는 그리스도교의 자제를 노예로서 징발한 이에체리군단과 티말이 수여된 시파히(기사)군단으로 이루어졌다. 한편, 관료는 중앙관처 이외에 주, 현, 군, 향, 촌 등 정비된 행정기구 중에 조직되었는데, 샤리아의 유효한 시행을 위해서 울라마로서의 재판관도 이들 지방행정조직과 결합해서 계층적으로 임명된 것이 오스만제국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의 이슬람 국가론,
19세기를 통해서 점차로 결정적인 것으로 나타난 정치적ㆍ경제적ㆍ사회적 변동하에서 <이슬람 세계>라는 관념도 <이슬람 국가>의 이데올로기도 모두 해체ㆍ붕괴되었다. 근대 이슬람의 위기감의 주요 내용은 이슬람 국가의 상실감(제도ㆍ사상 양면에서의)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샤 와리 울라의 아들 압두 알아지즈가, 영국인 지배하의 인도는 오로지 이슬람 세계의 범위 밖에 있는 달 알할브(전쟁의 집)라고 선언한 파토와(1803)에서 시작되어서, 터키혁명하의 칼리프제 폐지(1924)에 이르는 과정 중에서 점차로 전혀 치유하기 어려운 것이 되었다.
전통적 지배 이데올로기의 구조는 이슬람법(샤리아)과 이슬람 신비주의의 복합으로 나타나며, 울라마와 교단(카리카)이 정치적ㆍ사회적 통합의 채널로서 기능하였는데, 이와 같은 전통적 시스템은 급속하게 약체화되어 분해되었다. 유럽의 법 체계가 실질적인 힘을 가지기 시작해서 법의 이중 과정이 발생한 것은 신수(神授)의 법으로서의 이슬람법의 절대성ㆍ자기완결성의 이데올로기가 심하게 파괴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유럽 상품의 압력에 의한 길드적 동업동직조합의 해체와 지주제 경영확대에 의한 <촌락>사회의 변질은 교단조직을 붕괴시키고 이슬람 신비주의의 형해화를 초래했다.
울라마에 대신해서 기사, 군인, 법률가, 관리 등 새로운 형태의 지식층이 엘리트로서 등장했다. 세계 자본주의적 편성의 심화와 함께 여러 지역에서 여러 가지 에스닉 그룹(민족집단)이 대중적 레벨에서 이동해서 혼합과정이 심하게 전개되었다. 평화와 안전의 체계였던 오스만 제국의 미레트제는 동방문제 중에서 오히려 분쟁의 요인으로 전화되었다. 시오니즘을 이용한 팔레스타인 문제의 설정은 이슬람 국가 상실감의 증폭에 의한 초조와 지하드론적 대응을 날카롭게 자극했다.
이렇게 해서 이슬람 국가론은 현대 이슬람의 중심적 쟁점이 되었다. 거기에서 먼저 현저하게 인정되는 첫 번째의 입장은 현상 유지파적ㆍ국제 정치론적 이슬람 국가론이다. 그것은 20세기에 발생한 여러 국가 시스템을 전제로서, 다수의 이슬람 교도를 옹호하는 제국을 이슬람 제국으로 보는 입장으로, 이슬람 제국회의(1971년 발족, 가맹국 42개국)는 그에 의거하고있다. 이에 대립적인 두 번째의 입장은 현상타파적ㆍ종교사회운동론적 이슬람 국가론이다. 그것은 1930년대 이후, 우슬림 동맹단으로 대표되는 대중적 사회운동 중에서 공정과 정의에 의한 이슬람 국가의 재건ㆍ획득의 요구로서 전개되었는데, 그후 대중의 정치적 급진화하에서, 70년대 말의 이란혁명론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입장의 혁명적 성격이 현저하게 강해졌다. 파키스탄 국가가 어떤 의미에서 이슬람 국가인가라는 논의는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입장 사이를 흔드는 것이었다. 또한 70년대에는 두 번째 입장의 발전과 함께 그에 대해서 대항적으로, 첫 번째 입장 중에서도 <이슬람 경제>론이 발생하고, 자원주권이나 은행개혁 또는 파트너십에 의거한 경제개발이나 자카트의 제도화를 널리 논의하게 되었다.
이들 현대 이슬람국가론의 여러 조류로 인해서 실제로는 항상 세속화ㆍ세속주의적 행동의 경향을 나타내는 제국정부도 헌법에서의 이슬람의 국교규정을 둘러싼 문제나 샤리아의 실행(가령 하드와 같이 코란에 규정된 형벌)을 둘러싼 문제에 관해서 동요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 팔레스타인의 운동사이에서는 명확한 탈종교의 비종파주의 입장이 이슬람국가론을 적극적으로 극복해서 지양하는 것으로서 밝혀지게 되었다.
이슬람 사회,
유목민, 상인, 농민,
자힐리야라고 불리는 이슬람 이전의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메카나 메디나 등 일부 정주지역을 제외하면, 대부분 베드윈에 의한 유목생활이 지배적이었다. 그들은 작은 가족집단마다 일정한 수장(水場)을 이동해서 낙타, 산양, 양 등의 가축을 사육하고, 전쟁이나 기근이 일어나면 보다 큰 혈연집단을 조직해서 비상사태에 대처했다. 오래전부터 우상 숭배의 중심지였던 메카는 6세기 중반 이후, 예멘과 시리아를 연결하는 남아라비아 무역을 독점해서 번영하였는데, 상업활동에 종사하는 자는 아직 쿠라이슈족의 일부 상인에 한정되었다. 통상적인 범위와 규모는 이슬람 이념에 의한 아랍의 대정복에 의해서 일거에 확대된다. 각지에 건설된 미슬(군영도시)은 여기에 아랍전사와 그 가족이 정주하고, 또한 가까운 곳에서 상공업자가 모여듬으로써 마침내 생산과 소비의 중심적인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들 미슬을 연결하는 광대한 국내 경제권의 형성은 화폐수요의 증대를 초래하고, 이에 호응해서 7세기 말에는 아랍화폐의 주조가 개시되었다. 또한 미슬로의 아랍 이주는 마침내 원주민의 아랍화를 촉진하고, 아라비아어를 공통어로 하는 일대 문화권을 성립시켰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의를 가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바스 왕조 시대(750~1258)에는 바그다드를 비롯한 도시의 상공업 활동은 더욱 활발하게 되었다. 모스크에 인접한 시는 교역의 장인 동시에 생산의 장이기도 하여서, 거기에서 생산된 각종 직물이나 유리제품, 종이, 비누 등의 특산물은 각지의 도시를 향해서 많이 수출되었다. 도시상인에는 외국무역에 종사하는 대상인부터 시장의 소상인까지 있었는데, 아바스 왕조 시대에 특히 유력한 계층을 형성한 것은 전자의 대상인이었다. 그들은 중국의 비단이나 도자기, 인도의 후추, 목재, 철, 러시아의 모피와 노예, 비잔틴의 공예품, 그 외에 아프리카의 금이나 도예 등을 구입해서 칼리프나 고급관료 또는 군인 등의 유력자에게 판매했다. 그리고 9세기 이후에는 그런 경제력을 기반으로 정치 세계로 진출해서, 그중에는 국가의 재상에까지 올라간 상인도 나타났다. 또한 그 재력을 학문 분야에 활용해서 스스로 각지를 돌아다녀 예언자의 전승을 수집하기 위해서 돌아다니는 상인도 다수 존재했다. 정부에 의한 재산몰수가 빈번하게 행하여졌기 때문에 몇 세대에 걸쳐서 호상이 존속하는 예는 드물었지만, 군사정권의 성립에 이르기까지 경제, 정치, 문화의 면에서 상인의 이와 같은 활약을 볼 수 있는 것은 이슬람 사회의 현저한 특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유목민이었던 아랍 정복군은 지배하의 농촌사회나 농업에는 흥미를 나타내지 않고 거기에서 조세를 징수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였다. 종래대로의 토지보유가 인정된 경작농민에게는 인두세 외에 토지세가 부과되는데, 이 토지세만으로 수확의 약 반에 이르렀다고 추정되고 있다. 면세특권을 가진 아랍 무슬림과 원주민과의 세제상의 불평등이 해소된 것은 이슬람의 조세제도가 정비되고 토지의 경작자는 모두 지대로서의 지세를 지불한다는 원칙이 확립되는 8세기 중반 이후의 일이다. 또한 촌장도 종래와 마찬가지로 사유지의 소유가 인정되고, 조세를 일괄해서 정부에게 납부하는 마을의 책임자로서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8세기경부터 아랍이 지주가 되어서 마을에 살고, 관료적인 징세기구가 정비되게 되면 이들 촌장은 지방명사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대신에 샤이프라고 하는 아랍의 촌장이 촌락사회를 책임지고 관리하게 되었다. 도시에서는 이미 아바스 왕조 시대 초반부터 주민의 다수가 무슬림이 되었는데, 이와 같은 변화에 대응해서 촌락에서도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농민의 수가 점차로 증대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정복지의 토지와 농민은 아랍전사에게는 분배되지 않는 것이 최초의 원칙이었다. 그러나 옴미아드 왕조(661~750) 초반부터 칼리프는 일족이나 총신에 대해서 사유지인 카티아를 수여하게 되고, 또한 황무지 개간이나 토지에 울타리를 둘러서 보다 대규모 사령지도 계속 성립되었다. 이렇게 해서 8세기부터 9세기에 걸쳐서 카티아나 다이아를 기초로 군인이나 관료, 상인에 의한 대토지 소유가 현저하게 발달했다. 그들은 대리인을 이용해서 수로의 개삭이나 염해를 입은 토지의 개량에 노력, 특히 티그리스ㆍ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다이아에서는 소맥이나 대맥외에 상품작물인 벼나 사탕수수의 지배가 성행하였다. 상공업 활동의 진전과 함께 여기에 이슬람 사회 번영의 경제적 기반이 거의 확립되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상과 같이 이슬람 사회의 생활의 기초는 상공업과 농업과 목축에 있었는데, 이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기본적으로는 거의 변함없다. 그것도 이들 요소는 상품유통과 인간의 이동을 통해서 상호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노예군인과 울라마,
샤리아(이슬람법)에 의한 정치 원리가 확립되고, 무슬림 상인의 광범위한 활약과 농민의 개종이 서서히 진행됨에 따라서, 9세기 초 무렵에 이슬람 사회는 그 이름에 어울리는 내실을 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슬람 사회가 이와 같이 충실한 한편, 특권적인 대토지 소유의 발달이나 아바스 왕조의 상비군인 홀라산군의 해체는 새로운 역사적 전개를 촉진하는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변혁은 터키인을 중심으로 하는 맘루크(노예군인)의 대두에서 시작된다. 중앙아시아의 터키인은 이미 8세기 초부터 어떤 자는 전쟁포로로서, 어떤 자는 구입노예로서 이슬람 사회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란의 다이람인이 오로지 보병으로서 이용된 것에 반해서, 이들 터키인은 기마전사로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칼리프 무타심(재위 833~842)은 약 7000기의 터키인 맘루크를 구입해서 친위대를 조직하였는데, 이 이후 맘루크는 홀라산군에 대신해서 국가의 실권을 장악하고, 마침내 칼리프의 폐위도 좌우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0세기 중반 이후에도 유리한 이크타 보유에 의해서 농촌을 지배하고, 12세기 말에는 흑인노예병의 세력을 구축해서 아미르나 지방 총독의 자리를 독점했다. 물론 자유신분의 비맘루크기사도 다수 존재하였는데, 맘루크 왕조(1250~1517)는 물론, 그후의 오스만제국(1290~1922)이나 사파비 왕조(1501~1736)에서도 노예군단 우위의 체제에 변함은 없었다.
이민족으로 노예출신인 맘루크에 의한 지배가 이와 같이 오래 계속된 것은 맘루크와 울라마(종교지도자, 학자)와의 긴밀한 제휴에 의하는 점이 적지 않다. 시아파의 여러 세력에 대해서 수니파 이데올로기를 보급하기 위한 마드라사(학원)의 건설은 이미 셀주크 왕조 시대(1038~1194)부터 시작되었는데, 이 정책을 답습한 아이유브 왕조에서 맘루크 왕조에 걸쳐서 울라마의 사회적 역할은 더욱더 증대하였다. 맘루크는 모스크나 마드리사를 많이 건설해서 이슬람문화를 보호해서, 무슬림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울라마의 지지를 얻고자 하였다. 물론 이와 같은 맘루크 체제에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랍 유목민은 이민족 노예에 의한 지배에 이론을 제기하고 가끔 반란을 일으켰으며, 도시의 젊은이 집단인 아이야르('ayyār)도 군인의 폭력에서 하라(마을)를 지키는 것에 자신의 존재가치를 발견하였다. 유목민이나 아이야르는 정부에 협력해서 군대의 보조군을 구성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10~12세기의 시리아나 쟈지라에서는 일시적이기는 하였지만 상인이나 아프다스(아이야르)의 지지를 얻어서 도시에 울라마의 연합정권이 수립된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런데 맘루크가 대두하고, 이크타제가 성립한 후에도 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상업활동이 활발히 행하여졌다. 아바스 왕조 시대와 같이 정치가로서 활약하는 상인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지만, 술탄의 보호하에 향료무역이나 노예무역에 종사하는 상인 중에는 정부에 자금을 빌려주거나 외교사절로서 멀리 중앙아시아나 러시아까지 가는 자도 있었다.
이슬람교 예배,
맘루크의 대두에 따른 정정(政情)의 혼란은 이란이나 이라크의 농촌사회에 큰 타격을 주었다. 군벌상호의 전투에 의해서 수리기구는 파괴되고, 부와이 왕조(932~1062)의 성립 후에도 군인에 의한 자의적인 수탈이 계속되었다. 셀주크 왕조는 군인의 이크타보유를 엄격하게 감독함으로써 농촌사회에 어느 정도의 안정을 가져왔으나, 그래도 과거의 농업생산력을 완전히 회복하기에는 이르지 못했다. 한편 서방의 이집트ㆍ시리아에서는 비교적 안정된 농업생산이 유지되어, 아이유브 왕조에서 맘루크 왕조에 걸쳐서 도시와 농촌의 인구는 확실히 증가하였다고 추정되고 있다. 촌락사회를 구성하는 주요한 계층은 자소작의 농민이었는데, 이크타제가 성립하자 그들은 점차로 군인에 대한 예속도를 더해서 마침내 이크타 보유자의 농노적인 상태로 전락해갔다. 또한 이크타제의 성립과 함께 이슬람 신비주의 교단의 결성도 농촌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온 요인이었다. 12세기 이후, 각 도시에 성립한 타리카는 그 조직의 틀을 농촌에도 확산시킴으로써 도시와 농촌을 연결하는 강력한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 수공업자나 농민은 이들 타리카에 참가함으로써 비로소 이슬람의 신앙을 친근한 것으로서 체득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도시와 촌락,
전통적인 이슬람 사회가 형성되는 과정은 이상과 같은데,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의 결합원리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대부분 시대의 이슬람 사회에도 공통되는 것이 있었다. 도시는 직물을 비롯한 수공업제품이나 도서무역에 의한 향료, 노예 등이 거래되는 장인 동시에, 정부관리나 군인에 의한 농촌지배의 거점이기도 하였다. 한편, 주변 촌락 농민의 입장에서 보면 도시는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교통의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촌락은 자급자족적인 공통체가 아니라, 이미 이슬람 시대 초기부터 직물의 원료나 각종 과일 등의 특산물이 근처 도시를 향해서 출하되었다.
촌락의 쿳타브(절의 소옥)에서 코란의 암송을 끝낸 소년은 도시로 나와서 마드라사에서 공부하고, 바그다드나 카이로 등에서 면학을 계속하는 것이 유력한 울라마가 되기 위한 필수 코스였다. 촌락에는 농민이외에 농경지의 관리인이나 순찰인, 목수, 설교사 등도 존재하였는데, 그들 중 특히 순찰역은 유목민에 의해서 청부되는 일이 가끔 있었다. 일반적으로 기동력과 무력을 가진 유목민은 전투집단으로서의 성격도 갖추었기 때문에, 그들은 계약에 의해서 촌락을 순찰할 뿐만 아니라, 정부에 보조군을 제공하거나 일정 지역에 보호권을 행사해서 여행객이나 순례에 대한 안전보장을 하는 대신에 보호료를 징수했다. 그러나 이들 유목민은 농촌사회와 공존하며 국가체제에 협력하는 반면, 중앙권력이 약해지면 즉시 농촌이나 메카순례의 약탈자로 변할 위험성도 항상 지니고 있었다.
사회계층은 칼리프나 술탄의 일족, 군인, 대상인, 고급관리 등으로 이루어진 지배층과 중소 상인이나 직인, 또는 농민으로 이루어진 민중으로 나뉘어졌다. 그 중간에 무슬림 지식인이 존재하였는데, 도시에 마드라사가 건설되기 시작하는 11세기 이후에는 서서히 이 중간층이 두터워지는 경향이 있었다. 원래 핫사와 안마 및 각 직업은 결코 고정적인 신분인 것이 아니라, 농민의 자제가 관리가 되는 경우도 있었으며, 상인이나 직인의 자녀가 부모의 직업을 잇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단, 아바스 왕조 중기 이후의 군사는 터키인이나 몽고인 등 이민족에 의해서 독점되며, 도시민이나 농민 출신의 군인이 거의 전무하였다는 것은 이슬람 사회에 고유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외에 자유인과 노예의 구분도 존재하였는데, 군인노예이건 가내노예이건 해방 후의 경력에 노예였던 것이 큰 장해가 되지는 않았다. 만술이나 하른알라시드를 비롯해서 아바스 왕조의 역대 칼리프에 노예의 자녀가 많았던 사실이 이를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이슬람 사회는 이와 같은 신분ㆍ직업의 유동성과 함께 인간의 이동이 매우 활발히 행하여진 사회이다.
아랍제국의 성립 이후, 터키인이나 몽고인은 정복에 의해서 사방에 대한 이주를 실현해서, 페르시아인 마와리나 맘루크는 유력자의 예속민으로서 이슬람 사회에 들어갔다. 또한 이라크, 시리아, 이집트를 연결하는 상호이주는 정정의 불안이나 기근을 계기로 단속적으로 행하여졌으며, 농민이나 유목민의 도시로의 유입도 일상적인 현상이었다. 또한 학문의 습득방법을 보아도 마드라사의 학생은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서 법학이나 전승학을 공부하고, 마침내 충분한 지식을 얻으면 선생으로부터 면허를 받아서, 다른 마을의 마드라사에게 새로운 선생을 구해서 여행을 떠났다. 또한 동서를 연결하는 활발한 상업활동이나 1년에 한 번의 메카순례도 이와 같은 인간의 이동을 더욱 촉진하는 요인인 것에 틀림없다. 와크프(기부 재산)에 의한 캐라반 사라이의 건설에 더해서 유력자가 일정기간 여행자의 생활과 안전을 보장하는 지와르(jiwār)의 관행도 살아 있기 때문에, 여행인이 이향에서의 생활에 큰 불편을 느끼는 경우는 없었다. 민족이나 지역의 전통이 복잡하게 혼합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사회가 대략적으로 균질적인 문화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의 이동에 의해서 새로운 기술이나 학문의 정보가 원격지에 신속하게 전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생활과 문화.
무슬림의 생활은 복수의 달력을 기본으로 영위되었다. 이드라고 하는 이슬람의 이대 제사(단식이 끝난 후의 제사와 희생제), 예언자의 성탄제(마우리드) 등은 헤지라력에 의해서 개최되었는데, 농사나 조세의 징수는 각지에 고유한 태양력에 의해서 행하여졌다. 가령 이집트에서는 나일이 증수하는 8월말을 연초로 하는 콥트력이 사용되며, 시리아에서는 가을을 연초로 하는 시리아력이, 이라크나 이란에서는 춘분을 연초로 하는 페르시아력이 이용되었다. 근년 이후에는 이에 그레고리오력이 더해져서 많은 지역에서 3력 병용의 상태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민족이나 종교도 결코 단일하지 않았던 것이 특징이다. 역사상 중요한 역할을 한 아랍, 페르시아인(이란인), 터키인, 몽고인, 버버 이외에 쿨드, 아르메니아인, 누비아, 슬라브인, 그루지아인, 다이람 등의 소위 <소수민족>도 수없이 많이 존재하였다.
종교별로 보면 이슬람 교도 외에 인두세의 지불을 조건으로 <계전의 민족>으로서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그리스도 교도나 유대 교도, 또는 조로아스터 교도 등이 있으며, 이슬람 교도 수니파시아파, 아라위파, 도르즈파 등의 여러 분파로 나뉘어졌다. 이들 민족이나 종파는 페르시아인은 서기ㆍ문인으로서, 터키인은 군인으로서, 유대 교도는 상인ㆍ금융업자로서 특히 눈에 띤 작용을 한 것처럼 각각 고유한 기술이나 재능을 살려서 이슬람 사회에 독자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민족이나 종교가 이와 같이 다양한 것에 대응해서 언어 또한 복잡했다. 물론 코란의 언어인 아라비아어는 오랫동안 이슬람 세계의 공용어로서 이용되고 학문이나 문학활동도 아라비아어에 의해서 행하여졌다. 그러나 10세기 이후가 되면 이란에서는 근세 페르시아어가 부활하고, 또한 터키민족의 서진과 함께 터키어의 사용 지역도 점차로 확대되었다. 또한 쿨드나 아르메니아인, 또는 그루지아인 등의 사이에서는 각각의 민족언어가 현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계속적으로 사용된 것이다.
그런데 주된 생업이 도시의 상공업이건, 시골의 농업이나 목축이건, 생활의 기초가 되는 단위는 역시 가족이었다. 부계의 혈연그룹의 집합체인 가족은 그 집합의 정도에 따라서 대소 여러 가지였으나, 현실의 생활은 비교적 소규모의 가족에 의해서 영위되었다. 가족의 성원은 부친의 권위에 따르고, 필요하면 먼 혈연에게까지 원조의 손길을 뻗치는 것이 요구되었다. 개인주의적인 행동의 원리가 강하게 살아 있는 사회로, 가족이나 일족의 긴밀한 유대는 도시나 촌락의 공동체와 함께 개인의 자유로운 행동에 대한 규제력으로서 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슬람 사회에는 현실의 소가족과는 별도로 공통의 선조에 의해서 결합된 <집>의 의식도 존재하였다.
예를 들면 이라크의 바르마크가나 이집트의 맘마티가는 관료의 명가로서 오랜 전통을 자랑하며, 맘루크 왕조나 오스만 왕조의 아미르는 맘루크와 의제적인 혈연관계를 맺음으로써 하나의 집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이와 같은 가족이나 집의 관념은 크게 동요되기 시작했다. 산업구조의 변화에 따른 도시화의 진행과 촌락공동체의 붕괴, 또는 서구시민사회의 이데올로기의 유입은 혈연에 의한 기반을 점차로 약화시켰다. 또한 사회변동의 물결은 사람들의 행동 규범이 된 이슬람 그 자체에도 미쳤다. 혼합 재판소의 설치에 의해서 샤리아가 적용되는 범위는 대폭으로 제한되며, 그 담당자인 울라마의 역할도 점차로 저하되었다. 이슬람 사회의 전개 이후, 거의 유일한 사회조직으로서 기능하였던 타리카도 19세기 이후에는 급속하게 해체화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근대화를 촉진하기 위해서 구세력인 맘루크는 일소되며, 농촌에서도 이크타제의 시행 이후 비로소 본격적인 토지개혁이 실시되었다. 10세기 이후의 이슬람 사회는 맘루크에 의한 지배와 그것을 지지하는 울라마의 사회적 역할, 이크타제의 성립과 발전, 타리카에 의한 사회통합 등으로 특징지어진다. 서아시아, 북아프리카의 근대 여러 국가는 비이슬람화의 방향을 거치건, 이슬람 재생의 길을 걷든 이들 모두를 개혁의 대상으로 들어서 새로운 사회와 그에 어울리는 가치의식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천사 가브리엘의 계시를 받고 있는 무함마드,
제사,
이슬람의 제사는 외형상 ①신성ㆍ엄숙ㆍ근행형 ②순교기념ㆍ비통형 ③환희활달ㆍ해방형의 세가지 타입으로 나뉘어진다. 종파의 구별없이 이슬람법에 정해진 이대제사(이드)는 단식후의 제사와 희생제이다. 이외에 ①헤지라력의 원단 ②무함마드의 성탄제 ③밤의 여행과 승천기념의 밤 ④샤반 달의 15일의 전야 ⑤라일라 알카드르(layla al-qadr) 등이 있다. 시아파에서는 이외에 무함마드가 알리의 칼리프권을 암으로 표명했다고 주장하는 사건을 기념하는 카딜품제나 알리, 하사인의 순교기념일을 중시한다. 특히 푸사인의 순교기념일 아슈라는 시아파 최대의 행사이다. 이외에 시아파에서는 역대 이맘(6대, 8대, 12대 등)의 성탄제나 명일이 중시된다. 또한 종파 구별없이 이슬람 신비주의의 성자의 성탄제가 지방적인 제사로서 널리 행하여지고 있다.
동남아시아권 이슬람,
동남아시아의 총 인구 중 무슬림(이슬람 교도)은 그 40%를 차지하며 2위의 불교도, 3위인 그리스도 교도를 웃도는 지역내 최대의 종교그룹이다. 무슬림 인구의 대부분은 동남아시아 동서부인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군도, 필리핀 군도 남부에 집중하고 있으며, 그 분포범위는 그리스도 교도가 차지하는 필리핀 북부ㆍ중부를 제외하면 소위 말레이계의 언어ㆍ문화를 가진 사람들의 분포범위와 거의 일치하고 있다. 이슬람은 교도개인의 신앙ㆍ종교생활만이 아니라, 지역내 각국의 문화, 사회, 정치, 국제관계의 동적인 구성요소로 되어 있다. 동남아시아의 무슬림은 전 세계의 무슬림 총 인구의 20%에 이르고 있으며, 1970년대 초기 이래의 세계적 이슬람 부흥의 동향도 현저하게 받아들여지며, 이슬람 세계의 유력한 구성부분으로서 발언력을 강화시키고 있다.
역사,
고대, 동남아시아는 중국과 인도대륙ㆍ서아시아ㆍ지중해의 여러 문명을 연결하는 해상교역의 루트에 위치하고 있으며, 아랍상인은 이 교역루트에서 일찍이 활약하였다. 무함마드에 의해서 제창된 이슬람의 가르침도 이 교역루트를 통해서 전해졌다. 동남아시아에서 이슬람으로의 개종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은 13세기 말경부터이다. 개종은 아라비아, 인도, 중국 등으로부터의 무슬림상인의 정착과 현재사회에 대한 동화, 울라마(이슬람 학자)나 스피즘(이슬람 신비주의)도사에 의한 포교, 토착권력자의 정치적 배려ㆍ경제적 타산 등 여러 가지 양태와 동기로서 진행되었다. 어떤 경우든 외부로부터의 대량의 무슬림 이민이나 무력침공은 보이지 않으며, 개종은 전체로서의 평화적ㆍ자발적ㆍ점진적 과정을 거쳤다.
먼저 13세기 말 수마트라섬의 북부 연안에 몇 개의 무슬림 왕국이 일어났다. 15세기 초기에는 말레이반도 남부의 동서교역의 거점지인 믈라카 왕국의 왕이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이슬람화는 이 믈라카 해협지역을 기점으로서 한편에서는 말레이반도를 돌아서 중국을 향하는 동북방향의 교역루트를 따라서 인도차이나 남부, 보르네오(카리만탄)섬 북안, 필리핀 군도에 미치며, 한편에서는 모르카제도(향료제도)를 동단으로 하는 동남방향의 교역루트를 따라서 수마트라섬 남부, 자바섬 북안, 보르네오섬 남부, 스라웨시(셀레베스)섬 남부 등으로 퍼졌다.
1511년 믈라카가 포르투갈의 손에 함락된 후에도 수마트라 북부의 아체의 술탄 이스칸달 무다(재위 1607~1636), 자바 내륙부의 마타람 왕국의 술탄 아군, 수라웨시 남부 말카살의 하사누딘왕(동년 1631~1670) 등 강력한 무슬림 권력이 각지에서 일어나, 17세기를 통해서 유럽세력의 진출을 용이하게 허용하지 않았다. 19세기 초기부터 네덜란드에 의한 식민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이에 대해서 서수마트라의 이맘 본로 대표되는 파드파의 저항(파드리 전쟁), 자바삼 죠크쟈카르타의 술탄가의 왕자 디오포네고로의 반란(자바 전쟁), 테운크 디 티로를 정신적 지도자로 하는 아편 전쟁 등, 이슬람 성전(지하드)의 기인(旗印)을 드는 격렬한 무력저항이 20세기 초기까지 이어졌다. 이는 20세기의 인도네시아 민족주의 운동의 선구가 되고, 이슬람동맹(1911년 결성) 등으로 이어졌다. 1945년의 독립선언, 49년의 주권위양에 의해서 인도네시아는 이슬람을 주요 구성요소의 하나로서 탄생했다.
필리핀 남부의 무슬림은 모로족이고 불리며, 16세기 중반부터 4세기반에 걸쳐서 스페인, 아메리카의 식민지화ㆍ그리스도 교화에 계속해서 저항해서, 현재에는 분리ㆍ자치를 요구하기에 이르고 있다. 말레이반도와 보르네오 북안의 무슬림의 모든 권력은 19세기 후반부터 전체적으로 영국식민지 권익의 진출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취하고, 화교ㆍ인도이민의 노동력 수입을 인정하고, 오늘날까지 이르는 다민족의 복합사회가 각지에서 형성되었다.
생활ㆍ문화,
동남아시아의 무슬림 주민의 생활은 많은 면에서 이슬람을 기조로 하고 있다. 남자의 할례(5~15세), 결혼계약(아카드 니카), 토장에 의한 매장 등 주요한 통과의례는 이슬람에 따른다. 역은 태음력에 의하며, 1일은 일몰부터 시작해서 일몰에서 끝나며, 1주는 금요일을 성일로 하는 7요일, 1개월은 29일부터 30일, 1년은 12개월로 354일로, 태양력보다 약 11일 짧다. 따라서 이슬람의 연중행사는 자연의 계절과 관계없이 돌아가고 있다. 이외에 태양력, 자바의 주 5요일 등 복수의 역법이 병용되고 있다.
이슬람의 도래와 함께 아라비아어ㆍ아라비아 문자의 사용이 동남아시아에서 보급되었다. 말레이계의 무슬림 사회전역에서 말레이시아어를 아라비아 문자로 표기한 쟈위(Jawi)가 정치, 외교, 종교, 교육 등의 분야에서 기본용어가 되었다. 자바에서는 산스크리트계의 자바문자와 자바 외에 자바어를 아라비아 문자로 표현하는 페곤(Pegon)이 이슬람법, 스피즘, 이슬람 교육 등의 분야에서 이용하게 되었다. 이 영향은 라틴 문자를 널리 사용하게 된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슬람화의 초기부터 다수의 동남아시아ㆍ무슬림이 메카를 순례했다. 특히 1869년의 수에즈 운하 개통 후, 동남아시아로부터의 순례자수는 급격히 증대했다. 또한 순례 후에도 메카에 머물러서 이슬람 교의의 연찬에 노력하는 자도 많아지고, 동남아시아ㆍ무슬림의 코로니가 자바(Jawah)의 총칭하에 발전했다. 자바ㆍ코로니에서는 자바, 아체, 미난카바우 등의 출신의 울라마를 중심으로서 필리핀, 태국을 포함한 동남아시아 전역으로부터의 무슬림이 말레이시아어를 공통어로서 공동생활을 영위하고, 동남아시아ㆍ무슬림동포로서의 연대성이 형성되었다.
이슬람은 동남아시아의 문학ㆍ예능에 샤일(페르시아 신비주의 계통의 시 형식), 히카야트 스쟈라(전기ㆍ역사 이야기 등) 등 새로운 장르를 가져오고, 와얀의 레퍼토리에 이슬람 설화, 무슬림 영웅전을 더했다. 또한 스피의 행(行) 등에서 여러 가지 무용ㆍ음악이 발달했다. 건축, 조형미술의 분야에서는 힌두ㆍ불교기에 특징적이었던 석조사원건축, 불상조각이 모습을 감추었으며 이슬람 예배당은 동남아시아의 독특한 목조건축양식으로서 세워졌다. 조각, 장식에서는 꽃ㆍ동물의 양식화, 기하학 모양이 주류를 이루었다.
교의, 특징,
동남아시아의 이슬람은 코란과 함께 무함마드의 언행(수나)과 무슬림 공동체의 합의(이주마)를 중시하는 수니파에 속한다. 수니파의 교의는 신앙ㆍ의례적 규범(히바다트)인 육신오행(六信五行)은 전세계 어디에서나 우수한 공통성ㆍ보편성을 나타내는데, 사회윤리적 규범(무아말라트)에서는 코란과 수나를 원칙으로 하며, 시대나 환경, 관습(아닷트) 등을 고려해서 유연성 있는 다양한 적응을 행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수니파 이슬람법학(피크프) 4학파 중에서 동남아시아에서는 샤피이파가 주류이다. 수피교단(탈레캇트)의 활동은 동남아시아의 이슬람화 초기부터 활발하였는데, 그중에서도 나크슈반디야, 카디리야, 샤타리야 등이 현재에도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이슬람ㆍ시아파의 영향은 단편적으로 말레이시아어, 인도네시아어 중에 페르시아어 기원의 단어가 보이는 점, 수마트라 서ㆍ북부 등에서 하산 후사인의 수난제의 흔적이 보이는 점, 이븐 아르알라비계통의 <존재의 단일성론>이 신비주의 사상의 일단을 이루고 있는 점 등에 머물렀다. 그러나 1979년의 이란혁명 이후에는 시아 정치사상이나 이슬람 원리주의의 영향이 강해지고 있다.
교육,
할례 전기의 아동에 대한 양친이나 코란교사에 의한 코란 낭독의 교육은 동남아시아 각지에서 상당히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더욱 발전한 이슬람 교육을 위해서 폰도크(아라비아 어원 푼도크, 숙사라는 뜻. 자바에서는 푸산트렌이라고도 한다)이라고 하는 기숙사가 각지에 산재하고, 울라마(자바에서는 키야이)의 지도하에 아라비아어 문법, 코란해석, 하디스(무함마드의 언행록), 이슬람법, 이슬람 신비주의 등 전통적인 커리큘럼에 따른 교육이 행하여졌다. 20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동남아시아의 무슬림주민의 교육은 기본적으로 이슬람 교육이었다. 오늘날에는 전통적인 폰도크 프산트렌 교육은 근대적 학교교육의 영향을 받아서 여러 가지 내부개혁이 일어나고, 종교학교나 일반학교를 병설하는 등의 노력을 통해서 동남아시아에서의 이슬람의 유지ㆍ발전에 의연히 큰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슬람의 위치와 역할,
동남아시아 각국에서의 이슬람의 위치와 역할은 역사, 인구 구성 등에 따라서 다양하다. 무슬림이 다수를 차지하는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브루네이에서는 이슬람이 국가생활의 기조를 이루고 있다. 싱가포르, 필리핀, 태국에서 무슬림은 국가적 통합에 관련된 중요한 마이널리티의 위치에 있으며, 인도차이나에서는 소멸의 위기에 처한 극소수파이다.
인도네시아는 총인구 중 88%가 무슬림이며, 동남아시아만이 아니라 세계에서 최대의 무슬림 인구를 가지는 국가이다. 그러나 이슬람은 헌법상 국교로서의 위치에 있지는 않다. 헌법은 그 전문에서 건국 5원칙의 제1원칙으로서 유일 최고신으로의 귀의를 들고 있으며, 무슬림의 대다수는 이를 이슬람의 근본원리인 타우히드(신의 유일성)의 승인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렇지만 일부에서는 이슬람을 국가원리로서 명기할 것을 요구하는 움직임도 의연히 존재한다. 현행 헌법체제하에서 무슬림의 결혼, 이혼, 상속, 기부 등에 관한 행정과 사법, 이슬람 교육 등은 종교성(宗敎省)의 관할하에서 놓여있어 이슬람법의 적용이 보증되어 있다.
말레이시아는 식민지화 이전부터 연속되고 있는 토착의 무슬림 여러 권력을 주체로서 연방국가로서 형성되어 있다. 연방헌법은 이슬람을 국교로 정하고 있는데, 총인구의 44%에 이르는 말레이계 무슬림은 대부분이 농민으로, 공업, 상업을 지배한 화교에 대해서 경제적으로 약세의 위치에 있다. 현 정부는 말레이계 주민을 부미프트라(<토지의 자손>)로서 여러 가지 특권을 줌으로써 경제적ㆍ사회적 향상에 노력하고 있다. 브루네이(총인구 중 말레이계 55%)는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술탄 통치국인데, 최근 영국연방에서 독립해서 풍부한 천연자원(천연가스)을 활용해서 독특한 국가형성을 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화교가 주체인 복합민족국가로 총인구 중 말레이계 무슬림 15%와 인도계의 무슬림 상당수가 있는데, 결혼, 이혼, 상속 등의 영역에서의 이슬람법의 적용과 종교활동의 자유가 보증되고 있다. 필리핀과 태국의 무슬림 인구는 모두 총인구의 4%, 그것도 독자적인 역사와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있는 점에서 공통되고 있다. 또한 국가의 남부에 있어서 근린국의 무슬림 주민과 긴밀한 사회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분리ㆍ독립의 요구가 반복되었는데, 양국 정부 모두 현재의 국경선을 유지하는 것을 원칙으로서 양보하지 않고, 교육, 사회복지 등의 면에서 내부자치를 높임으로써 무슬림 주민의 합의를 얻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미얀마에도 총인구의 4%의 무슬림이 존재하는데, 그 실태는 불분명하다.
인도차이나에서는 오랜 역사를 가진 챰족의 무슬림이 지금도 캄보디아에 거의 10만 명, 베트남에 5만 명 정도, 라오스에 수천 명이 현존하고 있다고 추정되는데, 장기의 전란에 의해서 마이널리티로서의 입장도 위협당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일부는 이미 난민으로서 미국이나 유럽으로 이주했다.
오늘날 메카 순례에 임하는 무슬림 중에서는 동남아시아로부터의 순례자가 가장 많다고 한다. 1970년대부터 80년대 전반에 걸친 ASEAN제국을 중심으로 한 경제적 번영이 같은 지역에서의 이슬람 재활성화의 경향에 박차를 가한 것이다. 국가적 통합, 개발노선과 전략, 기본적 이권과 사회복지, 마이널리티의 생존권 등 여러 문제에서 이슬람 부흥의 움직임, 특히 이슬람 원리주의의 새로운 대두는 동남아시아 각국의 앞으로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아프리카 권 이슬람,
현황,
아프리카 전역에서는 현재도 매년 이슬람 교도가 증가하고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활발하게 이슬람화가 진행되고 있는 대륙이다. 1981년의 추계에 의하면 이슬람 교도가 약 1억5000만 명, 그리스도 교도(전종파)가 약 1억3000만 명이며, 이슬람 교도는 아프리카 전 인구의 35%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아프리카제국 독립 전의 1950년대의 2000만 정도에 비해서 7~8배의 증가를 나타내고 있다. 서아프리카의 사하라 이남의 사바나지대, 수단 중앙부, 동아프리카 연안부의 주민의 대부분은 이슬람 교도이며, 지금도 서아프리카의 기니아만 연안부나 동아프리카 내륙부에서는 도시를 중심으로 이슬람화가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근년 아랍 산유국의 경제원조나 이슬람 자조운동의 전개에 의해서 각지에서 신모스크의 건설, 신자조직의 활성화가 진행되고, 또한 아프리카 각지에서 공로에 의한 메카 순례자의 수도 격증하고 있다.
이를 현재의 국가 레벨에서 보면 이집트, 리비아, 튀니지, 알제리, 모로코, 모리타니아, 수단, 지브티, 소말리아의 9개국을 특별히 아랍ㆍ이슬람 문화의 강국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 9개국은 이슬람 교도가 국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아라비아어를 주요 언어로 하는(소말리아를 제외) 아랍민족으로서의 의식이 높으며 아랍연맹에 가맹하고 있다.
이슬람화의 루트,
아프리카 대륙의 이슬람화의 전개는 역사적으로 보아서 크게 세 가지의 루트가 고려된다. 즉, ①이집트에서 나일강을 따라서 남하해서 수단, 에티오피아로, 나가서 사바나를 따라서 챠드호 지방으로 ②이집트에서 서쪽으로, 마그리브(튀니지, 알제리, 모로코를 포함한 북서 아프리카)를 거쳐서 사하라의 교역 루트를 따라서 남하해서 서아프리카로 ③홍해, 인도양을 거쳐서 동아프리카 연안부로, 여기에서 동아프리카 내륙부로, 동서 양 아프리카의 이슬람화를 크게 유형화하면 동쪽으로는 선형(線型), 서쪽은 면형(面型)이라고 할 수 있다. 동아프리카에서는 이슬람화의 거점이, 연안부에 선상으로 나열된 교역도시의 연결이라는 지역 전개를 한 것에 대해서, 서아프리카에서는 왕국의 영토라는 넓은 면에 교역 루트, 국가통치조직의 망이 정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서아프리카,
서아프리카의 이슬람화의 과정에 대해서 영국의 인류학자 H. J. 피셔는 격리, 혼합, 개혁의 세 가지 기본적 단계를 상정하고 있다. 격리는 무슬림(이슬람 교도)인 아랍상인, 전도자, 망명자 등의 집단과, 비무슬림인 아프리카인 집단이 분리해서 거주지를 구분하고 있는 초기 단계이다. 이어서 아프리카주민의 이슬람화가 일어났는데 아프리카인 사회의 개종은 아프리카 국가의 중추부, 즉 왕이나 수도의 상인 등에서 일어났다. 예를 들어 아랍의 여행객 엘 바클리에 의하면 11세기에 발흥한 마리제국에서 왕이 한발시의 기우에 실패해서 곤경에 처했을 때, 모로코에서 일어난 모라비트파의 수도사가 왕의 개종과 인환해서 은혜의 비를 내리게 해서 이로써 왕국이 이슬람화했다고 한다. 모라비트파의 수도사들은 서아프리카의 각지에서 지하드(성전)를 전개하고, 이슬람화의 길을 열었다.
14세기에는 마리의 왕 만사 무사가 마린케(만딘고)족의 많은 추종자들과 재보를 갖추어서 메카로 순례하고(1324~25), 카이로나 마그리브에서 많은 이슬람 신학자를 톤브크투로 데리고 돌아가서 서아프리카에서의 정통 이슬람 증흥의 기초를 형성했다. 또한 스피즘(신비주의)의 경향이 있는 카딜리아파, 티쟈니아파, 또는 마흐디즘(종말론) 등 여러 이슬람 신들의 사상도 이 루트를 통해서 소개되고, 각지에 퍼졌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만사ㆍ무사가 메카에서 돌아왔을 때에 여행의 안전을 감사해서 마린케족의 조령을 제사지내는 전통적 의례를 행하였다는 고사에도 나타난 바와 같이 통치자는 국가의 통치상 사람들의 전통적인 비무슬림적 가치지향도 무시할 수 없다는 안비바렌트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이슬람교와 전통적 종교의 여러 요소와의 신크레티즘(습합)은 피할 수 없었다.
19세기 개혁기에는 이와 같은 습학적 이슬람을 주된 공격대상으로서 북나이지리아의 플루베족인 우스만 단 포디오에 의한 프라니 왕국, 마찬가지로 플루베족에 의한 마시나제국, 현 세네갈의 투크롤족의 하지우말에 의한 투크롤 제국 등의 신성 지하드 국가의 건설이 계속되고 이슬람화를 보다 넓은 지역에서 일으킴과 동시에 유럽의 식민지 세력의 침략에 대해서 최종적으로는 패배했지만, 장기간 강하게 저항했다. 또한 마흐디즘 사상은 수단의 무함마드 아흐마드의 마프디(구세자)선언과 반란(1881), 교단국가의 성립이라는 형태로 결실을 맺었다(마흐디파).
동아프리카,
한편, 동아프리카에서는 환인도양 교역의 일단으로서 발달한 연안부의 여러 도시에서 토착의 반투문화와 아랍ㆍ페르시아 문화와 접촉하였고, 7세기에는 이슬람이 더해지고 아플로ㆍ아시아적 스와힐리 도시문화가 형성되었다. 15~17세기, 포르투갈에게 제해권을 빼앗겨 이슬람 중핵지대와의 항상적인 문화접촉의 길이 끊어진 연안도시는 필연적으로 부득이하게 반투 사회와의 밀접한 사회관계를 맺었다. 이렇게 해서 아플로ㆍ아시아적인 이슬람문화인 스와히리 문화는 한층 아프리카적 색채를 강하게 띠었다. 18~19세기, 몬바사의 마즐루이가, 마스카트 오만의 부 사이드가 등과의 전쟁에 의해서 포르투갈 세력은 점차로 남쪽으로 이동하고, 1840년에는 부 사이드가의 사이이드 사이드에 의한 잔지발을 수도로 하는 연안부 일대의 술탄국가가 성립했다. 19세기 중기에는 아랍 스와힐리 상인에 의한 내륙교역이 시작되고, 그 교역루트를 중심으로 주민의 이슬람화가 일어났다. 이들은 연안부의 스와힐리 이슬람인을 모델로서 스스로를 <스와힐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19세기 말, 유럽인에 의한 식민지화가 일어나자 식민지 통치자에게 징세 청부인이나 안내인으로서 고용된 스와힐리 사람들이나 서아프리카의 이슬람인은 내륙 각지에 이슬람교를 전했다. 또한 화폐경제의 침투와 함께 시장네트의 확립, 플랜테이션이나 철도건설 등에 대한 주민의 타향벌이가 이슬람화를 진행시키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동아프리카ㆍ서아프리카에서 무슬림이 된다는 것은 이슬람문화와 아프리카문화가 융합한 아플로 이슬람을 수용하는 것이며, 동시에 종교 그 자체와 함께 아플로 이슬람적인 생활양식 전체를 수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례를 들면 이슬람 교도에게는 신앙고백, 예배, 희사, 단식, 순례가 <오주(五柱)>로서 의무지어져 있기 때문에 그들을 소중히 하는데, 또 한편에서는 부족의 전통적인 종교의례나 제사도 수용되어 있는 경우가 그것이다.
종파,
아프리카계 이슬람인은 거의 전부가 수니파(정통파)가 차지하고 있다. 그외에는 동아프리카의 인도ㆍ파키스탄계 주민에게는 시아파계의 이스나 아샬리파, 이스마일파, 보홀라파 등 이란, 인도에 발달한 종파에 속하는 사람이 많다. 또한 잔지발에 왕조를 형성한 부 사이드가는 이바디파에 속한다. 수단에서는 마흐디즘을 신봉하는 마흐디파의 사람들이 지금도 정권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
출처 & 참고문헌,
[이슬람 [Islam, al-Islām] (종교학대사전, 1998. 8. 20.)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재미있는 지구촌 종교 이야기]
[(CC BY-SA)Tab59@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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