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5일 일요일

개심사(開心寺)

충남 서산시 운산면() 신창리() 상왕산()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의 말사이다. 사적기에 따르면, 651년(의자왕 11) 혜감국사()가 창건하고 개원사()라 하던 것을 1350년 처능()이 중창하며 개심사로 고쳤다. 그 후 1475년(조선 성종 6) 중창하였으며 1955년 전면 보수하였다. 보물 제143호로 지정된 대웅전과 충남문화재자료 제194호인 명부전(殿) 및 심검당() 등이 있다.
마음을 씻고 오르는 절
개심사를 오르는 입구에는 세심동이라 글귀가 새겨진 표지가 보인다. 마음을 씻으며 마음을 열면서 개심사로 올라보자. 표지가 있는 입구에서 개심사까지 오르는 길은 멋진 산길로 나무 그늘이 짙게 드리워진 돌계단을 따라 옆으로 계곡이 흘러 운치 있다. 개심사의 창건은 백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지금의 개심사로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조선시대에 이르러서이다. 천천히 걸어 절에 이르면 안양루를 만난다. 안양루에 걸린 ‘상왕산 개심사’라는 현판은 근대 명필로 알려진 해강 김규진의 글씨이다.

절의 강당인 이곳에 올라 바라보는 산세가 일품이니 잠시 머물렀다 가자. 절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대웅보전과 요사채인 심검당은 조선 초에 지어진 건물로 당시의 건축 문화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다. 대웅보전은 맞배지붕 건물로 차분한 분위기를 내고 있는데 밖에서 보면 기둥 사이로 공포가 놓인 다포계 건물로 보이나 안쪽에는 기둥 위에만 공포가 놓인 주심포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형대로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오는 과도기적 건축형태이다.
수선화 언덕이 아름다운 서산, 
한동안 봄꽃 하면 자연 그대로 아름다운 동백꽃과 매화, 벚꽃 정도를 떠올렸다. 몇 년 새 풍경을 상품화하는 경관 농업이 관심을 끌고 대규모 유채꽃 단지와 청보리밭, 매실 농장 등이 인기 관광지가 되면서 봄빛이 다양해졌다. 수선화의 아름다움도 재발견됐다. 특히 서산 유기방가옥(충남민속문화재 23호)은 고즈넉한 한옥과 노란 수선화를 가득 심은 언덕이 그림처럼 어우러진다.
영롱한 빛깔과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수선화
수선화의 영어 이름은 나르시서스(narcissus)다. 자연스레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미소년 나르키소스가 떠오른다. 호수에 비친 자신과 사랑에 빠져 목숨을 잃은 나르키소스가 꽃으로 피어난 것이 바로 수선화다. 수많은 요정의 마음을 흔든 소년을 닮아 수선화는 영롱한 빛깔과 우아한 자태를 뽐낸다. 언뜻 이국의 꽃으로 느껴지지만, 옛 선비들의 문인화에서도 수선화를 흔히 만난다. 추사 김정희는 제주 유배 시절 수선화를 보고 단번에 매혹됐다. 그는 《완당집》에 “수선화는 과연 천하의 큰 구경거리”라며 “그 꽃이 정월 그믐부터 2월 초에 피어 3월에 이르면 산과 들, 밭둑 사이가 마치 흰 구름이 질펀하게 깔린 듯하다”라고 적었다. 수선화를 묘사한 시와 그림도 남겼다.
언덕과 산자락을 따라 펼쳐진 꽃밭에 놓인 의자가 포토 존
3월 중순에서 4월 중순까지 만개한 꽃을 감상할 수 있다. 이 무렵 유기방가옥 뒷동산은 추사의 표현을 빌리면 샛노란 구름이 질펀하게 깔린 듯하다. 산등성이엔 울창한 솔숲이 이어져 수선화의 노란빛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진다. 고택 바로 뒤 언덕과 산자락을 따라 드넓게 펼쳐진 꽃밭에 놓인 의자가 포토 존으로 인기다.
여미헌(餘美軒)이라는 현판이  
수선화 언덕에서 나르키소스 못지않은 인생 사진을 건졌다면, 유기방가옥도 찬찬히 둘러보자. 1900년대 초에 지은 고택은 서산 지역 전통 양반 가옥의 배치를 그대로 따른다. 누각형 대문에 여미헌(餘美軒)이라는 현판이 걸렸는데, 이 지역이 운산면 여미리에 속한다. 안으로 들어서면 부엌과 방, 대청, 건넌방으로 이어지는 ‘一 자형’ 안채가 양반가다운 규모를 드러낸다. 예전에 안채 앞으로 중문채가 있었다는데, 지금은 헐어낸 상태다.
수선화의 동양적인 매력을 더하는 토담
대청에 앉으면 후원에 만발한 수선화가 한 폭의 그림 같다. 안채 왼쪽에 행랑채, 오른쪽에 사랑채가 있어 전체적으로 마당을 가운데 둔 ‘ㅁ 자형’이다. 덕분에 크기가 상당한 가옥인데도 아늑한 인상이다. 꽃밭과 고택을 구분 짓는 ‘U 자형’ 토담도 수선화의 동양적인 매력을 더한다.
대청에서 쉬는 여행자들
유기방가옥은 2018년에 방영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촬영지로도 알려졌다. 고종의 최측근인 궁내부 대신 이정문의 집으로 등장했는데, 꼿꼿하고 거침없는 집주인의 성격을 고스란히 담아낸 공간으로 눈길을 끌었다. 현재 한옥 체험을 운영해, 전화로 예약하면 안채와 사랑채 등에서 숙박이 가능하다.
수령 350년에 가까운 비자나무,
고택에서 나와 오른쪽 언덕으로 올라가면 수령 350년에 가까운 비자나무가 있다. 기록에 따르면 1675년 제주도에서 가져와 심은 나무라고 한다. 지금도 왕성한 생명력을 뽐내듯 잎마다 윤기가 흐른다. 높이 20m에 둘레도 240cm가 넘는다. 제주에서 군락을 이루는 비자나무는 전라도 백양산과 내장산에서 자생하는 게 전부다. 중부지방 이북에서 이처럼 장수하는 고목이 흔치 않아, 산림학적 가치도 매우 높다.
10년 넘게 방치된 정미소를 리모델링한 여미갤러리&카페
유기방가옥이 자리한 여미리엔 고려 시대 석불과 수령 250년을 자랑하는 느티나무 등 걸음마다 볼거리가 풍성하다. 최근 예술가들이 하나둘 자리 잡으며 ‘달빛예촌’이란 이름으로 활기를 불어넣는데, 그 중심에 여미갤러리가 있다. 10년 넘게 방치된 정미소를 리모델링한 이곳은 다양한 기획전은 물론, 마을 사람과 예술가들이 어우러지는 마을 예술제도 운영한다. 여행자에겐 잠시 걸음을 쉬었다 갈 수 있는 카페를 겸한다.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책장에 각종 디자인 관련 전문 서적이 빼곡해 북카페로도 손색없다.
내포 지역의 중심지였던 해미읍성
서산을 대표하는 여행지 해미읍성과 개심사가 유기방가옥에서 자동차로 20분 내외 거리다. 지난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해 화제를 모은 서산 해미읍성(사적 116호)은 천주교 성지로 이름이 높다.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를 거치며 천주교도 수천 명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당시 해미고을은 서산과 당진, 홍성과 예산을 아우르는 내포 지역의 중심지로, 현감에게 군사력과 독자적인 처형권이 있었기 때문이다.
천주교도를 매달아 고문했다는 회화나무
이토록 비극적인 사연을 품었으나, 봄날의 해미읍성은 평화롭기만 하다. 드넓은 잔디밭이 연둣빛을 띨 무렵이면 벚꽃도 흐드러지게 핀다. 복원한 옥사와 천주교도를 매달아 고문했다는 회화나무(충남기념물 172호) 한 그루가 목숨과 맞바꾼 신념을 기억할 뿐이다.
벚꽃이 아름다운 개심사의 봄 <사진제공:서산시청>
백제 시대 사찰로 알려진 개심사는 푸른빛을 띠는 청벚꽃으로 유명하다. 산속 깊숙이 자리해 평지보다 한참 늦은 4월 하순에나 벚꽃이 만발한다. 꽃송이가 탐스러운 겹벚꽃도 함께 피어 봄의 절정을 알린다. 오붓한 산길을 조금 걸어 올라가면 돌계단이 나오는데, 하나하나 가지런한 모양새가 꽤 정성을 들인 느낌이다. 수백 개나 되는 돌계단이 산세를 따라 ‘之 자형’으로 놓여 그 끝을 짐작할 수 없다. 그저 묵묵히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다 보면 선물처럼 개심사가 눈앞에 나타난다. 누군가의 마음을 얻는 것도 이와 같지 않을까. 개심사(開心寺)로 오르는 길은 그 이름처럼 마음을 여는 과정이다.
개심사(開心寺)
보물 제 143호인 대웅보전을 안고 있는 개심사.
넓직한 주차장에 차를 세운 후 상점사이를 비집고 나와 일주문 앞에 섰다.
"상왕산 개심사"... 바로 전에 들렀던 "문수사"도 상왕산이었는데....
가야산 한 줄기가 내려와 상왕산이라는 이름 안에 개심사, 일주문,
일주문에서 약 10여분을 올라가면 개심사가 나온다.
거리상으로는 300m쯤? 100m는 찻길이고, 200m는 계단이다.
개심사는 입구
절 앞마당에 있는 직사각형 연못...
조금 더 있으면 연못가로 길게 드리운 왕벚꽃나무에서 하얀꽃잎들이 연못으로 떨어지는 장관을 볼수 있을게다.
수령이 짐작이 되지 않는 배롱나무의 화려한 꽃들도 볼만할텐데...
범종각
개심사를 둘러보는데 다른 여느 사찰에서 보지 못한 문구가 눈에 많이 들어왔다.
"그대 발길을 돌리는 곳입니다." 일반 사찰에서는 "출입금지", "내방객 출입을 금합니다."라는 단호한 글귀가 보였는데 이곳은 시적인 글귀가 써져있어 그저 조용히 고개를 돌리게 된다.
범종각 뒷건물은 "안양루"라는 건물이다.
"象王山 開心寺" 현판은 근대의 명필 해강 "김규진"씨가 예서체로 쓴 것이다. 
 안양루 옆의 "해탈문"으로 경내 입장~     
 개심사 강당으로 사용되고 있는 안양루는 다른 개심사의 전각들처럼 옛스럽다.
불룩하게 튀어나와 자연스러움을 주는 대들보도 개심사답다.
안양루에서 사찰 건물을 쳐다볼때 정면에 대웅전이, 왼쪽으로는 심검당, 오른쪽에는 무량수각이 자리잡고 있다.
 개심사 경내는 작고 소박하지만 있을건 다 있다. 운치도 있고....
개심사 심검당
현재 개심사 종무소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로 조선초기 요사채 모습을 보여주는 귀중한 건축물이면서 개심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요사채 문짝없는 대문
​심검당의 건립연대는 전해지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조선 성종실록에 개심사의 건물이 1475년(성종6)에 화재로 불타 없어진 것을 1484년(성종 15)에 중창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심검당도 이 때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 후기에 다시 중창되었다.     
특히 휘어진 나무를 그대로 살려 부재를 삼은 이 건물의 대담함과 천연스러움에 감탄하게 된다.
​심검당의 부엌쪽인 종무소 현판이 있는 부분은 후대에 이어지은 것이고 원래 건물은 맨 오른쪽부터 3칸이다.
 원래의 크기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이나 지금의 "ㄱ"자형의 방을 이어지게 늘려지어 상당히 큰 요사로 남아있다. 구조는 기단석위에 자연석의 주춧돌을 놓고 배흘림이 가미된 둥근 기둥을 세웠으며 기둥 윗부분에 공포를 짜올려 지붕의 무게를 모두 기둥에 받도록 한 주심포 양식이다. 
​지붕의 뒷부분에 홑처마, 앞은 겹처마의 맞배지붕 집이다.
평지의 사원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평탄하고 안정되어 산속의 다른 건축물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단청을 하지 않아 깊은 맛이 오히려 좋다.
개심사 오층석탑에 대하여는 별다른 설명이 되어있지 않다.
 ​개심사 대웅보전(보물 제143호)
개심사 사적기에 의하면 신라 진덕여왕 5년, 백제 의자왕 14년에 혜감국사가 창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진덕여왕 5년은 651년에 해당하고 의자왕 14년은 654년에 해당하는데 어느 것이 맞는가는 확인할 수 없다.  
1941년 대웅전 수리공사 때 발견된 묵서명에 의하면 1484년(성종15)에 다시 세웠음을 알 수 있다.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모셔놓은 건물로 네모반듯한 평면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을 이룬 단순한 직사각형 평면이다. 맞배지붕의 다포계 형식을 갖추고 있으나 내부는 주심포계 형식의 특징인 결구 모습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모셔놓은 건물로 네모반듯한 평면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을 이룬 단순한 직사각형 평면이다. 맞배지붕의 다포계 형식을 갖추고 있으나 내부는 주심포계 형식의 특징인 결구 모습이 그대로 보이는 연등천장을 하고 있어 일종의 절충 형식을 띠고 있다. 조선시대 초기 다포계 목조건물로서 귀중한 자료이다.   
무량수각 대부,
​안으로 들어서면 높은 불단 위에 다시 연꽃 조각 대좌를 두고 아미타불이 앉아있다.
양 옆으 보살들은 지장과 관음보살입상이다. 군더더기 없는 얼굴모양, 정연한 조각 등이 고려말과 조선 초기의 긴장감을 보여주고 있다.     
삼존불 뒷벽면은 예전에는 화려하면서도 아름다운 탱화가 걸려있었는데 전문 도둑이 하룻밤 사이에 칼로 도려내가서 옛것을 본떠 새로 걸었다고 한다.
무량수각
사찰부엌,
사찰 부엌 천정,
다양한 각도에서 본 경내 풍경
전각이 많지 않은 개심사이지만 짜임새 있는 배치로 답답하지도 왜소해 보이지도 않는다.
대웅전, 오층석탑,,
대웅전 앞 전경,
대웅전 앞 전경,
새로지은 요사채,
심검당 뒷 모습,
요사채
개심사, 팔상전.
개심사 명부전,
명부전은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염라대와 등 10대왕을 봉안한 절의 전각이다. 
원래는 대웅전 다음으로 중요시되던 건물이었다. 자연석을 다듬어 기단을 만들었으며 위에 다듬지 않은 주춧돌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워 정면 3칸, 측면 3칸의 평면으로 건립되었다. 
맞배지붕이며 측면에 비바람을 막기 위한 널판지가 있는 조선초기의 건물이다.
내부바닥은 우물마루를 깔고 그 뒷면으로 불단을 조성하여 철로 만든 지장보살과 10대왕을 안치하였는데 기도의 효과가 크다고 하여 참배객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출입문 좌우에는 사람과 같은 크기의 사자상을 세워두었다.   
​ 명부전
명부전 앞마당에는 큰 청벚꽃나무가 있다. 
청벗은 다른 곳에서는 살지 못하고 이곳에서만 살수 있다고 한다.
스님들 숙소같은듯, 담벼락이 정겹다, (요사채)
요사채대문,
이정표대로 걷다보면 보원사지가 나오고 마애여래삼존불이 나온다.
개심사 산신각
개심사 산신각
개심사 산신각 대부모습,
전각들이 있는 곳, 한층 아래 수풀로 우거진 창고(?)와 감로수가 나오는 약수터가 있다.
절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
민가인듯,,,
추측컨대 절 아래 민가가 있었을거 같다.
민가 인듯..
사찰주위에 오래묵은 집, (민가)
개심사 텃밭,
내려갈때는 왔던길로 내려가지 않고 차가 다니는 아스팔트길로.,,
알고보니 주차장에서 이길로 차를 타고 올수 있었다.
그런데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후 소나무 오솔길을 걷는 것도 힐링이 될듯싶다. 
개심사 소나무 오솔길
사찰입구, 논이 주차장???
​벚꽃 만발한 완연한 봄날에 다시 한번 올 수 있을까?
"맞배지붕에 다포계 건물이라는 점이 특징이라 한다. 개심사는 입구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입산하는 것처럼 나그네의 발길을 끌었다. 구불거리는 돌계단을 숨차게 올라왔다. 開心寺는 마음을 열라는 사찰이다. 그러니 입구에서부터 천천히 마음의 문을 열면서 두루두루 살폈어야했다. 길옆으론 무엇이 있었는지, 어떤 사람들이 찾아왔는지, 무엇을 보러 왔는지 살피는 것도 사찰을 찾는 의미. 자연스런 모습으로 봄이라고 꽃이 지니 새롭게 올라온 야들한 나무이파리들의 모습도,,. 이것이 개심사로 향하는 멋스럼이지 싶었다.         
예로부터 산사는 높은 산에 있었다. 그것이 동기가 되어 우리나라 산사가 유네스코에 등재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산사의 나라다.’ 라고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는다고. 유홍준 문화유산답사기에 나와 있다. 다 아는 이야기를 새삼스럽게 들춰내는 데는 돌계단과 비탈길을 오르며 힘들다 투덜거렸기 때문이다. 생각없이 목표에만 신경을 썼으니 어찌 힘들지 않았을까? 두루두루 살폈더라면 어느 사이에 다 왔구나! 했을 것이다. 삐져나온 바위에 걸터앉아 무릎 보호대를 묶을 때까지는 오르락내리락 하는 사람의 물결에 휩쓸리곤 했다. 어디서부터 투정을 부렸을까. 아마도 내가 나를 놓아버렸을 때였다. 개심사 가는 길이 별로 힘들지 않았고 멀지도 않았는데, 마음에서 산사가 멀어져갔을 때였다. 뭘 보러 여길 왔지? 사람구경일까. 어디가나 이때면 사람의 물결로 골치 아프니까. 그 순간 나는 개심사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고얀이 입산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구부러진 고목사이로 보이는 벚꽃이파리들이 엷은 바람결에 날렸다. 개심사의 왕벚꽃이 피면 장관이란 말을 들었다. 아직은 봉오리를 열지 않았다.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그 옆에 앵두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누군가 잽싸게 옆에서면서 폰을 내어준다. 맛배지붕의 기와 골을 타고 내린 햇살도 곱다. 어쩜 검은 톤과 흰 꽃다발의 어울림이었다. 가지를 타고 주르륵 매달린 꽃들이 귀여운 동물의 긴 꼬리가 되어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다. 이런 것이 자연이 주는 산사의 멋인가 보다. 우리만의 독특한 자연환경이 낳은 불교 유산일 게다. 가야산 한 줄기가 내려와 상왕산이라는 이름 안에 개심사는 들어앉았다.
佛자도 모르는 어리석은 중생이지만 사찰에 들면 나는 스님이 만나고 싶어진다. 장삼을 입고 가사를 두른 스님을 보면 장삼자락에 불심의 도가 날릴 것 같고, 합장한 두 손 모음에 깊은 신심을 불러 모으는 듯해서 다시 한 번 그윽하게 바라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눈빛을 마주 볼 수 있으면 좋지만 그건 너무 과한 욕심일 게다. 말 한마디라도 건네고 싶어 꾸벅 인사를 드리면서 살짝 올려다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꿈일 뿐이다. 스님의 그림자도 못 봤다. 일장춘몽이다.
대웅보전을 한 바퀴 돌아 열린 문으로 어쩌다 법당에서 스님의 불경소리를 들으면 참으로 신비스럽다. 역시 스님이 이 사찰의 주인인 것처럼 존경스럽다. 불교신자는 아니어도 자연스럽게 고갤 숙여 불경소리에 묵념을 하기도 했다. 그저 지나가는 나그네가 들렸을 때 마음을 울리는 것은 감사한 일임을 표현했다. 내일을 맞기 위한 진정한 기쁨은 오늘을 즐기는 일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임을 강론 시간에 들은 적이 있다. 결과보다는 과정을 즐기며 사는 일이 내일의 기쁨을 맞는 일이라고. 개심사가 내 나름의 판단으로 착각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건 이 사찰을 오기 위해 준비하며 기다린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그 시간만큼의 즐김으로 만족하는 것도 오늘을 사는 보람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돌계단을 내려올 수 있지 싶어서 였다.
계절이 좋아서 일까?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당우는 많지 않았다. 대웅보전 양옆으로 왼쪽에 무량수전, 오른쪽엔 심검당과 이어진 건물로 종무소가 있다. 그리고 대웅보전과 마주한 안양루가 마당을 가운데 두고 배치되어 있다. 햇살이 따사롭게 내려와 앉아있다. 눈이 부셨다. 안양루 앞에 벤치에 앉아 둘러보았다. 희안하게도 종무소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얕게 내려앉은 것 같은 추녀와 굽은 나무기둥이 별스럽게 건물을 지탱하고 있다. 하나 같이 구부러져 있는데도 제 구실을 하고 있는 버팀이 의아스러웠다. 나뭇결을 그대로 지고 한 공간을 형성하고 있는 건축물 종무소는 그래서 더욱 돋보였다. 반듯했다면 그냥 스쳐갈 것인데 눈에 띄는 나무기둥들이 발길을 잡았다. 선산 굽은 나무가 대들보가 되었다.
커다란 가마솥과 아궁이가 입을 딱 벌리고 있다. 우리들의 유년시절의 모습과 엄마의 얼굴 언니들이 드나들던 문지방도 이색적이었다. 전에 부엌 문지방이 높았다. 한 옆으로 나뭇간이 있어서 먼지난다. 아무리 비질을 해도 통풍이 잘되도록 만든 한옥의 문들은 바람이 들어왔다. 그래서 항상 뒤곁의 문을 닫았던 언니의 눈길이 보였다. 산사의 부엌 바닥은 세멘트로 매끄러웠다. 우리집 바닥은 흙바닥이였으므로 들고나는 신발이 물고온 흙들로 조개무덤을 만들었다. 디딜적마다 발바닥이 지압이 되었던 그날이 보였다. 그래도 그날은 부엌에서 열무김치와 고추장 넣어 비벼먹었던 커다란 양푼도 보였다. 지난 추억은 행복했었다.
개심사에서 수인이란 뜻도 모르고 지나칠 뻔했다. 마당으로 내려서는데 중학생이 숙제라면서 내게 물었다. 그 학생은 내가 불도인 줄 알았던 모양이다. 학생이 묻는데 그냥 내려간다면 안 될 것 같아서 기와 공양 봉사자에게 물었다. 불상마다 그 모습이 다르다면서 석가모니 부처님부터 자신이 알고 있는 부처의 수인 형태와 그에 상응하는 것을 대강 알려주었다. 수인은 부처님 손의 모양을 말한다. 수인 형태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불상 종류에 의한 수인은 교리적인 뜻을 가지고 표현되었다. 불상의 성격과 명칭을 분명하게 해주는 역할이라고 한다.
항마촉지인은 부처가 깨달음에 이르는 순간을 상징하는 것이란다. 개심사의 대웅보전엔 아미타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수인형태는 전법륜인은 최초로 설법할 때의 수인이라 한다. 그리고 오른손은 무릎 위에 얹고 손가락 끝은 가볍게 땅을 가리키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해 배꼽 앞에 놓는다. 이런 모양을 한 부처는 본존불로 항마촉지인의 형태라는 것이다. 봐야 이해가 된다. 여하튼 학생 덕분에 개심사에서 하나 건져가지고 내려오게 되었다. 나도 선산의 굽은 나무 몫을 한 기분이 좋았다.                 
개심사 심검당과 오층석탑"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신창리. 정면에 있는 건물은 조선시대 때의 것으로 충남문화재자료 제358호로 지정되었다.
● 여행 정보
○ 관련 웹 사이트 주소
 - 유기방가옥 http://서산유기방가옥.gajagaja.co.kr
 - 서산문화관광 www.seosan.go.kr/tour/index.do

○ 문의 전화
 - 유기방가옥 041)663-4326
 - 서산시청 관광과 041)660-2499
 - 여미갤러리&카페 041)667-7344
 - 해미읍성 041)661-8005
 - 개심사 041)688-2256
유의사항
※ 위 정보는 2020년 2월에 작성된 정보로, 이후 변경될 수 있으니 여행 하시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참조항목
역참조항목
카테고리
출처 ^ 참고문헌,
[네이버 지식백과]개심사[開心寺] (두산백과)
[doopedia.co.kr
[네이버 지식백과]개심사(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2010. 1. 15., 최정규, 박성원, 정민용, 박정현)
#대한민국구석구석 #추천가볼만한곳 #3월추천가볼만한곳 #색깔있는미리봄 #서산여행 #서산가볼만한곳 #유기방가옥 #수선화 #개심사 #청벚꽃나무 #항마촉지인 #부처 #석가모니부처님 #부처님 손의 모양 #불상 종류 #수인은 교리적인 뜻 #불상의 성격과 명칭 #대웅보전 #아미타삼존불 #봉안 #수인형태 #전법륜인 #최초 설법 #가마솥 #아궁이 #대웅보전 #무량수전 #심검당 #종무소 #佛자 #중생 #사찰 #장삼 #가사 #스님 #장삼자락 #불심의 도 #합장 #산사의 부엌 #공양 #해미읍성 #당우 #대웅보전 #무량수전 #심검당 #종무소 #대웅보전 #안양루 #문화유산 #불심의 도 #맞배지붕 #다포계 건물 #開心寺는 마음을 열라는 사찰 #보원사지 #마애여래삼존불 #청벚꽃나무 #불단 #조성 #지장보살 #10대왕을 안치 #기도의 효과 #참배객 #전각 #감로수 #약수터 #보원사지 #탱화 #보살들 #지장 #관음보살입상 #고려말 #조선 초기 #연꽃 조각 대좌 #아미타불 #석가모니불 #주심포계 형식 #특징인 결구 모습 #연등천장 #일종의 절충 형식 #조선시대 초기 다포계 #목조건물 #귀중한 자료 #묵서명 #개심사 대웅보전(보물 제143호) #사적기 #백제 의자왕 14년에 혜감국사 #창건 기록 #진덕여왕 5년은 651년 #의자왕 14년은 654년 #여미헌(餘美軒

폭포(瀑布),

폭포(瀑布),

이단폭포/ 비봉폭포/ 미인폭포 (삼척) [美人瀑布]/ 한국의 흰수염폭포/ 포천비둘기낭폭포/ 재인폭포/ 속리산 문장대 오송폭포/ 천일폭포/ 강원철원 삼부연폭포/ 강원철원 직탕폭포/ 은류폭포/ 청도 구만폭포(통수골폭포)/ 해운대 양문폭포/  천제연폭포/ 풍기 단양 희방폭포/ 서귀포엉똥폭포/ 원앙폭포,,,,,

철원 삼부연폭포,

나이아가라 폭포 한국: 비가 와야되는 폭포, ㅎㅎ
폭포는 곧은 절벽(絶壁)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規定)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向)하여 떨어진다는 의미(意味)도 없이 계절(季節)과 주야(晝夜)를 가리지 않고
고매(高邁)한 정신(精神)처럼 쉴사이없이 떨어진다.
금잔화(金盞花)도 인가(人家)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瀑布)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醉)할 순간(瞬間)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懶惰)와 안정(安定)을 뒤집어 놓은 듯이
높이도 폭(幅)도 없이 떨어진다.
"지은이 : 김수영(金洙暎)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주지시
율격 : 내재율('떨어진다'의 반복에 의한 운율 형성 / 서술형 어미에 의한 산문의 리듬)
성격 : 주지적[사물의 존재 의미를 지적으로 탐색], 관념적, 상징적, 참여적, 산문적, 직설적
심상 : 역동적 심상. 청각적 심상
어조 : 힘차고 격정적인 어조 / 강인하고 의지적인 어조
구성 :
1연 : (도입 - 기) 폭포의 사나운 낙하 기세- 폭포의 모습
2연 : (첨가 - 승) 폭포의 쉬임 없는 낙하 운동 - 폭포의 정신
3, 4연 : (전환 - 전) 폭포의 요란한 굉음과 그 의미 - 폭포의 소리
5연 : (정리 - 결) 폭포의 낙하 기세와 굉음의 의미에 대한 도취 - 폭포의 정신
제재 : 폭포, 현실의 부정적 모순과 인간의 나태한 심성
주제 : 부정적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의지적 삶의 추구. 부정적 사회 현실과 일상적 삶의 나태성에 대한 자각, 부정적 현실에 저항하는 선구자적인 삶에 대한 의지
특징 : 4·19 이후에 쓰여진 시로 동일한 시어, 시구를 반복하면서 운율을 형성하고 의미를 강화하고 있으며, 폭포의 속성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자유를 추구하는 실천적인 삶을 형상화했고, 정신적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출전 : <달나라의 장난>(1959년)
폭포[시인의 현실 의식이 투영된 존재 / 시적 화자가 지향하는 삶의 태도 / 시인이 가치 있게 여기는 관념적, 추상적 의미가 투영된 폭포로 부정적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깨어 있었던 선구자적 인물의 비유 / 고매한 정신 / ‘곧은 소리’를 상징]는 곧은[폭포의 외적 모습] 절벽(絶壁)[깎아지른 듯 곧추 선 절벽]을 무서운 기색[어떤 사물이나 행동이 두려워 망설이고 주저하는 낌새 / 부정적 현실에 대한 두려움도 없이]도 없이 떨어진다.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 거침없이 떨어지는 폭포의 힘찬 외형적 모습을 단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곧은 절벽을 세차게 떨어져 내리는 폭포를 마주한 시적 자아의 경탄이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란 수식어구 속에 드러나 있다. 여기에서 ‘폭포’는 실제의 폭포가 아니라 시적 화자의 의식이 반영된 것으로 억압적인 현실에 아무런 두려움이 없는 비판과 저항의 ‘폭포’의 정신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이 경탄은 감정의 직접적 분출을 통해 영탄적으로 드러난 것이 아니고 지성(知性)의 여과를 통해 정리되어 나타나고 있다] -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지는 폭포의 외형적 모습
규정(規定)할 수 없는 물결이[폭포의 물결 – 자유의 이미지 / 무엇이라고 정확하게 이름지어 부를 수 없는 물결이. 세차게 떨어지는 폭포의 물줄기에 대한 경탄과 감격이 ‘규정할 수 없는’이란 수식어구로 정리되어 있다. 이는 한 가지 이름으로 정의할 수 있는 움직임이라면 그것은 바로 이 시인이 평생 추구한 ‘자유’ 그 자체다. 바로 자유를 마주한 순간의 경탄의 감정이 ‘규정할 수 없는’이란 수식어구에 의해 지적으로 통제되어 표현된 것이다. / ‘높이도 폭(幅)도 없이’와 대응]
무엇을[현실적, 세속적 가치나 목적] 향(向)하여 떨어진다는 의미(意味)도 없이[폭포의 낙하는 본디 그 자체로는 어떤 의미도 띠지 않고 있는 사물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 자연스러운 사물의 움직임에서도 인간의 자유를 향한 고매한 정신은 현실적 이념이나 그것에의 집착과 같은 특정의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말 그대로 자유를 지향한다는 인간적인 뜻을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계절(季節)과 주야(晝夜)[사계절과 밤낮의 순환]를 가리지 않고[일관되고 지속적인 폭포의 속성]
고매(高邁)한[(인품, 학식, 재질 등이) 높고 뛰어난] 정신(精神)[여기서 고매한 정신은 부정적 현실에 저항하는 태도 / 높고 훌륭한 폭포의 속성]처럼 쉴사이없이 떨어진다.[ ‘고매한 정신’은 바로 일체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하는 인간의 정신적 지향을 가리킨다. 또한 작자는 이런 정신적 지향이 폭포의 낙하처럼 잠시도 쉴사이없이 우리 현실 세계 속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 쉴 사이 없이 떨어지는 폭포의 내적 속성
금잔화(金盞花)[아름다움, 희망]도 인가(人家)도[‘금잔화’와 ‘인가’는 사람들끼리 유대 관계를 맺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삶을 의미 / 인간적 삶의 조건] 보이지 않는 밤[‘금잔화’와 ‘인가’와 같은 가치들이 존재하지 않은 왜곡된 현실, 의롭지 못한 현실, 독재 정권하에 숨을 죽이고 있는 당시 현실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상징한 것 / 부정적 현실]이 되면[집 앞 뜰에 피어 있는 아름다운 금잔화도, 사람이 사는 따뜻한 집도 보이지 않는 암흑의 세계가 되면. 폭포의 물줄기가 낙하는 세찬 기세의 요란스러운 소리가 어떤 감격으로 시인에게 감지되고 있는 이유를 상징적으로 암시하는 부분이다.
시인에게 폭포의 운동과 굉음이 감격으로 마주서는 이유는 바로 ‘밤’이기 때문이다. 밤은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이란 수식어구가 암시하는 것처럼, 황폐한 정신에 휴식을 주는 아름다움 혹은 예술적 감동도 인간끼리의 따뜻한 유대도 존재하지 않는 암흑적 현실을 가리킨다. / 정희성 시 ‘얼은 강을 건너며’ [겨울, 얼음(얼은 강) : 차갑고 암울한 시대 현실]]
폭포(瀑布)는 곧은 소리[정의롭고 진실된 양심의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곧은 소리’는 ‘밤’과 대조되는 청각적 이미지이다. 모든 것을 왜곡시키고 있는 현실(밤)을 깨뜨려야 한다는 바른 소리(곧은 소리)를 시인은 폭포의 요란스러운 낙하음속에서 듣는 것이다. 이 ‘곧은 소리’는 보다 바른 현실을 있게 하기 위한 예언적 지성의 선구적 외침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 정희성 시 ‘얼은 강을 건너며’ [깰수록 청청한 소리가 난다 : 세상의 불의를 바로 잡아가고자 하는 의지적 노력 행위]
곧은[폭포의 내적 속성으로 비판과 저항의 외침, 양심의 소리] 소리는 곧은 소리[정의를 외치는 양심의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곧은 소리로써 다른 사람들을 각성시키는 폭포의 선구자적 정신 / 바른 소리만이 정말 필요한 소리이기 때문에, 바른 소리는 다른 소리를 불러 낼 수 있다. 진정한 자유가 향유될 수 있는 보다 바른 현실을 이끌어 내야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요청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어떤 선구적 지성의 진실이 왜곡된 현실을 질타하는 ‘곧은 소리’는 다시 ‘곧은 소리’를 불러내어 바른 현실을 만들기 위한 ‘곧은 소리’가 메아리처럼 반향을 일으키며 함성을 이루게 될 것이란 암시적 뜻을 폭포의 세찬 굉음에 비겨 나타냈다.] - 4연 : 통사적 구조에 있어 다른 부분과 뚜렷이 구별되는 연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현실에 안주하는 속성을 전복시키듯 힘차게 떨어지는 폭포의 물 / 다른 연에서 ‘떨어지다’를 수식하는 어구들이 이 시를 통해 시인이 독자들에게 요구하는 어떤 행동 양식을 암시하는 데 비해, 여기서의 ‘번개와 같이’는 폭포의 낙하를 직접 묘사하기 위한 감각적 비유로 보아도 좋을 듯함]
취(醉)할 순간(瞬間)[(폭포의 낙하가 이루는 놀라운 광경에) 도취하여 감격할 시간적 여유]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둘째 연이 ‘쉴사이없이’와 이미지상의 호응을 보인다. 폭포가 ‘쉴사이없이’ 떨어지므로 노래하는 나 역시 그것에 ‘취할 순간’이 없는 것이다.]
나타(懶惰)[게으르고 느림]와 안정(安定)[부정적 현실에 안주하는 게으르고 무사안일(無事安逸)한 소시민적 속성을 표현 / 김광규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에 나오는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을 뒤집어 놓은 듯이[부정적 현실에 안주하고 타협하는 소시민적 삶에 대한 부정과 각성 촉구]
높이도 폭(幅)도 없이[부정적 현실에 저항하는 삶에 대한 의지]
떨어진다.[폭포의 절대적 자유로움을 드러내기 위한 표현][나타와 ~ 떨어진다 : 전체적으로 폭포를 바라보는 시인의 현기증이나 도취감이 가장 잘 드러난 부분이다. ① 첫행의 ‘나타와 안정’은 현실에 머물러 있으려는 습관적 무사안일의 평온을 뜻하는 것으로 시인의 눈에 깨뜨려 버려야 할 부정적 태도와 현실이다.
② ‘뒤집어 놓은 듯이’에서 완료형의 시제(時制)가 쓰인 점에는 유의해야 한다. 이 구절의 뜻은 ‘뒤집어 놓은 듯이’의 미래형으로 표현되었을 때와 대조시킴으로써 잘 이해될 수 있다. 미래형이 가능성에 대한 예감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완료형은 이미 진행되고 있는 상태를 표현하는 데에 효과적이다. 시인이 폭포의 기세와 굉음에서, ‘나타’에서 깨어나 부정적 현실을 혁신하는 소리와 움직임을 보고 듣는 것이다.
③ 둘째 행의 진술은 매우 반어적이다. 물줄기의 폭과 낙하의 높이를 지니지 않은 폭포란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미 시인에게 이 폭포는 현실의 사물성을 떠나 까마득한 절대의 높이에서 음량의 폭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떨어지는 정신의 충격일 뿐인 것이다. 그래서 시적 화자는 떨어지는 폭포의 모습에 자신이 지향하는 정신적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 나타와 안정을 부정하는 폭포의 정신
 이해와 감상
이 시는 '폭포'의 낙하 운동과 굉음(轟音)을 소재로 하여 인간의 정신이 지향해야 할 어떤 절대의 상태를 형상화하고 있다. 이 시에서 폭포는 '무서운 기색도 없이' 높은 절벽에서 떨어져 내려 스스로를 부정함으로써 '곧은 소리'를 빚어낸다. 그리고 그것은 어둠을 뚫고 멀리 퍼져 또 다른 '곧은 소리'를 불러낸다. 이처럼 온몸을 내던져 '곧은 소리'를 빚어내는 폭포의 운동은 곧 시대 현실에 맞선 정신과 양심의 운동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양심과 지성의 행위에는 일체의 양보나 타협이 있을 수 없고, 두려움이나 망설임 또한 있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상대적인 가치의 세계가 아니라 절대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 시는 이처럼 어떤 절대적 높이에서 요구되는 양심과 지성의 운동, 즉 절대의 자유를 향해 움직여 가는 양심과 지성의 운동을 상징한다.
이해와 감상1
이 시는 제목 그대로 폭포를 노래한 것이다. 이 시가 여타의 서정시와 사뭇 다른 인상을 주는 까닭은 아마도 폭포의 아름답고 장엄한 광경을 개인적 감정을 통해 표출하기를 거부하고, 물줄기의 낙하(落下)라는 자연 현상에서 무엇인가 정신적 의미 ― 사회 현실에 대한 자각과 현실에 대응할 행동 양식을 찾아내려 고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연에서는 폭포의 힘찬 외형적 모습이 드러난다.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힘차게 떨어지는 폭포를 경탄하고 있다. 물론, 감성적 경탄이 아닌 지성에 의해 여과된 것이다.
2연에서는 강한 주관적 관념이 개입된다. 폭포는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사이없이' 떨어진다. 바로 폭포의 자유 의지이며 타협 없는 양심의 자세요, 굴복이나 무기력함이 없는 폭포의 본질적 모습이 그려져 있다.
3,4연에서 폭포의 구체적 모습이 나타난다.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란 소박한 아름다움도 인간적인 삶의 유대도 없는 암울한 현실을 말한다. 이런 밤이 되면 폭포는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여기서 폭포가 내는 곧은 소리는 그 스스로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곧은 소리― 바르고 강직한 지성의 소리를 부르는 것이다. 폭포의 선구자적 행동성, 이것은 곧 시인 자신의 실천 의지의 표현인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곧기를 요청하는 대목이다.
5연에서 '곧음'에의 요청은 더욱 뚜렷하다. '나타(懶惰)와 안정(安定)을 뒤집어 놓은 듯이'― 현실에의 안주와 무사 안일의 생활을 강렬하게 부정하고 있다. 시인은 폭포를 단순한 구경거리로 보지 않고, 삶의 자세에 대한 준열한 의지의 전형으로 생각하고, 자기 자신을 포함한 사람들의 나타(懶惰)하고 안이(安易)한 타협적 삶을 각성시키는 선구자의 모습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이 시는 단순하고도 힘찬 언어로써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고자 하는 자세를 선명하게 보여 준다. 계절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절벽을 곧게 떨어져 내리는 폭포의 모습, 그것은 바로 타협 없는 양심의 자세이며, 굴종(屈從)이나 무기력을 용납하지 않는 투철한 정신의 기상이다.
 심화 자료
 김수영(金洙暎)
1921∼1968. 시인. 본관은 김해(金海). 서울 출생. 지주였던 아버지 태욱(泰旭)과 어머니 안형순(安亨順)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941년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가서 동경상과대학 전문부에 입학하였다.
1943년 징집을 피해 귀국하여, 1944년 가족과 함께 만주 길림성(吉林省)으로 이주하였다. 그곳에서 교원생활과 연극운동을 하였다. 광복 후 연희전문학교 영문과 4년에 편입하였으나 중퇴하였다.
북한의 남침으로 미처 피난하지 못한 그는 북한군에 징집되었다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되었다. 그뒤 미군통역생활도 하고 평화신문사 문화부차장 등 여러 직장을 전전하였으나, 1956년 이후부터는 시작과 번역에만 전념하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그의 작품활동은 1945년 문예지 ≪예술부락 藝術部落≫에 시 〈묘정(廟庭)의 노래〉를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뒤 김경린(金璟麟)·박인환(朴寅煥)·임호권(林虎權)·양병식(梁炳植) 등과 함께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1949)을 간행하여 모더니스트로 각광을 받았다.
이 때의 시들은 〈공자의 생활난〉(1945)·〈가까이할 수 없는 서적〉(1947)·〈아메리카타임지〉(1947)·〈웃음〉(1948)·〈이〔芒〕〉(1947)·〈토끼〉(1949) 등이 있다.
초기에는 모더니스트의 일반적 경향인 현대문명과 도시생활을 비판적으로 노래했으나, 서구사조를 뒤쫓는 일시적이고 시사적인 유행성에 탐닉하지 않고 새로운 시대의 전진로를 개척하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서구취향의 모더니스트의 자기극복과정을 보여준다.
1950년대 후반부터는 모더니스트들이 지닌 관념적 생경성을 벗어나 격변하는 시대 속에서 겪어야 했던 지적 방황과 번민을 풍자적이며 지적인 언어로 시화하였다. 1959년에 간행된 ≪달나라의 장난≫은 이 시기의 시적 성과를 수록한 첫 개인시집이다.
수록된 대표적 작품들은 〈달나라의 장난〉(1953)·〈헬리콥터〉(1955)·〈병풍〉(1956)·〈눈〉(1957)·〈폭포〉(1957) 등을 꼽을 수 있다. 1950년대의 지적 번민 속에서 성숙해온 그가 본격적인 자신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된 것은 1960년의 4월의거이다.
여기서 그는 평등한 삶을 실현하고자 하는 자유를 위한 혁명에서 시적 열정을 얻는다. 강렬한 현실비판의식과 저항정신에 뿌리박은 시적 탐구는 그로 하여금 1960년대 참여파 시인들의 전위적 구실을 담당하게 했다.
이 때의 대표작품으로 〈푸른 하늘을〉(1960)·〈후란넬저고리〉(1963)·〈강가에서〉(1964)·〈거대(巨大)한 뿌리〉(1964)·〈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1965)·〈엔 카운터지(誌)〉(1966)·〈풀〉(1968)을 들 수 있다.
그는 현실의 억압과 좌절 속에서 일어서고자 하였던 1960년대의 대표적인 시인의 한 사람이며 현실참여의 생경하지 않은 목소리를 보여줌으로써 1970년대는 물론 1980년대까지 강력한 영향을 미친 시인이라 할 수 있다.
1958년 제1회한국시인협회상을 수상했다. 죽은 뒤 출판된 시집으로는 ≪거대한 뿌리≫(1974)·≪달의 행로를 밟을지라도≫(1976)와 산문집 ≪시여, 침을 뱉어라≫(1975)·≪퓨리턴의 초상≫ 등이 있다.
저서 ^ 역서
≪20세기 문학평론≫(柳玲·蘇斗永共著, 1953)·≪카뮈의 사상과 문학≫(金鵬九共譯, 1958)·≪현대문학의 영역≫(Tate,A. 原著, 李相沃共譯, 1962) 등이 있다. ≪참고문헌≫ 金洙暎의 詩世界(白樂晴, 現代文學, 1968.8.), 金洙暎의 詩史的 位置와 業績(金顯承, 創作과 批評, 1968.가을호), 自由와 꿈(김현 해설, 거대한 뿌리, 民音社, 1974), 絶望 후의 소리(黃東奎, 心象, 1974.9.), 藝術家의 良心과 自由(金禹昌, 궁핍한 시대의 詩人, 民音社, 1978)./
천제연폭포
3개의 폭포로 나뉘어 지는데, 주상절리 절벽에서 천제연(못)으로 떨어지는 것이 제1폭포,천제연의 물이 더 아래로 흐르면서 형성된 제2,3폭포,

천제연(못)으로 떨어지는 것이 제1폭포, 주상절리 절벽

주상절리 절벽이 이렇게 멋진 곳을 이제서야 와보고 ,,,,



 2단과 3단 폭포 사이에는 선임교라는 아치형의 다리가 있는데, 옥황상제를 모시던 칠선녀가 옥피리를 불며 내려와 노닐다 올라갔다고 하는 전설이 있어 칠선녀다리로도 불린데요, 천제연이라는 이름도 칠선녀가 모시던 '하나님'의 몫에서 유래됐다고,,,-^0^-
출처 ^ 첨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폭포(瀑布) #한국폭포 #천제연 #천제연(못) #전설이 있어 #칠선녀다리 #주상절리 절벽 #시인 #1단 2단 3단 폭포 #서구사조#칠선녀다리 #낙하 운동 #굉음(轟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