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 1일 금요일

전쟁, [War, 戰爭]

전쟁, [War, 戰爭]

국가와 국가 사이의 무력에 의한 싸움. 인간사회에 발생하는 다양한 폭력적 충돌 속에서 전쟁을 구별하는 경우 적어도 당사자의 일방은 국가이며 전투가 조직적이고 지속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둘 이상의 서로 대립하는 국가 또는 이에 준하는 집단 간에 군사력을 비롯한 각종 수단을 사용해서 상대의 의지를 강제하려고 하는 행위 또는 그 상태. 또한 자국의 의사를 상대국에 강요하기 위하여 국가 간 또는 이에 준하는 집단간에 수행되는 조직적인 투쟁. 정치용어

외국어 표기
Krieg(독일어)
국가와 국가 사이의 무력에 의한 싸움. 인간사회에 발생하는 다양한 폭력적 충돌 속에서 전쟁을 구별하는 경우 적어도 당사자의 일방은 국가이며 전투가 조직적이고 지속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즉, 전쟁의 주체는 기본적으로는 국가이며, 전쟁의 특수한 형태인 내전도 정권 탈취를 노리는 여러 집단이 서로 경쟁하면서 공권력과 대치하는 이상 국가는 역시 전투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전쟁이란 국가의, 국가에 의한, 국가를 위한 무력 대립을 특징으로 하는 폭력의 발현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전쟁의 규모는 근대국가의 형성과 발전과 함께 확대되어 왔다. 근대 초기의 ‘유럽 대전’이라고도 칭해지는 30년 전쟁(1618~1648)은 신교ㆍ구교의 대립과 함께 유럽 사회를 근본부터 흔들었으며, 종교적 권위의 질서유지 기능의 파탄을 명확히 하였기 때문에 그 강화조약인 웨스트팔리아(베스트팔렌)조약은 연방국가에 최고의 권력으로서 주권을 인정한 근대 주권국가중심 시스템(Staatensystem) 즉, 서유럽국가체계를 낳게 되었다.

국가는 결국 내외에 대한 폭력장치를 독점한다는 점에서 모든 다른 사회조직과 구별되는 주체가 되며 ‘국가가 전쟁에서 탄생되었다고 해도 이번에는 역으로 국가가 전쟁을 낳는다’(R. 카유아 ; Roger Caillois)는 관계 속에서 근대는 시작된다.

전(前) 근대에는 용병이 다용되었지만 근대국가는 상비군과 그것을 징세에 의해 재정 관리하는 관료제를 탑재하고 또한 대포의 성능 개선이나 실전 배치 등 파괴력의 확대를 계통적으로 시도한 군비확대 국가가 되어 간다.

나폴레옹 전쟁(1792~1815)은 내셔널리즘의 고양으로 일반 병역의무에 기초한 국민군의 형성이 가능해져 징병제에서만 가능한 병력수가 전선에 투입되었다. 내셔널리즘으로 정신 무장된 침략이 피침략자측의 더욱 강한 저항의 내셔널리즘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에 프랑스의 패배로 끝난 그 전쟁으로부터 약 1세기 후인 제1차 세계대전은 전선의 병사 뿐만 아니라 후방 체제를 포함한 전국민의 총력을 집결하여 싸우는 총력전(E. 루덴도르프 ; Erich Ludendorff)이 되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핵무기가 실전에 사용됨으로써 전쟁의 형태는 극한적인 양상을 띠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의 핵개발이 주요 연합국 소련에 대해 비밀리에 이루어져 결정적으로 앵글로아메리카와 균열이 발생하였으며 전후의 미소 냉전이 발생한다. 양극국가간에 직접적으로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핵 확산 경쟁으로 지구 인구를 과잉살상(overkill)할 수 있을 정도의 핵전력이 배치되었으며 제3세계에서는 수많은 대리전쟁이 발생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100여개가 넘는 무력 분쟁이 발생하여 그 희생자는 2,000만 명을 넘는다. 과거의 30년 전쟁이 유럽 세계를 흔들었던 것은 적어도 중세 이후 최초로 병사보다 농민의 희생이 많은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냉전시대의 전쟁은 베트남전쟁 중의 농민 화공(火攻)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항상 비무장 시민의 희생이 많았으며 최근의 전쟁에서는 그 비율이 95%를 넘는 다.

전쟁의 추세를 최초로 계통적으로 분석한 Q. 라이트(Quincy Wright)는 전쟁규모의 장기확대 경향을 확실히 하였다. 17세기에는 성채 포위공격을 제외하면 96%의 작전활동이 1일 이내에 종료되었다. 그 비율은 18세기에는 93%, 19세기에는 84%, 20세기 전반에는 40% 이하가 되어 공습 등에 의한 1일의 파괴력의 격증에도 불구하고 작전행동의 장기화가 진행된다. 전쟁에서의 전투수의 평균은 16세기에는 1회나 2회이고, 17세기에는 4회, 19세기에는 20회, 20세기에는 60회를 넘었다. 동원의 규모는 17세기 유럽에서는 고대 로마제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인구 1,000명당 3명이 병사라는 동원율이고, 나폴레옹 전쟁에서는 프랑스의 인구 5%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14%가 동원되었다.

종래에는 무력행사를 수반하는 국가간의 투쟁을 전쟁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전쟁은 비단 국가간에만 행해지는 것이 아니며, 집단안전보장체제에 의한 국가집단 간에도 일어날 수 있고, 또한 내란에 있어서도 내란을 일으킨 정치단체가 정당한 교전단체로 인정되면 국제법상으로 정식적인 전쟁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전쟁의 수단에 있어서도 종래에는 무력의 행사가 전쟁의 필수요건으로 되어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국제법상으로 한 국가의 명시()나 묵시()에 의한 전쟁개시의 의사표시가 있을 경우에는, 현실적으로 무력행동의 유무에 관계없이 전쟁상태로 간주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연합국에 가담하여 독일·이탈리아·일본에 대해서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한 국가가 교전상대의 어떤 국가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무력행사를 전혀 하지도 않았던 실례도 있다.

전쟁 희생의 역사 통계의 취급은 곤란한 면이 많지만 기록된 전사자의 규모를 보면 인구가 비약적으로 증가하면 전사자도 증가한다고 해도, 유사이래 19세기말까지의 전사자(戰死者)수의 총수보다 20세기의 전사자수가 더 많다고 한다.

개념 및 정의
최근의 국제법에서는 식민지 지배 및 외국의 점령, 인종차별체제에 반대하여 투쟁하는 이른바 ‘민족해방전쟁’과 한 국가에서 2개 이상의 정치적 권력집단간의 무력투쟁도 전쟁에 포함시키고 있다.

전쟁은 군사적 측면의 무력투쟁뿐만 아니라, 비군사적 측면인 정치·외교·경제·심리·사상 및 과학기술 등도 무력수단과 마찬가지로 전력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전쟁은 정치적 권력집단 사이에서 조직적인 정치·경제·사상 및 군사력 등을 사용하여 자기의 의사를 상대편에게 강요하는 투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전쟁의 개념과 정의는 시대와 관점에 따라 그 견해를 달리하지만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① 전쟁은 국가의 존망과 생사의 문제이다.
② 패자는 승자의 의지 앞에 굴욕적인 굴복을 당한다.
③ 전쟁은 약속이나 계약에 의해서 발발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하고자 하는 자의 의지에 의하여 시작된다.
④ 민족이나 국가 사이의 분쟁은 조정기관에 의해서 해결된 일은 거의 없었고, 유일한 해결수단으로 전쟁을 구사해 왔다.
⑤ 전쟁은 지금까지 인류 생존의 기본 요소가 되어 왔고, 또 인간의 천성이 변하지 않는 한 그 양상을 달리하면서 계속 존재한다.

국가와 민족의 생존권을 확보하고 독립과 번영을 누리기 위해서는 전쟁을 이해하고 연구하여 이에 대비해야 한다는 이론적 근거가 여기에서 비롯된다.

원인
전쟁이 일어나는 원인은 단일적인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일어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나, 조미니(Jomini,B.D.)는 정부가 전쟁을 하는 원인을 다음의 여섯 가지로 분류하였다.

① 권리의 회복 및 보호, ② 주요 국가 이익의 보호 및 유지, ③ 세력 균형의 유지, ④ 정치적 혹은 종교적 이념의 전파·말살 또는 보호, ⑤ 영토의 획득에 의한 국가의 영향력 및 세력의 증대, ⑥ 정복욕의 충족이다.

전쟁은 반드시 원인과 동기에 의해서 발발한다. 원인은 예외 없이 장기간에 걸쳐 전쟁 결의와는 별도로 교전국 쌍방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며, 동기는 많은 경우 미묘하고 교활하게 하여 개전 책임을 상대편에 전가시키기 위해 감추어서 식별하기 어렵지만, 한 편이 먼저 침공함으로써 발생하게 된다.

전쟁의 유형
전쟁의 유형은 전쟁의 어떤 특성을 분류의 기초로 삼느냐에 의해서 달라지게 된다. 도덕적 기준에 의하면 정의의 전쟁과 부정의의 전쟁으로 구분되고, 전략이 공세적인가 수세적인가, 그리고 공격의 선후에 따라 침략전쟁과 자위전쟁으로 구분된다.

전쟁의 목적과 동기의 기준에 의하면, 침략전쟁·자위전쟁·제재전쟁(또는 응징전쟁)·식민지전쟁·민족해방전쟁·독립전쟁·혁명전쟁 등이 있다. 지역적 규모의 기준에서는 세계전쟁·국지전쟁으로 구분된다.

전쟁 양상의 기준에서는 무제한전쟁(또는 전면전쟁·절대전쟁)과 제한전쟁, 사용 병기의 종류에 따라 핵전쟁과 비핵전쟁(또는 재래식 전쟁), 그리고 선전포고에 의한 정규 군대간에 수행되는 정규 전쟁과 그렇지 않은 비정규 전쟁이 있다.

전쟁의 주체에 따라서는 국가 대 국가 간에 수행되는 국제전쟁과 한 국가 내의 정치권력집단간에 수행되는 내전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쟁은 복합되어 하나의 전쟁형태를 이룬다. 예를 들면, 6·25전쟁은 북한측에서 말하면 민족해방전쟁이고, 한국측에서 본다면 침략에 대한 자위전쟁이며, 유엔에 의한 제재전쟁이고, 또한 국지·제한·재래식 전쟁이었다.

현대의 전쟁
현대 전쟁의 특징은 정치와 군사가 밀접하게 융합되어 있으며, 특히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클라우제비츠(Clausewitz,K.)는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전쟁이라는 것이다.

첫째, 전면전쟁에서는 교전국간의 외교관계는 단절되고 군사적 행동만 전개되나, 제한전쟁에서는 전쟁중에도 어떤 형태로든 외교 교섭이 유지된다. 즉, 전쟁과 정치의 구별이 어려워져 정치가는 군사문제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고, 군인은 군사문제에 대한 전문가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 예지도 갖추어야 한다.

둘째, 현대 전쟁은 다만 이익이나 세력의 확장이 아니다. 예컨대, 민주주의 대 공산주의처럼 체제의 투쟁, 이데올로기의 투쟁으로 인식되고 있다. 따라서 19세기까지의 전쟁이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이익 획득을 지향한 데 반하여, 현대 전쟁은 희생은 불문에 붙이고 상대국의 무조건 항복 혹은 그 나라를 지탱하는 체제나 이데올로기를 말살하는 데 중점을 두는 경향이 강하다.

적대국가의 도의적·가치적·체제적 열등성을 강조하는 반면, 성전(聖戰)·자위전·해방전, 그리고 이데올로기에 의해 자신의 전쟁의 정당성·도덕성을 강조한다. 여기에 현대 전쟁에서의 심리전쟁·선전전쟁·이데올로기전쟁이 갖는 영향은 대단히 크다.

셋째, 현대 전쟁은 물량전쟁이다. 이것은 국력을 총동원하여 전쟁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의 4대 군사노선은 이런 경향을 잘 예시해 주고 있다. 그리고 병력 수의 증가에 따르는 군비의 증가뿐 아니라 무기와 장비의 정교화와 기계화에서 오는 군사비의 증가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19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17일간의 전쟁에서 소비한 전쟁 비용은 4조 2750억 원이나 되었다고 하니, 전쟁을 해서 물질적 이득을 획득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실정이다.

현재 지구상에서 자신의 힘만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국가는 미국과 중국 등이며, 그들이라 할지라도 통로·기지 및 자원의 협력 등 다른 국가의 지지 없이는 효과적인 군사행동을 수행하기가 어렵다.

한국의 역대 주요 전쟁, 
통일신라 이전의 전쟁
① 고조선과 한나라의 전쟁: 서기전 194년 고조선의 준왕(準王)을 축출하고 왕검성에 도읍한 위만(衛滿)은 주위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의 손자 우거왕(右渠王) 때 이르러서는 군사력이 증강되고 국토가 넓어졌으며, 고조선 남부에 있는 변한 등의 세력이 한나라와의 직접 통교를 방해하였다. 이로 인하여 영토확장정책을 추진하던 한나라와 대립하게 되었다.

한무제는 서기전 109년 초 사자를 보내어 우거왕에게 한나라에 복속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우거왕은 이를 거절하였다. 이에 한무제는 그 해 가을 성기(成己)로 하여금 육군 5만 명, 수군 7,000명으로 조선을 침공하게 하였다. 그러나 고조선군의 선전으로 1차 공격에 실패한 무제는 위산(衛山)을 보내어 강화를 교섭하고자 하였다. 우거왕도 강화교섭에 응하여 태자를 한나라에 보내기로 하였다.

태자가 1만여 무장병의 호위하에 패수(浿水)를 건너려 할 때 한나라의 사자는 호위병의 무장해제를 요구하였다. 태자는 강을 건넌 뒤 자기를 살해하려는 기만책으로 의심하여 돌아와 버렸다. 이로써 양국의 협상은 결렬되고 말았다.

화의에 실패하자 한무제는 총 공세를 취하여 왕검성을 포위하였다. 한군이 왕검성을 포위하여 수 개월 공격했으나 고조선군은 그때마다 한군을 격퇴하였다. 그러나 전투가 장기화됨에 따라 성 안에서도 화전(和戰) 양파의 대립에 따른 동요가 일어나, 주화파가 우거왕을 살해하고 한군에 항복함으로써 마침내 서기전 108년 고조선은 멸망하였다.

여수·당전쟁(麗隋唐戰爭):
589년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는 요하(遼河)를 국경으로 하여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수나라의 대고구려정책은 건국 초기에 아직 정비되지 않은 통치력으로 인한 일시적인 방책이었으며, 점차 요동(遼東)을 정복할 야욕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수나라의 정책에 대응하여 고구려 영양왕은 598년(영양왕 9) 요서(遼西)를 공격하였다.

이것은 전략상의 요충지를 선점하여 수나라의 침략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한 일종의 예방전쟁이었으며, 고구려의 요서 공격에 대응하여 수문제는 수륙군 30만여 명의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육상군은 홍수로 인한 보급선 마비와 질병의 유행으로 요하에 도달하지도 못했으며, 산동반도를 출발한 수군도 풍랑으로 회군하여 실패로 끝났다.

수나라는 대규모의 군대를 다시 파견하기에는 국내 체제와 경제적 어려움이 있었고, 예방전쟁의 목적을 일단 달성한 고구려도 전쟁을 더 원하지 않아 수나라는 고구려의 사과를 명분으로 내세워 전쟁을 중지하고 양국의 우호관계는 다시 이루어졌다.

그 뒤 문제의 뒤를 이은 양제는 고구려 국왕의 내조를 요구했으나 고구려는 이를 거부하였다. 양제는 고구려 원정을 결의하고 612년(영영왕 23) 고구려로 쳐들어왔다. 이때 육상군은 113만이었고, 군량 수송을 담당한 인원은 그 갑절이었으며, 수군은 약 7만 명에 달하였다.

수나라의 침공을 받은 고구려는 요동성을 고수하여 수나라의 군대를 수 개월 동안 그곳에서 막아냈다. 요동전투가 전개되는 동안 수나라의 수군은 황해를 건너 대동강을 거슬러 그 해 6월 평양을 공격하였다.

고구려의 수군은 열세하여 해전을 피하고 적의 수군을 지상으로 유도해서 섬멸하기로 하고, 거짓 패한 척 후퇴하여 평양성의 외성 내에 잠복 대기중이던 정예부대가 수군을 급습하였다. 이에 수나라 수군은 불과 수천 명만이 생명을 건져 철수하였다.

요동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초조해진 수양제는 요동지방의 고구려성을 계속 포위하여 고구려군을 가두어 두고, 30만의 별동부대를 이끌고 평양을 직접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에 대항해서 고구려의 을지문덕(乙支文德)은 후퇴 유도작전을 전개하여 수나라 군대를 평양성 밖 30리까지 유인한 다음, 수나라의 우중문(于仲文)에게 조롱의 시 한 수를 보내고 그에게 철군하면 고구려 왕이 수양제에게 조례하겠다고 통보하였다.

수나라 군대는 평양성 수비가 견고한 데다 강행군으로 인한 피로와 식량의 부족으로 사기가 떨어졌으므로 공격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고구려 왕의 조례 약속을 명분으로 후퇴하였다.

을지문덕은 후퇴하던 수나라 군대에게 살수(薩水: 지금의 청천강)에서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 이 때 목숨을 건져 돌아간 자는 불과 2,700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이 우리나라 전사상 길이 빛나는 살수대첩이다. 그 뒤 수양제는 613·614년, 그리고 617년 세 차례나 침입했으나 거듭 패하고, 전쟁으로 인한 국력 탕진과 민심이 돌아선 데 따른 국내의 반란으로 수나라는 615년에 멸망하고 말았다.

수나라의 뒤를 이은 당나라도 수나라와 마찬가지로 고구려 침공의 징조를 보이자 고구려는 이에 대비하여 631년(영류왕 14)부터 요하의 국경선에 1,000여 리의 장성을 쌓기 시작하여 646년(보장왕 5)에 이를 완성하였다. 당시 장성 축조공사의 책임자로 임명된 연개소문(淵蓋蘇文)은 642년에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뒤 스스로 막리지(莫離支: 수상)가 되어, 신라가 한강을 점유함으로써 적대관계에 있던 백제와 동맹하여 신라에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고구려·백제의 동맹에 대응하여 신라는 적극적인 친당정책을 전개해서 두 나라의 견제를 요청하였다. 이것은 당나라의 대외정책과 일치하여 당나라는 고구려에게 신라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라고 거듭 권고했으나, 고구려는 이를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사신을 감금하였다.

이에 당태종은 644년 10여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수륙 양면으로 고구려를 침공해 왔다. 이세적(李世勣)은 6만의 대군으로 요동성 방면으로, 장량(張亮)은 4만 3000여 수군으로 해로를 통하여 평양으로 진격하였다.

고구려는 연개소문의 지휘하에 신성·건안성·안시성 등 요동의 요새를 굳게 지켰다. 특히, 안시성에서의 방어전은 치열하여 60여 일간의 교전 끝에 당나라 군대를 물리쳤다.

안시성 공격에서 대패한 당나라 군대는 추위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여 총퇴각하고 말았다. 육상군의 패보를 들은 수군도 침공을 중단하고 회군하였다.

당태종은 그 뒤에도 647·648·655년에 거듭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고구려와 수·당과의 싸움은 동아시아의 패권을 다투는 일대 결전이었으며, 고구려 정복의 어려움을 깨달은 당나라는 그 뒤 신라와의 연합을 통한 대고구려정책을 전개하였다.

나당전쟁(羅唐戰爭):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660년(무열왕 7)과 668년(문무왕 8)에 백제·고구려를 차례로 정복하여 삼국을 통일하였다.

신라와 당나라의 목적은 서로 다른 것이었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당나라의 힘을 일시적으로 빌린 것이었고, 당나라는 한반도를 정복할 야심에서 신라와 연합하였다.

당나라는 백제의 옛 땅에 5도독부(都督府)를 설치하여 이를 차지하고자 했으며, 더 나아가 신라에 계림대도독부를 설치하는 한편, 신라의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으로 임명하였다. 뿐만 아니라 백제 유민의 부흥운동이 진압된 뒤에는 의자왕의 아들 부여 융(扶餘隆)을 웅진도독에 임명하여 백제의 옛 땅을 관할하게 하였다. 그리고 동시에 신라의 문무왕과 화친을 맹약하게 함으로써 신라의 백제 병합을 막는 일석이조의 정복정책을 추진하였다.

당나라의 3국 지배 야욕은 고구려 멸망 후에 더욱 노골화되었다. 당나라는 고구려의 옛 땅에도 9도독부를 설치했는데, 특히 평양에는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 당나라의 설인귀(薛仁貴)를 도독으로 삼았다. 이 안동도호부는 실제로는 고구려는 물론 백제의 5도독부와 신라까지도 총괄했으며, 이로써 신라는 당나라로부터 패전국인 고구려나 백제와 똑같은 취급을 받았다.

신라는 이러한 당나라에 대항하여, 백제와 고구려 옛 땅 안에 있는 당나라군을 축출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신라는 먼저 고구려 멸망 후 요동지방을 비롯하여 당나라 군대가 점령하지 않은 지역의 고구려군 유민이 부흥운동을 전개할 때 이들을 지원하여 고구려 옛 땅에 있는 당나라군을 견제하는 한편, 670년 7월부터 당나라의 백제 주둔군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여 80여 성을 탈취하였다. 그리고 671년에는 사비성(泗沘城: 부여) 및 웅진성(熊津城: 공주) 방면으로 진격, 이를 점령하여 백제의 옛 땅에서 당나라군을 완전히 축출하였다.

당나라는 그들의 세력이 백제의 옛 땅에서 축출당하자, 672년에 4만 명의 병력을 평양에 진주시켜 신라의 북변 일대를 파상적으로 공격했으나 실패하였다. 이에 당나라는 674년 2월부터 신라 북변에 대하여 총공격을 가하였다. 당나라 대군이 공격해 오자 신라의 북변 성주들은 결사적으로 항전하여 당나라군과 치른 전후 18회의 전투에서 대승하였다.

677년 당나라는 신라군의 날카로운 공격을 피하기 위해 반도 내에 있는 고구려 옛 땅의 주둔군을 요동으로 철수시키는 동시에, 평양에 있던 안동도호부도 요동의 신성(新城: 무순 부근)으로 옮겼다. 이로써 신라는 실질적으로 한반도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고려시대의 전쟁
① 고려와 거란의 전쟁: 중국의 송나라는 거란이 점령하고 있는 화북(華北)지방을 탈취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985년(성종 4) 고려에 사신을 보내 원병을 요청해 왔으나 고려는 이를 거절하였다. 또 거란도 986년 고려에 사신을 보내어 친선을 제의해 왔으나 고려는 회답을 하지 않은 채 중립을 지켰다.

거란은 고려와 송나라가 연합하자 불안을 느끼고 993년 10월 소손녕(蕭遜寧)으로 하여금 80만의 대군을 보내 고려를 침공하게 하였다. 그 후 거란군은 고려군을 물리치고 청천강에 도달하여 강화조건을 제시하였다. 즉, 고구려의 옛 땅을 넘겨주고 송나라와 단교하여 거란을 상국으로 받들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고려조정에서는 의논이 많았으나 서희(徐熙)의 외교활동으로 난국을 타개할 수 있었다. 즉, 서희는 소손녕의 거란군을 스스로 물러가게 했을 뿐만 아니라 압록강 동쪽의 강동6주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고려는 여전히 친송정책을 추구했으므로 거란은 강동6주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거란의 이러한 요구를 거절하자, 1010년(현종 1) 11월 거란의 성종은 강조(康兆)의 현종 옹립을 구실로 40만 명의 대군을 지휘하여 제2차로 고려를 침공해 왔다.

고려는 강조에게 30만의 병력으로 통주에서 저항하게 했으나 패하였다. 결국 현종은 12월에 나주로 피난했으며, 1011년 1월 거란군은 개경(지금의 개성)에 침입하여 약탈을 일삼았다. 이에 현종은 하공진(河拱辰)을 보내어 강화를 맺게 하였다. 거란의 성종은 국왕의 무조건 친조(親朝: 친히 조공을 바침)를 조건으로 대군을 철퇴시켰다.

거란은 고려왕의 친조와 강동6주를 넘겨줄 것을 요구해 왔으나 이에 응하지 않자, 1018년에 거란장 소배압(蕭排押)이 10만의 대군으로 고려에 제3차 침입을 해왔다.

고려에서는 강감찬(姜邯贊)을 도원수로 삼아 20만여 명의 대군을 지휘하여 안주로 나아가 대비하게 했으나, 거란군은 바로 개경을 향해 남진하여 다음해 정월에는 개경 100리 거리에 이르렀다. 이때 강감찬이 개경에 대한 병력을 증강하고 거란군을 요격하니, 소배압은 공격을 시도하다 실패하여 철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강감찬은 퇴각하는 적을 귀주(구주)에서 대파하여 거의 전멸시켰다. 이것이 유명한 귀주대첩(구주대첩)이다. 그 결과 1019년에 강화를 맺어 양국은 평화적인 관계가 지속되었다.

고려의 여진정벌:
11세기 후반에 이르러 만주 북부 완안부(完顔部)의 여진은 세력이 강대해지자 함흥평야의 패권을 두고 고려와 정면 충돌하기 시작하였다. 1104년(숙종 9) 1월 완안부의 기병이 정평의 장성 밖에까지 미치자 고려에서는 임간(林幹)을 파견하여 대항하게 했으나 도리어 패배당하여 다시 윤관(尹瓘)을 보내어 방비하게 하였다. 그러나 여진의 기병을 물리치지 못하고 전세가 불리하여 화의를 맺고 돌아왔다.

윤관은 패전의 원인이 적의 기병에 우리의 보병이 대적하지 못한 데 있으니, 마땅히 군사를 쉬게 하고 사졸을 양성, 훈련하여 후일을 기다려야 한다고 대비책을 건의하였다. 이 건의에 따라 고려조정은 별무반을 편성하는 일에 착수하여 기병부대 양성에 역점을 두었고, 또한 군량을 비축하고 군사훈련을 강화하였다. 그리하여 1107년(예종 2) 12월 윤관을 도원수로 삼아 17만의 병력을 파견하여 여진정벌의 길에 오르게 하였다.

고려군은 먼저 점령지역의 여진군을 토벌하고, 다음은 수륙 양면에 의한 전격전을 전개하여 장성의 130여 마을을 점령하였다. 윤관은 이 수복된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전략적 요지인 함주를 비롯하여 9개 소의 요지에 성을 쌓았으니, 이것이 이른바 윤관의 9성이다. 그 뒤 여진이 계속 반격을 하는 한편, 조공할 것을 조건으로 9성을 돌려 달라고 애걸하자 고려는 멀리 떨어진 변경을 확보, 경영한다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1109년 7월 여진의 맹세를 받은 뒤 9성을 돌려 주었다.

고려의 대몽항쟁:
정예 기마부대로 인접 국가를 정복하고 있던 몽골의 칭기즈칸은 1215년 금나라의 수도 연경을 함락시키고 황하 이북의 땅을 그의 판도 안에 넣었다. 금나라의 지배하에 있던 만주의 거란족은 금나라의 쇠퇴를 틈타 요동지방에서 세력을 확충하다 몽골군과 충돌하게 되었다.

몽골군과의 충돌에서 패한 거란족은 1216년(고종 3) 8월 압록강을 건너 고려에 침입하여 의주에서 평양에 이르는 서북지방에서 약탈을 감행하였다. 1218년 8월 거란은 또다시 고려에 침입하여 고려군과 싸우다가 강동성에 몰리게 되었다. 이 해 12월 거란 소탕작전의 마무리 단계에서 몽골군은 거란족 격멸을 이유로 동진의 포선만노(蒲鮮萬奴)와 연합하여 이 전투에 개입해 왔다.

고려에서는 몽골의 요청으로 군량미도 내고 병력도 합세시켰다. 몽골은 거란족을 소탕시킨 은혜를 구실로 해마다 막대한 공물을 고려에 강요했으나 고려는 이에 잘 응하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두 나라의 관계가 소원해 가던 중 1225년 1월 몽골 사신이 압록강을 건너 귀국하던 도중 도적에게 피살되고 말았다. 몽골은 이를 구실로 1231년 8월 살례탑(撒禮塔)을 선봉으로 하여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였다.

몽골군은 귀주성(구주성)에서 박서(朴犀)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채 남하하여 개경을 포위하고, 그 일부는 멀리 충주까지 내려갔다.

최우(崔瑀)는 하는 수 없이 몽골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화의함으로써 몽골군은 1232년 1월에 철수하였다. 그러나 최우는 몽골과의 항쟁을 결의하고, 그 해 6월에 서울을 강화로 옮겼다. 이것은 수군이 없는 몽골군의 허점을 찌른 방책이었다.

왕과 귀족들이 강화로 들어감과 동시에 일반 백성들도 산성이나 섬으로 피난하게 한 고려의 태도가 몽골을 자극하여 그 해 12월 몽골군은 다시 침략을 해왔다. 그러나 몽골 장수 살례탑이 처인성(지금의 용인)에서 김윤후(金允侯)에게 피살되자 곧 철수하였다. 그 뒤 몽골은 동진과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1235년 7월 탕구[唐古]에게 제3차 침입을 하게 하여 1239년까지 5년간 전국을 유린하였다.

유럽과 아시아를 석권했던 몽골의 대군도 넓이 약 650m의 강을 건너지 못하여 강화도를 침공하지는 못하였다. 몽골의 요구는 고려왕이 육지로 나와 친조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으나, 고려가 이에 응하지 않음으로써 몽골군은 그 뒤에도 제4차(1253)·제5차(1254∼1255)·제6차(1255)·제7차(1257)에 걸쳐 침략을 거듭해 왔다. 그 중에도 1254년의 침략 때는 민중을 살육하는 것은 물론이요 포로로 붙들어 간 남녀만도 20만여 명이나 되었다.

무인정치의 마지막 집권자 최의(崔竩)가 1258년 3월에 피살되자 정권은 일단 왕에게 돌아가고 몽골에 대한 강화가 결정되기에 이르렀다. 1259년 4월 태자가 몽골로 출발하여 항복의 뜻을 표하고, 1270년(원종 11)에 개경으로 환도하니 강화로 천도한 지 39년 만이며, 이로써 고려조정은 몽골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항몽세력의 핵심인 삼별초는 무인정권이 타도되고 몽골과 강화가 성립된 데 대하여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배중손(裵仲孫)의 지휘하에 강화도에서 개경정부와 대립하는 반몽정부를 수립하였다. 그 뒤 근거지를 진도로 옮겨 부근의 여러 섬과 해안 일대를 지배하는 해상왕국을 이룩하였다.

1271년 5월 여몽연합군이 진도를 함락하는 데 성공하자 삼별초는 그 중심 인물의 대부분을 잃고 전력 또한 크게 약화되었다. 그러나 삼별초의 나머지 병력은 김통정(金通精)의 지휘 하에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겨 항전을 계속하였다.

1273년 4월 연합군은 제주에 상륙하여 삼별초를 격멸하니, 삼별초의 만 3년간에 걸친 대몽항쟁도 마침내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고려는 몽골과 치른 40년간의 항쟁을 통하여 한민족의 끈질긴 저항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했으며, 원나라도 다른 정복국과는 달리 고려왕실과 혈연관계를 맺도록 하는 유화정책을 썼다.

조선시대의 전쟁
임진왜란·정유재란: 조선은 건국된 지 200년이 가까워짐에 따라 지배계급은 글에만 열중하여 나약해지고 사회의 기강은 해이해졌으며, 국방에 대한 관심도 약화되었다. 한편,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전국시대의 혼란을 수습하여 국내를 통일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장기간의 싸움에서 강력해진 제후들의 군사력을 해외에 방출시킴으로써 국내 체제에 만전을 도모하고자 대륙 침략을 구상하게 되었다.

도요토미는 대마도주를 통하여 조선과의 수교를 요청하는 한편, 명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군대가 조선을 통과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조선은 이를 거절하였다. 이러한 당시의 일본 실정과 도요토미의 의도를 살피기 위해 조선 조정에서는 1590년(선조 23) 황윤길(黃允吉)을 통신사, 김성일(金誠一)을 부사로 파견하였다.

이듬해 3월 통신사 편에 보내 온 도요토미의 답서에 ‘정명가도(征明假道)’가 있어 침략 의도가 명백했는데도 사신의 보고는 일치하지 않았다. 즉, 황윤길은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으나, 김성일은 그러한 사실이 없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보고 이면에는 동인·서인으로 나누어진 당시의 정치상황이 그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침략전쟁의 모든 준비를 갖춘 도요토미는 1592년 4월 15만 대군을 9진으로 편성하여 조선을 침공하였다.

4월 14일 고니시[小西行長]를 선봉으로 하는 이 부대는 부산에 상륙하여 이를 함락시키고, 뒤따라 들어온 가토[加藤淸正]·구로다[黑田長政] 등과 함께 세 길로 나누어 진격하였다. 한편, 구키[九鬼嘉薩] 등이 지휘하는 9,000여 명의 수군은 바다에서 이들을 지원, 엄호하게 하였다.

왜병이 침입했다는 급보를 접한 조정에서는 신립(申砬)을 도순변사, 이일(李鎰)을 순변사로 임명하여 왜병의 진격을 저지하게 했으나, 이일은 상주에서 패하였고, 신립은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싸웠으나 패하여 죽었다. 신립이 패하자 선조는 평양으로 몽진(蒙塵)하였다.

왜적은 상륙한 지 불과 20일 만인 5월 2일 서울을 함락하였다. 서울을 함락한 왜병은 다시 북진하여 6월 13일에는 평양을 점령하였고, 가토는 함경도 끝까지 북상하여 두 왕자를 사로잡았다. 평양이 함락되자 선조는 다시 의주로 피난하여 명나라의 원병을 요청하였다.

일본의 수군은 700여 척의 병선으로 편성, 4월 27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이들의 주요 임무는 조선의 서해안을 우회하여 고니시군과 수륙 합동작전으로 북상하는 것이었다. 경상도의 수군은 일본 수군의 위세에 밀려 싸워 보지도 못한 채 패주하여 경상도 일대의 해상권을 일본 수군에 넘겨주고 말았다. 그러나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은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이 구원을 청하자 평시부터 정비해 두었던 병선, 특히 거북선을 이끌고 곳곳에서 일본 수군을 격파하였다. 더욱이 7월 8일 한산도해전에서는 적 수군의 주력 함대 73척 중 59척을 빼앗고 격파하였으며, 또한 9월 1일 부산포해전에서는 적선 100척을 격파함으로써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일본의 지상군은 그들의 수군이 패하여 제해권을 상실함에 따라 병참선이 위협을 당하자 이제는 더 북상할 기세를 잃고 후퇴를 거듭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관군이 왜적을 막지 못하자 국내 각 지방에서는 의병이 일어났다. 조헌(趙憲)은 충청도 옥천에서 군사를 일으켜 충주의 왜병을 축출하고 금산의 왜병을 공격하다 전사하였다.

곽재우(郭再祐)는 경상도 의령에서 군사를 일으켜 의령·창녕 등지에서 적을 물리치고, 진주에서 김시민(金時敏)과 함께 적을 격퇴하였다. 묘향산의 노승 휴정(休靜: 서산대사)은 팔도의 승려에게 격문(檄文)을 발하여 그의 제자 유정(惟政: 사명당)의 원조를 얻어 1,700명의 승병을 이끌고 평양탈환전에 공을 세웠다.

조선이 요청한 명나라의 원병이 도착하였다. 명나라는 처음에는 명장 조승훈(祖承訓)의 휘하에 5,000명의 군사를 보내어 7월 17일 평양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하자 심유경(沈惟敬)을 파견하여 화의를 교섭하게 하는 한편, 다시 이여송(李如松)에게 4만 3000명으로 구원하게 하였다. 명군은 조선군과 함께 1593년 1월 8일 평양을 탈환하고, 이어 일본군을 추격하여 서울로 향하였다.

명군은 1월의 벽제관전투에서 패배하여 일시 개성으로 후퇴하였다. 왜군은 서울에 집결하여 마침 함경도에서 철수한 가토군과 합동하여 2월 12일 행주산성을 공격했으나 권율(權慄)이 배수의 진을 치고 끝내 왜군의 공격을 무찔렀다. 이것은 김시민의 진주싸움, 이순신의 한산섬싸움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이다.

벽제관전투 이후 이여송은 평양에 머물면서 심유경을 서울의 왜진에 보내어 화의를 교섭하게 하였다. 왜군도 조선 수군의 활동으로 병참선에 대한 위협을 받고, 또한 각지 의병의 봉기와 명군의 진주, 전염병의 유행 등으로 전의를 잃었으므로 화의에 응하였다. 그래서 1593년 4월부터 서울에서 철수하여 서생포에서 웅천에 이르는 성을 쌓고 강화조약의 조인을 기다렸다. 그러나 화의 진행중인 2월 18일 왜병은 진주성에 보복적인 공격을 가하여 성을 함락시켰다.

심유경이 왜군과 함께 도요토미의 본영에 들어간 뒤 2∼3년간 사신이 내왕했으나 도요토미가 너무나 무리한 조건을 내놓았기 때문에 화의는 결국 결렬되었다.

이에 도요토미는 1597년 1월 14만 명의 대병력을 동원하여 조선에 다시 침공해 왔으니, 이것이 정유재란이다. 이번에는 왜군의 활동이 여의치 못했는데, 그것은 조선군이 전비를 갖추었고, 또 명나라의 원군도 즉시 출동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순신은 모함으로 옥에 갇혔으며, 7월 15일 수군은 다대포와 칠천량에서 일본 수군에 의해 섬멸당하고 말았다. 이에 기세를 올린 일본군은 7월 28일부터 행동을 시작하여 경상도를 중심으로 전라도 일대까지 점령하였다. 그러나 조선·명나라의 연합군도 총반격을 가하여 9월 6일 소사전투에서 왜군을 대파함으로써 전세를 만회하였다.

수군이 패하자 조정에서는 다시 이순신을 기용하여 남은 병선 12척으로 수군을 재편성하였다. 그리고 9월 16일 명량해전에서 적선 133척과 격전을 벌여 적선 31척을 격침시키고 다수를 격파하여 제해권을 다시 잡았다. 그 동안 육상에서는 명군이 전쟁에 개입하고 명량해전에서 패배한 영향으로 일본군의 사기가 떨어져 전투는 부진상태에 놓였다. 특히, 도요토미의 유언에 따라 왜군은 철수를 서두르고 있었다.

이순신은 명나라의 수사제독 진린(陳璘)과 함께 철수하는 왜군과 노량에서 격전을 벌여 왜선 200여 척을 격파하고 승리를 얻었으나, 이 해전에서 전사하였다. 이 싸움을 끝으로 전후 7년에 걸친 왜란은 끝났으나, 이 전쟁이 조선·명나라와 일본의 삼국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조선은 팔도가 거의 전쟁터화되어 왜군의 약탈과 살육으로 인해 심한 타격을 받았다. 한편, 조정은 병제 개편과 무기 개량에 착수하여 훈련도감의 설치, 삼수병에 의한 무예의 훈련,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와 화차를 발명하였고, 조총과 불랑기(佛狼機: 포르투갈 사람이 전래한 대포) 등을 제조하였다.

명나라는 병력을 조선에 파견하여 국력의 소모와 재정의 문란으로 새로 대두하기 시작한 여진의 청나라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일본에서도 도요토미가 몰락하고 도쿠가와[德川家康]가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 전쟁은 처음의 목적인 도요토미의 체제 안전 및 유지에 대한 기대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무익한 전쟁으로 한일 두 민족의 원한관계를 뿌리깊게 만들었다.

병자호란: 1627년(인조 5) 1월의 정묘호란으로 조선과 후금은 형제지국의 맹약을 맺었다. 그러나 그 뒤 후금은 명나라를 치기 위해 조선에 군량과 병선을 강요하는 등 압력을 가하고, 또 1632년에는 형제관계를 고쳐 군신관계를 맺고 조공을 늘리라고 요구하였다.

후금의 태종은 황제의 존호를 사용하기 위해 1636년 12월 용골대(龍骨大) 등을 보내어 황제로 부를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인조는 사신을 만나지도 않고 국서도 받지 않았다. 같은 해 4월 황제의 칭호와 더불어 국호를 청으로 고친 태종은 조선의 이런 도전적인 태도에 대하여 원정군 10만을 편성, 청태종이 지휘하여 그 해 12월 조선을 침입하였다. 이 때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은 백마산성을 굳게 방비하고 있었으나 청군은 이 길을 피해 서울로 직행하여 진격하니, 출발한 지 10일 만에 서울 근교에 도달하였다.

조정에서는 바로 그 전날 비로소 청군이 침입했다는 사실을 알고 이조판서 최명길(崔鳴吉) 등을 적진에 보내어 시간을 얻는 한편, 서둘러 두 왕자 등을 강화로 피난시켰다. 그러나 인조는 길이 청군에 의해 차단되어 12월 4일 밤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다.

청군의 선봉은 벌써 남한산성을 포위했고, 다른 부대는 아무 저항도 받지 않은 채 서울에 입성하였다. 따라서 포위된 지 45일 만에 식량 부족과 추위로 인하여 성 내의 장병들은 사기를 잃었고, 구원군은 도중에서 모두 청군에게 격파당했으므로 주화파(主和派)의 주장에 따라 마침내 항복하기로 하였다.

1월 10일 이후 교섭이 진행되었는데, 청태종의 요구는 조선의 왕이 친히 성문 밖에 나와 항복하고 양국의 관계를 악화시킨 주모자 2, 3명을 인도하면 화의에 응하겠다는 것이었다.

인조는 처음에는 이 제안에 대해 주저했으나 강화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부득이 1월 30일 성문을 열고 삼전도(三田渡: 송파)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하였다. 이것은 우리나라 역사상 큰 치욕이었다.

조정은 청나라의 가혹한 요구조건을 수락하여 화의가 체결되었으며,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 뒤의 효종)이 인질로 잡혀갔다. 그리고 주전파의 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홍익한(洪翼漢) 등 3학사는 잡혀가 참형을 당하였다.
그 뒤 1639년 청나라는 조선에 강요하여 청태종의 송덕비를 삼전도에 세우게 했으며, 조선은 청나라에 복종하게 되었다. 그 후 군비를 갖추어 북벌계획을 비밀리에 진행했으나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병인양요·신미양요:
흥선대원군은 처음에는 천주교도를 탄압하지 않았으나, 1866년(고종 3) 1월에 탄압령을 내려 불과 몇 개월 동안에 9명의 프랑스인 신부와 신도 8,000여 명을 학살하였다. 이 때 탈출한 리델(Ridel, F. C.) 신부의 보고를 접한 프랑스 공사는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Roze, P. G.) 제독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으며, 로즈 제독은 그 해 9월 군함 3척을 보내어 지형을 정찰한 뒤 철수하였다. 그 뒤 10월에 다시 군함 7척, 육전대 600명으로 조선을 침입하였다. 이것이 병인양요이다.

프랑스는 선교사 살해에 대하여 항의하는 한편, 10월 14일 일부는 강화도 갑곶에 상륙하여, 강화부를 점령하고 무기와 양식 및 서적 등을 약탈하였다. 그러나 10월 26일 프랑스군의 다른 부대(병력 120명)는 서울로 가는 길목의 문수산성에서 조선군에 의해 2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하였다. 앞서 강화부를 점령한 부대는 11월 9일 정족산성을 점령하고자 했으나, 천총(千摠) 양헌수(梁憲洙)가 지휘하는 500명의 매복한 포수의 기습에 의해 3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격퇴당하였다.

로즈 제독은 사태의 불리함을 깨닫고 강화부의 여러 관아를 불사르고는 11월 18일 함대를 철수하였다. 이 사건으로 동양에서 프랑스 정부의 위신은 크게 실추되었고, 반면에 대원군은 쇄국양이정책을 더욱 고집하여 천주교 탄압에 박차를 가하였다. 한편, 같은 해 7월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General Sherman號)가 대동강에서 조선 관헌과 충돌하여 소각된 일이 있었다. 그 뒤 미국 정부는 조선을 문책하는 동시에 강제로 통상조약을 맺으려고 북경에 있는 로(Low, F.) 공사에게 훈령하여 아시아 함대를 출동하게 하였다.

1871년 로는 로저스(Rodgers, J.) 제독에게 군함 5척에 해병대 1,200명을 지휘하여 남양(南陽) 앞바다에 와서 조선 정부에 통상을 요구하도록 했으나 거절당하였다. 6월 1일 그들의 일대가 강화해협을 측량하고자 강화도 광성진 앞에 왔을 때 요새의 병사들이 포격을 가하자 미군들도 이에 대응하여 사격을 하였다. 그 뒤 외교 교섭을 했으나 조선 정부가 완강히 거절하자 6월 10일 651명의 해병대와 7문의 포를 가지고 초지진·덕진을 점령하고, 다시 북진하여 광성진을 공격하였다.

이것이 신미양요이다. 서로의 공방전이 치열하게 벌어져 중군 어재연(魚在淵) 등 243명이 전사하고 20명이 포로가 되었다. 반면에, 미군은 맥키(Mekee) 중위 이하 3명이 전사하고 10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로 공사와 로저스 제독은 조선 정부로부터 협상 소식이 올 것으로 기대하여 1주일을 기다렸으나 아무런 소식이 없자 더 이상 전투하는 것이 무익하다고 생각하고 철수하였다. 전쟁이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한다면, 미군은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전쟁에서는 패한 결과가 되었다. 두 차례의 양요에서 외국군을 격파한 대원군은 각지에 척화비를 세워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항일독립운동
일제는 청일전쟁 및 러일전쟁의 승리를 기반으로 한반도 침략 및 대륙 진출을 실현하게 되었다. 더욱이 1907년 7월 한일신협약으로 한반도의 정치 실권은 거의 일제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고, 대한제국의 군대는 8월 1일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해산된 군인들은 각지의 의병과 합류하여 일제에 무력항쟁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1908년을 고비로 의병의 활동은 점차 약화되었으며, 인명의 희생만도 1만 7000여 명이나 되었다. 이러한 일제의 탄압정책에 따라 국내에서 무장독립항쟁을 하는 데 따른 어려움을 인식하여 동북만주 및 연해주로 이동해서 독립군 전투를 전개하게 되었다.

1919년 3·1운동 후 항일무력투쟁이 만주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 1920년까지 군사활동이 가장 활발했는데, 만포진 공격 및 두만강 연안에서의 유격전, 그리고 청산리전투는 일본군과 대항한 독립군에게 혁혁한 승리를 안겨준 전투였다.
1920년 만주의 독립단체 총 수는 22개, 무장군인은 약 2,000명이나 되었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일어나 일제의 세력이 만주에까지 미치자 독립군은 근거지를 잃게 되어 시베리아 등지로 이동하기도 하고 일부는 상해로 모여들어 상해 임시정부에 가담함으로써, 이전의 외교투쟁노선을 지양하고 무력항일투쟁으로 서서히 그 성격을 변화시켜 갔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 정부는 중국 대륙에 침공한 일제를 몰아내야 하는 처지가 되었고, 따라서 임시정부에 대한 협조태도가 크게 향상되었다. 그리하여 1940년 9월 17일 충칭(重慶)에서 한국광복군이 정식으로 창설되었다. 광복군은 창설 초 중국 정부와의 협정으로 중국군사위원회의 지휘·감독을 받도록 되어 있었으나, 임시정부의 요청으로 1944년 8월 28일 독자적인 지위를 갖게 되었다.

광복군의 당면문제는 병력 증강을 위한 초모활동과 첩보공작이었다. 1943년 6월에는 한영군의 합작 교섭이 성립되어 영국군에 파견됨으로써 버마 전선에서 영국군을 도와 전단 작성과 포로 심문 등을 담당하였다. 또한, 광복군은 국제 정세의 변화에 대처하여 미국과의 제휴로 본국 상륙작전을 준비하고, 나아가서는 한반도에 연합 진공하기 위하여 1945년 5월 한미합작 특수훈련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예상보다 빠른 항복으로 실현을 보지 못하였다.

광복군은 제2차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의 일원으로서의 승인을 받지 못하였고, 또한 항복한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킬 능력이 없다고 판단되었기에 미소 양군에 의해 국토가 분단되고 말았다.


비격진천뢰 〈비격진천뢰〉, 조선, 지름 21㎝, 둘레 68㎝, 보물 제860호, 국립고궁박물관. 선조 때 군기시 화포장이던 이장손이 발명하여 임진왜란 때 실전에 사용된 인마살상용 포탄이다. 이 비격진천뢰는 전래 경위는 명확하지 않으나 보존 상태가 좋아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대한민국과 전쟁
6·25전쟁: 1943년 11월 미국·영국·중국의 3거두(巨頭)는 카이로회담에서 공동선언을 통하여 “한국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해방시키며 독립시킬 것을 결의한다.”는 이른바 카이로선언을 하였고, 이 결의는 1945년 7월의 포츠담선언에서 재확인됨으로써 한국의 독립은 기정 사실화되었다.

일본이 항복하자 미군과 소련군은 한반도 주둔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목적으로 38도선을 경계로 남북한에 각각 진주하였다. 그 뒤 한반도문제를 두고 1945년 12월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5년간 한국신탁통치안을 결의하였다. 이에 대하여 한국민은 맹렬한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한국문제가 반탁운동으로 난국에 부딪치자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두 차례에 걸쳐 미소공동위원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그러나 소련측이 찬탁을 주장하는 단체들만으로 정부를 수립할 것을 고집하여 모든 정치단체의 참여를 주장한 미국측의 주장과 엇갈림으로써 이 회의는 결렬되었다.

미국은 1947년 9월에 한국 독립문제를 유엔에 제출하였다. 미국은 유엔 감시하에 총선거를 실시하고, 그 결과 정부가 수립되면 미·소 양군은 철퇴할 것이며, 이러한 모든 절차를 감시 및 협의하기 위해 유엔한국위원단을 설치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 안은 약간의 수정을 거쳐 소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절대 다수로 유엔총회를 통과하였다.

소련은 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을 거부하였다. 이에 대하여 유엔은 가능한 지역에서만이라도 선거에 의한 독립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이 국내외에 선포되었다.

북한과 소련은 외군 철수·통일정부 수립 등 선전적인 구호로 미군의 철수를 주장하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방해하는 한편, 김일성(金日成)을 내세워 소련의 괴뢰정권을 만들고 각종 군사 원조를 제공하여 20여 만의 중무장한 10여 개 전투사단을 편성하였다.

대한민국 내의 정치적 불안정과 경제적 취약점을 이용하여 제주 4·3사건과 여수·순천사건 등 교란작전을 폈으나 실패하자, 무력으로 남한 적화를 달성하겠다는 야욕으로 겉으로는 평화공세를 펴면서 남침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1949년 6월 주한 미군이 철수한 데 이어 1950년 1월 애치슨(Acheson, D. G.) 미 국무장관이 “한국은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제외된다.”는 등 미국의 일관성 없는 대한정책에 고무되어, 마침내는 소련과 중공의 지원 아래 1950년 6월 25일 새벽, 일제히 38도선 전역에 걸쳐 불법적인 남침을 시작하였다.

불의의 기습을 받은 한국군은 빈약한 무기로 맞서 싸웠으나 병력과 장비의 열세로 작전상 후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이러한 북한 공산군의 불법 남침에 대하여 유엔은 6월 25일 오후 2시에 안전보장이사회를 열고 공산군의 즉각 철퇴를 결의하였으며, 그 달 27일 재개된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다시 공산군의 남침은 불법이며 평화를 파괴하는 침략행위라고 규정하고 한국에 대한 지원을 결의하였다.

동시에 유엔군을 파견하여 북한 공산집단의 침공을 격퇴시키게 하였다. 이에 따라,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필리핀 등 16개 우방국이 유엔의 이름으로 참전하게 되었다. 이러는 동안 한국군과 미국군은 북한의 남진을 막지 못하고 7월 말에는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하게 되었다. 9월 15일 새벽 유엔군 및 한국 해병대가 맥아더(MacArthur, D.) 장군의 진두 지휘로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로 진격해서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하였다.

인천 상륙과 동시에 낙동강 방위선의 한국군 및 유엔군도 9월 16일을 기하여 총공세를 취한 결과 10월 1일에는 38도선을 돌파하여 북진을 계속, 10월 3일 북한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하였고, 동해안 쪽의 한국군 제3사단은 10월 10일 원산을 점령했으며, 수도사단은 10월 17일 흥남, 24일에는 청진을 점령하였다. 한편, 서부 전선에서는 한국군 제6사단의 일부 병력이 10월 26일 초산을 점령했으며, 서해안으로 진격하고 있던 유엔군은 신의주 남방 16㎞까지 진출하였다. 인민군이 거의 붕괴상태에 이르자 약 30만의 중공군이 10월 중순에 한국 전선에 불법 개입하였다. 이로 인하여 전세는 또 다시 역전되어 한국군과 유엔군은 부득이 철수를 하다가 오산-제천-담양-삼척을 잇는 선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부대를 재편성하여 반격작전에 대비하였다.

1월 25일부터 유엔군의 반격작전이 시작되어 3월 18일에는 서울을 다시 탈환했으며, 3월 24일 맥아더 장군은 38도선의 재돌파를 명령하여 북진하게 되었다. 그러나 4월 11일 트루먼(Truman, H. S.)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을 그가 행한 현지 정전협상의 요청성명 등을 이유로 유엔군 총사령관과 기타 모든 직위에서 해임시키고, 후임으로 미국 제8군 사령관이던 리지웨이(Ridgway, M. B.) 장군을 임명하였다.

유엔군은 화력과 기동력의 우세를 활용하여 중공군의 공세를 좌절시키는 동시에 막대한 인적 손실을 입힘으로써 전선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사태의 변화를 주시해오던 소련은 중공군 재건을 위하여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유엔 주재 소련 대사 말리크(Malik, Y.)에게 1951년 6월 23일 휴전회담을 제의하도록 하였다.

7월 10일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시작된 뒤에도 전투행위는 회담과는 별도로 계속되었지만 전선은 별다른 변동이 없었다. 그런데 3월 5일 소련의 스탈린(Stalin, J. V.)이 사망한 뒤, 4월 6일 장기간 휴회한 회담이 재개되어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을 조인, 3년 1개월에 걸친 동족상잔의 참극은 일단 휴전으로 멈추게 되었다.

한국군의 월남(베트남)파병: 1964년 7월 15일 월남(지금의 베트남) 정부의 지원 요청에 의해 최초로 그 해 9월 1개 의무중대와 소수의 태권도교관단 파견을 시작으로 1965년에는 건설지원단을 정식으로 파견함으로써 월남공화국의 대공투쟁을 지원하게 되었다. 그 뒤 한국은 해상 수송 지원을 위한 해군 수송전대, 건설지원단 자체 경비부대, 의무증원부대 등을 계속 파월시켰다.

1965년 6월 25일 월남 정부에서 한국군의 전투부대 파월을 정식 요청하자 1개 사단 규모의 전투부대를 10월에 파월하기로 결정하였다.

파월부대가 월남의 퀴논에 도착한 것은 10월 22일로 퀴논 부근의 전략지역에 위치하여 퀴논을 확보하고 책임지역 내의 19번 도로를 확보함과 동시에 다른 부대와 협조하여 전술지역 확장 준비를 하였다. 파월된 전투부대는 수도사단과 해병 제2여단이었다.

1966년 2월 정부는 다시 월남 정부로부터 전투 병력 증파에 관한 간곡한 요청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전투 병력을 증파하는 데 대한 국내외 정세, 특히 우리의 안전보장문제를 중심으로 신중히 검토하여 국무회의 의결과 국회 의결을 거쳐 1개 연대를 포함한 1개 전투사단을 증파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들 부대는 9월과 10월 사이에 3진으로 나누어 월남에 상륙하여 작전지역에 투입되었다.

이로써 파월된 한국군 부대는 육군 맹호사단·백마사단·건설지원단, 해병 청룡부대, 해군 백구부대, 공군 은마부대 등으로 총병력은 4만 8000명이었다. 이들은 파월된 뒤 대부대 작전 1,171회, 소부대 작전 5만 7636회의 많은 작전과 대민 지원을 수행하여 월남을 평정하는 데 기여하였다.

1971년 1월 11일 박정희 대통령은 연두 기자회견에서 월남군의 전투력이 빠른 속도로 증강되고 있기 때문에 주월 한국군의 감축문제를 검토중이며, 그 시기는 월남 정부와 미국을 비롯한 참전연합국과 충분히 협의한 후 결정하겠다고 발표하였다.

4월 23일 제5차 월남참전국 외상회담에서 주월 한국군의 1개 사단 감축을 결정하고 해병 제2여단을 포함한 1만 명의 제1단계 철수를 1971년 12월부터 1972년 4월까지 완료하였다. 1973년 1월 23일 닉슨(Nixon, R. M.) 미국 대통령과 티우 월남 대통령이 월남휴전일을 1973년 1월 28일 08:00시부로 실시한다는 발표를 하자, 주월 한국군을 철수하는 일에 박차를 가하여 3월 23일 완전히 철수함으로써 총 3만 6856명의 주월 한국군 철수작전을 성공리에 끝냈다. 만 7년 5개월간의 월남 파병에는 군사상, 국제관계에서 여러 가지 의의가 있었다.

① 정치적 관점에서는 대공투쟁과 집단 안전보장체제를 강화하고 국민의 단결과 해외 진출을 촉진할 수 있었으며, 반공의식이 높아지고 국제적 지위 향상에 기여하였다.

② 군사적 관점에서는 미군의 계속 주둔과 한국 방위 보장의 확보, 국방력 강화, 특히 연인원 32만여 명의 전투 경험자 획득은 우리의 국방력 강화에 크게 이바지하는 요인이 되었다.

③ 경제적 관점에서는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과 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달성하는 데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월남전 참전의 성과는 4,800여 명의 인명 희생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전쟁의 원인, [ causes of war ]
전쟁이 없는 평화를 어렵게 하는 국제정치의 구조상의 원리적 문제를 3가지 들어본다.
우선, 전쟁이란 각국의 상호작용에 의한 정책 선택의 귀결로서 그것을 누군가가 선택하여 최초로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국가 정책의 선택계 중에 전쟁이라는 선택사항이 존재하고, 전쟁이 항상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이 생긴다. 일반적인 이해는 국제정치의 무정부성(anarchy)이 하나의 원리적인 문제를 야기한다고 생각된다.

국내의 중앙정부와 같이 국제정치에는 세계정부와 같은 집권적인 권위가 없다. 따라서 만일 정치분쟁을 비군사적으로 해결한다는 전쟁 회피의 합의가 국가간에 이루어졌다고 해도 집권적인 강제장치가 부재하기 때문에 그 합의의 이행의 확보는 당사자에 의한다. 그러한 이상, 국가간의 합의는 신뢰성을 획득할 수 없으며 각국은 자조 노력으로 그 안전을 확보하려고 하기 때문에 국가정책의 선택사항에서 전쟁을 원리적으로 제외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불확실성(uncertainty)이라는 제2의 원리적인 문제가 부상한다. 즉, 전쟁 회피를 위해 취해할 선택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각국은 사전에 알 수 없다. 특히, 군사력은 통상 국가기밀로 되어 있어 관계국은 타국의 의도나 능력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다. 따라서 전쟁 회피라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 달성이 어렵고, 사후적으로는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가 초래되는 정책 선택일지라도 한정된 정보 속에서 정책 결정의 당사자는 그러한 정책을 ‘합리적’으로 선택할 위험이 있다. 덧붙여 불확실성을 이용하여 자국의 진짜 의도를 은폐하거나 군사능력을 속임으로써 분쟁 해결을 유리하게 이끌고자 하는 원인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아무리 군사력의 비행사라는 합의를 교환해도 향후의 합의의 이행에 대한 의심이 생겨 원래의 합의 달성을 저해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불확실성의 문제가 앞의 무정부성이라는 문제를 보다 어렵게 하고 있다.

전쟁은 관계국가의 정책 선택의 집합적 귀결이기 때문에 국제정치의 미시-거시 문제(micro-macro problem)라는 제3의 원리적인 문제가 있다. 국가의 정책은 국내 정치 주체의 선호를 각각의 규칙으로 집적한 집합적인 귀결이며 또한 국제 상호작용은 각국의 정책 선택의 집합적 귀결이기도 하다. 여기에 집합적인 선택의 문제가 국내 레벨과 국제 레벨로 2중으로 나타난다. 각각의 거시적인 레벨에서의 귀결은 그 구성 주체의 대부분이 전쟁 회피를 바라고 있어도 국가의 정책 선택이 전쟁을 회피한다고 보증할 수 없다. 이것을 지적한 것으로서 애로우의 역설이 유명하다. 또한 국제 레벨에서는 많은 국가가 전쟁 회피를 바라고 있어도 국가간의 상호작용의 귀결이 전쟁의 회피를 보증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수인(囚人)의 딜레마 상황은 그러한 국제 상호작용을 나타내는 하나의 예이다.

이상의 3가지 원리적인 문제가 전쟁 회피를 어렵게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가간의 이해 대립이 즉시 전쟁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동종의 대립이 전쟁에 이르는 경우도 있지만 이르지 않는 경우도 있으며 수적으로는 비폭력적인 해결을 달성하는 쪽이 압도적이다. 그렇다면 그 차이는 무엇에 의한 것일까? 거기에서 정책 결정자의 선택의 폭이나 그 실현성에 대한 제약 조건을 구성하는 국가 나름의 국제시스템이라는 집합체의 고유 특성과 전쟁의 관계를 분석하여 어떠한 원인이나 조건하에서 국가는 무수한 선택사항 중에서 전쟁을 선택하는지 논의된다.

1국 레벨에서는 현상의 만족도나 군사증강, 선거 사이클, 정치체제, 경제발전의 정도 등이라는 국가의 속성의 차이에서 전쟁의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또한 여러 국가간의 상호작용이라는 시점에 서면 2국의 세력균형이나 지리적 인접성, 동맹, 경제적 상호의존 등이라는 관계성의 속성에서 전쟁의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어떤 특정의 국제시스템의 구조적 조건이 국가의 전쟁행동을 규정한다고 하면 양극이나 다극이라는 국제 시스템의 극(極)구조나 그 안정성 등이라는 시스템의 속성에서 전쟁 원인을 찾게 된다. 그러나 어느 속성을 중시하는가는 어떠한 패러다임에 의거하는가에 따라 달라지지만 현재 모두가 인정하는 유일한 패러다임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무엇이 중요한 전쟁 원인인지는 연구자간에 견해가 분분하다.

[손자병법]을 쓴 동양병법의 비조(鼻祖), 손자가 오나라 합려왕의 궁녀를 상대로 군사훈련을 시킨 까닭은?

- 다윗이 골리앗에게 던진 것은 돌멩이가 아니라 ‘납덩이’였다?

- 스파르타를 무찌르고 그리스를 재패한 테베군의 최정예 돌격부대 신성군단은 300명 전원이 동성연애자였다는데?

- 전 유럽을 벌벌 떨게 만들었던 천하무적 바이킹 용사 베르세르크는 전투 때마다 순록의 오줌을 마시고 싸우는
약물중독자들이었다?

- 전쟁사에서 ‘기마’보다 ‘전차’가 먼저 등장했다는데?

-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도 ‘스텔스’가 존재했다?

- 이순신처럼, 악조건 속에서 큰 공을 세우며 속 좁은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에게 평생 충성을 바친 동로마 장군
벨리사리우스


정치범처형 6·25전쟁 중 1950년 10월 19일 북한군은 함흥에서 300명의 사상범들을 동굴 속에 가두고 질식사시켰다.

한국전쟁. [ Korean War ]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무력남침으로 시작된 국제전쟁으로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을 하였다. 이 전쟁의 원인에 대해서 일본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지식층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던 ‘진보적 문화인’에 의해 한미 합작에 의한 남쪽에서의 북침설이 오랫동안 신봉되었다. 그러나 신곡불이(神谷不二)의 저서 「한국전쟁」(1966년)에 의해 북쪽에서의 남침설이 비로소 제창되었다. 소련의 붕괴 후에는 이 전쟁이 사실상 김일성과 스탈린의 공동결정이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소련측의 사료가 공개되어 북침설은 허위로 판명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성립으로 한반도에는 사실상 2개의 국가가 성립 하였다. 그 이전부터 모든 ‘민주주의적 과업’의 근거지를 북한에 두고 ‘민주 기지론’을 전개하였던 김일성은 무력행사를 통하여 한반도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소련의 군사지원과 중국의 조선인 부대의 파견이 불가결한 조건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김일성이 개전 시기를 결정하는 요인이 되었던 것은 미국의 한국에 대한 군사 커미트먼트의 축소였다.

미국은 한국과의 사이에 상호방위 원조협정과 군사고문단 설치협정을 체결하고 군사원조와 한국군의 군사력 강화를 조언하는 한편, 1949년 6월 29일에는 군사고문단을 제외한 미군철수를 완료시켰다. 그리고 1950년 1월 12일 애치슨 미국무장관이 내셔널 프레스클럽의 연설에서 미국의 서태평양에서의 방위선으로서 알류샨 열도, 일본, 오키나와, 필리핀을 연결하는 선(‘불후퇴 방위선’)을 발표하였다. 북한은 이러한 미국의 대한 커미트먼트의 축소를 민족해방전쟁 시작의 호기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공격으로 시작된 한반도전쟁은 당초 북한군의 우세로 시작되었다.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는 즉시 소련이 중국 대표권 문제로 보이콧한 와중에 북한의 무력공격을 ‘평화의 파괴’라는 결의(S/1501)를 채택하고 6월 27일에 다시 소련 부재 하에 국제연합 가입국에 대해 북한의 무력공격을 격퇴하는 원조를 한국에 제공하도록 권고하는 결의를 채택하였다(S/ 1511).

전세는 1950년 9월의 국제연합군에 의한 인천 상륙작전으로 일단 국제연합군 우위로 기울었지만 그 다음 달 한국군과 국제연합군이 38도선을 돌파하여 북상한 것이 중국인민 지원군의 참전을 초래하여 민족해방전선으로서 시작된 한반도전쟁은 미ㆍ중 대결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또한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1951년 6월 마리크 소련 국제연합 대표의 제의로 정전협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에게 있어서 한반도전쟁은 국제연합군의 힘을 빌린 ‘북진 통일’이기 때문에 정전에는 반대의 입장을 취하였다. 결국 정전협상은 한국군이 빠진 상태에서 진행되어 1953년 7월 27일 조선인민군, 중국인민지원군, 국제연합군의 3자에 의해 군사정전협정이 서명되어 3년 이상에 걸친 전투상태가 정지되었다.

6·25전쟁,[ Korean Conflict , 六二五戰爭 ]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 공산군이 남북군사분계선이던 38선 전역에 걸쳐 불법 남침함으로써 일어난 한반도에서의 전쟁.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됨에 따라 한국은 일본의 불법적인 점령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러나 카이로회담에서 나라의 독립이 약속은 되어 있었으나,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남과 북에 미소 양군이 분할 진주함으로써 국토의 분단이라는 비참한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8월 9일 뒤늦게 대일전에 참가한 소련군은 허울 뿐인 관동군을 격파하면서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8월 13일 제25군단의 일부가 청진에 상륙하고, 8월 22일에는 평양에 진주하였다. 미군 제24사단은 9월 8일에야 인천에 상륙하여 이튿날 서울에 진주하였다. 미소 양군의 한반도 진주 목적은 일본군의 무장해제 등 전후처리에 있었다.

북한에 진주한 소련 군정당국은 남북간의 왕래와 일체의 통신연락을 단절시킴으로써 38도선을 남북을 가르는 정치적 경계선으로 만들었으며, 공산화통일이 보장되지 않는 어떠한 통일정부수립도 거부함으로써 한반도의 반영구적인 정치적 분단을 강요하였다.

한반도에서의 지배권 강화를 목표로 하는 소련의 기도와 적대정부의 출현만은 절대로 반대하는 미국의 입장이 타협될 수 없었다. 따라서 한국의 통일독립 문제의 해결은 극히 어려웠으며 이 문제를 위해 개최된 미소공동위원회도 결렬되고 말았다.

1947년 중반에 이르러 미국은 마침내 단일정부의 수립과 신탁통치의 실시를 전제로 하여 한반도를 통일하려 했던 종래의 대한 정책을 포기하고, 분단의 고정화라는 기정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한반도의 세력균형을 보장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유엔은 1947년 제2차 총회에서 통일된 한국정부수립을 위한 총선거를 1948년 5월 31일 이전에 한반도 전역에서 실시하기로 결의하고, 선거감시를 위한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유엔이 결의한 전국적 범위에서의 총선거는 1948년 1월 소련 군정당국이 이의 수락을 거부하고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북한지역 출입을 막음으로써 좌절되었다.

1948년 2월 26일 유엔 소총회는 '유엔의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의 선거실시'를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38도선 이남지역에서 유엔 감시하의 자유 총선거가 실시되어 제헌국회가 구성되었으며, 1948년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의 건국이 세계만방에 선포되었다.

소련군의 비호 아래 북한지역을 장악한 김일성 등 공산주의자들은 1948년 9월 9일 이른바 '흑백선거'에 의하여 북한지역에 독자적 공산정권인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소련을 비롯한 공산 제국의 승인을 얻어냈다. 그러나 1948년 12월 12일 제3차 유엔총회는 대한민국정부만이 '한반도에 존재하는 유일한 합법정부'(유엔 총회결의 195 Ⅲ호)임을 결의함으로써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로서 대한민국의 법통을 확인하였다.



6·25전쟁/ 발생시기/ 주요사건
1949년
북한, 소련과 '조소군사비밀협정' 체결.
남한에서 주한미군철수.
1950년
미국, 애치슨라인 발표.
1950년 6월 23일
국군, 비상경계령 해제. 병력의 1/3 이상이 외출.
1950년 6월 25일
북한, 38선 전역에 걸친 국군 방어진지 기습공격 개시. YAK전투기 서울 상공에 침입.
미국,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즉시 소집 요구. 미국 결의안 채택(소련 결석)해 북한군 철수 요구.
1950년 6월 27일
안전보장이사회, 유엔 회원국에 대한민국 원조를 권고하는 결의 채택.
1950년 9월 15일
유엔군, 인천상륙작전.
1950년 10월
유엔군, 평양을 수복하고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진격.
1950년 11월
중공군 개입.
1950년 12월
북한지역에서 유엔군 철수.
1951년 1월
대한민국 정부 서울에서 철수.
1951년 2월
유엔 총회, 중공군 철수 요구.
1951년 7월
개성에서 휴전회담 시작.
1951년 10월
회담 장소를 판문점으로 옮김.
1952년 10월
공산측의 비타협적인 태도를 문제로 유엔군 사령부 회담 중지.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유엔군 사령관과 공산군(북한군과 중공군) 사령관 간 휴전이 조인.



참조어
애로우의 역설(투표의 역설), 수인의 딜레마, 불확실성.

참조항목

역참조항목

카테고리
출처 ^ 참고문헌,
[인터파크 도서 제공]
[전쟁 [War, 戰爭, Guerre] (21세기 정치학대사전, 정치학대사전편찬위원회)
[전쟁 [war, 戰爭] (두산백과)
[세종실록(世宗實錄)』
[동국병감(東國兵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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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의병장열전』(김의환, 정음사,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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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론』(크라우제비츠 저, 이종학 역, 일조각,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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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사』(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67)
[주월한국군전사』1 1(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67)
[한국사: 근세후기편』(진단학회, 을유문화사, 1965)
[인물로 본 한국고대사」(천관우, 정음문화사, 1982
[조선군의 흑룡강출병」(박태근, 『한국사론』9, 1981)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사활동」(이종학, 『한국사론』10, 1981)
[실전에서의 병력동원문제」(이종학, 『한국사론』7, 1980)
[Policy and Direction(James, F. Schnabel, Office of the chief of Military History, U.S. Army, 1972)[Our Other War in [Korea(William M. Leary, Jr. Proceeding, June 1968)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Roy E, Appleman, Office of the chief of Military History, U.S. Army, 1961)
[A Study of War(Quincy Wright,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42)
[The Art of War(Jomini, trans. J.B. Lippihcott & Co., Philadelphia, 1862)
[전쟁 [戰爭]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전쟁 [戰爭]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쟁의 원인 [causes of war] (21세기 정치학대사전, 정치학대사전편찬위원회)
[6·25전쟁 [Korean Conflict, 六二五戰爭] (두산백과)
[ nara

#전쟁 #War #戰爭 #Guerre #대한민국정부 #한국전쟁 [ Korean War ] #조선군의 흑룡강출병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사활동 #한국전쟁사 #월남전 #동국병감(東國兵鑑)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됨 #한국은 일본의 불법적인 점령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카이로회담에서 나라의 독립이 약속은 되어 있었으나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남과 북에 미소 양군이 분할 진주함 #국토의 분단이라는 비참한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8월 9일 뒤늦게 대일전에 참가한 소련군은 허울 뿐인 관동군을 격파하면서 파죽지세로 남하 #8월 13일 제25군단의 일부가 청진에 상륙하고, 8월 22일에는 평양에 진주하였다 #미군 제24사단은 9월 8일에야 인천에 상륙 #상륙 이튿날 서울에 진주하였다 #미소 양군의 한반도 진주 목적은 일본군의 무장해제 등 전후처리에 있었다 #북한에 진주한 소련 군정당국 #남북간의 왕래와 일체의 통신연락을 단절시킴 #38도선을 남북을 가르는 정치적 경계선으로 만들었으며 #공산화통일이 보장되지 않는 어떠한 통일정부수립도 거부함 #한반도의 반영구적인 정치적 분단을 강요하였다 #한반도에서의 지배권 강화를 목표 #소련의 기도와 적대정부의 출현만은 절대로 반대하는 미국의 입장이 타협될 수 없었다 #한국의 통일독립 문제의 해결은 극히 어려웠으며 이 문제를 위해 개최된 미소공동위원회도 결렬되고 말았다 #1947년 중반에 이르러 미국은 마침내 단일정부의 수립 #신탁통치의 실시를 전제로 하여 한반도를 통일하려 했던 종래의 대한 정책을 포기 #분단의 고정화라는 기정사실을 바탕으로 #한반도의 세력균형을 보장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유엔은 1947년 제2차 총회 #통일된 한국정부수립을 위한 총선거 #1948년 5월 31일 이전에 한반도 전역에서 실시하기로 결의 #선거감시를 위한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을 구성하였다 #유엔이 결의한 전국적 범위에서의 총선거 #1948년 1월 소련 군정당국이 이의 수락을 거부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북한지역 출입을 막음으로써 좌절되었다 #1948년 2월 26일 유엔 소총회는 '유엔의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의 선거실시'를 결의하였다 #1948년 5월 10일 38도선 이남지역에서 유엔 감시하의 자유 총선거가 실시되어 제헌국회가 구성 #1948년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의 건국이 세계만방에 선포되었다 #소련군의 비호 아래 북한지역을 장악한 김일성 등 공산주의자들 #1948년 9월 9일 이른바 '흑백선거'에 의하여 북한지역에 독자적 공산정권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소련을 비롯한 공산 제국의 승인을 얻어냈다 #1948년 12월 12일 제3차 유엔총회 #한반도에 존재하는 유일한 합법정부'(유엔 총회결의 195 Ⅲ호)임을 결의함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 #대한민국의 법통을 확인하였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무력남침으로 시작된 국제전쟁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을 하였다 #전쟁의 원인 #일본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지식층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던 ‘진보적 문화인’에 의해 한미 합작에 의한 남쪽에서의 북침설이 오랫동안 신봉되었다 #신곡불이(神谷不二)의 저서 #한국전쟁 1966년 에 의해 북쪽에서의 남침설이 비로소 제창되었다 #소련의 붕괴 후 6 25전쟁이 사실상 김일성과 스탈린의 공동결정이었다는 것을 입증 #소련측의 사료가 공개되어 북침설은 허위로 판명되었다 #여몽연합군이 진도를 함락 성공 #삼별초 #중심 인물의 대부분을 잃고 전력 또한 크게 약화되었다 #삼별초의 나머지 병력은 김통정(金通精)의 지휘 하에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겨 항전을 계속하였다 #1273년 4월 연합군은 제주에 상륙하여 삼별초를 격멸 #삼별초의 만 3년간에 걸친 대몽항쟁도 마침내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고려는 몽골과 치른 40년간의 항쟁을 통하여 한민족의 끈질긴 저항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했으며 #원나라도 다른 정복국과는 달리 고려왕실과 혈연관계를 맺도록 하는 유화정책을 썼다 #조선시대의 전쟁 #임진왜란 #정유재란 #조선은 건국된 지 200년이 가까워짐에 따라 지배계급은 글에만 열중하여 나약해지고 사회의 기강은 해이해졌으며 국방에 대한 관심도 약화되었다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전국시대의 혼란을 수습하여 국내를 통일하는 데 성공하였다 #장기간의 싸움에서 강력해진 제후들의 군사력을 해외에 방출시킴으로써 국내 체제에 만전을 도모하고자 대륙 침략을 구상하게 되었다 #도요토미는 대마도주를 통하여 조선과의 수교를 요청 #명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군대가 조선을 통과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조선은 이를 거절하였다 #당시의 일본 실정과 도요토미의 의도를 살피기 위해 조선 조정에서 1590년(선조 23) #황윤길(黃允吉)을 통신사 #김성일(金誠一)을 부사로 파견하였다 #이듬해 3월 통신사 편에 보내 온 도요토미의 답서 #정명가도(征明假道)’가 있어 침략 의도가 명백했는데도 사신의 보고는 일치하지 않았다 #황윤길은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 #김성일은 그러한 사실이 없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보고 이면에는 동인/ 서인으로 나누어진 당시의 정치상황이 그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침략전쟁의 모든 준비를 갖춘 도요토미는 1592년 4월 15만 대군을 9진으로 편성하여 조선을 침공하였다 #4월 14일 고니시[小西行長]를 선봉으로 하는 이 부대는 부산에 상륙하여 이를 함락시키고 #가토[加藤淸正]·구로다[黑田長政] 등과 함께 세 길로 나누어 진격하였다 #구키[九鬼嘉薩] 등이 지휘하는 9000여 명의 수군은 바다에서 이들을 지원 엄호하게 하였다 #왜병이 침입했다는 급보를 접한 조정에서는 신립(申砬)을 도순변사 #이일(李鎰)을 순변사로 임명하여 왜병의 진격을 저지하게 했으나 이일은 상주에서 패하였고 #신립은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싸웠으나 패하여 죽었다 #신립이 패하자 선조는 평양으로 몽진(蒙塵)하였다 #왜적은 상륙한 지 불과 20일 만인 5월 2일 서울을 함락하였다 #서울을 함락한 왜병은 다시 북진하여 6월 13일에는 평양을 점령 #가토는 함경도 끝까지 북상하여 두 왕자를 사로잡았다 #평양이 함락되자 선조는 다시 의주로 피난하여 명나라의 원병을 요청하였다 #일본의 수군은 700여 척의 병선으로 편성 #4월 27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이들의 주요 임무는 조선의 서해안을 우회하여 고니시군과 수륙 합동작전으로 북상하는 것이었다 #경상도의 수군은 일본 수군의 위세에 밀려 싸워 보지도 못한 채 패주하여 경상도 일대의 해상권을 일본 수군에 넘겨주고 말았다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이 구원을 청하자 평시부터 정비해 두었던 병선 #거북선을 이끌고 곳곳에서 일본 수군을 격파하였다 #7월 8일 한산도해전에서는 적 수군의 주력 함대 73척 중 59척을 빼앗고 격파 #9월 1일 부산포해전에서는 적선 100척을 격파함으로써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일본의 지상군은 그들의 수군이 패하여 제해권을 상실함에 따라 병참선이 위협을 당하자 이제는 더 북상할 기세를 잃고 후퇴를 거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관군이 왜적을 막지 못하자 국내 각 지방에서는 의병이 일어났다 #조헌(趙憲)은 충청도 옥천에서 군사를 일으켜 충주의 왜병을 축출하고 금산의 왜병을 공격하다 전사하였다 #곽재우(郭再祐)는 경상도 의령에서 군사를 일으켜 의령/ 창녕 등지에서 적을 물리치고 #진주에서 김시민(金時敏)과 함께 적을 격퇴하였다 #묘향산의 노승 휴정(休靜 서산대사)은 팔도의 승려에게 격문(檄文)을 발하여 #그의 제자 유정(惟政: 사명당)의 원조를 얻어 1700명의 승병을 이끌고 평양탈환전에 공을 세웠다 #조선이 요청한 명나라의 원병이 도착하였다 #명나라는 처음에는 명장 조승훈(祖承訓)의 휘하에 5000명의 군사를 보내어 7월 17일 평양성을 공격했으나 실패 #심유경(沈惟敬)을 파견하여 화의를 교섭 #이여송(李如松)에게 4만 3000명으로 구원하게 하였다 #명군은 조선군과 함께 1593년 1월 8일 평양을 탈환 #일본군을 추격하여 서울로 향하였다 #명군은 1월의 벽제관전투에서 패배하여 일시 개성으로 후퇴하였다 #왜군은 서울에 집결하여 마침 함경도에서 철수한 가토군과 합동하여 2월 12일 행주산성을 공격 #권율(權慄)이 배수의 진을 치고 끝내 왜군의 공격을 무찔렀다 #김시민의 진주싸움 #이순신의 한산섬싸움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이다 #벽제관전투 #이여송은 평양에 머물면서 심유경을 서울의 왜진에 보내어 화의를 교섭하게 하였다 #왜군도 조선 수군의 활동으로 병참선에 대한 위협 #각지 의병의 봉기와 명군의 진주 #전염병의 유행 등으로 전의를 잃었으므로 화의에 응하였다 #1593년 4월부터 서울에서 철수하여 서생포에서 웅천에 이르는 성을 쌓고 강화조약의 조인을 기다렸다 #화의 진행중인 2월 18일 왜병은 진주성에 보복적인 공격을 가하여 성을 함락시켰다 #심유경이 왜군과 함께 도요토미의 본영에 들어간 뒤 2∼3년간 사신이 내왕했으나 도요토미가 너무나 무리한 조건을 내놓았기 때문에 화의는 결국 결렬되었다 #도요토미는 1597년 1월 14만 명의 대병력을 동원하여 조선에 다시 침공 #정유재란 #왜군의 활동이 여의치 못했는데 조선군이 전비를 갖추었고 #명나라의 원군도 즉시 출동했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모함으로 옥에 갇혔으며 #7월 15일 수군은 다대포와 칠천량에서 일본 수군에 의해 섬멸당하고 말았다 #이에 기세를 올린 일본군은 7월 28일부터 행동을 시작하여 경상도를 중심으로 전라도 일대까지 점령하였다 #조선/명나라의 연합군도 총반격을 가하여 9월 6일 소사전투에서 왜군을 대파함으로써 전세를 만회하였다 #수군이 패하자 조정에서는 다시 이순신을 기용 #남은 병선 12척으로 수군을 재편성하였다 #9월 16일 명량해전에서 적선 133척과 격전을 벌여 적선 31척을 격침시키고 다수를 격파하여 제해권을 다시 잡았다 #육상에서는 명군이 전쟁에 개입하고 명량해전에서 패배한 영향으로 일본군의 사기가 떨어져 전투는 부진상태에 놓였다 #도요토미의 유언에 따라 왜군은 철수를 서두르고 있었다 #이순신은 명나라의 수사제독 진린(陳璘)과 함께 철수하는 왜군과 노량에서 격전을 벌여 왜선 200여 척을 격파하고 승리 #이 해전에서 전사하였다 #이 싸움을 끝으로 전후 7년에 걸친 왜란은 끝났으나 #전쟁이 조선/ 명나라와 일본의 삼국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조선은 팔도가 거의 전쟁터화되어 왜군의 약탈과 살육으로 인해 심한 타격을 받았다 #조정은 병제 개편과 무기 개량에 착수하여 훈련도감의 설치 #삼수병에 의한 무예의 훈련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와 화차를 발명 #조총과 불랑기(佛狼機 #포르투갈 사람이 전래한 대포) 등을 제조하였다 #명나라는 병력을 조선에 파견하여 국력의 소모와 재정의 문란으로 새로 대두하기 시작한 여진 #청나라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일본에서도 도요토미가 몰락하고 #도쿠가와[德川家康]가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 전쟁은 처음의 목적인 도요토미의 체제 안전 및 유지에 대한 기대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왔을 뿐 #무익한 전쟁으로 한일 두 민족의 원한관계를 뿌리깊게 만들었다 #병자호란 #1627년(인조 5) 1월의 정묘호란으로 조선과 후금은 형제지국의 맹약을 맺었다 #후금은 명나라를 치기 위해 조선에 군량과 병선을 강요하는 등 압력을 가하고 #1632년에는 형제관계를 고쳐 군신관계를 맺고 조공을 늘리라고 요구하였다 #후금의 태종은 황제의 존호를 사용하기 위해 #1636년 12월 용골대(龍骨大) 등을 보내어 황제로 부를 것을 요구하였다 #인조는 사신을 만나지도 않고 국서도 받지 않았다 #4월 황제의 칭호와 더불어 국호를 청으로 고친 태종 #조선의 이런 도전적인 태도에 대하여 원정군 10만을 편성 #청태종이 지휘하여 그 해 12월 조선을 침입하였다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 #백마산성을 굳게 방비하고 #청군은 이 길을 피해 서울로 직행하여 진격 #출발한 지 10일 만에 서울 근교에 도달하였다 #조정에서는 바로 그 전날 비로소 청군이 침입했다 #이조판서 최명길(崔鳴吉) 등을 적진에 보내어 시간 #두 왕자 등을 강화로 피난시켰다 #인조는 길이 청군에 의해 차단 #12월 4일 밤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다 #청군의 선봉은 벌써 남한산성을 포위했고 #다른 부대는 아무 저항도 받지 않은 채 서울에 입성하였다 #포위된 지 45일 만에 식량 부족과 추위로 인하여 성 내의 장병들은 사기를 잃었고 #구원군은 도중에서 모두 청군에게 격파당했으므로 주화파(主和派)의 주장에 따라 마침내 항복하기로 하였다 #1월 10일 이후 교섭이 진행 #청태종의 요구 #조선의 왕이 친히 성문 밖에 나와 항복하고 #양국의 관계를 악화시킨 주모자 2/ 3명을 인도하면 화의에 응하겠다는 것이었다 #인조는 처음에는 이 제안에 대해 주저했으나 강화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부득이 1월 30일 성문을 열고 삼전도(三田渡 송파)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하였다 #우리나라 역사상 큰 치욕이었다 #조정은 청나라의 가혹한 요구조건을 수락하여 화의가 체결 #소현세자(昭顯世子 #봉림대군(鳳林大君 뒤의 효종)이 인질로 잡혀갔다 #주전파의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 #홍익한(洪翼漢 #3학사는 잡혀가 참형을 당하였다 #1639년 청나라는 조선에 강요하여 청태종의 송덕비를 삼전도에 세우게 했으며 #조선은 청나라에 복종하게 되었다 #군비를 갖추어 북벌계획을 비밀리에 진행했으나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병인양요 #신미양요 #흥선대원군은 처음에는 천주교도를 탄압하지 않았으나 #1866년(고종 3) 1월에 탄압령을 내려 불과 몇 개월 동안에 9명의 프랑스인 신부와 신도 8000여 명을 학살하였다 #탈출한 리델(Ridel F C) 신부의 보고를 접한 프랑스 공사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Roze P G) 제독에게 사실을 보고 #로즈 제독은 그 해 9월 군함 3척을 보내어 지형을 정찰한 뒤 철수하였다 #10월에 다시 군함 7척 #육전대 600명으로 조선을 침입하였다 이것이 병인양요이다

종교 개혁.[ Reformation ]

영어 및 독일어로 Reformation. 종교개혁은 16세기 전반, 유럽의 그리스도교, 그것도 로마 • 가톨릭 교계 내부에서 일어난 신학, 교의, 전례, 교회 체제 전반에 걸친 변혁운동이다. 중세 이후 그리스도교는 유럽의 사회, 정치, 문화, 사상 등 생활의 여러 분야와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이를 깊이 규정하였기 때문에, 이 변혁과 그것을 통해서 성립한 프로테스탄티즘은 르네상스와 함께 근대유럽세계 형성에 중요한 의의를 가지게 되었다.

종교개혁의 일반적 전제가 된 것은 로마교황권의 동요로 상징 지을 수 있는 것처럼, 중세 가톨릭교회 체제의 내부적인 구조변화이다. 가톨릭시즘은 중세유럽의 봉건제도와의 관계에서 일개의 거대한 법적 • 권력적 질서를 형성하였다. 교황권에 의해서 통괄된 성직자 신분의 계층질서, 지배체제만이 가톨릭시즘의 정통한 교의의 틀일 때, 모든 신앙 조항은 일종의 법적규정이라는 성격을 갖추며, 개인의 신앙은 신이 정한 교회의 전통적 권위에 대한 내면적인 복종을 의미하였다. 그리고 이런 권위나 그것이 강제하는 정통교의에 반한 신앙내용은 모두 <이단>으로서 세속권력의 협력 하에 엄격하게 금압되었다.

14세기경부터 정치적 의미에서의 봉건제도가 점차로 약체화되고, 각 지역에 영역적 • 집권적인 통일국가 체제가 구축됨에 따라서 원래 봉건적인 권력분산상황하에서만 그 보편성과 절대성이 보증되었던 교황권은 불가피하게 동요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교황의 아비뇽 유폐(1309~77)와 그에 이은 교회대분열(1378~1417)은 프랑스의 국민적 왕권의 대두에 의한 교황권의 공동화를 나타내는 전형적인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로마교회체제의 동요 중에서 몇 가지 종교적인 개혁이념이 탄생했다.

첫 번째
첫 번째는 교회대분열의 극복, 교회통치의 쇄신을 지향해서 열린 콘스탄츠 공의회(1414~18), 바젤 공의회(1431~49)의 두 공의회로 표현되는 개혁공의회 운동이다. 이는 주교계층이 중심이 되어서 교회통치체제를 종래의 교황절대주의에서 일종의 입헌군주제로 바꾸려는 것이며, 15세기 중엽의 교황권 제한주의(프랑스국민교회주의)의 성립이 나타내는 바와 같이, 국왕에 의한 중앙집권화의 노력과 그에 의해서 싹튼 내셔널리즘이 이와 결합하였다. 또한 이 체제개혁운동의 배후에는 속권과 교권의 분리를 제창하는 신학자 오캄 등의 새로운 교회통치이념이 작용하였는데, 가톨릭시즘의 중심적인 교의내용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진행 되지는 않았다.

두 번째
두 번째는 <종교개혁의 선구자>라고 하는 위클리프나 후스의 개혁운동이다. 그들은 교권과 속권의 분리나 교회통체체제의 변혁에 그치지 않고, 성서를 중심으로 하고 그에 근거하지 않는 교회의 관행 • 교의를 비판했기 때문에 이단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위클리프에 의한 성직자의 신분적 특권에 대한 공격과 성서의 영어역, 후스파에 의한 양종 성찬, 즉 속인신도에게도 빵과 포도주를 주라는 요구 등은 신도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이념을 나타내고 있는 점에서 종교개혁과 보다 깊이 결부되어 있다.

세 번째
세 번째는 신도 개개인의 영혼과 신과의 직접적인 교류를 구하는 내면화된 신앙으로서의 신비주의의 흐름이다. 독일의 에크하르트나 타울러, 『준주성범』으로 알려진 플랑드르의 토마스 아 켐피오 등으로 대표되는 이 신비주의는 도시의 발달에 지지받아서 중세 말기에는 널리 각국의 속인사회로 퍼지고, 체제 중에서 형해화한 신앙생활에 새로운 숨결을 주었다.

네 번째
네 번째는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와 결합한 개혁적인 그리스도교 철학인데, 이 사조는 가끔 신비주의와 혼합되어 있다. 프랑스의 르페브르 데타플, 네덜란드 출신의 에라스무스 등이 제창한 이 그리스도교적 휴머니즘의 이념은 고전연구를 통한 인간형성이라는 입장에서 역시 성서를 중시하고 그리스도 신앙을 원초의 순수한 모습으로 되돌리려는 지향에서 종교개혁에 큰 추진력을 제공했다.

루터의 복음주의
독일 중동부의 연방, 작센 선제후국의 수도 비텐베르크에서 아우구스티누스회의 수도사이며 대학의 신학교수인 마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속죄의 효력에 관한 <95>을 발표한 것이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었다. 깊은 죄의식과 예민한 양심에서 율법의 준수나 선행을 행함(공적)으로써 구원의 길을 주장하는 가톨릭시즘의 교의에 근본적인 회의를 품은 그는, 오컴신학의 연구나 상사인 슈타우피츠를 통한 신비주의자와의 접촉,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서에 대한 침체 중에서 구원 문제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이해에 도달했다.

<신앙 의인론> 또는 <복음주의>라고 불리는 것이 그것으로, <인간의 구원은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는 것에 의한다>라는 확신을 근저로 하고 있다. 그때 루터의 개인적 종교체험에 객관적인 증명을 뒷받침한 것은 구약성서의 『시편』과 신약성서의 바울 서간(『로마서』, 『갈라디아서』)이였다. <95>으로 표명된 그의 의문과 비판은 교황이 면죄부의 구입과 같은 외적인 <행위(공적)>로 신도의 죄 그 자체를 사면하는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며, 참된 내적인 참회와 유일한 구세주 그리스도의 어업(御業)으로 나타내는 신의 은총에 대한 전면적인 신앙에 의해서만 영혼이 구원받는다는 근본적인 확신의 귀결이었다.

<95>은 이처럼 교황청 재정의 수단이 되었던 면죄부 판매에 대한 비판에 그치지 않고, 교황권의 본질과 그리스도 신앙의 중핵에 관련된 중대한 논점을 포함하였기 때문에, 루터 자신의 예상을 훨씬 능가하는 폭넓은 반향을 일으켰다. 당초 로마교황청은 이 사건을 문제시하지 않고, 루터 측에서도 논제의 참뜻을 상세하게 해설한 서적을 발표해서 교황의 이해를 구하였는데, 면죄부 판매에 직접 관계하였던 도미니코회 신학자들과의 논쟁을 통해서 쌍방의 대립은 점차로 심해지고, 도미니코회의 고발로 이듬해 18년 6월에 루터에 대한 이단심리가 로마에서 개시되었다. 그리고 19년 6~7월, 교황측의 가장 유력한 정통 신학자 에크와 라이프치히에서 행하여진 토론회(라이프치히 토론)에서 루터가 결국 교황의 지상권을 명확히 부인하고, 공의회도 잘못을 범할 가능성이 있으며, 후스의 학설에도 복음적인 것이 있다고 공언하기에 이르러, 로마교회와의 결렬은 사실상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루터의 개혁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유일한 권위로 보고, 신앙자의 양심을 건 루터의 용감한 교황권 비판은 후텐을 비롯한 독일 인문주의자들의 강력한 지지를 얻고, 에라스무스를 존경하는 신학자 멜란히톤 등은 1518년 이후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루터의 동료교수로서 그 개혁운동의 협력자가 되었다. 그의 복음주의는 더욱 널리 시민층에서 농민층에 이르는 국민적인 세론을 획득하기에 이르게 되어, 그에는 당시 급속히 발전하였던 인쇄술의 힘이 크게 작용 하였으며, 루터 자신도 이 수단을 충분히 활용해서 많은 저술이나 논쟁문, 설교를 발표했다.

특히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20년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서 쓰여진 3대개혁론, 『그리스도교계의 개선에 대해서, 독일 국민인 그리스도교 귀족에게 고함』, 『교회의 바빌론 유폐』, 『기독교 교인의 자유』이다. 『독일국민인 그리스도교 귀족에게 고함』은 루터가 처음으로 독일인으로서의 국민의식에 서서 로마교황세력에 의한 재정적 수탈이나 성직매매, 그 외에 국민생활을 압박하고 올바른 신앙을 방해하는 여러 가지 악폐를 열거하고, 교회 당국자가 무능을 폭로하고 있는 현재, 통치권력을 신에게 위임받은 귀족(실제로는 영방군주인 독일제후)에게 교회생활 전반의 개혁을 돕도록 호소한 것이다. 거기에는 또한 성직자의 독신제나 일반적으로 특권적 신분으로서의 성직자의 부정, 즉 <만인제사주의(allgemeines Priestertum)> 이념이 성서에 의거해서 전개되고 있는데,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존재방식을 깊이 규정한 근본이념은 『그리스도 교인의 자유』에서도 <신앙 의인론>에 입각해서 다시 강하게 주장되었다.

루터에게 <자유>라는 것은 율법 앞에서 명확해진 죄로부터의 해방,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신앙으로만 신의 앞에서 의롭게 된다는 기독교 교인의 영적 • 내적인 자유이며, 이런 기독교 교인은 육체적 • 외적 존재로서는 자유로운 영혼의 기쁨에 넘쳐서 이웃에 대한 봉사에 몸을 바치는 신의 종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들 두 논저가 독일어로 널리 읽혀지고, 또한 국민적인 영향을 미친 것에 반해, 『교회의 바빌론 유폐』는 라틴어 신학자나 성직자용 저술인데, 여기에서 그가 가톨릭 교회의 7가지의 비적(사크라멘트)에 성서주의 입장에서 비판을 가하고 사크라멘트를 세례와 성찬의 두 가지만으로 한정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진전
로마에서는 1520년 6월에 교황 레오 10세가 이단판결이 내려진 루터에게 주장을 철회하지 않으면 파문한다는 내용의 교서를 발표했다. 독일 각지에 반로마감정이 고양되는 중에 여러 가지 방해를 받으면서 이 교칙이 루터에게 도달한 것은 가을이 되어서였다. 루터는 12월 10일, 이를 대중이 보는 앞에서 불 속에 던져서 결의를 나타냈으므로, 다음해 21년 초 정식으로 파문 교칙이 나왔다. 그때의 독일(신성로마제국) 황제 칼 5세는 스페인왕이기도 하며, 엄격한 가톨릭 신자였는데, 그는 황제선거시 은혜를 입은 작센 선제후에 대한 정치적 배려로 루터의 처치에 대해서 교황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21년 봄, 보름스에서 열린 제국의회(보름스 국회)에 황제가 루터의 출두를 요구하고, <이단적> 주장을 철회할 기회를 준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루터는 양심을 굽히지 않고 취소하라는 요구에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황제는 보름스 칙령을 발하여 그의 제국공민권을 박탈하고 그의 저작의 금압을 명령했다.

루터의 보호자인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현공)의 힘으로 바르트부르크성에 몸을 숨긴 루터는 여기에서 신약성서의 독일어역(『루터역 성서』)이라는 중요한 일을 단기간에 이루었다(1522년 간행). 한편 황제는 마침 이 무렵 발발한 프랑스와의 전쟁(이탈리아 전쟁) 때문에 10년 정도 독일을 떠났기 때문에 보름스 칙령은 거의 공문화 되고, 작센, 헤센 등 각지의 영방이나 제국도시에서 복음주의 선교가 행하여지고, 수도원의 해산, 전례 개폐 등을 수반하는 교회생활의 변혁이 세속권력의 협력 하에서 추진되었다. 이렇게 루터주의의 확대에 촉발되어서 더욱 급진적 • 민중적인 종교개혁운동이 대두했다. 

멜란히톤 등 정통적인 루터 주의자에게 <광신파(Schwarmer)>라는 낙인이 찍힌 이 일파의 움직임은 일찍이 루터의 바르트부르크 은거 중인 비텐베르크에서 그의 동료 카프슈타트 등이 지도하는 소요로 나타났다. 사태를 우려한 루터의 비텐베르크 귀환(1522년 봄)으로 소요는 진정되었는데, 이 같은 급진주의는 전통적인 사회체제를 변혁하려는 하층시민이나 농민의 요구와 결합해서 각지로 비화하고, 교회질서를 혼란시키는 위험을 낳았다. <광신파>의 가장 유력한 지도자로서 활약한 것이 토마스 뮌처로 그는 1525년의 유명한 독일농민전쟁에 큰 역할을 하고, 반란이 영방군주에게 무력으로 진압되는 중에 처형되었다. 이 경험은 원래 사회관에서 보수적이었던 루터나 협력자들에게 강한 충격을 주고, 이후 종교개혁의 정치적 주도권은 영방군주로 이행되었다.

교회제
중세 가톨릭시즘은 본래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해서는 <교회 안에 국가가 있다>라는 입장을 취하였다. 중세 말기의 국민국가 형성의 움직임은 교황통치체제의 동요에 대응하여, 프랑스, 스페인 등에서 영역 내의 교회를 왕권의 통제 하에 두려는 경향을 나타냈는데, 종교개혁은 속권의 종교적 임무를 강조함으로써 이 영역교회주의를 확립했다. 제후령의 연합체에 지나지 않는 독일에서는 그것이 제국레벨의 국민교회가 아니라, 영방교회제라는 형태를 취한 것이다.

루터파 제후에 의한 영방교회체제의 조직은 스페인왕인 황제 칼 5세가 프랑스와 호응하는 오스만 터키세력의 오스트리아 침입의 위험에 직면해서, 1527년의 슈파어어 제국의회에서 그들에게 부득이하게 정치적 양보를 하게 되었기 때문에 더 한층 촉진되었다. 정세의 호전과 함께 29년의 제2회 슈파이어 제국회의에서 황제 측이 이 양보를 철회했을 때 루터파 제후는 이에 강력하게 항의하고, 이것이 프로테스탄트라는 호칭의 기원이 되었다. 그 후 루터파를 구교회로 되돌리려는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단 뿌리를 내린 영방교회 체제를 전복시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절박한 가톨릭 세력과의 정치적 대결을 어쨌든 회피하고자 멜란히톤은 최대한 온화한 표현을 취한 복음주의 신앙조항을 작성하여 30년의 아우구스부르크 제국의회에 제출했는데(<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 가톨릭 제후가 이를 물리쳤으므로, 루터파 제후와 제국도시는 슈말칼덴 동맹으로 결집해서 대결에 입하였다.

스위스의 종교개혁
이보다 앞선 1522년 이후,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영향하에 츠빙글리가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시정부와 제휴해서 종교개혁운동을 전개하고, 이 운동은 바젤, 베른 등에도 확산되었다. 루터파의 헤센 방백 필립(Philipp der Grossnurige, 1504~67)은 독일의 프로테스탄트와 츠빙글리파를 합동시키고자 노력하고, 29년, 마르부르크의 거성에서 루터, 멜란히톤과 츠빙글리 등 스위스의 개혁지도자와의 종교회담(마르부르크 회담)을 열었는데, 성찬의 전례의 해석을 둘러싸고 양자는 의견이 맞지 않아서 합동의 시도는 좌절되었다. 얼마 후에 일어난 스위스 가톨릭 각 주와의 전쟁에서 츠빙글리가 31년에 패배한 후에 이 지역의 종교개혁은 괴멸되었다.

츠빙글리의 개혁운동도 신도의 공동체인 교회와 시민공동체로서의 도시의 권력을 결합한 점에서 일종의 영역주의를 추구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은 순수한 성도공동체의 이념을 내걸어서 유아세례를 부정하여, 당국의 탄압으로 스위스에서 쫓겨났다. 이것이 재세례파의 발흥이다. 때마침 독일 농민전쟁 시기에 재세례파는 독일에 들어와 농민이나 소시민이 주요 담당자가 되어서 네덜란드 등에도 확산되었는데, 루터파는 이 운동을 <광신파>의 급진주의와 동일시하여 엄격하게 박해를 가했다. 또한 마찬가지로 독일농민전쟁 무렵, 루터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영혼의 구원에 도움이 되는지의 문제로 에라스무스와 대립하여 결국 갈라지게 되었다. 이처럼 루터파는 복음주의의 원리를 공유하는 다른 <과격한> 여러 세력도, 온화한 인문주의적 개혁노선도 모두 물리침으로써 교의적 경직화의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

영방분립주의와 결합한 정치적인 프로테스탄티즘과 가톨릭 진영과의 적대는 더욱더 심화되어서, 트리엔트 공의회(1545~63)의 소집으로 가톨릭시즘의 내적 쇄신과 교황권 부흥(가톨릭종교쇄신)의 단서가 된 이듬해, 황제는 공의회 출석을 거부한 독일 • 프로테스탄트의 무력탄압에 나섰다. 이슈말칼덴 전쟁(1546~47)은 황제측의 승리로 끝났는데, 그에 편승해서 황제의 통치권을 강화하려는 카르 5세의 야심은 52년에 종파를 초월한 독일 제후의 반격을 맞아서 허무하게 무너졌다. 실의에 빠진 황제가 네덜란드로 물러난 후, 칼의 아우 펠디난트 1세가 주재하는 아우구스부르크 제국의회에서 독일의 종교문제에 정치적인 결착이 맺어졌다. 이런 아우구스부르크의 종교화의에 의해서 루터파는 제국 내에서의 가톨릭과의 동권이 인정되었는데, 두 종파를 선택할 권리가 제후와 제국도시 당국에만 주어진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결정은 영방교회제의 법적인 시인을 의미하였다. 프로테스탄트의 주권자가 그 영역 내의 교회 재산 • 수도원령을 접수하고, 교회통치권을 장악하는 이런 국교회체제는 독일 외에 루터주의를 수용한 북구 왕국에서도 실현되었다.

칼비니즘의 등장
아우구스부르크의 종교화의와 거의 같은 무렵, 스위스의 제네바에서는 칼뱅에 의한 종교개혁이 최종적으로 승리하였다. 인문주의자로서 출발해서 루페부르 데타플 등의 복음적 휴머니즘의 영향 하에 신앙을 형성한 칼뱅은 1530년대에 본격화된 프랑스 왕권에 의한 복음주의에 대한 탄압으로 스위스로 망명하고, 『기독교강요』(1536) 이후 프로테스탄티즘의 제2세대를 지도하는 지위로 추대되었다. 

G. 파렐의 요청으로 제네바 교회의 개혁운동에 몸을 던진 그는 신도의 공동체라는 의미에서의 개별 교회의 자율을 중시하고, 그 기관으로서 장로 제도를 도입하는 한편, 루터파가 유지하였던 주교(감독)제도를 폐지함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개혁파 교회의 형성을 도모하였다. 신의 주권성을 강조하고, 신도 생활의 엄격한 윤리적 규율을 요구하는 칼뱅의 개혁이념은 그 불관용성으로 부득이하게 반대세력과 투쟁하게 되었는데, 강인한 의지력으로 결국 이 위기를 극복했다.

현세의 <하나님의 영광>의 실현을 지향하는 행동주의는 반종교개혁의 기수인 예수회와 전투적 성격에서 유사하며, 제네바에 창설된 신학교는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자 녹스를 비롯해 많은 유능한 선교자의 양성을 통해서 프로테스탄티즘 확대에 큰 역할을 하였다. 칼비니즘은 전통적 사회질서를 중시하는 루터파에 비하면 자본주의적 영리활동의 긍정, 가톨릭 군주에 대한 정치적 저항을 용인하는 등 보다 자유주의적 성격을 가지며, 근로자층 외에 귀족 사이에도 지지를 얻어서 프랑스의 위그노 전쟁이나 스페인 지배에 대한 네덜란드의 독립운동(80년 전쟁) 등에서 전투적 에너지를 실증했다.

영국에서는 헨리 8세 때에 오로지 정치적 동기에서 교황권으로부터의 독립, 국교회 체제로의 이행이 시작되었는데, 프로테스탄트 교의의 수용은 에드워드 6세 치하의 일이며, 주교제와 독자적인 예배형식을 가진 앵글리카니즘의 확립은 메리여왕의 가톨릭 반동을 거쳐서 엘리자베스 1세 시대로 가져갔다. 이 국교회체제를 비판하는 장로파교회는 많은 박해를 받으면서 세력을 확장하여 퓨리탄이라고 하는 비국교도의 주류를 형성해갔다.

영국의 종교개혁
영국의 종교개혁이라는 것은 영국 교회에 대한 로마교황의 종교적 • 사법적 • 재정적 관계를 단절하고, 교황 지배에서 교회를 해방시킨 국가의 행위였다. 로라드파의 운동이나 국민 사이에 확산되었던 반성직자 감정, 루터주의의 이입, 또한 W. 틴달의 영역 성서의 간행(1525) 등 종교개혁을 가능하게 한 원인 • 배경을 나열할 수 있는데, 이 종교개혁을 성립시키기 위해서 작용한 국가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대법관 울지 추기경이 헨리 8세와 캐서린의 이혼문제 처리에 실패한 후, 교황청에 대한 협박, 그리고 국왕에 의한 교회지배의 방향이 나타나, 1533년의 상소금지법(또는 상고금지법)에 의해서 교황과 영국의 관계는 결정적인 단계를 맞이했는데 이 법은 유언 • 결혼 • 이혼소송 등이 국왕사법관할권 내에서 처리될 것을 명령하고, 교황좌 • 외국법정의 소환, 또한 그에 대한 상소를 금지하고, 국왕이혼문제를 왕국 내에서 처리하는 것을 당면의 목적으로 하였다.

이 법에는 국왕에 의한 성속(聖俗)의 일원적 지배, 국가통일이 명시되고, 영국이 주권국가라는 것을 선언해서 외국주권자로부터의 독립이 주장되었다. 이런 종교개혁, 영국 국교회(앵글리칸 처치)의 성립은 국가주권의 선언과 연동해서 생긴 일이며, 34년의 국왕지상법(또는 수장령)에 의해서 로마교회로부터의 이탈의 총 마무리가 행하여졌다. 이어서 36년과 39년의 2회에 걸쳐서 수도원 해산법이 나와 전수도원 재산의 몰수가 행하여졌다. 그 이유로서는 국가재정 강화설이 유력해서, 몰수수도원령은 점차로 매각되어 주로 젠트리의 부를 풍부하게 했다.

36년의 소수도원 해산법이 의회를 통과한 얼마 후 북부 여러 주에서 <은총의 순례>라고 하는 농민반란이 일어나 종교개혁, 수도원 해산의 반대를 주장하고, 농민보유지의 보전을 요구하였는데 진압되었다. 이 시기의 국교회의 교의는 <10>, 『주교의 서』(1537)에 보이며, 보수 • 개혁 두 파의 대립 결과 가톨릭, 프로테스탄트 두 요소가 혼재하고 있다. 한편 토마스 크롬웰에 의해서 2회에 걸쳐서 나온 <국왕지령>(1536, 38)에서는 루터적 종교개혁과 에라스무스적 교회 • 사회개혁이 병용되어 국교회의 더 한층의 개혁을 지향했다. 이에 대해서 이미 1521년 교황으로부터 <신앙의 옹호자>라는 칭호를 얻을 정도의 반루터주의자 헨리 8세는 종교개혁의 진전을 좋아하지 않아 노포크공, 가드나 주교와 함께 39년 <6>을 통과시키고, 실체설과 일종성찬(communion in one kind)의 확인, 성직자의 결혼금지 등 보수화를 강화하고 이듬해에는 크롬웰을 처형했다.

헨리 8세가 지향하는 종교개혁은 교황없는 가톨릭시즘 또는 섬나라 가톨릭시즘이라고 할 수 있다. 프로테스탄트로서 교육받은 에드워드 6세가 1547년 왕위에 오르자, 섭정 사마셋 공은 <육개조법>을 철폐해 성직자의 결혼을 인정하고, 49년의 예배통일법에 의해서 제1기도서가 확정되고, 52년 노산바란드공 지배 하에서는 보다 개혁적인 제2 기도서가 나오고, 이듬해 T. 크랜머 대주교는 프로테스탄트적 신앙조항 <42>를 냈다. 메리 1세가 즉위(1553)하자 가톨릭 복귀가 일어나, 의회는 에드워드 6세 때의 여러 율법을 철폐해 47년 당시로 돌아가고, 나아가서 54년의 의회는 헨리 8세의 반교황적 법률을 물리쳐서 종교개혁전의 상황을 회복했다. 단, 몰수 수도원령 회복의 기도는 많은 보상금을 필요로 하였기 때문에 실패로 끝났다. 55년부터 이듬해에 걸쳐서 크랜머, H. 라티머, N. 리드리, J. 푸파 등의 개혁파 성직자가 이단으로서 화형에 처해졌다.

엘리자베스 1세(1558~1603) 때 형세는 또 한 번 역전해서, 59년의 국왕지상법에 의해서 여왕은 국교회의 <지상의 통치자>가 되었고, 예배통일법에 의해서 에드워드 제2 기도서를 개정해서 신기도서를 확정하였으며, 63년에는 42개조를 개정해서 <39>을 만들었고, 71년의 의회는 이를 승인 • 가결하였다. 한편 아일랜드에 관해서는 1536년 헨리 8세는 아일랜드 의회에서 국왕지상법을 결의시키고, 60년 엘리자베스 1세도 국왕지상법과 예배통일법을 성립시켜서 국교회를 강제하였는데, 저항이 커서 국교회는 주로 아일랜드 중의 영국화된 부분에만 머물렀다.

이와 같이 영국국교회는 가톨릭시즘과 프로테스탄티즘의 중도를 가는 교회가 되고, 영국인 생활과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중도 • 중용성으로 퓨리탄의 공격을 받고, 영국혁명을 맞이해서 결국 왕정복고시에 국교회로서 재생하여 현대에 이르고 있다. 확실히 주권국가 형성기에 성립한 국교회는 국가교회라는 형태로 종교개혁을 실현하였다. 따라서 국가와 교회의 긴밀성은 피하기 어려워 체제교회로서 나타난 것으로서, 장래 국교회제도가 폐지될 때가 온다면 그때야말로 영국 종교개혁은 비로소 완성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개혁과 근대 세계
종교개혁운동은 문화 영역의 르네상스 운동과 함께 근대유럽의 형성에 큰 역할을 하였다. 내셔널리즘과 결합한 성서국어역의 보급이나 <만인사제주의>에 대응하는 성직자의 신분적 특권의 부인, 수도원제의 폐지와 교회재산의 접수, 속인신도의 직업노동의 종교적 평가, <양심>의 자율성에 나타난 개인주의 등은 각각의 의미에서 생활 여러 분야의 근대화의 추진력이 되었다. 그러나 <정교분리>나 <신교의 자유>의 실현이라는 점에서는 루터파, 칼뱅파를 불문하고 통치권력이나 영역주의와 결합해서 체제화된 정통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당분간 장애가 되며, 종교전쟁이나 <마녀사냥>의 촉발에 힘을 빌려주었다. 이런 면에서 그리스도교의 근대화나 새로운 과학적인 세계관의 성립에 대해서는 르네상스 문화의 조류와 함께 정통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 이단시된 재세례파 등의 보다 개인주의적 종파가 장기적 관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왕이 교황과 단절하고 종교의 수장임을 선포했지만, 실질적인 왕의 종교 개혁의 입장을 확고하게 만들어 준 것은 토머스 크롬웰의 역할로 비롯 되었다. 토머스 크롬웰은 영국 내란시 청교도 혁명의 주도자인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과 먼 친척 관계였던 사람으로, 젊은 시절 플랑드르와 이탈리아에서 군인으로 복무도 하고 무역업도 하다가 금융업과 새로운 정치 사상(르네상스)을 배워 온 후 고리 대금업으로 부자가 되었다. 그 후 울지 추기경과 친분이 두터워져 그 연유로 왕과의 인연도 맺게 되었는데, 그는 먼저 공소원 판사로 시작하여 상서, 재정관, 왕실 시종관을 거쳐 가터 기사 칭호를 받은 후 에식스 백작이 되었다.

그는 1529년부터 왕이 제안한 모든 종교에 대해 특별법을 공표했는데, 이러한 특별법은 먼저 오랫동안 싹터 온 섬나라적 국민 의식(독립 및 자유 의식)의 종교적 표현이 국민들이나 일부 성직자들에게 호응을 얻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다음으로 르네상스 정신에 의해 인간성을 중시하는 사상에 젖어 있던 크롬웰이 가톨릭계에 대한 개혁 작업을 전혀 양심적인 가책 없이 처리했기 때문이다.

특별법의 주요한 내용은, 첫째 잉글랜드의 경우 왕에게 법률상 교회의 수호자 겸 최고 수령이라 칭하도록 공표하는 최고 수권자법(Act of Superemacy), 둘째 교황에게 바치던 감사 헌금제를 폐지하는 일, 셋째 교황청에 일반 사건을 상소하는 것을 금하는 상소 법령(Status of Appeals), 그리고 마지막으로 최초 결혼의 무효 및 그에 따른 최초 자녀에게 주는 왕위 계승법(Act of Succession)의 취소 등이었다.

이러한 특별법의 시행에 대해 교황은 왕을 파문하고 프랑스나 에스파냐의 도움을 청하는 등 가능한 조처를 다 써 보았으나 효과가 없었다. 또 잉글랜드 내에서는 역사적으로 이어온 정통적인 가톨릭을 그래도 인정할 것을 주장하던 보수파 토머스 모어(대사법관)와 존 피셔 주교가 끝까지 이 법을 인정하지 않다가 1535년에 교수형에 처해지는 사건과 수도사들이 특별법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다가 박해를 당하는 상황도 벌어졌다.

수도사의 박해는 크롬웰에 의해 이뤄졌는데, 그는 국고 대리 감독의 자격으로 조사 서류를 작성한 후, 이를 의회에서 승인받아 정책적으로 1536~1539년 사이 4여 년 동안 1200여 개의 수도원을 파괴했고, 이렇게 파괴된 수도원 소유의 토지들은 국고로 들어와 왕과 관료들에게 다시 배분됨으로써 이들을 부유하게 했다. 그리고 이러한 재산을 지키기 위해 잉글랜드에서는 가톨릭으로 다시 환원하지 않은 결과 국교가 제자리를 잡게 되었으므로, 수도원의 파괴를 시도한 크롬웰의 행동은 헨리 8세의 종교 개혁이 완성 단계에 들어가게 해 준 대표적인 역사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헨리 8세는 영국형 가톨릭을 원했기에 이에 맞는 국교 신조 6조를 만들었고, 이를 의회에 통과시켜 위반시에는 화형까지 할 수 있는 법률을 만들었다. 그 조항들을 보면, 첫째 성찬은 허락하며, 둘째 정절에 대한 서약을 준수할 것, 셋째 성직자의 독신 존중과, 넷째 일반인들이 성직자에게 고해하는 것의 승인, 마지막으로 개인적 미사의 승인 등이었다. 이는 프로테스탄트와는 성격이 달랐으므로 순수 프로테스탄트들도 박해를 받게 되었고 최초의 영어판 성서 인쇄자인 윌리엄 틴들(William Tyndale)은 결국 화형당하였다.
윌리엄 틴들의 초상과 최초의 영어 성경의 일부 국교가 신교의 특성을 갖고 있었다고 하나 진정한 신교가 아니었기에 이를 거부하는 부류들이 나왔다. 그 대표적 인물이 윌리엄 틴들인데, 그는 마침내 순교하였다. [윌리엄 틴들의 초상 : Source=Foxe's Book of Martyrs]

잉글랜드가 국교화되면서 그 첫 번째 대주교는 크랜머였는데, 이때 그의 주선 아래 1533년 1월 헨리 8세는 잉글랜드 북부 젠트리 집안의 처녀인 앤 불린(Anne Boleyn)과 비밀리에 결혼하고 그녀를 그 해 부활절에 왕비로 책봉했다. 그런데 그녀는 딸인 엘리자베스를 낳고 아들을 유산함으로써 헨리는 또 그녀와도 이혼을 시도하려 하였다. 그러나 앤은 끝까지 왕비로서의 권세를 빼앗기지 않은 채 왕에 대한 불복종죄로 1536년에 참수형을 당했다. 같은 해 공교롭게도 헨리의 첫째 부인인 캐서린 왕비도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러한 국내의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도 헨리는 웨일스를 1535년에 합병했고, 1542년에 스코틀랜드를 침략하는 여유를 보였다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5세는 헨리 8세의 조카(헨리 8세의 누이 마거릿의 아들)였는데, 헨리 8세의 큰딸인 메리 튜더와 결혼하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로써 헨리 8세와 그의 사이가 서먹서먹해졌으며, 또 헨리가 종교 문제로 파문당했을 때 제임스 5세가 교황과 친분이 두터웠기에 헨리의 반대편에 서게 됨으로써 둘 사이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헨리 8세에게 스코틀랜드를 침략하게 했다. 이 당시 제임스 5세는 헨리의 침공을 피하던 중 왕비의 딸 순산 소식을 접하며 외딴 성채에서 병사했는데, 그때 낳은 딸이 바로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이다.

앤 불린을 처형한 후 헨리 8세는 세 번째 왕비로 제인 시모어(Jane Seymour)를 맞이하여, 마침내 그녀로부터 그렇게 원하던 왕자(에드워드 6세)를 보았다. 하지만, 시모어는 산욕열로 부귀 영화를 누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는데, 왕은 그녀의 사후에도 세 차례의 결혼과 이혼을 되풀이했다. 결국 그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에는 한 명의 여인도 그의 곁에 없었고, 오직 크랜머 대주교만 있었다. 왕은 그의 손을 잡고 에드워드 왕자를 부탁하며 쓸쓸히 세상을 떠나갔다.

면벌부를 파는 교회
르네상스가 유럽에 널리 퍼지면서, 엄청난 힘을 갖고 있던 교회도 차츰 무너져 갔어요. 왕들은 교회의 힘을 누르며 맞섰지요.

“이제부터 우리나라의 성직자는 내가 뽑겠소. 또한 앞으로 교회는 함부로 돈이나 물건을 걷지 마시오.”

하지만 독일은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 교회에 대한 반대가 약했어요. 그래서 로마 교황은 다른 나라보다 독일에서 더 많은 돈을 거둬들였지요. 독일의 농민들은 점점 살기가 힘들어졌어요. 그런데다가 교황 레오 10세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질렀어요.

‘성 베드로 성당을 보다 크고 화려하게 지어야겠는데, 돈을 어떻게 마련한담?’

그러다가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지요. “맞아! 그거야!”

교황은 성직자들을 시켜 죄를 지은 사람을 용서해 준다는 증서인 면벌부를 만들어 팔게 했어요. 죄를 용서받는다는 말에 사람들은 면벌부를 샀다.

면벌부란 죄를 지은 사람의 벌을 용서해 준다는 로마 교황청의 증서란다. 십자군 시대 때는 전쟁에 참여하면 죄를 용서받을 수 있었지. 로마 교회에서는 헌금을 한 사람들은 죄를 없애 주는 제도도 있었다.

종교 개혁의 시작
로마 교황이 면벌부를 파는 것에 반대하고 나선 사람이 있었어요. 그 사람은 바로 독일의 한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던 루터였다.

“말도 안 되는 짓이오. 교회가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돈을 벌다니!”

루터는 교회의 잘못된 점 95가지를 적어 교회의 문에 붙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회개하라’고 말한 것은 스스로 깊이 반성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교황이나 성직자가 죄를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면벌부를 사서 죄를 용서받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죄를 용서받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는 것뿐입니다.”

루터의 글을 본 사람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보게! 루터가 쓴 글을 보았나? 루터가 하는 말에 따르면 교황의 면벌부는 순 엉터리라더군!”
“하긴 그래! 무슨 종이 쪼가리가 죄를 없애 준다는 건가? 돈이나 받으려는 거지!”

루터는 면벌부 파는 일을 그만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루터는 또 성직자가 한 나쁜 일들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 교황이 성직자를 뽑는 것과 세금을 걷는 것도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외쳤어요. 화가 난 교황은 루터를 로마 교회에서 쫓아내 버리겠다는 내용의 글을 루터에게 보냈어요. 하지만 루터는 사람들 앞에서 종이를 불에 태워 버렸다.

“이런 것으로 겁주면 내가 포기할 것 같아?”
“아니, 어쩌려고 저러지? 교황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

사람들은 루터의 행동에 놀라워했어요. 그러나 이러한 루터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는 사람들도 많았지요. 특히 교황을 싫어하던 여러 지역의 제후들이 루터를 따랐어요. 교황의 착취로부터 고통스러워하던 시민들도 루터를 따르기 시작했다.

“루터는 못된 교황으로부터 우리를 구해 줄 것이오!”
“맞습니다. 루터는 우리의 영웅입니다.”

루터는 이에 더욱 용기를 얻어 라틴 말로 되어 있던 성경을 독일 말로 옮겼다.
‘우선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게 해야 해.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정말 무엇인지를 알려야지!’

루터가 번역한 성경은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갔어요.

루터의 성경 번역은 아주 큰 의미가 있다. 이전까지는 라틴 말로 된 성경이 대부분이라 보통 사람들이 성경을 읽기 힘들었거든요. 그런데 이제 사람들이 쉽게 성경을 읽을 수 있어서 성직자들은 성경과 다르게 말하거나 거짓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누구보다도 루터를 환영한 사람들은 농민들이었어요. 농민들이야말로 교황으로부터 가장 고통을 받던 사람들이었으니까.

“우리도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욕하고 헐뜯습니다. 우리도 일어나 권리를 찾읍시다.”

농민들은 반란을 일으켰어요. 농민들은 성직자는 물론이고 지방 영주들의 성에도 쳐들어갔어요. 그리고 가는 곳마다 크게 이겼다.

“노예나 다름없는 농노를 풀어 주어라!”
“십일조를 없애라!”

농민들은 주장했다.

신교와 구교
루터는 농민들의 반란에 반대했어요.

“법에 따르지 않고 폭력을 쓰는 것은 질서를 어지럽히는 일다.”
루터의 말에 용기를 얻은 영주들은 군대를 일으켜 농민들의 반란을 누르기 시작했어요. 이 과정에서 무려 10만 명의 농민들이 끔찍하게 죽었지요. 이제 농민들은 더 이상 루터를 따르지 않았어요. 하지만 루터를 계속 따르던 영주들과 도시 사람들은 새로운 종교인 루터교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교황과 황제도 마침내 1555년 루터교를 정식 종교로 받아들였답니다. 지역을 다스리는 제후는 가톨릭과 루터교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 뒤 루터교는 신교 또는 프로테스탄트라고 불렸어요. 프로테스탄트는 ‘저항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지요. 그리고 가톨릭 교회를 구교라고 불렀어요. 이렇게 해서 유럽의 크리스트교는 교황을 중심으로 한 로마 가톨릭과 이에 항의해서 새로 생긴 신교로 나누어진 거예요.

가톨릭도 신교가 더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교리를 다시 다듬었어요. 그리고 새로운 지역으로 가톨릭을 전파하기 위한 활동을 시작했지요. 이렇게 신교와 구교가 서로의 세력을 넓혀 나가는 과정에서 종교 전쟁도 일어났어요. 하지만 훗날에는 상대방의 종교를 서로 받아들이게 되었답니다.

신교가 생기고 나서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는 가톨릭과 신교 사이에 끊임없이 싸움이 일어났어. 네덜란드의 독립 전쟁, 프랑스의 위그노 전쟁, 독일의 30년 전쟁이 있었단다.

핵심 되짚기
1) 교회의 타락
로마 교황 레오 10세는 성당을 다시 짓기 위해 면벌부를 팔았어요. 면벌부를 사는 사람은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했지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면벌부를 샀고, 교황은 엄청난 돈을 챙겼어요.

2)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루터는 교황이 면벌부를 파는 것에 대해 반대했어요. 면벌부로는 죄를 용서받을 수 없다고 했지요. 로마 교회는 루터를 교회에서 쫓아냈어요. 하지만 루터를 따르는 제후들과 농민들이 늘어났어요.

3) 신교
루터는 새로운 종교인 루터교를 만들었어요. 루터교는 1555년 정식 종교가 되었고, 이를 신교 또는 프로테스탄트라고 해요.

30년 전쟁
유럽 최대의 종교 전쟁
전쟁
국가 : 신성 로마 제국 등 가톨릭 세력 vs. 보헤미아 등 반 가톨릭 연합
연도 : 1618~1648년
마르틴 루터, 로마 교황청에 도전장을 내다/ 루터를 지지하는 신교와 구교 간에 갈등이 깊어지다/ 30년 전쟁이 시작되다/ 유럽의 여러 나라가 참여하여 국제전으로 발전하다/ 30년 전쟁으로 유럽의 역사가 바뀌다

1517년 유럽에서는 독일의 신학 교수인 마르틴 루터에 의해 종교 개혁이 일어났어요. 이후 그를 지지하는 신교파가 생겨나면서, 가톨릭을 믿는 구교파와 갈등이 깊어졌지요. 그중 30년 전쟁은 신교파가 구교를 강요하는 신성 로마 제국에 반기를 들면서 일어난 종교 전쟁으로, 30년 동안 계속되었어요.

로마 교황청에 도전장을 내다
로마 교황인 레오 10세는 산 피에트로(성 베드로) 대성당을 보수 공사하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면벌부(면죄부)를 팔게 했어요. 면벌부는 교회에 돈이나 재물을 바친 사람에게 그 죄를 면한다는 뜻으로 발행하던 증서예요. 당시 교회는 부정부패가 심했어요. 교황도 사치를 일삼아 무려 65가지 코스로 이루어진 저녁 식사를 할 정도였지요. 또 성직을 매매할 뿐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 교회 의식에 쓰이는 신성한 물건을 팔기도 했어요.
16세기 가톨릭 교회의 면벌부,
독일에서 면벌부 판매를 맡은 신부는 '땡그랑!'하고 면벌부를 구입한 돈이 통에 떨어지는 순간, 죽은 자의 영혼이 지옥 불에서 뛰어나온다고 설교했어요. 성직자였던 마르틴 루터는 이와 같은 거짓말을 용납할 수 없었어요. 그는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여 종교 개혁에 불을 붙였어요.

루터는 95개조 반박문에서 "구원은 오직 신앙, 은총, 말씀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주장하면서 세상에서 최고로 부자인 교황은 왜 자신의 돈으로 대성당을 짓지 않고, 가난한 신자들의 돈으로 공사를 진행하느냐고 비판했지요.

루터는 반박문의 36조에서 "진실로 회개한 크리스트교도는 면벌부가 없어도 징벌이나 죄에서 완전히 해방된다."라고 하여 농민을 비롯한 신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었어요.
마르틴 루터(1483~1546년)와 그가 발표한 95개 조의 반박문,
루터를 지지하는 신교와 구교 간에 갈등이 깊어지다
로마 교황청의 착취에 고통 받던 독일 농민들과 독일을 통치하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게 불만이 많았던 독일의 일부 제후들은 루터를 열렬히 지지했어요. 이후 루터를 지지하는 신교파와 로마 교황청을 지지하는 구교파는 대립을 거듭하다가, 결국 전쟁을 하게 되었어요.

독일 전역이 동요하게 되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카를 5세는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제국 회의를 소집하여 '제후의 신앙에 따라 제후가 다스리는 지역의 신앙이 결정된다.'고 선언했어요. 이로써 루터파의 자유가 허용되었지요.

30년 전쟁이 시작
17세기 초, 신교와 구교 간의 갈등이 다시 깊어졌어요. 신성 로마 제국과 교황이 신교를 믿는 도시를 강제로 가톨릭을 믿는 제후의 통치 지역으로 편입시켜 버렸기 때문이에요. 여기에 저항하여 신교를 믿는 팔츠의 선제후를 중심으로 신교파 연합이 구성되었어요. 그러자 구교 제후들도 바이에른을 중심으로 가톨릭 연맹을 결성했지요.

그런데 1618년, 30년 전쟁이 일어나는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어요. 구교를 믿는 보헤미아의 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페르디난트 2세가 신교의 종교 자유를 보장했던 칙령을 취소해 버린 거예요. 그러자 보헤미아 의회는 그를 왕의 자리에서 내리고, 팔츠의 선제후인 프리드리히 5세를 왕으로 세웠지요. 이것을 계기로 30년 전쟁이 시작되었어요.
잠깐! 선제후는 누구일까?
선제후는 신성 로마 제국에서 독일 황제를 뽑는 권한을 가진 사람들을 말해요. 왕이나 황제 다음으로 높은 권한을 가지고 있었지요.

유럽
여러 나라가 참여하여 국제전으로 발전하다
30년 전쟁은 독일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비극적인 전쟁이었어요.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독일의 민중들은 가족을 잃고 헐벗고 굶주렸으며, 나라 전체가 황폐해졌어요. 800만여 명은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지요. 어린이와 여성들은 오갈 곳 없는 신세로 전락하였고, 길에는 다친 사람, 부랑자가 넘쳤어요.

이렇게 전쟁이 오랫동안 이어진 것은 여러 나라들이 개입하여 국제 전쟁이 되었기 때문이에요. 신교가 패배하면, 신교를 믿는 덴마크와 네덜란드, 노르웨이, 스웨덴이 신교 편에 서서 구교를 공격하였고, 구교가 패배하면, 구교를 믿는 에스파냐와 오스트리아가 구교 편에 서서 신교를 공격했어요. 프랑스는 구교를 믿는 국가였지만, 에스파냐와 오스트리아와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신교 편으로 참전했지요.

독일(신성 로마 제국)에는 종교 개혁 이후, 가톨릭과 개신교가 함께 어우러져 있었어요. 그러던 17세기 초, 개신교 제후국들이 모여 프로테스탄트(개신교도) 모임을 만들었어요. 그러자 이에 맞서기 위해서 가톨릭 제후국들도 또 다른 제후국 바이에른(오늘날 독일 남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가톨릭 동맹을 만들었지요.

그로부터 10년 후, 개신교 제후국 보헤미아(오늘날 체코 서부 지역)의 왕이 된 페르디난트 2세가 신교도를 탄압하는 사건이 일어났어요. 이에 엄청나게 화난 보헤미아와 오스트리아의 프로테스탄트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어요.

“우리는 페르디난트 2세를 황제로 인정할 수 없다!” 그러고는 팔츠 선제후를 새 국왕으로 올리고 페르디난트 2세와 싸웠어요. 이때 페르디난트 2세는 재빨리 에스파냐에 도와달라고 연락했어요. 에스파냐는 군대를 보내 주었지요. 이제 독일의 개신교 세력들은 거의 없어질 위기에 처하게 되었어요.

이때 북쪽 지방의 프로테스탄트 국가인 덴마크가 싸움에 끼어들었어요. 개신교가 무너지는 걸 그냥 지켜볼 수가 없었던 거예요. 그런가 하면 프랑스도 개신교를 돕고자 전쟁에 참여했지요. 이런 식으로 여러 나라가 뒤엉킨 전쟁은 30년이나 계속되었어요. 이를 30년 전쟁이라 해요.

30년 전쟁으로 유럽의 역사가 바뀌다
30년 전쟁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맺으며 신교의 승리로 끝났어요. 이 조약으로 네덜란드는 에스파냐로부터 완전히 독립했고, 독일을 지배하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 명예만 남게 되었지요. 스웨덴이 강대국으로 떠오른 반면, 에스파냐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어요.

독일의 지방 국가들이 독립하면서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었어요. 이 과정에서 루터와 함께 신교를 대표하는 개혁가인 스위스의 종교 개혁가 칼뱅의 교리를 믿는 칼뱅파도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되었어요.

가장 치열했던 종교 전쟁, 30년 전쟁: 독일 안에서 신교와 구교가 벌인 전쟁이었다. 이 전쟁 결과 신교와 구교는 동등한 권리를 갖게 되었다.

1648년 베스트팔렌에서 신교와 구교(가톨릭교)가 서로를 인정하는 조약을 맺음으로써 겨우 전쟁이 끝났지요. 하지만 전쟁이 끝났을 때, 독일은 온 나라가 황폐해졌고 뭉쳐 있던 제후국들이 독립해 나갔어요. 그럼으로써 독일의 영토는 아주 좁아졌어요. 뿐만 아니라 1600만 명이던 인구가 600만 명으로 크게 줄었지요. 경제는 사실상 마비될 지경이었고 중산층은 완전히 가난해져 버렸어요.

그래서 역사가들은 베스트팔렌 조약을 일컬어 ‘독일의 사망 증명서’라고 표현했지요.
30년 전쟁을 끝내기 위한 베스트팔렌 조약,

30년 전쟁을 끝내기 위한 베스트팔렌 조약프로이센의 한 주인 베스트팔렌 뮌스터 시에서 에스파냐, 프랑스, 스웨덴, 독일의 자유 도시들이 참여해 조약을 맺었다. - 테르보르흐 <뮌스터 조약의 비준에 관한 서약>

그나마 브란덴부르크(오늘날 독일 동북부 지역)의 프로이센만이 주권 국가가 되겠다는 꿈을 꾸었어요. 프로이센은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통치하면서 절대 왕정의 체제를 갖추어 나가기 시작했어요.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프랑스의 위그노를 비롯한 외국인을 끌어들여 산업 발전에 필요한 인력을 보충했어요. 상비군도 만들어 두었어요. 그리고 귀족들을 설득하여 정부의 중요한 관리와 군대의 장교로 임명했지요.

그 뒤를 이은 프리드리히 1세는 수도를 베를린으로 옮겼고, 이어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군사비를 더 투자하여 상비군을 20만 명으로 늘렸어요. 심지어 나랏돈의 절반을 군사비로 쓰기도 했지요. 그 때문에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군인 왕’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어요. 그야말로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프로이센의 군대를 유럽 최강으로 만들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답니다.

마침내 프로이센이 막강한 유럽 국가 중 하나가 된 것은 프리드리히 2세 때였어요.
프리드리히 2세는 어린 시절, 매우 나약하고 음악을 좋아하는 수줍은 소년이었어요. 프리드리히 2세는 플루트 연주하는 걸 좋아했고, 프랑스의 예술을 사랑하며 시를 짓곤 했어요.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그런 아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요. 그래서 밥을 굶기거나 감옥에 가두는 방법으로 아들을 훈련시켰어요.

“프로이센의 지도자가 되려면 강철같이 튼튼해야 해. 너처럼 나약해서는 이 나라를 이끌어 갈 수가 없어!”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프리드리히 2세는 자라면서 매우 씩씩한 군인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어요. 아니나 다를까 프리드리히 2세는 왕위에 오른 뒤, 더욱 강력한 군대를 만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프로이센을 유럽의 강대국으로 성장시켰어요.

물론 왕이 된 후에도 프리드리히 2세는 프랑스 예술을 사랑했고, 책을 썼으며 프랑스의 뛰어난 문학가 볼테르와 편지를 주고받기도 했어요. 자신이 지은 상수시 궁전에 볼테르를 초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요.

대왕의 휴식 공간 상수시 궁전: 독일의 도시 포츠담에 있는 궁전이다. 프랑스 문화를 좋아하던 프리드리히 2세가 베르사유 궁전을 따라 지었다. ‘상수시’는 프랑스 말로 ‘근심이 없는’이란 뜻이다. 이윽고 프리드리히 2세는 군대를 이끌고 오스트리아의 왕위 계승 전쟁에 참여했어요.

오스트리아에서 황제 카를 6세가 세상을 떠났는데, 그 뒤를 이을 왕자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왕위를 물려받았지요.

“여자가 왕위에 올라서는 안 됩니다!”

프리드리히 2세가 이렇게 주장하며 전쟁에 참여한 데는 다른 속셈이 있었어요. 프리드리히 2세는 공업이 발달하고 지하자원이 풍부한 슐레지엔을 차지하고 싶었어요. 프로이센을 힘센 나라로 이끌기 위해서는 슐레지엔의 상업과 지하자원이 꼭 필요했으니까요.

그러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랑스와 러시아, 두 나라와 손잡고 프리드리히 2세와 싸우기로 했어요. 프리드리히 2세도 영국을 끌어들였어요.

결과는 프리드리히 2세의 승리였어요. 결정적인 순간에 러시아의 여왕이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러시아 군대가 돌아갔기 때문이에요. 이 승리로 프로이센은 슐레지엔 지역을 얻었고 영토는 1.6배, 인구는 무려 두 배 이상 늘어났어요. 이로써 프로이센은 유럽에서 제일 힘센 나라 중 하나로 떠오를 수가 있었어요. 프리드리히 2세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항상 군복을 입고 다녔고, 자신의 신념을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했어요.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군대를 강하게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열 명의 학자보다 단 한 명의 훌륭한 장교를 먼저 얻어야 한다!” 그 말에 따라 프리드리히 2세는 엄격한 군대 법으로 병사들을 끊임없이 훈련시켰고, 더 강한 군대를 만들어 나갔어요.

물론 군대에만 힘을 쏟은 건 아니었어요. 강한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경제 발전이 필수였기 때문에 산업 발전에도 눈을 돌렸어요. 농민들에게 농기구를 무료로 주고, 도로와 다리를 세웠어요. 금속 공업과 섬유 공업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도 노력했지요. 그러면서 프리드리히 2세는 프랑스의 루이 14세와는 달리 “나는 국민의 최고 머슴이다!”라는 말을 남겼어요.

출처 ^ 참고문헌,
[종교개혁 [Reformation, Reformation] (종교학대사전, 1998...)
[종교 개혁의 진행 과정 (영국사, 2003. 11. 10., 위키미디어 커먼즈)
[종교 개혁 (천재학습백과 초등 스토리텔링 세계사)
[30년 전쟁 - 유럽 최대의 종교 전쟁 (재미있는 전쟁 이야기, 2014..,서울대학교 뿌리깊은 역사나무)
[30년 전쟁과 프로이센 (처음 세계사 6 - 절대 왕정과 산업 혁명, 2015.., 초등 역사 교사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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