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 1일 금요일

종교 개혁.[ Reformation ]

영어 및 독일어로 Reformation. 종교개혁은 16세기 전반, 유럽의 그리스도교, 그것도 로마 • 가톨릭 교계 내부에서 일어난 신학, 교의, 전례, 교회 체제 전반에 걸친 변혁운동이다. 중세 이후 그리스도교는 유럽의 사회, 정치, 문화, 사상 등 생활의 여러 분야와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이를 깊이 규정하였기 때문에, 이 변혁과 그것을 통해서 성립한 프로테스탄티즘은 르네상스와 함께 근대유럽세계 형성에 중요한 의의를 가지게 되었다.

종교개혁의 일반적 전제가 된 것은 로마교황권의 동요로 상징 지을 수 있는 것처럼, 중세 가톨릭교회 체제의 내부적인 구조변화이다. 가톨릭시즘은 중세유럽의 봉건제도와의 관계에서 일개의 거대한 법적 • 권력적 질서를 형성하였다. 교황권에 의해서 통괄된 성직자 신분의 계층질서, 지배체제만이 가톨릭시즘의 정통한 교의의 틀일 때, 모든 신앙 조항은 일종의 법적규정이라는 성격을 갖추며, 개인의 신앙은 신이 정한 교회의 전통적 권위에 대한 내면적인 복종을 의미하였다. 그리고 이런 권위나 그것이 강제하는 정통교의에 반한 신앙내용은 모두 <이단>으로서 세속권력의 협력 하에 엄격하게 금압되었다.

14세기경부터 정치적 의미에서의 봉건제도가 점차로 약체화되고, 각 지역에 영역적 • 집권적인 통일국가 체제가 구축됨에 따라서 원래 봉건적인 권력분산상황하에서만 그 보편성과 절대성이 보증되었던 교황권은 불가피하게 동요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교황의 아비뇽 유폐(1309~77)와 그에 이은 교회대분열(1378~1417)은 프랑스의 국민적 왕권의 대두에 의한 교황권의 공동화를 나타내는 전형적인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로마교회체제의 동요 중에서 몇 가지 종교적인 개혁이념이 탄생했다.

첫 번째
첫 번째는 교회대분열의 극복, 교회통치의 쇄신을 지향해서 열린 콘스탄츠 공의회(1414~18), 바젤 공의회(1431~49)의 두 공의회로 표현되는 개혁공의회 운동이다. 이는 주교계층이 중심이 되어서 교회통치체제를 종래의 교황절대주의에서 일종의 입헌군주제로 바꾸려는 것이며, 15세기 중엽의 교황권 제한주의(프랑스국민교회주의)의 성립이 나타내는 바와 같이, 국왕에 의한 중앙집권화의 노력과 그에 의해서 싹튼 내셔널리즘이 이와 결합하였다. 또한 이 체제개혁운동의 배후에는 속권과 교권의 분리를 제창하는 신학자 오캄 등의 새로운 교회통치이념이 작용하였는데, 가톨릭시즘의 중심적인 교의내용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진행 되지는 않았다.

두 번째
두 번째는 <종교개혁의 선구자>라고 하는 위클리프나 후스의 개혁운동이다. 그들은 교권과 속권의 분리나 교회통체체제의 변혁에 그치지 않고, 성서를 중심으로 하고 그에 근거하지 않는 교회의 관행 • 교의를 비판했기 때문에 이단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위클리프에 의한 성직자의 신분적 특권에 대한 공격과 성서의 영어역, 후스파에 의한 양종 성찬, 즉 속인신도에게도 빵과 포도주를 주라는 요구 등은 신도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이념을 나타내고 있는 점에서 종교개혁과 보다 깊이 결부되어 있다.

세 번째
세 번째는 신도 개개인의 영혼과 신과의 직접적인 교류를 구하는 내면화된 신앙으로서의 신비주의의 흐름이다. 독일의 에크하르트나 타울러, 『준주성범』으로 알려진 플랑드르의 토마스 아 켐피오 등으로 대표되는 이 신비주의는 도시의 발달에 지지받아서 중세 말기에는 널리 각국의 속인사회로 퍼지고, 체제 중에서 형해화한 신앙생활에 새로운 숨결을 주었다.

네 번째
네 번째는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와 결합한 개혁적인 그리스도교 철학인데, 이 사조는 가끔 신비주의와 혼합되어 있다. 프랑스의 르페브르 데타플, 네덜란드 출신의 에라스무스 등이 제창한 이 그리스도교적 휴머니즘의 이념은 고전연구를 통한 인간형성이라는 입장에서 역시 성서를 중시하고 그리스도 신앙을 원초의 순수한 모습으로 되돌리려는 지향에서 종교개혁에 큰 추진력을 제공했다.

루터의 복음주의
독일 중동부의 연방, 작센 선제후국의 수도 비텐베르크에서 아우구스티누스회의 수도사이며 대학의 신학교수인 마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속죄의 효력에 관한 <95>을 발표한 것이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었다. 깊은 죄의식과 예민한 양심에서 율법의 준수나 선행을 행함(공적)으로써 구원의 길을 주장하는 가톨릭시즘의 교의에 근본적인 회의를 품은 그는, 오컴신학의 연구나 상사인 슈타우피츠를 통한 신비주의자와의 접촉,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서에 대한 침체 중에서 구원 문제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이해에 도달했다.

<신앙 의인론> 또는 <복음주의>라고 불리는 것이 그것으로, <인간의 구원은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는 것에 의한다>라는 확신을 근저로 하고 있다. 그때 루터의 개인적 종교체험에 객관적인 증명을 뒷받침한 것은 구약성서의 『시편』과 신약성서의 바울 서간(『로마서』, 『갈라디아서』)이였다. <95>으로 표명된 그의 의문과 비판은 교황이 면죄부의 구입과 같은 외적인 <행위(공적)>로 신도의 죄 그 자체를 사면하는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며, 참된 내적인 참회와 유일한 구세주 그리스도의 어업(御業)으로 나타내는 신의 은총에 대한 전면적인 신앙에 의해서만 영혼이 구원받는다는 근본적인 확신의 귀결이었다.

<95>은 이처럼 교황청 재정의 수단이 되었던 면죄부 판매에 대한 비판에 그치지 않고, 교황권의 본질과 그리스도 신앙의 중핵에 관련된 중대한 논점을 포함하였기 때문에, 루터 자신의 예상을 훨씬 능가하는 폭넓은 반향을 일으켰다. 당초 로마교황청은 이 사건을 문제시하지 않고, 루터 측에서도 논제의 참뜻을 상세하게 해설한 서적을 발표해서 교황의 이해를 구하였는데, 면죄부 판매에 직접 관계하였던 도미니코회 신학자들과의 논쟁을 통해서 쌍방의 대립은 점차로 심해지고, 도미니코회의 고발로 이듬해 18년 6월에 루터에 대한 이단심리가 로마에서 개시되었다. 그리고 19년 6~7월, 교황측의 가장 유력한 정통 신학자 에크와 라이프치히에서 행하여진 토론회(라이프치히 토론)에서 루터가 결국 교황의 지상권을 명확히 부인하고, 공의회도 잘못을 범할 가능성이 있으며, 후스의 학설에도 복음적인 것이 있다고 공언하기에 이르러, 로마교회와의 결렬은 사실상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루터의 개혁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유일한 권위로 보고, 신앙자의 양심을 건 루터의 용감한 교황권 비판은 후텐을 비롯한 독일 인문주의자들의 강력한 지지를 얻고, 에라스무스를 존경하는 신학자 멜란히톤 등은 1518년 이후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루터의 동료교수로서 그 개혁운동의 협력자가 되었다. 그의 복음주의는 더욱 널리 시민층에서 농민층에 이르는 국민적인 세론을 획득하기에 이르게 되어, 그에는 당시 급속히 발전하였던 인쇄술의 힘이 크게 작용 하였으며, 루터 자신도 이 수단을 충분히 활용해서 많은 저술이나 논쟁문, 설교를 발표했다.

특히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20년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서 쓰여진 3대개혁론, 『그리스도교계의 개선에 대해서, 독일 국민인 그리스도교 귀족에게 고함』, 『교회의 바빌론 유폐』, 『기독교 교인의 자유』이다. 『독일국민인 그리스도교 귀족에게 고함』은 루터가 처음으로 독일인으로서의 국민의식에 서서 로마교황세력에 의한 재정적 수탈이나 성직매매, 그 외에 국민생활을 압박하고 올바른 신앙을 방해하는 여러 가지 악폐를 열거하고, 교회 당국자가 무능을 폭로하고 있는 현재, 통치권력을 신에게 위임받은 귀족(실제로는 영방군주인 독일제후)에게 교회생활 전반의 개혁을 돕도록 호소한 것이다. 거기에는 또한 성직자의 독신제나 일반적으로 특권적 신분으로서의 성직자의 부정, 즉 <만인제사주의(allgemeines Priestertum)> 이념이 성서에 의거해서 전개되고 있는데,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존재방식을 깊이 규정한 근본이념은 『그리스도 교인의 자유』에서도 <신앙 의인론>에 입각해서 다시 강하게 주장되었다.

루터에게 <자유>라는 것은 율법 앞에서 명확해진 죄로부터의 해방,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신앙으로만 신의 앞에서 의롭게 된다는 기독교 교인의 영적 • 내적인 자유이며, 이런 기독교 교인은 육체적 • 외적 존재로서는 자유로운 영혼의 기쁨에 넘쳐서 이웃에 대한 봉사에 몸을 바치는 신의 종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들 두 논저가 독일어로 널리 읽혀지고, 또한 국민적인 영향을 미친 것에 반해, 『교회의 바빌론 유폐』는 라틴어 신학자나 성직자용 저술인데, 여기에서 그가 가톨릭 교회의 7가지의 비적(사크라멘트)에 성서주의 입장에서 비판을 가하고 사크라멘트를 세례와 성찬의 두 가지만으로 한정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진전
로마에서는 1520년 6월에 교황 레오 10세가 이단판결이 내려진 루터에게 주장을 철회하지 않으면 파문한다는 내용의 교서를 발표했다. 독일 각지에 반로마감정이 고양되는 중에 여러 가지 방해를 받으면서 이 교칙이 루터에게 도달한 것은 가을이 되어서였다. 루터는 12월 10일, 이를 대중이 보는 앞에서 불 속에 던져서 결의를 나타냈으므로, 다음해 21년 초 정식으로 파문 교칙이 나왔다. 그때의 독일(신성로마제국) 황제 칼 5세는 스페인왕이기도 하며, 엄격한 가톨릭 신자였는데, 그는 황제선거시 은혜를 입은 작센 선제후에 대한 정치적 배려로 루터의 처치에 대해서 교황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21년 봄, 보름스에서 열린 제국의회(보름스 국회)에 황제가 루터의 출두를 요구하고, <이단적> 주장을 철회할 기회를 준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루터는 양심을 굽히지 않고 취소하라는 요구에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황제는 보름스 칙령을 발하여 그의 제국공민권을 박탈하고 그의 저작의 금압을 명령했다.

루터의 보호자인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현공)의 힘으로 바르트부르크성에 몸을 숨긴 루터는 여기에서 신약성서의 독일어역(『루터역 성서』)이라는 중요한 일을 단기간에 이루었다(1522년 간행). 한편 황제는 마침 이 무렵 발발한 프랑스와의 전쟁(이탈리아 전쟁) 때문에 10년 정도 독일을 떠났기 때문에 보름스 칙령은 거의 공문화 되고, 작센, 헤센 등 각지의 영방이나 제국도시에서 복음주의 선교가 행하여지고, 수도원의 해산, 전례 개폐 등을 수반하는 교회생활의 변혁이 세속권력의 협력 하에서 추진되었다. 이렇게 루터주의의 확대에 촉발되어서 더욱 급진적 • 민중적인 종교개혁운동이 대두했다. 

멜란히톤 등 정통적인 루터 주의자에게 <광신파(Schwarmer)>라는 낙인이 찍힌 이 일파의 움직임은 일찍이 루터의 바르트부르크 은거 중인 비텐베르크에서 그의 동료 카프슈타트 등이 지도하는 소요로 나타났다. 사태를 우려한 루터의 비텐베르크 귀환(1522년 봄)으로 소요는 진정되었는데, 이 같은 급진주의는 전통적인 사회체제를 변혁하려는 하층시민이나 농민의 요구와 결합해서 각지로 비화하고, 교회질서를 혼란시키는 위험을 낳았다. <광신파>의 가장 유력한 지도자로서 활약한 것이 토마스 뮌처로 그는 1525년의 유명한 독일농민전쟁에 큰 역할을 하고, 반란이 영방군주에게 무력으로 진압되는 중에 처형되었다. 이 경험은 원래 사회관에서 보수적이었던 루터나 협력자들에게 강한 충격을 주고, 이후 종교개혁의 정치적 주도권은 영방군주로 이행되었다.

교회제
중세 가톨릭시즘은 본래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해서는 <교회 안에 국가가 있다>라는 입장을 취하였다. 중세 말기의 국민국가 형성의 움직임은 교황통치체제의 동요에 대응하여, 프랑스, 스페인 등에서 영역 내의 교회를 왕권의 통제 하에 두려는 경향을 나타냈는데, 종교개혁은 속권의 종교적 임무를 강조함으로써 이 영역교회주의를 확립했다. 제후령의 연합체에 지나지 않는 독일에서는 그것이 제국레벨의 국민교회가 아니라, 영방교회제라는 형태를 취한 것이다.

루터파 제후에 의한 영방교회체제의 조직은 스페인왕인 황제 칼 5세가 프랑스와 호응하는 오스만 터키세력의 오스트리아 침입의 위험에 직면해서, 1527년의 슈파어어 제국의회에서 그들에게 부득이하게 정치적 양보를 하게 되었기 때문에 더 한층 촉진되었다. 정세의 호전과 함께 29년의 제2회 슈파이어 제국회의에서 황제 측이 이 양보를 철회했을 때 루터파 제후는 이에 강력하게 항의하고, 이것이 프로테스탄트라는 호칭의 기원이 되었다. 그 후 루터파를 구교회로 되돌리려는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단 뿌리를 내린 영방교회 체제를 전복시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절박한 가톨릭 세력과의 정치적 대결을 어쨌든 회피하고자 멜란히톤은 최대한 온화한 표현을 취한 복음주의 신앙조항을 작성하여 30년의 아우구스부르크 제국의회에 제출했는데(<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 가톨릭 제후가 이를 물리쳤으므로, 루터파 제후와 제국도시는 슈말칼덴 동맹으로 결집해서 대결에 입하였다.

스위스의 종교개혁
이보다 앞선 1522년 이후,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영향하에 츠빙글리가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시정부와 제휴해서 종교개혁운동을 전개하고, 이 운동은 바젤, 베른 등에도 확산되었다. 루터파의 헤센 방백 필립(Philipp der Grossnurige, 1504~67)은 독일의 프로테스탄트와 츠빙글리파를 합동시키고자 노력하고, 29년, 마르부르크의 거성에서 루터, 멜란히톤과 츠빙글리 등 스위스의 개혁지도자와의 종교회담(마르부르크 회담)을 열었는데, 성찬의 전례의 해석을 둘러싸고 양자는 의견이 맞지 않아서 합동의 시도는 좌절되었다. 얼마 후에 일어난 스위스 가톨릭 각 주와의 전쟁에서 츠빙글리가 31년에 패배한 후에 이 지역의 종교개혁은 괴멸되었다.

츠빙글리의 개혁운동도 신도의 공동체인 교회와 시민공동체로서의 도시의 권력을 결합한 점에서 일종의 영역주의를 추구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은 순수한 성도공동체의 이념을 내걸어서 유아세례를 부정하여, 당국의 탄압으로 스위스에서 쫓겨났다. 이것이 재세례파의 발흥이다. 때마침 독일 농민전쟁 시기에 재세례파는 독일에 들어와 농민이나 소시민이 주요 담당자가 되어서 네덜란드 등에도 확산되었는데, 루터파는 이 운동을 <광신파>의 급진주의와 동일시하여 엄격하게 박해를 가했다. 또한 마찬가지로 독일농민전쟁 무렵, 루터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영혼의 구원에 도움이 되는지의 문제로 에라스무스와 대립하여 결국 갈라지게 되었다. 이처럼 루터파는 복음주의의 원리를 공유하는 다른 <과격한> 여러 세력도, 온화한 인문주의적 개혁노선도 모두 물리침으로써 교의적 경직화의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

영방분립주의와 결합한 정치적인 프로테스탄티즘과 가톨릭 진영과의 적대는 더욱더 심화되어서, 트리엔트 공의회(1545~63)의 소집으로 가톨릭시즘의 내적 쇄신과 교황권 부흥(가톨릭종교쇄신)의 단서가 된 이듬해, 황제는 공의회 출석을 거부한 독일 • 프로테스탄트의 무력탄압에 나섰다. 이슈말칼덴 전쟁(1546~47)은 황제측의 승리로 끝났는데, 그에 편승해서 황제의 통치권을 강화하려는 카르 5세의 야심은 52년에 종파를 초월한 독일 제후의 반격을 맞아서 허무하게 무너졌다. 실의에 빠진 황제가 네덜란드로 물러난 후, 칼의 아우 펠디난트 1세가 주재하는 아우구스부르크 제국의회에서 독일의 종교문제에 정치적인 결착이 맺어졌다. 이런 아우구스부르크의 종교화의에 의해서 루터파는 제국 내에서의 가톨릭과의 동권이 인정되었는데, 두 종파를 선택할 권리가 제후와 제국도시 당국에만 주어진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결정은 영방교회제의 법적인 시인을 의미하였다. 프로테스탄트의 주권자가 그 영역 내의 교회 재산 • 수도원령을 접수하고, 교회통치권을 장악하는 이런 국교회체제는 독일 외에 루터주의를 수용한 북구 왕국에서도 실현되었다.

칼비니즘의 등장
아우구스부르크의 종교화의와 거의 같은 무렵, 스위스의 제네바에서는 칼뱅에 의한 종교개혁이 최종적으로 승리하였다. 인문주의자로서 출발해서 루페부르 데타플 등의 복음적 휴머니즘의 영향 하에 신앙을 형성한 칼뱅은 1530년대에 본격화된 프랑스 왕권에 의한 복음주의에 대한 탄압으로 스위스로 망명하고, 『기독교강요』(1536) 이후 프로테스탄티즘의 제2세대를 지도하는 지위로 추대되었다. 

G. 파렐의 요청으로 제네바 교회의 개혁운동에 몸을 던진 그는 신도의 공동체라는 의미에서의 개별 교회의 자율을 중시하고, 그 기관으로서 장로 제도를 도입하는 한편, 루터파가 유지하였던 주교(감독)제도를 폐지함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개혁파 교회의 형성을 도모하였다. 신의 주권성을 강조하고, 신도 생활의 엄격한 윤리적 규율을 요구하는 칼뱅의 개혁이념은 그 불관용성으로 부득이하게 반대세력과 투쟁하게 되었는데, 강인한 의지력으로 결국 이 위기를 극복했다.

현세의 <하나님의 영광>의 실현을 지향하는 행동주의는 반종교개혁의 기수인 예수회와 전투적 성격에서 유사하며, 제네바에 창설된 신학교는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자 녹스를 비롯해 많은 유능한 선교자의 양성을 통해서 프로테스탄티즘 확대에 큰 역할을 하였다. 칼비니즘은 전통적 사회질서를 중시하는 루터파에 비하면 자본주의적 영리활동의 긍정, 가톨릭 군주에 대한 정치적 저항을 용인하는 등 보다 자유주의적 성격을 가지며, 근로자층 외에 귀족 사이에도 지지를 얻어서 프랑스의 위그노 전쟁이나 스페인 지배에 대한 네덜란드의 독립운동(80년 전쟁) 등에서 전투적 에너지를 실증했다.

영국에서는 헨리 8세 때에 오로지 정치적 동기에서 교황권으로부터의 독립, 국교회 체제로의 이행이 시작되었는데, 프로테스탄트 교의의 수용은 에드워드 6세 치하의 일이며, 주교제와 독자적인 예배형식을 가진 앵글리카니즘의 확립은 메리여왕의 가톨릭 반동을 거쳐서 엘리자베스 1세 시대로 가져갔다. 이 국교회체제를 비판하는 장로파교회는 많은 박해를 받으면서 세력을 확장하여 퓨리탄이라고 하는 비국교도의 주류를 형성해갔다.

영국의 종교개혁
영국의 종교개혁이라는 것은 영국 교회에 대한 로마교황의 종교적 • 사법적 • 재정적 관계를 단절하고, 교황 지배에서 교회를 해방시킨 국가의 행위였다. 로라드파의 운동이나 국민 사이에 확산되었던 반성직자 감정, 루터주의의 이입, 또한 W. 틴달의 영역 성서의 간행(1525) 등 종교개혁을 가능하게 한 원인 • 배경을 나열할 수 있는데, 이 종교개혁을 성립시키기 위해서 작용한 국가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대법관 울지 추기경이 헨리 8세와 캐서린의 이혼문제 처리에 실패한 후, 교황청에 대한 협박, 그리고 국왕에 의한 교회지배의 방향이 나타나, 1533년의 상소금지법(또는 상고금지법)에 의해서 교황과 영국의 관계는 결정적인 단계를 맞이했는데 이 법은 유언 • 결혼 • 이혼소송 등이 국왕사법관할권 내에서 처리될 것을 명령하고, 교황좌 • 외국법정의 소환, 또한 그에 대한 상소를 금지하고, 국왕이혼문제를 왕국 내에서 처리하는 것을 당면의 목적으로 하였다.

이 법에는 국왕에 의한 성속(聖俗)의 일원적 지배, 국가통일이 명시되고, 영국이 주권국가라는 것을 선언해서 외국주권자로부터의 독립이 주장되었다. 이런 종교개혁, 영국 국교회(앵글리칸 처치)의 성립은 국가주권의 선언과 연동해서 생긴 일이며, 34년의 국왕지상법(또는 수장령)에 의해서 로마교회로부터의 이탈의 총 마무리가 행하여졌다. 이어서 36년과 39년의 2회에 걸쳐서 수도원 해산법이 나와 전수도원 재산의 몰수가 행하여졌다. 그 이유로서는 국가재정 강화설이 유력해서, 몰수수도원령은 점차로 매각되어 주로 젠트리의 부를 풍부하게 했다.

36년의 소수도원 해산법이 의회를 통과한 얼마 후 북부 여러 주에서 <은총의 순례>라고 하는 농민반란이 일어나 종교개혁, 수도원 해산의 반대를 주장하고, 농민보유지의 보전을 요구하였는데 진압되었다. 이 시기의 국교회의 교의는 <10>, 『주교의 서』(1537)에 보이며, 보수 • 개혁 두 파의 대립 결과 가톨릭, 프로테스탄트 두 요소가 혼재하고 있다. 한편 토마스 크롬웰에 의해서 2회에 걸쳐서 나온 <국왕지령>(1536, 38)에서는 루터적 종교개혁과 에라스무스적 교회 • 사회개혁이 병용되어 국교회의 더 한층의 개혁을 지향했다. 이에 대해서 이미 1521년 교황으로부터 <신앙의 옹호자>라는 칭호를 얻을 정도의 반루터주의자 헨리 8세는 종교개혁의 진전을 좋아하지 않아 노포크공, 가드나 주교와 함께 39년 <6>을 통과시키고, 실체설과 일종성찬(communion in one kind)의 확인, 성직자의 결혼금지 등 보수화를 강화하고 이듬해에는 크롬웰을 처형했다.

헨리 8세가 지향하는 종교개혁은 교황없는 가톨릭시즘 또는 섬나라 가톨릭시즘이라고 할 수 있다. 프로테스탄트로서 교육받은 에드워드 6세가 1547년 왕위에 오르자, 섭정 사마셋 공은 <육개조법>을 철폐해 성직자의 결혼을 인정하고, 49년의 예배통일법에 의해서 제1기도서가 확정되고, 52년 노산바란드공 지배 하에서는 보다 개혁적인 제2 기도서가 나오고, 이듬해 T. 크랜머 대주교는 프로테스탄트적 신앙조항 <42>를 냈다. 메리 1세가 즉위(1553)하자 가톨릭 복귀가 일어나, 의회는 에드워드 6세 때의 여러 율법을 철폐해 47년 당시로 돌아가고, 나아가서 54년의 의회는 헨리 8세의 반교황적 법률을 물리쳐서 종교개혁전의 상황을 회복했다. 단, 몰수 수도원령 회복의 기도는 많은 보상금을 필요로 하였기 때문에 실패로 끝났다. 55년부터 이듬해에 걸쳐서 크랜머, H. 라티머, N. 리드리, J. 푸파 등의 개혁파 성직자가 이단으로서 화형에 처해졌다.

엘리자베스 1세(1558~1603) 때 형세는 또 한 번 역전해서, 59년의 국왕지상법에 의해서 여왕은 국교회의 <지상의 통치자>가 되었고, 예배통일법에 의해서 에드워드 제2 기도서를 개정해서 신기도서를 확정하였으며, 63년에는 42개조를 개정해서 <39>을 만들었고, 71년의 의회는 이를 승인 • 가결하였다. 한편 아일랜드에 관해서는 1536년 헨리 8세는 아일랜드 의회에서 국왕지상법을 결의시키고, 60년 엘리자베스 1세도 국왕지상법과 예배통일법을 성립시켜서 국교회를 강제하였는데, 저항이 커서 국교회는 주로 아일랜드 중의 영국화된 부분에만 머물렀다.

이와 같이 영국국교회는 가톨릭시즘과 프로테스탄티즘의 중도를 가는 교회가 되고, 영국인 생활과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중도 • 중용성으로 퓨리탄의 공격을 받고, 영국혁명을 맞이해서 결국 왕정복고시에 국교회로서 재생하여 현대에 이르고 있다. 확실히 주권국가 형성기에 성립한 국교회는 국가교회라는 형태로 종교개혁을 실현하였다. 따라서 국가와 교회의 긴밀성은 피하기 어려워 체제교회로서 나타난 것으로서, 장래 국교회제도가 폐지될 때가 온다면 그때야말로 영국 종교개혁은 비로소 완성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개혁과 근대 세계
종교개혁운동은 문화 영역의 르네상스 운동과 함께 근대유럽의 형성에 큰 역할을 하였다. 내셔널리즘과 결합한 성서국어역의 보급이나 <만인사제주의>에 대응하는 성직자의 신분적 특권의 부인, 수도원제의 폐지와 교회재산의 접수, 속인신도의 직업노동의 종교적 평가, <양심>의 자율성에 나타난 개인주의 등은 각각의 의미에서 생활 여러 분야의 근대화의 추진력이 되었다. 그러나 <정교분리>나 <신교의 자유>의 실현이라는 점에서는 루터파, 칼뱅파를 불문하고 통치권력이나 영역주의와 결합해서 체제화된 정통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당분간 장애가 되며, 종교전쟁이나 <마녀사냥>의 촉발에 힘을 빌려주었다. 이런 면에서 그리스도교의 근대화나 새로운 과학적인 세계관의 성립에 대해서는 르네상스 문화의 조류와 함께 정통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 이단시된 재세례파 등의 보다 개인주의적 종파가 장기적 관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왕이 교황과 단절하고 종교의 수장임을 선포했지만, 실질적인 왕의 종교 개혁의 입장을 확고하게 만들어 준 것은 토머스 크롬웰의 역할로 비롯 되었다. 토머스 크롬웰은 영국 내란시 청교도 혁명의 주도자인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과 먼 친척 관계였던 사람으로, 젊은 시절 플랑드르와 이탈리아에서 군인으로 복무도 하고 무역업도 하다가 금융업과 새로운 정치 사상(르네상스)을 배워 온 후 고리 대금업으로 부자가 되었다. 그 후 울지 추기경과 친분이 두터워져 그 연유로 왕과의 인연도 맺게 되었는데, 그는 먼저 공소원 판사로 시작하여 상서, 재정관, 왕실 시종관을 거쳐 가터 기사 칭호를 받은 후 에식스 백작이 되었다.

그는 1529년부터 왕이 제안한 모든 종교에 대해 특별법을 공표했는데, 이러한 특별법은 먼저 오랫동안 싹터 온 섬나라적 국민 의식(독립 및 자유 의식)의 종교적 표현이 국민들이나 일부 성직자들에게 호응을 얻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다음으로 르네상스 정신에 의해 인간성을 중시하는 사상에 젖어 있던 크롬웰이 가톨릭계에 대한 개혁 작업을 전혀 양심적인 가책 없이 처리했기 때문이다.

특별법의 주요한 내용은, 첫째 잉글랜드의 경우 왕에게 법률상 교회의 수호자 겸 최고 수령이라 칭하도록 공표하는 최고 수권자법(Act of Superemacy), 둘째 교황에게 바치던 감사 헌금제를 폐지하는 일, 셋째 교황청에 일반 사건을 상소하는 것을 금하는 상소 법령(Status of Appeals), 그리고 마지막으로 최초 결혼의 무효 및 그에 따른 최초 자녀에게 주는 왕위 계승법(Act of Succession)의 취소 등이었다.

이러한 특별법의 시행에 대해 교황은 왕을 파문하고 프랑스나 에스파냐의 도움을 청하는 등 가능한 조처를 다 써 보았으나 효과가 없었다. 또 잉글랜드 내에서는 역사적으로 이어온 정통적인 가톨릭을 그래도 인정할 것을 주장하던 보수파 토머스 모어(대사법관)와 존 피셔 주교가 끝까지 이 법을 인정하지 않다가 1535년에 교수형에 처해지는 사건과 수도사들이 특별법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다가 박해를 당하는 상황도 벌어졌다.

수도사의 박해는 크롬웰에 의해 이뤄졌는데, 그는 국고 대리 감독의 자격으로 조사 서류를 작성한 후, 이를 의회에서 승인받아 정책적으로 1536~1539년 사이 4여 년 동안 1200여 개의 수도원을 파괴했고, 이렇게 파괴된 수도원 소유의 토지들은 국고로 들어와 왕과 관료들에게 다시 배분됨으로써 이들을 부유하게 했다. 그리고 이러한 재산을 지키기 위해 잉글랜드에서는 가톨릭으로 다시 환원하지 않은 결과 국교가 제자리를 잡게 되었으므로, 수도원의 파괴를 시도한 크롬웰의 행동은 헨리 8세의 종교 개혁이 완성 단계에 들어가게 해 준 대표적인 역사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헨리 8세는 영국형 가톨릭을 원했기에 이에 맞는 국교 신조 6조를 만들었고, 이를 의회에 통과시켜 위반시에는 화형까지 할 수 있는 법률을 만들었다. 그 조항들을 보면, 첫째 성찬은 허락하며, 둘째 정절에 대한 서약을 준수할 것, 셋째 성직자의 독신 존중과, 넷째 일반인들이 성직자에게 고해하는 것의 승인, 마지막으로 개인적 미사의 승인 등이었다. 이는 프로테스탄트와는 성격이 달랐으므로 순수 프로테스탄트들도 박해를 받게 되었고 최초의 영어판 성서 인쇄자인 윌리엄 틴들(William Tyndale)은 결국 화형당하였다.
윌리엄 틴들의 초상과 최초의 영어 성경의 일부 국교가 신교의 특성을 갖고 있었다고 하나 진정한 신교가 아니었기에 이를 거부하는 부류들이 나왔다. 그 대표적 인물이 윌리엄 틴들인데, 그는 마침내 순교하였다. [윌리엄 틴들의 초상 : Source=Foxe's Book of Martyrs]

잉글랜드가 국교화되면서 그 첫 번째 대주교는 크랜머였는데, 이때 그의 주선 아래 1533년 1월 헨리 8세는 잉글랜드 북부 젠트리 집안의 처녀인 앤 불린(Anne Boleyn)과 비밀리에 결혼하고 그녀를 그 해 부활절에 왕비로 책봉했다. 그런데 그녀는 딸인 엘리자베스를 낳고 아들을 유산함으로써 헨리는 또 그녀와도 이혼을 시도하려 하였다. 그러나 앤은 끝까지 왕비로서의 권세를 빼앗기지 않은 채 왕에 대한 불복종죄로 1536년에 참수형을 당했다. 같은 해 공교롭게도 헨리의 첫째 부인인 캐서린 왕비도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러한 국내의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도 헨리는 웨일스를 1535년에 합병했고, 1542년에 스코틀랜드를 침략하는 여유를 보였다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5세는 헨리 8세의 조카(헨리 8세의 누이 마거릿의 아들)였는데, 헨리 8세의 큰딸인 메리 튜더와 결혼하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로써 헨리 8세와 그의 사이가 서먹서먹해졌으며, 또 헨리가 종교 문제로 파문당했을 때 제임스 5세가 교황과 친분이 두터웠기에 헨리의 반대편에 서게 됨으로써 둘 사이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헨리 8세에게 스코틀랜드를 침략하게 했다. 이 당시 제임스 5세는 헨리의 침공을 피하던 중 왕비의 딸 순산 소식을 접하며 외딴 성채에서 병사했는데, 그때 낳은 딸이 바로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이다.

앤 불린을 처형한 후 헨리 8세는 세 번째 왕비로 제인 시모어(Jane Seymour)를 맞이하여, 마침내 그녀로부터 그렇게 원하던 왕자(에드워드 6세)를 보았다. 하지만, 시모어는 산욕열로 부귀 영화를 누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는데, 왕은 그녀의 사후에도 세 차례의 결혼과 이혼을 되풀이했다. 결국 그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에는 한 명의 여인도 그의 곁에 없었고, 오직 크랜머 대주교만 있었다. 왕은 그의 손을 잡고 에드워드 왕자를 부탁하며 쓸쓸히 세상을 떠나갔다.

면벌부를 파는 교회
르네상스가 유럽에 널리 퍼지면서, 엄청난 힘을 갖고 있던 교회도 차츰 무너져 갔어요. 왕들은 교회의 힘을 누르며 맞섰지요.

“이제부터 우리나라의 성직자는 내가 뽑겠소. 또한 앞으로 교회는 함부로 돈이나 물건을 걷지 마시오.”

하지만 독일은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 교회에 대한 반대가 약했어요. 그래서 로마 교황은 다른 나라보다 독일에서 더 많은 돈을 거둬들였지요. 독일의 농민들은 점점 살기가 힘들어졌어요. 그런데다가 교황 레오 10세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질렀어요.

‘성 베드로 성당을 보다 크고 화려하게 지어야겠는데, 돈을 어떻게 마련한담?’

그러다가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지요. “맞아! 그거야!”

교황은 성직자들을 시켜 죄를 지은 사람을 용서해 준다는 증서인 면벌부를 만들어 팔게 했어요. 죄를 용서받는다는 말에 사람들은 면벌부를 샀다.

면벌부란 죄를 지은 사람의 벌을 용서해 준다는 로마 교황청의 증서란다. 십자군 시대 때는 전쟁에 참여하면 죄를 용서받을 수 있었지. 로마 교회에서는 헌금을 한 사람들은 죄를 없애 주는 제도도 있었다.

종교 개혁의 시작
로마 교황이 면벌부를 파는 것에 반대하고 나선 사람이 있었어요. 그 사람은 바로 독일의 한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던 루터였다.

“말도 안 되는 짓이오. 교회가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돈을 벌다니!”

루터는 교회의 잘못된 점 95가지를 적어 교회의 문에 붙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회개하라’고 말한 것은 스스로 깊이 반성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교황이나 성직자가 죄를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면벌부를 사서 죄를 용서받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죄를 용서받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는 것뿐입니다.”

루터의 글을 본 사람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보게! 루터가 쓴 글을 보았나? 루터가 하는 말에 따르면 교황의 면벌부는 순 엉터리라더군!”
“하긴 그래! 무슨 종이 쪼가리가 죄를 없애 준다는 건가? 돈이나 받으려는 거지!”

루터는 면벌부 파는 일을 그만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루터는 또 성직자가 한 나쁜 일들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 교황이 성직자를 뽑는 것과 세금을 걷는 것도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외쳤어요. 화가 난 교황은 루터를 로마 교회에서 쫓아내 버리겠다는 내용의 글을 루터에게 보냈어요. 하지만 루터는 사람들 앞에서 종이를 불에 태워 버렸다.

“이런 것으로 겁주면 내가 포기할 것 같아?”
“아니, 어쩌려고 저러지? 교황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

사람들은 루터의 행동에 놀라워했어요. 그러나 이러한 루터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는 사람들도 많았지요. 특히 교황을 싫어하던 여러 지역의 제후들이 루터를 따랐어요. 교황의 착취로부터 고통스러워하던 시민들도 루터를 따르기 시작했다.

“루터는 못된 교황으로부터 우리를 구해 줄 것이오!”
“맞습니다. 루터는 우리의 영웅입니다.”

루터는 이에 더욱 용기를 얻어 라틴 말로 되어 있던 성경을 독일 말로 옮겼다.
‘우선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게 해야 해.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정말 무엇인지를 알려야지!’

루터가 번역한 성경은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갔어요.

루터의 성경 번역은 아주 큰 의미가 있다. 이전까지는 라틴 말로 된 성경이 대부분이라 보통 사람들이 성경을 읽기 힘들었거든요. 그런데 이제 사람들이 쉽게 성경을 읽을 수 있어서 성직자들은 성경과 다르게 말하거나 거짓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누구보다도 루터를 환영한 사람들은 농민들이었어요. 농민들이야말로 교황으로부터 가장 고통을 받던 사람들이었으니까.

“우리도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욕하고 헐뜯습니다. 우리도 일어나 권리를 찾읍시다.”

농민들은 반란을 일으켰어요. 농민들은 성직자는 물론이고 지방 영주들의 성에도 쳐들어갔어요. 그리고 가는 곳마다 크게 이겼다.

“노예나 다름없는 농노를 풀어 주어라!”
“십일조를 없애라!”

농민들은 주장했다.

신교와 구교
루터는 농민들의 반란에 반대했어요.

“법에 따르지 않고 폭력을 쓰는 것은 질서를 어지럽히는 일다.”
루터의 말에 용기를 얻은 영주들은 군대를 일으켜 농민들의 반란을 누르기 시작했어요. 이 과정에서 무려 10만 명의 농민들이 끔찍하게 죽었지요. 이제 농민들은 더 이상 루터를 따르지 않았어요. 하지만 루터를 계속 따르던 영주들과 도시 사람들은 새로운 종교인 루터교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교황과 황제도 마침내 1555년 루터교를 정식 종교로 받아들였답니다. 지역을 다스리는 제후는 가톨릭과 루터교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 뒤 루터교는 신교 또는 프로테스탄트라고 불렸어요. 프로테스탄트는 ‘저항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지요. 그리고 가톨릭 교회를 구교라고 불렀어요. 이렇게 해서 유럽의 크리스트교는 교황을 중심으로 한 로마 가톨릭과 이에 항의해서 새로 생긴 신교로 나누어진 거예요.

가톨릭도 신교가 더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교리를 다시 다듬었어요. 그리고 새로운 지역으로 가톨릭을 전파하기 위한 활동을 시작했지요. 이렇게 신교와 구교가 서로의 세력을 넓혀 나가는 과정에서 종교 전쟁도 일어났어요. 하지만 훗날에는 상대방의 종교를 서로 받아들이게 되었답니다.

신교가 생기고 나서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는 가톨릭과 신교 사이에 끊임없이 싸움이 일어났어. 네덜란드의 독립 전쟁, 프랑스의 위그노 전쟁, 독일의 30년 전쟁이 있었단다.

핵심 되짚기
1) 교회의 타락
로마 교황 레오 10세는 성당을 다시 짓기 위해 면벌부를 팔았어요. 면벌부를 사는 사람은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했지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면벌부를 샀고, 교황은 엄청난 돈을 챙겼어요.

2)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루터는 교황이 면벌부를 파는 것에 대해 반대했어요. 면벌부로는 죄를 용서받을 수 없다고 했지요. 로마 교회는 루터를 교회에서 쫓아냈어요. 하지만 루터를 따르는 제후들과 농민들이 늘어났어요.

3) 신교
루터는 새로운 종교인 루터교를 만들었어요. 루터교는 1555년 정식 종교가 되었고, 이를 신교 또는 프로테스탄트라고 해요.

30년 전쟁
유럽 최대의 종교 전쟁
전쟁
국가 : 신성 로마 제국 등 가톨릭 세력 vs. 보헤미아 등 반 가톨릭 연합
연도 : 1618~1648년
마르틴 루터, 로마 교황청에 도전장을 내다/ 루터를 지지하는 신교와 구교 간에 갈등이 깊어지다/ 30년 전쟁이 시작되다/ 유럽의 여러 나라가 참여하여 국제전으로 발전하다/ 30년 전쟁으로 유럽의 역사가 바뀌다

1517년 유럽에서는 독일의 신학 교수인 마르틴 루터에 의해 종교 개혁이 일어났어요. 이후 그를 지지하는 신교파가 생겨나면서, 가톨릭을 믿는 구교파와 갈등이 깊어졌지요. 그중 30년 전쟁은 신교파가 구교를 강요하는 신성 로마 제국에 반기를 들면서 일어난 종교 전쟁으로, 30년 동안 계속되었어요.

로마 교황청에 도전장을 내다
로마 교황인 레오 10세는 산 피에트로(성 베드로) 대성당을 보수 공사하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면벌부(면죄부)를 팔게 했어요. 면벌부는 교회에 돈이나 재물을 바친 사람에게 그 죄를 면한다는 뜻으로 발행하던 증서예요. 당시 교회는 부정부패가 심했어요. 교황도 사치를 일삼아 무려 65가지 코스로 이루어진 저녁 식사를 할 정도였지요. 또 성직을 매매할 뿐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 교회 의식에 쓰이는 신성한 물건을 팔기도 했어요.
16세기 가톨릭 교회의 면벌부,
독일에서 면벌부 판매를 맡은 신부는 '땡그랑!'하고 면벌부를 구입한 돈이 통에 떨어지는 순간, 죽은 자의 영혼이 지옥 불에서 뛰어나온다고 설교했어요. 성직자였던 마르틴 루터는 이와 같은 거짓말을 용납할 수 없었어요. 그는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여 종교 개혁에 불을 붙였어요.

루터는 95개조 반박문에서 "구원은 오직 신앙, 은총, 말씀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주장하면서 세상에서 최고로 부자인 교황은 왜 자신의 돈으로 대성당을 짓지 않고, 가난한 신자들의 돈으로 공사를 진행하느냐고 비판했지요.

루터는 반박문의 36조에서 "진실로 회개한 크리스트교도는 면벌부가 없어도 징벌이나 죄에서 완전히 해방된다."라고 하여 농민을 비롯한 신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었어요.
마르틴 루터(1483~1546년)와 그가 발표한 95개 조의 반박문,
루터를 지지하는 신교와 구교 간에 갈등이 깊어지다
로마 교황청의 착취에 고통 받던 독일 농민들과 독일을 통치하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게 불만이 많았던 독일의 일부 제후들은 루터를 열렬히 지지했어요. 이후 루터를 지지하는 신교파와 로마 교황청을 지지하는 구교파는 대립을 거듭하다가, 결국 전쟁을 하게 되었어요.

독일 전역이 동요하게 되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카를 5세는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제국 회의를 소집하여 '제후의 신앙에 따라 제후가 다스리는 지역의 신앙이 결정된다.'고 선언했어요. 이로써 루터파의 자유가 허용되었지요.

30년 전쟁이 시작
17세기 초, 신교와 구교 간의 갈등이 다시 깊어졌어요. 신성 로마 제국과 교황이 신교를 믿는 도시를 강제로 가톨릭을 믿는 제후의 통치 지역으로 편입시켜 버렸기 때문이에요. 여기에 저항하여 신교를 믿는 팔츠의 선제후를 중심으로 신교파 연합이 구성되었어요. 그러자 구교 제후들도 바이에른을 중심으로 가톨릭 연맹을 결성했지요.

그런데 1618년, 30년 전쟁이 일어나는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어요. 구교를 믿는 보헤미아의 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페르디난트 2세가 신교의 종교 자유를 보장했던 칙령을 취소해 버린 거예요. 그러자 보헤미아 의회는 그를 왕의 자리에서 내리고, 팔츠의 선제후인 프리드리히 5세를 왕으로 세웠지요. 이것을 계기로 30년 전쟁이 시작되었어요.
잠깐! 선제후는 누구일까?
선제후는 신성 로마 제국에서 독일 황제를 뽑는 권한을 가진 사람들을 말해요. 왕이나 황제 다음으로 높은 권한을 가지고 있었지요.

유럽
여러 나라가 참여하여 국제전으로 발전하다
30년 전쟁은 독일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비극적인 전쟁이었어요.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독일의 민중들은 가족을 잃고 헐벗고 굶주렸으며, 나라 전체가 황폐해졌어요. 800만여 명은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지요. 어린이와 여성들은 오갈 곳 없는 신세로 전락하였고, 길에는 다친 사람, 부랑자가 넘쳤어요.

이렇게 전쟁이 오랫동안 이어진 것은 여러 나라들이 개입하여 국제 전쟁이 되었기 때문이에요. 신교가 패배하면, 신교를 믿는 덴마크와 네덜란드, 노르웨이, 스웨덴이 신교 편에 서서 구교를 공격하였고, 구교가 패배하면, 구교를 믿는 에스파냐와 오스트리아가 구교 편에 서서 신교를 공격했어요. 프랑스는 구교를 믿는 국가였지만, 에스파냐와 오스트리아와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신교 편으로 참전했지요.

독일(신성 로마 제국)에는 종교 개혁 이후, 가톨릭과 개신교가 함께 어우러져 있었어요. 그러던 17세기 초, 개신교 제후국들이 모여 프로테스탄트(개신교도) 모임을 만들었어요. 그러자 이에 맞서기 위해서 가톨릭 제후국들도 또 다른 제후국 바이에른(오늘날 독일 남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가톨릭 동맹을 만들었지요.

그로부터 10년 후, 개신교 제후국 보헤미아(오늘날 체코 서부 지역)의 왕이 된 페르디난트 2세가 신교도를 탄압하는 사건이 일어났어요. 이에 엄청나게 화난 보헤미아와 오스트리아의 프로테스탄트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어요.

“우리는 페르디난트 2세를 황제로 인정할 수 없다!” 그러고는 팔츠 선제후를 새 국왕으로 올리고 페르디난트 2세와 싸웠어요. 이때 페르디난트 2세는 재빨리 에스파냐에 도와달라고 연락했어요. 에스파냐는 군대를 보내 주었지요. 이제 독일의 개신교 세력들은 거의 없어질 위기에 처하게 되었어요.

이때 북쪽 지방의 프로테스탄트 국가인 덴마크가 싸움에 끼어들었어요. 개신교가 무너지는 걸 그냥 지켜볼 수가 없었던 거예요. 그런가 하면 프랑스도 개신교를 돕고자 전쟁에 참여했지요. 이런 식으로 여러 나라가 뒤엉킨 전쟁은 30년이나 계속되었어요. 이를 30년 전쟁이라 해요.

30년 전쟁으로 유럽의 역사가 바뀌다
30년 전쟁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맺으며 신교의 승리로 끝났어요. 이 조약으로 네덜란드는 에스파냐로부터 완전히 독립했고, 독일을 지배하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 명예만 남게 되었지요. 스웨덴이 강대국으로 떠오른 반면, 에스파냐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어요.

독일의 지방 국가들이 독립하면서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었어요. 이 과정에서 루터와 함께 신교를 대표하는 개혁가인 스위스의 종교 개혁가 칼뱅의 교리를 믿는 칼뱅파도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되었어요.

가장 치열했던 종교 전쟁, 30년 전쟁: 독일 안에서 신교와 구교가 벌인 전쟁이었다. 이 전쟁 결과 신교와 구교는 동등한 권리를 갖게 되었다.

1648년 베스트팔렌에서 신교와 구교(가톨릭교)가 서로를 인정하는 조약을 맺음으로써 겨우 전쟁이 끝났지요. 하지만 전쟁이 끝났을 때, 독일은 온 나라가 황폐해졌고 뭉쳐 있던 제후국들이 독립해 나갔어요. 그럼으로써 독일의 영토는 아주 좁아졌어요. 뿐만 아니라 1600만 명이던 인구가 600만 명으로 크게 줄었지요. 경제는 사실상 마비될 지경이었고 중산층은 완전히 가난해져 버렸어요.

그래서 역사가들은 베스트팔렌 조약을 일컬어 ‘독일의 사망 증명서’라고 표현했지요.
30년 전쟁을 끝내기 위한 베스트팔렌 조약,

30년 전쟁을 끝내기 위한 베스트팔렌 조약프로이센의 한 주인 베스트팔렌 뮌스터 시에서 에스파냐, 프랑스, 스웨덴, 독일의 자유 도시들이 참여해 조약을 맺었다. - 테르보르흐 <뮌스터 조약의 비준에 관한 서약>

그나마 브란덴부르크(오늘날 독일 동북부 지역)의 프로이센만이 주권 국가가 되겠다는 꿈을 꾸었어요. 프로이센은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통치하면서 절대 왕정의 체제를 갖추어 나가기 시작했어요.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프랑스의 위그노를 비롯한 외국인을 끌어들여 산업 발전에 필요한 인력을 보충했어요. 상비군도 만들어 두었어요. 그리고 귀족들을 설득하여 정부의 중요한 관리와 군대의 장교로 임명했지요.

그 뒤를 이은 프리드리히 1세는 수도를 베를린으로 옮겼고, 이어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군사비를 더 투자하여 상비군을 20만 명으로 늘렸어요. 심지어 나랏돈의 절반을 군사비로 쓰기도 했지요. 그 때문에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군인 왕’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어요. 그야말로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프로이센의 군대를 유럽 최강으로 만들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답니다.

마침내 프로이센이 막강한 유럽 국가 중 하나가 된 것은 프리드리히 2세 때였어요.
프리드리히 2세는 어린 시절, 매우 나약하고 음악을 좋아하는 수줍은 소년이었어요. 프리드리히 2세는 플루트 연주하는 걸 좋아했고, 프랑스의 예술을 사랑하며 시를 짓곤 했어요.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그런 아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요. 그래서 밥을 굶기거나 감옥에 가두는 방법으로 아들을 훈련시켰어요.

“프로이센의 지도자가 되려면 강철같이 튼튼해야 해. 너처럼 나약해서는 이 나라를 이끌어 갈 수가 없어!”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프리드리히 2세는 자라면서 매우 씩씩한 군인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어요. 아니나 다를까 프리드리히 2세는 왕위에 오른 뒤, 더욱 강력한 군대를 만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프로이센을 유럽의 강대국으로 성장시켰어요.

물론 왕이 된 후에도 프리드리히 2세는 프랑스 예술을 사랑했고, 책을 썼으며 프랑스의 뛰어난 문학가 볼테르와 편지를 주고받기도 했어요. 자신이 지은 상수시 궁전에 볼테르를 초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요.

대왕의 휴식 공간 상수시 궁전: 독일의 도시 포츠담에 있는 궁전이다. 프랑스 문화를 좋아하던 프리드리히 2세가 베르사유 궁전을 따라 지었다. ‘상수시’는 프랑스 말로 ‘근심이 없는’이란 뜻이다. 이윽고 프리드리히 2세는 군대를 이끌고 오스트리아의 왕위 계승 전쟁에 참여했어요.

오스트리아에서 황제 카를 6세가 세상을 떠났는데, 그 뒤를 이을 왕자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왕위를 물려받았지요.

“여자가 왕위에 올라서는 안 됩니다!”

프리드리히 2세가 이렇게 주장하며 전쟁에 참여한 데는 다른 속셈이 있었어요. 프리드리히 2세는 공업이 발달하고 지하자원이 풍부한 슐레지엔을 차지하고 싶었어요. 프로이센을 힘센 나라로 이끌기 위해서는 슐레지엔의 상업과 지하자원이 꼭 필요했으니까요.

그러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랑스와 러시아, 두 나라와 손잡고 프리드리히 2세와 싸우기로 했어요. 프리드리히 2세도 영국을 끌어들였어요.

결과는 프리드리히 2세의 승리였어요. 결정적인 순간에 러시아의 여왕이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러시아 군대가 돌아갔기 때문이에요. 이 승리로 프로이센은 슐레지엔 지역을 얻었고 영토는 1.6배, 인구는 무려 두 배 이상 늘어났어요. 이로써 프로이센은 유럽에서 제일 힘센 나라 중 하나로 떠오를 수가 있었어요. 프리드리히 2세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항상 군복을 입고 다녔고, 자신의 신념을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했어요.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군대를 강하게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열 명의 학자보다 단 한 명의 훌륭한 장교를 먼저 얻어야 한다!” 그 말에 따라 프리드리히 2세는 엄격한 군대 법으로 병사들을 끊임없이 훈련시켰고, 더 강한 군대를 만들어 나갔어요.

물론 군대에만 힘을 쏟은 건 아니었어요. 강한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경제 발전이 필수였기 때문에 산업 발전에도 눈을 돌렸어요. 농민들에게 농기구를 무료로 주고, 도로와 다리를 세웠어요. 금속 공업과 섬유 공업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도 노력했지요. 그러면서 프리드리히 2세는 프랑스의 루이 14세와는 달리 “나는 국민의 최고 머슴이다!”라는 말을 남겼어요.

출처 ^ 참고문헌,
[종교개혁 [Reformation, Reformation] (종교학대사전, 1998...)
[종교 개혁의 진행 과정 (영국사, 2003. 11. 10., 위키미디어 커먼즈)
[종교 개혁 (천재학습백과 초등 스토리텔링 세계사)
[30년 전쟁 - 유럽 최대의 종교 전쟁 (재미있는 전쟁 이야기, 2014..,서울대학교 뿌리깊은 역사나무)
[30년 전쟁과 프로이센 (처음 세계사 6 - 절대 왕정과 산업 혁명, 2015.., 초등 역사 교사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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