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29일 수요일

피타고라스[ Pythagoras ]

피타고라스[ Pythagoras ]

피타고라스
그리스의 종교가·철학자·수학자. 피타고라스는 만물의 근원을 ‘수()’로 보았으며, 수학에 기여한 공적이 매우 커 플라톤, 유클리드를 거쳐 근대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피타고라스의 정리의 증명법은 유클리드에 유래한 것이며, 그의 증명법은 알려져 있지 않다.

출생-사망/ 국적/ 활동분야/ 출생지/
BC582? ~ BC497?
그리스
종교, 철학, 수학
그리스 에게해(海) 사모스섬
정치가, 수학자, 철학자. 처음 사모스 섬에서 살다가, 사모스는 포류크라테스가 정적이었던 관계로 성년이 되어 이탈리아로 옮겨가서 크로톤 시에서 살았다. 이 당시(기원전 6세기 말) 이곳의 권력은 귀족계급의 손아귀에 있었다. 피타고라스는 '질서'에 관한 반동적인 학설을 제기하였는데, 이 질서란 말은 사회생활에 적용할 경우 귀족권력의 의지대로 해석되고 있었다. 그는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를 '질서' 파괴로 간주하였다.

에게해(海) 사모스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므네사르코스(Mnesarchos)는 이집트, 그리스, 이탈리아, 에게 해 등지를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는 상인이었으며 아들이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어려서 부터 리라 연주와 그림, 운동을 배울 수 있도록 하였고 긴 여정의 장사길에 함께 데려가기도 하였다. 이후 피타고라스의 스승이었던 탈레스(Thales)의 주선으로 이집트로 유학을 떠나 23년간 수학하였으며, 페르시아의 침략으로 이집트가 함락되고 포로가 되어 바빌론으로 이송되어 12년을 보냈다.

이집트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접한 피타고라스는 56세에 고향으로 돌아와 남이탈리아의 그리스 식민지 크로톤섬에 학술 연구 단체이면서 수도원 성격을 띤 최초의 철학공동체를 결성하였다. 피타고라스 공동체는 영혼의 윤회사상을 가르치며 육식을 금하는 채식주의를 따랐고 백색의 옷과 담요를 사용하였다. 그후 메타폰티온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생애를 마쳤다. 피타고라스 공동체는 온화와 겸손, 과묵을 덕목으로 추구하였으며, 신들과 양친,친구,계율에 대하여 절대적 신실(信實)과 자제,복종을 설파하였다.

그의 종교적 교의는 윤회(輪廻)와 사후의 응보로서 동시에 인간과 동물과의 유사성을 강조하고 육식을 금하였다. 이론적 방면의 연구에서는 음악과 수학을 중시하였는데, 음악에서는 일현금(一絃琴)에 의하여 음정이 수비례(數比例)를 이루는 현상을 발견하고 음악을 수학의 한 분과로 보았다.

피타고라스는 자신의 사상을 기록하는 것을 금지하였으며 저서를 남기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의 업적이 그 자신의 것인지 또는 초기 제자들의 것인지의 구별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제자인 필로라오스와 기타 학자들의 저술의 단편에 의하여 당시 피타고라스와 그 일파의 업적이 알려져 있다. 피타고라스는 만물의 근원을 ‘수(數)’로 보았다. 그 수는 자연수를 말하는 것으로 이들 수와 기하학에서의 점과를 대응시켰다.

예컨대 자연수 계열의 연속항의 임의의 항까지의 합은 삼각형수이고, 마찬가지로 기수계열의 합은 정사각형수, 우수계열의 합은 직사각형수라는 방법으로 정의하였다.

완전수, 인수의 합, 비례와 평균의 연구, 상가평균, 조화평균 등도 분류하였다. 피타고라스의 정리도 그 자신의 업적인지 제자들의 업적인지는 불분명하며 그의 증명법도 오늘날에는 알려져 있지 않다. (오늘날의 그 정리의 증명법은 매우 다양하며 가장 대표적인 증명법은 유클리드에 유래한다).

사모스의 상인 무네사르코스가 아내와 함께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 참배했을 때 준 자식으로, <아폴론의 대변자>라는 의미로 피타고라스라고 이름붙였다고 한다. 젊었을 때 사모스에서 이오니아 철학을 공부하고, 친구인 폴리크라테스와 함께 정치개혁에 임했다. 이 시도는 성공을 거두었는데, 폴리크라테스가 점차로 독재자가 되어가는 것을 비판해서 고국을 버렸는데 30세 전후 무렵으로 생각된다. 그후 30년 동안 세계각지의 밀의전수를 구해서 편력하고, 이집트,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카리아, 인도 등 발이 닿지 않은 곳이 없으며, 당시의 모든 학문을 몸에 익혔다고 전해지며, 그 박학다식은 많은 고대 작가에게 경탄받았다.

60세 전후, 남이탈리아의 크로톤에 거주를 정하고, 거기에 밀의 학교로서 피타고라스 교단을 창립했는데 이 교단은 즉시 부흥하고, 그 영향하에 크로톤은 남이탈리아의 패권을 장악했다. 한편 90세 때, 교단과 세속권력의 확집이 격렬해져 가혹한 탄압을 받게 되었는데 메타폰티온으로 추방되어서 그곳에서 죽었다. 그러나 사후에도 탄압이 계속되고 교단은 각지로 흩어졌으며, 결국 비밀결사화하였고 피타고라스 교단에서는 일체의 교설이 피타고라스의 것이 되었는데 그는 절대적 권위를 가진 교조였다. 여기에서 남녀는 평등하게 취급되고, <피타고라스적 생활>을 보내도록 지도되었으며 청정을 유지하고 육식을 끊고, 침묵 중에 자기혼을 응시하는 수행이 부과되었다.

피타고라스에 의하면 혼은 원래 불사, 즉 신적인 존재인데, 무지로 자신을 더럽게 하고, 그 죄를 씻기 위해서 육체라는 묘에 매장되고 있으며 우리들이 생이라고 하는 지상의 생활은 실은 혼의 죽음이며, 그 죽음에서 부활해서 다시 신적 본성을 회복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인데 그에 실패해서 무지한 인생을 계속 살면, 윤회전생의 틀에서 영구히 벗어나지 못한다. 한편 이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혼은 지혜(소피아)를 구하고, 그로써 본래의 순수존재로 돌아가야 한다.

<지혜의 탐구(필로소피아)>야말로 해탈을 위한 가장 유력한 방법인데 이 교단에는 종교적 해탈을 구하는 청문생과 학문적 연구에 정진하는 학문생의 두 파가 있었다고 하며 여기에서 학문은 종교적 해탈과 불즉불리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이 두 파는 현교와 밀교, 또는 신참자와 숙달자로 구별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또한 지혜에 이르기 위한 준비적 과정으로서 네 개의 학문이 있었다. 첫 번째에 <수의 학>, 두 번째로 <형의 학>, 세 번째로 <별의 학>, 네 번째로 <조화의 학>이다. 이 4학은 후에 중세에서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유럽학문의 중추를 이루었는데, 근대적 의미에서의 수학, 기하학, 천문학, 화성학과는 현상적으로는 어찌되었든, 본질적으로는 다르다는 것에 주의해야 하는데 그것은 고대적인 <수>의 관념에 의거한 일종의 명상체계였다.

1은 최초의 자연수 또는 단위수일 뿐만 아니라, 시원, 전체, 궁극, 완전을 의미했다. 마찬가지로 2는 2개의 단위수가 아니라 대립, 분열, 투쟁, 무한을, 3은 조화, 미, 질서, 신성을, 4는 사물, 현실, 배분, 정의 등을 의미한다. 수는 양이 아니며 존재의 원형적 형상 이었다. <만물의 원리는 수이다>라고 그가 말했을 때, 세계는 양적 관수관계로 이루어진 수학적 질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만물은 수의 존재분절기능에 의해서 질서가 확립되고, 존재의 각 층에는 동일한 수의 유비관계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 다음에 제시하는 <4>이다. 이 1, 2, 3, 4로 된 10개의 점은 대우주와 소우주에 공통하는 세계질서(코스모스)를 나타내는 만다라로 되어 있으며, 피타고라스 교단에서는 이 도형 앞에서 서약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위와 같은 <수>의 중시는 수학사상에서 피타고라스 또는 피타고라스 학파에 돌려지는 많은 업적을 낳게 되었다. 삼평방의 정리(피타고라스의 정리), 피타고라스의 수, 무리수의 발견 외에, 수론과 결부된 음계이론이 특히 유명한데, 최근에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수학의 영향도 주목되며, 그 독창성에 대한 평가는 정하기 어렵다. 수를 만물의 원리로 보는 피타고라스주의는 이후의 유럽사상사, 과학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는데 엠페도클레스의 사대론,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소크라테스플라톤의 철학도 그 권내에 있다. 한편 지동설의 최초의 제창자라는 피롤라오스, 입방체의 배적문제의 해결로 유명한 아르키타스 등은 피타고라스 학도였다.
피타고라스, [Pythagoras] 
기원전 1세기에는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서 신(新)피타고라스주의가 일어나 종교적 전통에 수학적 빛을 비추었다. 티아나의 아폴로니오스가 이 대표이며, 이안브리코스에도 신 피타고라스 학파와의 결합이 인정된다. 또한 근대를 연 상징적 사건이었던 코페르니쿠스의 우주론이나 케플러의 우주 모델도 피타고라스 학파 사상의 힌트가 되었으며 자연을 수학적으로 기술하려는 근대자연과학의 방법론은 적어도 그 중요한 일부분을 16~17세기의 피타고라스 부흥운동에 의해서 지지되고 있다. 또한 르네상스는 어느 의미에서 플라톤과 함께 피타고라스의 재생운동이었다고도 할 수 있으며, 당시의 음악, 회화, 건축, 문예 등에도 피타고라스적 우주론이 반영된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이의 정리에서 의외로 곤란한 문제가 발생하였다. 즉, 정사각형의 한 변과 그의 대각선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이다. 이 경우 대각선의 길이는, 한 변을 1이라 할 때 √2가 되어 약분이 불가능한 무리수가 된다. 이것은 자연수만을 수로 생각한 피타고라스와 그의 제자들에 있어서는 극히 난문제였기 때문에 수로부터 제외시켰던 것이다. 또 피타고라스와 그의 제자들은 임의의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2직각(180°)과 같음을 발견하고 이를 증명하였다.

'플라톤의 다면체(多面體)'로 불리는 정사면체, 정육면체, 정팔면체, 정십이면체, 정이십면체를 알고 있었다고 한다. 정십이면체는 정오각형의 작도를 필요로 하지만 한 선분을 중외비(中外比)로 끊는 문제로 환원시켜 이 작도에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피타고라스는 이 정오각형에서 생기는 성형오각형(星形五角形)을 그의 교단의 휘장(徽章)으로 채택하였다고 한다. 피타고라스가 수학에 기여한 공적은 매우 크며, 그의 영향은 플라톤, 유클리드를 거쳐 근대에까지 미치고 있다.

천문학에서는 지구가 구형(球形)임을 확신하고, 우주의 중심은 태양이며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공전함을, 지구 자전으로 인한 낮과 밤의 생김, 기울어진 자전축으로 인한 계절의 변화가 생김을 이미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 다른 과학자들에 밀려 1000여년 간 다른 학자들의 인정을 받지 못하다가 16세기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로 인해 과학혁명의 최초에 피타고라스가 있었음이 인정되었다. 피타고라스에 의해 우주는 코스모스(Cosmos)로 불려지기 시작하였다.

피타고라스의 정리
직각삼각형에서 직각을 낀 두 변의 길이를 각각 a, b라 하고, 빗변의 길이를 c라 하면 a2+b2=c2이 성립한다.
[참고] 직각삼각형에서 직각을 끼고 있는 두 변의 제곱의 합은 빗변의 길이의 제곱과 같다.
피타고라스, 공식,
      피타고라스 공식
      [피타고라스의 정리 (Basic 중학생을 위한 수학공식 활용사전, 2007. 3. 26., 장지경)

      참조항목

      역참조항목

      카테고리
      출처 ^ 참고문헌,

      [피타고라스 [Pythagoras] (철학사전, 2009.,)
      [피타고라스 [Pythagoras] (두산백과)
      [피타고라스 [Pythagoras] (종교학대사전,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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