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 10일 일요일

우리국악, 판소리,

우리국악, 판소리,

판소리는 한 명의 소리꾼이 고수(북치는 사람)의 장단에 맞추어 창(소리), 말(아니리), 몸짓(너름새)을 섞어가며 긴 이야기를 엮어가는 것을 말한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유형
개념용어

목차

  1. 정의
  2. 개설
  3. 판소리의 음악
  4. 판소리의 구성
  5. 판소리의 유파
  6. 동편제
  7. 서편제
  8. 중고제
  9. 판소리의 장단
  10. 진양
  11. 중모리
  12. 중중모리
  13. 자진모리
  14. 휘모리
  15. 엇모리
  16. 엇중모리
  17. 붙임새
  18. 판소리의 선율
  19. 계면조
  20. 우조
  21. 평조
  22. 경드름
  23. 설렁제
  24. 기타 조
  25. 판소리 음악사
  26. 판소리의 문학적 특질

정의

창자가 고수의 북장단에 맞추어 서사적인 이야기를 소리와 아니리로 엮어 발림을 곁들이며 구연하는 고유의 민속악. 구비서사시

개설

그것은 전세계적으로 다양하게 존재하였던 구비서사문학의 독특한 발전형인 동시에, 한민족이 지녀온 갖가지 음악언어와 표현방법이 총결집된 민속악의 하나이며, 현장연희에서는 일부 연극적인 표현요소까지도 구사하는 종합적 예술이다.
판소리는 전통적으로 광대라고 불려진 하층계급의 예능인들에 의하여 가창·전승되어 왔다. 그들은 때로는 농촌이나 장터에서 노래했고, 때로는 양반·부호들의 내정(內庭)에서 연희하기도 하였다.
판소리사의 진행과정을 통해 청중의 구성은 점차 상향적으로 확대되는 추세를 보였으나, 대체적으로 판소리는 평민예술의 바탕을 지니면서도 탈춤, 남사당놀이 등과 달리 다양한 계층의 청중들을 포용할 수 있는 폭과 유연성을 지녔다고 하겠다.
‘판소리’라는 말의 어원과 의미에 대하여는 아직 일치된 결론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그것이 ‘판’과 ‘소리’의 합성어임은 분명하나, 문제는 ‘판’의 의미이다.
우리말에서 ‘판’의 일반적 의미는 ‘상황·장면’과 ‘여러 사람이 모인 곳’으로 나타나는데, 이를 취할 경우 판소리라는 이름은 ‘다수의 청중들이 모인 놀이판에서 부르는 노래’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그러나 다수의 청중을 상대로 한 소리판에서 불려진 창악에는 판소리 외에도 여러 종류가 있어서 이를 판소리의 어원으로 단정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이와 다른 또 하나의 견해는 ‘판’을 ‘악조(樂調)’라는 의미로 보는 것이다. 이를 취할 경우 판소리라는 이름은 ‘변화 있는 악조로 구성된 노래’라는 의미가 되는데, 판소리 관계문헌에 이를 지지할 만한 용례가 더러 보인다.
따라서 후자의 견해가 좀더 큰 설득력을 띤다고 할 수 있으나, 판소리가 다수의 청중을 상대로 한 소리판에서 연창되는 현장예술이며, 방법상으로는 작중상황에 따라 다양한 악조와 장단을 구사하는 창악이라는 점에서 두 가지 어원설은 그 나름의 통용가치를 가진다.

판소리의 음악,

판소리는 소리광대가 서서 소리도 하고 아니리도 하고 발림도 하며 긴 이야기를 엮어 나가고 고수는 앉아서 추임새를 하며 북장단을 치는 판놀음의 한 가지이다

판소리의 구성

판소리는 소리광대가 서서 소리도 하고 아니리도 하고 발림도 하며 긴 이야기를 엮어 나가고 고수는 앉아서 추임새를 하며 북장단을 치는 판놀음의 한 가지이다.
그래서 판소리란 ‘판놀음으로 벌이는 소리’라는 뜻이다. 소리라는 말에는 음향(音響)이라는 뜻도 있지만 선소리·김매기소리·짓소리에서 볼 수 있듯이 노래라는 뜻도 있다.
판놀음이란 널찍한 마당을 놀이판으로 하여 음악·춤·연극·곡예 따위의 놀음을 순서대로 짜서(판을 짠다고 한다) 벌이는 놀음을 가리키며, 판놀음으로 벌이는 놀음에는 흔히 ‘판’자를 붙이는데, 줄타기는 판줄, 춤은 판춤, 굿(農樂)은 판굿, 염불은 판염불, 소고놀음은 판소고, 소리는 판소리라 한다.
옛 문헌에서는 판소리를 본사가(本事歌)·타령(打令)·잡가(雜歌)·극가(劇歌)·창가(倡歌)로 적기도 하였으나 이두식으로 적은 본사가라는 말을 빼고는 판소리를 가리키는 고유명칭이 아니다. 타령·잡가는 속악(俗樂)이라는 뜻이며 극가는 극적인 노래라는 뜻이고 창가란 광대가 부르는 노래라는 뜻이다.
광대는 한편 창우(倡優)·창부(倡夫) 또는 노릇바치라 이르는데, 판놀음에서 소리·춤·재담·곡예 따위를 섞어 놀음을 벌이는 연희자(演戱者)를 뜻하는바, 그 장기에 따라 소리광대·줄광대·어릿광대·대광대·탈광대로 나눈다.
이 가운데 소리광대가 가장 대우를 받았다. 솜씨가 뛰어난 소리광대를 명창(名唱)이라 하고 또 이를 예우하여 가객(歌客)이라 이른다. 가객은 본디 정가(正歌)를 부르는 이를 뜻하였다. 광대는 청창옷에 초립을 쓰는 것이지만, 명창으로 꼽힌 가객은 창의를 걸치고 통영갓을 쓰고 갓신을 신었다.
판소리에서 노래로 부르는 것을 소리라 하고 말로 하는 것을 아니리라 하지만 선율로 하든, 말로 하든 장단(長短)을 치지 않고 자유리듬으로 하는 것을 아니리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말로 하는 아니리는 말조아니리, 선율로 하는 아니리를 소리조아니리라고 갈라 부르는 이도 있다. 명창 가운데는 소리조를 잘 하는 소리광대가 있고 아니리를 잘 하는 아니리광대가 있었으나 모두 능한 이를 대명창으로 꼽는다.
판소리에서 광대가 소리나 아니리로 이야기를 엮으며 몸짓하는 것을 발림이라 하고 그 밖에 너름새 또는 사체라고도 이른다. 발림이란 춤이나 놀이에서 벌이는 몸짓을 뜻하는 것으로, 판소리에서 발림은 소리에 따른 춤가락스러운 몸짓, 소리가락을 강조하기 위한 몸짓, 사설의 극적 내용을 그리는 몸짓을 포함한다.
발림은 하는 법이 있어 명창 가운데에는 김창환(金昌煥)과 같이 발림을 많이 한 명창이 있고 송만갑(宋萬甲)과 같이 발림을 아껴서 한 명창이 따로 있지만 모두 발림하는 법에 따르는 것은 같다. 고수는 취고수(吹鼓手) 또는 고인이라 하여 삼현(三絃)재비를 뜻하기도 하지만 판소리에서 고수는 북장단치는 재비를 뜻한다.
판소리에서 고수는 광대의 소리에 따라 장단을 치는 한편 광대에게 소리의 한 배를 잡아주고 장단과 박(拍)을 가늠하게 하며 추임새로 극적 상대자 구실을 할 뿐만 아니라 소리의 맺고 푸는 것을 알아서 북의 통과 가죽을 가려 치므로 고수의 구실이 무겁다 하여 일고수(一鼓手) 이명창(二名唱)이라는 말이 전해 온다.
판소리에서 광대의 소리에 흥이 나면 고수나 관중이 ‘좋다’·‘얼씨구’ 따위의 감탄사를 질러 흥을 돋우는 소리를 추임새라 한다.
고수의 추임새는 광대의 소리를 추어 흥을 돋우는 구실, 소리의 공간을 메워주는 구실, 장단의 박을 대신하는 구실, 광대의 상대역으로써 연극성을 돋우는 구실, 광대 소리의 음악 또는 극적 요소를 돋우어주는 구실 따위가 있다.
판소리는 관아나 마을 또는 사가(私家)의 잔치에서 불렸다. 판소리를 벌이는 놀이판을 소리판 또는 소리청이라 하였는데, 소리판은 관아·마을·사가의 마당이나 큰 대청마루에서 벌어졌다.
줄타기·땅재주·무동춤과 함께 판놀음으로 벌이기도 하고 또 판소리 홀로 소리판놀음으로 벌이기도 하며 조선 말기에는 방안놀음으로 벌이는 경우도 많았다.
소리청의 가운데 돗자리를 깔고 광대는 창의를 입고 통영갓을 쓰고 갖신을 신고 부채를 들고 상석(上席)을 향하여 서서 갖가지 소리도 하고 아니리도 하고 사설(辭說)과 소리에 따라 발림도 하며 구경꾼을 웃기고 울리고, 고수는 두루마기 차림에 갓을 쓰고 북을 앞에 놓고 비껴 앉아 광대의 소리에 북을 치고 추임새도 한다.
조선 중기에는 소리광대가 여러 이야기를 판소리로 짜서 불렀던 가운데 열둘을 골라 판소리 열두마당이라 부르니 그것이 송만재(宋晩載)의 ≪관우희 觀優戱≫와 정노식(鄭魯湜)의 ≪조선창극사 朝鮮唱劇史≫에 보인다.
≪관우희≫에는 <춘향가>·<심청가>·<흥보가>·<수궁가>·<적벽가>·<가루지기타령>(변강쇠타령)·<배비장타령>·<장끼타령>·<옹고집타령>·<강릉매화타령>·<왈자타령>·<가짜신선타령>이 나왔다.
≪조선창극사≫에는 ≪관우희≫와 같되, <왈자타령>을 <무숙(武淑)이타령>이라 하였고 <가짜신선타령> 대신에 <숙영낭자전>을 들고 있다.
판소리 열두마당은 조선 후기에 하나씩 사라져 조선 말기에 활동하던 명창을 마지막으로 <춘향가>·<심청가>·<흥보가>·<수궁가>·<적벽가> 다섯마당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전승이 끊어졌다.

판소리의 유파

판소리 전승지역은 전라도·충청도 서부와 경기도 남부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이르므로, 판소리는 지역적 특성과 전승 계보에 따른 파가 생겼다. 전라도 동북지역의 소리제를 동편제(東便制)라 하고, 전라도 서남지역의 소리제를 서편제(西便制)라 하며, 경기도·충청도의 소리제를 중고제(中高制)라 한다.

동편제

동편제는 운봉·구례·순창·흥덕 등지의 이쪽 즉, 전라도 동북지역에 전승되어 오는 소리제를 순조 때의 명창 송흥록(宋興祿)의 소리제에서 송광록(宋光祿)·박만순(朴萬順)·송우룡(宋雨龍)·송만갑(宋萬甲)·유성준(劉聖俊)으로 전해지는 소리제를 주축으로 한다.
그 밖에 김세종(金世宗)·장자백(張子伯), 정춘풍(鄭春風)·박기홍(朴基洪)으로 전해지는 소리제 또한 동편제의 큰 줄기를 이루었다. 동편제 소리는 비교적 우조(羽調)를 많이 쓰고 발성을 무겁게 하고 소리의 꼬리를 짧게 끊고 굵고 웅장한 시김새로 짜여 있다.

서편제

서편제는 보성·광주·나주 저쪽, 즉 전라도 서남지역에 전승되어 오는 소리제로 철종 때의 명창 박유전(朴裕全)의 소리제에서 이날치(李捺致)·김채만(金采萬)으로 전해지는 소리제를 주축으로 하고, 그 밖에 정창업(丁昌業)·김창환(金昌煥)·김봉학(金奉鶴)으로 전해지는 소리제로 큰 줄기를 이루었다.
서편제 소리는 비교적 계면조(界面調)를 많이 쓰고 발성을 가볍게 하며, 소리의 꼬리를 길게 늘이고 정교한 시김새로 짜여 있다.

중고제

중고제는 경기도·충청도지역에 전승되어 오는 소리제로 순조 때의 명창 김성옥(金成玉)·김정근(金定根)·황호통(黃浩通)·김창룡(金昌龍)으로 전하여지는 소리제와 또한, 순조 때의 명창 염계달(廉季達)·고수관(高壽寬)·한송학(韓松鶴)·김석창(金碩昌)으로 전하여지는 소리제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중고제 소리는 동편제 소리에 가까우며 고박한 시김새로 짜여 있다.

판소리의 장단

판소리의 음악은 시나위권(圈)의 향토음악 가운데 패개성음에 토대를 둔다고 볼 수 있다. 판소리가 시나위권의 의식음악(儀式音樂)에서 창부(倡夫)가 부르던 패개성음에서 볼 수 있는 단순한 형태에서 고도의 예술음악으로 발전함에 따라 다른 분야의 음악적 어법(音樂的語法)을 빌려 써서 장단과 조(調)가 확대되고 붙임새와 시김새가 다양하고 정교하여졌고, 또 광대의 성질(聲質)에 따라 여러 가지 성(聲)과 목이 분화된 것 같다.
오늘날 판소리는 여러 가지 조·장단·붙임새·시김새·발성(發聲)에 있어서 음악적으로 다채롭고 정교한 표현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판소리 사설에 나타난 여러 극적 상황에 따른 음악적 표출을 할 수 있어서 훌륭한 극적 음악으로 꼽히고 있다.
판소리에 쓰이는 장단에는 진양·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휘모리·엇모리·엇중모리가 쓰이는데, 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 장단이 기본장단이었던 것 같다.
판소리에는 느린 장단인 진양, 보통 빠른 중모리, 조금 빠른 중중모리, 빠른 자진모리, 매우 빠른 휘모리, 이렇게 느리고 빠른 여러 장단이 있어 사설에 나타난 긴박하고 한가한 여러 극적 상황에 따라 가려 쓴다.

진양

진양은 3분박 느린 6박자를 단위로 하여 소리의 맺고 푸는 데에 따라 3∼6단위를 주기(週期)로 북의 변주가 있다. 진양에서 이 단위를 각(刻)이라 하는데, 흔히 4각을 주기로 하여 소리가 맺고 풀리므로 4각 24박 한 장단이라는 말이 나왔다.
진양은 한배에 따른 매우 느린 느진진양, 느린 평진양, 좀 느린 자진진양으로 나누는데, 자진진양을 판소리에서는 ‘세마치’라 부르기도 한다.
진양은 느린 장단이므로 판소리에서 사설의 극적 상황이 한가하고 이완(弛緩)되어 서정적인 장면에 많이 쓰인다. 진양으로 유명한 대목은 <춘향가>에서 ‘적성가(赤城歌)’·‘긴 사랑가’, <심청가>에서 ‘범피중류’·‘추월만정(秋月滿庭)’ 따위가 있다.

중모리

중모리는 일명 중머리라 이르며 2분박 보통 빠른 12박자로, 이를 몇 개의 단위로 하여 소리의 맺고 푸는 데 따라 북을 변주하여 친다. 중모리는 한배에 따라 느린 느진중모리, 보통 빠른 평중모리, 조금 빠른 자진중모리 등으로 나누는데 자진중모리를 단중모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중모리장단은 보통 빠른 장단이므로 사설의 극적 상황이 서정적인 장면이나 서술하는 대목에 많이 쓰인다. 중모리장단으로 유명한 대목은 <춘향가>에서 ‘쑥대머리’·‘옥중상봉’, <흥보가>에서 ‘가난타령’, <심청가>에서 ‘선인(船人) 따라가는 대목’ 따위가 있다.

중중모리

중중모리는 3분박 좀 느린 4박자이나 좀 빠른 12박자로 느끼기도 한다. 이를 3∼8단위로 하여 소리의 맺고 푸는 데 따라 북을 변주하여 친다.
중중모리는 한배에 따라 느진중중모리, 자진중중모리 장단으로 나누기도 한다. 중중모리는 춤추는 느낌의 한배이므로 사설의 극적 상황이 춤추거나 활보하거나 통곡하는 장면에 많이 쓴다.
중중모리장단으로 유명한 대목은 <춘향가>에서 ‘천자(千字)풀이’·‘자진 사랑가’·‘어사(御史)와 장모’, <심청가>에서 ‘꽃타령’, <흥보가>에서 ‘제비노정기(路程記)’·‘비단타령’, <수궁가>에서 ‘토끼화상’, <적벽가>에서 ‘장승타령’ 따위를 들 수 있다.

자진모리

자진모리는 3분박 보통 빠르거나 조금 빠른 4박자인데, 이를 몇 개의 단위로 하여 소리의 맺고 푸는 데 따라 북을 변주하여 친다. 보통 빠른 것을 느린 자진모리라 하고 조금 빠른 것을 자진 자진모리라 하는데, 산조(散調)에서는 이것을 휘모리라 하기도 한다.
느진 자진모리는 빠른 장단이므로 사설의 극적 상황이 어떤 일을 길게 서술하거나 나열하는 대목, 또는 어느 일이 차례로 길게 벌어지는 대목에 많이 쓰이며, 자진 자진모리는 극적이고 긴박한 대목에서 흔히 쓰인다.
자진모리장단으로 유명한 대목은 <춘향가>에서 ‘신연(新延)맞이’·‘어사출도’, <심청가>에서 ‘임당수 바람부는데’ <적벽가>에서 ‘자룡(子龍)이 활 쏘는데’·‘적벽화전(赤壁火戰)’ 따위를 들 수 있다.

휘모리

휘모리는 2분박 매우 빠른 4박자이며 이를 몇 개의 단위로 하여 소리의 맺고 푸는 데 따라 북을 변주하여 친다. 산조나 농악에서는 휘모리를 단모리 또는 세산조시라 이른다.
휘모리는 매우 빠른 장단이므로 흔히 사설의 극적 상황이 매우 분주하게 벌어지는 대목에서 쓰인다. 휘모리장단으로 유명한 대목은 <춘향가>에서 ‘춘향 끌어내리는데’, <심청가>에서 ‘심청이 물에 빠지는데’, <흥보가>에서 ‘돈과 쌀 퍼나르는 대목’을 들 수 있다.

엇모리

엇모리는 3+2+3+2로 혼합된 혼합박자로 매우 빠른 10박자로 느끼기도 한다. 이를 몇 개의 단위로 하여 소리의 맺고 푸는 데 따라 북을 변주하여 친다. 엇모리는 사설의 극적 상황이 신비한 인물의 거동이나 신비한 장면에 쓰인다.
엇모리장단으로 유명한 대목은 <심청가>에서 ‘중타령’, <흥보가>에서 ‘중타령’, <수궁가>에서 ‘도사(道士) 내려오는데’·‘범 내려오는 대목’을 들 수 있다.

엇중모리

엇중모리는 2분박 보통 빠른 6박자로 자진 도드리장단에 맞는다. 엇중모리 장단은 판소리의 뒤풀이에 흔히 쓰인다. 옛날에는 엇모리와 엇중모리 장단을 바꾸어 부르는 이도 있었다.

붙임새

판소리에서 말이 장단 또는 박에 어긋나게 붙는 기교에는 엇붙임·잉어걸이·완자걸이·교대죽·도섭 등 여러 가지가 있는바, 이러한 리듬적인 기교를 붙임새라 하며 이러한 붙임새를 쓰지 않는, 즉 말이 장단 및 박에 어긋나지 않게 붙는 기교를 대마디대장단 또는 대머리대장단·대마치대장단이라 부른다.
엇붙임은 말 몇 마디가 장단 머리에서 시작하지 않고 중간에서 시작하여 다음 장단 중에서 끝나는 붙임새이며, 잉어걸이는 말이 주박(主拍)에 놓이지 않고 약간 지나서 붙는 붙임새이다.
완자걸이는 여러 말이 주박에 각각 놓이지 않고 앞으로 당겨 붙고 뒤로 당겨 붙여지는 붙임새이며, 교대죽은 3분박 장단에 말을 촘촘히 엮어 놓되 2분박으로 붙여 헤미올라(hemiola)가 일어나는 붙임새이다 (혹은 말을 몇 박을 뛰어넘어 몰아붙이는 붙임새라고 하는 이도 있다).
도섭은 말을 장단과 박에 어긋나게 자유리듬으로 붙이는 붙임새이다. 붙임새를 쓰면 리듬이 아주 생동감 있고 다채로워지는데 자연스럽지 못하고 음악적이 아닌 어거지로 붙인 붙임새를 생자붙임이라고 하여 좋지 않게 본다.
이러한 판소리 붙임새의 용어는 음악적 특징이 비슷한 산조·시나위·농악에서 쓰이고 있고, 또, 민속춤에서도 춤사위(춤가락) 용어로 쓰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판소리의 선율

판소리의 기본선율은 의식에서 창부들이 부른 패개성음에 토대를 두고 발생하였다고 보이며 판소리가 고도로 예술화됨에 따라 다른 분야의 음악적 어법이 차용되어 오늘날에는 계면조·우조·평조·경드름·설렁제 등 여러 조(調)가 쓰이게 되었다.
판소리에서 조라는 것은 선법(旋法)·선율형(旋律形)·시김새·감정표현·발성(發聲) 등 여러 음악 특징으로 구분되는 선율적 특징이라 하겠다.
판소리에는 슬픈 느낌을 주는 계면조, 밝고 화평한 느낌을 주는 평조, 웅장한 느낌을 주는 우조, 경쾌한 느낌을 주는 경드름, 씩씩한 느낌을 주는 설렁제, 그 밖에 추천목·강산제·석화제·메나리조 등 슬프고 즐거운 여러 조가 있어 사설에 나타난 여러 극적인 정황에 따라 가려서 쓴다.

계면조

판소리에서 계면조는 전라도·충청도·경기도 남부의 살풀이 무가(巫歌), 또 이 지역의 육자배기토리의 민요가락 등에서 보이는 향토토리를 토대로 판소리를 선율화시킨 것이다.
그래서 가곡(歌曲)의 계면조와는 다른 점이 있다. 계면조라는 말은 가곡에서 쓰던 용어만 빌려 쓴 것이고, 슬픈 느낌을 주기 때문에 서름제 또는 애원성(哀怨聲)이라고도 부르며, 사설의 극적 정황이 슬프고 여성적인 장면에 흔히 쓰인다.
근래에는 사설의 내용에 따라 음구조(音構造)·시김새·발성에 차이가 있는 것을 가려 계면조에서 진계면·평계면·우계면·단계면 따위로 갈라 부르기도 하나 일반적으로 널리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계면조로 유명한 대목은 <춘향가>에서 ‘이별가’·‘옥중가’, <심청가>에서 ‘심청모 유언’·‘추월만정’, <흥보가>에서 ‘가난타령’, <적벽가>에서 ‘고당상(高堂上)’·‘새타령’ 따위가 있다.

우조

판소리에서 우조는 정가적(正歌的)인 특징을 가지는 조의 하나이다. 그러나 정가의 선율과 꼭 같은 것은 아니다. 판소리에서 우조는 웅장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호령조라고도 부르며 사설의 극적 정서가 웅장하고 남성적이고 영웅적인 대목에 흔히 쓴다.
우조로 유명한 대목은 <춘향가>에서 ‘만첩청산(萬疊靑山)’(구조 사랑가)·‘신연맞이’, <적벽가>에서 ‘삼고초려(三顧草廬)’와 같은 대목을 들 수 있다.

평조

판소리에서 평조 또한 정가적인 특징을 갖는 조의 하나이다. 이것도 정가선율과 꼭 같은 것은 아니다. 판소리 평조에서 평조는 화평스럽고 명랑하고 즐거운 느낌을 주기 때문에 사설의 극적 정서가 화창하고 즐거운 대목에 흔히 쓰인다. 평조로 유명한 대목은 <춘향가>에서 ‘천자풀이’, <적벽가>에서 ‘장승타령’ 따위를 들 수 있다.

경드름

경드름은 <창부타령>·<도라지타령>과 같은 서울민요토리를 판소리화시킨 것으로 서울토리와 비슷하여 경조(京調)·경제(京制)·경(京)토리라고도 부른다.
경드름은 경쾌하고 서울토리의 느낌을 주기 때문에 판소리 사설의 극적 정황이 서울사람이나 한량(閑良)들이 나오는 대목에 흔히 쓰인다. 경드름으로 유명한 대목은 <춘향가>에서 ‘남원골 한량’·‘이도령 춘향 달래는 대목’을 들 수 있다.

설렁제

설렁제는 권마성(勸馬聲)가락을 판소리화시킨 것으로, 높은 소리로 길게 빼는 선율과 도약적인 선율이 많아서 경쾌하고 씩씩한 느낌을 주는데, 덜렁제·드렁조·권마성제·중고조라고도 부른다.
사설의 극적 상황이 무사적(武士的)인 인물이 거드럭거리면서 호기 있게 나오거나, 떠드는 대목에 흔히 쓰인다. 설렁제로 유명한 대목은 <춘향가>에서 ‘군노사령(軍奴使令)’, <심청가>에서 ‘남경선인(南京船人)’, <흥보가>에서 ‘제비 후리러 나가는 대목’을 들 수 있다.

기타 조

추천목은 순조 때 명창 염계달이 낸 소리제로 <오봉산타령>, <한강수타령>과 같은 서울토리를 판소리화시킨 것이며, <춘향가>에서 ‘네그른 내력’·‘자진 사랑가’에서 보인다.
강산제는 순조 때 명창 모흥갑(牟興甲)이 낸 소리제로 <춘향가>에서 ‘이별가’·‘날 다려가오’에서 보인다. 석화제는 가야금병창제와 비슷한 소리제이며 순조 때 명창 김제철(金齊哲)·신만엽(申萬葉)이 낸 소리제이며, <수궁가>에서 ‘토끼 고향에 돌아오는 대목’에서 볼 수 있다.
메나리조는 <강원도아리랑>·<쾌지나칭칭나네>와 같은 강원도·경상도 민요의 메나리토리를 판소리화시킨 것으로 매우 드물게 보인다.
정응민(鄭應珉)제 <심청가>에서 ‘뺑덕이네 길소리’에 보인다. 판소리는 통성(通聲)이라 하여 힘차게 나오는 발성을 하되 성대를 약간 스쳐 좀 쉰듯한 목소리를 좋은 소리로 꼽는다.
그러나 부르는 이마다 목소리의 음질과 발성법에 따라 광대의 목소리를 여러 가지로 가르는데, 약간 걸걸한 수리성, 맑고 우렁찬 천구성, 단단한 철성 따위는 좋은 목소리로 꼽으며, 가는 세성, 되바라진 양성, 발발 떠는 발발성, 콧소리 나는 비성, 깨어진 소리나는 파성 따위는 좋지 않은 소리로 꼽힌다.
또, 발성과 시김새에 따라 여러 가지 목으로 가리는데, 공력이 없이 내는 생목, 목 안에서 내는 속목, 틔지 못한 떡목 따위는 음질과 발성에 따라 가르는 것이며, 굴려내는 방울목, 모가 나게 깎는 목, 높이 찔러 내는 찌른목 따위는 발성과 시김새에 따라 가르는 것이다.

판소리 음악사

판소리에 관한 최고(最古)의 문헌은 조선 영조 30년 유진한(柳振漢)의 ≪만화집 晩華集≫의 <춘향가>를 넘지 못하지만, 판소리가 재인 광대들이 벌이는 판놀음에서 여러 놀음 틈에 끼여 한 놀이로 구실을 하던 것은 훨씬 거슬러 올라갈 것으로 짐작된다.
큰 마을굿에는 흔히 창우(倡優:광대)의 판놀음이 딸렸고 창우 가운데 소리광대가 벌이는 놀음이 판소리였던바, 민속적인 소리와 재담조 아니리와 발림으로 서민적인 이야기를 엮어 판놀음으로 공연하면서 판소리가 생겨난 것으로 짐작된다.
판소리는 마을굿에 딸린 판놀음에서 생겨나서 여러 놀이 틈에 끼여 놀이구실을 하다가 판놀음이 마을굿과 떨어져 따로 벌이는 놀음으로 발전하면서 순조 때 송만재의 ≪관우희≫에 보이듯이 열두마당이나 생겨 다른 놀음보다 가장 인기있는 놀이로 자랐다고 본다.
판소리가 사대부들로부터도 인기를 얻게 되자 민중의 판놀음뿐만 아니라 사대부의 방안놀음으로도 끼이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서 판소리는 사설과 음악이 민중의 소박하고 솔직한 것에 세련되고 어려운 것이 덧붙여져 복합적인 모습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사설은 유식한 한문구(漢文句)가 많이 끼이게 되고 아니리보다 소리에 무게를 두며 소리에는 사대부들이 즐기는 정가풍(正歌風)의 가조(歌調)가 끼이고 복잡하고 세련된 시김새와 붙임새를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여러 가지 판소리 가운데 <강릉매화가>·<변강쇠타령>과 같이 서민적인 재담으로 된 것은 도태되고 <적벽가>·<심청가>·<춘향가>와 같이 사대부들에게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을 가진 것은 계속 발달하여 오늘날과 같이 방대한 모습으로 된 것이라 하겠다.
판소리 최고(最古) 명창으로 이름이 전하여지는 이는 영조∼정조 때 우춘대(禹春大) 및 하은담(河殷譚)·최선달(崔先達)이다. 그러나 이들의 판소리 음악사 자료는 전하여지는 것이 없다.
순조 무렵에는 권삼득(權三得)·송흥록·염계달·모흥갑·고수관·신만엽·김제철·황해천(黃海天)·주덕기(朱德基)·송광록·박유전·방만춘(方萬春) 등 뛰어난 명창들이 나와서 판소리 발전에 공헌하였다.
이들의 더늠이 지금까지 전하여지는데, 이들의 더늠에 나타나는 소리제가 이들 명창들이 판소리에 처음 짜넣은 것들이라고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이들이 판소리의 음악을 확대시킨 것을 엿볼 수 있다.
판소리 명창들의 출신지는 남한강 이남 소백산맥 이서(以西)로 이 지방의 향토음악이 육자배기토리나 시나위토리가 주가 되는 것으로 보아 판소리의 토대가 되는 것은 계면조를 비롯한 패개성음으로 된 가조에 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장단이었던 것 같다.
8명창은 이러한 판소리음악을 토대로 하여 여러 가조와 장단을 확대시켰으니 권삼득은 설렁제를, 염계달과 고수관은 경드름과 추천목을, 신만엽과 김제철은 석화제를 판소리에 짰고, 송흥록은 계면조·우조를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짰고, 진양을 판소리에 집어넣어 소리를 짰다.
8명창 때에 명창들의 지역에 따른 음악적 특성 그대로 전승되어 동편제·서편제·중고제 등 여러 파가 생겨 전승하게 되었다. 동편제는 송흥록 소리제에서, 서편제는 박유전 소리제에서, 중고제는 김성옥과 염계달의 소리제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철종 때에는 박만순·이날치·정창업·김세종·한송학·송우룡·정춘풍·장자백·김정근 등 많은 명창들이 나와서 판소리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이들은 또 8명창의 파에 나타난 특징을 전승해 주었다.
송흥록의 소리제는 박만순과 송우룡에게 전하여졌고 김세종·장자백·정춘봉도 동편제 소리를 새로 발전시킨 명창이다. 박유전의 소리제는 이날치에게 전해졌고 따로 정창업도 서편제 소리를 발전시킨 명창이다. 김성옥의 소리제는 김정근에게 전해졌고 김정근과 한송학도 중고제 소리를 발전시킨 명창이다.
이 무렵에 신재효(申在孝)가 명창들에게 판소리 이론을 지도하였고 그 나름대로 여섯마당 판소리 사설을 다듬었다. 고종 때에는 황호통·이창윤(李昌允)·김찬업(金贊業)·김창환·박기홍·김석창·유공렬(柳公烈)·이동백(李東伯)·송만갑·김창룡·김채만·정정렬(丁貞烈)·유성준 등 많은 명창들이 나서서 판소리 내용을 충실하게 닦았던바, 이들 명창들에 의하여 판소리는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
이들 손에 의하여 오늘날과 같은 모습의 정교한 판소리가 완성되었다. 또, 판소리의 각 파에 나타난 특징은 이들에 의하여 판을 마쳤고 또 이들에 의하여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황호통·김석창 등은 중고제 소리의 판을, 김찬업·박기홍·유성준은 동편제 소리의 판을, 김창환·김채만은 서편제 소리의 판을 막았다 하며, 송만갑·이동백·정정렬에 이르면 지역적 교류에 의하여 판소리 각 파의 특징이 무너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다섯마당 밖의 다른 마당의 전승 또한 이들에 의하여 판을 막았다. 한말에 나라가 기울어지면서 판소리 또한 내리막길을 걸었다.
한말과 일제시대에 판소리를 이어놓은 명창들로는 장판개(張判介)·박중근(朴重根)·박봉래(朴奉來)·김정문(金正文)·정응민·공창식(孔昌植)·김봉학(金奉鶴) 등이 있었으며, 임방울(林芳蔚)·김연수(金演洙)·강장원(姜章沅) 등이 그 뒤를 이었다.
광대노릇은 본디 남자들만이 하는 것이었으나 고종 때 신재효에 의하여 진채선(陳彩仙)이 최초 여명창(女名唱)이 되었고, 이어 나온 허금파(許錦坡)와 함께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한말과 일제시대에는 강소춘(姜笑春)·김녹주(金綠珠)·이화중선(李花中仙)·김초향(金楚香)·배설향(裵雪香)·박녹주(朴綠珠) 등 수많은 여류명창들이 나왔고, 김여란(金如蘭)·김소희(金素姬)·박초월(朴初月)이 뒤를 이었다.
한말에 원각사(圓覺社)가 생기고 판소리 명창들이 창극(唱劇)을 처음 꾸며 공연한 뒤 창극이 성행하였고, 일제 때에는 협률사(協律社)·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를 거치는 동안 많은 창극이 공연되어 판소리 명창들이 여기에 휩쓸리게 되어 판소리가 쇠퇴하는 원인이 되었다.
광복 뒤에는 한때 여성창극이 성행하여 판소리는 더욱 쇠미(쇠잔하고 미약함)하게 되고 1960년대에는 창극도 기울어졌다.
1960년대에는 판소리 부흥운동이 일어났고, 박동진(朴東鎭)이 판소리 다섯마당의 전판 공연을 시도한 것을 계기로, 박초월·김소희·오정숙(吳貞淑)·성우향(成又香)·박초선(朴初仙)이 판소리 전판 공연을 가진 바 있어 판소리 명창의 수는 극소수로 줄었으나 한때 판소리는 부흥되어 가는 듯하였다.
1960년대에 판소리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뒤 정광수(丁珖秀)·오정숙(吳貞淑)·박동진·성창순(成昌順)·조상현(趙相賢)·한승호(韓承鎬)·김성권(金成權)·정철호(鄭哲鎬)가 보유자로 인정되어 사라져가는 판소리 전수에 진력하고 있다.

판소리의 문학적 특질

판소리 사설의 기본 골격은 거의 대부분이 전승설화 등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판소리사의 전 과정을 통해 창자들은 전승적 이야기의 골격을 근간으로 하여 그 중에서 특히 흥미로운 부분을 확장·부연하는 방식으로 사설을 발전시켜 나아갔다.
이렇게 기존 전승에 첨가된 문학적·음악적 새로움을 가진 창작 부분을 ‘더늠’이라고 한다. 현전하는 판소리는 이들 더늠이 무수히 집적된 결과이다.
따라서 판소리는 이야기 전체의 흥미나 구성의 긴박성을 추구하기보다는 각 대목·장면을 확장하면서 부분적인 흥미와 감동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판소리에서 앞뒤의 내용이 잘 맞지 않거나 때로는 뚜렷이 모순되기까지 하는 일이 흔히 있는 것은 이러한 까닭에서이다. 그러면서도 판소리는 그 나름대로의 독특한 서사적 구성원리를 가지고 있다.
비장한 대목과 골계적(滑稽的:익살스러운)인 장면, 재담을 교체적으로 배치하여 청중들을 작중현실에 몰입시켰다가 해방하는 것과 같은 일련의 방식이 그것이다. 이를 통해 정서적 긴장과 이완이 반복됨으로써 얻어지는 효과는 매우 특이한 심리적·미학적 의의를 가지는 것으로 해석된다.
판소리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매우 다채로울 뿐 아니라 각별히 생생한 입체감과 현실성을 띠고 있다. 판소리에서 설정되는 사건 공간은 대개 당대의 생활현실이거나 그 우화적(寓話的)인 투영이며, 이 속에 움직이는 인물들 역시 허구화된 재자가인(才子佳人)이 아니라 당대의 현실상을 반영하는 범인적(凡人的)인 존재들로 나타난다.
판소리에서는 비록 우월한 능력을 갖춘 선인(善人)이라 해도 완벽한 영웅상으로 그려지지 않고, 흔히 풍자·희롱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또한, 부정적인 인물들이라 해서 철저한 악의 표상으로만 그려지지는 않는다.
아울러, 방자(房子)·애랑(愛娘)·정욱(程昱)·매화(梅花) 등 봉건적 예속관계 아래 있으면서 상전의 위선과 약점을 폭로하고 희롱하는 장난꾼의 존재들이 발달한 점과, 평민층의 인물 군상(群像)들이 생생한 구체성을 띠고 살아 있다는 사실도 판소리의 인물형에서 주목되는 특징이다.
판소리 사설은 운문과 산문이 혼합된 서사문학인데다가 여러 계층의 청중들을 상대로 하여 누적적으로 발달한 까닭으로 문체와 수사(修辭)가 매우 다채롭다.
그 속에는 전아(典雅)한 한학(漢學) 취미의 대목이 있는가 하면 극도로 익살스럽고 노골적인 욕설과 속어가 들어 있으며, 무당의 고사나 굿거리 가락이 유장(悠長)한 시조창과 나란히 나오기도 한다.
이 밖에 민요·무가·잡가·사설시조·선소리·십이가사 등 각종 민간가요가 삽입가요(揷入歌謠)로서 판소리 속에 다수 채용되어 있다. 판소리 문체의 특징적 현상으로는 ‘문체의 분리’라는 경향성을 지적할 수 있다.
문체의 분리란 등장인물의 신분·성격·분위기·서술자의 태도 등에 따라 문체가 판이하게 바뀌는 현상인바, 판소리에서는 장단(長短)·조(調)의 빈번한 교체와 함께 문체면에서도 이러한 변이가 나타난다.
존귀하고 품위 있는 인물이 등장하는 대목에서는 음률이 우아할 뿐 아니라 사설 역시 많은 한문구(漢文句)와 전고(典故)를 담은 장중한 문체로 된다. 반면에, 신분이 낮거나 비속한 인물 및 풍자적 대상이 등장할 때, 그리고 반드시 부정적인 인물은 아니더라도 희극적 맥락에서 다루어질 때 그 문체는 소박하고 발랄한 평민적 속어의 색채를 띤다.
판소리의 사회적 성격 및 판소리에 투영된 사회의식은 판소리사의 전개과정에 따라 일정하지만은 않으나, 창자들 자신이 천민이며 19세기 초 이전까지 평민 청중들의 영향력이 압도적이었으므로 평민적 세계관과 미의식이 주류를 이루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판소리에 있어서 중세적 윤리의식과 가치질서는 대체로 희극적 조롱의 대상이며, 평민적 경험에 기반한 세속적 현실주의가 삶의 근본으로 생각되어진다.
다만, 이와 같은 성격은 그 자체가 아직 중세적 세계관을 대체할만큼의 충분한 성숙에 도달하지 못하였던데다가 19세기 초기 이래의 판소리가 양반층의 청중을 주요 고객으로 의식하면서 일부 약화 또는 수정되었다.
그 결과 판소리에는 표면적 주제와 이면적 주제 사이의 갈등이라는 양면성 내지 이원성이 나타나는 예가 많으며, 특히 19세기를 살아 남은 전승 5가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실전된 일곱마당까지를 포함하여 해석할 때 판소리 전반의 사회의식과 세계관이 근본적으로 탈중세적 현실주의의 지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판소리에 관한 연구는 1930년대에 시작된 이래 1960년대까지 문학과 음악 양면으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이 시기의 문학적 연구는 판소리 사설과 판소리계 소설을 조선 후기 소설사의 맥락에서 다루는 데 치중하여 여러 이본(異本)에 대한 실증적 연구에 주력하였고, 판소리의 기원·발생·근원설화(根源說話)·장르적 성격이 아울러 논의되었다.
1970년대 이래로는 앞 시기의 문제들을 재론하면서 판소리의 사회적 성격, 서사적 구조, 미의식 등의 문제를 심층적으로 해석하는 한편, 판소리의 문학적 특질을 현장 연희(演戱)의 입체성과 관련하여 이해하려는 연구 동향이 전개되었다.
판소리의 현장연희적 측면에 관한 연구는 아직 요청적인 과제로 남아 있는 상태이나, 판소리에 관한 문학적·음악적 연구가 상보적(相補的)으로 통합되면서 이에 관한 해명에도 진전이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판소리의 구성요소
분류
민속문화관>민속음악>민속극음악
판소리는 연창자인 소리광대와 북재비인 고수 및 청중으로 이루어져 있다. 판소리에서 주되는 인물은 고수의 북장단에 맞추어 소리하는 연창자이다. 연창자는 여러 가지 형상적 표현수단을 이용하여 판소리대본을 청중에게 전달하여 그들의 사상정서적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일반적으로 판소리를 독연 형태의 독특한 음악극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연창자의 형상적 표현수단에서 중요한 것은 ‘창(唱, 소리)’, ‘아니리’, ‘너름새’ 등이다.

창이란 판소리대본에서 연창자가 소리하는 모든 대목을 통털어 이르는 말이다. 창에는 작품주인공의 내면세계를 집중적으로 표현하는 소리인 영창, 등장인물들이 주고받는 소리인 대창 작품에 주어진 인물의 심리적 성격을 객관적으로 표현하는 소리인 설명창, 기성의 소리인 삽입가요 등 여러 가지 형태의 소리들이 포함되고 있다.

창은 그 음조에 따라 평조, 우조, 계면조로, 형상기법에 의하여 동편제, 서편제, 중고제 등의 유파로 나누어진다. 창은 또한 성음의 음질과 발성법 등에 의하여 무슨 성, 무슨 목으로 구분되었다. 성음의 높고낮음에 따라 평성, 상성, 하성 등이 있고 성음의 음질에 의하여 통성(배에서 울려나오는 소리), 수리성(쉰소리), 비성(코소리), 발발성(떠는 소리), 귀곡성(귀신이 곡하는 소리) 등이 있으며 성음의 변화와 발성법에 따라 푸는 목, 가므는 목, 찍는 목, 마는 목, 감는 목 등 수십 종이 있다.

연창자의 형상적 표현수단의 다른 하나는 ‘아니리’이다. 아니리는 판소리대본의 극적 줄거리를 가수가 운율화된 말로 엮어나가는 부분을 말한다. 아니라는 판소리대본의 서두에서 사건이 벌어지는 장소, 인물, 환경을 설명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극적 사건이 변화되는 내용을 대화체로 연결시켜 준다. 이러한 대화체는 고수의 일정한 장단 안에서 처리되어야 하는 것만큼 망탕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아니리는 연창자로 하여금 소리의 공간과 너름새의 기회를 주게 된다.

연창자의 형상적 표현수단의 또 다른 하나는 너름새이다. 너름새란 연창자의 간단한 몸동작을 말하는데 발림이라고도 한다. 이밖에 다른 형상적 표현수단은 얼굴표정을 나타내는 화용, 새소리를 비롯한 자연계의 온갖 소리를 흉내내는 비양 등이 있다. 이처럼 판소리구성에서 주되는 인물인 연창자는 여러 가지 형상적 표현수단들을 이용하여 판소리 대본을 청중에게 전달하여 그들의 사상정서적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판소리구성에서 주되는 인물은 연창자와 함께 고수인데 고수는 북장단으로써 연창자를 인도하며 청중과 호흡을 맞춘다. 북 하나로 반주하는 고수는 북장단을 치면서 때로는 ‘얼씨구’, ‘좋다’, ‘으이’ 등의 말을 덧붙여 연창자의 흥취를 돋우며 청중의 인기를 끈다. 이때 고수와 청중간의 호흡을 맞추는 것을 짜임새라고 한다. 고수의 북장단은 판소리의 주요한 음악구성의 하나로서 판소리에 쓰인 장단에는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잦은모리, 잦은중모리(휘모리), 엇모리 등이 있다. 고수는 이러한 여러 가지 장단을 통하여 판소리의 변화를 주면서 작품을 재미있게 엮어나갔다.

실례로 판소리 ‘심청가’에서 심청이를 실은 배가 폭풍을 만나 당황하게 고사를 울리는 것을 소리할 때 요란스럽고 잦은 북가락은 급한 형세가 생동하게 표현되고 있으며 심청이가 아버지의 눈이 뜨이기를 빌며 바닷속으로 풍덩 뛰어 드는 순간 소리와 북이 일시에 멈추었다가 진양조로 나오는 ‘망망한 대해’의 은은한 소리는 잔잔하여진 바닷물결을 효과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러므로 고수의 북장단은 단순한 박자, 속도만을 제시해주는 것이 아니라 매 대목과 장면의 음악정서적 성격을 특징지어 주는 주요한 수단으로서 이용되었다.
출처 ^ 참고문헌
[네이버 지식백과] 판소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판소리의 구성요소 (조선향토대백과, 2008., 평화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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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고유의 음악

우리나라 고유의 음악

흥보가, [ 興甫歌 ]
판소리 다섯마당 가운데 하나.
판소리는 한 명의 소리꾼이 고수(북치는 사람)의 장단에 맞추어 창(소리), 말(아니리), 몸짓(너름새)을 섞어가며 긴 이야기를 엮어가는 것을 말한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이칭/ 별칭/ 유형/ 성격/
흥부가, 박타령
작품
판소리
판소리 다섯마당 가운데 하나.‘박타령’이라고도 한다. 가난하고 착한 아우 흥보는 부러진 제비다리를 고쳐주고 그 제비가 물고 온 박씨를 심어 박을 타서 보물들이 나와 부자가 되고, 넉넉하고 모진 형 놀보는 제비다리를 부러뜨리고 그 제비가 물고 온 박씨를 심어 박을 타서 괴물들이 나와 망한다는 이야기를 판소리로 엮은 것이다.

사설이 우화적이기 때문에 우스운 대목이 많아 소리 또한 가벼운 재담소리가 많다. 사설의 길이는 짧은 편이며 한 마당 모두 부르는 데 대개 3시간 가량 걸린다. 조선 중기에 이미 불렸으며 송만재(宋萬載)의 ≪관우희 觀優戱≫, 이유원(李裕元)의 ≪관극팔령 觀劇八令≫과 같은 조선 후기 문헌에 처음 보인다.

정조 때의 명창 권삼득(權三得)이 <흥보가>를 잘하였고, ‘제비 후리러 나가는 대목’이 그의 더늠이라고 한다. 순조 때의 명창 염계달(廉季達)·문석준(文錫準)도 <흥보가>로 이름을 떨쳤는데 그는 ‘박통 속에서 돈과 쌀을 정신없이 퍼내는 휘모리 대목’을 더늠으로 전하고 있다.

철종 때에는 한송학(韓松鶴)·정창업(丁昌業)이 <흥보가>를 잘하였다 하며, 고종 때에는 최상준(崔相俊)·김창환(金昌煥)이 잘하였다 한다. 김창환은 ‘제비노정기’를 더늠으로 내었던 바, 오늘날 ‘제비노정기’는 그의 더늠을 첫손으로 꼽고 있다.
전승되고 있는 <흥보가> 바디에는 박녹주(朴綠珠)와 박봉술(朴奉述)이 보유하고 있는 송만갑(宋萬甲) 바디, 정광수(丁珖秀)가 보유하고 있는 김창환 바디, 오정숙(吳貞淑)이 보유하고 있는 김연수(金演洙) 바디가 있으며, 박동진(朴東鎭)이 짜 부르고 있는 바디 <흥보가>는 김창환 바디에 가깝다.

그 밖의 <흥보가> 바디는 거의 전승이 끊어진 상태이다. <흥보가>는 바디마다 사설과 소리가 얼마쯤 다르게 짜여 있으나, 흔히 ‘초앞’·‘놀보심술’·‘흥보 쫓겨나는데’·‘매품팔이’·‘매 맞는데’·‘집터 잡는데’·‘제비노정기’·‘흥보 박타령’·‘화초장’·‘제비 후리러 나가는데’·‘놀보 박타령’ 등 뒤풀이로 짜인 바디가 많다.

앞과 뒤에는 재담소리가 많고 가운데에 좋은 소리가 많다. <흥보가>에서 이름난 소리 대목은 ‘중타령’(엇모리-계면조)·‘집터 잡는데’(진양-우조)·‘제비노정기’(중중모리-평조 또는 계면조)·‘박타령’(진양-계면조)·‘비단타령’(중중모리-평조 또는 계면조)·‘화초장’(중중모리-계면조)·‘제비 후리러 나가는데’(중중모리-설렁제)를 들 수 있다.

<흥보가>는 우스운 재담 대목이 많이 들어 있고 끝에 ‘놀보 박타는 대목’에는 잡가(雜歌)가 나오기 때문에 해학적인 마당으로 꼽힌다. 소리도 잘해야 하지만 아니리와 너름새에 능해야 <흥보가>명창으로 제격이라 할 수 있다.

가난하지만 마음씨 착한 아우 흥보는 제비 다리를 고쳐주어 복을 받고, 마음씨 고약한 형 놀보는 부자로서 더 부자가 되려고 동생 흥보를 흉내 내어 제비 다리를 일부러 부러뜨려 벌을 받는다는, 전형적인 권선징악(勸善懲惡)의 교훈을 담고 있고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고 있는 판소리 전승오가(傳承五歌) 중의 하나.

<흥보가(興甫歌)>의 근원이 된 설화들은 크게 변화하지 않고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어서 비교적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 중에 하나는 몽골의 <박타는 처녀 설화>로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다.

옛날에 어떤 처녀가 처마에서 떨어져 바동거리는 제비 다리를 동여매주니 제비가 좋아서 날아간다. 얼마 뒤 그 제비가 날아와 씨앗을 떨어뜨리니 그 씨앗 심은 데서 큰 박이 열린다. 박을 타는데 그 속에서 금은보화가 나와 그 처녀는 거부가 된다. 이웃의 심사가 바르지 못한 처녀 하나가 그 이야기를 듣고 처마 밑에 사는 제비의 깃을 일부러 부러뜨리고 실로 매어 날려 보낸다. 얼마 지나 제비가 물어다 준 박씨를 심어 박을 타는데 박 속에서 독사가 나와 그 처녀를 물어 죽인다.

이 이야기는 흥보 놀보 이야기와 정확히 대응하는데, 몽골이 침략했을 때 몽골설화가 조선에 전파된 것인지, 아니면 고려시대에 몽골에 잡혀간 고려 여인네들에 의해 우리 것이 전파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흥보가의 또 하나의 근원설화는 신라설화라고 알려진 방이,,,

내용
흥보가에는 민담적 사유 체계가 널리 퍼져 있다. 이름에 성이 없이 그저 흥보, 놀보, 째보, 청보 등이라 부르는 것이 그러하고, 박타는 내용이 있기 때문에 성이 박가거나 제비에서 유추되어 성이 ‘연(燕)가’라는 것도 그러하다. 지리적 배경이 ‘충청·전라·경상, 삼도 어름’으로 제시된다거나, 시간적 배경이 옛날 옛적으로 나오는 것도 민담적 사고를 담고 있다.

등장하는 인물의 이력 사항이 제시되지 않는다든가 인물 유형이 평면적 성격으로 되어 있다는 것도 민담의 전통과 관련된다. 흥보가의 이야기 구조에서도 민담적 사유 체계가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흥보가의 거시 구조인 ‘대립적 반복 모방담’은 민담의 ‘흉내 내기담’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민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① 착한 사람이 우연히 어떤 행위를 하다. ② 그 보답으로 행운의 결과를 가져오다. ③ 악한 사람이 그 행위를 가식적으로 흉내 내다. ④ 그 응답으로 악운의 결과를 가져오다.’와 같은 서사구조를 흥보가 또한 그대로 갖고 있는 것이다. ①와 ②는 흥보 이야기, ③와 ④는 놀보 이야기와 대응된다.

흥보가 이야기의 핵심적 구조를 이루는 설화적 모티프로는 크게 보아 ‘선악형제담’과 ‘동물보은담’, 그리고 ‘무한재보담’을 꼽을 수 있다. ‘선악형제담’은 우리의 수많은 민담에서 보이는 선과 악의 선명한 대비와 역전의 스토리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다. 선악의 주체가 형제가 아닌, 이웃 사람이거나 자매이거나 하는 경우도 있다. 대체로 아우가 착하고 형이 악한 경우가 많지만 반대로 <방이 설화>처럼 형이 선하고 동생이 악한 경우도 있다. ‘동물보은담’은 동물이 자신을 보살펴준 사람을 위해 희생정신을 발휘해 은혜에 보답한다는 이야기로 우리 민담에 편만해 있는 화소이다. 하지만 이 화소에는 자신을 해코지한 사람에게는 복수를 한다는 화소가 동시에 내재되어 있다. ‘보은’의 국면만 나타나는 이야기들이 많지만 흥보가처럼 ‘보수(報讎)’의 국면이 같이 나타나는 이야기들도 있다.

보은하는 존재로서의 새는 우리 민담에서 까치가 가장 흔한데 흥보가에서는 제비가 대상이 되고 있다. ‘무한재보담’은 선한 사람이 베풂의 대가로 얻게 된 도구에서 무수한 재물이 쏟아진다는 화소이다. 우리 민담에서 원하는 온갖 재물을 화수분처럼 쏟아내는 도깨비 방망이가 대표적인 것이다. 도깨비 방망이 외에도 항아리나 냄비·맷돌·쌀바위 등이 우리 민담의 화수분 목록을 차지한다. 그런데 동물보은담이 보은과 보수의 국면을 동시에 갖듯이, 무한재보담 속에는 무한탕진담도 동시에 내재되어 있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하겠다. 악한 행위를 한 사람에게는 보수의 실천 행위로서 재물을 모두 탕진하게 만드는 것이다. 흥보가는 무한 재보 획득뿐만 아니라 무한 재보 탕진 과정에도 상당한 흥미의 초점이 주어져 있는 작품이다.

이와 같이 흥보가는 민담적 이야기 화소들이 서로 연접되고 중첩됨으로써 전체적인 얼개를 형성한다. 그러나 흥보가는 이러한 이야깃거리로만 구성된 게 아니다. 민담적 이야기의 틀거리 사이사이에서 분비되어 나오는 현실적인 성격의 이야기들이 흥보가를 한 편의 사회적 의미를 지닌 판소리로 만드는 역할을 한다. 민담적 요소들이 흥보가의 전체적인 윤곽을 그렸다면, 현실적인 요소들은 그 윤곽에 따라 채색을 가해 삼차원의 그림을 완성시키는 것이라고 비유할 수 있다. 흥보가에서 흥보와 놀보의 형제 관계라는 민담적 포장을 한 꺼풀만 벗겨내고 보면 거기에는 어떤 집단은 아무리 열심히 품을 팔아도 최저 생활도 하기 힘든 반면, 또 어떤 집단은 그럭저럭 지낼 만한데도 남을 해치는 욕심을 내어 재물이 나날이 불어나는 사회 경제 구조의 모순을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놀보의 축재와 흥보의 곤궁을 통해 경제력을 갖춘 신흥 부농층과 생산 수단을 상실한 빈민층으로 분화되는, 당시의 사회 문제인 경제적 양극화 현상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악질적 신흥 부자와 최하위 빈민 유랑층의 모습은 <놀보심술> 대목이라든지 그의 축재하는 과정, 흥보 내외의 품팔이 대목 등을 통해 잘 나타난다. 한편 흥보의 매품팔이를 통해서는 사회 지도층의 부역 회피와 궁민층의 대역이라는 부패한 사회 구조를 보여주며, 호방의 환자(還子) 거절과 매품 제안을 통해서는 중간 관리의 농간과 환자 제도의 모순, 그리고 권력의 횡포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놀보의 흥보에 대한 심술과 포악이라든가 매품팔이의 가로챔, 그리고 놀보 박에서의 삯꾼이나 놀이패 집단의 강탈성 등을 통해서는 몰인정한 이익 사회와 그로 인해 해이해진 사회 기강에 대해서도 주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흥보에게는 막대한 부를 가져다주는 반면, 놀보로부터는 축적한 부를 송두리째 뺏는 진술 태도를 통해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강퍅한 물질주의적 가치관에 대항하여 기존의 전통적인 온정주의적 가치관에 대한 옹호 내지는 보존 유지를 염원하는 작가 의식이 흥보가에서 작동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흥보가는 민담적인 이야기 구조에 이와 같은 현실주의적 요소들을 곳곳에 배치하여 현실 유추의 기능이 이루어지게끔 하고 있다. 그래서 흥보가를 들으면서 청중들은 민담식의 재미있는 이야기 재담과 해학적 표현을 통해 발랄하게 웃게 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을 풍자하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인해 시니컬한 웃음을 웃게 된다.

등장 인물
흥보가의 등장인물인 흥보와 놀보는 한국인의 인물 캐릭터의 대표적인 표본이다. 우리는 흔히 ‘흥보 같은 사람’이니 ‘놀보 같은 놈’이라는 말을 한다. 흥보는 경제적으로는 무능하고 체면을 중시하는 보수적인 사고를 갖고 있는 사람이지만, 착하고 욕심 없고 생명을 사랑하는 순수함이 마음속의 풍요로움을 주는 존재라 할 수 있다. 놀보에게 맞고 돌아와서도 형을 한 번도 원망하지 않고 아내에게는 변명을 늘어놓는다든가, 마지막에 그렇게 모질게 굴었던 형 놀보를 따뜻하게 포용한다든가 하는 장면에서 그 선한 형상은 뚜렷하게 부각된다.

반면에 놀보의 형상은 심사가 뒤틀려 남을 해치는 심술을 부린다든가, 재산을 혼자 차지하려고 동생을 집에서 쫓아낸다든가, 양식 얻으러 온 흥보에게 폭력을 휘두른다든가, 제비 다리를 일부러 부러뜨린다든가, 부자가 된 흥보의 집에 찾아와 포악을 부린다든가 하는 장면들을 통해 탐욕스러움에 포악함까지 갖춘 악한 존재로 형상화되고 있다. 놀보가 경제적 능력이 있고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사고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측면이 있고, 그래서 상당 부분 바람직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그 반도덕적이고 반사회적인 행동은 한국인의 심성에 근원적인 거부감을 주고 있다.

이러한 흥보 놀보의 성격은 사실적 재현이라기보다는 민담적 사고의 소산으로서 이후의 근현대 문학 속의 캐릭터에 하나의 전형적 모델을 제시해주었다. 특히 놀보의 성격은 채만식의 『태평천하(太平天下)』에 나오는, 욕 잘하고 이기적이고 반도덕적인 윤직원 영감에게 확장·심화됨으로써 전통적인 인물 캐릭터가 문학적으로 수용되는 메커니즘을 잘 보여주고 있다.

창 본
요즘 활발하게 전승되는 흥보가는 박녹주제, 박봉술제, 김연수제, 강도근제, 박동진제라고 할 수 있다. 이 중에서 박동진제를 제외하고는 모두 송만갑의 흥보가를 직·간접적으로 이어받은 것들이다. 송만갑제 소리 중에서도 오늘날 많은 후학들이 즐겨 부르는 흥보가는 박녹주바디인 것으로 보인다. 다른 흥보가는 전승이 끊어지거나 미약한 반면 박녹주바디 흥보가는 한농선과 박송희가 굳건하게 맥을 이었고, 또 그 후학들이 활발하게 전승시키고 있다.

박녹주가 남긴 흥보가 음반에는 <놀보 박타는 대목>이 들어 있는데, 사설이 비교적 소략하게 짜여져 있다. 그리고 그 자신은 소략하나마 이 대목을 음반으로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에게는 가르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흥보 밥 먹는 대목>과 같이 골계적이고 익살맞은 재담 대목도 여러 군데 빠져 있다. 그러나 박녹주의 제자인 박송희 명창이 <놀보 박 사설>을 복원시켜 현재는 흥보가 완질이 전승되고 있다.

특징 및 의의
흥보가는 전승오가(傳承五歌) 가운데 재담 소리가 가장 많아, 민속적 성격이 강한 작품이다. 앞과 뒤에 재담 소리가 많다. 특히 다양한 하층 예인 집단 등 온갖 인물 군상들이 등장하여 놀보를 패망시키는 <놀보 박타는 대목>은 흥보가 중에서도 민속적인 요소가 가장 강한 부분이다. 재담 소리를 폄하하는 시선이 존재하는 판소리 연행 관습상 흥보가는 지난날 창자로부터 그렇게 우대받던 판소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보성소리의 명창 정응민은 제자들에게 흥보가 가운데 <놀보 박타는 대목>을 가르치지 않았으며, 오늘날 대부분의 명창이 <놀보 제비 후리러 나가는 대목>까지만 부르게 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재담소리가 전혀 저평가되지 않는다. 요즘 청중들은 알아듣기 쉽고 재미있는 재담 대목에 오히려 더욱 관심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한때 전승이 위축되었던 흥보가가 오늘날에는 다른 어떤 바디보다도 인기가 있다. 흥보가의 재담적 구성이나 해학성 넘치는 담화적 표현들이 없다면 오늘날 판소리 공연의 발랄함과 흥미성은 그나마 확보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흥보가의 재담은 오늘날 창작판소리의 담화적 구성과 표현의 방향을 시사하는 지침의 역할을 하고 있다. 흥보가의 중간 중간에는 좋은 소리가 많다. 흥보가에서 이름난 소리 대목은 <중타령>(엇모리장단―계면조), <집터 잡는 대목>(진양조장단―우조), <제비노정기>(중중모리장단―평조 또는 계면조), <박타령>(진양조장단―계면조), <비단타령>(중중모리장단―평조 또는 계면조), <화초장타령>(중중모리장단―계면조), <제비 후리러 나가는 대목>(중중모리장단―설렁제) 등을 들 수 있다.

흥보의 박 속에서 금은보화가 나와 부자가 된다는 상황 설정은 그 내용의 비현실성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 동안 혹독한 가난을 체험하며 살아야 했던 민중들의 소망을 담아내고 있어서 큰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송만갑의 <흥보 박타는 대목>이 대단한 인기를 끌면서 많은 창자들이 다투어 부르게 되었던 이유도 바로 거기 있으며, 오늘날에도 환상적인 부의 획득을 염원하는 민중의 바람이 존재하는 한 <흥보 박타는 대목>은 흥미의 초점이 될 것이다. 이와 똑같은 이유로 <가난타령>도 민중들의 삶의 응어리를 표출한다는 점에서 호소력을 지닌다. 특히 천민 자본의 횡포가 두드러지는 요즘의 현대 사회에서 흥보네 가족이 겪는 간난(艱難)의 절정은 공감의 진폭이 크다고 할 것이다.

참조어
박타령

국악, [ Gugak , 國樂 ]

한국음악의 준말. 우리나라 전통음악의 총칭. 일명 한국음악.
이칭/ 별칭/ 유형/ 시대/
한국음악, 한국전통음악, 한민족음악
개념용어
근대
예로부터 전해 오는 우리나라 고유의 음악. 한국음악·한국전통음악·한민족음악

국악은 아악(雅樂)·당악(唐樂)·속악(俗樂) 곧 향악(鄕樂)을 모두 포함하며, 일반적으로 전통음악과 최근의 한국적 창작음악까지를 포함하는 우리나라 음악이다.

우리나라의 말과 글을 뜻하는 국어(國語)·국문(國文)이라는 말처럼 현재 사용되는 국악이라는 용어는 1907년 일제통감부(日帝統監府)가 교방사(敎坊司)를 장악과(掌樂課)로 개칭할 때 두었던 국악사장(國樂師長)과 국악사(國樂師)에서 기원됐다. 그런데 이 국악이라는 용어는 당시 통감부에 파견된 메가다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郎)가 일본의 전통음악을 뜻하는 고쿠가쿠(國樂) 곧 국악의 명칭을 소개한 결과물이다.

일제강점기에는 국악이라는 말 대신에 아악(雅樂) 또는 조선음악(朝鮮音樂)이라는 용어가 주로 사용됐다. 8·15광복 직후 등장한 국악건설본부(國樂建設本部) 또는 대한국악원(大韓國樂院) 및 국립국악원(國立國樂院)이라는 명칭에 사용됨으로써 국악은 서양음악을 뜻하는 양악(洋樂)의 대칭어로 사용됐다. 1959년 서울대 음대에 설립된 국악과(國樂科)라는 명칭은 그 후에 설립된 대학교의 국악과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1980년대 이후부터는 국악과라는 학과명 대신에 한국음악과(韓國音樂科)라는 명칭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국악이라는 명칭은 20세기 후반까지의 전통음악을 지칭하는 과거지향적 용어로 규정하고 새로운 창작곡을 포괄하는 새로운 한국음악이라는 용어의 사용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최근에 주목을 받고 있다.

연원 및 변천,
고려 때 송나라에서 아악이 수입된 이후 당시의 음악은 아악과 이미 그 이전에 들어와 있던 당악 및 우리 고유의 음악인 속악 곧 향악의 세 가지로 구별되었다. 아악은 주로 제사에 쓰였고, 당악은 주로 조회(朝會)와 연향(宴饗)에 쓰였으며, 향악은 민간에서 우리말로 익히는 것 등으로 되어 있었다.

역대의 이 모든 음악은 장악원(掌樂院)이라는 음악기관에서 관장하였는데, 1908년 12월 27일 포달(布達:궁내부에서 일반에게 널리 펴 알리는 통지) 제161호로 궁내부(宮內府)의 관제가 개정, 반포될 때 장악원의 기구가 대폭 축소되어 궁내부 장례원(掌禮院)에 부속되었고, 악사(樂事)를 책임지는 상위직의 직계로 국악사장(國樂師長) 한 사람이 있었다.

이때에는 이미 양악(洋樂)의 군악대가 해산된 뒤여서 이를 그대로 궁내부에 흡수하여 각종 신식 의전과 빈객 접대에 쓰고 있었기 때문에, 그 양악대의 악장인 양악사장(洋樂師長)과 구별하기 위해 우리 전통음악을 관장하는 국악사장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비록 직명에서이지만 국악이라는 이름이 공공연하게 사용된 것은 이 때가 처음이다.

광복 직후 재야의 국악인들은 이전의 아악사장(雅樂師長) 함화진(咸和鎭)을 중심으로 대한국악원(大韓國樂院)을 결성하였다. 이 대한국악원의 명칭에서 국악이라는 말이 다시 사용되었다.

또, 1950년 1월 16일 국립국악원의 직제 공포로 구 왕궁아악부는 국립국악원으로 개칭되어 국악이라는 말이 확립되었다. 아악이라는 말은 재래의 궁정음악 일부에 국한되지만, 국악은 아악과 민간에 산재한 민속음악 일체를 포괄할 수 있다.

가야금산조

현황,
국악은 현재 한국전통음악(韓國傳統音樂)과 한민족음악 등 다양한 용어로도 통용되고 있는데, 그 용어들은 범위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한국전통음악은 전통적으로 전승된 한국음악이며, 한민족음악은 우리민족의 생활 속에서 계승 발전된 음악을 가리킨다. 
농악농촌에서 집단노동이나 명절 때 등에 흥을 돋우기 위해서 연주되는 음악.
판소리《박타령》민속악의 하나로 광대의 소리와 그 대사의 총칭.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수궁가》동리(桐里) 신재효(申在孝) 작의 판소리.
판소리《심청가》조선시대 작자 , 연대 미상의 판소리.
판소리《적벽가》조선시대의 판소리. 판소리 열두 마당 중의 하나.
판소리《춘향가》조선 후기에 동리(桐里) 신재효(申在孝)가 지은 판소리.
한국음악이란 한국에서 연주되는 모든 음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한국에 뿌리를 내린 음악, 또는 한국적 토양에서 나온 음악을 가리킨다. 한국에서 연주되는 모든 음악 속에는 서양음악도 많기 때문에 이것을 한국음악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미 한국에 뿌리를 내린 음악을 전통음악이라고 부르는데, 시대적으로는 일제강점기, 즉 1910년 이전부터 있었던 음악을 가리킨다. 또 한편으로는 지금부터 약 50년 전, 즉 30년대 이전부터 있었던 음악을 전통음악이라 부르기도 한다(문화재보호법 참조).

이 밖에 한국적인 아이디어에 의하여 작곡된 현대의 음악도 한국음악의 범주에 속한다.

한국에 뿌리를 내린 음악 또는 한국적 토양에서 나온 음악을 가리킨다. 여기서 이미 한국에 뿌리를 내린 음악을 전통음악이라 함은 시대적으로는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1910년 이전부터 있었던 음악을 가리키거나 한편으로는 1930년대 이전부터 있었던 음악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리고 한국적 토양에서 나온 음악이라 함은 한국 전통음악을 비롯하여 한국적인 아이디어에 의해 작곡된 현대의 음악도 범주에 한국음악에 포함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기도 안산 지역의 국악을 주요 국악인 및 국악단체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국악가요, [ 國樂歌謠 ]
유형/ 시대/
개념용어
현대
국악의 장단이나 가락을 살려 대중이 쉽게 부를 수 있도록 만든 민요풍의 창작가요.

민요풍의 노래로서 국악의 생활화와 대중화라는 당시의 시대적 과제와 연관되어 1980년대에 부상한 새로운 국악 갈래이다. 「어디로 갈꺼나」, 「한네의 이별」, 「삼포가는 길」, 「꽃분네야」, 「산도깨비」 등이 국악가요에 속한다.

연원 및 변천
국악가요의 연원은 일제강점기 민요풍의 대중가요였던 신민요에서 찾아진다. 당시 신민요는 특정 작곡, 작사자에 의해 짧은 유절 형식의 민요풍 가요로 만들어져 양·국악 혼합합주(일명 鮮洋合奏)에 의해 반주되면서 대중들에게 현대적인 민요로 유행되었다. 국악가요는 1970년대 후반 국악계 안팎에서 소규모 양·국악 혼성 실내악단에 의해 반주되는 민요풍의 창작가요로서 1980년대에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는 퓨전국악의 대중화로 인하여 그 하위 갈래로서 민요의 현대화 작업의 일환으로 자리잡았으나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쇠퇴일로에 있다.

내용
국악가요의 원천에 해당하는 민요풍의 창작가요는 일제강점기 대중가요의 주류 장르 중 하나였던 신민요에서 시작한다. 〈노들강변〉, 〈처녀총각〉, 〈조선팔경가〉 등 민요양식과 유행가 양식이 혼합된 노래들이 1930년대에 크게 유행하여 신민요라는 갈래가 당시 성행하였다. 그러나 해방이후 창작민요는 전문 국악인들의 창작 및 가창 전승을 통해 기존의 통속민요와 함께 전문 국악인의 레퍼토리로 편입되었고 민요양식과 결별한 한국대중가요는 미국식 대중음악어법에 점점 더 지대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 1970년대 들어 국악계와 대중음악계, 그리고 민중가요 진영 사이의 교차적 틈새 영역에서 국악가요가 새롭게 등장하였다.

김영동은 국악가요를 연 초기 작곡가로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1978년 12월 국립극장에서 발표된 〈누나의 얼굴〉, 〈개구리 소리〉 등은 당시 대학가를 중심으로 한 민족문화운동 혹은 민중가요의 영향을 받은 노래로서 민요풍의 운동가요로 유행되었고 영화주제가 〈조각배〉,〈어디로 갈꺼나〉, 연극 삽입가요 〈사랑가〉, 〈한네의 이별〉, TV주제가 〈삼포 가는길〉 등은 국악가요의 대중성을 확보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김영동의 작업을 이어받아 국악가요가 국악계의 새로운 흐름으로 정착하게 된 데에는 국악실내악단 ‘슬기둥’ 활동의 힘이 컸다. 가야금, 피리, 기타, 해금, 소금, 신디사이저 등 당시 새로운 양·국악 혼성 편성으로 구성된 국악실내악단 슬기둥은 1990년대 초반까지 김영동, 채치성, 조광재 등의 창작곡을 연주하면서 방송프로그램 출연과 음반작업, 라이브 공연을 통해 국악계에 ‘국악의 대중화’, 혹은 ‘생활화’라는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슬기둥의 대표곡으로는 〈꽃분네야〉, 〈산도깨비〉,〈소금장수〉, 〈황톳길〉 등이 있다.

초창기 국악가요는 대편성 기악음악위주의 창작국악과 달리 짧고 단순하여 따라 부르기 쉬운 동요나 민요풍 노래 위주로 되어 있고 대금, 가야금 등의 전통선율악기와 기타 및 신서사이저의 서양화성악기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밴드의 반주를 포함하였다. 국악가요의 이러한 반주 편성은 이후 퓨전국악 밴드의 모체가 되었다. 국악가요는 음악회장외에 방송 및 음반과 같은 대중매체에 대한 친화력이 강하고 주요 수용층을 젊은이로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당시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에 국악가요가 대중화되면서 국악관현악단에서 국악가요 공연을 주최하는 등 국악계 제도권에 진입하여 대편성 국악관현악단에서도 국악가요를 수용하였다.

의의와 평가
국악가요는 그간 소수 매니어 혹은 노년층에 제한된 국악의 수용층을 넓히고 국악의 활로를 방송 및 음반, 청소년 음악회 등으로 새롭게 넓히는 등 국악의 대중화 및 현대화라는 1980년대의 시대적 과제에 충실했다는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단조·장조 오음음계의 틀에 박힌 선율과 초보적인 3화음, 유절형식의 서정가요라는 초기의 정형화 된 틀에서 진화하지 못하고 가사에 있어서도 토속적이고 의고적·감상적인 이미지를 고착화시킴으로써 이후 시대 변화에 맞추어 자생적으로 변신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주요 국악인,
향토 국악인
국악을 즐겨 부르며 예향(藝鄕) 안산 국악의 명맥을 지켜 온 대표적인 안산의 향토국악인으로는 천병희, 주장성, 김수옥, 김석근, 장석준 등이 있다. 이들은 안산 지역이 크게 변해가는 과정 속에서도 그윽하고 우아한 가락으로 애환을 달래 가면서 아직도 남아 고향을 지키고 있을 정도로 안산의 기질과 정서를 몸속 가득 체득하고 있는 향토국악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중 천병희는 1985년 한국전통문화의 대표적인 인물인 김천흥과 박해일 등이 이주해와 안산에 국악을 보급하는 활동을 전개할 당시 이들의 활동에 부응하여 안산의 가락을 후배들에게 전수하는 일에도 열중하였다.

김천흥
국가무형문화재 제1호-종묘제례악의 해금과 일무, 국가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의 기능보유자이자 김천흥은 190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열네 살에 이왕직 아악부원 양성소에 들어가 우리 전통음악과 무용을 배웠으며 순종황제가 태어난 지 50년을 기념하는 기념 잔치 때 무동이 되어 순종황제 앞에서 춤을 추었다.

아악부에서 일하며 1932년에는 아악수장이 되었고 해방 뒤에는 아악부가 국립국악원으로 바뀌자 이사 겸 무용부장 및 예술사로 일하였다. 1955년에는 김천흥 고전무용연구소를 열었으며 일제강점기부터 2008년 8월 타계할 때까지 우리의 전통무용과 음악을 살리고 지키는 일에 평생을 바치면서 그 노력을 인정받아 수많은 상을 받기도 하였다. 남긴 작품으로는 무용극 「처용량」, 「만파식적」이 있으며 주요 저서로는 『한국무용의 기본무보』, 『우리춤 이야기』가 있다.

박해일
박해일은 국가무형문화재 제79호 발탈(재담예능)의 기능 보유자이며 안산 출신이다. 1923년 2월 25일 태어나 1942년 6월 조선연예단에 입단했으며 조하소 선생으로부터 화술, 재담을 사사받았다. 만주국 공연을 진행했으며 민요재담 「잔칫집 풍경」, 「장님타령」 등으로 당시 한창이었던 산림녹화 현장이나 농어촌으로 미신타파 및 계몽을 위한 순회공연을 펼쳤다.

또한 한국국악협회 감사,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이사를 역임하고 광주비엔날레 개최기념 국가무형문화재 발표공연에도 참여하였다. 한국국악대상을 수상하기도 했으며 전국국악경연대회를 유치하는 등 국악 발전에 많은 공헌을 했으나 지난 2007년 10월 21일 숙환으로 타계하였다.

주, 국악 관련 단체,
한국 국악협회 안산지부
1989년 4월 4일 안산 지역 국악의 발전을 위해 안산시 단원구 원곡동 소재 안산시 근로청소년복지회관에서 발기인 총회를 개최하여 초대지부장에 국가무형문화재 39호 처용무 기능보유자인 김천흥을, 부지부장에 박해일·안병덕·천병희를 각가 선임하면서 한국국악협회 안산지부가 출범하였다. 같은 해 6월 12일 한국국악협회로부터 공식인증을 받고 지부조직으로 농악, 민요, 기악, 국극, 무용 등 5개 분과위원회를 구성했으며 지회 직속 가무단을 창단하였다.

이후로 안산 지역의 고유문화유산인 와상농기와 둔배미놀이 등을 발굴하여 경기민속예술경연대회에 안산시 대표로,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는 경기도 대표로 각각 출전했으며 매년 별망성예술제에도 참가하여 국악보급에 기여하고 있다. 1991년 3월 19일에는 소속 회원인 김천흥이 서울 중구 정동에서 양금, 해금 발표회를 열기도 했으며 1993년부터 현재까지 총 14회에 걸쳐 국악 경기소리·서도소리 전국경연대회를 개최하여 국악의 저변확대에 공헌하였다.

2006년 9월에는 안산시 올림픽기념관에서 경기민요, 남도민요, 단소, 한국무용, 사물놀이 등을 강좌내용으로 하는 무료국악교실을 개설하여 140여 명의 시민이 참여하는 등 국악의 대중화에 기여하였다. 전국청소년 국악경연대회, 동(洞) 대항 농악경연대회, 신인국악무료강습회를 개최하고 있으며 국악의 해맞이 경축 창극 「어사와 옹새원」과 연말 불우이웃돕기 자선 국악을 공연하고 있다. 초대 지부장 김천흥, 제2대 지부장 박해일에 이어 제3대 지부장은 박순금, 제4대 지부장은 박미옥이 맡고 있다.

안산시립국악단
안산시립국악단은 1996년 10월에 창단되어 현재까지 29회의 정기연주회를 개최했으며 청소년 및 시민들을 위한 연간 80여 회의 음악회와 국악강습회도 열고 있다. 그리고 국악을 바탕으로 만든 어린이 연극, 뮤지컬, 재즈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으며 대한민국 국악제, 작곡축제, 전주소리축제, 제17대 대통령취임식연주 등의 초청연주회, TV나 라디오 등 방송매체를 통한 실황연주 프로그램 참여, 15장의 음반작업 등 열정이 넘치는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대금, 피리, 가야금, 해금, 아쟁, 타악 등 민요 분야 45명의 단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산국악동호회
1994년 5월 10일 아름다운 우리가락을 시민들에게 선보이고 전통국악을 유지 보전하는 데 뜻을 같이 하는 안산 지역사회의 국악 동호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안산국악동호회를 탄생시켰다. 이들 동호인들은 1994년 국악의 해를 맞아 국악무료강습회를 실시했으며 별망성예술제, 성호문화제 등의 문화행사에도 참여하여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있다.

기타
안산 지역의 기타 국악단체로는 시흥 지역의 초·중등학교 교사들로 구성된 풍물패가 있다. 풍물패는 풍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교사들이 상호간의 친목 도모와 더불어 풍물을 통한 학생 교육을 통하여 민족문화의 계승발전에 이바지하고자 창립했으며 안산시민을 위한 단오맞이공연, 샘두레 제1회 창립공연, 어린이날 축하공연, 제1회 경기도초등교원예술제 등에 참가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안산문화예술의전당 국악아카데미에서는 가야금 교육프로그램을 개설·운영하고 있다. 안산시립국악단원 중 가야금 선생을 강사로 위촉하여 어린이반, 성인반 등으로 나누어 20여 명을 교육하고 있으며 수강생들은 가야금과 연습실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

참조항목

역참조항목

카테고리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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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가요 [國樂歌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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