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 10일 일요일

우리나라 고유의 음악

우리나라 고유의 음악

흥보가, [ 興甫歌 ]
판소리 다섯마당 가운데 하나.
판소리는 한 명의 소리꾼이 고수(북치는 사람)의 장단에 맞추어 창(소리), 말(아니리), 몸짓(너름새)을 섞어가며 긴 이야기를 엮어가는 것을 말한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이칭/ 별칭/ 유형/ 성격/
흥부가, 박타령
작품
판소리
판소리 다섯마당 가운데 하나.‘박타령’이라고도 한다. 가난하고 착한 아우 흥보는 부러진 제비다리를 고쳐주고 그 제비가 물고 온 박씨를 심어 박을 타서 보물들이 나와 부자가 되고, 넉넉하고 모진 형 놀보는 제비다리를 부러뜨리고 그 제비가 물고 온 박씨를 심어 박을 타서 괴물들이 나와 망한다는 이야기를 판소리로 엮은 것이다.

사설이 우화적이기 때문에 우스운 대목이 많아 소리 또한 가벼운 재담소리가 많다. 사설의 길이는 짧은 편이며 한 마당 모두 부르는 데 대개 3시간 가량 걸린다. 조선 중기에 이미 불렸으며 송만재(宋萬載)의 ≪관우희 觀優戱≫, 이유원(李裕元)의 ≪관극팔령 觀劇八令≫과 같은 조선 후기 문헌에 처음 보인다.

정조 때의 명창 권삼득(權三得)이 <흥보가>를 잘하였고, ‘제비 후리러 나가는 대목’이 그의 더늠이라고 한다. 순조 때의 명창 염계달(廉季達)·문석준(文錫準)도 <흥보가>로 이름을 떨쳤는데 그는 ‘박통 속에서 돈과 쌀을 정신없이 퍼내는 휘모리 대목’을 더늠으로 전하고 있다.

철종 때에는 한송학(韓松鶴)·정창업(丁昌業)이 <흥보가>를 잘하였다 하며, 고종 때에는 최상준(崔相俊)·김창환(金昌煥)이 잘하였다 한다. 김창환은 ‘제비노정기’를 더늠으로 내었던 바, 오늘날 ‘제비노정기’는 그의 더늠을 첫손으로 꼽고 있다.
전승되고 있는 <흥보가> 바디에는 박녹주(朴綠珠)와 박봉술(朴奉述)이 보유하고 있는 송만갑(宋萬甲) 바디, 정광수(丁珖秀)가 보유하고 있는 김창환 바디, 오정숙(吳貞淑)이 보유하고 있는 김연수(金演洙) 바디가 있으며, 박동진(朴東鎭)이 짜 부르고 있는 바디 <흥보가>는 김창환 바디에 가깝다.

그 밖의 <흥보가> 바디는 거의 전승이 끊어진 상태이다. <흥보가>는 바디마다 사설과 소리가 얼마쯤 다르게 짜여 있으나, 흔히 ‘초앞’·‘놀보심술’·‘흥보 쫓겨나는데’·‘매품팔이’·‘매 맞는데’·‘집터 잡는데’·‘제비노정기’·‘흥보 박타령’·‘화초장’·‘제비 후리러 나가는데’·‘놀보 박타령’ 등 뒤풀이로 짜인 바디가 많다.

앞과 뒤에는 재담소리가 많고 가운데에 좋은 소리가 많다. <흥보가>에서 이름난 소리 대목은 ‘중타령’(엇모리-계면조)·‘집터 잡는데’(진양-우조)·‘제비노정기’(중중모리-평조 또는 계면조)·‘박타령’(진양-계면조)·‘비단타령’(중중모리-평조 또는 계면조)·‘화초장’(중중모리-계면조)·‘제비 후리러 나가는데’(중중모리-설렁제)를 들 수 있다.

<흥보가>는 우스운 재담 대목이 많이 들어 있고 끝에 ‘놀보 박타는 대목’에는 잡가(雜歌)가 나오기 때문에 해학적인 마당으로 꼽힌다. 소리도 잘해야 하지만 아니리와 너름새에 능해야 <흥보가>명창으로 제격이라 할 수 있다.

가난하지만 마음씨 착한 아우 흥보는 제비 다리를 고쳐주어 복을 받고, 마음씨 고약한 형 놀보는 부자로서 더 부자가 되려고 동생 흥보를 흉내 내어 제비 다리를 일부러 부러뜨려 벌을 받는다는, 전형적인 권선징악(勸善懲惡)의 교훈을 담고 있고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고 있는 판소리 전승오가(傳承五歌) 중의 하나.

<흥보가(興甫歌)>의 근원이 된 설화들은 크게 변화하지 않고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어서 비교적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 중에 하나는 몽골의 <박타는 처녀 설화>로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다.

옛날에 어떤 처녀가 처마에서 떨어져 바동거리는 제비 다리를 동여매주니 제비가 좋아서 날아간다. 얼마 뒤 그 제비가 날아와 씨앗을 떨어뜨리니 그 씨앗 심은 데서 큰 박이 열린다. 박을 타는데 그 속에서 금은보화가 나와 그 처녀는 거부가 된다. 이웃의 심사가 바르지 못한 처녀 하나가 그 이야기를 듣고 처마 밑에 사는 제비의 깃을 일부러 부러뜨리고 실로 매어 날려 보낸다. 얼마 지나 제비가 물어다 준 박씨를 심어 박을 타는데 박 속에서 독사가 나와 그 처녀를 물어 죽인다.

이 이야기는 흥보 놀보 이야기와 정확히 대응하는데, 몽골이 침략했을 때 몽골설화가 조선에 전파된 것인지, 아니면 고려시대에 몽골에 잡혀간 고려 여인네들에 의해 우리 것이 전파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흥보가의 또 하나의 근원설화는 신라설화라고 알려진 방이,,,

내용
흥보가에는 민담적 사유 체계가 널리 퍼져 있다. 이름에 성이 없이 그저 흥보, 놀보, 째보, 청보 등이라 부르는 것이 그러하고, 박타는 내용이 있기 때문에 성이 박가거나 제비에서 유추되어 성이 ‘연(燕)가’라는 것도 그러하다. 지리적 배경이 ‘충청·전라·경상, 삼도 어름’으로 제시된다거나, 시간적 배경이 옛날 옛적으로 나오는 것도 민담적 사고를 담고 있다.

등장하는 인물의 이력 사항이 제시되지 않는다든가 인물 유형이 평면적 성격으로 되어 있다는 것도 민담의 전통과 관련된다. 흥보가의 이야기 구조에서도 민담적 사유 체계가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흥보가의 거시 구조인 ‘대립적 반복 모방담’은 민담의 ‘흉내 내기담’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민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① 착한 사람이 우연히 어떤 행위를 하다. ② 그 보답으로 행운의 결과를 가져오다. ③ 악한 사람이 그 행위를 가식적으로 흉내 내다. ④ 그 응답으로 악운의 결과를 가져오다.’와 같은 서사구조를 흥보가 또한 그대로 갖고 있는 것이다. ①와 ②는 흥보 이야기, ③와 ④는 놀보 이야기와 대응된다.

흥보가 이야기의 핵심적 구조를 이루는 설화적 모티프로는 크게 보아 ‘선악형제담’과 ‘동물보은담’, 그리고 ‘무한재보담’을 꼽을 수 있다. ‘선악형제담’은 우리의 수많은 민담에서 보이는 선과 악의 선명한 대비와 역전의 스토리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다. 선악의 주체가 형제가 아닌, 이웃 사람이거나 자매이거나 하는 경우도 있다. 대체로 아우가 착하고 형이 악한 경우가 많지만 반대로 <방이 설화>처럼 형이 선하고 동생이 악한 경우도 있다. ‘동물보은담’은 동물이 자신을 보살펴준 사람을 위해 희생정신을 발휘해 은혜에 보답한다는 이야기로 우리 민담에 편만해 있는 화소이다. 하지만 이 화소에는 자신을 해코지한 사람에게는 복수를 한다는 화소가 동시에 내재되어 있다. ‘보은’의 국면만 나타나는 이야기들이 많지만 흥보가처럼 ‘보수(報讎)’의 국면이 같이 나타나는 이야기들도 있다.

보은하는 존재로서의 새는 우리 민담에서 까치가 가장 흔한데 흥보가에서는 제비가 대상이 되고 있다. ‘무한재보담’은 선한 사람이 베풂의 대가로 얻게 된 도구에서 무수한 재물이 쏟아진다는 화소이다. 우리 민담에서 원하는 온갖 재물을 화수분처럼 쏟아내는 도깨비 방망이가 대표적인 것이다. 도깨비 방망이 외에도 항아리나 냄비·맷돌·쌀바위 등이 우리 민담의 화수분 목록을 차지한다. 그런데 동물보은담이 보은과 보수의 국면을 동시에 갖듯이, 무한재보담 속에는 무한탕진담도 동시에 내재되어 있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하겠다. 악한 행위를 한 사람에게는 보수의 실천 행위로서 재물을 모두 탕진하게 만드는 것이다. 흥보가는 무한 재보 획득뿐만 아니라 무한 재보 탕진 과정에도 상당한 흥미의 초점이 주어져 있는 작품이다.

이와 같이 흥보가는 민담적 이야기 화소들이 서로 연접되고 중첩됨으로써 전체적인 얼개를 형성한다. 그러나 흥보가는 이러한 이야깃거리로만 구성된 게 아니다. 민담적 이야기의 틀거리 사이사이에서 분비되어 나오는 현실적인 성격의 이야기들이 흥보가를 한 편의 사회적 의미를 지닌 판소리로 만드는 역할을 한다. 민담적 요소들이 흥보가의 전체적인 윤곽을 그렸다면, 현실적인 요소들은 그 윤곽에 따라 채색을 가해 삼차원의 그림을 완성시키는 것이라고 비유할 수 있다. 흥보가에서 흥보와 놀보의 형제 관계라는 민담적 포장을 한 꺼풀만 벗겨내고 보면 거기에는 어떤 집단은 아무리 열심히 품을 팔아도 최저 생활도 하기 힘든 반면, 또 어떤 집단은 그럭저럭 지낼 만한데도 남을 해치는 욕심을 내어 재물이 나날이 불어나는 사회 경제 구조의 모순을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놀보의 축재와 흥보의 곤궁을 통해 경제력을 갖춘 신흥 부농층과 생산 수단을 상실한 빈민층으로 분화되는, 당시의 사회 문제인 경제적 양극화 현상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악질적 신흥 부자와 최하위 빈민 유랑층의 모습은 <놀보심술> 대목이라든지 그의 축재하는 과정, 흥보 내외의 품팔이 대목 등을 통해 잘 나타난다. 한편 흥보의 매품팔이를 통해서는 사회 지도층의 부역 회피와 궁민층의 대역이라는 부패한 사회 구조를 보여주며, 호방의 환자(還子) 거절과 매품 제안을 통해서는 중간 관리의 농간과 환자 제도의 모순, 그리고 권력의 횡포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놀보의 흥보에 대한 심술과 포악이라든가 매품팔이의 가로챔, 그리고 놀보 박에서의 삯꾼이나 놀이패 집단의 강탈성 등을 통해서는 몰인정한 이익 사회와 그로 인해 해이해진 사회 기강에 대해서도 주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흥보에게는 막대한 부를 가져다주는 반면, 놀보로부터는 축적한 부를 송두리째 뺏는 진술 태도를 통해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강퍅한 물질주의적 가치관에 대항하여 기존의 전통적인 온정주의적 가치관에 대한 옹호 내지는 보존 유지를 염원하는 작가 의식이 흥보가에서 작동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흥보가는 민담적인 이야기 구조에 이와 같은 현실주의적 요소들을 곳곳에 배치하여 현실 유추의 기능이 이루어지게끔 하고 있다. 그래서 흥보가를 들으면서 청중들은 민담식의 재미있는 이야기 재담과 해학적 표현을 통해 발랄하게 웃게 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을 풍자하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인해 시니컬한 웃음을 웃게 된다.

등장 인물
흥보가의 등장인물인 흥보와 놀보는 한국인의 인물 캐릭터의 대표적인 표본이다. 우리는 흔히 ‘흥보 같은 사람’이니 ‘놀보 같은 놈’이라는 말을 한다. 흥보는 경제적으로는 무능하고 체면을 중시하는 보수적인 사고를 갖고 있는 사람이지만, 착하고 욕심 없고 생명을 사랑하는 순수함이 마음속의 풍요로움을 주는 존재라 할 수 있다. 놀보에게 맞고 돌아와서도 형을 한 번도 원망하지 않고 아내에게는 변명을 늘어놓는다든가, 마지막에 그렇게 모질게 굴었던 형 놀보를 따뜻하게 포용한다든가 하는 장면에서 그 선한 형상은 뚜렷하게 부각된다.

반면에 놀보의 형상은 심사가 뒤틀려 남을 해치는 심술을 부린다든가, 재산을 혼자 차지하려고 동생을 집에서 쫓아낸다든가, 양식 얻으러 온 흥보에게 폭력을 휘두른다든가, 제비 다리를 일부러 부러뜨린다든가, 부자가 된 흥보의 집에 찾아와 포악을 부린다든가 하는 장면들을 통해 탐욕스러움에 포악함까지 갖춘 악한 존재로 형상화되고 있다. 놀보가 경제적 능력이 있고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사고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측면이 있고, 그래서 상당 부분 바람직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그 반도덕적이고 반사회적인 행동은 한국인의 심성에 근원적인 거부감을 주고 있다.

이러한 흥보 놀보의 성격은 사실적 재현이라기보다는 민담적 사고의 소산으로서 이후의 근현대 문학 속의 캐릭터에 하나의 전형적 모델을 제시해주었다. 특히 놀보의 성격은 채만식의 『태평천하(太平天下)』에 나오는, 욕 잘하고 이기적이고 반도덕적인 윤직원 영감에게 확장·심화됨으로써 전통적인 인물 캐릭터가 문학적으로 수용되는 메커니즘을 잘 보여주고 있다.

창 본
요즘 활발하게 전승되는 흥보가는 박녹주제, 박봉술제, 김연수제, 강도근제, 박동진제라고 할 수 있다. 이 중에서 박동진제를 제외하고는 모두 송만갑의 흥보가를 직·간접적으로 이어받은 것들이다. 송만갑제 소리 중에서도 오늘날 많은 후학들이 즐겨 부르는 흥보가는 박녹주바디인 것으로 보인다. 다른 흥보가는 전승이 끊어지거나 미약한 반면 박녹주바디 흥보가는 한농선과 박송희가 굳건하게 맥을 이었고, 또 그 후학들이 활발하게 전승시키고 있다.

박녹주가 남긴 흥보가 음반에는 <놀보 박타는 대목>이 들어 있는데, 사설이 비교적 소략하게 짜여져 있다. 그리고 그 자신은 소략하나마 이 대목을 음반으로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에게는 가르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흥보 밥 먹는 대목>과 같이 골계적이고 익살맞은 재담 대목도 여러 군데 빠져 있다. 그러나 박녹주의 제자인 박송희 명창이 <놀보 박 사설>을 복원시켜 현재는 흥보가 완질이 전승되고 있다.

특징 및 의의
흥보가는 전승오가(傳承五歌) 가운데 재담 소리가 가장 많아, 민속적 성격이 강한 작품이다. 앞과 뒤에 재담 소리가 많다. 특히 다양한 하층 예인 집단 등 온갖 인물 군상들이 등장하여 놀보를 패망시키는 <놀보 박타는 대목>은 흥보가 중에서도 민속적인 요소가 가장 강한 부분이다. 재담 소리를 폄하하는 시선이 존재하는 판소리 연행 관습상 흥보가는 지난날 창자로부터 그렇게 우대받던 판소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보성소리의 명창 정응민은 제자들에게 흥보가 가운데 <놀보 박타는 대목>을 가르치지 않았으며, 오늘날 대부분의 명창이 <놀보 제비 후리러 나가는 대목>까지만 부르게 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재담소리가 전혀 저평가되지 않는다. 요즘 청중들은 알아듣기 쉽고 재미있는 재담 대목에 오히려 더욱 관심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한때 전승이 위축되었던 흥보가가 오늘날에는 다른 어떤 바디보다도 인기가 있다. 흥보가의 재담적 구성이나 해학성 넘치는 담화적 표현들이 없다면 오늘날 판소리 공연의 발랄함과 흥미성은 그나마 확보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흥보가의 재담은 오늘날 창작판소리의 담화적 구성과 표현의 방향을 시사하는 지침의 역할을 하고 있다. 흥보가의 중간 중간에는 좋은 소리가 많다. 흥보가에서 이름난 소리 대목은 <중타령>(엇모리장단―계면조), <집터 잡는 대목>(진양조장단―우조), <제비노정기>(중중모리장단―평조 또는 계면조), <박타령>(진양조장단―계면조), <비단타령>(중중모리장단―평조 또는 계면조), <화초장타령>(중중모리장단―계면조), <제비 후리러 나가는 대목>(중중모리장단―설렁제) 등을 들 수 있다.

흥보의 박 속에서 금은보화가 나와 부자가 된다는 상황 설정은 그 내용의 비현실성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 동안 혹독한 가난을 체험하며 살아야 했던 민중들의 소망을 담아내고 있어서 큰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송만갑의 <흥보 박타는 대목>이 대단한 인기를 끌면서 많은 창자들이 다투어 부르게 되었던 이유도 바로 거기 있으며, 오늘날에도 환상적인 부의 획득을 염원하는 민중의 바람이 존재하는 한 <흥보 박타는 대목>은 흥미의 초점이 될 것이다. 이와 똑같은 이유로 <가난타령>도 민중들의 삶의 응어리를 표출한다는 점에서 호소력을 지닌다. 특히 천민 자본의 횡포가 두드러지는 요즘의 현대 사회에서 흥보네 가족이 겪는 간난(艱難)의 절정은 공감의 진폭이 크다고 할 것이다.

참조어
박타령

국악, [ Gugak , 國樂 ]

한국음악의 준말. 우리나라 전통음악의 총칭. 일명 한국음악.
이칭/ 별칭/ 유형/ 시대/
한국음악, 한국전통음악, 한민족음악
개념용어
근대
예로부터 전해 오는 우리나라 고유의 음악. 한국음악·한국전통음악·한민족음악

국악은 아악(雅樂)·당악(唐樂)·속악(俗樂) 곧 향악(鄕樂)을 모두 포함하며, 일반적으로 전통음악과 최근의 한국적 창작음악까지를 포함하는 우리나라 음악이다.

우리나라의 말과 글을 뜻하는 국어(國語)·국문(國文)이라는 말처럼 현재 사용되는 국악이라는 용어는 1907년 일제통감부(日帝統監府)가 교방사(敎坊司)를 장악과(掌樂課)로 개칭할 때 두었던 국악사장(國樂師長)과 국악사(國樂師)에서 기원됐다. 그런데 이 국악이라는 용어는 당시 통감부에 파견된 메가다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郎)가 일본의 전통음악을 뜻하는 고쿠가쿠(國樂) 곧 국악의 명칭을 소개한 결과물이다.

일제강점기에는 국악이라는 말 대신에 아악(雅樂) 또는 조선음악(朝鮮音樂)이라는 용어가 주로 사용됐다. 8·15광복 직후 등장한 국악건설본부(國樂建設本部) 또는 대한국악원(大韓國樂院) 및 국립국악원(國立國樂院)이라는 명칭에 사용됨으로써 국악은 서양음악을 뜻하는 양악(洋樂)의 대칭어로 사용됐다. 1959년 서울대 음대에 설립된 국악과(國樂科)라는 명칭은 그 후에 설립된 대학교의 국악과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1980년대 이후부터는 국악과라는 학과명 대신에 한국음악과(韓國音樂科)라는 명칭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국악이라는 명칭은 20세기 후반까지의 전통음악을 지칭하는 과거지향적 용어로 규정하고 새로운 창작곡을 포괄하는 새로운 한국음악이라는 용어의 사용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최근에 주목을 받고 있다.

연원 및 변천,
고려 때 송나라에서 아악이 수입된 이후 당시의 음악은 아악과 이미 그 이전에 들어와 있던 당악 및 우리 고유의 음악인 속악 곧 향악의 세 가지로 구별되었다. 아악은 주로 제사에 쓰였고, 당악은 주로 조회(朝會)와 연향(宴饗)에 쓰였으며, 향악은 민간에서 우리말로 익히는 것 등으로 되어 있었다.

역대의 이 모든 음악은 장악원(掌樂院)이라는 음악기관에서 관장하였는데, 1908년 12월 27일 포달(布達:궁내부에서 일반에게 널리 펴 알리는 통지) 제161호로 궁내부(宮內府)의 관제가 개정, 반포될 때 장악원의 기구가 대폭 축소되어 궁내부 장례원(掌禮院)에 부속되었고, 악사(樂事)를 책임지는 상위직의 직계로 국악사장(國樂師長) 한 사람이 있었다.

이때에는 이미 양악(洋樂)의 군악대가 해산된 뒤여서 이를 그대로 궁내부에 흡수하여 각종 신식 의전과 빈객 접대에 쓰고 있었기 때문에, 그 양악대의 악장인 양악사장(洋樂師長)과 구별하기 위해 우리 전통음악을 관장하는 국악사장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비록 직명에서이지만 국악이라는 이름이 공공연하게 사용된 것은 이 때가 처음이다.

광복 직후 재야의 국악인들은 이전의 아악사장(雅樂師長) 함화진(咸和鎭)을 중심으로 대한국악원(大韓國樂院)을 결성하였다. 이 대한국악원의 명칭에서 국악이라는 말이 다시 사용되었다.

또, 1950년 1월 16일 국립국악원의 직제 공포로 구 왕궁아악부는 국립국악원으로 개칭되어 국악이라는 말이 확립되었다. 아악이라는 말은 재래의 궁정음악 일부에 국한되지만, 국악은 아악과 민간에 산재한 민속음악 일체를 포괄할 수 있다.

가야금산조

현황,
국악은 현재 한국전통음악(韓國傳統音樂)과 한민족음악 등 다양한 용어로도 통용되고 있는데, 그 용어들은 범위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한국전통음악은 전통적으로 전승된 한국음악이며, 한민족음악은 우리민족의 생활 속에서 계승 발전된 음악을 가리킨다. 
농악농촌에서 집단노동이나 명절 때 등에 흥을 돋우기 위해서 연주되는 음악.
판소리《박타령》민속악의 하나로 광대의 소리와 그 대사의 총칭.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수궁가》동리(桐里) 신재효(申在孝) 작의 판소리.
판소리《심청가》조선시대 작자 , 연대 미상의 판소리.
판소리《적벽가》조선시대의 판소리. 판소리 열두 마당 중의 하나.
판소리《춘향가》조선 후기에 동리(桐里) 신재효(申在孝)가 지은 판소리.
한국음악이란 한국에서 연주되는 모든 음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한국에 뿌리를 내린 음악, 또는 한국적 토양에서 나온 음악을 가리킨다. 한국에서 연주되는 모든 음악 속에는 서양음악도 많기 때문에 이것을 한국음악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미 한국에 뿌리를 내린 음악을 전통음악이라고 부르는데, 시대적으로는 일제강점기, 즉 1910년 이전부터 있었던 음악을 가리킨다. 또 한편으로는 지금부터 약 50년 전, 즉 30년대 이전부터 있었던 음악을 전통음악이라 부르기도 한다(문화재보호법 참조).

이 밖에 한국적인 아이디어에 의하여 작곡된 현대의 음악도 한국음악의 범주에 속한다.

한국에 뿌리를 내린 음악 또는 한국적 토양에서 나온 음악을 가리킨다. 여기서 이미 한국에 뿌리를 내린 음악을 전통음악이라 함은 시대적으로는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1910년 이전부터 있었던 음악을 가리키거나 한편으로는 1930년대 이전부터 있었던 음악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리고 한국적 토양에서 나온 음악이라 함은 한국 전통음악을 비롯하여 한국적인 아이디어에 의해 작곡된 현대의 음악도 범주에 한국음악에 포함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기도 안산 지역의 국악을 주요 국악인 및 국악단체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국악가요, [ 國樂歌謠 ]
유형/ 시대/
개념용어
현대
국악의 장단이나 가락을 살려 대중이 쉽게 부를 수 있도록 만든 민요풍의 창작가요.

민요풍의 노래로서 국악의 생활화와 대중화라는 당시의 시대적 과제와 연관되어 1980년대에 부상한 새로운 국악 갈래이다. 「어디로 갈꺼나」, 「한네의 이별」, 「삼포가는 길」, 「꽃분네야」, 「산도깨비」 등이 국악가요에 속한다.

연원 및 변천
국악가요의 연원은 일제강점기 민요풍의 대중가요였던 신민요에서 찾아진다. 당시 신민요는 특정 작곡, 작사자에 의해 짧은 유절 형식의 민요풍 가요로 만들어져 양·국악 혼합합주(일명 鮮洋合奏)에 의해 반주되면서 대중들에게 현대적인 민요로 유행되었다. 국악가요는 1970년대 후반 국악계 안팎에서 소규모 양·국악 혼성 실내악단에 의해 반주되는 민요풍의 창작가요로서 1980년대에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는 퓨전국악의 대중화로 인하여 그 하위 갈래로서 민요의 현대화 작업의 일환으로 자리잡았으나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쇠퇴일로에 있다.

내용
국악가요의 원천에 해당하는 민요풍의 창작가요는 일제강점기 대중가요의 주류 장르 중 하나였던 신민요에서 시작한다. 〈노들강변〉, 〈처녀총각〉, 〈조선팔경가〉 등 민요양식과 유행가 양식이 혼합된 노래들이 1930년대에 크게 유행하여 신민요라는 갈래가 당시 성행하였다. 그러나 해방이후 창작민요는 전문 국악인들의 창작 및 가창 전승을 통해 기존의 통속민요와 함께 전문 국악인의 레퍼토리로 편입되었고 민요양식과 결별한 한국대중가요는 미국식 대중음악어법에 점점 더 지대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 1970년대 들어 국악계와 대중음악계, 그리고 민중가요 진영 사이의 교차적 틈새 영역에서 국악가요가 새롭게 등장하였다.

김영동은 국악가요를 연 초기 작곡가로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1978년 12월 국립극장에서 발표된 〈누나의 얼굴〉, 〈개구리 소리〉 등은 당시 대학가를 중심으로 한 민족문화운동 혹은 민중가요의 영향을 받은 노래로서 민요풍의 운동가요로 유행되었고 영화주제가 〈조각배〉,〈어디로 갈꺼나〉, 연극 삽입가요 〈사랑가〉, 〈한네의 이별〉, TV주제가 〈삼포 가는길〉 등은 국악가요의 대중성을 확보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김영동의 작업을 이어받아 국악가요가 국악계의 새로운 흐름으로 정착하게 된 데에는 국악실내악단 ‘슬기둥’ 활동의 힘이 컸다. 가야금, 피리, 기타, 해금, 소금, 신디사이저 등 당시 새로운 양·국악 혼성 편성으로 구성된 국악실내악단 슬기둥은 1990년대 초반까지 김영동, 채치성, 조광재 등의 창작곡을 연주하면서 방송프로그램 출연과 음반작업, 라이브 공연을 통해 국악계에 ‘국악의 대중화’, 혹은 ‘생활화’라는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슬기둥의 대표곡으로는 〈꽃분네야〉, 〈산도깨비〉,〈소금장수〉, 〈황톳길〉 등이 있다.

초창기 국악가요는 대편성 기악음악위주의 창작국악과 달리 짧고 단순하여 따라 부르기 쉬운 동요나 민요풍 노래 위주로 되어 있고 대금, 가야금 등의 전통선율악기와 기타 및 신서사이저의 서양화성악기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밴드의 반주를 포함하였다. 국악가요의 이러한 반주 편성은 이후 퓨전국악 밴드의 모체가 되었다. 국악가요는 음악회장외에 방송 및 음반과 같은 대중매체에 대한 친화력이 강하고 주요 수용층을 젊은이로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당시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에 국악가요가 대중화되면서 국악관현악단에서 국악가요 공연을 주최하는 등 국악계 제도권에 진입하여 대편성 국악관현악단에서도 국악가요를 수용하였다.

의의와 평가
국악가요는 그간 소수 매니어 혹은 노년층에 제한된 국악의 수용층을 넓히고 국악의 활로를 방송 및 음반, 청소년 음악회 등으로 새롭게 넓히는 등 국악의 대중화 및 현대화라는 1980년대의 시대적 과제에 충실했다는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단조·장조 오음음계의 틀에 박힌 선율과 초보적인 3화음, 유절형식의 서정가요라는 초기의 정형화 된 틀에서 진화하지 못하고 가사에 있어서도 토속적이고 의고적·감상적인 이미지를 고착화시킴으로써 이후 시대 변화에 맞추어 자생적으로 변신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주요 국악인,
향토 국악인
국악을 즐겨 부르며 예향(藝鄕) 안산 국악의 명맥을 지켜 온 대표적인 안산의 향토국악인으로는 천병희, 주장성, 김수옥, 김석근, 장석준 등이 있다. 이들은 안산 지역이 크게 변해가는 과정 속에서도 그윽하고 우아한 가락으로 애환을 달래 가면서 아직도 남아 고향을 지키고 있을 정도로 안산의 기질과 정서를 몸속 가득 체득하고 있는 향토국악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중 천병희는 1985년 한국전통문화의 대표적인 인물인 김천흥과 박해일 등이 이주해와 안산에 국악을 보급하는 활동을 전개할 당시 이들의 활동에 부응하여 안산의 가락을 후배들에게 전수하는 일에도 열중하였다.

김천흥
국가무형문화재 제1호-종묘제례악의 해금과 일무, 국가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의 기능보유자이자 김천흥은 190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열네 살에 이왕직 아악부원 양성소에 들어가 우리 전통음악과 무용을 배웠으며 순종황제가 태어난 지 50년을 기념하는 기념 잔치 때 무동이 되어 순종황제 앞에서 춤을 추었다.

아악부에서 일하며 1932년에는 아악수장이 되었고 해방 뒤에는 아악부가 국립국악원으로 바뀌자 이사 겸 무용부장 및 예술사로 일하였다. 1955년에는 김천흥 고전무용연구소를 열었으며 일제강점기부터 2008년 8월 타계할 때까지 우리의 전통무용과 음악을 살리고 지키는 일에 평생을 바치면서 그 노력을 인정받아 수많은 상을 받기도 하였다. 남긴 작품으로는 무용극 「처용량」, 「만파식적」이 있으며 주요 저서로는 『한국무용의 기본무보』, 『우리춤 이야기』가 있다.

박해일
박해일은 국가무형문화재 제79호 발탈(재담예능)의 기능 보유자이며 안산 출신이다. 1923년 2월 25일 태어나 1942년 6월 조선연예단에 입단했으며 조하소 선생으로부터 화술, 재담을 사사받았다. 만주국 공연을 진행했으며 민요재담 「잔칫집 풍경」, 「장님타령」 등으로 당시 한창이었던 산림녹화 현장이나 농어촌으로 미신타파 및 계몽을 위한 순회공연을 펼쳤다.

또한 한국국악협회 감사,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이사를 역임하고 광주비엔날레 개최기념 국가무형문화재 발표공연에도 참여하였다. 한국국악대상을 수상하기도 했으며 전국국악경연대회를 유치하는 등 국악 발전에 많은 공헌을 했으나 지난 2007년 10월 21일 숙환으로 타계하였다.

주, 국악 관련 단체,
한국 국악협회 안산지부
1989년 4월 4일 안산 지역 국악의 발전을 위해 안산시 단원구 원곡동 소재 안산시 근로청소년복지회관에서 발기인 총회를 개최하여 초대지부장에 국가무형문화재 39호 처용무 기능보유자인 김천흥을, 부지부장에 박해일·안병덕·천병희를 각가 선임하면서 한국국악협회 안산지부가 출범하였다. 같은 해 6월 12일 한국국악협회로부터 공식인증을 받고 지부조직으로 농악, 민요, 기악, 국극, 무용 등 5개 분과위원회를 구성했으며 지회 직속 가무단을 창단하였다.

이후로 안산 지역의 고유문화유산인 와상농기와 둔배미놀이 등을 발굴하여 경기민속예술경연대회에 안산시 대표로,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는 경기도 대표로 각각 출전했으며 매년 별망성예술제에도 참가하여 국악보급에 기여하고 있다. 1991년 3월 19일에는 소속 회원인 김천흥이 서울 중구 정동에서 양금, 해금 발표회를 열기도 했으며 1993년부터 현재까지 총 14회에 걸쳐 국악 경기소리·서도소리 전국경연대회를 개최하여 국악의 저변확대에 공헌하였다.

2006년 9월에는 안산시 올림픽기념관에서 경기민요, 남도민요, 단소, 한국무용, 사물놀이 등을 강좌내용으로 하는 무료국악교실을 개설하여 140여 명의 시민이 참여하는 등 국악의 대중화에 기여하였다. 전국청소년 국악경연대회, 동(洞) 대항 농악경연대회, 신인국악무료강습회를 개최하고 있으며 국악의 해맞이 경축 창극 「어사와 옹새원」과 연말 불우이웃돕기 자선 국악을 공연하고 있다. 초대 지부장 김천흥, 제2대 지부장 박해일에 이어 제3대 지부장은 박순금, 제4대 지부장은 박미옥이 맡고 있다.

안산시립국악단
안산시립국악단은 1996년 10월에 창단되어 현재까지 29회의 정기연주회를 개최했으며 청소년 및 시민들을 위한 연간 80여 회의 음악회와 국악강습회도 열고 있다. 그리고 국악을 바탕으로 만든 어린이 연극, 뮤지컬, 재즈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으며 대한민국 국악제, 작곡축제, 전주소리축제, 제17대 대통령취임식연주 등의 초청연주회, TV나 라디오 등 방송매체를 통한 실황연주 프로그램 참여, 15장의 음반작업 등 열정이 넘치는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대금, 피리, 가야금, 해금, 아쟁, 타악 등 민요 분야 45명의 단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산국악동호회
1994년 5월 10일 아름다운 우리가락을 시민들에게 선보이고 전통국악을 유지 보전하는 데 뜻을 같이 하는 안산 지역사회의 국악 동호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안산국악동호회를 탄생시켰다. 이들 동호인들은 1994년 국악의 해를 맞아 국악무료강습회를 실시했으며 별망성예술제, 성호문화제 등의 문화행사에도 참여하여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있다.

기타
안산 지역의 기타 국악단체로는 시흥 지역의 초·중등학교 교사들로 구성된 풍물패가 있다. 풍물패는 풍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교사들이 상호간의 친목 도모와 더불어 풍물을 통한 학생 교육을 통하여 민족문화의 계승발전에 이바지하고자 창립했으며 안산시민을 위한 단오맞이공연, 샘두레 제1회 창립공연, 어린이날 축하공연, 제1회 경기도초등교원예술제 등에 참가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안산문화예술의전당 국악아카데미에서는 가야금 교육프로그램을 개설·운영하고 있다. 안산시립국악단원 중 가야금 선생을 강사로 위촉하여 어린이반, 성인반 등으로 나누어 20여 명을 교육하고 있으며 수강생들은 가야금과 연습실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

참조항목

역참조항목

카테고리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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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영의 음악비평· 생존과 자유』(이소영, 민족음악연구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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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전국악의 대중화:국악의 대중화와 대중음악화 사이에서」(이소영, 『대중음악』 통권1호, 한울, 2008)
[국악가요 [國樂歌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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