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바위, [Ssalbawi], 2
천량암 이야기, [ 天糧庵- ]
분야/ 유형/ 지역/ 출처/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작품/설화 |
경상북도 울진군 근남면 행곡리 |
디지털울진문화대전-「천량암 이야기」 |
경상북도 울진군 근남면 행곡리에서 천량산 암자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천량암 이야기는 횡재형에 속하는 허욕 금지담이다. 이런 유형의 설화는 속칭 ‘쌀바위’ 전설로 대표되고 있으며, 가난한 절이나 암자와 결부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각 지역에 퍼져 있는 설화의 내용은 대동소이하여 헛된 욕심을 부리지 말라는 공통의 주제를 갖고 있다.
채록/수집상황
1998년에 울진문화원에서 간행한 『울진의 설화』에 수록되어 있으며, 2001년에 울진군지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울진군지』에도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내용
신라시대에 원효대사가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니며 수행을 하던 중 잠시 행곡리 천량산에 자리를 잡아 절을 짓고 수행하였다. 그 곳은 마치 병풍을 둘러쳐 놓은 듯한 암석 구멍에서 조석(朝夕)으로 쌀이 나와 수행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한다.
그 후 원효대사가 이곳을 떠나자 떠돌이 중이 이곳에 자리를 잡고 수행을 하게 되었는데 아침저녁으로 조금씩 나오는 쌀의 양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여 많이 나오도록 구멍을 크게 뚫었다. 그런데 그 뒤부터는 쌀이 나오지 않고 뿌연 뜨물이 나왔다 한다. 객승이 더 이상 머물 수 없어 절에서 떠나니 절은 폐허가 되었다. 절가에 쌓아 놓았던 석축은 무너져 내렸으며, 깨어진 기와는 세월과 함께 뒹굴었다.
결국 무소유를 주장하는 것이다. 욕심을 모두 버려야 할 승려가 헛욕심을 부린 결과는 비록 전해오는 전설이라 하지만 전설로 넘기기엔 현재와 미래를 살아갈 우리들에게 좋은 귀감이 된다. 행곡리 동명(洞名)은 이로 인하여 ‘쌀구’라 불렀다 한다.
그 후 원효대사가 이곳을 떠나자 떠돌이 중이 이곳에 자리를 잡고 수행을 하게 되었는데 아침저녁으로 조금씩 나오는 쌀의 양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여 많이 나오도록 구멍을 크게 뚫었다. 그런데 그 뒤부터는 쌀이 나오지 않고 뿌연 뜨물이 나왔다 한다. 객승이 더 이상 머물 수 없어 절에서 떠나니 절은 폐허가 되었다. 절가에 쌓아 놓았던 석축은 무너져 내렸으며, 깨어진 기와는 세월과 함께 뒹굴었다.
결국 무소유를 주장하는 것이다. 욕심을 모두 버려야 할 승려가 헛욕심을 부린 결과는 비록 전해오는 전설이라 하지만 전설로 넘기기엔 현재와 미래를 살아갈 우리들에게 좋은 귀감이 된다. 행곡리 동명(洞名)은 이로 인하여 ‘쌀구’라 불렀다 한다.
모티브 분석
「천량암 이야기」의 주요 모티프는 천량암의 쌀구멍과 객승의 욕심이다. 원효가 수행하던 곳으로, 암석 구멍에서 조석으로 쌀이 나왔는데 원효가 떠난 뒤 객승이 구멍을 크게 뚫으니 그 뒤부터는 쌀구멍에서 뜨물만 나오게 된다. 이는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지나친 욕심을 내면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상징성을 천량암에 비유하여 강조한 이야기이다.
바위치성
바위를 신격으로 삼아 주로 자식 등을 기원하는 의례.
내용
바위가 지닌 생생력(生生力)을 바탕으로 바위를 신격화 한다. 즉 바위는 견고할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존재하여 왔다는 점에서 영구성과 항구성을 지닌 존재로 이해된다. 특히 바위는 단순한 고체가 아니라, 강인한 생산력을 지닌 존재로 믿어 왔다. 전국적으로 전승되는 쌀바위 전설은 바위의 탁월한 생산력을 잘 보여 준다.
『조선의 귀신(朝鮮の鬼神)』에서는 바위의 정령이 있다고 하여 암석을 신앙대상으로 삼는 풍속이 조선 전역에서 나타난다고 하였다. 사례로는 기자 목적을 위해 치성을 드리는 바위로인 산아당, 남녀를 맺게 하는 영력을 지닌 상사암, 병에 걸린 사람을 낫게 하는 석불 등을 들 수 있다.
최근에 조사된 내용을 보더라도 바위에 치성을 드리는 사례로 남근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마을신앙의 수호신격으로 남근석이나 여근석이 자리 잡은 지역도 있다. 이들 바위는 크게 마을신앙의 신체인 경우와 개인치성의 신체인 경우 나눌 수 있다.
먼저 남근석이 마을신앙의 신체로 자리 잡은 경우로 좋은 예는 충청북도 영동군 용산면 부상리의 남근석이다. 이 돌은 원래 옛 도로 옆에 세워져 있다가 새 도로가 나면서 밭에 묻혔다고 한다. 그 후 마을에 줄초상이 나는 불상사가 생겨 이 돌을 다시 세우고 마을제사를 올렸다. 새마을운동 이후에 동제를 금하여 그곳에 집을 짓고 살았지만 그곳에 살던 사람들도 죽었다고 한다. 이후 사람들이 정월대보름날로 제삿날을 정해 동제를 지내 왔다는 것이다. 이 마을의 남근석은 마을 수호신적인 존재로서의 능력을 잘 보여 준다.
여근석을 신체로 삼은 마을도 있다. 바로 제천시 송학면 무도리의 공알바위이다. 원래는 남서낭도 있었다. 새마을운동 때 파괴되고 이것만 남게 되었다. 이 마을에서는 공알바위란 명칭이 상스럽다고 하여 용왕바위, 또는 용암이라고 부른다. 현재 이 마을에서는 정월 초이튿날 자정에 삼색실과와 포를 제물로 장만해서 동제를 지내고 있다.
특정 바위가 마을제의의 신체로 모셔지는 경우와 달리 개인치성의 신체는 주로 기자신앙(祈子信仰)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이 밖에 병의 치료나 기복신앙의 믿음으로 모셔진다. 남근석 형상을 한 바위에 대한 치성은 전국적으로 전승된다는 점에서 지역적인 차이를 제시하기가 어렵다.
기자신앙의 신체로 모셔지는 남근석은 임신을 못하는 여인도 임신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생산력이 뛰어난 바위로 인식한 결과이다. 남근석에 대한 치성 방식은 고사(告祀)뿐만 아니라 남근석에 손을 대고 빙빙 돌거나 껴안는 등 다양한 모의 성행위이다. 현재 안동시립민속박물관에 있는 남근석은 눕혀져 있기 때문에 바위 위에 올라타고 마치 성행위를 연상하는 행위를 통해 임신하기를 기원하기도 한다.
남근석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이 치성을 드리는 바위도 있다. 경기도 가평의 용추계곡에 있는 미륵바위이다. 이 바위는 전체가 남근석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한쪽에만 남근의 형상을 하고 있다. 특히 이 바위는 관리하는 보살이 따로 있어 암 등과 같은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이 백일치성 등을 올리기 위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조선의 귀신(朝鮮の鬼神)』에서는 바위의 정령이 있다고 하여 암석을 신앙대상으로 삼는 풍속이 조선 전역에서 나타난다고 하였다. 사례로는 기자 목적을 위해 치성을 드리는 바위로인 산아당, 남녀를 맺게 하는 영력을 지닌 상사암, 병에 걸린 사람을 낫게 하는 석불 등을 들 수 있다.
최근에 조사된 내용을 보더라도 바위에 치성을 드리는 사례로 남근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마을신앙의 수호신격으로 남근석이나 여근석이 자리 잡은 지역도 있다. 이들 바위는 크게 마을신앙의 신체인 경우와 개인치성의 신체인 경우 나눌 수 있다.
먼저 남근석이 마을신앙의 신체로 자리 잡은 경우로 좋은 예는 충청북도 영동군 용산면 부상리의 남근석이다. 이 돌은 원래 옛 도로 옆에 세워져 있다가 새 도로가 나면서 밭에 묻혔다고 한다. 그 후 마을에 줄초상이 나는 불상사가 생겨 이 돌을 다시 세우고 마을제사를 올렸다. 새마을운동 이후에 동제를 금하여 그곳에 집을 짓고 살았지만 그곳에 살던 사람들도 죽었다고 한다. 이후 사람들이 정월대보름날로 제삿날을 정해 동제를 지내 왔다는 것이다. 이 마을의 남근석은 마을 수호신적인 존재로서의 능력을 잘 보여 준다.
여근석을 신체로 삼은 마을도 있다. 바로 제천시 송학면 무도리의 공알바위이다. 원래는 남서낭도 있었다. 새마을운동 때 파괴되고 이것만 남게 되었다. 이 마을에서는 공알바위란 명칭이 상스럽다고 하여 용왕바위, 또는 용암이라고 부른다. 현재 이 마을에서는 정월 초이튿날 자정에 삼색실과와 포를 제물로 장만해서 동제를 지내고 있다.
특정 바위가 마을제의의 신체로 모셔지는 경우와 달리 개인치성의 신체는 주로 기자신앙(祈子信仰)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이 밖에 병의 치료나 기복신앙의 믿음으로 모셔진다. 남근석 형상을 한 바위에 대한 치성은 전국적으로 전승된다는 점에서 지역적인 차이를 제시하기가 어렵다.
기자신앙의 신체로 모셔지는 남근석은 임신을 못하는 여인도 임신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생산력이 뛰어난 바위로 인식한 결과이다. 남근석에 대한 치성 방식은 고사(告祀)뿐만 아니라 남근석에 손을 대고 빙빙 돌거나 껴안는 등 다양한 모의 성행위이다. 현재 안동시립민속박물관에 있는 남근석은 눕혀져 있기 때문에 바위 위에 올라타고 마치 성행위를 연상하는 행위를 통해 임신하기를 기원하기도 한다.
남근석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이 치성을 드리는 바위도 있다. 경기도 가평의 용추계곡에 있는 미륵바위이다. 이 바위는 전체가 남근석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한쪽에만 남근의 형상을 하고 있다. 특히 이 바위는 관리하는 보살이 따로 있어 암 등과 같은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이 백일치성 등을 올리기 위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유학산 빈대 절 터, [ 遊鶴山- ]
분야/ 유형/ 지역/ 출처/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작품/설화 |
경상북도 칠곡군 석적읍 성곡리 |
디지털칠곡문화대전-「유학산 빈대 절 터」 |
경상북도 칠곡군 석적읍 성곡리에 전해오는 빈대 절 터와 관련된 이야기.
이야기는 ‘쌀바위’ 설화, ‘미혈(米穴)’ 설화로 전국적으로 분포하는 이야기이다. 욕심을 너무 부리면 끝내 자연물에 의해 파괴된다는 우리 조상들의 소박한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다. 칠곡군 석적읍 도개리의 안 골짜기 북쪽으로 우뚝 솟은 유학산을 중턱까지 올라가면 깎아지른 듯한 웅대한 바위 절벽이 정상까지 솟아 있다. 절벽 밑에서 고개를 들면 까마득히 보이는 정상이 위압감을 느끼게 한다. 높이가 50길이나 된다 하여 옛날부터 ‘쉰질바위’라고 불린다. 쉰질바위의 절벽이 시작되는 바로 밑에 절이 하나 있었는데, 지금은 그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지만 사람들은 이곳을 ‘빈대 절 터’라고 부르고 있다. 갈대와 잡초로 우거진 일대에는 지금도 깨어진 기왓장이 나와 이 전설을 뒷받침하여 주고 있다.
채록/수집상황
칠곡군지편찬위원회가 채록하여 1994년 발행된 『칠곡군지』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아주 오랜 옛날, 건립 연대도 사찰 이름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쉰질바위 밑에는 조촐한 절이 있었다. 절의 건립 당시에는 스님도 제법 많아 법당에는 염불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불공을 드리는 신도들의 왕래로 조용한 가운데도 활기에 차 있었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시주하던 신도들도 차츰 줄고 그 많던 스님들도 하나 둘 절을 떠나 종국에는 노스님이 혼자서 절을 지키게 되었다. 이렇다 보니 노스님은 자신이 먹을 식량까지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노스님은 매일같이 여러 마을을 다니며 시주를 받아야 했으므로 이런 나날이 계속되자 수행을 하고 도를 닦을 시간도 없게 되었다. 하루는 동냥에 지친 몸으로 절에 늦게 돌아온 노스님은 고단함을 참고 공양을 드리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 부처님이 나타나서, “네 정성이 가히 불쌍하구나. 내일 아침 일어나 절 뒤편에 바위에 구멍이 난 곳을 살피면 쌀이 나올 것이니 한 사람의 연명에는 족할 것이다. 그 쌀로 너는 절을 지키고 수행에 정진하도록 하여라.”하고 일러 주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잠이 깬 노스님은 날이 밝기를 기다려 절 뒤편의 바위 절벽으로 가보니 과연 부처님이 꿈에서 이른 대로 절벽 밑에 뚫어져 있는 작은 구멍에서 쌀이 솔솔 흘러나오고 있었다.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쌀을 받으니, 정확하게 한 사람 몫의 쌀이 나오고는 딱 멈추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어 노스님은 끼니때마다 마치 뒤주에서 쌀을 내어 밥을 짓듯 바위 구멍에 가서 쌀을 받아 매일의 식량을 해결하게 되었다. 이렇게 양식 문제가 해결되자, 스님은 시주를 받으러 마을에 나가는 것을 그만두고 부처님의 지시대로 수도에 전념하여 오랜 세월이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날 조용하기만 했던 절에 세 사람의 신도가 불공을 드리기 위해 찾았고 며칠 동안 절에 묵게 되었다. 그런데 끼니때가 되자 노스님은 걱정이 생겼다. 바위 구멍에서 나오는 한 사람 몫의 쌀로는 네 사람의 밥을 지을 수 없기 때문에 저녁 지을 쌀을 받으러 간 노스님은 더 많은 쌀을 나오도록 하기 위해 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로 바위 구멍을 후비고 쌀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러자 기다리던 쌀이 아니라, 흰 빈대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갑자기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빈대는 그칠 줄 모르고 계속해서 나와 절을 침범하고 절 구석구석에 들끓게 되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불공이 중단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빈대 때문에 견딜 수가 없어 신도들도 절을 떠나고 말았다. 홀로 남은 노스님은 쌀 구멍에서 더 이상 쌀이 나오지 않아 굶주리기도 했지만, 더 큰 문제는 들끓는 빈대를 견딜 수가 없어 절에 불을 질러 모두 태워 버리고 절을 떠나 버렸다. 이런 사연 때문에 사람들은 이곳을 ‘빈대 절 터’라고 부른다.
이렇게 되어 노스님은 끼니때마다 마치 뒤주에서 쌀을 내어 밥을 짓듯 바위 구멍에 가서 쌀을 받아 매일의 식량을 해결하게 되었다. 이렇게 양식 문제가 해결되자, 스님은 시주를 받으러 마을에 나가는 것을 그만두고 부처님의 지시대로 수도에 전념하여 오랜 세월이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날 조용하기만 했던 절에 세 사람의 신도가 불공을 드리기 위해 찾았고 며칠 동안 절에 묵게 되었다. 그런데 끼니때가 되자 노스님은 걱정이 생겼다. 바위 구멍에서 나오는 한 사람 몫의 쌀로는 네 사람의 밥을 지을 수 없기 때문에 저녁 지을 쌀을 받으러 간 노스님은 더 많은 쌀을 나오도록 하기 위해 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로 바위 구멍을 후비고 쌀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러자 기다리던 쌀이 아니라, 흰 빈대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갑자기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빈대는 그칠 줄 모르고 계속해서 나와 절을 침범하고 절 구석구석에 들끓게 되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불공이 중단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빈대 때문에 견딜 수가 없어 신도들도 절을 떠나고 말았다. 홀로 남은 노스님은 쌀 구멍에서 더 이상 쌀이 나오지 않아 굶주리기도 했지만, 더 큰 문제는 들끓는 빈대를 견딜 수가 없어 절에 불을 질러 모두 태워 버리고 절을 떠나 버렸다. 이런 사연 때문에 사람들은 이곳을 ‘빈대 절 터’라고 부른다.
모티브 분석
이야기의 모티프는 쌀이 나오는 구멍에 욕심이 생긴 노스님이 더 많은 쌀을 얻기 위해 구멍에 손을 대는 바람에 더 이상 쌀도 얻지 못하고 절까지 폐찰(廢札)당했다는 것이다.
진안 마이산의 설화,
분야/ 유형/ 지역/ 출처/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전라북도 진안군 |
디지털진안문화대전-설화 |
전라북도 진안 지역에서 예로부터 구전되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설화는 일반적으로 신화·전설·민담으로 구분하는데, 현재 진안 지역의 설화는 전설 위주로 전승되고 있다. 진안 지역에는 「커 오르다가 멈춘 마이산」, 「고양이혈과 쥐혈」, 「이무기의 복수로 망한 의림사」, 「효자 신의연」, 「역적으로 몰린 정여립」, 「쌀바위 전설」 등 지역과 역사 인물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 동안 조사된 진안 지역 설화 자료를 기초로 진안의 설화를 인물 전설, 풍수 설화, 산 이동 설화, 자연물 설화, 동물 설화, 효행 설화, 민담 등 7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인물 전설
인물 전설의 주인공인 역사 인물로는 이성계, 이서구, 이이, 황희, 사명당, 신언충, 정여립 등이 있다. 특히 꿈에 마이산에서 금척을 받고 조선을 개국했다는 이성계와 장수로 태어났으나 역적으로 몰려서 죽었다는 신언충과 정여립 설화에는 진안 지역 특유의 전승 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진안 지역의 인물 전설로 「아전들의 노름 버릇을 고친 이서구」, 「이서구가 지목한 명당을 차지한 전주 유씨」, 「진묵 대사의 후신으로 태어난 이서구」, 「흑칠백장을 먹고 도통한 전라 감사 이서구」, 「사명 대사와 아랑 낭자」, 「황희 정승과 어머니」, 「황희 정승과 농부」, 「율곡 선생의 지혜」, 「역적으로 몰린 신언충」 등이 있다.
「역적으로 몰린 신언충」 이야기는 정여립 사건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용담댐의 상류인 진안군 상전면·동향면·천전면 경계 지역에 있는 천반산과 죽도 등 정여립 사건의 배경지에서 주로 전승되고 있다. 오누이 힘내기와 풍수담이 결합된 신언충 남매 이야기와 달리 정여립 전설은 설화적 구조를 온전히 갖추지 못한 경우가 많다. 진안읍 가막리에는 정여립 장군이 죽도를 끼고 있는 천반산에 피난을 와서 군사 훈련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정여립 장군이 술법으로 강변의 돌을 던져서 성을 쌓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천반산에 가면 정여립이 군사 훈련을 할 때 썼다고 하는 삼천 명이 밥을 해 먹을 수 있는 돌솥이나 말 발자국이 새겨진 바위가 남아 있다고 한다.
「역적으로 몰린 신언충」 이야기는 정여립 사건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용담댐의 상류인 진안군 상전면·동향면·천전면 경계 지역에 있는 천반산과 죽도 등 정여립 사건의 배경지에서 주로 전승되고 있다. 오누이 힘내기와 풍수담이 결합된 신언충 남매 이야기와 달리 정여립 전설은 설화적 구조를 온전히 갖추지 못한 경우가 많다. 진안읍 가막리에는 정여립 장군이 죽도를 끼고 있는 천반산에 피난을 와서 군사 훈련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정여립 장군이 술법으로 강변의 돌을 던져서 성을 쌓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천반산에 가면 정여립이 군사 훈련을 할 때 썼다고 하는 삼천 명이 밥을 해 먹을 수 있는 돌솥이나 말 발자국이 새겨진 바위가 남아 있다고 한다.
풍수 설화
진안 지역 풍수 설화는 음택 풍수와 관련한 이야기가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학이 날아간 묘터」, 「장군 대좌 묘를 쓰고 여장수가 난 구씨 집안」, 「호식당한 자리에 묘 쓰고 부자 된 사람」, 「우물 명당」 등이 그 예이다. 음택 풍수 설화 외에도 우연한 기회에 잡은 명당, 가짜 풍수 또는 여자가 명당을 잡은 이야기, 명당을 뺏고 빼앗긴 이야기 등이 전해진다.
사찰 또는 승려가 관련된 명당 파손담도 전해진다. 「사라진 절」은 중들의 시기심과 욕심 때문에 명당이 파손되고 절이 사라지게 된다는 폐사 유래담이며, 「피바위 전설」은 승려를 박대했다가 승려의 보갚음으로 명당 발복이 끊겨 마을이 망했다는 이야기이다.
사찰 또는 승려가 관련된 명당 파손담도 전해진다. 「사라진 절」은 중들의 시기심과 욕심 때문에 명당이 파손되고 절이 사라지게 된다는 폐사 유래담이며, 「피바위 전설」은 승려를 박대했다가 승려의 보갚음으로 명당 발복이 끊겨 마을이 망했다는 이야기이다.
산 이동 설화
진안의 상징물인 마이산은 지역민들에게는 솟금산이라는 명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솟금산 전설」은 전국에 분포하는 산 이동 설화의 지역적 변이형이라 할 수 있는데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 있는 솟금산의 독특한 형상은 지역민들의 설화적 상상력을 자극함으로써 현재까지도 활발한 설화 전승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솟금산 전설」은 두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는 산의 형상에서 이야기의 발상이 비롯된다. 마이산의 옛 이름이 솟금산인데 하늘을 향해 솟아올라 자꾸 크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다. 암솟금산과 수솟금산이 같이 커 오르는데 암솟금산은 새벽에 크자 하고, 수솟금산은 밤에 크자고 했다. 그런데 새벽에 물을 길러 나오던 여자가 커 오르는 산을 보고 놀라서 산이 큰다고 소리치자 두 산은 더 이상 크지 못했다. 수솟금산이 암솟금산을 책망하면서 발로 찼더니 암솟금산이 주저앉는 바람에 암솟금산은 펑퍼짐한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솟금산 전설」은 두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는 산의 형상에서 이야기의 발상이 비롯된다. 마이산의 옛 이름이 솟금산인데 하늘을 향해 솟아올라 자꾸 크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다. 암솟금산과 수솟금산이 같이 커 오르는데 암솟금산은 새벽에 크자 하고, 수솟금산은 밤에 크자고 했다. 그런데 새벽에 물을 길러 나오던 여자가 커 오르는 산을 보고 놀라서 산이 큰다고 소리치자 두 산은 더 이상 크지 못했다. 수솟금산이 암솟금산을 책망하면서 발로 찼더니 암솟금산이 주저앉는 바람에 암솟금산은 펑퍼짐한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자연물 설화
자연물 설화로는 「배미산」, 「배때기 산」, 「옥녀봉」, 「시루봉」, 「질매목」, 「태자굴」, 「장군 바위」, 「칼바위」, 「피바위」, 「상사 바위」, 「병풍 바위」, 「북소」, 「도치소」 등이 있다. 주로 산봉우리와 굴, 바위, 못 등의 자연물에 붙은 명칭의 유래에 대한 전설이다.
동물 설화
동물 설화에는 호랑이, 구렁이, 뱀, 지렁이 등이 많이 등장한다. 특히 진안 지역 설화에서 호랑이는 인간과 교감을 나누는 동물로 나오며 둔갑술과 관련되어 있어서 흥미롭다. 「효자 김용담」은 호랑이로 둔갑했다가 다시 인간으로 변신하지 못한 효자의 비극적 결말을 다루고 있고, 「호랑이가 된 효자」는 호랑이로 변신해서까지 효성을 다한 효자의 이야기이다. 「효성 깊은 며느리와 호랑이」에 나오는 호랑이가 산신의 속성을 지닌 신성한 동물이라면, 「효자 김용담」이나 「호랑이가 된 효자」에 나오는 호랑이는 신성하다기보다는 인간과 교감을 나누는 특별한 동물로서 의미가 있다. 「은혜 갚은 까치」, 「죽은 구렁이의 앙갚음」, 「구렁이 죽이고 태어난 아이」, 「뱀을 낳은 사람」, 「지렁이라는 말에 눈 뜬 노인」 등의 설화 외에도 쥐, 가재, 두꺼비가 등장하는 설화들도 전해진다.
효행 설화
효행을 소재로 한 설화는 전통적 가치관이 잘 드러나는 이야기이다. 효행 설화가 널리 공감을 얻는 이유는 효가 단순히 유교적 실천 덕목이 아니라 인간의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심성이기 때문일 것이다. 진안 지역에서는 「호랑이가 된 효자」, 「효자 김용담」, 「효자 신의연」, 「효성 깊은 며느리와 호랑이」 등의 효행담이 전해진다.
「효자 신의연」은 임진왜란 때 쳐들어온 왜적이 신의연의 효심에 감동하여 살려준 이야기이다. 백운면 노촌리에 살던 거창 신씨 신의연은 임진왜란 때 무민공 황진, 건재 김천일과 함께 출병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부친의 죽음이 임박하여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때 일본군 대장이 조선은 충효 정신이 강하다는데 신의연이 효자인지 검증하기 위해 ‘효자(孝子)’라고 종이에 써서 불을 붙이니 종이가 타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다. 일본군은 신의연이 효자인 것을 알고 해치지 않고 살려 주었다. 그 후에 선조가 그 일을 알고 효자 정려를 내려 주었고 후손들은 그의 효행을 기려 영모정을 세웠다.
「효자 신의연」은 임진왜란 때 쳐들어온 왜적이 신의연의 효심에 감동하여 살려준 이야기이다. 백운면 노촌리에 살던 거창 신씨 신의연은 임진왜란 때 무민공 황진, 건재 김천일과 함께 출병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부친의 죽음이 임박하여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때 일본군 대장이 조선은 충효 정신이 강하다는데 신의연이 효자인지 검증하기 위해 ‘효자(孝子)’라고 종이에 써서 불을 붙이니 종이가 타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다. 일본군은 신의연이 효자인 것을 알고 해치지 않고 살려 주었다. 그 후에 선조가 그 일을 알고 효자 정려를 내려 주었고 후손들은 그의 효행을 기려 영모정을 세웠다.
민담
「구렁덩덩 신선비」, 「쌀 노적과 바꾼 돌 노적」, 「내 복으로 산다」, 「지성이와 감천이」, 「소금 장수 이야기」 등은 전국적으로 널리 퍼져 있는 민담으로 진안 지역에서도 수집되었다.
출처 ^ 참고문헌
[울진의 설화』(울진문화원, 1998)
[울진군지』(울진군지편찬위원회, 2001)
[북면 사람들의 삶과 민속』(울진군북면·대구경북향토사연구협의회, 2005)
[온정면 사람들의 삶과 민속』(대구·경북향토사연구협의회, 2006)
[천량암 이야기」 [天糧庵-]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朝鮮の鬼神(村山智順, 김희경 역, 동문선, 1990년)
[한국의 성신앙(김종대, 인디북, 2004년)
[한국의 性숭배문화(이종철, 민속원, 2003년)
[바위치성 (한국민속신앙사전: 가정신앙 편, 2011...)
[한국민속신앙사전: 가정신앙 편
[호국의 고장』(칠곡군, 1983)
[칠곡군지』(칠곡군, 1994)
[유학산 빈대 절 터」 [遊鶴山-]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구전 설화집 1: 용담댐 수몰 지역 설화』(구비 문학 조사 연구회, 1998)
[진안 지방의 구전 설화집』(진안 문화원, 2003)
[진안군 향토 문화 백과사전』(진안군·진안 문화원, 2004)
[진안군 마령면 마을지』(생명의 숲 국민 운동 마을 조사단, 2008)
[설화 [說話]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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