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 1일 월요일

비류 [沸流]

비류 [沸流]

전설 속의 인물로서, 고구려의 건국시조인 주몽(朱蒙)의 아들이자 백제의 건국시조인 온조(溫祚)의 형으로 전한다.

고대에 현재의 인천광역시 지역을 근거지로 삼았던 삼국시대 백제의 미추홀에서 일어난 왕족의 건국 시조릐 형제.

출생-사망
? ~ BC 18?
시대/ 가족관계/
고구려
아버지 : 동명왕
동생 : 온조왕
분야/ 유형/ 지역/ 시대/ 출처/
역사/전통 시대,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인물/왕족·호족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고대/삼국 시대/백제
디지털미추홀구문화대전-비류
《삼국사기》에는 그의 행적에 관해 서로 다른 두가지 이야기가 기재되어 있다. 그중 하나에 따르면, 비류는 북부여(北扶餘)출신의 주몽과 졸본부여(卒本扶餘)왕의 둘째딸 사이에서 태어나 아우인 온조와 함께 자랐는데, 어느날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 유리(琉璃)가 와서 태자가 되자 온조와 함께 따르는 신하들을 거느리고 한강유역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신하들이 모두 한강 남쪽에 자리잡자고 권하고 아우인 온조도 그 말에 따라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자리잡고 싶어했으나, 비류는 바닷가에서 살고 싶어해 백성을 나눠 미추홀(彌鄒忽)로 가서 살았는데,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자신이 거느린 백성은 편히 살지 못하는 반면 온조의 백성들은 편히 살게 되자 부끄럽게 여겨 후회하다 죽었다고 한다.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비류는 졸본사람 우태(優台)와 소서노(召西奴) 사이에서 태어나 아우 온조와 함께 자랐으며, 아버지 우태가 죽은 뒤 어머니 소서노가 주몽과 재혼하였는데, 주몽이 부여에서 낳은 아들인 유유(孺留)를 태자로 삼고 왕위를 잇게 하였다. 이에 비류는 아우인 온조와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를 건너 미추홀로 왔으며, 그곳에서 나라를 세우고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두가지 이야기 중 널리 알려진 것은 첫 번째 이야기이다. 그래서 비류가 죽자 비류의 백성들이 모두 온조에게로 왔고, 이에 온조가 서기전 18년에 백제를 세웠다는 이야기에 착안해 비류가 서기전 18년에 죽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위의 이야기는 역사적 사건을 빗댄 건국설화이므로 비류와 온조를 개인이 아닌 집단의 상징으로 해석하는 것이 보통이며, 비류집단과 온조집단의 경쟁에서 온조집단이 승리했다고 보는 것이 보통이다.

문학 산성 성벽인천광역시 남구 문학산에 위치한 삼국 시대 산성인 문학 산성의 복원된 모습,

비류가 부여출신이라는 점에 주목해 비류의 성씨는 해(解)씨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삼국유사》 등의 기록에 따르면 백제의 왕실 성씨는 원래 해(解)씨였다가 나중에 부여(扶餘)씨로 바뀌었다고 하는데, 학자들 중에는 비류집단을 해씨, 온조집단을 부여씨로 보는 사람이 적지 않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비류가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가 없어서 다시 위례에 돌아와 보니 도읍은 안정되고 백성들도 평안하므로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다가 죽었고,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에 귀부하였다고 한다.

『삼국사기』의 기록들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추측할 수 있다. 비류와 온조가 형제로 기술되어 있는 것은 초기 백제의 연맹체적 성격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연맹 초기에는 비류 집단이 연맹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가, 한강 유역의 문화적 기반을 바탕으로 성장한 온조 집단이 왕위를 차지하였던 것을 생각된다. 비류 집단을 흡수한 온조 집단이 목지국(目支國)을 비롯한 마한 세력을 아우르면서 백제가 고대 국가로 성장해 나갔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의 시조 주몽(朱蒙)이 졸본 부여(卒本扶餘) 왕의 둘째 딸과 결혼하여 낳은 두 아들 중 첫째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비류(沸流)와 관련된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백제의 시조 온조왕의 아버지는 추모(鄒牟)인데, 혹은 주몽이라고도 하였다. 주몽은 북부여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 부여에 이르렀다. 부여 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부여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주몽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비류라 하였고, 둘째 아들은 온조라 하였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 유류(孺留)가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 마침내 오간(烏干)ㆍ마려(馬黎) 등 열 명의 신하와 더불어 남쪽으로 갔는데 백성들이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들은 드디어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가 살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고자 하니 열 명의 신하가 간하였다.

“이 강 남쪽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를 띠처럼 띠고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벌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으니 이렇게 하늘이 내려 준 험준함과 지세의 이점은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여기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

비류는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鄒忽)로 돌아가 살았다. 온조는 한수 남쪽의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아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이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기원전 18)이었다.

한편 세주(細註)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시조 비류왕은 아버지는 우태(優台)로 북부여 왕 해부루(解扶婁)의 서손이었고, 어머니는 소서노(召西奴)로 졸본인 연타발(延陀勃)의 딸이었다. 소서노는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비류라 하였고, 둘째는 온조라 하였다. ……주몽이 부여에서 용납되지 못하자 전한 건소(建昭) 2년(기원전 37)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소서노를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주몽은 ……그녀를 총애하고 대접하는 것이 특히 후하였고, 비류 등을 자기 자식처럼 대하였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禮氏)에게서 낳은 아들 유류가 ……태자로 ……왕위를 잇기에 이르렀다. 이에 비류가 동생 온조에게 말하였다.

“처음 대왕이 부여에서의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도망하여 오자 우리 어머니께서 재산을 기울여 나라를 세우는 것을 도와 애쓰고 노력함이 많았다. 대왕이 세상을 떠나시고 나라가 유류에게 속하게 되었으니, 그저 군더더기 살처럼 답답하게 여기에 남아 있는 것은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땅을 택하여 따로 도읍을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

드디어 동생과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두 강을 건너 미추홀에 이르러 살았다.

위 기록들을 통해 볼 때 해상 활동을 하기에 적합하다는 점 때문에 당시 비류가 미추홀, 즉 인천 지역을 근거지로 택했음을 알 수 있다. 옛 인천은 지형적으로 보면 서해로 둘러싸인 작은 반도이다.

옛 인천을 중심으로 경기만에 있는 강화도까지 확대하여 본다면 고대로부터 해상 교통이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인천 지역이 갖는 해상 교통의 이점은 백제 때 중국과의 교류 창구로 기능했던 데에서 알 수 있다. 인천광역시 연수구 옥련동 해안 쪽 선단에 능허대(凌虛臺)라는 곳이 있다. 중국과의 통교를 위한 백제 사신을 실은 배의 출항지였다고 전하는 곳으로 1990년에 인천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8호로 지정되어 보호 중이다. 이 능허대가 인천 지역이 갖는 해상 교통의 이점을 잘 보여 준다고 하겠다.

한편 비류 집단이 오늘날의 인천 지역을 근거지로 택한 또 하나의 이유는 소금 산지의 확보라는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소금은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식품이었고 고대 사회에 있어서 소금 생산지의 확보는 국가적인 관심사였다. 바닷가인 인천은 근래에 이르기까지도 많은 소금을 생산했던 지역으로 유명하였다.

결과적으로 비류가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짬에도 불구하고 미추홀에 정착한 것은 해상활동을 하기에 적합한 곳이란 점, 그리고 소금 생산지와 소금 교역망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백제 미추홀(彌鄒忽 : 여러 설이 있으나 지금의 인천부근으로 추정됨)에서 일어난 왕족의 시조이다. ≪삼국사기≫에는 온조(溫祚)를 시조로 하는 건국설화와 함께 비류가 시조라는 이설도 실려 있다.

이러한 두가지 시조설화가 남게 된 것은 처음 비류는 미추홀에서, 온조는 지금의 서울 한강유역에서 따로 지배세력으로 성장하여 두 집단이 각기 자기 시조를 내세운 결과로 이해된다.

한편 ≪삼국사기≫ 등에는 비류집단의 계보는 전하지 않으며, 백제왕들은 모두 온조계보에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비류계 설화가 오늘날까지 남아 전하는 것은 비류를 시조로 하는 집단이 백제 후기까지 계속 존재하였던 때문으로 여겨진다.

‘비류’라는 말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고구려 송양국(松讓國)을 비류국이라고도 하고 강(江)의 이름도 비류수라 하고 있으며, 또 각훈(覺訓)의 ≪해동고승전 海東高僧傳≫에서는 비류를 ‘피류(避流)’로, 온조를 ‘은조(殷祚)’로 표기하고 있다.

歷史 - 백제(百濟)에서 본 주몽(朱蒙)
백제에서 본 주몽'
BC58년 태어난 주몽(朱蒙)은 22세 때 금와왕(金蛙王)의 아들 대소(帶素)에 쫓겨 부여(扶餘)를 탈출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다.

졸본의 세력가 연타발(延陀勃)의 딸 소서노(召西奴)는 원래 우태(優台)와의 사이에서 아들 비류(沸流)와 온조(溫祚)를 둔 과부였는데 BC37년 주몽은 소서노와 결혼해 도읍을 정하고 고구려(高句麗)를 세우면서 그녀의 집안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두 아들이 있음에도 주몽이 동부여(東夫餘)에 있을 때 예씨 부인(禮氏夫人)에게서 얻은 아들 유리(瑠璃)를 불러 BC19년 후계자로 삼자 섭섭한 소서노는 두 아들을 데리고 남하하여 백제(百濟)를 세웠다. 고구려가 주장하는 설화에 비해 신비적인 요소가 거의 없이 역사적 사실에 훨씬 근접해 있다.

歷史 - 소서노(召西奴) 비류(沸流) 온조(溫祚)
歷史 소서노 비류 온조'
비류(沸流)와 온조(溫祚)는 주몽(朱蒙)의 아들이 아니다. BC37년 주몽은 졸본부여로 망명하였는데 졸본에는 세력가 연타발(延陀勃)의 딸 소서노(召西奴)가 죽은 전 남편 우태(優台)와의 사이에서 낳은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을 데리고 혼자 살았다.

소서노와 결혼해 그 가문의 도움으로 주몽은 고구려를 건국했는데 당시 주몽은 22세 소서노는 29세였으며 비류는 10세 온조는 8세로 추정된다.

주몽은 친자가 아닌 두 아들보다 동부여에 두고 온 유리(瑠璃)를 후계로 생각했으니 근왕파(勤王派)와 소서노파(召西奴派)와 대립이 심했을 테고 결국 BC19년 유리를 불러들여 왕위를 물려주자 소서노는 두 아들을 데리고 새로운 나라를 위해 고구려를 떠난다.

비류국,[ 沸流國 ]
고구려 건국기 서기전 1세기경 지금의 압록강 지류인 동가강( : )유역에 위치하였던 작은 나라.소국().  
이칭/ 별칭/ 유형/ 시대/ 성격/
송양국
지명/지명
고대/삼국/고구려
국가, 초기국가
비류국(沸流國) 또는 다물국(多勿國), 비류나(沸流那)는 압록강의 만주 쪽 지류인 비류수(沸流水, zh:浑江) 상류에 있었던 부족국가이다.

기원전 36년(동명성왕 2년)에 비류국의 왕 송양(松讓)이 고구려 동명성왕에게 항복하였고, 동명성왕은 비류국을 '옛 상태로 되돌린다. 되물린다'는 뜻의 고구려말인 다물(多勿)로 개칭하고 송양을 그곳의 왕으로 임명했다.

'다물'을 옛 땅을 회복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지만, 동명성왕이 송양의 영토를 정복하여 신하로 삼았으나 나중에 나라가 커진 후에 그에게 땅을 되물려 주는 것이므로 '다물'은 '원래 상태로 되돌리다'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주몽(朱蒙)이 비류수(沸流水)에 채소잎이 떠내려옴을 보고 상류에 사람이 살고 있음을 알아 사냥을 하면서 비류국을 찾아가 국왕 송양(松讓)을 만났는데, 송양이 말하기를 우리는 여러 대 동안 이곳에서 왕 노릇을 해왔으나, 땅이 작아 두 임금을 용납하기 어려우며 그대가 도읍을 정한 지 오래지 않으니 우리의 부용(附庸)이 될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이에 주몽이 분노하여 송양과 활쏘기 등으로 겨루었으나 송양이 항거하지 못하고 이듬해 나라를 들어 항복하였다고 한다. 비류국의 지배층은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이동해온 것 같으며, 정착시기가 고구려보다 빨라 선주(先住)토착세력으로서 우세한 입장에 있었던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또한, ‘송양’의 음이 고구려 5부의 하나인 소노(消奴)와 유사함을 근거로 송양에 대한 주몽의 승리를《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구려조에 나오는 소노부로부터 계루부(桂婁部)로의 왕실교체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추정도 있다.

초기 고구려세력에 병합된 비류국은 송양의 딸이 유리왕의 비로 들어가는 등 주몽집단과 혼인관계를 맺으면서 고구려 국가의 성장과 함께 유력한 지배집단의 하나가 되고 있다. 다물국(多勿國) 또는 비류나(沸流那)로 기록되기도 한다,

역대 국왕,
대수/ 호칭/ 성명/ 재위기간/
1다물후(多勿侯)송양(松讓)? ~ ?
이 글은 한국사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분류: 
헌대,

미추홀구 향토 문화백과,
  • 삶의 터전(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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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방식(생활·민속)
  • 삶의 이야기(구비 전승·언어·문학)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서 전해오는 생활과 풍습.

항목 ID/ 한자/ 분야/ 유형/ 지역/
GC04700027
民俗
생활·민속/민속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민속은 민간에 전승되는 기층문화 혹은 잔존(殘存) 문화로 ‘민간의 전승’ 또는 ‘민간의 풍속’이란 말의 줄임말이다. 민속은 민중의 생활인 동시에 그 생활의 지속 또는 반복에서 이루어지는 공통의 습속을 말하기도 한다. 따라서 민속은 세시 풍속이나 의례, 신앙, 언어, 노동 등 삶의 전 분야를 포괄하고 있으며, 또한 특정 지역의 민속은 그 지역의 자연 환경이나 인문 환경 등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고,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지속과 변화 과정을 겪게 된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는 인천광역시의 서남부에 위치하며 모두 24개동을 관할하고 있다. 지형은 준평원 위에 남아 있는 잔구성(殘丘性) 산지인 문학산과 청량산이 중앙부에 솟아 있고, 동부 지역에는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주안동에서 발원한 승기천이 남쪽으로 흘러 황해로 흘러가며 하천 연안에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그러나 서부에는 간석지가 발달하여 한때는 염전으로 이용되었으나 현재는 공업 단지로 변모하고 있다. 이렇듯 인천광역시 미추홀구는 내륙과 바다가 인접한 지리 및 지형적 특징을 지니고 있어 다양한 삶의 토대 위에서 형성된 여러 민속이 오랜 역사를 기반으로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민속 신앙은 인간의 종교적인 심성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한 민간의 종교이다. 기독교와 불교 등의 일반적인 종교와 달리 특별한 교리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민중들의 기층(基層)에 자리 잡아 전승되고 있는 신앙이 민속 신앙에 해당된다. 마을 신앙을 비롯해 가정 신앙, 민간에서 행하는 미신적인 신앙 관습인 속신(俗信)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의 민속 신앙 중에는 동막동 도당굿이 있다. 동막동 도당굿은 조선 시대에 정립된 것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도당신을 모신 당집에서 3일 동안 주야로 도당굿을 지내고 있다. 또한 안관당제라 불리는 당제가 지내지기도 하는데 안관당제는 김민선(金敏善)이라는 인물에게 지내는 당제이다. 김민선은 임진왜란 때 인천도호부 부사로 인천을 지키다 순직한 인물로, 김민선을 추모하기 위해 문학산에서 당제를 지내게 된 것이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는 국가 무형 문화재 제82-나호인 ‘서해안 배연신굿 및 대동굿’[서해안 풍어제]가 있다. 김금화 만신[무녀(巫女)를 높여 이르는 말]으로 상징되는 서해안 풍어제는 1985년 2월 1일에 국가 무형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풍어제는 어업을 생업으로 하는 바닷가 마을이나 배를 부리는 집에서 매년 또는 몇 년에 한 번씩 풍어를 기원하기 위하여 행하는 굿을 말한다.

서해안 풍어제는 크게 ‘배연신굿’과 ‘대동굿’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배연신굿이란 선주(船主)들이 자기 배와 선원의 안전 그리고 풍어를 기원하기 위하여 무녀의 관장 하에 배 위에서 행하는 굿을 말한다. 이에 비해 대동굿은 마을 사람들이 해상에서의 안전과 풍어, 협동과 화목을 기원하기 위하여 공동으로 비용을 마련하여 행하던 마을 공동의 제사 의식을 말한다.

굿의 진행 과정은 배연신굿의 경우 ‘신청울림’[신을 청하는 굿]을 시작으로 ‘강변굿’까지 12거리로 구성되어 있고, 대동굿은 ‘신청울림’을 시작으로 해상에서 생명을 잃은 넋을 달래고 마을의 액운을 띠배에 실어 보내는 ‘강변 수살 용신 송신굿’까지 24거리로 구성되어 있다.

세시 풍속은 1년을 주기로 매 시기마다 행해지던 풍속을 말하는데, 농업을 중시하던 전통 사회에서는 농사력에 맞춘 다양한 세시풍속이 행해졌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의 세시 풍속 역시 이러한 양상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바다와 인접해 있어 어업에 영향을 받은 세시 풍속 역시 전승되고 있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는 정월, 정월 대보름단오추석 등 특정 시기에 맞는 다양한 세시 풍속이 전해온다. 정월에는 토정비결연날리기윷놀이 등이, 정월 대보름에는 부럼, 오곡밥 먹기, 더위팔기 등이 행해졌다. 사월 초파일에는 절을 찾아 연등을 걸기도 했으며, 오월 단오에는 그네뛰기와 씨름을 하였으며, 여자들은 창포에 머리를 감았다. 추석에는 차례를 지내고 동지에는 팥죽을 먹기도 하였다. 섣달그믐에는 눈썹이 흰색으로 변한다고 해서 잠을 자지 않는 ‘수세(守歲)’ 풍속도 있었다.

민속놀이는 각 지역의 풍속과 생활 모습이 담긴 민중들의 놀이로 민속 오락, 민속 경기, 민속 유희, 민속 예능, 전승 놀이, 향토 오락 등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민속놀이의 개념에는 싸움을 뜻하는 경쟁의식을 비롯해서 흥을 뜻하는 유희성, 즐김을 나타내는 오락성,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성이 복합적으로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는 다양한 민속놀이가 전해져 온다. 일정한 시기에만 행해지는 세시 놀이를 비롯해 연중 행해지는 비 세시 놀이, 그리고 투전과 같은 어른 놀이, 땅따먹기, 꼬리따기 같은 어린이 놀이 전해온다.

이들 놀이 외에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는 국가 무형 문화재 제61호인 은율 탈춤이 전승되고 있다. 은율 탈춤은 1978년 2월 23일에 국가 무형 문화재로 지정된 것으로 황해도 은율 지방에서 행해지던 민속극이다. 은율 탈춤은 봉산 탈춤, 강령 탈춤과 함께 ‘해서 탈춤’에 속하며 사월 초파일, 오월 단오, 칠월 백중에 행해졌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탈춤은 약 200~300년 전에 난리를 피하기 위하여 섬으로 갔던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올 때 얼굴을 내놓기가 부끄러워 탈을 쓴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민속 무용은 민속의 특수성과 향토의 특색을 갖추고 옛날부터 전해지는 전통 무용을 말한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서 전해오는 민속 무용에는 2002년 2월 4일 인천광역시 무형 문화재 10-1호로 지정된 ‘범패와 작법무(바라춤)’가 있다. 이 두 민속 무용은 불교의 의례 과정에서 행하던 무용인데, 작법의 하나로 양손에 바라를 들고 빠른 동작으로 전진과 후퇴, 회전을 하며 활발하게 추는 춤이다. 불가에서는 모든 악귀를 물리치고 도량을 청정하게 하며 마음을 정화하려는 뜻에서 춘다고 한다.

바라춤의 종류는 천수(千手)바라춤, 명(鳴)바라춤, 사다라니(四茶羅尼)바라춤, 관욕게(灌浴偈)바라춤, 먹[막]바라춤, 내림(來臨)바라춤 등 6가지가 있다. 하얀 장삼에 녹색 띠를 두른 무복(舞服)에 두 손에 바라를 들고 장중하면서도 무겁지 않게 몸을 놀리는 바라춤은 색감(色感)과 움직임이 모두 들뜨지 않는 속에서 화려함을 끌어낸다. 발은 외로 도나 언제나 고무래 ‘정(丁)’자로 떼어 놓고 무릎과 허리를 동시에 굴절시키며 바라를 놀린다.

무릎과 허리 놀림이 덩실덩실하고 발놀림이 또박또박 장중하다. 바라를 맞부딪치거나 비벼서 내는 소리가 춤의 리듬 속에 장중한 멋을 더해 주며 바라가 지닌 쇳소리는 종이나 요령처럼 쨍그랑 거리지도, 징처럼 크지도 않으면서 부드럽고 쓰다듬는 맛이 난다. 최근 속화(俗化)되어 임의로 무대에 올려 지기도 하는데, 이때에는 반염불굿거리 장단을 쓰기도 한다.

민속 공예란 각 지역마다 전승되어온 전통적 기법과 그 고장 산물을 이용하여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만들어내는 조형 예술을 말한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는 여러 형태의 민속 공예가 전해지는데, 화각장(畫角匠)과 완초장(莞草匠) , 단소장(短簫匠)이 그것이다.

2008년 12월 15일 인천광역시 지정 무형 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된 완초장은 왕골, 즉 완초를 재배한 후에 선별·가공 기능, 완초 염색 처리 기능, 염색 완초의 적절한 배열로 미적인 요소를 살려내는 기능까지 모두 해낼 수 있는 장인(匠人)을 말한다. 완초 공예품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신라 때부터 사용했다고 기록됐다.

고려 때에는 사직신인 후토씨(后土氏)와 후직씨(后稷氏)의 신위에 왕골자리를 깔았으며 왕실에서는 문석(文席), 채석(彩席), 화문대석(花文大席)을 사용했다. 조선 시대에는 관청에서 민간에 공납을 요구하는 품목 중 하나로 왕골을 포함시켰는데 이것은 완초 공예품이 매우 귀한 물건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완초장 보유자에 의해 완초 공예 기능인 손을 이용한 엮기법, 즉 편조법으로 화방석, 그릇, 팔각형 함 등 아름다움과 쓰임새가 결합된 생활 속의 공예품이 만들어지고 있다.

인천광역시 무형 문화재 제2호인 단소장은 1990년 11월 9일에 지정된 것이다. 단소는 음색이 청아하여 독주 악기로 손색이 없으며 연주하기 간편하고 소리내기도 어렵지 않아 누구나 연주하기 좋은 악기이다. 단소는 대나무로 만드는데, 우리나라는 대나무 종류도 많고 양도 풍부하여 어떤 대나무를 사용해도 무방하지만 오죽(烏竹)을 즐겨 쓴다.

제작 과정은 지름 20㎜, 길이 700㎜ 정도의 대나무를 농도 짙은 소금물에 10시간 정도 삶아 기름 성분을 제거하고 절인 다음, 열을 가하여 구부러진 부분을 바로 잡고 다시 10분 정도 찬물에 담근다. 그 후 바람이 잘 통하는 그늘에서 3개월 이상 건조시킨 후 길이 500㎜로 잘라 속을 관통하는 내공(內孔)을 뚫고 다시 420㎜로 자른 다음 반달 모양의 입김을 불어 넣는 구멍인 취구(吹口)를 만들고 손가락으로 막아 연주하는 지공(指孔)을 뚫어 완성한다.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의 민속을 살펴보면 지리적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 많음을 알 수 있다. 황해도와 인접해 있는 연유로 서해안 풍어제와 은율탈춤이 전해져 오고 있는가 하면, 바다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갯가노래와 뱃노래가 전해오는 것 등이 모두 이와 관련되어 있다. 이 지역 민속의 또 다른 특징은 기능과 관련된 다양한 문화재가 전승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민속은 시대에 따라 지속적으로 변화한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지역의 민속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도시화 과정에서 사라진 민속 또한 적지 않으며, 반대로 새로운 형태의 민속이 생겨나기도 한다. 따라서 전통의 민속을 계승시키는 일과 새로운 민속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참조항목

역참조항목

카테고리
출처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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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콘텐츠닷컴
[삼국사기』
[고구려국호고」(서울대학교론문집 인문사회과학』 3, 1956 ;『한국고대사연구』, 1976)
[한국사강좌』-고대편-(일조각, 1982)
[고구려 초기의 지방통치제도」(역사학보』 94·95합집, 198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encykorea.aks.ac.kr/]
[비류국 [沸流國]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지식연계]


#비류 [沸流] #백제를 세웠다는 이야기 #비류가 서기전 18년에 죽었다고 보기도 한다 #역사적 사건을 빗댄 건국설화 3비류와 온조를 개인이 아닌 집단의 상징으로 해석하는 것이 보통이며 #비류집단 #온조집단 #경쟁에서 온조집단이 승리했다고 보는 것이 보통이다 #비류가 부여출신이라는 점에 주목해 비류의 성씨는 해(解)씨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삼국유사 등의 기록 #백제의 왕실 성씨는 원래 해(解)씨였다가 나중에 부여(扶餘)씨 #학자들 중에는 비류집단을 해씨 #온조집단을 부여씨로 보는 사람 #역사 #아시아사 #한국사 #삼국시대 #인물 #정치 #한국정치 #동명성왕 #온조왕 #유리왕 #백제의 건국설화 #소서노 #문학산성 #백제의 건국 #연타발 #비류는 졸본사람 #우태()와 소서노(西) 사이에서 태어나 아우 온조와 함께 자랐으며 #아버지 우태가 죽은 뒤 어머니 소서노가 주몽과 재혼 #주몽이 부여에서 낳은 아들인 유유()를 태자로 삼고 왕위를 잇게 하였다 #비류는 아우인 온조와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패수(浿)와 대수()를 건너 미추홀로 왔으며 #나라를 세우고 왕위에 올랐다 #비류는 북부여()출신의 주몽과 졸본부여()왕의 둘째딸 사이에서 태어나 아우인 온조와 함께 자랐는데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 유리()가 와서 태자가 되자 #온조와 함께 따르는 신하들을 거느리고 한강유역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신하들이 모두 한강 남쪽에 자리잡자고 권하고 #아우인 온조도 그 말에 따라 하남위례성()에 자리잡고 싶어했으나 #비류는 바닷가에서 살고 싶어해 백성을 나눠 미추홀()로 가서 살았는데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자신이 거느린 백성은 편히 살지 못하는 반면 #온조의 백성들은 편히 살게 되자 부끄럽게 여겨 후회하다 죽었다고 한다. #주몽() #비류수() #비류국 [沸流國] #고구려국호 #고구려 초기 #백제건국 #세시 풍속

고주몽,

고주몽,

고구려 주몽신화와 부여 동명신화,

고구려를 건국한 시조. 동명성왕. 동부여 금와왕은 태백산 우발수에서 유화를 만난다. 유화는 하백의 딸로 천제의 아들 해모수와 정을 통한 후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우발수에 와서 살고 있었다. 금와는 유화를 궁중에 머물게 하였다. 유화가 알을 낳으니 그 알에서 남자아이가 태어났다. 이 아이는 활을 잘 쏘므로 주몽이라고 하였다. 영특하고 총명하여 금와왕의 아들들이 시기하고 죽이려 하자 B.C. 37년 주몽은 졸본으로 와서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시대 ▶ 기원전 58년~기원전 19년
재위 기간 ▶ 기원전 37년~기원전 19년
국정 운영 스타일 ▶ 정복 전쟁으로 영토를 넓힌다!
가장 기뻤을 때 ▶ 고구려를 세웠을 때
나에게 의미 있는 장소 ▶ 졸본 부여
연관검색어 ▶ 고구려, 해모수, 유화 부인, 소서노
역사적 중요도 ▶ ★★★★★
시험 출제 빈도 ▶ 높음,

고구려의 왕,
고구려에서는 해마다 10월이면 큰 동굴에서 하늘을 향해 제사를 지냈다.      - 왕이 직접 주재한 동맹제는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과 그의 어머니 유화부인을 하늘로부터 맞이했고 유화로 대표되는 동굴의 수신을 압록강가로 모시고 나와 강가에서 제를 지냈다.

** 수신(隧神) : 여성의 형상을 나무로 깍아 만든 신상,  -그날밤 사람들은 풍성하게 차린 음식과 술을 먹고 마시며 밤새도록 춤과 노래를 즐겼다.

- 진수가 쓴 '삼국지 위지동이전'을 보면 10월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나라사람들이 크게 모여서 행사를 하는데 이것을 동맹이라고 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수혈에서 수신을 맞아 동쪽의 물가에서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다.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데 나라에 큰 대회를 열어 이름을 ‘동맹東盟’이라 한다. 그 나라의 동쪽에 큰 굴이 있는데 그것을 수혈隧穴이라 부른다. 10월에 온 나라에서 크게 모여 수신隧神을 맞이하여 나라의 동쪽 [江]위에 모시고 가 제사를 지내는데, 나무로 만든 수신을 신의 좌석에 모신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기록으로 나오는 수혈이 1983년 5월에 발견되었다. 고구려의 수도였던 중국 집안시 인근의 국내성 동쪽 산을 올라가는 곳에서 동굴을 발견하였다. 하늘로 통하는 형상을 가진 동굴이었다. 동맹제에서 신을 맞이했던 수혈로 추정된다,



- 고구려의 동맹제는 제천의례이므로 하늘에 대한 제사는 주몽의 아버지를 수신을 모시는 의례는 주몽의 어머니에 대한 제사였다. 천신과 수신의 후예라는 것을 체험하는 행사였다. 

 - 주몽의 어머니인 유화부인은 수신이자 농업신의 성격도 가지고 있다. 주몽이 부여를 떠날 때 곡식의 종자를 전해주었는데  유화부인을 농업의 신으로 섬기면서 나라의 풍요를 기원하였다.

고구려 주몽신화와 부여 동명신화,
고구려 주몽신화,
 - 백발백중, 한 번에 사슴을 잡는 활솜씨,  
부여의 금와왕 일곱 왕자들은 모두 주몽을 시기했다. 이 모든 이야기를 어머니인 유화부인에게 털어놓으며 주몽은 부여를 떠날 비책을 준비한다.

- 마구간에서 일하던 주몽은 좋은 말을 골라 말의 혀에 바늘을 꽃아두었다. 바늘때문에 제대로 먹지못한 말은 비쩍마르게 되었고 금와왕은 그 말을 주몽에게 주었다.

- 그가 활로 물을 치자, 물고기들과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 졸본 땅에 이른 주몽은 초막을 짓고 나라를 세우니 그 이름을 고구려라 하였다.

부여 동명신화- 고대사의 무대였던 만주평원의 젖줄 송화강,

송화강 유역에 사는 주민들 사이에 아주 오래전부터 특별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신화 같은 이야기였어요.

한 나그네가 급하게 강을 건너려고 했는데 배가 없었어요. 근데 갑자기 강가에서 큰 자라 한 마리가 오더니 그를 등에 지고 강을 건넜다고 합니다.

-쪼우펑궈, 조원현 팔가촌(2010년도 인터뷰)-
 - 이 이야기의 기원이 고구려의 주몽신화인지  아니면 부여의 동명왕신화인지 확실하지 않다.

- 부여는 송화강유역 평야지대에서 5부족 연맹체로 이루어졌다. 부여는 사방 2천여 리, 인구는 8만 호에 달하였다. 당시에 고구려가 3만 호였으므로 고구려에 비하면 강대한 나라였다.



- 부여는 2, 3세기에 동북아시아 초강대국으로 만주평야 일대에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우리 민족사에 엄연히 존재하나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역대 한민족 국가 존속기간,
          - 고   려 : 474년 : 918년 ∼ 1392년
          - 조   선 : 518년, 1392 ∼ 1910년
          - 백   제 : 678년, 기원전 18년 ∼ 서기 660년
          - 고구려 : 705년, 기원전 37년 ∼ 서기 668년
          - 부   여 : 700여 년, 기원전 2세기 경 ∼ 서기 494년
          - 신   라 : 992년, 기원전 57년 ∼ 서기 935년
동명신화,   - 하늘로부터 달걀 같은 기운을 받아 아이를 임신하는 시종 돼지우리와 마구간에 버려진 아기는 동물들이 숨을 불어넣어 생명을 구한다.  

동명이라 이름 지은 아이는 노비로 키워졌고 활솜씨가 매우 뛰어났다. 아이에게 나라를 빼앗길까 두려워진 왕은 동명을 죽이려 하고 남쪽으로 달아난 동명은 엄호구 강에 이른다.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고  마침내 동명은 강을 건너 부여를 건국한다.

- 고구려는 부여로부터 갈라져나왔으므로 부여의 동명신화가 먼저 만들어졌다.  고구려 주몽신화는 같은 신화의 구조를 가진 부여의 동명신화를 가져와 만들었다.

- 부여 동명신화와 고구려 주몽신화 비교,
구분
동명신화
주몽신화
탄생
하늘에서 달걀 같은 기운을 받음유화의 품에 해가 비쳐 임신
시련
돼지우리와 마구간에 버려짐마구간과 깊은 산에 버려짐
성장 과정
노비로 키워져 마구간에서 일함마구간에서 일함
탈출 배경
활솜씨가 뛰어나 왕이 죽이려 함활솜씨가 뛰어나 왕자들에게 시기를 받음
위기
엄호수 강에 이르자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들이 다리를 만들어 줌
강에 이르자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들이 다리를 만들어 줌
'해동역사, - 한치윤은 '에서,

동명왕은 부여의 임금이고 주몽은 고구려의 임금이다. 그런데 김부식이 삼국사기에 동명성왕은 성이 고씨이고 이름은 주몽이라 하여  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이때문에 다시는 부여의 동명왕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면서 김부식의 삼국사기로 인하여 합했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동명은 부여의 임금이고 주몽은 고구려의 임금이다. 그런데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의 구려본기에는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은 성이 고씨이고 휘가 주몽이다'하여 비로소 동명과 주몽을 합하여서 한 사람으로 만들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시는 부여의 동명왕이 있는지를 알지 못하게 하였다.

동명이라고 하는 것은 부여족 전체 족속 중에서 가장 위대한 부여족 전체 시조를 상징한다. 고구려사람들이 건국시조인 주몽을 동명이라고 불렀을 것으로 보인다. 다른 신화적 구조를 택할 수 있었음에도 부여의 동명신화의 줄거리를 채택한 이유는 동명으로 상징되는 부여의 정통성이 고구려에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으로 보  고구려가 군사강국으로 7백년을 지탱해왔다고 하지만 강대국 고구려의 정신적 기반에는 고구려 신화가 있었다.

 - 주몽신화는 12세기 고려시대에 와서 다시 부활을 한다.  이규보가 동명왕편이라고 하는 대서사시를 남긴다. 고려 중기까지 김부식의 삼국사기만해도 신라중심의 역사의식이 강했는데 고려 후기로 오면 고구려 계승의식이 강하게 발현되어 주몽 신화를 통해 그 당시 고려사람들에게 민족적 자긍심을 심어주었다.

** 동명왕편 :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가 고구려 주몽 신화를 엮은 한시로 총 1,410자에 달하는 대서사시 처음에는 믿을 수가 없어 괴상하고 황당한 이야기려니 생각하였다. 여러 번 거듭 읽어 음미하면서 차차로 그 근원을 찾아가니 이는 환상이 아니오 성스러움이며 귀신이 아니고 신이었다.  -이규보의 '동명왕편' 서문 중-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이병주 소설 '산하' 중-

상징성,
우리는 이 신화에 등장하는 몇 가지의 소재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 하겠다. 우선 해와 알(卵)과 활의 의미이다. 햇빛이 유화의 몸을 비추어 잉태한 것은 하늘과의 연관이 지속되었음을 의미하며, 그 결과 알을 낳는데, 알은 세계를 상징한다. 세계가 깨뜨려져서 하나의 새로운 질서를 세우게 되는 것이다. 그 알을 새나 짐승이 보호한다는 것은 신성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의 제유적 표현이며, 활과 화살은 바로 제왕의 상징이다. 화살은 햇살과 같은 의미로 활을 잘 쏜다는 것은 해를 거느려 제압하는 존재, 곧 왕인 것이다. 서양이나 동양이나 화살은 천상과 지상을 연결하는 매개체로서 상징되어 내려오는 방향에서는 번개나 햇살, 빗줄기처럼 신의 권능을 의미했었다. 또 활은 달의 형태로 풍요, 강함, 생명력 등을, 화살은 형태와 내쏘는 기능에서 남성을 상징하기도 했었다. 따라서 햇빛과 알, 그리고 활은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영웅의 탄생을 예고하는 상징성을 가지는 것이다. 한편 말(馬)이 주몽과 상당히 밀착된 관계에서 등장하고 있음은 유목민족적인 일면을 드러내는 것이라 여겨진다.


오녀산성높다란 절벽 위의 분지에 만든 오녀산성. 학자들은 이곳을 고구려의 첫 수도로 짐작하고 있다. 


고구려의 성립,
주몽은 졸본(卒本: 일설에는 紇升骨城)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비류수(沸流水) 위에 집을 짓고 살면서 서기전 37년에 나라를 세워 고구려라 하였다. 왕위에 올라 서기전 36년(동명성왕 2)에 비류국(沸流國) 송양왕(松壤王)의 항복을 받고, 서기전 33년에는 태백산 동남쪽의 행인국(荇人國)을 쳐서 그 땅을 빼앗아 성읍(城邑)으로 삼았고, 서기전 28년에는 북옥저를 멸망시켰다.

고구려의 성립을 실증주의적 역사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일찍이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킨 후 옛 고조선 지역은 한사군이 설치되어 그들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압록강 중류일대에서는 훗날 고구려라는 고대 동아시아 강국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정치․사회적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었다. 지리적으로 압록강 중류지역은 좁은 평야를 중심으로 깊은 계곡과 험한 산이 있는데, 서북쪽으로 혼강을 건너 요동지역에 통하고, 동으로는 독로강을 넘어 개마고원과 동해안으로 통해 동서 교통의 중간지가 될 수 있었다. 그 뿐 아니라, 서남쪽으로는 황해로 이어지고 남쪽은 대동강과 재령강 유역의 평야지대와 만나고 북쪽에서는 송화강 유역의 대평원지대나 요하 상류의 초원지대로 통할 수 있었다. 고구려인들은 이러한 지리적 조건을 충분히 활용하며 발전해 나갔다.

기원전 3세기 중엽에서 기원전 2세기 초 사이에 압록강 중류 지역에서는 주변의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주민집단이 형성되었으며 이들이 보다 정치적으로 성장하여 ‘예군남려’, ‘구려’와 같은 정치세력으로 기록상에 등장하고 있다. 이들은 주로 강가나 계곡에 자리 잡은 지역집단이었다. 그래서 이들 지역집단을 ‘나(那)’라고 불렀는데 이는 ‘노’, ‘내’와 음이 통하고 ‘천’, ‘양’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땅(地)이나 내(川), 또는 냇가(川邊)의 평야를 뜻한다. 점차 여러 지역집단들이 생겨나게 되자, 자신들을 다른 집단과 구별해 부를 수 있는 이름을 붙이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조나(藻那), 주나(朱那), 소노(消奴), 관노(官奴), 절노(絶奴), 순노(順奴) 등과 같은 집단의 명칭이 생겨나게 되었고 훗날 이들 중 가장 유력한 5개의 나가 5개의 부를 이루면서 고구려의 핵심세력으로 성장하였다.

나집단은 철기 문화에 바탕을 두고 성장하였다. 기원전 3세기경부터 보급된 철제 농기구는 토지이용과 수확의 효율성을 높이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리하여 농업생산력이 발전하자 사회경제적으로 계층화가 더욱 진전되어 나갔고, 이를 바탕으로 철제농공구를 집중적으로 소유하는 집단이 생겨나면서 소집단간의 통합도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 같은 과정을 거치며 성장한 지역정치집단이 바로 나집단이다.

그런데 기원전 2세기 중엽, 이들이 거주하던 압록강 중류지역에 위만조선과 한(漢)의 영향력이 뻗어오기 시작하였다. 특히, 위만조선은 기원전 2세기 초에 진번, 임둔 등을 복속시켜 세력을 키운 후, 기원전 2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주변 집단과 중국의 교통을 통제하고 나섰다. 그러자, 압록강 중류일대의 나집단들은 유력한 집단을 중심으로 모일 수밖에 없었고 그 중 한나라에 의지하게 된다. 역사서에는 기원전 128년 한에 투항한 예군남려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들이 투항하자 한나라는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하고 도로를 개설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창해군을 설치하려는 한나라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대신해서 이후에 한이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나서야 압록강 중류 일대에 현도군을 설치하였다.

예군남려 집단은 강력한 통치조직을 가진 국가형태가 아니라, 각 지역집단들이 공동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기 위해 결성된 연맹체와 같은 형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요동군에서 동해에 이르는 교통로 상에 분포하는 집단들의 연맹체에서 압록강 중류지역의 주민집단은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던 중에 한이 설치하려던 창해군이 계획만으로 끝나게 되자, 압록강 중류일대의 나집단은 안으로 자신들의 통합을 강화시키면서 주변을 복속시키는 데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주변 요새지마다 ‘구루’나 ‘홀’이라 불리는 성을 쌓았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이 지역집단을 주변지역 사람들이 ‘구려(句驪)’라 부르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한 예로서, 기원전 121년에 한이 압록강 중류일대에 설치한 현도군의 여러 현 가운데에 고구려현이 있음을 들 수 있다.

단일한 정치 세력으로 성장해 가던 압록강 중류 일대의 이들 ‘구려’집단은 현도군의 설치로 한의 직접 지배를 받게 된다. 그러자 압록강 중류 일대일대의 나집단들은 다시 유력한 집단을 중심으로 뭉쳐 연맹체를 형성하였고, 한군현과 대항하면서 그 힘을 키워 마침내 이들을 이 지역에서 몰아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압록강 중류일대에는 이전의 예군남려 집단보다 강력하게 결합한 연맹체가 등장하였는데, 그 연맹체는 정치적 수장이 있고 무장력을 갖춘 독자적 정치세력들이 결집한 것이었다.

처음 이 연맹체의 중심이 된 것은 소노집단(消奴集團)이었는데, 이들은 농경과 군사 방어에 유리한 환인(桓仁) 일대에 기반을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시기에는 내부의 성장을 바탕으로 각 집단들 간에 통합과 복속이 진행되었다. 또한 일찍이 이 지역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 부여계 이주민 집단도 이 시기에 활발하게 이동해 왔고, 이들이 토착세력과 연합하면서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세력이 주몽집단이다. 그리고 혼강(渾江)의 졸본(卒本) 지역에 정착해 그곳의 토착세력과 연합하여 세력을 키워나간 주몽집단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마침내 소노집단을 누르고 연맹체의 새로운 중심에 서게 되니 이들이 바로 계루집단(桂婁集團)이다.

계루집단은 현도군과 가까운 위치에 있는 환인지역으로부터 국내지역으로 천도한 후, 그 지역에서 강력한 정치세력으로서 자리 잡은 후, 다른 정치세력을 통제하는 정책을 펼쳐 나갔다. 그래서 소노집단과 계루 집단 외에 독로강 아래와 운봉댐 위의 압록강 유역과 그 지류 일대에 있었던 대표적인 정치체들을 자신의 하부단위정치체로 편재하였다. 한편, 당시의 한군현은 이들의 내부 통합을 방해하기 위해 각 지역집단에게 필요한 물자나 작위를 주어 회유하는 정책과 무력을 동원하는 정책을 함께 쓰고 있었다. 그러나 계루집단은 한군현의 이 같은 분리 통제책에도 강력하게 대응하여, 정치체들이 한군현과 개별적으로 맺어오던 대외교섭권을 일원화시켰다. 이는 비로소 이 지역 전체를 아우르며 강력한 힘으로 다스릴 수 있는 정치적 힘, 즉 국가권력이 등장했음을 뜻한다. 그리고 고구려가 이같이 강력한 통치력을 갖게 된 시기는 태조대왕 때 즈음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동명성왕(고주몽)
고구려를 건국하다,
알에서 태어났으며, 활을 잘 쏘았어요. 부인 소서노의 도움을 받아 고구려를 세웠어요.
출생-사망/ 재위 기간/
기원전 58년 ~ 기원전 19년
기원전 37년 ~ 기원전 19년
동명성왕/ 동부여의 왕, 유화 부인을 만나다/ 유화 부인이 알을 낳다/ 주몽, 금와왕 아들들의 질투를 받다/ 왕자들의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부여를 떠나다/ 대소 왕자가 보낸 군사로 위기에 처하다/ 졸본 부여의 공주인 소서노를 만나다/ 소서노, 주몽을 도와 고구려를 건국하다/ 주몽, 예씨 부인의 아들 유리를 태자로 삼다소서노가 두 아들을 데리고 떠나다/ 고종훈의 5분 강의 - 동명성왕(고주몽)

동부여의 왕, 유화 부인,
어느 날, (두만강 유역) 동부여의 왕이었던 금와왕이 행차를 하다가 슬픈 표정을 한 유화 부인을 만나게 되었어요.
유화는 강의 신 하백의 딸이었답니다. 금와왕은 슬픈 표정을 한 유화 부인에게 이유를 물어 보았지요.
“저는 북부여의 왕이자, 천제(하느님)의 아들인 해모수와 사랑에 빠졌어요. 하지만 아버지인 강의 신 하백은 제가 허락도 없이 결혼을 했다며 절 내쫓았습니다.”라고 대답했어요.

유화 부인이 알을 낳다,
금와왕은 사정이 딱한 유화를 자신의 궁궐로 데리고 왔다.
그리고 얼마 후, 유화 부인은 동부여의 궁궐에서 알을 낳게 되었어요. 그 알에서 태어난 사내아이가 바로 주몽입니다. 주몽은 부여 말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주몽, 금와왕 아들들의 질투를 받다,

금와왕에게는 대소를 비롯한 많은 왕자들이 있었는데, 금와왕의 맏아들인 대소 왕자를 비롯한 많은 왕자들이 주몽을 질투해 괴롭혔어요.

주몽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고 못하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주몽에게 왕의 자리를 빼앗길까봐 두려웠던 거죠.

왕자들의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부여를 떠나,,,
주몽은 왕자들의 괴롭힘이 너무 심해 부여를 떠날 결심을 했습니다. 이때 주몽은 이미 결혼을 해 임신한 아내 예씨 부인이 있었어요.

하지만 주몽은 아내와 자식을 데리고 부여를 떠나기는 힘든 상황이었지요. 어서 빨리 도망가야 하는 처지였거든요. 결국 주몽은 예씨 부인과 생이별을 하게 되었답니다.

대소 왕자가 보낸 군사로 위기에 처하다,
주몽은 자기를 따르는 오이, 마리, 협보 등의 신하들을 이끌고 동부여를 떠나 남쪽으로 향했어요. 그런데 이 과정에서 대소가 보낸 군대가 주몽 일행을 바짝 쫓았어요.

주몽은 강 앞에 다다랐지만, 배가 없었어요. 주몽은 발을 동동 구르며 큰 소리로 외쳤어요.

“내가 강을 건널 수 있게 해다오!”
그러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주었답니다.

졸본 부여의 공주인 소서노 [召西奴].
백제의 건국설화에 나오는 인물로서, 비류(沸流)와 온조(溫祚)의 어머니이다.
백제의 건국설화는 여러 가지가 전하는데, 그중 널리 알려진 온조설화에는 소서노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주몽(朱蒙)이 북부여로부터 난을 피해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자 아들 없이 딸만 셋을 둔 졸본부여의 왕이 주몽을 둘째 사위로 삼고 왕위를 잇게 하였으며, 부부는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을 낳아 길렀다는 이야기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비류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꾸민 비류설화에는 '백제의 시조는 비류왕(沸流王)으로서, 그의 아버지인 우태(優台)는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庶孫)이며, 어머니인 소서노(召西奴)는 졸본사람 연타발(延陀勃)의 딸이다. 소서노가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가서 두 아들을 낳으니, 맏아들이 비류이고 둘째 아들이 온조이다. 우태가 죽자 소서노는 과부가 되어 졸본에서 살다가 주몽과 재혼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리고 뒤이어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禮氏)에게서 낳은 아들인 유유(孺留)가 오자 그를 세워 태자로 삼고 왕위를 잇게 하였다. 이에 비류가 아우인 온조에게 이르기를 "처음에 대왕께서 부여의 난을 피해 이곳으로 도망왔을 때 우리 어머니가 집안의 재산을 기울여가며 도와 방업(邦業)을 이루니, 그 노고가 많았다. 그런데 대왕께서 돌아가시자 국가가 유유의 소유로 되었으니 우리가 이곳에서는 한낫 혹과 같아서 답답할 뿐이다.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땅을 택하여 따로 국도(國都)를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다. 드디어 아우와 함께 무리를 이끌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를 건너 미추홀(彌鄒忽)에 이르러 살았다'고 해서 주몽이 나라를 세울 때 소서노가 경제적으로 많이 도왔다고 적혀 있다.

한편, 《삼국사기》에는 온조왕 13년에 '왕의 어머니가 죽었는데 나이가 61세였다'는 기록도 있다. 이에 소서노가 아들들과 함께 졸본부여 곧 고구려를 떠나 한강유역으로 내려왔으며, 백제를 세운지 13년째 되던 해에 죽었다고 풀이하기도 한다.
“소서노는 조선 역사상 유일한 창업 여대왕일 뿐더러,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세운 사람”이다.단재 신채호 [조선상고사] 중에서
소서노(召西奴)는 졸본부여의 5부족 가운데 하나인 계루부의 공주였다. 일설에는 유력자인 연타발의 딸이었다고 한다. 북부여 왕 해부루의 서손(庶孫)인 우태와 혼인했다가 우태가 일찍 죽자 비류와 온조라는 두 아들을 키우고 있었다. 나이는 [삼국사기]에서는 서른 살 즈음이라 하고, [조선상고사]에서는 그보다 일곱 살 정도 많았다고 전한다.

한국사 유일한 창업 여대왕 소서노, 주몽과 함께 고구려 건국 주도,

아버지와 남편으로부터 지역적 기반과 넉넉한 유산을 상속받았고, 아들 둘까지 둔 삼십대 여성. 아쉬울 것 없는 삶이었지만, 소서노는 안주하지 않았다. 새로운 땅을 찾아온 주몽을 만나 다시 사랑과 삶을 시작했다. 당시 주몽은 동부여 금와왕의 아들들에게 쫓겨 도망친 스무 살 가량의 청년이었다. 일곱 살에 제 손으로 활을 만들어 백 번 쏘아 백 번을 맞히는 등 무예가 뛰어났고 총명했다고 하나, 낯선 땅에서 의지할 것이라고는 몇 명의 부하 밖에 없는 처지였다.

동부여를 도망칠 때 함께 온 오이, 마리, 협보와 모둔곡에 와서 만난 재사, 무골, 묵거가 그들이다. 지혜와 무예, 그리고 야망을 지닌 젊은이를 알아본 것이 소서노의 아버지인 연타발인지 소서노 자신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주몽이 소서노에게 먼저 접근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졸본지역의 토착세력이었던 소서노와 능력 있는 주몽이 만났고, 소서노는 자신의 재력을 기반으로 주몽을 왕으로 성장시켰다. 주몽은 소서노의 재산을 가지고 뛰어난 장수를 끌어들이고 민심을 거두었다. 그리고 기원전 37년 마침내 고구려를 세웠다. 당연히 소서노는 고구려의 첫 번째 왕비가 되었다. 주몽은 이후 말갈을 물리치고 불류국, 행인국을 복속하는 등 나라를 안정적으로 성장시켰다. 소서노와의 사이도 좋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주몽은 그녀가 나라를 창업하는 데 잘 도와주었기 때문에 그녀를 총애하고 대접하는 것이 특히 후하였고, 비류 등을 자기 자식처럼 대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문제는 주몽의 첫 번째 부인과 친아들이 등장하면서 불거졌다. 부여를 떠날 때 주몽에게는 이미 부인이 있었고, 부인 예씨는 임신 중이었다. 주몽은 떠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만일 사내를 낳거든 그 아이에게 이르시오. 일곱 모난 돌 위, 소나무 밑에 감추어둔 유물을 찾아 나에게 오라고.” 예씨는 아들을 낳아 유리라 이름을 지었다. 성장한 유리는 일곱 모로 되어 있는 주춧돌과 기둥 사이에서 부러진 칼 한 토막을 찾아 들고는 주몽을 찾아왔다. 주몽이 왕위에 오른 지 19년 되던 해였다. 주몽은 기뻐하며 유리를 태자로 삼았다. 예씨가 원후, 소서노가 소후가 되었다.

소서노는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자신과 함께 만든 나라였고 당연히 자신의 아들 비류가 왕위를 이을 것이라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주몽의 친아들에게 나라를 고스란히 빼앗기게 되었다. 남편의 배신 앞에 선 소서노는 침착했다. 그리고 탁월한 결정을 내렸다. 사실 주몽이 20년 동안 세력을 키웠다고는 하지만 토착세력인 소서노를 따르는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유리와 피비린내 나는 권력 다툼을 벌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소서노는 두 아들을 이끌고 새로운 땅으로 떠나기로 결정했다. 능력과 야망만 가진 젊은이를 왕으로 키워낸 경험이 있었기에 두 아들을 믿고 떠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들 둘을 이끌고 한강 유역에 백제 건국,
소서노가 주몽을 떠나는 이후부터는 [삼국사기]와 [조선상고사]가 조금 다른 이야기를 전한다. [삼국사기]는 주몽이 죽은 뒤, 소서노가 비류, 온조와 함께 고구려를 떠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처음 대왕이 부여에서 난을 피해 이곳으로 도망 오셨을 때 우리 어머니께서 재산을 기울여 나라를 세우는 것을 도와 애쓰고 노력함이 많았다. 지금 대왕이 세상을 떠나신 이후 나라가 유리에게 돌아갔으니, 우리가 여기에서 혹처럼 남아 있는 것은 차라리 어머님을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좋은 땅을 선택해 도읍을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비류가 온조에게 한 말이다.

<삼국사기>는 이때 열 명의 신하와 많은 백성들이 따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만큼 소서노의 세력이 막강했음을 의미한다.

만주에서 한반도로 남하한 이들은 마침내 한강 유역에 이르러 살 만한 땅을 찾았다. 그러나 비류는 바닷가에 살고 싶어 했다. 열 명의 신하가 말렸다. “이 하남 땅은 북쪽으로 한수(한강)가 띠를 둘렀고, 동쪽으로 높은 산악에 의거했으며, 남쪽은 비옥한 들판이 바라보이고 서쪽은 큰 바다로 가로막혔으니, 이런 자연적인 요새와 지리는 얻기 어려운 지세입니다. 도읍을 여기에 세우는 것이 어찌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들을 나누어 미추홀로 갔다.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를 존중해 십제(十濟)라고 나라 이름을 지었다. 이때 소서노는 대부분의 어머니들과 달리 장남인 비류를 따르지 않고 온조를 선택했다. 남쪽으로의 원정길을 계획하고 주도한 것 자체가 소서노였다고 본다면, 이 역시 소서노의 판단이었을 것이다.


 풍납토성에서 발굴된 백제의 집터와 그릇,

그 판단은 옳았다. 비류가 선택한 미추홀은 땅에 습기가 많고 물이 짜서 백성들이 편히 살 수 없었다. 반면 위례성은 백성들이 살기에 적합했다. 부끄러움을 느낀 비류가 죽자(혹은 일본으로 건너갔다고도 한다.) 그 백성들이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이후 백성들이 많이 따르자 나라 이름을 고쳐서 백제(百濟)라 했다. 백제가 세워지던 해 온조는 동명왕 사당을 세웠다. 이때 동명왕은 주몽이 아니라 부여의 시조를 말한다.주몽의 아들이 왕위를 이은 고구려나, 비류가 세운 나라가 아니라 소서노와 그의 둘째 아들 온조가 세운 백제에 부여의 정통성이 있음을 내외에 알린 것이다. (한가지 덧붙이고 싶은 말은, 부여의 시조와 고구려의 시조 모두동명왕이라고 전한다는 점이다. 이는 주몽이 부여에서 이주하면서부여의 신화를 가져와 자신들의 건국신화로 만들었을 수도 있고, 훗날 고구려인들이 장구한 부여의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로 아우르고자 자신들의 건국영웅에게 부여 시조 동명의 모습을 겹쳐 놓았을 수도 있다.)

기원전 6년 소서노가 세상을 떠났다. 온조왕은 “나라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서 우리 강역을 침범하기 때문에 편안한 나날이 적다. 하물며 요즘에는 요상한 조짐이 계속 나타나고 국모마저 세상을 떠나셔서 스스로 편안할 수 없는 상태이니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며 천도를 강행했다. 소서노의 죽음이라는 충격은 나라의 수도를 옮겨야 할 정도로 컸다. 또한 몇 년 뒤 낙랑이 침입해 위례성이 불타는 사건이 발생하자 백제는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사당을 세웠는데, 이 사당에 모신 인물이 소서노였다. 왕의 어머니를 넘어 나라를 지키는 인물로 존중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상고사]에 전하는 소서노의 모습은 더 적극적이다. 유리가 태자에 오르자 비류와 온조가 의논했다. “고구려 건국의 공이 거의 우리 어머니에게 있는데, 이제 어머니는 왕후의 자리를 빼앗기고 우리 형제는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이 되었다. 대왕이 계신 때도 이러하니, 하물며 대왕께서 돌아가신 뒤에 유리가 왕위를 이으면 우리는 어떻게 되겠는가. 차라리 대왕이 살아 계신 때에 미리 어머니를 모시고 딴 곳으로 가서 딴 살림을 차리는 것이 옳겠다.” 아들들의 뜻을 전해들은 소서노는 주몽에서 청하여 많은 재물을 나누어가지고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두 아들과 오간, 마려 등 18사람을 데리고 마한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마한 왕에게 뇌물을 주고 서북쪽 백 리의 땅을 얻어 왕을 일컫고 국호를 백제라 했다. 그러니까 소서노가 주몽에게 위자료를 청구하여 많은 재물을 받았고, 이를 기반으로 나라를 세운 뒤 직접 왕이 되었다는 말이다. 이 책에 따르면 비류와 온조가 갈라진 것은 소서노가 죽은 뒤의 일이다. “서북의 낙랑과 예가 날로 침략해오는데 어머니 같은 성덕이 없고서는 이 땅을 지킬 수 없으니, 차라리 새 자리를 보아 도읍을 옮기는 것이 좋겠다.”하고 각자 서울이 될 만한 곳을 찾다가 비류는 미추홀로, 온조는 하남 위례홀로 의견이 나뉘어 갈라졌다는 것이다.


백제 초기의 거주지로 밝혀진, 송파구 풍납동의 풍납토성 유적,

나라를 두 번 세운 여인, 남성중심의 역사관 속에 묻히다,
이렇게 진취적이고 지혜로웠던 소서노에 대한 기록을 우리 역사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고대의 기록으로는 [삼국사기]의 온조왕 편에, 이후 근대의 기록으로는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고구려와 백제를 건국하는 데 실질적이고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 소서노가 이렇게 역사에서 소외된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삼국시대에 집필된 역사서들은 현재 전하지 않고, 고려, 조선시대에 역사서를 집필한 학자들은 대부분 유학자들이었다. 남성중심의 가부장적인 사회를 지향하는 그들에게 소서노는 결코 칭찬받지 못할 여성이었다. 절개를 지키지 않고 재가한 과부였고, 정실부인이 아니었으며, 남편의 뜻에 반해 집을 나간 여성이었다. 더구나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함은 반역까지 의미했다. 한마디로 일부종사, 현모양처를 지향하는 여성상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인물이었다. 남성 역사가들은 이 위험한 여성을 차츰 역사에서 지워버렸다.

참조항목,

역참조항목,

카테고리,
출처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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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서노 [召西奴] (두산백과)
[소서노 [召西奴] - 고구려의 첫 왕비, 백제를 세우다 (인물한국사)
[연합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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