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류 [沸流]
전설 속의 인물로서, 고구려의 건국시조인 주몽(朱蒙)의 아들이자 백제의 건국시조인 온조(溫祚)의 형으로 전한다.
고대에 현재의 인천광역시 지역을 근거지로 삼았던 삼국시대 백제의 미추홀에서 일어난 왕족의 건국 시조릐 형제.
출생-사망
? ~ BC 18? |
시대/ 가족관계/
고구려 |
아버지 : 동명왕 동생 : 온조왕 |
분야/ 유형/ 지역/ 시대/ 출처/
역사/전통 시대,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인물/왕족·호족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고대/삼국 시대/백제 |
디지털미추홀구문화대전-비류 |
《삼국사기》에는 그의 행적에 관해 서로 다른 두가지 이야기가 기재되어 있다. 그중 하나에 따르면, 비류는 북부여(北扶餘)출신의 주몽과 졸본부여(卒本扶餘)왕의 둘째딸 사이에서 태어나 아우인 온조와 함께 자랐는데, 어느날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 유리(琉璃)가 와서 태자가 되자 온조와 함께 따르는 신하들을 거느리고 한강유역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신하들이 모두 한강 남쪽에 자리잡자고 권하고 아우인 온조도 그 말에 따라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자리잡고 싶어했으나, 비류는 바닷가에서 살고 싶어해 백성을 나눠 미추홀(彌鄒忽)로 가서 살았는데,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자신이 거느린 백성은 편히 살지 못하는 반면 온조의 백성들은 편히 살게 되자 부끄럽게 여겨 후회하다 죽었다고 한다.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비류는 졸본사람 우태(優台)와 소서노(召西奴) 사이에서 태어나 아우 온조와 함께 자랐으며, 아버지 우태가 죽은 뒤 어머니 소서노가 주몽과 재혼하였는데, 주몽이 부여에서 낳은 아들인 유유(孺留)를 태자로 삼고 왕위를 잇게 하였다. 이에 비류는 아우인 온조와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를 건너 미추홀로 왔으며, 그곳에서 나라를 세우고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두가지 이야기 중 널리 알려진 것은 첫 번째 이야기이다. 그래서 비류가 죽자 비류의 백성들이 모두 온조에게로 왔고, 이에 온조가 서기전 18년에 백제를 세웠다는 이야기에 착안해 비류가 서기전 18년에 죽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위의 이야기는 역사적 사건을 빗댄 건국설화이므로 비류와 온조를 개인이 아닌 집단의 상징으로 해석하는 것이 보통이며, 비류집단과 온조집단의 경쟁에서 온조집단이 승리했다고 보는 것이 보통이다.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비류는 졸본사람 우태(優台)와 소서노(召西奴) 사이에서 태어나 아우 온조와 함께 자랐으며, 아버지 우태가 죽은 뒤 어머니 소서노가 주몽과 재혼하였는데, 주몽이 부여에서 낳은 아들인 유유(孺留)를 태자로 삼고 왕위를 잇게 하였다. 이에 비류는 아우인 온조와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를 건너 미추홀로 왔으며, 그곳에서 나라를 세우고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두가지 이야기 중 널리 알려진 것은 첫 번째 이야기이다. 그래서 비류가 죽자 비류의 백성들이 모두 온조에게로 왔고, 이에 온조가 서기전 18년에 백제를 세웠다는 이야기에 착안해 비류가 서기전 18년에 죽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위의 이야기는 역사적 사건을 빗댄 건국설화이므로 비류와 온조를 개인이 아닌 집단의 상징으로 해석하는 것이 보통이며, 비류집단과 온조집단의 경쟁에서 온조집단이 승리했다고 보는 것이 보통이다.
비류가 부여출신이라는 점에 주목해 비류의 성씨는 해(解)씨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삼국유사》 등의 기록에 따르면 백제의 왕실 성씨는 원래 해(解)씨였다가 나중에 부여(扶餘)씨로 바뀌었다고 하는데, 학자들 중에는 비류집단을 해씨, 온조집단을 부여씨로 보는 사람이 적지 않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비류가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가 없어서 다시 위례에 돌아와 보니 도읍은 안정되고 백성들도 평안하므로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다가 죽었고,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에 귀부하였다고 한다.
『삼국사기』의 기록들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추측할 수 있다. 비류와 온조가 형제로 기술되어 있는 것은 초기 백제의 연맹체적 성격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연맹 초기에는 비류 집단이 연맹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가, 한강 유역의 문화적 기반을 바탕으로 성장한 온조 집단이 왕위를 차지하였던 것을 생각된다. 비류 집단을 흡수한 온조 집단이 목지국(目支國)을 비롯한 마한 세력을 아우르면서 백제가 고대 국가로 성장해 나갔다고 볼 수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들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추측할 수 있다. 비류와 온조가 형제로 기술되어 있는 것은 초기 백제의 연맹체적 성격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연맹 초기에는 비류 집단이 연맹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가, 한강 유역의 문화적 기반을 바탕으로 성장한 온조 집단이 왕위를 차지하였던 것을 생각된다. 비류 집단을 흡수한 온조 집단이 목지국(目支國)을 비롯한 마한 세력을 아우르면서 백제가 고대 국가로 성장해 나갔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의 시조 주몽(朱蒙)이 졸본 부여(卒本扶餘) 왕의 둘째 딸과 결혼하여 낳은 두 아들 중 첫째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비류(沸流)와 관련된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백제의 시조 온조왕의 아버지는 추모(鄒牟)인데, 혹은 주몽이라고도 하였다. 주몽은 북부여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 부여에 이르렀다. 부여 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부여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주몽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비류라 하였고, 둘째 아들은 온조라 하였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 유류(孺留)가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 마침내 오간(烏干)ㆍ마려(馬黎) 등 열 명의 신하와 더불어 남쪽으로 갔는데 백성들이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들은 드디어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가 살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고자 하니 열 명의 신하가 간하였다.
“이 강 남쪽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를 띠처럼 띠고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벌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으니 이렇게 하늘이 내려 준 험준함과 지세의 이점은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여기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
비류는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鄒忽)로 돌아가 살았다. 온조는 한수 남쪽의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아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이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기원전 18)이었다.
한편 세주(細註)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시조 비류왕은 아버지는 우태(優台)로 북부여 왕 해부루(解扶婁)의 서손이었고, 어머니는 소서노(召西奴)로 졸본인 연타발(延陀勃)의 딸이었다. 소서노는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비류라 하였고, 둘째는 온조라 하였다. ……주몽이 부여에서 용납되지 못하자 전한 건소(建昭) 2년(기원전 37)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소서노를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주몽은 ……그녀를 총애하고 대접하는 것이 특히 후하였고, 비류 등을 자기 자식처럼 대하였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禮氏)에게서 낳은 아들 유류가 ……태자로 ……왕위를 잇기에 이르렀다. 이에 비류가 동생 온조에게 말하였다.
“처음 대왕이 부여에서의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도망하여 오자 우리 어머니께서 재산을 기울여 나라를 세우는 것을 도와 애쓰고 노력함이 많았다. 대왕이 세상을 떠나시고 나라가 유류에게 속하게 되었으니, 그저 군더더기 살처럼 답답하게 여기에 남아 있는 것은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땅을 택하여 따로 도읍을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
드디어 동생과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두 강을 건너 미추홀에 이르러 살았다.
위 기록들을 통해 볼 때 해상 활동을 하기에 적합하다는 점 때문에 당시 비류가 미추홀, 즉 인천 지역을 근거지로 택했음을 알 수 있다. 옛 인천은 지형적으로 보면 서해로 둘러싸인 작은 반도이다.
백제의 시조 온조왕의 아버지는 추모(鄒牟)인데, 혹은 주몽이라고도 하였다. 주몽은 북부여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 부여에 이르렀다. 부여 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부여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주몽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비류라 하였고, 둘째 아들은 온조라 하였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 유류(孺留)가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 마침내 오간(烏干)ㆍ마려(馬黎) 등 열 명의 신하와 더불어 남쪽으로 갔는데 백성들이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들은 드디어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가 살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고자 하니 열 명의 신하가 간하였다.
“이 강 남쪽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를 띠처럼 띠고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벌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으니 이렇게 하늘이 내려 준 험준함과 지세의 이점은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여기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
비류는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鄒忽)로 돌아가 살았다. 온조는 한수 남쪽의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아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이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기원전 18)이었다.
한편 세주(細註)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시조 비류왕은 아버지는 우태(優台)로 북부여 왕 해부루(解扶婁)의 서손이었고, 어머니는 소서노(召西奴)로 졸본인 연타발(延陀勃)의 딸이었다. 소서노는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비류라 하였고, 둘째는 온조라 하였다. ……주몽이 부여에서 용납되지 못하자 전한 건소(建昭) 2년(기원전 37)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소서노를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주몽은 ……그녀를 총애하고 대접하는 것이 특히 후하였고, 비류 등을 자기 자식처럼 대하였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禮氏)에게서 낳은 아들 유류가 ……태자로 ……왕위를 잇기에 이르렀다. 이에 비류가 동생 온조에게 말하였다.
“처음 대왕이 부여에서의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도망하여 오자 우리 어머니께서 재산을 기울여 나라를 세우는 것을 도와 애쓰고 노력함이 많았다. 대왕이 세상을 떠나시고 나라가 유류에게 속하게 되었으니, 그저 군더더기 살처럼 답답하게 여기에 남아 있는 것은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땅을 택하여 따로 도읍을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
드디어 동생과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두 강을 건너 미추홀에 이르러 살았다.
위 기록들을 통해 볼 때 해상 활동을 하기에 적합하다는 점 때문에 당시 비류가 미추홀, 즉 인천 지역을 근거지로 택했음을 알 수 있다. 옛 인천은 지형적으로 보면 서해로 둘러싸인 작은 반도이다.
옛 인천을 중심으로 경기만에 있는 강화도까지 확대하여 본다면 고대로부터 해상 교통이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인천 지역이 갖는 해상 교통의 이점은 백제 때 중국과의 교류 창구로 기능했던 데에서 알 수 있다. 인천광역시 연수구 옥련동 해안 쪽 선단에 능허대(凌虛臺)라는 곳이 있다. 중국과의 통교를 위한 백제 사신을 실은 배의 출항지였다고 전하는 곳으로 1990년에 인천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8호로 지정되어 보호 중이다. 이 능허대가 인천 지역이 갖는 해상 교통의 이점을 잘 보여 준다고 하겠다.
한편 비류 집단이 오늘날의 인천 지역을 근거지로 택한 또 하나의 이유는 소금 산지의 확보라는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소금은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식품이었고 고대 사회에 있어서 소금 생산지의 확보는 국가적인 관심사였다. 바닷가인 인천은 근래에 이르기까지도 많은 소금을 생산했던 지역으로 유명하였다.
결과적으로 비류가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짬에도 불구하고 미추홀에 정착한 것은 해상활동을 하기에 적합한 곳이란 점, 그리고 소금 생산지와 소금 교역망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비류 집단이 오늘날의 인천 지역을 근거지로 택한 또 하나의 이유는 소금 산지의 확보라는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소금은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식품이었고 고대 사회에 있어서 소금 생산지의 확보는 국가적인 관심사였다. 바닷가인 인천은 근래에 이르기까지도 많은 소금을 생산했던 지역으로 유명하였다.
결과적으로 비류가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짬에도 불구하고 미추홀에 정착한 것은 해상활동을 하기에 적합한 곳이란 점, 그리고 소금 생산지와 소금 교역망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백제 미추홀(彌鄒忽 : 여러 설이 있으나 지금의 인천부근으로 추정됨)에서 일어난 왕족의 시조이다. ≪삼국사기≫에는 온조(溫祚)를 시조로 하는 건국설화와 함께 비류가 시조라는 이설도 실려 있다.
이러한 두가지 시조설화가 남게 된 것은 처음 비류는 미추홀에서, 온조는 지금의 서울 한강유역에서 따로 지배세력으로 성장하여 두 집단이 각기 자기 시조를 내세운 결과로 이해된다.
한편 ≪삼국사기≫ 등에는 비류집단의 계보는 전하지 않으며, 백제왕들은 모두 온조계보에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비류계 설화가 오늘날까지 남아 전하는 것은 비류를 시조로 하는 집단이 백제 후기까지 계속 존재하였던 때문으로 여겨진다.
‘비류’라는 말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고구려 송양국(松讓國)을 비류국이라고도 하고 강(江)의 이름도 비류수라 하고 있으며, 또 각훈(覺訓)의 ≪해동고승전 海東高僧傳≫에서는 비류를 ‘피류(避流)’로, 온조를 ‘은조(殷祚)’로 표기하고 있다.
歷史 - 백제(百濟)에서 본 주몽(朱蒙)
백제에서 본 주몽'
BC58년 태어난 주몽(朱蒙)은 22세 때 금와왕(金蛙王)의 아들 대소(帶素)에 쫓겨 부여(扶餘)를 탈출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다.
BC58년 태어난 주몽(朱蒙)은 22세 때 금와왕(金蛙王)의 아들 대소(帶素)에 쫓겨 부여(扶餘)를 탈출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다.
졸본의 세력가 연타발(延陀勃)의 딸 소서노(召西奴)는 원래 우태(優台)와의 사이에서 아들 비류(沸流)와 온조(溫祚)를 둔 과부였는데 BC37년 주몽은 소서노와 결혼해 도읍을 정하고 고구려(高句麗)를 세우면서 그녀의 집안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두 아들이 있음에도 주몽이 동부여(東夫餘)에 있을 때 예씨 부인(禮氏夫人)에게서 얻은 아들 유리(瑠璃)를 불러 BC19년 후계자로 삼자 섭섭한 소서노는 두 아들을 데리고 남하하여 백제(百濟)를 세웠다. 고구려가 주장하는 설화에 비해 신비적인 요소가 거의 없이 역사적 사실에 훨씬 근접해 있다.
歷史 - 소서노(召西奴) 비류(沸流) 온조(溫祚)
歷史 소서노 비류 온조'
비류(沸流)와 온조(溫祚)는 주몽(朱蒙)의 아들이 아니다. BC37년 주몽은 졸본부여로 망명하였는데 졸본에는 세력가 연타발(延陀勃)의 딸 소서노(召西奴)가 죽은 전 남편 우태(優台)와의 사이에서 낳은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을 데리고 혼자 살았다.
비류(沸流)와 온조(溫祚)는 주몽(朱蒙)의 아들이 아니다. BC37년 주몽은 졸본부여로 망명하였는데 졸본에는 세력가 연타발(延陀勃)의 딸 소서노(召西奴)가 죽은 전 남편 우태(優台)와의 사이에서 낳은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을 데리고 혼자 살았다.
소서노와 결혼해 그 가문의 도움으로 주몽은 고구려를 건국했는데 당시 주몽은 22세 소서노는 29세였으며 비류는 10세 온조는 8세로 추정된다.
주몽은 친자가 아닌 두 아들보다 동부여에 두고 온 유리(瑠璃)를 후계로 생각했으니 근왕파(勤王派)와 소서노파(召西奴派)와 대립이 심했을 테고 결국 BC19년 유리를 불러들여 왕위를 물려주자 소서노는 두 아들을 데리고 새로운 나라를 위해 고구려를 떠난다.
비류국,[ 沸流國 ]
고구려 건국기 서기전 1세기경 지금의 압록강 지류인 동가강(佟佳江 : 渾江)유역에 위치하였던 작은 나라.소국(小國).
이칭/ 별칭/ 유형/ 시대/ 성격/
송양국 |
지명/지명 |
고대/삼국/고구려 |
국가, 초기국가 |
기원전 36년(동명성왕 2년)에 비류국의 왕 송양(松讓)이 고구려 동명성왕에게 항복하였고, 동명성왕은 비류국을 '옛 상태로 되돌린다. 되물린다'는 뜻의 고구려말인 다물(多勿)로 개칭하고 송양을 그곳의 왕으로 임명했다.
'다물'을 옛 땅을 회복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지만, 동명성왕이 송양의 영토를 정복하여 신하로 삼았으나 나중에 나라가 커진 후에 그에게 땅을 되물려 주는 것이므로 '다물'은 '원래 상태로 되돌리다'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주몽(朱蒙)이 비류수(沸流水)에 채소잎이 떠내려옴을 보고 상류에 사람이 살고 있음을 알아 사냥을 하면서 비류국을 찾아가 국왕 송양(松讓)을 만났는데, 송양이 말하기를 우리는 여러 대 동안 이곳에서 왕 노릇을 해왔으나, 땅이 작아 두 임금을 용납하기 어려우며 그대가 도읍을 정한 지 오래지 않으니 우리의 부용(附庸)이 될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이에 주몽이 분노하여 송양과 활쏘기 등으로 겨루었으나 송양이 항거하지 못하고 이듬해 나라를 들어 항복하였다고 한다. 비류국의 지배층은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이동해온 것 같으며, 정착시기가 고구려보다 빨라 선주(先住)토착세력으로서 우세한 입장에 있었던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또한, ‘송양’의 음이 고구려 5부의 하나인 소노(消奴)와 유사함을 근거로 송양에 대한 주몽의 승리를《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구려조에 나오는 소노부로부터 계루부(桂婁部)로의 왕실교체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추정도 있다.
초기 고구려세력에 병합된 비류국은 송양의 딸이 유리왕의 비로 들어가는 등 주몽집단과 혼인관계를 맺으면서 고구려 국가의 성장과 함께 유력한 지배집단의 하나가 되고 있다. 다물국(多勿國) 또는 비류나(沸流那)로 기록되기도 한다,
역대 국왕,
대수/ 호칭/ 성명/ 재위기간/
1 | 다물후(多勿侯) | 송양(松讓) | ? ~ ? |
이 글은 한국사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 분류: |
헌대,
미추홀구 향토 문화백과,
- 삶의 터전(지리)
- 삶의 내력(역사)
- 삶의 자취(문화유산)
- 삶의 주체(성씨·인물)
- 삶의 틀(정치∙경제∙사회)
- 삶의 의미(종교)
- 삶의 내용(문화·교육)
- 삶의 방식(생활·민속)
- 삶의 이야기(구비 전승·언어·문학)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서 전해오는 생활과 풍습.
항목 ID/ 한자/ 분야/ 유형/ 지역/
GC04700027 |
民俗 |
생활·민속/민속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민속은 민간에 전승되는 기층문화 혹은 잔존(殘存) 문화로 ‘민간의 전승’ 또는 ‘민간의 풍속’이란 말의 줄임말이다. 민속은 민중의 생활인 동시에 그 생활의 지속 또는 반복에서 이루어지는 공통의 습속을 말하기도 한다. 따라서 민속은 세시 풍속이나 의례, 신앙, 언어, 노동 등 삶의 전 분야를 포괄하고 있으며, 또한 특정 지역의 민속은 그 지역의 자연 환경이나 인문 환경 등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고,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지속과 변화 과정을 겪게 된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는 인천광역시의 서남부에 위치하며 모두 24개동을 관할하고 있다. 지형은 준평원 위에 남아 있는 잔구성(殘丘性) 산지인 문학산과 청량산이 중앙부에 솟아 있고, 동부 지역에는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주안동에서 발원한 승기천이 남쪽으로 흘러 황해로 흘러가며 하천 연안에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그러나 서부에는 간석지가 발달하여 한때는 염전으로 이용되었으나 현재는 공업 단지로 변모하고 있다. 이렇듯 인천광역시 미추홀구는 내륙과 바다가 인접한 지리 및 지형적 특징을 지니고 있어 다양한 삶의 토대 위에서 형성된 여러 민속이 오랜 역사를 기반으로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는 인천광역시의 서남부에 위치하며 모두 24개동을 관할하고 있다. 지형은 준평원 위에 남아 있는 잔구성(殘丘性) 산지인 문학산과 청량산이 중앙부에 솟아 있고, 동부 지역에는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주안동에서 발원한 승기천이 남쪽으로 흘러 황해로 흘러가며 하천 연안에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그러나 서부에는 간석지가 발달하여 한때는 염전으로 이용되었으나 현재는 공업 단지로 변모하고 있다. 이렇듯 인천광역시 미추홀구는 내륙과 바다가 인접한 지리 및 지형적 특징을 지니고 있어 다양한 삶의 토대 위에서 형성된 여러 민속이 오랜 역사를 기반으로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민속 신앙은 인간의 종교적인 심성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한 민간의 종교이다. 기독교와 불교 등의 일반적인 종교와 달리 특별한 교리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민중들의 기층(基層)에 자리 잡아 전승되고 있는 신앙이 민속 신앙에 해당된다. 마을 신앙을 비롯해 가정 신앙, 민간에서 행하는 미신적인 신앙 관습인 속신(俗信)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의 민속 신앙 중에는 동막동 도당굿이 있다. 동막동 도당굿은 조선 시대에 정립된 것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도당신을 모신 당집에서 3일 동안 주야로 도당굿을 지내고 있다. 또한 안관당제라 불리는 당제가 지내지기도 하는데 안관당제는 김민선(金敏善)이라는 인물에게 지내는 당제이다. 김민선은 임진왜란 때 인천도호부 부사로 인천을 지키다 순직한 인물로, 김민선을 추모하기 위해 문학산에서 당제를 지내게 된 것이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는 국가 무형 문화재 제82-나호인 ‘서해안 배연신굿 및 대동굿’[서해안 풍어제]가 있다. 김금화 만신[무녀(巫女)를 높여 이르는 말]으로 상징되는 서해안 풍어제는 1985년 2월 1일에 국가 무형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풍어제는 어업을 생업으로 하는 바닷가 마을이나 배를 부리는 집에서 매년 또는 몇 년에 한 번씩 풍어를 기원하기 위하여 행하는 굿을 말한다.
서해안 풍어제는 크게 ‘배연신굿’과 ‘대동굿’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배연신굿이란 선주(船主)들이 자기 배와 선원의 안전 그리고 풍어를 기원하기 위하여 무녀의 관장 하에 배 위에서 행하는 굿을 말한다. 이에 비해 대동굿은 마을 사람들이 해상에서의 안전과 풍어, 협동과 화목을 기원하기 위하여 공동으로 비용을 마련하여 행하던 마을 공동의 제사 의식을 말한다.
굿의 진행 과정은 배연신굿의 경우 ‘신청울림’[신을 청하는 굿]을 시작으로 ‘강변굿’까지 12거리로 구성되어 있고, 대동굿은 ‘신청울림’을 시작으로 해상에서 생명을 잃은 넋을 달래고 마을의 액운을 띠배에 실어 보내는 ‘강변 수살 용신 송신굿’까지 24거리로 구성되어 있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의 민속 신앙 중에는 동막동 도당굿이 있다. 동막동 도당굿은 조선 시대에 정립된 것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도당신을 모신 당집에서 3일 동안 주야로 도당굿을 지내고 있다. 또한 안관당제라 불리는 당제가 지내지기도 하는데 안관당제는 김민선(金敏善)이라는 인물에게 지내는 당제이다. 김민선은 임진왜란 때 인천도호부 부사로 인천을 지키다 순직한 인물로, 김민선을 추모하기 위해 문학산에서 당제를 지내게 된 것이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는 국가 무형 문화재 제82-나호인 ‘서해안 배연신굿 및 대동굿’[서해안 풍어제]가 있다. 김금화 만신[무녀(巫女)를 높여 이르는 말]으로 상징되는 서해안 풍어제는 1985년 2월 1일에 국가 무형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풍어제는 어업을 생업으로 하는 바닷가 마을이나 배를 부리는 집에서 매년 또는 몇 년에 한 번씩 풍어를 기원하기 위하여 행하는 굿을 말한다.
서해안 풍어제는 크게 ‘배연신굿’과 ‘대동굿’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배연신굿이란 선주(船主)들이 자기 배와 선원의 안전 그리고 풍어를 기원하기 위하여 무녀의 관장 하에 배 위에서 행하는 굿을 말한다. 이에 비해 대동굿은 마을 사람들이 해상에서의 안전과 풍어, 협동과 화목을 기원하기 위하여 공동으로 비용을 마련하여 행하던 마을 공동의 제사 의식을 말한다.
굿의 진행 과정은 배연신굿의 경우 ‘신청울림’[신을 청하는 굿]을 시작으로 ‘강변굿’까지 12거리로 구성되어 있고, 대동굿은 ‘신청울림’을 시작으로 해상에서 생명을 잃은 넋을 달래고 마을의 액운을 띠배에 실어 보내는 ‘강변 수살 용신 송신굿’까지 24거리로 구성되어 있다.
세시 풍속은 1년을 주기로 매 시기마다 행해지던 풍속을 말하는데, 농업을 중시하던 전통 사회에서는 농사력에 맞춘 다양한 세시풍속이 행해졌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의 세시 풍속 역시 이러한 양상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바다와 인접해 있어 어업에 영향을 받은 세시 풍속 역시 전승되고 있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는 정월, 정월 대보름, 단오, 추석 등 특정 시기에 맞는 다양한 세시 풍속이 전해온다. 정월에는 토정비결, 연날리기, 윷놀이 등이, 정월 대보름에는 부럼, 오곡밥 먹기, 더위팔기 등이 행해졌다. 사월 초파일에는 절을 찾아 연등을 걸기도 했으며, 오월 단오에는 그네뛰기와 씨름을 하였으며, 여자들은 창포에 머리를 감았다. 추석에는 차례를 지내고 동지에는 팥죽을 먹기도 하였다. 섣달그믐에는 눈썹이 흰색으로 변한다고 해서 잠을 자지 않는 ‘수세(守歲)’ 풍속도 있었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는 정월, 정월 대보름, 단오, 추석 등 특정 시기에 맞는 다양한 세시 풍속이 전해온다. 정월에는 토정비결, 연날리기, 윷놀이 등이, 정월 대보름에는 부럼, 오곡밥 먹기, 더위팔기 등이 행해졌다. 사월 초파일에는 절을 찾아 연등을 걸기도 했으며, 오월 단오에는 그네뛰기와 씨름을 하였으며, 여자들은 창포에 머리를 감았다. 추석에는 차례를 지내고 동지에는 팥죽을 먹기도 하였다. 섣달그믐에는 눈썹이 흰색으로 변한다고 해서 잠을 자지 않는 ‘수세(守歲)’ 풍속도 있었다.
민속놀이는 각 지역의 풍속과 생활 모습이 담긴 민중들의 놀이로 민속 오락, 민속 경기, 민속 유희, 민속 예능, 전승 놀이, 향토 오락 등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민속놀이의 개념에는 싸움을 뜻하는 경쟁의식을 비롯해서 흥을 뜻하는 유희성, 즐김을 나타내는 오락성,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성이 복합적으로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는 다양한 민속놀이가 전해져 온다. 일정한 시기에만 행해지는 세시 놀이를 비롯해 연중 행해지는 비 세시 놀이, 그리고 투전과 같은 어른 놀이, 땅따먹기, 꼬리따기 같은 어린이 놀이 전해온다.
이들 놀이 외에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는 국가 무형 문화재 제61호인 은율 탈춤이 전승되고 있다. 은율 탈춤은 1978년 2월 23일에 국가 무형 문화재로 지정된 것으로 황해도 은율 지방에서 행해지던 민속극이다. 은율 탈춤은 봉산 탈춤, 강령 탈춤과 함께 ‘해서 탈춤’에 속하며 사월 초파일, 오월 단오, 칠월 백중에 행해졌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탈춤은 약 200~300년 전에 난리를 피하기 위하여 섬으로 갔던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올 때 얼굴을 내놓기가 부끄러워 탈을 쓴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는 다양한 민속놀이가 전해져 온다. 일정한 시기에만 행해지는 세시 놀이를 비롯해 연중 행해지는 비 세시 놀이, 그리고 투전과 같은 어른 놀이, 땅따먹기, 꼬리따기 같은 어린이 놀이 전해온다.
이들 놀이 외에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는 국가 무형 문화재 제61호인 은율 탈춤이 전승되고 있다. 은율 탈춤은 1978년 2월 23일에 국가 무형 문화재로 지정된 것으로 황해도 은율 지방에서 행해지던 민속극이다. 은율 탈춤은 봉산 탈춤, 강령 탈춤과 함께 ‘해서 탈춤’에 속하며 사월 초파일, 오월 단오, 칠월 백중에 행해졌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탈춤은 약 200~300년 전에 난리를 피하기 위하여 섬으로 갔던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올 때 얼굴을 내놓기가 부끄러워 탈을 쓴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민속 무용은 민속의 특수성과 향토의 특색을 갖추고 옛날부터 전해지는 전통 무용을 말한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서 전해오는 민속 무용에는 2002년 2월 4일 인천광역시 무형 문화재 10-1호로 지정된 ‘범패와 작법무(바라춤)’가 있다. 이 두 민속 무용은 불교의 의례 과정에서 행하던 무용인데, 작법의 하나로 양손에 바라를 들고 빠른 동작으로 전진과 후퇴, 회전을 하며 활발하게 추는 춤이다. 불가에서는 모든 악귀를 물리치고 도량을 청정하게 하며 마음을 정화하려는 뜻에서 춘다고 한다.
바라춤의 종류는 천수(千手)바라춤, 명(鳴)바라춤, 사다라니(四茶羅尼)바라춤, 관욕게(灌浴偈)바라춤, 먹[막]바라춤, 내림(來臨)바라춤 등 6가지가 있다. 하얀 장삼에 녹색 띠를 두른 무복(舞服)에 두 손에 바라를 들고 장중하면서도 무겁지 않게 몸을 놀리는 바라춤은 색감(色感)과 움직임이 모두 들뜨지 않는 속에서 화려함을 끌어낸다. 발은 외로 도나 언제나 고무래 ‘정(丁)’자로 떼어 놓고 무릎과 허리를 동시에 굴절시키며 바라를 놀린다.
무릎과 허리 놀림이 덩실덩실하고 발놀림이 또박또박 장중하다. 바라를 맞부딪치거나 비벼서 내는 소리가 춤의 리듬 속에 장중한 멋을 더해 주며 바라가 지닌 쇳소리는 종이나 요령처럼 쨍그랑 거리지도, 징처럼 크지도 않으면서 부드럽고 쓰다듬는 맛이 난다. 최근 속화(俗化)되어 임의로 무대에 올려 지기도 하는데, 이때에는 반염불굿거리 장단을 쓰기도 한다.
바라춤의 종류는 천수(千手)바라춤, 명(鳴)바라춤, 사다라니(四茶羅尼)바라춤, 관욕게(灌浴偈)바라춤, 먹[막]바라춤, 내림(來臨)바라춤 등 6가지가 있다. 하얀 장삼에 녹색 띠를 두른 무복(舞服)에 두 손에 바라를 들고 장중하면서도 무겁지 않게 몸을 놀리는 바라춤은 색감(色感)과 움직임이 모두 들뜨지 않는 속에서 화려함을 끌어낸다. 발은 외로 도나 언제나 고무래 ‘정(丁)’자로 떼어 놓고 무릎과 허리를 동시에 굴절시키며 바라를 놀린다.
무릎과 허리 놀림이 덩실덩실하고 발놀림이 또박또박 장중하다. 바라를 맞부딪치거나 비벼서 내는 소리가 춤의 리듬 속에 장중한 멋을 더해 주며 바라가 지닌 쇳소리는 종이나 요령처럼 쨍그랑 거리지도, 징처럼 크지도 않으면서 부드럽고 쓰다듬는 맛이 난다. 최근 속화(俗化)되어 임의로 무대에 올려 지기도 하는데, 이때에는 반염불굿거리 장단을 쓰기도 한다.
민속 공예란 각 지역마다 전승되어온 전통적 기법과 그 고장 산물을 이용하여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만들어내는 조형 예술을 말한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는 여러 형태의 민속 공예가 전해지는데, 화각장(畫角匠)과 완초장(莞草匠) , 단소장(短簫匠)이 그것이다.
2008년 12월 15일 인천광역시 지정 무형 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된 완초장은 왕골, 즉 완초를 재배한 후에 선별·가공 기능, 완초 염색 처리 기능, 염색 완초의 적절한 배열로 미적인 요소를 살려내는 기능까지 모두 해낼 수 있는 장인(匠人)을 말한다. 완초 공예품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신라 때부터 사용했다고 기록됐다.
고려 때에는 사직신인 후토씨(后土氏)와 후직씨(后稷氏)의 신위에 왕골자리를 깔았으며 왕실에서는 문석(文席), 채석(彩席), 화문대석(花文大席)을 사용했다. 조선 시대에는 관청에서 민간에 공납을 요구하는 품목 중 하나로 왕골을 포함시켰는데 이것은 완초 공예품이 매우 귀한 물건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완초장 보유자에 의해 완초 공예 기능인 손을 이용한 엮기법, 즉 편조법으로 화방석, 그릇, 팔각형 함 등 아름다움과 쓰임새가 결합된 생활 속의 공예품이 만들어지고 있다.
인천광역시 무형 문화재 제2호인 단소장은 1990년 11월 9일에 지정된 것이다. 단소는 음색이 청아하여 독주 악기로 손색이 없으며 연주하기 간편하고 소리내기도 어렵지 않아 누구나 연주하기 좋은 악기이다. 단소는 대나무로 만드는데, 우리나라는 대나무 종류도 많고 양도 풍부하여 어떤 대나무를 사용해도 무방하지만 오죽(烏竹)을 즐겨 쓴다.
제작 과정은 지름 20㎜, 길이 700㎜ 정도의 대나무를 농도 짙은 소금물에 10시간 정도 삶아 기름 성분을 제거하고 절인 다음, 열을 가하여 구부러진 부분을 바로 잡고 다시 10분 정도 찬물에 담근다. 그 후 바람이 잘 통하는 그늘에서 3개월 이상 건조시킨 후 길이 500㎜로 잘라 속을 관통하는 내공(內孔)을 뚫고 다시 420㎜로 자른 다음 반달 모양의 입김을 불어 넣는 구멍인 취구(吹口)를 만들고 손가락으로 막아 연주하는 지공(指孔)을 뚫어 완성한다.
2008년 12월 15일 인천광역시 지정 무형 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된 완초장은 왕골, 즉 완초를 재배한 후에 선별·가공 기능, 완초 염색 처리 기능, 염색 완초의 적절한 배열로 미적인 요소를 살려내는 기능까지 모두 해낼 수 있는 장인(匠人)을 말한다. 완초 공예품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신라 때부터 사용했다고 기록됐다.
고려 때에는 사직신인 후토씨(后土氏)와 후직씨(后稷氏)의 신위에 왕골자리를 깔았으며 왕실에서는 문석(文席), 채석(彩席), 화문대석(花文大席)을 사용했다. 조선 시대에는 관청에서 민간에 공납을 요구하는 품목 중 하나로 왕골을 포함시켰는데 이것은 완초 공예품이 매우 귀한 물건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완초장 보유자에 의해 완초 공예 기능인 손을 이용한 엮기법, 즉 편조법으로 화방석, 그릇, 팔각형 함 등 아름다움과 쓰임새가 결합된 생활 속의 공예품이 만들어지고 있다.
인천광역시 무형 문화재 제2호인 단소장은 1990년 11월 9일에 지정된 것이다. 단소는 음색이 청아하여 독주 악기로 손색이 없으며 연주하기 간편하고 소리내기도 어렵지 않아 누구나 연주하기 좋은 악기이다. 단소는 대나무로 만드는데, 우리나라는 대나무 종류도 많고 양도 풍부하여 어떤 대나무를 사용해도 무방하지만 오죽(烏竹)을 즐겨 쓴다.
제작 과정은 지름 20㎜, 길이 700㎜ 정도의 대나무를 농도 짙은 소금물에 10시간 정도 삶아 기름 성분을 제거하고 절인 다음, 열을 가하여 구부러진 부분을 바로 잡고 다시 10분 정도 찬물에 담근다. 그 후 바람이 잘 통하는 그늘에서 3개월 이상 건조시킨 후 길이 500㎜로 잘라 속을 관통하는 내공(內孔)을 뚫고 다시 420㎜로 자른 다음 반달 모양의 입김을 불어 넣는 구멍인 취구(吹口)를 만들고 손가락으로 막아 연주하는 지공(指孔)을 뚫어 완성한다.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의 민속을 살펴보면 지리적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 많음을 알 수 있다. 황해도와 인접해 있는 연유로 서해안 풍어제와 은율탈춤이 전해져 오고 있는가 하면, 바다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갯가노래와 뱃노래가 전해오는 것 등이 모두 이와 관련되어 있다. 이 지역 민속의 또 다른 특징은 기능과 관련된 다양한 문화재가 전승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민속은 시대에 따라 지속적으로 변화한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지역의 민속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도시화 과정에서 사라진 민속 또한 적지 않으며, 반대로 새로운 형태의 민속이 생겨나기도 한다. 따라서 전통의 민속을 계승시키는 일과 새로운 민속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민속은 시대에 따라 지속적으로 변화한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지역의 민속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도시화 과정에서 사라진 민속 또한 적지 않으며, 반대로 새로운 형태의 민속이 생겨나기도 한다. 따라서 전통의 민속을 계승시키는 일과 새로운 민속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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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참고문헌,
[비류 [沸流] (두산백과)
[비류 [沸流] (인명사전, 2002. 1. 10., 인명사전편찬위원회)
[삼국사기(三國史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비류 [沸流]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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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사 편찬 위원회, 『인천광역시사』(인천광역시, 2002)
[인천광역시사 편찬 위원회, 『인천의 역사와 문화』(인천광역시, 2003)
[삼국사기, 백제건국에 관한 제문제」(이홍직, 『국사상의 제문제』 6·7, 국사편찬위원회, 1960)
[백제건국고」(백제연구』, 충남대학교백제연구소, 1982)
[삼한문제의 신고찰」(한국학문헌연구의 현황과 전망』, 아세아문화사, 1983)
[비류 [沸流]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문화콘텐츠닷컴
[삼국사기』
[고구려국호고」(서울대학교론문집 인문사회과학』 3, 1956 ;『한국고대사연구』, 1976)
[한국사강좌』-고대편-(일조각, 1982)
[고구려 초기의 지방통치제도」(역사학보』 94·95합집, 198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encykorea.aks.ac.kr/]
[비류국 [沸流國]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지식연계]
#비류 [沸流] #백제를 세웠다는 이야기 #비류가 서기전 18년에 죽었다고 보기도 한다 #역사적 사건을 빗댄 건국설화 3비류와 온조를 개인이 아닌 집단의 상징으로 해석하는 것이 보통이며 #비류집단 #온조집단 #경쟁에서 온조집단이 승리했다고 보는 것이 보통이다 #비류가 부여출신이라는 점에 주목해 비류의 성씨는 해(解)씨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삼국유사 등의 기록 #백제의 왕실 성씨는 원래 해(解)씨였다가 나중에 부여(扶餘)씨 #학자들 중에는 비류집단을 해씨 #온조집단을 부여씨로 보는 사람 #역사 #아시아사 #한국사 #삼국시대 #인물 #정치 #한국정치 #동명성왕 #온조왕 #유리왕 #백제의 건국설화 #소서노 #문학산성 #백제의 건국 #연타발 #비류는 졸본사람 #우태(優台)와 소서노(召西奴) 사이에서 태어나 아우 온조와 함께 자랐으며 #아버지 우태가 죽은 뒤 어머니 소서노가 주몽과 재혼 #주몽이 부여에서 낳은 아들인 유유(孺留)를 태자로 삼고 왕위를 잇게 하였다 #비류는 아우인 온조와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를 건너 미추홀로 왔으며 #나라를 세우고 왕위에 올랐다 #비류는 북부여(北扶餘)출신의 주몽과 졸본부여(卒本扶餘)왕의 둘째딸 사이에서 태어나 아우인 온조와 함께 자랐는데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 유리(琉璃)가 와서 태자가 되자 #온조와 함께 따르는 신하들을 거느리고 한강유역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신하들이 모두 한강 남쪽에 자리잡자고 권하고 #아우인 온조도 그 말에 따라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자리잡고 싶어했으나 #비류는 바닷가에서 살고 싶어해 백성을 나눠 미추홀(彌鄒忽)로 가서 살았는데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자신이 거느린 백성은 편히 살지 못하는 반면 #온조의 백성들은 편히 살게 되자 부끄럽게 여겨 후회하다 죽었다고 한다. #주몽(朱蒙) #비류수(沸流水) #비류국 [沸流國] #고구려국호 #고구려 초기 #백제건국 #세시 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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